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꽃 -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
전희식.김정임 지음 / 그물코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66 ― 어린이와 늙은이, 딸아들과 어버이는 한몸
 : 전희식과 김정임, 《똥꽃》



- 책이름 : 똥꽃,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
- 글 : 전희식, 김정임
- 펴낸곳 : 그물코 (2008.3.5.)
- 책값 : 12000원


 (1) 할배 자전거와 어린이 자전거


 인천에 있는 ㅈ대학교 사진학과 ㅂ교수님과 낮밥 약속이 있어 자전거를 타고 찾아갑니다. 사진학과 교수님은 도서관장 일도 맡고 있어 본관에서 뵙기로 했기에, 본관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어디에다 잠가 놓으면 좋을지를 헤아립니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ㅂ교수님한테 손전화를 거는데, 학교문에서 지켜서는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거, 어디 가려고 왔어요?” 하고 묻습니다. 뻔히 이 대학교에 볼일이 있어서 온 사람보고 이렇게 묻다니, 아마 제가 양복을 차려입고 까만 자가용을 끌고 왔다면 이런 말투나 말이 나오지 않았겠다고 느낍니다. “여기(ㅈ대학교) 왔어요.” 하고 짧게 끊습니다. 그러니 더 묻지 않습니다. 차 댄 자리 끄트머리에 자전거를 댈까 하다가, 사람들 눈에 잘 뜨이는 자리가 도둑 안 맞는 자리임을 생각하며, 본관 들머리 옆으로 길게 나무를 심어 놓은 한켠에 자전거를 묶습니다. 이리로는 걸어다닐 사람이 없어 걸리적거리지 않고, 저로서도 볼일 마치고 나오면 곧바로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문 지킴이는 다시 다가와 “자전거 거기 세우면 안 돼요.” 하고 가로막습니다. “여기 세우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거기 세우면 안 돼요. 거기 세우면 다른 사람도 오토바이 거기다 세워 놔.” “여긴 사람들 다니지 않는 자리인데 여기 세우면 안 될 까닭이 있습니까?” “안 되니까 저기 구석으로 갖다 놔요.”

 방송국에 가도 신문사에 가도, 또 어느 건물에 볼일을 보러 가도, 건물 지킴이는 자전거꾼한테 푸대접입니다. 때때로 반말을 놓기도 하고 멱살잡이라도 할 듯 우락부락거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워낙 자주 겪어 보았고, 어느 규칙이나 교칙이나 회칙에도 ‘건물 앞 빈터에 자전거 세우지 말라’는 말이 적혀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터라, “이거 손대지 마세요. 손대면 신고합니다.” 한 마디로 으름장을 놓고 건물로 들어갑니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한테 으름장을 놓아야 하니 마음 한켠이 켕기지만, 자전거꾼 권리를 생각한다면 물러설 수 없게 됩니다. 전철을 탈 때에도 이런 일이 흔한데, 나이를 제법 잡수신 분들은 자전거꾼을 밉보거나 뱀눈으로 바라보기 일쑤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자리를 느낄 때마다, 왜 이분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얕은 우물에 가두려고 하는가 싶어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마땅히 타니까, 자전거 세울 자리가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 자동차 세울 자리는 있어도 자전거 세울 자리란 없습니다. 그러면 자전거를 걱정없이 알뜰히 세워 놓을 자리를 찾아볼 노릇이건만, ‘비싼돈 들여 멋들어지게 지은 건물 옆에 자전거가 비죽이 서 있으면 보기 나쁘다’는 말로 자전거를 못살게 굽니다.


.. 어머니 목소리가 바뀌는가 싶더니 분위기도 바뀌기 시작했다. “젤 불쌍항 기 너라. 묵을 끼 남아 있어도 묵으락꼬 안 카믄 묵을 줄도 모르고, 형들 안 묵었닥꼬 냉가두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어머니의 누르스름한 조끼를 입었다. 등짝이 넓적한 게 보기 좋다며 어머님이 내 등을 쓸어내리며 좋아하셨다. “내가 죽더라도 이거는 태우지 말고 니가 입거라.”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누가 머락카믄 그래야. 우리 어무이 생각나서 어무이 옷 입는닥꼬.” ..  (224∼225쪽)


 퍽 예전 일인데, 아버지가 모는 차를 얻어타고 아버지 살던 동네를 달린 적이 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이었음에도, 길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을 타거나 걸어서 집으로 가는 아이들 앞에서 빵빵거리며 욕을 몇 마디 하시곤 했습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어떻게 교사 된 아버지가 이렇게 하실 수 있나 뒷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라, “아버지, 조금 기다렸다가 가도 되지 않아요? 아이들한테 빵빵거리면 놀라잖아요?” 하고 여쭙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날은 더 빵빵거리지 않으시지만, 다음에 또 얻어탈 때 보면 또 그 빵빵거림을 그치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자동차를 몰게 되는 분들은 교육자이건 아니건 ‘아이들이건 어른들이건, 길에서 차 앞에서 얼쩡거리는 무엇’이라도 있으면 짜증스러워서 이내 빵빵질을 하게 되지 않느냐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차를 몰 때만이 아니라, 여느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었습니다.


.. 돌아오는 길에 봉투랑 선물들을 가리키며 내가 “우리 어머니 부자가 되셨다”고 부러워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날라 댕긴다 칸들 누가 나보고 이런 걸 주건노. 다 니 얼굴 보고 중기지.” 공덕을 나에게 돌리고 사리를 분별하시는 어머니 모습은 아침과 비교하면 거짓말 같았다. 절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이 한결같이 어머니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음식뿐 아니라 마실 물까지 챙겨다 주며 곁에 와서 일부러 말을 걸면서 정성을 다해 받들어 모시는 것에 어머니의 긴장과 경계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정성스런 모심’이 백 가지 약보다 나았다 ..  (84쪽)


 자전거한테 빵빵거리는 자동차, 건물 벽에 자전거를 바짝 붙인다고 하여도 ‘건물 보기 흉해진다’며 손사래치며 자전거를 발로 툭툭 차는 늙수그레한 건물 지킴이들한테 때때로 묻고 싶어지곤 합니다. 아니, 앞으로는 물어 볼 생각입니다. 늙어 허리 굽은 할매 할배가 엉금엉금 기듯 길을 걸어간다고 할 때에도 그처럼 빵빵거리거나 얼른 비키라고 소리를 치실는지를. 당신님들은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저 할매 할배와 같은 나이가 될 텐데, 그때 당신님들한테도 그렇게 못살게 굴면 느낌이 어떠하실는지를.

 힘여린 이를 아낄 줄 알고, 힘없는 이를 보듬을 줄 알며, 힘앗긴 이를 사랑할 줄 알아야 참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자전거를 아끼고 어린이를 보듬으며 할매 할배를 사랑할 줄 알아야 비로소 우리들은 바른 사람으로 우뚝 서면서 이 땅 이 겨레와 어깨동무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 계남면에서 장수읍으로 넘어가는 국도를 따라 ‘에프티에이FTA 결사반대’라는 장수군 농민회의 노란 깃발이 죽 꽂혀 있는 걸 보셨다. “저거는 먹꼬? 새 쫓을락꼬 꼬자 난나?”라고 하셔서 글자를 읽어 보라고 했더니 바람에 펄럭거려서 잘 못 읽으신다. 읽는다 해도 영어를 모르니 ‘결사반대’만 읽으셨을 것이다. 노인들만 있고 문맹자도 만만찮은 시골길에 농민회에서 만든 영어로 쓰인 ‘FTA’라는 남의 나라 말 깃발이 참 낯설어 보였다 ..  (81쪽)


 자전거를 타고 골목마실을 하다가 곧잘 큰 찻길로 접어들어 달리다 보면 거슬러 달리는 할배 자전거를 드문드문 마주칩니다. 무척 아슬아슬한 노릇인데, 할배 자전거가 ‘역주행’을 몰라서 이리 하실 수 있는 한편, 지난날에는 역주행이고 순주행이고 없이 ‘길에서는 자전거가 가고픈 대로 달렸다’는 생각으로 그리 달리시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날이라고 해 보아야, 인천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신호등이 놓인 때는 고작 마흔 해밖에 안 되었으며, 마흔 해 앞서 신호등이 놓였을 때에도 북적이는 곳에 한두 곳만 놓였을 뿐, 어디에서도 신호등이란 없이 사람과 자전거가 마음껏 오갔습니다. 이런 지난날 삶자락이 몸에 밴 할배 자전거는 찻길에서 스스럼없이 ‘거슬러 달리기’를 하십니다. 그래, 이런 할배 자전거질을 몰랐을 때에는 “할아버지! 그렇게 달리면 위험해요!”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제는 소리를 치지 않습니다. 뒷거울로 뒤에 차가 있는가 살피며, 제가 찻길 안쪽으로 더 들어가며 할배 자전거가 느긋하게 지나가도록 뒷차를 막아서 빠르기를 늦추도록 하고 왼손을 들어 줍니다.


.. “어무이, 오줌 눌 때 안 됐어요? 오줌 좀 누러 가입시다.” “오줌? 여따 눠 삐리지 뭐.” “예?” “불도 따끈따끈해서 싸도 잘 마르겠네, 하하하하.” “안 돼요. 여따 누면 안 돼요! 옷 빨기 힘들어요!” “옷 빨드래도 내가 빠나 니가 빨지!” ..  (59쪽)


 할배들한테, 또 아이들한테, 자전거를 걱정없이 몸 튼튼히 지키며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자동차한테서 당신들 몸을 지키는’ 자전거질만 가르칠 노릇이 아니라, 자동차 모는 사람이 먼저 ‘자전거 타는 사람’을 눈여겨볼 줄 알도록 가르쳐야 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운전면허증을 줄 때에는 길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한테 어떻게 얼마나 마음쓸 줄 아는가를 돌아보면서 주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골목을 걷는 할배 할매와 어린이 앞에서 어떻게 차를 모느냐를 꼼꼼히 살피고 나서야 면허를 주든 말든 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르신을 모실 줄 알자면 어린이를 받들 줄 알아야 하고, 어린이를 받들 줄 알자면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한테는 우리 스스로 사람됨을 잃어 가는 가르침과 사람됨을 내다버리는 돈벌이만 판치고 있지 않느냐 느낍니다.


 (2) 골목길 할매와 할배


 ㅈ대학교에서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자전거머리를 돌립니다. 집으로 돌아가 할 일이 산더미같고, 어제부터 몸살이 돌아 얼른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지만, 오늘처럼 볕이 좋을 때 골목마실을 안 하면 두고두고 안타까워 하리라 생각하면서 버티어 보기로 합니다.

 마침 오늘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 으슬으슬 추운 몸은 더 고단합니다. 그러나 송림4동을 거쳐 도화3동 골목집 사이사이를 도는 동안, 마음이 활짝 펴고 눈이 맑게 뜨입니다.

 틀림없이 이 동네는 말끔하게(?) 밀려 아파트가 될 곳인데, 곧장 내일부터 아파트로 바뀌게 된다 하여도, 이 골목길 사람들은 ‘헐리고 비어 버린 집터’를 치우고 흙을 고르고 땅을 일구어 텃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야말로 곳곳에, 사람 오가는 길자리를 뺀 모든 ‘빈 집터’가 골목밭이 되어 있습니다.


