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톰의 슬픔
테즈카 오사무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17 ― ‘좋은’ 진보를 꿈꾸면 ‘좋은’ 만화를 읽어야
 : 데즈카 오사무, 《아톰의 슬픔》


- 책이름 : 아톰의 슬픔
- 글 : 데즈카 오사무
- 옮긴이 : 하연수
- 펴낸곳 : 문학동네 (2009.1.21.)
- 책값 : 8500원


 (1) 책, 책읽기, 책삶


 장마비가 끝없이 내릴 듯하더니, 어제 하루는 말끔히 개면서 날이 몹시 무더웠습니다. 집안 창문을 모조리 열어 놓아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아쉬우나마 바람 한 점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밤새 후덥지근한 가운데 모기는 법석을 떱니다.

 이런 더운 날, 어른들은 차가운 보리술이나 얼음커피를 떠올릴 테고, 아이들은 차가운 얼음과자나 팥얼음물이나 콜라를 떠올릴까요. 더위를 이기거나 견디면서 내 마음밭 살찌울 책 하나 읽겠다고 나설 어른이란, 또 어린이란 얼마나 될까요.


.. 뻔뻔스럽게 국민을 탄압하는 악랄한 권력자와 정치가조차도 태연한 얼굴로 ‘숲은 소중하다’, ‘동물을 보호하자’, ‘생명을 존중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가차 없이 독극물을 흘려보내고, 끊임없이 살인병기를 개발하고 제조하지요 … 혹시 인류는 어제도, 또 오늘도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리 달에 착륙하고 우주정거장을 건설한다 해도 환경 파괴와 전쟁을 멈추지 않는 한 인류는 ‘야만인’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 국가권력이 ‘정의’라는 이름 하에 국민들에게 휘두른 폭력의 실상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린 작품이 《아돌프에게 고한다》입니다  … 전쟁터에서는 어디로 도망치든 결국 공포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탈출구는 없습니다. 그것이 지진이나 해일과 같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괴물이라는 점이 가장 참혹한 것입니다 … 수많은 나라가 저마다 ‘정의’를 내걸고 전쟁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정의’란 참으로 편리한 말이어서 국가의 수만큼, 혹은 인간의 수만큼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거창한 ‘정의’의 속뜻은, 노인부터 순진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참한 살육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16, 18, 41, 53∼54쪽)


 아기 기저귀를 빠는 동안은 조금 시원합니다. 찬물을 만지기 때문입니다. 더운 날에는 아기를 여러 차례 씻깁니다. 이제 기저귀를 떼야 하니 아랫도리를 벗기거나 속옷만 한 벌 입혀 놓는데, 오줌을 가리기 앞서까지는 온 방바닥이 오줌바다가 됩니다. 그만큼 기저귀 빨랫거리는 줄지만, 하루에 열 번 남짓 걸레질을 해야 합니다. 기저귀 열 번 빨기보다 걸레 열 번 빠는 일이 한결 수월합니다.

 어른 두 사람이 아기 하나한테 매여 쩔쩔맨다고 할 텐데, 이렇게 쩔쩔매는 동안 엄마든 아빠든 제 마음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어질어질 해롱해롱 아슬아슬 간당간당입니다. 아기를 어르고 달래는 사이 어느새 밥때가 다가오고, 밥때가 다가와 밥을 차려 놓으면, 아기는 제가 숟갈질을 하겠다며 한손으로 꾹 움켜쥐고 밥을 다 헤집어 놓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떠먹여 주면 고개를 도리도리 젓거나 엉금엉금 내뺍니다. 한 숟갈 먹일 때마다 몇 분씩 걸립니다. 이렇게 하루 온통 바쳐 씨름을 하며 지치는 엄마 아빠가 책을 펼치기란 대단히 힘든 노릇. 뒷간에서 똥을 눌 때, 이제 지쳐 잠자리에 드러누우며 잠깐 책을 집어들지만, 겨우 잠들었다 싶은 아기는 금세 다시 깨어나 응애응애거리니 이마저도 몇 쪽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먹고살기 바쁜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농사일이나 공장일로 고단한 일꾼은 일꾼대로, 또 장사하기 벅찬 장사꾼은 장사꾼대로, 그리고 집에서 아기하고 씨름하는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한국땅 사람한테 책이란 머나먼 님, 아니 멀디먼 남입니다.


.. 겉보기에 평화로운 사회 속에서 하루하루 안락하게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이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의 내면에까지 뿌리내린 것입니다 … 일본의 군부와 정보기관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영상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정책을 편 것이겠지요. 우리 세대는 고스란히 그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전쟁에 흠뻑 빠져 버린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애니메이션 제작에 힘써 온 것은, 군국주의가 남용한 영화의 효용을 거꾸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의 눈망울에 꿈과 희망을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  (29∼30, 44∼45쪽)


 아이가 책을 읽자면 어버이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아이가 바르고 착하게 크자면 어버이가 바르고 착하게 커야 합니다. 아이가 튼튼하고 씩씩하자면 어버이가 튼튼하고 씩씩해야 합니다.

 아이는 어느새 어버이를 따라 합니다. 좋은 모습이든 궂은 모습이든 따라 합니다. 아이는 엄마 아빠 모습을 보며 절구질 시늉을 하고, 숟갈질 시늉을 하고, 빨래 비빔질 시늉을 하며, 방바닥 걸레질 시늉을 합니다.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습니다. 어젯밤 오늘밤 그젯밤 …… 요 며칠 사이 우리 동네 사람이나 우리 동네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깊은밤에 술에 절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그제와 그끄제에는 경찰차가 와서 주정뱅이를 끌고 갔고, 어제는 ‘아마 그제나 그끄제 끌려갔구나 싶은’ 주정뱅이가 ‘x같으면 신고해!’ 하면서 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오늘밤이라기보다 새벽나절 너덧 시에는 어떤 젊은 사내와 계집이 술에 절은 소리로 악을 쓰며 싸웁니다. 저와 옆지기는 이 소리에 흠칫 놀라 잠에서 깨는데, 아기도 이런 소리에 놀라서 깰까 걱정입니다. 조용할 때에는 그지없이 조용한 골목동네이지만, 동네사람이든 딴 곳 사람이든 술에 절디전 사람들이 때때로 부리는 못난 짓이 고스란히 아이한테 옮을까 걱정입니다. 낮에는 동네 할매들이 우리 집 옆에 붙어 있는 정자에서 소주잔치를 으레 벌이며 갖은 욕을 늘어놓는데, 이런 소리도 우리 아이뿐 아니라 우리 동네 다른 아이한테 조금도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어버이 된 사람으로서, 이런저런 주정뱅이 소리가 아닌, 동네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제법 많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동네 곳곳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팔랑거리는 소리와, 바닷가에서 큰배가 뚜우 하고 울리는 소리, 그리고 빗소리 봄이 가는 소리 여름이 오는 소리 들을 받아들이고 느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대로만 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그저, 아이 앞에서 엉뚱하거나 엉망진창인 소리가 되도록 덜 가닿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이 세상에 ‘한심한 아이’나 ‘나쁜 아이’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딱지가 붙은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정신이 궁핍한 것입니다 … 우선 부모의 생활이 완전히 규격화되어 있지요. 빡빡한 하루 일과 속에 어린이를 적당히 끼워맞추는 게 다반사입니다 … 부모가 특별한 지위나 힘을 지닐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저 대세를 좇아 학력사회만 추종하며 자녀가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설령 주류에서 조금 밀려난다 할지라도 자녀와 함께 자기 가정만의 가치관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가요? ..  (58, 65∼66쪽)


 곰곰이 헤아려 보면, 제가 헌책방마실과 골목길마실을 꾸준히 잇는 까닭은 제 마음과 몸을 살찌우며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옆지기와 아이를 함께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책 그대로 꾸밈없이 바라보고 껴안고 싶어서, 새책방마실뿐 아니라 헌책방마실을 함께하며 책사랑 마음을 즐거이 가꿉니다. 헐어도 책이요 번쩍거려도 책이거든요. 이천 원짜리라 해서 나쁘거나 이만 원짜리라 해서 좋거나 하지 않는 책입니다. 더 넓은 길이라 하여 사람이 다니기에 좋은 길이 아니며, 더 큰 집이라 해서 더 살기 좋은 집이 아닙니다. 수수한 살림살이며 갖가지 꽃그릇이며 꽃풀나무이며, 제 눈길과 매무새를 고이 지키도록 도와주고 되돌아보도록 이끕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장만하는 책들과 골목길마실을 하면서 찍어 놓는 사진들을 떠올려 봅니다. 모두 저 혼자 좋아서 보는 책이며 찍는 사진이라 하겠습니다만, 또 이 책과 사진을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만, 그저 옆지기와 아이와 나란히 즐기고 맛보며 함께할 수 있으면 흐뭇하다고 여깁니다. 이 책들처럼 아빠와 엄마가 살고 있으며, 이 사진들처럼 아빠와 엄마는 세상을 들여다봅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는 가운데, 제 깜냥껏 어버이를 느낄 테고 동네를 느끼며 세상을 느끼리라 봅니다. 이 자람길에서 책은 아이한테 길동무가 될 수 있고, 골목길 사진은 아이한테 길눈이 될 수 있습니다.


..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더라도 일본의 역이나 빌딩 등 도시의 구조는 도저히 노인이나 장애인을 배려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 모든 사람이 살기 좋은 사회란 곧 모든 생물이 살기 좋은 사회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 아무리 일본인의 후각이 발달했다지만 도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코가 둔감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뒷골목 가게의 맛있는 라면 냄새는 금방 맡아도, 사계절이 변화하는 자연 속의 미묘한 향기는 알지 못합니다 … 정치인들이 더 많은 벌레와 생물들의 이름, 그리고 그것들의 서식지와 수명, 먹이까지 상세히 안다면, ‘이 공원에는 무슨 나무를 심어서 이런 새들이 찾아오도록 해야겠다’는 식의 녹색행정을 펼쳐, 숲과 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푸른 도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정도도 한낱 꿈으로 여겨야 한다면 너무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닌, 이룰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  (81, 86, 132쪽)


 옆지기나 저나, 우리 아이가 더 많이 배우거나 알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두 사람 스스로 더 많이 배우거나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옳다면 그 한 가지 옳은 길을 가면 넉넉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우며 남다른 한결 옳고 바람직한 길이 있다 해서 반드시 그 길로만 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길을 가되, 우리 둘레에 어떤 이웃이 어떻게 애쓰고 힘쓰는가를 헤아리거나 껴안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책읽기를 이어갑니다. 고단하고 지치는 하루하루이지만, 다문 몇 쪽이라도 펼치고자 하며, 미처 못 읽어낼 책이라 하여도 ‘이런 책은 다른 사람이라도 볼 수 있도록 사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란 우리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동네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이든, 눈을 뜨려 하고 생각을 열려 하며 마음을 넓히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이한테 내밀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조촐하게 동네도서관을 지켜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2) 만화, 만화책, 만화쟁이


