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동네 찾아온 동화작가 황선미
 ― 어린이문학은 ­‘사람’을 깊이 다루는 이야기



 작가를 만나려면 책을 읽으면 됩니다. 글 작가이든 사진 작가이든 그림 작가이든, 그이가 펼쳐서 보여주는 이야기는 책에 알알이 담기니, 책을 읽으면 작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쓴 책에 앞서 작가를 만날 수 있다면, 또 작가가 쓴 책을 읽고 나서 작가를 만날 수 있다면, 책과 삶과 사람을 새삼스럽게 돌아보게도 됩니다. 책은 책대로, 삶은 삶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좀더 그윽하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2008년 12월 12일 금요일 낮 네 시, 어린이문학을 하는 황선미 님이 인천 배다리 골목길에 있는 〈시 다락방〉에 찾아왔습니다. 요즈음은 어린이문학뿐 아니라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창작을 가르치기도 하는 터라 몹시 바쁘지만, 어려운 틈을 내어 사람들(어린이 독자와 어른 독자)과 이야기 한 자락을 나누었습니다.

 황선미 님이 그동안 낸 작품을 들면, 《앵초의 노란 집》(베틀북,1998), 《여름나무》(두산동아,1998), 《내 푸른 자전거》(두산동아,1999), 《샘마을 몽당깨비》(창비,1999), 《나쁜 어린이 표》(웅진주니어,1999), 《목걸이 열쇠》(시공주니어,2000), 《마당을 나온 암탉》(사계절,2000), 《까치 우는 아침》(웅진주니어,2000), 《초대받은 아이들》(웅진주니어,2001), 《늘푸른 나의 아버지》(두산동아,2001), 《소리없는 아이들》(두산동아,2001), 《들키고 싶은 비밀》(창비,2001), 《약초 할아버지와 골짜기 친구들 1ㆍ2》(사계절,2002), 《꼭 한 가지 소원》(낮은산,2002), 《빈 집에 온 손님》(아이세움,2002), 《과수원을 점령하라》(사계절,2003), 《일기 감추는 날》(웅진주니어,2003), 《막다른 골목집 친구》(두산동아,2003), 《넌 누구야?》(사계절,2004), 《트럭 속 파란눈이》(시공주니어,2005), 《푸른 개 장발》(웅진주니어,2005), 《동화 창작의 즐거움》(사계절,2006), 《처음 가진 열쇠》(웅진주니어,2006), 《나온의 숨어 있는 방》(창비,2006), 《울타리를 넘어서》(베틀북,2007), 《주문에 걸린 마을》(주니어랜덤,2008), 이렇게 창작 스물여섯 권에다가 동화창작을 돌아보는 이론책 한 권이 있습니다.

 책이름으로도 느낄 수 있고, 책을 몸소 펼쳐서 읽은 분들은 남달리 느끼실 텐데, 황선미 님 어린이문학은 사탕발림 어린이문학이지 않았습니다. 구경하는 어린이문학이 아니요, 어린이를 귀엽게만 바라보는 갇힌 눈 문학도 아니었습니다. 아이를 이야기감 삼아서 팔아먹는 문학 또한 아니며, 교육과 사회 부조리를 까밝히는 문학 또한 아니었습니다.

 당신 스스로 좋아서 걷는 어린이문학입니다. 당신 스스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서 아이들하고 어깨동무하고서 주고받을 이야기로 엮어 내는 어린이문학입니다. 튼튼하게 이 땅을 딛고 있는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느덧 어린이문학가라는 이름으로 두 자리수(열 해)에 걸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당신 몸을 튼튼하고 아름답게 추스를 수 있다면, 열 해를 넘어 스무 해를 애쓸 수 있고 스무 해를 애쓴다면 쉰 권에 가까운 어린이문학을 남기게 됩니다. 더 애써 서른 해나 마흔 해까지 어린이문학 한길을 걷는다면, 어쩌면 백 권에 이르는 어린이문학을 선보일 수 있습니다.

