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72 : 허영만 씨가 《퇴색공간》을 그릴 자유

 겨울철에는 낮 한 시와 두 시 사이에 어김없이 빨래를 합니다. 밤과 새벽에 한 차례 더 빨래를 하는데, 영하를 오르내리는 우리 집에서는 빨래가 잘 마르지 않아, 한낮을 놓칠 수 없습니다. 이맘때 누군가 만나자고 한다든가 전화라도 한 통 걸려오면 고단합니다. 마침 가장 따뜻한 때라, 아기를 씻기며 남은 물로 빨래를 하는데, 씻기랴 빨래하랴 전화통 붙잡으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렇게 애먹지 말고, 종이기저귀 사다 쓰지’ 하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단함이 종이기저귀 사다 쓴다고 풀리겠습니까. 외려 종이기저귀는 우리 삶뿐 아니라, 자라날 아기한테도 나쁘게 영향을 끼칠 텐데요. 빨래가 따사로운 햇볕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듯, 아기도 맑은 햇살과 파란 하늘을 즐기면서 무럭무럭 크기를 바랍니다.

 한창 기저귀를 빨면서 오늘 저녁은 무얼 마련하고, 저녁까지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하다가, 지난달부터 붙잡고 있는 만화책 하나에 생각이 미칩니다. 서울 숙대입구역 둘레에 있는 헌책방에서 찾아낸 한 권짜리 대본소판 만화인데, 그린이는 허영만 님이고, 책이름은 《퇴색공간》입니다. 나온해는 1990년입니다. 만화쟁이 허영만 님은 잡지 《만화광장》에 1987년 6월부터 〈오! 한강〉을 이어실었고, 나중에 이 작품을 세 권짜리 낱권책으로 묶어서 1988년에 펴냅니다. 그런 다음 《퇴색공간》을 그린 셈인데, 《오! 한강》 세 권은 김세영 님이 글을 넣었으나, 《퇴색공간》은 글과 그림 모두 허영만 님 혼자 해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시대를 읽은 훌륭한 만화작품’으로 《오! 한강》을 손꼽기도 하고, 대학생들한테는 필독서 못지않았다는 대접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참말 이와 같은 소리를 들을 만한가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작품완성도’나 ‘작품 재미’로는 뛰어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들은 무엇을 보여주거나 들려주고 있을까요.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은 배후조종자가 있고, 이들은 자본주의를 뒤엎으려는 폭동을 꾀하면서 우리 경제를 무너뜨릴 뿐’이라는 ‘서민들 생각과 목소리’일까요? 그린이 자유에 따라서 줄거리를 엮기 나름일 테지만, 《오! 한강》이며, 《퇴색공간》이며, 허영만 님이 바라보는 세상이 무엇인가를 찬찬히 보여주고프다면 보여줄 노릇이지만, 작품 하나가 독자들한테 받아들여지는 우리 얼거리를 돌아볼 때에는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대학생이라면 으레 데모나 하고 있고, 이 데모 때문에 ‘착한 시민들’이 고달프다며, “좀 조용히 살자! 조용히! 누가 옳고 누가 나쁘든 제말 그만둬!(24쪽)” 하는 대사와 그림을 큼직하게 집어넣을 때, 이 나라 어린이와 젊은이는 이 만화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좌경세력에 의해서 노조가 결성되면 회사가 망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158쪽)” 같은 대사는 우리 삶터를 어떻게 보여주게 될까요.

 자유와 책임이 함께해야 한다고 말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허영만 님한테 ‘노동운동 = 빨갱이’라 말할 권리가 있되, 이런 만화를 그린 허영만 님을 비판할 권리 또한 누구한테나 있다는 말 한 마디만 하고 싶습니다. (4342.1.8.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자의 식탁 1
시무라 시호코 글.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사랑과 그리움과 애틋함을 만화 하나에 소롯이
 [살가운 만화 41] 시무라 시호코, 《여자의 식탁 (1)》



- 책이름 : 여자의 식탁 (1)
- 글ㆍ그림 : 시무라 시호코
- 옮긴이 : 김현정
- 펴낸곳 : 대원씨아이 (2008.5.15.)
- 책값 : 4200원



 (1)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는 눈골목 사진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아침, 모든 일을 젖혀 놓고 사진기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옵니다. 오늘은 모처럼 장갑까지 끼고 나옵니다. 설마 싶어서 두툼한 겉옷을 챙겨 입습니다. 모자를 눌러쓰며 눈발을 막고 사진기는 겉옷 안에 넣어 눈이 맞지 않게 하면서 뒤뚱뒤뚱 뜀박질을 합니다.

 창영동 골목집에서 배다리 철길다리 밑으로 지나 경동으로 건너갑니다. 늘 다니면서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았던 골목 모습을, 오늘은 눈발 날리는 모습으로 새롭게 담습니다. 경동을 지나 율목동으로 접어들고, 다시 경동으로 건너온 다음 용동으로 넘어가고, 용동에서는 인현동으로 건너서 은행에 들러 돈을 찾고, 지하상가를 거쳐 찻길을 가로지른 다음 동인천 〈대한서림〉 옆을 스쳐서 내동을 살짝 바라보다가 전동 삼치골목을 쳐다봅니다. 삼치골목은 가게마다 간판갈이를 하느라 부산합니다. 시에서 관광특구로 지정하며 간판을 새로 다는 듯합니다.

 부지런히 발을 놀려, 내동과 전동과 송학동1가가 만나는 무지개문(홍예문) 앞에 섭니다.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 뒤 무지개문 밑에 서고, 이 길에서 사고가 많아 걱정이라 한다면 이리로 자동차가 못 다니게 하면서 이곳을 ‘근현대 문화역사 체험 마을 특구’로 삼아도 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송학동1가 골목길을 지나 북성동3가로 접어들고, 중국사람들 살림집을 하나둘 넘겨보면서 북성동2가로 접어들고, 중국인거리에서 허물어져 가는 공화춘 건물 앞에 서서 잠깐 고개를 숙인 뒤, 선린동 해안동성당 앞에 닿습니다. 선린동 해안동성당 맞은편에 자리한 해안동성당 교육관은 시 지정 문화재라고 하는데, 이곳 또한 또다른 시 지정 문화재인 공화춘 건물과 마찬가지로 그예 썩어들며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 “참지 않아도 돼.” “그치만.” “그래.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구나. 하지만, 난 정말로 괜찮아. 이쿠가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모른 척할 순 없어. 아빠랑 할머니가 반대해도 엄마가 설득할게. 그러니까, 다음에 친엄마와 만날 기회를 만들자.” ..  (14쪽 - 수영 클럽의 아이스크림)


 눈발이 멎을까 싶어 쉴 새 없이 걷고 달리고 사진을 찍습니다. 엉덩방아도 찧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북성동2가 골목 안쪽에 옛날 그대로 남아 있는 우물터를 스치고 지나간 다음, 관동2가로 접어들었고, 관동2가에 멋들어진 텃밭을 꾸리는 집 앞에 어느새 새로 생긴 울타리를 물끄러미 바라다봅니다. 이곳 관동2가에는 나이트며 가라오케며 단란주점이며 잔뜩 있어서, 인천시에서 ‘역사문화의 거리’라고 붙인 이름이 남우세스럽기도 한데, 아무래도 그 술집에서 체한 사람들이 쓰레기를 텃밭에 함부로 버리는 듯합니다. 집임자는 텃밭에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높직하게 울타리를 쌓았고 경고글까지 붙여놓습니다.

 중앙동2가를 지나고 중앙동3가와 관동3가를 지난 다음, 신포동에서 머뭇거리다가 송학동3가로 거슬러 갑니다. 다시 내동을 지나면서 내동 성공회성당 앞을 지나갈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하고, 지하상가를 건너서 답동성당 옆으로 지나갑니다. 답동성당을 옆으로 끼는 샛길에 늘 자동차가 두 줄로 서 있어서 다니기 나빴는데 지지난달에 시에서 드디어 거님길 공사를 해서, 걸어다닐 때 차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도록 바뀌었습니다.

 다시 율목동으로 들어서면서 머잖아 사라질 인천시립도서관을 옆으로 흘깃 바라본 다음, 율목공원으로 들어갑니다. 율목공원 들머리에서 길에 염화칼슘 뿌리는 할아버지를 보고는 “고생 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나이를 제법 많이 먹은 은행나무한테도 인사를 하고 나서, 율목동 안쪽 고즈넉한 집자리, ‘개조심’ 푯말이 붙은 마당가에서 서성이면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부랴부랴 신흥동2가 골목을 누비고, 다시 율목동과 유동과 경동이 엇갈리는 골목을 지납니다. 인천시에서 밀어붙이는 산업도로 공사터 옆을 지나는 길을 마지막으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 ‘본심을 알 수 없어서 타인이 무섭다는 말은 자주 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 정말로 바깥출입을 안 하게 되면서, 넌 이제 이대로 평생 틀어박혀 사는 건가 생각했거든. 하지만 다행이야. 마음이 편하다는 이유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선 안 된다는 걸 겨우 깨달았구나. 넌 다시 한 번 타인과 마주할 용기를 갖고 있었어.’ ..  (26쪽 - 호밀 100%의 호밀빵)


 집으로 돌아오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손은 꽁꽁 얼어붙었으나 등판에는 땀이 줄줄 흐릅니다. 속옷을 모두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아침에 신나게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모두 155장을 찍었습니다. 얼마 못 찍었습니다. 밥을 먹고 다시 마실을 나가야겠어요.

