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물개를 바다로 보내주세요 미래그림책 55
마리 홀 에츠 글 그림, 이선오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좋은 사람, 좋은 책, 좋은 그림책
 [그림책이 좋다 55] 마리 홀 에츠,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



- 책이름 :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
- 글ㆍ그림 : 마리 홀 에츠
- 옮긴이 : 이선오
- 펴낸곳 : 미래M&B (2007.6.7.)
- 책값 : 9000원



 (1) 시와 글과 문예창작과 교수와 사람


 글을 쓰는 꽤 많은 분들이 대학교에서 문예창작과 강사나 교사가 되곤 합니다. 대학교에 문예창작과가 그리도 많았는가 싶어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데, 글쓰기를 가르쳐 주는 곳이 퍽 많고, 적잖은 시인과 소설가가 ‘교수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저는 글쓰기는 학교에서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느끼고 있기에, 대학교 같은 데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친다고 할 때에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싶어 몹시 궁금하기도 하지만 슬프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삶이 없이 글을 쓸 수 없고,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서 글이 나오지 않으며, 자연 삶터 목숨을 내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야 글에 기운이 실리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글솜씨를 키우려는 생각으로 대학교 문예창작과를 간다든지, 그냥 책이 좋아 간다든지, 아무 생각 없이 원서를 냈다든지 했다면 갈 수도 있는 노릇이겠습니다만, 참으로 책을 좋아한다면 문예창작과도 대학교도 마음에서 잊어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책을 좋아하면 책방과 도서관에 갈 노릇이고, 글을 쓰고 싶다면 수많은 책을 돌아보면서 ‘아직 쓰여지지 않은 가슴 저리는 이야기’로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가운데 ‘우리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이야기’는 얼마나 있는가를 몸소 찾아나서야 한다고 느낍니다. 글쓰기란 겉멋이 아니요, 글쓰기란 대중소설이 아니고, 글쓰기란 돈벌이가 아니며, 글쓰기란 이름값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는 어느 직업인으로 대학교수가 되기도 하고, 시인이 교수가 되기도 하며, 소설가가 교수가 되기도 합니다. 글이 아닌 ‘문예’가 되고 쓰기가 아닌 ‘창작’이 되는 이 나라에서는, 시중 새책방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면서 글삯을 두둑하게 챙기고 비평가들한테 좋은 소리 많이 들으며 이름을 날리게 되면 ‘글 잘 쓰는 사람’인 듯 대접을 받으니, 이러한 겉치레를 좇아 해마다 천만 원이나 되는 돈을 대학교에 바치는 젊은 넋이 꽤 많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슬픈 마음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 그런데 엄마가 항구로 돌아와 보니 아기 물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아기 물개를 찾아 온 바닷가를 헤매었어요. 이름을 부르고, 끽끽 소리도 질러 보았지만 아기 물개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아기 물개는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엄마가 먼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한 선원이 모래밭에 있는 아기 물개를 보게 되었어요. 선원은 아기 물개를 데려가 버렸습니다. 선원은 아기 물개를 바닷가 마을에 가서 팔 생각이었어요 ..  (2∼3쪽)
 





 엊저녁, 퍽 이름난 시인이 들려주는 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진을 찍고, 찍은 사진을 곧바로 시디에 구워 건네드리고 나서 함께 막걸리잔을 들다가, 자꾸자꾸 샘솟는 눈물을 참기 어려웠습니다. 시란 이러한가, 시를 누구 읽으라고 쓰는가, 시인이 젊은 넋한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란 무엇이고, 젊은 넋은 왜 시인한테 문예창작이라는 학문을 배우고 있는가 곱씹으면서 괴로웠습니다.

 그 시인도, 또 다른 시인들도, 당신들 삶이 있었기에 시를 썼습니다. 당신들 발자국 묻어난 고향마을이 있고 고향사람이 있었기에 시를 엮어냈습니다. 당신들을 일깨운 책이 있고, 당신들을 이끌어 온 어른이 있었기에 시한테 사랑을 바쳤습니다. 당신들을 북돋우고 아끼며 기꺼이 읽어 준 낮은자리 사람들이 있었기에 시 하나로 밥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밥벌이가 끝나고 나면, 밥벌이가 어느 만큼 느긋하게 자리잡고 나면, 시는 어디로 가지요? 시는 어떻게 흐르지요? 시는 어떻게 뻗어나가지요?


..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올레이(아기 물개)의 향수병은 깊어만 갔어요. 엄마가 보고 싶었고, 바닷가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도 그리웠습니다. 올레이는 자꾸 눈물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어요. 사육사 아저씨는 올레이를 달래 주려고 말을 걸기도 하고, 트럼펫으로 슬픈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어요 ..  (7쪽)


 동화를 쓰는 어느 분은 자기 글에 빈틈이 없을 뿐더러, 자기가 아주 글을 잘 쓰는 사람인 듯 여기고 있습니다. 마흔이란 나이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글 하나에 담긴 빛줄기를 보거나 잡아챘기에 스스로 자기 글을 훌륭히 여기게 되었는지 모릅니다만, 농사짓기와 같은 글쓰기인지라, 잘 쓴 글이고 못 쓴 글이란 있지 않습니다. 밥이 되는 곡식과 같은 글인지, 쭉정이라 거름으로나 써야 하는 글인지가 갈릴 뿐입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모내기를 할 만한 볍씨가 될 만한 글인지, 농약과 비료를 먹고 자란 글인지, 똥거름을 먹고 자란 글인지가 나뉠 뿐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어린이한테 읽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만한 마음그릇이라는 대목이 그지없이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어린이 마음이 아니고서는 어린이한테 읽힐 글을 쓸 그릇이 안 되는데, 어린이 마음이란 ‘찬찬히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마음이고, ‘늘 새롭게 배우고 거듭 익히며 꾸준히 달라지는’ 마음인데, 둘레 사람 말을 듣지 못하고, 둘레 사람 삶을 몸뚱이와 머리 모두로 찾아나서지 못하면서 무슨 동화를 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른이 읽는 글 또한 함부로 쓸 수 없지만, 어린이가 읽는 글은 훨씬 더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국가는 폭력이다》를 쓴 톨스토이와 같은 그릇이 되고 나서야 시를 쓰든 동화를 쓰든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너무하는 이야기인지 모릅니다만, 톨스토이 발가락만큼이라도 닮아 보려고 바둥거리면서 시를 쓰든 동화를 쓰든 해야 할 테고, 우리 땅에서 우리 나름대로 ‘또다른 톨스토이가 되려는’ 매무새로 시를 쓰든 동화를 쓰든 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나를 알고 세상을 알고 사람을 알고 자연을 알아야 샘솟아 나오는 글이거든요. 나를 모르고 세상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며 자연마저 모르는 채 글짓기를 억지로 억지로, 또 억지로, 순 억지로 써내어 무슨무슨 상을 타고 무슨무슨 대학에서 교수 일을 한다고 해 보아야, 이런 쭉정이들이 얼마나 밥이 되거나 힘이 되겠습니까. 거름이나마 될 수 있으려나요.
 





.. 홱! 올레이는 낚싯줄에 걸리고 말았어요! 작은 방울들이 딸랑거리자 사람들이 낚싯줄을 끌어당겼습니다. ‘이렇게 끝나다니!’ 올레이는 물속을 향해 있는 힘껏 헤엄쳤어요. 올레이가 얼마나 세게 몸부림을 쳤던지 낚싯줄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올레이는 다시 자유로워졌어요. 사람들은 거의 잡을 뻔하다 놓친 게 무엇인지 보려고 성냥불을 켰습니다. 하지만 올레이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쳐다보자,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어요. 그러고는 달아나 버렸지요. 사람들은 올레이와 놀아 주지도 않고, 친구가 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올레이는 등대 옆에 있는 바위까지 헤엄쳐 갔습니다 ..  (14∼15쪽)


 (우리 말로 옮겨진 책으로는) 《숲 속에서》와 《또다시 숲 속으로》와 《바로 나처럼》과 《나랑 같이 놀자》와 《크리스마스까지 아홉 밤》 같은 구슬처럼 아름다운 그림책을 엮어낸 ‘마리 홀 에츠’ 님이 1947년에 그려낸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를 두 번 세 번 넘기고 읽고 보고 눈물을 흘리다가는 빙긋 웃으면서 이 나라 글꾼들 삶과 모습과 말과 매무새를 돌아봅니다. 이 나라에서 그림 그린다는 분들과 사진 찍는다는 분들 삶과 모습과 말과 매무새도 함께 헤아립니다.

 처음부터 ‘명작’이나 ‘고전’이란 없고, 새내기나 풋내기를 거치지 않고 훌륭한 이나 깨우친 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모짜르트 같은 천재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한테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천재들도, 천재가 아닌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땀을 흘립니다. 땀을 바칩니다. 사랑이 서린 땀을 흘립니다. 믿음이 배인 땀을 바칩니다. 한 해 두 해로는 어림도 없을 땀을 쏟고, 열 해 스무 해로도 모자란 땀을 들입니다.

 몇 해 앞서 세상을 떠난 어린이문학가 권정생 님이 《몽실 언니》를 어떻게 써냈을까 떠올려 봅니다. 《한티재 하늘》을 써낸 이야기를 아주 짤막하게 밝힌 적이 있는데, 권정생 님은 젊은 날부터 몸이 아파서, 첫사랑이 막사랑이 되고 만 아픔과 슬픔이 있지만, 너무도 아픈데 빨리 죽지도 않아 더 괴로웠는데, 그러면서도 피를 한 움큼 쏟고 원고지 글 한 줄 쓰고, 또 피를 한 움큼 쏟고 원고지 글 한 줄을 쓰면서 겨우겨우 이야기책 하나를 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글꾼이건 그림꾼이건 사진꾼이건, 반드시 아무개 님들처럼 아파 보아야만 더 빛나는 열매를 얻어내지는 않아요. 아픔과 슬픔이 빛나는 열매를 이루는 디딤돌이지는 않고요. 그러나, 내 아픔과 슬픔을 떨쳐내지 않고 삭여낼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하고, 이웃 아픔과 슬픔을 등돌리지 않고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나한테 있는 모자람과 아쉬움을 볼 줄 알아야 이웃한테 있는 모자람과 아쉬움을 봅니다. 나한테 있는 사랑과 믿음을 느낄 줄 알아야 이웃이 우리한테 베풀려고 하는 사랑과 믿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림책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를 넘기면, 가없이 넓고 깊은 어머니 사랑이 처음부터 끝까지 넘실넘실 느껴지는 한편으로, 어머니 사랑을 잃거나 버린 우리들 여느 사람들 삶이 슬프고 아프게 느껴집니다. 한 목숨 어머니한테 받은 기쁨과 보람을 느끼면서, 우리들 스스로 어머니한테 이어받은 고마운 목숨을 기뻐하거나 반가워할 줄 모르는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 ‘마리 홀 에츠’ 님 그림책이 옮겨진 때는 이제 고작 열 해가 조금 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아직 ‘마리 홀 에츠’ 님 그림책을 보고 자라면서 어른이 된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진작부터 수많은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깊은 사랑과 너른 믿음이 알알이 담긴 ‘마리 홀 에츠’를 어머니랑 함께 보아 왔어요. 한국사람이 우러러 마지않는 미국땅 어린이들도, 유럽나라 어린이들도 ‘마리 홀 에츠’ 그림책과 함께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다만, 무럭무럭 자라난 아이들 가운데 엇나가고 말아 전쟁 미치광이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만,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 같은 그림책을 살뜰히 받아먹고 아름다운 마음결을 놓지 않고 할머니가 되고 할아버지가 된 사람이 아주 많아요.
 





