목수일기
목수 김씨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목수일기
- 글쓴이 : 김진송(목수 김씨)
- 펴낸곳 : 웅진닷컴(2001.7.10.)
- 책값 : 8000원


 학교에서는 착한 일을 하며 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며 착한 일을 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착한 일’을 권리로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땅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힘없는 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착한 일은 언제가 가로막힙니다. 재개발을 한다는 마을마다 ‘그곳에 있던 집보다 오래 살아온 나무’가 으레 있으나, 이런 나무를 사랑하며 돌보고 싶은 착한 마음은 언제나 포크레인 삽날에 찍혀 버립니다. 큰나무를 파서 옮기자면 500만 원도 넘게 들지만, 새로 사서 심으면 50만 원이면 넉넉하다고 하면서.

 힘없이 쫓겨나야 하는 철거민을 돕자는 착한 마음도 언제나 날벼락을 맞습니다. 철거를 맡은 깡패들은 ‘위에서 시킨 일’이라 하고, 위에서는 ‘법으로 떳떳이 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나날이 줄어드는 지구자원을 걱정하면서 자전거로 거리를 오가면, 한결같이 자동차 배기가스 세례를 받고 시끄러운 빵빵거림을 받습니다. 자동차마다 자전거를 길섶으로 아슬아슬하게 밀어붙이곤 합니다. 정작 지구자원을 펑펑 써대는 자동차는 ‘석유든 석탄이든 다른 지하자원이든 바닥날 일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조차 안 합니다. 자전거 타거나 걷는 사람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지구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착한 마음은 언제나 콜록콜록 아찔아찔입니다.


.. 도시계획과 도로개발 과정의 기획안에는 땅값의 배상 이외에는 주거인들에 대한 어떤 것도 고려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전유한 공간에서 살 권리가 인정되거나 그것을 배려한 정책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으며, 그런 법조항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개발에 관한 한 무제한의 독재가 벌어질 수 있는 공간이 농촌인 것이다. 따라서 만일 도시의 번잡스러움을 피해 산골로 숨어들었다고 해도, 그리고 그곳을 자신의 삶의 공간으로 수십 년을 가꾸었다고 해도, 어느 날 산을 뚫어버리며 쳐들어오는 도로와 갑자기 만들어지는 댐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는 시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남아 있지 않다 ..  〈273∼274쪽〉


 저는 아직 시골에 몸을 붙이고 있지만, 이곳에 얼마나 오래 몸을 붙일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땅임자는 땅을 팔아 전원주택 짓거나 인삼밭을 가꿉니다. 산임자는 산을 깎고 나무를 베어내고 공장을 들여놓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뿐 아니라 이 나라 어디를 가도 형편이 비슷합니다. 도시에 깃든들 뾰족한 수가 없고, 시골에 뿌리박는들 다른 수가 없습니다. 땅이 없으면 없는 대로, 집이 없으면 없는 대로 언제나 떠돌이 신세입니다. 찻길도 놓고 공장도 세우고 짐승우리도 갖춰야 하니 자꾸자꾸 쫓겨납니다. 전세값 높이고 재개발을 하고 뭐를 뭐를 짓는다고 하니 자꾸만 밀려납니다.


.. 땡볕에 군인들 몇 중대가 동원되고 포크레인이며 트럭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한편 고맙기도 하고, 한편 일하는 모양새가 영 마뜩찮던 중이었다. 개울물이 도로를 휘돌아서 아스팔트가 다 벗겨지고 콘크리트 밑의 흙도 다 휩쓸려 내려가, 공중에 콘크리트만 덜렁 들려 있는 곳이 그들의 작업터였다. 그런데 아무리 긴급 복구공사지만, 공중에 떠 있는 콘크리트를 무너뜨리고 흙을 다져넣는 게 아니라 동굴처럼 보이는 앞부분만 흙으로 메우고 있었다. 마침 어제는 흙을 가득 실은 복구차량이 그 위를 지나다 콘크리트가 무너져내려 전복되어 버렸다.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그저 흙더미만 대충 메우는 일품새를 보니, 차라리 수해복군지 뭔지 집어치우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  〈44∼45쪽〉


