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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 마음을 담은 그릇
호연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도자기’와 ‘만화’에 담은 아름다운 마음
[살가운 만화 38] 호연, 《도자기》
- 책이름 : 도자기
- 글ㆍ그림 : 호연
- 펴낸곳 : 애니북스 (2008.5.13.)
- 책값 : 14500원
(1) 우리 아기한테 쏟는 마음
동네에서 무슨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도서관에 찾아와서 우리 집 옥상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 싶다고 하기에, ‘그러마’ 하고 올라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옥상에서 둘레를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살림집까지 들어간 듯합니다. ‘우리 집에 들어가겠다’고 여쭙지 않았으며, ‘살림집에 들어가 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버젓이 다른 사람 집에 들어갔고, 집에서 더위를 식히며 무거운 몸을 가누고 있던 옆지기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옥상이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고 둘러대었다는데, 텅 빈 옥상이 아니라, 창문과 대문이 따로 있는 집이 한쪽에 있고, 문간에는 신발이 여럿 놓여 있으며, 더워서 열어 놓은 대문 안쪽으로는 여러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보이는데, ‘집이 아닌 옥상’으로만 여긴다는 대목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참 딱한 사람들이구나, 그렇게 하면서 무슨 공연이니 예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러면서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않을 수 있나, 그런 마음으로 자기들 공연이나 예술에 무얼 담는다고, 그 영상 장비에 무슨 그림을 담는다고.
.. “난 우리 아버지가 새 같다고 생각했어요. 나랑 눈을 잘 안 맞추거든요.” .. (32쪽 / 청화백자 매화 대나무 무늬 병)
오늘도 그지없이 더운 하루입니다. 창문을 모두 열고 자리에 앉아 도서관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흐릅니다. 부채질을 하지만 부채질을 멈추면 다시 땀이 흐릅니다.
틈틈이 낯과 손을 씻어 보지만, 씻을 때만 잠깐 시원한데, 수도물도 뜨뜻미지근입니다.
아침나절 옥상마당에 널어 놓은 이불은 햇볕을 아주 듬뿍 머금고 있고, 빨래는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바싹 마릅니다. 다시 한 번 낯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빨래 한 점을 합니다. 손과 발은 물이 닿아 땀이 조금 식혀지지만, 빨래 하는 몸은, 등줄기로는 땀이 흐릅니다.
.. “개구리다!” “위험해.” “어, 이 자식 더워서 안 움직이냐.” “죽은 척하는 거야.” …… “나 시골 가서 개구리 봤다.” “난 두꺼비도 밟아 죽였어. 타이어에 펑.” .. (70쪽 / 청화백자 매화 대나무무늬 연적)
이렇게 더운 여름날 아기가 태어난다면, 아기 어머니도 힘겹고 아기도 힘겨울 텐데, 아기가 나올 무렵은 조금 선선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반가우랴, 고마우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오늘처럼 더운 날씨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기는 더위를 느끼며 태어나, 이 세상은 이렇게 더운 여름임을 느껴야 할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 살림집에서는 전기 먹는 살림살이 거의 없고, 자동차도 없으며,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도 없지만, 우리가 이런 물건을 안 써도 이웃사람 모두가 이 물건을 아주 흥청망청 쓰고 있기 때문에, ‘남 탓’을 할 일이 아니라 ‘함께 껴안을 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기는 이 모든 짐을 두 어깨에 얹어놓으면서 태어납니다. 만만하지 않은 세상임을 알아가게 됩니다. 서로서로 나 몰라라 하는 세상임을, 자꾸자꾸 쓰고 버리기만 하는 세상임을 느끼게 됩니다. 버려지는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가는 헤아리지 않는 세상임을, 이리하여 자기 꿈을 펼치면서 살아가기에는 몹시 막혀 있는 세상임을, 참된 공부를 바라고 아름다운 일을 하며 즐거운 놀이를 함께 하면서 땀흘리는 보람을 느끼고 싶어도 늘 벽에 부딪쳐야 하는 세상임을, 한 해 두 해 자라는 동안 몸으로 배우겠지요.
