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 원폭 2세 환우 김형률 평전
전진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54 ― ‘원폭피해 2세 환우’한테 인권은 없었네
 : 전진성 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김형률 평전)


- 책이름 :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 글 : 전진성
- 사진 : 윤정은
- 펴낸곳 : 휴머니스트(2008.5.19.)
- 책값 : 12000원



 (1) 사라지는 책


 지난주에 바람 좀 쐬려고 서울로 헌책방 나들이를 했습니다. 이때 서울 노고산동에 있는 ㅅ헌책방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할머니 작품집》이라는 두툼한 그림책 하나를 보았습니다. “문화관광부 복권기금 지원사업”으로 나왔다고 책겉에 글씨를 박아 놓고 있던데, 2004년에 비매품으로 나왔습니다.

 2004년이면, 몇 해 안 되었기에, 그때 이런 책이 나온 줄 왜 몰랐을까 생각하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를 합니다. 이 책과 얽혀서 아무런 기사가 뜨지 않습니다. 비매품으로만 찍고 기자한테도 돌리지 않았을까요. 기자한테 보내어 주기는 했으나 기사로 다루지 않았을까요. 광주 퇴촌면에 자리한 〈나눔의 집〉에 가야만 구경할 수 있을까요.

 문과관광부에서 책 내는 돈을 도와주었다면, 출판사 한 곳에서 일을 맡아서 꾸며낸 다음, 새책방에도 집어넣어서 사람들이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찾아보고 읽으면서 하나하나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할 수 있지 않았을는지 궁금합니다.


.. 합천에서 많은 사람들이 히로시마로 건너갔던 것은 분명히 일제와 그 하수인들의 수탈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합천사람들의 고통은 그들을 히로시마로 내몰고 귀향 후 무책임하게 방치해 온 역사적 전말과 관련지어 규명되어야 하며, 국가 차원에서 응분의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 분명히 역사의 피해자들인데도 이들의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무책임한 사회라면 우리는 과연 이런 곳을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자발적인 소속감을 가질 수 있을까? ..  (148쪽)


 지난 2002년, 송건호 님 전집이 스무 권으로 나오면서, 그나마 몇 가지 시중에 있던 ‘낱권으로 된 송건호 님 책’은 모두 판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40만 원에 이르는 전집을 사든지, 아예 읽지 말든지 하라는 노릇입니다. 그래도 헌책방을 찾아가 보면 송건호 님 책은 어렵잖이 만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나저나, 아직 절판이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재판을 찍을 일이 없어 보이는 ‘송건호 전집’이 절판이 되어 버리면, 이제는 영영 송건호 님 책을 시중 새책방에서는 구경해 볼 수 없게 되고 말는지요. 송건호 님 책을 낱권으로 만날 길은, 또는 값싸고 가벼운 판으로 송건호 님 책을 읽을 수 있는 길은, 앞으로도 없을까 모르겠습니다.


.. 일본의 원폭피해자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한국인들이 겪은 식민지 지배와 전후 방치의 고통만큼은 알지 못했다 …… 형률 씨는 자국의 역사적 과오를 덮으려 하는 일본 정부에 대해 정당한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책임 소재를 일본 정부로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책임은 미국 정부에게도, 그리고 한국 정부에게도, 또한 한국의 시민사회에도 있다. 심지어는 한국 원폭피해자들 자신에게도 있다 ..  (89∼90쪽)


 지난 2006년, ‘리영희 저작집’ 열두 권이 나올 때, 리영희 님 책도 주루루 절판이 되어버리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걱정과 달리 다른 책이 절판되지는 않았습니다. 안타까이 품절을 걷다가 절판까지 이어지고 만 《스핑크스의 코》라는 책도 있지만, ‘리영희 저작집’ 말고도 몇 가지 책은 시중 새책방에서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얄궂게도 ‘리영희 저작집’ 열두 권이 먼저 품절이 되어버렸습니다.

 말로만 품절인지, 속내로는 절판인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다만, 송건호 전집과 마찬가지로 ‘리영희 저작집’도 앞으로는 홀가분하게 만날 수 없겠다는 생각은 뭉게뭉게 듭니다.


.. 그는 여기서 문제 해결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선지원 후규명’이라는 해법이었다. 날로 악화되는 환우들의 건강은 면밀한 조사와 법적 공방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순수한 인권 차원에서 정부 차원의 의료 원호 사업이 실시되어야 한다 …… 그러나 인권위는 ‘정책권고안’을 제출하지 않았고, 주무 부처인 복지부는 원폭 2세에 대한 어떠한 실태 조사도 실시하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  (211쪽)


 지난 1999년, ‘문익환 목사 전집’ 열두 권이 삼십만 원이라는 값을 달고 나왔습니다. 아직까지 이 책은 품절은 안 된 듯 싶습니다. 그러나 1999년 값으로 열두 권 삼십만 원이란 엄두를 내기 어려웠습니다. 어느덧 열 해 가까이 지난 2008년에 와서 헤아리면 열두 권에 삼십만 원은 그다지 안 비싼(?) 값입니다만, 주머니를 열기가 벅차기는 매한가지입니다.

 1997년에 나온 ‘예용해 전집’ 여섯 권을 생각해 봅니다. 1997년 값으로 여섯 권에 십이만 원이었습니다. 예용해 선생이 살아온 발자취를 곱씹어 본다면, 당신이 펼친 이야기처럼 당신 책도 수수한 아름다움과 멋을 듬뿍 풍기면 좋으련만, 글쎄요.

 한국땅에서 한국 얼과 넋을 빛낸 분들 책을 한 자리에 묶어내는 일은, 오히려 무덤을 파는 일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는지. 몸뚱이는 흙으로 돌아갔어도 그분들 넋을 고이 이어받아서 우리 삶을 가꾸도록 하려는 몸짓으로 전집을 묶었을 텐데, 이 전집들이 받는 대접은 하나같이 겉치레와 껍데기일 뿐, 이 전집들에 담긴 이야기가 알알이 소담스럽고 조촐하게 우리 삶에 스며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르신을 기리고자 야무진 양장에 비싸구려 종이에다가 단단한 종이상자를 씌워 주는 일은 반갑기는 하지만, 무덤에 금을 바르기보다는 살아서 굶주리는 사람들 앞에 밥그릇 하나 골고루 놓아 주는 일이 한결 반가웁지 않으랴 싶습니다.


.. 형률 씨는 원폭 2세 환우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할 사안이다. 현률 씨는 단지 사회복지 차원에서 구호를 호소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부채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였다 ..  (233쪽)


 ‘원자폭탄 피해자 2세 환우’ 김형률 님 이야기를 담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를 읽고 나서, 그러면 ‘김형률 개인을 넘어서 원자폭탄 문제란 무엇이고, 원자폭탄 피해자 이야기는 얼마나 우리가 찾아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자료를 뒤져 보았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이쪽 일에 눈길을 두면서 자료를 챙겨 놓았기 때문에, 이 책도 보고 저 책도 살핍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책이 있으니, 더 읽어 보면 좋습니다’ 하고 소개해 보려고 인터넷 새책방 목록을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만화책 《맨발의 겐》을 빼놓고는 절판이나 품절입니다. 죽은 김형률 씨가 그토록 아끼고 되읽었던 《한국의 히로시마》라는 책마저 2003년에 처음 나왔음에도 벌써 절판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진작 절판이 되었는데, 이참에 비로소 알게 된 일인지 모릅니다만.




 (2) 사라지는 역사


 나이를 거슬러서, 고등학교 적을 떠올려 봅니다. 1991년부터 1993년. 이 세 해 동안 찾아서 읽은 책을 헤아려 봅니다. 고1이 된 1991년 2월께, 방송 소식으로 ‘1993학년도 대입시험은 학력고사에서 수능과 논술로 바꾼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과목을 배우던 그해부터 교과서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덕분(?)에 같은 학교를 마친 우리 형이 쓰던 교과서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물려받을 수 없었고, 모두 새로 사야 했습니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시험으로 바뀌기만 하지 않고, 교과서에서 쓰던 말도 한꺼번에 바뀌었습니다. ‘타제석기’와 ‘마제석기’는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뗀석기’와 ‘간석기’가 쓰였고, ‘지석묘’ 또한 사라지면서 ‘고인돌’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함께, 교과서 지식만으로는 수능시험을 치를 수 없으니, 교과서 아닌 교양서적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주문이 내려왔습니다.

