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마음
― 조성선, 《과학의 나무를 심는 마음》



- 책이름 : 과학의 나무를 심는 마음
- 글 : 조성선
- 펴낸곳 : 전파과학사 (1985.6.20.)


 내가 글을 언제부터 썼는가 곰곰이 돌아봅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91년에 처음으로 글쓰기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중학교 다니던 때까지는 따로 글쓰기를 하지 않았고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글쓰기를 온마음 기울여 붙잡은 때는 1995년부터라고 느낍니다. 내 어버이하고 살아오던 집에서 나와 혼자서 살림을 꾸리며 살아갈 때부터 비로소 내 글쓰기 첫길을 열었다고 떠올립니다.

 1995년 4월 5일, 내 어버이 집을 나와 홀로 살림을 꾸리기로 한 때부터 이제까지 어설프든 어리숙하든 집살림과 책살림과 글살림을 혼자서 맡습니다. 따지고 보면 혼자서 살림을 한다 할 수 없고, 내 둘레 숱한 사람들 도움손길을 받으며 혼자서 이것저것 할 수 있다고 해야 옳지 싶습니다. 혼자 살아간다지만 밥과 옷과 집을 혼자서 마련하지는 못하니까요. 언제나 누군가한테서 도움을 받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글쓰기를 할 때에 으레 내 힘과 슬기로 글쓰기를 한다지만, 글로 쓸 수 있는 이야기란 내가 꾸린 삶이면서 내가 내 둘레 사람들과 부대끼며 꾸린 삶입니다. 내가 부대끼며 꾸린 삶이란 내 힘만으로 이룬 삶이 아니라, 둘레 사람들 사랑과 믿음으로 이룬 삶입니다. 글쓰기를 하기까지 얻는 온갖 깜냥 또한 내 마음밭이 따뜻하거나 내 머리가 뛰어나서 얻는 깜냥이 아닙니다. 나한테는 조그마한 씨앗이 하나 있을 뿐, 이 씨앗을 돌보거나 보살피는 손길이 많습니다. 게다가 내 가슴에 깃든 씨앗이란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길러서 베푼 선물입니다.


.. 수업을 참관하던 내가 보기에는 보라색이 아니라 검은색으로 보였다. 다른 분단에서 실험한 결과도 모두 검은색으로 나타났다. 나는 조금 전에 발표했던 학생 곁으로 다가갔다. “얘, 이 색이 보라색이냐?” 그 학생은 머리를 긁으며 싱긋이 웃기만 하고 말을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보라색 같지가 않은데, 너는 이 색이 무슨 색으로 보이니?” 나는 옆에 앉은 다른 학생에게 물어 보았다. “검은색 같아요.” … “그런데 왜 보라색이라고 발표했지?” “녹말가루에 요오드용액을 떨어뜨리면 보라색으로 변하니까요.” … “네가 실험한 결과는 소금이 ‘거뭇거뭇’하게 되지 않았는데 왜 ‘거뭇거뭇’하다고 발표했자?” “전과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그 학생은 거침없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 지식이란 이미 발견되었거나 밝혀진 사실을 체계있게 엮어 놓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 수업에서, 교사가 어떤 식의 덩어리를 말로만 가르친다면, 그것은 어린이들의 발견하고자 하는 왕성한 의욕을 꺾어버린 결과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  (9, 12, 39쪽)


 1995년 4월부터 2011년 1월에 이르는 나날을 돌이킵니다. 갓 홀로 살아가던 때이든 멧골자락 작은 집에 깃든 오늘 내 삶이든, 글쓰기를 하는 방은 겨울이면 썰렁해서 손이 시립니다. 따끈따끈한 곳에서 글쓰기를 한 적은 한 번조차 없다고 느낍니다. 추위를 잊거나 모르면서 글쓰기를 한 일은 아직 없다고 느낍니다. 추운 날은 춥게 글을 쓰고, 더운 날은 덥게 글을 씁니다. 글을 쓸 때면 으레 날씨를 헤아리고, 날씨를 헤아리는 하루하루 그대로 글을 씁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며 잠이 모자란 나날인 오늘, 잠이 모자라 꾸벅꾸벅 졸면서 글을 씁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는 매무새 그대로 글을 쓰고, 아이를 안고 달래며 토닥여 재우는 삶자락 고스란히 글을 씁니다.

