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살펴보기
 (119) Good Morning INCHEON


 - 1 -

 부산에 ‘인디고서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INDIGO+ING》라는 잡지를 펴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책쉼터 이름을 나라밖 말로 지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내는 잡지이름도 나라밖 말로 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인디고서원’이라는 말은 한글로 적어 주니 낫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이곳 인디고서원에서는 오는 8월에 닷새에 걸쳐서 ‘인디고 유스 북페어(INDIGO YOUTH BOOK FAIR)’를 연다고 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 ‘청소년 책’을 함께 모두어 내는 ‘세계잔치’로 꾸린다는군요.

 생각해 보면, 책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서울국제도서전’을 열고 있습니다. 이 책잔치 이름은 한글로 ‘서울국제도서전’이고, 알파벳으로 적으면 ‘SEOUL INTERNATIONAL BOOK FAIR’입니다. 한국사람한테는 ‘도서전’이고, 나라밖 사람한테는 ‘BOOK FAIR’입지요.

 ┌ 국제도서전 / INTERNATIONAL BOOK FAIR
 └ 유스 북페어 / YOUTH BOOK FAIR


 해마다 치르는 서울국제도서전 행사를 가 보면, 날이 갈수록 ‘국제’라는 이름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안타까움은 잠깐 접어 놓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이 나라 안팎에 있는 사람들을 모시고 잔치를 나눈다고 할 때에, 이와 같은 잔치판을 알리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야 알맞을까요. 아니, 어떻게 붙여야 좋을까요.

 ┌ 청소년 책잔치
 └ 푸름이 책잔치


 우리 말은 ‘청소년’입니다. 또는, ‘푸름이’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 말은 “책으로 벌이는 잔치”, 곧 ‘책잔치’입니다. ‘책’을 ‘圖書’라는 한자로 옮기고, ‘잔치’를 ‘典’이라는 한자로 옮기면 ‘圖書典’이 됩니다.

 인천시는 준비가 안 된 ‘도시엑스포(-expo)’를 치른다고 나섰다가, 세계엑스포위원회한테 쓴소리를 듣고는 잔치 크기와 이름을 모두 바꾸면서 ‘도시축전(-祝典)’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한자로 적어서 ‘祝典’인데, 이 ‘축전’이란 ‘엑스포’하고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우리 말로는 ‘잔치(또는 한마당)’이고, 한자말로는 ‘祝典(또는 祝祭)’이고, 영어로는 ‘Expo(또는 festival)’이며, 이탈리아말로는 ‘biennale’입니다.

 ┌ 인디고 청소년 세계 도서전
 └ 인디고 푸름이 세계 책잔치


 나라밖 사람을 불러들이는 잔치판이라고 해서 잔치이름을 아예 알파벳으로 적을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한국사람 누구한테나 글을 쓰는 자유가 있고, 이름을 붙이는 자유가 있습니다. 알파벳 아닌 히라가나나 가타가나로 적는다고 한들, 한자로 적는다고 한들 어느 누가 법으로 따지겠으며, 어느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겠습니다.

 한국사람만 즐기는 잔치판 이름을 외국말로 지어서 쓰든, 온통 알파벳으로 적바림하든, 누가 무어라 탓하겠습니까. 나라밖 사람을 모으든 안 모으든, 이리하여 서울시에서 ‘Hi Seoul Festival’이라고 외친들, 쑹얼쑹얼 따질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이름을 들을 때마다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영어에 온마음을 바치는 밑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하고. 한국땅을 찾아와서 한국사람을 만나는 나라밖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은 이 잔치를 어떤 한국말로 가리킬까’ 하고 궁금해 하지 않겠느냐고. 어쩌면 한국땅까지 찾아오는 그 나라밖 사람들이 ‘한국말-한국 문화-한국 삶터-한국 이야기’에는 눈길 한 번 안 둘 수 있습니다. 영어로 ‘thank you’를 한국말로 ‘고맙습니다(고마워/고맙네/고맙구나/…)’라고 하는 줄 모르고, ‘good-bye’를 한국말로 ‘잘 가(잘 가렴/잘 가게/…)’라고 하는 줄 모르더라도, 그 나라밖 사람한테는 아무 피해 될 일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한국말과 한국글이 있어서, 영어로 ‘BOOK FAIR’를 한국사람들은 ‘책잔치’로 적고 있음을 모른다고 하여, 이 사람들로서는 무어 아쉬울 노릇조차 없습니다.

 - 책 / 書籍,圖書,冊 / book

 우리들한테는 ‘책’입니다. 한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書籍,圖書,冊’입니다. 영어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book’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를 찾아오는 나라밖 사람들이 한글로 ‘책’을 쓰고 있음을 모른다고 해서, ‘한국 관광’이 빛을 잃지는 않아요.



 - 2 -

 인천시에서 시 살림돈으로 엮어서 거저로 보내주는 잡지가 있습니다. 인천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볼 수 있고, 인천사람이 아니어도 받아볼 수 있는 줄 압니다. 이달 2008년 5월로 173호가 나온 이 잡지는 《Good Morning INCHEON》입니다. 이 잡지는 나라밖 사람한테는 보내지 않고 나라안 사람한테만 보냅니다. 한글판만 찍으니까요.

 그러나, 잡지 이름에는 한글이 하나도 없습니다. 겉장을 넘겨 차례를 봅니다. 틀림없이 차례이지만 ‘차례’라는 말은 없습니다. ‘CONTENTS’라는 말만 있습니다. 그 옆으로, “May 2008 통권 173호”라고 적혀 있습니다. 응? ‘5월’이 아닌 ‘May’로 적는다면, ‘통권’이 아닌 ‘vol’을 적어야 하지 않나?