.. 올레이는 구경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천천히 헤엄쳐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호숫가 모래밭에서 들려왔어요. 올레이는 그 사람들이라면 자기와 놀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레이는 모래밭 쪽으로 헤엄쳐 갔어요. 그리고 얼굴을 물 위로 쏙 내밀고, 사람들이 봐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올레이를 보고도 웃지 않았어요. 자세히 보려고 몰려오지도 않았어요. 물고기로 가득한 건물에서 본 사람들하고는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올레이와 놀려고도, 올레이를 구경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놀라서 정신을 잃거나,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호수 밖으로 달아나 버렸지요 ..  (19쪽)


 오늘도 새로운 아침해를 맞이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동화를 쓰든, 스스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면 땀을 흘릴 노릇인데, 자기 작품을 일구는 데에만 땀을 흘리지 말고, ‘마리 홀 에츠’처럼 고즈넉하게 사랑열매와 믿음열매를 맺은 분든 땀방울을 알아내고 느껴서 받아먹는 데에도 땀을 흘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작품을 써낸 괴테라지만, 괴테는 자기 삶 1/3을 말등에서 보냈다고 할 만큼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굳이 괴테처럼 살거나 괴테가 되어야 할 까닭은 없는데, 그렇기는 하나 우리들은 우리 삶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우리들은 우리 삶을 어떻게 여미고 있는지, 우리들은 우리 고맙고 거룩한 삶을 어떤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지 곰곰이 돌아보아야지 싶어요. 이렇게 하지 않고서 쓰는 시나 소설이나 동화가 된다면, 한낱 종이쓰레기일 뿐입니다. 거름도 되지 못하는 종이부스러기일 뿐입니다. 자기가 ‘내 책은 명작이야!’ 하고 말하거나 ‘내 책은 고전이라고!’ 하면서 내세울 수 없는 노릇입니다만, 앞으로도 오래오래 ‘명작이 되고 고전으로 이어갈’ 만한 글그릇이 되도록 그림그릇이 되도록 사진그릇이 되도록, 좀더 갈고닦으면서 삶자락을 추슬러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2) 좋은 그림책이란


 1895년에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란 ‘마리 홀 에츠’ 님은, 1917년에 혼인했던 남편이 두 주 만에 제1차 세계대전 때 싸움터에서 죽자 남편 잃은 슬픔을 이겨내려고 어린이를 돌보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일을 합니다. 1930년에 다시 혼인을 했으나, 둘째 남편도 열세 해 뒤 암으로 세상을 떠나 버렸고, 끊임없이 닥치는 아픔과 슬픔을 꿋꿋이 이겨내려고, 또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따뜻함을 찾아서 나누려고 그림책을 그리게 됩니다. 그렇게 그렇게 애쓰고 힘쓰면서 살다가 1985년에 당신도 흙으로 돌아갑니다.


.. 엄마는 아기 물개의 코에 입을 부볐어요. 올레이와 엄마는 파도를 타고 헤엄쳐 바닷가 쪽으로 갔습니다. 물개 두 마리는 배로 기어서 천천히 밖으로 나왔어요. 점박이물개는 발이 지느러미 같아서 걸을 수가 없거든요. 올레이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먼 길을 헤엄쳐 와 피곤했어요. 올레이는 엄마 옆에 누워 금방 잠이 들었어요. 바닷가 항구 모래밭에서 ..  (30쪽)
 





 ‘마리 홀 에츠’를 모르는 이웃집 헌책방 아주머니하고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라는 그림책을 함께 넘겨 봅니다. 책읽을 겨를이 없고, ‘누가 훌륭한 그림책 작가인가를 모르는’ 아주머니는, “그림 참 좋네, 가슴으로 느껴지네.”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마리 홀 에츠’라는 이름을 보며 책을 끄집어냈지만, 아주머니는 이름이나 출판사는 보지 않고 그림부터 먼저 펼쳐 보았습니다.

 예순 해를 묵은 그림책이니, 1947년에 미국에서 이 그림책을 보던 아이들 가운데에는 세상을 뜬 사람도 꽤 많겠구나 싶습니다. 이 그림책을 보면서 ‘나도 이런 그림책을 그려내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꿈을 키운 사람도 퍽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2007년에 겨우 옮겨지기는 했으나 그리 알려지지 못하고 읽히지도 못하는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인데, 요 알뜰한 사랑열매와 요 애틋한 믿음열매를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받아안거나 받아먹는지 궁금합니다.


.. 어느 바닷가 항구에 점박이 아기 물개가 태어났어요. 아기 물개는 너무 어려서 물속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모래밭에 엄마와 함께 누워 있었지요. 가끔 엄마는 고개를 돌려 아기 물개 쪽을 살폈어요. 그리고 아기 물개에게 뽀뽀를 해 주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  (1쪽)


 아무래도 우리들은 ‘좋은’ 그림책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눈이 몹시 얕다고 느낍니다. 어릴 때부터 ‘좋은’ 그림책과 어린이책을 만나지 못하니, 스스로 ‘좋은’ 책을 알아보는 눈을 기르지 못하고, 또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길 가운데 하나를 놓치지 않느냐 싶습니다. ‘좋다 나쁘다’란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고, ‘좋다 나쁘다’로 가르는 일이란 아무 뜻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몸에 좋은 밥처럼 마음에 좋은 책이란 틀림없이 있습니다. 씨눈이 살아 있는 누런쌀밥과 씨눈이 잘리고 없는 하얀쌀밥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새힘을 나게 할 때에도 틀림없이 다릅니다. 농약 먹은 감자와 농약 안 먹은 감자 또한 틀림없이 달라요. 합성착색료가 들어간 마실거리를 아이들한테 함부로 마시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어른들이라면, 아이들한테 쥐어 주거나 읽어 줄 그림책이나 어린이책도 ‘좋은’ 책으로 꼼꼼히 살피고 골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부터 좋은 책을 가까이하는 매무새가 자리잡아야 푸름이가 되고 어른이 되면서도 좋은 문학과 좋은 이야기책과 좋은 인문학 책을 가까이하거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좋은’ 그림책이란 어떠한 책을 가리킬까요. 그림책이니, 먼저 그림이 군더더기가 없고 어긋난 대목이 없으며 살가워야 합니다. 적잖은 한국 그림책 작가들은 자전거를 참 잘못 그릴 뿐더러, 출판사 편집자들마저 잘못 그린 자전거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림쟁이나 책쟁이나 자전거를 안 타면서 살아가니까 자전거를 잘못 그려도 느끼지 못하는 셈인데, 좋은 그림책이라면 그린이 스스로 자기 삶을 야무지게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버지니아 리 버튼’ 그림책에, 또 ‘베아트릭스 포터’ 그림책에 군더더기란 있지도 않으나 어긋난 그림 또한 한 군데도 없습니다. ‘나카가와 리에코’가 만화처럼 간추려 그린 책 어디에도 대충 그리거나 엉터리로 그린 대목이란 한 곳도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기본 데생’을 할 줄 모르면서 ‘좋은’ 그림책이 되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림책 작가로 경력이 쌓인다 하더라도 스스로 기본 데생이 삭지 않도록 꾸준히 힘쓰는 모습이 그림책에 녹아나야 합니다.

 다음으로, 줄거리가 싱그러워야 합니다. 그림책은 한 번 읽고 덮는 책이 아니라, 적어도 100번은 다시 읽고 보는 책입니다. 100번이 아닌 1000번을 거듭 보아도 새로운 재미가 샘솟을 수 있는 줄거리를 짜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늘 신나고 재미있을 만한 이야기가 ‘별나라 달나라에 있는’ 줄 잘못 아는 한국 그림책 작가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 나라 창작 그림책은 나라밖 번역 그림책을 따라가지 못하는데, 우리가 명작이나 고전이라고 가리키는 그림책치고 ‘우리 삶 이야기’를 안 담은 그림책이 없을 뿐더러 ‘우리 가까이 이웃한 삶 이야기’를 안 다룬 그림책이 없습니다. 모든 명작과 고전은 삶에서 비롯합니다. 삶이 밑바탕입니다. 삶이 있어야 그림책이 있고, 삶이 싱그러워야 그림책이 싱그럽습니다. 《장갑》이나 《심심해서 그랬어》나 《재활용 아저씨 고마워요》나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나 《할아버지는 수레를 타고》나 《오른발 왼발》이나 《이슬이의 첫 심부름》이나 《종이 인간》 같은 줄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찬찬히 돌아보셔요.

 그리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즐거워서 웃기도 해야 하지만, 슬퍼서 울기도 해야 합니다. 《팥죽 할멈과 호랑이》나 《아프리카여 안녕!》나 《따르릉 따르릉 비켜 나세요!》나 《캄펑의 개구쟁이》나 《나는 곰이란 말이에요》처럼 배꼽 잡도록 웃기는 아름다움도 있고, 《생쥐와 고래》라든지 《당나귀 실베스타와 요술 조약돌》이라든지 《까마귀 소년》이나 《우리 할머니》나 《아툭》이나 《꼬마 곡예사》처럼 눈물이 펑펑 나오는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말없는 그림책 《떠돌이 개》나 《나무》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고, 연필 한 자루만으로도 아름다운 《꼬마 인형》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톡톡 터지는 웃음이면서, 펑펑 터지는 울음입니다. 해맑게 웃고 가슴아프게 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지 못하는 그림책이라 한다면, 그림이 빈틈없고 줄거리가 탄탄하더라도 ‘좋은’ 그림책이 될 수 없어요. 





 어쩌면, ‘좋은’ 그림책에서 가장 크게 살필 대목은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아름다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고마움이 담긴 아름다움, 사람이면서 사람답지 못한 안타까움을 담아낸 아름다움,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아름다움 말입니다. 아름다움에서 즐거움이 배어나고 아름다움에서 싱그러움이 샘솟는지 모릅니다. 아름다움에서 눈물이 나고 웃음이 나는지 모릅니다. 아름다움에서 사랑이 태어나고 믿음이 자라는지 모릅니다.