 교과서가 바뀐 탓에 살림돈이 많이 나가 우리를 괴롭히기는 했지만, 이 소식은 ‘교과서 아닌 책을 학교로 마음껏 가지고 가서 읽어도 되는구나’ 하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역사 시간에 박지원을 가르쳐 주면, 책이름을 잘 새겨 놓았다가 박지원이 쓴 글과 책을 책방을 뒤져서 찾아 읽었습니다. 교과서에는 안 나오는 이름이었지만, 박영문고에는 ‘박지원ㆍ이옥’ 소설이 함께 묶여 있었기에, 또다른 옛 선비 글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교과서 지식으로는 ‘박지원 = 열하일기’였지만, 저는 구태여 《열하일기》라는 책을 손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정약용 = 목민심서’로 외우기 싫어서 《목민심서》를 읽고 《흠흠신서》를 읽었습니다. 마침 한문 공부를 꽤 깊이 하였던 터라, 박지홍 님이 쓴 《한문입문》까지 읽으면서 《목민심서》를 아예 원본을 놓고 새기기도 했습니다.


.. (박정희) 군사정권은 국내 원폭피해자들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왜? 민주적 정통성이 결여된 군사정권은 주변국의 지지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우두머리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관동군에 충실히 복무했던 둘도 없는 친일파가 아니었던가 ..  (83쪽)


 현대역사를 가르치며 ‘박은식’이 나오면 《독립운동지혈사》를 찾아 읽었고, ‘신채호’가 나오면 《조선상고사》를 찾아 읽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책은 시중 새책방에 없었습니다. 박은식 님 책은 박영문고와 서문문고로 있었으나, 헌책방에서 겨우 찾았고, 신채호 님 책도 삼성문화재단문고로 나온 판을 헌책방에서 가까스로 찾아서 읽었습니다. 김동인이든 김유정이든 이효석이든 나도향이든 안수길이든, ‘이름 = 작품’이 아닌 ‘이름 → 책’으로 바꾸어서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 놓은 다음, 반드시 찾아서 읽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틈틈이 소지품 검사를 하면서 ‘교과서 아닌 책’을 잔뜩 꺼내는 제 책을 압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수능시험을 치르려면 교과서 아닌 책을 읽어야 한다면서요?’ 하고 대꾸를 하면서 국어 교사나 역사 교사 손을 거쳐서 모두 돌려받았습니다.


.. 원폭 이전 히로시마는 일본에서 제일 가는 군사도시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은 히로시마에서 승선했고, 메이지 천황은 히로시마를 7개월 간 임시수도로 삼고 육해군을 통솔하는 최고 사령부인 대본영을 히로시마성에 설치했다 …… 이후 반세기에 걸쳐 히로시마는 아시아 침략의 거점으로 크게 번창했다 ..  (115쪽)


 나중에 우리가 꿈꾸던 대학교를 속으로 읊으면서 ‘그 학교 그 학과에 아무개 교수가 있다더라. 우리가 그곳에 가려면 그 교수가 쓴 책은 읽어야 하지 않겠니?’ 하면서, 강만길 님이 쓴 《한국현대사》를 읽고, 《한국의 역사인식》 상하권을 줄줄 외면서, 수업을 듣다 말고 선생님한테 여쭙곤 했습니다. 교과서에는 안 나오지만 수능과 본고사 보기글로는 나오는 고은, 염무웅, 최원식, 백낙청, 김윤식, 김현 같은 사람들 책도 읽어나가면서 이들이 비평하고 소개하는 사람들 책도 가지치기가 되어서 저절로 따라 읽게 됩니다.

 이러는 동안 이오덕, 권정생, 이원수를 알게 됩니다. 성내운, 고정희, 최현배, 박완서, 홍명희, 황석영, 김정한, 천승세를 읽게 됩니다.

 교과서 역사에는 왜 ‘현대 역사가 이리도 짧게 나올까’ 갸웃갸웃하고, 두루뭉술하게 스쳐 지나가는 친일부역자와 독재정권 문제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중간시험과 기말시험, 또는 수능시험에서 만점을 받거나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하더라도 ‘역사를 안다’고 할 수 없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점수에서는 조금 낮은 점수, 때로는 많이 낮은 점수를 받더라도, 내 땅에서 내가 살아가는데 내 삶터 발자취를 내 스스로 알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 원폭이 차세대에 끼치는 영향을 인정하는 것은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미국의 핵무기에 대해 비판하도록 촉구하는 운동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일본 피폭 2세들은 이 정도 모험을 감수할 만큼 사명감이 투철하지 못하다. 다만, 자신들의 권익에 민감할 뿐이다 ..  (137쪽)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에는 시험이라는 굴레에서 홀가분하게 풀려납니다. 이때부터는 거리낌없이 갖가지 책을 더 깊이 찾아나섭니다. 이토 다카시라는 일본사람이 쓴 《사할린 아리랑》과 《종군 위안부》라는 책을 만나면서, 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이분들, 사할린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분들이나 한국땅에서 제 모습을 숨긴 채 울어야 하는 분들 삶과 아픔을 한 줄로도 적바림하지 않을 수 있는지 짜증이 일었습니다. 구와바라 시세이라는 일본사람이 쓴 《미나마따의 아픔》이나 《촬영금지》나 《보도사진가》라는 책을 만나면서, 왜 한국에서 기자나 사진작가라고 하는 놈들은 우리 근현대사를 이렇게 멀찌감치 에둘러가면서 겉멋만 잡고 있는가 하면서 주먹을 파르르 떨었습니다.

 이러는 동안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라는 책을 만납니다. 한국외대 구내서점에서 일할 적에는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라는 따끈따끈한 책이 나온 모습을 보며 덥썩 껴안습니다. 《심심해서 그랬어》 같은 그림책은 아이들이 볼 그림책이라기보다 어른이 함께 보아야 할 그림책이라고 처음 느낍니다. 《몽실 언니》나 《하느님의 눈물》이야말로 《우리들의 하느님》 같은 책보다 훨씬 더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까이할 책임을 느낍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대로 학교교육에 파묻히다가는, 책이 아닌 교과서 달달 외우며 살다가는, 교과서가 마치 책이라도 되는 듯 잘못 아는 삶을 고치지 않다가는, 이대로 시험점수에 노예처럼 휘둘리면서 ‘성적표 숫자가 자기 자신을 말하기라도 하는 듯’ 엉터리로 알고 있다가는, 사람도 망가지고 삶터도 망가지고 이 나라도 망가지겠다고 느낍니다.


.. (형률 씨가) 무심코 들춰본 진료기록부에서 그는 한 편의 의학 논문을 발견했다. 〈면역글로불린M의 증가가 동반된 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병을 다룬 논문이 아닌가! 환자인 자신도, 그리고 보호자인 부모님도 알지 못한 채 발표된 의학 논문이었다. 1995년 당시 자신에게 병명을 알려주었던 주치의가 형률 씨의 혈액을 채취하여 검사한 결과를, 더구나 보호자가 낸 검사비로 이루어진 것인데도, 아무런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논문으로 발표한 것이었다. 형률 씨는 엄청난 소외감을 느꼈다. 한낱 실험 대상으로 전락한 자신의 몸! ..  (54쪽)


 그렇게 ‘누군가 없애거나 지우려고 애쓰는’ 참된(?) 우리 발자취를 찾아나가던 어느 날, 서울 홍제동 ㄷ헌책방에서 《핵의 아이들》이라는 책을 만납니다. ‘한국 원폭피해자 2세’가 어떻게 지내는가를 돌아본 조그마한 책입니다. 《핵의 아이들》을 써낸 박수복 님은 1975년에도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라는 책을 펴내어 ‘한국 원폭피해자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핵의 아이들》은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에서 소개한 원폭피해자들이, 그 뒤 열 해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가를 다시 찾아가서 만난 이야기로 묶었습니다.

 그렇지만 때가 때였던 만큼, 원폭피해자는 ‘여느 장애인보다 더 고달프고 아픈(?)’ 굴레에서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 왜 아픈지, 무엇 때문에 아픈지 알 길이 없었고, 아파도 병을 다스릴 약값을 댈 수 없었으며, 바로 코앞에 떨어진 밥과 집 문제마저 풀기 어려웠습니다. 1975년에 낸 책에 붙인 이름처럼, ‘소리도 없’고 ‘이름도 없’는 삶이라고 할까요. ‘소리를 내도 들어 주는 사람 없’고, ‘이름이 없으니 알아주려는 사람도 없’는 삶이라고 할까요.

 박수복 님은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라는 책에서, 원폭피해자들 입을 갈음하면서 “한국피폭자들의 현존이야말로 현대의 전쟁이 무엇이며, 과학무기가 무엇인가를 그들이 온 생애를 통한 고통과 그들의 목숨으로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30년을 버텨 온 것처럼 앞으로도 버텨 갈 것이다. 그리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을 것이다. 장구한 미래까지도 결코 마멸되지 않는 흔적으로 그 고통은 메아리칠 것이다(25쪽)” 하고 외칩니다.

