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75 : 좋은 책 하나를 읽으면


 세상을 꿰뚫는 눈을 일러 주는 책은 꾸준하게 나옵니다. 사람들 마음속을 파고드는 눈길을 보듬어 주는 책은 지며리 나옵니다. 우리 삶터를 아름다이 가꾸도록 이끄는 책은 한결같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책들이 널리 팔리거나 읽히는 일은 뜻밖에도 드뭅니다. 재미가 있어서 많이 팔리는 책, 다들 많이 읽는다 하여 제법 팔리는 책은 있으나, 담긴 줄거리나 알맹이가 참으로 훌륭하기에 골고루 읽히며 우리 마음밭을 북돋우게 되는 책은 생각 밖으로 얼마 안 됩니다.

 누구나 《태백산맥》과 《토지》와 《삼국지》를 재미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깊은 바탕지식이 없어도 어느 만큼 즐겁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탕지식이 없는 만큼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없고, 바탕지식이 얕은 만큼 한결 애틋하게 받아먹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저마다 제 그릇이 있어서 제 깜냥껏 좋은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갑니다. 다만, 스스로 바탕지식을 키우지 않거나 마음그릇을 넓히지 않고서는 ‘책으로 얻는 재미’와 ‘책으로 나누는 즐거움’이 그 한때로 그치게 될 뿐, 내 이웃과 둘레로 퍼져나가지는 못하기 일쑤입니다.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저절로 《수달 타카의 일생》 같은 책을 읽도록 손길이 뻗쳐야 하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수달 타카의 일생》 같은 책을 읽은 분이라면 시나브로 《제7의 인간》 같은 책으로도 손길이 뻗쳐야 하지 않느냐 싶고, 《제7의 인간》 같은 책을 읽은 분은 으레 《일본군 군대위안부》 같은 책으로 손길이 뻗치리라 봅니다. 《일본군 군대위안부》로 손길이 뻗쳤다면 《니사》 같은 책으로도 손길이 뻗칠 테며, 《니사》 같은 책으로도 손길이 뻗친다면 《산골유학》 같은 책으로도 손길이 뻗칩니다. 《산골유학》 같은 책으로도 뻗친 손길은 《빅토르 하라》 같은 책으로도 뻗치고, 또다시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로도 뻗치며, 《골목 안 풍경》이나 《연변으로 간 아이들》로도 뻗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책 하나 읽은 손길이 그 책 하나로 그치는 일이 없으며, 이러한 손길은 책을 살피는 손길로만이 아니라 나와 내 이웃 모두를 둘러싼 우리 삶터를 헤아리는 손길로도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만 읽는 손길이라면, 《우리들의 하느님》을 읽고도 《몽실 언니》나 《초가집이 있던 마을》로 뻗치지 못합니다. 뒤이어 《산골마을 아이들》과 《탄광마을 아이들》로 이어지지 못하는데, 지식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삶(실천)을 말하는 책임을 보지 못합니다. 한꺼번에 뒤엎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부터 작은 한 가지부터 갈아엎지 못하면 아무 일도 안 됨을 말하는 책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혼자 나아가지 말고 함께 나아가자고 하는 책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엊그제, 《바다로 간 플라스틱》을 덮으면서, 이 작은 책에 담긴 넋을 우리 스스로 얼마나 곱씹을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한편으로, 아무리 이 작은 책을 읽어내 주더라도 우리 생각과 매무새와 삶 모두 달라지거나 거듭나지 않는다면, 이 책이 곧잘 팔리게 되더라도 무슨 뜻이 있을까 싶더군요. 책은 읽으라고 있으며, 책은 읽어서 좋을 수 있지만, 돈에 눈멀어 만들어지는 책이 있고, 책만 읽어 머리통만 무거워지는 얼간이는 조금도 좋지 않습니다. (4342.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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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인간 -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차미례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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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느낌글은 예전에 한 번 썼지만, 이번에 세 번째로 읽으면서 다시금 틀을 갖추어서 써 보기로 한다... 



 이 책 하나 73 ― 정규직과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는 똑같다
 : 존 버거+장 모르, 《제7의 인간》



- 책이름 : 제7의 인간
- 글 : 존 버거
- 사진 : 장 모르
- 옮긴이 : 차미례
- 펴낸곳 : 눈빛 (2004.11.11.)
- 책값 : 12000원



 (1) 동네와 집과 사람


 제가 동네에서 즐겨찾는 구멍가게 할배는 지난해 가을께 가게에 셈틀 한 대를 들여놓았습니다. 아이들이 예전에 쓰던 낡은 녀석을 물려받으셨는지 새로 장만하셨는지 모르지만, 구멍가게 할배는 한동안 당신 자리 옆에 멀거니 모셔 두기만 하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셈틀에 들어 있는 놀이 가운데 하나인 ‘프리셀’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여느 때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며 손님을 기다리지만, 요사이는 셈틀놀이에 푹 빠져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 이민노동자들은 노동 인력이 부족한 곳으로 자기의 노동력을 팔러 온다. 그는 어떤 한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허락을 받는다. 그에겐 아무런 권리도 주장도 없으며, 그 일자리를 채우는 것밖에는 현실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동안은, 돈도 받고 숙소도 제공된다. 더 이상 그것을 안 할 때에는, 그는 처음에 출발한 곳으로 되돌려 보내진다. 이민을 가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라 기계 관리 인부, 청소부, 땅 파는 인부, 시멘트 섞는 인부, 세탁부, 공원 따위이다 ..  (62쪽)


 구멍가게 할배는 지금 동네 골목길 안쪽에 장만해서 살고 있는 집이 1층과 2층을 더해서 100평쯤 된다고 하는데, 이 집을 장만하여 살기까지는 오래도록 땀흘리고 애썼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할배가 들려주는 말도 있지만, 말씀으로 들려주지 않아도 몸으로 느낍니다. 어느 골목집 이웃이 안 그러겠습니까마는, 인천에서도 연수구나 송도새도시와 청라새도시 같은 데, 그리고 웬만한 서울하고 견주면 터무니없이 싼 집값이요 땅값이라고 할 테지만(한 평에 200만 원도 잘 안 쳐 주니), 이렇게 싼 땅에서 마련한 싼집이라고 하여도 돈 10원을 아끼고 갈무리하면서 살아가는 긴 세월 끝에 장만한 집이라 남다르다고 느낍니다. 당신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집이 아닌 당신 손으로 일하여 일군 집이라, 가게며 집이며 둘레 골목길이며 쓰레기나 비닐봉지 하나 떨어지거나 구르는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몇 가지 안 되는 물품을 늘여놓고 있어도 흐트러짐 하나 없고, 가게 유리문이며 간판이며 뿌옇게 먼지가 앉은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면, 할배 구멍가게뿐 아니라 둘레 곳곳에 자리한 다른 구멍가게도 형편이 비슷합니다. 어수선하거나 지저분하게 차린 구멍가게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고작 보리술 한두 병에 주전부리감 안주 한 점쯤 사러 가는 구멍가게입니다만, 이와 같은 매무새에는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이제 당신들은 나이도 나이이고 살림 걱정이 따로 없으니, 구멍가게에서 셈틀놀이만 하거나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세월을 보내실 수 있을 텐데, 오랫동안 몸에 익은 버릇 그대로 빈병을 모으고, 손수 자전거로 물건을 실어 오며, 당신 집 페인트 바르기나 손질을 누구한테 맡기지 않습니다. 가게 옥상에는 당신들 나름대로 옥상 텃밭을 일구고, 눈이 오면 골목길 눈을 스스럼없이 치우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일을 그예 즐겁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서울 종로구 평동 안쪽 골목집에서 살 때에, 그 집 임자인 할배는 ‘낡은 집 손질’을 꼭 당신 스스로 했습니다. 나무로 지은 적산가옥이라 뒷간이 없고 쥐가 함께 사는 집이었는데, 일꾼을 사지 않고 당신이 손수 시멘트와 모래와 물을 섞어 공사를 했고, 전기공사니 보일러공사니 꼭 손수 하면서 세입자가 바라는 대로 해 주었습니다. 온도가 많이 떨어진 겨울철에는 새벽같이 나와서 수도가 얼지 않게 틀어 놓으라 부르고, 어쩔 수 없이 수도가 얼면 이를 녹이려고 함께 끙끙댔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금 달삯 내며 살고 있는 집 임자인 할배는 아무런 집일을 할 줄 모릅니다. 오로지 돈만 아는 분입니다. 늦은밤 아기를 재우고 고단한 다리 쭉 뻗고 잠들면서 도무지 이 집에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며 지난 일을 떠올려 보곤 하는데, 누구나 어릴 적부터 길들고 익숙해 온 대로 늙어서까지 살지 않느냐 싶고, 자기 삶을 가꾸는 손은 자기가 움직이는 손이지, 돈으로 사서 쓰는 손이 아님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 살림이 확 피면서 우리도 누군가한테 방 한 칸 내주며 달삯을 받을 집임자가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세입자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아름다운 집임자가 되자면 어떠어떠해야 하는가를 몸으로 느낍니다.


.. 그들은 제일 힘들고 제일 하기 싫고 보수가 적은 직종, 예를 들어 독일의 플라스틱ㆍ고무ㆍ석면 공장 같은 데서 일한다. 콜로뉴에 있는 포드 공장의 일관 생산 라인에서는 40퍼센트의 노동력이 이민들이며, 프랑스의 르노 자동차의 제작공장에서는 40퍼센트, 고텐부르크의 볼보 공장은 45퍼센트가 이민들이다. 살기 위해서 그는 자기 목숨을 팔 수도 있다 ..  (90쪽)


 자전거를 타면 조금 멀리까지, 두 다리로 걷자면 한 시간쯤 되는 거리까지 골목마실을 합니다. 이때마다 우리 식구는 낯익은 길을 새삼 둘러보기도 하고 낯선 길에 살금살금 첫발을 들이기도 합니다. 이때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르게 꾸리는 집살림을 느끼는데, 흔히 말하는 ‘자동차 들어가지 못하는’ 어둡거나 허름하다 싶은 뒷골목이 ‘자동차 씽씽 내달리거나 우뚝 서 있는’ 제법 넓고 밝으며 번듯번듯 올라선 건물 있는 큰길보다 깨끗하곤 합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바라보면 뒷골목은 으스스하고 꾀죄죄하다는 느낌이지만, 골목동네에서 살아 보면, ‘사람 사는 동네’가 으스스하고 꾀죄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동네, 해마다 다른 데로 옮겨 살아야 하는 동네, 끝없이 재개발 문제에 부닥쳐야 하는 동네, 뿌리내리며 사는 동네가 아닌 잠깐 머물다가 가거나 구경꾼이 스치고 지나는 동네가 으스스하고 꾀죄죄합니다.