 나라밖으로 옮겨지는 우리 문학이 드물지만, 황선미 님은 두 가지 책, 《마당을 나온 암탉》과 《나쁜 어린이 표》가 일본말로 옮겨졌습니다. 《나쁜 어린이 표》는 100쇄를 넘게 찍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린이문학을 어른문학과 견주어 몇 수 낮은 문학으로 여기는 잘못된 눈길과 흐름이 있는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광장》뿐 아니라 《나쁜 어린이 표》도 ‘100쇄 문학’입니다. 훨씬 짧은 동안에 훨씬 많은 사람(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읽혔으며, 훨씬 기나긴 앞날에 걸쳐 훨씬 널리 사랑받으며 알찬 열매를 나누어 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황선미 님이 어린이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바라본 우리 삶터와 사람 이야기 몇 마디를 옮겨적어 봅니다. 어린이문학은 ‘사람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다루는’ 이야기열매임을 다시금 곱씹습니다.


1. “우리는 서사를 잊어버렸다 일상의 세세한 부분을 스케치하면서 … 가벼움 … 가벼움 … 가벼움 … (어린이문학상 응모작으로 들어온 작품을 읽다 보면) 왜 이렇게 재미없고 불쾌하기까지 할까 … 소설이 가진 문학성을 생각하지 않고, 이만하면 괜찮아 괜찮아 하는 ……. 동화도 서사이고, 서사는 이야기이거든요. 언제부턴가 우리는 가벼운 일상에 매몰되면서, 아이들 일상만 좇아가고 있구나 … 왜 이렇게, 훌륭한 (어른문학) 시를 쓰시는 그분들이 (동시나 동화를 쓰시면서) 지치게 하는지 … 제대로 이루어지지 앟기 때문에, 훨씬 더 가벼워지는 모양이 보이기도 해요.”

2. “가장 우려되는 것은 문장력이 되지 않는 것 …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 또 관심이 있어서 아카데미고 강좌고 들으면서도 감각이 없는 것 … 비문은 태도의 문제는 아니에요. 연습의 부족, 공부가 안 되어서일 수 있는데, 가장 큰 건 비속어의 남용이에요. 예를 들면 1인칭 시점이 많아요. 쓰기가 쉽기도 할 테지만 어린이 눈길로 본다는 생각에서 1인칭 시점을 많이 쓰는데 구어체와 진술은 다르잖아요. 그런데 신인작가들이 ‘저새끼, 학교 뺑뺑이 치고’라든지 ‘나는 언젠가 담탱이와 맞짱을 뜨겠다’는 문장을 … 사회를 보여주는 단초가 된다고 해도, 이런 사람을 (등단작가나 당선작가로) 뽑아 주면 우리가 자책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 이것은 선배들 책임이겠지요. 먼저 나온 책들에서 이렇게 썼고, 이렇게 쓴 책이 잘 팔리니까요. 그러나 그보다 먼저 아이들 입맛에만 맞추려는 신인작가들 태도가 …….”

3. “정말 재미있는 것은 대만이나 일본이나, 아이들한테 잔소리하고 학원 많이 보내고 들볶고 그러는 게 거의 비슷해요. 때로는 미국 같기도 하고 … 그러면 우리다움은 뭘까? 대만하고 비슷하거나 일본하거나 비슷하거나 미국 같기도 한 모습 말고 우리다움은 뭘까? … 나도 글쓰는 사람으로서도 나다움이 뭐고 우리다움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볼로냐 가서 부스를 보면, 일본 부스는 옆에 국기를 안 달아도 그림을 보면 일본 것이라고 알 수 있어요. 그러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그림을 보았을 대 ‘야, 이건 한국 거야’ 할 수 있을까는 모르겠어요 … 문장만 보더라도, ‘야, 이건 한국 거야’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문학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

4. “유행처럼 번졌던 거는 언젠가는 없어지겠지요. 아동문학이 가진 보편과 상징은 살 거예요. 그런데 … 저는 그래요. 시 잘 쓰는 분이 소설도 잘 쓰고 동화도 잘 쓰지 않을까 … 문학하는 마음은 다 같으리라 생각하니까요. 가능하면,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들이 아동문학을 같이하면 좋겠어요 … 제가 아는 분들이 제일 좋아하는 작품에 현덕 동화가 많아요. 시대를 뛰어넘고 뛰어난 것이 있습니다. 아직 안 읽어 보셨다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분이 여기(인천) 분이었군요.”

