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서갑숙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 책에 담긴 참된 속마음을 읽어 주기는 너무 힘들까


- 책이름 :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 글쓴이 : 서갑숙
- 펴낸곳 : 중앙 M&B (1999.10.15.)



 우리 집에서 딸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옆지기 어머님이 찾아왔습니다. 아기가 궁금하고 당신 딸아이가 딸을 낳은 모습이 대견스러워서 몸풀이를 거들어 주려고 오셨습니다.

 옆지기 어머님이 우리 집에 함께 머무는 동안, 낮 나절에 곧잘 책을 펼치시곤 했는데, 제 책꽂이에 꽂힌 책 가운데 서갑숙 님 책 《추파》를 읽으셨습니다.


.. 그래, 나약한 나의 젊은은 이렇게 간다. 이렇게 중얼거리는 내 곁에서 친구들도 각자의 삶에 절망한 듯 고개를 꺾고 앉아 있었다. 담배 연기가 새어나갔는지, 친구의 어머니가 방문을 두드렸다. “쯧쯧쯧, 벌써부터 이러면 되니?” 너저분해진 방을 보고 친구의 어머니는 혀를 찼다. 대학은 떨어졌고, 나는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국문학과를 지망했지만,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바꿨다. 어차피 짧게 살 목숨이라면, 연극을 통해 다양한 인생이나 경험해 보고 죽자는 생각이었다 ..  (29쪽)


 벌써 퍽 여러 해가 된 일입니다. 책마을 선배한테 이끌려서 서울 인사동에 있는 ㅍ이라는 술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날 그곳에는 여러 손님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여러 손님들이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술잔도 주거니 받거니 했습니다.

 서로 이름도 모르면서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 나중에 술값은 어찌할까 걱정스럽지만, 이런 걱정은 저 혼자뿐, 모두들 웃고 떠들며 어울립니다. 한참 술잔을 부딪히다가, 책마을 선배가 제 옆에 앉은 분이 서갑숙 씨라고 소개해 줍니다. 처음에 따로 소개를 안 한 까닭은 최종규 씨라면 으레 알겠거니 싶어서. 그러나 텔레비전 안 보는 제가 서갑숙 씨를 어찌 알아보겠습니까. 원더걸스도 모르고 채연도 모르고 하는데.


.. 어쨌든 그런 폭력적인 경험들을 겪으며, 역시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사랑이라는 생각을 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진심어린 사랑이 없는 한, 그 어떤 섹스나 스킨십도 폭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45쪽)


 이름을 알게 되며 조금 더 찬찬히 이야기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분이 저를 어찌 속깊이 알겠으며, 저 또한 그분을 어찌 속깊이 알랴마는, 그날 그 자리에서는 허물없이 술과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그렇게 만난 뒤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라는 책을 하나 찾아봅니다. 어느 헌책방에 가 보아도 여러 권씩 꽂혀 있는 이 책을, 꽂히기는 많이 꽂혀도 애써 끄집어내어 읽는 이 없는 이 책을.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빨간 띠가 둘러져 있는 이 책을 찬찬히 넘겨봅니다(책을 읽어 보면, 이 책이 이런 빨간 딱지를 받아야 할 까닭은 조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이름을 출판사에서 이렇게 붙여 버렸으니…….). 그날 그 술집에서 보고 느낀 서갑숙 씨 외로움과 고단함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헤아려 봅니다.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보면서 사귀고 싶어하고, 사람을 사람 그대로 느끼면서 어우러지고 싶어하던 그 눈매를 곱씹어 봅니다. 사람 많은 세상이고, 사람 넘치는 서울이며, 사람 복닥이는 이 땅인데, 왜 서갑숙 씨 여린 가슴에 사랑과 믿음이 고이 내려앉아 열매를 맺도록 어깨동무를 하려는 손길이 보이지 않을까 뒤돌아봅니다.