.. 예비노동력의 대부분이 이민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들은 필요할 때에는 ‘수입’을 해 올 수 있고, 일시적으로 남아돌 경우에는 ‘수출(귀국시키는 것)’을 할 수가 있으며, 이민노동자들은 정치적인 권리도 없고 정치적인 영향력도 거의 없기 때문에 아무런 정치적인 충격도 받을 필요가 없다 ..  (147쪽)


 어느 때에는 뒷골목 으슥하다 싶은 곳에서 담배 태우는 아이들을 마주칩니다. 이 아이들이 오죽 담배 태울 데가 없으면 이런 데서 태울까 싶기도 하다가는, 학교 뒷간에서도 태우는데 이런 골목이야 아무것도 아닐 테지 싶고, 왜 이처럼 뒤로 숨어 가면서 태우게 될까 안타깝습니다. 겉멋으로 태우는 아이들이 있지만, 속이 타고 애가 타서 태우는 아이들이 틀림없이 있기에,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속태우거나 애태울 일을 처음부터 일으키지 않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골목마실을 하며 아이들 매무새를 살피면, 아이들은 제 어버이 하는 대로 고스란히 보여주거나 제 이웃 하는 대로 꾸밈없이 드러납니다. 늘 보는 모습대로 배우고, 늘 겪는 대로 익숙해지며, 늘 치르는 대로 버릇이 됩니다. 얼음과자 봉지를 휙휙 버리든,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든, 아이들 어버이나 이웃 어른이 하는 양하고 똑같습니다. 아이들 어버이나 이웃 어른이 당신 집 둘레 삶터를 아름다이 가꾸는 매무새였다면, 아이들 또한 동네에서 아무렇게나 다니지 않고 얄궂은 짓을 함부로 일으키지 않습니다.


.. 고용주들은 프롤레타리아보다도 낮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의식화되면 불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노동자도 너무 오래 체재하지 않도록 외국인 노동력을 끊임없이 ‘로테이션’시킬 계획을 세운다 ..  (154∼155쪽)


 그나저나, 학교옷을 입고 골목 안쪽에서 담배 태우는 아이들은 담배를 어디에서 샀을까요. 이 아이들은 학교옷을 벗으면 더는 골목 안쪽에서 담배를 안 태우고 떳떳하게 큰길을 거닐며 태우게 되는데, 열여덟과 열아홉이라는 숫자 사이에는 무엇이 가로놓여 있을까요. 열여덟이라 하여도 ‘학생’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진 아이들은 ‘학생’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있는 아이들하고 무엇이 다를까요. 담배를 태우는 아이와 담배를 안 태우는 아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군대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병과 담배를 안 태우는 사병은 어찌 다를까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담배 태우는 일이 좋지 않다면, 아이들과 어울리는 어른들도 학교에서는 담배를 태우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담배를 태우지 말아야 옳습니다. 나아가, 옳지 않은 담배가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도록 나라에서는 담배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학교에서 버젓이 담배를 태우고, 학교 바깥에서도 거리낌이 없으며, 나라에서는 담배 팔아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입니다.
 





 (2) 저잣거리와 헌책방과 사람


 아기를 안고 저잣거리 마실을 할 때면, 우리가 물건을 한 번도 안 산 집 할매도 아는 척을 하면서 “아이고, 아기가 벌써 그렇게 컸어요? 이뻐라.” 하면서 주름진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면서 들여다보십니다. 우리한테는 살 물건이 없어 그냥 지나치게 되었지만, 늘 그 자리에서 수십 해 세월을 보낸 할매한테는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라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고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마주치는 가운데 시나브로 이웃처럼 느끼게 되었구나 싶습니다. 저잣거리 끝에 있는 구멍가게 할매와 할배는 손뼉까지 치면서 “어머 얘 좀 봐.” 하면서 좋아하십니다.

 엊저녁, 옆지기가 성가대 연습을 하러 성당에 갔는데, 집에서 홀로 아기를 보다가 아무래도 엄마젖을 자꾸 찾기에 아기를 포대기에 폭 싸서 슬쩍슬쩍 골목마실 조금 하다가는 성당으로 찾아가 엄마젖을 물렸습니다. 성가대 봉사를 하는 분들은 하나같이 아줌마 아저씨 또는 ‘이제 막 할머니 소리를 듣는’ 분들입니다. 당신들은 입으로는 노래를 부르면서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리며 아빠한테 안긴 아기를 보고 눈웃음을 치거나 젖을 무는 아기를 뿌듯해 하는 눈빛을 보냅니다.


..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을 제공하러 온다. 그들의 노동력은 기성품이다. 이제부터 그 노동력 덕분에 생산에 이익을 얻게 될 공업화된 국가들은 그 노동력을 생성시키는 비용은 전혀 부담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뿐 아니라 중병에 걸린 이민노동자나 너무 늙어서 일할 수 없게 된 이민노동자를 부양하는 경비 역시 부담하지 않는다. 도시화된 국가의 경제에 관한 한, 이민노동자들은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으며,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 하나의 기능-일하는 것-을 가질 뿐이다. 그들의 삶의 다른 모든 기능들은 그들의 출신 국가의 책임이다 ..  (64∼65쪽)


 때때로 저한테 ‘무슨 책 있어요?’ 하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전화를 거는 분들은 당신이 누구인지 한 번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마치 ‘헌책방 장사를 하는 듯’ 깔아 놓고 말문을 엽니다. 그러나 저는 헌책방 나들이를 즐겨다니면서 헌책방 사진을 찍고 헌책방 이야기를 글로 옮겨 나누는 일을 할 뿐입니다. 지금 하는 일은 동네에서 도서관을 꾸리고요. 오늘도 한참 바쁘게 일하는데 ‘엘피판 있어요?’ 하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래, “저희는 도서관입니다.” 하고 대꾸하니, ‘그러면 엘피판 살 수 있는 데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제 전화번호를 아셨다면 ‘사진책 도서관을 하는 사람 일터’로 알게 되었을 텐데, 이런 이름은 들여다보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바라는 물건만을 찾’습니다.

 그래도 저는 헌책방 장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 이쯤에서 말을 끝낼 수 있습니다. 헌책방 장사를 하는 분들은 ‘손님 되는 이들이 얼마나 나이가 많고 적은지’ 알 길이 없으나 으레 말을 깝니다. 다소곳하거나 부드러운 말씨로 묻는 사람이 드뭅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그저 책이 좋아 헌책방을 나들이하는 사람은 헌책방 일꾼한테 ‘무슨 책이 있나요?’ 하고 묻지 않습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서 조용히 책을 살펴보다가는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골라서 사고, 마음에 드는 책이 없으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조용히 나갑니다.


.. 이민을 가는 노동자들은 원래 태어난 나라에서 일자리가 없이 실직 상태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나라 그 사회가 그들의 양육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했다는 사실을 번경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 지금까지 집계된 바로는, 한 이민노동자들의 양육, 그가 스무 살에 이르기까지 생존을 유지하는 데 그의 조국의 국민경제가 부담하는 액수가 약 2천 파운드에 이른다. 한 명 한 명의 이민이 도착할 때마다, 저개발된 경제권에서 개발된 경제권에 대해 그만한 액수를 희사하는 셈이다. 게다가 공업화된 나라가 차지하는 저축액은 또 훨씬 막대하다. 그곳의 좀더 높은 생활 수준으로 계산해 본다면, 그의 조국에서 열여덟 살짜리 노동자를 ‘생산해 내는’ 비용은 1인당 8천 파운드에서 1만6천 파운드는 된다. 이미 다른 곳에서 생산되어 온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은, 도시화된 국가가 매년 8백억 파운드 이상을 저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를 가진 자들에게, 인간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  (72∼73쪽)


 며칠 앞서 동네 헌책방에 들렀을 때입니다. 헌책방 아주머니가 밖에서 누군가한테 큰소리를 치면서 한소리를 합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헌책방 문간에 쌓아 놓고 있던 만화책 꾸러미를 슬그머니 들고 튀려다가 붙잡혔답니다. “야, 너희들 그거 왜 가져?” 하고 아주머니가 큰소리를 치니, “지금은 돈이 없어서 이따가 가지고 오려고요.” 하고 둘러대더라고, 그래서 “너희들이 책을 가지고 싶으면 너희들이 일해서 번 돈으로 사 가지, 그렇게 남의 노동을 가로채도 돼?” 하면서 따끔하게 한 마디를 한 다음 돌려보냈다더군요.

 헌책방 아주머니는 이 아이들을 경찰서로 넘길 수 있었고, 더 따끔하게 나무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따끔한 소리를 들었다 한들, 다른 이 물건을 슬쩍하려던 그 마음이 바로잡힐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 아이들은 어찌하다가 다른 이 물건을 슬쩍해서 제 것으로 삼고프도록 마음이 거칠어지고 무너졌을까 모르겠습니다. 참말 돈이 없었는지, 아니면 헌책방 물건은 아무나 그냥 가져가도 괜찮다고 생각을 했는지.


