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폴리스 2 - 다시 페르세폴리스로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최주현 옮김 / 새만화책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바보 어른’이 아닌 ‘숨쉬는 참사람’으로 거듭나다
 [살가운 만화 45] 마르잔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2》


- 책이름 : 페르세폴리스 2
- 그린이 : 마르잔 사트라피
- 옮긴이 : 최주현
- 펴낸곳 : 새만화책 (2008.4.15.)
- 책값 : 12000원



 (1) 한국을 못 보는 눈은 이란을 못 본다


 만화책 《페르세폴리스》 1권은 2005년 10월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2권은 세 해가 거의 지난 2008년 4월에 나옵니다. 2005년 10월에 1권이 나온 뒤로 곧 2권이 나온다고 했으나 그 ‘곧’은 한 달 두 달 늦어지고 미루어지고 하다가 한 해 두 해가 되었고, 비로소 2008년 4월에 마무리가 됩니다.

 이토록 늦어진다면 출판사는 살림이 괜찮은가 걱정이 되고, 자칫 2권이 빛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모두 사라지지 않느냐 근심이 되었습니다. 한두 권짜리가 아닌 열 권 스무 권 넘는 긴 만화가 때때로 ‘번역을 그만’하면서 더 안 나오는 일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다시 나오기는 하지만, 《피아노의 숲》 같은 만화도 꽤 오랫동안 뒷권이 안 나와서 ‘설마 그 어중간한 가운데 이야기가 끝나 버렸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 “너희들 그거 알아? 이란에는 크리스마스가 없어…….” “스키 타러 간다고? 좋겠다!” “별로, 그저 그렇지 뭐.” “이란의 새해는 3월 21일이고, 그 ……” “나는 앙시에 갈 건데, 알프스랑 별로 안 멀잖아. 우리 만나도 되겠다.” ..  (18쪽)


 만화책 《페르세폴리스》는 한국 만화밭에 퍽 낯설게 느껴질 만한 책입니다. 이야기도, 만화결도, 그린이 고향나라도 모두 낯설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배울 수 있는 ‘이란’이라는 나라는 고작 ‘석유가 많이 나는 중동에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들은 이란사람이 이란말을 쓰는지 무슨 말을 쓰는지 배우지 않습니다. 나라안에는 ‘이란말’을 가르치는 대학교가 꼭 한 곳 있습니다만, 이 이란말을 가르치는 대학교에서조차 ‘이란이라는 나라에 이란말이 따로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한 학년에 고작 서른 학생뿐이고, 이 가운데 몇몇은 얼마 다니지 않고 그만두니, 몇 천에 이르는 ‘그 학교 대학생’이라 해서 이란말을 가르치는 학과를 눈여겨보거나 곰곰이 들여다볼 일은 없어요. 또한, 이란말을 배웠다고 하여 이란 대사관에서 일할 수 있느냐 하면, 아니면 이란 문학을 우리 말로 옮기는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아니올시다’이곤 합니다.

 저는 네덜란드말이라는 바깥말을 한동안 배웠는데, 이 학과에서 배울 때까지, ‘안네 프랑크’가 네덜란드사람인 줄 몰랐고, 일기를 네덜란드말로 쓴 줄도 몰랐습니다. 이제는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네덜란드말에서 우리 말로 옮긴 딱 하나 있는 번역책’은, 이 학과 교수인 김영중 님이 옮긴 판입니다. 다른 번역책은 ‘독일 번역판을 한국말로 옮기’거나, ‘일본 번역판을 한국말로 옮긴’ 책일 뿐입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도 제법 많이 읽었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작품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이분은 스웨덴사람이라 모든 문학을 스웨덴말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분 작품을 우리 말로 옮긴 분들은 ‘독일 번역책을 우리 말로 옮기’거나 ‘일본 번역판을 우리 말로 옮기기만’ 했지, 제대로 된 ‘스웨덴판 번역책’은 아주 드뭅니다(저는 딱 한 권 가지고 있습니다. 1982년에 종로서적에서 옮긴 《말괄량이 삐삐》는 판권에 스웨덴책에서 곧바로 옮겼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 루시아의 가족은 이란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매일, 나를 알고 싶어하는 삼촌이나 고모네에 초대되었다. 나의 독일어 실력은 아주 기본적이었고, 그들의 독일어는 독특했다. 불어권의 스위스에서 4년을 보낸 한 사촌이 내 통역자 역할을 자청하며 즐거워했다. 우린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학교 친구들이 좋아하는 전쟁이나 죽음과 같은 주제에 대해선 한 번도 다루지 않았다 ..  (22쪽)


 우리는 이란이라는 나라를 거의 모릅니다. 그리고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무엇 하느냐고 여깁니다.

 우리는 네덜란드라는 나라 또한 거의 모릅니다. 굳이 알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네덜란드 지식은 거의 겉핥기일 뿐, 제대로 된 네덜란드 지식을 아는 사람이란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국가대표 축구팀을 이끈 감독 몇 사람이 네덜란드사람이었으나 이이들 이름을 ‘네덜란드말’로 적거나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 ‘영어 투로 읽고 말했’습니다. 이분들 스스로 네덜란드말이 아닌 영어만 쓰기도 했지만, 우리 나라에 버젓이 네덜란드말을 가르치는 대학교가 있음에도, 그 학교에서는 통번역 학생을 길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있다 하여도 사회나 나라에서 안 씁니다.

 우리 나라에서 쓰이는 바깥말은 오로지 영어입니다. 다음은 일본말입니다. 그리고 중국말과 프랑스말쯤입니다. 독일말과 러시아말이 더러 쓰여도 그렇게까지 잘 쓰이지 않습니다. 중남미 문학을 읽자면 스페인말을 북돋워야 하고, 서양 옛 문화와 역사를 헤아리자면 그리스말이나 이탈리아말도 키워야 할 테지만, 이와 같은 바깥말을 골고루 가르치는 배움틀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뿐더러, 애써 배워도 써먹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 우리가 아무리 이란 삶과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샅샅이 살펴서 올바르게 안다 한들, 한국땅에서는 그예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지식부스러기가 될 뿐입니다.


..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고, 나의 과거를 없애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의식이 그걸 다시 불러왔다. 급기야 국적을 속이기까지 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어느 파티에서, “넌 어디서 왔어, 마리-잔느?” “난 프랑스인이야.” “아, 그래? 프랑스인치곤 재미있는 억양이구나.” 당시엔 이란은 ‘악의 전형’이었고, 이란인이라는 것은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었다. 거짓말하는 게 그 짐을 지는 것보다 더 쉬웠다 … 그리고 저녁에 집에 와서 나는 할머니의 말씀을 떠올렸다. ‘언제나 네 존엄성을 잃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 ..  (45쪽)


 생각해 보면, 이란 삶과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바로 꿰뚫는 눈길만 쓰레기 대접이지 않습니다. 한국 삶과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올바로 헤아리는 눈길 또한 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나 나라나 정부에서는, ‘올바른 눈길’과 ‘곧은 매무새’와 ‘착한 마음’을 바라지 않거든요.

 돈 잘 버는 매무새를 바라고, 돈을 바라보는 눈길을 바라며, 돈을 키우는 마음을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도 더 많은 돈을 바라는 데다가, 더 많은 돈을 준다 하면 얼씨구나 하고 달겨듭니다. 집도 돈이요 학교도 돈이요 옷과 밥도 돈이며, 사람 또한 돈으로 재고 따집니다.

 돈이 되는 일이면 붙잡고, 돈이 안 되는 일이면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들여다보는 기사거리만 언론매체에서 다루고, 사람들이 적게 들여다보는 기사거리는 언론매체에 실리는 법이 없고, 실려도 코딱지 만한 자리를 겨우 얻습니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 한들, 아무리 아름다운 이야기라 한들, 한국 사회뿐 아니라 한국에 사는 우리 스스로 아끼지 않습니다.


.. “그래도 이곳은 테헤란 북쪽이지. 남 테헤란의 가난한 동네로 가 보면 거의 하나같이 무슨무슨 순교의 거리로 불린단다. 사람들은 왜 8년 동안 전쟁을 했는지 잊어버렸어. 왜 그들의 아이들이 죽었는지. 이번 전쟁은 전적으로 이란과 이라크 양쪽 군대를 파괴하고 재정비하려는 것뿐이었지. 이란 군은 1980년대에 중동에서 가장 강성한 군대였고, 이라크 군은 이스라엘에게 현실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으니까. 서구는 이 두 편에게 무기를 팔았고, 우리는 이 우스운 게임에 말려들어갈 만큼 멍청했던 거고. 아무런 명분 없는 8년 간의 전쟁이라니. 그래서 정부는 길 이름을 순교 어쩌구 하는 것으로 바꾸어,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거야. 아마도 그들은 이 부조리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요, 하지만 다른 것도 있었어요. 오후에 텔레비전에서 자기 자식들의 죽음으로 기쁨이 충만했다는 어머니들을 봤거든요. 그게 신앙심에서 나온 건지 거짓인지, 난 모르겠어요.” “어느 정도는 둘 다일 수 있을 거야. 10년 동안 그 순교자들이 별 5개짜리 천국에 산다고 믿게 하려고 했잖아! 그동안 전쟁은 지옥 같았거든! 네가 알았다면 ……. 정전 직전 몇 달 동안은 가장 참혹했단다.” “이야기해 줘요, 아빠, 듣고 싶어요.” ..  (103쪽)


 우리 스스로 아름답게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착하게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슬기롭게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어깨동무하며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같은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기운을 얻습니다. 비정규직뿐 아니라 정규직도 길거리로 내몰리는 가운데 다부지게 싸움을 맞아들인 아줌마 아저씨들은, 스스로 부딪히고 피가 터지고 머리가 깨지면서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당신 스스로도 ‘이제부터는 바보가 되지 않’고자 다짐하고, 당신들이 낳아 기르는 ‘아이들 또한 바보가 되지 않으면서 살아가기’를 꿈꿉니다.

 아주 적은 숫자라 할지라도, 찬밥 대접이 되고 푸대접이 되고 똥대접이 되는 사람들이 밑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세상을 깨닫습니다. 당신들 스스로 돈바라기 삶자락에 매여 톱니바퀴로 굴러가기만 하던 얼거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당신들을 돕는 손길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지만, 스스로를 스스로 돕습니다. 남이 도와주는 당신들 삶이 아니라, 스스로 돕는 당신들 삶입니다.


.. 쿠웨이트 이민자들은 알아보기 쉬웠다.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을 겪은 이후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이란인들과 달리, 그들은 최신형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그들을 접했던 것은 어느 여름날 거리에서였다. 이 기분 나쁜 일을 쿠웨이트를 잘 아는 삼촌에게 말하자, 이렇게 말해 주었다. “여느 아랍 국가들이 그렇듯, 쿠웨이트에서는 워낙 여성의 권리가 박탈되어 있어서, 밖에서 콜라를 마시며 걷는 여자는 그들에게 매춘부로 보일 수밖에 없단다.” ..  (170쪽)


 만화책 《페르세폴리스》에 나오는 주인공 또한, 스스로를 스스로 돕습니다. 1권에서는, 또 2권에서도 어느 만큼 이야기가 흐르는 동안, 주인공은 ‘얼토당토않은 곳에서 내빼려’고만 했습니다. 벗어나려고만 했고, 잊으려고만 했습니다.

