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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물개를 바다로 보내주세요 ㅣ 미래그림책 55
마리 홀 에츠 글 그림, 이선오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좋은 사람, 좋은 책, 좋은 그림책
[그림책이 좋다 55] 마리 홀 에츠,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
- 책이름 :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
- 글ㆍ그림 : 마리 홀 에츠
- 옮긴이 : 이선오
- 펴낸곳 : 미래M&B (2007.6.7.)
- 책값 : 9000원
(1) 시와 글과 문예창작과 교수와 사람
글을 쓰는 꽤 많은 분들이 대학교에서 문예창작과 강사나 교사가 되곤 합니다. 대학교에 문예창작과가 그리도 많았는가 싶어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데, 글쓰기를 가르쳐 주는 곳이 퍽 많고, 적잖은 시인과 소설가가 ‘교수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저는 글쓰기는 학교에서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느끼고 있기에, 대학교 같은 데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친다고 할 때에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싶어 몹시 궁금하기도 하지만 슬프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삶이 없이 글을 쓸 수 없고,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서 글이 나오지 않으며, 자연 삶터 목숨을 내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야 글에 기운이 실리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글솜씨를 키우려는 생각으로 대학교 문예창작과를 간다든지, 그냥 책이 좋아 간다든지, 아무 생각 없이 원서를 냈다든지 했다면 갈 수도 있는 노릇이겠습니다만, 참으로 책을 좋아한다면 문예창작과도 대학교도 마음에서 잊어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책을 좋아하면 책방과 도서관에 갈 노릇이고, 글을 쓰고 싶다면 수많은 책을 돌아보면서 ‘아직 쓰여지지 않은 가슴 저리는 이야기’로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가운데 ‘우리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이야기’는 얼마나 있는가를 몸소 찾아나서야 한다고 느낍니다. 글쓰기란 겉멋이 아니요, 글쓰기란 대중소설이 아니고, 글쓰기란 돈벌이가 아니며, 글쓰기란 이름값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는 어느 직업인으로 대학교수가 되기도 하고, 시인이 교수가 되기도 하며, 소설가가 교수가 되기도 합니다. 글이 아닌 ‘문예’가 되고 쓰기가 아닌 ‘창작’이 되는 이 나라에서는, 시중 새책방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면서 글삯을 두둑하게 챙기고 비평가들한테 좋은 소리 많이 들으며 이름을 날리게 되면 ‘글 잘 쓰는 사람’인 듯 대접을 받으니, 이러한 겉치레를 좇아 해마다 천만 원이나 되는 돈을 대학교에 바치는 젊은 넋이 꽤 많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슬픈 마음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 그런데 엄마가 항구로 돌아와 보니 아기 물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아기 물개를 찾아 온 바닷가를 헤매었어요. 이름을 부르고, 끽끽 소리도 질러 보았지만 아기 물개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아기 물개는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엄마가 먼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한 선원이 모래밭에 있는 아기 물개를 보게 되었어요. 선원은 아기 물개를 데려가 버렸습니다. 선원은 아기 물개를 바닷가 마을에 가서 팔 생각이었어요 .. (2∼3쪽)
엊저녁, 퍽 이름난 시인이 들려주는 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진을 찍고, 찍은 사진을 곧바로 시디에 구워 건네드리고 나서 함께 막걸리잔을 들다가, 자꾸자꾸 샘솟는 눈물을 참기 어려웠습니다. 시란 이러한가, 시를 누구 읽으라고 쓰는가, 시인이 젊은 넋한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란 무엇이고, 젊은 넋은 왜 시인한테 문예창작이라는 학문을 배우고 있는가 곱씹으면서 괴로웠습니다.
그 시인도, 또 다른 시인들도, 당신들 삶이 있었기에 시를 썼습니다. 당신들 발자국 묻어난 고향마을이 있고 고향사람이 있었기에 시를 엮어냈습니다. 당신들을 일깨운 책이 있고, 당신들을 이끌어 온 어른이 있었기에 시한테 사랑을 바쳤습니다. 당신들을 북돋우고 아끼며 기꺼이 읽어 준 낮은자리 사람들이 있었기에 시 하나로 밥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밥벌이가 끝나고 나면, 밥벌이가 어느 만큼 느긋하게 자리잡고 나면, 시는 어디로 가지요? 시는 어떻게 흐르지요? 시는 어떻게 뻗어나가지요?