.. “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숙사의 아침밥을 받아.” “부지런하군.” “다시 자. 아침에 누룽지 퍼 온 통 안고.” “맙소사.” “점심때 일어나서 그걸 먹고 수업 가.” “으엑 비위생.” …… “이거, 호연 너가 예전에 말했던 인화문이지?” “엉? 음. 누룽지 무늬네, 누룽지.” .. (106∼108쪽 / 분청사기 인화무늬 장군)
우리 두 식구는 우리 나름대로 아기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집임자가 이 해묵은 집을 아주 조금 손질해 주겠다고 해서, 월요일에 창문샤시 하나 덧달아 주고, 작은 방 벽에 압축단열재를 붙여 준다면, 그나마 덜 시끄럽고 모기하고도 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공사만 마치면, 바로 창문마다 긴천을 두껍게 달아 빛이 새어들지 못하게 막을 생각입니다. 바닥에 깔 이불이나 담요는 모두 마련했습니다. 가위와 실도 가까운 곳에 두었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누런쌀 십 킬로그램도 주문해 놓았으니, 두 달쯤은 집에만 있어도 밥을 해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틈틈이 저잣거리 나들이를 얼른 하면서 날푸성귀 장만을 해야겠지만.
가장 큰 일이라 한다면, 옆지기도 옆지기이지만, 제가 혼자서 아기낳이를 거드는 한편, 똥오줌 받아내고 땀 닦아 주고 밥 차려서 먹여 주기를 한 달 가까이 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집안을 쓸고닦는 일, 밥벌이 하는 일, 또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을 모두 해내야 하는 대목.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지치거나 마음을 놓아 버리게 되면 안 되는 아이낳기입니다. 둘 모두 몸을 잘 간수하면서, 꼭 알맞춤하게 움직이고 일손을 나누고 마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 ‘내가 어릴 적,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화장하여 남은 재를 본 적이 있다.’ … ‘와, 정말 희다.’ .. (136쪽 / 분청사기 물고기 무늬 편병)
살림집에서 누워 있던 옆지기가 도서관으로 내려옵니다. 너무 덥고 허리가 아프고 배도 아프다고 합니다. 아기가 나온 뒤에도 이렇게 더우면 어떻게 누워 있어야 하느냐 걱정을 합니다.
저도 걱정입니다. 더운 날, 더운 집, 더운 몸이 되어서 이 어려움을 견디어 내야 한다니 참 걱정입니다. 씻는들, 부채질을 한들, 작은 선풍기 하나 돌린들, 더위를 얼마나 털어내면서 아기를 안아 줄 수 있을지 근심입니다.
더욱이, 아기가 나오면 석 주 동안은 빛을 보면 안 되는데, 창문을 닫고 긴천을 드리워 놓으면 여름날 방은 훨씬 후덥지근할 테지요. 갓 태어난 아이는 밝은 빛을 보면 눈이 다칩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텔레비전과 셈틀을 가까이하기에 눈이 많이 나빠져서 안경을 많이 낀다고 하는데, 이런 탓도 틀림없이 있지만, 처음 세상에 나올 때 병원에서 나오다 보니, 병원에서 눈부시게 켜 놓은 불빛에 눈이 다칩니다(병원에서는 아기와 함께 아기 어머니도 센 불빛 때문에 눈이 다치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아무래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아기 어머니 위로 불을 환히 밝힐 뿐 아니라, 수많은 ‘(아기하고) 낯선 사람들’이 시끄럽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아기가 나온 뒤, 탯줄로 쉬는 숨을 마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 다음 탯줄을 자르고, 탯줄을 자르고 나서 아기는 어머니 곁에서 죽 지내야 합니다.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아기를 낳은 뒤로 한 주에서 열흘까지 그대로 누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몸을 움직이면 아기 어머니는 엉덩뼈가 뒤틀립니다. 아기 낳은 뒤 몸을 함부로 움직여서 엉덩뼈가 뒤틀리면 등뼈도 뒤틀리고, 젊은 날에는 그럭저럭 버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어머니는 허리아픔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누운 채로 똥오줌을 누어야 하고, 옆에서 이를 받아 주고 닦아 주는 도움이가 꼭 있어야 합니다.