.. “얼마나 남았어요? 아직 멀었나요?” 그러다 진통이 잦아지고 심해지자, 나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이리 좀 와 봐요!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런 내 곁을 냉랭한 태도로 지나치는 간호사가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몰랐다 … 간간이 잠이 깨어 눈을 떠 보면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고마워요.”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  (85∼86쪽)


 비 퍼붓던 어제 아침, 인천으로 볼일 보러 가려고 부지런히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저는 2000번 빨간버스가 씨잉 빠르게 지나가며 거님길 안쪽 깊이까지 튀겨 주는 물보라를 흠씬 뒤집어씁니다. 저녁나절 일산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건널목 신호가 바뀌어 건너는데 아랑곳않고 제 앞으로 휭 지나가는 까만 자동차를 몰며 한손으로 손전화로 수다를 떠는 아줌마를 봅니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탈 때에는 마구 밀치기까지는 안 하지만 먼저 타려고 안달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버스에서는 둘레 사람이 시끄러워하거나 말거나 작지 않은 목소리로 “존나 씨발 짜증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내뱉으면서 자기 남자친구가 지저분하네 뭐네 하고 수다를 떠는 아가씨를 봅니다. 전철로 갈아탄 자리에서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있다가 내릴 때가 되어 가방을 영차 하며 메는데 내 뒤쪽으로 갑자기 지나가면서 가방을 툭 쳐서 미는 아저씨를 봅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꼭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분들 마음결이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이대로 살아도 당신들 먹고사는 데에는 아무 걱정이 없을지 모르겠는데, 이대로 살아가는 당신들 모습은 아름다움하고는 자꾸만 멀어지는구나 싶어 안타깝습니다.


..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동안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원치 않는 고통을 한탄하며 자기를 학대하고 비하해 왔기 때문이다. 나의 노화는 세월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노화에서 온 것이 틀림없다 … 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섹스에 대해 무지했던 것일까? 그저 상대방이 이끄는 대로 섬세한 교감 없이 치러내는 섹스, 소극적인 섹스만 나누다 보니 진정한 육체적 사랑이 찾아왔을 때 적응을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  (169쪽)


 헌책방 책시렁에서 찬대접을 받는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한 권 장만해서 읽은 뒤, 헌책방 나들이를 할 때마다 이 책이 보이면 한 권씩 더 사 두게 됩니다. 가방에 한 권씩 넣고 다니면서, 만나는 이들한테 이 책을 아느냐고 물어 본 다음, 아직 안 읽었다고 하면 선물로 내밉니다.

 이 책을 고맙게 받아들고 읽어 줄는지, 귀찮게 뭔 책이냐 할는지, 썩 재미도 없어 보이는 책을 왜 주느냐고 할는지, 얄딱구리한 책을 자기한테 선물하는 꿍꿍이가 뭐냐고 할는지 모릅니다만, 조용히 내밀고 조용히 서갑숙 씨 이야기를 들려주고 조용히 우리가 걸어가는 삶과 가꾸는 삶을 짚어 보자고 말합니다.


.. 내가 그렇게 흥분했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한 개인의 삶이 구겨지든 찢어지든 상관않고 멋대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정말 싫었어. 돌아서서는 금세 잊어버릴 말들을, 남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까지 내뱉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  (212쪽)


 《추파》를 읽은 옆지기 어머님은 어떤 느낌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옆지기 어머님한테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선물해 드리면 즐겁게 읽으실지, 그냥저냥 받아들이실지 궁금합니다.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즐겁게 읽어 주신 분이 있으면 《추파》도 선물해 주고 싶은데, 여태껏 스무 권 가까이 선물해 오는 동안, ‘읽은느낌’을 들려주는 분이 없습니다. 책이름만 보고 덮었을지, 머리말 몇 줄 읽다가 덮었을지, 책 몸글 몇 쪽이나마 읽다가 덮었을지, 아예 들여다보지 않고 덮었을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 한몸 먹고살기에도 바쁘고 빠듯한데, 서갑숙이든 누구든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껴안고 있는지 돌아볼 틈이 어디 있어?’ 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드시 서갑숙 씨를 알라고 이 책을 건네지 않았습니다만. 구태여 서갑숙 씨 삶이나 생각을 알라고 이 책을 내밀지 않았습니다만. 딱히 서갑숙 씨 길을 돌아보라고 이 책을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4341.9.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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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작가란 사람들은 왜