 취재를 하면서 울고, 글을 갈무리하면서 울던 그 마음이, 시중에서 사라지고 헌책방 책시렁 한켠에서 조용히 먼지를 먹고 있던 책을 우연히 알아보고 읽은 한 사람 마음으로도 이어져서, 서른 몇 해가 흐른 지금까지도 쩌렁쩌렁 울립니다.




 (3)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책


.. 최소한의 인간다움도 유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많은 원폭 2세 환우들과 원폭피해자 가족들을 더 이상 방치한다는 것은 국가권력의 폭력이며 인권유린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  (김형률/288쪽)


 ‘한국 원폭피해자 2세 환우’ 김형률 님은 1970년 7월 28일에 태어나 2005년 5월 29일에 숨을 거둡니다. 서른여섯을 채우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피해자인 몸으로 태어나서 아픔 한 번 달래 보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하다가 죽고 만, 원폭피해자 2세 환우 가운데 하나인 김형률 님입니다.

 형률 님 형제가 모두 아픔에 시달리지는 않습니다. 다른 원폭피해자 2세들 가운데에도 몸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김형률 님은 ‘원폭피해자 2세 환우’라고 해서 ‘환우’라는 말을 뒤에 꼭 붙였습니다. “저와 같은 원폭 후유증을 앓고 있는 원폭 2세 환우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면 건강한 원폭 2세들도 유무형의 사회적인 편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김형률/38쪽)”한다고 말한 김형률 님. 그렇지만, 문제는 ‘튼튼하게 잘 살아가는 원폭 피해자 2세’를 뱀눈으로 바라보는 사회에 있습니다. 더욱이, ‘아파서 힘겹게 겨우 살아가는 원폭 피해자 2세’를 아예 ‘없는 사람’인 듯 구석으로 내모는 우리 사회야말로 문제입니다.


.. 생계 지원이나 박물관 건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환우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장치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 공세나 학술적인 호기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  (254쪽)


 하루하루 더 골이 깊어가는 사회 푸대접을 바라보고 있자면,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처럼 어렵다는 말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부자가 가난한 이 삶을 돌아보기 어려웁듯, ‘몸이 안 아픈’ 사람이 몸 아픈 사람 삶을 돌아보기도 어려울까요.

 피해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받아 시름시름 앓거나 괴로워하는 사람 삶을 헤아리기는 꿈일 뿐일까요. 지식으로는 알고, 소식으로는 들어도, 그저 머나먼 딴 나라 이야기로만 느껴질 뿐인가요.


.. 아프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운동을 하는 이유였다. 아픔을 종식시키는 것은 그 운동의 목표였다. 그는 자신의 운동을 ‘인권회복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  (222쪽)


 모자라나마 이런 책이 나왔고, 아쉬우나마 원폭피해자 2세 환우 이야기를 다루며, 늦게나마 이 책 하나로 우리 스스로 우리 눈길에 담아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만, 이제 첫발입니다. 첫걸음입니다. 김형률 님이 세운 ‘한국원폭 2세 환우회’는 어떻게 보면 첫발도 아닌지 모르거든요. 애써 첫발을 떼려고 했지만, 첫 발걸음을 떼려는 김형률 님과 이웃 아픔이들을 밀어서 넘어뜨린 사람이 숱하게 많았어요. 2004년 여름날, 보건복지부 질병정책과에서 ‘원폭피해자 담당 사무관’하고 만났을 때, 담당 공무원은 “현재 한국 원폭2세 환우회에 가입한 회원수가 적어 조직을 인정할 수 없으며, 그저 김형률이라는 개인의 민원으로 접수하겠다고 못박았(169쪽)”답니다. 그리고, “박 사무관은 원폭 2세 환우들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199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국 원폭피해자 실태 조사〉에서 원폭 후유증 자녀수를 2300여 명이라고 밝혔던 사실에 대해 그는 ‘모르는 사실’이라고 일축했(170쪽)”고요.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알아보고도 눈을 감았습니다. 알고 난 다음에는 팔짱을 끼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입니다. 공무원부터 여느 시민까지 한결같습니다. (4341.6.20.쇠.ㅎㄲㅅㄱ)

   
 
 [더 찾아볼 만한 책]

㉠ 원자폭탄 피해자 실태 조사자료
박수복,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창원사,1975)
박수복, 《핵의 아이들》(한국기독교가정생활사,1986)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인 원폭피해자(실태조사보고서)》(한국교회여성연합회,1984)
한국교회여성연합회ㆍ사회사진연구소, 《그날 이후》(한국교회여성연합회,1989)

㉡ 원자폭탄 피해자 수기ㆍ증언
존 허시/이부영 옮김, 《히로시마의 증인들》(분도출판사,1986)
오꾸다 사다꼬/조형균 옮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고》(생각사,1982)
표문태 엮음, 《버림받은 사람들》(중원,1987)
오사다 아라다 엮음/박준희ㆍ홍현길 옮김, 《원폭의 어린이》(학문사,1996)

㉢ 원자폭탄과 평화ㆍ환경 문제
칼 야스퍼스/김종호ㆍ최동희 옮김, 《원자탄과 인류의 미래》(사상계사,1963) 상하 권
간샤 다에꼬/조형균 옮김, 《아직도 늦지 않다면》(백재문화사,1991)
박해전 옮김, 《반핵과 제3세계》(시인사,1986)
히로세 다카시/김원식 옮김, 《위험한 이야기》(푸른산,1990)
리영희ㆍ임재경 엮음, 《반핵, 핵위기의 구조와 한반도》(창작과비평사,1988)
고승우ㆍ윤범모, 《반핵과 미술》(춘추사,1989)
표문태 엮음, 《아시아를 비핵지대로》(일월서각,1987)
윌프레드 버체트/표완수 옮김, 《히로시마의 그늘》(창작과비평사,1995)
이안 부루마/정용환 옮김,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한겨레출판,2002)
이치바 준코/이제수 옮김, 《한국의 히로시마》(역사비평사,2003)

㉣ 원자폭탄과 얽힌 문학ㆍ예술 작품
신기활, 《핵충이 나타났다》(친구,1989)
앨런 니들/박정은 옮김, 《핵시대의 우화》(현암사,1994)
김원일, 《히로시마의 불꽃》(문학과지성사,2000)
구드룬 파우제방/함미라 옮김,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보물창고,2005)
나카자와 게이지/김송이ㆍ이종욱 옮김, 《맨발의 겐》(아름드리미디어,2000) 10권

㉤ 원자력발전소 폐기장 문제와 얽힌 나라안 문제
전재진, 《핵, 그리고 안면도 항쟁》(충남저널,1993)
박영복, 《굴업도》(학민사,1995)

㉥ 일본은 아무 잘못 없으며, 원자폭탄 피해자이기만 하다고 외치는 모순덩어리
나스 마사모토ㆍ니시무라 시게오, 《히로시마》(사계절,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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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지기 식구들이 살고 있는 일산으로 가고자, 동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갑니다. 용산역에 내려서 뒷간에 한 번 들릅니다. 종로3가역에 내려서 뒷간 다시 한 번 들릅니다. 용산역에서 내려 ‘표 끊고 나가야 하는 바깥’이 아닌, 안쪽에 하나 있는 뒷간으로 가자면, 인천에서 서울 가는 쪽으로 나 있는 계단 두 곳 가운데 뒤쪽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종로3가역에서 뒷간을 찾아가자면 1호선 타는곳 맨끝으로 가거나 5호선 타는곳 맨끝으로 가야 합니다. 사이에는 뒷간이 없기에, 길을 잘못 들면 한참 걸어가야 합니다. 낮이라서 전철은 뜸하게 옵니다. 뜸하게 오는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서 있습니다. 어느 전철역이든 앉을 자리는 거의 없습니다.

 서울역부터는 땅밑으로 달립니다. 땅밑 전철, 지하철입니다. 땅위에서 달릴 때에는 철길 긁는 소리가 그리 크게 안 들렸으나, 땅밑으로 들어오면 대단히 크게 들립니다. 안내방송 소리도 크게 들립니다. 이에 따라 지하철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목소리는 한결 높아집니다. 손전화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목소리를 높입니다. 형광등은 파르르 떨리기도 하여 책을 읽던 눈이 아파서 한동안 책을 덮고 눈을 감습니다.