.. 1973년 초에 네 명의 스페인 출신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면서 반나절 동안 파업을 벌였다. 그들끼리만. 그들은 즉각적으로 해고됐다. 일자리가 없으니 그들은 그 나라에 남아 있을 권리가 없었다. 그들은 강제로 스페인으로 송환되었다. ‘바람직하지 못한 극렬분자’라는 그들의 기록이 틀림없이 스페인 당국에 통지되었을 것이다. 스위스의 노조들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176쪽)


 곧 새로운 학년을 맞이합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언제부터인가 ‘경제 불황 속 헌책방 찾는 시민들’이니 ‘새책 한 권 값으로 두어 권 살 수 있다’느니, ‘파격 할인으로 불황 넘는다’느니 ‘불황 속 이색 호황’이라느니 하는 판에 박은 기사가 드문드문 나옵니다. 이런 기사에서는 한결같이 헌책방 헌책 하나를 ‘싼 물건’으로만 여깁니다. ‘마음밭을 살찌우는 숨어 있는 책’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헌책방이 왜 생겨나게 되었고, 헌책방에는 어떤 사람들이 찾아오고, 헌책방 일꾼은 어떤 책을 캐내어 갖추는지를 곰곰이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여느 때에 헌책방을 찾아가 보지 못한 탓이라고 느낍니다. 여느 때에 헌책방 나들이를 했다면 해마다 판에 박은 기사를 쓰는 일은 없을 테고, 사람들이 헌책방에서 어떤 맛과 멋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못 보는 일은 없을 테지요.

 이와 똑같이, 신문사 기자들이니 방송사 피디들은 여느 때에 도서관 나들이를 못합니다. 안 한다고 해야 할까요. 일에 쫓기고 너무 바쁘다고들 하니까. 이리하여 우리 나라 도서관 형편이 어떠하고 어떤 문제가 있으며 어떻게 손질하며 고쳐나가야 하는가를 다루지 못합니다.

 좀더 살피면, 헌책방과 도서관 이야기뿐 아니라, 우리 세상사람들 이야기를 제대로 다루어내지 못합니다. 우리 삶터 이야기를 깊이있게 되씹어내지 못합니다. 우리 나라와 겨레에 닥친 이야기를 한결 널리 꿰뚫어내지 못합니다. 모두모두 여느 때에 온몸으로 껴안지 않기 때문이며, 여느 자리에서 온마음으로 눈여겨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녀평등 문제라든지, 군대폭력 문제라든지, 막개발 문제라든지, 서민들 일자리 문제라든지, 이주노동자 문제라든지, 국가보안법 문제라든지, 또 다른 어떤 문제라든지, 뻥뻥 크게 터져야만 가까스로 눈길을 보냅니다. 뻥뻥 크게 터지지 않으면 눈길을 두지 못합니다. 뻥뻥 크게 터졌더라도 얼마쯤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눈길을 거두어들여, 일이 제대로 풀리건 풀리지 않건 아랑곳하지 않고 맙니다.
 





 (3) 《제7의 인간》과 ‘없는 사람’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이라는 이름이 자그맣게 붙은 사진이야기 《제7의 인간》을 세 번째 읽습니다. 1991년에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소개된 이 책은 2004년에 오랜만에 다시 빛을 보았습니다.

 존 버거가 글을 쓰고 장 모르가 사진을 찍은 《제7의 인간》은 1970년대 첫머리 유럽 이야기이기에, 2009년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서른 해도 훌쩍 넘은 옛날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 삶터를 돌아보니, 숫자와 나라이름과 사람이름만 고치면 꼭 우리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터키와 스페인과 그리스와 포르투갈과 ‘유럽에서 가난하다고 하는 나라’에서 ‘유럽에서 잘산다고 하는 나라’인 스위스와 프랑스와 독일과 스웨덴 들로 ‘몸팔러 가는’ 이야기가 담긴 《제7의 인간》인데, 2009년 우리 나라에는 몽골이며 티벳이며 중국조선족이며 필리핀이며 우즈베키스탄이며 버마며 네팔이며 스리랑카며 터키며 인도며 …… 수많은 나라에서 ‘몸팔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통계가 잡히지 않으나 적어도 30만이 넘는 이주노동자가 한국땅에 있다고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는다. 그는 이 마을을 평생 동안 알고 있었다. 떠나는 순간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강도는 거의 그의 의지력만큼이나 강력하다. 마을을 떠남으로써, 그는 스스로 그런 느낌을 자초한 것이다. 그에 따라 일어나는 감정의 혼란은 많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가 돌아올 때 그의 삼촌은 살아 계실까? 작별을 고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따르는 일이다. 그가 승리해서 돌아올지 패배해서 돌아올지 누가 알 것인가? 도시가 베풀어 주는 것은 거기서 성공하는 사람들에게지, 실패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건 아니다 ..  (34∼35쪽)


 우리 나라에도 제법 ‘이주노동자’ 인권을 말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인권을 말하는 목소리와 견주면 거의 안 들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규직’ 인권을 말하는 목소리와 대면 하나도 안 들린다고 할 수 있어요.

 모두 똑같은 노동자일 뿐인데, 우리 스스로 ‘정규직-비정규직-이주’ 이렇게 갈라 놓습니다. ‘이주’노동자라 하여도 나라에 따라 가릅니다. 지금은 ‘정규’일는지 몰라도 앞으로 어느 날 ‘비정규직’으로 바뀌거나 자기 스스로 ‘이주’노동자가 되어 나라밖으로 떠나야 할지 모르는 데에도, 서로 어깨동무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살피면, 노동자가 제 대접을 받도록 하지 않는 얄딱구리한 사업주한테 말썽거리가 있습니다만, 노동자가 빼앗긴 권리를 되찾도록 애쓰지 않는 안타까운 나라한테 골칫거리가 있습니다만, 사업주와 정부를 탓하기 앞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껴안지 못합니다. 곁에 있는 이웃이 아파할 때 손을 내밀지 못하고, 살가운 동무가 눈물을 흘릴 때 고개를 돌립니다.


.. 이민노동자들에게 있는 유일한 현실은 오직 일하는 것과 그에 뒤따르는 피로뿐이다 ..  (185쪽)


 책으로만 읽는 《제7의 인간》일 수 있습니다. 책이 아닌 ‘내 이야기’로 받아들일 《제7의 인간》일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입니다. 받아들이는 그릇 나름입니다. 받아들여 움직이려는 우리 몸뚱이 나름입니다. (4342.2.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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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간 플라스틱 - 쓰레기와 떠나는 슬픈 항해 미래를 꿈꾸는 해양문고 7
홍선욱.심원준 지음 / 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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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를 외치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를 망가뜨린다
 [잠깐 읽기 25] 홍선욱+심원준, 《바다로 간 플라스틱》



- 책이름 : 바다로 간 플라스틱
- 글 : 홍선욱, 심원준
- 펴낸곳 : 지성사 (2008.12.31.)
- 책값 : 8000원



 (1) 내 밥그릇이 무엇인지를 알아야지요


 요즈음 라면 한 봉지는 700원을 넘어섭니다. 850원짜리도 있고 1000원 넘는 녀석도 있습니다. ㅇ마트나 ㄹ마트에 가면 봉지에 적힌 값보다 꽤 싸게 사들일 수 있다고 하나, 비싸기는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밀 라면’은 값이 얼마나 할까요? 1100원입니다. 항생제와 비료와 풀약과 갖가지 몸에 나쁜 짓을 하면서 짓지 않은 곡식으로 만든 라면 한 봉지 값이 1100원일 때에, 나라밖에서 온갖 항생제와 비료와 풀약을 쓰는데다가 나라안으로 사들일 때에 또다시 약품을 치는 곡식을 화학물질을 섞어 가면서 식품회사 공장에서 만드는 라면 한 봉지 값이 700원이라 하면, 어느 쪽이 비싸고 어느 쪽이 값쌀까요?

 생협매장에서 사서 먹는 순부두 400그램은 1000원 안팎입니다. ㅇ마트나 ㄹ마트에서 아주 값싸게 사서 먹을 순부두 400그램이라면 500원쯤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500원에 두 봉지를 주기도 할 테지요. 그런데, 유전자조작을 하지 않은 콩으로 빚은 순두부하고, 유전자조작을 한데다가 수없이 많은 풀약과 항생제를 쓴 콩으로 빚은 순두부하고, 이만한 값벌어짐이라면, 어느 쪽이 비싸고 어느 쪽이 값쌀까요?

 세겹살을 싸게 파는 곳은 한 사람 몫(1인분) 200그램에 5000원도 하고 3500원도 합니다. 드물게 2000원 하는 집이 보이는데 이러한 집은 200그램이 채 안 된다고 느낍니다. 아주 싸다고 하여 200그램이 3000원이라고 치면, 600그램에 9000원입니다. 그런데 생협매장에서 세겹살을 사면 650그램에 9000원이 안 됩니다. 여느 고기집에서 사면 훨씬 눅을 테지만, 우리가 고기구이집에 가서 사먹는 돈을 헤아릴 때에 생협매장 나들이를 해서 ‘항생제 안 먹이고 화학처리된 사료 안 먹이는’ 고기를 사먹는다고 했을 때 드는 돈은 그리 많이 안 듭니다.

 다만, 생협매장에는 늘 물품이 넘치게 있지 않습니다. 늘 모자라게 있어, 공급날짜를 놓치면 장바구니가 비게 됩니다. 미리 어떤 물품을 받으려 하는지를 알려주어야 장바구니를 채울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장보기가 쉽지 않은 셈이지만, 쓸데없이 사들이는 물품이 없도록 살림을 맞출 수 있고, 꼭 써야 하는 물품만 쓰게 되는 한편, 우리 몸과 밥상과 둘레 터전을 한결 두루 살필 수 있기도 합니다.