 학교에서 우리들한테 가르친 ‘착한 일’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데 눈길 두지 말고 시험공부 잘해서 일류대학에 붙은 다음, 자격증 몇 가지와 운전면허증 따서 큰기업에 일자리 얻고, 좋은 신랑신부감 만나 하루빨리 시집장가 가서 애 쑥쑥 낳고 세금 잘 내는 일등시민 되라는 것? ‘어떤 사람을 찍을지는 알 수 없어’도 투표하는 날은 빠짐없이 투표하라는 것? 무엇이 쓰레기로 버려지는지는 따질 것 없이 ‘쓰레기 잘 줍는 일’? 아직까지도 서울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는 ‘수상한 사람은 신고하라’는 안내방송에 따라 간첩신고 알뜰히 하는 일?

 우리가 사회살이를 하며 할 수 있는 ‘착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나라에서 시키는 일 군말 없이 받아들이기? 행정관청에서 하라는 일은 두말 없이 받아들이기? 나이 많이 잡수신 어르신 말씀 고개숙여 잘 듣기? 신문과 방송에서 수없이 흘려보내는 소식을 비판없이 그대로 새겨듣기?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에 월급 주고 일 시키는 회사가 얼마나 고마웁냐고, 이런 회사에 반기를 들며 교통정체 일으키는 데모하지 말고 야근이나 잘하기?


.. 도무지 엄나무를 제대로 자라게 놔두는 법이 없다. 몸에 좋다고 껍질을 벗겨 약으로 쓰거나, 엄나무닭 백숙이라고 하여 닭국에 넣어 삶아먹는지라 남아나는 게 없다. 큰 엄나무가 방골내미 뒷산에도 자라고 있었는데, 그것도 한 해 전에 누군가가 뎅겅 잘라가 버렸다 ..  〈78∼79쪽〉


 목수 김씨(김진송)가 쓴 《목수일기》를 읽습니다. 처음에는 나무쟁이 이야기만 쓰는 줄 알고 너무 어려운 책이 아닐까 싶었으나, 가만가만 읽노라니 나무질하는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자기가 만난 나무 이야기, 자기가 만난 나무가 어떻게 시달리고 있으며 괴롭게 살아가는지 하는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또한 자기가 나무를 만지며 살아가는 터전이 얼마나 팍팍해지고 있는지, 자기 또한 나무를 만지며 살 수 있는 시골땅에서 사람다움을 간직하기 얼마나 어려운가를 숨김없이 털어놓습니다. 반갑군요. 이렇게 나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간직하고 있으니. 하지만 슬프군요. 나무며 사람이며 우리 삶터며 된통 뒤죽박죽이 된 채 어둡고 슬프게 살아가야 하니까요. (4340.2.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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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만화를 볼 때마다 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림결이 깔끔하고 그린이마다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한편, 사람이든 사물이든 참 훌륭하게 그려냅니다. 만화 그림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정물은 아니지만, 정물을 빈틈없이 그릴 수 있는 그림 솜씨를 바탕으로 자기 눈길과 생각과 그림감에 따라서 아주 단출한 금 몇 가지로 모든 것을 담아내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일본 만화는 바로 이런 예술에 아주 알뜰합니다. 한편, 줄거리로 담아내는 그림감도 테두리가 넓습니다. 테두리가 넓으면 깊이가 모자라기 쉬운데, 넓게 여러 가지 그림감을 다루면서도 깊이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는이 혼자서 애쓰기 때문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둘레에 많기 때문이겠지만, 그리는이 스스로 자기가 그림으로 담아내어 줄거리로 살을 입히는 만화에 온마음을 쏟아붓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자전거 한 대를 그려도 그냥 떠오르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야구공 하나를 그려도, 공을 차는 다리 모양을 그려도, 이삿짐차와 책을 실은 짐차와 얼린 물고기를 실은 짐차를 그려도, 대충대충 그리지 않아요.

 여기까지만 되더라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만화를 보자면, 이만큼이라도 된 만화를 요즘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뭐, 몇 사람쯤, 혼자서 바득바득 애쓰는 분들 만화에서는 엿볼 수 있는데, 초중고등학교 아이들까지 두루 즐겨보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한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요. 너무 대충 그립니다. 아무래도, 도움이(배경이나 말풍선이나 칸을 그리며 도와주는 일꾼)를 쓰기 쉽지 않은 형편도 한몫 할 테지요.