..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올레이(아기 물개)의 향수병은 깊어만 갔어요. 엄마가 보고 싶었고, 바닷가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도 그리웠습니다. 올레이는 자꾸 눈물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어요. 사육사 아저씨는 올레이를 달래 주려고 말을 걸기도 하고, 트럼펫으로 슬픈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어요 .. (7쪽)
동화를 쓰는 어느 분은 자기 글에 빈틈이 없을 뿐더러, 자기가 아주 글을 잘 쓰는 사람인 듯 여기고 있습니다. 마흔이란 나이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글 하나에 담긴 빛줄기를 보거나 잡아챘기에 스스로 자기 글을 훌륭히 여기게 되었는지 모릅니다만, 농사짓기와 같은 글쓰기인지라, 잘 쓴 글이고 못 쓴 글이란 있지 않습니다. 밥이 되는 곡식과 같은 글인지, 쭉정이라 거름으로나 써야 하는 글인지가 갈릴 뿐입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모내기를 할 만한 볍씨가 될 만한 글인지, 농약과 비료를 먹고 자란 글인지, 똥거름을 먹고 자란 글인지가 나뉠 뿐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어린이한테 읽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만한 마음그릇이라는 대목이 그지없이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어린이 마음이 아니고서는 어린이한테 읽힐 글을 쓸 그릇이 안 되는데, 어린이 마음이란 ‘찬찬히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마음이고, ‘늘 새롭게 배우고 거듭 익히며 꾸준히 달라지는’ 마음인데, 둘레 사람 말을 듣지 못하고, 둘레 사람 삶을 몸뚱이와 머리 모두로 찾아나서지 못하면서 무슨 동화를 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른이 읽는 글 또한 함부로 쓸 수 없지만, 어린이가 읽는 글은 훨씬 더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국가는 폭력이다》를 쓴 톨스토이와 같은 그릇이 되고 나서야 시를 쓰든 동화를 쓰든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너무하는 이야기인지 모릅니다만, 톨스토이 발가락만큼이라도 닮아 보려고 바둥거리면서 시를 쓰든 동화를 쓰든 해야 할 테고, 우리 땅에서 우리 나름대로 ‘또다른 톨스토이가 되려는’ 매무새로 시를 쓰든 동화를 쓰든 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나를 알고 세상을 알고 사람을 알고 자연을 알아야 샘솟아 나오는 글이거든요. 나를 모르고 세상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며 자연마저 모르는 채 글짓기를 억지로 억지로, 또 억지로, 순 억지로 써내어 무슨무슨 상을 타고 무슨무슨 대학에서 교수 일을 한다고 해 보아야, 이런 쭉정이들이 얼마나 밥이 되거나 힘이 되겠습니까. 거름이나마 될 수 있으려나요.
.. 홱! 올레이는 낚싯줄에 걸리고 말았어요! 작은 방울들이 딸랑거리자 사람들이 낚싯줄을 끌어당겼습니다. ‘이렇게 끝나다니!’ 올레이는 물속을 향해 있는 힘껏 헤엄쳤어요. 올레이가 얼마나 세게 몸부림을 쳤던지 낚싯줄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올레이는 다시 자유로워졌어요. 사람들은 거의 잡을 뻔하다 놓친 게 무엇인지 보려고 성냥불을 켰습니다. 하지만 올레이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쳐다보자,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어요. 그러고는 달아나 버렸지요. 사람들은 올레이와 놀아 주지도 않고, 친구가 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올레이는 등대 옆에 있는 바위까지 헤엄쳐 갔습니다 .. (14∼15쪽)
(우리 말로 옮겨진 책으로는) 《숲 속에서》와 《또다시 숲 속으로》와 《바로 나처럼》과 《나랑 같이 놀자》와 《크리스마스까지 아홉 밤》 같은 구슬처럼 아름다운 그림책을 엮어낸 ‘마리 홀 에츠’ 님이 1947년에 그려낸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를 두 번 세 번 넘기고 읽고 보고 눈물을 흘리다가는 빙긋 웃으면서 이 나라 글꾼들 삶과 모습과 말과 매무새를 돌아봅니다. 이 나라에서 그림 그린다는 분들과 사진 찍는다는 분들 삶과 모습과 말과 매무새도 함께 헤아립니다.
처음부터 ‘명작’이나 ‘고전’이란 없고, 새내기나 풋내기를 거치지 않고 훌륭한 이나 깨우친 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모짜르트 같은 천재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한테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천재들도, 천재가 아닌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땀을 흘립니다. 땀을 바칩니다. 사랑이 서린 땀을 흘립니다. 믿음이 배인 땀을 바칩니다. 한 해 두 해로는 어림도 없을 땀을 쏟고, 열 해 스무 해로도 모자란 땀을 들입니다.