 전철칸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물결은 늘 있습니다. 그렇게 움직인들 얼마나 더 빨리 갈 수 있으랴 싶지만, 이렇게 요리조리 움직이는 분들은 다문 몇 초라고 아끼고 싶으실 테지요. 이리하여 사람으로 꽉 차 빈틈이 없어도 밀치고 쑤시며 지나가려고 할 테지요. 으레 밀치고 쑤시고 지나다녀야 했기에, 널널할 때에도 애꿎은 사람을 밟거나 치거나 밀어도 미안하다는 느낌 한 번 없을 뿐더러, 미안하다는 말 한 번 없을 테지요.

 간첩을 신고하고 반체제를 꾀하는 사람을 신고하라는 안내방송은 2008년 여름을 접어들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즈음에도 간첩이라는 사람이 있으려나. 얼마 앞서 시청 앞에서 ‘대북침투공작원 집회’가 있었는데, 그 간첩이라고 하는 사람은 북녘에서 남녘으로 내려보내기도 했지만, 남녘에서도 북녘으로 올려보냈는데, 남이고 북이고 왜 이리 뒤에서 꿍꿍이셈만 헤아렸을까. 왜 서로서로 평화와 자유와 민주와 평등으로 감싸면서 돌보려는 마음을 키우지 못했을까. 반체제라 한다면, 그제(6월 16일) 나온 여론조사에서 12% 지지율까지 떨어진 대통령 이씨를 꾸짖거나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반체제가 되려나. 촛불모임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반체제이려나. 아니면, 대통령 이씨를 꾸짖지 않는 사람들이 반체제가 되려나. 촛불모임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반체제가 되려나.

 3호선 구파발역을 지날 무렵부터 보이는 바깥세상. 지하철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바깥세상은 온통 아파트 새로 짓는 공사터 세상. 북한산을 휘감아 주는 아파트 세상. 모두들 아파트가 좋다고 하니 아파트만 이렇게 지어댈 터이지. 모두들 자가용을 좋아하니, 아무리 기름값이 치솟아도 자가용 씀씀이는 줄어들지 않을 터이지. 모두들 ‘사랑’보다는 ‘돈’을 더 좋아하니까, ‘믿음’보다는 ‘대학교 학벌’을 더 좋아하니까, ‘나눔’보다는 ‘개인 명예와 권위’를 더 좋아하니까, 우리 세상은 이렇게 저렇게 흘러갈 터이지.

 다문 몇 초라도 아껴서 더 빨리 어딘가로 가려고 하는 우리 나라이니까, 더 많은 돈을 남(내 이웃)보다 더 많이 벌어서 어깨를 우쭐거리고 싶어하는 우리 나라이니까, 책 한 권 느긋하게 읽을 마음을 일구기는 어려울 수 있구나. 책 한 권을 손에 들어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휴머니스트,2008)나 《항일유적답사기》(눈빛,2006) 같은 책은 고르기 어려울 수 있구나. 《두 친구 이야기》(양철북,2005)나 《눈물나무》(양철북,2008) 같은 책은 ‘아이들이나 읽는 책’으로만 여기고 말겠구나.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아름다운사람들,2004)이나 《나의 수채화 인생》(미다스북스,2005) 같은 책을 손에 들고 눈물을 똑 똑 똑 똑 …… 흘릴 일은 없겠구나. 《슬픈 미나마타》(달팽이,2007)라든지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삼인,2006) 같은 책을 가슴에 안고 우리가 여태껏 찬찬히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 틀거리를 가슴시리게 붙잡을 수는 없겠구나. 그렇지만, 조그마한 꿈 하나를 품어 보아야지. 가녀린 꿈 하나를 살며시 손바닥에 올려놓아야지. (4341.6.1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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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동네에서 제가 즐겨 찾아가는 구멍가게는 ‘충인상회(-商會)’입니다. 충인상회로 가는 길목에 ‘재영슈퍼(-supermarket)’가 있습니다. 동구청으로 가는 길을 따라 곧게 걸으면 ‘금곡제일슈퍼’가 있습니다. 이 구멍가게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금곡상회’가 있습니다. 금곡제일슈퍼 건너편으로는 ‘한아름마트(-mart)’가 있어요. 저는 ‘구멍가게’에 간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가는 구멍가게마다 ‘상회’나 ‘슈퍼’나 ‘마트’라는 이름이 달려 있습니다. 적어도 ‘가게’라는 이름을 붙인 곳은 없습니다.

 동무들하고, 또는 손윗사람이나 손아랫사람하고, 또는 이웃사람하고 술 한잔 하자며 나들이를 하곤 합니다. 이때 우리들은 ‘술집’에 가지만, 그 어느 술집에서도 ‘술집’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막걸리를 팔면 ‘주점(酒店)’이고, 맥주를 팔면 ‘호프(Hof)’입니다. ‘주점’이 ‘술 + 집(가게)’을 한자로 옮긴 말일 뿐임을 헤아려 보는 사람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옷집이 줄줄줄, 또는 다닥다닥, 또는 층층이 늘어서 있는 동대문 같은 곳을 일컬어, ‘패션(fashion)의 거리’라고들 합니다. ‘옷집거리’나 ‘옷집골목’ 또는 ‘옷가게거리’나 ‘옷가게골목’ 같은 말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합니다. 옷을 파니까 옷집이요, 옷을 다루니 옷가게입니다. 그렇지만, ‘패션’ 아닌 말로 이와 같은 거리나 골목을 가리킬 때에는 으레 ‘의류타운(衣類town)’입니다.

 우리 식구는 집에서 밥을 먹지만, 때때로 집 밖으로 밥을 사먹으러 마실을 나가곤 합니다. 집에서 해먹을 수 없는 밥이 먹고플 때, 이래저래 바깥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날푸성귀가 하나도 없을 때, 밖에서 밥을 사먹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러 “밥 파는 가게”를 찾아갑니다. ‘밥집’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찾아가는 곳에는 한결같이 ‘식당(食堂)’이라는 말만 붙어 있습니다. 그나마, 보리밥을 파는 곳은 ‘보리밥집’이라 하지, ‘보리밥 식당’이나 ‘보리 식당’이라고는 하지 않더군요. 더욱이, 가게를 마련하여 밥을 파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요식업(料食業)’을 한다고 이야기하는 우리 사회요, 정부입니다. ‘밥일’을 한다든지 ‘밥집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집에서 밥을 먹을 때에는 ‘집밥’입니다. 집 바깥에서 밥을 먹을 때에는 ‘바깥밥’입니다. 뭐, 바깥밥을 먹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하나같이 ‘외식(外食)’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들은 예부터 얼마 앞서까지 흙을 바닥으로 삼아 흙으로 벽을 올리고, 흙에서 거둔 짚이나 풀로 지붕을 이어서 살았습니다. 두 발로 땅을 디디듯이 등과 배를 흙에 깔고 잠을 이루었습니다. 흙을 만지며 일을 했고, 흙을 다루어 집을 지었습니다. 흙으로 지은 집이었으니 ‘흙집’입니다. 풀로 지붕을 이었으니 ‘풀집’입니다. 그런데, 흙집이나 풀집에 살던 사람은 스스로 ‘흙집’과 ‘풀집’이라 했으나, 흙집이나 풀집에 안 살던 사람들이 흙집이나 풀집에 살던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서는 으레 ‘토담집(土-)’이니 ‘토옥(土屋)’이니 ‘초가집(草家-)’이니 ‘초가(草家)’니 ‘초옥(草屋)’이니 하는 말을 썼습니다. 한국사람이 살던 집을 가리켜 ‘한옥(韓屋)’이라 하는데, 이 한옥에는 ‘풀집’이나 ‘흙집’은 끼어들지 못합니다. 오로지 ‘기와집’ 하나만을 한옥이라고 합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앞으로 스무 해쯤만 더 지나면, 또는 서른 해쯤만 되면, 아파트(apartment)라는 곳이 한옥이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어느 프랑스사람이 《아파트 공화국》(후마니타스)이라는 책도 한 권 써내기도 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한국 집 문화’를 말할 때에는 아파트 말고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습니다. 시골 고샅집은 죄 사라졌습니다. 박씨 집안이 쇠삽날을 밀어붙여 없애기도 했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고샅집을 볼품없이 여겼습니다. 시골이 거의 사라지고 도시만 멀뚱멀뚱 남은 오늘날 도시에서는 골목집이 집 대접을 못 받습니다. 판자집이든 나무집이든 벽돌집이든 무슨 집이든, 돈과 힘과 이름이 없이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이 옹기종기(높으신 분들은 게딱지나 성냥갑이라고 가리키셨겠지만) 모여살던 골목집은 집이 아닌 집, 문화가 아닌 문화, 삶이 아닌 삶, 도시가 아닌 도시, 동네가 아닌 동네, 이리하여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시달렸고 들볶였고 떠밀렸고 쫓겨났고 짓밟혔습니다.