 아침부터 눈밭 골목길을 후들거리는 다리로 누비면서 몸이며 손발이며 고단하기 짝이 없지만, 눈구경을 하기 어려운 오늘날, 모처럼 눈발이 그치지 않고 흩날리는 이런 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눈구경이 어려우니 눈온 모습은 덜 찍거나 안 찍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아무리 우리 세상이 이렇게 뒤바뀌고 있다고 하여도, 어렵게 만나는 눈송이인데,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송이를 냠냠하면서 비알진 골목에서 미끄럼도 타며 놀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어서 오거라. 볼일은 끝났니?” “네. 저기,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오시면 같이 우리 집에 안 갈래요? 유부초밥 다 같이 함께 먹어요.” …… ‘난 단순하니까 괜찮아. (열심히 한 상이야) 그러니까 분명 또다시 힘을 내서 달릴 수 있어.’ ..  (56쪽 - 운동회의 유부초밥) 






 생각해 보면, 오늘은 아기와 옆지기가 집에 없으니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아기와 옆지기가 집에 있으면, 밥하고 빨래하고 뭐하고 하느라 바깥마실은 엄두도 못 냅니다. 아기와 옆지기가 한동안 처가에 가서 지내고 있으니, 보일러가 얼지 않도록 틈틈이 인천집으로 돌아와서 손보고, 고양이한테 밥 주고 하는 사이사이, 눈골목 사진도 찍고 밤골목 사진도 찍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기와 옆지기가 함께 있는 집에서는 아기와 옆지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여덟아홉 가지 곡식으로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면서는, 밥그릇과 찌개그릇을 사진으로 담고, 빨래 널어 놓은 옥상마당을 드문드문 사진으로 담습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할 때에는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고, 골목길 마실을 할 때에는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좋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으며, 자전거 타고 마실을 다니면 또 자전거 타고 지나다니는 길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살아가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깁니다. 살아가는 발자취가 고스란히 사진이 됩니다. 삶과 생각과 모습이 온통 사진으로 아로새겨집니다.


.. ‘난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과자는 맛있고 예쁘고, 다만 너무나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78쪽 - 일요일의 다과회 마카롱)
 





 오늘 눈골목 사진은, 그동안 봄 여름 가을 사이에 신나게 다니던 곳을 다시 찾아가면서 담았습니다. 이제까지 봄 사진과 여름 사진과 가을 사진은 수두룩하게 있으나, 겨울 모습을 말할 만한 사진이 없어서 짝을 이루어 놓지 못했는데, 오늘 다리힘이 쪽 빠지도록 돌아다니면서 비로소 마무리가 지어집니다.

 사진을 한 장 두 장 찍는 동안, 제 어릴 적, 이 골목 저 골목을 뛰어다니면서 놀던 일이 떠오릅니다. 골목길 동무들하고 놀던 일이 떠오르고, 중고등학생 때 시험공부로 밤늦게까지 붙들어매는 학교가 싫어서 주말이면 하염없이 골목길을 걷고 또 걸어서 다니던 일이 떠오릅니다.

 1992년에도 이 길을 걸었는데 그때나 이제나 마찬가지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1985년에도 이 골목에서 놀았는데 그때나 이제나 다르지 않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1982년과 1981년에 엄마 손을 잡고 신포시장과 송현시장과 신흥시장을 다녔지, 하고 떠올립니다. 이제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 2019년에 이 골목을 다시 거닐 수 있을지 모르고, 2029년에 아이와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 예전에 살던 집 둘레를 거닐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1981년이나 1992년은 그리 까마득한 옛날 같지 않은데, 2019년이나 2029년이 우리 앞에 다가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까마득한 앞날 같습니다. 그때까지 이 골목이, 우리 골목집이, 이웃 골목 삶터가 하나도 안 남아 있을 듯합니다. 오늘 하루 동안 담은 사진에만 남고 그예 없어져 버릴 듯합니다.
 





.. ‘상처 입힐 것 같아서 무섭다고 말하면서 히로야 오빠가 씻은 딸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히로야 오빠가 보물처럼 다룬 딸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 있지. 웃을 거 같아서 말하지 못했지만, 변신해서 인기를 얻는 것보다, 누군가를 사귀는 것보다, 난 사실은 이게 처음으로 하고 싶었던 것 같아. 지금 빠져 버린 ‘사랑’이라는 걸.’ ..  (100∼102쪽 - 히로야가 씻은 딸기)


 사진을 찍는 동안 등과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습니다. 손가락이 얼고 발가락이 얼었습니다. 그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저는 ‘사라져 가는 우리 고향’을 사진으로 담을 마음이 없는데, ‘잊혀져 가는 우리 옛 도심지’를 사진으로 찍을 생각이 아닌데, ‘추억이 되어 버린 우리 골목길’을 사진으로 박아 놓을 뜻은 없는데.

 사진에 하나둘 찍힐 때마다 ‘이야기’로 헤아리고 있습니다만, 다른 분들한테는 그저 ‘기록’이나 ‘추억’으로 느껴지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살아가는 발자국이며 살아온 손때인데, 낡은 집이고 ‘주거환경개선을 해야 하는 낙후된 지역’으로만 느끼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 ‘이젠 다 싫어. 알바 가는 것도 싫어. 시시한 공부도 싫어. 타카하시에게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싫어. 이젠 모든 게 다 싫어, 싫다고. 싫어. 싫어. 싫어.’ ..  (111쪽 - 종이박스 속의 말린미역) 






 눈을 쓸고 쓰레기를 치우는 몽당빗자루에 깃든 사랑을 사랑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이 몇 사람한테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쓸고 일곱 시에 쓴 다음 아홉 시에 또 쓰는 골목집 아주머니와 할머니들 손자취를 곱새길 수 있는 넋이 몇 분한테 살아 있을지 궁금합니다.

 사랑하니까 찍는 사진이고, 사랑하기에 찍을밖에 없는 사진이며, 사랑을 바치며 찍게 되는 사진인데.

 같이 살고 싶어 찍는 사진이고, 함께 살고 있으니 찍는 사진이며, 오순도순 모이고 어우러지면서 엮어내는 사진인데.


 (2) 사랑에 빠진 삶, 사랑을 그리는 삶, 만화 《여자의 식탁》


 만화책 《여자의 식탁》을 읽습니다. 지난해 8월에 아기를 낳은 뒤 다섯 달 동안 만화가게에 들르지 못해 그사이 새로 나온 만화는 하나도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그제 어렵사리 만화가게 나들이를 하면서 잔뜩 사들였는데, 마침 지난해 5월에 처음 옮겨졌다고 하는 《여자의 식탁》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4권까지 나왔고, 아직 줄거리와 맛을 알 길이 없기에 1권만 먼저 사서 읽습니다.


.. ‘처음으로 남자에게 안기면서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의 시간과 씁쓸한 첫사랑’ ..  (180∼182쪽 - 버스 정류장)


 그린이 ‘시무라 시호코’ 님은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서 사람들이 부대끼면서 어울리는 이야기를 ‘먹을거리 하나’에 따로따로 담아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책이름이 《여자의 식탁》이구나 싶은데, 밥상머리 먹을거리는 새삼스러운 요리이지만은 않습니다. 초콜릿 하나이기도 하고 딸기 한 송이이기도 합니다. 스파게티 한 접시이기도 하고, 운동회 때 먹는 유부초밥이기도 합니다. 차멀미를 막아 줄까 싶어 씹는 민트껌일 때가 있고,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혼자 대학교 다니며 알바하여 공부할 돈을 버는 아이가 고향 부모님이 보내 준 말린미역일 때도 있습니다.

 학교 앞 분식집 떡볶이와 순대로 옛생각을 되새기기도 하듯, 청어 한 접시나 삼치 한 접시로 옛사람 만나던 일을 떠올리기도 하듯, 눈물 젖은 막걸리 한 사발이나 도시락 한 그릇으로 어린 날 집식구와 옛동무를 그리워하기도 하듯, 《여자의 식탁》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먹을거리에 모든 삶이 담기고 모든 이야기가 스미며 모든 우리 발자취, 곧 우리 생활문화역사가 있음을 찬찬히 보여줍니다. 군더더기 없는 그림결에 부드러운 흐름으로 우리 마음결을 사로잡고 눈길을 촉촉하게 해 줍니다.

 사랑이란 시끌벅적한 사랑만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사랑이라면 누구한테나 마음속 깊은 데에 조용히 소담스레 보듬고 있기도 하다고 들려줍니다. 사랑이기에 옛사랑과 새사랑 가리지 않고 언제나 내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일으켜세우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곳에 튼튼하게 살아 있어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귀엣말을 합니다. (4342.1.16.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진을 찍는 기쁨, 찍은 사진 나누는 기쁨
 [사진은 삶이다 2] 사진을 찍는 당신한테



 아기를 품에 안고 나들이를 다녀도 사진기를 꼭 어깨에 걸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고 하여도 어깨에는 언제나 사진기를 걸칩니다. 동네 구멍가게에 보리술 한 병 사러 나가는 길에도 사진기는 들고 갑니다.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다니더라도 사진기는 목아지에 걸칩니다. 저한테는 사진기 담는 가방이 예닐곱 가지 있지만, 사진기를 가방에 넣는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필름사진기만 가슴에 메는 가방에 넣어 두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집 아래층 마당에 사는 길고양이한테 밥을 줄 때에도 사진기를 들고 내려가곤 합니다. 추운 날씨에 길고양이가 밥 달라고 야옹거리는 모습을 가끔 한 장씩 찍어 보곤 합니다. 고양이는 자기랑 놀아 주지 않고 사진만 찍는 저를 그리 좋아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도 밥은 잘 먹습니다. 



 방바닥에 이불을 두툼하게 깔고 있는 집에서 까르르거리는 아기를 사진으로 찍을 때면, 이 녀석은 꼭 제가 단추를 누를 때까지 잠깐 기다려 줍니다. 아기가 벌써 사진찍기를 알랴 싶습니다만, 어쨌든 한 장 찍혀 주고 노는 품새는 남다르다고 느낍니다.