 돈이 없어 더 따스한 집을 마련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내 살림집을 꾸리거나 보듬는 데에 마음을 쓰지 못하기도 합니다. 겨울날 추운 집이라면 이래저래 뚝딱뚝딱 고치거나 손질해서 찬바람이 덜 들어오도록 해야 할 텐데, 이런 데에는 제대로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책 하나를 살핀다든지, 글 하나를 여민다든지, 어리숙하나마 밥하고 빨래하는 집일에는 마음을 쓰지만, 막상 집 안팎을 다스리는 데에는 젬병입니다. 글을 쓰는 데에 마음을 바치듯, 집을 고치는 데에 마음을 바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한 사람이 모든 삶을 다 건사할 수 없는지 모릅니다. 나 스스로 모든 삶을 다 건사한다면 글을 쓸 겨를이 없다든지, 구태여 글까지 쓰면서 살아갈 까닭이 없는지 모릅니다. 집을 손질하는 재미 하나로 넉넉할 삶일 테니까요.


.. 이렇게 볼 때 공장을 거쳐 나온 물건들은 제조되는 과정에서 연료를 소비시킨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므로 우리는 물건이나 물자의 낭비를 막음으로써 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대기오염도 줄여야 할 것이다. 즉 대기오염과 거리가 먼 것 같은 수도물도 헤프게 쓰면 쓸수록 대기를 오염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수도물 생산비의 1/3∼1/5은 전기요금이므로, 수도물의 낭비는 전기의 낭비와 같고, 전기의 낭비는 결국 석유나 석탄을 더 많이 태워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대기오염을 심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대기오염을 심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물 한 컵 연필 한 자루 도화지 한 장 양말 한 켤레라도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동안 대기가 오염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못 쓰게 된 물건이라도 마구 버리거나 태워서 또다시 대기를 오염시킬 것이 아니라 다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연구하여 재활용해야 할 것이며 ..  (143∼144쪽)


 글을 쓰는 마음은 하루를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기쁘든 슬프든 즐겁든 고단하든 하루를 살아가는 마음을 그대로 글로 담습니다.

 《과학의 나무를 심는 마음》을 쓴 조성선 님은 과학이라는 나무 한 그루를 생각하면서 하루를 살았기에 이와 같은 책을 묶었겠지요. 과학나무가 삶나무가 되고, 삶나무가 사랑나무가 되는 길을 헤아리면서 글조각 하나하나 모았겠지요.

 글이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책이란, 어느 날 한꺼번에 확 쏟아부은 글로 엮지 않습니다. 글이란, 오늘까지 살아낸 내 모든 땀과 슬기와 꿈을 실어 푼푼이 적바림합니다. 책이란, 날마다 조금씩 적바림하면서 그러모은 삶조각을 차근차근 꿰어맞추며 내놓습니다.

 과학을 하는 마음이란 글을 쓰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내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면서 제대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학을 하는 마음이란 글을 쓰는 마음과 매한가지로, 내 삶을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아낌없이 돌보는 매무새를 건사해야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학문하는 과학으로만 치달을 수 없는 과학이요, ‘순수’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치달을 수 없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웃음과 울음을 담는 과학하는 마음이고, 갖은 기쁨과 슬픔을 싣는 글쓰는 마음이라고 느낍니다. (4344.1.2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과 우리 말 64] Hi Seoul 맑은서울

 세 식구 나란히 서울로 볼일을 보러 다녀온 어느 날, 광화문 옆길을 걷다가 서울 시내버스 한쪽에 붙은 딱지를 들여다본다. 오, ‘친환경차량’을 써서 ‘맑은서울’을 이룬다는구나. 그런데, ‘맑은서울’이라면서, 정작 옆에는 ‘Hi Seoul’이 그대로 있네. 이럴 바에는 ‘맑은서울’이라 하지 말고, ‘Hi Seoul’하고 아귀를 맞추어 ‘Clean Seoul’이라 해야지. ‘반가운 서울’이나 ‘좋은 서울’이나 ‘웃는 서울’이 아닌 ‘Hi Seoul’이면서 ‘맑은서울’이라니. (4344.1.2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누리말(인터넷말) 11] 4대강 살리기 바로알기와 다운로드

