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희의 여행 - 아오지에서 서울까지 7,000km
최금희 지음, 임양 그림 / 민들레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59 ― 한국사람 스스로 잊은 남녘과 북녘
 : 최금희, 《금희의 여행, 아오지에서 서울까지 7000km》


- 책이름 : 금희의 여행, 아오지에서 서울까지 7000km
- 글 : 최금희
- 그림 : 임양
- 펴낸곳 : 민들레(2007.8.28.)
- 책값 : 9000원


 (1) 숱하게 죽을 고비 넘기고 찾아온 남녘땅에서


 《통일로 가는 길》(1999), 《사람답게 살고 싶소》(1999), 《북한사람들이 말하는 북한 이야기》(2000), 《1999 민족의 희망찾기》(1999),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1999), 《고난의 강행군》(1999), 《정말이지 살아남는 것이 목표입니다》(1997) 같은 책들이 한동안 꾸준히 나왔으나, 요즈음은 소식이 뜸합니다. 눈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북녘을 떠나는 사람이 수없이 늘고 남녘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나날이 늘지만, 이들 이야기가 책으로 엮이는 일은 드물 뿐더러 속깊은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더욱 드뭅니다.

 오히려 새로운 이야기가 꾸준히 나와야 하고, 북녘 사람과 삶터와 사회를 거의 모르는 남녘 우리들로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찾아서 읽어야 할 테지만, 세상은 거꾸로 흐릅니다.


..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왜 그러니?” “아니다.” “왜? 한국 애들과 싸웠니?” “아니! 내가 왜 그들과 싸우나? 통일도 바라지 않는 애들인데.” “뭐?” “학교에서 선생님이 통일을 원하는 사람 손들라고 했는데 두 명밖에 없더라. 나머지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더라.” “왜?” “통일 되면 한국이 못 산다고, 그리고 북한사람들 무섭다고…….” 그들은 만나 보지도 못한 북한사람을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탈북자인 우린 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었고,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  (213쪽)


 ‘먹고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1950년대나 1960년대나 1970년대나 1980년대나 1990년대나 2000년대나 ‘먹고살기 바쁜데 그딴 데에 무슨 눈길을 둬’ 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기 때문일까요.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하면서 이웃사람하고 콩알 한쪽 나누는 마음을 가꾸는 문화나 삶을 우리 스스로 내동댕이쳤기 때문인가요. ‘그리 넉넉하다고 할 수 없어도 온 식구 끼니 제때 챙길 수 있으니 즐겁다’는 마음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인가요. 천만 원을 벌면 일억이 보이고, 일억을 벌면 십억이 보이며 십억을 벌면 백억이 보여서 자꾸자꾸 돈버는 일에만 마음이 끌리기 때문인가요.

 오늘날 남녘 삶터는 지난날과 견주어 ‘먹고살기에 대단히 나아졌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한뎃잠을 자야 하는 분도 꽤 있고, 일자리 못 얻는 분도 퍽 많으며, 일자리를 얻어도 비정규직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디에 돈을 쓰고 마음을 빼앗기고 몸을 움직이는가를 헤아려 본다면. 한 번쯤 걸음을 멈추고 옆과 뒤를 돌아볼 수 있다면.


.. 내가 생각했던 한국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머리속에 그리던 동포의 느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우리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말투, 생활, 사고방식, 모두가 너무 낯설었기에 자연히 경계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조사실에 먼저 다녀온 언니는 울고 있었습니다. “언니야, 왜 우니?” “금희야, 저것들 사람 아니다. 진짜로 화가 난다.” “왜?” “글쎄, 어머니 아버지가 가짜란다.” … 나는 언니를 울린 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 피부에 매서운 눈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한국에 대한 환상이 이미 깨어진 나는 그 사람을 쏘아보듯 바라보았습니다. 경계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람은 씨익 웃으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이름은?” “최금희입니다.” “나이는?” “열여덟 살입니다.” “부모님은?” “최○○, 이○○입니다.” “진짜 네 부모 맞아?”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따졌습니다. “선생님은 눈이 없습니까? 선생님 자식에게도 이런 식으로 묻겠습니까?” … 한 사람으로 존중받길 원했는데 무리였나 봅니다 ..  (206∼207쪽)


 오래된 저잣거리로 푸성과나 열매를 사러 가면,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은 으레 한두 줌 더 집어줍니다. 우리는 아직 500원어치를 따로 살 수 있습니다. 젊은 부부를 걱정해서 더 얹어주는 분들이 ‘잘살면 얼마나 잘살’며, ‘많이 벌면 얼마나 많이 번다’며 그렇게 마음을 써 주실까요. 우리는 저잣거리에 나들이를 가서 여태껏 한 번도 흥정을 해 보지 않습니다. 흥정을 해야 할 까닭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 식구는 ‘배부르게’ 사는지 모릅니다. 은행에 다문(?) 몇 백만 원이라도 돈을 모아 놓으며 뒷날을 걱정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 젊은 나이에 막일판에라도 가서 돈 좀 벌어 놓으라는 소리도 듣습니다만, 이런 소리를 한귀로 흘립니다. 꼭 벌 만큼만 벌고, 우리가 우리 몸으로 겪거나 부딪히는 세상을 느끼고 싶으며, 곧 태어날 아이한테 온마음 쏟아서 함께하고 싶습니다. 아이를 병원에서 낳고 병원에서 몸풀이할 돈을 버느라 뼈를 깎기보다는, 집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서 몸풀이를 하도록 이웃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여쭙고 앞선 이들 책을 찾아 읽으며 스스로 배우며 집을 손질해 놓으려 합니다. 아이를 보육원에 넣거나 밥어미를 두어 돌보게 하고 두 사람이 밖으로 돈벌러 나가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아이와 하루 내내 함께 지내면서 ‘벌지도 않지만 쓰지도 않는’ 삶으로 아이한테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을 듬뿍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더 맛난(?) 밥집을 자가용 몰고 찾아다니면서 바깥밥을 사먹는 일이 그럴싸할는지 모릅니다만, 우리들은 우리 깜냥껏 번 돈으로 저잣거리에서 날푸성귀 장만해서 꼭 두 사람 먹을 만큼만 밥을 해서 버려지는 쓰레기 하나 없이 맛나게 밥그릇을 비우려고 합니다.


.. 한국 가는 길은 점점 불투명해지기만 했습니다. 선교사님을 만날 때마다 부모님은 한국에 갈 방법이 없겠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선교사님이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금희, 성경 공부 잘해?” “네.” “금희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래?” “돈 많이 벌고 싶습니다.” “돈보다 선교가 좋은 거야. 여기서 성경 공부 잘해서, 북한에 가서 전도해야지.” 한국에 가는 것보다 북한에 가서 선교하는 게 먼저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이국땅에서 고생하며 공부도 제대로 못하는 자식들 걱정에 날이 갈수록 몸도 마음도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  (158쪽)


 대중교통을 거의 안 타고 자전거를 타는 뜻도 여기에 있습니다. 찻삯을 아끼는 일은 ‘자전거 타기에 뒤따르는 덤’일 뿐입니다. 몸이 튼튼해지는 일 또한 ‘자전거 타기에 얹혀지는 선물’일 따름입니다. 자전거 타기를 하면서 내 몸을 느낍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고 골목을 걷다가 계단에서는 어깨에 짊어지고 낑낑 오르면서 내 삶터를 느낍니다.

 자전거를 세우고 구멍가게에 들러 보리술 한 병 사서 마시며 길바닥에 앉아 있으면서 하늘도 올려다보고, 지나다니며 저를 쳐다보는 사람을 마주보며 싱긋 웃고 인사도 하지만 저 또한 그이들을 구경합니다. 찻길을 싱싱 달리기보다는 거님길에서 아기들 아장걸음에 맞추어 아주 느리게 달리곤 합니다.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슬슬 달리곤 합니다. 때때로 큰자전거 뒤에 짐수레를 붙여 짐을 나르기도 합니다. 이때만큼은 찻길 하나를 떠억 하니 차지하면서 신나게 달립니다.

 우리 앞집에서 일하는 헌책방 아주머니는, 요사이 자전거 짐칸에 푯말 둘을 묶어서 시청 앞으로 가십니다. “배다리, 우리가 지켜야 할 인천의 역사입니다”라는 글을 적은 동그란 푯말을 들고 서서, 우리 사는 이 골목마을 무너뜨리는 ‘산업도로 반대한다’는 뜻을 시청에서 일하는 공무원들한테 알리려고 하십니다.


