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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아이 티스투 ㅣ 길벗어린이 문학
모리스 드뤼옹 지음, 자끌린 뒤엠 그림, 나선희 옮김 / 길벗어린이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49 ― 사랑을 심는 어린이, 전쟁을 사고파는 어른
: 모리스 드뤼옹, 《초록색 엄지 소년 티쭈》
- 책이름 : 초록색 엄지 소년 티쭈
- 글 : 모리스 드뤼옹(모리스 드리용)
- 그림 : 최윤경
- 옮긴이 : 배성옥
- 펴낸곳 : 민음사(1991.3.10.)
* ‘민음사’에서 펴낸 《초록색 엄지 소년 티쭈》는 판이 끊어졌고, 2005년 7월 15일에, 나선희 님이 새로 옮긴 판으로 ‘길벗어린이’에서 《꽃 피우는 아이 티스투》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와서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는 길벗어린이 판보다 민음사 판 번역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민음사 판 책으로 읽으며 느낌글을 씁니다. 프랑스에서 1957년에 나온 이 동화는 “Tistou Les Pouces Verts”였고, 우리 말로 옮기면 “풀빛 엄지손가락 티쭈(티스투)”입니다.
(1) 어른들이란, 참!
제가 일하는 ‘동네 도서관’을 찾아오는 사람은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어린이, 다음으로 어른. 도서관을 찾아오는 어린이는 조용히 자기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잡습니다. 그러고는 가장 느긋하게 책을 볼 만한 자리를 찾아서 철푸덕 하고 앉습니다. 소리를 낮춘 노래를 틀어 놓습니다. 너무 조용하기보다는 알맞춤한 가락이 흐르는 편이 나으니까요. 시골이라면 아무 노래를 틀어놓지 않아도 바람소리가 있고 새소리가 있고 물소리가 있습니다. 바람이 부는 결에 따라서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도 있습니다. 나뭇잎이 부딪힐 때는 반짝반짝 빛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도시에서는 자동차 소리와 빵빵질 소리와 공장 돌아가는 소리, 갖가지 기계 움직이는 소리와 전화기 소리만 그득합니다. 어쩔 수 없이 도시에서는 노래를 틀어야 합니다.
.. 이건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시청이나 교회에는 아나톨이니, 쉬잔느니, 아녜스니, 장클로드라고 신고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톨라, 제트, 푸스 혹은 미스투플레라고 불리우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오죽 많은가요! 이것은, 그저 어른들이란 진짜 우리 어린이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증거이지요. 게다가 어른들 자기네들이야 다 안다고들 말하지만,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들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모든 일에 관하여 틀에 박힌 생각만을 갖고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말해 버립니다. 그런데 틀에 박힌 생각이란 대개가 잘못된 생각이지요. 그런 생각들은 아주 오래 전에 이루어졌으며,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모르고, 또 매우 낡아빠진 생각들이랍니다 .. (13∼14쪽)
아이들은 참으로 다소곳하게 책을 읽습니다. 보던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새로운 책을 뽑아들기도 하지만, 앉던 자리에 그대로 놓기도 하는데, 아직 버릇이 덜 들었거나 깜빡 잊었기 때문입니다. “얘야, 보던 책은 꽂아 놓아야지.” 하고 이르면, “네” 하면서, 깜빡 잊었다는 얼굴이 되어 뾰로롱 달려가서 책을 집어 얌전하게 꽂아 놓습니다.
어른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책을 선뜻 찾아내지 못합니다. 아이들과 달리 출판사 이름을 보고 지은이 이름을 보고 책이름을 봅니다. 출판사며 지은이며 책이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 자기 마음밥을 채워 주는가 못 채워 주는가를 살피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책,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책, 널리 알려진 책, 교수님이 읽어 보라고 한 책, 언론에서 큼직한 기사로 소개한 책에 손길이 뻗칩니다.
