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일터나 학교를 오가는 사람들은 거님길이 아닌 찻길로 달리기 마련입니다. 거님길에서 자전거를 달리면 이 길에서 걷는 사람을 위험하게 할 수 있으니 안 좋아서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거님길은 파인 데가 많고 울퉁불퉁하고 턱이 많습니다. 가게에서 내놓은 물건과 버스정류장과 갖가지 알림판이며 전봇대며 걸리적거리지요. 이리하여 찻길에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생각해 보면, 자전거는 찻길로 달려야 합니다. 또한 자전거는 찻길에서 달릴 권리가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지 않고 끌 때면 거님길로 지나고요.

 그렇지만 찻길에서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자전거한테 찻길 달릴 권리가 없는 듯 여깁니다. 더욱이 시골과 시골을 잇는 길, 도시와 도시를 잇는 길은 자꾸만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고속화도로(또는 고속도로)’로만 뚫습니다. 처음부터 자전거가 다니도록 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러니, 시골 국도나 지방도로에 시골사람이 두 다리로 걸어서 다니도록 하려는 데에는 조금도 마음을 안 기울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꿋꿋하게 자전거를 몹니다. 걷는 사람도 당차게 걷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자전거꾼과 걷는이는 ‘매캐한 자동차 방귀’와 ‘바퀴가 닳으며 날리는 고무먼지’와 ‘자동차에서 내뿜는 열기’를 옴팡 뒤집어씁니다. 찻길을 닦는 데 들어가는 돈은 우리가 낸 세금이건만, 찻길을 누리는 권리나 ‘나쁜 공기 안 마시고 안전하게 다니는’ 권리를 자동차꾼만 누리고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시장, 군수 들이 되면 ‘관용차’가 나옵니다. 이들이 ‘서민을 만나거나 언제나 서민 삶과 부대끼’도록 ‘관용 자전거’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들한테 ‘전철 한 해치 정액권’이나 ‘버스 한 해치 찻삯’을 주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찻길을 닦고, 교통정책 세우고, 교통순경 두고, 찻길 정비를 하고, 자동차를 저마다 장만해서 다니는 데에는 얼마나 큰돈이 들까요. 우리들은 부자이건 부자가 아니건 어디이든 마음껏 움직이거나 찾아갈 권리를 누리면서 맑고 시원한 바람을 쐴 권리를 함께 누려야 하지 않을는지요. 또한, ‘왜 위험하게 자전거를 타고다니니?’ 하고 자전거꾼보고 ‘스스로 목숨 내놓고 다닌다’는 말이 아닌, ‘그래, 우리 모두 안전하고 아늑한 삶터에서 살도록 자전거를 타야겠구나’ 하는 말을 해야지 싶어요.

 정치꾼과 공무원부터 자전거를 타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장 노동자와 농사꾼도 자전거를 타야 합니다. 아이들도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운동, 진보운동, 정치운동, 통일운동, 교육운동, 문화운동을 하는 이들도 자전거를 타고다녀야 합니다. 환경운동 하는 사람만 자전거를 타서는 우리 삶터와 사회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글쟁이도 그림쟁이도 사진쟁이도 자전거를 타야지요. 종교를 믿는 분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야 합니다. 두 다리와 자전거가 아닌 자동차에 매이는 사람한테는 책을 읽을 겨를이 없습니다. 책을 읽어 세상을 더욱 넓게 부대끼려는 마음마저 줄어듭니다. (43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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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아이 티스투 길벗어린이 문학
모리스 드뤼옹 지음, 자끌린 뒤엠 그림, 나선희 옮김 / 길벗어린이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49 ― 사랑을 심는 어린이, 전쟁을 사고파는 어른
 : 모리스 드뤼옹, 《초록색 엄지 소년 티쭈》



- 책이름 : 초록색 엄지 소년 티쭈
- 글 : 모리스 드뤼옹(모리스 드리용)
- 그림 : 최윤경
- 옮긴이 : 배성옥
- 펴낸곳 : 민음사(1991.3.10.)


* ‘민음사’에서 펴낸 《초록색 엄지 소년 티쭈》는 판이 끊어졌고, 2005년 7월 15일에, 나선희 님이 새로 옮긴 판으로 ‘길벗어린이’에서 《꽃 피우는 아이 티스투》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와서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는 길벗어린이 판보다 민음사 판 번역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민음사 판 책으로 읽으며 느낌글을 씁니다. 프랑스에서 1957년에 나온 이 동화는 “Tistou Les Pouces Verts”였고, 우리 말로 옮기면 “풀빛 엄지손가락 티쭈(티스투)”입니다.


 (1) 어른들이란, 참!


 제가 일하는 ‘동네 도서관’을 찾아오는 사람은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어린이, 다음으로 어른. 도서관을 찾아오는 어린이는 조용히 자기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잡습니다. 그러고는 가장 느긋하게 책을 볼 만한 자리를 찾아서 철푸덕 하고 앉습니다. 소리를 낮춘 노래를 틀어 놓습니다. 너무 조용하기보다는 알맞춤한 가락이 흐르는 편이 나으니까요. 시골이라면 아무 노래를 틀어놓지 않아도 바람소리가 있고 새소리가 있고 물소리가 있습니다. 바람이 부는 결에 따라서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도 있습니다. 나뭇잎이 부딪힐 때는 반짝반짝 빛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도시에서는 자동차 소리와 빵빵질 소리와 공장 돌아가는 소리, 갖가지 기계 움직이는 소리와 전화기 소리만 그득합니다. 어쩔 수 없이 도시에서는 노래를 틀어야 합니다.


.. 이건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시청이나 교회에는 아나톨이니, 쉬잔느니, 아녜스니, 장클로드라고 신고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톨라, 제트, 푸스 혹은 미스투플레라고 불리우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오죽 많은가요! 이것은, 그저 어른들이란 진짜 우리 어린이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증거이지요. 게다가 어른들 자기네들이야 다 안다고들 말하지만,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들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모든 일에 관하여 틀에 박힌 생각만을 갖고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말해 버립니다. 그런데 틀에 박힌 생각이란 대개가 잘못된 생각이지요. 그런 생각들은 아주 오래 전에 이루어졌으며,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모르고, 또 매우 낡아빠진 생각들이랍니다 ..  (13∼14쪽)


 아이들은 참으로 다소곳하게 책을 읽습니다. 보던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새로운 책을 뽑아들기도 하지만, 앉던 자리에 그대로 놓기도 하는데, 아직 버릇이 덜 들었거나 깜빡 잊었기 때문입니다. “얘야, 보던 책은 꽂아 놓아야지.” 하고 이르면, “네” 하면서, 깜빡 잊었다는 얼굴이 되어 뾰로롱 달려가서 책을 집어 얌전하게 꽂아 놓습니다.

 어른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책을 선뜻 찾아내지 못합니다. 아이들과 달리 출판사 이름을 보고 지은이 이름을 보고 책이름을 봅니다. 출판사며 지은이며 책이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 자기 마음밥을 채워 주는가 못 채워 주는가를 살피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책,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책, 널리 알려진 책, 교수님이 읽어 보라고 한 책, 언론에서 큼직한 기사로 소개한 책에 손길이 뻗칩니다.


.. 아아,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학교는 티쭈에게 예상할 수 없었던 나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칠판에 알파벳 글자들의 느린 행렬이 시작되기만 하면, 또한 삼 곱하기 삼, 사 곱하기 사 같은 기다란 사슬이 펼쳐지려고만 하면, 티쭈는 왼쪽 눈이 따끔거림을 느끼고는 이내 깊이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티쭈는 바보도 아니었고 게으르지도, 피곤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부하겠다는 의지에 넘쳐 있었습니다 ..  (31쪽)


 지난주에 도서관을 찾아온 어느 어른은, 퍼질러 앉아서 느긋하게 책을 읽으라고 깔아 놓은 깔개를 신발로 밟고 다니면서 책을 고릅디다. 그러면서 “이 책 얼마예요?” 하고 묻더군요. 틀림없이 우리 도서관 1층 문간에 ‘사진책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큰 글씨로 적어 놓았고, 지난 금요일에는 건물 바깥벽에 커다란 간판도 달아 놓았건만, 더구나 도서관 안쪽에 ‘도서관 소식지’를 잘 보이는 자리에 늘어놓기도 했는데, 이런 데에는 한 번도 눈길을 안 두는가 봐요. 나즈막한 소리로 대답해 드립니다. “여기는 도서관입니다.” “아, 그런가요? 어쩐지 좋아 보이는 책이 많이 있던데.” “네, 도서관이니까 좋은 책을 갖추어 놓지요.”