 돈을 쏟아부어 물길을 바꾸는 일을 두고 ‘강 살리기’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아마 이런 일을 하면서 ‘강 죽이기’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을 테지요. 이런 일을 하면서 ‘강 죽이기’가 아니라고 외쳐야 하니까 ‘바로알기’를 해야 한다고 다시금 목소리를 높여야 할 테고요. 그러나 공기정화기를 쓴다 해서 공기를 맑게 바꾸지 못합니다. 공기정화기를 만드느라 공장을 돌려야 하고, 공장을 돌리자면 석유를 써서 전기를 만들어 기계를 움직여야 하는데, 석유를 쓰는 동안 공기는 더욱 나빠질 뿐 아니라, 공기정화기를 돌리며 전기를 쓰니까 공기는 맑아지기는커녕 더더욱 나빠집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삶일 때에는 겉치레 말이 판칩니다. 생각해 보면, ‘살리기’라는 말마디하고 ‘바로알기’ 같은 말마디는 얼마나 훌륭한가요. 끝없이 영어사랑으로 치닫는 대한민국 정부와 정책인데, 뜻밖에 ‘4대강 살리기’라는 정책이름만큼은 토박이말로 예쁘게 빚고, ‘바로알기’ 같은 낱말 또한 ‘말 살리기’를 해 줍니다. 다만, 겉치레는 어쩔 수 없는 겉치레인 만큼, ‘PDF다운로드’라는 말마디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4344.1.2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식인과 책읽기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을 지난 2007년에 사서 읽다가 퍽 오랫동안 밀쳐 두었다. 놀랍게 썼다 싶은 논문이지만, 이 책은 책이 아니라 논문이기 때문에 ‘책으로 읽는 맛’이 없다. 아파트를 파헤치거나 들여다보는 눈썰미를 찾는 대목에서는 훌륭하다 여길 만하다. 그러나 논문은 ‘보고·분석·정리’에서 그칠 뿐, 논문이 다루는 이야기를 사람들 삶에 어떻게 녹아들도록 하느냐를 짚거나 살피지 않는다. ‘사례조사·통계·비교’ 또한 훌륭하다 할 만하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길찾기에서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을 네 해 만에 다시 들추어 본다. “대단지 아파트로 대표되는 한국의 주택 문제에 대해 대다수 건축가들과 지식인들의 입장은 모호함을 그 특징으로 한다(111쪽).”는 대목을 읽는다. 건축가들과 지식인들이 아파트라는 곳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밝히는 글이란 거의 없거나 흐리멍덩하다. 프랑스사람 발레리 줄레조 님 글이 아니더라도, 한국땅 건축가나 지식인 가운데 아파트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거의 다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더구나, 건축가나 지식인이라는 이들이 쓴 글을 읽을 사람 또한 으레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글쟁이(작가)와 즐김이(독자) 모두 아파트사람이라 할 수 있는 한국땅이다.

 가만히 살피면, 건축가나 지식인 스스로 아파트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아파트 굴리기’를 흔히 하는 데다가 ‘돈불리기’를 한다. 이들 삶이 이러하니, 이들 건축가가 건축을 한다든지 지식인이 지식을 펼친다든지 할는지 모르나, 막상 스스로 또아리를 튼 삶터를 놓고 비평을 하거나 논평을 할 일이란 없다. 아파트에서 살아가며 “아파트는 불구덩이야!” 하고 외치는 글쟁이가 어디에 있는가. 밤하늘 별빛이 아닌 밤도시 불빛을 우러러 마지 않는 도시사람 아닌가. 아파트 높은층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아름답다고 여기는 도시사람 아닌가. 건축가라든지 지식인이라든지 하나같이 시골사람 아닌 도시사람인데, 이들 입에서 아파트를 다루는 글이 나오기를 바랄 수 없다. 더구나, 그림쟁이가 아파트를 멋스레 그리는 일이란 없고, 사진쟁이가 아파트를 예쁘게 찍는 일 또한 없다. 제 삶터를 그림감이나 사진감으로 삼지 않는다. 아주 마땅히, 건축가나 지식인은 아파트를 글감으로 삼지 않는다. 아파트는 어떤 지식인한테도 이야기감이 되지 못한다.

 도시에서 동네 골목 조그마한 살림집을 얻거나 빌려 가난하고 수수하게 살아갈 때에 비로소 ‘대규모 재개발’이라든지 ‘4대강 막삽질’이라든지 ‘올림픽과 월드컵 유치’처럼 막나가는 ‘돈에 미친 경제정책’을 올바로 바라보며 올바로 말할 수 있다. 스스로 가난하게 살아갈 마음이 없고, 스스로 가난을 모르면서, 스스로 가난하고는 멀리 떨어진 채 부자요 권력자로서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건축가나 지식인은 입으로는 ‘서민·대중·인민·시민·민중·민초·백성’ 같은 말마디를 읊을는지 모르나, 건축가나 지식인 스스로 서민이나 백성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면서 말할 수 없고, 말하기 앞서 알지 못하며, 알기 앞서 깨닫거나 껴안지 못한다.