.. “나 같은 거는 사람도 아잉기 농띠처럼 죽지도 않고 니 짐떵어리다, 니 짐떵어리.” “너 없을 때 내가 그만 칵 죽어 삐리야 이도 저도 안 보고 내가 눈을 감아야 안 보지.” “나 땜시 니가 딴 살림 함스로 두벌 고생하는 거 내가 눈을 감아야 안 보지.” 자식이 집에서 부모 모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시간이 남아돌 때 하는 것도 아니요, 할 일이 없을 때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려도 통하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가 정신을 놓고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본정신일 때 자식 보기 미안하고 똥오줌 범벅인 이부자리가 창피해서 하는 면피용 발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저런 극단의 말씀을 하시는 순간의 심정은 어머니 건강에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어무이, 어무이가 나 어릴 때 기저귀 갈아 채우고 똥걸레 다 빨아 주고 했잖아요. 그것도 몇 년 동안을 그랬잖아요. 제가 이제 그거 어머니한테 갚아 드리는 거예요. 저는 괜찮아요.” “애 키울 때는 다 그라지. 앙 그라는 사람 누가 있노.” “마찬가지죠, 어머니. 자기 어머니가 나이 잡숫고 몸 아프면 자식이 다 그라능기라요. 오줌 누믄 옷 갈아입히고 똥 묻으믄 빨아드리고요.” “요새 세상에 그라는 사람이 오대 있노. 지 밥 묵끼도 바쁜데.” “아이 차암, 옷에 똥오줌 누시는 사람보다 그거 빨 수 있는 사람이 몇 배 행복한 거예요. 저 아무리 고생한닥캐도 어머니하고 안 바꿔요, 절대.” ..  (210∼211쪽)


 길그림책에는 ‘도화3동 20번지’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제 눈앞에 펼쳐진 도화3동 20번지는 딱 한 집만 남고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저는 도화1동에서 태어났으니 도화3동하고는 그리 애틋한 느낌이 없다 할 수 있지만, 제가 태어난 바로 이웃 동네인 까닭에 한참 동안 바람을 맞으며 빈 들녘 아닌 허물어 쓸려나간 집자리에 멀뚱멀뚱 섭니다.

 아직 가까스로 살아남은 나무전봇대를 쓰다듬습니다. 도화3동 나무전봇대까지 하면, 인천 옛 도심지에서 송림1동과 내동과 중앙로2가까지 해서 저로서는 네 번째로 찾아낸 나무전봇대입니다. 조금 거닐다 보니 송림4동에 나무전봇대가 두 군데 더 남아 있습니다. 하루 사이에 나무전봇대를 세 군데나 보게 됩니다.

 나무전봇대 살아남은 둘레로도 어김없이 텃밭이 일구어져 있습니다. 고추를 심고 푸성귀를 심었으며, 아직 싹이 돋지 않아 무슨 씨를 심었는지 모를 밭이랑이 그득그득 보입니다.

 빈 집자리에 동그랗게 꽃밭을 일구기도 합니다. 버려진 꽃그릇에 한 포기씩 심긴 고추줄기가 싱그럽습니다. 그 위로 다닥다닥 붙은 빨래집게와 빨래줄을 바라보면서, 당신님들 마지막 삶자락 이곳에서 밀려나게 될 마지막 그때까지 ‘나무 심는 사람’처럼 ‘골목길 텃밭 일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할매와 할배들 손길을 가슴 찡하게 느낍니다.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바지런히 담으며, 송림4동과 도화3동 둘레에서 대학생으로 배우는 이들이 이 삶터를 꾸밈없이 느끼고 받아들이면서 무엇인가 가슴에 고이 껴안는다면 얼마나 반가우랴 생각합니다.


..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뒤로 밀렸다. 거추장스런 짐덩어리가 되었다. 5월 8일 어버이날은 가슴에 그 잘난 카네이션 한 송이가 대롱거리다 만다. 명절이라고 다르지 않다. 여든여섯의 몸 불편한 어머니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 장례식장에서 울컥울컥 울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실 때 잔치를 하고 싶었다 … 면사무소에 가도 그렇고 병원에 가도 그렇다.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간병인도 그렇고 하물며 우체부 아저씨도 그랬다. 여든여섯인 우리 어머니에게 쉽게 반말을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어디가 아픈데?” “이거 아니야. 할머니, 주머니 다시 찾아봐요. 다른 도장 없어?” 나이 잡수시고 몸 어딘가가 불편한 노인을 대하는 건강한 사람들의 태도는 단순한 무시를 넘어서 무례에 가까운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호호백발 할아버지 환자에게 반말을 하던 어느 대학병원 간호사는 “친근하게 하느라고 그런다”며 자기들의 반말을 변명했다. “아, 그래? 반말하니까 할아버지도 친근해서 좋다고 그러더냐?” 내가 바로 받아쳤더니 그 간호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  (150∼151, 155∼156쪽)


 곳곳이 허물린 집이라 어찌 보면 으스스한 동네이지만, 길바닥에 자잘한 쓰레기 나뒹굴지 않습니다. 집마다 문간에 쓰레받이와 빗자루가 놓여 있는데, 여느 사람들이 안 보는 때에 골목집 할매와 할배는 부지런히 쓸고 치우고 하셨을 테지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돈을 주지 않아도, 당신 스스로 당신 집을 사랑하고 당신 동네를 아끼는 마음으로.

 저잣거리 길바닥장사라도 할 기운마저 남아 있지 않을 듯 구부정한 할매와 할배가 곡괭이를 들고 빈 집자리 돌을 고른다든지, 호미와 괭이로 밭을 일군다든지, 그러면서 푸성귀 몇 손을 거두어들인다든지 하는 모습이란 바로 당신님들 스스로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아파트에 살고 있을 당신님들 딸아들한테 기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당신님 마지막 삶을 알차고 싱싱하게 꾸릴 수 있음을 갖은 몸뚱이로 드러내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 그동안 내가 읽어 온 책들은 좀 건조했다. 《노년기 정신장애》는 치매 중에서도 혈관성치매인 뇌졸증이나 우울증 같은 증상에 대해서는 도움이 될 책이다. 그러나 노년기의 심리변화나 노년기 적응의 과제 등은 너무 도식적이었다. 책 구성이 논문처럼 딱딱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없고 ‘노인기계’를 관리하고 보수하는 실용서 같았다는 말이다 ..  (102쪽)


 햇볕에 빨래를 말립니다. 길가 빨랫줄에 빨래를 넙니다. 오가는 이웃이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집마다 문간에 마련한 걸상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지만, 오늘은 바람이 너무 세니 걸상은 모두 비어 있습니다.

 이제 이곳 이 골목이 죄 사라질 판이 되자, 민속학을 한다느니 국문학을 한다느니 지역학을 한다느니 건축학을 한다느니 사진을 찍는다드니 하는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할매와 할배한테 ‘이 동네에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며 부산을 떨곤 합니다. 주말이 되면 인천 골목길은 서울 둘레에서 사진 찍으러 나들이 오는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합니다. 다만, 인천역 차이나타운과 배다리 헌책방골목 언저리와 북성포구 둘레에서 맴돌 뿐이지만, 어찌 보면 ‘사라지거나 없어질 즈음’ 되니 뒤늦게나마 한 장쯤이라도 건져 보려고 찾아드는 사람으로 어수선합니다.

 할매와 할배는 난데없이 모델이 되고 뜬금없이 무대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할매 이름과 할배 이름을 여쭈던 젊은이가 없었는데, 이제는 할매 나이가 얼마이며 할배 이름이 무엇인가를 여쭈는 젊은이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고작 한두 번 찾아와서 듣고는 끝입니다. 할매 할배 스스로 오래도록 풀어내는 긴 나날을 듣기보다는, 곶감 빼먹듯 알짜가 될 법한 몇 마디만 얼른 듣고 서울로 돌아가려는 몸짓들입니다.


.. 어머니한테 다가갔다. 똥이 발에 밟혔다.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는 어머니 얼굴이 반쪽이었고 훨씬 굵어진 주름들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어머니 곁에서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어머니 눈은 겁을 머금고 있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겁먹은 눈초리. 그것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어머니 어깨를 감싸고 꼭 안았다. 울컥하고 울음이 솟았다. 어머니가 천천히 돌아앉으며 내 팔을 잡았는데 미끈거리는 똥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어머니 얼굴에 볼을 대고 속삭였다. “어무이 똥재이.”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우스웠다. 그래서 웃었다. 그러자 눈물이 볼을 타고 굴러 내렸다. “어무이 똥박사∼” 소리를 높여 말하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알아들었나 보다. 어머니 굳어 있던 얼굴이 풀렸다. 어머니도 내 웃음에 감염되었는지 따라 웃었다. “어무이 똥대장∼” 다시 소리쳤다. 우리는 서로 똥 묻은 상대를 손가락질해 가며 마구 웃었다. 불을 환히 밝히고 보니 여기저기 발린 똥덩이들이 몇 년 잘 묵은 된장 같았다 ..  (49쪽)


 골목마실을 하면서 옆지기와 아기를 생각합니다. 골목마실을 하는 동안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우리 옆지기와 아기가 우리 삶터인 골목길을 몸으로 마지막으로 부대낄 요 몇 해를 생각합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와 형을 낳아 길렀을 그 옛날 이 골목길 자취를 떠올립니다.

 할매 할배와 저하고는 아무런 사이가 아닐지 모르나, 어쩌면 이웃 사이였을는지 모릅니다. 골목마실을 하며 할매 할배한테 고개숙여 인사를 하기는 하지만 일부러 말을 섞지 않습니다. 저절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나눌 뿐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제가 이 동네에서 태어났을 때 이쁜 아기가 태어났다며 기뻐해 주었을는지 모르고, 제가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졌을 때 ‘저런!’ 하면서 일으켜세우고 빨간약을 발라 주었을는지 모릅니다.

 한 목숨은 늙어 쭈그렁뱅이가 되었습니다. 한 목숨은 아기에서 ‘아기 낳아 기르는 아빠’가 되었습니다.


 (3) 《똥꽃》이라고 하는 이야기책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전희식 님이 농사짓는 이야기가 아닌 어머니 돌보는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냅니다. 아니, 어머니를 돌보는 이야기라기보다,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라 해야 옳겠구나 싶습니다. 늙어서 죽을 날을 코앞에 둔 어머니 똥오줌을 치우고 밥해 먹이고 ‘좋은 데’ 찾아 함께 놀러 다니는 이야기라고 해야 맞겠구나 싶습니다.


.. 어머니를 보면서 새롭게 깨닫는 것이 있다. 노인이 되면서 정신을 살짝 놓은 덕분에 저렇게 남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자식 흉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는 것이다. 맨정신이라면 저럴 수 없을 것이다. 분노는 더욱 내면화되고 화석처럼 굳어져 병을 키울 것이다 ..  (138쪽)


 전희식 님은 당신이 어린 날 어머니가 당신 똥오줌을 치워 주고 먹이고 키웠기 때문에 어머니를 모시지 않습니다. 전희식 님 또한 늙은 할배가 될 줄을 알고 어머니를 보듬지 않습니다.

 그저 똑같은 한 목숨으로서 어머니를 사랑할 뿐입니다. 어디 먼 데에서 나누는 사랑이 아닌, 바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할 사랑이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뿐입니다.


.. “빼뿌재이 나왔네. 저거 생주리 해 묵어도 좋고 삶아서 된장 끓여 묵어도 된다.” “이거 질경인데요?” “빼뿌재이라. 내가 빼뿌쟁이도 모륵까이!” 이 외에도 ‘나시래이(냉이)’나 ‘질금다지(빌금다지)’ 등의 봄나물 이름도 익혀 나갔다. 어머니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자신 있는 것은 도시의 세련된 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각종 전기제품과 거기에 딸린 리모컨들은 귀신 붙은 방망이였고, 가스레인지나 진공청소기, 믹스기도 만지기가 무서웠다 ..  (70쪽)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나날이 새로움을 봅니다. 날마다 새로움을 배웁니다. 그리고 늙은 어머니도 젊은 아들한테 새로운 모습을 보고 새로운 이야기를 배웁니다. 서로서로 새 세상을 보고, 서로서로 새 날을 맞이합니다. 저마다 눈물과 웃음이 범벅이 되는 하루를 맞이하고, 같이 얼싸안으면서 시골살림을 꾸립니다.