 어제 아침에는 성당 나들이를 하다가 골목가게 담벼락에 꽁꽁 얼어붙어 있는 고드름을 보았습니다. 눈 구경도 어렵지만, 고드름 구경도 어려운 오늘날 도시 살림살이인데, 골목마실을 하면서 틈틈이 고드름을 만납니다. 고드름 찍는 사진에 겨울이 함께 담깁니다.

 송림동 구멍가게 앞으로는 해가 잘 들고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이 골목에서는 겨울을 날 만하다고 느끼는데, 우리들 이런 느낌과 마찬가지인지, 이 골목에 사는 분들은 빨래를 골목길에 널어 놓았습니다. 빨래가 얼지 않을까 걱정이기는 했어도, 이 골목에서 한두 해 사신 분도 아닌데, 얼어붙을 줄 안다면 처음부터 널지도 않았을 테지요. 골목길에 빨래를 널어 햇볕에 말리는 집은 사람 살기에 퍽 괜찮은 곳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중학교 아이들이 했을는지, 고등학교 아이들이 했을는지, 다른 사람 사는 골목집 담벼락에 스프레이를 뿌려서 짓궂은 장난질을 해 놓은 모습을 보다가는, 저 녀석들이 자기 집에도 저렇게 할까 싶어서 씁쓸합니다. 저 녀석들은 누구한테 이런 짓거리를 배웠을까요. 저 녀석들 아버지 어머니한테서? 저 녀석들을 가르친다는 학교 교사들한테서? 저 녀석들 손위사람이라는 선배한테서?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에서? 영화에서?

 우리 동네 성당 신부님이 오늘 마지막 미사를 올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우리 동네에 오래오래 머물면서 ‘배다리 산업도로’ 막는 일에 힘을 보태는 한편, ‘잘못된 동네 재개발’ 또한 막아내고 싶은 꿈이 있으나, 지역교구장이 보내는 데에 말없이 따라야 하기 때문에, 어쩌는 수 없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제 일요일을 맞이해 송별식을 하는 자리에서, 떠나는 인사를 하는데 울먹이시더군요. 떠나는 인사에서도 막개발 삽날 이야기를 다시금 한 마디 하십니다. 누구는 힘이 있는 자리에 있어도 아무런 힘을 안 쓰고 있는데, 누구는 힘이 있는 자리가 아닌 데에 있어도 작은 손길 모아 다부지게 애쓰고 있습니다. 





 ㅁ이라는 출판사에서 사진책을 두 가지 보내주었습니다. 뜻밖이라고 할 책인데, 제가 쓴 ‘사진 이야기’를 읽고 보내게 되었다는 편지가 책 사이에 꽂혀 있습니다. 두 장에 걸쳐 써 준 편지가 고마워서 꼼꼼하게 사진책을 읽어 나가는데, 한 권은 영 읽을 수 없다는 생각이 짙게 들어서 덮어 버리고, 다른 책 하나는 부지런히 읽어 끝마칩니다. 그렇지만 뒷맛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제법 도톰하게 나온 이 사진책, 가만히 따지면 사진책이라기보다는 ‘사진 몇 장 곁들인 수필책’인데, 책겉에는 ‘포토에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기도 하지만, ‘사진’도 아닌 ‘포토’라는 말을 이렇게 함부로 붙여도 될까,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이 책을 쓴 분은 ‘사진일을 하고’ 있습니다. 퍽 이름난 노래꾼들이 내는 음반에 쓰이는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고, 스튜디오도 꾸리며, 패션화보에도 사진을 싣습니다. 갈래로 나누자면 상업사진인데, 상업사진이라서 마뜩하지 않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상업사진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누구나 찍는 흔한 사진’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사진가 ○○○ 사진’이라고 할 만한 사진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딱 하나, 놀이공원 허니문카 찍은 사진은, ‘사진가 ○○○ 사진’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포샵질은 거의 안 한다고 하니 그만큼 사진기에 모든 눈과 마음을 쏟는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만큼 ‘자연스러운 사진을 좇는다’고 하면서, 이이가 찍는 사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사람 움직임과 사람 삶터를 담는지’까지는, 글쎄, 아직 나이 서른도 안 된 젊은이한테 너무 많이 바라는 셈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름을 앞세워 ‘포토에세이’라고 내놓고자 했다면, 나이 서른이고 스물이고 마흔이고 쉰이고를 떠나서, ‘나는 내 사진을 찍는 ○○○입니다’ 하고 느껴지도록 사진으로 보여주고, 사진에 붙이는 글로 함께 들려주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런 마음결이 되지 못한다면, 지난날 연예인으로 일했던 발자취에다가 요즈음 잘나가는 몇몇 노래꾼 사진을 찍어 주었다는 손자국으로 ‘책 팔아먹는’ 일을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요.

 그래도, 이이 수필책을 읽으며,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찍은 사진을 하나 넣어 주었기에, 책이 아주 밉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토록 어릴 때부터 사진을 좋아했고 즐기던 마음이었다면,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믿는 가장 가까이 있는 식구들부터 사진으로 담아내어 자기 목소리와 생각을 우리들한테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ㅈ’이니 ‘ㅌ’이니 하는 노래꾼들 사진만 수두룩하게 보여주지 말고,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살붙이 모습을 담은 사진을 좀더 골고루 보여줄 때, 자기 지난날과 오늘날이 우리들한테 한결 푸근하고 넉넉히 스며들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ㅁ출판사에서 보내준 다른 책은, 사진은 한 사람이 찍고 글은 문학쟁이 여럿이 돌아가면서 따로따로 썼습니다. 서울부터 제주까지, 우리 나라 도시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나서는 글과 사진을 함께 묶습니다. 저야 인천에 사는 몸이고,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니, 무엇보다도 인천 이야기를 맨 먼저 펼쳤습니다. 인천 이야기를 쓴 분은 인천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기는 했지만, 열 몇 해 앞서부터 서울로 옮겨서 살아가는 분입니다. 이분도 ‘인천에 새 연고지를 얻은 야구단보다, 떠돌이 신세인 야구단’에 한결 마음을 줄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천이 아닌 서울에 삽니다. 더욱이 인천에서 안 산 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이분이 들려주는 ‘인천이라는 도시’ 이야기는 자기로서는 머나먼 옛날, 1970년대와 1980년대 가운데무렵까지 머뭅니다. 오로지 추억을 말하고, 그예 추억만 곱씹습니다.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를 바라보는 인천사람들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제 오늘 내일로 이어지는 ‘인천이라는 도시’ 흐름과 발자국을 느낄 수 없습니다.

 꼭 글쓴이 탓은 아닐 터이나, 인천이라는 도시를 사진으로 담은 분도 ‘겉핥기 인천’ 사진만 담을 뿐,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다른 곳과 남다르거나 맛깔나거나 새롭거나 좋거나 나쁘거나 반갑거나 얄궂거나 훌륭하거나 어수룩하거나 한 모습을 잡아채지 못합니다. 그저 풍경입니다. 용산역에서 급행 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린 뒤, 막바로 택시 잡아타고 월미도에 달려가 놀이기구 몇 가지 타고 바가지 회를 소주 곁들여 몇 점 사먹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그런 구경꾼들이 바라보는 인천 풍경입니다. 





 책을 덮으면서 ‘제기랄’ 하고 내뱉으려고 하다가 도로 집어넣습니다. 모르는 사람한테 ‘넌, 그것도 모르냐, 이 바보야, 이 멍청아, 이 밥통아, 이 머저리야!’ 하고 나무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음, 당신은 아직 모르시는군요.’ 하면서 일러 줄 수는 있는 노릇이지만, 모르는 사람한테 모름을 깨우쳐 주려 해도, 이이들 스스로 ‘우리가 못 보는 모습을 알려주셔요.’ 하면서 찾아올 때까지는 어떠한 이야기도 소 귀에 읽는 불경일 뿐입니다. 항구가 있으면서도 항구도시가 아니고, 프로야구단 두 곳이 인천에 뿌리를 둔다고 하지만 둘 모두 인천에 뿌리를 두었다고 하기 어려운 인천입니다. 나라안에서 맨 먼저 철길이 놓였고 고속도로가 첫 번째로 놓였으며 전화며 기상대며 보통교육기관 또한 맨 먼저 생기고 극장도 맨 먼저 열린 인천입니다. 그러나 방송국 하나 없고(지난해에 비로소 오비에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생겼습니다. 그러나 중앙방송사 지역본부는 인천에 한 군데도 없습니다. 광역시치고 지역본부가 없는 오직 한 군데이며, 작은 시군에조차 지역본부가 열려도 인천에만큼은 열리지 않습니다), 지역신문사는 지역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데다가, 지역 국회의원이 지역일에는 나 몰라라 합니다. 독재정권한테 사랑받아 무시무시한 재단을 꾸리던 군인한테서 지역교육권을 도로 찾아(선인재단) 시립으로 삼기는 했어도 국립대학이 없는 인천이고, 경기도 권에서 교통카드 ‘환승할인’이 안 되는 딱 한 곳인 인천이며, 전국에서 공기가 가장 나쁜데에도 전국에서 재개발 공사를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인천입니다. 이런 인천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할 때에는 어떤 눈길과 마음길과 생각길로 다리품을 팔고 손품을 팔아야 할까 궁금합니다. 인천 바닥에서 인천을 사진으로 담는 이들과, 인천 바깥에서 인천을 사진으로 찍는 분들한테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무슨 사진이 인천을 말하는 사진입니꺼. 





 새벽 네 시 사십오 분부터 들리고 있는 전철 오가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깨어 있습니다. 부엌 개수대 물은 간밤에 얼어붙어 녹을 낌새가 없습니다. 그래도 씻는방 물은 얼지 않았습니다. 보일러도 터지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집안은 영 도 밑으로 네다섯 걸음쯤 되지 않을까 싶어도 잠자는 방은 그럭저럭 불을 넣어 지낼 만합니다. 한숨을 돌립니다.