 누구나 저 스스로 선 자리에 맞게 글을 쓴다. 누구나 저 스스로 살아가는 자리에 따라 책을 읽는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으니까 처세책을 보고, 지식을 더 갖추고 싶으니까 지식책을 본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어린이책이나 문학책마저 ‘독후감 실적 쌓기’로 여기며 읽는다. 아이들은 대학입시 때문에 문학책을 외우며, 어른들은 심심풀이로 문학책을 옆구리에 낀다. 아름다운 삶을 즐기면서 밝히는 문학책을 손에 쥐면서도 문학책에 깃든 아름다운 삶을 건드리거나 바라보거나 어깨동무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저마다 저 스스로 선 자리에서 책을 느끼거나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마음이 착한 다음에 책을 쥐어야 한다. 먼저 참다이 꾸리는 삶을 사랑하고 나서야 책을 들어야 한다. 먼저 곱고 바른 말을 나누는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에 책을 마주해야 한다. 껍데기가 그럴싸한 삶이 아니라, 속살이 아름다운 삶일 때라야 아름다운 책을 알아보면서 눈물과 웃음으로 맞아들인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동안 책읽기는 부질없다. (4344.1.2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니아가 떠나던 날 어린이 생각나무 1
카롤 잘베르그 지음, 하정희 옮김, 엘로디 발랑드라 그림 / 숲속여우비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아이를 아끼는 예쁜 살림살이
 [환경책 읽기 26] 카롤 잘베르그, 《라니아가 떠나던 날》



- 책이름 : 라니아가 떠나던 날
- 글 : 카롤 잘베르그
- 그림 : 엘로디 발랑드라
- 옮긴이 : 하정희
- 펴낸곳 : 숲속여우비 (2009.12.5.)
- 책값 : 9000원



 (1) 즐겁게 살아갈 터전


 얼핏설핏, 경상도 창원시는 야구장 새로 짓는 데에 3000억이라는 돈을 쓰겠다 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큰돈을 기꺼이 들여 좋은 야구장을 짓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가 굳이 마음을 쓴다거나 눈길을 둘 만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창원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보금자리는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2014년 아시아 경기대회를 앞둔 인천시를 돌아보아도 매한가지입니다. 경기장 새로 짓는 데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런데 경기장 하나로 그치지 않습니다. 경기장을 비롯한 온갖 다른 시설을 마련해야 해요.

 경상도 창원시이든 인천시이든 어린이집을 비롯해 초·중·고등학교 시설이나 제도나 문화가 얼마나 잘 닦였는지 궁금합니다. 창원시 사람들이든 인천시 사람들이든, 이곳 사람들이 먹을 곡식을 일구는 농사꾼들은 농사지으며 흘리는 땀방울에 값할 만큼 보람을 거두는지 궁금합니다.

 이 나라 어디이든 지역사람이 지역사람으로뿐 아니라 나라사람으로서 즐거이 어울려 살아가도록 뒷배하는 틀은 어설프거나 모자라다고 느낍니다. 돈없는 사람이 게으르기 때문에 힘겹지 않을 뿐더러, 돈없는 사람이 살기 좋아야 할 뿐 아니라, 돈있는 사람 또한 서로 어울리면서 즐거울 터전이요 틀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새로운 시설 뛰어난 경기장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우리는 무엇을 먼저 갖추며 나누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논과 밭과 들판과 숲과 갯벌과 바다와 산과 냇물을 밀거나 깎거나 없애며 마련하는 경기장과 아파트와 공장과 놀이공원은 얼마나 아름답거나 뜻있거나 훌륭할는지 궁금합니다.


.. 라니아가 좋아하는 것이 또 있는데, 그건 바로 밭까지 이어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짙은 황금색 언덕들 사이를 구불구불 지나가지요. 맨발에 느껴지는 땅의 감촉은 참으로 부드럽습니다 … 밭에 이르면 모두들 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힘껏 일을 돕습니다 … 라니아는 늘 바쁘고 튼튼한 여자들만 보고 자랐지요. 라니아가 살던 마을의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를 나르고, 자르고, 천을 짜고, 수를 놓고, 뒤섞고, 땅을 파고, 열매를 주워 모으고, 아기를 품에 안아 재우고, 끈을 엮습니다. 특히 여자들은 하루 종일 움직입니다 ..  (14∼15, 45쪽)


 아이가 잠들고 옆지기도 새근새근 자는 때에 비로소 조용히 일어나서 글을 씁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깨었거나 움직일 때에는 좀처럼 글을 못 씁니다. 깬 사람, 그러니까 나와 함께 눈을 뜬 살붙이가 복작복작 돌아다닌다면, 여기에 마음을 쓰거나 빼앗기느라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때때로, 밀린 일이 있어 ‘놀아 달라는 아이’한테 “미안해. 아빠가 이 일을 해야 하거든. 기다려 줘. 벼리는 혼자서 놀아 주라.” 하고 얘기하지만, 이렇게 얘기해야 할 때는 슬픕니다. 참으로 무슨 일 때문에 아이하고 놀아 줄 겨를이 없어야 할는지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를 낳아 사랑스럽다 말을 하면서, 왜 내 아이하고 살가이 놀거나 신나게 어울릴 겨를을 마련하지는 못하는지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게끔 제도와 시설을 잘 갖추어야 할 나라요 사회이며 지자체입니다. 나라와 사회와 지자체는 어린이집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얼거리를 알맞고 올바로 닦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한테서 이모저모 갖은 세금을 거둬들이기 때문입니다. 쌀 한 말을 사든 얼음과자 하나를 사든 붙는 세금이 있고, 일삯을 받을 때에 떼는 세금이 있습니다. 세금이란 동사무소나 구청이나 시청이나 세무소나 공공기관 건물을 높이 올려세운다든지 기관 광고비를 낸다든지 하는 데에 쓸 돈이 아닙니다. 세금을 낸 사람들이 걱정없이 살아가도록 제도와 시설을 다스리는 데에 쓸 돈입니다.