5. “아동문학은 우리 삶에서 깊이 박혀 있는 무엇인가 있는 … 작품 하나가 바로 시다, 하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 많아요. 그런데 정말 우리 작가들 중에는 아동작가를 하려면 정말정말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강의를 할 때 저는 아놀드 로벨 작품을 늘 드는데, 간결하고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오래 남고 … 글이 안 써질 때마다 들춰봐요 … 저의 교과서이기 때문에 저는 이 책을 참고하고 다른 분들은 다른 책을 참고할 텐데 … 언제쯤이면 불필요한 것들을 놓아 버리고 할 수 있는지 … 〈눈물차〉나 〈개구리와 두꺼비가 함께〉를 읽어 보라고 하고 싶어요 … 짧고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 … 어른들은 걱정이에요. 이 보통내기 아닌 책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고 … 그러나 우리는 한 번 읽어서 싹 받아들이는 책이 없어요. 조금씩 나이에 따라 받아들이는 거지 … 그것이 다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간들에 대해, 죽 꿰어서 쉽고 간결하게 하는데, 책을 덮고 나면 ‘이게 뭐야?’가 안 되고, ‘그거면 됐지.’가 돼요. 동화는, 머리는 시에 두고 다리는 소설에 두어야 하지 않느냐고 … 이걸 어떻게 (어른들한테는 안 주고) 아이들한테만 줄 수 있느냐고, 그림책도 우리한테 큰 울림을 주는 그림책은 그냥 그림책이 아니에요 …….”

6. “아동문학을 보는 편견이, 아동문학은 아이한테 교훈적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변하지 않는 편견인데, 동화가 아이들한테 교육을 하려고 나와서 그러기도 할 테지만, 거기서 자유롭지 못한 게, 그놈의 계몽성과 교육성에서 도망가려고 하는데, 대다수 독자가 어린이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유용성을 찾게 돼요 … 그러면서도 삐삐처럼 틀을 넘어서 보고 싶은 생각을 하고 … 계몽성을 밀어내면서도 같이 가고, 그러면서 창의성으로 가려는 요상한 태도가 같이 있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의 억눌린 욕망으로 가고 싶어요. 억눌린 걸 열어 주고 싶고 … 그래서 요즘 아동문학이 학원과 공부 이야기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자꾸 되풀이되는 거 같아요. 그런데 보여줄 때 재미있고 개성 있으면 좋을 텐데 천편일률적이고 아주 절망스런 상태에서 끝내 버리고 있어요. 반성되는 게, 텔레비전 뉴스 속에는 더 절절하고 엄청난 일이 많은데, 그런 데에 동화가 못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동화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게 세상에 있는데, 아이들은 엄청난 피해자라고 보여주는 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보여주기가 다가 아닌데. 요즘 아동문학이 르포가 아닌데 …….”