 책방이라고 좋아 보이는 책이 없겠느냐만, 더 많은 사람한테 더 두루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어 놓은 도서관이니, 마땅한 소리입니다. 바로 다른 사람들은 털푸덕 앉아 있기도 하던 깔개를 신발로 꾹꾹 밟던 그분은,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밖으로 나갑니다만, 책을 꽂아 놓을 때에도 깔개를 또 밟습니다. 에휴, 한숨을 쉬고는 걸래로 발자국을 지웁니다.


.. “도시란 보다시피 거리와 건물과 집, 그리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네 생각에, 무엇이 도시에서 제일 중요할 것 같으냐?” 티쭈가 대답했습니다. “식물원요.” “아니야, 도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질서야. 그래서 지금 우리는 질서를 관리하는 건물로 가 보려 한다. 질서가 없이는 도시도, 나라도, 사회도, 모두 바람처럼 도무지 유지가 안 된다. 질서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무질서를 벌주어야 해!” 티쭈는 생각했습니다. ‘므슈 트루나디스의 말이 분명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왜 저렇게 고함을 치실까? 트럼펫 같은 목소릴 가진 어른이 바로 이분이시구나. 질서 때문에 저토록 소리를 질러야 할까? ..  (58쪽)


 아이들은 책을 읽을 때 바닥에 깔아 놓고 펼쳐서 읽거나 무릎에 올려놓고 펼쳐서 읽습니다. 잘 보이도록 하려고 펼칩니다. 그래서 좀 묵은 만화책이나 그림책은 쩍쩍 갈라지거나 튿어지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과 달리 힘이 있어서 한손으로 책을 끄집어 내어 한손으로 팔랑거리며 책을 넘기기도 합니다. 이때는 제아무리 묶임새가 야무졌던 책이라 해도 실이 풀리고 풀이 떨어집니다. 보다 못해서 ‘안내 쪽글’을 부랴부랴 적어서 도서관 책손한테 한 장씩 돌립니다. 안내 쪽글에는 “이곳은 책방이 아니라 도서관이니 책을 팔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인 만큼 다른 사람들도 책을 즐길 수 있도록 깨끗하게 간수해 주소서” 같은 글도 적어 놓습니다.

 쪽글을 돌리니, 어린이들은 모두 그대로 앉아서 책을 보지만, 어른들 2/3는 밖으로 나갑니다. ‘뭐야? 책도 안 팔잖아?’ 하는 얼굴입니다. 남아 있는 어른 1/3은 ‘도서관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을 하십니다. 이분들도 이곳이 어떤 곳인 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는가?


.. 식물학자들이 모이게 되면 커다란 회의가 열립니다. 미르포왈에는 그리하여 대대적인 식물학회가 열렸습니다. 꽃의 종류는 한없이 많지만, 식물학자들은 뛰어난 식물학자와 유명한 식물학자, 그리고 탁월한 식물학자, 이렇게 세 종류뿐이랍니다. 그들은 ‘선생님……, 교수님……, 명예로운 동료 학자님……’이라고 부르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 정원사 할아버지는 대답했지요. “저 식물학자들이란 꽃다발 하나도 만들 줄 모르는 사람들이란다.” …… 식물학자들도 그래서 보고서를 꾸몄지요. 아무도 알아먹지 못하는 과학용어들로 꽉 채워서 쓴 보고서였는데 ..  (75∼76쪽)


 하루일을 마치고 도서관 문을 닫습니다. 어질러진 책을 가지런히 맞추고 쓸고 닦고 빈 그릇과 물잔을 씻아서 말려 놓습니다.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렇게 큰 간판까지 밖에 내걸었는데, 어떻게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책 안 파느냐고 물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서관하고 분위기가 달라서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동네사람들도 제가 도서관을 꾸리는 줄을 진작부터 알고는 있으시지만, 동네사람들이 생각하는 도서관은 ‘독서실’입니다. ‘도서관 = 독서실’이고, 이러한 독서실은, 중고등학교 수험생이나 고시 공부 하는 사람들이 와서 칸막이책상에서 문제집 푸는 곳입니다.

 “바쁘실 테지만, 가끔 책도 보면서 마음도 쉬어 보셔요.” 하고 동네 아저씨며 아주머니며 붙잡아 보지만, “지금은 바빠서, 나중에 한가할 때 올게요.” 하는 대답만 돌아옵니다.


.. “저 동물들은 어디서 왔어요?” 티쭈가 경비원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아주 먼 데서 왔다. 아프리카, 아시아 ……, 나도 모르는 그런 데서 실어 왔다.” “이리로 데려오기 전에 데려와도 되느냐고 동물들한테 물어 보았어요?” 경비원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자기를 놀린다고 투덜거리면서 멀리 사라졌습니다. 티쭈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우선 저 경비원 아저씨는 자기가 맡은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이니 지금의 직업을 택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  (108쪽)


 우리 나라에 ‘어린이 도서관’은 몇 군데 없습니다. 뜻있는 단체에서 애써서 열어 놓은 곳(인표어린이도서관)이 남달리 있고, 텔레비전 영향으로 군데군데 생기기도 하지만(기적의 도서관), 정부에서 세우는 어린이 도서관이란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새로 한 곳을 세우기는 했습니다만). 지역자치단체에서 세운 어린이 도서관이 따로 있습니까. 시청과 구청에서 다스리는 어린이 도서관이 있습니까(그래도 요즘은 구청이나 동사무소 한쪽 자리를 터서 어린이책 몇 천 권 꽂아 놓은 도서관을 꾸며 놓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린이 도서관도 없는 이 나라에는, 푸름이(청소년) 도서관도 없습니다. 푸름이 도서관도 없는 이 나라이지만, 여느 일꾼이 찾아갈 만한 도서관조차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새벽바람으로 일터에 가서 저녁 늦게 일마치고 집으로 오는 일꾼이 찾아갈 수 있는 도서관은 어디에 있을까요. 밤늦게 문을 열어 주거나 새벽 일찍 여는 도서관이 있습니까. 쉬는 날도 따로 없이 꾸려 나가는 도서관은 어디에 자리잡을까요. 또한, 도서관에서 갖추는 책은 어떤 갈래 책들입니까. 어떤 신문을 갖추어 주고, 어떤 잡지를 받아들여 주고, 어떤 이야기로 우리들 마음밥을 선사해 주고 있습니까.


 (2) 또다른 어른과 우리 세상


 아침에 잠깐 성당 나들이를 갑니다. 이제 예비자교리를 마치고 다다음주에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하여 저한테 어떤 믿음이 깊다거나, 새로워지는 믿음이 생긴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또한 여느 믿음이들 길을 걸어가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올해 예순아홉인 동네 할아버지가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난주까지는 수녀님한테 배웠고, 마지막 배움은 믿음이 무척 깊은 할아버지가 ‘신앙인으로서 기도하며 살아가기’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 “책만 보면 졸음이 오니까 책을 아예 없애 버리자구. 우리 아들이 다른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다니까, 새로운 교육제도로 키워 봅시다. 사물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배우도록 하겠소. 조약돌이 무엇인지, 정원이 무엇인지, 들과 밭이 무엇인지, 일일이 보여주도록 합시다. 그밖에 티쭈가 어른이 되는 데 도움을 줄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설명해 주도록 합시다. 결국 우리들의 생활 자체가 가장 훌륭한 학교인 거요. 결과는 두고봅시다” ..  (40쪽)


 할아버지는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당신이 얼마 앞서 신협(신용협동조합) 부이사장 선거에서 떨어졌다면서, 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중에 신부님하고 이야기를 하니, 신부님은 할아버지가 부이사장 선거에서 떨어지기를 바라셨답니다. 할아버지로서는 부이사장이 되면 연봉 3600만 원을 받고, 동네 성당 할아버지들한테 짜장면도 사 주면서 어깨도 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다는데, 이러한 우쭐거림이 자칫 교만으로 흐를 수도 있었으리라고, 그래서 정작 당신이 당신 딸아들과 친구들한테 미안하다고 할 판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다들 자기를 달래 주려고 애쓰더라고, 그럽니다.

 저는 빙그레 웃으면서, “잘 떨어지셨네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일흔을 앞둔 할아버지로서는, 신협 부이사장이 되어 한 달에 삼백만 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적지 않은 돈으로 이래저래 베풂도 하고 선물도 하고 그럴 수 있지만, 그만한 돈을 받는 만큼 그곳에서 당신한테 고달픈 데까지 시간과 마음을 쏟으면서 바쳐야 합니다.