 만화쟁이 ‘데즈카 오사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주 드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데즈카 오사무 만화 가운데 무엇을 보았나요?” 하고 여쭈어 본다면, “글쎄요…….” 하고 뒷통수를 긁적이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 이름나고 널리 읽힌 《우주소년 아톰》마저 첫 권부터 끝 권까지 찬찬히 펼쳐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이 그린 《붓다》를 스무 해쯤 앞서 ‘고려원미디어’에서 우리 말로 옮겨서 펴낸 적이 있음을 아는 분은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1960년대 우리 나라 과학잡지에 ‘아톰’ 해적판이 이어실린 적이 있기도 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은 일본 역사를 다룬 만화를 곧잘 그리기도 했고, 《밀림의 왕자 레오》라든지 《사파이어 왕자》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작품 이름을 댄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텔레비전 만화영화로 보았다’고 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있기는 있어도 이 만화들이 무엇을 보여주려 했고, 무슨 생각을 나누려 했으며, 아이들한테 이런 만화영화를 선물해 주고자 한 만화쟁이 속내를 헤아리는 분은 거의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 어린 시절, 나는 다카라즈카라는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였던데다가 막 전쟁에 돌입한 시기였기 때문에 결코 좋은 시절은 아니었습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곁엔 늘 자연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마음껏 뛰놀던 산천과 초원, 한없이 빠져들었던 곤충채집은 지금도 생생한 추억으로 빛을 발하며 내 몸과 마음 깊숙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 필명인 ‘오사무(治蟲)’도 실은 ‘딱정벌레’에서 따온 것이지요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네마다 숲과 들판이 있어서 아이들은 골목대장과 함께 해가 저물도록 그 환상의 왕국에서 뛰어놀 수 있었습ㄴ디ㅏ. 그곳은 우주기지였고, 탐험대가 찾아나서는 비밀스런 땅이었으며, 끝없이 공상이 퍼져나가는 미지의 장소였습니다 … 이제까지 나는 미래사회를 다룬 만화를 많이 그려 왔지만 우주 저편까지 날아가는, 혹은 작은 벌레 속까지 파고드는 상상력의 기반은, 내 안의 ‘자연’이었습니다 … 맹렬한 비판의 폭풍 속에서도 만화를 그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로봇의 격렬한 싸움을 그린다 해도 내 만화의 주제는 항상 자연에 뿌리를 둔 ‘생명의 존엄’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  (11∼13쪽)


 ‘데즈카 오사무’라는 이름은 무척 널리 알려져 있었음에도, 정작 데즈카 오사무 님 작품이 제대로 나라안에 나온 적은 거의 없습니다. 2000년을 조금 넘어선 때에 학산문화사에서 ‘데즈카 오사무 전집’ 비슷하게 예닐곱 가지를 옮겨냈고, 솔출판사에서 한 가지를 옮겨냈습니다. 그러나 이 ‘데즈카 오사무 전집’ 비슷한 만화책들은 몇 해 지나지 않아 거의 모두 절판이라는 길을 걷습니다. 이제는 《우주소년 아톰》 24권, 《블랙잭》 22권, 《도로로》 4권, 이렇게 찾아볼 수 있는 가운데 ‘데즈카 오사무 초기 걸작집’ 네 권을 겨우 만날 수 있습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이 세상을 떠난 지 스무 해가 되는 2009년 올 1월에 나온 산문모음 《아톰의 슬픔》이라는 책에서 글쓴이 데즈카 오사무 님이 여러 차례 되뇌는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우리 말로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지 않느냐 싶고, 《불새》는 한 번 나왔으나 이 또한 금세 판이 끊어졌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만화영화 《밀림의 왕자 레오》나 《사파이어 왕자》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할 텐데, 정작 ‘만화영화로 그려지던 첫 만화책’을 살펴볼 수 없는 대목은 몹시 안타깝습니다.

 우리 문화 눈높이가 이만큼밖에 안 되며, 우리 만화 눈높이도 더 뻗어나가지 못하는 모습이라 할 텐데, 곰곰이 따져 보면,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만 이렇게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나라안 숱한 만화쟁이 작품을 찾아보기도 퍽이나 어렵습니다. 부천에 만화책 다루는 도서관이 한 곳 있기는 합니다만, 이곳을 뺀 다른 여느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찾아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요?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할 뿐 아니라, 훌륭한 만화책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네 도서관 사서 가운데 ‘만화를 만화 그대로 받아안을’ 만한 생각그릇을 갖춘 분은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습니다. 국립이든 공립이든 시립이든, 또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이든, ‘알찬 만화이든 재미난 만화이든 차곡차곡 갖추는 일’에는 어느 사서나 선생님이나 젬병이 아니냐 싶습니다.


.. 나는 자연과 인간성을 외면한 채 오직 진보만을 추구하며 질주하는 과학기술이 사회에 얼마나 깊은 균열과 왜곡을 가져오고 얼마나 많은 차별을 낳는지, 또 인간과 모든 생명에게 얼마나 무참한 상흔을 남기는지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 아톰도 인간들 사이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왕따’였습니다. 하지만 소신 있게 행동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때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악당에게도 용기 있게 맞서는 아이로 그렸습니다. 물론 만화 속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본래 어린이들에게는 그런 에너지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 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고, 매미가 울고, 강에는 물고기가 헤엄치던 자연, 그것은 그대로 우리들의 일상이었고, 벌레와 새와 어린이가 공존하던 세계였습니다. 자연을 ‘추억’으로도 소유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타인의 아픔과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친다는 것은 무척이나 모순된 일이 아닐까요? ..  (22, 27∼28, 57쪽)


 엊그제 잠깐 들렀던 헌책방에서 만화책 《불새》 일본판 하나를 만났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데즈카 오사무 님 숱한 만화책은 ‘번역이 안 된 탓’인지 모르나, ‘일본판으로 웬만한 작품이 거의 다 들어와’ 있은 듯합니다. 제가 만난 《불새》 일본판인 《火の鳥》에는 한국 책방에서 팔았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글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주제에 전철길에 이 만화를 다 보아 냈는데, 퍽 예전 작품인 《불새》에는 톤을 하나도 쓰지 않습니다. 그림자며 옷이며 모두 펜끝으로 마감합니다. 그린이 손길이 무척 많이 갔구나 싶은 한편, 이렇게 펜질로 모든 그림을 그려내는 작품은 톤을 쓰는 작품하고 얼마나 다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톤을 쓰면 안 좋고 톤을 안 쓰면 좋다가 아니라, 펜질만으로 된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조금 더 찬찬히 만화에 빠져들기도 하고, 그림을 한 번 더 지그시 바라보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저한테는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 느낌이, 꼭 김수정 님 예전 만화를 보는 느낌이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길을 다 다른 생각으로 만화를 그렸습니다만, 제 마음으로 스며드는 느낌은 한동아리입니다. 그래서, 한 해에 한 차례씩 김수정 님 만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롭게 다시 보고 있는데,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또한 한 해에 한 번쯤 우리 집 책꽂이 앞에 선 채로 죽 보아 내곤 합니다.

 재미가 있기도 하지만 재미만 있지 않은 만화요, 이야기가 있기도 하지만 이야기만 있지 않은 만화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만화이지만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한 만화 또한 아닌, 김수정 님 작품이고 데즈카 오사무 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애니메이션에서 전쟁을 묘사할 때도 제작자의 메시지를 담는다면 괜찮지만, 전쟁을 단순하게 묘사하기만 하는 것은 엄청난 죄악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 나에게도 세 명의 자식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는 지금의 평화와 자유를 지켜 주고 싶습니다 ..  (62∼63쪽)


 아이를 낳기 앞서도 만화책을 즐겨 장만하며 차곡차곡 갖추었고, 아기를 낳은 뒤에도 만화책을 즐겨 보면서 하나하나 갖춥니다. 저 스스로 만화를 좋아하니까 꾸준하게 만화를 즐깁니다. 뒷날 우리 아이가 여러 갈래 온갖 만화를 스스로 살피면서 아이 깜냥껏 마음을 채우고 덥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장만해 놓습니다. 세상 어느 책이 안 그러겠습니까만, 그때그때 장만해 놓지 않으면 이내 판이 끊어지며 사라집니다. 새책방에서든 헌책방에서든 보이는 그때그때 집어들어 주머니를 털지 않으면 나중에 눈물만 질금질금 흘리거나 입맛만 다셔야 합니다.

 책값에 돈을 쓰는 일을 힘들거나 아깝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이런 책 저런 만화를 차근차근 장만해 놓으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 하나는 있습니다. 참말, 우리네 도서관에는 왜 만화책이 없는지, 또 도서관을 꾸리는 분들은 왜 만화책을 갖출 생각을 못하는지, 그리고 왜 어른들은 만화를 깔보거나 ‘돈 되는 사업’으로만 여기는지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그림은 그림이고 사진은 사진이며 춤은 춤이고 노래는 노래이듯, 만화는 만화입니다. 수학은 수학이고 과학은 과학이며 영어는 영어이듯, 만화는 만화입니다.

 만화는 우리 꿈을 담아내는 문화예술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화는 우리 생각과 삶을 보여주는 문학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화는 우리 마음을 쉬게 하거나 우리 마음을 살찌우는 마음밥 가운데 하나입니다.


.. 도시의 구조 자체가 이러했기에, 일본인들은 내 마을 주변의 생명과 자연환경을 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런데 왜 우리는 수십 년 동안 도시 공간과 자연을 격리시키려 안간힘을 쓰게 됐을까요? … 일본 고유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서구의 도시를 억지로 흉내내다 보니 심각한 왜곡과 불균형이 생겨 결국 자연환경까지 해치게 된 것이 아닐까요? … ‘여유’는 인생의 꽃입니다. 나는 여행을 할 때 여러 마을의 뒷골목을 둘러보곤 합니다. 그곳에는 다양한 인생의 향기가 스며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판자로 엮은 담이나 처마 밑, 도랑, 집과 집 사이의 공간에 특별한 매력을 느낍니다 … 무미건조한 빌딩숲을 거닐며 행복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뒷골목을 걷다 보면 여러 가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어 즐겁습니다. 그것이 곧 놀이인 것이지요 ..  (122∼124쪽)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만화쟁이를 한 사람, 또는 한 직업인, 또는 한 문화인, 또는 한 문화예술인으로 섬기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박재동 님이 《인생만화》, 《밥보다 만화가 더 좋아》, 《만화 내 사랑》 같은 글모음(또는 글그림모음)을 내고, 이두호 님이 《무식하면 용감하다》를 냈지만, 만화쟁이로서 당신 삶을 글로 펼쳐 보이는 분이 몹시 드뭅니다. 또한, 딱히 책으로 내주려 하는 흐름도 옅구나 싶고, 애써 책으로 나온다 한들 두루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머리통 굵은 어른은 어른대로 만화를 만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니, 만화쟁이가 쓴 글을 읽지 않습니다. 어릴 적 만화를 보았던 이들은 이런 이들대로 당신들 만화 삶을 어른이 된 뒤에까지 잇지 못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만화를 좋아하는 분들은 ‘일찌감치 판이 끊어져 다른 여러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운 만화쟁이’가 된 탓이 있기는 하나, 만화쟁이가 쓴 글을 잘 안 읽습니다. 다른 숱한 만화책을 보기에만 바쁩니다.

 이런저런 까닭이 겹치고 맞물리면서, 데즈카 오사무 님 글모음 《아톰의 슬픔》은 그리 눈에 안 뜨이는 책이 되고 맙니다. 2006년에 나온 《어머니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다》도 그렇고, 2002년에 나온 《만화가의 길》도 매한가지였습니다. 






 (3) 《아톰의 슬픔》이라는 책은


 올 1월에 데즈카 오사무 님 글모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뻤습니다. 이모저모 알아보니 그동안 두 차례 다른 글모음이 나온 적이 있는데, 두 번 모두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쳤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언론매체나 비평가 눈길과 손길을 거의 못 탔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책은 여느 새책방 책꽂이에 제대로 못 꽂히기도 했겠지요. 만화책 전문가게에 열 몇 해 동안 꾸준히 들르고 있습니다만, 제가 들르는 만화책 전문가게에도 데즈카 오사무 님 글모음이 꽂힌 모습을 못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데즈카 오사무’를 모르니까, 또 안다고 해 보았자 기껏 ‘아톰’이라는 이름뿐이니까 그럴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기껏 아톰만 안다 할지라도, 만화책이나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일’이 없었다면, 데즈카 오사무이든 와사무이든 와사비이든 무슨무슨 책을 냈다 해서 딱히 눈여겨보지 않으리라 봅니다.