.. 아이들도 어른 한 사람 몫을 톡톡히 해낼 수 있는 것이 시골일이고 생태 집짓기다. 도시일과 달리 힘이 세건 신체조건이 열악하건 다 조건에 합당한 일거리가 있는 게 시골일이다. 그래서 누구도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는다. 아이들의 자부심과 어른들의 뿌듯함은 최대치가 된다 … 자다가 오줌 누러 가려면 총총한 별도 봐야 하고, 얼어붙는 겨울바람도 쐬야 한다. 손빨래를 하면서 빨랫감 하나하나에 얽힌 내력들을 되새겨 보는 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 된다 …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목표 중심의 삶이 고단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집짓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 제일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 모아서 다시 되살려내겠다는 원칙이다 … 일을 서두르거나 일정을 빠듯하게 세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이 일이다. 기다려야 하고 느긋해야 한다 … 귀도 멀고 똥오줌도 잘 못 가리는 어머니가 계실 곳은 결코 서울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더구나 사시사철 두 평 남짓한 방에서만 지내면서 밥도 받아먹고 똥오줌도 방에서 해결하는 것은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여든여섯 노쇠한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가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머니에게 파란 하늘도 보여 드리고 바위와 나무, 비나 눈, 구름도 보여 드리려고 한다. 어머니가 철따라 피고 지는 꽃도 보시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계곡의 바람결도 느끼시고 크고 작은 산새들이 처마 밑까지 와서 노닥거리는 것도 보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  (24∼25, 32쪽)


 섣부른 목소리로 ‘늙은 어버이 모시자’고 외치는 《똥꽃》이 아닙니다. 늙은 어버이 똥은 꽃과 같다고 내세우려는 《똥꽃》이 아닙니다. 억지스러운 아름다움을 빚어내려는 《똥꽃》이 아니요, 못난쟁이는 못난쟁이대로 즐겁다는 이야기를 값싸게 팔아치우려는 《똥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저마다 참살길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선 자리에서 찾아내기를 바라는 《똥꽃》입니다. 내 몸과 마찬가지로 내 이웃 몸과 내 식구들 몸과 내 동무들 몸을 사랑할 슬기로운 길을 찾자는 《똥꽃》입니다. 낮은 목소리도 아니요 높은 목소리도 아닌 《똥꽃》입니다. 어울리는 삶, 땅에 발을 디딘 삶, 하늘을 우러를 줄 아는 삶을 조곤조곤 나누어 보고픈 《똥꽃》입니다. (4342.4.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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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다케나카 치하루 지음, 노재명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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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낱 불쌍한 떨거지인 미국과 이명박과 ……
 [잠깐 읽기 31] 다케나카 치하루,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 책이름 :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 글 : 다케나카 치하루
- 옮긴이 : 노재명
- 펴낸곳 : 갈라파고스 (2009.4.10.)
- 책값 : 11000원



 (1) 아이들 삶에서 사랑과 전쟁이란


 중학교 1학년인 처남은 ‘한국전쟁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를 모릅니다. 헷갈려 합니다. 어쩌면, 해방된 해를 모를 수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잡아먹은 해를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르는 일은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어딘가 글렀다거나 말썽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전쟁이 터진 해를 안다 한다 하여 전쟁이 어떠한 일인가를 알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피해 숫자를 알고, 휴전을 언제 맺었는지 아는 이들이 한국전쟁뿐 아니라 온누리 전쟁이 우리 삶을 어떻게 옥죄는지를 깨닫고 있을까요? 임진왜란이 우리한테 아픔이었다면, 고구려가 땅을 넓힌 일은 아무한테도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곰곰이 살피면, 우리 처남만 아니라 이웃 아이들도 한국전쟁을 잘 모릅니다. 일제강점기는 더욱 모릅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를 잇는 군사독재와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을 거치며 이러한 독재 앙금이 그리 풀리지 않은 사회 얼거리를 더더욱 모릅니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인지는 아예 모른다 하겠습니다. 촛불집회 이야기를 얼핏 들었을 테지만 살갗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아이들 삶에 어떻게 잇닿고 있는가를 깨닫지 않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모두와 얽혀 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와 아이를 가르치는 학교교사 모두 이러한 이음고리를 못 느끼거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가두기 때문입니다. 아이들한테 비싼 손전화를 사 줄 돈은 있고, 인터넷게임을 하도록 마음써 주기는 하지만, 아이들한테 제 삶이 어떻게 흘러왔으며 앞으로 어찌 흘러갈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에는 생각을 잇지 못합니다.


.. 최근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대 테러전쟁에 수많은 나라들이 이런 선택을 강요당했습니다. 미국 정부에 반기를 들면 손해를 본다, 그렇기 때문애 전쟁에 협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일본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과연 이 경우에도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평화로운 방법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사상적 근거가 존재할까요? … 미국이나 유럽의 강대국이 중동에 개입한 이유는 전략적인 거점과 석유 확보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산유국이 밀집되어 있는 페르시아만의 강대국 이란이 반미로 돌아선 것은 이들에게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더욱이 미국 식의 시장경제를 비판하는 사상이 수출된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굉장히 곤란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미국은 그렇게 간단하게 이란에 전쟁을 유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신에 전쟁을 해 줄 나라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란과 인접한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 목표를 이루게 됩니다 ..  (26, 116쪽)


 6월 25일을 안다 하여도 4월 19일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한국사람일까 궁금합니다. 8월 15일을 안다 하여도 5월 18일을 모른다면? 10월 9일은 알아도 11월 13일을 모른다면? 12월 25일은 알아도 5월 1일은 모른다면? 그리고 이 모두를 죄다 모른다면? 이 모두를 죄다 안다면?

 안다면 무엇을 어디까지 알까요. 모른다면 무엇을 어느 만큼이나 모를까요. 뭔가를 안다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가요.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우리 어른들은 어떻게 마주했으며, 우리 어른 스스로는 얼마나 제대로 샅샅이 깨닫고 있을까요.


.. ‘폭력을 통제하는 방법’은 우연히 발생한 폭력사건에 일시적으로 대처하는 수준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의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폭력을 추방할 수 없습니다 ..  (166쪽)


 한국전쟁을 알아야 한다면, 한겨레가 둘로 쪼개어져 서로 죽이고 죽은 일이 끔찍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나쁜 놈이요 빨갱이는 죽일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은 나쁘다’는 속없고 알맹이없는 이야기만 외쳐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은 ‘대리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 대리전쟁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우리 스스로 얼마나 바보스러웠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한국전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군인보다 훨씬 많은 민간이 죽은 이러한 전쟁은 북녘이든 남녘이든,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느 무엇한테는 이바지할 구석이 없음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이란, 우리 스스로 치고받은 싸움이 되었든, 일본이 우리 땅에 쳐들어온 싸움이 되었든, 때리는 쪽이나 맞는 쪽이나 모두 제 삶이 망가지고 제 삶터가 무너지며 제 삶자락이 사라지게 이끕니다. 나를 때린 이를 내가 앙갚음하며 때린다 하여 나한테 남은 생채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 다리 자른 사람을 찾아가 그이 다리를 싹둑 자른다 하여 내 다리가 새로 돋지 않습니다.

 한 번 죽으면 끝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없습니다. 꺼진 셈틀을 켜듯 다시 켤 수 없고, 하드디스크를 갈아 새로 켤 수 없습니다. 오락실에서 돈을 더 넣고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는 놀이처럼 새로 열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오로지 누구한테나 꼭 하나만 있는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을 망가뜨리고 무너뜨리고 짓밟는 전쟁입니다. 일으켜 짓밟으려 하는 쪽이나 일어나 짓밟히는 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일으켰다고 이네들 삶이 안 무너지겠습니까. 전쟁에 휩쓸렸지만 이겨냈어도 우리 삶이 안 무너졌겠습니까.

 낫과 쟁기가 아닌 총과 칼이란 처음부터 없어야 했습니다. 이제라도 걷어치워야 합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하여 지키는 군대를 키운다지만, 세상 어느 나라 군대이든 ‘지키는 군대’란 어느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나라밖으로 쳐들어갔든 나라안에서 쿠테타를 일으키거나 독재에 팔뚝질을 하는 여느 사람을 후려갈기든 하는 군대였을 뿐입니다.

 우리를 지키는 힘은 ‘총칼 주먹다짐’이 아닌 ‘맨 몸뚱이 사랑’일 뿐입니다. ‘돈과 재물’이 아닌 ‘어깨동무 믿음’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이란 몹시 끔찍했던 지난날이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지난 삶이요, 우리가 다시 불러들이지 말아야 할 지난 발자국입니다.


..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를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로부터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사실 한 나라 안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내전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슬럼지역에 사는 주민을 개발계획 때문에 강제 퇴거시키는 정책은 여러 나라에서 시행됩니다. 이른바 ‘아름다운 도시’, ‘범죄 없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정책이지요 …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의 시민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위험하고 더러운 것’들이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 전가된다는 사실입니다 ..  (172∼173쪽)


 열네 살 처남은 아홉 달짜리 아기를 보면서 ‘귀엽다’고 이야기합니다. 아기가 한 달이 될 무렵부터 보았는데, 나날이 ‘더 귀엽다’고 이야기합니다. 열네 살 처남은 제 두 눈으로 제 가까이에서 아기를 처음으로 마주할 뿐 아니라, 똥오줌을 누고 칭얼거리고 젖과 죽을 먹고 기고 놀고 웃고 우는 모두를 보면서 ‘귀엽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귀여운 아기’를 보게 되고 느끼게 되고 알게 된 처남한테는, 저 스스로 모르게 마음속에 사랑이 싹트리라 믿습니다. 아니, 사랑이 싹틀밖에 없습니다. 어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니, 어른이 알아듣지 못하는 아기 말을 하는 이 작은 목숨붙이가 이 하나로 얼마나 아름다운 줄을 느끼고 있으니 마땅히 사랑이 싹틉니다.

 그렇지만, 열네 살 처남 앞뒤와 둘레로 얼마나 많은 어리고 푸르고 젊은 넋들은 ‘귀여운 아기’를 부대끼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집에서, 제 배움터에서, 제 일터에서, 제 동네에서, ‘귀여운 아기’뿐 아니라 ‘살가운 나무’나 ‘애틋한 길고양이’나 ‘고마운 이웃’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버이와 교사와 학교벗만이 아닙니다. 버스기사나 전철기사, 길에서 스치는 사람, 가게 일꾼, 학원 강사, 동네 사람들 가운데 오늘날 ‘열네 살 아이’한테 사랑과 믿음이 스스로 샘솟도록 도와주거나 이끌어 주는 어른은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평화를 보고 자라야 평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장난감 총으로 전쟁놀이를 하는 가운데 저절로 총싸움은 아무것 아니요 텔레비전으로 흘러나오는 ‘미국이 일으킨 침공’ 또한 재미난 볼거리로만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맛을 보고 자라면 사랑을 알면서 나누지만, 돈맛을 보며 자라면 돈만 벌면서 돈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2) 첫걸음 떼는 책


 일본사람이 쓴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라는 책이 우리 말로 옮겨졌습니다. 이 책을 펼치기 앞서, ‘왜 우리는 전쟁 이야기마저 일본사람 글을 읽어야 하는가?’ 하고 물어야 했습니다. 왜 우리 스스로 우리가 치르고 겪은 그 숱한 전쟁 이야기를 우리 땅과 사람과 넋에 맞추어 풀어내지 않는가 하고 되물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사랑하기 때문일까요? 입으로는 ‘전쟁 반대’를 외치더라도, 우리 몸은 ‘전쟁에 길든 채’ 살아가기 때문일까요? ‘전쟁 반대’를 외치는 입이라면, 저절로 ‘군 가산점’ 따위는 얼마나 ‘전쟁 사랑’이며 ‘사람 푸대접’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군 의무 복무’란 참된 나라사랑이 아닌 기득권 지키기에다가 군사독재가 이 땅에서 씻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입으로만 외쳐지는 ‘전쟁 반대’만 있을 뿐, 우리 온몸으로 부대끼려는 ‘전쟁을 털어낸 삶’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전쟁 반대’를 하겠다면, 《우리들의 하느님》을 쓴 동화쓰는 할아버지 권정생 님처럼 “승용차를 버려야 이라크파병을 막을 수 있다”는 깨달음에 가 닿을 터이나, 승용차는커녕 냉장고와 텔레비전조차 못 버리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 가해자, 즉 폭력을 휘두른 학생도 폭력의 ‘희생자’로서 보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학생들은 생활이 완전히 망가져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폭력의 문화’에 깊숙이 빠져 있는 병든 상태입니다 ..  (200쪽)


 그러고 보면, 이제는 세상을 떠난 동화쓰는 권정생 할아버지님입니다만, 권정생 님 또한 텔레비전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당신 나름대로 세상을 읽자면 텔레비전을 보셔야 했기 때문일 테고, 걸어다니기도 힘든 터라 좋은 영화를 보자면 비디오로 보아야 했기 때문이리라 봅니다.