 동네 이웃인 할아버지와 당신 딸아들과 손주한테 들이면 좋은 것은 ‘돈으로 나누어 주는 베풂’이 아니라, 당신 마음과 몸으로 아껴 주는 사랑이요 믿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뜻에서 할아버지가 그 선거에서 떨어진 일은 잘된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 티쭈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에 무스타슈 할아버지는 천천히 정원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비로소 티쭈는 왜 정원사 할아버지가 평소에 그렇게도 말을 적게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할아버지는 꽃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 무스타슈 할아버지는 그렇게 꽃송이 하나하나의 건강을 살피면서 한 바퀴를 도는 것이었습니다 ..  (48∼49쪽)


 할아버지는 신학교 시험에 다섯 번 떨어지고 수도원에도 들어가 지내기도 했지만, 몸이 아파서 끝내 신부가 되는 길을 접어야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광주 살레지오 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때 여름철 모기를 몰아낸다며 디디티를 기숙사 방에 잔뜩 뿌려서, 여느 때에도 썩 좋지 못하던 허파가 더 나빠져서 폐렴으로 번졌고, 결핵까지 앓아서, 광주에서 연평도까지(50년대까지 연평도에서 사셨다고 하네요)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내내 울며 손수건을 적셨다고 합니다.

 신부가 되지 못하면서 곧바로 혼인을 하게 되었고, 딸아들을 다섯 두었는데, 이 가운데 둘째 딸은 수녀로, 셋째 아들은 신부로 컸다고 합니다. ‘당신은 신부가 될 그릇이 못 되어 하느님이 물리치고, 당신 아들이 당신보다 신부가 될 그릇으로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받아들여 주지 않았느냐’는 말씀을 붙이시는데, 이 말씀을 하는 동안 할아버지 얼굴이 퍽 맑다고 느낍니다.


.. 하늘색 꽃들로 된 둥근 천장이 보기 흉한 판자집을 가려 주었습니다. 잔디가 난 길 주변은 온통 제라늄으로 울타리가 만들어졌습니다. 너무나 흉해서 지금껏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이 비참한 빈민가는 이제 미르포왈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가 되었습니다. 미술관을 구경 오듯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  (87쪽)


 늘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은, ‘그래, 최종규라는 사람은 부지런히 책을 사고 읽어야 해’라는 말로 들립니다. 또한, ‘글 한 줄을 쓰든 두 줄을 쓰든, 좀더 깊이 곰삭이며 되뇌이는 가운데 알뜰하게 담아내야 해’라는 말로 다가옵니다. 여기에, ‘서둘러서 읽는 책은 속알맹이를 제대로 못 새기기 마련이고, 바쁘다며 부랴부랴 쓰는 글은 나중에 크게 고쳐서 다시 써야 하니 애먼 시간만 버리는 셈’이라는 말로 파고듭니다.


.. “자, 티쭈, 오늘 무얼 배지? 의학에 대해 뭘 알게 됐니?” “저는요, 슬픈 마음을 치료하는 데에 의학은 별웠로 힘을 못 쓴다는 걸 배웠어요. 병을 낫게 하려면 살고 싶은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의사 선생님, 희망을 주는 알약은 없나요?” 모디베르 박사는 저런 꼬마한테서 그처럼 슬기로운 말을 듣게 되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맨 처음으로 알아야 할 것을 넌 혼자서 터득했구나.” “그럼 두 번째로는 무얼 알아야 하나요, 선생님?” “환자들을 잘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많이많이 사랑해야 한다는 거야.” 의사 선생님은 티쭈에게 사탕을 한 주먹 집어 주시고는 공책에 좋은 점수를 써 주셨습니다 ..  (96쪽)


 할아버지와 나누는 이야기를 마칩니다. 할아버지는 성당 뒷문에서 왼편으로 걸어갑니다. 저는 오른편으로 걸어갑니다.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집니다. 해가 나올 듯 말 듯합니다. 천천히 내디디는 걸음을 멈추며 사진을 한 장 두 장 담습니다. ‘경축, 송림초등학교 주변 정비사업 지정’을 알리는 걸개천, ‘정비사업 설명회’를 알리는 걸개천이 곳곳에 걸려 있습니다. 학교 둘레 산비탈 골목집을 뜯어내어 아파트를 짓겠다는 일인데, 이 일은 ‘도시정비’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사람이 살기 나빠서 하는 ‘정비’가 아니라, 높은자리 분들이 보기에 나빠서 한다는 ‘정비’입니다. 그런데 사람 사는 집을 ‘정비’한다는 일은 왜 모두 ‘30∼40층짜리 아파트 짓기’로 이어질까요. 그나저나, 30층이 넘는 아파트를 초등학교 울타리와 마주한 자리에 짓는다고 한다면,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시끄러워서 어떻게 공부하지요? 더구나, 학교 둘레 골목집에 사는 아이들이 바로 이 송림초등학교를 다니는데, 이 아이들은 자기 집이 재개발이 되면 어디로 옮겨가서 살아야 하는가요. 아이들은 나중에 ‘도시 정비사업’이 끝나면 자기 고향 동네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 짐나스티크가 말했습니다. “울어야 한다. 어른들은 우는 걸 참지만, 그럼 안 돼. 눈물이 마음속에서 얼어붙어 버리거든. 그러니까 어른들은 마음이 돌처럼 딱딱하지.” ..  (162∼163쪽)


 사진기를 거두어들이고 걷습니다. 길에 쭈그려앉아서 시멘트 틈바구니에서 고개를 내민 민들레를 봅니다. 어느새 어른 손목 만한 굵기로 자란 꽃나무를 봅니다. 이 조그마한 풀과 나무는 하루아침에 삽날에 잘려나가며 아무 자취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릴 수 있습니다. 한 번 파헤친 우리 삶터를 돌이킬 수 없듯, 한 번 줄기가 꺾이고 뿌리가 파헤쳐진 들풀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어떤 길로 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다가, 빗방울이 더 굵어지기 앞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3) 싸움, 죽임


 집으로 돌아와 버섯감자끼개를 끓입니다. 어제 송현시장에 갔더니 버섯 담은 작은 상자 둘에 천 원에 팔기에 샀습니다. 엊저녁에 한 통 절반을 넣은 버섯국을 끓여서 먹고 오늘 낮에도 절반을 넣은 버섯국을 감자 두 알과 양파 한 알을 송송 썰어서, 된장 하나만 풀어서 끓여먹습니다.

 밥을 먹으며 생각합니다. 요즈음, 소고기 하나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촛불집회가 벌어집니다. 고기소가 되는 소한테 몸에 나쁜 병이 깃들인다면, 소 아닌 다른 유전자조작 먹을거리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미국에서 키운 소뿐 아니라 한국에서 키우는 소는 어떠할지 궁금합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소라고 하여 여물을 먹으면서 크고 있을는지요. 소 아닌 돼지는 어떠하지요. 사료가 아닌 메뚜기나 애벌레를 먹으면서 크는 닭이 있는가요.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 거두어들이는 푸성귀는 얼마나 될까요. 쌀과 보리와 수수와 조와 율무와 콩은 얼마나 비료와 농약에서 홀가분한지요. 지금 우리 밥상에 올려지는 먹을거리 가운데 ‘유기농까지 바라지 않아도’ 깨끗하다고 할 만한 먹을거리로 무엇을 손꼽을 수 있을까요.


..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나이 이후로 티쭈는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티쭈야, 우리 집 장사는 재미가 좋은 장사란다. 대포는 우산이나 밀짚모자 같지가 않거든. 우산이란 날씨가 좋으면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고, 밀짚모자란 비오는 날이면 진열장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데, 대포는 날씨가 어떻든 간에 팔리는 물건이란다.” ..  (26쪽)


 마시는 물은 얼마나 깨끗하며, 숨쉬는 바람은 얼마나 싱싱한지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새로운 손전화 기계가 멋들어져 보인다고 느끼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새로 나오는 옷이 예뻐 보인다고 느끼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싱싱한 바람을 들이쉴 수 없습니다.

 한 차례 비바람이 지나간 하늘은 살짝 맑아졌습니다. 먹구름이 짙게 깔린 하늘 사이사이로 해가 비칠 때마다 올려다보면 파란빛이 보입니다. 그러나 구름이 모두 걷힌 뒤 하루만 지나도 파란빛은 잿빛으로 덮입니다.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여 날마다 타고 있을 자가용과 버스에서 내뿜는 배기가스가 하늘을 다시 덮을 테니까요.


.. 무스타슈 할아버지는 덧붙여 말했습니다. “전쟁에 대해선 할 얘기가 아직 더 있다. 요리하는 아줌마 아멜리는 말이다, 전쟁으로 자기 아들을 잃어버렸단다. 팔을 잃은 사람, 다리를 잃은 사람, 정신을 잃은 사람도 있지. 전쟁이 나면 모두들 뭔가를 잃어버리게 돼.” ..  (117쪽)


 미국은 더 많은 석유를 얻으려고 전쟁을 서슴지 않고 일으켰습니다. 한국사람 가운데 이 싸움판을 모르는 분은 없으리라 봅니다. 미국은 더 많은 석유뿐 아니라 더 많은 달러를 벌어들이려고 유전자조작 먹을거리를 세계 곳곳에 내다 팝니다. 한국땅은, 미국이 달러를 벌어들이도록 하는 저잣바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을 머리속에 새기고 있으면서도, 더욱이 촛불집회에 나가 정권을 꾸짖으면서도, ‘한국전쟁 때 우리를 지켜 준 고마운 나라’라는 생각을 이어나가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참말로 미국은 남녘나라 사람들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으로 총칼과 탱크와 전투기와 군함을 몰고 이 땅에 찾아왔습니까.