 우리 딸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몇 가지 글로 써서 띄워 놓았더니, ‘독특하게 키우는 육아 이야기를 취재하고 싶다’는 연락이 몇 군데에서 옵니다. 제 글을 읽었으면 틀림없이 ‘세이레가 되기까지 아기 사진은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다’고 적은 대목도 보았을 터인데, 사진기도 아닌 촬영기를 들이밀려고 하는 마음을 어떻게 품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아찔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방송 타는 일을 대단한 자랑으로 알 뿐더러, 방송을 타 보려고 너나없이 나서는 판입니다만, 저 같은 사람은 그깟 방송에 나간들 어떠하고 안 나간들 어떠하랴 하고 생각합니다. 방송국 사람들이 어느 한 사람을 속깊이 제대로 취재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서 조금도 믿지 못하고 있는 판이고요.

 전화번호는 어떻게들 용하게 알아내는지 놀랍습니다.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그 마음씀과 손놀림만큼이라도, 아니 그 반이나 반만큼이라도, 자기들이 취재를 하고 싶은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이며 어떤 삶이며 어떤 매무새인지를 곱씹어 볼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4341.9.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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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소 2008-09-03 15:57   좋아요 0 | URL
인천 배다리 못간지 몇 해 훌쩍~...^^ 96년인가 그랬을겁니다 아마도 님께서 혼자 만들어 놓으신 책자를 만난게..아벨서점에서요 늘 건강하세요~ 맘몸삶
 


 68킬로그램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부터 군대에 가기 앞서까지 내 몸무게는 68킬로그램이었다. 이때 내 몸은 퍽 호리호리했고 어깨와 가슴만 크고 넓었다. 군대에서는 ‘괴물’처럼 살아야 하다 보니까, 군대를 마친 뒤 몸무게가 조금 불었고, 이 몸무게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래도 군대를 마친 뒤 신문딸배를 하면서 살았으니 69∼70킬로그램을 오갔는데, 신문딸배를 그만두고 출판사에 들어간 1999년 8월부터 몸이 꽤 불었다. 몸쓰기보다는 머리쓰기를 많이 하는 일이 되다 보니까, 74∼75킬로그램, 한때 78킬로그램까지 나가기도 했다.

 군대에서 80킬로그램이 된 적이 한 번 있는데, 75킬로그램이라는 무게를 넘어가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듯 여겨졌다. 몸무게만큼 힘은 더 잘 써서 무거운 짐도 너끈히 나를 수 있기는 하지만, 몸은 굼떠서 자전거를 타거나 가방 너덧 개를 몸에 주렁주렁 달고 여러 시간 거닐며 헌책방 나들이를 할 때면 퍽 고달팠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충주 산골짜기에서 일하게 된 2003년 9월 무려부터는 72∼74킬로그램을 오갔다. 가볍지는 않으나 무겁지도 않은 몸무게였고, 이 몸무게는 충주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싱 하고 달리면 2킬로그램쯤 빠졌다가, 사나흘 쉬며 몸풀이를 하면 도로 제자리를 찾고, 다시 서울에서 충주로 자전거를 달리면 또 2킬로그램쯤 빠졌다가, 사나흘 느긋이 지내면서 다시 돌아오곤 했다.