 그러나 나라나 지자체에서 세금을 옳게 쓴들 옳게 못 쓴들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가 내 보금자리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간다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가게에서 비닐봉지를 내어 줄 때에 20원을 받아야 한다느니, 가게에는 비닐봉지를 두어서는 안 된다느니 하고 법으로 세우거나 따진들 안 따질들 마음쓸 까닭이 없습니다. 내 가방에 언제나 천 장바구니를 넣으면 되고, 가게로 마실을 갈 때에 천 장바구니를 여럿 챙기면 되니까요. 물건을 담는 비닐봉지를 가게에서 못 쓰도록 한다지만, 커다란 마트라는 데가 아닌 작은 가게에서조차 공산품이든 푸성귀이든 비닐이나 랩에 씌워 놓기 일쑤입니다. 어차피 비닐이나 랩은 곳곳에 수없이 많이 씁니다. 물건 담는 비닐봉지는 안 쓴다지만 ‘천 장바구니 젖지 않도록 비닐이나 랩을 한 번 더 씌운다’면, 물건 담는 비닐봉지를 안 쓰도록 하거나 말거나 똑같아지거나 더 나빠집니다.


.. 라니아는 아주 잠깐이지만 아직도 자기가 세 걸음 만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소박하고 작은 집에서 식구들과 누워 있는 듯한 착각을 하곤 합니다. 고향 집에서는 일어나자마자 살갗에 닿는 햇살을 느낄 수 있었지요. 또 뜨거운 기운이 서서히 깨우기 시작하는 자연의 온갖 냄새를 들이마시곤 했어요. 비에 젖어 수프처럼 변해 버린 땅에서 올라오는 그 특별한 향기도요. 눈을 꼭 감고 있으면 조금은 붙잡을 수 있는 그 향기를. 여기(도시)서 라니아는 감기를 달고 삽니다 ..  (63쪽)


 아이하고 읍내 장마당에 나갈 때이든 도시로 볼일 보러 다닐 때이든, 아빠와 엄마는 가방에 천 장바구니를 꼭 여럿 넣어 다닙니다.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비닐봉지도 잔뜩 챙깁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가 천 장바구니를 늘 쓰니까, 저도 이 장바구니를 손에 들거나 어깨에 걸고 싶어 합니다. 집에서 혼자 놀면서 이 장바구니를 손에 쥔 채 그림책을 펼치기도 합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가르치면서 키운다지만, 가르치면서 키우는 어버이가 아니라, 어버이 삶이 그대로 아이 삶으로 옮습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살피며 받아들입니다. 어버이가 옳게 살아가면 아이도 옳게 살아가는 나날을 즐기고, 어버이가 짓궂게 살아가면 아이 또한 짓궂게 살아가는 나날을 즐길밖에 없습니다.

 나라나 지자체에서 훌륭하며 멋진 어린이집을 마련해 준다면 아주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고맙기도 할 텐데, 애써 우리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뜻이 없습니다. 어린이집 교사들이 착하거나 참답다 할지라도, 아이가 훌륭한 어린이집 교사한테서 착하거나 참된 삶과 넋을 배운다 할지라도, 어린이집 교사한테서만 배우거나 받아들이는 내 아이가 되도록 할 수 없습니다. 바깥에서 어린이집 교사만 훌륭하고, 집안에서 어버이는 어설프거나 못날 수 없습니다. 바깥이야 어떠하든, 아이가 살아가는 터전인 제 보금자리에서 제 어버이부터 아름답거나 알차거나 고운 삶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함께 놀고 함께 일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수수한 살림살이요 집안이며 보금자리로 가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골마을에 워낙 아이들이 없다 보니까, 다른 동무를 사귀고 싶다면 갈 만한 어린이집이지만, 아이한테 일찍부터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느니, 아빠 엄마가 돈벌이나 다른 볼일 때문에 바빠서 맡겨야 한다느니 하면서 어린이집에 보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이상한 일이지만, 라니아는 부인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별 인사를 한 것은 아닙니다. 라니아는 활짝 웃는 얼굴로 부인 옆을 지나가면서, 뒤를 돌아보지도 손을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  (91∼92쪽)


 집안에서 즐겁게 살아갈 때에 집 바깥에서 즐겁게 살아갑니다. 집안부터 따스해야 집 바깥에서 이웃과 복닥이면서 따스한 사랑을 나눕니다. 집안을 아름다이 일구는 손길로 집 바깥에서 내 마을과 고향과 삶터를 아름다이 일굽니다.