.. “왼나라도 우리 물건을 사 주는 손님이거든.” 미르포왈의 대포들은 그리하여 이쪽저쪽으로 편이 갈라져서 서로 맞대고 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쪽 정원과 저쪽 정원이 함께 부서져 버릴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장사라는 거야.” 므슈 트루나디스가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 장사란 것 아주 나쁜 짓이네요!” “뭐라고?” 쇠망치 소리 때문에 티쭈의 말이 들리지가 않았으므로 므슈 트루나디스는 허리를 굽히고 몸을 낮추면서 물었습니다. “어른들이 하는 장사는 아주 나쁜 짓이라구요. 왜냐하면 …….” 그 순간 처얼썩! 하고 따귀가 날아들었습니다. 오른나라와 왼나라의 싸움이 갑자기 티쭈의 뺨에까지 퍼졌던 것이었지요 ..  (127쪽)


 (4) 《초록색 엄지 소년 티쭈》라는 이야기책


 모리스 드뤼옹(모리스 드리용) 님은 1957년에 《초록색 엄지 소년 티쭈》라는 이야기책을 써내면서,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고 나쁜가를 아이들한테 일깨워 주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러니까 1950년대에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엄청난 싸움판 아픔이 채 아물기 앞서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 가슴에 대못이 박히고 눈물과 생채기가 얼룩진 때입니다. 이때 우리 나라는 어떠했을까 떠올려봅니다. 1950년대를 살지 않았으나, 신문으로, 또 책으로, 또 그때를 살았던 어르신들 말씀으로 짚어 보건대, 우리들은 큰 싸움판 갈무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나, 서로가 서로를 더욱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하면서 ‘때려잡자’는 외침이 온나라를 휩쓸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는 ‘때려잡자’는 외침이 살아남아서 큰힘을 내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도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통일보다는 합병을, 평화보다는 전쟁을 더 사랑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 만약에 우리가 커서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틀에 박힌 생각들은 자라나는 우리 머리속에 아주 쉽게 들어앉아 버립니다 ..  (14쪽)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평화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집안에서는 아이들한테 사랑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동네나 마을에서는 아이들한테 믿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이들한테 나눔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로지 경쟁을 가르칩니다. 오직 점수를 가르칩니다. 다만 돈을 가르칩니다. 그예 이익을 가르칩니다.


.. “감옥이 저렇게 보기 싫게 생기지 않았으면, 아마 도망 가고 싶은 생각이 덜 날 텐데요.” 이제 므슈 트루나디스의 볼도 귀만큼이나 빨개졌습니다. 그는 ‘이상한 아이로군. 교육을 죄 다시 시켜야겠어’라고 생각하고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감옥의 죄수는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돼.” “그럼 나쁜 점을 고치려고 저런 곳에 두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려고 저런 감옥에 둔다.” “감옥이 저렇게 보기 싫게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쁜 점은 훨씬 빨리 고쳐졌을 거예요.” ..  (61쪽)


 우리들 살고 있는 이 한국땅에 천사가 내려와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우리들 살고 있는 이 한국땅에야말로 천사는 벌써부터 내려와서 우리 이웃으로, 또는 우리 아이로, 또는 우리 할머니로, 또는 우리 동무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둘레에 고운 천사들이 그득그득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우리들은 눈이 멀어서 천사를 못 알아보고 귀가 먹어서 천사들 외침을 못 듣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티쭈가 풀빛 엄지손가락을 꾹 누르며 풀이 자라게 하고 꽃이 피게 하고 나무가 크도록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 느끼지 못하면서, 더 많은 돈과 더 큰 이름과 더 센 힘을 바라면서 우리 목숨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심지만, 어른들은 전쟁을 사고파는 나라, 이러한 나라는 미국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도 사랑을 나누지 않고 전쟁을 사고팔며 이익이 된다고 하하호호 웃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한민국 어른입니다. (4341.5.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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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원과 다시다


 ‘미원’과 ‘다시다’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조미료가 있습니다. 화학조미료지요. 일본에서 만든 조미료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만들고, 상품광고마저도 일본 광고를 고스란히 베껴서 내보내 왔습니다. 1998년에 신문방송학 공부를 하면서 본 일본 조미료 회사 광고와 한국 조미료 회사 광고가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고, 노래며 광고말이며 어느 하나 안 베낀 곳이 없는데, 이와 같은 광고가 한국에서는 ‘광고상’까지 받는 형편이었으니 그저 놀랄 뿐이었습니다.

 미원이며 다시다며, 또 맛나며, 또 새로운 이름으로 나오는 숱한 조미료며, 집살림을 하는 아주머니들이 끊임없이 엄청나게 사서 밥을 하고 반찬을 하고 찌개를 끓이고 국을 끓입니다. 조미료가 있기 앞서까지는 된장과 소금과 간장으로 간을 보았으나, 조미료가 싼값으로 퍼져나가자, 모두들 된장과 소금과 간장을 뒤로 밀쳤습니다. 집집마다 다 다른 손맛과 입맛으로 우리 몸을 북돋우던 흐름이 하루아침에 끊겼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나라에서 라면공장 키우는 정책을 펼치며, 사람들 밥상에 라면이 부쩍 자주 오르게 되었고, 이제 라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느끼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라면에는 ‘스프’가 들어가는데, 이 스프는 미원이나 다시다보다 더 자극이 센 조미료입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제까지, 찬장에 미원이나 다시다나 맛나나 라면스프가 없는 집을 거의 못 보았습니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밥과 국을 하는 손길을 찾는 일은 놀이터 모래밭에서 천 원짜리 캐내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동네 이웃집에 놀러가서 밥 한 그릇 얻어먹게 될 때면 일찌감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고 비손을 올려야 합니다. 조미료덩이를 배속에 집어넣고 삭여야 할 일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지만, 싫은 얼굴을 할 수 없습니다. 세탁기 안 돌리고 텔레비전 안 본다는 대목 하나만으로도 ‘미친 놈’ 소리를 듣고 있는데, 조미료 하나 안 쓰고 소금과 된장과 간장으로만 간을 해서 찌개를 끓여서 먹는다고 하면, ‘이 동네를 떠나 산골구석으로 들어가라’는 듯한 눈초리를 받습니다.

 커피를 마시면 꼭 물똥을 누거나 속이 뒤집어져서 괴로웠지만, 어디를 가도 하도 커피를 타 주기 때문에 차마 개수대에 흘려보내기만 할 수 없어서 억지로, 어거지로 마시고 했더니 이제는 몸에서 조금 받아 주기는 합니다. 토마토나 딸기 대접을 받을 때, 그냥 꽁다리까지 우걱우걱 씹어먹습니다. 설탕은 안 묻히고 먹습니다. 그러나 ‘그럼 맛없어!’ 하면서 일부러 설탕을 푹 묻혀서 이쑤시개로 찍어서 제 손에 쥐어 주십니다. 능금이나 배를 먹을 때 껍질을 안 벗기고 속까지 모두 먹고 싶으나, ‘맛없어! 그걸 왜 먹어!’ 하면서 쓰레기통에 얼른 집어넣으십니다.

 눈물이 핑 돌지만, 가슴이 쓰리지만,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옆지기와 저는 배추 날것 그대로 물에 씻어서 먹기를 좋아하나, 싱그러운 열매는 껍질과 씨까지 오독오독 깨물어 먹기를 즐기나, 집에 찾아온 손님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라도 능금 껍질을 벗겨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껍질 안 벗긴 것을 속까지 냠냠짭짭 씹어서 먹지요.

 여러모로 알아보고 생각하고 길찾기를 해 본 끝에, 우리들이라도 도시에서 똥오줌을 거름으로 삭혀서 집에서 푸성귀를 기른다든지, 아니면, 만들어 놓은 거름을 동네 꽃밭에라도 뿌려 줄까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동네이웃하고 함께 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고 신날 텐데, 옆지기가 이웃 아주머니한테 들어야 하는 소리는 장난이 아닙니다. 어느 만큼 어림하고 있었습니다만,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들 살아가는 모습이 아주 남다른 삶도 아닌데, 당신들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고작 스무 해나 서른 해 앞서만 해도 다들 이렇게 사셨는데, 그리고 당신들 아주머니 아저씨를 낳아 기른 아버님 어머님은 모두 그렇게 살아오셨는데, 그 위로 올라가면 모두들 거리낌이 없는 모습과 매무새로 그렇게들 이 땅에서 어울려 왔는데.