7. “안델센, 삐삐, 피터팬이 나온 곳을 가 보고픈 소망이 있어요. 그런데 다 다른 나라예요. 다 찾아가려면 돈도 시간도 많이 들어요 … 저는 편집자 한 명과 정말로 갈 수 있었어요 … 그런데 저한테 이렇게 큰 공부가 되었어요. 그리고 우리도 우리 동화 발자취를 찾을 수 있는 거가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 유럽 동화마을을 찾아간 뒤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까 감감한 거예요. 우리 거가 없는 거예요. 우리한테 남겨지는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그런 작가들 알려면 그냥 책 읽으라고 하면 되는 거지 … 우리는 아동문학에서는 ‘유형의 것(작가 자취)’이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 베아트릭스 포터가 살던 곳처럼 남아 있는 곳이 없어요. 베아트릭스 포터는 남은 식구가 없어서 자기 책을 팔아서 들어온 인세로 땅을 조금씩 샀대요. 그리고 죽으면서 유언을 쓰는데 그 땅을 지켜 달라고 썼대요. 그리고 내셔널트러스트에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그 땅을 지켜 달라고 했대요 … 개발이라는 논리 앞에 무너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8. “지방에 강연 가면 그곳 공무원들이 한참 동안 인구가 몇이고 개발이 어떻고 하고 이야기를 들려줘요. 그러면 그분한테 ‘동화작가는 얼마나 있어요?’ 하고 물으면, HOT가 태어났고 하는 얘기를 해요. 동화작가는 한 사람도 없어요 … 그 시간에 그곳에 있어야 할 것을 남기는 것 … 우리는 그대로 둘 뿐이지 나중 사람이 값어치를 평가하겠지요 …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을 결국 못 벗어나거든요. 어린 시절에 누구를 만났고 어디에서 놀았고 어떻게 컸고 하는 게 어른이 되어도 그 척도가 되는데,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면 이제 어린이가 아니라고 하면서 어른 흉내를 내는데 … 스테디셀러가 되는 어린이책을 보면 어린이만 다루지 않아요. 상당히 깊은 ‘사람’을 다루잖아요. 아이와 함께 고전을 읽으면 왜 고전이 고전인 줄을 알아요. 고등학교 2학년인 우리 아들한테 〈왕자와 거지〉 완역본을 읽혔더니 아이가 잘 읽었다면서 이 사람이 쓴 다른 작품은 없냐고 묻더라고요. 놀랐어요. 고전이란 그래요 … 아이들은 고전을 읽고 자기를 생각하여 나타내는 데에 대단히 달라요 … 고전은 읽는 시간을 일부러 투자해서 가져야 해요 … 시대를 넘어 연령을 넘어 민족을 초월하는 강한 게 있구나, 우리 나라 책을 더 많이 읽혀야 한다고도 하는 편견을 넘어, 사람의 삶을 다양하게 생각하고 보는 고전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이들만 아니고, 우리 어른들도 읽어야 해요 …….”


(4341.12.1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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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광고와 신문 ‘한겨레’
 


 신문을 읽지 않은 지 몇 해인가 헤아려 보니, 2004년부터가 아니랴 싶습니다. 술집에서 굴러다니는 스포츠신문을 더러 넘겨서 야구와 배구 이야기를 들추곤 하며, 부산에 가면 부산에서 나오는 신문을, 춘천에 가면 강원도에서 나오는 신문을 사서 넘기곤 하지만, 따로 신문을 집에서 받아보지 않습니다.

 

 1988년에 이 땅에 태어난 〈한겨레〉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한글로 신문이름을 지을 수도 있구나’ 하고 놀라워 했지만 딱히 들여다보지 못했고, 고등학생 때 길거리에서 몇 번 사읽은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 앞에서 신문딸배 노릇을 하면서 살 때, 다른 지국에는 들어가지 않고 〈한겨레〉 지국에 들어갔고, 1995년 4월 5일부터 1999년 8월 7일까지 일했습니다(중고등학생 때 〈중앙일보〉를 돌려 본 적이 있어서, ‘조중동 배달직원은 죽어도 안 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신문딸배를 그친 날부터 〈한겨레〉 정기구독을 했고, 서울에서 살림을 꾸리다가 충주로 옮길 무렵인 2004년인가 2005년부터 정기구독을 끊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어느 신문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신문딸배를 하던 여러 해에 걸쳐서, 다른 지국과 신문 돌려읽기를 하면서 열 가지 일간신문을 날마다 읽기도 했습니다.

 

 운동경기 가운데 야구와 배구와 핸드볼을 남달리 좋아해서, 이 운동경기 소식을 보고자 스포츠신문을 뒤적이기는 하지만, 〈한겨레〉에 실린 운동경기 소식은 뒤적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라도 운동경기 지식이나 소식에는 젬병이거나 뒤처지기 마련인데다가 잘못 나오는 때도 잦았습니다. 〈한겨레〉가 운동경기 이야기를 신문에 싣는다고 한다면, 다른 여느 신문과는 다르게 바라보아야 할 텐데, 처음 운동경기 소식을 실을 때부터 햇수를 거듭하는 동안 조금씩 빛깔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비인기종목 소개가 굵직하게 나오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골프 이야기가 큼직하게 실렸고, 월드컵과 올림픽을 치를 때면 아예 다른 기사를 젖혀 두기까지 했습니다. 박찬호가 뜨면 박찬호를, 김병현이 뜨면 김병현을 다루었습니다. 요사이는 아마 김연아 선수 이야기를 그득그득 채울 테지요.