..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월급봉투를 받으면 내 책값을 따로 빼서 만화책을 사주었습니다 … 게다가 내 경우엔 어머니가 만화책을 소리내어 읽어 주었던 것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 50년 전에(1930년대에) 자식에게 만화책을 읽어 준 어머니는 굉장히 유별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읽어 주는 방식이 그야말로 걸작이었지요. 등장인물마다 캐릭터 별로 목소리를 바꿔 가며 연기하듯 재미있게 읽어 주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숨죽이며 감동해서 울먹일 정도로 ..  (34∼35쪽)


 어릴 적 만화영화로 《우주소년 아톰》을 볼 때면 언제나 눈가가 촉촉하게 젖곤 했습니다. 저는 아톰 만화를 ‘눈물을 흘리며’ 보았습니다. 다른 분들은 으레 ‘공상과학’이니 ‘미래세계’니 하고 말씀하지만, 저한테 아톰은 공상과학도 미래세계도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바로 ‘오늘 내 둘레 삶터 이야기’였습니다. 아톰이 사는 무대가 먼 앞날이라 하지만, 무대와 과학기술을 빼놓고 보면, 언제나처럼 우리 둘레 여느 사람들 삶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이는 《사파이어 왕자》와 《밀림의 왕자 레오》를 만화영화로 볼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느끼기로, 데즈카 오사무 님은 한낱 우스꽝스런 만화감이나 공상을 퍼뜨리려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품이 따뜻하고 넉넉한 큰형이나 큰아저씨와 같았습니다.

 《돈 드라큐라》를 보건 《미크로이드 S》를 보건 《노만》을 보건 《아야코》를 보건 늘 매한가지입니다. 헌책방에서 때때로 데즈카 오사무 님 그림이 들어간 일본 어린이책을 만날 때면 으레, ‘우리 나라에서도 이렇게 만화쟁이들이 널리 사랑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가운데, 우리 나라에도 ‘눈물을 흘리며’ 볼 수 있는 만화쟁이가 더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요정 핑크》라든지 《달려라 하니》라든지 《번데기 야구단》이라든지 하는 만화책은, 벌써 몇 백 번이 넘게 보고 또 보아, 책이 퍽 낡고 닳았습니다. 이 만화책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자아내는 밝은 만화로 여기고들 있으나, 저한테는 웃음과 눈물이 함께 감도는 만화입니다. 어쩌면,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많이 나는 만화일 텐데, 보고 또 보면서도 새롭게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마음에 메마르거나 지쳤을 때, 마음이 팍팍해지거나 힘이 빠졌을 때, 이런 만화책들을 넘기면 어느새 눈물샘이 솟아나면서 기운샘까지 솟아나곤 합니다.


.. 생명이 없는 곳에 미래는 없습니다 … 생명이란 더없이 소중하며 인생은 결국 단 한 번뿐이라는 것, 그리고 인류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생명이 자연에는 가득하며 그들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더불어 지구는 인류는 물론, 모든 생명에게 반드시 필요한 별이라는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성심성의껏 이야기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 당연한 사실에 대한 감동을 몇 번이고 곱씹게 하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 거듭 말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풍요로운 자연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 일본은 그 좁은 땅덩이에 골프장만 수없이 많은데, 한 20∼30개 정도는 없애서 달을 볼 수 있는 초원을 만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  (14, 56, 133쪽)


 데즈카 오사무 님은 《아톰의 슬픔》에서 끝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뻔히 다 알 만한 이야기라고 느낀다고 하면서도 굳이 그런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하고 거듭 되뇝니다. “쓸모없는 것, 멀리 돌아가는 것, 예정된 길에서 벗어나 잠시 딴짓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풍요로운 앞날이 보이지 않습니다(168).” 하고.

 1989년에 세상을 떠난 데즈카 오사무 님이니, 이 책에 실린 글은 스물 몇 해나 묵은 글입니다. 그런데, 1980년대 일본 모습이나 2000년대 한국 모습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외려, 이 글모음이 2009년에 옮겨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삶터를 더 찬찬히 굽어살피면서 받아안을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전국적으로 교통망이 발달해 각지의 간선도로가 그물망처럼 교차하고, 그 결과 지역산업이 발전하지만 모든 지방도시들이 정형화되어 엇비슷한 도시 구조를 지닌 특색 없는 모습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반면 개발로 인해 자연림이 더욱더 파괴되어 일본 전역에서 절반 가량의 삼림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171쪽).” 같은 말은 우리 나라에도 어김없이 들어맞습니다. 아니, 우리 나라가 더 뼈저리게 느낄 대목입니다.

 천성산을 뚫는 굴을 생각해 보셔요. 북한산과 속리산에 구멍을 내며 찻길을 내려는 정치꾼과 공무원을 헤아려 보셔요. 국립공원에 함부로 케이블카를 놓으려 하는 사람들을, 또 수없이 많은 골프장을 짓는 개발업자를 보셔요. 그러나, 진보를 말한다는 신문마저도 ‘골프 기사와 골프채 광고’를 아무렇지도 않게 싣습니다. 끝없는 아파트 광고를 그야말로 끝없이 싣고 있습니다. 먹고살기 힘들다 하지만, 이 광고 저 광고 가리거나 솎으면 돈 한 푼 못 번다고 하지만, 우리 삶터를 망가뜨리거나 흔들거나 괴롭히는 ‘나쁜 부자 회사’ 광고를 꼭 받아내어 신문을 내야 하는지 퍽 궁금합니다. 우리 마음과 삶을 착하고 곧은 쪽으로 이끌면서, 착하고 곧게 살아가는 사람한테서 푼푼이 달삯을 받으며 신문사 살림을 꾸릴 수 없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 내가 만화를 그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화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 나는 지금 한창 유행하는 만화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 인기도 한때라는 생각에 슬며시 웃음을 짓고 있으면 실제로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 나는 재미있는 만화가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재미에 바탕을 두지 않고 유행만을 좇는 만화는 결국 세월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유행은 늘 바뀔 것이고, 그에 영합하는 만화는 그때마다 곧 사라질 것입니다 … 어린이들은 진실한 메시지에는 반드시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물며 꿈을 심어 주는 재미있는 메시지라면 얼마나 눈을 반짝이며 좋아할까요? ..  (156∼159쪽)


 책을 꼭 읽어야만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만화를 꼭 보아야만 따뜻하거나 아름다운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좋은’ 진보를 이룩하거나 갈고닦으려 한다면, 우리 손으로 ‘좋은’ 책을 알아내고 우리 눈으로 좋은 줄거리를 읽어내며 우리 마음으로 좋은 넋을 받아들여 우리 몸으로 좋은 삶을 꾸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따뜻한’ 진보가 되고자 한다면, 넉넉한 진보가 되고자 한다면, ‘따뜻함’과 넉넉함을 담뿍 담아 놓고 있는 좋은 만화책을 좋은 매무새와 눈썰미로 하나하나 알아보면서 즐길 줄 아는 느긋함과 틈이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은 일본사람이지만, 훌륭한 만화쟁이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밭이 더없이 따뜻하고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입니다. (4342.7.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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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7-17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스카 오사무가 일본 만화의 신이고 좋은 만화를 많이 그렸지만 한편으론 일본 만화가(애니메이션 작가)들을 혹사시킨 주범이기도 하지요.일본에서 tv만화를 활성화시키기위해 리미티드 기법과 초 저가 납품으로 만화가들을 혹사시켰다고 라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비판한적이 있지요.
근데 동인천 배다릿골 책방은 언제 여시나요.몇달전에 가봤는데 오전이라 그런지 문이 잠겨 있더군요.^^

숲노래 2009-07-18 05:19   좋아요 0 | URL
그런 비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비판받을 대목은 비판받을 대목이나, 만화를 그리는 한 사람 마음과 매무새를 돌아보는 테두리에서 이 책을 만난다면, 우리 스스로 얻을 이야기가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

배다리에 있는 곳은 '책방'이 아닌 '도서관'이고, 금토일에만 열어 놓습니다~

appletreeje 2013-06-22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좋고 아름다운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
 
자전거홀릭 - 두 바퀴 위의 가볍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나다
김준영 지음 / 갤리온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한국땅에서 ‘자전거 즐김이’는 ‘서울 사는 남자 회사원’뿐?
 [잠깐 읽기 46] 김준영, 《자전거홀릭》



- 책이름 : 자전거홀릭
- 글쓴이 : 김준영
- 펴낸곳 : 갤리온 (2009.6.10.)
- 책값 : 13000원



 (1) 우리 나라에서 자전거란 무엇인가


 지난 5월부터 바로 어제(7월 14일)까지,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한 주에 한 번씩, 경기도 파주에 있는 대안학교에서 ‘자전거 정비’ 수업을 맡아 이끌었습니다. 열세 살부터 열일곱 살인 아이들 열둘하고 했던 ‘자전거 정비’ 수업에서는, 망가지거나 다친 자전거를 어떻게 손질하느냐부터, 어떻게 자전거를 타야 우리 몸에 알맞는지, 자전거를 생각하는 마음과 몸짓이란 어떠할 때가 좋은지 들을 골고루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전거 수업을 이끄는 저는 인천에서 파주로 자전거를 타고 오갔습니다.

 어제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아무래도 인천부터 파주까지 가기에는 만만하지 않을 뿐더러 자칫 다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길을 나섰으며, 인천부터 파주까지 전철로 가는 두 시간에 걸쳐 책 두 권을 읽었습니다.


.. 뭐니 뭐니 해도 자전거는 본인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게 첫 번째 조건인 것만은 사실인가 보다 … 뭐니 뭐니 해도 자전거 타기의 기본은 기술보다는 마음가짐에 있는 것 아닐까? 아무리 좋은 기술로 현란한 라이딩쇼를 펼친다 하더라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여유로운 마음이 없으면 자칫 위험한 질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43, 103쪽)


 주엽역에서 책을 가방에 넣은 다음 비닐로 잘 싸 놓습니다. 모자를 쓰고 안경을 끼고 비옷을 입습니다. 비오는 날에는 안경을 쓰곤 하는데, 빗물이 눈에 튈 때 눈을 감다가 미끄러질 뻔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옷을 입으면서도 모자를 쓰는 까닭은 비옷만 입으면 머리 쪽에서 흐르는 빗물이 얼굴로 타고 흐르기도 하지만, 빗물이 곧바로 얼굴을 때려서 앞을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옷을 입고 모자를 쓴 채로 달릴 때에는 고개가 많이 아픕니다. 파이거나 기울어진 찻길에는 으레 빗물이 고여 있는데, 이런 길을 살피고 뒷거울로 차흐름을 보노라면 고개를 위로 많이 젖힐 수 없어 이삼십 분이 넘어가면 뒷목이 뻣뻣해집니다.

 여느 날 자전거를 달릴 때에도 늘 느끼지만, 비오는 날이 되니 우리 나라 찻길이 참으로 엉망진창임을 새삼 느낍니다. 왜냐하면, 찻길 가운데 쪽은 어떠할는지 모르나, 자전거가 달릴 찻길 가장자리는 울퉁불퉁한 데에다가 기울어져 있기 일쑤이고 깊이 파인 데가 많습니다. 이런 탓에, 비오는 날 자동차들이 찻길 가장자리에서 씨잉 하고 내달리면, 거님길을 걷던 사람들은 그예 물벼락을 맞을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찻길 가운데 쪽을 달리는 자동차 가운데 한 대가 자전거한테 물벼락을 뒤집어씌웁니다. 이 자동차는 빗길임에도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다가 끼익 하고 멈추었는데, 신호등과 길흐름을 살피며 달리던 제 눈으로 보자면, 이 자동차는 어차피 신호에 걸려 더 달릴 수 없었음에도 내처 달렸고, 아무래도, 빗길 자전거한테 물벼락을 씌워 놀려 주려는 생각이었다고 느낍니다.