 충주 살림을 접고 고향마을 인천으로 온 2007년 4월, 3.5톤 짐차로 석 대를 꽉꽉 눌러서 채운 책짐을 실어나르고 무거운 책장을 새로 들이고 책 자리를 새로 잡고 하는 동안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몸무게는 70∼72킬로그램 사이를 오가게 된다. 어느 하루도 몸 홀가분히 쉬는 날이 없으니, 책상맡에 앉아서 글을 쓰는 시간이 열 시간이 넘어간다고 해도 뱃살이 나올 겨를이 없다. 날마다 손빨래를 하고, 방바닥 걸레질을 하며, 밥하기와 설거지를 쉬지 않으니까, 내 몸에 군더더기살은 붙지 않는다. 게다가 틈틈이 자전거 마실을 하지, 서너 시간씩 걸으면서 동네 골목길 마실을 하지, 외려 얼굴이 말랐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올 팔 월 십육 일. 아기가 태어날 무렵. 옆지기와 함께 배앓이를 나누어 하면서 밤잠도 낮잠도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밥해 먹이랴 집 치우랴 무어 하랴 아주 바쁘게 돌아치는 동안 몸무게는 68킬로그램으로 떨어진다. 아기가 태어나고 기저귀 갈랴 빨랴 치우랴 밥하랴 청소하랴, 몸무게가 66킬로그램으로 떨어진다. 눈자위는 푹 꺼지고 눈밑이 꺼매진다.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면서 밥맛을 잃고, 밥을 먹지 못하면서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하루에 한 시간 자기도 어려운 가운데 잠깐 드러누워 등허리를 펼라치면, “여보, 벼리가 오줌 누었어요.”나 “여보, 벼리가 똥 누었어요.” 하는 소리.

 아이를 막 낳은 어머니가 아기 기저귀를 갈 수 있으랴, 빨 수 있으랴, 더욱이 손수 미역국을 끓여먹을 수 있으랴. 옆에서 지아비 된 사람이 모든 시중을 들어야 한다. 옆지기는 깊은 밤 젖먹일 때를 빼놓고는 새근새근 잠이 들지만, 지아비는 맥주잔이라도 붙잡으면서 잠을 좇으며 기저귀를 갈고 빨고 널고 다림질을 한다.

 요 며칠, 일산 옆지기 어머님 댁에 와 있어서, 옆지기 밥해 주는 몫은 크게 덜었다. 어느 만큼 몸이 느긋해지니 마음도 풀어져서, 이른저녁에 일찌감치 눈을 감아 본다. 밤새 잠을 못 잘 테니까.

 그러나 한 시간 반쯤 눈을 붙였을까. 아기 오줌 기저귀를 한 번 갈아 받친 저녁 열한 시부터 새벽 여섯 시 삼십칠 분까지 내처 뜬눈으로 보낸다. 새벽 두어 시쯤 갑작스레 똥을 무더기로 내보낸 어린아기는 기저귀를 여섯 장 한꺼번에 쏟아내었고, 미리 다림질해 마련해 둔 기저귀가 꼭 한 장이 남았을 때가 새벽 여섯 시 삼십칠 분. 미리 빨아 널어둔 기저귀도 이즈음 거의 마르고. 아기도 더는 똥질과 오줌질을 하지 않으면서(그래도 한 시간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하지만, 그 뒤로는 왕창 쏟아내지는 않았다) 한숨을 돌렸는데, 새벽 네 시쯤 한창 힘들어 다문 십 분이나 삼십 분이라도 눕고 싶던 때, 옆지기가 나를 부른다. “여보, 착유기 좀 가져다 줘요. 아무래도 젖을 짜내야겠어요.”

 아기가 아무리 신나게 젖을 먹어도 한쪽 젖은 퉁퉁 불기 마련. 남자인 내가 젖몸살 아픔을 얼마나 알겠느냐만, 잠들지 못하고 눕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만 보아도 얼마나 아픈가를 살갗으로 느낀다.

 익숙하지 않던 젖짜기 기계를 안 아프게 쓰는 길을 어렵사리 알아냈고, 지아비 된 사람은 기저귀가 모자랄세라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도록 다림질을 한다.