 ‘차례’ 아닌 ‘CONTENTS’는 모두 세 갈래로 크게 나뉘어 있습니다. 첫째 갈래는 ‘Fly Incheon’입니다. 둘째 갈래는 ‘Incheon Life’입니다. 셋째 갈래는 ‘Incheoner’입니다.

 ┌ 날자 인천 / Fly Incheon
 ├ 인천 삶 / Incheon Life
 └ 인천사람 / Incheoner


 글꼭지를 보니, “Fly Incheon News”, “시의회 Zoom in”, “Eduport Incheon”, “Healthy Life 건강백세”, “Info Box” 같은 말이 보입니다.

 잡지를 덮습니다. 이와 같은 잡지 꾸밈새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인천시 한 곳 모습만도 아닙니다. 대구를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을 가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울이라고 남다를 모습은 없습니다. 대전은? 광주는? 울산은? 우리 나라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딱히 새로울 만한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아직 법으로 ‘영어 함께쓰기’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전국 여러 도시마다 ‘영어마을’이 만들어졌습니다. 원어민 영어강사가 모셔지고 이 나라 아이들은 이 영어마을에 영어체험을 하러 찾아갑니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영어마을을 만드는 까닭이라면, 우리 나라 적잖은 사람들이 영어마을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마을을 바라는 사람이 드물다면, 또는 없다면, 굳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으며 만들 까닭이 없습니다. 공문서에도 버젓이 영어를 집어넣고, 동사무소는 어느 날 아침에 ‘주민센터’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동사무소 간판과 지도와 길알림판 갈아치우는 데에 들어간 큰돈을 놓고 예산낭비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거의 못 들었습니다. 한글학회에서나 잠깐 외쳤달까.

 ┌ 안녕하셔요, 인천입니다
 ├ 어서 오셔요, 인천입니다
 ├ 반가워, 인천
 └ …


 우리들이 우리 삶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쏟을 수 있다면, 또한 공무원들이 동네사람들 삶터에 살짝이나마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면, 나아가 이 나라 지식인들이 이 나라 문화에 털끝만큼이나마 마음을 둘 수 있다면, 지자체에서 주민들한테 보내주는 홍보잡지 이름을 붙일 때에도 《반가워, 인천》쯤으로 붙인 다음에, 이 글월 밑에다가 ‘Good Morning INCHEON’을 집어넣었으리라 봅니다. 영어로 이름을 붙이고 알파벳으로 적는 글월을 꼭 넣어야 한다고 해도, 《어서 오셔요, 인천입니다》쯤으로 잡지이름을 삼은 다음에, 이 밑이나 오른쪽에 넣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생각있는 사람들이 벌이는 문화잔치조차 ‘INDIGO YOUTH BOOK FAIR’인걸요. 책이름도, 책방이름도, 이름쪽에 적는 이름도, 물건에 붙이는 이름도, 우리가 몸담은 일터이름도, 길거리 빵집에서 파는 빵조각에 붙는 이름도, 모두모두 영어로 되어 있고 알파벳으로 적는걸요. (4341.5.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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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 포토 라이브러리 6
조나단 콕스 글.사진, 김문호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진찍기란
 [잠깐 읽기 4] 조나단 콕스,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


- 책이름 :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
- 글ㆍ사진 : 조나단 콕스
- 옮긴이 : 김문호
- 펴낸곳 : 청어람미디어(2008.4.15.)
- 책값 : 17000원



 (1) 시간을 들여 배워야 하는 사진


.. 이제 문제는 디지털 카메라를 살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디지털 카메라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다 ..  (14쪽)


 몇 해 앞서, ‘헌책방’을 사진감으로 삼아서 찍는 사람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때 문득, ‘이제는 내가 굳이 헌책방을 사진으로 찍어서 남기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헌책방 사진찍기’는 잠깐 반짝하고는 수그러들었습니다. 헌책방에 와서 책은 안 보고 사진만 찍던 그 많던 사람들은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예나 이제나, 조용히 책을 즐기는 사람만 헌책방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헌책방 사진찍기’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하는 듯, 어디에서나 사진질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부터 늘 사진기를 어깨에 걸쳐메고 다니기는 합니다만, 길을 걸어가는 데에도 사진기를 들이대고 전철에 서서 책을 읽는 데에도 사진기 불꽃을 터뜨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보면서, ‘이 젊은이들이 자기 사진기에 담는 이 엄청난 사진을 어디에 어떻게 쓰려고 할까?’ 궁금했습니다. 제 차림새가 뭔가 도드라져 보여서 사진세례를 받는가 싶기도 했으나, 사진이란 ‘어딘가 눈에 뜨이는 모습을 담는 일’이 아닌데, 이 젊은이들은 기계는 대단히 좋은 녀석을 장만하면서도, 정작 이 기계를 왜 다루고 어떻게 다루고 언제 다루어야 하는가는 까막눈이구나 싶었습니다.


.. 나는 피사체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는가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미지가 실물 크기의 몇 배로 나타나는지는 관심이 없다. 다만 피사체를 가장 좋은 빛에서 포착하려 하고, 적정한 노출과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얻고자 할 뿐이다 … 나는 얼마나 고배율의 이미지를 얻어내느냐 하는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 접사사진을 촬영하려면 먼저 당신이 사용하는 장비에 통달하고, 뛰어난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서 장비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  (18쪽)


 요즈음도 새로운 디지털사진기는 쏟아져 나옵니다. 새로운 디지털사진기를 장만하는 사람도 꾸준히 늘어납니다. 사진 모임도 제법 많고, 공원이나 옛 궁궐에 ‘출사’ 나가는 사람도 많으며, 골목길 모습을 찍는다며 출사를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는 분들이 출사를 다녀왔다고 이야기를 건네면, 그분 인터넷방이나 블로그를 찾아가보고 무슨 사진을 어떻게 찍었나 들여다보곤 합니다. 찍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참 부지런히 많이도 찍던데, 정작 올려놓는 사진은 몇 장 안 되기도 합니다.