.. 아아,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학교는 티쭈에게 예상할 수 없었던 나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칠판에 알파벳 글자들의 느린 행렬이 시작되기만 하면, 또한 삼 곱하기 삼, 사 곱하기 사 같은 기다란 사슬이 펼쳐지려고만 하면, 티쭈는 왼쪽 눈이 따끔거림을 느끼고는 이내 깊이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티쭈는 바보도 아니었고 게으르지도, 피곤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부하겠다는 의지에 넘쳐 있었습니다 .. (31쪽)
지난주에 도서관을 찾아온 어느 어른은, 퍼질러 앉아서 느긋하게 책을 읽으라고 깔아 놓은 깔개를 신발로 밟고 다니면서 책을 고릅디다. 그러면서 “이 책 얼마예요?” 하고 묻더군요. 틀림없이 우리 도서관 1층 문간에 ‘사진책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큰 글씨로 적어 놓았고, 지난 금요일에는 건물 바깥벽에 커다란 간판도 달아 놓았건만, 더구나 도서관 안쪽에 ‘도서관 소식지’를 잘 보이는 자리에 늘어놓기도 했는데, 이런 데에는 한 번도 눈길을 안 두는가 봐요. 나즈막한 소리로 대답해 드립니다. “여기는 도서관입니다.” “아, 그런가요? 어쩐지 좋아 보이는 책이 많이 있던데.” “네, 도서관이니까 좋은 책을 갖추어 놓지요.”
책방이라고 좋아 보이는 책이 없겠느냐만, 더 많은 사람한테 더 두루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어 놓은 도서관이니, 마땅한 소리입니다. 바로 다른 사람들은 털푸덕 앉아 있기도 하던 깔개를 신발로 꾹꾹 밟던 그분은,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밖으로 나갑니다만, 책을 꽂아 놓을 때에도 깔개를 또 밟습니다. 에휴, 한숨을 쉬고는 걸래로 발자국을 지웁니다.
.. “도시란 보다시피 거리와 건물과 집, 그리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네 생각에, 무엇이 도시에서 제일 중요할 것 같으냐?” 티쭈가 대답했습니다. “식물원요.” “아니야, 도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질서야. 그래서 지금 우리는 질서를 관리하는 건물로 가 보려 한다. 질서가 없이는 도시도, 나라도, 사회도, 모두 바람처럼 도무지 유지가 안 된다. 질서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무질서를 벌주어야 해!” 티쭈는 생각했습니다. ‘므슈 트루나디스의 말이 분명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왜 저렇게 고함을 치실까? 트럼펫 같은 목소릴 가진 어른이 바로 이분이시구나. 질서 때문에 저토록 소리를 질러야 할까? .. (58쪽)
아이들은 책을 읽을 때 바닥에 깔아 놓고 펼쳐서 읽거나 무릎에 올려놓고 펼쳐서 읽습니다. 잘 보이도록 하려고 펼칩니다. 그래서 좀 묵은 만화책이나 그림책은 쩍쩍 갈라지거나 튿어지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과 달리 힘이 있어서 한손으로 책을 끄집어 내어 한손으로 팔랑거리며 책을 넘기기도 합니다. 이때는 제아무리 묶임새가 야무졌던 책이라 해도 실이 풀리고 풀이 떨어집니다. 보다 못해서 ‘안내 쪽글’을 부랴부랴 적어서 도서관 책손한테 한 장씩 돌립니다. 안내 쪽글에는 “이곳은 책방이 아니라 도서관이니 책을 팔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인 만큼 다른 사람들도 책을 즐길 수 있도록 깨끗하게 간수해 주소서” 같은 글도 적어 놓습니다.
쪽글을 돌리니, 어린이들은 모두 그대로 앉아서 책을 보지만, 어른들 2/3는 밖으로 나갑니다. ‘뭐야? 책도 안 팔잖아?’ 하는 얼굴입니다. 남아 있는 어른 1/3은 ‘도서관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을 하십니다. 이분들도 이곳이 어떤 곳인 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는가?