 스스로를 잊고, 제 식구와 동무를 잊고, 제 고향과 나라를 잊으려 했습니다.

 어디론가 떠나면 길이 열리리라 믿었고, 이곳만 아니면 꿈을 펼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자로 태어난 몸은 이란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사회며 세상이며 여자는 사람이 아닌 이란 터전이었기 때문에, 《페르세폴리스》 주인공이 괴로운 나날을 보낸 일은 아주 마땅했다고 느낍니다.


.. “할머니.” “아이구, 얘야! 무슨 일 있니?” “할머니, 너무 끔찍해요.” “그 머리에 쓴 우스꽝스런 천쪼가리는 좀 벗으면 안 돼? 나를 밀실 공포증에 시달리게 한다니깐!” “왜? 뭐가 그렇게 끔찍해?” “그거야? 네가 ‘끔찍하다’는 게? 어이구! 괜히 겁먹었네. 난 또 누가 죽은 줄 알았지.” “난 레자(지금 남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우리 이혼해야 될 것 같아요.” “내가 심장이 안 좋다는 걸 너도 알잖니! 그깟 이혼으로 그렇게 울어? 잘 들으렴! 나도 이혼했어. 55년 전에. 그 시대엔 아무도 결혼을 깨지 않았어. 하지만 난 언제나 짜증나는 남자랑 사는 것보다 혼자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고 생각한단다!” “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첫 결혼은 두 번째를 위한 연습장이란다. 다음 번엔 더 만족스러울 게다. 그렇게 우는 거 보니, 아마도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다! 꼭 지금 당장 레자에게 이야기해야 하는 법은 없어. 시간을 갖고 잘 생각해 보고, 정말 그를 원하지 않으면 그때 떠나라! 이가 썩었으면 뽑아내야지!” ..  (183쪽)


 그래도 주인공한테는 슬기로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슬기롭게 키운 할머니가 있습니다.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던 주인공은 아버지와 어머니, 또 할머니한테서 기운을 얻습니다. 아니, 벼랑으로 굴러떨어진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용을 쓰며 다시 기어오르는 기운을 스스로 내게 됩니다. 또는, 그 벼랑으로 다시 올라가기보다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가시밭길이라 하더라도 제 나름대로 새 길을 뚫어 보고자 다짐하게 됩니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당신 꿈을 붙안고 살면서 당신 아이를 길렀고, 당신 아이는 또 당신 아이대로 스스로 꿈을 붙안고 살면서 당신 아이를 낳아 이 아이한테도 스스로 제 꿈을 찾아서 펼치도록 기릅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딸이 됩니다. 태어난 해와 곳은 모두 다르고, 겪고 치러야 할 고비는 저마다 달랐지만, 바라보는 곳은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찾고 스스로 일으키고 스스로 가꾸는 삶으로 아름다운 곳을 바라보는 세 사람 눈길은 언제나 한 자리에 있습니다.


 (2) 숨쉬는 어른이 되어 가는 《페르세폴리스》


 만화책 《페르세폴리스》에는 이야기가 아주 많이 실려 있습니다. 만화라는 틀을 빌었으나, ‘이야기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빼곡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페르세폴리스》를 제대로 읽어내자면, 그림은 그림대로 넘겨보면서 글은 글대로 꼼꼼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어느 한 가지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어느 한 가지에 매여서도 안 됩니다.

 숨을 쉴 수 없도록 막힌 곳에서 태어나 자라야 했던 그린이 숨결을, 칸 가득 채워진 깨알 같은 글씨를 또박또박 읽어 나가면서 한 쪽 두 쪽 더디게 넘기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면, 하루는 치과에 들러야 했는데, 수업이 예상 밖으로 늦게 끝났다. 갑자기 확성기에서 어떤 목소리가 울렸다. “파란 옷 입은 여자 분, 뛰지 마세요! 파란 옷을 입은 여자 분! 뛰지 마십시오! 야! 거기 파란 옷! 뛰지 말란 말야!” ‘나?’ “아가씨, 왜 뛰는 겁니까?” “너무 늦었어요! 버스를 잡아야 한다구요.” “아, 그렇지만, 당신이 뛸 때 당신의 뒤쪽이 움직이잖아요. 어떻게 말해야 하나. 적나라하다는 거죠!” “그럼 당신들이 내 궁둥이를 쳐다보지 않으면 될 거 아냐!” 내가 너무나 소리를 크게 질렀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체포하지도 않았다 … 정권은 잘 알고 있었다. 집을 나서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 ‘내 바지가 충분히 긴 건가? 베일이 잘 씌워졌나? 화장한 게 너무 진한가? 나를 채찍으로 때리면 어쩌지?’ 들을 던지는 사람은, 더 이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나의 사상의 자유는 어디 있지? 나의 언론의 자유는? 내 삶은 살 만한 걸까? 정치범들은 어떻게 된 걸까?’ ..  (150∼151쪽)


 1969년에 태어나 어린 나날을 보내다가 전쟁 불길에서 몸을 빼내어 유럽나라에서 지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여러 해를 보내면서 뼛속 깊이 아픔과 생채기를 받지만, 이 아픔과 생채기를 스스로 다시금 우뚝 서려는 눈물로 삭이는 이야기가 담기는 만화 《페르세폴리스》입니다.

 주인공은 더는 내빼지 않고자 이란으로 돌아왔지만, 다시는 내빼지 않으려고 다시 이란을 떠납니다. 주인공한테는 자기가 어디에 발을 붙이고 있느냐보다도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훨씬 큰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버지만큼이라도 튼튼해지자면, 할머니만큼이라도 당찬 사람이 되자면, 아직은 너무 어리고 철없는 풋내기임을 깨닫고 ‘더 배우’려고 새 길을 나섭니다.


.. “20일 동안 난 그가 영웅이라고 생각했는데!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그 번지르르한 빈말들을 봐! 자기 부인에게 말 한 마디 하게 놔두질 않잖아! 아, 이란 남자들이라니!” “그런 말 마! 이건 이란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야. 남자들은 모두 다 그래. 2년 전에 스페인 외교관이랑 사귀었는데, 겉보기엔 나은 것 같았지만 속은 다 똑같더라.” “여기선 모든 법이 남자들 편이잖아! 만약 어떤 남자가 15명의 여자 앞에서 여자 10명을 죽인다 해도, 누구도 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릴 수 없어. 왜냐하면, 살인 사건에 대해서 우리 여자들은 증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 게다가 이혼할 권리도 남자들에게 있어. 설령, 남자가 이혼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에 대한 권리는 남자들에게 있지! 어떤 종교인이 이 법을 정당화시키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남자는 씨앗이고, 여자는 그 씨앗이 자라는 땅이래. 그러니까, 아이는 당연히 아빠에게 속한다는 거야! 믿을 수 있니? 난 더 이상 못 참겠어! 이 나라를 뜰 거야!” ..  (187쪽)


 그러나 주인공은 아버지만큼이나 할머니만큼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주인공 스스로도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 또래가 이란에서 사람다움을 간직하면서 살아가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깨닫고 익히면서 살아나갑니다. 할머니는 할머니 또래가 이란에서 사람됨을 잃지 않으면서 뿌리박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부딪히면서 배우고 살아왔습니다. 주인공은 주인공대로 고향나라 이란이 볼썽사나운 꼬락서니로 나뒹굴기를 바라지 않는 한편, 이란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디딘 지구라는 땅떵어리에서 저마다 볼썽사나운 꼬락서니가 아닌, 아름다운 몸짓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란 남자만 얼간이가 아니라 스페인 남자도 얼간이요 프랑스 남자도 얼간이입니다. 그러면 한국 남자는 어떻겠습니까. 일본 남자는? 중국 남자는? 미국 남자는? 아니, 남자와 여자 울타리를 넘어 이 땅에 발딛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어떻게 제 삶을 꾸리고들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다움을 스스로 즐기며 이웃과 넉넉히 나누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고운 목숨임을 깨닫듯 이웃 또한 고운 목숨임을 깨닫고 있을까요.

 입에 발린 평화만 외치는 우리는 아닌가요. 겉치레 자유와 민주를 들먹이는 우리는 아닙니까. 껍데기 평등과 생태를 내세우는 우리는 아니온지요.


.. “너희들 그거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걔는 자기 나라나 부모 얘긴 절대로 안 해.” “당연히 그렇겠지! 전쟁을 겪었네 하는 거 다 거짓말이야. 그게 다 관심을 끌려고 그러는 거라구.” “어쨌든 걔 부모도 걔한테 관심이 없는 게 분명해. 아니면 왜 애를 혼자 외국에 보냈겠어?” “너희들, 입닥쳐! 아니면 내가 닥치게 해 줄까! 나는 이란인이고 그게 자랑스럽다구!” “쟤, 완전 돈 거 아냐?” ..  (46∼47쪽)


 다시 ‘페르세폴리스’로 돌아온 《페르세폴리스》 주인공은 고향나라 이란을 사랑합니다. 고향나라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고향나라가 어처구니없이 굴러떨어지거나 비뚤어지거나 얼빠진 모습으로 치닫는 일을 슬퍼합니다. 고향나라 사람들이 제 넋과 얼을 잃고 스스로 바보가 되어 가는 모습을 가슴 아파합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이란사람’인 스스로가 더 단단해지고 따뜻해져야겠다고 느낍니다.

 우리 사는 이 땅에서도, 우리가 우리 고향나라를 더욱 사랑한다면, 아니 참다이 사랑한다면 오늘날과 같이는 살아가거나 정치꾼을 뽑거나 입시지옥을 붙잡고 있거나 돈벌이에만 눈이 벌건 채로 억눌려 있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고향마을 사람을 사랑한다면, 아니 아름다이 사랑하는 마음결이라면, 다른 이 얘기를 하기 앞서 우리 스스로 제 삶을 고치고 키우고 북돋우며 날마다 새로워지고 애쓰리라 봅니다. 어린이였던 ‘마르잔 사트라피’는 《페르세폴리스》 2권을 거치며, 드디어 어른이 되었습니다. (4342.4.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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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09-04-1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만화책이 있었는지 오늘에야 알았는데
참... 멋진 만화책이네요... ^^

따뜻한 4월인데 '잔인한 4월'이란 말에 공감하게 되는 날이라서
님 블로그 찬찬히 보고 있습니다

다시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책은 정말 훌륭한 친구네요.