몇 해 앞서 세상을 떠난 어린이문학가 권정생 님이 《몽실 언니》를 어떻게 써냈을까 떠올려 봅니다. 《한티재 하늘》을 써낸 이야기를 아주 짤막하게 밝힌 적이 있는데, 권정생 님은 젊은 날부터 몸이 아파서, 첫사랑이 막사랑이 되고 만 아픔과 슬픔이 있지만, 너무도 아픈데 빨리 죽지도 않아 더 괴로웠는데, 그러면서도 피를 한 움큼 쏟고 원고지 글 한 줄 쓰고, 또 피를 한 움큼 쏟고 원고지 글 한 줄을 쓰면서 겨우겨우 이야기책 하나를 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글꾼이건 그림꾼이건 사진꾼이건, 반드시 아무개 님들처럼 아파 보아야만 더 빛나는 열매를 얻어내지는 않아요. 아픔과 슬픔이 빛나는 열매를 이루는 디딤돌이지는 않고요. 그러나, 내 아픔과 슬픔을 떨쳐내지 않고 삭여낼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하고, 이웃 아픔과 슬픔을 등돌리지 않고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나한테 있는 모자람과 아쉬움을 볼 줄 알아야 이웃한테 있는 모자람과 아쉬움을 봅니다. 나한테 있는 사랑과 믿음을 느낄 줄 알아야 이웃이 우리한테 베풀려고 하는 사랑과 믿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림책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를 넘기면, 가없이 넓고 깊은 어머니 사랑이 처음부터 끝까지 넘실넘실 느껴지는 한편으로, 어머니 사랑을 잃거나 버린 우리들 여느 사람들 삶이 슬프고 아프게 느껴집니다. 한 목숨 어머니한테 받은 기쁨과 보람을 느끼면서, 우리들 스스로 어머니한테 이어받은 고마운 목숨을 기뻐하거나 반가워할 줄 모르는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 ‘마리 홀 에츠’ 님 그림책이 옮겨진 때는 이제 고작 열 해가 조금 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아직 ‘마리 홀 에츠’ 님 그림책을 보고 자라면서 어른이 된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진작부터 수많은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깊은 사랑과 너른 믿음이 알알이 담긴 ‘마리 홀 에츠’를 어머니랑 함께 보아 왔어요. 한국사람이 우러러 마지않는 미국땅 어린이들도, 유럽나라 어린이들도 ‘마리 홀 에츠’ 그림책과 함께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다만, 무럭무럭 자라난 아이들 가운데 엇나가고 말아 전쟁 미치광이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만,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 같은 그림책을 살뜰히 받아먹고 아름다운 마음결을 놓지 않고 할머니가 되고 할아버지가 된 사람이 아주 많아요.
.. 올레이는 구경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천천히 헤엄쳐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호숫가 모래밭에서 들려왔어요. 올레이는 그 사람들이라면 자기와 놀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레이는 모래밭 쪽으로 헤엄쳐 갔어요. 그리고 얼굴을 물 위로 쏙 내밀고, 사람들이 봐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올레이를 보고도 웃지 않았어요. 자세히 보려고 몰려오지도 않았어요. 물고기로 가득한 건물에서 본 사람들하고는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올레이와 놀려고도, 올레이를 구경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놀라서 정신을 잃거나,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호수 밖으로 달아나 버렸지요 .. (19쪽)
오늘도 새로운 아침해를 맞이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동화를 쓰든, 스스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면 땀을 흘릴 노릇인데, 자기 작품을 일구는 데에만 땀을 흘리지 말고, ‘마리 홀 에츠’처럼 고즈넉하게 사랑열매와 믿음열매를 맺은 분든 땀방울을 알아내고 느껴서 받아먹는 데에도 땀을 흘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작품을 써낸 괴테라지만, 괴테는 자기 삶 1/3을 말등에서 보냈다고 할 만큼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굳이 괴테처럼 살거나 괴테가 되어야 할 까닭은 없는데, 그렇기는 하나 우리들은 우리 삶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우리들은 우리 삶을 어떻게 여미고 있는지, 우리들은 우리 고맙고 거룩한 삶을 어떤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지 곰곰이 돌아보아야지 싶어요. 이렇게 하지 않고서 쓰는 시나 소설이나 동화가 된다면, 한낱 종이쓰레기일 뿐입니다. 거름도 되지 못하는 종이부스러기일 뿐입니다. 자기가 ‘내 책은 명작이야!’ 하고 말하거나 ‘내 책은 고전이라고!’ 하면서 내세울 수 없는 노릇입니다만, 앞으로도 오래오래 ‘명작이 되고 고전으로 이어갈’ 만한 글그릇이 되도록 그림그릇이 되도록 사진그릇이 되도록, 좀더 갈고닦으면서 삶자락을 추슬러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2) 좋은 그림책이란
1895년에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란 ‘마리 홀 에츠’ 님은, 1917년에 혼인했던 남편이 두 주 만에 제1차 세계대전 때 싸움터에서 죽자 남편 잃은 슬픔을 이겨내려고 어린이를 돌보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일을 합니다. 1930년에 다시 혼인을 했으나, 둘째 남편도 열세 해 뒤 암으로 세상을 떠나 버렸고, 끊임없이 닥치는 아픔과 슬픔을 꿋꿋이 이겨내려고, 또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따뜻함을 찾아서 나누려고 그림책을 그리게 됩니다. 그렇게 그렇게 애쓰고 힘쓰면서 살다가 1985년에 당신도 흙으로 돌아갑니다.