 이틀 동안 한 번도 씻지 못했다. 씻을 겨를이 없다. 잠깐 아기가 우리한테 평화를 선사하는 때에는 씻을 힘이 없어서 그냥 드러누워서 눈을 붙인다. 그렇지만 ‘으 끙 끄’ 하는 나즈막한 외마디소리를 듣고 화들짝 깨어나서 똥기저귀와 오줌기저귀를 간다. ‘어차피 다시 땀으로 젖을 텐데 뭐 하러 힘들게 씻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찬물로 기저귀를 빨지만 하나도 안 시원하다. 널어 놓은 기저귀는 보송보송 말라 가는데, 내 목덜미며 허벅지며 때가 밀릴 만큼 땀이 범벅이 되었다.

 날이 밝고 한잠도 이루지 못한 가운데 아침을 먹는다. 아침을 먹고 나서 옆지기 어머님이 아기방을 치우자고 이야기한다. 방에 먼지가 많을 테니 아기한테 안 좋으니까 쓸고 닦잔다. 아기를 옆방으로 옮긴다. 옮길 때 햇볕으로 눈이 부시지 않도록 잘 가리고, 옆방에서도 햇볕을 쐬지 않게 가려 놓는다.

 부지런히 쓴다. 신나게 걸레질을 한다. 걸레를 빤다. 다시 걸레질을 한다. 이불을 턴다. 팡팡팡 두들기며 턴다. 또다시 온몸을 땀으로 씻어냈다. 낮 열두 시 십 분. 옆지기가 배가 많이 고프다고 한다. 낮밥을 먹기로 한다. 벌써 밥때인가? 옆지기 부모님 사는 집으로 온 다음부터, 밥때를 놓치기는 해도 끼니를 거르는 일은 없다. 좋다. 밥 먹고 보자.

 밥상 차릴 즈음 후다닥 씻는다. 씻는 김에 똥오줌 기저귀도 빤다. 옆지기 기저귀도 함께 빤다. 부랴부랴 씻고 빨래한 뒤 널고 말리면서 밥술을 든다. 밥술을 뜨기 앞서 아기방에 들어가 엉덩이에 살며시 손. 촉촉하다. 오줌이군. 기저귀를 간다. 겉싸개 기저귀는 다리미로 말린다. 다리미로 말린 겉싸개 기저귀가 이번에는 엉덩이 기저귀가 된다. 엉덩이 기저귀는 씻는방 대야에 담긴다. 밥먹고 나서 빨자.

 빨아 둔 기저귀가 다 말랐다. 하나하나 걷는다. 이제 또 다림질을 해야지. 그러는 동안 또다시 똥오줌 기저귀는 새로 나올 테고, 빨래감은 또 나올 테며, 새로 너는 빨래는 자꾸자꾸 나오리라. 아기는 때맞춰 똥오줌을 누고 젖을 먹으며, 지아비 된 사람은 밀리지 않고 빨래질을 해낸다. 한 번 밀리면 죽음은 아니고, 두어 번 밀린다고 해서 기저귀가 모자라지 않는다. 다만, 여러 차례 밀렸을 때에는 어김없이 똥벼락이 내려서 기저귀가 바닥이 날 때가 있기에, 한 번이라도 빨래를 밀리지 않으려고 한다.

 갈고 빨고 다림질하고 어르고 안고 달래고 쓰다듬고 하는 데에 한 시간 가운데 오십 분쯤 쓴다. 한 시간에 10분쯤 쉴 틈이 난다. 이때에는 수첩에 아기 매무새와 움직임 들을 적어 놓는다. 옆지기 가슴 주무르기를 한다. 팔다리 주무르기를 한다. 이러다 보면 ‘빼기 시간’이 되어서, 다음번 기저귀 빨래 시간을 갉아먹는다. 가끔가끔, 아기는 한 시간에 한 번이 아닌 두 시간에 한 번 오줌을 지리면서 빨래감을 줄여 주곤 한다. 이때에는 얼마나 고마운지 넙죽 절을 하게 되고, ‘빼기 시간’으로 갉아먹었던 모자람을 넉넉히 채우게 된다. 잠깐이나마 마루에 나와 허리돌리기를 하고 기지개를 켜며 효소를 타서 물 한 잔 마신다.