 우리 식구 달삯 내며 붙어사는 집은 1957년에 지어졌습니다. 동네 다른 집과 견주면, 지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집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도 벌써 쉰한 살입니다. 쉰한 살이면 그 옛날 사회와 문화와 삶을 찬찬히 헤아릴 수 있는 집인 셈입니다. 이 집, 또 우리 이웃집들마다 깃들어 있는 사회와 문화와 삶을, 우리들 시민한테 권력을 넘겨받아서 꾸려 나가는 공무원과 시장과 정치꾼들이 얼마나 보듬어 줄는지 모를 일입니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들은 우리 깜냥껏 우리들 깃든 보금자리를 잘 추스르며 살아야지 싶습니다.

 저는 자주 못 가고, 옆지기는 부지런히 가는 ‘성당(聖堂)’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 ‘거룩한집(성당)’에서 비손을 드리노라면, 모두들 일어나서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다” 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요, 거룩한집에 모였으니 ‘거룩하다’고 노래를 부르지요. 그러하오나, 거룩함을 기리거나 받드는 이 집 이름은 ‘聖堂’일 뿐입니다. 성당에서 파는 ‘거룩한 물건(성물:聖物)’을 파는 가게 이름은 얼마 앞서까지 ‘성물방(聖物房)’이었습니다. 지난달 끝머리, 거룩한집 알림판을 새로 단다고 해서, 그러면 ‘거룩한가게’로 이름을 붙여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주 뒤 다시 거룩한집을 찾아가 보니, 말끔한 판에 깔끔한 글씨로 ‘거룩한가게’ 알림판이 붙었습니다. (4341.6.1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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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편해문 지음 / 소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52 ― 골목 삶터 무너지면 아이들 놀이터는 끝장
 : 편해문,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 책이름 :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 글ㆍ사진 : 편해문
- 펴낸곳 : 소나무(2007.6.25.)
- 책값 : 12500원



 (1) 지키고 싶은 골목길


 인천 동구 금곡동 밤골목을 걷습니다. 동네 골목집이 모여 있는 한복판을 가로질러 놓으려고 하는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동네사람들 월요일 모임을 마친 뒤, 옆지기와 손을 잡고 거닙니다. 저녁 아홉 시가 넘은 늦은 골목길에는 오가는 차가 드뭅니다. 아침과 낮을 헤아려 보아도, 이 길을 오가는 차는 매우 적습니다. 시내버스 한 대가 편도로 다니기는 하는데, 시내버스 지나가는 무렵 여느 차 서너 대 지나간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저녁에는 자동차가 더 적습니다. 차 없고 호젓한 밤골목을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을 여럿 봅니다. 지난해 봄부터 줄곧 보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혼자생각이지만, 이 아저씨는 회사일을 마치고 이 골목길을 달려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나 싶습니다.

 골목길을 거닐다 보니,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이웃사람도 만납니다. 서로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합니다. “여기에서 밤에 자전거 타는 모임을 만들어도 되겠다.” 옆지기가 말합니다. “그러게. 그래도 되겠네.” 마땅한 공원도 쉼터도 없는 우리 동네이지만, 차가 뜸한 이 길을 공원으로 삼아서 자전거를 탈 수 있습니다. 골목 안쪽에서는 거리등 불빛에 기대어 배드민턴을 하고요.

 막걸리집 아저씨도 배드민턴채 둘을 늘 가게에 놓아 두고 있습니다. 우리 옆집 분들도, 또 건넛집 분들도 저녁 아홉 시나 열 시쯤이면 슬슬 골목으로 나와서 배드민턴채를 휘두릅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끼리, 아이들끼리, 아이하고 어른끼리.


.. 먹고살기 위해 남의 빨래를 해 주는 어른들 곁에서 빨랫줄 거는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아이들은 일상에서, 어른들의 일 가까이에서 풍부한 놀이거리를 얻어 그들만의 놀이로 바꾸어 놀고 있었다 ..  (23쪽)


 여러 달 동안 닫아 놓고 있던 동네 닭집 ㅈ이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동네에서 아저씨들 맞이하는 닭집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마음 가벼이, 홀가분하게 찾아갈 수 있기도 했고, 가게 불빛도 밝으며, 둘이 마주앉아 이야기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시끄러운 노래가 흐르지 않습니다(아무 노래도 안 틀어 놓으니). 길가에 차도 거의 안 다녀 조용합니다. 아주머니가 마련해 주는 닭날개는, 둘레 다른 어느 닭집에서도 구경할 수 없을 만큼 맛났습니다.

 그 닭집이 다시 열었나 궁금해서 찾아갑니다. 닭집 임자가 바뀌었습니다. “요새 닭병이다 뭐다 해서 닭은 안 팔려요. 그래서 다 버렸지 뭐.” 그러면 무슨 먹을거리가 되느냐고 여쭙니다. “도토리묵도 있고, 갑오징어도 있고.” “갑오징어로 주셔요.” “맥주 드실 거여, 소주 드실 거여?” “맥주 주셔요.” “지금 맥주가 4홉들이밖에 없네.”

 ㅈ집 새로운 아주머니는 밑안주로 오이를 썰어 줍니다. 이내 갑오징어데침이 한 접시 나옵니다. 뚝딱뚝딱 금세 마련해 주시는구나. 무척 쫄깃쫄깃합니다. 여태껏 먹어 본 오징어데침 가운데 가장 훌륭합니다.

 한 접시를 다 비울 즈음, 아주머니한테 여쭙니다. “갑오징어는 한 접시에 얼마 하나요?” “그거, 사천 원에 사 오는데, 육천 원만 줘.” “네? 그러면 손해잖아요.” “만 원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받기도 그렇고, 팔천 원씩 받고 있어. 어떤 사람은 세 접시를 먹고 가더라고. 음, 그러면 두 접시 해서 만사천 원만 줘.”


.. 인도에는 놀이터가 따로 없다. 왜냐하면 온 동네가 놀이터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도 않다. 하루 가운데 노는 시간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  (46∼47쪽)


 갑오징어데침 두 접시에 맥주 두 병. 저녁참 값으로 이만 원. ‘오늘 하루 벌이를 넘겼군.’ 속으로 생각하며 걷는데, 옆지기는 이 집에서 마련해 주는 먹을거리가 괜찮다며 좋아합니다. 좋아하는구나. 하긴, 나도 좋았지. 다음에 또 가자고 합니다. 아무렴, 또 가야지. 그런데 그 ㅈ집에 찾아가는 동네사람들은 얼마나 되려나.

 동네에 이와 같은 술집이 있는 줄 얼마나 알고 있으려나. 값싸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집도 좋은 한편, 값을 조금 치르더라도 입맛이 돌게 해 주는 집도 좋음을 얼마나 느껴 주시려나.





.. 오늘날 아이들이 이 정돈된 세상에서, 이 반듯하게 잘라진 시간과 공간에서 무슨 놀이를 할 수 있는지 …… 무릎이 까지고 넘어지고 구르지 않고 어떻게 놀이와 만날 수 있단 말인가 …… 나는 이 동네를 가난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도대체 가난이라는 게 무엇일까? 가난은 스쳐지나가는 타인의 편협한 평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웃이 있었고, 이웃과 함께 해야 할 일을 했고, 아이들은 너무나 많은 놀이를 풍족하게 누리고 있었다 ..  (90, 94쪽)


 그끄제 낮, 서울 공덕동에 사는 후배가 도서관에 찾아왔습니다. 쉽지 않은 걸음을 해 준 후배는, 자기 옆짝하고 신포시장을 돌고 답동성당도 둘러보는 둥 골목길 마실을 했답니다. 저녁을 함께 먹는 자리에서, 공덕동 갈매기살 고기집이 늘어선 자리에 있던 〈굴다리 헌책방〉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건넵니다. 〈굴다리 헌책방〉 아주머니가 꾸리는 고기집은 그대로 있다고 하니, 헌책방 깃든 건물을 재개발 한다면서 헐어버린 듯합니다. 〈굴다리〉 아저씨는 책방 지키는 일로 보람을 느끼고 즐거움을 찾으셨는데. 그예 그 건물이 헐렸네. 고기집 늘어선 헌책방 있는 코앞까지 아파트를 짓는다며 한창 부수고 뜯고 새로 짓고 법석이었는데. 끝내 그곳 헌책방까지 재개발 손길이 뻗쳤구나.

 후배는 ‘골목이 모두 허물리는 모습을 마스크 쓰고 지켜보다가는 모두 아파트로 바뀌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후배는 자기 고향을 잃었으니까요. 자기 어릴 적 놀이터를 잃었으니까요.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떠돌아야 하는 삶을 보내야 하니까요.