 

 세상흐름에 맞춰 가는 일이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흐름에 좇아 가는 일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한겨레〉가 태어날 때 돈과 마음과 힘과 손길을 보탠 사람들은 ‘그저 그런 찌라시 하나’로 바뀌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신문다운 신문이 한 가지도 없다고 할 만한 이 나라에, 신문다운 신문으로 자리매길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리하여 사상과 철학으로 따지면 좌파인 분과 우파인 분이 고루 모여서 〈한겨레〉를 빚어냈습니다. 좌파 지식인과 우파 지식인 가운데 겨레와 나라를 걱정하고 꿈꾸는 분들이 하나됨을 이루었습니다. 리영희 님은 좌파라 할 테지만 송건호 님은 우파입니다. 당신들 마음바탕을 이루는 생각은 갈릴지라도, 당신들 마음바탕을 꾸리는 매무새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가 되는 신문으로 〈한겨레〉를 빚어냈지, 둘로 셋으로 쪼개지라는(이를테면 연대파와 고대파 따위로) 신문으로 〈한겨레〉를 빚어내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겨레를 말하고 나라를 말하는 신문인 〈한겨레〉로서 이 나라 낮은자리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신문으로 퍼졌습니다. ‘조중동 반대’는 곁가지일 뿐입니다. ‘조중동 반대’란, 이 세 가지 신문이 참된 마음으로 겨레와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뿐더러, 거짓된 마음으로 겨레와 나라를 무너뜨리기 때문이었습니다.

 

 2004년인가 2005년에 〈한겨레〉를 끊을 무렵, 아니 이에 앞서도, 참 많은 이들이 〈한겨레〉를 끊었습니다. 제가 처음 〈한겨레〉를 돌리던 1995년에도 꽤 많은 이들이 〈한겨레〉를 끊었습니다. 끊은 까닭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한겨레〉가 맛이 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소리는 〈한겨레〉 기자나 경영진한테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기자와 경영진 모두는 자랑과 보람이 넘쳤으며, 50만 독자가 곧 100만도 넘고 200만도 넘으리라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이리하여, 낮은자리 독자들이 ‘왜 〈한겨레〉를 끊는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헤아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어느새 〈한겨레〉 기자와 경영진 분께서는 쇠밥그릇 놀이에 젖어서 여느 대기업 월급쟁이와 다름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여느 대기업 월급쟁이와 댄다면 달삯은 반토막밖에 안 되는.

 