.. (대사관 앞에서)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카메라를 든 아저씨 두 명이 우리 쪽으로 왔습니다. 그러더니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대고 우리 모습을 찍는 것입니다. 뭇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괴로웠는데 동물원의 동물 찍듯 우리 가족을 찍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울면서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고, 나는 머리를 무릎에 묻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습니다. … 우리가 어떤 기분일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그저 먹이를 찾던 하이에나의 먹잇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메라를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러워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찍지 마요! 찍지 마요!” ..  (154쪽)


 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문득문득 느낍니다. ‘그래, 요사이는 꽃제비 이야기를 다루는 책도 나오지 않고, 새터민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내면서 남북이 한겨레로 어우러지자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정작 알고 보면, 남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자고 하는 목소리 또한 안 들리잖어? 수수하게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는 책은 보이지도 않잖어?’

 ‘머나먼 유럽을 그리워하는 책은 나오고, 미국과 남미를 가로지르는 자전거여행을 한다는 책은 나오며, 일본 문화를 둘러본 이야기책은 꾸준하게 나오지만, 정작 우리 사는 이 땅을 두 발로 튼튼히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책은 하나도 안 나오잖아. 게다가, 한국땅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구경꾼 아닌 한겨레’로 느낀 마음을 담아내는 이야기책도 안 나오고.’





 (2) 떠날 수밖에 없던 북녘땅에서


 지난주 일요일 낮, 인천 논현동 아파트마을로 자원봉사를 갔습니다. 이날 이곳에서는 ‘새터민 노래잔치’가 열렸고, 노래잔치를 잘 치를 수 있도록 돕는 일꾼으로 저녁까지 움직였습니다. 자원봉사자가 적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새터민한테 도움이 될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싶어서 함께 가는 분 차를 얻어타고 갔습니다.

 새터민을 한곳에 모아 놓은 마을 가운데 하나인 인천 논현동은 대중교통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퍽 외딴 아파트마을입니다. 여기에서 시내로 나가기에 만만치 않구나 싶은 한편으로, 자가용을 모는 사람한테는 딱히 어려움이 없을 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새터민을 이 동네 한쪽에 주욱 몰아놓고 살게 하는 일이 이분들을 남녘땅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될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그리고 왜 아파트에서만 살게 해야 하는지, 여느 다세대주택이라든지 골목집에서 다른 주민하고 어울리도록 할 때가 낫지 않느냐 싶은 생각이 듭니다.


.. 나는 아버지의 눈을 보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장군님 버려 두고 어떻게 갑니까?” “아버지, 굶어죽어도 사회주의 지킵시다!” 작은언니까지 가세했습니다. 아버지는 답답한 듯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너희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일단 건너가서 보여주마. 내가 먼저 건너갈 테니 내 뒤를 따라와라.” ..  (136쪽)


 노래잔치에 나오는 새터민들은 모두들 남녘나라에서 사랑받는 대중노래를 부릅니다. 초등학교를 다님직한 어린 계집아이들은 ‘섹시’와 ‘남자친구’라는 말이 되풀이 나오는 어느 여자 노래패 노래를 춤까지 곁들이면서 부릅니다. 말씨에 함경도나 평안도 높낮이가 남아 있습니다만, 쓰는 말투는 남녘사람하고 다를 바 없습니다. 아이들 말씨에서는 북녘 말씨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이들 옷차림이나 어른들 옷차림은 자원봉사를 온 사람들 옷차림과 견주어 퍽 고급스럽게 보입니다. 아파트마을 아이들이 타는 자전거는 제가 타는 자전거(20만 원)보다 비싼 녀석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우리 여느 이웃이 입는 옷, 우리 여느 이웃이 쓰는 물건이 퍽 초라하거나 후줄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빨리 ‘남녘사람들 물질주의에 쉽게 빠져드는구나’ 싶어 고개를 젓습니다. 똑같은 새터민인 《금희의 여행》을 쓴 최금희네 아버지는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하나원 나와서 가장 먼저 책장을 만들어 주”었고, “책을 산다고 하면 서슴없이 돈을 주시지만 옷을 산다고 하면 입던 옷을 입으라고 하”였다고 하며, “가끔 외식을 해도 될 텐데 아버지는 ‘그 돈이면 집에서 맛있는 거 며칠을 해 먹을 수 있어.’하(249쪽)”셨다고 합니다.


.. 1996년, 북한의 식량 사정이 더 나빠지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는 교시가 내려졌습니다. 강냉이 뿌리와 배추 뿌리를 주식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김정일이 선포한 것입니다. 강냉이 뿌리뿐 아니라 벼 뿌리, 나무 껍질, 심지어는 강냉이 대까지 가루 내어 먹었습니다 ..  (125쪽)


 저녁 여섯 시 무렵, 노래잔치는 끝나고 잔치 연 쪽에서 마련한 선물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원봉사 하러 온 사람들은 곳곳에 널린 쓰레기를 주워서 나누어 담고 상자와 종이를 차곡차곡 따로 모읍니다. 큰 비닐에 페트병과 깡통을 따로 나누어 놓았으니, 이곳 분리수거 쓰레기통 옆에 놓고 가도 됩니다. 그렇지만 아파트 지킴이 할아버지는 못마땅해 합니다. 뒷자리는 말끔하게 치워 놓고 쓰레기는 깨끗이 나누어 놓고 쓰레기봉투까지 사서 담아 놓았는데. 몇몇 분들이 머뭇머뭇하다가, 쓰레기봉투는 남구청 것이니 여기에 둘 수밖에 없고, 상자와 깡통 들은 우리 동네로 가져가서 동네에서 재활용품 모으는 분들한테 드리기로 합니다.

 자리를 치우고 쓰레기를 가르는 동안, 노래잔치에서 노래를 부른 아주머니 한 분이 ‘나는 다른 일도 빠지고 나와서 그렇게 노래를 잘 불렀는데, 노래도 못 부른 그런 꼬맹이들한테는 선물도 다 주고 왜 나한테는 안 주느냐’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모든 참가자한테 퍽 값나가는 다리미를 하나씩 주었지만, 그 아주머니한테는 참가상 다리미만 돌아갔던 터. 잔치 연 사람들하고 한참 실랑이를 합니다만, 더 내어 드릴 선물은 없는 노릇.

 자원봉사를 하는 우리들은 조용히 뒷갈무리 마친 다음, 물건을 짐차에 싣고, 차에 나누어 타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 닿은 우리 두 사람은 밥을 해 먹을 힘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저 혼자 집으로 올라가 밥통에 남은 식은 밥을 도시락에 담습니다. 가까운 닭집으로 갑니다. 닭 한 마리 시켜서 보리술 석 잔 마십니다. 말없이 술잔을 비우고 닭고기를 반참 삼아 밥을 먹습니다.


.. 사형 집행은 계속되었고 사형 당하는 사람들의 죄명도 다양해졌습니다. 강냉이 이삭을 훔쳐서 사형 당하고, 고위급 간부 자식이 도박을 했는데 그 누명을 써서 사형 당하고, 길 가는 여자 시계를 빼앗아 사형 당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무조건 공개 처형 장면을 보게 했습니다 ..  (118쪽)


 이튿날 아침, 찌뿌둥한 몸으로 일어나 부랴부랴 서울 나들이를 갑니다. 살림살이가 어렵게 된 서울 대학로 인문사회과학 〈이음책방〉 아저씨한테 이야기를 듣기로 했기에.

 〈이음책방〉에 가기 앞서 성균관대 앞 〈풀무질〉을 잠깐 들릅니다. 책방 〈풀무질〉을 찾아가는 길에 보니, 아스팔트 길바닥 한쪽을 죄다 뜯어내고 무슨 돌을 깔아 놓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풀무질〉에 닿아 아저씨한테 이야기를 들으니, 구청에서 ‘올해 예산을 다 소비해야 해서 하는 일’이라며, 육십 몇 억을 들이는 공사를 한다는군요.

 한쪽은 대학로에 문화를 심으려고 자기 돈 다 털어가며 빚을 지면서 일을 하고, 한쪽은 서민들 세금을 받아서 꾸리는 행정 예산을 빨리 써서 없애야 한다면서 길바닥 뒤집고 있고.


.. 보지도 못한 증조할아버지가 지주였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뿌리깊게 박힌 성분제도 때문에 큰언니는 십 년 넘게 운동과 함께 키워 온 꿈을 버려야 했습니다 … 그렇다고 대학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운동만 해 온 언니는 간직했던 꿈을 고스란히 접고 아버지와 함께 탄광에서 일을 했습니다 ..  (84쪽)


 먹고살 길이 없어서 고향을 등지고 나라를 등지는 북녘사람이라면, 먹고살 길이 많으나 이웃과 나누지 않거나 나누기 싫어서 나라밖으로 떠나는 한편 고향땅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거나 무너뜨리는 남녘사람인가 싶습니다.

 성분에 따라서 자기 꿈을 펼치지 못하는 북녘 사회라면, 학벌과 이름값에 얽매여 자기 꿈을 펼치기 어려운 남녘 사회인가 싶습니다.

