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말(인터넷말) 9] 새소식 더보기

 ‘뉴스(news)’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뒤적여 보면 “새 소식”이라는 말마디로 고쳐서 쓰도록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풀이가 “(1) 새로운 소식을 전하여 주는 방송의 프로그램”이라 적힌 다음에 “새 소식”으로 고쳐서 쓰라고 합니다. 방송사에서 처음부터 두루 쓴 말이 ‘뉴스’였기에 이제는 고칠 수 없는지 모릅니다만, 처음부터 두루 쓰던 ‘뉴스’랄지라도 바로 오늘부터 고쳐서 쓰자고 다짐한다면 바로 오늘부터 사람들 말매무새는 확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다만, 방송사나 지식인이나 학자들은 이렇게 함께 좋은 말길을 트자며 다짐을 한다든지 마음을 기울인다든지 힘을 쏟는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비즈니스 프랜들리’처럼 얼토당토않은 말을 함부로 쓰기도 하는데, 청와대 누리집에서는 뜻밖에 ‘뉴스’ 아닌 ‘새소식’이라는 낱말을 쓰고, 여느 누리집에서는 으레 ‘more’라 하는 자리에 ‘더보기’라는 낱말을 씁니다. 이 대목은 참으로 고마우며 반갑습니다. (4344.1.2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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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1. 

하루 내내 함께 붙어 지내는 아빠가 너랑 잘 놀아 주는지 모르겠구나. 

 

아빠 옆에서 아빠 따라하는 네 모습을 보며, 아빠가 잘 살아가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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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0. 

그림종이에 그림을 잔뜩 그리는 아이. 

 

사진 나온 책을 아빠와 함께 읽으며 발 꼬물딱꼬물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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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림하는 하루를 사진으로 담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5] 《타부 치요시오:田渕義雄-森暮らしの家》(小學館,2002)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는 한 갈래가 아닙니다. 사진찍기 한길이란 한 가닥이 아닙니다. 보도사진이 되든 상업사진이 되든 예술사진이 되든, 사진은 한 가지 모습으로만 나아가지 않습니다.

 사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으레 ‘세상을 바꾼 사진’을 말합니다. 사진은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다만, 사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할 때에 ‘깜짝 놀랄 만한 사진’으로 세상을 바꾸지 않아요. 하나도 깜짝 놀랄 만하지 않을 뿐더러, 더없이 수수한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여느 사람 여느 삶 여느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루이스 W.하인 님 사진이든 도로시아 랭 님 사진이든 ‘여느 사람 여느 삶 여느 모습’입니다. 무언가 대단하거나 남다르거나 돋보이거나 빼어난 사람들 빼어난 삶 빼어난 모습이 아니에요. 아주 어린 아이들을 공장에서 부려먹던 일이 ‘흔했을’ 뿐더러, 가난한 집에서는 누구나 으레 이렇게 일을 했기에 이처럼 ‘수수한 여느 모습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이민자이든 이주노동자이든 이름나거나 잘생기거나 어찌어찌한 사람이 아니라 ‘수수한 여느 사람’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나중에 이름값을 얻은 ‘루이스 W.하인’이요 ‘도로시아 랭’입니다만, 이들 사진쟁이는 ‘수수한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담기 앞서까지 참으로 수수한 여느 사진쟁이였습니다. 수수한 여느 사진쟁이가 수수한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세상을 바꾸는 사진이 있다 한다면 이렇게 세상을 바꾼다’고 하겠어요.

 《森暮らしの家》라는 책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森暮らしの家》라는 책은 딱히 사진책 갈래에 넣을 만하지 않을 수 있으나, 차분히 돌아보면 사진책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사람 타부 치요시오 님이 당신 삶을 사진으로 보여주니까 사진책입니다. 숲속에서 나무로 집을 짓고 자연과 하나되어 보내는 삶을 이렁저렁 글로도 담지만, 무엇보다 사진으로 담아 보여줍니다.

 언뜻 보기에 숲속에서 전기를 안 쓰고 자연에서 얻는 푸성귀랑 나무랑 햇볕이랑 물로 꾸리는 삶이란, 오늘날 도시물질문명 사회에서는 톡톡 튄다든지 꿈만 같다든지 엉뚱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별 모든 사람은 숲사람이었고 들사람이었으며 멧사람이자 바닷사람이었습니다. 도시사람이기 앞서 누구나 시골사람이던 우리들이에요. 《森暮らしの家》라는 사진책은 숲에서 숲을 사랑하고 아끼면서 보내는 나날이란 ‘잘난 삶’이 아니라 ‘여느 삶’이요, 대단하거나 거룩하거나 훌륭하다는 이름이 아니라, ‘수수한 삶’이면서 이름을 붙이지 않기에 즐거운 나날임을 가만가만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살림하는 하루를 사진으로 담은 책”이 《森暮らしの家》라 해도 좋습니다. 숲에서 살림하는 하루이니까, ‘숲살림 사진책’이라 할 수 있겠지요.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집을 어떻게 짓고 집을 어떻게 가꾸며 하루하루 살림을 어떻게 꾸리면서 즐거움을 맛보는가를 보여주는 사진책이라 하겠어요.

 숲에서 사는 사람으로서는 숲삶을 담는 책입니다. 바닷가에서 살아간다면 바다삶을 담으면 되고, 골목동네에서 가난하게 살거나 조촐하게 산다면 그예 골목삶을 담으면 돼요.