잘보고 갑니다 ^^

숲노래 2009-04-14 14:50   좋아요 0 | URL
만화책 전문가게를 가지 않고는, 좋은 만화를 놓치게 된답니다~~
ㅠ.ㅜ
 
나의 꿈꾸는 눈동자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76
제니 수 코스테키-쇼 지음, 노은정 옮김 / 보림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사팔눈’이 멋지다고 생각한 아이가 키운 꿈
 [그림책이 좋다 62] 제니 수 코스테키-쇼, 《나의 꿈꾸는 눈동자》



- 책이름 : 나의 꿈꾸는 눈동자
- 글ㆍ그림 : 제니 수 코스테키-쇼
- 옮긴이 : 노은정
- 펴낸곳 : 보림출판사 (2009.3.10.)
- 책값 : 9800원



 (1) 내 눈에 보이는 모습들


 아침에 전철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서는, 오늘은 일찌감치 사진기 목에 걸고 자전거 몰고 골목마실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와 지지난해를 돌아보건대, 4월을 막 넘긴 이무렵에 골목마실을 해야 개나리 노란 꽃망울을 한가득 볼 수 있습니다. 이주를 넘기고 나면 노란 꽃망울이 지고 푸른잎이 돋습니다. 또한, 엊저녁 동네 구멍가게에 보리술 한 병 사러 가며 보니, 구멍가게 옆 텃밭에 잇빛 진달래가 꽃망울을 흐드러지게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개나리와 함께 진달래도 구경하고, 또 개나리와 진달래보다 먼저 꽃을 피우다가 금세 지는 이팝나무 꽃도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 태어났을 때부터 내 눈은 서로 다른 쪽을 보고 있었어요. 누군가 이렇게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나요. “사팔뜨기잖아!” ..  (6쪽)
 





 아침 아홉 시가 조금 지납니다. 자전거를 들고 내려옵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허연 구름이 가득합니다. 빗줄기라도 뿌리려나? 그냥 걸어서 다녀올까? 그렇지만 걸어다니다가 비를 만나기보다는 자전거 타고 움직이다가 비를 만나면 집에 돌아오기 한결 낫지 않을까. 오면 오는 대로 맞고,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다니자.

 자전거는 맨 먼저, 엊저녁 들른 구멍가게 옆으로 갑니다. 잇빛 꽃망울 앞에 서서 물끄러미 들여다봅니다. 꽃그릇 하나에 진달래나무 한 그루이지만, 이 한 그루만으로도 골목이 환하다고 느낍니다. 아침길을 나서는 이웃집 사람들은 따로 이 진달래한테 눈길을 보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당신 댁에도 진달래쯤이야 한두 그루쯤 기르고 있기 때문일 테지요. 또는, 당신 댁에서 기르는 이팝나무나 개나리가 한결 어여쁘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릅니다.

 금창동사무소 옆을 따라 창영초등학교 울타리 길을 달리다가 우뚝 멈춥니다. 손바닥 만한 동네 쉼터 앞으로 마련된 텃밭 둘레에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져 있습니다. 꽃망울을 들여다보니 오늘 오지 않았으면 이 흐드러진 노랑물을 느끼지 못했겠구나 싶습니다. 지난해와 지지난해에는 꼭 이맘때를 놓쳐서 무척 아쉬웠는데 올해에는 꼭 알맞춤하게 때를 맞춥니다. 골목마실 사진찍기를 하자면 적어도 세 해라는 세월쯤은 들여야 꽃때를 맞출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 나는 “꿈꾸는 눈동자”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아요. 그 눈길이 가는 대로 내 마음이 움직이니까요. 때로는 아이들이 놀리곤 해요. 내 두 눈이 저마다 다른 곳을 보고 있어서 꼭 이구아나 눈동자 같다고요.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이구아나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나도 분명히 멋질 거예요 ..  (7∼8쪽)
 



 한참 돌아다니는데, 송림3동 92번지 조그마한 집 문에 ‘보증금 100 월세 10, 방 1 부엌 1 도시까스’라 붙은 알림쪽이 보입니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인데 도시가스가 나온다라, 어떨까, 괜찮을까. 방이 아주 작지만 않다면 아기와 함께 세 식구가 오순도순 지낼 만하지는 않을까.

 알림쪽에 붙은 번호로 꾹꾹 누르는데 받지 않습니다. 못 받으시는 듯. 이따가 다시 걸기로 하고 좀더 골목마실을 합니다. 우리 동네에서 새 삯집을 얻으려면 부동산에 알아볼 수도 있지만, 이렇게 구비구비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문에 붙은 알림쪽을 찾아보기도 해야 합니다. 부동산에 내놓는 집보다는, 한 동네에 사는 사람한테 내놓는 집이 좀더 많거든요. 있는 집들이야 부동산에 내놓을 만하지만, 없는 집에서는 복비 몇 만 원도 아쉬워 알음알음으로 방을 놓고 얻고 합니다.

 쭐래쭐래 걷기도 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슬슬 달리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복덕방 앞에 잠깐 멈추어 봅니다. 또 모르는 일이니 어떤 방이 나와 있나 들여다봅니다. 방 둘에 기름보일러가 있다는 전세 800짜리 집이 보입니다. 전세 800이라면 좀 버겁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그 옆에는 보증금 50에 달삯 5만 원인 방 둘짜리가 보입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복덕방으로 들어가고, 복덕방 할아버지와 그 집을 구경하러 찾아가 봅니다. 낮에 불을 안 켜면 깜깜하지는 않으나 햇볕은 들어오지 않고, 푸세식 뒷간이 옆에 딸려 있습니다. 벽에 짙게 밴 곰팡이 자국에다가 이웃집에서 기르는 큰 개 두 마리 때문에, 이 집이 아주 눅어도 힘들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 집에서 대학생 둘이서 엊그제까지 살다가 집을 비웠다고 합니다. 도배도 않고 장판도 안 깔고 그 대학생들이 용케 잘 살았다고 하는데, 달삯을 삼만 원으로 깎을 수도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지만, 방은 하나요 달삯이 10만 원일 그 집이 좀더 마음에 남습니다.


.. 어느 날,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창밖을 보는 듯한 내 눈을 보고 알림장에다 “안과 치료가 필요함.”이라고 써 주었어요. “난 됐어요.” 나는 엄마 아빠에게 말했어요. “내 눈은 멀쩡해요.” ..  (16쪽)
 





 자전거를 몰아 아까 그 집 앞에 섭니다. 다시 전화를 겁니다. 집임자가 받습니다. 도화1동에 사신다며 이리로 오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기다리기로 하고 둘레 골목마실을 합니다. 바로 뒤편 샛골목으로 오릅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까지만 드나들 수 있는 비알진 골목으로 들어섭니다. 대문을 마주한 두 골목집에서 저마다 내놓은 빨래가 한 가득 해바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집 빨래에는 햇볕이 닿고 한 집 빨래에는 햇볕이 안 닿습니다. 저런저런.

 빨랫대에 수북하게 걸린 빨래를 살며시 들여다봅니다. 아기 옷이 꽤 많습니다. 두 집 모두 갓난쟁이가 있는가 봐요. 살살살 자전거를 끌면서 좀더 돌아다니니, 아기를 업고 슬금슬금 나들이를 하는 젊은 아주머니가 보입니다. 집 앞 텃밭을 일구고 장독대를 들여다보는 할매가 보입니다. 드문드문 차가 다니는 데에는 교회 앞. 집이 교회 앞이라는 대목에서 조금 걸리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아주 고즈넉한 동네이면서, 동네에 우리 아이 또래인 아이도 꽤 많은 듯하니 동네에서 동무를 사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깃든 집 둘레에는 아무런 또래동무가 없거든요.

 집임자가 올 때가 다 되어 자전거를 싱 달려 그 집 앞에 닿습니다. 마침 집임자도 교회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오는 길. 꾸벅 인사를 하면서 집으로 들어가 봅니다. 문을 여니 곧바로 트인 부엌(부엌이라기보다는 문간인데 수도꼭지를 놓은 자리)이고, 막바로 방 한 칸. 좁은 쪽으로 누워 봅니다. 세 식구가 나란히 눕고도 벽에 옷통과 작은 책상 하나를 놓을 자리가 납니다. 방 크기 절반 조금 못 될 만한 다락이 하나 있습니다. 다락이라니, 멋진걸. 다락으로 기어들어갑니다. 건너편 교회가 바라다보입니다. 다락에서는 앉을 수 없고 그냥 엎드려만 있어야 하지만, 꽤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빨래는 옥상에서 2층 집 사람과 함께 널면 된다 하고, 뒷간은 이웃집과 함께 쓰는 자리가 붙어 있습니다. 이웃집에는 중학교 다니는 아이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하고 부모 둘이 산다고 합니다. 전기와 물은 서로 나누어 낸다고 하니, 이번에도 세금 내는 데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아껴도 어쩔 수 없는 살림이 되겠구나 싶습니다.

 요모조모 살피고 있자니 뒤에서 집임자 할매가, 당신 아이들이 클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면서, 아이들이 나중에 ‘이런 좁은 데에서 사느라 다리를 못 뻗어 키가 못 컸잖아요’ 하면서 투정을 부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훗. 그런 이야기는 달삯방 얻으려는 사람한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못 되는 듯한데. 하하 웃으면서 ‘그래도, 이만하면 꽤 살 만한데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 박사님은 내 오른쪽 눈에 납작하고 동그란 반창고를 붙여 주었어요. “이렇게 하면 가물가물 눈이 빠릿빠랫해질 거야.” ‘난 원래 빠릿빠릿한데.’ ..  (22쪽)


 집임자 할배는 제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해 보고 괜찮다 싶으면 연락을 하라는 말을 남기고 차를 타고 댁으로 돌아갑니다. 저도 도서관 문을 닫아 놓고 너무 오래 밖에서 보냈구나 싶어, 다시 자전거에 올라 숭의동 골목을 조금 더 돌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나올 때와는 달리 하늘에 잔뜩 끼어 있던 구름이 가시면서 햇살이 비칩니다. 햇살이 비치니 조금 덥습니다. 반바지를 입고 나오려다가 말았는데 반바지 차림이어도 괜찮았겠구나 싶습니다.

 전도관 재개발구역으로 들어가는 숭의3동 109번지 언덕골목을 살몃살몃 거닐고 자전거를 몰면서 개나리와 진달래를 바라보다가는, 며칠 뒤면 막 벌어지겠구나 싶은 목련 봉오리를 올려다봅니다.

 비가 오는 날은 비 느낌과 함께 싱그러운 이 골목이고, 눈이 오는 날은 눈 느낌과 함께 깨끗한 이 골목이요, 햇살 맑은 날은 햇볕 느낌과 함께 따사로운 이 골목입니다. 아까 그 송림3동 92번지도 괜찮지만 숭의3동 109번지에 삯집이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꿈을 꿉니다. 그래도, 이만한 방이라도 어디인가 싶습니다.

 이 방에 삯을 얻고 머잖아 아이가 걸음마를 하게 되면, 아이 손을 잡고 걷고 뛸 골목 놀이터에서 날마다 기나긴 시간을 보내지 않으랴 싶습니다. 차는 다닐 수 없고 사람만 오갈 수 있는 골목에서 세 식구가 한결 싱그럽고 맑으며 따뜻한 기운을 얻으며 지내노라면, 이 기운을 우리 둘레 사람한테도 넉넉히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스티로폼 꽃그릇 농사를 아직 못하고 있지만, 둘레 어느 집에서나 이와 같은 농사를 짓고 있으니, 우리도 이참에 문간 바깥에 꽃그릇을 몇 가지 차려 놓으면서, 우리 집 앞 골목을 오가는 사람부터 우리 세 식구까지 꽃기운과 풀기운을 듬뿍 받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 하고 꿈을 꾸어 봅니다.
 