.. 식물학자들이 모이게 되면 커다란 회의가 열립니다. 미르포왈에는 그리하여 대대적인 식물학회가 열렸습니다. 꽃의 종류는 한없이 많지만, 식물학자들은 뛰어난 식물학자와 유명한 식물학자, 그리고 탁월한 식물학자, 이렇게 세 종류뿐이랍니다. 그들은 ‘선생님……, 교수님……, 명예로운 동료 학자님……’이라고 부르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 정원사 할아버지는 대답했지요. “저 식물학자들이란 꽃다발 하나도 만들 줄 모르는 사람들이란다.” …… 식물학자들도 그래서 보고서를 꾸몄지요. 아무도 알아먹지 못하는 과학용어들로 꽉 채워서 쓴 보고서였는데 .. (75∼76쪽)
하루일을 마치고 도서관 문을 닫습니다. 어질러진 책을 가지런히 맞추고 쓸고 닦고 빈 그릇과 물잔을 씻아서 말려 놓습니다.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렇게 큰 간판까지 밖에 내걸었는데, 어떻게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책 안 파느냐고 물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서관하고 분위기가 달라서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동네사람들도 제가 도서관을 꾸리는 줄을 진작부터 알고는 있으시지만, 동네사람들이 생각하는 도서관은 ‘독서실’입니다. ‘도서관 = 독서실’이고, 이러한 독서실은, 중고등학교 수험생이나 고시 공부 하는 사람들이 와서 칸막이책상에서 문제집 푸는 곳입니다.
“바쁘실 테지만, 가끔 책도 보면서 마음도 쉬어 보셔요.” 하고 동네 아저씨며 아주머니며 붙잡아 보지만, “지금은 바빠서, 나중에 한가할 때 올게요.” 하는 대답만 돌아옵니다.
.. “저 동물들은 어디서 왔어요?” 티쭈가 경비원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아주 먼 데서 왔다. 아프리카, 아시아 ……, 나도 모르는 그런 데서 실어 왔다.” “이리로 데려오기 전에 데려와도 되느냐고 동물들한테 물어 보았어요?” 경비원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자기를 놀린다고 투덜거리면서 멀리 사라졌습니다. 티쭈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우선 저 경비원 아저씨는 자기가 맡은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이니 지금의 직업을 택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 (108쪽)
우리 나라에 ‘어린이 도서관’은 몇 군데 없습니다. 뜻있는 단체에서 애써서 열어 놓은 곳(인표어린이도서관)이 남달리 있고, 텔레비전 영향으로 군데군데 생기기도 하지만(기적의 도서관), 정부에서 세우는 어린이 도서관이란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새로 한 곳을 세우기는 했습니다만). 지역자치단체에서 세운 어린이 도서관이 따로 있습니까. 시청과 구청에서 다스리는 어린이 도서관이 있습니까(그래도 요즘은 구청이나 동사무소 한쪽 자리를 터서 어린이책 몇 천 권 꽂아 놓은 도서관을 꾸며 놓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린이 도서관도 없는 이 나라에는, 푸름이(청소년) 도서관도 없습니다. 푸름이 도서관도 없는 이 나라이지만, 여느 일꾼이 찾아갈 만한 도서관조차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새벽바람으로 일터에 가서 저녁 늦게 일마치고 집으로 오는 일꾼이 찾아갈 수 있는 도서관은 어디에 있을까요. 밤늦게 문을 열어 주거나 새벽 일찍 여는 도서관이 있습니까. 쉬는 날도 따로 없이 꾸려 나가는 도서관은 어디에 자리잡을까요. 또한, 도서관에서 갖추는 책은 어떤 갈래 책들입니까. 어떤 신문을 갖추어 주고, 어떤 잡지를 받아들여 주고, 어떤 이야기로 우리들 마음밥을 선사해 주고 있습니까.