 그런데 이렁저렁 하루를 보내는 동안 책 한 번 펼치지 못한다. 옆지기 어머님이 세탁기로 한 집식구들 빨래가 마루에 나오면, 옆지기 어머님도 바빠서 미처 개키지 못하는데, 초등학교 6학년 다니는 어린 옆지기 동생은 빨래 개기를 안 한다. 시키면 할 테지. 이래저래 바쁜 가운데 빨래가 마루에 널브러진 지 두 시간쯤 지나서 겨우 짬을 내어 빨래를 갠다. 빨래를 개면서 ‘집안일로도 이렇게 바쁘고 할 일이 많으신데, 우리가 아이를 데려와서 더 힘드실 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할 일이 많아도, 옆지기 어머님도 할머니가 된 즐거움을 누리는 맛’이 힘듦보다 더 크지 않으랴 싶다. 오늘 아침에도 아기를 씻기면서 옆지기 어머님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면, 아기 돌보기를 더 거들어 주고 싶어하는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저러나, 나도 옆지기도, 또 옆지기 어머님도 책을 읽지 못한다. 모든 일을 다 끝난 늦은 저녁에는 몸이 고단하니 책장을 못 넘기고, 햇볕 좋은 아침과 낮에는 이 일 저 일 부대끼느라 책장을 못 펼친다. 나 또한 밤늦게 다림질을 하고 겨우 숨을 돌리면서 불빛에 기대어 책장을 한두 쪽 넘기는데, 그러다가 기저귀 갈이를 하다 보면, 책은 어느새 덮어놓게 된다.

 책 좀 읽고 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책 좀 읽으며 내가 아직 모르는 세상 이야기를 배우고 싶어도, 책 좀 읽으며 여러모로 어리숙한 내 마음밭을 푸근히 가꾸고 싶어도, 책과 가까워지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래도 끈은 놓지 않는다. 아직은 책을 펼치기 어렵다고 하지만, 지금은 책과 떨어진 채 지내야 하지만, 우리 아이가 책이요 우리 옆지기가 책이며 우리 옆지기 어머님이 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달려가자. 어제그제는 그나마 하루에 한 시간 남짓 잠을 더 자 주었다고 몸무게가 2킬로그램 늘어서 68킬로그램이 되었다. (4341.8.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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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8-30 09:24   좋아요 0 | URL
읽어가며 제가 다 힘이 드네요.ㅎㅎ
벼리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더운날 고생이 많으세요. 이렇게 도와주시는 남편 잘 없어요.
옆지기님이 아주 고마워하고 계실겁니다.

숲노래 2008-08-30 16:4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제대로 못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더구나, 제가 일이 많아서
일산과 인천을 오가야 하니 더 고달픕니다.
인천에서만 아기를 낳고 돌볼 수 있기를 바랐으나,
이 일이 어그러지면서
참 쉽지 않은 부모요 아이가 되었어요.

에구... 아무튼 고맙습니다 ^^
 


 책으로 보는 눈 61 : 아기 돌보기와 책읽기



 지난 8월 16일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옆지기가 스물네 시간 배앓이를 겪은 다음 낳았습니다. 집에서 낳으려고 했으나, 새벽녘 쏟아진 비 때문에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며 옆지기 몸 또한 나빠지는 바람에, 부랴부랴 산부인과로 옆지기를 옮겨서 10분 만에 낳았습니다. 이날 뒤로 열흘이 훌쩍 지나고 두 주가 가까워 옵니다. 머잖아 세이레를 맞이하면서, 바깥사람한테도 아기를 내보이면서 축하를 받고 백일잔치를 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낳이를 하려고 집을 꾸미고 이래저래 알아보고 배우는 동안, 또 아기낳이를 한다며 배앓이하는 옆지기를 돌보는 동안, 그리고 아이를 낳고 옆지기와 아이를 돌보는 동안, ‘여태껏 하루도 손에서 멀리해 본 적이 없던 책’을 멀리하게 됩니다. 멀리한다기보다 손에 들 겨를이 없습니다. 기저귀 갈랴, 기저귀 빨랴, 기저귀 널어서 말리다가 다림질하랴, 다시 기저귀 갈랴, 또 기저귀 빨랴, 또다시 기저귀 널어서 말리다가 다리랴.