 씁쓸하게 웃으면서 ‘이이는 뭘 했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사진 찍기 좋다는 곳’에 가서 무얼 했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출사는 핑계고, 그냥 술 마시는 모임을 한 셈인지? 출사랍시고 모여서 빈둥빈둥 수다만 떨지는 않았는지? 출사를 했으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더 나은 사진을 헤아려 보는 자리를 마련해야 할 텐데, 당구장에서 공치기 놀이나 하고 있지는 않으셨는지?


..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이라면, 카메라를 꺼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가 촬영하는 사진이 카메라를 망가뜨려도 좋을 만큼 대단한 사진이 아니라면,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 두라! ..  (43쪽)


 곰곰이 헤아리면, 사진 모임에 나가고 출사에도 나가는 분들이 늘 보아 온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은, ‘퍽 그럴싸해 보이는 모습’이기 일쑤입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이 담긴 사진이라기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멋지구나 싶은 모습’이곤 합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스스로 자기 삶을 알뜰히 담고, 사진에 찍힌 사람 삶이 사뿐히 담긴 사진이라기보다는 ‘분위기 있다고 하는 모습’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을까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읽었어도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는 못 읽었으니, 《태백산맥》은 읽었어도 《광주 전남 현대사》는 모르고 있으니, 《외딴 방》은 읽었어도 《마흔에 길을 나서다》는 건드려 보지도 않으니, 어찌할 길 없는 노릇일까요.

 신락균을 알든, 임응식을 모르든, 강운구를 읊든, 한정식을 따르든, 최민식 이름 석 자를 되뇌이든, 김기찬 이름 석 자를 새기든, 육명심 강의를 들었든, 이명동 말고 저 명동도 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든, 먼저 자기 나름대로 시간을 들이고 품을 들여서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곱씹고 되새겨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림 좋은 사진을 바라든 뜻이 있는 사진을 바라든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사진 찍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가슴에 새기고 나서야 사진기를 들 일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내 손가락을 까딱거려서 눌러대는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뒤돌아보고 나서야 사진기를 들 일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2) 사진기를 들기 앞서 생각하기


.. 빛을 연구하려면 카메라를 내려놓고 피사체의 모습이 빛에 따라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관찰해 보라 ..  (62쪽)


 훌륭한 사진쟁이든 훌륭하지 않은 사진쟁이든,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내가 사진으로 담을 대상하고 가까워진 다음에 사진기를 들자. 그렇게 해도 늦지 않다’고. 백두산에 오른 기쁨과 벅참을 사진에 담고 싶다면서 여기저기 막 찍는다고 하여, 내 가슴으로 다가온 기쁨과 벅참이 사진에 담기지 않습니다. 모르지요. 헐레벌떡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헐레벌떡 사진이 가장 뜻있는지도.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대충대충 사진이 가장 재미있는지도. 그냥저냥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그냥저냥 사진이 가장 값진지도. 겉치레와 겉멋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겉치레 사진이나 겉멋 들린 사진이 가장 알맞는지도.


.. 카메라가 내 팔의 연장이라고 느껴질 때면 시간을 벗어난 것 같은 초월의 순간을 경험하면서 그 장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장면의 일부가 된다 … 사진가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볼 때 현실을 떠나 다른 장소로 가는 느낌을 주고 싶어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진가가 사진 속에 몰입하는 것이다 … 장비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기에 그들의 창조적인 측면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 렌즈의 선택을 제한하면 피사체들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 ..  (85∼86쪽)


 제 사진감인 ‘헌책방’과 ‘골목길’, 여기에 ‘자전거’까지 해서 사진에 담을 때마다 늘 혼자말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모습을 담을지가 머리에 떠오르거나 마음에서 샘솟기 앞서까지는 사진기를 손에 쥐지 말자고. 한쪽 어깨에 언제나 사진기가 걸려 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찍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면 섣불리 사진기를 손에 쥐지 말자고. 사진기 구멍으로 ‘찍을 대상’을 요모조모 살피지 말고, 두 눈으로 먼저, ‘찍을 대상’을 살피자고.

 그러고 나서, 내가 꼭 찍어야 하는지, 나 아니면 찍을 사람이 없는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흔히 찍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합니다.

 돈 떨어질 걱정이 없는 디지털사진을 찍는다고 해도, 저장장치에 쓰레기 사진을 모아 놓는 일은 반갑지 않습니다. 쓰레기 사진을 모아 놓으면 어차피 다 지워야 합니다. 게다가, 쓰레기 사진을 치우느라 소중한 시간이 빼앗깁니다. 엉뚱한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시간이 버려지고, 엉뚱한 사진을 지우느라 또 시간이 버려집니다. 또한, 엉뚱한 사진을 찍는다고 설레발을 치는 바람에, 정작 제가 즐겨야 할 헌책방이나 골목길이나 자전거하고 함께하는 시간마저 줄어들어요.


.. 사진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보는 방법’을 배우고, 환경적 조건에 따라 신속하게 적응하는 것이다 … 접사 이미지를 포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임을 나는 거듭 깨닫고 있다. 또, 피사체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도 잘 도망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거듭 놀란다. 사실 피사체가 자리를 뜨기 전에 내가 먼저 뜨는 경우가 더 많다 ..  (91,108쪽)


 사진을 찍어서 한 가지 모습을 종이나 파일로 남긴 뒤부터는, 두 눈으로 바라보고 온몸으로 부대끼던 삶터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모습이, 오늘 다르고 어제 다르고 내일 또 달라지겠구나 하고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 누구나 보는 모습이 아닌, 내 나름대로 뜻과 값을 두면서 바라보는 모습이 하나둘 늘어납니다. 사진 한 장에 이야기 한 자락이 생기고, 사진 두 장에 삶 한 자락이 새겨집니다. 사진 석 장에 눈물 한 방울 담기고, 사진 넉 장에 웃음 소담스레 묻어납니다.