 모든 자동차꾼이 이렇게 괘씸하고 심술궂지 않습니다. 100대에 2대 꼴로 이런 심술쟁이 자동차꾼을 만납니다. 그런데, 심술쟁이는 아니더라도 ‘길에는 자동차만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동차꾼은 100대에 20대 꼴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빗길을 살금살금 달리는 자전거 앞에 난데없이 끼어들어 한참 밍기적거리다가 슬그머니 오른쪽 깜박이를 넣고 아주 느릿느릿 꺾어 들어가는 택시며 자가용이며 있기 때문입니다.


.. 내가 느낀 일본의 자전거는 철저하게 생활 속에 녹아 있다는 점이다. 아침의 출근도, 학생들의 등교도, 엄마들의 장보기도, 아이들의 놀이도, 퇴근도 모두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도로가 북적인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헬멧도 없고, 자전거 복장 차림도 아니었다. 양복에 교복에 평상복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며칠을 둘러보아도 근사하게 차려입고 날쌘 속도로 지나는 라이더를 본 기억이 없다 … 신기한 것은 매장 대부분의 자전거가 분명 유명 브랜드의 산악자전거인데도 고급 부품을 쓰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보통 LX나 XT급을 중급 부품이라 생각하고 데오레급은 입문용으로 생각하고 있는 데 비해, 미국의 숍은 XT를 굉장히 고급 부품으로 생각한다. 나의 자전거가 XT로 꾸며졌다고 했을 때, 혹시 내가 자전거 선수가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내가 보는 자전거 문화나 숍의 주인장 얘기를 들어 봐도, 미국은 레저용으로 즐기기 위한 자전거 문화가 많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  (78∼79쪽)


 여느 날에는 이십 분이면 넉넉히 달리던 길을 사십 분 남짓 달려 파주에 있는 대안학교 앞에 닿습니다. 그동안 손질해 놓은 자전거 두 대가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대안학교 아이들 대여섯이 비 안 맞는 자리에서 놀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불러 “자전거를 이렇게 비 맞게 놓으면 어떡해요?” 하고 묻습니다. 달리 대꾸가 없습니다. “이 자전거들을 애써 손질하고 닦아 주었어도 비 맞히면 예전하고 똑같아지니까, 비 안 맞는 자리로 옮겨 놓으셔요.” “누가 저기다 놓았어? 내가 안 놓았는데.”

 마침 이때에 밖에 있던 아이들이 이 자전거들을 비 맞는 자리에 놓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가 놓았든, 대안학교 아이들이 모두 번갈아 타는 자전거라면, ‘내 자전거’가 아니어도 잘 간수하고 다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전거 수업을 하며 아이들한테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들 가운데 ‘자전거를 장만한 뒤로 여태까지 자전거를 한 번이라도 닦아 준 적이 있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참 놀랄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전거뿐 아니라 셈틀도 그렇고 책상도 그렇습니다만, 또 밥상도 그렇고 방바닥도 그렇습니다만, 더구나 옷가지도 그렇고 신발과 악기도 그렇습니다만, ‘닦고 매만져 주지 않아도 되는 물건’이란 있을까요? 오늘날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으레 갖고 있는 손전화기에 짜장면 국물이 튀었을 때 국물 자국 그대로 두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다 못해 바짓단에 슥슥 문질러 닦기라도 하지 않을까요? 자전거에 흙탕이 튀면? 자전거가 비를 맞은 다음에는? 자전거에 기름때가 끼었다면? 마땅히 닦아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친구들이 자전거를 닦아야 하는 줄 몰랐을 수 있어요. 그러면, 친구들 부모님은 어떠한가요? 친구들 부모님 가운데 친구들한테 자전거를 닦으라고 가르치거나 부모님이 몸소 자전거를 닦은 적이 있는가요?” 하고 다시 묻습니다. 어느 아이도 저희 엄마 아빠가 자전거를 닦은 적이 없고 닦으라 말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 그럼 두 번째, 자전거는 차와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역시 그렇다. 법적으로는 거의 같은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자전거는 도로에서 약자가 되어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천덕꾸러기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불공평하지만, 우리 나라 도로 구조와 교통 문화가 많이 개선되었다곤 해도 자전거에는 아직 그리 관대하지 못하다. 그래서 ‘발바리’와 같은 모임이 생겨 자전거의 권리를 찾고자 함이 아닌가? ..  (301쪽)


 파주에 있는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사는 집은 거의 일산에 있습니다. 일산부터 파주까지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걸어가면 한 시간 반 남짓 걸리겠지만, 자전거를 타면, 넉넉잡아 삼십 분 남짓입니다. 그렇지만 이 길을 자전거로 오가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자전거로 오가는 선생님이나 학부모님 또한 한 분도 없습니다. 모두 자가용 또는 버스를 탑니다.

 제가 즐겨가는 동네 구멍가게 할아버지는 일흔을 넘긴 나이이지만, 가게 물건을 떼려고 손수 자전거를 끌고 가서 짐받이에 그득그득 묶어서 날라 오곤 합니다. 당신이 입는 양복을 빨래방에 맡기거나 찾아올 때에도 한손으로 양복을 들고 한손으로 손잡이를 잡으며 타고 다닙니다. 동네에 있는 솥집 할아버지도, 동네에 있는 쌀집 할아버지도, 동네에 있는 도매상집 할아버지도, 언제나 자전거 짐받이에 짐을 잔뜩 묶고는 나릅니다.

 이분들 자전거를 보면 짧아도 스무 해를 탄 자전거요, 길면 마흔 해를 훌쩍 넘긴 자전거들입니다. 빠르게 내달리지는 못하는 녀석이지만, 당신들한테 꼭 알맞춤하게 달릴 수 있는 탈거리이며, 당신들이 눈을 감고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당신들한테 두 다리가 되어 주는 길동무 노릇을 하리라 봅니다. 아마, 당신들 스스로 느끼실 텐데, 당신들한테 자전거는 그냥 자전거가 아닌 재산이었고 오랜 길벗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새 돈 좀 있고 자전거 멋나게 타고 다니는 사람이 보기에’ 하찮거나 시시한 짐자전거일 뿐일지라도, 당신들은 당신 자전거가 낡거나 다치지 않도록 틈틈이 손질하고 닦아 주며, 비바람이나 햇볕에 망가지지 않게끔 간수합니다.


.. 어느 날 동료의 자출 자전거를 보니 체인에 오일이 말라 있기에 내가 물었다. “야∼ 너는 자전거 좀 닦아 주고 기름칠 좀 해 주지. 자전거 꼬라지가 그게 뭐냐?” 친구가 내게 그런다. “야∼ 오버하지 마. 청소는 뭣 하러 하는데?” 당당한 그의 한마디에 뭐라 해야 할지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  (366쪽)


 할아버지 아저씨한테는 짐자전거가 당신들 생활자전거, 곧 ‘삶자전거’입니다. 할머니와 아주머 가운데에도 짐자전거를 타는 분이 있으나, 으레 바구니 달린 자전거를 타곤 합니다. 이를테면 ‘장바구니 자전거’인데, 장바구니 자전거가 바로 당신들한테 ‘삶자전거’입니다.

 자전거로 살아가는 할매 할배 아재 아지매는 언제나처럼 자전거를 몹니다. 빨리 내닫는 자전거가 아니라 알맞게 바람을 느끼는 자전거요, 길을 느끼고, 동네사람을 만나 인사하며, 짐을 싣는 자전거인 가운데, 서로서로 태워 주는 자전거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초중고등학교 아이들 가운데 학교를 오가며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제법 있기는 있으나, 어느 아이도 ‘짐자전거’나 ‘장바구니 자전거’를 타지 않습니다. 거의 모두 ‘유사 산악자전거’를 타거나 ‘신문 경품 자전거’를 타곤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도시에서 돈 제법 받는 회사원쯤 되면 ‘겉보기에 멋지거나 예쁘장한(이른바 뽀대나는)’ 자전거를 큰돈 들여 지릅니다. 멋져 보이는 자전거를 지른 다음에는 자전거옷을 갖추어 입고, 자전거장갑에 자전거모자에 자전거수건에 자전거안경에 자전거가방에 자전거물병에 자전거속도계에 자전거등불에 …… 목돈이 쏠쏠히 빠져나가는 물품 사들이기에 빠져들고 맙니다.
 





 (2) 자전거 ‘매니아’야말로 자전거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김준영 님이 쓴 자전거책 《자전거홀릭》을 읽었습니다. 인천에서 파주로 자전거 수업을 하러 가는 전철길에서 금세 읽습니다. 인터넷 네이버까페 ‘자출사’에서 ‘쭈니’라는 또이름을 쓰는 김준영 님은, 모임이름마따나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생활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분이 아닌 ‘산악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분이지만, 자전거 사랑이 남다르며, 섣불리 겉멋을 내세우는 자전거꾼 또한 아닙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자전거홀릭》이라는 책, 우리 말로 하면 ‘자전거중독자’ 또는 ‘자전거에 미친 사람’ 또는 ‘자전거에 푹 빠진 사람’이라는 책을 써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는 라이더들에겐 속도 줄이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빠르게 달리다가 장애물이 나타나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아슬하게 피하거나, 호각이나 벨을 신경질적으로 불거나 울려 상대가 피하게끔 만든다. 잠시 멈추었다가 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  (107쪽)


 자전거책 《자전거홀릭》에는 ‘후회하지 않는 자전거 구입’, ‘자전거 구조와 명칭에 대한 이해’, ‘내 몸에 자전거를 맞추는 방법’, ‘중고 자전거 구입 요령’, ‘자전거 레이서의 자세’, ‘주행 기술 익히기’,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기 위한 계명’, ‘기어비 계산하기’, ‘이상적인 페달링 익히기’, ‘자전거 용품 총정리’, ‘자전거 도난 예방하기’, ‘사계절 자출 요령’, ‘자전거 응급 조치 요령’, ‘자전거 사고 시 대처법’, ‘자전거- 업그레이드’, ‘일상적인 자전거 점검’, ‘본격적인 자가정비의 세계로’, ‘주기적인 자전거 청소’, ‘환상의 루트’, 이렇게 여러 가지 자전거 이야기를 다룹니다.

 책날개에는 “자전거 초보와 숙련된 레이서 모두에게 꼭 필요한 유용한 정보들”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틀림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도움되는 정보’입니다. 다만, 이 이야기들이 ‘꼭 있어야 할’ 이야기라든지, ‘자전거 새내기가 꼭 익힐’ 이야기라든지, ‘자전거 오래 타거나 잘 타는 사람이 반드시 알아둘’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자전거를 사면 딸려 나오는 자전거제품설명서’에 차근차근 실려 있거든요. 더구나 ‘자전거제품설명서’에는 ‘교통법규 및 도로주행 시 유의사항’이나 ‘승차 전 필수 확인사항’도 나와 있으며, ‘점검, 조정의 시기와 방법’에다가 ‘주차 및 보관 시 유의사항’까지 나와 있고, ‘올바른 승차자세와 핸들과 안장 조립 및 높이 조절’이 그림과 함께 낱낱이 실려 있습니다.


.. 내가 자출을 시작한 지도 오래되었다. 자출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 자전거를 타는 이들 중에 헬멧 쓰는 이가 의외로 많지 않다는 점이다. 도로에서도 강변에서도 자전거 타는 이들의 대다수가 쓰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연세 있는 분들이나 나이 어린 친구들이 헬멧 쓴 모습은 더욱더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교복 차림의 학생이 헬멧을 쓴 경우는 자전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이래 단 한 차례도 본 기억이 없다 ..  (179쪽)


 대안학교 아이들과 자전거 수업을 하면서 “친구들은 자전거를 살 때에 자전거제품설명서를 받았나요?”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어느 아이도 받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못 받았을 수 있는데, 못 받았다기보다 받았는데 쓰레기통에 넣었다고 해야 옳지 않으랴 싶습니다. 가스렌지를 사든, 연고를 사든 어디에나 설명서는 꼭 들어 있습니다. 자전거를 사는데 설명서가 안 들어 있겠습니까. 손전화기를 다루는 설명서만 해도 100쪽이 넘어요. 그런데 자전거 설명서가 없겠습니까.