 권정생 님 작은 집에는 냉장고도 있었습니다. 한 번 앓아누우면 꼼짝 못하고 끙끙거려야 했으니, 며칠 먹을거리를 간수하자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두 다리 멀쩡하고 두 손 마음대로 놀릴 수 있는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텔레비전이 없으면 세상을 읽을 수 없는가요? 신문을 읽어야만 세상을 알까요? 냉장고를 모셔야만 굶지 않고 살게 되나요? 승용차를 굴려야만 집과 일터를 오가며 우리 뜻을 펼치게 되나요? 손으로는 빨래를 못하고 전기 먹는 빨래기계를 돌려야만 할까요? 그러다가 열 몇 해쯤 지난 냉장고와 세탁기와 승용차들은 어떻게 하지요? 이런 기계와 전자제품을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까지 ‘안 버리고’ 잘 쓰고 있습니까?


.. 전후의 일본은 자신의 식민지와 전쟁터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따라서 그 후 일본인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전후를 보낸 아시아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많은 일본인들은 잊기 쉽습니다. 중국이나 한반도는 1945년 이후 내전이나 분단, 군사지배를 경험했습니다. 이 지역사람들에게 전쟁은 1945년 8월에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반공정책을 지원했던 일본은 두 나라의 분단에 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21세기인 지금도 두 나라는 아직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 아시아인들은 지금껏 일본사람들을 증오하거나 해치려는 행동을 하지 않고 지내 왔습니다. 일본이 가혹한 식민지배와 잔인한 살육을 범했어도 넓은 마음으로 일본인들을 대했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나라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지금껏 아시아인들이 일본인에게 보여준 관용의 정신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시아인으로부터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뿐 아니라, 정부를 비판해 온 세력 또한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쟁은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정치가들은 음지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입니다 ..  (219, 234쪽)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라고 하는 책은,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는가?’ 하는 밑뿌리까지 파고들지 않습니다. 아니, 파고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쓴 분 스스로 아직 ‘나는 밑뿌리가 무엇인지 다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밑뿌리를 찾는 가운데, 모자라나마 풀이법 또한 함께 찾고 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아주 뾰족하고 시원스런 이야기를 바라는 분들한테는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라는 책은 지루하거나 아쉽게 느껴지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몸부림을 치고 있기 때문에, 또한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평화를 사랑하는 옳은 길’은 무엇인지 누구보다 글쓴이 스스로 찾아나서고 있기 때문에 따뜻한 살내음이 배어 있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거든요. 글쓴이 스스로 아직 어설피 알고 있는 대목이 엿보이고, 잘못 아는 대목 또한 군데군데 보입니다만, ‘옳은 길’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글쓴이가 몸담은 대학교에서 ‘가해자이며 전범인 일본은 어느 누구보다 용서와 사랑을 많이 받은 겨레’임을 몸소 깨닫는 가운데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먹다짐을 일으킨 주제에 입만 살았네?’ 하고 빈정거릴 분이 틀림없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가해자 또한 제 삶이 망가져 있음’을, 일본사람 스스로 ‘가해자였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제대로 못 느끼는 대목에서 제대로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직은, 한국사람 스스로 ‘주먹질을 받았음에도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멀리할 줄 알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책을 써내도록 바라고 또 바라야 하겠습니다만, ‘주먹다짐을 일으킨 주제라 할지라도 평화와 사랑으로 돌아서며 고개숙여 뉘우치고 바르게 제 삶을 되찾는 길’이 담긴 이 책 하나를 곱다시 껴안는 일도 겉훑기로나마 보람과 열매를 얻는 일이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 이를 보면 이 분쟁(이스라엘ㆍ팔레스타인 분쟁)은 사실 신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이익 대문에 발생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아니라 인간들의 싸움이라면 인간이 평화의 길을 열 수 있습니다 ..  (96쪽)


 저는 이 책을 덮고 다시 한 번 읽으며 책 귀퉁이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가 아니라 ‘미국, 그러니까 흰둥이들은 왜 허구헌 날 싸움질이여?’ 하고 책이름을 고쳐 달아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흰둥이든 미국이든 이명박이든 또 아무개이든 한낱 불쌍한 떨거지가 아닐까 싶구나.” (4342.4.2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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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곳에서 - 에드워드 김 포토 에세이
에드워드 김 지음 / 바람구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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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참’도 ‘거짓’도 숨기지 못한다
 [잠깐 읽기 30] 에드워드 김(김희중), 《그때 그곳에서》



- 책이름 : 그때 그곳에서
- 글ㆍ사진 : 에드워드 김(김희중)
- 펴낸곳 : 바람구두 (2006.1.16.)
- 책값 : 19800원



 (1) ‘전두환 만세!’를 부끄럽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1987년 1월 26일에 나온 《전통의 뿌리, 경상북도》(HEK홍보기획공사)라는 사진책이 있습니다. 이 사진책은 오로지 ‘경상북도는 한국 전통을 잇는 밑뿌리 같은 곳으로, 아름답고 깨끗하고 밝은 앞날이 있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사진책 차례를 살피면 ‘전통의 고장, 호국의 터전, 신라 문화 꽃피운 경주, 부처님의 미소, 신비의 섬 울릉도, 맑고 푸른 동해, 내 고장의 특산물, 마음의 고향, 역사 속의 인물, 조상의 얼 지키는 하회마을, 마음이 닿는 곳, 미래를 여는 산업, 특색있는 9시ㆍ24군’, 이렇게 짜여 있습니다.

 이 사진책을 펴낸 ‘에드워드 김(김희중)’ 님 요즈음 해적이를 살피면, 다음처럼 적혀 있습니다.


.. 경기고 재학중 두 번의 사진 개인전을 열었으며, 연세대 재학중 미국으로 유학, 텍사스 주립 대학 신문학과와 미주리대학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하고 내셔날지오그라픽에 입사하였다. 1971년 미국기자단 최우수 사진편집인상과 1974년 미국 해외기자단 최우수 취재상, 1979년 백악관 출입 기자단 사진 취재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80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편집장 겸 기획위원으로 승진한 이후 미국 출판협회 최우수 편집상과 미국 디자인협회 편집기획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시사주간지 〈타임〉의 서울특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중앙일보〉 사진자문위원과 월간 〈지오〉 편집장을 역임하였다. 1994년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수상하였으며, 1999년 이명동 사진상을 수상하였다. HEK 홍보기획공사 대표, 이화여대 교육공학과 초빙교수를 거쳐, 2006년 현재 상명대 석좌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Korea : Beyond the Hills》, 《Decade of Success》, 《The Family of Dolls》, 《The Korean Smile》, 《Taekwondo : The Spirit of Korea》, 《THIS EHWA》,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그때 그곳에서》 등이 있다 ..


 맨몸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사진으로 뜻을 이루어 〈내셔널지오그래픽〉 편집장까지 맡았으니, 대단히 뛰어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더욱이 이 잡지사를 그만둔 뒤로도 한국에서 〈타임〉 서울특파원에다가 〈지오〉 편집장까지 맡았습니다. 사진을 찍는 손매와 사진을 다루는 손길과 사진을 보는 눈매가 무척 남다르지 않고서야 이와 같은 자리를 맡을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대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앉을 만한 눈높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몇 가지 궁금한 대목이 있습니다. 1987년까지는 어디에서나 밝혀져 있던 ‘에드워드 김 발자취’ 몇 줄이 그 뒤로는 감쪽같이 사라진 일이 첫째입니다. 사진이야기 《그때 그곳에서》에는 에드워드 김 님이 찍었던 ‘박정희-전두환 새마을운동’ 사진 몇 장이 깃들면서 몇 마디 이야기가 다음처럼 덧붙습니다.


.. 경제발전을 위하여 온 국민이 하나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땀흘려 일하던 1970년대. 중세 무사를 방불케 하는 복장을 하고 쇳물이 튀는 용광로 옆에서 일하는 노무자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할머니 두 분이 새마을 깃발을 들고 밭으로 나가는 모습. 온 가족이 동원되어 힘들게 쟁기를 끌어 농사짓는 모습. 일하는 가족 옆 흙바닥에서 잠이 든 아이. 자칫 부정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는 후진국스러운 장면들이지만, ‘하면 된다’는 구호와 ‘잘 살아 보세’라는 새마을운동 노래를 흥얼거리며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고 땀흘려 열심히 씨를 뿌렸기에, 오늘과 같은 발전이 가능했으리라 여겨집니다 ..  (108∼110쪽)


 에드워드 김 님 해적이에 나오지 않는 세 가지 책을 책꽂이에서 들추어 봅니다. 모두 헌책방 책시렁에서 찾아내어 간직한 책입니다. 이 가운데 《전통의 뿌리, 경상북도》 뒷장을 봅니다. “그의 저서로는 한국인의 정서와 생활상을 담은 《한국:언덕을 넘어서》가 1980년 일본 고단샤에 의해 발행되었고, 형문출판사에서 발행한 《민주복지의 길》과 《인형의 가족》이 있다. 전두환 대통령 《미국 순방》(1985년) 및 《유럽 순방》(1986년) 등은 직접 수행 취재하여 편집한 사진집이며, 제5공화국의 치적 5년을 기록한 사진집 《국민이 함께》와 86아시안게임을 기록한 《영원한 전진》 등의 사진집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1987년 책에는 밝혀져 있는’ 에드워드 김 님 사진책 가운데 제가 갖고 있는 책은 《민주복지의 길》과 《유럽 순방》입니다. 《미국 순방》과 《국민이 함께》와 《영원한 전진》과 《인형의 가족》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만, 언젠가는 제 손에 들어올 날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책들은 나라돈으로 찍어 전국 구석구석에 퍼뜨린 ‘전두환 찬양 사진책’이기 때문입니다.
 





.. 빨간 수건을 목에 두르고 북을 치는 중학생들이 경직된 표정으로 교정에서 교련훈련을 받고 있다. 1973년 북한의 경제수준이 남한과 거의 비슷했던 시절, 북한은 주체사상과 천리마운동으로 자신감 넘치는 정책을 펼쳤다. 혁명박물관. 김일성 수령의 업적을 기리는 95개의 대형 전시실 그곳에 우뚝 서 있는 18미터나 되는 동상. 박물관 광장에서 금색의 김일성 조각을 청소하는 일꾼들. 그리고 북한의 산업화와 자급자족 경제를 상징하는 제철소의 역군들. 불가리아 대통령 환영 인파로 동원된 만여 명에 이르는 학생과 시민들. 천리마운동을 상징하는 천리마동상과 넓은 도로 건너편 모란봉 위의 극장과 저 멀리 대형 텔레비전 전송탑이 평양의 하늘을 장식하고 있다 …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느 집에서 한 소년이 벌거벗은 채 뛰어나왔고 이어 누나뻘 되는 소녀도 뛰쳐나와 달아나는 아이를 냅다 뒤쫓았다. 그 어린아이들이 석양 속에서 뛰어다니며 웃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자, 안내원은 어색하게 내 앞을 막아섰다. 죄송하다며, 그러한 장면을 찍는다면 북한의 어린이들이 헐벗어서 옷을 입지 못한 채 길거리를 배회하는 것처럼 선전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며 나의 촬영을 제지한 것 ..  (70∼74, 98쪽)


 에드워드 김 님은 1974년에 북녘을 찾아가서 취재합니다. 이듬해 1975년에는 남녘을 찾아가서 취재합니다. 이 취재는 모두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렸고, 1974∼1975년 사이에 나온 《내셔널지오그래픽》은 다른 여느 해 잡지와 견주어 웬만해서는 헌책방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누군가 쓴 힘에 따라서 솎아내어졌기 때문입니다. 1974년 8월치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딱 한 번 헌책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에드워드 김 님이 북녘을 취재한 자리는 면도칼로 아주 잘 잘려져 나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1975년 9월치 남녘 취재 기사는 잘리지 않았더군요.