 이리하여, 꾸며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살면서 녹여내는 아름다움으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배어나는 아름다움으로, 겉치레 아름다움이 아니라 알맹이가 단단히 여문 아름다움으로 그림책 하나 빚어내어야 우리 삶도 아름답게 껴안을 수 있지 않느냐 싶어요. 얼른 집 치우기를 마치고, 그림책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를 들고서 아기와 옆지기가 있는 일산 처가집으로 가야겠습니다. (4341.12.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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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야, 자니? 산하작은아이들 39
이상교 지음 / 산하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85 ― 사랑 잃고 돈 심은 자리에 시라는 씨앗 하나를
 : 이상교 동시모음, 《먼지야, 자니?》


- 책이름 : 먼지야, 자니?
- 글ㆍ그림 : 이상교
- 펴낸곳 : 산하 (2006.5.12.)
- 책값 : 9500원



 (1) 어린이를 보는 어른 삶


 옆지기가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줍니다. 또는 아기한테 젖을 물린 채 노래를 불러 줍니다. 또는 아기를 눕힌 채 가슴을 살살 토닥이면서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아기 얼굴에 잠이 가득한데 제대로 잠들지 못하면 저도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아기가 잠에서 깨어 놀고 싶다고 할 때에도 아기를 어르거나 놀리거나 안으면서 노래를 불러 줍니다.

 다른 아기 어머니도, 또 아기 아버지도 이렇게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요즈음 많은 아기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신들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기보다는 노래테이프를 돌리거나 노래시디를 돌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머니 목소리나 아버지 목소리보다는 텔레비전 소리를, 또 셈틀 소리를, 또 손전화 소리를, 또 숱한 기계소리와 차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사〉

 “이거 너 줄까?”
 개울가에서 주운 거라며
 짝이 돌멩이 한 개를 내게 주었다.

 새알처럼 매끈매끈한
 돌멩이 한 개
 내 손에
 들어왔다.

 짝 마음이
 내 마음속으로
 쏙, 이사 들어왔다.


 지난날 국민학교에 다닐 적에 동시를 읽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동시 외우기 숙제가 꼭 있었고, 국어 시간에는 무서운 선생님이 시외우기를 한 사람씩 꼬박꼬박 시키곤 했습니다. 시 하나를 막힘없이 낱말 하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면 지나가지만, 낱말이나 토씨 하나라도 틀렸다가는 안경 낀 그 선생님 오른손에 들린 굵직한 몽둥이가 어느새 우리 머리통까지 날아와서 딱! 소리를 내곤 했습니다.

 시를 싫어하지 않았고, 시 외우기가 그리 싫지는 않았지만, 빈틈없이 외워서 읊지 못하면 무시무시하게 내리치는 몽둥이 때문에 시를 가까이하고픈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았습니다. 숙제로, 또 백일장 과제로 시를 깔짝깔짝 대기는 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나 꿈을 글 하나에 살뜰히 담아내는 일은 해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몽둥이찜질을 받으며 동시를 외우던 날이 스물 몇 해가 훌쩍 지나간 옛날 일이 됩니다. 우리 아기를 생각하면서 동시모음 하나 쥐어 봅니다.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서 학교 갈 나이는 아직 멀었는데, 우리 아이도 학교에 다닐 무렵, 그 학교 교사는 우리 아이를 비롯해 숱한 아이들한테 시 외우기 숙제를 낼는지, 또 시 외우기를 못하는 아이한테 매질을 할는지, 시를 외우다가 토씨나 낱말 하나 틀리는 아이를 얼굴이 벌개지도록 나무라다고 손찌검을 할는지 궁금해집니다.


 〈책이 된 꽃〉

 꽃이 책이다.
 나비가 읽고 가는
 책.
 꽃내 스민 갈피 갈피를
 더듬이로 읽고 간다.

 꽃이 책이다.
 바람이 읽고 가는
 책.
 새로 돋은 침을 묻혀
 소슬랑소슬랑 넘겨 읽는다.

 꽃이 책이다.
 해님이 읽고 가는
 책.
 포시시 눈맞춤으로
 총총총 읽어 내린다.
 ……



 나이가 들어서 동시를 다시 읽고, 어린이시를 새로 읽습니다. 동시는 어른이 아이한테 베풀어 주는 선물이고, 어린이시는 어린이 스스로 즐기고자 쓰는 시이면서 어린이 동무한테 나누어 주는 선물인 한편, 우리 어른한테도 건네주는 선물입니다. 동시는 처음부터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쓰는 시이기에, 어른들이 동시를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어린이 그대로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동시를 쓰는 어른들 마음결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마다 담긴 맛과 멋을 느낄 수 있고, 어린이와 함게 기뻐할 수 있어요.

 마음을 맑게 해 주는 동시가 아니라, 마음 맑은 어린이가 앞으로도 마음 맑은 어른으로 크고, 언제까지나 마음 맑은 사람이 되어서, 어린이 스스로와 어린이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자연 목숨붙이와 삶터를 맑게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비손이 담긴 동시입니다. 마음이 맑은 어린이가 쓰는 어린이시가 아니라, 어린이 눈높이에서 꾸밈없이 쓰는 어린이시요, 어린이 스스로 어린이 삶을 보여주는 어린이시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쓴 어린이시를 읽으면, 어린이 마음을 잃은 어른들이 미처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하는 잘잘못을 돌아볼 수 있는 가운데, 어린이가 무엇을 바라고 꿈꾸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또 무슨 사랑을 나누는지를 곱씹을 수 있습니다.


 〈먼지〉

 책장 앞턱에
 보얀 먼지.

 “먼지야, 자니?”

 손가락으로
 등을 콕 찔러도 잔다.
 찌른 자국이 났는데도
 잘도 잔다.



 아기는 저한테 장난을 치는 어른을 알아차립니다. 아기는 저한테 사랑을 쏟는 어른을 느낍니다. 아기는 저를 괴롭히는 어른을 알아봅니다. 아기는 저를 어루만져 주는 어른 손길을 압니다.

 아기는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을 할 줄 모르기에, 어설픈 어른들은 아기가 어른들 마음이나 뜻을 모르려니 잘못 짚곤 합니다. 그러나 말마디에 담기는 기운이 있고, 눈빛과 몸짓에 배인 낌새가 있습니다. 몸으로 살피는 아기이고, 마음으로 얘기 나누는 아기입니다. 참되게 기울여 주는 마음씀을 아는 아기이고, 사랑으로 다가와 주는 매무새를 느끼는 아기이며, 믿음으로 껴안으려는 손길을 붙잡는 아기입니다.

 우리들 어른은 정치를 하고 경제를 하고 문화를 하고 교육을 하고 과학을 하고 사회운동을 한다고들 하는데, 이런 여러 가지를 하는 동안 우리가 거쳐 왔던 어린 나날을 돌아보고, 지금 어린 나날을 보내는 아기를 둘러보며, 앞으로 태어나 자랄 아기를 톺아볼 수 있다면, 스스로 멈추어 고이는 일이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날을 못 보고 오늘날을 못 느끼며 앞날을 못 살피기에, 자꾸만 낡은 틀과 법과 테두리에 갇힌 채 얕은 셈속과 검은 돈과 먼지에 지나지 않는 끈만 부둥켜안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매듭〉

 엄마를 좇아
 바느질을 한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맨다.

 “매듭을 지어 놓아야
 실이 풀리지 않는단다.”
 ……


 옆지기 식구들이 살고 있는 일산으로 나들이를 가서 열흘 남짓 머물고 있습니다. 아기한테 이모가 되는 처제는 바깥으로 볼일을 보러 나가거나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면서도 일산집에 머물고 있는 귀여운 아기가 생각이 나서 일찍일찍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 또한 인천과 일산을 오가면서 일을 하느라 고달프지만, 아기 기저귀를 빨거나 안고 어르며 노래를 불러 주거나 함께 놀 때에는 시름이 가십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어른 된 우리들이 어린이 마음을 잃지 않는 매무새만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아이든 이웃 아이이든 살붙이 아이이든’ 둘레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볼 줄 알고 사랑할 줄 알며 껴안을 줄 아는데다가 돕고 함께할 줄 아는 몸짓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세상에는 따스함과 넉넉함이 좀더 넓고 깊이 자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배고파 칭얼대는 아기를 보면서 배고파 울고 있는 이웃을 보게 되고, 졸려서 잠들려는 아기를 보면서 잠잘 곳이 없이 한데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웃을 보게 되며, 신나게 엄마젖을 빠는 아기를 보면서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고단한 비정규직과 장애인과 이주노동자와 농사꾼과 낮은자리 일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큰이모부〉

 큰이모부는 착하다.
 나를 혼내지도 않고
 일찍 자라고 하지도 않는다.

 옷을 벗길 때는
 코나 귀가 뒤집히지 않게
 조심조심 벗겨 준다.
 코를 풀게 할 때도
 휴지로 코 밑을 세게 닦지 않는다.
 ……



 오늘도 인천으로 일하러 돌아오면서, 전철간에서 버르장머리없는 사람을 수없이 부대낍니다. 수없이 부대끼며 생각에 잠깁니다. 전철간 한쪽 구석에 서서 사람들 물결에 휩쓸리거나 거슬리지 않고자 있어도, 어김없이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책을 펼쳐 밑줄을 그어 가며 읽고 있는데 팔꿈치를 툭툭 치면서 미안하다 소리 한 마디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출근 때라 미어터지는 전철 하나를 보내고 뒷차를 기다리며 맨 앞자리에 서 있는데, 어느새 제 앞으로 끼어들어 먼저 올라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그쪽을 쳐다보게 됩니다. 때때로 자기가 치고 지나간 사람 쪽을 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눈을 마주칩니다. 이때, 고개라도 살짝 숙여 준다면 어처구니없는 마음이 가볍게나마 가라앉을 테지만, 똥씹은 얼굴이라든지 그예 메말라 비틀어진 얼굴로 콧방귀 뀌듯 잽싸게 돌려버리는 고갯짓을 볼 때면, 마음이 잔뜩 무거워집니다.

 이 나라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아니된 지 오래되었고, ‘동방 예의지국’이란 웃기는 옛날이야기가 된 지도 오래되었지만, 낯모르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굴 수 있는 이 못나고 헐벗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은 언제부터 이렇게 골고루 퍼져나갔을까 궁금합니다. ‘이웃사촌’ 사라진 지 까마득하다고 하지만, ‘이웃경쟁자’나 ‘이웃도둑’처럼 여기는 마음은 참으로 언제부터 우리 마음밭에 또아리를 틀고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강아지풀〉

 무릎에 올려
 안아 주고 싶다.
 강아지풀.
 ……



 돈만 버느라 마음이 돈다발처럼 차가워지고 말았는가요. 시 한 줄 읊을 줄 모르고, 아기한테 또 어린이한테 또 푸름이한테 또 젊은이한테 살가이 시 한 줄 읽고 나눌 줄 모르면서, 오로지 돈만 움켜쥐려고 하는 동안 가슴은 차갑게 식어 버리고 말았는가요.

 퀴즈대회에 나가서 ‘우리 말 달인’이나 ‘퀴즈 달인’은 될는지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눌 아름다움은 하나도 모르는 바보가 되고 말았는지요. 대학 졸업장 없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슬기와 가르침은 한줌도 챙기지 않는 얼간이가 되고 말았는지요.