 집이 아닌 부동산인 아파트 삶입니다. 고향이 아닌 돈굴리기를 하는 아파트 굴레입니다. 1억이 오르고 2억이 오른다고 좋아질 아파트 삶터이겠습니까. 그렇게 올라서 앉은자리에서 얻은 돈으로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서 그 돈을 쓰면서 자기 삶을 아름다이 가꾸겠습니까.

 부모 스스로 고향을 버리면서, 아이들한테 고향을 잊게 합니다. 고향을 잊게 된 아이들이 자라서 사랑하는 짝을 만나 사랑하는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될 때가 되면, 당신 손주들은 ‘내 고향은 어디야?’ 하며 묻기도 할 텐데, 이 물음에 무어라 말을 해 줄는지요. 어쩌면, 당신 손주들은 고향이 어디인지 안 묻고, 고향이 있는가 없는가는 아예 생각도 않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만한 도시내기로 태어날는지요.


.. 아빠가 물건을 고치거나, 엄마가 저녁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만큼 좋은 놀이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부모들은 집안에서의 자연스런 노동과 멀어져 있다. 이런 좋은 놀이를 놔두고 우리는 돈과 시간을 따로 들여 아이들을 놀이방으로 보내고 복잡한 놀잇감을 아이들 품에 안긴다 ..  (106쪽)


 후배를 데리고 송현동 중앙시장 길을 걸어서 지나갈 때, 저잣거리에 살고 있는 아이들 너덧이 공놀이를 했습니다. 한 아이가 배구공을 던지려고 하니 세 아이가 뒤에서 받으려고 하고, 던질까 말까 움찔움찔거리니, 던지려는 아이도 받으려던 아이도 까르르 웃으면서 자빠집니다. 이 옆을 지나가는 어른들 가운데 아이들을 쳐다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들 굳어 있는 얼굴로 제 갈 길이 바쁩니다. 아이들은 어둑어둑한 저잣거리 한켠에서 저희끼리 공놀이를 했습니다.


.. 학교란 무엇인가? 건물인가? 시설인가? 교사인가? 무엇인가? …… 아이들은 진짜 물건을 만지고 싶고, 사람이 말하고 노래하는 것을 듣고 싶고, 제 몸으로 춤추고 싶지만 이 모든 것을 그림으로 음반으로 프로그램으로 사진으로 만나게 해 주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교육은 아이들을 어디까지 데려갈까 ..  (153∼154쪽)


 우리 집 아이도 이렇게 놀 수 있으려나. 우리 집에 아이가 태어날 무렵, 이웃 가운데 우리 아이 또래가 있으려나. 또래가 없어도 언니오빠하고 함께 뛰어놀 수 있으려나. 학원 안 다니는 동무를 사귈 수 있으려나. 텔레비전에 빠지지 않을 만큼 한갓진, 학교 숙제와 문제집 풀이에 매달리지 않을 만큼 홀가분한, 무릎이 까지고 팔꿈치가 벗겨지더라도 울지 않고 씩씩한 동무를 사귈 수 있으려나.

 망까기를 배우고 고무줄을 배우고 고누를 배우며 술래잡기를 배우고 숨바꼭질을 배울 언니오빠를 사귈 수 있으려나. 둘째가 나오기 앞서까지는 혼자 심심하지 않으려나.





 (2) 그림 할머니를 생각하며


 옆지기는 이달로 두 달째, 동구 화평동에서 ‘평안 수채화의 집’을 꾸려 나가는 ‘그림 할머니’ 박정희 님한테 그림그리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제 아침, ‘그림 할머니’가 전화를 하신 뒤, 댁부터 우리 도서관까지 지팡이를 짚고 그림 연장 바구니를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아기를 밴 옆지기를 당신 수채그림으로 담고 싶다는 할머님은, 여느 어른들은 십 분쯤이면 걸을 길을, 걷다가 쉬고, 또 걷다가 쉬고 하면서 삼십 분도 넘게 걸어서 찾아오셨어요.


.. 돈으로 아이들을 놀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아이들과 내가 함께 놀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부모들이 그립다. 놀이는 평등해야 하고, 평화를 만날 수 있어야 하고, 공짜여야 하지 않겠는가 …… 심심해야 이제 한번 놀아 볼까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이 심심해 할 틈도 없이 온갖 장난감을 사서 안기기에 바쁘다 ..  (160∼162쪽)


 햇빛 잘 들어오는 자리에 그림 그릴 터를 마련합니다. 그림 연장을 하나하나 풀어놓습니다. 먼저 연필로 테두리를 잡습니다. 그런 뒤 자바라에 물을 받고 물감을 풀면서 조금씩 빛깔을 입힙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손은 붓을 놀리고 입은 당신과 긴긴 삶을 함께 보낸 할아버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할아버지하고 있던 일,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나중에 옆지기가 말합니다. 할머님이 할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는가 보더라고. 따지고 보면 지금 할머님한테는 할아버님하고 예순 해 남짓 함께 사셨으니 당신 부모님보다 훨씬 오래 함께 지냈을 테고, 어쩌면 부모보다 그리울 사람이지 않겠느냐고.


.. 요즘 아이들과 놀이를 해 보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지는 것을 못 견디는 아이들 모습이다 ..  (197쪽)


 그런가. 그러했을까. 할머님이 날마다 온힘을 쏟으며 부지런히 그려내고 있는 이 수채그림마다 당신 온삶지기였던 할아버님한테 보여드리면서 ‘여보, 내가 오늘은 이런 그림을 그렸다우, 한번 봐주시오.’ 하고 이야기를 건네셨을까. 당신 스스로 좋아서 그리는 그림이지만, 이 좋은 느낌을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온삶지기한테, 또 딸아들한테, 또 이웃들한테 함께 나누어 주고픈 마음이셨을까.


.. 오랫동안 거리의 아이들을 보아오고 그들의 현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되묻고 대안을 만들고 따듯한 시선을 길러온 사람만이 아이들 모습을 온전히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을 사진을 찍는 내내 했다. 찍을수록 세상에는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것이 거꾸로 더욱더 많아진다는 것을 알아갈 뿐이었다 ..  (226쪽)


 이리하여 그림 할머니는 스물이 넘는 큰식구가 열 평 조금 넘을까 싶은 작은 집에서 북적북적 살아야 했던 가난한 살림을 조금도 가난으로 느끼지 않으면서 즐겁게 꾸려나갈 수 있었을까. 더구나 그 집을 당신 아버님이 해 온 일을 갈무리하는 쉼터로, 또 당신이 고이 여미어 놓은 당신 발자취를 젊은이들한테 ‘우리들(할머니, 할아버지)은 예전에 이렇게 살았다우’ 하고 당신들 삶을 고스란히 남겨 주면서 보여주고픈 뜻이었을까.


.. 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나는 ‘웃음’이라고 본다. 한 마디로 웃으려고 논다는 말이다. 놀이를 하는데, 그것이 전래놀이든지 민속놀이든지 요즘 놀이든지 관계없이 웃음이 없다면 그것은 놀이가 아니다 ..  (250쪽)





 (3)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라는 책


 놀이를 좋아하는 어른 편해문 님은 “놀이를 가르치려 들면 재미는 그만 달아나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한때는 나 또한 그랬다(278쪽)”고 이야기합니다. 놀이라 한다면 스스로 좋아해서 즐겨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생각해 보면, 놀이뿐 아니라 일도, 우리 스스로 좋아해서 즐겨야 합니다. 동무를 사귈 때에도, 자기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가움이 있어야 사귑니다. 마음속부터 기쁨이 느껴지는 사람이어야 만날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할 때에도, 우리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꿈이 몽글몽글 솟아나야 비로소 익힐 수 있습니다. 걷기나 달리기나 자전거타기가 아무리 우리 몸에 좋다고 하더라도, 저마다 스스로 나서서 해야지, 누가 시켜서 할 수 없습니다.

 지구자원을 아끼자는 목소리야 누구나 낼 수 있습니다만, 스스로 자가용을 버리고 대중교통을 타는 데까지는, 나아가 대중교통조차 버리고 두 다리나 자전거에 기대기까지는, 스스로 즐기고 좋아할 때라야만 합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뜻은 훌륭해도 몸이 따르지 않습니다. 뜻이 거룩하여도 몸이 고단하고 마음이 지칩니다.