(2) 또다른 어른과 우리 세상
아침에 잠깐 성당 나들이를 갑니다. 이제 예비자교리를 마치고 다다음주에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하여 저한테 어떤 믿음이 깊다거나, 새로워지는 믿음이 생긴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또한 여느 믿음이들 길을 걸어가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올해 예순아홉인 동네 할아버지가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난주까지는 수녀님한테 배웠고, 마지막 배움은 믿음이 무척 깊은 할아버지가 ‘신앙인으로서 기도하며 살아가기’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 “책만 보면 졸음이 오니까 책을 아예 없애 버리자구. 우리 아들이 다른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다니까, 새로운 교육제도로 키워 봅시다. 사물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배우도록 하겠소. 조약돌이 무엇인지, 정원이 무엇인지, 들과 밭이 무엇인지, 일일이 보여주도록 합시다. 그밖에 티쭈가 어른이 되는 데 도움을 줄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설명해 주도록 합시다. 결국 우리들의 생활 자체가 가장 훌륭한 학교인 거요. 결과는 두고봅시다” .. (40쪽)
할아버지는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당신이 얼마 앞서 신협(신용협동조합) 부이사장 선거에서 떨어졌다면서, 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중에 신부님하고 이야기를 하니, 신부님은 할아버지가 부이사장 선거에서 떨어지기를 바라셨답니다. 할아버지로서는 부이사장이 되면 연봉 3600만 원을 받고, 동네 성당 할아버지들한테 짜장면도 사 주면서 어깨도 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다는데, 이러한 우쭐거림이 자칫 교만으로 흐를 수도 있었으리라고, 그래서 정작 당신이 당신 딸아들과 친구들한테 미안하다고 할 판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다들 자기를 달래 주려고 애쓰더라고, 그럽니다.
저는 빙그레 웃으면서, “잘 떨어지셨네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일흔을 앞둔 할아버지로서는, 신협 부이사장이 되어 한 달에 삼백만 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적지 않은 돈으로 이래저래 베풂도 하고 선물도 하고 그럴 수 있지만, 그만한 돈을 받는 만큼 그곳에서 당신한테 고달픈 데까지 시간과 마음을 쏟으면서 바쳐야 합니다.
동네 이웃인 할아버지와 당신 딸아들과 손주한테 들이면 좋은 것은 ‘돈으로 나누어 주는 베풂’이 아니라, 당신 마음과 몸으로 아껴 주는 사랑이요 믿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뜻에서 할아버지가 그 선거에서 떨어진 일은 잘된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 티쭈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에 무스타슈 할아버지는 천천히 정원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비로소 티쭈는 왜 정원사 할아버지가 평소에 그렇게도 말을 적게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할아버지는 꽃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 무스타슈 할아버지는 그렇게 꽃송이 하나하나의 건강을 살피면서 한 바퀴를 도는 것이었습니다 .. (48∼49쪽)
할아버지는 신학교 시험에 다섯 번 떨어지고 수도원에도 들어가 지내기도 했지만, 몸이 아파서 끝내 신부가 되는 길을 접어야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광주 살레지오 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때 여름철 모기를 몰아낸다며 디디티를 기숙사 방에 잔뜩 뿌려서, 여느 때에도 썩 좋지 못하던 허파가 더 나빠져서 폐렴으로 번졌고, 결핵까지 앓아서, 광주에서 연평도까지(50년대까지 연평도에서 사셨다고 하네요)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내내 울며 손수건을 적셨다고 합니다.
신부가 되지 못하면서 곧바로 혼인을 하게 되었고, 딸아들을 다섯 두었는데, 이 가운데 둘째 딸은 수녀로, 셋째 아들은 신부로 컸다고 합니다. ‘당신은 신부가 될 그릇이 못 되어 하느님이 물리치고, 당신 아들이 당신보다 신부가 될 그릇으로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받아들여 주지 않았느냐’는 말씀을 붙이시는데, 이 말씀을 하는 동안 할아버지 얼굴이 퍽 맑다고 느낍니다.