 배 굶는 주민이 있어도 배 굶지 않는 간부가 있는 북녘 정치라면, 마음 굶는 주민이 있어도 마음굶이가 무엇인지 깨닫지 않으면서 자기 스스로 마음 굶으며 똑같이 나뒹굴고 있는 남녘 정치인가 싶습니다.

 배우고 싶어도 배우기 어려운 북녘 땅이라면, 배우고 또 배워도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돌아보지 못하면서 가방끈만 길어지는 남녘 땅인가 싶습니다.


..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우리 아버지가 만들어 준 썰매가 제일 좋았습니다. 우리 남매는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겨울을 지냈습니다. 남쪽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추운 곳에서 자랐지만 가끔은 지금 이곳이 더 춥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아마 고향에서 느꼈던 훈훈한 정을 느낄 수가 없어서 그런 듯합니다 ..  (29쪽)


 틀림없이 배를 곯다 못해 뛰쳐나오는 북녘사람이라지만, 배만 채우면 모든 일이 끝나는 삶은 아닐 텐데요.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남녘 사회는 ‘정착금’과 ‘아파트’는 나누어 줄 수는 있으나, ‘돈에 담는 넋’과 ‘집에 들이는 얼’은 나누어 주지 못합니다.

 돈을 바라보며 그렇게 부지런히 뛰었으니 돈은 움켜쥐었습니다만, 돈만 바라보고 사람 넋은 바라보지 않았기에 따뜻한 손길로 돈을 건네지 못합니다. 착한 마음씨로 돈을 베풀지 못합니다. 겉보기에 번들거리는 아파트를 짓는 솜씨는 키웠지만, 오래오래 사는 집이 아닌 돈굴리기 건설업으로 나뒹굴고 있기에, 아파트 한 채 걱정없이 나누어 주기는 하지만, 이 집에 깃들이며 이웃사랑과 이웃믿음을 함께하지 못합니다.





 (3) 《금희의 여행》이라는 책을 덮으며


.. 북한에서는 한국사람을 ‘미군앞잡이’로, 남한에서는 북한을 ‘빨갱이’로 부르면서 서로가 서로를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며 증오의 싹을 키운 지 50년 … 왜 북한과 남한은 서로를 비방하기에 바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지 안타깝습니다 … 부산사람이 부산사람이고, 서울사람이 서울사람인 것처럼, 나도 함경북도에서 자라난 아오지사람입니다. 14년을 살아온 고향을 잊고 부정한다면 그건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살아온 곳이 좋인지 나쁜 곳인지 판단하기 전에 내가 자란 곳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입니다 ..  (233, 237쪽)


 책방 〈풀무질〉 아저씨는 책방 잘 보이는 자리에 《금희의 여행》을 여러 권 쌓아 놓고 사람들한테 ‘이 책 꼭 읽어 보셔요’ 하고 말씀하곤 합니다. 당신 스스로 먼저 읽은 다음 느낌글까지 한 쪽 써서 책손님들한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처음, 《금희의 여행》이 나왔을 무렵, 좀 시큰둥하게 느꼈고, 책겉에 적힌 ‘아오지’라는 말이 껄끄러웠습니다. 글쓴이가 아오지사람이었기에 아오지를 적었을 뿐임은 나중에 책을 읽으며 알았고, ‘아오지를 팔아먹는 글월’이 아니냐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러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이라는 마을에는 아이들이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숨바꼭질 하는 아이도 말뚝박기 하는 아이도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왜 아이들이 없을까? … 그러다 서울마을에는 아이들이 모여서 놀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끔 보이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만나곤 하지만, 그 놀이터는 답답할 정도로 작아 보입니다.사방에는 자동차들이 득실거립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찾는 일은 고향마을에서 불 꺼진 저녁에 골목에서 아이들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던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곳이 딱 한 곳 있었습니다.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다 보면 큰 학원을 지나게 되는데,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원 어귀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 이곳 아이들의 몸은 종이로 된 교과서처럼 변해 가고 있어서, 경험을 통해서 느끼고 깨닫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교과서와 참고서를 외우기 바쁜 아이들이 다른 것을 생각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  (240∼241쪽)


 《금희의 여행》을 덮은 다음,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 다시 훑습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었던 대목을 다시 읽습니다. 새터민 가운데 이 책을 읽어 본 사람이 있으려나 생각해 봅니다. 새터민 이야기를 하는 분 가운데 이 책을 읽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헤아려 봅니다. 새터민을 좋게 이야기하건 얄궂게 비틀건, 새터민을 돕건 새터민을 뱀눈으로 바라보건, 이 책 《금희의 여행》이나 지난 1999년에 나온 《사람답게 살고 싶소》나 1997년에 나온 《정말이지 살아남는 것이 목표입니다》 같은 책을 한 번이나마 들추어본 사람이 몇 사람쯤 될까 궁금합니다. 일찌감치 판이 끊어진 《정말이지 살아남는 것이 목표입니다》는 헌책방에서 드문드문 눈에 뜨이기에, 보일 때마다 한 권 더 사서 선물해 주곤 하는데, 이 책을 받는 분 가운데 반가운 빛을 보여준 분은 아직 없습니다. 다 알고 있어서 꺼리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아서 꺼리는지, 새터민 이야기를 몰라도 남녘에서 사는 데 아무 걱정이 없어서 꺼리는지 …….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 대학입시에 목매이며 살지 않을 수 있으면, 저 같은 사람이 주머니돈 털어서 《금희의 여행》 같은 책을 사서 선물해 주지 않더라도 사람들 스스로 찾아서 읽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더 많은 돈과 더 큰 집과 더 빠른 차에다가 더 눈길받는 이름값에 발묶인 채 살지 않을 수 있으면, 사람들 스스로 책방 나들이를 즐겁게 하면서 《금희의 여행》 같은 책을 밝은 눈으로 알아보고 맑은 마음으로 새겨 읽지 않으랴 싶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큰 한겨레’이고 ‘민주주의 나라’라고 내세우면서 ‘大韓民國’이라는 나라이름을 쓰고 있지만, 얼마나 ‘큰’ 나라이고, 참말 ‘한겨레’인가 모르겠으며,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고, ‘나라’ 꼴은 얼마나 나라 꼴다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4341.7.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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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의 왕 장수풍뎅이
구리바야시 사토시 지음, 히다카 도시다카 감수, 고향옥 옮김, 김태우 / 사파리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잡지 <북새통> '이달 추천 어린이책'에 보내는 비평]


 이달에 받아 본 책 다섯 가지를 놓고 오래도록 망설이게 됩니다. 지난달에는 어느 책을 고르면 좋을까 하며 즐겁게 걱정을 했는데, 이달에는 마땅히 어느 하나를 가릴 수 없었습니다. 차마 이 책을 좋은 책이라고 추천하기도 껄적지근하고, 그렇다고 이 책을 칭찬하고 싶지는 않고.

 망설이고 망설이며 ‘이 책은 안 되겠어’ 하고 하나씩 덜어내다 보니 《곤충의 왕 장수풍뎅이》(사파리)가 남습니다. 지금 한국땅에서는 ‘장수풍뎅이’를 본다는 일은 아주 드물 뿐 아니라 운이 억세게 좋지 않고서는 꿈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장수풍뎅이며 하늘소가 살아갈 터전을 마구 무너뜨리고 깎아 버리면서 고속도로와 아파트와 공장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판이니, 우리 땅에서 살아가는 장수풍뎅이 이야기는 엮어내지 못하고, 이웃 일본에서 자라는 장수풍뎅이 이야기를 옮겨서 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엮은 《곤충의 왕 장수풍뎅이》는 일본이 어린이책을 얼마나 잘 만들며, 부지런히 엮어내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이 담아내고 있는가를 잘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번역글이 그런지 일본사람이 쓴 글이 그런지 몰라도, 사진 아래에 달린 풀이말 가운데에는 장수풍뎅이를 ‘사람과 함께 사는 이웃 목숨’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한낱 연구대상이나 보호대상이나 노리개’쯤으로 여기는 듯한 풀이말이 자주 보입니다.

 자연 삶터와 목숨붙이를 살펴보는 데에 《곤충의 왕 장수풍뎅이》는 틀림없이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산 목숨’이 아닌 ‘죽은 목숨’ 같은 느낌이 드는 사진과 풀이말은 달갑지 않습니다. 죽은 목숨을 가까이하는 아이들은 이 책으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장수풍뎅이와 얽힌 지식? 그러면 이 지식을 얻은 아이들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 어울리며 살아야 할까요? 지식과 정보를 담아서 보여준다고 하는 자연도감 갈래 책이라고 해서 ‘지식과 정보’만 담아낸다면 속 빈 강정이 되고 맙니다. 별 하나 반을 줍니다. (4341.7.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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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산책 - 일상 속에서 건져낸 사진 이야기
한정식 지음 / 눈빛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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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동화 읽으며 자라니, 한국 사진을 못 찍어
 [잠깐 읽기 8] 한정식, 《사진 산책》 또는 《사진―시간의 아름다운 풍경》



- 책이름 : 사진―시간의 아름다운 풍경
- 글ㆍ사진 : 한정식
- 펴낸곳 : 열화당(1999.3.16.)