 요즘 틈틈이 보는 일본 만화 가운데 《교도관 나오키》(고다 마모라 그림,학산문화사,2006)가 있습니다. 어느덧 3권까지 우리 말로 나왔는데, 이 만화는 제가 즐기는 다른 일본 만화와 마찬가지로 깊은 생각이 담겼습니다. 제가 달가이 여기지 않는 말로 한다면 ‘철학’이 담긴 만화라 하겠어요. 사형제도를 꼭지점으로 놓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 끔찍한 범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 범죄자를 가두어야 하는 사람, 범죄자한테 교수형 집행을 손수 치러 주어야 하는 교도관, 벌을 내리는 판사와 변호하는 사람, 가해자와 피해자 유족, 이런 사형제도를 꾸려 나가는 정부…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면서 이야기를 건넵니다. 객관이라든가 냉철로 줄거리를 다루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인데,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한편, 우리들 모두가 ‘사람’이라는 대목을 놓치지 않습니다.


.. 반성한 사람을 이렇게 공포에 질리게 한 다음 죽여 버리다니…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귀신이에요, 악마예요? 이건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에요! ..  〈3권 147쪽〉

.. 아오야마는 처음부터 자기 죽음으로 속죄할 각오를 하고 있었어. 그래서 오오키의 위증을 알고도 사형을 감수했다고 나는 생각해. 나는 그런 아오야마의 고결함에 감복하고, 복구규정을 어기면서 특별대우를 해 주는 거야. 이해해 줘, 나오키 ..  〈3권 198쪽〉


 제대로 그렸다는 생각이 드는 일본 만화를 보면서, ‘야, 이래서 요즘은 영화가 책보다 더 사랑을 받는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한편, 만화에 나오는 대사만 쏙 뽑아서 소설을 쓴다고 해도 거의 똑같이 마음이 꿈틀거렸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 나라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책을 살펴보았을 때, 마음이 꿈틀거리게 하는 책이 드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얼마 없어요. 어느 만큼 ‘참, 좋네’ 하는 생각으로 이끄는 책이 있기는 하지만, 눈물이 똑똑 떨어질 만큼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이야기를 건네지는 못한다고 할까요? 더 깊이 곰삭이며 자기 목소리를 낮출 줄 알고, 누구나 다 함께 귀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로, 깊은 밤에도 불을 밝히며 읽을 만한 이야기로, 바쁘고 고되게 일하는 가운데에도 틈을 짜내어 헤아리고 살필 만한 이야기로 빚어내는 책이 뜻밖에도 적구나 싶어요.

 훌륭하다는 생각까지도 드는 일본 만화를 보다가, 잠깐 덮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은 만화 하나를 훌륭하게 그렸는데, 만화가 아닌 소설을 썼어도, 시를 썼어도, 수필을 썼어도, 이와 거의 같은 즐거움과 뭉클함을 선사했으리라고요. 다만, 만화라는 매체이기 때문에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제대로 눈길을 안 둘 뿐이며, 찬찬히 살피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된 만화 하나가 나오자면, 글책 하나가 나오는 시간 못지않게 힘과 땀을 들여야 하고, 살가운 사진책 하나 엮어내는 시간 못지않게 오랜 세월 붓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생각을 담은 책을 좋아합니다. 생각을 담은 만화를 좋아합니다. 생각을 담은 그림책, 생각을 담은 사진책, 생각을 담은 경제-경영-과학-종교-예술-교육-문학-인문학-어린이책 들을 좋아합니다. 생각을 담지 않은 책은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출판사에서 낸 책이라 해도, 가장 이름난 글쟁이가 쓴 책이라 해도, 100만 부나 200만 부가 팔려나갈 만큼 인기가 높은 책이라 해도, 대통령이 칭찬하고 신문과 방송마다 크게 칭찬하는 책이라 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누가 거저로 안겨 줘도 읽지 않습니다. 그냥 헌책방에 가져다줍니다.