.. 하늘색 꽃들로 된 둥근 천장이 보기 흉한 판자집을 가려 주었습니다. 잔디가 난 길 주변은 온통 제라늄으로 울타리가 만들어졌습니다. 너무나 흉해서 지금껏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이 비참한 빈민가는 이제 미르포왈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가 되었습니다. 미술관을 구경 오듯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 (87쪽)
늘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은, ‘그래, 최종규라는 사람은 부지런히 책을 사고 읽어야 해’라는 말로 들립니다. 또한, ‘글 한 줄을 쓰든 두 줄을 쓰든, 좀더 깊이 곰삭이며 되뇌이는 가운데 알뜰하게 담아내야 해’라는 말로 다가옵니다. 여기에, ‘서둘러서 읽는 책은 속알맹이를 제대로 못 새기기 마련이고, 바쁘다며 부랴부랴 쓰는 글은 나중에 크게 고쳐서 다시 써야 하니 애먼 시간만 버리는 셈’이라는 말로 파고듭니다.
.. “자, 티쭈, 오늘 무얼 배지? 의학에 대해 뭘 알게 됐니?” “저는요, 슬픈 마음을 치료하는 데에 의학은 별웠로 힘을 못 쓴다는 걸 배웠어요. 병을 낫게 하려면 살고 싶은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의사 선생님, 희망을 주는 알약은 없나요?” 모디베르 박사는 저런 꼬마한테서 그처럼 슬기로운 말을 듣게 되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맨 처음으로 알아야 할 것을 넌 혼자서 터득했구나.” “그럼 두 번째로는 무얼 알아야 하나요, 선생님?” “환자들을 잘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많이많이 사랑해야 한다는 거야.” 의사 선생님은 티쭈에게 사탕을 한 주먹 집어 주시고는 공책에 좋은 점수를 써 주셨습니다 .. (96쪽)
할아버지와 나누는 이야기를 마칩니다. 할아버지는 성당 뒷문에서 왼편으로 걸어갑니다. 저는 오른편으로 걸어갑니다.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집니다. 해가 나올 듯 말 듯합니다. 천천히 내디디는 걸음을 멈추며 사진을 한 장 두 장 담습니다. ‘경축, 송림초등학교 주변 정비사업 지정’을 알리는 걸개천, ‘정비사업 설명회’를 알리는 걸개천이 곳곳에 걸려 있습니다. 학교 둘레 산비탈 골목집을 뜯어내어 아파트를 짓겠다는 일인데, 이 일은 ‘도시정비’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사람이 살기 나빠서 하는 ‘정비’가 아니라, 높은자리 분들이 보기에 나빠서 한다는 ‘정비’입니다. 그런데 사람 사는 집을 ‘정비’한다는 일은 왜 모두 ‘30∼40층짜리 아파트 짓기’로 이어질까요. 그나저나, 30층이 넘는 아파트를 초등학교 울타리와 마주한 자리에 짓는다고 한다면,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시끄러워서 어떻게 공부하지요? 더구나, 학교 둘레 골목집에 사는 아이들이 바로 이 송림초등학교를 다니는데, 이 아이들은 자기 집이 재개발이 되면 어디로 옮겨가서 살아야 하는가요. 아이들은 나중에 ‘도시 정비사업’이 끝나면 자기 고향 동네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 짐나스티크가 말했습니다. “울어야 한다. 어른들은 우는 걸 참지만, 그럼 안 돼. 눈물이 마음속에서 얼어붙어 버리거든. 그러니까 어른들은 마음이 돌처럼 딱딱하지.” .. (162∼163쪽)
사진기를 거두어들이고 걷습니다. 길에 쭈그려앉아서 시멘트 틈바구니에서 고개를 내민 민들레를 봅니다. 어느새 어른 손목 만한 굵기로 자란 꽃나무를 봅니다. 이 조그마한 풀과 나무는 하루아침에 삽날에 잘려나가며 아무 자취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릴 수 있습니다. 한 번 파헤친 우리 삶터를 돌이킬 수 없듯, 한 번 줄기가 꺾이고 뿌리가 파헤쳐진 들풀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어떤 길로 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다가, 빗방울이 더 굵어지기 앞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3) 싸움, 죽임
집으로 돌아와 버섯감자끼개를 끓입니다. 어제 송현시장에 갔더니 버섯 담은 작은 상자 둘에 천 원에 팔기에 샀습니다. 엊저녁에 한 통 절반을 넣은 버섯국을 끓여서 먹고 오늘 낮에도 절반을 넣은 버섯국을 감자 두 알과 양파 한 알을 송송 썰어서, 된장 하나만 풀어서 끓여먹습니다.