.. 이튿날 아침, 난 엄마한테 내 마음을 이야기했어요. 너무 슬퍼서 학교에 가고 싶지도 않다고요. 엄마는 곰곰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제니 수, 우리 좀 다르게 생각해 보자꾸나.” 그래서 나는 엄마랑 같이 첫 “그림 안대”를 만들었어요. ‘엄마는 정말 똑똑해.’..  (31쪽)


 우리한테는 자가용이 없어, 이맘때 흔히들 자가용 타고 인천대공원이니 월미도니 또 어디니 하고 다니는 사람들처럼 꽃구경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자전거가 있어, 언제라도 자전거를 몰고 이웃 동네 꽃골목 마실을 즐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 튼튼한 두 다리로 뚜벅뚜벅 골목을 누비면서 집집마다 차려 놓은 꽃잔치길을 온몸으로 껴안으면서 즐기기도 합니다.

 큰 놀이공원 너른 꽃밭에서 피어나는 꽃도 꽃이요, 조그마한 골목길 한켠에서 피어나는 꽃도 꽃입니다. 골목길 시멘트 틈바구니에서 고개를 내미는 작은 풀꽃도 꽃입니다. 낡은 꽃그릇이나 스티로폼 통이나 바구니에서 자라는 푸성귀도 풀이며, 고추와 토마토가 틔우는 꽃도 꽃입니다.

 더 나은 꽃이나 덜 좋은 꽃은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꽃은 모두 꽃이며, 모든 꽃은 그 나름대로 곱고 환하며 싱그럽다고 느낍니다. 우리한테 마음만 있으면 어느 꽃이든 어디에서 자라는 꽃이든 이 소담스러운 내음과 기운과 빛깔을 조촐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느낍니다.
 





 (2) 그림책 《나의 꿈꾸는 눈동자》에 담은 이야기


 그린이 스스로 어릴 적에 겪은 일을 담아낸 그림책 《나의 꿈꾸는 눈동자》를 읽어냅니다. 그린이는 처음으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하는데, 첫 작품으로는 더없이 훌륭하다고 느낍니다. 누구보다도 당신이 겪은 일을 담았으며, 당신이 겪은 일을 다름아닌 당신 눈과 마음으로 곱새겨서 펼쳐 놓았습니다.

 사팔눈으로 태어났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린이는 ‘사람들이 놀리는 내 눈’이야말로 멋있고 재미있고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구아나 눈동자’라고 놀리더라도 그린이는 ‘이구아나는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내 눈은 더 멋있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병원 의사가 그린이 눈을 ‘사팔이 아닌 정상(?) 눈’으로 고쳐 주었다고 하나, 그린이는 ‘사팔눈’이었어도 ‘빠릿빠릿’했으며, 언제나 그린이 두 눈은 ‘멀쩡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생각을 입밖으로는 꺼내지 않습니다. 괜히 입밖으로 꺼내 보았자 재미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으리라 느꼈을 테니까요.


.. 내 두 눈은 마치 환상의 짝꿍 같아요. 오른쪽 눈은 길잡이예요. 숫자를 잘 보면서 나를 이끌어 줘요. 내 꿈꾸는 눈동자는 화가예요. 색깔을 주로 보거든요. 모험도 좋아해요. 그래서 두 눈이 함께 있으면 못할 게 없어요 ..  (9∼10쪽) 






 현실이 아닌 꿈에서 살았던 그린이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꿈에서 허덕인 그린이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꿈에서 살던 그린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즐기려는 마음이었기에 꿈을 꿀 수 있던 그린이가 아닌가 느낍니다. 사팔눈인 내 몸을 사랑하고, 이구아나 닮았다는 내 눈을 사랑한 그린이는, 누구보다도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그 나름대로 꿋꿋하고 힘차게 걸어갈 길을 잘 알고 있었다고 느낍니다.


.. ‘내 눈은 항상 멀쩡했는데.’ ..  (38쪽)


 이 꿋꿋함과 힘참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요? 그림책 《나의 꿈꾸는 눈동자》에서는 이 밑힘을 따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린이가 병원에 가서 오른눈을 가리고 사팔인 오른눈으로만 세상을 보며 다니라고 한 의사 말 때문에 너무 괴롭고 힘들어 밤새 잠을 못 자고 눈물을 흘리다가 어머니한테 이 일을 모두 털어놓았어요. 이때 그린이 어머니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한 마디를 했습니다. “제니 수, 우리 좀 다르게 생각해 보자꾸나.”

 그러면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도 기쁘고 아이로서도 기쁠 훌륭한 풀이법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이 풀이법을 따르는 어린 날 그린이는 ‘엄마는 정말 똑똑해’ 하고 생각해요.

 이 생각, ‘엄마는 정말 똑똑해’는, 제 느낌입니다만, ‘엄마는 참 사랑스러워’라든지 ‘엄마는 더없이 믿음직해’라든지 ‘엄마는 언제나 든든해’ 하는 애틋함과 반가움과 고마움이 담긴 생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리하여 어린 ‘사팔눈 제니 수’는 둘레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놀리더라도 늘 꿋꿋할 수 있었고, 제 사팔눈을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꿈꾸는 아이가 될 수 있는 가운데, 제 두 눈동자는 저마다 맡은 몫이 달라, 이 다른 몫대로 사이좋게 어울린다고 깨닫게 되었구나 싶어요.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리고 이 깨달음이 좋은 밑힘이 되어 무럭무럭 자라났고, ‘어린 제니 수’가 ‘어른 제니 수’가 되고 난 다음, 아마도 즐겁고 신나게 《나의 꿈꾸는 눈동자》라는 그림책을 그려내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사팔눈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늘 따뜻하고 믿음직스러운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싱그러운 꿈꾸기를 멈추지 않은 그린이 스스로가 튼튼하게 두 다리를 이 땅에 디디고 있었기 때문에. 






.. 내 꿈꾸는 눈동자는 튼튼해졌어요. 게다가 훨씬 당당해졌어요. 아마 사랑이 조금 더 필요했나 봐요. 이제 내 외눈박이 생활도 끝났어요 ..  (38쪽)


 책을 덮으면서 한 가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책이름이 《나의 꿈꾸는 눈동자》인데, “내 꿈꾸는 눈동자”라든지, 그냥 “꿈꾸는 눈동자”라고만 했으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영어 ‘my’를 우리 말로 옮기면 ‘나의’가 아닌 ‘내’예요. 그리고 이 책에서는 굳이 ‘내’를 넣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4342.4.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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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예수 - 예수는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비출 것이다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지음, 원충연 옮김 / 달팽이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95 ― 종교란 ‘가르침ㆍ봉사ㆍ선교’ 아닌 ‘사랑’
 :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볼룸하르트, 《숨어 있는 예수》


- 책이름 : 숨어 있는 예수
- 글 :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 옮긴이 : 원충연
- 펴낸곳 : 달팽이 (2008.8.5.)
- 책값 : 8500원



 (1) 우리가 읽을 책이라면


 저한테 “어떤 책을 즐겨 읽으셔요?” 하고 묻는 분들한테 언제나 “읽어서 좋고, 받아들여 살 만한 책을 즐겨 읽습니다.” 하고 대꾸합니다. 문학이냐 비소설이냐 인문학이냐 자연과학이냐 종교냐 예술이냐 하는 갈래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만화책이나 사진책이나 그림책을 더 좋아할 수 있고, 글만 가득한 책을 더 즐길 수 있습니다. 그 책이 제 마음을 톡톡 건드릴 수 있다면 모두 반갑습니다. 다만, 건드리다가 그치면 서운합니다. 책이 더 아름답지 못해서 서운하다기보다, 이 책을 쓴 사람 마음밭이 너무 얕아서 서운합니다. 글쓴이가 좀더 깊고 너르게 뻗어나가지 못했다고 느끼니 불쌍한 마음이 들어 서운합니다. 얕은 책을 애써 펴낸 책마을 일꾼 땀방울이 서운합니다. 더 가다듬지 못해서 안타까운 한편, 더 갈고닦으며 글쓴이를 일으켜세우지 못해서 슬픕니다.

 이리하여, 저는 따로 갈래를 나누지 않고 책을 장만하여 읽습니다. 종교책을 읽는다 할 때에도, 개신교와 천주교와 천도교와 불교와 이슬람교 책을 굳이 가르지 않습니다. 어떠한 종교를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저 스스로 참다운 길을 느끼도록 해 주는 책이라면 기꺼이 집어듭니다. 어떠한 종교를 다룬달지라도, 스스로 우상을 모시지 않는 이야기로 펼쳐진다면 고마이 받아듭니다. 어떠한 종교 테두리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자기들 종교 테두리 사람한테만 달고 맛난 마음밥을 선사할 그릇이 아닌 책일 때에 비로소 사들게 됩니다.


..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게. 자유로우면서도 하나님이 자네에게 보내는 사람들과는 일치를 이루게. 사람들이 자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세상에서 이뤄지게 될걸세 … 선교사는 종교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 예수의 이름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면 그만이야 … 성령은 파당을 만들지 않고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일을 한다네 … 이런 입장 때문에 아마 자네는 윗사람과 갈등을 겪게 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하나님이 내려 살펴 줄 거야. 무슨 일이 생기든지 기다려야 하네 …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성령은 군림을 허용하지 않네. 사람들은 생명을 주는 섬김이 아니라 힘에 의지해서 살고 싶어하는데, 그것은 세상에 죽음만을 가져다준다네 … 크게 소리칠 필요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돼 … 말의 하나님이 아니라 행동의 하나님이라는 걸 알게 될 거네 ..  (23∼24, 28, 33, 38쪽)


 두 번째 물음은 으래 “한 달에 몇 권쯤 읽으셔요?”나 “한 해에 몇 권쯤 읽으셔요?”입니다. 어떤 책을 즐겁게 읽느냐는 물음 못지않게 부질없는 물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작가 책을 좋아하느냐는 물음과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물음이라고 느낍니다.

 제가 어느 일터에 몸담고 있다고 치면, 달삯으로 얼마를 받느냐 묻는 소리인데, 제가 달삯을 200만 원 받으면 그럭저럭이고, 210만 원 받으면 뛰어나고 220만 원 받으면 훌륭하겠습니까. 달삯 1000만 원은 되어야 뭔가 있어 보이고 달삯 900만 원은 좀 모자라고, 달삯 1100만 원은 아주 뛰어나 보이겠습니까.