 그러나 책 한 권 손에 쥘 틈이 없으면서도 서운하지 않습니다. 슬프지 않습니다. 괴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홀가분합니다. 들뜹니다. 즐겁습니다. ‘옆지기와 아이를 돌보는 가운데에도 손에 쥘 만한 책이 무엇이냐?’를 되새겨 봅니다. 그냥저냥 읽던 책은 이렇게 고달프고 바쁠 때에는 아예 젖혀 놓게 됩니다. 그지없이 아름다우며 훌륭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면, 손에 물기 마를 새 없는 요즈음 같은 때에 졸린 눈을 비벼 가면서 읽을 수 없습니다.

 옆지기 부모님이 사는 일산으로 살림을 잠깐 옮겨서 옆지기와 아이를 돌봅니다. 그래서 저 혼자 이틀에 한 번씩 아침 일찍 인천으로 돌아와서 볼일을 보고 저녁에 부리나케 일산으로 갑니다. 고단함과 졸림이 겹치며 몸이 축납니다. 그래도 이렇게 오가는 동안 버스나 전철에서나마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 억지로 눈가를 비비면서 책장을 넘깁니다. 다른 책은 거의 읽을 마음이 나지 않고 딱 두 가지, 《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라는 책과 《지구를 걸으며 나무를 심는 사람, 폴 콜먼》을 읽습니다. 요사이 나온 다른 책들도 집어들어 보지만 이내 하품이 나와서 다시 덮어놓습니다. 별 서넛을 붙일 만한 책은 ‘애 아버지’ 마음속 깊은 데까지 와닿지 못합니다. 별 다섯을 붙이고 하나를 덤으로 더 얹어 주고픈 책이어야 비로소 ‘애 아버지’ 눈을 번쩍 뜨게 해 줍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애 아버지’보다 몸이며 마음이 훨씬 지쳐 있는 ‘애 어머니’는 별 다섯에 덤으로 하나 얹어 줄 책조차 펼치기 힘드리라 봅니다. 별 다섯에 별 다섯을 붙일 책마저 넘기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배앓이를 하고 젖먹이기를 하는 동안, 그 어느 책에서도 다루지 못하거나 않은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애 어머니’ 마음밭에 차곡차곡 심기고 자라지 않겠느냐 싶어요. 책 없이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두 사람이, 책을 가까이하지 못하면서도 마음이 푸근한 이맘때입니다. (4341.8.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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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호랑이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 잘잘잘 옛이야기 마당 1
이미애 지음, 백대승 그림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옛이야기’는 어떻게 다시 펴내면 좋을까?