.. 어두운 밤하늘에 예쁘게 퍼지는 불꽃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준다. 촛불이 제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고 사라지듯 불꽃도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태우고 사라지는 환상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폭죽을 터뜨리고 난 다음날, 같은 해변을 거닐어 볼 것을 권한다 … 가볍고 작아서 사람들 눈에는 잘 안 띄지만, 먹이를 찾는 바닷새들에겐 먹이로 착각하기 쉬운 크기이다. 담배필터를 먹이로 알고 잘못 먹는 새들이라면 이런 폭죽쓰레기도 먹게 될 것이다 ..  (31∼33쪽)


 생협매장은 전국 곳곳에 있지 않습니다. 큰도시 몇 곳에 몰려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손수 지어 먹으면 되니 구태여 생협매장이 들어설 까닭이 없다고 할지 모르나, 곰곰이 따지면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시골에도 생협매장이 있어야 합니다. 몸소 땅을 일구어 먹지 않는 도시사람 모인 곳에는 마땅히 생협매장이 있어야 하고요.

 농사짓는 사람이 허튼 농사를 안 지어도 일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생협이 차츰 자리를 잡아야, 시골이 살고 우리 살림이 삽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우리 몸이 바뀌고, 우리 몸이 바뀌는 흐름에 따라 우리 생각이 바뀝니다. 우리 생각 흐름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가려보는 눈길이 달라지고, 옳고 그름을 가려보는 눈길을 머리속 지식만이 아닌 온몸 삶으로 부대끼게 된다면, 우리 세상은 밑바탕부터 튼튼하게 새로워집니다.


.. (갯벌에서)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그들과 함께 나뒹구는 스레기들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불편하다. 아이들이 먹고 버린 과자봉지, 우유팩, 도로변에서 낚시하다 버린 엉킨 낚싯줄과 미끼통, 술병은 늘상 볼 수 있는 것들이고 줄 끊어진 기타가 발견된 적도 있다. 물속에는 오래 전에 버려진 의자, 세발자전거, 생활정보지 거치대 등이 갯벌에 박혀 세월을 보내고 있다 ..  (47쪽)


 인천에서 오랫동안 지역 역사를 파헤쳐 온 어르신이 언젠가 “지식인들은 밤낮 민중을 말하지만 밤낮 맥주만 마셔” 하고 따끔한 한 마디를 들려주어서, 옆에서 이 말씀을 듣다가 속으로 피식 웃었습니다. ‘그러게 말야, 참말 그러네’ 하고 생각했는데, 맥주를 마시는 일이 잘못이 아니라 ‘허구헌날 술자리에서만 떠들 뿐이지, 온몸으로 이웃사람과 부대끼면서 이 땅 삶과 참모습을 알아보고 함께하려 하지 않는다’는 소리이거든요.

 인천에서 살고 있으니 인천을 돌아보지만, 서울에서 지낼 때 서울을 돌아보면서, 또 충청도에서 살아가며 충청도를 돌아보면, ‘자기 텃밭에서 자기 밥그릇을 지키는 틀’을 깨부수면서 땀흘리는 사람을 찾아보는 일이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밥그릇 채우기에서 홀가분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이웃 마을 삶터까지 헤아리지 못하기 일쑤이고, 이웃사람 삶과 아픔을 내 삶과 아픔으로까지 삭이지 못하고요.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좁을까, 왜 이렇게 마음주머니를 북돋우지 못할까 하고 곱씹는데, 아무래도 자기 삶부터 다부지게 붙잡지 못하니 이러지 않겠느냐는 데로 생각이 모아집니다. 어떤 일을 하든 먼저 자기가 어느 집에서 살며 어떠한 밥을 먹고 어떻게 집살림을 꾸리느냐가 그이 삶과 생각을 크게 움직인다고 느낍니다. 밥 한 그릇 좀더 옳게 먹으려 마음쏟지 못하면서 이웃 삶터를 좀더 옳게 헤아리도록 마음쏟지 못합니다. 배고픈 이웃한테 라면상자 선물하면 좋은 일이 될까요? 영구임대아파트가 집없는 사람한테 가장 나은 보금자리가 될까요? ‘일자리 백만 개 만들기’를 하면 실업자가 사라지고, 돈없어 애먹는 사람이 사라질까요? 그러면 그 일자리 백만 개란, 무슨 일을 어디에서 어떻게 하는 일자리일까요?


..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그 시작점은 알 수 없지만 다도해의 아름다운 바다공원이 거대한 하얀 목걸이를 두르기 시작했다. 낯설고 괴이한 목걸이를 가까이 들여다보니 스트로폼으로만든 부표들이다. 굴과 김 등을 양식할 때 어디에 양식을 하고 있는지 소유주가 위치를 표시하거나, 해수면 아래로 굴의 종묘를 늘어뜨릴 때 가라앉지 않도록 띄우는 역할을 하는 어구이다 … 1년에 우리 나라에서 사용하는 스티로폼 부표는 3500만 개 이상이 된다. 바람에 날리고 파도에 휩쓸린 스티로폼 부표는 다도해의 수많은 섬으로 퍼져 나간다 … 스티로폼은 손으로 살짝 긁기만 해도 떨어져 부스러기가 생길 정도로 약하다 …원래 부표는 깨지거나 망가지면 되가져와 다시 사용하거나 처리해야 하지만, 떨어져 나간 부표를 찾아다니는 인건비가 새로 사는 비용보다 비싸기 때문에 쉽게 포기해 버린다 … 본디 파랗던 바다는 어디로 갔을까? … 생각보다 자주 바다쓰레기가 배들의 항해를 방해한다. 배들의 불안한 항해가 계속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선박 사고의 1/10이 바다쓰레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여객선을 타고 가는데 바다 위에서 이유 없이 멈춰 선다면 아마도 대부분 바다쓰레기 때문일 것이다 ..  (52∼60쪽)


 대통령 이명박 님은 서울과 부산 사이에 물길을 내고, 서울과 인천 사이에도 물길을 트면서 ‘엄청난 일자리를 마련하고 엄청난 돈돌리기를 이룬다’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런 물길트기만이 아닌 ‘새 고속도로 또 뚫기’와 ‘새 고속화도로 자꾸 뚫기’와 ‘고속철도 늘려 뚫기’와 ‘새 아파트 끝없이 다시 짓기’만 하여도 어마어마합니다. 이런 정책은 이명박 대통령뿐 아니라 야당 정치꾼도 똑같이 되뇝니다. 우리는 어느 정치꾼을 뽑아도 똑같은 정책이 되풀이되고, 똑같은 토목건설 바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꾼 공약과 정책으로만이 아닌 우리 스스로, 집값이 오르기를 꿈꿉니다. 주식값이 오르기를 꿈꿉니다. 일삯이 오르기를 꿈꾸고, 물건값은 안 오르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자기 사는 집값이 오르면 물건값이 안 오를 수 없습니다. 물건값이 오르는데 일삯이 올라 보았자 달라질 구석이 없습니다. 물건값이 오른다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쓰는 물건값만 오를 뿐인데다가, 가난한 사람이 팔아야 하는 물건은 값을 올리기 어렵습니다. 달걀 하나 넣는 오방떡 하나가 1994년에도 500원이었고 2009년에도 500원입니다. 군고구마 한 봉지가, 붕어빵 한 조각이, 떡볶이 한 접시가, 열 몇 해 앞서와 오늘날 얼마만큼 벌어졌을까요. 우리 입에 냠냠짭짭 씹혀 우리 밥통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움직이며, 어떻게 우리 손까지 오게 될까요. 우리는 이 먹을거리를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생각하며, 얼마만큼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요사이 어느 식료품이든 ‘MSG無첨가’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딱지를 하나도 안 붙였습니다. 예전에는 ‘엠에스지’라는 녀석을 안 넣었기에 안 붙였을까요 넣었어도 안 붙였을까요. 그런데 ‘엠에스지’를 안 넣었다는 식료품치고 화학착색료와 화학착향료 들을 안 넣은 식료품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가운데 생각있고 뜻있고 넋있다고 하는 분들, 더욱이 지식인과 지성인이라고 하는 분들은 이런 먹을거리를 얼마나 속깊이 제대로 알고 있으려나요.

 우리가 입는 옷은 어떻게 빨아서 입고 있지요? 빨래를 할 때 빨래틀이라는 녀석을 쓰나요, 두 손을 쓰나요? 빨래하는 데 쓰는 비누는 어떤 세제인가요? 빨래는 어디에서 어떻게 말리나요? 옷은 얼마나 사입고, 우리가 사입는 옷은 어떤 천으로 지어졌는지 아나요? 커피와 초콜릿만 공정무역을 하면 될까요? 이런저런 흐름은 알 까닭 없이 그저 ‘공장노동자’이면 다 똑같은 ‘노동자’일까요? 이 나라에서 지식인이라 하는 분들은 얼마나 자기 집살림을 알고 있을는지, 얼마나 스스로 옳게 집살림을 꾸리고 있을는지, 얼마나 아름답게 집살림을 이웃나눔으로 펼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성을 아버지와 어머니 한 글자씩 붙여 ‘김신 아무개’나 ‘최박 아무개’처럼 적으면 두 성을 평등하게 다루는 셈일까요? 어머니 또한 당신 아버지한테서 받은 성일 텐데?


.. 이렇듯 이름을 외우기도 쉽지 않은 해로운 화학물질들이 우리가 늘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 … 제품을 생산할 때에 사람의 건강이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보다는 생산가를 얼마나 낮출 수 있느냐를 먼저 따진 결과이다 ..  (96쪽)


 지난날 신동엽 시인이 피를 뿜으며 외친 “껍데기는 가라”는 온갖 쇠붙이 무기만 가라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전쟁무기만 없으면 된다는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삶자락 어느 구석이든 겉치레와 겉발림이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살림을 꾸려야 하고, 우리 손으로 우리 삶을 가꾸어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두 손에 비누거품 가실 날 없고 진물이 빠질 날 없는 손으로 연필을 들고 깃발을 들고 가방끈을 조여야 합니다. 두 손으로 기저귀를 빨고 아기를 어르며 밥짓고 찌깨 끓여낼 수 있은 다음에 논문을 쓰든 소설을 쓰든 기사를 쓰든 해야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한테서 당신 살아온 이야기 듣던 귀로 민중이든 시민이든 국민이든 서민이든 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내 아이뿐 아니라 옆집 아이한테 놀이노래 불러 주고 자장노래 불러 주는 입으로 역사든 진보든 혁명이든 보수든 개혁이든 반동이든 읊어야 합니다. 바닥 없는 하늘이 없고, 기둥 없는 집이 없습니다. 모래알에 기둥을 박아 보았자 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내리지 않고서는 어떠한 일이건 운동이건 뭣이건 해낼 수 없고 이룰 수 없으며 맞이할 수 없어요. 오로지 돈만 바라보는 주제에 무슨 사회운동이며,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주제에 어인 대학졸업장이며, 오로지 돈셈밖에 안 하는 주제에 웬 자기계발입니까.