 어쩌면, 아이들한테 “너 몇 살이니?” 하고 묻는 철없는 어른들 물음하고 똑같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이는 그저 그 아이인 대로 반갑고 귀엽고 좋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네 살이든 여덟 살이든 그리 마음쓸 일이 아닙니다. 아홉 살인데 키가 몹시 크다든지 열세 살인데 키가 참 작다든지 하는 일 또한 마음쓸 대목이 아닙니다. 열다섯에 부쩍 클 수 있고, 아홉 살 키가 스무 살까지 갈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겉으로 드러나는 매무새가 아닌 속으로 살찌우는 매무새를 들여다볼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속차림을 살피고 속차림을 북돋우며 속차림을 아낄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튼, 어제도 이 물음을 받고 시익 웃으면서 “한 달에 300권쯤?” 하고 대꾸했습니다. 예전처럼 책방 나들이를 자주 못하고 살기에(예전에는 날마다 두어 곳씩 다녔으나 이제는 한 주에 두어 번 겨우 다니니까요), 예전만큼 책을 장만하여 읽지는 못하지만, 책방 나들이에서 더듬는 책과 꼼꼼히 되짚는 책과, 거듭거듭 곱씹는 책을 헤아리면 이만한 숫자로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많다면 많은 숫자일 테지만, 적다면 적은 숫자이고, 넘치면 넘치는 숫자일 테지만 모자라면 모자라는 숫자입니다. 한 달에 삼백 권 읽는 사람과 서른 권 읽는 사람과 세 권 읽는 사람과 세 쪽 넘기는 사람하고는 그리 다를 바가 있지 않습니다. 그저 제 삶이 이러할 뿐입니다.


.. 일하는 계급,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이 되어 있네. 하늘의 이름으로 그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이름은 의미가 있어질 거야 …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 위가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이 희망이지 않나? 죽음을 이긴 하나님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싶어하고 있어. 그러니 특정 종교를 위한 선전에는 관심이 없지. 자네는 모든 사람을 위해, 그들이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고 모두에게 비추는 복음을 당당하게 대표해야 하네. 예수는 낮은 사람들로부터, 낮은 사람들을 위해 왔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게나 … 자네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어야 해. 그래서 나중에는 후원자들 없이도 지낼 수 있어야 하고, 정부 관리들이나 성공한 사업가들한테 칭송을 받기보다는 낮은 사람으로 머물러 있게나 ..  (25, 47∼48, 56쪽)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보리술을 사러 찾아가는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할매는 늘 성경을 펼쳐 놓고 있습니다. 돋보기를 쓰고 찬찬히 읽어내려 가십니다. 성경 통째로 읽기를 퍽 많이 하셔서 당신 다니는 교회에서 표창장을 받으셨다고 하고, 무거운 성경을 받쳐 놓고 읽는 틀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할매 삶이 어떠한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마음가짐과 말씨로 사람들과 마주하는지 깊이 알지 못합니다. 다만, 틈틈이 스쳐 지나가는 만남과 할매가 동네에서 이웃한테 보여주는 만남과 때때로 당신 아이들(막내가 저보다 일곱 살쯤 위이더군요) 살아가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말씀으로 돌아보건대, 할매 마음자리 깊이는 할매가 다니는 ㅊ교회 목사님하고 대면 웅숭깊구나 싶어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어슐러 르 귄’이라는 분이 쓴 《어스시의 마법사》에 나오는 아렌과 게드와 같은 셈이구나 싶습니다. 아렌은 아주 젊은 제자요 게드는 나이 많이 든 훌륭한 임금 같은 스승입니다. 아렌은 게드를 모시면서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데, 이 여행길은 아렌이 게드한테서 배우는 여행길이라 볼 수 있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외려 게드가 아렌한테서 배우는 여행길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할매가 다니는 ㅊ교회뿐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에서는 목사님이 신도한테 가르침을 베푼다기보다, 신도들이 목사님한테 가르침을 베풀면서 더 깊고 너르게 예수님 사랑과 마음과 뜻을 받아들이고 깨닫도록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너비와 깊이를 ‘징검다리’에 선 이들한테 넉넉히 나누어 주면서, 징검다리에 선 이들이 다른 나그네를 만날 때마다 기꺼이 당신 자리를 내어주면서 즐겁고 걱정없이 냇물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셈이 아니냐 싶습니다.

 어버이는 딸아들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피와 살을 내어주고, 교회 신도는 교회 목사가 훌륭한 징검다리가 되도록 믿음과 돈과 품과 땀을 내어주는구나 싶습니다. 어머니 자연이 뭇사람과 뭇목숨한테 제 땅과 바람과 물과 햇볕을 베풀면서 오순도순 살라고 하듯, 구멍가게 할매는 당신 식구뿐 아니라 동네 이웃과 교회 목사님한테도 모두를 바치면서 ‘당신이라는 자리가 보이지 않게’ 하는구나 싶습니다.


.. 우리가 만약 증오에 맞서 화를 내지 않는다면 악은 선으로 인도될 거야 … 지금까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영혼만 돌봐 왔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의 물질적 삶을 어두운 좌절과 죄에 내주고 말았네 … 영적인 틀은 세워져야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자연의 삶에서 나와야 해 … 나는 중국사람들이 교회나 교리의 길이 아니라, 자유로운 하나님의 길로 인도되어지길 기도하네 … 사실, 사람들을 기독교 교회들의 늪에서 건져내는 일은 죄와 불신앙의 야만에서 사람들을 건져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워 … 모든 곳에서 기독교의 겉치레가 완전히 없어져야 하네. 실제의 삶에서 실패한 종교는 어떤 모습을 하든 간에 사람들의 진정한 삶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야 … 자네도 권력과 영향력을 찾는 사람들한테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오직 단단한 바위 위에 짓게 ..  (35, 50∼51, 54, 57쪽)


 구멍가게 할매를 보면서, 또 저잣거리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성경을 숱하게 읽어내는 할배와 할매를 보면서, 이분들이 다른 책들을 함께 읽으면 더 좋을 텐데 하고도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분들한테는 오로지 이 거룩한 책 하나로도 넉넉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분들한테는 거룩하다는 책조차 없어도 즐거웁겠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기 앞서 삶이 튼튼하고, 거룩한 책을 펼치기 앞서 당신 몸과 마음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삶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오직 한 가지 책을 붙안으면서 당신 몸이며 마음이 슬지 않게끔 가다듬는 셈이라고도 느낍니다.

 톨스토이 님 말이 아니어도, 우리한테 얼마나 많은 땅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커다란 돈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높은 이름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센 힘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많은 책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넓은 집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한테 넉넉한 삶자리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받아안으면서 스스럼없이 나눌 품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바라볼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우리가 읽는 책에서 무엇을 얻어듣겠습니까.


 (2) 우리가 살 집이라면


 교회에 빠짐없이 나갈 뿐더러, 틈틈이 제법 큰돈을 내놓기도 하는 아주머님이 저보고 “교회 나가야지.” 하는 말씀을 스무 해 가까이 하셨습니다. 예전에 이태쯤 교회에 나간 적이 있으나 대입시험을 앞두고 더 나가지 못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삶에 치이기도 했으며 책으로 받아먹는 말씀이 고마워 굳이 예배당에 나가야만 믿음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즈음까지도 아주머님은 “교회 나가야지.” 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저는 천주교회에서 세례와 견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따로 꺼내지 않습니다. 세례와 견진을 받았대도 바지런히 다니는 사람이 못 되기도 하고, 저 스스로 천주교회 길을 따른다고는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교회를 나가” 보라고 하시지만, 아주머님이 다니는 교회는 당신 집에서 가까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는 교회가 아주 많이 있는데, 교회 다니는 분들을 보면 집이나 일터에서 가까운 교회에 나가지는 않아 보입니다. 모두들 참으로 먼 데까지 나들이를 다닙니다. 거의 모두 자가용을 끌면서 멀리멀리 교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동네마다 새 교회는 끝없이 우뚝우뚝 섭니다. 새 교회마다 때 되면 절집 크기 불리는 공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곤 합니다.


..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구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권력에 목 졸리게 되어 있어 … 우리의 삶은 우리가 작아지고, 예수가 커지는 것을 분명히 보여줘야만 하네 … 낡은 세계를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게 우리의 목표인 것은 분명하네 … 다른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 기독교 사람들의 오만함을 경계하게. 그런 기독교 사람들은 유교 사람들에게 절을 해야 돼. 왜냐하면 그들은 존경을 진정한 예배의 시작이라고 봤거든. 우리 모두는 이런 존경하는 마음을 적들을 포함해 모두에게 가져야 해 ..  (52, 60, 73, 94쪽)


 천주교회가 참으로 괜찮다고 느끼는 대목 하나는, 절집에 매이지 않는 믿음에 있습니다. 천주교회는 제 삶터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멀리멀리 ‘아는 얼굴 있는’ 곳으로 다니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얼굴 있는 데로 나간다고 하여 탈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미사를 함께 받는 일이란 어디에서나 할 수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개신교회에서 안타깝다고 느끼는 대목 하나는, 자꾸자꾸 큰집을 지어서 더 멀리에서도 자가용 끌고 찾아오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조그마한 살림집에서 비손을 올릴 수 없을까요. 왜 우리는 으리으리한 절집에서만 비손을 올려야 하는 듯 여기고, 이런 흐름을 부추길까요. 절집을 크게 다시 짓는 데에 바치는 돈(헌금)이 아니라, 바로 내 팍팍한 삶을 일으키는 데에 바치는 돈이 되는 한편, 내 식구들과 동무들과 이웃들 팍팍한 삶을 돌보는 데에 바치는 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살림이 팍팍함에서 겨우 벗어났다 하면, 아니 내 살림이 팍팍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여도 다른 식구와 동무와 이웃한테 나눌 수 있습니다. 다른 식구와 동무와 이웃도 마찬가지 삶을 꾸리니까요. 서로서로 돈이 넘쳐나서 도와주는 삶이 아니라, 모자라는 가운데 도와주는 삶이거든요.

 우리가 따르거나 받들거나 모시거나 세워야 하는 절집이라면, 비바람을 막을 만한 집 하나면 넉넉하기도 하지만,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한데라 해도 넉넉합니다. 말씀과 넋은 절집으로 찾아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넋은 지붕을 가려 가면서 찾아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타워팰리스에만 찾아오거나 더샵에만 찾아오는 말씀과 넋이 아닙니다. 판자집 철거마을에도 찾아오고 서울역 떨꺼둥이한테도 찾아오는 말씀과 넋입니다.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이라면, ‘나라가 만드는 가난’ 때문에 고달픈 사람들이 쉴 만한 자그마한 방 한 칸이 차근차근 마련된 집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개신교회에서 수없이 절집을 지으려 한다면, 이 절집에 예배를 올릴 때에는 ‘거룩한 집’이 되고, 예배를 마친 여느 때에는 ‘가난한 집’이 되어 집없이 헤매는 사람이 깃들 보금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런 보금자리로 가꿀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개신교회 새 절집을 지을 구실이 생기고, 이런 구실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곳은 절집이 아니라 부자집일 뿐이라고 느낍니다.