 곰곰이 돌아보면, 2009년 오늘날에도 ‘북녘사람들 여느 모습’을 담은 사진은 남녘땅에서 구경할 수 없습니다. 남녘 사진기자뿐 아니라 나라밖 어느 사진기자도 북녘사람 여느 삶자리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못합니다. 또한, 남녘뿐 아니라 나라밖 웬만한 사진작가와 사진기자는 북녘을 사진으로 담으려 할 때에 ‘북한, 너네는 이런 놈들이야!’ 하는 틀에 갇혀서 뻔한 모습으로 ‘깎아내리는’ 사진을 보여주기 일쑤입니다.

 1974년에 에드워드 김 님이 북녘을 찾아갔을 때 수행원이 ‘어색하게 말린’ 까닭이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때나 이제나 달라지지 않은 ‘우리 눈길’ 때문입니다. 남녘이든 북녘이든 가난한 사람이 틀림없이 있고, 잘사는 사람 또한 틀림없이 있습니다. 사기꾼이 틀림없이 있고 착한 사람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사진기 눈은 어디로만 쏠려 있는가요?

 오래된 동네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는 우리들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담아내고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요? 서울 강남을 찍을 때, 우리 나라 청소년을 찍을 때, 이명박 대통령을 찍을 때, 전투경찰을 찍을 때, 공무원을 찍을 때, 운동선수를 찍을 때, 노숙자를 찍을 때, 연예인을 찍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찍을 때, 식구들을 찍을 때, 우리 눈길은 어떻게 맞추어져 있는가요?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사람과 삶터로 다가가면서 사진기를 들고 있을까요?
 





 (2) ‘어제’는 있되 ‘오늘’과 ‘내일’ 모두 없는 사진이면?


.. 농촌의 식생활도 많이 달라져 새참 때 읍내에 전화해 자장면을 시켜 먹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빵과 우유를 들며, 막걸리보다 맥주를 마시는 것이 보편화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농촌의 깊은 시름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을 덧붙입니다. 우리 농촌도 세계무역기구 농산물 개방정책의 장벽을 넘어 어서 빨리 살기 좋은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  (152쪽)


 에드워드 김 님이 바라보는 눈길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에드워드 김 님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한국땅은 ‘박정희-전두환 두 대통령이 일으킨 새마을운동’이 있었기에 모두 잘살고 넉넉하게 되었다고 느끼는데, 이러한 눈길은 이분 삶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입니다. 좋은 장비와 좋은 손길과 좋은 눈길에 따라, ‘아름다워진 한국’을 담아내려는 에드워드 김 님한테는 박정희 씨나 전두환 씨는 ‘독재자’가 아닌 ‘훌륭한 치적을 남긴 거룩한 분’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에드워드 김 사진이야기 《그때 그곳에서》를 비롯해, 요즈음 나온 책에서는 당신이 우러르던 사람들을 담아낸 사진책 이야기가 쏙 빠져야 했을까요. 빼야 할 까닭이 있었을까요.

 대통령으로 뽑힌 이명박 씨를 지지한 사람 눈에는 이명박 씨가 ‘한국을 먹여살리는 훌륭한 분’으로 비추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눈길이 글렀든 어긋났든 엉터리라 하든,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이 눈길 테두리에서 헤어나지 않습니다. 수렁에서 벗어나 참눈과 참마음과 참생각을 가꾸어 준다면 더없이 반가울 터이나, 수렁에서 허우적거린다 하여도, 세상을 보는 얕은 눈은 그 눈길대로 두면서도 당신이 걷는 길을 옳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이명박 씨를 대통령으로 찍지 않았어도 그릇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명박 씨를 안 찍으나 마나입니다. 이명박 씨를 대통령으로 찍었다 하여도 올바르게 삶을 꾸리는 사람은 이명박 씨를 안 찍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투표 하나로도 세상을 바꾸지만, 세상을 참되게 바꾸는 밑힘은 투표 아닌 ‘자그마한 우리들 살아가는 매무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 얼마 전 강의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에 대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론은 진정한 행복은 공짜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서, 미소에서, 말 한 마디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맑고 투명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한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도 새봄이면 푸른 싹이 돋아날 것임을 깨닫는 순간, 맘속으로 번지는 희망과 행복이 우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그 마음의 온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결국 그 온기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지요 ..  (60∼61쪽)
 





 사진은 아무것도 숨기지 못합니다. 거짓된 사람들이 아무리 힘을 들이고 돈을 퍼붓고 이름을 들이밀어도, 사진은 ‘참’을 숨기지 못합니다. 참된 사람 스스로 힘을 들이지 않더라도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이름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사진은‘거짓’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참이든 거짓이든 언제나 있는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참과 거짓을 못 알아채는 사람이 어김없이 있으나, 알아채는 사람이 없더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낱낱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에드워드 김 님은 스스로 당신 발자취를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까닭이 없다고. 부끄럽다면 부끄럽다고 떳떳이 밝히면서 뉘우칠 노릇이라고. 부끄럽지 않다면 부끄럽지 않다고 당차게 밝히면서 내세울 노릇이라고.

 ‘전두환 수행비서’와 다를 바 없이 함께 다니면서 ‘전두환 만세’를 불렀다 하여 ‘저런 죽일 놈!’이라고만은 느끼지 않습니다. 당신한테는 그와 같이 살았던 지난날이 ‘나라 살리기’였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 지난날에만 만세를 부르고 이제는 만세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때 일은 꽁꽁 싸매 놓고 있다면, 궁금함만 몽실몽실 커집니다. 오늘은 어제와 어떻게 다르며, 다가오는 내일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제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지 않고서는 참다이 사람을 사귈 수 없을 뿐더러, 사진쟁이는 ‘스스로 찍으려는 사람이나 삶터를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모두를 바쳐야 나한테 스며드는 ‘사진에 담기는 사람’이요 ‘사진에 들어오는 삶터’입니다. 모자람도 바치고 넉넉함도 바쳐야 하는 사진입니다. 어설픔도 바치고 솜씨있음도 바쳐야 하는 사진입니다.

 그래도 에드워드 김 님으로서는 그동안 해온 일거리만으로도 얼마든지 앞으로 튼튼하게 대학교수 자리를 지키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수 에드워드 김’은 될지언정 ‘사진쟁이 에드워드 김’은 될 수 없습니다. 에드워드 김 님 스스로 ‘새롭게 펼치는 사진길’을 헤아리지 않으신다면야 어찌할 길 없습니다. 그저 《그때 그곳에서》 같은 ‘예전에 찍은 사진을 몇 가지 추슬러서 추억 팔기’ 책을 쓰신다고 할 때에는 어찌할 노릇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정작 오늘날에는 ‘사진기를 안 들고’ 있는 채로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안쓰럽습니다. 그 기나긴 사진길 마무리를 이렇게밖에 못하나 싶어서. 그 고단하고 벅찼던 기나긴 사진길 끝을 이렇게밖에 못 맺는가 싶어서.

 새로운 글을 써내지 못하면 글작가가 아니요,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면 그림작가가 아니며, 새로운 만화를 그려내지 못하면 만화작가가 아닙니다. 새로운 사진을 찍어내지 못하면 사진작가가 아닙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은 역사뿐 아니라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이웃 앞에서 언제나 벌거벗고 있어야 합니다. (4342.4.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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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아이들 -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의 고향이다, 함성호 사진집
함성호 지음 / 눈빛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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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에서 사라진 아이, 도시에서는 안 사라졌을까
 [잠깐 읽기 29] 함성호 사진책, 《산골 아이들》


- 책이름 : 산골 아이들
- 사진ㆍ글 : 함성호
- 펴낸곳 : 눈빛 (2007.5.5.)
- 책값 : 15000원



 (1) 어제 우리 땅 아이들 삶자락 담은 사진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의 고향이다”라는 작은 말이 붙어 있는 사진책 《산골 아이들》은 1993년에 처음 나왔습니다. 그러나 오래오래 목숨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새책방 책시렁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헌책방에도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열 해를 훌쩍 넘긴 2007년에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나라안에서 나오는 여느 사진책과 마찬가지로 《산골 아이들》 또한 제대로 사랑을 못 받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만, 꾸준히 찾는 ‘사진 사랑이’ 힘과 출판사 뜻이 모여 새 옷을 입었는데, 새 옷을 입은 사진책 《산골 아이들》은 앞으로 얼마나 목숨줄을 이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첫 쇄 찍기로 그칠는지, 한 번쯤 거듭 찍으며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는지.


.. 그랬다. 사진 속 아이들에게 우리들 세대들에게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았고, 모두가 이웃’이었다. 봄꽃이 산야를 물들이고 보리가 아이들 키만큼 자라면, 가슴 설레게 하는 그 무엇 때문에 산과 들을 헤집고 다녔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어른들에겐 고향의 따뜻함을, 아이들에겐 알지 못했던 어른들의 또 다른 어린 시절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  (찍은이 맺음말/156쪽)


 저는 처음 나왔을 때에는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하며 바지런히 훑어보는데, 다른 사진책은 하나하나 만나게 되어도 《산골 아이들》만은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출판사에 연락을 해도 창고에 반품으로 들어온 헌책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만남줄이 닿지 못하는가 하는 아쉬움과, 언제쯤 다시 빛을 볼까 하는 기다림으로 지칠 무렵 드디어 새로운 판을 만나게 되었고,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판을 장만하여 우리 집 책꽂이에 고이 모셔 놓은 지도 어느새 이태.

 그동안 사진책 《산골 아이들》은 새로운 ‘사진 사랑이’를 꾸준히 만나게 되었을는지 궁금합니다. 이 사진책에 담긴 열매를 받아먹는 사람이 조금이나마 늘었을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쟁이 함성호 님이 산골마을 아이들 삶을 좇으면서 사진으로 하나하나 담아 놓은 땀방울을 느낀 분이 생겨났을는지 궁금합니다.


.. 야구놀이. 인원도 모자라고 규칙도 엉성하지만 우린 실랑이가 없습니다 ..  (41쪽) 






 때때로 사진을 들추면서, 도서관 나들이를 오신 분한테 넌지시 구경시켜 드리면서, ‘산골 아이들’이란 한 해가 다르게 자취를 감추는 우리 모습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그러나, 산골 아이들만 우리 둘레에서 자취를 감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도 ‘도시 아이들’ 또한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산골 아이와 함께 ‘논두렁 아이들’과 ‘밭두렁 아이들’과 ‘바닷가 아이들’이 자취를 감추고, 도시에서는 ‘골목길 아이들’이 자취를 감춥니다. 이러는 동안 ‘아파트 아이들’이 새로 생겨나는데,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틈틈이 잠깐잠깐 인라인이나 자전거를 끄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여도, 아파트마자 하나쯤은 마련된 모래밭 놀이터에서 만나는 일마저 마땅하지 않습니다.

 골목마실을 하면서 자전거 놀이를 하는 아이를 곧잘 스치곤 하지만, 맨손으로 맨땅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노는 아이를 마주치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끔가끔 스쳐 지나가게 되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진 한 장 찍어 볼까?’ 하고 생각하지만, 사진기는 어깨에 둘러멘 그대로 가만히 더 바라보다가 지나갑니다.