 찍고 나서 두 번 거듭 보고, 찍었기 때문에 세 번 다시 보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찍은 뒤에 다시 찾아오고 또 찾아갈 곳을 사진에 담아야 하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찍은 그날부터 사랑하게 되거나 애틋하게 바라보는 무엇인가를 사진에 담아야 하는구나 하고 알아갑니다.


 (3)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이라는 책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가까이 찍기’를 말하는 ‘접사’는 제 사진하고는 거리가 멀지 않나 생각하면서 읽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생각을 바꿉니다. 사진은 모두 똑같은 사진이구나. 다만, 모두 똑같은 사진을 다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찍을 뿐이구나. 다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찍는 사진이 아니라면 모두 똑같은 사진이라고 말할 수 없구나. 다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찍으니, 다른 사람들 사진을 구경하고 다른 사람들 사진책을 장만하면서 즐기는 맛이 있구나.


.. 하루가 끝나고 유리상자 안에 갇혀 죽어 있는 수집물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피사체를 관찰하는 일은 훨씬 만족스러운 일이다! ..  (7쪽)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을 쓴 조나단 콕스 님은 말합니다. 디지털파일을 RAW파일로 남겨 놓으라고. “JPEG포맷이 아닌 RAW 포맷을 사용하면 디지털 메모리 용량을 더 늘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촬영할 수 있는 이미지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물론 촬영속도는 느리게 하고 촬영 이미지 수는 줄이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메모리 저장 공간을 아끼기 위해서 좋은 피사체들을 보고도 충분히 촬영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139쪽)”라고 말합니다.

 저는 어떤 파일로 사진을 남겨 두고 있었나 살펴봅니다. JPEG로 남기고 있었군요. 그랬나? RAW 파일로 형식을 바꿉니다. 그랬더니, 저장 장치에 담을 수 있는 사진 장수가 1/3로 줄어듭니다. 헉! RAW 파일은 원본파일이고, 이 원본파일을 쓸 수 있도록 줄이거나 만지려면 새 프로그램 하나를 배워야 합니다. 헉헉!! 시험 삼아 RAW 파일로 사진을 담은 뒤 새 프로그램을 만지작만지작하다가, 애써 찍은 사진 1/2을 날렸습니다. 헉헉헉!!!

 파일 형식을 바꾸고 나서 보니, 예전 JPEG 형식이었을 때보다 빛느낌이 한결 살아납니다. 그렇구나. 이러한 파일 형식을 쓰는 까닭이 있었구나. 그러나 예전에 찍은 사진은 그 사진들대로 좋습니다. 싸구려 렌즈를 끼고 찍은 사진이든, 비싸구려 렌즈를 끼고 찍은 사진이든, 제가 담아야 할 사진감을 제 깜냥껏 사랑하고 믿고 아끼는 가운데 담아낸 사진이었다고 한다면, 좀더 나은 파일 형식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제 마음에 기쁘게 느껴집니다. 이제부터는 한결 나은 파일 형식으로 쓰면 되고, 또, 여태껏 소홀히 여기거나 가볍게 지나쳤던 대목을 다시금 찬찬히 돌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집니다.

 한 자리에 머무는 사진을 바라지 않으니까요. 고여 있는 사진을 바라지 않으니까요. 용두질하며 즐기는 사진을 바라지 않으니까요.


.. 이미지를 보는 사람과 당신의 이미지를 연결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사체의 눈높이에서 촬영하는 것이다. 거북이나 두꺼비가 세계를 어떻게 보는지 생각해 보라. 당신이 피사체의 시점에서 사진을 촬영하면, 사진을 보는 사람은 피사체만 보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가 주변 환경을 인식하는 방법까지도 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  (110쪽)


 사진책 오천 권을 보았다고 해서 더 나은 사진을 알아보는 눈길을 길렀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진책 만 권을 보았다고 해서 더 나은 사진을 찍는 손길을 길렀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몇 권 읽었느냐는 껍데기입니다. 예전에 읽은 권수가 아닌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읽는 책을 덮은 다음, 새로운 책을 읽으려고 마음을 기울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멋들어진 작품 하나 빚어내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멋들어진 작품은 일찌감치 이루어 놓은 하나로 그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를 처음으로 삼아 두 번째를 이루고 세 번째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밟고 일어서야 합니다. 열 며칠 동안 책상맡에 놓고 있던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을 마무르고 책꽂이 한켠에 얌전히 꽂아 놓습니다. 곧 책방 나들이를 해야겠습니다. (4341.5.2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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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전집 - 전20권
송건호 지음, 강만길 외 엮음 / 한길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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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현대인물사론》


 송건호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2001년에 세상을 떠났고, 2002년에 스무 권짜리 ‘송건호 전집’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전집이 나오면서, 당신이 써 온 낱권책은 모두 품절이나 절판이라는 길을 걸었고, 40만 원짜리 전집이 아니고서는 당신 글을 읽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08년 오늘날, 송건호라고 하는 분 책을 하나씩 따로 읽고 싶다면 헌책방을 가야 합니다. 헌책방에는 당신이 쓴 《민족지성의 탐구》며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며 《서재필과 이승만》이며 《김구》며 《의열단》이며 《한국현대사》며 《한나라 한겨레를 향하여》며 《분단과 민족》이며 《드골 평전》이며 《민중과 자유언론》이며 《소크라테스의 행복》이며 《민주언론, 민족언론》이며 《무지개라도 있어야 하는 세상》이며 《민족통일을 위하여》며 《동양의 고사》며, 또 아이들한테 읽히려고 쓴 위인전이며, 수많은 책을 어렵잖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1984년에 펴낸 《한국현대인물사론》이라는 책은, 김구ㆍ여운형ㆍ김창숙ㆍ안재홍ㆍ이동녕ㆍ안창호ㆍ이승만ㆍ김교신ㆍ한용운ㆍ신채호ㆍ함석헌ㆍ이광수ㆍ최남선ㆍ이용구, 이렇게 열네 사람 이야기를 담습니다. 김교신 꼭지를 읽어 봅니다. “김교신은 45세의 젊은 나이로 그렇게도 그리던 민족의 광복을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떴다. 그의 평생은 파란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생전에 높은 요직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낱 중학교의 평교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주의가 도도히 흐르는 기독교계에서 그처럼 기독교의 민족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은 없고 그토록 독실하게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교회와 서양 선교사를 외면하고 오로지 하느님과 성경만을 의지한 기독교인은 없었다(276쪽).”는 대목에 눈이 멎습니다.