 생각을 담은 만화, 생각을 담은 소설, 생각을 담은 교육학, 생각을 담은 사진, 생각을 담은 동화 하나 그립습니다. (4339.6.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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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 집에서 설을 맞이합니다. 차례를 지낸 뒤 식구들이 둘러앉아 떡국을 먹습니다. 마루에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무슨 시험대회 1등’을 했다는 사람들이 나와서 문제맞히기를 겨룹니다. 펄 벅이라는 분이 쓴 소설이름을 맞추는 문제가 나옵니다. 문제를 들은 분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지》?”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문제 낸 이는 “네, 맞았습니다!” 하고 외칩니다. 문득, 《대지》가 아니라 《넓은 땅》이라고 말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우리들은 익히 ‘大地’란 한자말 이름으로 알고 있으나, 펄 벅 님 작품을 우리 말로 처음 옮길 때 “너른 땅”이나 “넓은 땅”, 또는 “어머니 땅”으로 옮겼을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 언제가 되든 이렇게 살갑게 책이름을 고쳐 옮길 수도 있고요. 철학가 플라톤이 남긴 말을 모은 책은 1950년대에 《잔치》라는 이름으로 옮겨집니다. 그 뒤 《향연》이라는 이름으로 옮긴 이가 있습니다. 요즘은 ‘잔치’로 책이름을 쓰는 곳이 있는 한편 ‘향연’으로 책이름을 쓰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찌 다를까요. 우리는 왜 두 가지 책이름으로 같은 책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4340.2.18.설.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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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저녁 아홉 시가 조금 넘었을 때, 눈과 몸을 쉬고자 잠깐 자리에 눕는다. 불도 끈다. 조용히 드러누운 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두어 시간만 쉬었다가 일어나자고 다짐한다. 어느덧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일어날까 말까 하다가 조금 더 눕기로 한다. 그러다가 얼핏 잠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몸이 으스스 떨린 깊은 새벽.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웅웅웅 들린다. 곧 꺼진다. 다시 웅웅웅 돌아간다. 눈을 뜨고 누운 채 창밖을 바라본다. 별이 하나 보인다. 그렇구나, 별. 방바닥은 아직 따스해지지 않았고 몸은 으슬으슬 떨린다. 어떡할까. 이대로 죽 잘까, 아니면 일어날까. 망설이며 몸을 웅크리다가 벌떡 일어난다. 아, 춥다. 방온도는 아마 10도가 안 될 듯. 가지빛 고무신 꿰어신고 마당으로 나간다.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음, 별 많네. 예전만 못하기는 해도.

 새벽에 올려다보는 밤하늘. 고요한 이 새벽, 부엉이인지 소쩍새인지 밤새 한 마리 가늘게 우는 이 즈음. 저 멀리 큰길에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없고 오로지 내 발자국, 내 몸 움직이는 소리만. 바람도 없어 나뭇잎 구르는 소리나 나뭇가지 떨리는 소리도 안 들린다.

 산기슭에 쉬를 한다. 몸을 조금 풀어 준 뒤, 탁탁탁 뛰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방에 불을 켠다. 아, 눈부셔라.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빛이 낯설어 찡그리게 된다. 부엌에서 물 한 모금 입에 넣고 오글오글 굴린 뒤 삼킨다.

 셈틀을 켜고 자리에 앉는다. 몸이 떨리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얼얼한 손을 비비며 글을 쓴다. 보일러가 다시 웅웅웅 돌아간다. 그러다가 뚝. 방온도가 11도가 되었다는 불빛. 11도라. 한 사람이 깨어나 움직이니 이렇게 되나. 아직 손가락이 시리다. 조금 더 있자니 12도. 햐. 1도 더 올라갔네. 하지만 더 올라가지는 않겠지. 요새 날이 좀 풀린 듯하면서도 새벽엔 이렇게 쌀쌀하단 말이야.

 기름을 때는 조그마한 살림집. 올해는 기름을 얼마나 썼을까. 아침저녁으로 기름통을 살펴보는데, 올겨울에는 기름을 거의 안 썼다. 지난겨울에 넣은 기름이 아직도 제법 남았다. 잘하면 이듬해 겨울도 이 기름으로 날 수 있을 듯. 올겨울에는 이 집에서 혼자만 지내는데, 보일러 온도를 가장 낮추어 돌리고, 어지간해서는 돌리지도 않으니 이렇게 된다. 그만큼 집에서는 옷을 두툼하게 끼어 입는다. 큰방에는 아예 불을 안 넣는다. 겨울 한철 큰방은 얼음장이다. 작은방에는 언제나 이불이 깔려 있다. 이불이 깔리지 않은 자리에는 책과 옷가지를 쌓아놓았다. 조그마한 불씨라도 오래오래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그래, 기름을 때며 살아도 이렇게 아끼고 아끼면 두고두고 쓸 수 있구나. 나무 땔감이나 연탄 못지않게 적은 돈으로도 겨울나기 할 수 있겠네. 하지만 연탄을 땐다면 이 겨울이 한결 따뜻하겠지. 훨씬 적은 돈으로.