 사회운동은 자기 삶을 고치는 일입니다. 대학교란 자기 마음을 뜯어고치는 일입니다. 자기계발이란 나한테 있는 사랑과 믿음을 송두리째 이웃과 동무하고 나누는 일입니다. 






 (2) 《바다로 간 플라스틱》이 밝히는 바다쓰레기


 《바다로 간 플라스틱》은 고작 150쪽 조금 넘기는 얇은 책입니다. 집에서 아기 어르고 재우고 먹이는 틈틈이 책을 넘기고 들추고 하니 며칠 만에 다 읽게 됩니다. 줄거리를 살피면, 잘게 잘게 쪼개어져도 사라지지 않는 플라스틱이 바다로 가면 쓰레기로 남을 뿐 아니라, 바다를 삶터로 두는 온갖 목숨붙이들이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들이 찬찬히 눈길을 두지 않으면서 망가지는 바다 이야기를 하고, 우리들이 알면서도 더럽히는 바다 이야기를 합니다.


.. 바다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앨버트로스의 비극은 일어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하늘 높이 나는 앨버트로스가 항공기나 높은 관제탑에 부딪쳐 몇 년 사이 수천 마리가 죽었다. 높이, 그리고 멀리 나는 새가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하늘과, 언제라도 편히 쉴 수 있는 안전한 바다는 이제 없다. 보존하고 복원하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만이 남았을 뿐이다 ..  (71쪽)


 단출하게 참 잘 엮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이런 살가운 이야기를 살가이 녹여낼 만한 가슴이 우리들한테 얼마 없겠구나 싶은 생각 또한 듭니다. 참말, 우리들은 이런 이야기책을 지식으로만 여기고 우리 매무새를 고쳐나가는 삶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바닷가에서 불꽃놀이 하는 일도 골칫거리이지만, 도시에서 불꽃놀이 하는 일도 골칫거리입니다. 이런 불꽃놀이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과 눈길도 안타까운 한편, 이런 불꽃놀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기사로 다루고 하는 우리 마음결도 슬픕니다. 바닷가에서만 안 하면 될 불꽃놀이는 아니니까요.


.. 우리가 사용하고 버린 생활용품이 모래톱이나 갯벌에 더 깊이깊이 박혔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언젠가 유물로 발견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 마구 쓰레기를 버려대면 아마 여기저기 썩지 않는 유물로 가득한 유적지가 너무 많아서, 우리 후손들에게는 더 이상 보존하고 지켜야 할 소중한 유적이 아닌 몰상식한 선조들의 더러운 쓰레기더미로 눈총을 받을 것이 뻔하다 … 이곳의 어민들은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터전인 바다를 가꾸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오래오래 후손들까지 안정적으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동참하는 것이다 .. (81, 82, 87쪽)


 구멍가게에서 맥주 한두 병 사다 마시면서, 맥주 겉에 붙은 종이딱지를 살며시 뜯어내어 말리곤 합니다. 하루쯤 두면 빳빳하게 되어 책갈피로 쓸 수 있거든요. 동네 마실을 하면서 자동차 앞유리에 끼워진 광고쪽을 빼들거나, 전철 광고판에 꽂힌 또다른 광고쪽을 빼내어 책갈피로 쓰곤 합니다. 모두 쓰레기가 되어 길바닥에 나뒹굴게 될 일을 생각하면, 한 장이라도 덜 쓰레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손전화값 알려주는 청구서가 오면 알맞게 잘라내어 책갈피로 씁니다. 잘 갈무리를 해 둔 다음, 나중에 아이하고 종이접기를 할 때 써도 되고요.

 요즈음 세상은 우리 스스로 쓰레기를 안 만들려고 애써도 어쩔 수 없이 쓰레기가 나오고 넘치고 널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한 사람 움직임은 그저 나비 팔랑거림밖에 안 된다고 느껴지지만, 그래도 한 목숨 살아가면서 조그맣게나마 몸부림을 치면서 살고 싶고, 이렇게 몸부림을 치는 동안 제가 바라보는 길과 제가 걷는 길을 좀더 곰곰이 되짚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저는 이 나라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돈을 벌고 쓰면서 살아야 할 테지만, 돈에만 매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착한 돈은 50만 원 겨우 벌 수 있다면 50만 원만 벌고, 50만 원도 못 벌게 된다면 못 벌면서 살림을 꾸릴 생각입니다. (4342.2.1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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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 늙다리 보리피리 이야기 5
이호철 지음, 강우근 그림 / 보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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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는 소’와 얽힌 추억에 젖는 일은 좋지만
 [그림책이 좋다 56] 이호철, 강우근 《우리 소 늙다리》



- 책이름 : 우리 소 늙다리
- 글 : 이호철
- 그림 : 강우근
- 펴낸곳 : 보리 (2008.12.29.)
- 책값 : 8500원


 (1) ‘소’를 모르는 우리 삶


 둘레에서 영화 〈워낭소리〉를 보러 가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먼저 본 분들이 으레 말씀하시는데, 마음은 영화관에 가 있어도 몸은 집에서 아기와 복닥입니다. 더욱이 인천에서는 딱 한 곳에서 영화를 올린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고, 우리 동네에서 퍽 떨어진 곳임만 알고 있어서 섣불리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어떻게 찾아간다 한들 저 혼자 먼저 보고 옆지기 나중에 보고 하지 않으면 볼 수도 없습니다.

 너무 많이 바란다고 할는지 모르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 극장 가운데 아기를 데리고 찾아가서 걱정없이 볼 수 있는 곳은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아기가 으앙으앙 울면 시끄러워 다른 이가 못 보게 된다고만 말할 뿐, 아이키우기로 밤잠 이룰 길 없는 수많은 아줌마와 아저씨들을 헤아리는 극장 시설이란 꿈을 꾸지 못합니다. 하기는,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 나들이를 요즈음만큼이라도 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 많은 이들 목소리와 땀방울이 있어야 했는지요.

 우리 둘레를 살피면, 책방도 도서관도 영화관도, 또 여느 밥집조차도 아이를 데리고 찾아가기에는 아주 안 좋습니다. 이렇게 하자면 돈을 많이 들여 시설을 갖추어야 하지만, 그만큼 장사하는 이한테 돈이 떨어지지 않으니 마음은 먹어도 선뜻 옮기지 못합니다.

 장애인편의시설이란 전철역에 리프트 놓거나 에스컬레이터 까는 일만이 아닐 테지만, 우리들 생각과 눈길은 ‘장애인 복지와 문화’뿐 아니라, ‘장애인 아닌 비장애인 복지와 문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남 이야기할 까닭 없이, 저부터 아이키우기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목까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저 또한 아이키우기를 지식으로만 받아들인 채, 아이키우기를 하는 엄마 아빠가 얼마나 ‘세상 복지와 문화’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갈밖에 없는지, 그러면서도 오히려 눈총을 받아야 하는지, 게다가 몸과 마음이 얼마나 지치면서 미치게 되는지 알 길이 없었겠지요. 동네에서 성당을 다니는 서른일곱 아주머니는 집에서 애 보다가 미칠 듯하면 포대기에 아기 똘똘 싸매고 업어서 바깥으로 바람 쐬러 나온다고 하시더군요. 혼자서 애를 보는 일이란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거든요. 더구나 아이만 보아야 하나요. 집안일 해야지, 남편 뒷바라지 해 주어야지, 시부모 계시면 또 시부모도 모셔야지, 아기 말고 다른 형제가 있으면 하나하나 따로 돌보아야지, 일이란 끝이 없습니다.


.. 늙다리는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여물만 맛나게 먹습니다. 망나니도 제 어미 옆에서 날름날름 마른 풀을 골라 먹고요. 뒤꼍에 쟁여 둔 검불나무를 한 아름 가져와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핍니다. 그리고 풍구로 바람을 불어 넣어 가면서 왕등겨를 한 움큼씩 아궁이 속에 던져 넣으니까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이제 아궁이 앞에 쌓아 둔 마른 솔가지를 ‘똑똑’ 부러뜨려 넣습니다. 잔솔가지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잘 타오릅니다. 소죽이 끓는지 솥에서 김이 ‘피이’ 솟아오릅니다. 늙다리는 더 못 참겠는지 빗장 밑으로 목을 쑤욱 빼고 코를 식식거립니다 ..  (17∼18쪽)


 영화 〈워낭소리〉는 못 보았지만, 지난 설날, 옆지기 식구들 사는 일산으로 나들이를 가서, 그곳 식구들하고 ‘일소 부리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다큐멘타리로 보았습니다. 영화만큼 가슴을 적신 이야기인지는 영화를 못 보아 모르겠지만, 영화 〈워낭소리〉가 어떻게 짜여져 있는가는 어렴풋하게나마 헤아리게 됩니다. 마을에서도 꼭 한 집, 당신만 수십 해에 걸쳐서 소를 부려 농사를 지으시는데, 송아지 한 마리를 일소로 부리기까지 어떻게 애를 먹는가 하는 대목에서는 코끝이 찡합니다. 처음 코뚜레를 뚫어 아픈 나머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송아지 모습을 보면서 코끝이 찡하거나 눈물이 안 날 사람이 있을까요. 소를 부리는 할아버지도 미안해 하면서 송아지 등을 어루만져 주는데.