 〈귀뚜라미〉

 밤길을 걸어 돌아오는데
 컴컴한 구석빼기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귀뚤귀뚤 귀뚜르르르

 귀뚜라미가 울자
 컴컴하던 그 구석빼기가 환해졌다.



 아기한테 동시 하나 읽어 주면서 제 마음속으로도 동시라는 씨앗 하나를 심습니다. 아기와 나란히 누운 옆지기한테 동시 하나 읊어 주면서 제 가슴속으로도 동시라는 새싹 하나를 보듬어 봅니다.


 (2) 동시모음 《먼지야, 자니?》


 1949년에 태어났으니 벌써 예순 나이가 된 이상교 님이 쓴 동시를 모은 《먼지야, 자니?》를 읽습니다. 동시모음치고는 좀 두툼하고 책값이 센데, 시는 어렵지 않게, 또 금세 읽어 내립니다. 말끔하게 읽히고 깔끔하게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시와 함께 그림을 엮어 놓고 있어서, 시를 읽는 동안 말마디를 입에서 굴리고, 그림조각을 눈으로 담습니다.


 〈산새〉

 산새는
 노랫소리가 곱다.

 산에서 나는
 동그랗고
 예쁜 산열매를 따 먹고 살아
 노래가 동글동글 곱다.

 산새는
 날개 빛깔이 곱다.

 산에서 나는
 가지가지 빛깔
 산열매를 따 먹고 살아
 날개가 알록달록 곱다.



 드문드문 군더더기가 있네 하는 대목이 보입니다. 한 줄 또는 석 줄쯤 슬쩍 덜어내면 한결 매끄러우면서 깊이가 더해질 텐데 싶은 대목이 보입니다. 오늘날 아이들로서는 도무지 겪어 볼 수 없는 이야기를 쓴 대목이 보입니다.

 냇물이 말라 버린 대한민국이지만, 냇물이 남아나게 하지 않는 이 나라요, 그나마 냇물이 남아서 흐르는 곳에서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 주워 와 책상맡에 놓거나 동무한테 선물을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겠습니까. 무시무시한 물길이 서울부터 부산까지, 또 서울에서 인천으로 난다고 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품을 쓴다는데, 무슨 동시가 있고 어린이시가 있으며 어른시가 있을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산에는 산새가 아닌 부동산투기만 있고, 그나마 남은 산에는 케이블카를 놓느니 구멍을 뚫어서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를 내느니 하고 시끌벅적한 이 나라입니다. 그나마 도시에서 참새나 비둘기를 구경하기도 수월하지 않을 뿐더러, 참새와 비둘기는 새로 여기지 않는 우리들이 되었는데, 그러면 ‘새’란 어떤 짐승을 가리키고, 새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는 좀처럼 생각해 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부모님 자가용으로 학교에 갔다가, 노란 학원차를 타고 학원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오늘날 아이들인데,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도 이와 똑같은 굴레를 뒤집어써야 할는지, 앞으로는 달라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두 다리로 걸어서 학교에 가거나 자전거를 몰고 학교에 가거나 버스를 잡아타고 학교에 갈 아이들이 늘어날 수 있을는지 또한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들하고 골목길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도 골목길은 차츰차츰 사라질 뿐더러, 골목길이 고즈넉하게 남아 있는 우리 동네에서조차 아이들은 걷지를 않고 차를 탈 뿐입니다. 골목꽃과 골목빨래와 골목집과 골목사람 자취를 나누고 싶어도 학원에 매이고 시험교재와 학습지에 매이게 되는 아이들이니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섬돌 밑에 줄기를 밀어낸 길풀을 들여다보자고 할 수 없습니다.


 〈봄눈〉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씨.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꽃씨.

 흙에 발이 닿자마자
 풀씨, 풀꽃씨 내려놓고
 보풀보풀 봄눈 숨지고 만다.

 숨진 자리마다
 풀은 돋아 자라고
 눈송이만 한 풀꽃을 매단다.



 눈이 오면 눈사람을 굴리거나 눈싸움을 하거나 눈놀이를 즐기는 우리들이 아니라, 찻길에서 차가 못 다닐까 근심스러워 염화칼슘 뿌려대는 어른이 되고 만 우리들입니다. 고작 차유리에 내려앉은 얇은 눈더미를 긁어서 대충 뭉쳐서 던지고 끝납니다.

 사랑을 잃은 어른이라 사랑을 못 얻는 아이들이 되어 가는구나 싶습니다. 사랑 잃거나 버린 자리에 돈을 끼워넣었으니, 돈은 넘치고 쎄서 모자람 없이 장난감을 사고 엠피쓰리를 들으며 알록달록 새옷을 차려입는 아이들이 되어 가는구나 싶습니다.

 동시가 박제가 되고, 어린이시가 논술지옥이 되는 때입니다. 《먼지야, 자니?》라는 동시모음을 가슴에 안고 조용히 쓰다듬습니다. (4341.12.2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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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자가용+돈’을 버려야 책을 읽을 수 있다
 ― 책읽기와 자꾸 멀어지는 우리 삶을



 - 1 -

 책을 읽어 버릇하는 사람이 책하고 멀어지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에 밴 땀과 피와 눈물과 웃음을 읽어내는 사람이 책하고 담 쌓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에서 늘 배우며 고개숙이는 사람이 책이 들려주는 속깊은 이야기에 눈물짓지 않거나 웃음짓지 않는 일이란 없습니다. 새로운 책을 꾸준히 찾는 사람이 지나간 책 또한 꾸준히 안 찾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책마다 다 다르게 담아내고 있는 알뜰한 빛줄기를 놓치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에 길이 있다면 있고 길이 없다면 없습니다. 책에 길이 있다고 느끼면 이 길을 잘 찾아서 갈 노릇입니다. 책에 길이 없다고 느끼면 제 깜냥껏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길이 다른 어디에 있는가를 곰곰이 살피며 부지런히 찾아나설 노릇입니다.

 찾아나서는 사람한테만 찾아지는 길입니다. 만나려 하는 사람한테만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느끼려 하는 사람한테만 느껴지는 길입니다. 보려고 하는 사람한테만 보여지는 길입니다.





 - 2 -

.. 인간의 기본욕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일이라면 ‘어떻게’ 각자 입에 맞게 먹느냐 하는 것이 결코 시시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교묘한 대중조종을 통한 입맛의 전체주의화는 오히려 비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 김장을 앞두고 집집마다 신경을 쓰고 있다. 이 김장에는 규격화나 획일화를 가장 꺼려야 하지 않을까. 함흥댁의 짜릿한 김치맛, 평양댁의 찡한 동치미맛, 선산댁의 맵싸한 젓갈김치맛에서 우리는 지방의 고유한 멋을, 그리고 한 주부의 독특한 솜씨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산업화니 근대화니 하는 깃발 아래서는 모든 것들이―건물이니 행동양식ㆍ사고방식까지 획일화되고 규격화됨으로써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경원해야 할 대중사회나 전체주의사회로 말려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  《한완상-증인 없는 사회》(민음사,1976)


 집밥을 얻어먹는 일이 아주 힘들어집니다. 바깥밥은 언제 어디서나 아주 손쉽게 얻어먹을 수 있고 사먹을 수 있습니다(돈만 있다면). 그러나 바깥밥을 얻어먹든 사먹든, 우리 식구 입맛에 맞출 수 있는 바깥밥을 찾는 일은 대단히 힘듭니다. 거의 이룰 수 없는 일이 아니랴 싶기까지 합니다(우리 몸에 거스르지 않는 밥거리로 마련한 밥을 찾기 어려우니까). 그러면서도 바깥밥집은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합니다. 어쩌면, 똑같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인천이든 서울이든 부산이든 춘천이든 전주이든 제주이든 목포이든 군산이든 마산이든 대구이든 진주이든 울산이든 …… 똑같은 체인점에 똑같은 차림표에 똑같은 반찬에 똑같은 흰쌀에 똑같은 맵고 짠 양념에 똑같은 부피까지 …… 인천에서 먹기에 인천다움을 느낀다든지, 서울에서 먹기에 서울다움을 느낀다든지, 대전에서 먹기에 대전다움을 느낀다든지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밥 한 그릇도 빵 한 조각도 술 한 잔도 매한가지입니다. 도드라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밥뿐 아니라 집도 똑같습니다. 인천사람들 살림집이나 서울사람들 살림집이나 부산사람들 살림집이나 순천사람들 살림집이 다르지 않아요. 모두들 ‘건축회사 이름만 다른’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스무 해나 서른 해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서 새로 지어야 할 아파트로 바뀌고 있으며, 온갖 최첨단시설을 갖추었다는(그래 보아야 몇 해 지나면 다 낡아빠진 시설이 되고 마는) 아파트로 옮기고 있습니다.

 밥과 집이 똑같은 한편, 일거리와 놀이거리가 똑같습니다. 온나라 구석구석을 다녀 보아도 사람들 하는 일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어느 자리에 가 보아도 웃고 떠들고 즐기는 놀이가 ‘새롭’거나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틀에 박은 듯하고 판에 박은 듯합니다(예전에는 공기놀이를 하건 고무줄놀이를 하건 술래잡기를 하건 마을마다 달랐습니다). 하긴, 말이 사투리이지, 소리값 높낮이와 말소리 길이만 조금 다른 오늘날 사투리는 사투리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멋쩍고 남우세스럽습니다.

 가만히 살피면, 서울대를 나오든 인천대를 나오든 부산대를 나오든 제주대를 나오든, 사람들 지식이 똑같습니다. 지식 높낮이는 다를는지 모르나, 얼마나 다른지조차 느낄 수 없을 뿐더러, 자기 머리속에 가둔 지식을 다루는 매무새마저 어슷비슷합니다.

 지식만 똑같느냐 싶으면, 생각도 똑같고 마음도 똑같고 가슴마저 똑같습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빨리 더 큰 아파트를 따내어 사들여야 하며, 더 빨리 더 잘생기고 예쁘장한 짝꿍과 사귀어야 하는데다가, 텔레비전 연예인 옷차림이 달라지는 데 따라서 제 옷차림과 몸차림을 바꾸느라 바쁩니다.

 하다 못해 라면 한 그릇 끓이면서 파나 달걀을 넘어 연뿌리나 감자나 고구마나 버섯이나 쑥이나 오징어나 당근 따위를 썰어넣을 생각을 해 보지 못합니다. 다문 밥 한 그릇을 집에서 손수 지어도, 쌀에 씨눈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느낀다든지, 누런쌀로 지어 본다든지, 콩이나 팥을 넣어 본다든지, 콩을 넣는다면 어떤 콩을 얼마나 넣는다든지, 수수나 보리나 기장이나 옥수수나 조나 율무를 넣어 본다든지, 보리를 넣으면 밀보리를 넣는지 찰보리를 넣는지 누른보리를 넣는지 쌀보리를 넣는지 따위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 3 -

 오늘날 우리 삶은 책하고 멀어지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터는 책하고 담을 쌓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매무새는 책하고 등돌리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마음밭과 마음결과 마음눈은 책은 도무지 몰라도 된다고 하는 길입니다.