 저는 제가 단골로 다니는 자전거집에서 여러 가지 자전거설명서를 잔뜩 얻어 놓고 있습니다. 제 둘레에서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사람한테 주려고요. 아직 자전거를 사지 않았더라도 자전거설명서를 읽으면서 하나하나 익혀 나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미리 익힌 이야기를 자전거를 타면서 몸으로 받아들이거나 새기고, 나중에는 스스로 ‘설명서에 못 담은 더 깊은 이야기를 다룬 자전거책’을 한 권 두 권 읽으며 배우도록 이끌어 줍니다.

 자전거설명서 맨 앞에는 “본 제품 사용 설명서는 자저거 사용 전에 잘 읽으시고 올바르게 사용해 주십시오” 하는 말이 적혀 있고, 다음에 빨간 빛깔로 “어린이에게는 반드시 읽어 주고 지도하여 주십시오” 하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오늘 우리 삶터에서 아이들한테 자전거를 사 주는 어버이 가운데 ‘자전거설명서를 읽어 주는 아빠 엄마’는 몇 사람쯤 될까요? 아이들은 이런 설명서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를 뿐더러, 생각조차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 어른들은 어떠하지요? 우리 어른들은 ‘산악자전거’를 장만하든 ‘경주자전거’를 마련하든 ‘작은자전거’를 사들이든 ‘짐자전거’를 사서 타든, 이 자전거가 어떤 자전거이며 어떻게 타야 즐겁고 올바르고 서로한테 도움이 될는지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 헬멧을 잠깐 벗더라도 두건이 없으면 헬멧에 눌리고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가 좀 흉해 보인다. 또 라이딩 시에 몇 무더기 머리카락이 헬멧 구멍 사이로 나와 휘날리는 경우도 보는데,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 대부분의 고급 기종 자전거에는 물병 케이지를 걸 수 있도록 작은 나사 홈 두 개가 약 10센티미터 간격으로 있다. 생활자전거에 있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  (191, 195쪽)


 자전거책 《자전거홀릭》은 예쁘장한 그림과 부드럽고 쉬운 말씨로 ‘자전거 새내기’와 ‘자전거 솜씨쟁이’한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전거설명서’에 담긴 밑바탕 이야기 틀을 넘어서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자전거집에서 자전거를 장만하든 인터넷으로 자전거를 마련하든, 우리가 ‘거저로’ 얻는 설명서에서 다루는 이야기 깊이보다 깊게 파고들지 못했고, 널리 아우르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자전거는 길에서 달립니다. 길이란 사람이 걷는 거님길일 수 있고, 자동차가 함께 달리는 찻길일 수 있으며, 서울 같은 데에서는 한강길일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길에서 달리는 자전거’입니다. 그런데, ‘길에서 자전거를 어떻게 달려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가 하나도 안 실려 있습니다. 글쓴이 스스로 ‘길에서 자전거를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는 몇 줄로 짤막하게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그러면서 ‘자전거 물품과 장비’를 갖추거나 장만하는 이야기에 너무 많은 자리를 내주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지름신’ 이야기까지 합니다만, 자전거를 타는 분들 가운데 지름신에 따라 물품을 더 갖추는 분도 있습니다만, ‘자전거가 내 삶이 되며 언제까지나 즐거운 길동무가 되는’ 분도 무척 많습니다.

 그러면, 《자전거홀릭》은 누구와 자전거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책일는지요. ‘자전거 매니아’한테? ‘자전거 생활인’한테? ‘자전거 출퇴근 일꾼’한테?


.. 자전거에 취미를 가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고 싶은 용품이나 부품도 늘어난다. 이것도 써 보고 싶고, 저것도 써 보고 싶다. 그러한 것들 중에는 매달 받는 용돈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비상금보다 가격이 높은 경우도 허다하다. 처음에는 남편의 건강을 위한 투자로 생각해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내도 계속적인 지원 요구에는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다. 이때도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 … 가족을 위해 하나를 양보하면 두 개 세 개의 양보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배려와 이해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가족들은 나를 이해하게 되고, 다음번에는 기꺼이 남편과 아빠를 위해 그들의 시간을 양보해 줄 것이다 ..  (86∼87쪽)
 





 (3) 자전거로 살아가는 기쁨과 사랑을 찾길 바라며


 《자전거 홀릭》을 읽는 내내, 글쓴이 생각과 삶이 아무래도 ‘서울에서 사무직 회사에 다니는 청장년 남성, 이 가운데 혼인해서 아이가 하나쯤 있는 남성’한테만 눈길을 맞추어 놓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여성한테는, 또 자전거를 타는 중고등학교 아이들한테는, 또 자전거를 타는 아저씨 아줌머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는, 조금도 눈길을 안 맞추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참말로, 자전거는 남자만, 그러니까 아빠만 타야 할까요? 자전거는 도시에서만, 더욱이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만 타야 할까요?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사람은, 도시에서 가게를 꾸리는 사람은, 자전거를 어떻게 타야 좋을까요?

 더구나, 책 앞머리에서 ‘자전거 갈래’를 나눌 때에 ‘생활자전거 = 유사 산악자전거’라고 못박으면서 이야기를 펼치는데, 이 대목은 몹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생활자전거는 생활자전거이고, 유사 산악자전거는 유사 산악자전거입니다. 생활자전거는 ‘짐자전거’와 ‘장바구니 자전거’를 아우르며, 여느 산악자전거이든 경주자전거이든 작은자전거이든 이러한 자전거를 늘 타고다니면 이 자전거들은 곧바로 생활자전거가 됩니다.

 유사 산악자전거는, 이 이름 그대로 ‘산악자전거 비슷하게 만든 짝퉁’으로, 이런 자전거는 자전거가 아닙니다. 값싼 물건입니다. ‘유사 사진기’와 ‘유사 핸드폰’이 있겠습니까? ‘유사 가스렌지’와 ‘유사 버너’라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그래서, ‘유사 산악자전거라는 짝퉁 물건을 만드는 자전거회사는 법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자전거 아니면서 모양만 자전거처럼 만들어 아이들 눈을 홀리고 아이들을 위험에 내모는 녀석이 바로 ‘유사 산악자전거’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여느 자전거집 매출 거의 모두를 차지하는 녀석은 바로 유사 산악자전거입니다). 이런 자전거는 만들어서도 팔아서도 타서도 안 됩니다.

 그래, 《자전거홀릭》은 나중에 2쇄를 찍을 때에, 다른 어느 대목보다도 이 대목, 생활자전거를 다루는 자리는 모두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정보와 생각으로 사람들한테 잘못된 이야기를 퍼뜨리면 안 될 노릇입니다.


.. [생활자전거 (유사 산악자전거)] 보통 우리 나라 국민의 대다수가 자전거 하면 떠올리는 것이 바로 이 생활자전거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문을 구독하면 주는 자전거 또는 주유소 경품용 자전거라는 인식이 강했다. 지하철 입구 옆에 묶여 있는 자전거의 80∼90퍼센트가 이런 유의 자전거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가까운 거리의 출퇴근이나 생활용으로 이용하는데, 도난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고가의 고급 자전거를 사용할 이유는 없으므로 어찌 보면 이러한 생활자전거가 더 적합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  (18∼19쪽)


 글쓴이는, 일본 자전거 문화를 이야기하며 “그들은 헬멧도 없고, 자전거 복장 차림도 아니었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한국 자전거 문화를 이야기할 때에는 “교복 차림의 학생이 헬멧을 쓴 경우는 자전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이래 단 한 차례도 본 기억이 없다”고 밝힙니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일본에서 ‘자전거 = 삶’이라고 말한 글쓴이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자전거란 무엇일까요. 일본 청소년한테는 ‘헬멧 없이 자연스럽게 타고다니는 자전거 삶’인데, 한국 청소년한테는 자전거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또한, 글쓴이는 한강 자전거길에서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자전거꾼을 꾸짖는 이야기를 씁니다만, 이들 ‘무시무시 내달림꾼’이란, ‘자전거 헬멧과 장갑과 가방과 이것저것 다 갖춘 비싸구려 자전거’를 모는 분들입니다. 이들이 타는 자전거 부품은 무척 값비싸며, 이런 값비싼 부품은, 한국을 뺀 다른 모든 나라에서는 ‘자전거 선수나 쓰는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들 ‘무시무시 내달림꾼’들은 처음부터 한강길이든 어디에서든 씽씽 달리며 당신들 비싸구려 자전거를 뽐내려 하는 분들입니다. 처음부터 다른 이한테 마음쓸 그릇이 없는 분입니다.

 찻길에서 자전거를 괴롭히거나 못살게 구는 자동차꾼하고 매한가지입니다. 똑같은 차를 몰더라도 남 앞에서 잘나 보이거나 번듯해 보이는 더 비싼 자동차를 장만하려는 사람들 매무새하고 똑같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우리 나라에서 자동차이든 자전거이든, 또 책이든 영화이든, 옷이든 화장품이든, 집이든 일자리이든, 나 스스로 참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길을 찾는다기보다 남 앞에서 우쭐거리거나 자랑하거나 내보이려는 쪽으로 헛걸음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자전거홀릭》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 자전거가 삶의 작은 행복을 열어 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흡족할 듯 싶다 ..  (머리말)


 《자전거홀릭》을 쓴 글쓴이께서 첫마음으로 고즈넉하게 돌아갈 수 있다면, 아니, 첫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해 봅니다. “자전거가 우리 삶에 작은 즐거움을 나누는 열쇠”가 될 수 있는 길을 새롭게 찾고 느낄 수 있으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그래서 아빠 혼자서만 낼름낼름 즐기다 그치는 ‘자전거 마니아’가 아니라, 글쓴이 아내한테도 자전거를 가르쳐 주며 함께 타고, 또 글쓴이 아이한테도 자전거를 가르치면서 같이 타는, 이리하여 ‘세 식구가 함께 자전거 타기’를 자전거책에 담을 수 있으면 반갑겠고, ‘세 식구 자전거 장만하기’ 이야기를 새롭게 자전거책에 담을 수 있으면 고맙겠으며, ‘세 식구가 나란히 자전거를 즐기는 길은 어떠한 모습’인가를 차근차근, 더 느리게, 더 천천히, 더 오래 삭이고 묵히면서, 더 깊이 헤아리고 생각하면서, 더 길게 내다보고 어깨동무를 하는 삶자락을, 자전거책에 살포시 담아 준다면 저 또한 흐뭇하겠습니다. (4342.7.1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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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7-16 09:49   좋아요 0 | URL
된장님,자전거 운전 조심하세요.슬쩍 사람만 쳐도 차사고로 간주된답니다.^^

숲노래 2009-07-16 10:57   좋아요 0 | URL
그러믄요. 인도에서는 웬만하면 내려서 끄는데, 인도에서 탈 때에는 아기 아장걸음보다 느리게 달립니다 ^^

말씀 고맙습니다~
 
살림살이 (양장) 겨레 전통 도감 1
윤혜신 글, 김근희.이담 그림, 토박이 기획 / 보리 / 200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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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전통문화 이야기는 ‘조선 후기’에만 머물까?
 [잠깐 읽기 45] 토박이+윤혜신+김근희ㆍ이담, 《살림살이》



- 책이름 : 살림살이
- 기획 : 토박이
- 글 : 윤혜신
- 그림 : 김근희(세밀화), 이담(펼친그림)
- 펴낸곳 : 보리 (2008.12.30.)
- 책값 : 35000원



 (1) 집안살림과 집밖살림


 우리 어머니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집밖일을 도맡아 하는 분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삶을 들여다보면서, 저 또한 이러한 길을 걸었음직하지만,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걸었던 길은 조금도 안 걷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와 옆지기가 낳아 키우는 아이도 제 엄마 아빠가 걷는 길을 안 걸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저는 ‘남자 = 집밖일’, ‘여자 = 집안일’처럼 가르는 길이 마땅하지 않다고 느끼며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 길을 거스릅니다. 옆지기가 몸과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 집안일을 제가 거의 도맡고 있기도 하지만,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할지라도, 저는 언제나처럼 집안일과 집밖일을 많이 맡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또는, 집안일을 제가 거의 다 하고 집밖일은 옆지기한테 맡긴다든지요.