 교과서에 이름이 실려 익히 알 만하거나, 이래저래 무슨 행사 때마다 들먹여지거나, 우리 나라 곳곳에 크고작은 기념관이나 기념빗돌이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고, 어떤 마음과 넋으로 이 땅에서 살아갔는가를 얼마만큼 헤아리고 있습니까. 북한산국립공원이 왜 국립공원인지, 지리산국립공원은 국립공원으로서 얼마나 뜻이 있는지 헤아리면서 그곳을 찾아가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일터에 가서 하루 여덟 시간, 또는 더 길거나 짧은 시간을 바치면서 하는 일은 우리 은행계좌에 들어오는 돈을 넘어서 얼마나 우리 삶터를 북돋우거나 돌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는 밥과 물과 바람은 우리 몸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밥과 물과 바람이 지금 어떤 형편인지 알고 있습니까.

.. 일제 36년 간 조선에는 숱한 인물들이 나왔으나 지식 청년이나 일반 청년에 관계 없이 조선 청년대중에게 가장 폭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마 춘원 이광수를 따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광수는 세상이 다 아는 문인이었으나 지금과는 달리 일제 때의 춘원에 대한 기대는 단순한 문인으로서보다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서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얼마 후 1946년 여름쯤 되지 않았을까. 어느 날 이광수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조그맣게 보도된 일이 있다. “초췌한 모습의 이광수, 아내와 합의 이혼 수속차 종로구청에 출현”, 대체로 이런 내용의 기사였는데 머지않아 친일파로 단죄될 이광수가 재산을 보호하고자 아내 허영숙과 합의 이혼하고 재산을 아내의 이름으로 명의 변경했다는 보도였다. 8ㆍ15 후의 춘원은 온데간데 존재도 없었다. 8ㆍ15 전까지만 해도 민족의 우상처럼 존경받던 춘원이 해방이 되자 ‘친일파 이광수’로 변해 욕설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세상이 변하니까 하룻밤 사이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달라지나 싶어 인생의 무상함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  (이광수 꼭지/348쪽)

 송건호 님이 거쳐간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와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여기에다가, 온몸 바쳐 태어나게 한 〈한겨레〉는 오늘날 얼마나 힘차고 야무진 붓끝으로 우리한테 밝고 고운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까. 〈조선〉 기자와 〈한겨레〉 기자는 얼마나 송건호 님 발자취를 톺아보면서 당신들 발걸음을 튼튼하게 이 땅에 내딛고 있습니까.

 책이 없어서 사람을 못 보지는 않을 테지요. 사람이 없다고 책을 안 보지는 않을 테지요. 마음이 없고 뜻이 없어서 몸을 안 움직이고 어깨동무를 안 할 뿐일 테지요. (4341.5.1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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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굼 낮은산 작은숲 11
박기범 지음, 오승민 그림 / 낮은산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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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길을 꿋꿋이 걷는 외롭지 않은 아이야
 [잠깐 읽기 3] 박기범 글, 오승민 그림, 《낙타굼》



- 책이름 : 낙타굼
- 글 : 박기범
- 그림 : 오승민
- 펴낸곳 : 낮은산(2008.4.10.)
- 책값 : 8300원



 (1) 어른을 보는 아이


 어제 낮, 화평동 그림할머니하고 금곡동 골목길 안쪽에 있는 꽃잔치집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올해 여든여섯인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은 몸으로도 걷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런 골목은 연인들이 좋아하며 다니는 곳’이라고 하면서 골목집마다 문이나 울타리에 가지런히 늘어놓은 꽃그릇을 구경하고 꽃냄새를 맡고 꽃송이를 손으로 살짝 만져 보기도 하며 걷습니다.

 철쭉과 진달래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창영초등학교 높은 울타리 옆으로 나 있는 손바닥 만한 쉼터. 잠깐 쉬었다 가자면서 그늘이 드리운 걸상에 나란히 앉습니다. 손바닥 쉼터 한복판에는 아이들 놀이기구를 몇 가지 마련해 두었습니다. 초등학생이려나 싶은 아이 대여섯이 숨바꼭질을 하면서 뛰어놉니다.

 이 가운데 한 아이가 자꾸만 저를 쳐다봅니다. 제 귀에 들리는 목소리로 ‘저기 이상한 아저씨 있다’고 하면서 빤히 바라봅니다. 그래서 저도 빤히 마주봅니다. 아이는 눈길을 거두지 않습니다. 슬쩍 사진기를 들어 두 장 찍어 봅니다. 그래도 빤히 바라봅니다. ‘머리 길고 수염도 기른 이상한 아저씨’라는 말을 혼자말로, 또 옆에서 놀이기구를 함께 타고 있는 동무한테 건네는 말로 자꾸 되뇌입니다. 숨바꼭질을 하다가 우리 옆 걸상 밑에 옹크리며 숨으면서도 쳐다봅니다. 할머니가 이제 다 쉬었다며 일어나서 다시 걸을 때에도 물끄러미 올려다봅니다.