.. 작은 골목을 없애 큰 도로를 만들고, 빈틈없이 건물이 밀고 들어와 골목도, 마당도, 조무래기 아이들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골목과 마당에서 떠밀려난 아이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골목과 마당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 인도의 마당과 골목에서 마음껏 내닫고 뛰고 팽이 돌리고 사방치기 하고 구슬치기 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이 아이들이 이렇듯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것은 마당과 골목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  (32, 36쪽)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라는 책은 ‘어떻게 놀아야 하나?’ 하는 이야기를 한 마디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무슨 놀이를 해야 하나?’ 하는 이야기 또한 마디도 건네지 않습니다. ‘어떤 놀이가 우리한테 아름답거나 고유한가?’ 하는 이야기에는 털끝만큼도 다가서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도움이 되거나 좋은 놀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에는 아예 손을 내젓습니다.

 놀이에 앞서 삶이라고 말합니다. 놀이터에 앞서 삶터라고 말합니다. 도시에서는 골목길이고 시골에서는 고샅길입니다. 자동차 씽씽 내달리는 넓은 길이 아니라, 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좁은 골목입니다. 경운기며 트랙터가 오갈 수 있는 한길이 아니라, 지게 이고 아이 손을 잡으며 걸어갈 수 있는 좁다란 고샅입니다.

 아파트라고 놀이를 못할 곳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아파트에서도 아파트 나름대로 놀이를 북돋울 수 있습니다. 아파트에서도 아이들 꿈을 키우고 어른들 삶을 보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아이와 마주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울리고 있는지요. 아파트 층층대에서 얼마나 아이하고 눈을 마주치고 있는가요. 내 아이뿐 아니라 이웃 아이 이름을 어느 만큼 알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받아오는 성적표 점수나 상장 갈래 말고, 학원 이름이나 영어책꾸러미가 아닌, 아이가 온몸이 땀으로 젖도록 뛰놀고 싶어하는 놀이감이 무엇인 줄을 한 번이나마 헤아려 보셨나이까.


.. 놀이보다 중요한 것은 놀이를 서로 오래도록 하다 보면 생기고 쌓이고 오고가는 따뜻한 사랑과 이해와 우정이다 …… 또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음을 깨우친다 ..  (280쪽)


 설거지는 짐이 아닙니다. 짐이 아니기에 기계에 맡길 수 없습니다. 빨래도 짐덩이가 아닙니다. 짐덩이이 아니기에 기계한테 도맡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밥하기는 짐꾸러미가 아닙니다. 짐꾸러미가 아니기에 기계 단추만 눌러 놓을 수 없습니다. 모두 몸소 합니다. 모두 품과 시간을 들여서 손수 합니다.

 설거지도 빨래도 밥하기도 일이기에 제 몸을 움직여서 합니다. 설거지도 빨래도 밥하기도 일이면서 놀이가 되기에, 저와 옆지기는 함께 즐깁니다. 설거지와 빨래와 밥하기, 여기에 집치우기와 씻고 닦기와 쓸고 가지런히 하기 또한 일이면서 놀이입니다. 앞으로 아이가 커 가는 동안, 서로서로 알맞춤하도록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며 빨래와 집안 치우기를 할 생각입니다. 아니, 아이가 우리와 살아가는 한식구이니 저절로 함께하게 될 테지요.

 억지로 사귀는 이웃이 아니라, 오순도순 사귀는 이웃입니다. 잇속을 챙길 수 있기에 만나는 이웃이 아니라, 주고받는 사랑이 있기에 만나는 이웃입니다. 옆에 있으니 그냥저냥 어울리는 이웃이 아니라, 옆에 있으니 이 동네를 작은 힘 보태어 함께 지키거나 가꾸고 싶어서 어울리는 이웃입니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라는 책이름처럼, 아이들은 놀려고 세상에 왔습니다. 놀려고 온 아이들은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며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되는 동안 자기 놀이가 일이 되고, 자기 놀이터가 일터가 됩니다. 자기 놀이동무는 자기 일동무가 되고, 자기 놀이감은 자기 일감이 됩니다. 놀이를 하는 마음이 일하는 마음으로 되고, 놀이를 하던 매무새가 그대로 일하는 매무새가 됩니다. 언니오빠한테서 배운 놀이를 동생한테 물려주듯, 앞사람한테서 배운 일을 뒷사람한테 물려줍니다. 언니오빠한테서 사랑과 믿음을 받았으면, 동생한테 사랑과 믿음을 이어줍니다. 앞사람한테서 땀과 눈물과 웃음을 받았으면, 뒷사람한테 땀과 눈물과 웃음을 건네줍니다. 언니오빠한테서 주먹다짐과 욕질을 배웠으면, 동생한테도 주먹다짐과 욕질이 돌아갑니다. 앞사람한테서 돈굴리기와 대학졸업장 따위를 익혔으면, 뒷사람한테도 돈욕심과 졸업장열병만 가르쳐 줍니다. (4341.6.12.나무.ㅎㄲㅅㄱ)

 



[편해문]


 1969년에 서울 사당동 산동네에서 태어났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에 들어가 옛 아이들 놀이와 노래와 옛이야기를 공부하며 놀이에 신이 들린다. 산동네 골목을 누비며 신나게 놀았던 어린 나날이 오늘을 살아가는 힘임을 깨닫고, ‘어린이 놀이노래이야기 연구실 〈씨동무〉’를 꾸려, 아이들 놀이와 노래와 옛이야기에 목마른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 아이들과 교사와 부모님과 놀면서 살고 있다.


 한편, 공부에 시달리며 집에 학교와 학원으로 맴돌이하는 아이들한테는 놀 틈도 놀 터도 없음을 아프게 느끼게 된다. 틈과 터가 막힌 답답한 현실이 인도라는 땅으로 가도록 이끌었고, 다섯 해에 걸쳐 네 차례 인도를 드나들었다. 이러는 동안 놀이에 흠뻑 빠진 아이들마다 넘치는 생명력과 창조력을 보여주었고, 무엇이 우리 아이들한테서 이 생명력을 앗아갔을까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이들과 더 잘 놀고자 하는 꿈으로, 지금은 부산대학교 유아교육과 박사과정을 다닌다. 앞으로는 ‘세계 어린이 놀잇감 도서관’을 만들 꿈을 꾸고 있다.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생태유아공동체’, ‘어린이도서연구회’에 힘을 보태면서 ‘선재학교’ 운영위원으로 일한다.


 그동안 《동무 동무 씨동무》(1998), 《가자 가자 감나무》(1998), 《옛 아이들의 노래와 놀이 읽기》(2002), 《어린이 민속과 놀이문화》(2005), 《산나물아 어딨노?》(2006), 《문경의 어른과 아이들 노래를 찾아서》(2008), 《깨롱깨롱 놀이 노래》(2008) 같은 책을 써냈다.

 인터넷방은 http://cafe.caum.net/for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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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걸었다 - 2007년 10월 고도원의 아침편지 추천도서
김종휘 지음 / 샨티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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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으로 할 수 없는 여행, 돈으로 가꾸지 못하는 삶
 [잠깐 읽기 5] 김종휘, 《아내와 걸었다》



- 책이름 : 아내와 걸었다
- 글ㆍ사진 : 김종휘
- 펴낸곳 : 샨티
- 책값 : 13000원



 (1) 여행, 걷기, 삶, 돈, 집


 옆지기하고 ‘먼 나들이’를 하기로 했으나, 좀처럼 짬을 못 내고 있습니다. 금ㆍ토ㆍ일에 도서관 문을 열어 놓고 있어야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동네를 하루빨리 재개발과 재생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쓸어내 버리고 싶어하는 인천시장과 개발업자하고 싸우는 일을 거드느라 이틀이나 사흘쯤 자리를 비우고 떠나는 일도 못하는 판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없다고 해서 일손이 줄어들거나 모자라지 않겠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막상 여러 가지 일이 닥치다 보면, 참말 일손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어 주는 사람도 없고, 이야기를 글로 남겨 주는 사람도 없고, 그보다 자질구레한 온갖 일을 맡아 주는 ‘한 사람 손길’이 그립곤 합니다.

 몸이 더 무거워지기 앞서 다문 이틀이나 사흘이라도 맑은 숨과 따순 볕을 누릴 수 있는 곳에서 지내 보고 싶은데, 다른 일거리 걱정이 없이 자전거를 달리고 싶기도 한데, 풀숲이 우거진 그늘에서 실컷 단잠을 자 보고 싶은데, 내리쬐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흙길을 걸어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마음이 바쁜 탓일 테지요. 스스로 느긋하지 못한 탓일 테지요. 바쁘다는 말은 핑계이고, 떠날 마음이, 움직일 마음이, 돌아다닐 마음이 없거나 얕은 탓일 테지요.