밥을 먹으며 생각합니다. 요즈음, 소고기 하나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촛불집회가 벌어집니다. 고기소가 되는 소한테 몸에 나쁜 병이 깃들인다면, 소 아닌 다른 유전자조작 먹을거리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미국에서 키운 소뿐 아니라 한국에서 키우는 소는 어떠할지 궁금합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소라고 하여 여물을 먹으면서 크고 있을는지요. 소 아닌 돼지는 어떠하지요. 사료가 아닌 메뚜기나 애벌레를 먹으면서 크는 닭이 있는가요.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 거두어들이는 푸성귀는 얼마나 될까요. 쌀과 보리와 수수와 조와 율무와 콩은 얼마나 비료와 농약에서 홀가분한지요. 지금 우리 밥상에 올려지는 먹을거리 가운데 ‘유기농까지 바라지 않아도’ 깨끗하다고 할 만한 먹을거리로 무엇을 손꼽을 수 있을까요.
..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나이 이후로 티쭈는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티쭈야, 우리 집 장사는 재미가 좋은 장사란다. 대포는 우산이나 밀짚모자 같지가 않거든. 우산이란 날씨가 좋으면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고, 밀짚모자란 비오는 날이면 진열장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데, 대포는 날씨가 어떻든 간에 팔리는 물건이란다.” .. (26쪽)
마시는 물은 얼마나 깨끗하며, 숨쉬는 바람은 얼마나 싱싱한지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새로운 손전화 기계가 멋들어져 보인다고 느끼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새로 나오는 옷이 예뻐 보인다고 느끼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싱싱한 바람을 들이쉴 수 없습니다.
한 차례 비바람이 지나간 하늘은 살짝 맑아졌습니다. 먹구름이 짙게 깔린 하늘 사이사이로 해가 비칠 때마다 올려다보면 파란빛이 보입니다. 그러나 구름이 모두 걷힌 뒤 하루만 지나도 파란빛은 잿빛으로 덮입니다.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여 날마다 타고 있을 자가용과 버스에서 내뿜는 배기가스가 하늘을 다시 덮을 테니까요.
.. 무스타슈 할아버지는 덧붙여 말했습니다. “전쟁에 대해선 할 얘기가 아직 더 있다. 요리하는 아줌마 아멜리는 말이다, 전쟁으로 자기 아들을 잃어버렸단다. 팔을 잃은 사람, 다리를 잃은 사람, 정신을 잃은 사람도 있지. 전쟁이 나면 모두들 뭔가를 잃어버리게 돼.” .. (117쪽)
미국은 더 많은 석유를 얻으려고 전쟁을 서슴지 않고 일으켰습니다. 한국사람 가운데 이 싸움판을 모르는 분은 없으리라 봅니다. 미국은 더 많은 석유뿐 아니라 더 많은 달러를 벌어들이려고 유전자조작 먹을거리를 세계 곳곳에 내다 팝니다. 한국땅은, 미국이 달러를 벌어들이도록 하는 저잣바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을 머리속에 새기고 있으면서도, 더욱이 촛불집회에 나가 정권을 꾸짖으면서도, ‘한국전쟁 때 우리를 지켜 준 고마운 나라’라는 생각을 이어나가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참말로 미국은 남녘나라 사람들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으로 총칼과 탱크와 전투기와 군함을 몰고 이 땅에 찾아왔습니까.