***
2007년 3월 20일, ‘눈빛’ 출판사에서 고침판을 새로 펴내 주었습니다. 여덟 해 만에 다시 나온 셈인데, 저로서는 새로 나온 판까지는 따로 안 사도 되겠다고 느껴서, 처음 나온 책을 읽으며 받은 느낌으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처음 책은 판이 끊어졌으며 1999년에 나왔음에도 책값이 1만 원이었는데, 새로 나온 판이 한결 보기에 나으며 2007년에 나왔는데에도 책값은 똑같이 1만 원입니다.



 (1) 사진이란 무엇인가


 둘레에서 곧잘 ‘도서관에서 사진강좌 안 하나요?’ 하고 묻곤 합니다. 저는 싱긋 웃으면서 ‘사진 강좌라고 뭐 있나요. 10분만 이야기하면 사진 강좌는 끝인데, 그런 걸 어떻게 해요?’ 하고 대꾸해 줍니다. 짧으면 5분에 끝나고, 길어도 30분을 넘어갈 수 없는 ‘사진 강좌’입니다.

 몇 번 사진 강좌랍시고 들어 볼 때마다, 참 지루하다고 느꼈습니다. 사진 ‘강의’라면 다릅니다. 사진 ‘교육’이 될 때에도 다릅니다. 이때에는 지루할 수 없습니다. 말이야 다 같거나 비슷한 말일 텐데, 이 말을 쓰는 우리들이 받아들이는 자리가 모두 다르니, ‘사진 강좌­’라 한다면 참 꺼려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느 사람들은 사진 ‘교육이나 강의’는 바라지 않고, 사진 ‘강좌’만을 바랍니다.


.. 모르는 이들은 기념사진이 ‘작품사진’ 바깥쪽에 따로 선 막대기인 줄로만 안다. 천만의 말씀이다. 기념사진이라고 해서 작품사진일 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위 ‘작품사진’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의 꿈이 담긴 영롱한 사진이 작품이 아니라면 무엇이 ‘작품’일까 ..  (꿈을 찍는…/31쪽)


 2005년이었지 싶은데, 그때 한 번 자원봉사로 사진 ‘강좌’를 해 본 적 있습니다.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모임’ 회원들한테 ‘국립공원에서 사진 찍기’를 들려주고 함께 국립공원 나들이를 하며 사진을 찍는데, 5분쯤 지나니 할 말이 없더군요. 사진기 기능이 이렇고 저렇고, 노출이 이렇고 저렇고, 초점이 이렇고 저렇고, 틀이 이렇고 저렇고, 사진 찍는 매무새가 어떻고 저떻고 …… 하는 이야기는 금세 끝납니다. 필름으로 찍어서 손수 인화 현상을 한다면 좀더 이야기가 길어지겠지만, 모두들 디지털사진기를 들고 국립공원을 오르내리면서 이곳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편, 허튼 짓을 하는 사람을 잡거나, 잘못된 시설을 바로잡는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분들한테 가르쳐 줄 ‘강좌 지식’은 그야말로 한줌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한줌조차 너무 많다고 느꼈습니다.

 다만, 함께 산을 타고 숲길을 지나면서, 발걸음을 조금 늦추고 때때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서 쉬면서 가만히 둘레를 돌아보면 ‘자기 나름대로 자기 눈에 곱고 살갑게 다가오는 모습’이 있을 테니, 그 모습을 그때 그 자리에서 담아내어 보시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분들보다 사진을 좀더 많이 찍기는 했습니다만, 제 사진이 그분들보다 한결 보기좋거나 훌륭하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찍은 곳이 헌책방이거나 골목길이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 터이나, 국립공원을 저보다 훨씬 자주 구석구석 누벼 보신 분들이 국립공원에서 담는 사진은 제 눈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함께 밥먹는 자리에서 넌지시 여쭈었지요. ‘모두들 사진 잘 찍으시는데, 사진 강좌라고 따로 없어도 되잖아요?’ ‘그래도, 한 번도 그런 강좌를 들어 보지 못해서, 우리가 잘 찍나 못 찍나를 알 수 없으니까요.’ ‘강좌를 많이 들었다고 해서 더 잘 찍지 않아요. 오히려 강좌를 많이 받는 분들은, 강좌를 이끄는 사람이 바라보는 틀거리대로 따라가거나 멋부리는 흉내를 내면서 고유한 자기 틀거리를 잃어버리게 돼요. 여러분들은 모두들 고유한 자기 틀거리와 눈을 잃지 않고 있으니 이렇게 훌륭하게 잘 찍으시잖아요.’


.. 하지만, 아이들 사진이 밝아야 한다는 까닭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밝은 사진을 뽑는 것이 소위 밝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예술 작품 선정기준이 될 수도 없거니와, 더구나, 아이들이라고 언제나 밝을 수도 없는 법이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슬픔도 있고 괴로움도 있는 법인 것을 ..  (슬픈 어린이/82쪽)


 돌이켜보면, 제가 찍는 사진감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인 ‘헌책방’을 사진으로 찍어 온 분이 있었다면, 얼결에 그이 사진 틀거리를 흉내내거나 베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제 나름대로 제 눈길을 틔울 수 있겠지만, 좀처럼 못 벗어났을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둘째 사진감인 ‘골목길’은 찍는 분이 꽤 많으나, 골목길 사진 찍는 분들은 한결같이 ‘골목 바깥 사람’으로서 구경하는 사진밖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웃는 골목사람’이나 ‘꾀죄죄한 뒷골목’ 풍경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습니다. 오히려 골목길 사진은 많은 이들이 찍어도 그 어느 작가들 사진에도 영향을 안 받고 있습니다.

 셋째 사진감인 ‘자전거’는 찍는 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모임 분들 사진은 놀러다니는 사진이나 술마시는 사진이나 그저 싱싱 달리는 사진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또는 멋스럽게 찍으려는 사진. 생활자전거를 찍는 분이나,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나는 모습을 담아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 사진감 세 가지를 알뜰하게 담아낸다 싶은 분들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어서, 저로서는 홀로 부지런히 제 사진 틀거리를 갈고닦는구나 싶습니다. 배울 사람이 없으니 처음부터 어디 학교나 강좌에 나갈 꿈도 꾸지 않았고, 혼자서 이 책 저 책 들추고, 몸을 움직여 온 하루를 길에서 보내고 사람을 만나면서 사진눈을 추스를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 제 사진, 제 가족사진, 적어도 저와 가까운 사람의 사진일 때에 사진을 보는 흥미는 배가된다. 반대로, 나와 관계가 멀수록 그 사진을 보는 흥미는 또 반감하고. 그래서, 노출이 부족하고, 핀트가 덜 맞았어도 내 아들, 내 손녀의 사진은 볼 때마다 미소가 떠오르고, 아무리 잘 찍은 사진도 남의 사진이면 그저 두어 장 보고 나면 하품이 난다 … 사람 속에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사진은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땅 위에서 땅에 속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사진은 가장 커다란 매력을 발산한다 … 그리하여, 우리 선배들은 한때 사진이 예술이 아님을 소리 높이 외쳤다. 사진은 예술 이상이라는 자부심이 거기 있었다. 사진의 예술성을 앞장서서 주장한 사람들은 오히려 아마추어들이었다 ..  (사진은 예술이 아니다/90∼91쪽)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은 무엇을 하는 일인가. 사진은 놀이에 가깝나, 일에 가깝나. 사진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사진을 하는 내 삶은 어떠한가. 사진에 담는 마음이나 얼이나 느낌은 무엇인가. …… 사진을 찍으면서 늘 헤아려 보는 몇 가지 물음입니다.

 아직 이 물음에 마땅히 풀이말을 내놓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면, 섣불리 풀이말을 내놓을 수 없는 물음인 한편, 풀이말을 내놓지 못하더라도 늘 되새기고 곱씹으면서 스스로 풀이말을 찾아가야 하는 물음이 아니랴 싶어요. 차근차근 제 길을 걷고, 하나둘 느끼는 대로 곰삭이면서, 서두르지 않되 게으르지 않도록 매무새를 추스른다면, 어느 날 문득 하나씩 풀어나갈 수 있는 물음이라고도 느낍니다.