 1998년이라고 떠올립니다. 그무렵에도 〈한겨레〉는 위기였습니다. 제가 처음 이 신문을 돌리던 1995년에도, 이에 앞서도 늘 〈한겨레〉는 위기였고, 나중에 구독을 끊을 때에도 위기였으며 요즈음도 위기인 줄 압니다. 그런데, 이 위기 소리는 그치지 않으면서, 위기를 딛고 일어서려는 움직임은 영 보이지 않습니다. 달라지는 움직임은 너무 굼뜹니다. 그래, 그 1998년, 저로서는 그해가 참 잊을 수 없습니다. 그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로, ‘전국 3000 〈한겨레〉 배달직원이 의견광고를 내어 실었’던 일이 있습니다. 위기를 잘 이겨내기를 바라는 한편, 〈한겨레〉가 첫마음을 잃지 말기를 바라는 뜻으로, 맨 밑바닥에서 〈한겨레〉를 아끼면서 집집마다 돌리는 배달직원들이 푼푼이 모은 땀방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땀방울과 눈물겨운 목소리마저도 〈한겨레〉 기자와 경영진한테는 조금도 못 들어갔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맨 밑바닥에 있는 배달직원들한테 그 뒤로도 어느 한 번도 ‘〈한겨레〉라는 신문을 새벽바람에 잠도 안 자면서 돌린다’는 뿌듯함을 심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옳은 기사 똑바로 잘 써서 독자한테 부끄러울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우리들 배달직원 꿈을 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독자에 앞서 배달직원, 우리는 ‘딸배’라고 했습니다만, 이 배달직원은 기자보다도 신문기사 하나하나에 머리털을 곤두세웁니다. 말썽 많은 재벌기업 광고 하나가 실릴 때에도 독자전화를 받아야 합니다. 배달직원인 우리가 그 따위 놈들 광고를 받아서 싣지 않았건만, 독자들은 ‘본사로 전화를 걸어 봤자, 허구헌날 자동응답으로 넘어가거나 전화만 받는 여직원이 건성으로 들어넘기’니까, 가장 만만한 지국으로 전화를 걸어서 항의를 합니다. 그러고는 ‘신문 끊겠다’고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습니다. 골프채 광고가 나와도, 타이거 우즈인지 라이언 우즈인지 하는 사람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수놓아도, 누구보다도 우리 배달직원들 지국 전화기는 애먹습니다. 더욱이, 신문값을 걷으러 다닐 때면, ‘니들(한겨레)이 하는 꼬락서니하고 조중동하고 뭐가 달라?’ 하는 눈초리인데, 아무 잘못이 없는 배달직원인 우리들이, 〈한겨레〉 기자와 경영진 때문에 눈초리를 받고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노릇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짜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키지 않았음에도, 1998년 겨울을 앞둔 쌀쌀한 밤에, 일산 어딘가로 가서 ‘한겨레 독자늘리기 캠페인 광고 모델’로 나갈 사진에 찍혀 주기도 했습니다. 1998년 한글날에 ‘신문배달 직원이면서도 없는 틈을 쪼개어 우리 말 운동을 하는 당찬 젊은이’를 기린다는 뜻에서 한글학회에서 한글공로상을 주었어요. 이 상으로 제 이름이 여러모로 알려졌는데, 늘 위기를 맞이하고 있던 〈한겨레〉로서는, 캠페인 광고를 해야겠다고 느꼈고, 이 캠페인 광고에서 저 같은 배달직원을 내세우면 좋을 듯하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이리하여 신문 〈한겨레〉와 잡지 〈한겨레21〉하고 〈씨네21〉에, 제 얼굴(신문 돌리는 모습)이 박힌 캠페인 광고가 여러 달에 걸쳐서 실렸고, 언젠가 〈한겨레〉 경영진 한 분한테, 최종규 씨가 바라면 특채로 〈한겨레〉 기자로 뽑아 준다는 귀띔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때 저는 대학교를 그만둔 몸이라 고졸 학력이었습니다. 〈한겨레〉는 신문방송사 가운데 오직 한 곳만 있는 ‘학력제한 없는’ 곳이었지만, 속내를 보면 일류대 아닌 기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토익점수 제출’이 발목을 잡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 경영진 분한테, “저는 특채를 바라지 않습니다. 시험을 봐서 떳떳이 들어가야지요. 그런데 시험을 치고 싶어도 토익점수를 내라고 해서 못 보겠습니다. 영어 솜씨를 알고 싶으면 영어로 글쓰기를 시키거나 영어로 면접을 봐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고, 경영진 분께서는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해서, “그러면, 저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한겨레〉 기자는 될 수 없겠네요.”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그러고 여러 해 지나, 서울을 떠나서 충주에서 이오덕 선생님 유고를 갈무리하는 일을 맡다가, 한길사라는 출판사가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불법으로 몰래 펴낸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 말썽을 풀려고 이오덕 선생님 유족과 권정생 선생님 사이를 오가면서 출판사 앞으로 보낼 편지 문건을 쓰고 있었고, 밑글을 쓰면서 제 인터넷방에 고치는 과정에 있는 글을 살짝 걸쳐놓았는데, 그만 이 밑글을 〈한겨레〉 기자가 말도 없이 훔쳐서 쓰면서 ‘특종’이랍시고 기사로 큼직하게 띄운 적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기사 도둑질 때문에 이오덕 선생님 유족과 권정생 선생님 사이에, 또 말썽을 일으킨 출판사 한길사 사이에서 진땀을 빼야 했던 일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있기 앞서 몇 달 앞서까지 저는 〈한겨레〉에 “함초롬한 우리 말”이라는 이름으로 이태 반에 걸쳐서 연재기사를 올린 적이 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한겨레 필진’인 제가 쓴 글을 아무 말이나 허락도 없이 훔쳐서 특종이랍시고 터뜨리는 일을, 다른 누구도 아닌 〈한겨레〉 문화부 기자들이 저지를 줄을 누가 알았을는지요. 이에 항의를 했지만 아무 대꾸도 뉘우침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뒤로 몇 차례 제 글 도둑질이 이어졌는데, 쓰디쓰게 혼자서 웃을 뿐, 이런 사람들하고는 앞으로 마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래도 모르는 일입니다. 기사 도둑질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당신들로서는 ‘우리 세상에 좋은 일을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신다면. 이리하여, 신문 〈한겨레〉를 읽는 사람들한테 도움되는 이야기를 건네준다면.