.. 엄마는 아기 물개의 코에 입을 부볐어요. 올레이와 엄마는 파도를 타고 헤엄쳐 바닷가 쪽으로 갔습니다. 물개 두 마리는 배로 기어서 천천히 밖으로 나왔어요. 점박이물개는 발이 지느러미 같아서 걸을 수가 없거든요. 올레이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먼 길을 헤엄쳐 와 피곤했어요. 올레이는 엄마 옆에 누워 금방 잠이 들었어요. 바닷가 항구 모래밭에서 .. (30쪽)
‘마리 홀 에츠’를 모르는 이웃집 헌책방 아주머니하고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라는 그림책을 함께 넘겨 봅니다. 책읽을 겨를이 없고, ‘누가 훌륭한 그림책 작가인가를 모르는’ 아주머니는, “그림 참 좋네, 가슴으로 느껴지네.”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마리 홀 에츠’라는 이름을 보며 책을 끄집어냈지만, 아주머니는 이름이나 출판사는 보지 않고 그림부터 먼저 펼쳐 보았습니다.
예순 해를 묵은 그림책이니, 1947년에 미국에서 이 그림책을 보던 아이들 가운데에는 세상을 뜬 사람도 꽤 많겠구나 싶습니다. 이 그림책을 보면서 ‘나도 이런 그림책을 그려내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꿈을 키운 사람도 퍽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2007년에 겨우 옮겨지기는 했으나 그리 알려지지 못하고 읽히지도 못하는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인데, 요 알뜰한 사랑열매와 요 애틋한 믿음열매를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받아안거나 받아먹는지 궁금합니다.
.. 어느 바닷가 항구에 점박이 아기 물개가 태어났어요. 아기 물개는 너무 어려서 물속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모래밭에 엄마와 함께 누워 있었지요. 가끔 엄마는 고개를 돌려 아기 물개 쪽을 살폈어요. 그리고 아기 물개에게 뽀뽀를 해 주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 (1쪽)
아무래도 우리들은 ‘좋은’ 그림책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눈이 몹시 얕다고 느낍니다. 어릴 때부터 ‘좋은’ 그림책과 어린이책을 만나지 못하니, 스스로 ‘좋은’ 책을 알아보는 눈을 기르지 못하고, 또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길 가운데 하나를 놓치지 않느냐 싶습니다. ‘좋다 나쁘다’란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고, ‘좋다 나쁘다’로 가르는 일이란 아무 뜻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몸에 좋은 밥처럼 마음에 좋은 책이란 틀림없이 있습니다. 씨눈이 살아 있는 누런쌀밥과 씨눈이 잘리고 없는 하얀쌀밥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새힘을 나게 할 때에도 틀림없이 다릅니다. 농약 먹은 감자와 농약 안 먹은 감자 또한 틀림없이 달라요. 합성착색료가 들어간 마실거리를 아이들한테 함부로 마시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어른들이라면, 아이들한테 쥐어 주거나 읽어 줄 그림책이나 어린이책도 ‘좋은’ 책으로 꼼꼼히 살피고 골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부터 좋은 책을 가까이하는 매무새가 자리잡아야 푸름이가 되고 어른이 되면서도 좋은 문학과 좋은 이야기책과 좋은 인문학 책을 가까이하거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좋은’ 그림책이란 어떠한 책을 가리킬까요. 그림책이니, 먼저 그림이 군더더기가 없고 어긋난 대목이 없으며 살가워야 합니다. 적잖은 한국 그림책 작가들은 자전거를 참 잘못 그릴 뿐더러, 출판사 편집자들마저 잘못 그린 자전거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림쟁이나 책쟁이나 자전거를 안 타면서 살아가니까 자전거를 잘못 그려도 느끼지 못하는 셈인데, 좋은 그림책이라면 그린이 스스로 자기 삶을 야무지게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버지니아 리 버튼’ 그림책에, 또 ‘베아트릭스 포터’ 그림책에 군더더기란 있지도 않으나 어긋난 그림 또한 한 군데도 없습니다. ‘나카가와 리에코’가 만화처럼 간추려 그린 책 어디에도 대충 그리거나 엉터리로 그린 대목이란 한 곳도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기본 데생’을 할 줄 모르면서 ‘좋은’ 그림책이 되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림책 작가로 경력이 쌓인다 하더라도 스스로 기본 데생이 삭지 않도록 꾸준히 힘쓰는 모습이 그림책에 녹아나야 합니다.