.. 기독교가 적을 사랑하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금 도리어 심판을 받고 있네 … 사업가들, 선교사들, 군인들마다 모두 하나님의 손이 아닌 자신들의 주머니 속에 사람들을 틀어넣으려고만 해 … 어느 누구도 우리가 만든 형식에 따라서 기독교인이 될 필요는 없어. 하나님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의 뜻에 따라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허용하길. 그래서 사람들이 진짜 자유를 찾고 해방이 될 수 있게 되기를 … 세례를 줄 사람을 고르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신뢰하게 … 자네는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 생각을 해야 하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선교사들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대신, 지역 교회 조직들을 세우는 어리석은 일에만 몰두하고 있어. 그건 당연히 사람에게는 영광이 되겠지만 하나님에게는 모욕이 될 뿐이야 … 예수를 따르려는 기독교 사람들은 사람들을 섬겨야지, 지배해서는 안 되네 ..  (66∼69, 90쪽)


 그렇지만, 절집이 부자집이 되어 가는 흐름을 우리 형편에서는 무어라 따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절집만 부자집이 되지 않으니까요. 우리네 살림집도 부자집이 되어 버리고 있으니까요. 나라살림이 힘들다는 소리는 그치지 않으나, 서울시청 으리으리 다시 짓는 모습을 보고, 숱한 관공서가 번쩍번쩍 새로 올리는 모습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서울 강아랫마을에 있는 어느어느 우체국 건물은 서울 중앙우체국 건물보다 훨씬 크고 우람하고 빛이 납니다. 돈이 넘쳐나는 동에서 짓는 동사무소와 돈이 쌓이는 구에서 짓는 구청 건물은 어마어마하기까지 합니다. 공무원도 사람이라 공무원이 느긋하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면, 그만큼 ‘봉사’를 잘할 수 있다고 여길 테지요. 그런데, 공무원이 일하도록 세금을 내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집은 모두 헐리거나 쫓겨나야 한다면, 가난한 사람이 겨우 얻어서 들어갈 만한 작은 골목집은 모두 헐리며 몇 억도 아닌 십 몇 억이 넘는 아파트로만 새로 짓는 재건축과 재개발만 판을 치도록 하는 행정을 짜는 공무원들이 나라안에 득시글거리게 된다면, 이런 부자집들이 우리 삶을 얼마나 북돋우게 될는지요. 참말 북돋운다고 할 만한지요.

 사람 사는 집이 살림집이 아니라 부자집이 되는 가운데, 관공서 행정기관 건물도 부자집이 되고, 개신교회 절집도 부자집이 되어 갑니다. 믿음을 얄딱구리하게 비틀면서 절집에 돈이 넘치거나 쌓이는 우리네 흐름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보금자리를 보금자리 아닌 부자집으로 깎아내리거나 비틀고 있기에, 바로 우리 나라가 깎아내려지거나 비틀리고 맙니다.

 공무원이 누구이겠습니까. 목사님이 누구이겠습니까. 신도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 식구이고 동무이고 이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처럼 살아가고 있는 판인데, 누가 순복음교회에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부자집에 자가용 몇 대씩 굴리며 떵떵거리고 있는 주제에, 어느 누가 순복음교회를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까. 순복음교회뿐 아니라, 수많은 부자 교회는 다름아닌 우리 모습이요 우리 넋이요 우리 말씀입니다.


.. 기독교의 역사 전체는 종교적 예식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인지 보여준다네 … 우리는 신학이나 교회를 대표해서는 안 되네. 우리는 그저 사람들이 진리의 성령 가까이 갈 수 있게 돕기만 하면 돼 … 사람들이 교회 문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고도 하나님에게 갈 수 있다는 것을 왜 상상조차 할 수 없을까? … 혹시 우리는 이교도처럼, 죽고 난 다음의 행복을 찾고 있는 건 아닌가? 이 땅을 버리고, 우리 자신과 이웃들을 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 모든 종교적인 도발은 피하는 게 좋아. 그리스도가 조용하게 일하고, 위로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자네가 시도하는 일 속에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신을 분명하게 느끼게 되길 바라네 … 기억하게, 그들이 ‘기독교 사람들’이 될 필요는 없어. 그런 이름은 전혀 신경을 쓰지 말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은 그 실마리를 유교에서 찾든 교부에서 찾든 아무 상관없이 모두 하늘나라의 자녀가 되기 때문이야 ..  (70, 76, 77, 79, 99쪽)


 대학교 졸업장을 따지는 우리가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아이들한테 똑같은 학교옷을 맞추게 하고 똑같은 머리길이로 맞추게 하며 똑같은 연속극과 연예인 놀음놀이에 온마음을 빼앗기게 하는 우리들 스스로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 펜데 굴리는 큰회사 사무직 일자리를 바라는 우리들이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쇠밥그릇 공무원시험에 붙어 걱정없이 연금 받고 놀고먹겠다는 우리들이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얼굴과 몸매를 따지는 우리들이, 돈벌이밖에 생각하지 않는 우리들이, 옷차림과 유행에 얽매이는 우리들이, 갖은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버리지 못하는 우리들이, 사장님입네 교수님입네 기자님입네 선생님입네 사모님입네 하는 거짓 이름값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않는 우리들이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아니, ‘순복음교회’라는 이름으로 보여지게 되는 거짓 믿음을 만들고, 잘못된 믿음을 세우며, 뒤틀린 믿음을 섬깁니다.


 (3) 개신교회에 ‘칼’이 아닌 ‘사랑’을 드는 《숨어 있는 예수》


 이야기책 《숨어 있는 예수》를 쓴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라는 사람은 1842년에 태어나 1919년에 죽었습니다. 이 책은 꽤나 오래 묵어 있던 글모음입니다. 성경만큼 오래 묵은 글모음은 아니나, 성경에 담긴 말씀과 넋을 고이 새기면서 살아오던 한 사람이 자기와 같이 믿음길을 걷는 젊은이한테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담은 조그마한 책입니다.

 얼핏설핏 이 작은 책을 읽는다면, ‘우리 사회 뒤틀린 개신교단에 칼을 들어 썩은 자리를 도려내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읽어 줄 수 있다면, 이 책은 어느 만큼 값을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렇지만, 《숨어 있는 예수》는 칼을 드는 책이 아닙니다. 사랑을 드는 책입니다. 왼뺨을 내주고 오른뺨도 내주는 예수처럼, 한손에 사랑을 들고 다른 한손에도 사랑을 드는 책입니다.


..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네. 그들은 기독교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고 있는 거야 … 기독교 교회들은 영적인 세계와 사랑을 짓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풍습을 반대하는 일에만 힘을 쓰고 있어 … 지금 자네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지금은 무엇을 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 자네가 할 일은 종교적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네의 벗들이 자신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서 문제를 이겨내고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야. 예수는 생명, 하나님의 진정한 생명을 주고 싶어해. 종교적 느낌과 의견은 중요하지가 않네. 세상은 생명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경건한 척하는 위선자가 필요하지는 않아 … 서로 존중하는 신앙이 평화를 가져다주게 될 걸세 ..  (100, 112, 116, 127, 128쪽)


 이 세상을 살리는 길은 가르침에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세상을 북돋우는 길은 봉사에 있지 않음을 들려줍니다. 우리 세상을 일구는 길은 선교에 있지 않음을 깨우쳐 줍니다. 오로지 사랑 하나에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길부터 믿음길이 열림을 이야기합니다. 나 스스로 어떠한 사람인 줄 느껴야 내 삶을 사랑할 길을 찾고, 내 삶을 사랑할 길을 찾으며 내 삶을 고쳐 나가야, 비로소 내 삶이 새로워지면서 나와 얽히거나 나를 둘러싼 사람들한테 즐거움과 보람과 좋음을 함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종교를 나누는 일이란 ‘내가 먼저 믿고 보니 참 좋아서 너한테도 믿게 하려는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내가 이렇게 믿으며 내 삶을 이처럼 고칠 수 있었음을 털어놓는 일이며, 내 삶을 고치는 길에 접어들었기에 더 나은 삶으로 고쳐 보고자 내 이웃과 동무한테도 마음문을 여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함께 돌아보고 함께 나아지자고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 사람들과 따뜻한 관계를 다져나가되 그들의 신뢰를 얻기 전까지는 절대 설교를 하지 말게 … 설교가 아니라 삶이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야 하니까 말이야 … 자네가 다르게 살지 않고 사람들을 그들의 높이에서 만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이해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게 될 거네 …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서게 … 사람들은 목사나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언제나 새로운 생각과 행동에 이를 수 있네 … 신학에 의존한 추상적인 믿음은 무기력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실제적인 표현이 되어야 하네 … 오늘날 중국의 선교사들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처럼 행동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어. 동시에 교회와 기독교 사회는 모든 것을 ‘성공’이라는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기업가처럼 행동하고 있지 …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자기 교인들만 존중하려고 들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이기 전에 자기와 똑같이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 (111∼114, 118, 121쪽)


 이리하여 블룸하르트 님은, 중국으로 선교사 일을 하러 간 젊은이한테 틈틈이 편지를 남겼습니다. 당신이 살아온 길을 더듬고 당신이 겪은 삶을 돌이키면서, 당신이 젊은이한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편지들을 찬찬히 얻어읽는 동안 젊은이가 블룸하르트 님한테 말씀과 넋을 받는다기보다 블룸하르트 님이 젊은이한테 말씀과 넋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젊은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가 갖은 애를 쓰기에 비로소 블룸하르트 님 당신 마음에 뭉클하고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생겨났구나 싶습니다. 이 움직이는 무엇인가는 블룸하르트 당신이 빚어낸 말씀이나 넋이 아닌, 젊은 선교사와 늙은 블룸하르트 둘이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서 하늘나라 아닌 땅나라에서 둘을 지켜보던 말씀과 넋이 살며시 배어들어가 이 책 하나 꾸려지게 되었구나 싶습니다.


.. 기뻐하고, 걱정하지 않으며, 늘 한결같은 젊은이가 되게 … 자네가 목사나 선교사의 자리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네. 그런 자리는 사람에게서 온 거지 하나님에게서 온 게 아니거든. 자리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과 절대 똑같아질 수가 없어. 그러니 변절의 누룩을 경계하게. 중국사람들과 늘 같은 높이에서 머물러야 해.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  (118, 128쪽)


 한결같은 젊은이가 되기를 바라는 블룸하르트 님 말은, 곧바로 블룸하르트 당신이 한결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말이 됩니다. 이리하여 블룸하르트 님은 당신이 높은 이름값을 당신 뜻하고 달리 얻게 되었을 때 스스럼없이 내놓으면서 조용히 물러났고, 사람한테서 온 이름이나 자리가 아닌 하늘에서 온 이름이나 자리를 찾으러, 아니 하늘에서는 이름도 자리도 오지 않음을 느끼면서 몇 마디 글로 당신 삶자락을 남겨 놓았다고 느낍니다. 마지막 눈을 감는 날까지 “변절의 누룩”이 생기지 않도록, 자기가 발디딘 이 지구에서 모든 사람들과 “늘 같은 높이”에서 머물려고, 그리고 사람 아닌 뭇목숨하고도 “늘 같은 높이”에서 얼싸안도록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맞추었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되면서, 《숨어 있는 예수》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우리들한테 고마운 마음밥이 되어 준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이 작은 책은 저와 옆지기와 아이한테, 더불어 제 둘레 사람들과 다른 식구와 동무한테도 마음밥이 되어 주겠구나 싶습니다. 날마다 먹는 사랑 깃든 마음밥으로, 언제나 즐기는 믿음 넉넉한 마음밥으로. (4342.3.3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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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어린이미술관 13
신수경 지음 / 나무숲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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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아닌 ‘좋은’ 그림쟁이 이인성
 [그림책이 좋다 61] 신수경,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


- 책이름 :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
- 글 : 신수경
- 펴낸곳 : 나무숲 (2009.3.4.)
- 책값 : 10500원



 (1) 즐거운 삶이 될 때 비로소


 지난밤, 책 하나 만드는 일을 하면서 날밤을 홀딱 새웠습니다.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야 누구나 날밤 새우는 일을 밥먹듯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출판사에 몸담고 있지 않은 터라 딱히 일감이 많지 않아 날밤 새울 일이 드뭅니다. 1인잡지를 엮을 때 며칠쯤 밤을 새우다시피 하지만, 아기 함께 돌보고 기저귀 빨고 해야 하기에 밤을 새우지 않기도 합니다. 다만, 어제 하루는 홀몸으로 인천집에 머물면서 책 만들기를 하다 보니 저절로 날밤 새우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녘에 살풋 잠든 다음 다시 일어나서 여러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일손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손을 붙잡으면서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즐겁습니다.