 

 그렇다면, 신문 〈한겨레〉에 날마다 실리는 주식시세표는 누구한테 도움이 되는 정보일까요. 수천만 원에 이르는 새차 소식은, 겨울철 스키장 소식은, 여름철 비행기 타고 멀리멀리 떠나는 나라밖 나들이 소식은, 수십만 원이 넘는 새 손전화기 소식은, 골프채와 비싼 물건 광고들은 …… 참말 누구한테 이바지할 소식일는지 궁금합니다. 신문 〈한겨레〉가 다루는 경제 이야기라면 어떤 경제 이야기가 되어야 할까요. 신문 〈한겨레〉가 다룰 문화 이야기라면 어떤 사람들이 누리거나 즐길 문화 이야기가 되어야 할까요.

 

 어느새 신문 〈한겨레〉가 스무 살이 되었다고 하는데, 스무 해라는 세월을 버틴 대목은 놀랍지만, 버티기만 할 노릇이 아니라, 아름답게 자라야 하지 않을까 묻고 싶습니다. 아름답게 자랄 수 없는 신문이라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스스로 ‘문을 닫고’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묻고 싶습니다.

 

 서채원, 김달수, 이철, 강재언, 이진희, 위양복, 사토 노부유키 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펴내던 《계간 삼천리》는 1호부터 50호까지 곧은 흐름을 잃지 않고 펴냈는데, 더 호수를 이을 수 있었음에도 굳이 50호를 마지막으로 해서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 뒤 새로운 잡지를 다시 펴내어 50호로 또다시 마감을 했다지만, 또 신문과 잡지는 다르지만, 글을 쓰고 글을 다루고 글을 읽히는 넋과 얼은 매한가지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글이 엮이어 신문이 되고 잡지가 됩니다. 글이 여미어져서 신문 독자가 생기고 잡지 독자가 생깁니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계간 삼천리》가 힘겨우면서도 다부지게 걸어갔던 길을, 한국 사회에서 신문 〈한겨레〉는 얼마나 힘겹다고 하더라도 다부지게 걷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신문 〈한겨레〉는 이 땅 이 나라에서 다부지게 걸어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신문 〈한겨레〉는 조중동처럼 200만 부 넘게 찍어야 할 까닭이 따로 없는 한편, 조중동 기자만큼 일삯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타고 출근하는 기자로 살아야 합니까? 서울 강남에 아파트를 얻는 기자로 살아야 합니까? 집안일과 아이 돌보기는 마누라한테 떠넘기고 바깥에서 술 마시고 유흥업소에서 아가씨 끼고 노는 기자로 살아야 합니까?

 

 신문 〈한겨레〉는 좌파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신문이면서, 어이없게도 좌파 신문인 듯한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참 안쓰러운 노릇입니다. 그러나 정작 신문 〈한겨레〉 속내인 우파 목소리라도 제대로 내느냐 하면, 아니올시다 하는 생각만 듭니다.

 

 재벌 삼성하고 사이가 틀어져서 삼성 광고를 못 받아서 삼성하고 손을 다시 못 잡게 되는 일은 슬플 수 있고 안타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문 〈한겨레〉가 먼저 삼성 광고를 끊지 못한 대목은 그지없이 안타깝습니다. 또한, 신문 〈한겨레〉가 재벌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꾸준히 실으면서도, 광고는 아무 말썽이 없이 받을 수 있게끔 영업이나 독자관리를 하면서 ‘삼성에서 광고관리 하는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도록 신문으로 말하지 못한 대목’을 읽어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비판이란 무엇이며, 비판은 어떤 마음으로 할 때가 참다울는지를 신문 〈한겨레〉는 얼마만큼 곱씹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더 깊이 헤아릴 대목을 대충 지나쳤기 때문에 오늘날 〈한겨레〉는 끝도 없는 위기가 꼬리를 물지 않느냐 싶습니다.