.. 살림살이 가운데에는 지금 아줌마가 즐겨쓰는 것도 있고 처음 보는 것도 있어. 이런 살림살이는 사람들이 더 쉽고 편하게 살림을 하려고 만들어 낸 거야. 저마다 쓰임새에 맞게 만들어 조금씩 고쳐 가면서 점점 더 쓸모있게 만들었어. 정말 놀라운 일이지? 살림을 하는 데 이 많은 살림살이가 다 쓰이고, 또 쓰임에 딱 맞는 것이 있다는 게 말이야. 아줌마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바로 이 ‘살림’이라는 말이야. 말 그대로 살림은 우리가 먹고 자고 입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일이지. 우리는 살리는 일, 살림. 사람들은 살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자라는 것 같아 ..  (머리말)


 어머니는 ‘가정 주부’였습니다. 이 나라 숱한 어머니는 모조리 ‘가정 주부’라고 봅니다. 엊그제 옆지기네 고모님 댁에 다녀왔는데, 옆지기네 고모님은 하나같이 ‘가정 주부’입니다. 빈 그릇 치우기라도 거들고 싶지만,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빈 그릇을 치울라치면, “최 서방이 일어나니까 우리가 앉아 있을 수 없네.” 하고 말씀하시니 오히려 제가 몸둘 바를 모릅니다. 사위를 고이 여겨 주시는 마음은 고맙지만, 그예 밥상머리에 눌러앉아 밥술만 떠야 하니 속이 메슥거리고 방귀만 뿡뿡 나올 듯해서 힘듭니다. 잠깐이라도 일어나 빈 그릇도 나르고 설거지라도 하며 몸을 놀려야 할 텐데, ‘가정 주부’로 집안일을 도맡아 오신 당신님들한테는 사위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외려 바라보기 힘든 노릇인가 싶기도 합니다.

 하는 수 없이 목구멍까지 먹을거리가 차넘칠 때까지 겨우 견디며 밥상과 과일상 들을 받는데,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스스로 너무 오래도록 남자 다르고 여자 다르다는 울타리를 쌓는 바람에 모두 이렇게 생각이 굳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 조상들은 우리네 옛 살림이 사람힘으로만 되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어. 세상 모든 일들이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라고 생각해서, 늘 자연을 벗삼고 공경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지. 봄이 오면 그 따스함에 고마워하고 반기는 마음으로 잔치를 벌였고, 부드러운 봄바람, 따뜻한 햇볕, 단비를 내리는 하늘에 진심으로 고마워했어. 산과 들에 가득한 풀을 뜯고 나무에서 물을 받을 때는 땅에 절을 했지.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이웃과 나누어 먹으면서 사람들은 봄의 충만한 생명력을 즐겼던 거야 ..  (14∼15쪽)


 집으로 돌아온 우리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늦도록 아기하고 씨름하느라 고달픕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말씀을 들으면, 우리 옆지기는 우리 아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살림을 꾸리며 아이 돌보는 일이란 그리 어렵지 않은 셈입니다. 우리 아이는 많이 얌전하다(?)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아이를 키우며 보내는 하루하루란 아이 없이 지내던 하루하루하고 견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이 없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아이 없이 지내는 삶이 얼마나 단출하고 홀가분하고 호젓하고 손쉽던 나날이라고 떠오르는지. 아이하고 씨름하고 부대끼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길 뿐 아니라 힘들고 벅차다고 느껴지는지.

 그렇지만, 이렇게 고단하고 지치는 하루하루가 싫지 않습니다. 고단하고 지치며 보내는 하루하루이기 때문에 한결 크고 깊은 보람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아기보다 먼저 곯아떨어지는 나날이라 하여도 이 삶을 끝끝내 붙잡도록 하는 새힘이 돋고, 이 일 저 일 밀리고 치이면서도 이렇게 밀리고 치이기 때문에 내 이웃 아이를 새삼스레 돌아보고 내 이웃 어른을 다시금 헤아릴 수 있습니다.


.. 예전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음식을 오래 보관하기 어려웠어. 그래서 아줌마네 어머니는 여름철이면 끼니때마다 식구들이 먹을 만큼만 음식을 만드셨지. 특히 열무김치는 사나흘에 한 번 조금씩 담그셨어. 김치를 담글 때마다 어머니는 빨간 고추와 마늘, 생강을 돌확에 넣고 확확 갈아서 양념을 만드시는 거야 ..  (120쪽)


 살림살이란 내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란 오늘 하루 내 모습이면서,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도 꾸리거나 이끌어 나갈 내 모습이면서 꿈과 생각입니다. 내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대로, 내가 앞으로 다른 곳에서 살아갈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란 내가 생각하는 모습이기에, 입으로만 읊는 말마디나 믿음이 아닌 온몸으로 보여주는 말과 믿음이 됩니다.

 내가 갖추는 살림살이는 바로 오늘 내 생각과 매무새를 보여주고, 내가 갖춘 살림살이를 다루는 모습은 바로 오늘 내가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길과 눈높이를 이야기합니다.


 (2) 살림살이는 ‘죽은 유물’이 될 수 없는데


 집살림 잘 꾸리는 사람을 일컬어, 또 돈을 허투루 안 쓰고 잘 갈무리하는 사람을 가리켜 ‘살림꾼’이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어느 모임이나 일터를 잘 꾸린다든지 이끈다든지 하는 사람을 두고도 ‘살림꾼’이라 합니다. 집안 울타리에 머물던 살림꾼이 집밖 울타리 너머까지 뻗는 셈입니다.

 ‘겨레 전통 도감’이라는 이름을 걸고, 《살림살이》라고 하는 그림백과사전이 하나 선보였습니다. 그림백과사전 《살림살이》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에 따라, 우리네 여느 살림집에서 어떤 연장을 썼는가를 그림 하나와 글 하나로 나누어 엮어 보여줍니다.

 먼저 봄에는, “장독, 소쿠리, 체, 가마솥, 표주박, 빗자루, 이남박, 조리, 수저, 주걱, 밥통, 주전자, 칼과 도마, 양푼, 푼주, 냄비, 단지, 초병과 초 단지, 기름병, 기름틀, 자라병, 다래끼, 광주리, 동고리, 도시락, 찬합, 보자기”까지 스물아홉 가지를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여름에는, “두레박, 바가지, 물동이, 방구리, 물두멍, 물지게, 살강, 찬탁, 그릇, 신선로, 수세미, 밀판과 밀방망이, 국수틀, 국자, 곰박, 확과 확돌, 화덕, 불씨 항아리, 손풀무, 석쇠, 돗자리, 죽부인”까지 스물네 가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멱둥구미, 바구니, 흡·되·말, 저울, 맷돌, 다식판, 약과 판, 상술 빗기, 술병, 뒤주, 채반, 망태기, 뒤웅박”까지 열다섯 가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겨울에는, “젓갈 항아리, 옹배기, 자배기, 앵병, 절구, 메주 틀, 두부 틀, 시루, 떡판과 떡메, 함지박, 쟁반, 가위, 화로, 곰방대와 장죽, 등잔, 요강, 약달이기”까지 열아홉 가지를 보여줍니다. 이리하여 모두 여든일곱 가지 살림살이를 보여주는데, 오늘날 살림꾼 가운데 이 여든일곱 가지를 옹글게 떠올리거나 헤아리는 분은 얼마쯤 되려나 궁금합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이 여든일곱 가지를 또렷하게 알거나 쓰거나 다룰 줄 아는 분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가운데 오늘날까지 두루 쓰는 살림살이는 많지 않거든요.

 《살림살이》에 나오는 ‘도시락’이나 ‘찬합’은 예전에 쓰던 살림살이이지, 요즈음 쓰는 살림살이가 아닙니다. 설거지를 하며 수세미를 쓴다고 하여도, 《살림살이》에 나오는 ‘수세미’를 집에서 길러 마련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손풀무를 쓰는 사람도 없으며, 물지게를 일 사람 또한 없고, 살강 놓인 부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시골 부엌도 죄다 ‘서양 입식 가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살림살이》에 나오는 ‘바구니’는 농사짓는 사람이 자연에서 거둔 들풀로 엮거나 짠 바구니이지, 플라스틱으로 공장에서 뽑아낸 바구니가 아닙니다. ‘가위’ 또한 대장간에서 불을 달궈 쇠망치로 두들겨 만든 가위입니다. 절구는 돌을 깎았을 테며, 떡판이나 시루, 다식판은 나무를 깎았겠지요.

 그러나 이 모든 살림살이를 장만하지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 부모가 이와 같은 살림살이를 간직하고 있다면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부모한테 없다면 돈을 치러 살 수 있습니다.


.. 발효하는 것이 많은 우리 나라 음식에는 장독이 가장 잘 어울려.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들이 꾸려 온 살림살이는 참 지혜로웠지 ..  (18쪽)


 그림백과 《살림살이》는 책 사이사이 틈틈이 나오는 “우리 조상들이 꾸려 온 살림살이는 참 지혜로웠지”라는 말마디처럼 우리 옛사람이 ‘슬기롭게 살아온 모습’을 오늘날 아이들한테 보여주며 가르치려는 매무새로 엮었습니다. 이 모든 살림살이는 꼭 알맞춤하게 만들었고, 어느 살림살이나 자연에서 나왔으며, 망가져도 버려지는 일이 없이 되쓰이거나 썩어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왜 우리 옛사람 ‘슬기로운 살림살이’를 오늘날 아이들한테 보여주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네 슬기로운 살림살이’는 어짜하여 오늘날 거의 안 쓰이고 있을까요?


.. 옛날에는 빗자루가 흔해서 그랬는지, 아이들이 잘못을 하면 어른들이 빗자루채를 거꾸로 들고 혼을 냈어. 커다란 빗자루에 몇 대 맞아도 별로 아프지도 않고 다치는 일도 없었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빗자루는 사랑의 매였던 거지 ..  (30쪽)