 농사짓는 늙은 가시버시는 ‘지을수록 빚잔치’를 하게 되어, 하는 수 없이 그 아끼고 사랑하던 일소를 팔려고 내놓습니다. 고추를 팔아도 큼직한 한 상자에 고작 2500원밖에 못 받는데, 빚을 안 질 수 없는 노릇입니다. 나라밖으로 판다는 그 큰 고추상자는 상자값만 해도 1500원. 우리가 저잣거리 나들이를 가서 그 상자만큼 고추를 사려면 아마 10만 원은 치러야 할 듯하건만, 농사짓는 사람은 이렇게밖에 일삯을 못 건지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소시장에 간 할아버지는 쓰겁게 웃으면서 소를 도로 데려옵니다. 일소 값을 고작 150만 원 쳐 주기 때문입니다. 고기소로만 소를 사고파는 요즈음이니, 일소로 소를 사고팔려 할 때 어느 누가 사 가려 하겠습니까. 할머니는 빚 250만 원을 갚으려면 소를 팔아야 한다고 채근댔고, 할아버지는 어쩌는 수 없이 소를 팔려 했는데, 소를 팔아도 빚이 100만 원 남게 되면, 아예 소를 못 팔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착하게, 아니 고맙게 일을 잘해 준 소를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면서, 문득문득, 전민조 님 사진책 《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눈빛,2005)이 생각납니다. 이 사진책 겉에는 섬마을 빡빡머리 아이가 일소를 부리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는 나이가 얼마 안 되었으나 지게를 지고 있는데 지겟다리가 땅에 끌릴 듯합니다. 아이나 소나 배불리 먹지는 못하는 듯 몸집이 여위었습니다. 소는 갈비뼈가 드러나고 등날이 날카롭다고 할 만큼 등뼈가 불거져 있습니다.

 지난날은 이 나라 어디인들 배불리 먹으며 살았겠습니까만, 섬마을은 좀더 힘들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런 삶자락은 섬마을 모습을 담은 사진에도 고스란히 담기고, 이렇게 담긴 모습은 그 뒤로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가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가 살아온 모습’으로 또렷하게 새겨집니다.


.. 나는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지요. 아버지는 등불을 늙다리 주둥이 앞에 바짝 갖다 대고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막 소리를 질렀습니다. “언놈이 때렸구나! 우리 늙다리가 우쨌길래 이래 놨노! 헤헤이, 늙다리 코가 이기 뭐꼬! 말 몬하는 짐승을 우예 이래 때리겠노, 으이!” 우리 집 힘든 농사일을 다 하는 일꾼, 아버지가 그리 아끼는 늙다리를 저리 해 놓았으니 펄쩍 뛸 수밖에요 ..  (44쪽)


 인천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ㅈ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저보다 두어 살 또는 서너 살 어린데, 송도고등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가운데무렵, 이이가 다닌 학교 건너편 논에서 일소를 부리며 논갈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송도고등학교 둘레는 온통 아파트로 바뀌었기에, 그 둘레가 시골 논밭이었음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아파트로 갈아엎히기 앞서까지, ‘똑같은 인천’이었다고 하여도, 더욱이 1990년대임에도 기계가 아닌 소를 부리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렇구나,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고, 또 몸소 겪지 않았어도 영화며 텔레비전을 보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안다’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안다고 할 때에는 ‘움직임’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들 삶을 안다고 한다면, 철거민을 만들어서는 안 되며, 철거가 되려는 집에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한테 우악스러운 용역깡패나 특공경찰을 선물로 갖다 안기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경찰총장이나 대통령 부모님이나 동무가 그 ‘철거 대상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할 때에도 그처럼 몰아세울 수 있었을까요. 자기 부모나 동무가 안 산다 할지라도, 스스로 그런 가난과 고단함을 안다고 하는 이들이 그와 같이 몽둥이를 휘두르고 소방차 물을 뿜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경찰총장이나 대통령만 모르지 않습니다. 용역깡패 일을 하는 젊은이와 특공경찰 노릇을 하는 젊은이 또한 ‘철거민 이웃’을 모릅니다. 철거민 이웃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모릅니다. 그리고, ‘일하는 소’ 삶을 모를 테지요. ‘아이키우는 아줌마 아저씨’ 삶 또한 모를 테지요. ‘입시지옥이 무너뜨리는 아이들’ 삶을 모를 테며, ‘일제 식민지 찌꺼기’가 어떻게 우리 삶 구석구석 남아서 힘을 내는지도 모르리라 봅니다.


 (2) 아쉬운 그림이야기 《우리 소 늙다리》


 지나온 우리 삶을 찬찬히 돌아보며 조곤조곤 이야기로 풀어내는 《우리 소 늙다리》를 읽습니다. 구수한 글과 푸진 그림이 잘 어우러져 있어, 이 책을 펼치는 분들마다 ‘참 좋구나, 참 따뜻하네’ 하고 생각하리라 봅니다. 오로지 돈벌기에 매이는 현대물질문명으로 치닫는 한국땅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가를 조용히 일깨워 주고 있으니,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읽히며 보여주면 퍽 괜찮으리라 봅니다.


.. 늙다리는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더니, 내 쪽으로 머리를 돌렸습니다. 아직도 늙다리 주둥이 밑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늙다리는 순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 늙다리 두 눈 밑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늙다리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  (52쪽)


 그런데 그림 몇 대목이 껄끄럽습니다. 무엇보다 ‘소’ 그림이 마음으로 파고들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 그림’인데, 소가 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어미소 젖을 무는 송아지는 더더구나 송아지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릴 적 집에서 소를 키우셨다는 분이 글을 썼는데, 게다가 이분은 《연필을 잡으면 그리고 싶어요》(보리,1997)라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어 주는 길잡이책’을 엮어낸 분인데, 어찌 《우리 소 늙다리》 겉에 그려진 소 그림이 이렇게 엉터리가 되고 마는지 궁금해집니다.

 갓 태어난 송아지도 키가 꽤 큽니다. 제법 자란 송아지는 더더욱 큽니다. 그러나, 그림이야기 《우리 소 늙다리》를 보면 송아지가 목이 아파라 고개를 치켜들고 젖을 물고 있습니다. 글을 쓴 이호철 선생님이 엮은 《연필을 잡으면 그리고 싶어요》에 실린 아이들 그림을 살피면, ‘젖 무는 송아지’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아이들이 그린 ‘소 모습’만 보더라도 송아지 등짝이 어미소 배에 닿는 가운데 송아지가 고개를 모로 돌려서 옆으로 젖을 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필을 잡으면 그리고 싶어요》와 그림이야기 《우리 소 늙다리》를 낸 출판사는 같은 곳입니다.


.. 내가 어릴 때 농촌에서는 소가 집안의 큰 일꾼이었습니다. 논밭 갈고 무거운 짐 나르는 일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러 가지 일들도 다 했으니까요. 어지간한 일꾼 몇 몫의 일을 했습니다 ..  (58쪽)


 오늘날 아이들이 모르는 우리 삶 소담스러운 한구석을 밝히면서 빛내는 일은 큰뜻이 있습니다. 소를 소답게 알아야 소고기를 먹든 소를 부려 일을 하든, 소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엔 그랬지’ 하는 투로 섣불리 아이들한테 ‘지식 + 교훈’만 떠안기려고 하는 우리 어른들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면서, 오늘날 우리 어른들도 ‘소 삶과 매무새’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어설피 치우쳐지거나 비뚤어진 지식과 교훈을 떠먹이고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설 무렵 일산 옆지기네에서 텔레비전을 보니, ‘청량음료가 나쁘고 치약 샴푸 나쁘며 과자 라면 나쁘다’ 하는 풀그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방송사에서 ‘화학첨가물 집어넣은 공산 식료품’이 우리 몸에 나쁘다고 한들, 이런 공산 식료품에 길들어 있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먹이게 됩니다. 제대로 농사지은 먹을거리를 먹이지 않습니다. 값싼 공산품을 ㅇ마트나 ㄹ마트 같은 데 가서 한꾸러미 사들여 자가용 짐칸에 싣고 아파트로 돌아올 테지요. 그리고 집에서 맥주깡통을 따면서 ‘화학첨가물이 얼마나 나쁜가’ 하는 이야기를 텔레비전으로 봅니다. 때때로 《우리 소 늙다리》 같은 ‘옛생각(추억) 불러일으키는 애틋한 이야기’에 눈가를 적십니다. (4342.2.7.흙.ㅎㄲㅅㄱ)
 

 

[동영상] 엄마 젖 먹는 송아지 "예쁘다"

글을 다 읽은 분은 동영상을 보십시오. 이 그림책은 반드시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잘못된 그림으로 정보를 건네는 일은 아이한테 불량식품 먹이는 일보다 더 나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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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군의문사 유족들은 말한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엮음 / 삼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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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는 아들을 머저리로 만들고, 딸한테 생채기를 남긴다
 [잠깐 읽기 24]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책이름 :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글ㆍ사진 :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 펴낸곳 : 삼인 (2008.12.5.)
- 책값 : 12000원



 (1) 내가 겪은 군대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보면서, 이 아기가 사내로 태어나지 않아 얼마나 반가운가 하고 다시금 생각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사내였으면 기저귀를 갈다가 갑자기 오줌을 찍 사면 얼굴에 맞잖아요’ 하고 말하지만, 그런 아기 오줌질이야 아무렇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내로 태어날 때 가장 걱정스러운 ‘군대’ 문제는 아직도 풀릴 길이 까마득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 현재 국방부 훈령인 전공사상자 처리 규정엔 ‘자살’ 규정만 있고 ‘구타나 가혹 행위 등’으로 인한 자살의 경우는 명시돼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공무 수행 중 자살에 대한 순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  (64∼65쪽)


 그렇다고 계집으로 태어난 우리 아이가 ‘군대’ 문제 때문에 피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사귀는 남자아이가 군대에 갈 때라든지, 이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랑하여 혼인할 남자아이가 ‘군대에서 지내는 세월에 걸쳐 몸과 마음에 받은 생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 때에는 똑같이 ‘군대’ 때문에 피를 보게 됩니다.