.. “18세기 전반 조선각병 같던 내 몸이 18세기 후반 각병이 되었구나.” “호연아.” “저리 가. 너랑 이젠 안 마셔.” “나, 이번 달 군대 가는데.” “그럼 마셔야지.” ‘내 몸은 이제 떡메병으로 치닫고 있다.’ .. (263∼264쪽)
그렇지만, 우리가 집이 아닌 병원에서 아기를 낳으려 한다면, 이 모든 터전을 제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집은 기찻길 옆 집이라서 기차소리로도 시끄럽지만, 병원 시끄러움은 이와는 또 다르게 클 뿐더러, 지나치게 밝고, 자꾸 아기 어머니를 움직이게 하며, 아기와 아기 어머니 모두 고요하며 느긋하게 쉬도록 마음을 써 주지 못하는 얼거리입니다. 그러니, 소중한 아기를 낳으려 하면서 병원에 갈 수 없습니다. 병원에 갈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 “새들은 나한텐 절대 안 오면서 나무한텐 잘 가요.” “빨리 안 써?” “아, 나무한테는 자석이 있는 것 같아요! 새 끌어들이는 자석!” “다 튄다, 욘석아.” .. (349∼350쪽 / 청자 상감 구름 학 무늬 매병)
병원이라는 곳에서 아기낳기를 ‘돈벌이’나 ‘일거리’가 아닌 ‘한 목숨한테 바치는 마음 기울임’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새 목숨은 병원이라는 데가 아니라, 자기 어버이와 함께 살아갈 집에서 낳아야 함을 헤아릴 수 있다면, 나라 정책도 어느 만큼은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병원이나 나라한테 무엇인가를 바라기 어렵습니다. 바란다는 꿈을 안 꿉니다. 사회 얼거리나 틀거리가 벌써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며, 사람들 생각과 느낌 모두 ‘아기와 아기 어머니한테 참답게 마음을 쏟는 일’이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습니다. 아기를 낳으면 돈 얼마 주고 한다는 정책이 아니라, ‘아기낳기란 무엇인가’부터 헤아려야 할 텐데. 아기를 낳은 뒤 아기한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가 아니라, ‘아기가 살아갈 우리 땅 우리 터전이 얼마나 아름다울까’부터 살펴야 할 텐데.
(2) 만화책 《도자기》에 담긴 마음
네이버 웹툰에 실리던 《도자기》가 지난 5월에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널리 사랑받는 웹툰이 곧잘 만화책으로 묶이곤 하는데, 정작 책으로 묶인 웹툰 가운데에는 ‘인터넷만화 빛깔’을 제대로 못 살린 판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굳이 종이로 찍어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드는 책도 꽤 있습니다(제가 보기로는).
《도자기》는 인터넷만화로만 실리던 때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책으로 나오기’를 바랐고, ‘책으로 나온’ 뒤에는 인터넷만화 때 못지않게 두루 사랑받고 있습니다.
.. “말씀 너무 재밌었어요. 선생님 경험담들요. 저는 고고미술사학과의 일들을 만화로 그리고 있는데요, 선생님의 경험을 그려도 좋을까요?” “…… 응, 그래 …….” “이 교수님, 저 만화 그리고 있답니다. 도자기에 관해서 말예요.” “그래?” “…….” ‘만화라서……일까.’ .. (46∼47쪽 / 백자 철화 끈무늬 병)
만화에 자주 엿보이는데, 그린이 호연 님이 하는 ‘고고미술사학과’ 공부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고 합니다. 뜻도 모르는 채 끝없이 외워야 하는 한자와 한자 이름에다가, 교수가 파헤치는 갈래에 따라서 연구학설이 다르고, 보고서와 시험범위는 끝도 없을 뿐더러, 도자기를 만화로 담아내는 그린이 뜻을 헤아려 주는 스승(교수)은 보이지 않고.