 그림백과를 덮으며 또다른 대목에서 궁금합니다. 우리네 슬기로운 살림살이라 하고 우리 옛사람 살림살이라고 하지만, 그림백과에서 보여주는 거의 모든 살림살이는 ‘조선 후기에 쓰던 살림살이’입니다. 그나마 ‘조선 전기에 쓰던’ 살림살이는 몇 가지 안 되며, ‘고려’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때 쓰던 살림살이까지 헤아리자면 얼마 없으며, 더 오래도록 이 나라 사람들이 써 온 살림살이가 무엇일까 하고 가누어 보면 거의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참말 ‘살림살이란 무엇일까?’ 하고 새삼 생각해 봅니다. 무엇을 두고 살림살이라 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림백과 《살림살이》에 나오는 살림살이는, ‘이 나라 여느 살림집에서도 두루 쓰던 살림살이’일는지, 가난한 집에서는 쓰지 않던 살림살이가 있는지, 돈 많거나 사대부집안에서만 쓰는 살림살이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더욱이 ‘옛사람 슬기’라 하지만, 그림백과 《살림살이》에 보여지는 모습은 하나같이 ‘여자 손이 가는 물건’일 뿐입니다. 남자 손이 가는 물건이란 없으며, 그림백과 사이사이 곁들인 ‘펼친그림’에 비춰지는 사람들 모습 또한 ‘남자 = 위, 여자 = 아래’인 듯한 가부장 모습 그대로일 뿐입니다. 비록, 지난날 조선 때에 사람들 삶이 ‘여자는 죽도록 집안일을 하며 허리가 휘고, 남자는 양반다리 하고 앉아 높은 자리에서 밥상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런 모습을 굳이 그대로 보여주는 일을 ‘전통’이나 ‘문화’라는 이름으로, 또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아이들 앞에 내놓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통문화가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아름답거나 훌륭한 우리네 전통문화라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 아줌마가 시어머니께 살림을 하나씩 배워 가는 초보 주부였을 때 일이야. 한번은 시어머니께 크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어.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혼이 났냐고? 쌀을 씻다가 그만 쌀알을 조금 흘려 버렸지 뭐야. 한 스무 톨쯤? 시어머니는 귀한 쌀을 많이 버렸다고 혼쭐을 내셨지. 그때는 시어머니 말씀이 너무 서운했어. 먹다 남은 밥도 버리는데 그깟 쌀 몇 톨에 왜 그러실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아줌마가 직접 농사를 지어 보니까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그 쌀 한 톨이 나오기까지 수고한 농부의 손길과 땀, 벼가 뜨거운 햇빛과 차가운 밤이슬을 견디고 자란 그 시간을 생각해 봐 ..  (32쪽)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그림백과 《살림살이》는 ‘조선 후기 퍽 넉넉한 살림집 모습’을 바탕으로 ‘우리네 슬기로운 옛사람 전통문화’를 보여주는 틀로 짜여 있는데, 다른 출판사에서 펴내는 다른 전통문화 그림책과 이야기책에서도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네 전통문화 연구가 ‘조선 후기 문화와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편, 조선 전기나 고려나 더 앞선 때 문화와 삶을 헤아릴 자료가 없는 탓이라 할 테지만, 연구와 상상력을 모두어 더 뿌리깊고 넉넉한 ‘참다운 전통문화 찾기’를 해 본다면 더 뜻이 있고 보람이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리고, 옛날 문화재 더듬어 보기에만 그치지 말고, 오늘날 우리가 기쁘게 즐기면서 앞으로 우리 뒷사람한테 신나게 물려줄 ‘오늘 우리가 누리는 전통문화란 무엇일까’에도 눈길을 둔다면 더욱 싱그럽고 아름답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 여자아이들은 예닐곱 살만 되면 작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어 나르는 연습을 했어. 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물인 만큼 그것을 길어 나르는 것도 큰일이었지. 그래서 부엌에 놓인 물두멍에 물이 얼마나 차 있는지를 보고 그 집 안주인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가늠하기도 했대. 어머니들이 지칠 줄 모르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던 힘은 아마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 박 오가리는 졸여 먹기도 해. 껍질까지 잘 말려서 그릇으로도 쓰니,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다 쓰는 것이,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치는 어머니나 할머니와 마음을 꼭 닮은 것 같아. 박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던 셈이야 ..  (86, 88쪽)


 아쉬운 대목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림백과 《살림살이》는 ‘세밀화’와 ‘펼친그림’ 두 가지 그림을 나누어 싣습니다. 먼저 펼친그림으로 이야기 흐름을 두루 보여주고, 다음으로 세밀화로 낱낱 살림살이를 도드라져 보이도록 합니다. 한쪽에 그림 하나를 큼지막하게 넣습니다.

 이렇게 넣은 펼친그림은 구수하고 따스하다 싶은 느낌이 배어들게 하고, 찬찬히 그린 세밀화는 ‘이제는 눈으로 구경하기도 어렵게 된 살림살이’ 모습을 잘 살펴보도록 돕습니다. 그림 짜임새를 돌아본다면, 으레 말하는 ‘여백의 미’, 그러니까 ‘빈자리를 두는 아름다움’을 살리려 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백과 《살림살이》에서 베푸는 ‘빈자리 두는 아름다움에 따른 큼지막한 그림 하나’는, ‘사진으로 찍어도 되는데 왜 그림으로 굳이 그렸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사진으로 찍는 모습하고 다를 다 없다’는 느낌도 듭니다.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쁨과 재미가 없다’는 느낌에다가, ‘덩그러니 하나만 보여주는 그림으로 할 바에는 차라리 판짜임을 줄이고 작은 그림으로 넣더라도’ 괜찮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35000원짜리 큰 판짜임으로 할 까닭이 없고, 주머니도감으로 엮어 한결 값싸고 가벼운 책으로 묶었다면 더 보람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왜냐하면, 살림살이는 ‘박제’가 아니요 ‘박물관 유물’ 또한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가까이에서 부대끼는 연장이요, 우리가 늘 만지는 연장이거든요. 이제는 흙으로 빚는 살림살이가 아닌 스테인리스로 찍어내는 살림살이라 할지라도, 살림살이란 다루는 살림꾼이 어떤 마음밭이요 매무새이느냐에 따라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옻이 아닌 니스를 바른 밥상이라 할지라도, 살림꾼 마음이 애틋하다면 살갑고 사랑스러운 손길이 배어들기 마련입니다.

 보리출판사에서는 앞으로도 ‘겨레 전통 도감’이라는 이름으로 그림백과를 더 펴낸다고 밝히고 있는데, ‘겨레 전통 도감’ 2번을 펴낼 때에는 1번인 《살림살이》에서 보여준 좋고 나쁨을 널리 굽어살피고 보듬어 준다면 좋겠습니다. 살아 있는 이야기로 겨레 전통문화를 나누는 길을 찾으면 좋겠고, 죽어 버린 박물관 유물유먹 같은 값비싸고 껍데기 우람한 길은 이제 그만 접어두면 고맙겠습니다. (4342.7.1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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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과 이명박 대통령
 ― ‘헌책방 주인’이 그렇게 고맙다고 한다면



.. 이 대통령이 사재 331억 4200만 원을 기부한 것도 ‘친(親)서민’에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이 대통령은 좌판 장사할 때 자리를 열어준 이웃 가게,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 환경미화원 시절에 일감을 주던 이태원 재래상인 등을 일일이 거명하며 친서민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  〈대전일보〉 2009.7.8.

.. 이 대통령이 중학교 시절 은사, 좌판 장사할 때 자리를 열어준 이웃 가게,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던 대학생 시절에 일감을 준 이태원 재래 상인들을 일일이 거명한 대목 또한 특기할 만하다. 출연 재산이 이들에 대한 보은 차원을 넘어 사회 전반의 소외 계층을 위한 소중한 재원일 것임을 짚어 보게 한다 ..  〈문화일보〉 2009.7.7.


 헌책방버러지인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92년부터 헌책방을 다녔습니다. 1994년에 박상준이라는 분이 쓴 ‘헌책방 순례기’라는 글을 읽으면서, 이분이 쓰지 못한 다른 헌책방 이야기를 글로 끄적여 보았고, 1994년부터 혼자서 내던 소식지에 헌책방 소식과 이야기를 틈틈이 실으면서, 어설프나마 ‘헌책방 문화 나눔’을 해 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출판사에 다니며 서울에서 일하던 2003년 8월까지는, 짜투리에 아주 작게 실린 ‘헌책방을 다룬 기사’라 할지라도 신문을 모두 챙겨서 그러모았으나, 충북 충주 시골마을로 들어가서 신문 한 장 사읽을 수 없게 된 뒤로는 따로 그러모으지 못했습니다. 고향 인천에 와서도 몇 가지 신문은 도무지 살 수 없는 터라, 기사 모으기는 못합니다. 그저, 인터넷창에서 날마다 ‘헌책방’을 쳐넣으면서 오늘 하루 어떤 기사가 나오는가를 헤아려 볼 뿐입니다.

 그런데 지난 대통령선거 때부터, 이 ‘인터넷에서 헌책방 다룬 기사 찾아보기’가 퍽 고달픈 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1960년대에 대학교에 다녔다고 하는 이명박 대통령께서, 그무렵 ‘서울 청계천 헌책방’을 다니며 ‘대학교재를 거저로 얻었다’는 이야기가 몹시 많이 떠돌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선거유세를 할 때면 어느 유세에서든 꼬박꼬박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라는 말마디가 들어갔습니다. 대통령에 뽑힌 다음에 하는 인사말에도 이 말마디가 들어갔습니다. 대통령으로 뽑힌 뒤에도 서민 경제를 이야기하는 연설글에서 어김없이 이 말마디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앞서 313억이 넘는 큰돈을 내놓았다고 하는 자리에서도 이 말마디를 넣었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서울 청계천 헌책방거리 일꾼들은, 이렇게 자주 꾸준히 오래도록 당신들을 칭찬하고 알려주는 이명박 대통령이 더없이 고맙겠구나 싶습니다. 10대 일간지뿐 아니라 온갖 경제신문이며 지역신문이며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라는 글월이 깃들고 있으니까요.

 서울 청계천 헌책방 일꾼한테 고맙다고 밝히는 이 글월은 ‘부자 대통령이지만, 서민을 알고 서민을 걱정하려 한다’는 뜻으로 이명박 정권을 부추깁니다.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어느 대통령도 ‘헌책방 아저씨 고맙습니다!’ 하고 밝힌 적이 없을 뿐더러, 당신들이 헌책방에 다니며 책을 사서 읽었다고 한 적 또한 없습니다. 반지하와 옥탑방을 모른다 할지라도, ‘가난한 학생이라면 으레 다니기 마련’이라 하는 헌책방을 안다고 하니, 다른 여느 정치꾼하고는 사뭇 견줄 수 있는 대목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몇 해 앞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똑같은 글월로 똑같은 이야기만 들려주고 있는 말마디,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 퍽 귀에 거슬립니다. 신문기사를 보면 하나같이 이야기합니다. “재래 상인들을 일일이 거명한 대목 또한 특기할 만하다”고. 그런데 조금이나마 이 연설글을 눈여겨보았다면 여러 해에 걸쳐 이 연설글이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이어져 왔음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대통령후보로 있을 때, 대통령으로 뽑힌 뒤, 대통령으로 정권을 붙잡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연설글은 앞뒤 차례조차 바뀌지 않습니다.

 예전에 이회창 님이 김대중 님하고 대통령 자리를 놓고 부딪혔을 무렵, 이회창 님은 당신 자서전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도 이회창 님은 ‘대학 때 가난해서 청계천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보았다’고 한 줄쯤 밝혀 놓았습니다. 그 책을 헌책방에서 선 채로 읽고 제자리에 내려놓았기 때문에, 당신 목소리를 고스란히 밝혀 놓지 못해 아쉬운데, 저로서는 정치ㆍ경제ㆍ사회에 내로라하는 분들이 젊을 적 가난한 살림이었을 때에는 한결같이 헌책방마실을 했다고 밝히는 대목이 놀랍습니다.

 그렇지만, 썩 반갑다고는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회창 님이나 이명박 대통령이나, 청계천 헌책방거리에서 ‘대학교재’ 사다 읽은 이야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나라안 어느 헌책방이든 교재와 참고서를 팔아 살림을 꾸립니다. 교재와 참고서 아닌 책만 다루는 헌책방이 몇 군데 있고, 교재와 참고서보다 여느 인문책을 알차게 다루는 곳이 꿋꿋이 있습니다만, 헌책방에서 ‘교재 장사’는 아주 큰몫을 차지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이 나라 대한민국은, 아이들(학생들)한테 ‘교재 아닌 책은 못 보도록’ 시험 굴레를 뒤집어씌우니까요. 오로지 시험점수 잘 따도록 교재만 보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나중에 ‘대학교에 들어가서 딴 책을 보라’고 말하니까요.

 그런데, 아이들은 대학교에 가서도 ‘교재 아닌 딴 책’은 못 보거나 안 봅니다. 대학교에 들어서면 또 그 나름대로 바쁘고 힘겨워 ‘토익이나 토플이니 다른 교재’에 잔뜩 매여 버리거든요.