 저처럼, 군대에서 바보 멍텅이 돌대가리가 되어 버릴 뿐더러, 군대를 거치면서 입이 걸어지고 마음이 메말라 버리는 사람들도 ‘군대’ 때문에 피를 보지만, 저하고 함께 사는 옆지기도 ‘군대’ 때문에 피를 보는 셈이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또 장인 장모 모두 ‘군대’ 때문에 피를 보는 셈입니다.


..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했다. 국가에서 데려간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는데 그 원인조차 밝히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함께 배를 타고 먹고 잤다는 부함장이라는 사람은 20여 일이 지나서야 아들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들 잃은 슬픔에 잠겨 식음 전폐하기를 몇 날 며칠. 부모는 생업도 접고 아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찾아나섰다. 그 과정에서 아들의 속옷이 제대로 인계되지 않고 심지어 일부 품목은 부모의 확인 과정도 거치지 않고 세탁돼 있었다. 자꾸 감추려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  (76쪽)
 

 나날이 군대 가는 사내 숫자가 줄어, 이제는 중졸자도 군대로 끌려간다고 합니다. 얼마 앞서까지는 중졸자까지는 군대에 안 갔습니다. 제가 군대에 간 1995년에는 ‘고퇴자(= 중졸자)’도 군대에 갈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중졸이면서 군대에 온 녀석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군대에서 “야, 넌 어떻게 군대에 와서는 안 되는데 군대에 왔느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대한민국 군대에 너희들이 잘못 들어왔어도 국방부 시계가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어!” 하면서 까닭없는 주먹질과 얼차려를 덤으로 받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무렵 제 후임병으로 ‘다른 형제와 친척 없는 외동 장남이면서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생활보호대상자’ 집안 아이도 여럿 들어왔는데, 도무지 군대에 와서는 안 되는 이 아이들이 어찌 군대에 들어왔던가 하고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신상기록카드를 곰곰이 살피니, 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북파간첩 키우는 부대’로 끌려갔다가(징집) ‘북파간첩 대상자 부적격 판정’을 받고 ‘일반 군대, 이 가운데 강원도 산골짝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힌 육군 보병’으로 흘러든 셈이더군요.

 요즈음도 북파간첩을 키우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1997년에 전역을 하는 그때까지, 한국군에서는 틀림없이 북파간첩을 키웠고, 그 부적격자는 우리 부대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연고자가 더 없는 외로운 집’에서 살던 아이들이었고, 이 아이들은 자기들이 군대면제자였음을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훈련소를 거쳐 자대에 왔으며, 전역하는 날까지도 이런 일은 1급비밀에 붙여져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어릴 적 살던 동네 이웃집 아저씨도 북파간첩 출신이었습니다. 이 아저씨는 키 크고 덩치 우람해 또래 동무들 모두가 무서워했지만, 우리들보고 ‘남자는 체력단련을 잘해야 해!’ 하고 으르렁댈 때를 빼놓고는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 집 형은 아버지한테 얻어맞으면서 태권도와 무술을 배웠고, 집에서도 매섭게 체력단련을 해야 했습니다. 북파간첩 출신 아저씨는 5층짜리 아파트 마당에 샌드백과 평행봉을 손수 용접하고 시멘트 부어서 만들어 놓고 우리보고도 체력단련을 하라고 시켰고, 아저씨 말이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체력단련은 재미있는 놀이라서 곧잘 즐겼습니다.

 아저씨네(라기보다는 이웃집 형네) 놀러가면 때때로 아저씨가 임진강이며 북한강이며 물속으로 헤엄쳐 북녘으로 넘어 들어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당신이 군대에서 일찍 나온 까닭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통이 나서 자기 동료가 바로 옆에서 온몸에 총알구멍이 나면서 죽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동료 주검이라도 건지고 싶었지만 자기 또한 죽을까 두려워 혼자 빠져나왔다는데 그 죄책감을 씻을 수 없었답니다.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 5분 동안 물속에서 헤엄쳐야 하는 훈련을 받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물속에서 자기들이 숨을 못 참고 물 밖으로 나올라치면 고참들이 군화발로 머리를 까고 몽둥이로 두들기면서 꼭 5분 동안 물속에서 물을 마시면서라도 버티게 했다고 했는데, 소름이 돋는 한편, 나도 5분 동안 물속에서 참을 수 있을까 하고 집에서 바가지에 물을 받아 머리를 처박아 보곤 했습니다.


.. 진상 규명 결정이 내려졌지만, 늙은 아비와 어미는 여전히 답답함이 남았다. 아들의 사망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안 받고, 국방부가 군의문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지도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 가족들은 사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에 동의했다.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지만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부검 결과는 대부분의 의문사가 그렇듯 자살이었다. 심한 모욕과 얼차려, 구타를 자행해 아들을 사지로 내몬 병사와 간부들은 제대로 된 징계 한 번 받지 않았다 ..  (81, 94쪽)


 어릴 때에는, 저 또한 군대라는 곳에 들어가기 앞서까지는, 우리 아버지가 군대에서 지역차별을 받으면서 얼차려와 주먹다짐으로 시달리다 못해 고향 동무들하고 같이 실장갑에 대못을 박고 “썅, 서로 죽어 보자!”고 싸움박질을 했다는 일이 장난이나 거짓이나 뻥튀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군대에 들어가고는, 그리고 그 군대가 남녘땅 군대에서는 가장 외지고 춥고 고되다는 곳으로 용케(?) 들어가서 스물두 달을 채우고 나오는 동안에는 생각이 아주 뒤바뀌었습니다. 왜 부잣집 사람들이, 정치꾼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군대에 안 보내려’ 하는지를 온몸으로 깊디깊이 깨달았습니다. 훈련소와 자대에서는 ‘신상명세서 쓰기’ 종이를 나누어 주며 한쪽에 ‘내 식구나 친척 가운데에 국회의원, 시도 지사 따위가 있는지 적으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유명인사나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 간부 가운데 식구나 친척이 있으면 적으라 했는데, 이렇게 적은 동기들은 모두 ‘좋은’ 데로 빠져나갔고, ‘줄 닿는 뒷배’가 없는 저 같은 떨거지는 기차와 배와 군짐차를 여러 차례 갈아타면서 강원도 양구 산골로 엉덩이가 걷어차이며 들어갔습니다.

 자대에 들어가던 무렵부터 눈이 얼마나 오지게 오던지, 사단휴양소에서 이틀이나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눈밭을 헤치고 겨우 자대에 들어가니 더블백을 풀기 앞서 빗자루와 눈삽과 흙삽을 하나씩 받고는 한 시간 동안 산을 타고 올라가서 보급로 눈치우기를 해야 했습니다. 훈련소와 자대를 거치며 ‘이놈(고참)들 눈에 밉보이면 그대로 죽어 버릴 수 있구나(이때는 ‘의문사’를 몰랐고, 그냥 ‘개죽음’만 알았습니다)’ 하고 느꼈기에 죽자 사자 고참 꽁무니에서 1미터 거리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따라붙어 겨우 ‘눈치우기 산타기’에서 낙오를 안 했는데, 고참은 자기 뒤에 1미터 넘게 떨어진 모든 후임병을 눈밭에 머리박기를 시키며 발로 뻥뻥 걷어찼습니다. 등과 배와 얼굴을. 낙오를 안 해 옆에서 다리쉼을 할 수 있는 저로서는 ‘안 맞아서 다행’이 아니라, ‘나만 안 맞으니 이따 돌아가서 지금 맞은 사람(다른 고참)들한테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크게 들어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이등병 때, 치약뚜껑에 머리박기를 하며 저녁점호를 받던 동기는 ‘치약뚜껑에 머리박기를 하는 채’로 고참한테 발길질을 받아서 이마가 쭉 찢어져서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고, 제가 전역할 무렵 스물여섯 나이로 고시에 실패해서 들어온 ㄱ대 공부벌레 늦깎이는 날마다 뒷간에서 대여섯 살 아래 동생(고참)들한테 얻어맞고 우느라 늘 눈이 부어 쳐다보기에 언제나 안쓰럽기에, 제 앞으로 나오는 담배를 몇 갑씩 슬그머니 주머니에 찔러 주곤 했습니다. 이 녀석(형)은 이때부터 담배를 배웠습니다.


.. 경찰들은 또 장례를 치러야 된다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먼저 현덕의 동료 부대원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혹시 부대에서 가혹 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살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경찰은 가족들의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단, 부대원과의 개별 면담은 허락하지 않았다 … 부모는 아무리 애간장이 끊어져도 죽은 아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찾아간 군부대에서는 오히려 “아들이 나약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부대에 피해를 주었으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을 쳤다. 적반하장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과 맞서기에 늙은 부모는 너무나 힘이 없었다 ..  (146, 156쪽)


 그렇지만 모든 군대가 주먹다짐과 욕설과 얼차려로 얼룩져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나왔던 그 양구 골짜기 부대만(민통선 안쪽에서 이북 군인과 마주하고 있는) 더 모질었는지 모릅니다. 해병대 전적비가 있는(도솔산) 그 산골짜기 부대는 한 해에 꼭 닷새만 해를 볼 수 있는 비와 안개와 눈으로 덮인 곳이었고, 주둔지 대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중대에서도 소대가 따로 지내기도 했던 만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시무시함이 더 깊었는지 모릅니다.