 따로 어떤 돈을 버는 일이 아니요,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나, 저한테는 그지없이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등짝이 쑤시고 팔 어깨 손목이 저리지만, 이렇게 아프고 쑤시고 저리고 결리는 몸뚱이를 다독이면서 눈을 밝힙니다.

 다른 책쟁이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그예 돈만 벌려고 일하는 분도 어김없이 있는 한편, 그저 좋아서, 즐거워서, 재미있어서 적은 일삯을 받으면서도 책마을에 오래도록 몸담는 분이 많을 테지요.


.. 이인성은 ‘우리의 풍경’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자연의 색을 표현한 화가입니다. 색채의 마술사였던 이인성은 땅과 하늘, 산과 나무에서 우리 고유의 색을 찾아냈습니다 ..  (3쪽)


 사진을 찍으러 골목마실을 하고 헌책방마실을 하면 온몸과 손목이 저리고 결립니다. 골목에서는 사진만 찍지 않고 햇볕과 바람을 함께 받아들입니다. 헌책방에서는 사진만 담지 않고 반가운 책을 바지런히 살피고 보듬습니다.

 햇볕과 바람이 있고, 밤냄새와 이야기소리가 있어 즐거운 골목마실입니다. 마음을 살찌우는 밥이 있고, 마음을 건드리는 헌책방 일꾼과 책손 말씀이 있어 고마운 헌책방마실입니다. 이리하여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진을 찍게 되고, 두 손이 꽁꽁 얼어서 손가락을 꼬부리지 못하게 되어도 사진을 찍습니다. 가방이 터질 듯 책을 채워서 집으로 돌아오고, 두 손이 책먼지로 시커매져도 까만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씨익 웃게 됩니다.


.. 이제 갓 스무 살의 이인성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까지 하자, 지역 유지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려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울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들은 경북여자고등학교 시라가 주키치 교장이 이인성의 유학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일본의 킹 크레용 회사 사장에게 재주가 뛰어난 학생이 있는데 화가로 키우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  (12쪽)


 둘레 사람들은 저보고 왜 세탁기를 안 쓰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탁기를 쓰겠습니까. 제 옷이며 옆지기 옷이며 아기 옷이며, 손으로 빠는 느낌이 얼마나 풋풋하고 싱그러운데요. 기저귀 빨래를 하느라 하루 가운데 1/5쯤 잡아먹고(요사이는 아기가 오줌을 적게 누기에) 널고 개고 뭐하느라 다른 일을 할 시간을 빼앗긴다고 하지만, 시간을 빼앗긴다기보다 시간을 넉넉히 나누어 쓰는 셈이 아니랴 싶습니다. 북북 비비고 헹구고 탁탁 물 빼어 너는 동안 마음이 얼마나 고요해지는데요.

 몸이 여위고 힘들다 하여도 손빨래를 놓을 수 없습니다. 몸이 아프고 지쳤다 하여도 손빨래를 미룰 수 없습니다. 하루 한두 끼니 먹는 밥과 같이, 하루에 몇 차례 손빨래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고이 다스립니다. 날마다 누런쌀에 온갖 콩팥 섞은 밥으로 몸을 다스리는 한편, 훌륭하고 거룩한 책들로 마음을 다스리듯, 손빨래로 제 넋과 손발을 다스립니다.

 앞으로 아이가 무럭무럭 크면, 아이한테도 손빨래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이 기쁨을 혼자서만 즐기기란 얼마나 아까운가를 차근차근 물려줄 생각입니다. 저부터 즐겁고, 저부터 기쁘고, 저부터 고마운 일이며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 이인성은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을 캔버스에 풀어냈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모델로 하여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  (33쪽)


 열 해 남짓 사귀어 오는 술동무를 낮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제 모두들 시집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얼마나 바쁜 몸이 되었는지, 예전에는 거의 날마다 만나 술잔을 비웠는데 이제는 한 해에 한 번 잠깐 얼굴 보기도 힘들어집니다. 다들 아이가 좀 자라면, 다들 일이 좀 느긋해지면, 이리하여 우리들 나이가 쉰이나 예순쯤 되면 한갓지게 다시 어울릴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한창 바쁠 때에도 연락을 못하거나 만나지 못하는 사이이면서 나중에도 어울릴 수 있으려나요.

 좋은 사람들이라 저 스스로도 벗님들한테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고, 좋은 동무들이라 저 스스로도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어깨동무를 하리라 다짐하게 됩니다.

 좋은 자연과 벗삼으면 자연이 선물하는 좋음을 받는 가운데, 나 스스로도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자연한테 선물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좋은 이웃과 좋은 마을에서 살게 되면 이웃과 마을이 베푸는 선물을 받는 가운데, 나 스스로도 좋은 이웃이요 마을문화 일구는 사람으로 새로워지자고 마음먹으면서 내 다른 이웃과 마을에 좋은 땀방울을 바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살아가는 기쁨이라면 하루하루가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하루하루가 비손하는 믿음이라면 하루하루가 서로 손 맞잡으면서 부둥켜안는 넉넉함입니다.

 삶이란 문화이며 문화란 삶이고, 사랑이란 믿음이며 믿음이란 사랑이고, 일이란 놀이이며 놀이란 일이라고 느낍니다. 모두 한동아리가 되어 흐를 수 있을 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빚어진다고 느낍니다. 자연스레 생겨나는 무지개이고, 자연스레 비가 되고 눈이 되는 물방울이며, 자연스레 싹이 트고 움이 돋고 줄기와 잎과 꽃과 열매로 뻗어나가는 푸나무입니다. 우리 사람한테도 이와 같은 자연스러움이 온몸과 온마음에 깃들면서 나와 너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저마다 선 자리에서 즐거이 호미 한 자루 쥘 수 있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2) 그림쟁이 이인성 님 이야기를 담은 《이인성》


 그림이야기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을 넘깁니다. 1912년에 태어나 1950년까지 짧게 살면서 그림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아온 한 사람 발자취를 고이 담아낸 그림이야기책입니다.

 이인성 님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이런 모습을 보면서 둘레에서 일본으로 그림을 배우도록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인성 님이 살던 때는 일제강점기 때였고, 이인성 님을 일본으로 보내준 사람은 일본사람입니다.

 발자취와 그림밭을 찬찬히 살피다가 흠칫 놀랍니다. 아니, 우리 나라를 짓누르고 있던 일본인데, 그 일본에서도 조선사람을 눈여겨보면서 고이 보듬던 손길이 함께 있었다는 소리인가? 그러면, 오늘날 독립된 나라로 살아가는 이 땅에서는 어떠하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림밭에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진밭이나 글밭에서 놀라운 솜씨를 선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뿐 아니라, 농사짓기를 훌륭히 하는 사람들이 있고, 집살림을 알뜰살뜰 잘 꾸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바른 넋과 착한 마음으로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숱한 사람들도 ‘일제강점기 그림쟁이 이인성’ 님과 마찬가지로 고운 손길과 따순 사랑을 받고 있을까요?


.. 이인성은 평생 우리 자연과 평범한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  (21쪽)


 그림쟁이 이인성 님 그림밭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책에 실린 풀이말과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인성 님 붓질은 더없이 밝으며 맑다고 느낍니다. 그림을 즐기는 동안 눈이나 머리나 마음이 짐스럽지 않습니다. 홀가분하게 넘기고 가붓하게 헤아리게 됩니다. 아무래도 ‘자기와 같은 이웃을 그리고, 자기가 발디딘 터전을 그렸기’ 때문인가 생각해 보는데, 자기와 같은 이웃을 그리더라도 엉망으로 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가 발디딘 터전을 그린다 하여도 ‘우리가 어깨동무하는 삶터’가 아닌 ‘좁거나 치우친 눈길로 허투루 바라본 삶터’를 그리는 사람이 많아요.
 





.. 세상을 떠나던 해에 쓴 그의 글에는 화가의 자부심과 단호함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나의 천직은 그림을 그린다는 신세인 만큼, 그림 속에서 살고 그림 속에서 괴롬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누구에게도 자기의 개성을 짓밟히기는 싫다.” ..  (43쪽)


 그렇다면, 그림쟁이 이인성 님한테는 여느 그림쟁이와는 사뭇 다른 마음결이 있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똑같은 밑바닥 사람을 보더라도 바라보는 눈이 다르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짓눌린 이 나라 이 땅을 바라보더라도 여느 사람들 눈결과는 다르지 않았겠느냐 싶어요. 그리고 이런 다름을 고이 돌보고 북돋우면서 당신 나름대로 그림에 말을 걸었을 테고, 이런 말걸기는 그림을 즐기려는 우리한테 보람과 눈물과 웃음과 기쁨을 남기게 될 테고요.