 언손을 이불 밑에 넣어 비비면서 어제그제 찍은 사진을 살펴봅니다. 오늘 아침 다시 성당 나들이를 하여, 떠나는 신부님이 올릴 마지막 미사를 사진에 담고 시디로 구워서 선물로 드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찍은 세례하는 모습 사진도 시디로 구워서, 세례받은 분한테 하나씩 드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앞서 찍은 동네 이웃 아주머니 사진도 종이로 뽑아서 한 장씩 드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기를 그림으로 그려 준 여든일곱 그림할머님을 틈틈이 찍어 놓았던 사진은 어제 찾아가 뵙고 건네드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음성에 살고 계신 부모님한테도 아기 사진을 뽑아서 부쳐야겠네요. 사진은 뽑긴 했는데 아직 안 부치고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 성당이며 우체국이며 이웃집이며 들를 곳이 많습니다. 들러서 사진을 하나하나 나누어 드리면서 또다시 새 사진을 찍을 테고, 다음에 다시 사진을 드릴 때면 또다시 새 사진을 찍을 테지요. 다시 한 번 씻는방 물을 틀어서 흐르게 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머리 감고 길을 나서야겠습니다. (4342.1.12.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이란 무엇인가 - 최민식, 사진을 말한다
최민식 지음 / 현실문화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67 ―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 사진’일 뿐
 : 최민식, 《사진이란 무엇인가》


- 책이름 : 사진이란 무엇인가
- 글ㆍ사진 : 최민식
- 펴낸곳 : 현문서가 (2005.6.20.)
- 책값 : 12800원



 (1) 삶과 삶, 또 삶과 삶


 아기가 하루에 네 번쯤 똥을 누면 참으로 괴롭습니다. 날이 더운 여름날이라면 더위를 식힌다며 찬물로 벅벅벅 문질러 빨 텐데, 손도 몸도 꽁꽁 얼어붙는 겨울이면 에휴 하는 한숨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그나마 찬물로 빨면 온 손가락과 손바닥이 쩍쩍 얼어붙으며 벌겋게 되기에, 보일러를 돌려 방을 덥히고 따순 물을 쓰면서 빨기는 하는데, 이렇게 빨래를 해도 얼어붙는 손은 녹지 않습니다. 똥기저귀 빨래가 아니더라도 날마다 몇 시간쯤은 씻는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기저귀며 옆지기 옷가지며 부지런히 빨아야 하니 몸이 축나고 마음이 지치고 머리는 텅 비어 버립니다.


.. 리얼리즘 사진은 ‘사진을 위한 사진’이 아닌 ‘삶을 위한 사진’이다 … 리얼리즘 사진은 형식주의와는 달리 사진을 현실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 … 내용과 긴밀하게 얽히지 않은 형식적인 사진은 공허하다 ..  (15∼16쪽)


 고단함은 빨래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가 깃들인 집은 바람막이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불을 넣지 않는 방은 영 도 밑으로 떨어집니다. 어디 산골짝 집도 아니건만 이렇게 추운 집일 수 있으랴 싶은데, 돈없고 집없는 살림살이로서는, 한데에서 별도 안 보이는 칙칙한 하늘을 이불 삼지 않는 일로도 고마워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불 때는 방은 바닥이나마 뜨시고 이불이라도 덮으면 입김 콧김 서리기는 해도 얼어죽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방이 춥다고 해도, 또 집이 썰렁하다 해도, 기저귀 빨래라도 잘 말라 주면 좋을 텐데, 기저귀 빨래는 날이 춥고 집도 추우니 제대로 안 마릅니다. 열 시간쯤 널어 놓아도 마를 낌새가 없고 열다섯 시간쯤 가만히 널어 놓아도 안 마릅니다. 다 말려서 개 놓은 기저귀가 꼭 한 장이 남을 무렵 하는 수 없이 다리미로 말립니다. 바깥일 하랴 집일 하랴 기저귀 빨래 하랴 뭐 하랴 이거 하랴 저거 하랴, 그야말로 눈코 뜰 사이가 없습니다. 그 좋아하는 ‘헌책방 나들이’조차 한 주에 한 번은커녕 두 주에 한 번조차 못하면서 살게 됩니다. 견진성사까지 받은 천주교 신자가 된 몸이지만, 미사 드리러 가지도 못합니다. 내 코가 석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날이고 요일이고 어떻게 가는 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인간이 사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사진작가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사진을 위해 꾸준히 이념과 소재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 아무리 표현기법이 뛰어난 사진이라고 해도 내용이 뚜렷하지 않다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그런 사진에서는 힘을 느낄 수 없으며 가치 있는 사진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  (30∼31쪽)


 옆지기는 지난 12월 7일에 아기 유아세례를 받게 된다고 기뻐하며 당신 어머님한테도 전화를 하고 대모 설 동무한테도 전화를 했습니다. 날짜를 받고 나서 당신 어머님과 전화를 하다가, 아기가 세례 받는 날이 자기 지아비 난날임을 알게 됩니다. 당신 어머님이 “그날 니 남편 생일 아니야?” 하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지아비 된 제가 옆지기 난날이라 해서 더 기리거나 사랑해 주는 일이란 없습니다. 옆지기 어머님한테 고마워하고, 그동안 얼마나 애쓰셨을가를 돌아볼 뿐입니다. 제 난날이라고 하는 12월 7일도, 지어미 된 옆지기가 더 마음쓰거나 기뻐해 줄 일이란 없습니다. 그저 우리 어머니한테 전화라도 걸어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고, 우리 아기가 이 추위에도 모쪼록 튼튼하게 버티어 내면서 씩씩하게 자라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 러셀 리(1903∼1986)는, 사진이 시대적 소명에 무관심하다면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사진작가 이전에 한 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 모든 작품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창조했다 ..  (170쪽)


 사진 일감 때문에 서울 나들이를 하던 어느 날 저녁입니다. 사진 일감은 모두 아홉 사람한테 같은 이야기감을 던져 주면서 맡겼는데, 뚜렷한 듯하지만 하나도 뚜렷하지 않은 사진감이고, 함께 사진 찍을 다른 분들 사진이 저로서는 하나도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 사진이 이분들보다 빼어나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하나같이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저는 한 가지 사진감을 깨닫고 부지런히 사진찍기를 하게 된다고 하면, 적어도 열 해쯤은 그 한 가지 사진감을 파헤치고 캐내면서 이야기를 엮어야 비로소 성에 찰까 말까 한다고 느끼는데, 고작 다섯 달쯤 시간을 주면서, 일삯도 아주 조금 건네며 사진을 찍으라고 하니, 제가 무슨 노예도 기계도 아니고 고달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나마 그런 사진 일감이나마 받아 아쉬운 살림돈으로 쓰자고 생각하기도 했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맡게 되더라도 그 짧은 동안 한 가지 사진감을 내 깜냥껏 파헤치면서 공부를 해 보자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어날 저녁 두 번째 모임을 하는 동안, 또 모임을 마치고 저녁밥을 함께 먹는 동안 몹시 슬펐습니다. 다들 사진으로 먹고살고 있을 뿐 아니라 사진을 좋아한다고 하는 분들인데, 밥자리에서 어느 한 마디도 ‘사진 이야기’를 하지 않더군요. 모두들 사진을 아주 잘 알아서 그런지, 세계 온갖 나라 사진책이며 사진 문화를 훤히 꿰뚫고 있기에 굳이 할 말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릅니다. 어쩌다 보니 어제 서울 나들이를 할 때, ‘토몬 켄(土門 拳)’이라고 하는 일본 사진작가 두툼한 사진책 하나를 들고 가게 되었는데, 이 사진책을 알아본 분은 열세 사람 가운데 딱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 사진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가장 정확히 표현하는 예술 분야이며, 그 바탕에는 리얼리즘 정신이 깔려 있다. 따라서 진실한 사진이란 사진작가가 끊임없이 현실을 발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사진작가는 항상 세상일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젊은 사진작가들은 인간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채 의미 없는 사진만을 창조한다. 치열한 고민과 노력 없이 창조된 사진의 생명은 매우 짧을 것이다 … 사진은 이제 특정인의 성역이 아니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예술 분야가 되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찍은 사진은 개성적이라기보다는 무분별하게 미적 가치의 혼란만이 보인다. 대상에 대한 따뜻한 애정 없이 맹목적으로 찍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사진을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 진실한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자신에게 항상 던져야 한다 ..  (4, 33쪽)


 뭐, 일본 사진작가가 그리 훌륭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토몬 켄이든 아무개든 일본에서 내로라 해 보았자 한국 사진밭하고는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다른 이 사진책을 보거나 말거나 자기 길만 꿋꿋하게 걸어가도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그 추운 날, 두 손이 꽁꽁 얼어붙어 가면서도 그 사진책을 한손으로 들고 길을 걷는 내내, 슬프면서 쓸쓸했습니다. 사진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서, 사진이 참으로 좋다고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어서, 사진에 죽고 사는 사람을 보지 못해서, 사진 찍으면서 산다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어깨나 손에 사진기를 들고 있지 않아서.