 (2) 문화란 무엇인가


.. 차례나 제사를 모실 때 지방은 가로체 한글로 한동안 썼다. 한글로 모시려니까 ‘현고(顯考)’ ‘현조비(顯祖妃)’ 등이 안 어울리어 그냥 ‘아버님’ 또는 ‘할머님’ 등으로 고쳐 썼다. 거기에, 축문도 우리 말로 고쳐 놓았다. “유세차(維歲次) … 휘일부림(諱日復臨)…” 어쩌고 해서 알아들을 후손들 거의 없고, 그것을 그대로 한글로 써 보았자 아무 의미가 없겠기에,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우리 말로 고쳐쓰기로 한 것이다 ..  (지방 대신 사진으로/26쪽)


 ‘사진 예술’이라는 말이 쓰이고 ‘사진 문화’라는 말이 쓰입니다. 그렇지만 ‘사진 생활’이라는 말은 그리 쓰이지 않습니다. ‘예술 사진’이라는 말이 쓰이고 ‘상업 사진’이라는 말이 쓰이며 ‘다큐 사진’이라는 말은 쓰이지만, ‘생활 사진’이라는 말은 좀처럼 쓰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곳에서 사진감을 얻어내어 담는 ‘생활 사진’은 ‘다큐 사진’이 되기도 하고 ‘기록 사진’이 되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예술 사진’이 되기도 합니다. 거꾸로 ‘예술 사진’이나 ‘기록’이나 ‘다큐’가 될 수 있을까는 모르겠습니다. 또 ‘예술 사진’이 ‘생활 사진’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더 넓혀서 살피면, 그림이나 글도, 연극이나 영화도, 체육이나 과학도, 예술이나 상업이나 다큐라는 테두리에서는 움직이지만, ‘생활’이라는 자리로는, 자기 삶이든 이웃 삶이든 우리 모두가 어울리는 삶이든, 삶자리로 다가오려고는 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쓰는 말부터 어렵습니다. 전문 갈래이니 전문 낱말을 쓴다고 내세울 수 있습니다만, 전문 갈래라고 해서 우리 삶에서 동떨어진 말로만 주고받는 일이 옳거나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퍽 자주, 배부른 이야기가 많아서 꺼리게 됩니다. 배고픈 사람들 이야기, 배고파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못 본 체하는 이야기, 배고픈 삶이란 무엇인가를 도무지 모르는 이야기, 한 마디로 배고픔을 겪거나 부때기거나 찾아보지 않는 배부른 이들 잔치라고만 느껴지곤 합니다.


.. 내가 서 있는 땅을 내려다본다. 내가 지금 편안한 것은 땅 위에 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내 나라, 내 땅이라는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 보물이 경주 부근에만 묻혀 있는 것은 아니다. 내 나라 어디를 가든 그것은 역사의 땅이요, 유적지이다. 고고학적 가치는 깨어진 기왓장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덩이 자체가 우리의 골동품이요, 유물인 것이다 ..  (사라지는 땅/44∼45쪽)


 살아 있을 때에는 대접 한 번 받지 못하다가, 죽고 난 뒤에야 대접을 받는 수많은 그림쟁이, 글쟁이를 떠올려 봅니다. 사진쟁이는 죽고 난 뒤에도 대접을 거의 못 받고 있는데, 훌륭한 노래를 남긴 분들 가운데에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가난과 굶주림과 외로움에 허덕이다가 쓸쓸하게 떠난 분이 무척 많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박물관에 모셔지고 민속마을이 만들어지고 하면서 ‘옛 서민이 쓰던 물건과 살던 집’이 소중한 문화재라며 떠받들리고 있는데, 용인 민속마을 같은 데에서 되살린 옛 서민 살림살이가, 제주민속박물관에서 되살린 지난날 서민 발자취가, 고작 쉰 해나 백 해 앞선 때 우리 모습이었음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 스스로도 내동댕이치지만, 나라에서도 업신여기고 틈나는 대로 까부수며 쫓아낸 서민 삶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서민 삶이 뒷날 ‘좋은 유물’로 떠받들림을 받습니다. 오늘날, 서민 삶은 ‘새마을-신도시-뉴타운’이라는 새 이름에 따라서 끊임없이 쫓겨나고 내몰리고 버려지고 죽어 쓰러집니다. 2008년 이날 이곳에서는 푸대접하는 서민 삶인데, 2058년쯤 되면, 아니 2028년쯤만 되어도, 2008년까지 살아남은 서민 삶터를 ‘근현대 골목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되살린다면서 수천억 원을 쏟아부어 박물관이니 문화마을이니 뭐니 하고 꾸며 놓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사는 인천 동구에도, ‘송림동 달동네’를 법을 앞세워 싹 허물고 아파트를 올려세운 옆으로, ‘달동네 박물관’을 적잖은 돈을 들여서 되살려 놓았습니다. 이 ‘달동네 박물관’에는 날마다 수백 사람이 찾아와서 ‘좋은 구경하고 간다’고들 이야기합니다.


 (3) 삶이란 무엇인가


.. 옳은 말씀이시다. 내가 부처임을 깨달으면 그 순간부터 나는 부처다운 생각을 하고, 부처다운 말씀을 하고, 부처다운 일을 하게 될 것이다 … 우리가 찍고자 하는 것은 사진이지, 나무나 바위가 아니다. 우리가 찍고자 하는 것은 사진이지 사람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우러르는 것은 부처님이지 부처님의 형상을 한 쇳덩이나 나무토막이 아니듯이 ..  (삼존불/114∼115쪽)


 예술이 되는 글도 쓸 수 있고 예술이 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예술이 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돈이 되는 글도 쓸 수 있고 돈이 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돈이 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번듯해 보이는 글을 쓰며 이름을 날릴 수 있고 번듯해 보이는 그림을 그리며 이름을 높일 수 있으며 번듯해 보이는 사진을 찍으며 이름 석 자 떵떵거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도 돈도 이름값도 안 되는 글과 그림과 사진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저 자기 삶을 담아내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내 이웃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에 담을 수 있습니다. 나와 이웃이 함께 어우러진 삶터를 사진에 새겨 놓을 수 있습니다.

 나라이름은 한국이지만, 한국이라는 고유함보다는 ‘미국처럼 되기를 바라며 어중간함’으로 재개발이 되고 다시 태어나는 한국에서 글을 쓴다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한겨레라 하지만, 한겨레라는 어깨동무를 하지 못하고 북녘하고도 사이가 틀어지고 중국조선족이나 재일조선인 권리를 북돋우지 않는 이 한국에서 그림을 그리는 자리란 어디에 있을까요. 말은 한국말이지만 한자공동체라는 허울에다가 세계화라는 겉치레에 따라서 제 얼과 넋을 키우지 않고 있는 한국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무슨 눈길과 생각을 사진에 담아낼까요.


.. 나는 분명 외국에 와 있었다. 그것도 우리와 인종과 문화가 완전히 다른 유럽에 생전 처음 온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반가움을 느낀 것일까. 무언가 생전에 살던 동네라도 다시 와 본 듯한 착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려서 읽고 자란 통화의 탓이었다. 나만 해도, 안데르센이며 그림의 동화를 읽으며 자랐다. 인어공주나 백조왕자를 꿈꾸고, 알리바바나 백설공주가 콩쥐나 팥쥐보다 더 익숙한 이름이었다. 라인강변의 옛 성이 낯익어 뵈었던 것도, 그 성을 보면서 잠자는 공주를 연상하게 된 것도 모두 그 옛날에 읽으며 자랐던 서양 동화와 그 삽화가 끼친 기다란 그림자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우리의 옛날얘기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 문득, 내 사진이 돌이켜졌다. 내 사진은 과연 내 것일까. 우리 냄새가 나는 그런 것일까 돌이켜졌다. 우리는 서양식 사고방식, 서양식 감정, 서양식 문화에 너무 진하게 물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찍었다고 그대로 우리 사진일 수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서양 동화보다 우리 전래 동화를 어려서부터 많이 들어 왔더라면 내 사진에서도 우리 냄새가 자연스럽게 풍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유럽 여행/166∼167쪽)


 한정식 님은 대학교수 정년퇴임을 앞둔 1999년, 《사진―시간의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사진산문을 묶어냈습니다. 그리고 2007년, 짜임새를 고치고 책이름을 바꾸어 《사진 산책》을 다시 내놓습니다.