 아저씨는 머리나 수염을 자라는 그대로 두면 안 되려나? 이 아이 집이나 둘레, 또 학교에서는 나이든 남자 어른이 모두 머리가 짧고 수염도 깨끗하게 밀기만 하려나?


.. 어머니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내 얼굴을 잊어버리지야 않았겠지? 사람들이 우리 세 식구를 보면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닳았냐고 말하곤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서로 떨어져 살아가고 있어. 아득하게 펼쳐진 사막 위를 헤어져 홀로 걷는 낙타 식구처럼 ..  (39쪽)


 도서관으로 와서 그림할머니와 여러 가지 그림책을 펼쳐놓고 함께 보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아까 손바닥 쉼터 아이 눈길이 잊히지 않습니다. 새삼스러운 눈길이 아닌 눈길입니다만, 왜 아이들은 어른을 바라볼 때 ‘이상하다’는 말을 꺼내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아이는 ‘남자가 왜 머리를 길러?’ 하고 묻고, 어떤 아이는 ‘수염을 왜 안 깎어?’ 하고 묻습니다. 이런 물음에 ‘남자는 왜 머리가 짧아야 해?’ 하고 되묻고, ‘수염을 깎아야 하는 까닭은 뭐지?’ 하고 되묻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하나같이 ‘어, 어.’ 하다가는 ‘남자니까.’ 하고 더 말을 잇지 못합니다.

 남자니까 머리를 짧게 하고 수염도 싹 밀어야 한다면, 여자니까 머리를 길게 두어야 하고 꼭 치마만 입어야 할는지. 아이들은 어찌하여 그 어린 나이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이렇게 한쪽 틀로 매이게 되는지.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렇게 가르치기 때문일까요.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여주는 모습이기 때문일까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이처럼 가르치기 때문일까요. 학교에서 남녀 선생님들이 보여주는 모습이기 때문일까요. 그림책과 동화책에서 보고, 텔레비전에서 보고, 어머니나 할머니 따라 함께 보는 연속극에서 똑같이 보고, 교과서에 실린 그림으로도 보면서, ‘남자 = 무엇’이어야 하고, ‘여자 = 무엇’이어야 하는 생각이 또렷하게 새겨진 채 조금도 안 바뀌는지요.


 (2) 그림이야기책 《낙타굼》


 그림이야기책 《낙타굼》을 읽습니다. 책에 나오는 ‘한구름’이라는 아이는 여느 아이와 견준다면 느릿느릿 말을 하거나 움직입니다. 구름이는 저한테 가장 알맞고 좋은 빠르기로 말을 하고 움직이건만, 둘레에서는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껴안지 못합니다. 나이든 교장 할머니는 아이이름을 ‘한굼’이라고 잘못 알아습니다. 여기에다가 구름이네 담임 선생이 “이야, 교장 선생님이 우리 구름이가 굼뜨다는 걸 알아보고 그렇게 말씀하셨나 보네.(10쪽)” 하고 말합니다. 구름이는 얼결에 ‘굼’이라는 딴이름을 얻습니다. 짓궂은 아이들은 사막을 걷는 낙타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나서 구름이한테 아예 ‘낙타굼’이라고까지 놀림 비슷한 딴이름을 지어 부릅니다.

 그러나 구름이는 자기를 굼이라고 부르나 구름이라고 부르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낙타라는 짐승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자기한테는 자기 이름이 있기도 하지만, 남들이 어떻게 부르거나 찧거나 자기 마음을 간직하면서 가꾸면 될 뿐입니다.


.. “먼 길을 건너는 일이 힘이 들기는 하지만 지겨운 적은 없었어.” 어린 낙타는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 위에서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줬어. 하루하루 별자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피고, 바람 냄새가 어떻게 다른지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굳이 지겨운 때가 있다면 그런 것들을 놓쳐서 방향을 잃어 헤맬 때지만, 그렇더라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아. 그때부터는 기다리는 거지. 기다리면 곧 찾아질 거라는 걸 믿으니까 ..  (53쪽)


 어머니는 없이, 아버지는 있는 둥 마는 둥하는 구름이입니다. 구름이한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고, 좁다고 할 만한 집입니다. 그래도 구름이는 싫어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아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마음을 느낍니다. 어쩌면, 이와 같은 마음으로 동무들을 바라보는지 모릅니다. 동무들 노는 품새를, 또 서로 복닥이는 품새를 가만히 바라보고 되새기는지 모릅니다.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눈길로, 어느 한 가지로 사람을 못박지 않는 마음으로, 조용하게 지내는 구름이가 아닐까 싶어요. 어느 어른이 이끄는 대로 가지 않는 구름이이고, 스스로 길을 헤아리고 찾는 구름이가 아니랴 싶습니다. 더 높은 자리를 바라지 않고, 더 큰 자리를 꿈꾸지 않으며, 지금 자기한테 가장 소중하며 아름다운 자리가 어디일까를 알고 싶은 구름이로구나 싶습니다.

 제 깜냥껏 느끼는 어머니와 아버지, 옆에서 늘 마주하면서 느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또 학교에서 자기한테 다가오는 모습으로 돌아보는 선생님들과 동무들입니다. 어떠한 물결에도 휩쓸리지 않고 있으니, 선생님이나 동무들이 보기에는 ‘거의 없는 아이’처럼 느껴진다고 할 터이나, 구름이는 늘 구름이 자리에 있습니다. 선생님들이나 동무들로서는 ‘구름이 자리가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 스스로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를 찬찬히 헤아리지 못하기에 구름이 자리를 못 보는지 모릅니다. 아이들 스스로 자기 자리가 어디일까 가만히 찾아보지 않기에 구름이 자리를 못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구름이는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제 마음속에서 풀지 못하는 응어리 하나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조용히 묻습니다. 이렇게 조용히 묻는 말에, 꿈인 듯 꿈이 아닌 듯, 낙타 한 마리가 찾아와서 넌지시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리고 구름이는 이 이야기를 곱새기고 되새기면서 자기 자리를 더욱 튼튼하게 추스르는 힘을 얻습니다.