.. 단순한 경치는 쉽게 찍을 수 있지만, 강렬한 호소력이 담긴 풍경사진을 찍는 데에는 작가의 개성적인 표현과 기법이 뒤따라야 한다 ..  (56∼57쪽) 






 (2) 사진과 사진, 또 사진과 사진


 여러 달 앞서부터, 제 사진감인 헌책방을 찍을 때, 더는 필름을 쓰지 말고 디지털로만 찍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단골로 가는 사진관이 너무도 힘들다면서 가게를 줄이고 줄여, 앞으로는 아예 가게마저 접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암실을 따로 마련할 겨를이 없으며, 암실보다는 사진관 사람들하고 가까이 지내기를 바랍니다. 사진관 사람한테 필름을 맡기는 가운데, 내 일(사진찍기)이 나뿐 아니라 다른 이가 보기에도 그럴싸하게, 아니 무언가 느낌이 올 만큼 받아들여지는지를 배우고 되씹습니다. 사진관 사람과 현상소 사람이 제 필름을 보면서 ‘이런 사진감으로 용쓰는 사람도 있군’ 하고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 사진을 좋아하는 이들이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진감 하나 남달리 찾아내어 오래오래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만, 지금 쓰는 필름사진기는 디지털사진기보다 눈(화각)이 넓기 때문에, 디지털로는 못 담아내는 넓은각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필름사진을 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돈이 어느 만큼 모이면 파노라마 사진기를 장만할 꿈을 꿉니다. 치수는 6×17짜리 넓은 녀석으로. 그러나 웬만큼 돈을 모아 놓기는 했어도, 사진관에 지지난해부터 ‘파노라마 6×17 들어오면 연락해 주셔요’ 하고 부탁하고 있으나, 영 소식이 없습니다. 이제 35미리 필름사진은 접고 중형필름 쓰는 파노라마하고 디지털 두 가지로만 사진을 찍고 싶은데, 우리 나라에서 사진 찍는 형편으로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 인물의 표정을 찍는 일은 쉽다. 그러나 무언가 메시지를 지닌 얼굴과 몸짓이 들어 있는 사진을 찍기는 힘들다. 훌륭한 인물사진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 인물사진에 작가의 체험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물사진 속에는 한 시대의 삶의 지표나 사상을 집약한 한 인간의 삶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 주제가 되는 인물은 우리들이 사는 사회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을 발굴하는 것이 사진작가 자신이 살아가는 지침이 되기도 한다 ..  (74∼75쪽)


 때때로 이런저런 이름난 연예인들이 값나가는 사진장비로 손장난 하는 듯한 사진놀이를 하면서 책도 내고 전시회도 여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런 책을 보고 저런 전시회를 들여다보면, 세상은 부자와 가난뱅이로 나뉘어 20:80으로 갈리기도 하지만, 이런 갈라짐이 경제만이 아니라, 또 정치만이 아니라, 문화며 예술이며, 글이며 그림이며 사진이며 노래며, 모두 갈리지 않느냐 싶습니다. 손장난 하는 사람한테는 값나가며 좋은 장비들이 곰팡이랑 벗하고 있고, 사진에 목매달고자 하는 사람한테는 애써 여러 해에 걸쳐 돈푼을 모았어도 장비를 장만하기가 하늘에 달린 별 따기와 같고. 우리 삶을 밝혀 준다고 하는 훌륭한 작품 남긴 이들은 그리 비싸지 않을 뿐더러 ‘참 흔한’ 장비로 사진을 담아내지만, 세상에 이름 높거나 거룩하다고까지 하는 사진 장비 쓰는 한국 사진쟁이가 꽤 되지만 이분들이 남기는 사진은 ‘참 흔한’ 흉내내기에 머물고.

 한손에는 한 가지만 쥘 수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구나 하고 느낍니다. 저로서는 한손에 사진기만 들 뿐, 돈을 들지 못합니다. 저로서는 사진기로 할 수 있는 사진창작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이와 달리 한손에 돈을 들고 있는 이들은 이 넘치는 돈으로 때때로 사진장비도 사들여 사진놀이를 하지만, 이들한테는 시간때우기나 시간죽이기와 같은 장난질이지, 사진으로 흐뭇하고 사진으로 기쁘며 사진으로 아름답고자 하는 나눔으로 거듭나지 못해요. 좋거나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진장비를 쓰는 겉치레 사진쟁이들이라 해서 부러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 일상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사진작품으로 남겨야 한다. 사진은 시대와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진실한 삶의 길을 비추는 힘이 있어야 한다 ..  (96쪽) 






 졸려서 눈이 벌건 아기가 우애우애 칭얼거립니다. 아기 기저귀싸개를 햇볕에 말리려고 옥상마당에 널었더니 다른 빨래와 함께 꽁꽁 얼었습니다. 엊저녁과 어젯밤과 새벽과 아침에 빤 기저귀싸개 넉 장이 아직 안 마릅니다. 아기 외삼촌이 열세 해 앞서 쓰던 녀석이 둘 있고, 우리가 새로 산 녀석이 둘에다가, 이웃이 선물해 준 두 장이 있어, 가까스로 아기한테 대어 줍니다. 지금 살림살이로서는 새 기저귀싸개를 더 살 수 없을 뿐더러, 더 사는 일은 몇 달 쓰고 말 테니 돈이 아깝습니다. 그래도 이웃한테 다시 선물해 주면 아깝지는 않을 텐데, 지금 우리한테 있는 여섯 장을 선물해 주어야지, 또 새 물건을 사는 일은 달갑지 않습니다.

 그래, 어쩌면, 이 기저귀싸개와 사진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군요.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쓰고, 아쉬우면 아쉬운 가운데 내가 뽑아내고 빚어낼 수 있는 만큼 온힘을 다하여 새로운 눈길과 이야기를 엮어내면 된다고. 골목길이며 헌책방이며 파노라마사진기를 써서 담아내면 한결 빛이 나고 그윽할 수 있겠지만, 장비를 고루 갖추었다고 하여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장비는 고작 낡은 녀석 하나뿐일지라도, 이 낡은 녀석 하나를 고이 보듬고 손질하면서, 이 낡은 녀석으로 찍어낼 가장 멋지고 아름다울 사진을 걱정하고 찾아나서는 일이 훨씬 뜻있고 보람있지 않느냐 다짐합니다.


.. 다큐멘터리 사진의 목적은 삶을 배우는 데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사회구조 및 제도, 그리고 환경을 배우는 것이다 ..  (134쪽)


 하기는. 언제 제가 돈이 넘쳐서 사진을 찍었느냐 싶습니다. 필름값 없어 쩔쩔매는 가운데에도 값싼 필름은 안 쓰고 먹고살 돈을 바쳐 비싸면서 좋은 필름을 사고 배를 곯으며 사진을 찍지 않았느냐고 돌아보게 됩니다. 변두리에 싸구려 허름한 방을 얻어서 살고, 사진과 책에만큼은 있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살아오지 않았느냐고 되새기게 됩니다. 바쳐야 보이고, 바쳐야 이루며, 바쳐야 껴안습니다. 내 삶을 모두 내맡기면서 밑바닥부터 배우고, 내 마음을 모조리 내놓으면서 구석진 그늘자리까지 익히며, 내 품과 시간을 깡그리 내주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할 수 있게끔 곰삭여내지 않았느냐 싶군요.

 몇 천 원짜리 1회용사진기를 사려고 선배한테 돈 몇 푼 빌어 편의점에서 겨우 장만하여 찍은 사진이, 몇 백만 원 하는 장비로 으슥거리며 찍은 사진학과 대학생이 찍은 사진보다 낫다며 제 어깨를 토닥여 준 사진밭 어르신들 말씀을 새삼스레 곱씹어 봅니다. 






 (3)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하는 책


.. 어린이를 주제로 한 작품은 많지만 내용이 부족하다. 대상의 본질에 직접 다가가지 못해서다 ..  (258쪽)


 1957년부터 사진을 찍어 온 최민식 님은, ‘사진 찍는 다리품과 손품 쉰 해’가 될 무렵, 당신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사진쟁이 최민식이 사진 찍어 온 길’을 들려주는 책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펴냈습니다.

 이제는 저도 사진길을 걷고 있기에, 최민식 님은 큰스승이거나 앞선 어른이기도 하지만, 길동무이거나 길잡이이기도 합니다. 최민식 님 사진을 보면서 고개숙여 배우기도 하지만, 최민식 님 사진에서 어느 대목이 돋보이고 어느 대목이 낮보이는지를 제 나름대로 느낍니다. 한국 사진밭에서 최민식 님 사진이 어느 만한 자리에 놓이는가를 돌아보기도 하는 가운데, 내 깜냥으로 최민식 님한테 배울 대목이 무엇이고 최민식 님한테서 보여지는 아쉬움이나 모자람이 무엇인가를 곱씹습니다. 앞서 크게 발자국 남기며 걸었던 사람을 좇아 걸으면서 한편으로는 수월하고 고맙고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또한 제 뒷사람한테 이렇게 큰 발자국 남겨 주어(또는 작은 발자국이나마 남겨 주어) 뒷사람한테 수월함과 고마움과 기쁨을 느끼도록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최민식 님은 최민식 님대로 우리 사진밭에 비어 있는 자리를 알뜰히 채웠고, 저는 저대로 우리 사진밭에서 따돌림받거나 뒤로 내밀린 자리를 차곡차곡 채우면 됩니다. 제 뒷사람들은 뒷사람들대로 스스로 느끼는 아쉬움과 모자람을 보듬거나 손질하면서 더 훌륭하게 거듭나면 될 테고요.


.. 사진은 대상을 설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영역을 드러내 주는 수단이다. 감정의 영역을 감상자들에게 보여주는 방법은 작가 스스로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다. 좋은 사진작품은 작가 스스로가 삶을 충실히 살고, 자신의 작품에 일관된 철학을 반영할 때 나온다 ..  (248쪽) 






 똑같은 사람을 찍어도, 최민식 님은 ‘人間’을 찍고, 저는 ‘골목사람’이나 ‘헌책방사람’을 찍습니다. 똑같이 사진기를 들이대어도, 최민식 님은 ‘人間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찍고, 저는 ‘골목사람은 이렇게 살고 있어요’ 하는 생각이나 ‘헌책방사람은 이렇게 살아가요’ 하는 생각으로 찍습니다. 똑같이 사진말을 붙여도, 최민식 님은 ‘人間 存在 探究’를 하시고, 저는 ‘골목집 살림 살피기’와 ‘헌책방 살림 살피기’를 합니다.