- 책이름 : 무서운 호랑이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
- 글 : 이미애
- 그림 : 백대승
- 펴낸곳 : 미래아이 (2008)
- 책값 : 12000원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우리 옛이야기 가운데 ‘호랑이(범)’ 이야기 한 가지만 골라서 엮은 《무서운 호랑이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라는 책은, 사람이 아닌 짐승을 빌어서 우리 삶을 돌아보도록 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이야기 한 자락마다 모두 다른 빛깔로 그림을 담아낸 품새 또한, 흔히 떠돌고 웬만큼 퍼져 있기에 언뜻 지루해 보일 수 있는 ‘호랑이 이야기’를 재미나게 즐기도록 이끕니다. 시원시원한 판짜임은, 이 그림책을 볼 아이들을 널리 살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어느 한편으로 바라본다면, 좀더 수수하게 엮으면서 책값을 낮출 길을 찾으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옛이야기를 오늘날 아이들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책 말투를 보면 한결같이 판박이로 되어 있습니다. 보리출판사에서 펴낸 ‘서정오 님 이야기책’부터 퍼진 ‘입말 투’라 할 텐데, 입말 투는 ‘똑같은 토씨로 끝나는 일이 드뭅’니다. 처음에는 이런 입말 투가 무척 새로우며 놀랍다고 느꼈는데, 똑같은 말투가 자꾸만 되풀이되면서 더 나아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동안, 또 우리 입말 투가 무엇인가를 깊이깊이 파고들어가는 동안, 다른 작가나 서정오 님 스스로도 ‘자연스러운 입말 투’에서 멀어진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서정오 님 옛이야기 책이나 다른 분 옛이야기 책이나, 거의 판박이처럼 ‘-했어’, ‘그랬어’, ‘그랬지’ 하고 말끝을 맺습니다. 입말 투라고 하면서 ‘-다’가 아닌 ‘-어’나 ‘-지’로 끝맺는데, 우리들 입말 투는 ‘-다’로 끝맺을 때도 있고 ‘-어’나 ‘-지’로 끝맺을 뿐 아니라, ‘-구나’라든지 ‘-네’라든지 ‘-구만’으로 끝맺기도 합니다. 낮춤말도 아니고 높임말도 아닌 어설픈 입말 투로 이야기를 펼치기보다는, 차라리 높임말을 쓰면서 아이들을 섬기는 매무새를 보여줄 때가 한결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입말 투는 ‘것(거)’을 함부로 자주 붙이지 않습니다. ‘말했던 거야’나 ‘그랬던 거야’나 ‘먹었던 거야’가 아니라 ‘말했지’나 ‘그랬거든’이나 ‘먹었네’처럼 붙여야 올바릅니다. 《무서운 호랑이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는 이 어설픈 틀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아이들한테 바람직하지 않은 ‘순화대상 낱말’이 곳곳에 보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만한 그림이야기책을 싼값으로 조촐하게 꾸민다고 하면, 요새 어머니들은 외려 이 책에 깃든 보물을 못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출판사로서도, 독자로서도, 또 우리 형편으로도 단출한 판짜임과 엮음새보다는, 어딘가 무지개빛이 가득가득 수놓인 엮음새가 보기에 좋다고 느끼고, 큰 판이 더 나은 그림책인 듯 생각하며, 옛이야기도 ‘입말 투로 보이는 말씨’로 되어 있어야 좋은 듯 알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호랑이’라는 말이 썩 내키지 않습니다. 왜 호랑이한테는 ‘무섭다’는 생각을 심어 줄까요? 더군다나 오늘날 어느 곳에서 ‘호랑이를 본다’고, 호랑이는 무서운 짐승이라는 듯 이야기를 풀어 나갈까요? 지난 먼 옛날,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호랑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마음결을,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차근차근 되돌아보면서 이와 같은 이야기책을 펴내고 있을까요? 이제는 “무서운 공무원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나 “무서운 법관들의 가슴 시린 이야기”나 “무서운 전투경찰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 같은 책을 내어야 알맞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아직 어린 아이들한테는 처음 마주하는 호랑이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요. 동물원에서나 겨우 보는 호랑이라는 짐승을 머리로 헤아려 보면서, ‘무서운 짐승한테도 따순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가르침 하나는 얻을 테고요.

 옛날이야기를 오늘날 아이들한테 어떻게 다시 들려주면 좋을까 하는 대목에서는 깊이 있게 돌아보지 못했지만, 호랑이 그림 하나는 참 잘 그렸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대목이 남습니다. ‘왜 옛날사람이라고 하면서 죄다 조선 후기 사람만 그리고, 더구나 양반들만 그리고 있는지’를 뒷통수 좀 긁적이면서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가난한 선비는 어떤 신을 신었을지’, ‘산골 깊숙한 마을 집은 어떤 모양일는지’, ‘우리 나라 깊은 산골 나무는 어떤 모양 어떤 크기일는지’도 가만히 되새기면서 창조와 상상력을 북돋운다면 한결 나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4341.8.2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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