 바뀐 책이름만 놓고 보아도, 한정식 님이 사진을 자기 삶에서 놓지 않고 붙잡는 매무새를 느끼게 됩니다. ‘시간’이니 ‘아름다움’이니 ‘풍경’이니 하는 말을 모두 놓아 버리고 ‘산책’으로 바꾸어 놓은 말마디를 곱씹어 봅니다. 앞으로 세월이 열 해쯤 더 지난 뒤에 이 《사진 산책》을 거듭 찍어내게 될 때, 또는 두 번째 ‘사진 산책’을 나서게 될 때에는 다른 말로 이름을 붙이며 우리 앞에 선보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4341.7.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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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쟁이 톨로키
자케스 음다 지음, 윤철희 옮김 / 검둥소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58 ― ‘차별(인종분리)’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만 있지 않다
 : 자케스 음다, 《곡쟁이 톨로키》



- 책이름 : 곡쟁이 톨로키
- 글쓴이 : 자케스 음다
- 옮긴이 : 윤철희
- 펴낸곳 : 검둥소(2008.6.17.)
- 책값 : 1만 원



 (1) 법이란 누가 누구한테


 ‘국립공원’에는 함부로 찻길을 낼 수 없을 뿐더러, 굴도 뚫어서는 안 됩니다. 국립공원 안쪽 자리에 집이 있는 분들은 집고치기도 거의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법에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도로공사와 개발업자와 산업자원부 공무원 분들께서는 법그물을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특별법을 만들고 어쩌고 하면서 ‘북한산 관통도로’를 뚫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서울시와 정부 정책에 맞서서 환경운동에 뜻을 둔 이들이 막아서려고 했고, 이렇게 막아서려던 이들을 정부는 고발로 맞받아쳤습니다. 법원에서는 정부 손을 들어 주며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리도록 했습니다. 가난한 환경운동 활동가들 몸과 입과 손을 꽁꽁 옥죄려는 짓이었지요.

 2004년으로 떠올립니다. 그때 서울 종로 뒷골목 술집 한 곳에서는 ‘기금 모으는 하루술집’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 가난한 환경운동 활동가한테 내려진 벌금을 서로서로 조금씩 보태어 보자는 뜻으로 마련한 하루술집이었습니다. 술값을 아껴서 돈을 모으면 더 좋을 텐데, 그냥 돈을 내는 사람은 없고, 이렇게 술이라는 이음고리를 거쳐서 돈이 모아지게 됩니다. 어쩌면, 어차피 그리 벌금을 물어야 할 판이라면, 식 웃으면서 내주자는 마음으로, 속풀이도 하고 할 말도 다하는 자리로 술잔치를 마련하는 셈 아니냐 싶기도 합니다.


.. 노리아는 앞날이 두려웠다. 아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여유를 도대체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수업료도 내야 할 것이고, 선생한테 구박받고 쫓겨나지 않으려면 교복 살 돈도 필요할 것이었다. 책도 사야 하고, 선생들이 항상 학부모에게 요구하는 학교 건축 기금도 내야 한다.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  (112쪽)


 지난 대통령선거 때, 인천에서 애쓰는 시민단체 분들은 ‘대통령 후보자 비방’이라는 죄목에 따라 법원에서 벌금 조치를 받았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BBK와 한미FTA투쟁 집회’를 열고 있었음에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명예훼손 고발’이라든지 무어니 없었는데, ‘꼭 한 놈만 잡아서 팬다’는 잣대(?)에 따라서 인천 쪽 시민단체 활동가한테 쇠몽둥이가 내려졌어요. 지난해까지 50만 원 남짓 받으며 일하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올해는 60만 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한테 내려진 ‘후보자 비방 명예훼손 벌금’은 자그마치 1200만 원.

 벌금을 내지 못하면 징역을 살면서 깎아나가야 하는데, 하루에 3만 원씩 쳐 준다고 하니, 400일입니다. 문득, 엊그제 ‘죄없음’ 판결을 받은 큰 재벌 ㅇ 할아버지가 떠오릅니다. 그래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에 벌금이 1100억 원이라던데. 1100억 벌금을 헤아린다면,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집회를 하다가 물게 된 벌금 1200만 원은 껌값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풋.


.. 톨로키와 노리아는 택시 승강장에 다다를 때까지 말없이 걸었다. 그녀의 눈은 젖어드는 눈물 때문에 흐릿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잃어요. 톨로키 오빠, 아이들은 어머니들을 잃고요.” “죽음은 매일 우리랑 같이 살아. 정말이지 우리가 죽어 가는 방법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들이야.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들이 우리가 죽어 가는 방법들이라고 말해야 옳은 걸까?” ..  (131쪽)


 그러고 보면, 저도 ㅈ일보 기자 명예를 더럽혔다는 죄목에 따라서 벌금 200만 원을 문 적이 있습니다. 올 2월에. 그분 이름을 더럽힌 대목에서는 참으로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삶터를 빼앗기고 사람된 권리와 인격을 송두리째 짓밟힌 분들한테는 어느 누가 ‘명예훼손죄’를 받거나 배상이나 보상을 해 주지요?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는 할머님들한테는 누가 잘못했다고 말을 하거나 뉘우치거나 갚음을 하지요?

 제가 살고 있는 동네를 놓고, 인천시장을 비롯해서 개발업자와 개발부서 공무원, 더욱이 문화 담당 공무원들마저도 ‘낙후된 도심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습니다.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닌 수천 수만 사람이 깃들여 살고 있는 동네인데, 어느 누가 무슨 잣대로 함부로 ‘낙후’라느니 ‘지저분하다’라느니 ‘비위생’이라느니 하는 말을 뇌까릴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 동네가 ‘낙후’되었다 한다면, 우리 동네사람들이 여태껏 내 온 세금이 우리 동네를 북돋우는 데에 제대로 쓰인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온지요? 우리 동네가 ‘지저분하다’면, 우리 동네를 좀더 깨끗이 다스리는 데에 우리 세금이 알맞게 쓰인 일이 없던 탓이 아니온지요? 우리 동네가 ‘비위생’이라 한다면, 우리 동네가 ‘위생’을 찾도록 시설과 문화와 복지에 찬찬히 마음을 기울여 본 적이 없는 정책에 책임이 있지 않은지요?


.. 정착촌에 있는 판잣집 중에 닫혀 있는 판잣집은 하나도 없었다. 훔쳐 갈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샤드락처럼 부유한 사람들만이 둥지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새들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러 자기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항상 경계를 해야만 했다 ..  (198쪽)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 나라에서 정치권력을 움켜쥔 분들께서는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도심지 달동네를 허물어 변두리로 내쫓았습니다. 1980년대로 접어들고 1990년대까지, 뒤이어 이 나라 정치힘을 휘두르는 분들께서는, ‘新도시’라는 이름으로 도심지 달동네에서 변두리로 내쫓긴 이들을 다시금 더 먼 바깥자리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를 맞이한 오늘날, 엎치락뒤치락 정권을 뺏고 빼앗긴 분들께서는 ‘new town’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 사람들 삶터를 까뒤집으면서 돈없는 이들을 갈 곳 없는 떠돌이나 떨꺼둥이가 되도록 닦달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새마을’에서 ‘新도시’를 거쳐 ‘new town’이 되었을 뿐, 하나같이 ‘철거와 재개발’을 가리키는 다른 소리였을 뿐입니다. 또한 이 ‘철거와 재개발’은 돈있는 사람들 집터는 건드리지 않는 가운데, 돈없는 사람들 삶터를 깎아내려서 ‘그나마 낮은 집값’을 더 낮추어 내쫓은 다음 아파트를 세우며 집값을 껑충 올려서 서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정책을 꾸려 갑니다.


 (2) 발붙여 사는 곳은


 자전거를 타고 이웃 동네 마실을 합니다. 저녁 여섯 시로 접어드는 때임에도 햇볕이 뜨겁습니다. 땀이 비오듯 흘러내립니다. 손등으로 땀을 훔치며 자전거를 몰아 언덕길을 오르다가, 자전거에서 내려 골목 계단을 사진으로 찍다가, 그늘자리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아주머니나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합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말없이 살짝 웃고 “그려 그려” 하면서 인사를 받아 줍니다.

 벌써 방학을 맞이했는지, 아니면 학교 끝난 뒤인지, 동네 아이들은 셋씩 넷씩, 또는 대여섯씩, 또는 둘이 짝을 이루어서 골목을 가득 채웁니다.

 저는 창영동에 살고 아이들은 창영동과 맞닿은 이 송림동과 숭의3동과 금곡동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이웃한 동네임에도 모두들 자기 동네에서만 노닐 뿐 옆동네까지 가지는 않습니다. 어르신도 아이도 낯선 사진쟁이를 구경하면서 빤히 쳐다보고,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쑥스러워서 사진기를 차마 들지 못하고 우물쭈물 인사만 하며 지나갑니다.