 사진 한 장에 박아 놓고 오늘 이 자리 골목길 아이들 놀이를 두루두루 나누거나 남길 수도 있겠지만, 제 눈과 마음과 가슴에 아이들 매무새를 새겨 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설피 아이들 앞에서 사진기를 들이대면서 아이들이 노는 데에 헤살을 놓고 싶지도 않습니다. 옆동네 아이들이니 같은 동네 이웃으로 여기면서 사진을 찍어도 괜찮다고 여겨도 되지만, 아직 이 아이들과 저는 서로 이름을 모릅니다. 저는 아이들이 어느 동 어느 집에서 사는지 어렴풋이 알기는 해도 또렷이는 모를 뿐더러, 아이들은 제가 어느 동 어느 집에서 사는지 아직 모르기도 하고, 낯선 사람입니다. 잽싸게 사진기를 들어 후딱 찍어서 멋진 사진 하나 얻어낼 수 있는 한편, 아이들한테 말을 걸고 나서 웃는 모습을 브이 그려 가며 찍을 수 있기는 한데, 이렇게 해서까지 구태여 ‘골목길 아이들’을 담아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아니, 이렇게까지 할 까닭은 없어요.

 먼저, 사진을 찍는 저 스스로 흐뭇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써 ‘잘 찍은’ 사진이 나올 수 있어도, 그저 잘 찍은 사진일 뿐, 제 삶과 아이들 삶이 묻어난 사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청소를 합니다. 오늘 학교 공부가 모두 끝났습니다 ..  (50쪽)


 사진책 《산골 아이들》을 들여다보면, 사진쟁이 함성호 님은 사진으로 아이들한테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서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 한 걸음은 섣불리 ‘아이들을 사진감으로 담아내려는 몸짓’이 아님을 느낍니다. 다음 두 걸음은 빨리빨리 ‘곧 사라질 모습을 사진으로 적바림하려는 손놀림’이 아님을 느낍니다.

 그저 그곳에 있어서 좋은 아이들이었기에 차분히 기다린 끝에 사진기를 들었다고 느낍니다. 당신 스스로 ‘산골 아이들’과 같은 어린 날을 보낸 기쁨과 웃음이 있었기에, 이 기쁨과 웃음을 고스란히 ‘어른이 된 함성호가 내 어릴 때와 마찬가지인 아이’를 ‘거울로 내 모습 들여다보듯’ 담았다고 느낍니다.

 사진마다 군더더기가 없고, 억지스러움이 없습니다. 물렁물렁 비계가 없고, 어설픈 끼워맞춤이 없습니다. 바라보는 그대로 좋고, 덮었다가 나중에 또 들추는 재미가 있습니다.


.. 감자꽃이 피면 아이들도 감자꽃이 됩니다 ..  (77쪽)


 함성호 님은 사진마다 한 마디씩 이야기를 붙입니다. 사진과 함께 사진말 한 마디로, 당신 스스로 ‘당신 눈에 들어와 당신 사진에서 싱그러이 살아나는’ 아이들을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며 좋아하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사진 하나로도 좋고, 사진말 한 마디로 한결 즐겁기도 한 사진놀이를 펼칩니다. 아이들은 산골마을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놀고, 함성호 님은 아이들 곁에서 사진기를 들면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사진놀이를 즐깁니다.
 





 (2) 오늘 이 땅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렇지만, 사진책 《산골 아이들》은 몇 대목에서 아쉽다고 느껴집니다. 다시 살아나 주어 몹시 반갑고, 다시 살아나 준 일만으로도 반갑습니다만, 어딘가 살짝 빠져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처음 《산골 아이들》을 인천 인현동 〈대한서림〉에서 사들며 두근거리던 마음이, 겉싸개 비닐을 뜯어 한 장 두 장 넘기는 사이 가늘게 한숨으로 바뀌었고, 이태에 걸쳐 제 책꽂이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어딘가 빠져 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종잡을 수는 없었고. 어쩌면, 너무 크게 바랐다거나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고. 그러면 기다릴까? 책꽂이에 고이 꽂아 두고 날마다 바라보면서 이 사진책에서 어딘가 아쉽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스며들 때까지 기다릴까?


.. 가을걷이에 엄마의 손길이 바쁩니다. 서툰 낫질로 일손을 돕습니다. 가을해는 짧기만 합니다 ..  (125쪽)


 틈틈이 다시 들추던 때와 사진벗한테 이 책을 보여줄 때 얼핏설핏, 사진쟁이 함성호 님이 붙인 사진말 가운데 어울리지 않다 싶은 글월이 꽤 보였습니다. 더욱이, 산골 아이가 ‘서툰 낫질’이라고 적은 대목은 얄딱구리하다고까지 느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일 하는 어버이가 키우는 아이가 낫질이 서툴다고? 그럴 수 있나? 때로는 한두 아이가 서툴 수 있을는지 몰라도, 산골 아이가 낫질이 서툴다고? 낫질 서툰 산골 아이라면 그 자리에서 엄마나 아빠한테 꿀밤을 맞든 욕바가지를 먹든 하면서 눈물이 글썽이는 가운데 서툰 낫질이 익숙한 낫질이 되도록 꾸지람을 먹지 않았을는지?

 사진쟁이 함성호 님은 아이들 사진을 찍는 동안 스스로 시인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진마다 한두 마디씩 짤막하게 시를 쓰면서 당신 사진을 즐거워 하고 기꺼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너무 혼자서만 즐거워 하고 기꺼워 한 나머지 ‘사진을 찍으며 어린이 눈높이로 맞추던’ 눈길이 ‘글을 붙이며 어른 생각으로 올라가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내려다보는 눈길로, 마냥 귀엽게만 보는 눈매로, 그저 하늘나라 사람으로 구경하는 눈썰미로.


.. 하루 한두 번 오는 마을버스. 아무리 기다려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타 보는 마을버스입니다 ..  (139쪽)
 





 우리 삶은 줄타기와 같다고 이야기하는 분을 곧잘 만납니다. 웃음과 눈물은 종이 한 장 사이만큼만 벌어져 있다거나, 뒤집으면 서로 똑같다고도 합니다.

 잘 찍은 사진과 잘 못 찍은 사진도 이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사진과 가슴에 다가오지 못하는 사진도 이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성호 님 사진책 《산골 아이들》은 ‘눈물겹도록 반갑고 가슴 저리는 사진’으로 이루어진 가운데 ‘철없는 겉멋에 휩싸인 사진’이 곳곳에 끼어들지 않았느냐고 느낍니다.

 2007년에 새판이 나오게 되면서, 2000년대에 산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발자취를 한두 장이라도 함께 담지 못한 아쉬움도 이런 데에서 비롯하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산골마을 작은 학교가 사라졌다면 사라진 자취라도, 아직까지 꿋꿋하게 남은 작은 학교가 있다면 꿋꿋하게 살아남은 자취를 다문 한 장으로라도 담아내어 같이 나누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산골 아이들》은 완성품이 아닙니다. 기성품도 아닙니다. 사진에는 ‘완성품’이란 없고 ‘기성품’ 또한 있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밟아 나가면서 언제나 새롭게 닦아나가는 사진만이 있습니다. 자꾸자꾸 뒷걸음을 치면서 ‘옛날 모습 담은 아련한 사진’으로 이름값 팔아먹는 수많은 어르신이 주름잡는 한국 사진밭이라고는 하나, 《산골 아이들》과 같은 사진책은 ‘지난 세월에는 산골마을 아이요, 오늘 삶터에는 도시에서 사뭇 다르게 있는 아이요’ 하는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새 길을 잇는 사진밭을 일구는 좋은 거름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4342.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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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4-13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산골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도시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노란 학원버스 안에 모두 팔려가는 누런 병아리처럼 앉아 있더군요.

숲노래 2009-04-14 14:49   좋아요 0 | URL
그렇겠지요.
아이들이 송두리째 사라져요...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 - 행복과 평화에 이르는 길
툽텐 갸초 지음, 김인이 옮김 / 호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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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97 ― 살아가는 즐거움을, 나는 어디에서 찾는가
 : 툽뗀 갸초,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



- 책이름 :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
- 글 : 툽뗀 갸초(에이드리언 펠트만)
- 옮긴이 : 김인이
- 펴낸곳 : 호미 (2009.3.9.)
- 책값 : 11000원



 (1) 나와 식구들 삶


 옆지기 어머님과 집 보러 아침부터 낮까지 돌아다닙니다. 일산에서 전철을 타고 도화역에서 내려 도화동을 거쳐 숭의동과 송림동, 그리고 금곡동까지 여러 부동산집을 돌고 골목골목 집 사이를 누비면서 큰식구가 함께 지낼 만한 마땅한 집을 헤아립니다.

 인천은 아파트 아닌 자리는 모두 재개발이 된다고 하기 때문에 ‘들썩이지 않은 집값’에 따른 집삯 낮은 데를 찾기는 수월하지 않습니다. 딱히 옮기는 사람이 많지도 않고, 집임자도 보일러나 시설을 더 손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곧 뜯어서 없앨 집이니 굳이 삯 준다면서 돈을 들이지 않게 됩니다.

 한 번 지을 때 고작 서른 해도 못 가고 허물 집을 짓기보다는, 백 해나 이백 해는 거뜬히 버티면서 그 동네에 고유한 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인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꿈을 꿉니다. 이러한 꿈을 우리 나라에서 이루기란, 말 그대로 꿈만 같지만, 그래도 이 꿈이 꿈으로만이 아닌 삶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반가우랴 하고 새삼 꿈을 꿉니다.


.. 아버지가 밤에 호통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성냄과 무분별함 때문에 사랑이 녹스는 일이 없는, 완벽한 관계를 찾으리라고 마음먹었다 … 나는 새로운 사상에 언제나 마음이 끌렸지만, 이른바 정통 종교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인 내 부모님은 자식들 머리속에 어떤 종교도 심어 주지 않았다. 부모님은 우리 형제에게 언제나 삶에서 자신의 생각을 따를 자유를 주었다 ..  (23, 40쪽)


 다리에 알이 배길 만큼 집을 둘러보고 나서 옆지기 어머님과 함께 늦은 낮밥을 먹습니다. 젓갈백반 집에서 육천 원짜리 밥을 받아서 먹는데, 젓갈이 남달라 괜찮기는 하지만 너무 짭니다. 짠 반찬 때문에 목이 더 마르고, “집이 없나? 돈이 없지.” 하는 어머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기는. 우리 식구들이 살 집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런 집에 들어가서 큰식구가 지내기에는 돈이 없을 뿐입니다. 달삯이야 어찌어찌 치른다고 하지만 보증금을 짐지어내기란 아득합니다.

 어느 나라라고 하든가, 아니 우리 나라 말고는 보증금 놓고 달삯 내고 하는 틀이 거의 없다고 했지 싶은데. 그러나 우리들이 우리 나라를 떠나 어디 딴 좋은 나라에 가서 살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니, 이러하든 저러하든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야 합니다. 좋든 싫든 가난이란 짊어질 무게이고 삶입니다. 반갑든 괴롭든 오늘 이 자리에서 더욱 옥죄는 일과 무게에 눌리면서 버티고 견디어야 합니다.

 밥집을 나선 다음 어머님은 연수동에 사는 막내이모님 뵈러 가시고, 저는 사진기를 어깨에 걸고 골목마실을 조금 더 잇습니다. “옛날은 북적북적하던 데가 (인천) 동구였는데, 이제는 아주 조용한 동네가 되었어.” 하는 말씀처럼, 지금 저희 살림집이 있고 도서관이 있는 인천 동구는 아주 조용합니다. 함께 골목집 구경을 하는 동안 “옛날에 송림동 깡패 하면 아주 알아주고 무서웠는데” 하고 말씀하시는데, 송림동에는 지금 깡패고 건달이고 하나도 없습니다. 깡패 스스로 이 동네에서는 깡패 짓으로 재미 볼 만한 일이 없을 테니까 모두 북적거리는 다른 동네로 옮겨 갔습니다.