 

 신문 〈한겨레〉를 좋아할 분도 있고, 안 좋아할 분도 있으며, 거들떠보지 않을 분이 있는 한편, 일찌감치 등돌린 분도 있을 텐데, 구태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주절주절 떠들어 봅니다. 저 또한 〈한겨레〉를 안 보는 사람이지만, 지난 한때 〈한겨레〉가 위기라는 수렁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밑바닥에서 애썼던 사람이었기에, 이렇게나마 한 마디 끄적거리지 않고서는 속이 답답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그저 푸념 몇 마디라고 귀엽게 받아들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로서는 〈한겨레〉라는 신문이 걸어가는 길을 보면서 여러모로 많이 배웁니다. 안타깝게도 ‘일그러진 거울’이나 ‘깨진 거울’이 되어 주면서, 한 사람이 그릇된 길로 접어들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안타까움을 그득그득 느끼게 해 줍니다. (4341.12.1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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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데 빨래


 아프다고 해도 빨래해야지. 내 빨래는 못해도, 아기 기저귀와 옆지기 옷가지를 빨아야지. 아프다고 미루면, 이따가 더 아파지고 날 때에는 아예 못 빨고 말 테니까. 집안일은 더더욱 밀릴 테고. 내 옷은 안 빤다. 아니, 못 빤다. 아기 기저귀와 옆지기 옷가지를 빨다 보면 힘이 다 빠지고 고단해서, 내 옷가지를 빨 엄두를 못 낸다. 그래서 내 옷은 한 주 두 주 그대로 입다 보면 어느새 한 달쯤 그대로 입고 있곤 한다. (4341.12.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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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들이 빨래


 홀로 나들이를 할 때에는 따로 옷가지를 챙겨 가지 않아도 된다. 하루밤 묵는 잠집에서 빨래를 하고 널어 놓으면 아침에 다 마르기 때문. 그러나 홀로 나들이를 하지 않는 요즈음은 아기 기저귀와 옷가지만으로도 가방이 하나 가득 차고도 모자라 다른 손가방을 챙겨야 한다. 그리고 이 옷가지와 기저귀를 빨아야 하기에 저녁나절 일찌감치 잠집에 들어야 하고, 잠집에 들어서도 쉼없이 빨래를 해대야 한다. 애써 나들이를 나왔지만 돌아다니며 둘러볼 겨를이란 거의 나지 않으며, 돌아다니는 사이 하나둘 늘어나고 쌓이는 빨래를 헤아리면서 걱정이 함께 늘고 근심이 소록소록 겹친다. 이윽고 나들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찌감치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동안 엉성하게 했던 빨래를 다시 제대로 하느라, 그리고 여러 사람 옷가지까지 빨래감이 곱배기가 되느라, 다른 일에는 조금도 마음을 쏟을 수 없다. 더군다나 어제오늘은 날까지 궂어서 비까지 내리고 마니, 제기랄, 마당에는 빨래를 내다 널지 못한다. 궁시렁궁시렁 투덜거리며 겨우 집안에 이은 빨래줄에 널고 옷걸이에 걸지만, 하루가 다 가도록 빨래는 안 마른다. 집에서도 빨래가 밀린다. 하는 수 없이 다리미를 써서 억지로 물기를 빼낸다. (4341.1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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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저귀 빨래


 백일을 맞이하는 기저귀 빨래는 삼천 장입니다. 어느덧 백일을 넘겼으니 삼천 몇 백 장에 이릅니다. 머잖아 돌을 맞이할 텐데, 돌 때까지는 만 장이 되겠군요. 아기가 언제쯤 똥오줌을 가리게 될는지 모릅니다만, 앞으로 몇 만 장 기저귀를 빨아야 아기는 제 아비 어미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이 땅에 튼튼히 두 발을 디디는 어린이가 될는지요. (4341.12.1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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