 최민식 님 사진길과 제 사진길은, 같은 듯하면서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 같습니다. 사진에는 똑같이 사람이 찍히지만 사람이 찍히는 짜임새가 다릅니다. 다 다른 동네 다 다른 자리 다 다른 사람을 찍지만, 한결같이 사람 삶터에서 복닥이는 가운데 사진을 찍습니다. 최민식 님은 한쪽 어깨가 무너지도록 사진장비를 짊어지고 다니셨지만, 저는 무릎이 나가도록 자전거를 타면서 사진기를 쥐었고, 어깨와 등허리가 휘도록 헌책방에서 고른 책을 가방에 가득 담고 집까지 땀 뻘뻘 흘리며 걸어왔습니다.

 책을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도서관 책꽂이에 잘 보이도록 꽂아 놓은 최민식 님 사진책을 쓰다듬습니다. 최민식 님은 앞으로 당신 삶을 마칠 때까지 사진기를 손에서 놓지 않으시리라 봅니다. 저도 제 삶을 마칠 때까지 사진기를 손에서 놓을 날은 없으리라 봅니다. 최민식 님은 꾸준히 사진을 찍었던 만큼 꾸준히 사진책을 펴냈지만, 알고 보면 당신이 찍은 사진 가운데 아주 조금만 책으로 묶어 냈을 뿐입니다. 저는 아직 제 이름으로 된 사진책이 없는데, 먼 뒷날 사진책을 펴내게 된다 한들 그동안 찍은 사진 가운데 몇 점이나 넣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최민식 님 모든 사진을 골고루 살펴보거나 맛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제까지 그러모은 당신 사진책을 뒤적이면서, ‘사람을 사랑하여 사람을 사진에 담은 최민식’ 넋과 얼을 느낍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찍을 수 없던 사진이었다고 느끼고, 1928년에 황해도에서 태어나 부산을 바탕으로 사람을 사랑하던 사진쟁이 매무새를 느낍니다. 그러면, 1975년에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을 바탕으로, 또 헌책방을 바탕으로 사람과 책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책벌레요 사진벌레인 제 매무새는 사진에 어떻게 담기게 될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러면서, 사진사랑 쉰 해를 넘어 사진사랑 예순 해에 가까워지는 큰 어른이 있으니, 나도 이에 못지않게 쉰 해나 예순 해 가까이 골목사람 사랑과 헌책방사람 사랑으로 사진길을 꿋꿋하게 이어나가자고 거듭 다짐하고 곱씹습니다. (4342.1.11.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사진은 오도엽 님이 찍었고,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보내 주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과 함께 있는 사진은 누가 찍었는지 잘 모른다고 합니다.)  




 이 책 하나 87 ― 이소선은 ‘어머니’, 전태일은 ‘아들, 형, 오빠’
 : 오도엽,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책이름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소선 여든의 기억
- 글 : 오도엽
- 펴낸곳 : 후마니타스 (2008.12.5.)
- 책값 : 12000원



 (1) 이야기를 나누는 삶


 아기 엄마는 아기를 어르며 함께 놀 때 끊임없이 노래를 불러 주고 이야기를 건넵니다. 아기 할머니도 아기를 어르며 함께 놀 때 부지런히 노래를 불러 주고 말을 붙입니다. 아기 이모도, 아기 아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 외삼촌은 아직 노래나 말걸기를 그닥 하지 않지만, 아기를 귀여워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어느 어버이이든, 자기 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동안 쉴 틈 없이 달래고 안고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합니다. 이렇게 살과 살이 맞닿으면서 함께해야 아이는 사랑을 느끼고 믿음을 받으며 튼튼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아이 돌보는 일은 다른 누구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아이와 한식구라고 느끼는 이들이 다 함께 돌보아야 합니다. 아이 엄마와 아이 아빠 가운데 어느 한쪽이 도맡을 수 없습니다. 맞벌이하느라 바빠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맡긴다거나 돈을 주고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먹이는 밥은 어버이 사랑이 담겨야 하고, 아이한테 입히는 옷은 어버이 믿음이 스며야 하며, 아이하고 놀며 지내는 집은 어버이 삶이 깃들어야 합니다. 때때로 어쩔 수 없이 돈을 주고 남한테 맡긴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거의 모두 핑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하나하나 헤아리면 아이 키우기뿐 아니라 밥하고 빨래하고 치우고 하는 집일부터도, 나아가 밥거리와 옷거리를 마련하는 일부터도, 돈을 벌든 곡식을 벌든 땀흘려 애쓰는 일거리부터도, 우리 스스로 하고 우리 몸을 움직여서 해야 합니다. 누가 해 줄 수 없는 일이며, 누가 즐겨 줄 수 없는 놀이입니다.


.. 전태일과 이소선은 밤마다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피를 토하던 미싱사 이야기, 배고픈 시다들 이야기, 헌옷을 사고팔던 이야기, 사람을 만날 때 기쁘고 슬펐던 이야기……. 이소선은 그 밤과 그 이야기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잠들지 못한다 … 태일은 아무리 피곤해도 집에 오면 이소선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다, 이소선이 말을 하면 ‘그랬군요’ ‘힘드셨겠네요’ ‘잘하셨어요’하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태일이도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이소선에게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태일은 옳은 게 무엇인지, 그른 게 무엇인지 조리 있게 말할 줄 알았다. 어린 여공들이 졸린 눈을 비벼 가며 일하다 다리미에 화상을 입은 일이며, 먼지가 많은 곳에서 일하다 보니 폐병에 걸려 피를 쏟으며 병원에 가는 이야기, 작업반장에게 욕먹고 훌적이는 이야기……. 태일에겐 그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  (34, 35, 53쪽)


 하루 내내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아이 눈높이에 맞게 놉니다. 아이가 우리 어른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는 모릅니다. 말길을 모두 알아듣든 말든, 아이가 마음으로 어버이 사랑을 느끼고 어버이 믿음을 새길 수 있으면 넉넉하다고 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또 새로운 아침부터 새로운 밤까지, 그리고 다시 새로운 아침부터 새로운 밤까지, 내내 옆지기하고 붙어 지냅니다. 집에서 일하고 집에서 살림을 꾸리고 집에서 아기와 함게 노니 늘 함께 있습니다. 저잣거리 마실을 가도 함께 다니고,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어도 함께 움직이며, 책방 나들이를 해도 함께 돌아다닙니다. 요사이는 아기 때문에 때때로 혼자 다니게 될 일이 생기는데, 혼자 다니게 되든 함께 다니게 되든 부지런히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찻길이 시끄러우면 입을 닫아야 하고, 먼지 뿌연 길가를 지날 때에도 입을 막아야 하지만, 많이 꺼내고 나누는 말이 못 될지라도 늘 보고 지내는 사이라 해도 이야기를 나눕니다.

 “배고파? 밥할까?” 하는 이야기부터, “오줌 눴네. 기저귀 갈아야겠네.” 하는 이야기까지, 그저 말없이 지나칠 수 있는 일이 많지만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옆지기는 잠깐 옥상마당에 나가 머리카락을 빗으면서 아래층 옥상마당에서 노는 길고양이를 부르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기한테 고양이하고 이야기나눈 일을 또 이야기합니다. 그림책을 펼치며 읽어 주기도 하고, 아기가 끼악끼악 소리를 질러대며 좋아하면, 그림 하나하나가 어떤 모습을 담아냈는지 찬찬히 거듭 들려줍니다.


.. 형사들은 이소선이 마치 간첩인 것처럼 동네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뜨렸다. 이소선의 집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엄포를 놓았다. 남산동 화재 이후 십수 년을 함께 울고 웃고 하던 이웃들이라 이소선을 간첩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소선 집 앞에 초소까지 세워 두고 감시하는 판이라, 동네 사람들은 순덕이가 혼자 있는 줄 알면서도 들여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  (168쪽)


 어제 낮, 동네 이웃집에 갑니다. 우리 동네 골목집과 골목집 사이를 쪽 째어 인천 서남쪽 새도시와 인천 서북쪽 새도시를 잇는다는 ‘1자로 된 산업도로(알고 보면 고속도로)’를 반대하는 일에 처음 불씨를 당긴 아주머니 세 분이 모여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짚는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옆에서 이 이야기를 녹음하고 타자로 받아 옮깁니다. 세 시간 남짓 손 아프고 팔 아프도록 타자로 옮기는데, 아주머니들은 산업도로와 얽힌 인천시 공무원들 안타까운 모습을 꾸짖는 가운데, 부지런히 당신들 삶을 끄집어내어 나눕니다. 항암치료 받던 이야기, 당신 늙으신 어머니 돌아가신 이야기, 당신들 어머니가 거쳐간 그 환갑 나이에 이제 당신들도 접어들게 된 이야기, 당신들 아이 키우는 이야기, 이 동네에서 살아온 이야기, …….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일과 일로 만나는 사이라 해도, 사람과 사람으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일 때문에 전화를 걸어도 안부를 한두 마디 묻곤 하며, 일 때문에 편지를 쓰더라도 안부인사를 꼭 넣습니다.