 무거운 마음을 풀고자 동네 막걸리집에 갑니다. 동네 막걸리집에서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우리 나라 식량자급률이 51%인데 어쩌고 ……, 식량위기가 저쩌고 …….”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뭐라고? 우리 나라 식량자급률이 51%라고? 뭔 소리여? 우리 나라 식량자급률이 25% 밑으로 떨어진 지가 언제인데 헛소리를 늘어놓고들 있나? 아니, 헛소리이건 아니건, 그렇게 자기들도 우리 나라가 ‘식량 위기’인 줄 안다면, 이러한 이야기를 크나큰 특집으로 삼아서 이 나라 사람들 모두가 깨우치고 몸을 움직여 삶을 바꿀 수 있도록 운동을 벌여 나가야 하지 않나?

 우리 동네 아주머니들도, 아저씨들도 모두모두 집에서 저 텔레비전 소식을 들으실 테지요. 식량 위기가 어쩌고, 자급률이 어쩌고 ……. 그런데 우리 이웃 아주머니 아저씨 가운데 몇 분쯤이나마, 이런 이야기를 당신들 살갗으로 받아들이면서, ‘미원’과 ‘다시다’로 물들이고 있는 삶을 털어내도록 움직여 주실 수 있을까요. (4341.5.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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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ms 2010-07-12 10:41   좋아요 0 | URL
다른 이유로 검색하다가, 즉 우연히, 들렀습니다.
저도 멸치는 대가리 내장(?) 다 먹는 편이고
명태도 새우도(?) 대가리까지 먹지만
사과 내장은 그 사과씨의 독특한 맛 때문에 ... 네 사과 뼈는 맛이 괜찮습니다.
또 하나 사과 배꼽(꽃자리)는 맛이 별로 입니다.
맛이 별로인 것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사과씨는 근거가 부족하니
사과배꼽도 마찬가지겠네요.
포도씨도 씹자니 삼키자니 ... 포도 껍질도 어느덧 벗기는 게 씹는 것보다 편해졌고 ...
딸기 꼭다리는 아직 시도해 보지 못했네요. 딸기는 흔하지도 않아서였는지 ...
요즘은 애들과 애엄마랑 먹을 때 기준이 내가 아니라 더더욱 ... 그렇네요.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23
우자와 히로후미 지음 / 소화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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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47 ― 아름다운 지구가 왜 더러워지는지 아십니까
 : 우자와 히로후미,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



- 책이름 :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
- 글 : 우자와 히로후미
- 옮긴이 : 김준호
- 펴낸곳 : 소화(1997.1.6.)



 (1) 날씨와 공무원과 내 몸


 무르익은 봄을 알리는 비가 오는가 싶더니, 봄비가 아닌 겨울비 같은 찬비가 내렸습니다. 따뜻한 봄날에 걸맞는 따뜻한 봄비가 아니었습니다. 따뜻함을 싹 가시게 하는 찬비였습니다. 그렇게 제법 긴 날이 흐른 뒤 밤새 짙은 안개가 끼더니 날이 살며시 포근해집니다.


.. 이와 같은 기후의 변화에 의해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농업, 입업, 어업이다. 농작물이나 수목의 생육은 그 토지 고유의 기상 조건에 의해 크게 좌우되며, 또한 어패류의 생식도 바다의 온도가 조금만 변화해도 커다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  (17쪽)


 지난겨울을 생각하면, 겨울 같지 않은 포근함이 오래도록 이어지다가 갑자기 한 번 온도가 뚝 떨어지더니, 그 뒤로는 두 달 가까이 날씨가 한 번도 풀리지 않는 꽁꽁겨울이었습니다. 이 겨울이 풀리는가 싶더니 보름 만에 날씨가 따뜻하다 못해 조금 더웁기까지 했습니다. 봄이란 없이 곧바로 여름이 다가오느냐 싶다가, 굵은 비 몇 차례 들은 뒤 어느 만큼 알맞는 날씨로 자리잡습니다. 선뜻 여름 들머리로 가지 못하고 있는 날씨입니다만, 집에서는 거미와 바퀴와 모기가 깨어납니다. 파리도 바깥에서 날아듭니다. 들새는 들새대로 어린 새끼를 치면서 먹이를 찾느라 바쁩니다. 도서관이나 집에 앉아 있으면서도, 바깥에서 들려오는 새끼새 가냘픈 소리가 들려옵니다.

 봄꽃은 골목길마다 활짝활짝 피어납니다. 벌써 져 버린 꽃이 있고, 한창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이 있으며, 막 피어나려는 꽃이 있습니다. 이제 비로소 따뜻함을 물씬 느끼면서 사는 새날이구나 하며 한숨을 돌릴 즈음인데, 이러다가 들이닥친 차가운 비에다가, 모진 바람에다가, 쿵쾅쿵쾅 울리는 벼락이라니.


.. 중국, 인도를 비롯해서 발전도상국이 모두 미국과 같은 대량의 화석 연료를 사용한다고 하면 심각한 사태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발전도상국에 대해서 화석 연료의 사용을 늘리지 말라고 말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선진공업국이 화석 연료의 소비를 대폭으로 줄이는 노력을 함으로써, 비로소 지구온난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  (71∼72쪽)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주섬주섬 겨울옷을 찾아서 입습니다. 벗었던 속속옷도 다시 입습니다. 옷장에 집어넣었던 두꺼운 겉옷도 꺼내어 입으십니다. 저는 반바지차림 그대로 돌아다닙니다. ‘배다리 산업도로 무효화’ 집회터에도 반바지차림으로 갑니다. 새벽부터 비바람을 옴팡 뒤집어씁니다. 낮이 되자 골이 띵합니다. 집회터에 더 버티고 서 있기 어렵다고 느껴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 시간 반쯤 누워서 쉽니다. 두 시 오십 분쯤 일어나 동구청으로 갑니다. 동구청에서 인천시 도로건설과 공무원과 종건본부장 들이 찾아와서 주민과 만나는 자리가 있다고 합니다. 시간을 한 시간 뒤로 미루었다고 합니다. 토론자리를 마련하면서 시공사한테 ‘공사중단’ 지시를 내리지 않아서 주민들은 집회터에 그대로 비바람 맞으면서 있다고 합니다.

 네 시 반쯤 되어서야 금창동사무소로 옮겨서 토론자리를 엽니다. 긴소매 웃옷을 걸치고 동사무소로 찾아갑니다. 시에서 일하는 높은자리 공무원 분들은 말씀을 아낍니다. 주민들이 조목조목 따지는 이야기를 듣고도 ‘오늘 이 자리에 오면서 스터디를 많이 했다고 했는데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을 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인천시 공무원)는 원칙을 지킵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합니다. 주민들이 ‘그 원칙이라는 게 뭔가요?’ 하고 물으니, ‘공사를 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하고 대답해 줍니다. 그리고 ‘이미 보상비가 들어갔기에 도로부지를 다르게 쓸 수 없다’고 덧붙입니다. ‘인천시 스스로도 이 길을 놓아야 할 까닭(타당성)이 없음을 깨달았으면서도 왜 정치를 펼쳐서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느냐’고 주민들이 묻습니다. 이 말에는 ‘그렇게 되면 인천시 다른 곳하고 형평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우리 집 아이가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연수동은 왕복 12차선이지만 걸어서 학교를 다니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왜 여기에서만 통학에 문제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주민들이 거의 한목소리로 ‘고등학생하고 초등학생이 같습니까. 산업도로를 놓으려는 이곳에는 초등학교가 네 군데나 직접 붙어 있습니다. 이 길이 왕복 6차선으로 줄인 길이라고 하시는데, 폭이 50미터가 넘습니다. 이 길을 초등학생보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고 하시는 겁니까?’ 하고 소리높여 따집니다. 인천시에서 나온 높은자리 공무원은 말이 없습니다.


.. 선진공업국에서는 낭비를 미덕으로 물질적 쾌적함과 풍요를 탐욕스러울 정도로 추구하고 있다. 지구 환경에 커다란 스트레스를 주며 지구온난화를 비롯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음에도 거의 반성다운 반성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77쪽)


 저는 옆에서 시 공무원들 말과 주민들 말을 수첩에 받아적습니다. 세 시간 가까이 받아적습니다. 엄지손가락이 볼펜대에 눌려서 아픕니다. 골은 더욱 띵하고 다리는 뻑적지근합니다. 혼자서 받아적고 사진 찍고 왔다갔다 하노라니 어서 이 토론자리가 끝나고 집에 가서 쉬었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세 시간이 다 되어 가는 토론자리는 마무리가 될 낌새가 없습니다. 시에서 오신 분들은 아무런 다짐을 해 주지 않습니다. 다음에 언제 다시 만날지, 스스로도 잘못이라고 느낀 대목이 있으니 다시 검토를 하겠다든지, 무슨 실마리가 될 만한 이야기는 한 가지도 내놓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화를 참지 못하고 터뜨립니다. “여보시오, 지금 여기 동구에 육십오세 이상 노인이 몇 사람이 사는지 아십니까?”