.. 호상은 경찰이 쏜 총알이 벽에 맞고 튀어나오는 바람에 안마당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있던 아이가 맞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많이 봐 왔다. 경찰이 쏜 총알은 타운십에 있는 집들 벽에만 맞으면 이상한 궤적을 그리며 튀어나왔고,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총알들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아이들을 향했다 … 그래서 (부모는) 경찰서로 갔지만 이런 말을 들었다. “아이들은 날마다 실종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들은 나가서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까?” “어디를 살피라는 거요? 이 아이들은 테러리스트 집단에 가담하려고 집에서 도망친 건데.” “그 애는 여섯 살밖에 안 됐어요.” “아주머니, 여섯 살짜리들이 우리한테 돌하고 화염병을 던져요.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당신네들이 좀더 규율 있게 자식 키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게 전부요.” 어린 사내아이의 시체는 초원 지대에서 발견됐다. 그 애는 거세되어 있었다 ..  (60쪽)


 옆지기하고 함께 거닐었다면 좀더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걸었을까 생각하다가는, 아직 한두 번 낯익히기를 했을 뿐이니, 더 다니면서 인사를 하고 만나야 자연스레 말문이 트이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어르신이나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걸며 동네 삶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곧 밀어닥칠 재개발 바람을 어떻게 맞이하며 앞으로 어떻게 삶을 꾸려 나가실는지 여쭙고 싶기도 하지만, 공무원이며 통반장이며 개발업자 사람들이며 기자들이며 또 사진 찍는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며 번거롭게들 하기에, 여기에 한몫 거들고 싶지 않습니다.

 건너편으로 재능대학교가 보이고, 이 앞으로 골목집을 싹 쓸어낸 다음 아파트를 올려세우고 있는 공사터를 내다봅니다. 저곳 공사를 채 끝나지 않고 이곳까지 밀어내고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려나. 저렇게 높이 아파트를 올려세우면 아파트 수십만 채가 새로 지어지는 셈인데, 이 동네에 깃들일 수십만 사람이 있을까. 깃들일 사람이 있다손 치고, 그러면 비싼 분양값을 댈 만큼 주머니가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골목골목마다 크고작은 가게를 차리고 저잣거리에서 좌판을 깔고 서로서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온통 아파트숲으로 바뀐 데에서는 무슨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아파트값만큼이나 비싼 상자나 쇼핑센터에 자리를 얻을 돈이 될까. 지금 이 골목에 깃들인 사람들은 돈있는 사람들 가정부나 밥어미로, 또는 운전수나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으로, 골프장 심부름꾼이나 풀뽑는 사람으로, 대형마트 계산원이나 점원으로 일하는 자리에서 ‘봉사’만 해야 하나.


.. 경찰관이 호통을 쳤다. 남자는 도난당한 옥수수 자루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했다. 그러자 경찰관이 화를 내면서 그의 불알을 걷어찼다. 그러고는 그를 의자에 묶고, 그의 손가락과 목에 전선을 부착했다. 경찰관은 벽에 있는 콘센트에 이 전선들을 연결했고, 남자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똥을 싸고 말았다. “그 농사꾼은 누구고, 그놈들이 묵고 있는 데는 어디야?” “솔직히, 나리, 저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 “네가 그놈한테 옥수수를 팔았잖아. 그러고도 그놈을 모른다고?” “저는 옥수수를 판 적이 없습니다, 나리.” ..  (81쪽)


 한참 골목을 거닐고 자전거로 달리면서 대문 안쪽에 퍽 우람하게 자란 대추나무를 봅니다. 대추나무는 가지를 집 바깥 골목 복판까지 드리웁니다. 푸르게 맺힌 열매가 보입니다. 한 달쯤? 두 달쯤? 얼마쯤 있으면 대추가 익으려나. 대추가 익을 무렵, 이 골목 사람들은 한두 알씩 맛을 볼 수 있으려나. 아무렴 나무임자 혼자서 다 따 버리지는 않을 테지.

 뒷날, 이 동네를 죄 개발해야 한다고 하면, 이 대추나무도 베어내 버릴까. 얌전히 파내어 고이 옮겨심어 주려나. 파내어 옮겨심기까지 돈이 많이 든다며, ‘대추야 돈 주고 사먹으면 되지’ 하면서 차갑게 꺾어버리려나.


.. 밤에는 부둣가나 기차역 벤치에서 잠을 잤다. 공중 화장실에서 몸을 씻었다. 그 시절에는 그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 해변에 들어가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때에는 요즘 그가 하는 것처럼 바닷가에서 몸을 씻을 수가 없었다 … 정부는 사람들에게 집을 주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대신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는 서류를 갖춘 사람들은 도시에서 팔십 킬로미터도 더 떨어진 타운십으로 이사를 해야만 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팔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어떻게 일터에 올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의 직장과 가까운 곳에는 사방에 땅이 있었다. 그 땅들은 모두 백인 주민들을 위한 개발 지역으로 계획된 곳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격을 입증하는 필수 서류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그들의 고향이라고 정해진 곳들로 그들을 돌려보내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  (163∼164쪽)


 우각재13길을 지나면서, 얕은 대문간 위로 촘촘히 박아 놓은 ‘깨진 병조각’을 봅니다. 대문간 바로 옆 담벽은 그리 높지 않은데, 여기에는 ‘깨진 병조각’을 심어 놓지 않았습니다. 도둑이 넘어오려 한다면, 대문간 위가 아닌 담벽을 타고 넘을 텐데, 이 동네에 뭘 훔치려고 찾아올 도둑이 있을까, 헤아려 보다가, 도둑은 많건 적건 돈만 볼 뿐, 이웃사람들 삶을 돌아보지 않지, 하는 생각이 뒤따릅니다.

 도둑이 걱정스러워 집집마다 자물쇠를 단단히 채우고, 창문에도 쇠로 된 창살을 붙입니다. 새로 지은 아파트는 단추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고, 첨단경비장비에 경비원까지.


.. 보석으로 몸을 장식하고 있는 여자가 노리아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노리아는 조용히 듣고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멀리 떨어졌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말이 한 마디도 없다고 느꼈다. 지도자들은 그녀를 향해 얘기만 했지, 아들의 죽음에 대해 그녀하고 논의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당신들, 우리 존경스러운 지도자 분들께 빵하고 양배추를 대접한다는 게 말이나 돼?” “당신들은 우리가 뭘 대접해 주기를 바란 건데요?” “우리 지도자 분들께 어울리는 음식이지. 너무 게을러서 고기랑 감자랑 쌀은 요리를 못하겠던가? 샐러드 만드는 것도 못하겠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먹는 음식들만 그들에게 줄 수 있어요. 그들은 우리가 겪는 가난을 두 눈으로 목격해야만 해요. 저녁으로 팝하고 물만 먹는 처지인 우리가 고기에 쌀을 먹고 사는 사람들인 척 꾸밀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요.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에게 잘 대접했어요. 평소에 우리는 빵도 못 먹잖아요.” ..  (237∼238쪽)


 어둑어둑해질 무렵, 자전거머리를 돌려 집으로 달립니다. 가는 길에 정보산업고등학교 뒷문 가에 자라는 해바라기 앞에 멈춰서 손짓으로 인사를 한 다음, 금곡슈퍼 앞에서 자라는 꽃들한테 눈짓으로 인사를 합니다.


 (3) 남아프리카와 《곡쟁이 톨로키》


 집으로 돌아와 후다닥 씻고 빨래 담가 놓은 다음 시민모임 회의에 가려고 서두릅니다. 손가방에 책 하나 챙겨듭니다. 여러 사람이 부지런히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귀로 이야기를 듣고, 눈으로는 책을 읽습니다. 이야기는 길어져서 두 시간을 넘깁니다. 뒤풀이 자리가 있어 소주 한 병 들이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비누질을 해서 몸을 씻고 빨래 한 점을 한 다음, 책상맡에서 책 세 권을 집어서 잠자리에 놓습니다. 한 권 한 권 조금씩 펼치자니 졸음이 쏟아지고, 이내 잠듭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읽던 책을 다시 들춥니다. 여러 해 앞서 사두고 읽다가 그만둔 책을 다시 펼치는데, 읽는 내내 물음표를 자꾸 찍습니다. 이런 철없는 책을 낸 출판사 일꾼들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기를 바랄까, 하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사람들을 ‘야만인’처럼 여기는 이야기를 ‘뒤로 가면 글쓴이 스스로 자기가 철이 없었다고 깨달으며 달라지려나’ 하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읽는 저도 참 철이 없습니다.

 내가 참 철없는 책에 돈을 쏟았군, 하고 생각해 보았자 어쩔 수 없는 노릇. 읽던 책을 덮고 다른 책을 집어서 펼칩니다. 삼백 해쯤 앞서 우리 나라 어느 지식인이 적바림한 글입니다. 양반집 사람이라 한문으로 쓴 글을 요샛말로 옮긴 책입니다. 훈민정음이 있던 때에 한문으로 글을 썼으니, 한문을 아는 사람한테 읽히려고, 또는 한문을 아는 뒷사람한테 물려주려고 썼겠지요. 이분은 뒷사람한테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서 이와 같은 글을 남겼나, 생각하면서 읽는데, 지루해서 하품이 나옵니다. 그때로서는 훌륭한 선비였다고 하지만, 그때로서 훌륭했던 분이라 해도 세월이 흐른 뒤까지도 우리가 훌륭함을 느끼기는 어렵기도 하군요.