 사단장이나 별 달고 무궁화 단 분들께서 우리 부대에 나들이하실 때마다 모든 중대원이 하루 내내 ‘취나물 뜯기 사역’을 해서 몇 마대씩 선물로 앵겨 드리지 않으면 대대장 지시사항으로 우리 중대에 벼락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뭐 이런 일은 괜찮았습니다. 한 해에 한 번씩 사단장님께서 헬기가 아닌 지프를 타고 가칠봉전망대로 헤엄을 치러(가칠봉gop 꼭대기에는 수영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별 단 분들께서 헤엄치러 놀러옵니다. 마땅한 소리이지만, 지오피 꼭대기에 마련된 수영장은 우리 같은 땅개들이 자갈과 시멘트와 모래와 물을 주둔지부터 한 사람씩 등짐 지고 날라서 만들었습니다) 가시는데, 사단장님 지프가 작은 돌멩이 하나에라도 바퀴가 통! 하고 흔들리다가는 연대장 지시사항으로 우리 중대에 불벼락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뭐 이런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혹한기훈련을 앞두고 사격훈련을 하는데 그 추위에 총기고장도 잦고 손이 떨려 제대로 맞추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런 형편은 아랑곳 않고 제대로 못 쏜다고 몇 시간 동안 ‘뒤로 포복’으로 눈밭을 밀며 자대복귀 시키다가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 무전병 헬멧에 총질을 해대어 구멍을 내고 다음에는 우리들 대갈통에 구멍을 내겠다던 중대장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일도 그리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관물검사를 하며 ‘불온서적 색출’을 하는데,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불온서적이라고 스무 권 남짓 찾아내어 태우게 하는 일이 저한테 떨어져, 어찌 책을 태우나 속이 아파서 안 태우고 소각장 한쪽 구석에 몰래 숨겨 놓았으나 들키고 말아, “너 빨갱이 아냐? 간첩 아냐? 너희 같은 새끼들은 총으로 쏴죽여서 저기(철책) 안쪽에 갖다 던지면 월북했다고 신고하면 그만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갖은 징계와 구박과 주먹질을 받던 일도 있었는데, 여느 날 늘 벌어지는 주먹다짐과 욕설과 얼차려를 돌아보면 새발바닥 피 같은 장난입니다. 논산훈련소에서 똥물먹기가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그러기 앞서 우리 부대에서도 푸세식 뒷간을 혀로 핥아서 닦기를 시키는 고참이나 중대장이나 행정보급관이 있었고, 삽날과 곡괭이자루로 맞는 일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으며, 소총 소염기에 머리박느라 머리에 구멍이 나는 일도 잦았습니다. 






 (2) 군대에서 살아남으면 용하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참 많이 맞았지만, 저는 적게 맞은 셈이고, 저 또한 후임병을 아주 적게 때렸습니다. 저는 꼭 세 번 때렸는데 세 번 때릴 때 거의 반죽음으로 때려 놓았으며, 웬만하면 주먹이 아닌 입으로 후임병을 들볶았습니다. 저를 때렸던 고참은 전역 뒤에 어느 한 사람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저한테 맞은 후임병 셋도 두 번 다시 연락이 안 됩니다. 때린 분한테는 왜 때렸는지 묻고프고, 맞은 동생한테는 너무 미안하다고 빌고 싶으나, 어느 누구도 보거나 만나거나 알고 지낼 수 없습니다.

 그저 다들 그 끔찍한 데에서 살아남았으니, 그 일로 다 잊자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저한테 욕 많이 먹던 어느 분은 예닐곱 해 앞서인가 길거리에서 두어 번 마주쳤는데, 술이나 마시자며 연락처 좀 주고받자고 했으나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 마시지’ 하면서 끝내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모르지만, 모두들 어디에선가 어떻게든 군대에서 보냈던 일은 훌훌 털어버렸는지 모를 노릇이고, 털어낸다 해도 털어지지 않아 그때 생채기가 오늘날 자기 모습으로 굳은 가운데 사람들과 부대끼고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우리 애를 제일 괴롭혔던 그 군인이, 아주 부대 안에서 소문이 났더라고. 부산역 TMO에서 그 자를 조사하는데, 난 좀 늦게 갔어. 헌병 조사관이 추궁을 하니까, ‘어, 그럼 진술 거부하겠다’ 그러더군. 그러니 헌병이 또 달래서 진술을 시키는데……. 그 정 아무개라는 사람이 날보고 힐책을 하더라고. ‘왜 아들을 그리 약하게 키웠습니까’라고. 바로 조사관들 앞에서, 허허허 ……. 허허허, 우리 애를또 많이 괴롭혔던 자들 중에 전주에 있는 한 명은 그래도 가식적으로나마 사과를 하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쥐어박아도 살살거리고 살아남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는 뜻이겠지.” ..  (250쪽)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이라는 책을 읽으며, 어느 한편으로는 ‘군대에서 죽은 이 사람들은 그나마 자기들 목숨을 내려놓았을 때’ ‘그래, 이제 더는 안 맞아도 되고 더 욕을 안 먹어도 되며 더 속으로 눈물 안 흘려도 돼’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 군대 적 때 일이 그러했으니까요. 이등병 때 수없이 얻어맞고 불쌍하게 있던 동생들이 일병이 되고 후임병이 생기니 자기가 받은 그대로 후임병한테 고스란히 물려주는 모습을 보며, “야, 너도 이등병 때 그렇게 겪었는데 왜 그러느냐?” 하고 불러세워 따끔히 한 마디 하면 “네, 죄송합니다! 안 그러겠습니다!” 하면서도 눈빛에는 ‘씨, 씨, 그동안 맞은 만큼 돌려줘야지!’ 하는 불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곳은 뼛속 깊이 ‘시키는 대로 해라. 안 그러면 맞는다. 맞다가 죽을 수 있다. 맞다 죽으면 그냥 개죽음이다’ 하는 생각이 박혀 있으니 우리들 여느 사람 여린 힘으로는 어쩔 길이 없는가 싶곤 합니다. 그냥저냥 이등병 일병 때는 죽지 안을 만큼 맞고 버티자고 하다가, 상병 병장이 되면 죽지 않을 만큼 때려 주면서 속풀이 하자고 생각하게 되는가 싶곤 합니다. 안 맞고 크면 이상하고, 안 때리며 고참질 하면 또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가 싶습니다. 제가 상병이 되어도 동생들을 한 번도 안 때리니 동기들이 “야, 너만 안 때리면 우리가 어떻게 되냐. 너 때문에 우리가 상병이 되도 병장들한테 맞잖아. 그렇게 하면 안 돼!” 하고 자꾸 그래서, 상병 6호봉에 이르러 처음으로 동생들한테 욕을 했고, 병장 계급장을 달고 나서 비로소 주먹다짐을 했습니다. 이때에는 “얌마, 병장이 되어서도 그러면 우리 밑에 있는 애들이 함부로 날뛰어!”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리하여 군대 조직 질서가 남자들 몸과 마음이 하루하루 또아리를 틀고, 사회에 돌아와서도 이 버릇이 씻기지 않아, 한국땅 남자들은 ‘군대에서 아무리 몸소 손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옷을 개고 내무반 쓸고 닦고 이부자리 치우고’ 했어도, 군대에서 벗어나는 그때부터 모든 집안일은 ‘여자들이 알아서 할 일’로 넘기고, 무슨 일만 있으면 쉽게 주먹을 들고 손찌검을 하고 회초리나 몽둥이를 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푸름이들이 ‘제도권 교과서’가 아닌 ‘마음밭 살찌우는 진짜 책’을 찾아나서지 못하듯, 군대지옥에서 풀려난 젊은 사내가 ‘폭력으로 얼룩진 위계 질서’를 떨구지 못하고 자기 또한 ‘밥그릇 서열과 주먹힘’ 따위로 사람을 깔보거나 얕보거나 푸대접하지 않느냐 싶어요.


.. “텔레비전을 보면 매번 군대가 좋아졌다, 군대가 변했다는 얘기를 떠들잖아. 난 그거 하나도 안 믿어. 군대 깊숙이 자리잡은 폐쇄성과 폭력성이 사라지기 전에는 변했다는 말을 하면 안 돼.” ..  (98∼99쪽)


 2006년 여름이던가, 서울 어느 미술관에서 ‘이름난 어느 서양 그림책 작가’ 원화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그분 이름을 잊었지만, 온나라 어린이와 어버이한테 사랑받는 분인데, 이분은 미국사람이면서 ‘군대에 안 가고 산림보호원 공익근무’를 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총을 드는 일은 자기 마음을 다치게 할 뿐 아니라, 내 이웃을 다치게 하기에 군대에 안 가겠다고 하여, ‘대체 복무’로 산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자연을 들이마시면서 자연사랑과 사람사랑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고 밝히더군요.

 오늘날 한국땅에서 군대라는 조직을 키워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라도 키울 노릇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돈-이름-힘이 있는 사람은 다 빼돌릴 수 있는데다가, 군대라는 곳부터 ‘좋고 나쁜’ 곳으로 갈리는 한편, ‘사람 죽이는 훈련’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우리 스스로 이 땅 젊은 넋을 살인기계이자 바보로 만드는 틀거리가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대체복무제’가 하나도 없다면, 우리 나라 앞날이 어찌 될는지 걱정과 근심일 뿐입니다. 권력자한테는 젊은 넋이 모두 깨어 ‘권력이 썩지 않도록 일어서는’ 일이 걱정과 근심일는지 모르나, 이 나라와 삶터를 돌아본다면, 젊은 넋은 ‘살인기계 훈련’이 되도록 할 일이 아니라 ‘참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몸을 기르고 다스리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손길을 바라는 외로운 어르신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손이 모자란 공장과 농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젊은 넋이 세상을 더 알뜰하고 애틋하게 껴안거나 부대끼도록 하자면, 이 젊은 넋들 손을 ‘참다운 땀방울 흘리는 곳’으로 돌려놓아야지 싶습니다. 젊은 넋이 총칼 훈련 받을 시간에, 시골 논밭에서 손농사를 짓도록 하면, 우리 나라 농업은 100% 유기농으로 바꾸는 한편, 나라밖에서 곡식과 푸성귀를 사들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넉넉할 수 있습니다. 젊은날, 공장에서 일하면서 ‘물건 하나 만들기까지 얼마나 어려운가’를 몸소 배울 수 있고, 이 젊은이들이 새벽녘 길거리 청소를 해 보면서 ‘우리가 술주정을 하면서 길을 마구 더럽히거나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일이 동네를 어떻게 망치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땅 모든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편, 또래 동무들뿐 아니라, 이 나라 절반을 차지하는 딸들한테 사랑스러운 벗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군대 틀거리로는 이 땅 모든 아들들은 이태 동안 영 글러먹은 머저리나 깡패가 되어 갈 뿐입니다. (4342.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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