 (2) 즐겁게 사귈 마음동무


 2011년 오뉴월 무렵에 둘째를 낳습니다. 둘째가 태어나면 첫째는 둘째를 잘 보살피면서 무럭무럭 크도록 돕고, 나중에는 둘이 함께 신나게 놀겠지 하고 꿈을 꿉니다. 너무 많은 사람한테 치이는 도시가 아니요, 시끌벅적 어수선한 나머지 마음을 느긋하거나 넉넉하게 다스리기 힘든 도시가 아니니까요.

 몸마음 아픈 옆지기는 도시로 볼일 보러 나갈 때에 함께 마실을 하면 늘 어지러워 하고 힘들어 합니다. 아이는 이것저것 볼거리 많다며 이리 뛰고 저리 달립니다. 애 아빠는 아이 건사하랴 아픈 사람 돌보랴 벅차기도 하지만, 시외버스를 달려 도시하고 가까와질 무렵이면 똑같이 어질어질합니다. 마시는 바람과 받아들일 햇볕부터 다르거든요. 게다가, 어느 한 사람도 아름답지 않거나 소담스럽지 않을 목숨이 아닌 사람들인데, 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이 복작대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아끼지 못합니다. 아니, 서로서로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해요.

 내 몸을 아낄 때에 내 이웃을 아낍니다. 내 삶을 사랑할 때에 내 동무 삶을 사랑해요. 도시에서는 살아남기와 겨루기와 피튀기기에 시달리거나 길든 나머지, 참사랑을 잊고 참사람됨하고 멀어집니다. 바람이 좀 더럽다든지 햇볕 쬘 빈틈이 없다든지 하는 걱정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사람다움을 빼앗기거나 스스로 잃은 모습이 슬퍼서 몹시 고단해요.


.. 도시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천이며 연고 그리고 이상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가지고 마을을 찾아와 채소와 닭과 바구니, 모자 따위와 바꿔 가곤 합니다. 마을사람들은 바구니며 모자 들을 짜고 꾸미는 법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죠 … 거기서 좀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부모들이 자신들의 맏이를 도시로 보내기로 허락하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모두 딸들이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딸들은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가 아주 수월하기 때문이었지요 ..  (26, 29쪽)


 삶은 겨루기가 될 수 없습니다. 삶은 이름값이 될 수 없습니다. 삶은 등수매기기가 될 수 없습니다. 삶은 돈벌기가 될 수 없습니다.

 한 번 선물받은 삶이란 한 번뿐입니다. 어쩌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지만,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달지라도 예전에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를 떠올리거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나 바로 오늘 꾸리는 내 한삶이 보배와 같습니다.

 돈이 아주 많은 집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즐겁거나 멋진 삶을 보내지 않습니다. 돈이 하나도 없는 집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동무한 사람이 슬프거나 고단한 삶을 보내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다면 슬픈 삶입니다. 마음이 있다면 기쁜 삶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괴로운 삶입니다. 사랑이 있어서 즐거운 삶이에요.

 몸이 아파 제대로 못 걷는다 하더라도 서운하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몸이 튼튼해 온누리를 자전거나 두 다리로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놀랍거나 기쁘지 않아요. 조그마한 텃밭을 앙증맞게 일굴 때에는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며 보람찹니다. 널따란 논밭을 기운차게 일군다면 널따란 논밭을 기운차게 일구며 보람차겠지요.

 책을 백만 권 읽는 사람은 백만 권을 읽어서 기쁘리라 봅니다. 책을 백 권쯤 읽은 사람은 백 권쯤 읽은 책으로 기쁘리라 봅니다. 책을 한두 권 읽은 사람이라면 한두 권 읽은 책으로 기쁠 테고, 책을 한 권조차 못 읽은 사람은 책 아닌 삶자락에서 책읽기와 같은 기쁨을 누리리라 봅니다.


.. 그 말이 라니아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라니아에게는 6층도, 승강기도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것들이었으니까요 …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뭔지 모를 물건들이 곽 들어찬 작은 방에 혼자 남겨진 라니아는 매트리스 위에 놓인 검고 흰 옷들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화려한 옷감에 익숙한 라니아에게는 그 옷들이 매우 슬프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니아는 그 옷들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 늘 동생들 사이에서 꿈과 입김과 움직임이 정신없이 뒤섞이는 가운데 잠을 자곤 했던 라니아에게는 여기서, 시끄러운 소리는커녕 뒤척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이 깜깜한 작은 방에서 혼자 누워 잠을 자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라니아의 하루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았고, 기계처럼 돌아갔습니다 ..  (34∼35, 40, 58, 62쪽)


 삶은 숫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까이 사귈 동무 또한 숫자가 아닙니다. 돈이 더 많아야 좋은 삶이 아니기 때문에, 동무가 더 많아야 좋은 삶이 아니에요.