.. 톨로키는 그들이 방문하는 모든 판잣집에서 여자들이 가만히 있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들은 항상 손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요리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아이들을 야단치고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 있었다. 판잣집 바닥과 땅을 쓸고 있었다. 마분지와 플라스틱으로 판잣집에 난 구멍을 막고 있었다. 빨래를 빨랫줄에 걸면서 이웃들과 시끌벅적하게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니면 자기네 아이를 때린 아이들 때문에 이웃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또는 그들의 일자리인, 주인마님의 주방이 있는 도시행 택시를 잡기 위해 택시 승강장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항상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들은 끊임없이 몸을 놀리고 있었다. 반면 남자들은 시시하고 공허한 자존심으로 자신들의 머리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 그러고 나서 밤이 되면 음식이 저절로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처럼 저녁이 차려져 있기를 바랐다. 아이들이 다 잠들었다는 믿음이 생기면, 남자들은 쾌락을 얻고 싶어했다 ..  (239∼240쪽)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났으나 고향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더는 발붙이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을 가야 했던 사람이 쓴 《곡쟁이 톨로키》를 읽어냅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글쓴이는 고향나라로 돌아가고 싶을까. 고향나라에서는 자기처럼 떠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 줄까. 지금 깃들여 사는 나라에서는 자유나 평화나 평등을 누릴 수 있을까. 고향나라에서 따돌림과 푸대접과 괴롭힘이 사라진다면 글쓴이는 고향나라로 돌아가고자 할까.


.. 캠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 관계가 돈독한 공동체다. 그들은 서로를 알았다. 한편, 그는 사람들이 ‘불법 거주자’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종종 물었다. “우리 땅, 우리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불법 거주자일 수 있는가? 바다를 가로질러 우리 땅을 빼앗은 자들이야말로 불법 거주자다.” ..  (62쪽)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에 따른 차별)’가 있었으나, 이 ‘아파르트헤이트’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돈, 힘, 무리.

 돈은 마을사람 사이를 쪼개 놓을 뿐더러 같은 겨레나 식구나 동무를 갈라 놓습니다. 힘은 살갗 하얀 사람과 검은 사람 사이를 나눌 뿐 아니라, 살갗 같은 사람들끼리도 계급을 나누며 푸대접받는 이는 또다른 굴레를 뒤집어쓰게 합니다. 무리는 사랑이 아닌 욕심을, 나눔이 아닌 빼앗음을 불러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떨쳐낸다고 한들, 돈을 떨치지 못하고 힘을 떨치지 못하며, 무리를 떨치지 못한다면, 허울좋은 이름으로 ‘인종분리 차별’은 없다고 외칠 수 있을지 모르나, 사람들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 “나머지는 말이야, 노리아! 네폴로브호드웨가 제안한 대로 팔아 버려야 할까 봐. 마딤브하자의 하치장(고아원)에 돈을 줄 수 있게.” “그냥 여기 놔둬서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웃게 해 주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이것들 주위에 커다란 판잣집을 지어서 아이들이 마음에 내킬 때면 언제든 와서 웃을 수 있게 해 주는 거예요.” ..  (289∼290쪽)


 나이든 분들은 으레 ‘한국이 배고픔에서 벗어난 데에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경제개발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만, 경제개발을 했다고 하더라도(참말 했는지 안 했는지 알 노릇은 없습니다만) 우리 스스로 사랑을 버리고 돈을 좇는다면, 나눔을 내팽개치고 힘을 바란다면, 믿음을 깔아뭉개고 무리를 따른다면, 한국 사회는 ‘먹고살기 팍팍하던 때’하고 조금도 달라질 대목이 없습니다.

 옷차림은 번듯해졌는지 모르나 옷값 대느라 쩔쩔매고, 반찬 가짓수가 늘었는지 모르나 밥값 대느라 힘겨우며, 넓고 시설 갖춘 아파트에 살는지 모르나 관리비에 학원비 버느라 등골이 휩니다. ‘좋아졌네 나아졌네’ 하지만, 끝없이 서로 겨루고 다투어 올라서야만 하는 노릇이라면, ‘나빠졌네 죽겠네’ 꼴입니다.

 희망? 꿈? 앞날? 아이들? 글쎄, 좋아서 그리도록 하지 못하고 입시미술만 있는데. 좋아서 글쓰도록 하지 못하고 입시논술만 있는데. 좋아서 가르치지 못하고 입시교육만 있는데. 쓸모가 있어서 배우지 못하고 입시영어만 있는데.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인데. 좋아서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아랫도리 흐뭇하려고 만나는 사람인데. 좋아서 마시는 술이 아니라 그저 퍼넣는 술인데.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이 삶이며 무엇이 목숨인지를 잊어버린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사람과 삶과 목숨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믿음이며 무엇이 나눔인지를 내팽개친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사랑과 믿음과 나눔을 물려주지 못합니다. 무엇이 착함이고 무엇이 아름다움이며 무엇이 맑음인지를 팔아치운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착함과 아름다움과 맑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어른한테 배우고 물려받으며 보는 것이란, 오로지 돈벌기와 돈굴리기와 돈쓰기입니다. 계급과 차별과 겉치레를 낳는 돈만 배우고 물려받고 바라봅니다. (4341.7.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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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55 : 김수정 ④ 1남 4녀 막순이



 어제(7/2) 인천 답동성당에서 ‘시국미사’를 올리고 ‘길거리 걷기’를 했습니다. 6월 30일에 서울 시청 앞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이름으로 시국미사를 올린 뒤 이틀 만입니다. 인천이라는 곳은 온통 서울에서 하는 일에 끄달리기만 하고, 인천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마음이나 힘을 못 쏟기 마련이었습니다. ‘나라에 일어나는 큰일’에는 힘을 보태곤 하면서도, 정작 ‘인천에서 일어나는 큰일’에는 바쁘고 힘들다며 모르는 척하기 일쑤였습니다. 인천사람이면서 인천에서 일하는 사람보다는,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일하고 놀고 사람 만나는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인천은 고유하거나 홀로설 만한 힘이나 뜻도 모자라서, 다른 어느 도시보다 시장 힘이 크고 공무원 콧대가 높습니다. 이런 인천에서 삼백이 조금 넘는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가 중심이 되어 시국미사를 올리고 길거리 걷기를 했습니다. 답동성당부터 동인천역까지 찻길 한쪽을 차지하면서 이만한 사람들이 걸어가며 무언가를 외치기는 스물한 해 만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시국미사를 마칠 즈음, 신부님은 “답동성당 문에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사절한다는 쪽지를 내다 붙였습니다. 여러분 댁에도 붙이셨습니까?” 하고 물은 뒤, 당신 본당인 강화섬 마니산성당이 있는 마을에는 신문이 조선일보 한 가지만 들어온다며, 어쩔 수 없이 자기도 이 신문을 보는데, 여섯 달 만에 조선일보 논조와 똑같이 생각하며 살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그 성당에서 조선일보를 끊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조중동’이라고 하는 그 신문들이 얼마나 나쁘기에 신부님이 이렇게 이야기할까 싶고, 그렇게 나쁘다는 신문인데 여태껏 성당에서는 안 끊고 있었음이 놀랍고, 그렇게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고 하는데에도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그 신문들을 보고 있는 까닭이 궁금합니다. 설마 기자들이 나쁘겠습니까. 신문들이 나쁘겠습니까. 오랫동안 제도권 교육에 길들면서 우리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매무새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내로라하는 대학교를 마치고 나라밖에서 공부도 하고 머리에는 지식도 많으나, 이 모두를 아름답게 어우러 내지 못하며 이웃과 나누는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 탓 아니겠습니까.


 “자만하지 마시고,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하셔서 존경받는 배우가 되세요.(3권 182쪽)” 책꽂이에서 김수정 님 만화 《1남 4녀 막순이 (1∼3)》(서울문화사,1990)를 꺼냅니다. 그동안 삼백 번도 더 보아서 그림 하나 얼굴빛 하나 대사 하나 환하게 알지만, 다시 넘겨보면서도 눈물이 핑 돌고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김수정 님으로서는 만화쟁이로 더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울던 1980년에, 이 만화를 그려내며 비로소 ‘김수정’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립니다. 그리고 만화 맨 마지막에, 하숙하며 살던 ‘수복’ 씨가 영화배우로 뜻을 이룬 일을 기뻐하는 집임자 아주머니 말 한 마디처럼, 김수정 님 당신도 ‘우러름받는’ 사람이 되고자 부지런히 땀을 흘렸지 싶습니다. 만화를 그려 돈을 벌고 이름을 날리고 힘을 펼치기보다, 사랑받을수록 더 땀흘리고 다리품 파는 사람이 되고자. (4341.7.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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