 아이를 돌보며 내내 집에 붙어서 보내야 하는 삶이라 한다면, 나 스스로 내 집살림을 사진으로 담으면 됩니다. ‘살림하는 내 하루’라 해서 보잘것없거나 하잘것없지 않습니다. 여느 수수한 삶이기 때문에 초라하거나 볼썽사나울 까닭이 없습니다. 살림하는 내 하루이기에 나 스스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살림을 일구는 내 삶인 만큼 나 스스로 얼마든지 사진에 담을 값과 뜻과 멋과 맛이 있어요.

 예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살림살이는 예쁘게 담으면 됩니다. 어지러이 늘어놓는 사람들 살림살이는 어지러이 늘어놓은 대로 담으면 돼요.

 인문지리학이나 문화인류학을 하는 전문가나 학자들은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살피어 이야기를 담거나 사진을 찍거나 글을 씁니다. 사건과 사고를 다룬다는 보도사진이란 ‘일어난 일을 고스란히 담는 일’입니다. 아흔 살 할머니가 쪽방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갈 때에 이 모습만 담아야 보도사진이 되거나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중산층이라 할 만한 네 식구들 여느 수수한 모습을 가만히 담아 놓아도 얼마든지 보도사진이나 다큐사진이 됩니다.

 기록사진과 앨범사진은 종이 하나만큼 다르지만, 두 사진은 한몸입니다. 쓰임새에 따라 달리 자리잡을 뿐이나, 기념사진이든 예술사진이든 한동아리입니다. 우리 집에서 우리 식구들 담는 사진이 되든, 이웃집 가난한 살림살이를 담는 사진이 되든, 똑같은 보도사진이자 예술사진이 되면서 다큐사진이든 기념사진이든 됩니다. 이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이랑 이 사진을 쓰려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다뿐,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나누는 마음은 마찬가지예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거나 봉사를 하러 가거나 취재를 하러 갈 때에도 얼마든지 놀랍거나 대단한 사진을 얻습니다. 아니, 멀리 사진마실을 갈수록 놀랍거나 대단한 사진을 얻습니다. 내 둘레나 내 가까이에서 사진삶을 꾸린다면 하나도 놀랍지 않고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사진을 얻습니다. 아니, 얻는다기보다 즐기지요. 내 둘레랑 내 가까이에서는 아주 흔하며 너른 수수한 사진을 즐깁니다. 그런데, 사진이란 바로 흔한 삶이 아닐까요. 사진이란 곧 수수한 모습이 아닌가요. 사진이란 무엇보다 너른 이야기가 아닐는지요. (4344.1.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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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1-20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숲살림 사진책이라.

약간 유행처럼 해외블로거들 사이에서 아침식사 사진 찍은 책들이 나왔더랬습니다.
사진, 그리고 그 사진이 담고 있는 시간과 시간의 흐름이 다 어우러져 인상적인 사진책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숲노래 2011-01-20 08:37   좋아요 0 | URL
스스로 즐겁게 살아가며 사진을 즐기고,
스스로 재미나게 살아가며 글을 쓰면,
책이란 참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
 



 뜨개책


 뜨개질을 안 하면서 뜨개책을 쓸 수 없겠지요. 뜨개질하는 사람 마음을 모르거나 살피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뜨개질 이야기를 쓰거나 나눌 수 있나요. 새내기로서 양말 한 켤레 뜨개하기란 얼마나 힘들며 오래 걸리는 줄을 사람들은 얼마나 헤아릴까요.

 헌책방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나, 헌책방 얘기를 책으로 묶거나 신문·잡지·방송에 싣는 사람은 헌책방을 얼마나 다녔을까요. 헌책방을 얼마나 생각해 보고, 사랑하거나 아끼며, 헌책방 일꾼 삶을 어느 만큼 헤아렸을까요.

 철거민이 되어 보아야 철거민 삶을 알 수 있다고 하겠지요. 철거민과 이웃이거나 동무라 하더라도 나 스스로 철거민일 때처럼 느끼지는 못해요. 기사를 읽거나 현장체험을 했다면 지식과 몇 가지 경험은 있되 삶은 아니에요.

 누구나 뜨개를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헌책방을 말할 수 있어요. 그러면 ‘어떤 뜨개’를 말하는 사람인가요. ‘어떤 헌책방’을 다루려는 사람인가요.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서 ‘아이키우기 책’을 쓸 수 없어요. 자전거마실을 즐기지 않으면서 ‘자전거여행 책’을 쓸 수 없어요. 헌책방과 책과 삶과 사람과 사랑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헌책방 이야기책’을 쓸 수 없어요. 아니, 책 아닌 글조차 쓰지 못해요.

 사진기 단추를 누른대서 모두 사진이지 않아요. 볼펜을 놀리거나 자판을 두들겼대서 다 글이지 않아요. 생김새가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사람 노릇을 하지 않아요. 겉모양이 밥과 똑같다 하지만, 플라스틱으로 만든 밥을 먹지 못해요. 플라스틱 꽃은 냄새도 없고 살아숨쉬지 않아요.

 살아숨쉬어야 비로소 사진이에요. 살아숨쉬어야 바야흐로 글이에요. 살아숨쉬는 헌책방을 살아숨쉬는 내 넋으로 고이 껴안으면서 한몸 한마음이 되는 가운데 샘물처럼 맑고 시원하며 한결같이 솟아나야 참말로 ‘헌책방 이야기’라고 느껴요. 발바닥으로 써야 하는 ‘헌책방 이야기’이고, 눈물과 웃음으로 나누어야 할 ‘헌책방 이야기’예요.

 나는 두 아이 아버지로서 이렇게 말합니다. (4344.1.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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