 그저 인사치레라 할 수 있지만, 한낱 인사치레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딱딱한 기계가 아니라 포근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서 나누게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낯모르는 사람이건 낯익은 사람이건, 누구나 우리 이웃이며 우리 동무이며 어버이이자 동생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고받게 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 “남들이 다 장기표 욕을 한다 해도 나는 절대 못한다. 난 장기표 편이다. 진짜 잘됐으면 한다. 정치에 뛰어들었으니까 정말 국회의원 뱃지라도 달았으면 한다. 김문수처럼 한나라당에 들어가서 대가리 숙이더라도 국회의원 한번 했으면 좋겠다.” “진심이야?” “썩을 놈, 꼭 그 따위로 말하지.” 장기표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내게 이리 말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소선은 진심이다. 김문수에 대해서도 그렇다. 한나라당에 갔다고, 하는 꼴이 개판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텔레비전에 김문수가 나온다면 볼륨을 높인다. “효도하던 자식이 불효한다고 내칠 수 있냐. 만나서 야단치고 달래고 회초리를 들기도 하고 어르기도 해야지. 또 잘난 자식 있으면 못난 자식도 있는 법 아니냐.” 자식 앞에 약해질 수밖에 없는 여느 어머니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이소선을 아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그리 말해도 이소선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소선에게는 장기표도 김문수도 모두 친자식과 같다. 한 번 맺은 인연은 절대 버리지 못하는 ‘보통 어머니’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소선은 ‘투사 이소선’도 ‘노동운동가 이소선’도 ‘민주 인사 이소선’도 아닌, 그냥 ‘어머니 이소선’에 평생 머물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고 그래서 존경한다. “손가락질을 해도 어쩌냐. 나한테는 태일이만큼 소중한 사람들인데 말이야.” ..  (178쪽)


 아기랑 쉴 새 없이 이야기 나누는 옆지기는 아기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까요? 글세, 알아들으려나? 거꾸로 보면, 아기는 우리 어른들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지 모를 노릇이고, 외려 우리 어른들만 아기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지 모릅니다. 아기들은 끊임없이 지 어버이한테 말을 거는데, 우리 어버이 된 사람들은 ‘옹알거리지만 말고 말을 해야지’ 하면서, 옹알거림에 담긴 속내와 이야기는 알아채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2) 민주가 없는 나라에는 평등도 평화도 없는데


.. “지금 민주네 무슨 봄이내 하며 박정희의 죽음에 들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다시는 독재가 활개를 치지 못하게 끝장을 내야지요. 나는 우리가 싸우지 않고는 절대 민주주의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독재놈들이 민주주의를 낼름 내줄 것 같습니까. 절대 호락호락 내주지 않습니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입으로만 떠들 때가 아닙니다. 난 배우지 못했지만 싸워야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  (183쪽)


 올해 중학교에 들어가는 처제는 학교옷을 맞추어야 합니다. 일산에 있는 중학교는 거의 모두 학교옷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인천에 있는 중학교 아이들도 거의 모두 학교옷을 입지 싶습니다. 인천뿐 아니라 서울도 거의 다, 아니 우리 나라 전국 곳곳에 있는 학교라면 으레 학교옷을 맞추게 하여 입힙니다. 학교옷을 안 맞추게 하는 학교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학교옷을 맞추어서 입어야 한다는데, 학교옷 값은 장난이 아니도록 비쌉니다. 온삶에 걸쳐서 입는 옷이 아니요, 고작 세 해 입고 버려지는 옷임에도 싸야 20만 원이고, 50만 원을 웃돌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옷값은 학교에 보내는 어버이가 모두 짐을 져야 합니다. 반드시 학교옷을 입혀야겠다면 입힐 노릇이지만, 이와 같은 옷은 옷을 입히려는 학교나 나라(정부)에서 대주어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개인옷을 입도록 한다면 마땅히 개인이 마련해야 할 일이고, 학교옷을 입도록 한다면 마땅히 학교가 마련할 일이 아닐까요. 어느 회사에서 회사옷을 개인이 사서 입으라고 합니까. 회사를 다니면서 입는 일옷은 회사가 대어 줍니다. 맞추어 줍니다. 마땅하지요. 그 회사를 돋보이게 하든, 그 회사에 있는 동안 잘 알아보도록 할 생각이든 회사는 회사 몫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학교는 학교 몫이 있어요. 아이들이 입을 학교옷은 학교에서 사들여서 아이들 몸크기에 따라 나누어 준 뒤 돌려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학교옷 빨래는 학교에서 해야 하고, 아이들은 개인옷을 입고 학교에 와서 학교옷으로 갈아입도록 해야겠지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누구나, 또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는 어느 집이나 옷값이며 책값이며 부교재값이며 사교육비며 …… 진저리를 치고 주름살이 늘밖에 없습니다.


.. “저는 배운 게 없어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듣기에는 다 옳으신 말씀들 같습니다. 제 짧은 생각에는 노동자의 장례식에서 외칠 구호는 노동자들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함께 외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앞선 이론을 내세우면 아직 깨우치지 못한 노동자들이 따라가기 어렵지 않을까요. 먼저 지식을 배워서 안다고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려고 하면 노동자들이 쫓아가지 못합니다. 부족한 지식을 가진 노동자의 엄마가 쓸데없는 말 한다고 여기지 말고 한 번 더 생각해 주세요.” ..  (230쪽)


 어제부터 《당신에게 말을 걸다》라는 사진이야기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쓴 백성현 씨는 한때 춤노래를 하던 ‘코요테’에서 뛰기도 했는데, 어릴 적부터 사진찍기를 좋아해서, 고등학교에 갈 때에도 실업계에 가서 사진 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1981년에 태어나 2000년을 코앞에 둔 때에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에도 동아리 선배들은 새벽같이 동아리방에 나와 청소하고 물 끓여 놓고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자기들한테 쏟아졌고(책에는 밝히지 않았지만, 뻔한 노릇으로 주먹질과 얼차려와 욕설이었을 테지요), 백성현 씨가 1학년 때에 3학년 선배를 제치고 교내 사진백일장 같은 자리에서 금상을 타니 이죽거리면서 손찌검을 했답니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휘두르는 손찌검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교사들 손찌검뿐 아니라 ‘학교 선배’라는 이들이 ‘학교 후배’한테 휘두르는 손찌검 또한 그다지 사라지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책에만 적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두 눈으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오늘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중학교부터가 아닌 초등학교부터도 대학입시를 바라보는 교육 얼거리로 되어 있지만, 아이들한테 학교옷을 맞춰 입도록 하고, 머리길이를 짧게 맞추며, 선후배 위계질서와 교사 학생 계급질서를 단단하게 세워 놓는 학교라는 울타리는, 어쩌면 우리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민주라고 하는 뜻하고는 멀어지도록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말로는 민주주의가 좋다고 하고, 우리 나라는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정작 민주주의로 일이 이루어지고 놀이를 즐기며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자리는 거의 없지 않느냐 싶어요.

 교과서 엮는 일이 민주주의답게 이루어지지 않고, 교사가 교재를 골라서 가르칠 때에 민주주의 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으며, 학생이 교사한테 교과서로 배울 때 자기 삶을 가꿀 이야기를 민주주의 흐름에 따라 받아먹을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나저나, 온통 대학교바라기로 되어 있는 중고등학교 틀거리인데, 아이들은 대학교에 가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사람이 되도록 자라게 되는가요.


.. “김대중 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냐? 죽도록 민주주의 할라고 싸워서 된 거 아니나. 아이엠에픈가 뭔가 금반지 빼서 팔라는 소리도 좋긴 한데, 그래도 몇 가지는 제대로 해 놓고 해야지. 대통령 옆에 비서라는 사람은 국회의원 공천 장사나 해먹고 있으니 제대로 되겠냐. 내가 김대중 대통령 만날 때 그랬어. 금반지 빼서 경제 살리는 것도 해야 하지만, 국가보안법 없애고 민주화 운동 하다가 죽은 사람들 누명 벗기고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대통령도 국가보안법 대문에 죽을 뻔했잖아요. 막 따졌어. 제대로 안 하면, 대통령 체면 생각해서 지금은 국회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아예 청와대 앞에서 할 거라고.” ..  (275∼276쪽)


 어린 처제가 중학생이 되어 학교에서 민주를 배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처제가 민주로 둘러싸인 학교에서 민주를 배울 수 있다면, 이를 바탕으로 평등도 배우고 평화도 배우며 통일도 배우는데다가 연대와 창조도 배울 테지요. 민주를 익힐 수 있는 학교라면 스르럼없이 사랑도 익히고 믿음도 익힐 테며, 나눔과 어깨동무도 나란히 익힐 테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직 초등학교 졸업식도 안 하고 중학교 입학식도 안 한 처제가 ‘중학생 머리길이’에 맞추어 벌써부터 머리를 자르게 시키는 이 나라 교육 틀거리인데, 아이들 머리길이를 이처럼 다그치는 학교 규칙은 국가보안법하고 얼마나 다를까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중학생이 되면, 그나마 초등학교에서 하던 ‘책을 읽고 독후감 쓰기’ 같은 숙제는 사라지고 ‘교과서 아닌 책은 못 보도록’ 할 텐데, 이런 우리네 학교 수업은 진시황이 했다는 분서갱유나 일제강점기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그리고 이명박에 걸치기까지 사라지지 않는 ‘불온도서 목록’과 ‘금서 목록’하고 무엇이 다를까 모르겠습니다. 






 (3) ‘어머니’ 이소선을 담아낸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몸에 불을 붙여 노동자 푸대접에 맞서기 앞서 청계천 노동자들한테 벗이 되고 오빠가 되었던 전태일 님 이야기는 《전태일 평전》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에 담겨 있습니다. 전태일 님을 낳고 길렀으며, 전태일 님이 죽은 뒤에는 전태일 님이 걸었던 길을 다부지게 걸을 뿐더러, 더 힘차게 걷고 있는 어머니 이소선 님 이야기는 《어머니의 길》에 살뜰히 담겨 있습니다. 《전태일 평전》에 쏟아지는 눈길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길》에도 너르고 깊이 눈길이 쏟아졌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좀처럼 《어머니의 길》은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데, 참 오랜만에, 《어머니의 길》이 나온 지 거의 스무 해 만에 새롭게 ‘어머니’ 이소선 님 이야기가 책으로 묶였습니다.