 도시사람들은 우리 아이를 보며 흔히 “어쩜, 이 시골에 동무도 없을 텐데, 불쌍하네.” 하고 말합니다. 도시사람 아닌 시골사람도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그러면 도시에서는 동무로 사귈 사람이 많아서 안 불쌍할까 아리송합니다. 사람은 많은데,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모두 다 동무로 사귈 만한 삶을 꾸리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참다운 마음동무가 얼마나 많은지 알 길이 없을 뿐더러, 맑지 못한 바람과 하늘에다가 햇볕과 달빛을 받을 수 없는 터전이 아이한테 얼마나 좋을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라니아는 자기가 글을 깨치는 것을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부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야단을 맞을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 라니아가 부인과 주인님의 집에 온 이후로, 라니아는 마치 가구나 기계처럼 살았습니다. 두 사람이 라니아를 구박하지 않는다는 것은 라니아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라니아는 마치 그 집에 없는듯이 살았습니다. 부인과 주인님은 라니아에게 예를 들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즘 지내기가 어떤지 같은 것을 결코 물어 보지 않습니다 ..  (75, 78∼79쪽)


 책이라면 참다운 책 하나, 참책을 읽으면 됩니다. 백만 권이나 십만 권이나 만 권이나 하는 숫자는 부질없습니다. 돈이라면 참다운 돈 한 푼, 참돈을 벌면 됩니다. 백억 원이나 십억 원이나 일억 원이나 하는 돈크기는 덧없습니다. 동무라면 참다운 마음동무 한 사람, 참동무를 사귀면 됩니다. 동무가 즈믄이니 백이니 열이니 한다 한들 더 반갑지 않아요.

 지식을 쌓자고 읽을 책이 아닙니다. 참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자면서 읽는 책입니다. 은행계좌를 두둑히 하자며 벌어들일 돈이 아닙니다. 참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자면서 알맞게 벌어 알맞게 쓰는 돈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참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눌 마음동무 한 사람이면 넉넉합니다. 괜히 허파에 바람을 넣지 않아도 됩니다. 한 사람이면 넉넉하고, 둘이 되면 고맙습니다. 숫자로 사귀는 동무가 아니라 마음으로 사귀는 동무입니다. 얼굴이나 몸매나 이름값이나 학벌 따위로 따질 옆지기가 아니라, 마음으로 헤아리며 부둥켜안는 옆지기입니다.

 한 사람한테는 백만 평이나 만 평이나 천 평이나 하는 땅이 없어도 먹고살기에 넉넉합니다. 한 평짜리 텃밭에서 거두는 푸성귀만으로도 한 사람이 다 먹을 수 없습니다. 네 식구라면 네 평짜리 텃밭으로도 넘치겠지요. 쌀을 거두는 논은 네 식구일 때 몇 평이면 넉넉하겠습니까.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자면 돈이 아주 많아 크디큰 논밭과 전원주택을 사들여야 하지 않아요. 작은 논밭과 작은 집이면 알맞춤합니다. 작은 사람으로서 작은 보금자리를 작은 손길로 가꾸면 조촐합니다. 애써 큰사랑을 펼치려 하기보다, 작은사랑을 오붓이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곧, 시골에서 살든 도시에서 살든 똑같습니다. 작은 한 사람으로서 작은 집에서 작은 꿈으로 작은 믿음을 나눌 수 있으면 어느 곳에서 살든 아름답습니다. 내 마음을 따사롭게 돌보고, 내 사랑을 너그러이 감쌀 수 있어야, 누구하고 어깨동무하든 나부터 좋은 마음동무로 살아갑니다.


 (3) 《라니아가 떠나던 날》이라는 작은 책이란


 크기가 작고 이야기도 작은 책 《라니아가 떠나던 날》을 읽습니다. 《라니아가 떠나던 날》에 나오는 라니아는 여러 차례 떠납니다.

 맨 먼저, 고향마을에서 떠납니다. 다음으로, 착하며 넓었던 마음에서 떠납니다. 그러다가, 도시를 떠납니다. 이때에, 갑갑하며 와르르 무너져내렸던 마음에서 떠납니다. 마지막으로, 라니아를 옭아매던 낡은 쇠사슬에서 떠납니다.