.. 반지하 원룸에서 혼자 웅크리고 살다가 34층 고층으로 뛰어올라 한강 야경을 누리며 살았을 때, 그리고 그 집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다시는 되돌리기 어려울 어떤 방향을 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아프지 않을 집, 숨쉴 수 있는 집, 같이 꿈꾸는 집, 덜 벌고 덜 쓰며 나를 충족하고 나를 살릴 수 있는 집으로 한 발씩 나아가는 일이었다 ..  (239쪽)


 모자라나마 낮 나절에라도 한 시간 남짓 동네 골목길 마실을 합니다. 저녁 나절에도 한 시간 남짓 골목길을 떠돌곤 합니다. 흙이 아닌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발라진 길이긴 하지만, 한 층짜리 집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을 거닐면서, 차소리가 아닌 사람 사는 소리를 듣습니다. 창가로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소리와 이야기 소리와 도마질 소리를 듣습니다. 때때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여름임에도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순 넘은 나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일흔 여든 넘은 분들이 많이 사는 오래된 동네이다 보니, 여름에도 보일러를 돌리며 방을 데웁니다.


.. 온전히 하루 이상을 걸어 본 사람이라면 걷기를 조금씩 길게 거듭할수록 알게 되는 재미가 있다. 배낭 속 목록이 하나둘 줄어가면서 몸과 마음의 무게도 가벼워지는 맛, 불필요하게 불었던 살이 쪽쪽 빠지는 기분, 보잘것없는 한 가지라도 짐을 줄이면 몸과 마음은 환히 빛난다 ..  (20쪽)


 골목길을 거닐며 골목집 담벼락을 쓰다듬기도 하고, 늘 대문 바깥, 울타리 따라 나란히 놓아 둔 꽃그릇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새벽에 들여다볼 때, 낮에 들여다볼 때, 저녁에 들여다볼 때, 밤에 들여다볼 때 모두 다릅니다. 빛줄기에 따라서, 또 거리등 불빛에 따라서 생김새도 모양새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골목길 앵두나무가 좋아서 마냥 사진만 찍었는데, 그제 앵두나무 열매를 다시 보려고 그곳으로 갔더니 그새 아직 덜 여문 열매까지 따 버리고 없더군요. 덜 여문 열매까지 따 간 모습을 보면, 나무 임자가 그러지는 않았을 테고, 몰래 훔쳐서 먹는다고 해도, 덜 여문 열매는 남겨 놓아야지, 원.


.. 바닷가 마을에서 본 아이들은 아무도 똑바로 걷지 않았다. 왔다갔다 제멋대로 걸었다. 살아 있는 제 몸에 맞게 움직이며 길을 걸을 줄 알았다. 그런 아이를 데려다가 줄 맞추게 하고 일렬로 걷게 훈련시키는 학교를 오래 다녀선지, 또는 운전을 시작한 다음부턴지, 나는 직진의 대로를 직선 코스로 가는 것만이 길인 양 착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해안가의 길도 대부분 곧고 넓게 뻗은 길이 차지하고 있었다 ..  (90∼91쪽)


 골목집마다 기름보일러를 많이 씁니다. 기름이 도시가스보다 훨씬 비싸기는 하지만, 가스보일러로 바꾸랴, 도시가스를 신청하랴, 뭐 하랴 해서 들어가는 목돈을 엄두를 못 내고 그대로 쓰는 집이 제법 됩니다. 또한, 세들어 사는 사람으로서도 목돈 들여 바꿀 꿈을 못 꿉니다. 집임자는 굳이 자기 돈 들여서 바꾸어야 할 까닭을 느끼지 못합니다. 기름보일러조차도 들이기 힘든 집은 연탄을 땝니다.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신흥동에는 아직도 잘 돌아가는 강원연탄 공장이 있고, 이웃 동네에서도 연탄 때는 집이 퍽 많습니다.

 나중에 골목집이 모두 허물리고 30층이 넘는 아파트로 바뀌어 버린다면, 그때 비로소 이 동네에도 도시가스가 들어오리라 봅니다. 지금 있는 이 집들 그대로 간직하고 가꾸어 주기보다는, 집장사와 땅장사로 시세차익을 얻는 데에만 마음을 쏟을 지역정부일 테지요. 삶을 사람들 어울림이 아닌 돈흐름으로 재고들 있으니까요.

 나라에서는 ‘경제성장율’을, 우리들은 ‘월급봉투 두께’에 더 눈길을 두고 있어요.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지 않아도, 극장에 가지 않아도, 또 책을 읽지 않아도, 우리들은 얼마든지 문화를 누리거나 즐기거나 기쁨으로 가득할 수 있는데, ‘문화복지’를 동네 스스로 일구어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요.

 자그마한 꽃그릇 하나 돌보고 푸성귀를 손수 심어서 뜯어먹는 일도 문화입니다. 삶이며 문화입니다. 공원에 갔다가 매발톱꽃이 지고 꽃씨주머니가 여문 모습을 보고는 이 꽃씨주머니를 톡톡 따다가는 주머니에 챙겨 넣고 집에 와서 비어 있는 헌 그릇을 찾아 흙을 퍼 온 뒤 이듬해에 여기에 심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일도 문화입니다. 삶이자 문화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무얼 먹을까 생각하면서 저잣거리에 장바구니 하나 들고 가서 나물 천 원어치 두부 천 원어치 양파와 감자 천 원어치씩 사다가 찌개 하나 끓여서 두어 식구 함께 먹도록 밥상을 차리는 일도 문화입니다. 삶이면서 문화입니다.


.. 돈을 냈으니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손해 보지 않겠다는 기분 때문에 엄청나게 물을 낭비했다. 식당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을 시켰다가 기대에 못 미치면 화가 났다. 돈 버리고 입 버렸다는 감정에 쉽게 휩싸였다. 그 기준은 돈이었다. 돈 낸 만큼 대접받지 못했다는 생각 ..  (128쪽)


 임금님 수라상만 문화이겠어요? 임금님 수라상만 ‘우리네 옛 밥 문화’이겠어요? 여느 사람들 된장찌개 올려놓은 밥상도 어엿한 ‘우리네 옛 밥 문화’입니다. 우리가 가꾸는 문화, 곧 전통이고, 우리가 일구는 삶, 곧 역사입니다.
 

 (2) 《아내와 걸었다》라는 책을 덮고


 ‘먼 나들이’는 못하고 ‘가까운 나들이’만 하고 있는 몸. 오랜만에 찾아와서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눈 형은 “아, 제주도나 가 볼까?” 하면서 기지개를 켰습니다. “제주섬이라? 좋지? 좋겠네. 부럽네.” 제주섬 앞바다 파아란 물에 발을 담그고, 아니 몸을 담그면 얼마나 시원하고 개운할까. 흑흑흑. 제주시에 깃든 헌책방 〈책밭서점〉에 찾아가면 헌책방 아저씨가 오랜만에 찾아왔다고 반기면서 ‘한라산물순한소주’에다가 회 한 접시 먹자고 하실 텐데. 엉엉엉. 사진쟁이 김영갑 님이 온삶을 바쳐 누볐던 오름 아무 데나 한 곳 찾아가서 뒹굴뒹굴 구르면서 놀 수 있을 텐데. 아이고아이고아이고.

 마음은 구만 리도 아닌 백만 리이고. 몸은 4층집 씻는방에서 빨래를 북북 비벼서 빨고. 집 옆으로 지나가는 전철 소리를 들으면서 햇볕에 빨래를 널고.


.. 뭐해? 와 봐! 뭔데? 어느새 아내는 쪼그려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가지 않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끔 가 보거나 잠시 뒤에 전해 들으면 별것 아니었다. 민들레거나 이름 모를 풀꽃이었다. 불가사리나 이름 모를 조개껍데기였다. 그 자리마다 어김없이 야아- 하는 아내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  (196쪽)


 내 몸은 ‘먼 나들이’ 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담긴 책을 펼치면서 입맛을 다십니다. 쩝쩝쩝. “그냥 어느 날이었다. 답답했다.”면서 길을 떠난 이야기를 묶어낸 책 《아내와 걸었다》를 읽습니다. 그리고 덮습니다.

 이 사람은 좋겠네. 그냥 어느 날 답답해서 길을 나설 수 있었으니. 더구나 자기가 길을 나선 이야기를 책으로까지 낼 수 있었으니. 게다가 혼자도 아닌 짝꿍도 함께 손잡고 다녔으니.

 넨장. 안 되겠군. 나도 자전거를 타고 조금 멀리 나들이를 해야겠다. 조금 멀리라고 해 보아야, 요기 인천 동구에서 남구까지, 또는 부평구까지, 또는 시청 앞까지, 또는 수봉공원이나 연안부두까지일 테지만. (4341.6.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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