.. “왼나라도 우리 물건을 사 주는 손님이거든.” 미르포왈의 대포들은 그리하여 이쪽저쪽으로 편이 갈라져서 서로 맞대고 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쪽 정원과 저쪽 정원이 함께 부서져 버릴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장사라는 거야.” 므슈 트루나디스가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 장사란 것 아주 나쁜 짓이네요!” “뭐라고?” 쇠망치 소리 때문에 티쭈의 말이 들리지가 않았으므로 므슈 트루나디스는 허리를 굽히고 몸을 낮추면서 물었습니다. “어른들이 하는 장사는 아주 나쁜 짓이라구요. 왜냐하면 …….” 그 순간 처얼썩! 하고 따귀가 날아들었습니다. 오른나라와 왼나라의 싸움이 갑자기 티쭈의 뺨에까지 퍼졌던 것이었지요 .. (127쪽)
(4) 《초록색 엄지 소년 티쭈》라는 이야기책
모리스 드뤼옹(모리스 드리용) 님은 1957년에 《초록색 엄지 소년 티쭈》라는 이야기책을 써내면서,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고 나쁜가를 아이들한테 일깨워 주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러니까 1950년대에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엄청난 싸움판 아픔이 채 아물기 앞서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 가슴에 대못이 박히고 눈물과 생채기가 얼룩진 때입니다. 이때 우리 나라는 어떠했을까 떠올려봅니다. 1950년대를 살지 않았으나, 신문으로, 또 책으로, 또 그때를 살았던 어르신들 말씀으로 짚어 보건대, 우리들은 큰 싸움판 갈무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나, 서로가 서로를 더욱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하면서 ‘때려잡자’는 외침이 온나라를 휩쓸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는 ‘때려잡자’는 외침이 살아남아서 큰힘을 내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도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통일보다는 합병을, 평화보다는 전쟁을 더 사랑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 만약에 우리가 커서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틀에 박힌 생각들은 자라나는 우리 머리속에 아주 쉽게 들어앉아 버립니다 .. (14쪽)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평화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집안에서는 아이들한테 사랑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동네나 마을에서는 아이들한테 믿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이들한테 나눔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로지 경쟁을 가르칩니다. 오직 점수를 가르칩니다. 다만 돈을 가르칩니다. 그예 이익을 가르칩니다.
.. “감옥이 저렇게 보기 싫게 생기지 않았으면, 아마 도망 가고 싶은 생각이 덜 날 텐데요.” 이제 므슈 트루나디스의 볼도 귀만큼이나 빨개졌습니다. 그는 ‘이상한 아이로군. 교육을 죄 다시 시켜야겠어’라고 생각하고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감옥의 죄수는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돼.” “그럼 나쁜 점을 고치려고 저런 곳에 두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려고 저런 감옥에 둔다.” “감옥이 저렇게 보기 싫게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쁜 점은 훨씬 빨리 고쳐졌을 거예요.” .. (61쪽)
우리들 살고 있는 이 한국땅에 천사가 내려와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우리들 살고 있는 이 한국땅에야말로 천사는 벌써부터 내려와서 우리 이웃으로, 또는 우리 아이로, 또는 우리 할머니로, 또는 우리 동무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둘레에 고운 천사들이 그득그득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우리들은 눈이 멀어서 천사를 못 알아보고 귀가 먹어서 천사들 외침을 못 듣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티쭈가 풀빛 엄지손가락을 꾹 누르며 풀이 자라게 하고 꽃이 피게 하고 나무가 크도록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 느끼지 못하면서, 더 많은 돈과 더 큰 이름과 더 센 힘을 바라면서 우리 목숨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심지만, 어른들은 전쟁을 사고파는 나라, 이러한 나라는 미국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도 사랑을 나누지 않고 전쟁을 사고팔며 이익이 된다고 하하호호 웃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한민국 어른입니다. (4341.5.13.불.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