 속으로 외칩니다. ‘아, 모를 테지요. 아니, 생각을 아예 안 할 테지요. 이 공무원 분들은 길닦는 전문가라고 스스로 내세울 뿐, 길이 나는 곳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어떻게 어울리며 사는 사람들인지는 조금도 살피지 않는데요. 도로과 공무원들은 환경영향평가도 하지 않았고, 교통영향평가도 하지 않았어요.’

 ‘길을 내야 한다면서, 정작 길이 지나가는 곳 터전은 어떠하고, 이곳에 깃들이고 있는 사람들 삶은 어떠한지를 살피지 않는 시 공무원들이에요. 흔히들 쇠밥그릇이라고 말을 하지만, 쇠밥그릇이라기보다는 ‘동네 형편을 조금도 모르는 책상물림’이에요.’


.. 무쓰오가와라 개발 계획 때문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적절한 직업을 얻지 못하고 대부분이 집을 떠나 돈벌이를 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무쓰오가와라 개발 계획은 록카쇼무라의 농민을 말 그대로 지옥에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  (169쪽)


 모든 것을 숫자로만 따지는 공무원입니다. 동네사람 한 달 벌이를 숫자로만 따집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얼마쯤인지 숫자로만 따집니다. 이 동네 사람이 사는 집을 돈이라는 숫자로만 따집니다. ‘만족도 조사’라고 있다면, 이 또한 숫자로 금을 죽죽 긋습니다. 숫자 아닌 사람들 목소리를, 손과 발을, 얼굴과 몸뚱이를, 가슴과 마음을, 눈과 머리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무원들이 좋아하는 그 숫자놀이 가운데 ‘소음공해 기준치’를 여러 달에 걸쳐서 따졌을 때, 진작에 훨씬 넘어서며 말썽이 있다는 보고서가 있는데, 이러한 보고서 숫자는 아예 펼치지 않습니다.

 머리가 어질어질합니다. 무슨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무슨 말을 적을 수 있을까. 이 공무원들한테는 동네 골목길에 심긴 꽃나무와 푸성귀는 ‘몇 푼어치’ 안 되는 것들이라서, 이 꽃과 나물을 싹 밀어내고 얼마쯤 갚아(보상) 주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는구나 싶습니다.  집값 얼마 갚아 주고, 집 옮기는 돈 얼마 보태어 주고, 어여 이곳을 떠나 주기만을 바라는구나 싶습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갑니다. 몸살이 납니다. 이튿날 하루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드러눕습니다. 그 다음날 입술이 부르틉니다. 그 다음날 입안이 헐고 붓습니다. 밥을 못 먹고 말도 못 하며 한 주를 보내고 나니 비로소 몸살과 붓기가 가라앉습니다.


 (2) 자동차와 길과 사람과 삶


 돈 뽑으러 은행을 다녀옵니다. 건널목 푸른불이 들어와서 건너려는데 옆에서 큰 차가 빠르기를 늦추지 않고 싱 달려오더니 사람을 칠 듯합니다. 움찔 놀라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운전사를 바라봅니다. 차가 끼이익 멈춥니다. 틀림없이 푸른불로 신호가 바뀌었고 사람들이 건너고 있지만 이 자동차는 그냥 내달렸습니다. 치일까 걱정되면 푸른불이라 해도 비키라는 뜻인가요.

 오늘뿐 아닙니다. 다른 때에도 으레 이렇습니다. 어디를 가든, 인천이 아닌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대구에서도 대전에서도 꼭같은 일을 겪습니다. 조금 넓은 골목길을 걷고 있으면 뒤에서 차소리가 들립니다. 옆지기와 느긋하게 손잡고 걷고 싶으나 손을 놓고 길가 담벼락에 찰싹 붙어야 합니다. 골목에서도 사람은 깨갱이고 자동차는 빠방입니다.


.. 자동차는 이중의 의미에서 지구온난화의 요인이다. 우선 자동차의 생산 공정에서 직접 간접으로 화석 연료의 소비를 필요로 한다. 승용차를 1대 생산하는 데 평균 884kg(탄소환산)의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에 배출한다. 두 번째로 자동차를 사용할 때는 당연히 석유를 필요로 한다. 그때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일본의 경우 소형승용차 1대당 1년 간 평균 649kg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  (76쪽)


 우리 집 둘레로 문방구 도매상이 줄줄 잇닿아 있습니다. 이 도매상 앞에는 늘 차들이 뒤죽박죽입니다. 물건을 싣느라, 또 부리느라 북적북적입니다. 시내버스가 지나가는 두찻길인데, 차가 한 줄로만 서 있어도 막히고 두 줄로 서 있으면 거의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 볼일을 보아야 한다는 짐차들은 시내버스가 빵빵 울려도 비켜 줄 생각을 않습니다. 집안에서 이 빵빵질 소리와 운전기사가 외치는 소리를 낱낱이 듣습니다.

 차댈 곳이 마련되지 않는 가운데 도매상거리를 이루도록 허가를 내준 구청 공무원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신지.


.. 자동차가 가져온 가장 커다란 해독은 말할 것도 없이 교통사고에 의한 희생이다 …… 현재 자동차의 교통사고로 일본 전체에서 매년 1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백만 명 가까운 부상자가 나오고 있다. 인간의 희생이라는 점에서 볼 때 자동차에 의한 피해는 한신대진재가 매년 두 번 일어나는 셈이다 …… 또한 자동차를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운동 부족에 빠지며 오염된 대기 속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건강을 해치는 위험도 높아진다 …… 문화의 발전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나, 자동차를 이용하면 이와 같은 관계를 갖는 기회가 적어지고 ..  (86∼88쪽)


 낮 두어 시 무렵, 초등학교 앞은 노란 차들로 가득합니다. 학원마다 아이들을 데려가려고 법석입니다. 학교 마치고 곧바로 집까지 걸어가는 아이들도 있을 터이나 무척 많은 아이들은 학원버스를 타고 학원돌기를 합니다. 이 아이들은 언제쯤 얼마 동안 집과 학교 둘레 골목을 거닐어 볼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만나는 이웃 어른은 부모와 학원 교사와 학원차 운전기사를 빼고 누가 또 있을까요.


.. 일본의 도로는 원래 보행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폭도 좁으며, 구부러진 길이 대부분이다. 옛날에는 어린이들은 길에서 놀거나 즐겁게 통학을 하며 지냈다. 그러나 자동차가 좁은 길에 침입해 왔을 때, 어린이들의 통학은 대단히 위험하게 되어, 길에서 노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어린이 공원은 자동차의 보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  (117∼118쪽)


 그제,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시위 대학생 물결을 마주칩니다. 대학생들은 한목소리로 ‘비싼 등록금’과 ‘미친소병 소고기 문제’를 외칩니다. 알록달록 깃발을 들고 종로거리를 걷는 대학생들이 퍽 많았으나, 훨씬 많은 대학생들은 이 시위 물결에 함께하지 않습니다. 서울 아닌 곳에서 배우는 대학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시위대가 종로거리를 지나가니 닭장차도 바쁘게 움직입니다. 닭장차가 움직이니 여느 차와 버스는 꼼짝을 못하고 멎습니다. 교통경찰이 넓은 길 한복판에 나와서 여느 차 움직임을 막고 닭장차가 지나가도록 길을 틉니다. 어느 시민도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교통방송에는 무슨 이야기가 흐르고 있을는지.


.. 노인이나 어린이들이 육교를 오르내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세계에서 문명국이라 불리는 나라 중 이와 같은 육교가 눈에 띄는 곳은 없다 ..  (118쪽)


 종로에서 명륜동까지 걸었습니다. 창경궁을 옆으로 끼는 길을 걸었습니다. 차소리가 아주 큽니다. 차소리가 없다면 고즈넉한 길일 테지만, 이 기나긴 길을 걷는 내내 옆사람하고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잠깐 다리쉼을 하고 싶어도 걸상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고 배기가스와 차소리로 고달프기 때문에, 어딘가 들어갈 때까지는 쉼없이 걸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아주 드뭅니다. 띄엄띄엄 한둘만 보입니다. 이 길을 걷는 우리는 바보였나.