 똑같은 아파트에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책을 손에 쥘 까닭이 없습니다. 책을 쥔다고 하여도 돈벌이를 다루는 처세(이른바 자기계발) 책입니다. 또는 텔레비전 연속극과 같은 책입니다. 시간을 죽이는 책을 읽지, 시간을 살리는 책을 읽지 못합니다. 열 번 백 번 되읽을 책이 아니라, 한 번 넘기고 나서 책꽂이에 꽂거나 재활용품 모을 때 폐휴지 사이에 끼워 버리는 책을 사들입니다. 책을 읽지도 못하고 보기만 하지만, 이제는 넘기거나 들추는 눈높이가 되어 버립니다.

 똑같은 자동차를 굴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책을 가방에 늘 넣어 놓고 다닐 까닭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굴리면서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펼쳐야 지도책이지만, 네비게이션이 나오는 만큼 길그림 담은 책마저 펼칠 일조차 없습니다. 펼쳐야 스포츠신문이었지만, 네비게이션이 텔레비전 구실까지 하고 있으니 손가락으로 콕콕 찍으면 곧바로 운동경기를 차를 몰면서 볼 수 있습니다. 책이란 따분하고 지루하고 지겹고 번거로운 남남이 되어 버립니다.

 똑같은 회사원(사무직이든 영업사원이든)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책을 알아보려고 할 까닭이 없습니다. 책을 읽어야 할 일이 있으면 인터넷을 또닥거리면서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좀더 싼 책을 알아봅니다. 자기 마음을 살찌울 만한 ‘또 다른 책이 있을까’를 알아보지 않고, ‘꼭 사야 한다고 하는 그 책을 좀더 싸게 파는 곳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데에 시간을 바칩니다. 이리하여 다문 몇 백 원부터 몇 천 원을 몇 시간(적으면 몇 분)씩 들이면서 아낀다고 할 텐데, 우리가 아끼는 그 돈 몇 푼은 우리 삶에 얼마나 보탬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판이 끊어져서 헌책방과 도서관에만 있는 책들은, 또 인터넷 장사를 하지 않아서 인터넷 목록에 올려지지 않는 책들은, 또 인터넷 장사를 하더라도 사람들이 ‘차츰 안 찾게 되어’구태여 인터넷 목록으로 올리지 않는 책들은,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조금도 알아챌 수 없고, 알아챌 까닭마저도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똑같은 지식을 갖추고, 똑같은 대학졸업장을 가지려 하며, 똑같은 연봉을 받고, 똑같은 아파트에서, 똑같은 자가용을 굴려, 똑같은 서울이나 서울 비슷한 큰 도시에서, 똑같은 사무직 또는 영업직으로 돈만 버는 일을 하는 가운데, 예나 이제나 사회평등이나 남녀평등이나 계급평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헤프게 소비물질문명에 젖어들어 가는 이 나라에서는, ‘다 다른 지식과 다 다른 삶과 다 다른 꿈과 다 다른 길과 다 다른 사람’을 보여주는 책이란 한낱 부질없는 가을철 가랑잎 한 닢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을날 떨어져 스스로 거름이 되어 이듬해 봄에 새잎이 돋게 해 주는 힘이 되는 책 하나임을 느끼려 하지 않습니다.





 - 4 -

 우리 스스로 책을 읽으려면, ‘똑같은 아파트’를 버리고 ‘다 다른 골목집’을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책을 가까이하려면, ‘똑같은 자가용’을 버리고 ‘다 다른 자전거와 두 다리’를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책을 사랑하자면, ‘똑같은 바깥밥’을 버리고 ‘다 다른 집밥’을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책마다 담긴 고운 빛줄기를 가슴으로 껴안으려면 ‘똑같은 돈’을 버리고 ‘다 다른 눈물과 웃음’을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똑같은 틀에 매여도 다 다른 책을 찾아나설 수 있기도 할 테고, 똑같은 틀에 매인 가운데에도 책사랑을 이을 수 있습니다.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들 똑같은 틀에 매이고 있는 우리들이 보여주는 책사랑은 무엇이며, 똑같은 판에 짜여진 우리들 손에 쥐여진 책이란 무엇인가요. 지식이 아닌 지식을 다루는 마음을 담아내는 책임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요. 지식이 아닌 삶이 녹아나는 책임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가요. 지식이 아닌 이야기가 서리는 책임을 얼마나 곱씹고 있는가요.

 개성이란 ‘케이에프시와 롯데리아와 버거킹과 맥도널드와 파파이스가 어떻게 다른 햄빵을 만들고 값이 얼마인가’를 알거나 즐기는 일이 아닙니다. 다양성이란 ‘아우디와 베엠베와 푸조와 오피러스와 크레도스와 그랜저가 얼마나 멋지거나 잘 빠진 차인가’를 가름하거나 누리는 일이 아닙니다. 푸르지오에 산다고 푸르게 사는 삶이겠습니까. 파밀리에에 산다고 온식구와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겠습니까. 롯데캐슬에 산다고 군주가 되겠습니까. 타워팰리스에 산다고 무엇이 높아지는 삶입니까.

 손으로 만지작거려 종이 느낌을 헤아리면서 두 눈으로는 엮음새와 짜임새와 줄거리 들을 골고루 돌아보아 하나로 모두는 동안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곰삭여 펼쳐 보이는 책입니다. 글쓴이부터 책방 일꾼까지 숱한 사람들 땀방울과 피눈물이 담기는 책이기에, 우리 돈과 머리뿐 아니라 가슴과 넋과 몸뚱이 모두를 움직여서 받아들여야 비로소 ‘책 하나로 비롯하여 책 하나로 마무리되된다’는 뜻과 값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많이 사서 읽을 수 없는 책이고, 시간이 넉넉하다고 느긋하게 읽을 수 없는 책이며, 머리가 똑똑하다고 더 잘 새겨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사거나 빌리거나 책방이나 도서관에 선 채로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쪼개고 나누어 바지런히 읽는 책입니다. 내 마음그릇이 모자라다는 아쉬움에 힘내어 지며리 읽는 책입니다.

 돈을 얻고 싶다면, 돈을 얻어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시나브로 아파트로 기울고 자가용으로 기웁니다. 사랑을 얻고 싶다면, 사랑을 얻어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차츰차츰 책으로 기울고 사람으로 기울며 자연으로 기웁니다. 이름값을 높이고 싶다면, 이름값을 높여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저절로 도시에서 회사원이 되려고 하고 대학졸업장을 따려고 하며 혼인하여 낳는 아이들을 제도권입시교육에 밀어넣게 됩니다. 믿음을 얻고 싶다면, 믿음을 얻어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가만가만 책으로 기울고 땀흘리는 낮은자리 일거리로 기울며 고즈넉하고 자그마한 골목집으로 기웁니다.

 책이란 그렇습니다. 삶에 따라 읽게 되는 책이고, 삶에 따라 달라지는 책입니다. 삶이란 그렇습니다. 스스로 걷는 길에 따라 돈으로 기울는지 사람으로 기울는지 갈리게 되며, 제 마음바탕과 생각바탕에 따라 엇갈리는 삶입니다. 돈이란 그렇습니다. 가지려고 바둥거려 보았자 가질 수 없지만, 가지게 되어도 늘 허거퍼서 더 가지려고 안달이 되고, 가지고 있어도 즐겁게 쓰거나 나누거나 펼치는 아름다움을 찾지 못합니다. 삶이나 사람이나 사랑이 마무리가 아니라 돈이 마무리였기 때문에, 돈은 많아도 돈을 나누거나 쓸거나 베풀거나 함께하는 길을 조금도 몰라요. 대학교 졸업장이 마무리가 아니라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누구와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느냐’를 마무리로 삼아서 대학교 졸업장을 따든 말든 해야 하는데, 맨 먼저 대학교 졸업장을 앞에 놓고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으니, 머리는 굵어지고 지식은 늘어났지만 세상을 꿰뚫어보는 눈길은 조금도 기르지 못할 뿐더러 마음씨도 비뚤어집니다.

 책을 읽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 아름다워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훌륭해지거나 거룩해지거나 참된 멋을 가꾸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배우면서 누리고, 믿음을 익히면서 나누며, 넉넉함을 몸에 들이는 가운데 펼치며, 따스함을 헤아리면서 함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목숨을 받은 기쁨을 깨닫고 싶기 때문이며, 한 사람 목숨이 얼마나 소담스러운가를 받아들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고 싶고 내 이웃을 알고 싶으며 우리 모두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 길을 즐기고 싶고, 이웃사람 길을 돕고 싶으며, 뒷사람 길을 닦아 놓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살찌우고 싶어 읽는 책입니다. 내 몸을 살리고 싶어 가까이하는 책입니다. 내 넋을 북돋우고 싶어 함께하는 책입니다. 내 사랑이 아름다워지도록 거듭나고 싶어서 껴안는 책입니다. (4341.12.1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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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기 한 봉지 낮은산 너른들 8
강무지 지음, 이승민 그림 / 낮은산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 둘레 ‘낮은자리’ 돌아보는 고운 눈길을
 [잠깐 읽기 21] 강무지, 《다슬기 한 봉지》



- 책이름 : 다슬기 한 봉지
- 글쓴이 : 강무지
- 그린이 : 이승민
- 펴낸곳 : 낮은산 (2008.11.20.)
- 책값 : 8800원



 (1) 입벙긋 삶과 꾀꼬리 삶


.. 한국사람들이 집 없는 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뚜야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집 없는 동물에게 먹을 것을 좀 나눠 주면 도둑질을 안 할 텐데, 이름까지 아예 ‘도둑’이라고 붙여 버리면 어떡하나. 진짜 도둑밖에 더 될까. 또뚜야와 쪼쪼는 이 도둑고양이들에게 ‘바람’과 ‘별’이라는 뜻을 가진 미얀마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가끔 놀러 오는 고양이들에게 멸치나 밥을 조금 나눠 주었다. 비가 많이 올 때는 고양이들이 또뚜야네 부엌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  (150쪽)


 우리 세 식구가 옆지기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일산까지 가자면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자전거 뒤에 짐수레를 달고 달려가기. 둘째, 자가용을 몰고 고속도로와 외곽도로 타고 가기. 셋째, 택시 타고 가기. 넷째, 전철 타고 종로3가까지 간 다음 3호선으로 갈아타고 간 다음 버스를 타고 들어가기. 다섯째, 전철로 부평역까지 가서 시외버스 타고 들어가기.

 아직 아기가 어려서 첫째는 할 수 없고, 둘째부터 다섯째까지 있는데, 우리는 자가용을 몰 생각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셋째와 넷째와 다섯째가 남는데, 셋째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웬만하면 할 수 없습니다. 거의 넷째만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다섯째, 시외버스 타기를 해 봅니다.