.. ‘옛 도공들은 동심이 가득했나 보다.’ .. (96쪽 / 신발 모양 토기)
그렇지만 호연 님은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하는 공부가 아니었고, ‘많은 이들이 보는 자리에 선보였다’고 하지만 뽐내 보이려고 그린 만화가 아니었습니다. 좋아하는 공부요 즐기는 만화입니다. 만화 어느 대목에서도 그린이 스스로 “공부가 좋았어요” 하고 말하거나 “만화가 즐거워요” 하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만, 만화를 보는 동안 호연 님 이분은 자기가 파고드는 공부를 참 좋아하고 이렇게 공부하는 자기 삶을 만화로 담아내는 일을 무척 즐기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도자기와 하나가 되어, 도자기가 처음 태어나던 그때 그 ‘도공’은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꿈꿉니다. 도자기를 배우는 지금, 자기가 죽고 사라질 먼 뒷날까지도 죽지 않고 남을 도자기(자기가 빚은 도자기)를 들여다볼 그때 그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오늘날을 어떻게 헤아려 보게 될까를 꿈꿉니다.
.. “뭐 해?” “토기에 내 일상을 붙여, 먼 후대까지 알릴 거야.” .. (99쪽 / 토우 장식 긴 목 항아리)
반가웠던 일은 반가웠던 마음을 잊지 않고 만화로 녹여냅니다. 슬펐던 일은 슬펐던 마음을 놓지 않고 만화로 곰삭여냅니다. 기뻤던 일은 기뻤던 마음을 잃지 않고 만화로 되살려냅니다. 아팠던 일은 아팠던 마음을 흘려보내지 않고 만화로 차곡차곡 담아냅니다.
사진을 하려면 사진과 함께 살고, 글을 쓰려면 글과 함께 살아야 하듯, 호연 님은 만화와 도자기 공부를 하면서 만화로 사는 한편 도자기 공부로 함께 삽니다. 이 삶이 따로 떨어지지 않은 채 하나로 묶였고, 하나로 묶인 ‘만화와 도자기’는 어엿한 이야기 보따리가 되어, ‘외로운 사람(18쪽)’들 마음에 살며시 다가가며 ‘좋은 마음동무로 어깨동무를 하는 손길’로 뻗어나갑니다.
.. “여러분, 이 상이 어느 나라 건지 맞춰 볼래요?” “신라요!” “백제요!” “고구려요!” (하하, 귀여워) “자, 다들 정답이에요. 이 보살상은 고구려 것도 백제 것도 신라 것도 돼요. 그런데, 여러분 세대는 앞으로 논술이 매우 중요해요. 그러니까 글 쓸 때, 고구려 것이라고 쓰면 10점, 신라 거라고 쓰면 20점, 백제 거라고 쓰면 50점, 삼국시대 것이라고 쓰면 100점입니다. 자, 그럼 다음 걸 볼까요.” … (보살님은 100점짜리 논술답안지셨군요. 사람들은 어떤 큰 오해를 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 (164∼167쪽 / 분청사기 조화구름무늬 대접)
우리 나라 대학교에는 ‘고고미술사학과’도 있고 신문방송학과도 있으며 동양사학과도 있습니다. 에스파냐말을 다루는 학과가 있고 유고슬라비아말을 다루는 학과가 있으며 네덜란드말을 다루는 학과가 있습니다. 농학과가 있고 사회복지학과가 있으며 한국어교육과가 있습니다. 수많은 학과가 있습니다.
만화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 있으며 글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호연 님은 고고미술사학과 공부를 하면서 만화를 즐겼습니다. 이 나라에서 대학생으로 있는 분들이라면 네덜란드말을 공부하면서 글을 즐길 수 있고, 농학 공부를 하면서 사진을 즐길 수 있겠지요. 꾸려 가는 삶에 따라 얻게 되는 이야기가 다르고, 얻게 되는 이야기가 다른 가운데 벗과 함께 나눌 생각이 넓어집니다. (4341.8.10.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