 어떻게 본다면 이인성 님은 ‘천재화가’일는지 모릅니다만, 제가 느끼기로 이인성 님은 ‘천재’라 하기보다는 ‘좋은’ 그림쟁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살가운’ 그림쟁이로, ‘가슴 열린’ 그림쟁이로, ‘눈을 뜬’ 그림쟁이로, ‘제 길을 제 다리로 뚜벅뚜벅 걷는 동안’ 조금도 흐트러짐이나 망설임이 없이 힘차고 다부졌던 그림쟁이로 보아야 알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그림을 즐기고 나누려는 많은 이들이 ‘천재’나 ‘뛰어나다’라는 이름에 매이기보다는 ‘좋다’나 ‘아름답다’나 ‘즐겁다’나 ‘반갑다’는 소리를 듣는 이웃 같은 그림쟁이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면, 오랜 벗님 같은 그림쟁이로 뿌리내릴 수 있으면, 언제 보아도 허물없고 반가운 풀꽃과 같은 그림쟁이로 이어갈 수 있으면, 그림그리기와 그림즐기기는 모두 사랑이요 믿음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4342.3.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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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란, 삶이란, 책읽기란, 글쓰기란
 ― 나는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 1 -

 전철을 타고 가면서 책을 읽습니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따로 하지 않았으나, 고등학교를 다니며 늘 새벽과 밤으로 사십 분에서 한 시간쯤 보내야 하는 버스길에 올라야 하다 보니, 이 시간에 책이라도 읽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창밖으로 펼쳐진 모습을 보고, 버스에 탄 다른 사람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 모습이나 사람 구경은 시들해졌고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버스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보았고, 흔들리고 덜컹거리는 가운데에도 아랑곳 않고 책에 빠진 모습에 저 스스로 부끄럽다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버스를 타며 무얼 했나 싶어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이때부터 버스에서나 전철에서나, 또 어쩌다 자가용을 얻어타게 되나 책을 펼쳤습니다. 버스에서 책을 펼치니 버스 기사 매무새가 가끔 달라지곤 했습니다. 새벽밤에는 으레 불을 꺼 놓고 다니셨는데, 고등학생 아이 하나가 책을 꺼내어 읽으니, 제가 서거나 앉은 자리 쪽에는 불을 켜 주곤 했으며, 책을 읽는 데에 덜 흔들리게 하려고 덜 거칠게 몰거나 퍽 부드러이 몰곤 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불켜짐과 돌돌돌 굴러가는 바퀴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입으로 고맙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했으나 언제나 마음속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무거운 가방은 한쪽 구석에 내려놓습니다. 등허리를 펴고 한손을 번갈아 등뼈를 주무릅니다. 몸이 조금 풀렸다 싶을 때 책을 꺼내어 펼칩니다. 선 채로 한참 읽는데 속에서 불끈불끈 무엇인가 솟아오릅니다. 1500년대를 살다 간 서양사람 하나가 적어 놓은 이야기 《노예 근성에 대하여》(무림사,1980)를 읽는데, 자그마치 오백 해를 지난 묵은 이야기임에도 2000년대 오늘날과 맞대어 헤아려도 거의 달라지거나 어긋난 대목이 없습니다. 이 느낌은 무엇이고 이 말은 무엇인가 하면서 갈비뼈가 뻑적지근해집니다. 가슴이 시립니다. 책 한 귀퉁이에 아무 말이라도 끄적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합니다. 책을 덮고 뒤쪽 빈자리에 또박또박 글을 적어내립니다.


 - 2 -

 글다운 글을 읽어 보지 못한 가슴은, 글다운 글 앞에서 가슴이 뭉클뭉클 움직이지 못합니다. 가슴이 움직여 본 적이 없으니, 그 뛰는 가슴으로 제 삶을 바로잡거나 일으켜세워 새로 태어나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 스스로 글을 쓰게 되어도 무엇이 글인 줄 모릅니다. 글이란 어떻게 쓰며, 누구한테 읽히는가, 글을 읽는 사람한테 어떤 씨앗이 뿌려져 그이 삶이 거듭나는가를 조금도 모릅니다. 알아보려고도 못합니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마음그릇에서 사랑이 샘솟기를 바라기 어렵습니다. 참사랑을 모르고 겉사랑만 아는 이들이 읊는 거짓사랑이 참사랑이라도 되는 줄 생각하는 사람한테도 우리들 참사랑을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참사랑인 줄 모를 뿐더러, 저희들한테 쓰레기를 준다고 여기면서 싫어하는데요.

 굳어진 삶을 말랑말랑 동글동글 손질하기란 어렵습니다. 어쩌면 손질할 수 없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일, 이루지 못할 듯한 일을 즐겨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달프고 외롭습니다. 다만, 몸은 고되고 외로워도, 마음은 가없이 가뿐하고 싱그럽다고 느낍니다. 저는 자유 민주 평화 평등 통일을 제 삶자락에 고이 담아낸다고 느끼니까요. 그리고, 이웃을 억지로 끌어당길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오로지 제 삶에 따라 서로 어깨동무할 뿐입니다. 저는 씨뿌리고 가꾸는 사람이지, 밥상을 차려 숟가락에 밥을 퍼서 떠먹이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비록 철부지 길을 걷는 사람들한테도 읽힐 글을 쓴다고 하여도, 떠먹이는 글이 아니라, 농사지어 갈무리하여 나눠 주는 글일 뿐입니다.

 저는 제 글에 오로지 셋을 담습니다. 사랑, 믿음, 나눔. 그리고 세 가지 길을 걷습니다. 땀방울, 다리품, 마음쓰기.

 읽어 주는 이가 많으면 좋습니까? 기쁩니까? 읽어 주는 이가 없거나 적으면 나쁩니까? 슬픕니까? 대꾸가 없으면 서운합니까? 대꾸가 많으면 흐뭇합니까? 글쓰기란 기다림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내 모든 삶을 실어서, 오늘 이 자리부터, 내가 글 한 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갈 뒷날까지, 나 스스로한테 보람있으면서, 내 마음 읽어 줄 사람을 꿈꾸고 바라는 기다림을 담는 일입니다.

 손목이 저리고 팔꿈치가 쑤셔도 볼펜 든 손을 놓지 못합니다.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이야기를 옮겨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옮겨적기를 끝마칠 때까지 저리고 쑤시고 아파도 참습니다. 글이 저절로 터져나올 때까지는 저 스스로 기다립니다. 먼저 책상 앞에 앉지 않습니다. 오래오래 길에 섭니다. 길을 거닐고 뛰고 자전거를 몹니다. 그런 시간을 길디길게, 아니, 이제 속으로 멈추라는 소리가 터져나올 때까지 견디고 버티며 땀을 쏟습니다. 그리고, 마음속 목소리를 들으면 모든 일을 그치고 볼펜을 듭니다. 밥도 잠도 사랑놀이도 그칩니다. 오직 한 가지, 마음속 터져나오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고 펼쳐 보이는 데에 바짝바짝 귀를 곤두세웁니다.

 제 손을 떠나면 제 글이 아니라고 하는데, 제 손으로 끄적여지는 모든 글은, 처음 쓰여질 때부터 제 글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살아가도록 이끌고 도운 온갖 사람들 넋이 담겨 있어서, 모든 넋이 다 함께 이룬 글입니다. 이리하여, 책은 ‘내 것’이며 ‘모두 것’입니다. 오늘과 어제와 앞날 언제나 찬찬히 이어가는 팔딱거리는 핏덩이입니다.


 - 3 -

 아침 일찍 깨어난 아기를 안고 방과 마루를 이리저리 오가면서 어르다가, 때가 되어 옆지기한테 맡기어 젖을 물리는데, 아기는 다시 잠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엎어지고 기고 물건 잡아당기고. 아빠 책과 사진기를 붙잡아 입에 넣어 빨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잠깐 혼자 놀라고 놓아 둡니다. 틈틈이 옆을 보고 뒤를 보며 아기가 기어가는 곳을 살핍니다.

 삶을 담아내지 않았다면 글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이런저런 글자가 낱말을 이루고 낱말이 글월을 이룬다 한들, 껍데기만 글일 뿐, 참글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겉글과 거짓글도 글이라고 우기면 글이라 이름붙일 수 있으나, 이와 같은 글은 글을 쓰는 우리 뜻을 넉넉히 나누지 못합니다. 혼자만 좋자고 쓰는 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혼자만 좋자고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부터 좋으면서 이웃이 함께 좋자고 쓰는 글입니다. 나 스스로 좋으면서 내 동무가 함께 좋자고 쓰는 글입니다.

 삶을 담아내지 않은 글이란 쓰이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삶이든 더러움에 찌든 삶이든, 글에는 그이 삶이 고스란히 배어들기 마련입니다. 겉멋과 겉치레로 살아가는 사람은 겉보기로는 놀랍거나 대단하게 느껴지는 글을 씁니다. 그리고 이러한 글은 머잖아 속알맹이가 들통이 납니다. 속멋과 속치레로 살아가는 사람은 겉보기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는 놀랍고 대단한 글을 쓰기 일쑤입니다. 우리들이 속멋과 속치레를 가꾸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글을 곧바로 알아채면서 품에 꼬옥 껴안습니다. 우리들이 속멋과 속치레를 안 하거나 등돌리거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글을 놓고 ‘이게 글이냐?’ 하면서 비웃거나 따돌리거나 내팽개칩니다.

 살아가는 대로 쓰는 글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쓰는 글입니다. 어울리는 대로 쓰는 글입니다. 품은 꿈대로 쓰는 글입니다. 나누려는 사랑대로 쓰는 글입니다. 함께하려는 믿음대로 쓰는 글입니다. 글 온 구석에서 빈틈이나 모자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면, 이이는 그만큼 제 삶을 알차고 빈틈없이 돌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글 어느 자리에서나 허술하거나 아쉬움이 느껴진다면, 이이는 그만큼 제 삶에 구멍을 내고 어수룩하게 보내면서 세상 흐름을 제대로 꿰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으로 쓰여지는 글이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쓰여지는 글입니다. 참다이 쓰여지는 글만 있습니다. 꾸밈없이 쓰여지는 글입니다. 슬기로움이 담기고 어리석음이 담기는 글입니다. 넉넉함이 담기고 모자람이 담기는 글입니다. 거룩함이 담기고 못남이 담기는 글입니다. 반가움이 담기고 짜증이 담기는 글입니다. 이리하여, 돈을 바라는 사람한테는 돈 냄새 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이름값 높이고픈 이한테는 이름티 내려는 글이 쓰여집니다. 힘으로 남을 억누르는 사람한테는 힘자랑 하는 글이 쓰여집니다.

 가난한 사람한테는 가난이 뚝뚝 묻어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말만 예쁘게 빚으려는 사람한테는 말만 예쁜 글이 쓰여집니다. 말이 무엇인지 종잡지 못하는 얼치기한테는 제 말 네 말 가누지 못하는 얼치기 글이 쓰여집니다. 미국을 섬기는 사람한테는 미국 섬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한테는 하느님 섬김이 알뜰히 묻어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과자를 즐겨먹는 사람한테는 과자맛 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똥오줌 거름으로 지은 누런쌀을 날마다 먹는 사람한테는 흙내 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 4 -

 쓰고 싶은 글대로 꾸리는 삶입니다. 말하고 싶은 이야기대로 가꾸는 삶입니다. 쓰고 싶은 글처럼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디는 삶입니다. 말하고 싶은 이야기처럼 한 사람 두 사람 만나는 삶입니다.

 글에는 거짓이 스며들 수 없기에, 글쓰기는 두려운 일이 되곤 합니다. 글에는 참만 깃들 수 있기에, 글쓰기는 함부로 하기 어려운 일이 되곤 합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듯, 바라는 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내 밥그릇을 생각한다면 내 삶이며 내 아이 삶이며 내 둘레 사람들 삶이며 내 밥그릇 챙기기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하면서 바라보게 되고, 이러한 가운데 쓰는 글은 밥그릇 붙잡기에서 맴돌고 그칩니다. 모둠 밥그릇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밥자리와 밥나눔을 생각한다면, 내 글쓰기 테두리는 사뭇 달라지고 글에 담기는 넋과 얼 또한 크게 달라집니다.

 저한테는 책이 있고 사진기가 있으며 볼펜하고 수첩이 있습니다. 여기에 고운 옆지기와 술 한 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귀여운 아이까지. 이렇게 어우러진 우리가 깃들 방 한 칸 있어, 두 다리 뻗어 함께 자고 밥먹고 놀고 일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즐겁습니다. 이밖에 달리 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요. 자전거에 수레를 붙여 아이와 함께 마실 다니기? 이쯤? 그쯤? 아이가 볼볼 기어서 아빠 옆으로 옵니다. (4342.3.2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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