 두 손을 가랑이 사이에 넣고 비빈다. 틈틈이 이렇게 비벼서 녹이지 않으면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다. 글을 쓰면서도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움직인다. 그래야 몸도 안 굳겠지. 겨울을 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텐데, 이 가운데 ‘부지런히 몸 움직이기’가 있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가장 안 쓰는 방법일 텐데, 나는 이 방법이 좋다. 시골 사는 분 가운데에는 나보다 더 춥게 살며 더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분도 많다. 움직이지 않으니까 춥다. 옷을 안 입으니 춥다. 그것뿐이다. 겨울에는. (4340.2.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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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뿌리
서숙 지음 / 녹색평론사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따뜻한 뿌리
- 글쓴이 : 서숙
- 펴낸곳 : 녹색평론사(2003.5.10.)
- 책값 : 8000원

 
 새벽을 좋아합니다. 시골에 있든 도시에 있든 새벽이 참 좋습니다. 시골에서는 시골 나름대로 고요하고 으슬으슬 추운 새벽이 좋습니다. 도시에서는 도시 나름대로 시끄러운 소리 모두 잠든 새벽이 좋습니다. 지난날 서울에 살며 신문돌리기를 하던 때, 이 새벽이 참 좋아서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다른 딸배보다 먼저 일을 끝마치고 지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 점심으로 국수를 해먹고 맥주를 마셨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했는데, 충일한 기운이 몸안에 쌓인 듯했는데 여전히 정오였다. 학교에서는 전화 두어 번 하면 점심시간인데, 어떻게 시간이 이렇게 마디지요? 시골에서는 그럼 돈도 이렇게 마딜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사고 싶은 욕망이 생길 틈이 없고, 생활이 그래서 단순해지고 ..  〈12∼13쪽〉


 술이 거나해서 비틀거리는 사람을 빼놓고는 새벽에 볼 수 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도시 골목길을 치우며 손수레 끌고 다니는 청소부를 빼놓고는 새벽에 길거리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새벽 두 시쯤 일어나 신문 부수를 헤아려 챙긴 뒤 자전거 앞뒤에 가득 싣고 달렸습니다. 신문돌리기로만 먹고사는 다른 신문사 총무도 비슷한 즈음 일어나서 새벽을 엽니다. 우유돌리기로 살림을 꾸리는 다부진 아저씨 아주머니 들도 비슷한 즈음 일어나서 새벽을 엽니다. 새벽길에 이분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마주치면,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도 꾸벅 인사를 하거나 ‘안녕하셔요’, ‘수고하셔요’ 하고 인사말을 주고받습니다.

 때때로 노래를 부르면서 돌립니다. 무언가 울컥하는 것이 있는 날은 큰소리를 질러 보며 신문을 돌립니다. 빗길에는 신문 젖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고, 눈길에는 언덕길을 못 올라갈까 근심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이른새벽 골목길을 지나가는 차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는지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엄청난 빠르기로 쌩하고 지나갑니다. 이런 차를 부대끼면 차 뒤에 대고 주먹을 휘두릅니다.


.. 두 손으로 하던, 두 손 끝에 정성과 마음을 모아 하던 일들이 사라진 지금, 그 손들은 무엇을 하는가. 무슨 일을 하여서 잃어버린 집중과 긴장의 순간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손을 쓰지 않으면서부터, 우리의 생각과 감정도 생기를 잃게 되고, 우리의 삶은 그만큼 나른해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삶은 손을 통해 연결되는 현장성과 멀어지는 만큼 막연해지고 추상적이 되는 것이다 ..  〈114쪽〉