.. 라니아는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다. 라니아는 학교가 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동생들이나 마을 아이들도 라니아에게 학교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없어요. 아무도 학교에 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라니아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바로 학교입니다. 이를테면 새벽부터 동물들을 그늘로 몰아넣는 눈부신 해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니아는 해가 은혜이자 위험임을 알고 있습니다. 해가 없다면 아무것도 살지 못합니다. 해가 없다면, 덤불이 무성한 주변의 풍경은 라니아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황토색과 적갈색이 감도는 그 빛을 잃어버립니다 ..  (12쪽)


 돈이란 따로 없고 권력이나 학벌 따위조차 따로 없는 시골마을 시골아이 라니아입니다. 학벌 없는 마을에서는 권력 또한 없을 뿐 아니라 돈 또한 없습니다. 자동차라든지 비행기라든지 텔레비전이라든지 인터넷이라든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가 있다면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를 더 누리겠지요. 그런데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를 누리는 만큼 내 삶을 누리지는 않습니다. ‘물질문명’을 누린다 해서 ‘삶’을 누리지는 않아요.

 라니아한테는 시골마을이 학교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시골마을은 시골마을이지 학교가 아닙니다. 라니아한테는 제 어버이와 이웃 어른이 교사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어버이와 이웃 어른은 제 어버이요 이웃 어른이지 교사가 아니에요.

 시골마을은 라니아한테 수많은 삶과 이야기를 가르쳐 줍니다. 다만, 지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몸으로 가르칩니다. 꽃과 풀과 나무란 꽃과 풀과 나무로 라니아 삶으로 스며들지 꽃이름 풀이름 나무이름으로 외우지 않아요. 이름이란 몰라도 되고, 이름을 붙여도 되지만, 이름에 앞서 꽃과 풀과 나무가 어떤 목숨이요 어떤 자연인지를 몸뚱이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라니아네 어버이와 이웃 어른은 라니아한테 지식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돈도 물려주지 않습니다. 그예 함께 살아갈 뿐입니다. 함께 웃고 울며 떠들고 밥먹으며 살아가는 살붙이입니다. 교과과정에 발맞추어 성교육을 할 까닭이 없고, 학과과정을 살피며 사회정보를 알릴 까닭이 없습니다. 나이와 몸에 걸맞게 일거리를 주고 제몫과 제구실을 하게끔 가만히 지켜봅니다. 대통령 이름이라든지 미국에서 무슨 영화가 나왔다든지 하는 정보가 아니라, 라니아네 마을을 이룬 자연이라든지 라니아에 마을을 살아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흙을 알려주고 햇볕을 알려주며 물을 알려줍니다.


.. 적당한 시기가 찾아오자, 라니아는 고향 마을에 학교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주변의 모든 아이들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벽도 없고, 책상도 없고, 의자도 없는, 작은 학교입니다. 비가 내리는 날,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만 있습니다. 그리고 라니아가 아이들에게 가르칠 내용을 적는 칠판 하나하고요. 아이들은 무릎 위에 판판한 돌을 올려놓고 땅바닥에 앉아서 공부를 합니다. 도시에 살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 어떨 때면 라니아는 수업을 하는 대신에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합니다. 라니아가 어렸을 때 여기저기 걸어다니면서 주변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죠 ..  (97, 99쪽)


 줄거리로 보자면, 《라니아가 떠나던 날》은 ‘시골 아이들 노동력을 울궈먹는 나쁜 도시사람’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신매매범이나 성매매를 일삼는 못된 어른들만 시골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음을, 그저 수수하게 살아간달 수 있는 여느 도시사람 또한 알게 모르게 시골 아이들이 제 삶과 꿈과 뜻을 펼치지 못하도록 가로막거나 짓누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책이란 줄거리로 읽지 않습니다. 책이란 삶으로 읽습니다. 《라니아가 떠나던 날》이라는 작은 책에 담은 삶을 들여다보면, 라니아로서는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 두 가지를 또렷하게 느낍니다. 라니아로서는 착하게 사랑하고 싶고 참다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라니아로서는 아파트 열쇠를 가진다든지, 자동차 열쇠를 흔든다든지, 은행계좌를 여럿 거느린다든지 하는 삶을 사랑하지 않을 뿐더러 알지조차 않습니다. 라니아로서는 ‘눈부신 햇살’과 ‘귀여운 동생’과 ‘좋은 엄마 아빠’하고 어우러지는 고향마을이 즐겁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라니아가 떠나던 날》은 무척 어여쁜 환경책 하나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내 터전을 돌아보도록 이끌고, 내 보금자리를 사랑하도록 거들며, 내 마을을 살뜰히 보듬도록 돕습니다.

 환경책은 환경운동 지식을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환경책은 지구환경이 무너진다는 걱정스러운 외침을 담는 책이 아닙니다. 이런 책도 환경책 갈래 가운데 하나라 하겠습니다만, 참다운 환경책은 내 삶터(환경)를 옳게 느껴 바르게 아끼는 마음결을 내 손으로 추스르도록 도와주는 길동무 같은 책입니다. (4344.1.2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