.. 우리는 여전히 한낱 즐거움만 좇을 뿐이었고, 그러다 보니 늘 목마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집으로 돌아오자 마음의 평안이 사라져 버렸다. 옛 친구들이 찾아오고 내 귀향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누군가 초록색 대마초를 가득 채운 물담배통을 내 손에 건넸고, 낯익은 얼굴들이 내 둘레에서 소용돌이쳤다 … “사실 불행한 것 이상이에요. 제가 미쳐 가고 있는 건지, 멜버른 전체가 제정신이 아닌 건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행복한 척하지만 고통과 고민투성이예요 ..  (51, 169, 171∼172쪽)


 골목집 개나리를 보고 벚꽃을 보고 진달래를 봅니다. 활짝 피어난 목련을 보고, 곧 꽃망울 터뜨릴 목련을 봅니다. 이제 이 다음으로 어떤 꽃들이 피어나며 꽃그릇마다 가득할까 헤아립니다. 어느 집에는 파가 오르고 어느 집에서는 상추가 잎을 틔우기도 하는데, 머잖아 한 달쯤 뒤부터 갖가지 푸성귀가 가득한 가운데 싱그러운 풀빛을 뽐낼 테지요.

 앞뜰 조그맣게 있는 집을 들여다보고, 햇볕이 창문으로 가득 들어가는 집을 눈여겨봅니다. 지금 사는 저희 살림집은 다른 모두는 다 나쁘지만 빨래 널기에는 어느 집보다 좋습니다. 햇볕 쬐기를 따로 돈으로 따질 수 없을 테지만, 햇볕 하나만으로도 사람 삶이 한껏 달라지지 않느냐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낮밥을 먹을 때 옆지기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둘레에서 최 서방 사위로 잘 두었다고들 한다고, 어디서 그런 사람을 만나느냐고, 차라리 돈없는 사람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만큼 좋은 사위가 되는지는 모르지만, 저로서는 옆지기한테나 옆지기 식구한테나 또 저희 식구한테나 형제한테나 다른 동무한테나 ‘돈으로 도움 줄’ 수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 앞으로도 돈으로 도움될 구석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없는 제가 손을 벌리면 벌리지, 제가 손을 내밀 일이란 있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돈이 없으니 돈을 나누어 줄 수 없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다른 여러 가지가 있기에 다른 여러 가지를 나눕니다. 책을 나누고 책이야기를 나눕니다. 사진을 나누고 사진이야기를 나눕니다. 글을 나누고 글이야기를 나눕니다. 몸을 써서 함께하는 일을 나누고, 처남 졸업식 같은 자리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한편, 여느 날 치르는 제사에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아기와 함께 장인 어른 댁에서 여러 날 느긋하게 머물면서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기가 선사하는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 “교육 제도, 광고, 종교, 통속적인 신념 같은, 사회의 모든 장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고 저런 것을 하게 만들면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합니다. 자발성의 자유가 없지요. 사람들이 단순히 자기 삶의 행복과 의미를 찾기 위해서 규범에 저항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지요. 적절한 옷을 입고, 같은 것을 먹고, 모두가 하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회를 보세요! 부모들, 교사들, 정치인들, 종교 지도자들, 그들은 스스로 몹시 비참해 하면서도 젊은이들이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한다고 나무랍니다 … 사회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하고 우리는 또 그렇다고 믿지요. 자유로운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참된 행복과 평화를 추구할 자유라곤 없습니다 … 사회를 바꾸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저희 자신을 바꾸려는 겁니다. 되든 안 되든 그렇게 한번 해 볼 자유를 바랄 뿐인 거죠. 그렇게 해서 값진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아마 다른 사람들도 따르고 싶어하겠지요 … 사회는 우리가 더는 먹히지도 않는 옛 전통을 따르기를 바라느니, 더 나은 현실을, 그게 아니면 적어도 다른 현실을 찾는 것을 허용하고 북돋울 힘이 있어야 합니다.” ..  (193∼194쪽)


 어느 모로 보면, 우리 어머니나 형한테 “어머니, 아들이 살림이 참 힘들어서 그러는데 돈 좀 보태 주셔요.” 하고 올리는 말씀이나 “형, 동생이 어찌어찌 해 보아도 안 되어서 부탁을 하네, 미안해, 좀 도와줘.” 하고 드리는 부탁이란 멋쩍으면서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손 벌리는 일은 부끄러움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그렇다고 떳떳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떳떳하지 않아야 할 까닭 또한 없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저한테는 돈이 없으니 돈을 보태 달라고 할 뿐이고, 저보다 돈이 더 있는 분들이 도와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싶을 뿐입니다. 그분들도 힘들면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힘들더라도 보태실 수 있으면 보태어 줍니다. 돈이란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길 가운데 하나’이거든요.

 그리고 저는 다른 데에서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를테면 어떤어떤 공부를 할 때에 어떤어떤 책을 찾아서 읽으면 좋다든지 하는. 판이 끊어진 책을 어디에서 찾으면 좋을까 하는. 판이 끊어져 도무지 없는데 빌려 줄 수 있느냐 하는. 사진기를 장만하려고 하는데 어떤 녀석을 사면 좋을까 하는. 돌잔치나 혼인잔치 때 사진 찍어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 같은. 때로는 이삿짐을 날라 주고, 때로는 책 정리를 해 주고. 마음이 힘들어하는 동무한테는 밤늦은 때에 술동무가 되어 주고. 우리 살림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우리 뒤에서 무럭무럭 커 가는 젊은 벗들한테 밥이나 술 한번 사 주고.


.. 어떻게 이런 천국 같은 곳에서조차도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단 말인가. 이곳 사람들도 결국 닳고 닳아 머리속이 복잡한 서양사람들과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만족할 줄 모르고, 쉽게 화를 내고, 또 보답에 대한 기대 없이는 서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은 어디서나 같았다 … 여객선 사무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보도에 있는 코카콜라 자동판매기를 바라보느라고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것을 보고는 서양 문화가 어머니 인도를 침략한 것에 진저리를 치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 남자가 코카콜라 한 병을 사서 내게 주고는 갔다. 그 남자도 틀림없이 나를 돈 한 푼 없는 마약 중독자라고 생각했으리라. 나는 그 남자의 친절함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비록 내 마음은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 더 평화로웠지만 내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  (262, 303쪽)


 옆지기 식구가 일산에서 인천으로 살림을 옮기게 되면 여러 가지 걱정이 있는데, 이 가운데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간 처남이 가장 크게 걱정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까이 지낸 동무들하고 모두 떨어져야 하는 가운데, 낯선 동네에서 낯선 동무하고 새로 어울리면서 아주 다른 교과과정으로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천에 있는 중학교는 하나같이 건물이 오래되었습니다만, 일산에 있는 중학교는 지은 지 몇 해 되지 않아 시설을 견줄 수 없습니다.

 다만, 처남도 마냥 어린이가 아니니, 식구들이 겪는 어려움을 제 나름대로 삭이고 헤아리면서 받아들이리라 믿습니다. 또한, 처남이 마냥 어린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어른이라 하는 사람’들이 더욱 살가이 어울리고 함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새롭게 꾸릴 삶을 차근차근 일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한테 돈이 아주 넉넉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간다고 즐거움은 아닐 테니까요. 떠나는 만큼 만나는 삶이며, 잃는 만큼 얻는 삶일 테니까요. 돈이 없어 쪼들리기도 하고, 낯선 곳으로 갑작스레 집을 옮기기도 해야 하며, 때로는 학교를 옮기기도 하지만, 없는 살림이라 기쁜 날이 있고, 낯선 동네라 재미난 날이 있으며, 학교를 옮기면서 새롭게 틔우는 눈이 있을 테니까요. 서로가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르게 커 나가게 되는 새로운 발판이기도 할 테니까요.


 (2) 나와 책과 삶


 저소득가구전세자금대출이라는 돈을 받을 수 있나 궁금하여 은행에 다녀옵니다. 여러 가지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은행에서 내어주는 돈은 보증금에서 70%까지 빌려 준다고 합니다. 보증금 10%를 계약금으로 건 계약서를 동사무소와 은행에 내어 보름이나 한 달에 걸쳐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데, ‘저소득가구’인 사람한테는 거의 보름 남짓 하는 동안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일이라든지, 많아야 70%를 빌릴 수 있는 벽이 버겁다고 느껴집니다. 무엇을 하든 밑돈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은행에서는 저보고 “고객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 저는 무슨 일을 할까요. “글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소득신고는 하셨습니까?” 글쎄, 제가 뭐 글삯을 많이 받는 사람도 아니고, 글삯 받을 때 보면 다 세금이 잘려서 들어오던데. “출판사나 언론사에서 다 세금 떼고 주던데요.” “귀하 같은 경우는 무소득자로 간주해서 …….” “네, 그렇군요.”


.. 여권에 도장을 받고 나서 밖으로 나갔더니, 누더기를 걸치고서 누가 봐도 저희 것이 아닌 돈을 한 줌씩 들고 있는 소년들 한 무리가 나를 에워쌌다. “돈 바꿔, 아저씨?” “고맙지만, 됐어.” “해시시 좋아?” “고맙지만, 됐어.” 아이들은 그래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내 관심을 끌려고 서로를 떼밀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아주 기운차 보였다. 이런 장면에는 내가 곧 익숙해질 터였다. 장난감이며 이런저런 도구들이 없어도, 그러니까 우리 서양사람들이 아이가 잘 자라려면 꼭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그런 것들이 없어도, 그 아이들은 대부분의 서양 아이들보다 더 행복하고 더 생기가 넘쳐 보였다 ..  (44쪽)


 언젠가 어느 출판사 사장이 당신이 낸 책을 들고 은행에 가지고 가서 ‘다음 책을 찍을 돈을 빌린 적이 있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었기에, 저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제가 써낸 책 몇 권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무소득자’라는 말에 기운이 꺾여 달리 무슨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그래도, ‘무소득자’라는 사람한테는 천만 원에서 천오백만 원까지 빌려 주기도 한다는 말을 듣고는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그렇지만 천만 원을 빌린다 하여도 70% 벽이니까 1500만 원쯤 되는 보증금을 대는 집을 얻어야 빌린다는 소리이고, 보증금 천만 원쯤이라면 칠백만 원을 빌릴 수 있다는 소리인데.

 뒤에 기다리는 다른 손님이 없지만, 은행에 앉은 엉덩이가 근질거립니다. 더 꺼낼 말도, 딱히 들을 말도 없습니다. 머뭇머뭇하다가는 가방에 챙겨 온 책을 꺼내 은행 직원한테 “시간 나면 한번 읽어 보셔요.” 하고 내밀고는 뒤돌아 나옵니다.


.. 파키스탄사람들은 아프간사람들보다 확실히 너그럽고 속이 깊었지만, 그들은 서양의 물질주의가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 비록 학생들의 말은 변혁을 일으킬 만했지만, 그들은 조만간 저희가 고른 직업에 안주하며 사회적 지위를 누릴 것이다. 그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슬픈 것은 저희 나라와 민중이 지닌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었다. 그들 삶의 진짜 목표는 서양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태도가 안쓰러웠고, 파키스탄이 안쓰러웠다 … 우리를 초대한 세 사람은 우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저희의 생활과 낮은 급여에 실망해서 서양의 생활 양식을 갈망하고 있었다. 우리는 속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나라의 다른 사람들에 견주어 부자인데다 그들의 환경은 대부분의 서양사람들이 꿈꿀 수 있는 것보다 한결 평온했다. 우리는 그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을 진심으로 추켜올림으로써 그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애썼다 …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간 여행은 행운이 가득한 마법 같았다. 위험을 만났지만 잘 모면했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도우려고 애썼다. 우리는 파키스탄의 진면목을 본 것이다.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나는 이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  (66, 83, 97, 153쪽)


 집으로 돌아와 밥을 끓입니다. 요즈음 즐기고 있는 만화 《좋은 사람》을 펼쳐 읽습니다. 혼자서 밥과 시금치를 먹으며 만화책을 넘기다가 눈물이 뚝뚝 듣습니다. 참 좋다는 느낌, 그러나 참 좋다는 이 느낌을 함께 나누기란 참 힘들다는 느낌.