다음으로, 줄거리가 싱그러워야 합니다. 그림책은 한 번 읽고 덮는 책이 아니라, 적어도 100번은 다시 읽고 보는 책입니다. 100번이 아닌 1000번을 거듭 보아도 새로운 재미가 샘솟을 수 있는 줄거리를 짜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늘 신나고 재미있을 만한 이야기가 ‘별나라 달나라에 있는’ 줄 잘못 아는 한국 그림책 작가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 나라 창작 그림책은 나라밖 번역 그림책을 따라가지 못하는데, 우리가 명작이나 고전이라고 가리키는 그림책치고 ‘우리 삶 이야기’를 안 담은 그림책이 없을 뿐더러 ‘우리 가까이 이웃한 삶 이야기’를 안 다룬 그림책이 없습니다. 모든 명작과 고전은 삶에서 비롯합니다. 삶이 밑바탕입니다. 삶이 있어야 그림책이 있고, 삶이 싱그러워야 그림책이 싱그럽습니다. 《장갑》이나 《심심해서 그랬어》나 《재활용 아저씨 고마워요》나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나 《할아버지는 수레를 타고》나 《오른발 왼발》이나 《이슬이의 첫 심부름》이나 《종이 인간》 같은 줄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찬찬히 돌아보셔요.
그리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즐거워서 웃기도 해야 하지만, 슬퍼서 울기도 해야 합니다. 《팥죽 할멈과 호랑이》나 《아프리카여 안녕!》나 《따르릉 따르릉 비켜 나세요!》나 《캄펑의 개구쟁이》나 《나는 곰이란 말이에요》처럼 배꼽 잡도록 웃기는 아름다움도 있고, 《생쥐와 고래》라든지 《당나귀 실베스타와 요술 조약돌》이라든지 《까마귀 소년》이나 《우리 할머니》나 《아툭》이나 《꼬마 곡예사》처럼 눈물이 펑펑 나오는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말없는 그림책 《떠돌이 개》나 《나무》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고, 연필 한 자루만으로도 아름다운 《꼬마 인형》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톡톡 터지는 웃음이면서, 펑펑 터지는 울음입니다. 해맑게 웃고 가슴아프게 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지 못하는 그림책이라 한다면, 그림이 빈틈없고 줄거리가 탄탄하더라도 ‘좋은’ 그림책이 될 수 없어요.
어쩌면, ‘좋은’ 그림책에서 가장 크게 살필 대목은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아름다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고마움이 담긴 아름다움, 사람이면서 사람답지 못한 안타까움을 담아낸 아름다움,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아름다움 말입니다. 아름다움에서 즐거움이 배어나고 아름다움에서 싱그러움이 샘솟는지 모릅니다. 아름다움에서 눈물이 나고 웃음이 나는지 모릅니다. 아름다움에서 사랑이 태어나고 믿음이 자라는지 모릅니다.
이리하여, 꾸며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살면서 녹여내는 아름다움으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배어나는 아름다움으로, 겉치레 아름다움이 아니라 알맹이가 단단히 여문 아름다움으로 그림책 하나 빚어내어야 우리 삶도 아름답게 껴안을 수 있지 않느냐 싶어요. 얼른 집 치우기를 마치고, 그림책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를 들고서 아기와 옆지기가 있는 일산 처가집으로 가야겠습니다. (4341.12.28.흙.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