 새벽 신문돌리기에서 몹시 짜증스러운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는 순찰을 돈다는 경찰. 새벽 순찰을 돈다는 경찰은 신문배달부 자전거나 오토바이에 꽂힌 신문을 으레 슬쩍합니다. 그러고는 시치미를 뚝 떼지요. 골목길 안쪽 집에 신문을 넣고 헐레벌떡 돌아오면 저 앞쪽에 순찰차가 슥 지나가는 게 보입니다. 바구니에 꽂은 신문 부수를 세어 봅니다. ‘저 자식들 또 훔쳐가네’ 언젠가 코앞에서 슬쩍하는 모습을 보고 ‘야, 뭐 하는 거야!’ 하고 소리를 지르니 ‘어, 죄송해요. 그냥 뭐가 났나 보려고요.’ 하며 꼬리를 내리고, 언젠가는 ‘아저씨 오면 돈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면서 알량한 웃음을 짓고, 언젠가는 ‘우리들이 이 새벽에 이렇게 고생하는데 한 부쯤 주면 안 돼요?’ 하고 외려 큰소리입니다. 그러면 저도 한 마디 하지요. ‘저도 이 새벽에 이렇게 고생하면서 돌리는데 한 부쯤 사 주면 안 돼요?’


.. 가령, 쌀 한 톨이라도 애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알뜰이나 절약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밥상에 밥 한 공기가 오르기까지, 곡식알들은 벌레로부터 비바람으로부터 새들로부터 오가는 사람들의 손길로부터 수확기의 뜻밖의 폭우에 이르기까지 많은 위기들을 넘기고 살아남았다. 그러니 설거지통에 쌀 한 톨이 떨어진들, 그걸 무심히 그냥 버리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살아서 온 그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허방을 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설거지 물에서 건져내어 잘 씻어 향긋한 밥을 지어 먹을 때, 비로소 쌀 한 톨의 삶은, 거기 연결된 생명의 손길들은 완성되는 것이다 ..  〈217∼218쪽〉


 우유상자를 여섯 통 자전거 앞뒤로 매달고 이른새벽부터 아침까지 돌리는 아주머니를 보았습니다. 앞에 하나, 짐받이에 셋, 짐받이 옆으로 하나씩. 아주머니는 저렇게 돌리고 한 달에 얼마를 벌 수 있었을까요.

 어느 날, ㅈ일보를 돌리는 총무가 우리 지국으로 찾아와 울면서 하소연을 합니다. ‘제 오토바이 못 보셨어요? 일을 마치고 쇠사슬로 묶어 놓았는데 누가 그걸 끊고 훔쳐갔어요. 그런데 지국에서는 오토바이 도둑맞은 건 제 과실이라면서 제 돈으로 그걸 물어내라고 해요. 아내하고 저하고 둘이서 1500부를 돌리는데 한 달에 70만 원 받아요. 오토바이 값은 80만 원이래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 정말 그러네. 배낭들을 삐딱하게 걸치고 운동화를 신고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거리네. 이기, 우리가 차가 없어서 이럴 수 있는 기지요. 그건 그렇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비행기 택시 버스를 타고 걷고. 자가운전을 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전국의 도로 위를 달려가는 차들, 목적지를 향해 달리며 운전석에서 뒷자석에서 옹색하게 내다보는 풍경들 …… 물어서 버스표 사고 기다리고 그곳 사람들과 함께 타고 가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삶 속으로 잠시라도 들어가는, 그  홀가분하고 긴장된 순간들은 사라진다. 파스텔 색조가 사라지는 세계. 삶은 획일을 향해 질주한다 ..  〈136쪽〉


 새벽바람이 찹니다. 마당에 나가 새벽에도 아직 밝게 빛나는 별을 올려다봅니다. 이제는 밤하늘 별은 시골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아니 예전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고마운 선물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시골사람들은 이 고마운 선물을 누릴 만큼 느긋함이나 아늑함이 없습니다. 그만큼 힘듭니다. 삶이, 사회가 팍팍해지니까요. 그렇다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밤하늘이 선사하는 고마운 별빛을 손사래치고 무엇을 얻거나 누리며 살아가는가요. 우리를 먹여살리는 따뜻한 뿌리는 무엇일까요. 언제나 새힘을 내도록 하고, 저마다 다른 열매를 맺도록 북돋워 주는 따뜻한 뿌리는 무엇일는지요. (4340.2.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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