 그렇지만 참 좋다는 느낌이 들도록 애쓴 만화쟁이는 이 만화책을 일곱 해에 걸쳐서 바지런히 이어갔다고 하니, 나 또한 한 작품을 책으로든 사진으로든 무엇으로든 다부지게 붙잡고 걸어나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 그래도 여태껏 배 곯지 않고 용케 책 만들고 책과 함께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생각.


.. 강에서 만난 이 음악의 오르내림은 소떼가 다음 모래톱으로, 또 그 다음 모래톱으로 헤엄쳐 가는 동안, 그리하여 건너편 둑으로 완전히 건너갈 때까지 되풀이되었다. 마침내 소떼가 사막으로 사라지면서 음악은 사라져 갔다. 소떼가 건너는 데 이십 분쯤은 걸렸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소떼의 장엄한 워낭 연주를 지켜보았다. 기계가 없는 상태에서 소리가 새로운 차원을 얻은 것이었다. 새 울음소리, 파도 소리 그리고 강물의 속삭임이 우리와 늘 함께했다.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어쩌다 말을 할 때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 내가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말했다. “사람들 생활에서 늘 되풀이되는 허섭쓰레기들 말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야.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저희 속에 갇혀서 주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잖아.” ..  (119, 131쪽)


 책상맡에 놓아 둔 책 가운데 《엘리노어 마르크스》가 아직 다 읽히지 못한 가운데 제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날 때면 틈틈이 꺼내어 열 몇 쪽씩 들추어 읽는데, 아버지 마르크스와 딸 엘리노어가 보내야 했던 삶과 품었던 꿈을 곰곰이 짚으면서, 마르크스는 그저 수수한 아버지였을 뿐이고 엘리노어 또한 그예 수수한 딸이었을 뿐임을 느낍니다. 마르크스가 이루고 싶어한 세상이든, 엘리노어가 바꾸고자 했던 삶터이든, 늘 온몸으로 부딪히고 부대끼면서 그때그때 맞추고 받아들이면서 바라보고 있었음을 느낍니다.

 아직 몇 쪽 못 읽은 타르코프스키 책 《봉인된 시간》은 《엘리노어 마르크스》와 나란히 꽂혀 있습니다. 야금야금 읽어 나가고자 하지만 자꾸자꾸 눈에 걸리는 얄딱구리한 옮김말 때문에 머리를 거쳐 가슴으로 파고들지 못합니다.

 그 옆에 꽂아 둔 《사람은 왜 사는가》(이노우에 쇼지)라는 책을 들춥니다.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는 것은 예수가 제일 싫어한 자세입니다(132쪽).” 같은 대목이 부드러이 제 마음결을 사로잡습니다. 깔끔한 옮김말과 함께 단출한 글투가 몹시 사랑스럽다고 느끼는데, 문득문득 제가 쓰는 글도 이런 분들 글처럼 내 둘레 사람들 마음결을 부드러이 사로잡을 수 있는지 뉘우치게 됩니다. 제 깜냥껏 단출하게 추스른다고 하는 제 글이 참말로 단출한지, 단출하면서 알맹이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 나는 그가 옳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그런 함정들을 피해, 고통보다는 즐거움을 나누는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라마 예셰는 늘 그런 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북돋았다. 만일에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낟 해도, 라마 예셰는 우리가 우리 결정대로 행동하고 그 결과로 시련을 겪게 내버려 둘 것이다 … 앤과 주디가 모두 타라 하우스에 왔다. 나는 두 사람 다한테 애착을 느꼈지만, 서원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그들과의 우정은, 어떻게 하면 서양 사회에서 승려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체특해 나가는 과정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욕망의 노예가 되는 대신 그 욕망을 관찰했고, 더불어 여자들과 가까운 친구로 지내는 데에서 생기는 장점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불을 갖고 노는 것만큼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 만일 타 버릴 거라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는다면 내 마음은 서양 사회의 관능성에 저항하는 힘을 훌륭히 단련한 것이 될 터이다 ..  (306, 334, 342∼343쪽)


 좋은 책 하나 찾아서 읽는 동안 제 마음 또한 좋아지도록 하자고 다짐합니다. 조금씩 제 마음이 좋아진다면 이 좋은 마음으로 내 일손을 한결 기쁘고 홀가분하게 다잡게 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책을 읽으며 받아들인 그 좋은 느낌을 책을 덮고 난 다음에도 잊거나 잃지 않는가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마흔 평이 넘는 도서관에 빼곡하도록 갖가지 책을 갖추어 놓았다지만, 이 책들 가운데 몇 권이나 내 숨결로 고이 자리잡았는가 헤아리면 멋쩍습니다.

 사람들한테 ‘더 많은 책’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저 스스로 ‘더 많은 책’에 휘둘리거나 빠져 버리지 않는가 돌아봅니다. 혼자만 좋은 책 읽겠다면서 아이 키우는 일에서 살짝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는가 되뇌입니다. 남보다 먼저 어떤 책을 읽었거나 남은 모르는 어떤 책을 뜻밖에 만나서 알게 되었다고 우쭐거린 적은 없었는가 뒤돌아봅니다.

 좋은 책에 내 삶을 맞추는 일도 괜찮을 수 있으나, 책만 보다가 내 삶을 못 보지는 않는가 곱씹습니다. 내 삶에 따라 좋은 책을 찾는 일도 괜찮겠지만, 내 삶을 앞세워 좋은 책을 코앞에 두고도 주머니가 가볍다든지 짬이 모자란다든지 하면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는가 되씹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책에 담긴 ‘좋음’을 꾸밈없이 달게 빨아먹고 삭이려는 매무새를 잊은 적은 없었는가 뉘우칩니다.


 (3) 의사가 하는 일, 스님이 만나는 사람


 이야기책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를 덮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으면서 읽어 보려고 했지만, 아기는 책장을 휙휙 잡아채어 북북 뜯으려 하고, 책을 바닥에 놓으면 엉금엉금 기어와 입에 집어넣습니다. 이 책뿐 아니라 다른 책을 쥘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구나, 아기를 돌본다고 하는 자리에서는 아기만 생각해야지,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든지 딴짓을 해서는 안 되겠구나. 머리통을 가볍게 툭툭 때리고는 책을 가방에 집어넣습니다. 인천과 일산을 오가는 전철길에서 읽고, 아기가 잠들고 난 다음 읽으며, 새벽에 좀더 일찍 일어나서 읽자고 생각합니다.


.. 우리를 들여보낸 사람 말고는 그곳에 아무도 없었고, 소리라고는 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뿐이었다. ‘낙원이 따로 없군.’ 런던에서 그칠 줄 모르는 자동차 소음 속에서 일하던 것이 떠오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무실에서와 같은 그런 평화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살고 있을꺼나. 보좌관은 주변 환경만큼이나 조용했다 … 내가 5루피를 주자 좀더 큰 (거지) 소녀가 내게 천금에 값하는 웃음을 살짝 던졌다. 다른 승객들이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인도의 계급 제도가 혐오스럽기만 했다 ..  (95, 159∼160쪽)


 이야기책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는 책이름 그대로 ‘티베트 승려’가 된 호주사람 삶을 담습니다. 이 호주사람은 책이름 그대로 ‘히피’였고 ‘의사’입니다.

 우리로서는 꿈도 꾸기 어렵지만 대마초를 비롯한 수많은 마약을 즐겨 먹고 마시고 피웠으며, 이러는 가운데에도 ‘서양 물질문명으로는 안 된다. 어딘가 잘못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서양 물질문명이라고 느끼면서도 당신 스스로 잘못된 물질문명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자꾸자꾸 핑계를 댑니다. 물질문명을 한손으로 붙잡고 있으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깨달음을 붙잡고자 합니다.

 어쩌면, 두 가지 모두 이루는 길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제대로 못 찾아서 그렇지, 두 가지뿐 아니라 서너 가지를 한꺼번에 이루는 길 또한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참말 이런 길이 있을까요. 자연 삶터를 무너뜨리지 않고 자연자원을 얻어 쓰는 길이 있을까요. 돈 많이 벌면서 착한 마음 아름다이 지키는 길이 있을까요. 오래오래 많이많이 배우면서 자기 머리에 쌓은 지식을 손쉽게 풀어내어 나누는 길이 있을까요. 자가용을 몰면서 걷는 사람한테 마음쓰는 길이 있을까요. 국가보안법을 휘두르면서 평화를 사랑하는 길이 있을까요. 돈없는 사람 마을에 아파트를 세우면서 돈없는 사람이 깃들일 집자리를 지키는 길이 있을까요.


.. 오래된 건물들을 밀어내고 현대 도시를 세운다는 리관유(이광요) 수상의 정책이 우리 눈에는 그 도시를 죽이는 것으로 보여, 그길로 말레이시아의 페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  (224쪽)


 아주 슬기로운 길은 틀림없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그 슬기롭다고 하는 길이 펼쳐지는 모습은 아직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제 둘레에서는 아직 못 느끼고 있습니다. ‘착한 마음’과 ‘돈’ 두 가지가 우리 앞에 있고, 이 가운데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할 때에, ‘돈’ 아닌 ‘착한 마음’을 선뜻 집어드는 이웃이나 동무는 거의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배가 좀 고프게 되더라도 착한 길을 걷는 이웃이란, 내 몸이 더 고되게 되더라도 착한 길을 반기는 동무란, 아무래도 못 만날는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남들한테 바란다면 힘들 일이라고 느낍니다. 남들이 나서 주기를 기다린다면 끝이 없다고 느낍니다.

 제가 나서야 할 일입니다. 저부터 걸을 길입니다. 좋은 깨달음이 있다면, 온갖 잇속과 밥그릇과 이름값과 힘을 등져야 할 노릇입니다. 껍데기는 가라 했던 싯말만 욀 일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나한테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껍데기를 훌훌 털어낼 노릇입니다. 돈 많이 벌어 떵떵거리게 된다면 착한 일을 할 생각이 아니라, 바로 오늘부터 마음을 착하게 다스리면서 가난한 살림으로 함께할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고 나눌 노릇입니다.


.. 우리가 바나나를 말리고 있을 때 마약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전에 톰의 집에 해시시를 몰래 숨겨 놓고는 그를 체포한 적이 있었다. 이 경건한 백인 노동자들의 동네는 남부에서 온 긴머리 히피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모글 꽉 죄는 셔츠와 넥타이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는 그들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마약을 만들고 있다고 책잡으면서도, 여기저기 널린 것이 마약인데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  (200쪽)


 티베트가 중국한테 무너진 까닭은 이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티베트사람이 중국 군인한테 끔찍하게 짓밟히고 들볶이다가 죽여 나가는 까닭은 이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평화와 자유와 민주와 자치가 있던 티베트에서 어마어마한 지하자원을 뽑아내고, 티베트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며, 지금으로서는 중국땅이 아주 넓고 힘도 센 듯 느껴질 테지만, 간도 허파도 내주면서 스스로 사랑이 되는 티베트이기 때문에 주먹다짐이 아닌 눈물과 웃음으로 가여운 중국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히피이며 의사였던 글쓴이 ‘에이드리언 펠트만’은 아프가니스탄부터 파키스탄과 인도와 태국과 말레이사아를 두루 거친 다음 티베트에 뿌리를 내리면서, ‘툽뗀 갸초’라는 새 이름으로 새 삶을 꾸리게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저는 제 이름 석 자를 내려놓고 ‘함께살기’라는 이름으로 새 삶을 꾸리자며 열 몇 해째 바둥거리는데, 아직까지 그저 바둥거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져 남우세스럽습니다. (4342.4.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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