 (3) 반가움과 아쉬움


 그림이야기책 《낙타굼》을 덮고 나서 글쓴이 머리말을 읽습니다. 글쓴이 박기범 님은 “내가 닮고 싶은 아이들의 눈길과 목소리, 아이들의 느낌으로 한바탕 즐겁게 놀아” 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래도 이 책 《낙타굼》은 곧게 제 길을 걸어가면서 외롭지 않은 아이한테 바치고 싶은 선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아이를 외롭겠구나 느끼는 동무나 어른이야말로 정작 자기 외로움을 모르는 채 제 삶을 놓치며 헛구름을 잡고 있음을 들려주고 싶어서 내어놓은 선물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언뜻선뜻 느끼기로는 조금 어두워 보이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검정이라고 어둡거나 하양이라고 밝으란 법이 없습니다. 검정이 밝기도 하고 하양이 어둡기도 합니다. 제자리에서 제 모습을 가꾸고 있으면, 어떠한 빛깔이라도 밝음을 고이 간직합니다. 제자리가 아닌 남 자리를 자꾸 넘보거나 기웃거리면, 어떠한 빛깔이라도 어두움이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이야기책 흐름을 헤아리건대, 그림이 지나치게 어둡지 않나 싶습니다. 어린이 한구름은 곧게 제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데, 이 어린이를 바라보는 우리들 어른 눈길이 한켠으로 굽은 채 어둡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조금 더 가볍게, 한손에 얹힌 짐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바라보고 껴안을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껴안을 수 있지만, 아이들이 우리 어른들을 껴안아 주지도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을 껴안으려는 ‘위에 올라선 생각’이 아니라, 아이한테 껴안기기도 하는 ‘같은 자리 생각’으로 사잇그림을 넣었다면, 그림이야기책 《낙타굼》이 담은 맛이 한결 살아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걷지 않으면 뭘 할 건데?
- 곧 찾아질 거라는 걸 믿으니까.
- 참을 수 있는 거라지.
- 놀리려던 건 아니고 …… 재미있어 그런 거였지.
- 뜻 같은 거야.



 그리고, 글쓴이 박기범 님 글을 살피면, ‘것(거)’이 지나치게 자주 보입니다. 입말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이 말투를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어쩌다가 한두 번 쓰이는 ‘것(거)’이 아니라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튀어나오는 ‘것(거)’은 외려 읽는 흐름을 끊어 놓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교과서와 인터넷과 방송 말씨에 길들어 ‘것(거)’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데나 툭툭 집어넣는다고 하여도, 아이들이 읽을 책에 글을 쓰는 분으로서는, 자기 말씨를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다스려 주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즐겁게 읽은 책 하나, 가슴에 살짝 안아 보았다가 책꽂이에 얌전히 꽂아 놓습니다. (4341.5.2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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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 만세 아이세움 그림책 저학년 1
후쿠다 이와오 지음, 김난주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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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실에서 방귀 뀐 아이, 학교, 글쓰기
 [그림책이 좋다 44] 후쿠다 이와오, 《방귀 만세》



- 책이름 : 방귀 만세
- 글ㆍ그림 : 후쿠다 이와오
- 옮긴이 : 김난주
- 펴낸곳 : 아이세움(2001.4.10.)
- 책값 : 7500원



 (1) 방귀

 한창 공부를 하고 있던 1학년 3반 교실에 뿌웅 하는 소리가 납니다. 방귀 뀐 아이를 놀리고 싶어하는 짝꿍은 벌떡 일어서서 아무개가 뀌었다고 일러바칩니다. 아이들은 웅성웅성 이 말 저 말 나옵니다. 선생님은 “얘들아, 조용히 해야지. 방귀 좀 뀌면 어때서?” 하다가는 “방귀는 건강하다는 증거다. 소리가 큰 것도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이야.” 하고 말합니다만, 방귀 뀐 아이는 그예 울음을 터뜨립니다.

 이렇게 되면 선생님이나 아이들이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님 말마따나 ‘방귀 좀 뀌면 어떠냐’ 싶지만, 정작 자기도 모르게 방귀를 뀌게 된 사람이나, 둘레에서 수군수군거리는 사람, 그리고 일러바친 사람한테는 이와 같은 말이 얼마나 씨가 먹힐는지요.

 할아버지도 뀌는 방귀요 어머니도 뀌는 방귀요 고양이도 뀌는 방귀입니다. 배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하니까 나오는 방귀입니다. 보리밥을 먹으면 보리 방귀를, 고구마를 먹으면 고구마 방귀를, 감자를 먹으면 감자 방귀를 뀝니다. 고기를 먹은 사람한테는 고기 방귀가 나옵니다. 저마다 먹은 대로 방귀가 나오고, 저마다 몸에서 삭여지는 대로 냄새가 납니다. 소리는 큰데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방귀가 있고, 소리는 없는 듯한데 냄새가 구린 방귀가 있습니다. 혼자 뀌면 아무 일이 없으나, 여럿이 있는 자리라면 크게 달라지는 방귀입니다. 혼자라면 마음 놓고 뀔 터이나, 혼자가 아니면 속이 끓어도 참고 또 참아서 답답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밖에서 밥을 자주 사먹으니 방귀도 자주 뀌고 냄새도 많이 납니다. 시골집에서 손수 일군 밥을 해먹는 사람이라면 방귀도 그다지 나오지 않으나, 나온다 한들 냄새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도 느끼지만, 배가 아닌 혀에 달콤한 밥을 잔뜩 먹게 되면 언제나 구린 방귀가 나옵니다. 누런쌀과 콩으로 지은 밥에다가 푸성귀를 반찬 삼아서 알맞춤하게 먹으면 방귀가 거의 나오지 않을 뿐더러, 가끔 나와도 냄새를 못 느낍니다.