.. 이소선은 사라진 아들의 일기장을 찾으러 노동청에 가서 싸웠다 ..  (89쪽)


 그런데 책을 읽다가 문득, 궁금해지는 대목이 하나 나옵니다. 어머니 이소선 님은 사라진 ‘아들내미 일기장’을 찾으려고 노동청에 갔다고 하는데, 일기장을 다시 찾았다는 대목은 나오지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낡은 책 하나를 찾아내어 펼쳐 봅니다. 1970년대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뛰었던 이상현 기자가 쓴 글을 뒤적입니다. 이무렵(1970년 11월 13일) 이상현 기자는, 전태일 님 주검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일기장을 찾아내어 조선일보에 특종으로 실었다’는 글을 뒷날 밝혔습니다. 조금 길지만 이상현 기자가 쓴 글을 옮겨 봅니다.


 “사인을 필히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 자료를 입수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나는 참으로 막막했다. 구체적 자료라면 수기나 일기인데, 그 친구(전태일) 집안의 책상이나 장롱 등을 다른 기자들이 지금껏 그냥 두지 않았을 게 뻔한 노릇이 아닌가 … 사건이 사건인 만큼, 지하실 시체실에는 가족, 노동청 관계자, 수십 명의 보도진으로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나는 우선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일기장을 어디서 찾아낼 수 없을까? 그것만 찾아낸다면 통쾌한 스쿠프가 될 텐데, 뭔가 있긴 있을 텐데.’ 나는 추리, 상상 속에서 혼자 특종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힘든 상상이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그에게 일기 같은 게 있을 것인가 말이다. ‘여기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취재할 수 있단 말인가?’… 시체실 한쪽 테이블에 청년이 두 명 앉아 방명록을 기록하고 있었다. 명단을 쭉 훑어봤으나 이렇다 할 지명인사는 없었다. 명단을 모두 막 훑어보고 난 순간, 그 방명록이 낡은 대학노우트였다는 사실에로 나는 섬뜩해졌다. 청색 비닐 커버의 대학노우트. 직감적으로 느낌이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노우트를 한 장 펼쳐 보니 무언가 잔뜩 적혀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틀림없다.’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게 뭐요?’ 나는 부의금 접수를 맡은 20대 청년에게 귀엣말로 슬쩍 물었다. 주위에는 동료 기자들이 쉴사이 없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일이 일기예요.’ ‘어?’ 나는 무조건 그 노우트를 움켜쥐었다. ‘잠깐 좀, 봅시다.’ ‘누구신데요?’ ‘나가 보면 압니다.’ 부의금이 적힌 대학노우트를 코우트 호주머니에 움켜넣고 내가 먼저 앞장을 서 시체실을 나왔다. 그 청년은 죽은 태일 군의 사촌형이라고 했다 … 전군이 살던 성북구 쌍문동 셋방을 홀랑 뒤져 필요한 사진을 더 찾았다. 그리고 이 일기장을 신문사로 가져가기 위해, 나는 이 일기장이 꼭 세상에 공개돼야 하며 이로써 그의 죽음이 명실상부하게 된다고 거듭거듭 설명해 그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대학노우트를 들고 나는 신문사로 뛰었다. ‘일기를 구했읍니다!’ 나는 큰소리로 데스크를 향해 자신있게 소리쳤다. ‘뭐, 일기장이 나왔어?’ 데스크는 놀랐다. ‘빨리빨리 기사 써.’ ..  《이상현-사회부기자》(문리사,1977) 39∼44쪽)


 〈조선일보〉 이상현 기자는 일기장을 비롯하여 쌍문동 집까지 뒤져 사진도 가져갔다고 밝힙니다. 벌써 마흔 해 가까이 지난 옛일인데, 마흔 해 앞서, 노동청과 〈조선일보〉 기자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으며, 이 일은 어떻게 풀렸을는지 궁금합니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는 이 얘기가 더 실려 있지는 않습니다. 문득 1970년 그때 기자하고 2009년 오늘 기자하고, 기자들이 ‘못 배운 노동자’를 바라보는 눈길은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못 배운 노동자 주제에 무슨 일기를 쓰겠어?’ 하고 바라보던 1970년 기자들은 2009년 비정규직 노동자를 바라볼 때에, 어이없는 해고와 푸대접에 맞서서 집회를 여는 노동자를 쳐다볼 때에, 살빛이 검거나 거무스름한 이주노동자를 마주할 때에,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아니더라도 죽어나고 있는 농사꾼 이야기를 다룰 때에, 어떤 눈길과 생각과 마음결일는지 궁금합니다.


.. 그라고 이런저런 여러 가지 말을 너무 많이 했어.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 돼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 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 한 구멍이라도 캄캄한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엄마가 안 하면 그걸로 끝난다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란 말도 하고 그때 뭐 별말 다 했지. “어떤 물질이나 어떤 유혹에도 타협하지 마세요. 내 부탁한 거 꼭 들어주시겠죠?” 참말로 기가 차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듣고만 있었지. “왜 엄마는 내가 말하는데 대답하지 않아요? 우리 엄만데 왜 대답하지 않느냐고요? 내가 죽으면, 헛되게 죽으면 안 되잖아요. 엄마가 제발 내 말 들어주세요.” 막 따지는 거야. “목사들은 이웃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아요. 말로만 했지 실천은 안 한다고요. 그런 예수는 믿지 마세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예수를 믿으세요.” 지도 예수를 믿었는데 그란 말을 했어 … 그라다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라져 있다가 태일이가 눈을 뜨며 마지막으로 뭐라 한지 아냐? “엄마, 배가 고프다…….” ..  (84∼85쪽)


 책을 덮습니다. 아침부터 일찌감치 깨어나 놀자고 칭얼대는 아기는 어느새 잠이 들고, 옆지기는 제가 다 읽은 뒤 책상맡에 눕혀 둔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집어들어서 읽습니다. 아기가 30분도 채 안 자고 깨어나 끙끙거리지만, 책이 재미있는지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습니다. 아기 기저귀를 만져 봅니다. 오줌을 쌌다고 할는지 안 쌌다고 할는지 알 수 없지만 아주 살짝 뜨뜻합니다. 새 기저귀로 갈고 이 녀석은 말려서 다시 대야겠습니다.

 아기를 일으켜세워 잠깐 뜀뛰기를 한 다음 품에 안습니다. 아기를 안고 책상 앞에 앉습니다. 아기는 아빠 무릎에 엎드려 셈틀 화면도 들여다보고 아빠 손가락 놀리는 모습도 바라봅니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서 어머니 이소선 님이 오도엽 님을 비롯한 젊은이들한테 들려주던 말이 떠오릅니다. 요새 사람들이 아이를 거의 안 낳고, 낳아도 하나만 낳는데, 아이를 좀더 많이 낳고 재미나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가만 보면, 어머니 이소선 님만이 아니라 동네 할머님들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여든일곱 그림 할머님도 우리한테 더 많이 낳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저희로서도 낳을 수 있는 데까지 낳고 싶은데, 우리 삶터가 너무 모질고 팍팍하면서, 집에서 아기 낳기에는 몹시 안 좋기 때문에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말 힘이 닿는 데까지 낳아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아기가 태어나서 자라기에 참으로 모질고 얄궂고 고달픈 우리 세상이지만, 우리 어른 된 이로서, 우리 어버이 된 이로서, 세상이 차츰차츰 밝은 쪽으로 나아가도록 힘쓰면서 아이를 신나게 낳아서 신나게 길러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비뚤어진 법과 제도가 판을 치니까, 반듯해지고 둥글둥글하며 구수한 법과 제도로 거듭나도록 애쓰고 땀흘리면서 아이 손을 잡고 당차게 걸어가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작은 데부터, 구석진 곳부터, 응어리진 자리부터, 조금씩 손보고 어루만지고 달래면서 북돋워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태일이는 참 사람을 좋아했어야. 이 말 하니까 생각난다. 배웠다는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열사님은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그게 말이냐? 어느 부모에게 자식이 열사겠냐. 그냥 아들이야. 태일이는 열사도 투사도 아닌 사람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야. 그라고 분신자살 했다고 한다. 어디 자살이냐. 항거지. 분신 항거라고 해야 해. 배운 사람들이, 기자들이 자살했다고 쓰는 것 보면 배우기나 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래서 태일이를 열사니 투사니 하지 말고 그냥 동지라고 불러 줬으면 해. 전태일 동지. 그게 맞지 않냐.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지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 달라고 좀 써라.” ..  (286∼287쪽)


 사람을 좋아한 전태일 님으로 자란 까닭은, 아들 전태일을 낳아 기른 어머니 이소선 님부터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사람을 아끼고 사람을 섬기며 사람을 알뜰히 사랑할 줄 아는 어머니한테서 전태일이라고 하는 큰기둥 하나가 우뚝 설 기틀이 마련되지 않았겠느냐 생각합니다. 목숨을 바칠 만큼 애쓸 수 있던 까닭은, 어머니 이소선 님이 아들 앞에서 몸소 ‘목숨 바쳐 삶을 야무지게 꾸려 나갔’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집에는 전태일 님이 걸었던 발자취가 담긴 책 두 권에다가, 어머니 이소선 님이 디뎠던 발자국이 찍힌 책 두 권이 책꽂이에 꽂힙니다. 어제까지는 아빠가 읽었고, 오늘부터는 엄마가 읽습니다. 앞으로는 우리 집 어린 딸내미가 이 책을 읽겠지요. 뭐, 예닐곱 살쯤 되면 아빠나 엄마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읽어 줄 수도 있습니다. (4342.1.8.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