 부평역까지는 널널합니다. 인천 맨 왼쪽에서 타는 전철이니 사람도 적고 조용하고 한갓집니다. 그러나 부평역에서 내려 시외버스 타는 데까지 지하상가를 빠져나가는 길은 몹시 어수선합니다. 나가는 문구멍이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을 뿐더러, 숫자가 잘못 적혀 있기도 해서, 여러 번 왔음에도 그만 길을 잃고 헤맵니다. 가게마다 번들번들 내거는 광고판이며 간판에 가려서, 또 옆을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에 가려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짚기 어렵습니다. 그저 어림으로 느낍니다. 땅밑길을 걷는 우리들이 땅위로 치면 어디쯤일까를 헤아려 볼 뿐입니다.

 아기 기저귀와 옷가지를 바리바리 챙겨든데다가 일산 부모님한테 드릴 왕만두가 가득한 무거운 가방을 지고 들고 아기 안고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린 끝에 소방서 앞으로 나오는 문구멍을 겨우 찾습니다. 밖으로 나와도 어수선함은 그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길섶에 차를 대놓아도 자리가 모자라서 사람 걷는 길로 차를 끌고 올라와서 세우는 사람들은 우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걱정없이 걷지 못하게 막고, 가게마다 길에 내놓은 물건이며 온통 어지럽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수선함은 부평역에만 있지 않아요. 인천 어디를 가고 서울 어디를 가며 전국 어디에서나 다르지 않습니다.

 시외버스를 코앞에서 놓치는 바람에 40분 가까이 힘겹게 서서 기다립니다. 버스가 오기까지 서 있는 동안 담배 냄새와 화장품 냄새와 지난밤 술 체한 이들 게워낸 메스꺼운 냄새에 어질어질합니다. 버스가 들어오니 서로 먼저 타려고 밀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아기가 다치지 않게 안기 힘겹습니다. 젊거나 늙거나 아기 머리께를 밀치면서 먼저 타려는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이 사람들 누구한테나 아기였을 때가 있었을 텐데, 모두들 까맣게 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 “오빠야, 나는 커서도 우리 마을을 지킬 거다. 아나?” “아아……. 그 말이가……. 근데…… 삼촌 숙모도 아시나, 니 꿈을?” “아, 답답하네. 내 꿈을 내가 꾸는데 우리 엄마 아빠가 무슨 상관이고?” “…….” 기윤이는 판사, 대학교수, 외교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늘 들어왔던 터라, 솔직히 은정이의 소박한 꿈이 걱정이 되어 물었거든요. “미안, 은정아.” “뭐? 뭐가 미안하다고?” “아아니, 그냥 …….” “고속철도가 우리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가면 어떻게 된다는 거를 어른들이 진작 몰랐나 말이다. 잘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어야지. 보상금만 먼저 받으면 어떡하노. 뚝방 철도가 마을을 와넌히 망친다는 걸 알고 진작에 반대를 했어야지, 바보같이 이기 뭐꼬!” ..  (30∼32쪽)


 기차에서는 잘 자던 아기인데, 버스에서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뿌루퉁해 있습니다. 뭔가 속이 안 좋다는 얼굴입니다. 덜컹덜컹 흔들흔들 하기 때문인지, 버스라는 탈거리가 영 안 맞다는 뜻인지. 하긴. 버스는 우리처럼 갓난쟁이를 안고 타려는 사람한테는 너무 좁습니다. 가방 둘 자리가 마땅하지 않아서, 다리를 제대로 못 뻗고 짐을 한손으로 누르는 가운데 아기를 안고 있어야 하고, 기저귀 갈아 줄 때에도 진땀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창밖에 볼 만한 모습이 없습니다. 어디나 똑같고 언제나 한결같은 가게와 아파트와 자동차 물결만 눈에 들어옵니다. 때때로 공장이 나오고 드문드문 고가도로와 지하도로가 나와서 새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인천부터 일산까지 잿빛 시멘트 건물만 줄줄줄 이어져 있습니다. 높낮이가 조금 다르고, 바깥에 바른 페인트 빛이 살짝 다르며, 간판 모양과 글씨가 얼추 다를 뿐입니다.

 문득 몹시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이 아픕니다. 시외버스를 처음으로 타는 우리 아기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헤아리게 될는지, 어떤 모습이 두 눈을 거쳐 가슴에 아로새기게 될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걱정스럽습니다. 오로지 돈을 치르고 사서 써야 하는 물건만 늘어서 있는 도심지 거리를 지나야 하는 아기한테는, 돈하고는 아랑곳하지 않고도 싱싱하고 푸른 느낌을 선물받을 수 있는 시골길을 달릴 때하고 사뭇 다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방앗간 할머니는 이제 물에서 나와 집으로 걸음을 옮겼어. 산에서는 소쩍새가 소쩍소쩍 먼 데서 우는 것도 같고 가까이서 우는 것도 같애. “모 심으라고 소쩍새 운다.” 아무리 먼 산에서 험한 소리가 나도 소쩍새 소리는 분명하게 가려들을 수 있지. 평생을 들어왔던 소리인데 그렇고말고 … 다이너마이트 소리. 멀쩡한 산속으로 자동차가 들락날락할 정도로 큰 구멍을 뚫어야 하니 얼마나 많이 폭파를 시켜야겠어. 사람 사는 집도 통째 흔들리는 판에 말 못하는 짐승이 얼마나 놀랐겠냐고. 에미가 진저리를 치는데 배속에 있는 새끼는 말해 무얼 해 …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작고 조용한 마을은 일 년 열두 달 공사에 시달리고 있어 ..  (78, 94, 96쪽)


 그러고 보니, 전철이며 버스며 길이며 부대끼는 사람들 매무새가 ‘둘레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는’ 까닭을 알 만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으로 만나고 어우러지는 도시 삶터가 아니라, 오로지 돈과 돈으로만 얼키고설킨 도시 삶터입니다. 마음을 고즈넉하게 쉴 자리는 없고, 바쁘게 돌아치기만 합니다. 노약자보호석이란, 우리들이 스스로 우러나와 나이든 이와 힘여린 이를 지켜 주지 못하니 마련된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를 따로 마련해 놓지 않더라도 우리 둘레 어렵고 고달픈 사람을 돕거나 힘을 나누려는 마음을 우리 스스로 품지 않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막나가고 맙니다.

 아니, 노약자석, 이제는 이름이 ‘노약자 장애인 영유아동반자 보호석’이라는 기나긴 이름이 붙은 자리를 따로 만들었으나, 이렇게 따로 만들어 놓아도 ‘노약자와 장애인과 영유아와 영유아 보호자’를 살가이 헤아리지 않습니다. 사회평등과 남녀평등과 노동평등이라는 말은 외칠 줄 알지만, 우리 스스로 참다이 평등으로 걸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웃보다 더 많이 벌려 하고, 이웃보다 더 빠른 차를 가지려 하며, 이웃보다 더 큰 집에서 살려고 합니다.


.. 외할머니는 왜 엄마가 새아빠를 만나 행복하게 산다는 생각은 못하고 새아빠가 가난한 것만 생각할까 … 따지고 보면 오늘 일도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새아빠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어른들 때문에 내가 피해를 봐야 하지? 왜 내가 지금 친구들을 못 만나고 있지? 억울하다. 정말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왜? 왜 나는 친구들 앞에서 행복해지면 안 되나? … “할머니, 저는요, 화가가 꿈이에요. 꼭 되고 말 거예요.” 힘이라고는 하나 없어 보이는 할머니께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  (118, 124, 128쪽)


 초중고등학교 모두 도덕을 가르치지만 우리들 마음에는 도덕이 자라지 못합니다. 초중고등학교 어디에서도 ‘환경을 더럽히라’가 아닌 ‘환경을 사랑하고 지키라’고 가르치지만 우리들 마음자리에는 환경사랑이 깃들지 않습니다. ‘책에는 길이 있다’는 뻔한 말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자는 움직임이 드높지만, 정작 어른이고 아이고 스스로 책을 가까이하거나 즐기지 않습니다. 전쟁이 끔찍하다고는 생각하여도 아이들한테 전쟁무기인 총과 칼을 사 줄 뿐더러, 소비 문명을 멈추지 않습니다. 대학입시가 말썽이라 하면서 제 아이들을 대학교육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거나 스스로 졸업장을 찢어버리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입벙긋’ 노래꾼마냥, 우리들 삶도 ‘입벙긋’입니다. ‘입벙긋’ 노래꾼은 노래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우리 스스로 ‘입벙긋’이 아닌 삶으로 바꾸려고 하는 매무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꾀꼬리 노래꾼을 바란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꾀꼬리’ 삶으로 바꿀 수 있어야지요. 입벙긋 노래꾼이 우스꽝스럽고 꾀꼬리 노래꾼이 사랑스럽다면, 우리 삶이 입벙긋에 머물지 않도록 다그치면서 꾀꼬리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갈고닦아야지요. 우리 나름대로 자그마한 곳부터 새로워지는 매무새가 있어야 하고, 우리 깜냥껏 가까운 자리부터 북돋우는 손길이 있어야지요. 모든 사회비판은 자기뉘우침과 자기거듭남이 함께하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 아빠는 엄연히 한국 국적을 가졌는데도 회사 사장님들은 아빠를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길수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 직장을 구하다 구하다 못해 반찬 배달통을 든다는 것을요 … 사람들은 길수 가족이 잊어버릴 만하면 꼭 인도니 인도사람이니 들먹이곤 했습니다. 길수 친구도 그중에 하나였던 거죠. 하지만 아빠에게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백 번 잘한 일 같습니다 ..  (139쪽)


 (2) 남달라 돋보이지만, 아쉬운 습작에 머문 《다슬기 한 봉지》


 어린이책 《다슬기 한 봉지》를 읽습니다. 웬만한 어린이문학이 도시, 이 가운데 서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머물고 있음을 돌아보면, 《다슬기 한 봉지》처럼 변두리 도시 또는 시골마을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작품은 퍽 돋보입니다. 글감만 잘 고른다고 하여 훌륭한 문학이 되지 않지만, 글감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겉치레 문학이 많음을 헤아린다면, 《다슬기 한 봉지》는 아이들한테 즐겁게 읽힐 만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좋은 글감과 푸근하게 펼치는 이야기 사이사이, 좀더 무르익지 못한 글매무새는 아쉽습니다. 우리 세상에서 뒤나 옆으로 밀려나 있는 사람들을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는 눈매는 반갑지만, ‘뒤로 밀린 사람들 삶’을 살피는 눈매 못지않게, ‘뒤로 밀렸건 앞에 나와 있건’ 이 사람들 삶을 좀더 속깊이 파고드는 눈썰미로 거듭나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 사실 기윤이는 공사도 싫지만 어른들의 시위도 싫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시끄러운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싫은 겁니다 ..  (17쪽)


 모든 어린이 마음을 담아낼 수 없고, 모든 어린이 마음을 구태여 담아내야 하지는 않을 테지만, 어떤 어린이 마음을 담아내어,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한테 이야기 한 줌을 나누려고 하는지 되새길 노릇입니다.