 누구라도 걷고픈 마음이 안 생길 테지요. 차가 싱싱 달리는 길가에는, 차소리로 시끄러운 길 둘레에는, 싱그러운 바람이 아닌 자동차 배기가스를 들이마셔야 하는 거님길에는, 어느 누가 걷고플까요.


.. 보행자는 언제 자동차에 치일지 모르는 길을 자동차의 배기가스를 허파 가득히 들이쉬면서 걷는 셈이다 …… 주택도 직접 차도에 면한 경우가 많은데, 반드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무 등을 심고, 사람들의 생활이 자동차의 배기가스ㆍ소음ㆍ진동으로부터 보호되도록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  (122쪽)


 책방 나들이를 하며 책을 잔뜩 사들이니까, 또 사진장비를 이고 지느라 어깨가 고단하니까, 둘레에서 ‘웬만하면 작은 차 하나 사라’는 말을 끊임없이 합니다. ‘운전면허도 없습니다’라 말하면 ‘왜 운전면허가 없어? 면허부터 따야겠네’ 하고 덧붙입니다. ‘차를 왜 몰아야 할까요?’ 하고 되묻거나 ‘차에 넣는 기름은 어찌하나요?’ 하고 되물으면 ‘무거운 짐으로 몸을 괴롭히지 않아서 좋다’고 대꾸해 주고, ‘더 부지런히 일해서 돈벌면 되잖아’ 하고 대꾸해 줍니다. 그러면 저는 ‘무슨 일을 해야 돈벌이가 되어 차를 굴릴 수 있을까요?’ 하고 여쭙니다. ‘책 많이 팔면 되잖아?’ ‘어떤 책을 많이 팔아야 할까요? 사람들은 어떤 책을 많이 읽을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 차 없는 사람은 차 없는 자유를 누릴 수 없는 노릇.

 더운 여름날 부채질로 더위를 나고 있으면, 그 흔한 선풍기 하나 안 놓느냐는 타박을 듣습니다. 추운 겨울날 불때기를 적게 하면서 겨울나기를 하면, 기름 아깝다 하지 말고 보일러 돌리라는 꾸중을 듣습니다. 냉장고 안 돌리며 틈틈이 동네 저잣거리 나들이를 하며 푸성귀를 사먹으면, 김치 어떻게 먹느냐고 마트 가서 쟁여놓고 좀 먹으라는 핀잔을 듣습니다. 텔레비전 안 켜고 연속극 하나 안 보며 살면, 요즘 세상에 원시인 될 일이 있느냐며 눈총을 받습니다.

 대학교도 나와야 하는데, 어차피 나오려면 이름있는 대학교를 나와야 합니다. 회사원이 되어야 하는데, 어차피 하려면 연봉 몇 천만 원이나 억대는 되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굴려야 하는데, 작은 차로는 멋대가리없으니까 되도록 큰 차로 뽑아야 합니다. 텔레비전을 보아도 연속극뿐 아니라 뉴스며 영화며 스포츠며 뭐며 두루 꿰어야 합니다.


.. 미국에서는 자동차 없이는 생활할 수 없다. 도시의 형태도 도시간의 교통 체제도 모두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 전제가 되고 있다 ..  (138쪽)


 머리가 어지러워서 두 손을 듭니다. 두 발까지 들고 싶습니다. 고등학교만 마치고는 세상을 살아가면 안 될까요. 아니, 중학교나 초등학교만 마쳐도, 아니, 제도권 학교는 안 다닌 채로 세상을 살아가면 안 되는가요. 한 해 삼천만 원도 아닌 천만 원도 아닌, 한 달로 치면 삼사십만 원만 벌면서 살아가서는 안 되는지요.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삶이 아니라, 알맞는 만큼만 벌어서 알맞는 만큼만 쓰며 살면 안 됩니까. 텔레비전도 안 보고 라디오도 안 듣고 신문도 안 읽으면 세상에 어두운 바보인가요.

 이웃 아주머니가 한 마디 쏩니다. “그러면 산에 가서 살지, 여기서 왜 살아?”

 싱긋 웃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어디 산 같은 산이 남았나요?” 하고 대꾸하고 싶으나 속으로 삭입니다.


 (3)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라는 책


 ‘성장이론가­’로 이름을 날린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 교수가 1996년에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책을 펴냅니다. ‘경제성장’을 파헤치는 교수님이 어인 ‘지구온난화’ 책을 다 내느냐 싶은데, 우자와 히로후미 교수는 책끝에 붙이는 말에 “지구에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 덕분이다.(181쪽)”고 말합니다.

 그렇군요. 글쓴이 우자와 히로후미 교수는 머리로 알고 머리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군요. 날마다 숨쉬지 않으면 안 되는 공기(대기)가 얼마나 사람한테 소중한가를, 또 사람과 이웃한 자연 삶터에 소중한가를 깨닫고 있군요. 숨 안 쉬고 살 수 있겠습니까. 숨은 안 쉬어도 경제성장만 해도 되겠습니까. 숨은 덜 쉬면서 돈을 많이 벌면 우리 삶이 넉넉해집니까. 숨은 못 쉬어도 자동차만 굴릴 수 있으면 우리 삶은 기쁨이 넘칩니까. 숨은 막혀도 수십 억짜리 아파트 푹신걸상에 앉아 리모콘 단추를 누를 수 있으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습니까.


.. 지구온난화 문제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도 이해될 수 있다면 하는 꿈을 품고 있었던 차였다 ..  (11쪽)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숨을 쉬어야 합니다. 물을 마셔야 합니다. 밥과 숨과 물이 있어야 비로소 삽니다. 이 세 가지는 어느 누구한테라도 가장 좋은 밥이어야 하고, 가장 깨끗한 숨이어야 하며, 가장 맑은 물이어야 합니다. 밥ㆍ숨ㆍ물이 더러운 가운데 어떤 물질문명을 누릴 수 있는가요. 밥ㆍ숨ㆍ물이 지저분한 가운데 어떤 과학기술이 꽃피울 수 있는가요. 밥ㆍ숨ㆍ물이 형편없는 가운데 어떤 개발을 하고 어떤 돈벌이를 할 수 있습니까.

 재개발(뉴타운)은 밥ㆍ숨ㆍ물이라는 테두리에서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밥ㆍ숨ㆍ물을 엉망으로 무너뜨린다고 한다면, 재개발은 함부로 밀어붙여서는 안 됩니다. 서울과 부산을 이으려는 큰물길로 경제효과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밥ㆍ숨ㆍ물을 망가뜨리게 된다면, 억지로 정치힘을 써서 밀어붙여서는 안 됩니다. 나라밖에서 유전자조작 먹을거리(GMO식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까닭은, 우리 경제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네 밥ㆍ숨ㆍ물을 흐트리기 때문입니다. 값이 싸다고 해서 구정물을 마실 수 없고, 값이 눅다고 하여 농약으로 씻은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나와 내 이웃 모두 자기 몸을 살찌우고 마음을 가꿀 수 있는 밥과 숨과 물을 곁에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학문도 문화도 예술도 이곳에서 비롯해야 합니다.


.. 사회적 공통자본의 문제를 더욱 중요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인간적 존엄을 지켜 시민적 자유를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정적인 사회를 추구할 수 있도록 우리들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144쪽)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는 책 하나입니다. 나부터 아름답게 거듭나고 내 이웃이 함께 아름다워지자는 책 하나입니다. 돈을 바라서 읽는 책이 아닙니다. 돈을 바라서 마시는 물이 아닙니다. 돈이 되니까 읽자고 하는 책이 아닙니다. 돈에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 몸뚱이라면 얼마나 불쌍하고 서글픕니까.

 창영초등학교 앞 분식집에 들러서 핫도그 하나 사먹다가, 새로 마련하신 듯한 튀김떡볶이가 있어서 여쭈었더니 하나 집어서 먹어 보라고 합니다. 안 되지요, 하면서 500원어치를 시킵니다. (4341.5.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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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 친일 작품 1 (2008.4.30.)
 ― ‘친일’작품 나왔으니 무덤에서 파내어 다시 죽이자?



 이원수 선생 친일 작품 이야기가 나온 지는 2002년 3월부터이니까 제법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이원수 선생을 놓고 꺼내는 ‘친일부역’은 그다지 알맞아 보이지 않는다. 이원수 선생이 병을 앓아 드러누운 때가 1970년대 끄트머리요, 병실에 드러누워 입으로만 따님한테 겨우 몇 마디 읊조리면서 이야기하는 삶으로 여러 해 보내다가 1981년에 영영 떠나셨다. 세상을 떠나기 앞서 여러 해 동안 밥도 먹지 못하고 고무호스로 영양소를 위로 집어넣으며 겨우 목숨을 이어나가셨다. 살아 있는 동안 수많은 일을 하느라 당신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와 동화 창작뿐 아니라 나라밖 좋은 어린이문학 번역, 그리고 뜻있는 어린이문학가를 키우고 돌보는 일과 어린이문학 단체가 비틀리지 않도록 지키면서 가꾸는 일을 한 이원수 선생이다.