 (2) 학교

 한 아이가 방귀를 뀌면 교실은 공부를 하기 힘들어집니다. 냄새가 난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법석이 되기 일쑤이고, 방귀 뀐 아이를 놀려대느라, 잘못해서 방귀를 뀐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집니다. 선생님으로서도 차분하게 아이들을 다스리기 쉽지 않습니다. 글쎄, 우리 나라 수십만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어떻게 마주하실는지요. 제가 초중고등학교 때 겪은 교사들 가운데, 방귀 소리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면서 서로 깊이있게 이야기를 나눈 분들이 있었나 떠올려 봅니다. 거의 우격다짐으로 우리를 내리눌렀는데, 그런 가운데에도 몇몇 분들은 뜻있는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거나 이야기를 건네려 했습니다. 그러나, 뜻있는 말을 들려주어도 곧이듣거나 새겨듣는 동무가 많지 않았다고 떠오릅니다. 장난으로 방귀 뀐 아이는 반죽음이 되도록 몽둥이찜질이 되었고, 장난 아닌 방귀를 뀐 아이는 손가락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 “선생님 집에 미키라고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그 녀석도 방귀를 뀐단다.” “에, 정말요?” “거짓말이죠?” “고양이가 어떻게요?” 싱긋싱긋 웃는 선생님의 눈이 가늘게 붙어 버렸습니다. “살아 있는 생물은 다들 방귀를 뀌는 거야. 방귀에 관한 결론이다. 다들 알았냐?” 선생님은 뿌듯해하며 수염을 만지작거렸습니다 ..  (21쪽)


 그림책 《방귀 만세》에 나오는 선생님은 아이들이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듣습니다. 선생님도 아이들한테 찬찬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억지스럽게 짓누르거나 억누르거나 다그치는 목소리가 없습니다. 일러바친 아이는 짓궂었지만, 속으로까지 얄궂지 않습니다.

 문득, 우리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학교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또 우리네 교실도 이처럼 살아숨쉬거나 싱싱한 기운이 넘쳐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선생님은 방귀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자, 아이들과 함께 ‘방귀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거리낌없이 주고받은 다음, ‘방귀를 글감 삼아 글 하나 써 보자’고 아이들한테 말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러한 선생님 말을 고이 받아들여서 즐겁게 글쓰기를 합니다.


 [일러바친 아이 글 : 방귀 조회]
 어제 아침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의
 긴긴 얘기를 듣고 있는데
 방귀가 나왔다.
 엉덩이도
 심심했나 보다.
 끝.



 이제는 대학교 입시에서 논술이 중요하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도 ‘글쓰기’를 한다고 그럽니다만, 정작 아이들이 자기 마음을 열거나 나누면서 세상 보는 눈을 기르는 글쓰기는 자취를 감춥니다. 마음을 살찌우거나 가꾸면서 아이들 삶도 살찌우거나 가꾸게 되는 글쓰기도 차츰 사라집니다. 오로지 ‘논리와 이론을 담아 쓰는 글’인 논술만 판칩니다. 글 잘 쓰는 법을 다루는 책이 나오기는 하나, 글을 왜 잘 써야 하는가를 헤아리거나 돌아보도록 이끄는 이야기는 거의 안 담기거나 한두 줄 잠깐 다루고 그칠 뿐입니다.


 [방귀 뀐 아이 글 : 꽃 방귀]
 선생님은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방귀를 뀐다고 했다.
 그렇다면 풀이나 나무나
 꽃도 방귀를 뀔까?
 물푸레나무의 맛있는
 꽃향기는 꽃이 뀐
 방귀 냄새일까?


 일본은 ‘초중고등학교 글쓰기 역사’가 백 해가 넘었습니다. 일찍부터 아이들한테 자기 삶을 담은 글을 쓰도록 학교에서 교사들이 이끌었습니다. 꾸밈이나 치레가 아닌 자기 속생각을 있는 그대로 담도록 이끌었습니다. 대학교 입시 때문에 하는 글쓰기가 아닙니다. 이리하여 교사들은 자기가 맡은 아이들이 어떤 형편에서 살고,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학교를 다니는가를 가만히 돌아볼 수 있고, 아이들도 쉬 털어놓지 못하는 마음앓이를 속시원하게 쏟아낼 수 있습니다.

 《방귀 만세》라고 하는 그림책에서 이러한 일본 글쓰기 문화를 살며시 들여다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이끄는 길을 잘 따르는 한편, 저희들 나름대로 자기 길을 새롭게 열거나 찾아나섭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한 고비를 겪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여태껏 살아오면서도 미처 못 느끼거나 못 본 대목을 아이들한테 배우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3) 아쉬움 한 가지

 그림책 《방귀 만세》를 보면, 아이들이 자기 집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때 어머니는 아버지와 아들 시중을 들고, 아버지는 신문을 읽으며 앉은 자리에서 밥상을 받고, 옆에는 아들이 앉아 있습니다. 어머니만 따로 나온 그림에서도 어머니는 ‘집에서만 있는 사람’인 듯 그려집니다. 이와 같은 그림결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벗어나기 힘든 굴레일까요. 아니, 이렇게 그려야만 우리 삶을 담아내는 셈일까요.

 집안일이야 아버지가 할 수도 있고 어머니가 할 수도 있습니다. 바깥일이야 둘 모두 할 수 있고 어느 한쪽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일이 더 높지 않고 어느 일이 더 낮지 않습니다. 다만, 한쪽으로만 굳어지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성평등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이러한 그림결은 곰곰이 살피면서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4341.5.1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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