 가벼운 수다가 문학이 될 수 없고, 섣부른 눈길이 어린이문학이란 이름을 걸칠 수 없습니다. 어린이문학이란 어린이만 읽거나 즐기는 문학이 아니라, 어른이 빚어내어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즐기는 문학입니다. 어른문학은 어른 스스로 조용히 읽기만 하고 그치기 일쑤이지만, 어린이문학은 어린이 스스로 또는 어른이 나서서 입으로 읽어서 들려주기도 하는 문학입니다. 입으로 읊는다고 할 때에 어떤 느낌일지, 입으로 읊으면서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이야기란 어떤 짜임새일지를 한 번 더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슬기 한 봉지》를 낸 글쓴이는, 처음 내놓았던 작품을 손질해서 새로 묶었다고 하는데, 모든 글이란 나중에 손질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지만, 앞으로 언제가 되더라도 손질할 생각이 들지 않도록 여미어 내는 이야기가 되도록 한 번 더 추스를 수 있어야 합니다.


 ┌ 이것만 끝냈는데도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오 분 전이었다
 │→ 이 일만 끝냈는데도 시계를 보니 네 시 오십오 분이었다
 ├ 어쨌든 나는 자동적으로 외할머니의 젖가슴을 찾아 덥석 안겼다
 │→ 어쨌든 나는 저절로 외할머니 젖가슴을 찾아 덥석 안겼다
 ├ 테스가 십사 년 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 일 년 열두 달
 │→ 테스가 열네 해 앞서 처음 한국에 왔을 때 / 한 해 열두 달
 ├ 나의 자랑이었고, 나의 희망이었습니다
 │→ 내 자랑이었고, 내 꿈이었습니다
 ├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 마을버스도 학원차도 왜 오지 않는 걸까요
 │→ 마을버스도 학원차도 왜 오지 않을까요
 ├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혹시 ……
 │→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틀림없다. 그렇다면 설마 ……
 ├ 최악의 경우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고집을 꺾고 자시고 할
 └→ 너무 끔찍했다. 그렇지만 할머니 고집을 꺾고 자시고 할



 작품에서 글월 여덟 군데를 손질해 봅니다. 군더더기나 엉클어짐이 거의 보이지 않는 《다슬기 한 봉지》이지만,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또 아이들 앞에서 글로 이야기를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여미지 못한 대목이 곧잘 눈에 뜨입니다. 어린이문학은 아이들이 받아먹는 마음밥임을 다시금 되새겨야 합니다. 글 한 줄 낱말 하나까지도 꼼꼼히 살피고 빈틈없이 다독여야 합니다. 재미있고 아름답고 신나고 따뜻하고 멋들어지고 웃음과 눈물을 함께 쏟아낼 수 있기도 해야 하면서, 뿌듯함과 새로움을 함께 선사해야 합니다.


.. 필리핀에서는 친절하게 연인을 도와주었던 남편이 결혼 뒤에는 설거지, 빨래 같은 집안일을 나 몰라라 했습니다. 한국 남자들은 부엌일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테스는 남편의 사랑이 결혼 뒤 식은 것만 같아 혼자 울기도 했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이 하루아침에 두려움으로 변해 버렸던 겁니다 ..  (183쪽)


 한 가지 아쉬움을 더 이야기해 본다면, 책에 들어간 그림입니다. 그린이가 넣은 그림은 꼭 ‘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느낌이 짙습니다. 글이란 자기가 나타내려고 하는 이야기를 눈을 감고도 눈앞에 보고 있는 듯 써낼 수 있어야 하지만, 그림 또한 자기가 보여주고픈 모습을 눈을 감고도 코앞에 두고 있는 듯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날 한석봉 어머님이 자기 아이한테 불을 끈 채 글씨를 쓰도록 하면서 당신은 어두운 곳에서 떡을 가지런히 썰었다는 옛이야기는(참인지 거짓인지 모르지만), 그만큼 모든 일이 손에 익고 몸에 배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어린이책 《다슬기 한 봉지》에서 글이며 그림이며 참 훌륭하게 선보이려고 애는 많이 썼는데, 퍽 서툴면서 아쉬운 대목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왜 글다운 글로, 그림다운 그림으로 어린이책 하나를 마무리짓지 못했을까요. 왜 우리 둘레 살가운 이야기들에서 이야기감을 얻어냈으면서도 살가움을 푸근히 빚어내지 못했을까요.

 사진을 보고 그린 듯한 그림으로 그리자면 그냥 사진을 넣을 때가 낫습니다. 아니면 정밀그림을 그리든지요. 사진 냄새가 나는 그림이나, 그림 냄새가 나는 사진이나, 둘 모두 그림도 아니요 사진도 아닙니다.

 설익은 풋능금은 풋능금대로 맛있고, 푸른포도도 푸른포도대로 맛있습니다. 맛이 다릅니다. 다른 맛은 틀리거나 나쁜 맛이 아니라 ‘남다른’ 맛입니다. 그러나, 남다르다고 할 만한 맛이 모두 ‘좋은’ 맛이거나 ‘훌륭한’ 맛이 될 수 없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남다름을 찾는 일은 만만하지 않을 뿐더러 힘들지만 무척 보람이 있기 때문에 애써 나설 만합니다. 그러나, 남다름에서만 머무는 남다름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남다름이 되도록 더욱더 자기 이야기를 되돌아보고 우리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내 삶터에 단단히 뿌리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서 섣불리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습작 글을 내놓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 부끄럽기 앞서, 글쓰는 사람 스스로 얼굴을 부끄럽게 하는 셈입니다. (4341.12.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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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 방석 사계절 아동문고 71
박효미 지음, 오승민 그림 / 사계절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할 말’ 없는 어린이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잠깐 읽기 20] 박효미, 《길고양이 방석》



- 책이름 : 길고양이 방석
- 글쓴이 : 박효미
- 그린이 : 오승민
- 펴낸곳 : 사계절 (2008.10.9.)
- 책값 : 8800원



 (1) 믿을 수 없는 사람과 삶터와


 목포에 사는 형이 동생인 저한테 새 셈틀 하나와 외장하드 하나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셈틀이 먼저 오고 외장하드가 나중에 왔는데, 외장하드를 가지고 와 주는 택배기사는 ‘그제 배송완료’로 올려놓고는 오늘 낮 느즈막하게 가지고 왔습니다. 뻔뻔하게 ‘배송완료’라 해 놓고는 전화연락조차 되지 않던 그 택배기사는 물건을 건넨 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기요, 바쁘시겠지만 ……” 하고는 말문을 열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바쁘면 늦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제 물건을 갖다 주었다고 처리를 해 놓고 아무런 연락이 없이 이틀이나 보낼 수 있습니까?”


.. 엄마가 얼른 고개를 들고 할머니를 쏘아보았다. 할머니가 하던 말을 뚝 멈췄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애 다치면 어떡할 건데? 몸도 안 좋은 애를. 그런 생각은 해 봤니?” “어머니, 다 생각했어요. 지명이한테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친구들이에요. 놀 수 있는 친구들. 지금 행복하게 놀 친구가 필요하다고요. 지금 행복이 중요하다고요. 잘 다니고 있는 중이에요.” 퉁명스레 내뱉은 엄마 말 중 하나가 느닷없이 내 머리를 툭 쳤다. 지금 행복한 게 중요하다, 이게 무슨 말이지? … “지은아, 들어가 너 할 일 해.” “응, 근데 사회 숙제 있어. 세계 문화 유산 사진 찾아오래.” “알았어. 넌 공부나 해. 엄마가 찾아 줄게. 어서 방으로.” 엄마 재촉에 쫓겨 내 방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 시계 옆에 학습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모든 게 순서대로다. 맨 위에 올려져 있는 건 영어 동화책. 영어 테이프는 벌써 엄마가 꽂아 놓았을 것이다. 그 밑에는 풀다 만 수학 문제집. 내가 풀어야 할 부분에 작은 쪽지가 붙어 있다 ..  (13∼15쪽)


 택배기사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줄줄 늘어놓습니다. 택배회사 본사로 전화까지 해 보니 몇 번이나 미안하다면서 곧바로 물건을 보낸다고 한 때에서도 이틀이나 지났는데, 정작 택배기사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얼굴이고 몸짓이었습니다. 늦거나 말거나, 아니면 물건이 사이에 사라지거나 말거나 자기하고는 아랑곳할 일이 아닌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쓰겁게 웃으면서, “그래요? 그럼 가세요.” 하고는 그만두었습니다. 자기가 잘못했음에도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 벙긋하고 꺼낼 줄 모르는 사람한테, 당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게 하기란, 굳이 미안하다는 소리 한 마디 들으려고 하기란, 참 어리석다고 느껴졌습니다.


.. 문득 지명이한테는 허용되는데 나한테는 안 되는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명이는 친구랑 실컷 놀면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어질러도 되고, 나는 놀기는커녕 친구를 부르는 것조차 해 본 적이 없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 하긴, 우리 집에 오겠다는 애도 없다 ..  (34∼35쪽)


 지난달 어느 날, 인천에 있는 어느 인터넷신문에서 제 사진 두 장을 말없이 훔쳐서 쓴 데다가, 저작권표시마저 ‘자기 것’인 듯 고쳐서 쓴 일이 있었습니다. 지역 소식을 알아보려고 인터넷 글을 뒤적이다가 뜻밖에 보게 되었으니, 그날 어떤 기사 하나 찾으려고 부지런히 인터넷 글을 살피지 않았다면, 제 사진이 도둑질된 줄조차 모르고 지나쳤겠구나 싶습니다.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화면만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다가는 내용증명 한 통을 썼습니다. 내용증명에는, 저작권자 허락 없이 사진을 쓴 일, 저작권자 표기를 지운 일, 사진에 적혀 있던 저작권자 이름을 지우면서 자료사진이라고 적어 넣으면서 소유권을 빼앗은 까닭을 물으면서, 이와 같은 말썽거리를 하루빨리 고치라고 썼습니다.


.. “야! 빨리 가. 나 학원 시간 늦는단 말이야.” “아이고, 성질하고는. 야, 생각해 봤냐? 학예회.” 나는 되도록 태연하게 말했다. “그날 시험 보러 가야 돼. 영재 시험.” “왜? 그런 걸 왜 신청했어?” “외고 가려면 그런 것도 해야 된대.” 이렇게 말해 놓고 나는 흠칫 놀랐다. 엄마처럼 말하고 있다. 내 안의 엄마가 지금 유리한테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가 대신 시험 신청을 해 놓은 것처럼 말이다. 엄마가 내 속에 앉아 있다. 진짜 나는 뒷방으로 쫓겨나 버렸다 ..  (72쪽)


 그러나 제 사진을 도둑질한 분은 당신한테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투였고, 자기 둘레에 아는 시민사회단체 사람한테 뜬소문을 퍼뜨려 ‘사진 도둑질을 받은 제가 외려 잘못한 사람인 듯’ 내몰리는 처지가 되게 했습니다.