 그렇다. 해방 뒤, 어린이문학 단체 이끄는 일을 맡아 해 오면서, 독재정권에 빌붙는 허수아비와 끄나풀한테 얼마나 시달리던 이원수 선생이었던가. 독재정권 허수아비와 끄나풀은 얼마나 이원수 선생을 쓰러뜨려서 이 나라를 움켜쥐고 뒤흔들려고 했던가.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독재정권에 빌붙는 허수아비들을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얼마나 공격을 받고 힘들게 살아야 했던가. 외로운 기둥이 되어 갖은 바람과 모진 말밥을 견디면서 얼마나 아이들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하셨던가.

 지난 50∼70년대, 독재정권 허수아비와 끄나풀에 맞서서 이 땅 아이들을 지키려고, 또 이 땅 아이들을 사랑하는 힘여린 동료 어린이문학가를 보듬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리고 ‘간첩’으로 몰리고 형사가 뒤를 밟고, 쓰는 글마다 검열에 시달리면서 차가운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이원수 선생은 피땀을 흘리며 고달프고 외로웠어도, 또 모두들 독재자한테 입다물고 있었어도 붓을 들어 이승만을 비판하고 박정희를 비판하는 동시와 동화를 남겼다. 모두들 조용히 입닥치고 있을 때, 꿋꿋하게 붓을 들어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동화를 쓰면서 그 어둡던 세월에 아이들한테 힘과 희망을 실어 주려고 했다. 아파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몸으로 병자리에 누워 있는 1980년 그때에도 광주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당신이 광주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못 써서 안타깝다는 이야기만 하셨다. 곧은 한길에서 비껴나지 않으려고 꼿꼿하게 살아가셨는데, 당신이 살아오던 그동안에 당신이 할 수 있던 가장 걸맞는 ‘죄 씻기’는 무엇이었을까. 당신은 왜 당신 양심은 못 지키면서 당신 후배들과 이 나라 아이들만 지키려 했는가.

 명단 4776명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친일부역을 한 숫자가 이만큼밖에 안 된다고?

 친일인명사전에는 딱 한 사람만 들어가도 괜찮다. 한 사람만 넣든 백 사람을 넣든 만 사람을 넣든, 친일부역 작품 넣기로만 끝내서는 안 된다. 작품을 넘어야 한다. 친일작품을 남겼던 사람들이 보여준 그네들 삶을 함께 말해야 한다. 이들이 해방 뒤 꾸려온 삶을 함께 말해야 한다. 일제식민지 때, 친일을 하지 않고도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은 친일작품이 없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친일작품은 없으나 독재부역에 온마음 바친 사람들은 무엇인가.

 사람들 성격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속으로만 끙끙 앓으면서 사는 이가 있고, 털털하게 털어내는 사람이 있으며, 어려움을 맞불 놓듯이 헤쳐나가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흐름과 사람 성품에서 이원수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죄는 묻고, 잘잘못은 따져야 한다. 그런데 ‘이원수 선생 기리는 사업을 모두 접으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뭐하자는 소리인가? 이원수 선생 같은 분은 마땅히 기념사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해야 한다. 이원수 선생이 살아 있는 동안 이루어낸 훌륭한 발자취는 이 발자취대로 우리들이 이어받고 물려받고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원수 선생이 안타까이 남긴 발자취도 안타까운 발자취대로 곱새기고 되새기고 아로새겨야 하지 않을까. 티끌 한 점도 없을 줄 알았던 이원수 선생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던 아픈 티끌을 간직한 채 온삶을 보내었던 이원수 선생이었음을 헤아리면서, 배울 대목은 배우고 비판할 대목은 비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너, 예전에 이런 잘못을 저지른 적 있으니까, 넌 죽어서도 씻을 수 없는 전과자야!’ 하고 도장을 찍으면서 ‘죽은 주검을 파내어 사형을 시키겠다’는 소리인가.

 2002년 3월에 경남대 박태일 교수가 이원수 선생 친일시 문제를 꺼냈을 때, 이오덕 선생은 “선생의 빛나는 모든 작품뿐 아니라 일제 마지막에 썼다는 그 친일 동시까지도 있는 그대로 죄다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더 큰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선생도 저승에서, 생전에 스스로 깨끗이 보여 주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하여 준 일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작품을 읽게 되는 우리 아이들까지도, 세상의 어른들이 하는 모든 일을 더 깊게 더 넓게 생각하게 되고, 더 참되게 깨닫고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무결한 성인군자처럼 살아간 위인에게서보다도 결함이 있었던 사람, 자기와 비슷한 점이 있었던 사람한테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듯이, 나도 한때 잘못했지만 그것을 뉘우치고 바르게 살면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구나 하고 자신감을 가지게도 될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훌륭하게 남긴 작품은 훌륭한 모습이고, 안타까이 남긴 자취는 안타까운 자취다. 어느 하나는 씻어내거나 없는 듯 꾸밀 수 없고, 어느 하나만 돋보이도록 할 수 없다. 이렇게 해야 살아 있는 가르침이 되지 않겠나.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뜻도 이런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한 사람 삶과 발자취를 깊이 더듬거나 헤아리는 가운데 ‘이런 잘못을 드러내고자 하는 일은 우리 역사를 바로잡아 가르치고자 함’이라 한다면, ‘때려잡기’가 아닌 ‘살아숨쉬는 가르침’이 되도록 슬기로운 길을 함께 찾아야 하리라 본다. 친일인명사전은 인기투표 하는 사전이 아니다. 이름을 깎아내리거나 땅속에 파묻어 버리자는 사전도 아니다. 우리가 참답고 아름다이 살자고 하는 사전이다.

 한 점 티끌이 없을 줄 알았던 사람한테서도 티끌이 있었음을 느끼고 실망하거나 내동댕이치자는 친일인명사전인가? 한 점 티끌을 감싸안으면서 이와 같은 슬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가슴에 새기고 되뇌이자고 하는 친일인명사전인가? 《얘들아 내 얘기를》(웅진출판사,1984)이라는 이원수 선생 수필에 나오는 글을 몇 대목 옮겨 본다.


.. 도둑의 이야기가 났으니 하나만 더 하기로 하자. 어느 겨울의 일이다. 내 집에도 인기척을 듣고 나가 보니, 키가 큰 사나이가 대문을 나가고 있었다. 좀 무서웠다. 그러나 나갔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딸아이가 하는 말이, “아버지, 내 새로 산 장갑 여기 뒀었는데 가져갔어요?” 했다. 식구들이 사방을 두루 살펴보아도 없어진 건 따로 없었다. 그럼 도둑은 기껏 내 딸의 장갑만 집어간 것이다. 큰마음먹고 남의 집에 들어온 도둑으로서는 참으로 보람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별로 가져갈 만한 물건이 없는 것은 내가 부자의 생활을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추운 겨울이다. 이런 때, 장갑은 역시 필요한 물건이다. 몇 푼어치 되지도 않는 장갑만 들고 도망친 그 도둑은 그 장갑을 어떻게 했을까? 그까짓 것 어디 갖다 팔아도 돈이 될 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 도둑은 어쩌면 제 딸아이나, 제 누이동생에게 그 장갑을 주었을 때, 딸이 어쩌면 이렇게 물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이거 샀어?” 그러나 그 장갑은 새것이기는 하지만 몇 번 낀 것이니까 아주 새것은 아니다. 그 딸도 그런 것쯤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아버지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대답하기가 어려워서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딸아이가 만일 내가 보는 자리에 그 장갑을 끼고 나타났다면, ‘얘, 그 장갑 어디서 났니? 그건 우리 거야, 이리 내!’ 하고 말할 생각은 아예 없다. 나는 그 아이의 장갑 낀 손을 덥석 잡고, ‘아가, 너 장갑 좋구나! 엄마가 사 줬니?’ 하고 어루만져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태연히 참고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잘못하면 그 애의 손을 잡고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났다 ..  (이원수-잃어버린 장갑)


.. 나막신 장수는 비가 와야 좋아하고 미투리 장수는 날이 개어야 좋아하는 것같이, 지루한 비라도 다들 싫어할 때도 우산을 파는 아이들은 좋아 날뛰는 광경도 자주 본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8ㆍ15 해방이 되어 모두가 다 좋아했는데 그 중에는 은근히 싫어한 사람도 있었고, 남북통일은 우리 민족 모두가 바라는 것이지만 은근히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  (이원수-태풍 ‘빌리’ 호와 포플러숲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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