 저는 제가 애써 찍은 사진이건 무엇이건 스스럼없이 거저로도 주고, 따로 제 돈을 더 들여서 종이로 뽑고 사진틀에도 끼워서 선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된 밑바탕이 그릇된 채 도둑질을 한다면, 그리고 도둑질을 해서 쓰는 매체가 돈이 없거나 가난한 매체가 아닌 바에는, 제대로 된 값을 치르고 가져가서 쓰도록 합니다. 정 형편이 안 닿아서 당신들 스스로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면, 전화라도 한 통 해서 도와 달라고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연락도 허락도 없이 몰래 쓰고는, 잘못한 줄도 깨닫지 못하니.


.. “뭘?” 수돗물 소리가 다시 뚝 그쳤다. 엄마가 날 보자 어깨가 움찔했다. “그냥 학예회 하고 싶어.” 엄마 표정이 일그러지다가 어색하게 펴졌다. “지은아,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돼.” 엄마가 내 어깨를 잡았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고 눈에서는 덜컥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엄마가 내 등을 토닥토닥 다독거렸다. ‘그런 건 언제 해? 나중에? 미래에? 어른이 돼서?’ 내 마음이 소리쳤다. 엄마가 내 어깨를 감싸며 내 방으로 날 데리고 들어갔다. 내 몸은 순순히 엄마를 따라갔다 ..  (79쪽)


 아기 기저귀를 빨면서 생각합니다. 똥 눈 아기를 씻기면서 생각합니다. 잠깐 눈붙이며 쉴 틈 없이 쌀을 씻고 냄비에 안치면서 생각합니다. 옥상마당에 널어 말린 기저귀를 걷어서 개면서 생각하고, 까르르 웃는 아기를 품에 안고 노래를 부르면서 생각합니다. 오늘날 이 땅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는지를. 오늘날 이 땅 우리들은 어릴 적부터 어떤 사람 둘레에서 무엇을 바라보면서 무럭무럭 자랐는지를. 오늘날 이 땅 우리들은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어린이집이나 대학교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배웠는지를.

 숱한 사회살이와 회사살이를 거치면서 몸으로 받아들이는 지식이나 경험이란 무엇인가요. 숱한 사람을 부대끼면서 가슴으로 받아안는 슬기나 깜냥이란 무엇인가요.

 우리한테 이웃이란 누구이며 동무란 누구이고 식구란 누구인가요. 우리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우리 둘레 사람들은 어떻게 어깨동무하며 지낼 수 있는가요.

 우리한테 소담스러운 일이란 무엇이고, 우리 스스로 아름다이 여길 대목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꾸리는 삶이 즐거운 삶이고, 어떻게 이루는 꿈이 신나는 꿈이며, 어떻게 쓰는 돈이 넉넉한 돈입니까.


.. 나는 아무 데로나 걸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곳이라곤 학교 앞 커다란 상가 몇 개가 다였다. 상가를 지나 곧장 오르면 집이다. 나는 상가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빵집을 기웃거리고, 상가 뒤쪽 문방구 앞도 얼씬거렸다. 시간이 좀 지나자 조금씩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엄마한테 엄청 맞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펑펑 울지도 모른다.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것들이 날 괴롭혔다. 나는 결국 학교로 돌아갔다 ..  (140쪽)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돈으로 사귀는 사람이 아니고, 돈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돈으로 맺어지는 터전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깊은 사랑으로 함께하고, 너른 믿음으로 같이하며, 포근한 나눔으로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되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많은 돈을 알뜰살뜰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돈 많은 사람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되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내 지식과 슬기를 이웃과 스스럼없이 나누는 똑똑이가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름난 사람이 되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내 이름값이 나를 높이는 이름값이 아니라 내 이웃한테 따순 눈길을 건넬 수 있는 이름값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2) ‘할 말’ 없으면 문학이 아닐 텐데


 어린이책 《길고양이 방석》을 읽습니다. 책이름부터 남다르게 느껴지는 《길고양이 방석》은, 장애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겪는 아픔을 다루는 한편, 장애 있는 아이와 장애 없는 아이를 다르게 키우는 부모 모습을 다루고, 오로지 돈 많이 버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일류대학교에 들어가자면 어릴 때부터 영재 교육을 받고 학습지와 학원 공부 말고는 눈길을 돌릴 까닭이 없다고 여기는 부모 모습을 다룹니다.

 주인공 가운데 한 아이(걷지 못하는 어린 동생)는 자기가 아끼는 방석 무늬를 보고 ‘길고양이 방석’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책이름은 여기에서 따옵니다. 그런데, 책이름으로 쓰이는 ‘길고양이’와 얽힌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저냥 지나가는 생각 한 줌으로 책이름을 《길고양이 방석》이라고 붙일 수 있습니다만, ‘방석’도 아니요 ‘고양이 방석’도 아닌 ‘길고양이 방석’이라고 책이름을 붙이면서, 이와 얽히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줄도 나오지 않으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책이름을 이렇게 붙이는 바람에, 이 책을 읽을 아이들은 엉뚱한 데로만 생각이 뻗어나가지 않을까요? 뜻없이 붙인 책이름 때문에 ‘방석’이 말해 주거나 보이는 이야기를 감추어 버리지 않는가요? 방석을 깔지 않으면 다리가 아픈 장애 아이를, 방석 하나가 살가운 동무처럼 되어 있는 장애 아이를 바라보기보다는 ‘길고양이가 어쨌는데?’ 하는 생각을 자꾸자꾸 뻗치게 되지 않습니까? 그냥 꽃이라 하면 되는데 ‘은방울꽃’이나 ‘제비꽃’이라고 부러 예쁜 이름을 붙이면서, 예쁘게만 꾸미려는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궁금함은 책이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길고양이 방석》을 펼쳐 읽는 내내, 글쓴이가 우리한테 참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문장 솜씨 괜찮고, 이야기 짜임새도 제법 탄탄합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공부에 치이고 밟히는 모습을 낱낱이 잘 그려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알맹이는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써서 아이들한테 읽히는 까닭을 드러내지 못하고, 이와 같은 이야기를 구태여 종이책으로 찍어서 읽혀야 하는 까닭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줄거리는, 장애 있는 동생이 갑작스레 병이 걸려 죽고 나서 저절로 ‘입시공부에서 살며시 풀려나게 되었다’는 맺음말로 끝납니다.


.. “원하는 걸 내가 다 했다고? 뭘? 공부? 학습지? 학원? 그게 내가 원하는 거라고?” “널 위해서잖아. 지은이 널 위해서.” “그건…… 엄마가 원하는 거잖아.” ..  (146쪽)


 어린이책이든 어른책이든, 문학이 ‘가르침(교훈)’이어야 할 까닭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가르침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가르침만 지나치면 지루하고 가르침이 하나도 없으면 허전합니다. 가르침이란 교장 선생님 훈시 같은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가운데 저절로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못 배웠다고 하는 분들이 온몸으로 부대끼는 삶자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크게 배우는 일이 퍽 많은데, 크게 배우게 되는 까닭은 못 배웠다는 분들이 훌륭한 말씀을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들 손바닥을 보고 얼굴을 보고 매무새를 보기 때문에 배웁니다. 환경사랑과 재활용을 따로 배우지 않았어도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추운 겨울날에 실장갑 하나만 낀 채, 또는 맨손으로 헌 상자나 신문지 들을 그러모아서 다문 몇 백 원 벌이를 하는 삶은, 수십 수백 권짜리 환경책과 견줄 수 없이 아름다운 환경 이야기이곤 합니다. 헌책방 일꾼이 버려진 책을 캐내고 손질하여 새롭게 빛나도록 애쓰는 일 또한, 그 어느 출판평론가가 책을 사랑한다고 길게 논문을 쓰는 일하고 견줄 수 없이 거룩한 책사랑이곤 합니다.

 그나저나, 어린이책 《길고양이 방석》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듭 읽어도 느낌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줄거리는 있으나, 줄거리를 있게 하는 생각 한 줄기가 없습니다. 이야기 짜임새는 있으나, 이런 이야기를 짜넣어서 들려주는 느낌 한 가지가 없습니다. 솜씨 좋은 글매무새는 있으나, 솜씨 좋은 글매무새에 담겨 있는 넋과 얼을 찾기 어렵습니다.


.. 둘레에 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얘들아, 왜 그러니?” “아줌마, 얘 못 걷지요? 몇 살이에요?” 순간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머리속에 열기가 가득 찼다. 선생님이 대답하기도 전에 딴 아이가 또 물었다. “왜 안고 다녀요? 두 살이에요?” “에계, 다리가 뭐 저래.” 내 키만 한 아이가 불쑥 나서서 소리쳤다. “야 야, 손도 그렇잖아. 얘 장애인이야.” 지명이가 움찔 움츠러들었다 ..  (121쪽)


 어쩌면 《길고양이 방석》을 쓰신 동화작가는 아직 습작을 쓰는 눈높이가 아니랴 싶습니다. 앞으로 부지런히 습작에 습작을 거듭하면서 차츰 나아질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할 말은 없지만 쓸 글은 있는 지금 모습을 씻어내고, 할 말이 있도록 자기 삶을 붙잡고, 할 말이 알알이 여미어지도록 글 하나를 갈고닦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아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배우고 어떤 동무들과 어울리면서 스스로 어떤 일과 놀이를 즐기는 사람으로 크면 좋은가 하는 깨우침이 모자란 가운데, 글쓴이 스스로 바로 지금 어떻게 자기 삶을 다스리면서 가꾸어 나가야 즐겁고 아름다운가를 제대로 못 깨우치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군데군데 톡톡 튀어나오는 ‘아이들이 놓인 끔찍한 형편’ 이야기는 코앞에 벌어지는 일처럼 살뜰히 그려내지만, 이런 ‘상황 보여주기’를 왜 하는지, ‘아이들이 이렇게 입시공부에 갇힌 까닭’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아이들을 입시공부에 밀어넣는 부모’들은 어찌하여 이런 부모가 되고 말았는지를 못 헤아렸구나 싶어요.

 주말연속극도 문화이자 재미난 이야기일 수 있기에, 《길고양이 방석》 같은 어린이책도 문학이요 재미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글쓴이나 출판사나, 또 어린이문학 평론을 하는 분들 스스로 《길고양이 방석》과 같은 작품을 ‘문학’이라고, 더욱이 ‘어린이문학’이라고 이름표를 붙여 준다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너무도 부끄러운 짓을 하는 셈 아니랴 싶습니다. 쭉정이는 쭉정이이고 깜부기는 깜부기입니다. 쭉정이는 벼이삭일 수 없고 깜부기는 보리이삭일 수 없습니다.

 세부묘사와 줄거리 짜기와 문장수련은 훌륭히 하지만, 무엇을 보여주려는 세부묘사인지가 없고 무엇을 들려주려는 줄거리 짜기인지가 없으며 무슨 얘기를 나누고 싶은 문장수련인지 없는 아쉬움을 털어내는 문학을, 어린이문학을 기다려 봅니다. (4341.12.1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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