.. 조선학 연구자는 아울러 고서 수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전문학을 연구하면서 열렬한 고서수집가가 된 김태준도 그러했다 … 최남선, 양주동, 방종현, 이희승, 이병기, 조윤제, 김태준, 이병도, 황의돈, 이인영, 김양선 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 국만학자ㆍ국어학자ㆍ국사학자ㆍ기독교사가를 아우른 공동 기반은 고서 수집이다. 1930년대 조선학이 논의ㆍ연구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고서를 모아 조선학 연구의 기초를 쌓아 나갔다 ..  《이중연-고서점의 문화사》(혜안,2007) 204∼207쪽


 아직까지도 숱한 언론매체에서는 헌책방(고서점)을 ‘교재나 소설책 싸게 사는 곳’으로만 여기고 있지만, 또 이명박 대통령은 틈나는 대로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을 들추고 있지만, 헌책방은 ‘교재 싸게 파는 곳’이나 ‘가난한 학생을 도와주던 곳’만이 아닙니다. 이런 얼굴은 헌책방 수많은 얼굴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예나 이제나 수많은 학자와 교수와 연구자들은 헌책방을 찾아다니면서 당신이 파고드는 학문길을 단단히 다스려 줄 좋은 책 하나 캐내려고 땀흘리고 있습니다. 가난하건 가난하지 않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여느 새책방에서 제대로 다루어 주지 않아 사라져 버린 좋은 책을 찾아 읽으려고 헌책방마실을 합니다. 조금 눅게 책을 사는 맛도 있다지만, 눅은 값보다 ‘모든 책이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꽂히면서 책다운 섬김을 받는’ 헌책방에서 책바다를 느끼고 책마음을 얻는 분들이 많습니다. 부자한테만, 또는 가난뱅이한테만 문을 여는 헌책방이 아니라, 누구한테나 문을 여는 헌책방입니다. 값싼 책만 있는 헌책방이 아니라, 값있고 값없는 모든 책을 골고루 갖추어 놓고 있는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이 없이는 책 문화를 말할 수 없고, 헌책방이 있기에 책 문화는 밑바탕이 튼튼하게 이루어집니다. 최남선 님이 헌책방을 날마다 숱하게 마실하면서 ‘단군 역사’ 자료를 찾아 헤매어 당신 연구를 이룬 일도, 양주동 님이 헌책방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향가 읽기’ 자료를 맞아들여 당신 연구를 빛낸 일도, 언제나 한 뿌리입니다. 학문이 깊은 분들한테도 그렇지만, 학문길을 따로 걷지 않는 여느 사람한테도, 헌책방은 책으로 쉬는 곳이요 책으로 만나는 곳입니다. 책이 있어 반가운 곳이며, 책이 있기에 찾는 곳입니다.

 부산에서는 ‘헌책방 문화관’을 21억이나 들여 새로 짓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 일꾼들은 지난 2004년부터 당신들 힘만으로 ‘헌책방 문화잔치’를 벌여 왔는데, 이렇게 여러 해에 걸쳐 구슬땀을 빚은 보람을 비로소 얻은 셈입니다. 다만, 이런 구슬땀은 ‘돈으로 새로 짓는 건물’에 있지 않았습니다만, 행정 관청 사람들한테는 돈으로 건물 짓는 데에서만 무언가를 찾아보고 있을 뿐인데, 그래도 이렇게 번듯하게 ‘헌책방 문화관’을 짓는다면, 이제부터라도 이 건물 하나에 수많은 자료를 모아 놓고 박물관이나 전시관을 삼을 수 있습니다. 문닫고 사라지려 하는 헌책방에서 간판을 얻어 차곡차곡 모아 둔다든지, 전국 헌책방 연락망을 만들어 사람들한테 나누어 준다든지, 헌책방 문화를 나누는 소식지를 엮어 본다든지, 하다 못해 헌책방 명함이라도 골고루 모아 전시를 한다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청계천 헌책방 일꾼한테 더없이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면, 청계천을 ‘헌책방 문화거리’로 삼아, 헌책방 일꾼이 비싼 건물임대삯에 시달리지 않게끔 돕는 손길을 내밀 수 있으며, 청계천뿐 아니라 서울과 온나라 골목길에 뿌리내리고 있는 헌책방이 고유한 맛과 멋을 지킬 수 있는 제도를 함께 마련하는 데에도 생각을 뻗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청계천 헌책방거리는 ‘청계천 되살리기’를 하는 그때부터 장사를 제대로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 집 두 집 다른 데로 옮기거나 쫓겨났는데, 그토록 청계천 헌책방 일꾼을 고맙게 여긴다면, 이곳 일꾼들이 푸대접이나 막대접을 받게끔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가게들은 당신 가게 물건을 길바닥에 내놓아도 아무런 단속을 하지 않지만, 청계천 헌책방거리 가게에서 책을 길바닥에 내놓으면 동사무소 단속 짐차가 와서는 책을 착착 싣고 ‘빼앗아(압수)’ 간다고 합니다.

 길바닥에 책을 내놓아 걷기 번거롭게 하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가게들 앞에 쌓인 물건은 그대로 두면서 헌책방거리 앞 책만 단속하는 일은 어딘가 얄궂습니다. 더욱이, 청계천 헌책방거리 앞 찻길을 줄여 ‘주차장을 만들’었는데, 정작 이곳 청계천을 관광지이든 명소처럼 꾸밀 마음이었다 한다면, 그곳에 주차장을 놓을 일이 아니라, 헌책방들이 ‘길거리 책꽂이’를 마련해 놓고, 프랑스 세느강 못지 않게 ‘책 난장판’이 이루어도록 꾸미면서 사람들한테 더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선사할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문화란 돈이 아니니까요. 문화란 돈으로 이루지 못하니까요. 문화란 삶이니까요. 문화란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루니까요.

 이참에 이명박 대통령이 내놓은 313억이 넘는 그 어마어마한 돈 가운데 꼭 1억이라도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북돋우거나 살찌우는 데에 쓰일 수 있기를 꿈꾸거나 바라지 않습니다. 헌책방거리를 살리거나 살찌우는 일은 돈으로 할 수 없기도 하지만, 돈으로 살리거나 살찌우는 책 문화는 그리 내키지 않습니다.

 책은 누구한테나 똑같습니다. 어느 누구든 책을 두 손으로 쥐어들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몇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곰삭이며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부자라고, 대통령이라고, 책을 다르게 읽을 길이란 없습니다. 옆에서 누가 읽어 준다 한들 몇 시간이 걸려야 다 들을 수 있는 책입니다.

 이와 같은 책을 문화로 삼고, 책 다루는 헌책방을 문화로 여기려 하는 몸짓이라 한다면, 돈이 아닌 문화와 삶이라는 테두리에서 청계천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이러한 눈길은 ‘헌책방에서 교재 값싸게 샀거나 거저로 얻었다’는 고마움을 넘어, ‘헌책방에 어떤 책이 깃들어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데로 옮아가면서 새롭게 발돋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런 마음씀과 생각줄기를 바탕으로 삼는 이명박 대통령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또다시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 같은 말마디만 앵무새처럼 되뇌는 일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런 소리는 그만 듣고 싶습니다. 한 가지를 더 바란다면, 여러 해째 똑같은 말만 되풀이되고 있는 데에도 ‘받아쓰기’만 부지런히 하고 있는 신문방송사 기자들 매무새도 이제는 달라질 수 있다면, 더없이 반갑겠습니다. (4342.7.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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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빗질하는 소리 - 안데스 음악을 찾아서
저문강 지음 / 천권의책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노래 없는 이 나라에는 노래만 없을까
 [잠깐 읽기 44] 저문강,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



- 책이름 :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안데스 음악을 찾아서
- 글ㆍ사진 : 저문강(조영대)
- 펴낸곳 : 천권의 책 (2009.5.1.)
- 책값 : 15000원


 (1) 노래와 춤과 잔치와 삶과


 저문강(조영대) 님은 1999년부터 꾸준하게 ‘안데스 음악 여행’을 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집식구가 있으면서도 안데스 노래에 빠져 홀로 비행기를 타고 중남미를 떠돌며 노래를 듣고 시디를 장만하고 악기를 배우는 당신은, 그동안 안데스 노래를 들으면서, “안데스 음악은 잠들어 있던 감성을 새롭게 일깨워 준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안데스 음악에 대해 물을 때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라고 답하곤 한다(311쪽)”는 말처럼 당신 넋을 빗질해 주는 노래와 늘 가까이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참에 펴낸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라는 책 하나에는, 당신 넋을 빗질해 준 고마운 노래를 찾아나선 발자취를 그러모은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 사실 그들과 내 관심사는 전혀 다르다. 알렉스와 아기는 스페인 식민지 영향으로 세워진 성당이며 수녀원 등 식민지풍 건축물에 관심이 많다. 내 관심 밖의 일이지만, 삼사백 년 된 건물들이 여전히 아름답고 훌륭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는 게 감탄스러운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 알다시피 볼리비아는 경제적 수준이 매우 낮은 나라이다. 개개인은 물론이고 국가 자체가 돈이 많지 않다. 따라서 당연히 사회 간접자본의 축적도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다. 경제적 측면으로 보자면 사람들도 매우 낙후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삶의 행복이 단지 경제적인 측면만으로 결정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볼리비아 사람들은 언제, 어떤 곳에서, 어떤 종류의 행복을 찾으며 삶을 즐길까 ..   (41, 112쪽)


 책을 펼쳐드는 저는 ‘안데스 노래’를 잘 모릅니다. 텔레비전도 안 보고 라디오도 안 들으니 다른 노래를 들을 길이 없기도 하지만, 엘피나 테이프를 장만해서 틈틈이 노래를 듣는다 하여도, 나라안에 널리 알려지거나 들을 만한 ‘안데스 노래’란 거의 없거든요. 보름쯤 앞서인가, 동네에 있는 오랜 술집에 잠깐 들렀을 때에 에프엠 라디오에서 ‘빅토르 하라’ 노래 둘을 잇달아 틀어 주어 고맙게 들었습니다만, 하라 노래이건 중남미 노래이건, 또 안데스 노래이건 우리들 여느 사람으로서 만나거나 마주하기란 몹시 힘듭니다.

 생각해 보면 안데스 노래 만나기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라고 하는 ‘굿’을 만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무형문화재이니 민속문화재이니 뭐니 하고들 이야기를 하고, 돌아가신 김수남 님은 굿 사진을 부지런히 찍어 놓기는 하였어도, 정작 굿소리를 들을 마땅한 자리가 없고, 엘피도 테이프도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굿뿐 아니라 여느 일노래와 놀이노래도 듣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저는 국민학생이던 1982∼1987년에 동네 골목길에서 동네 동무들하고 숱한 놀이노래를 부르며 술래잡기와 숨바꼭질 들을 하며 놀기는 했으나, 오늘날 동네 골목길 이웃집 아이들한테서 놀이노래를 들을 일이란 없습니다. 우리 집 둘레에 있는 골목집 아이들이 아침저녁으로 골목에서 뛰놀기는 하지만 노래를 부르지는 않습니다. 줄넘기를 하고 손전화 놀이를 하고 유행노래를 부를지라도 ‘언니 오빠 형 누나’한테서 물려받거나 배운 놀이노래는 한 가지도 모릅니다.


.. 나는 오따발로 시내에서 직선으로 난 길로 다니는 파란 버스보다는, 시간은 좀더 걸리더라도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동네를 거쳐 가는 빨간 버스를 더 좋아한다. 파란 버스보다 2배 이상 걸리지만, 온통 푸른 색으로 내 눈을 꽉 채우는 오따발로의 자연이 그대로 펼쳐진 길을 마음껏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  (154∼155쪽)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탓이 있습니다. 가르칠 사람이 없는 탓이 있습니다.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 없는 탓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저런 탓보다도 어른인 우리 스스로 우리 노래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대중가요도 노래이며 뽕짝도 노래이며 팝도 노래입니다. 락도 노래이고 민중가요도 노래이며 판소리도 노래입니다. 그런데 ‘우리 노래’는 무엇이지요? ‘한겨레 노래’는 무엇이지요? 안데스사람들도 안데스 노래를 차츰 잊어 가거나 멀리하고 있다고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에 나와 있는데, 백두산 넋을 받건 태백산 얼을 받건 한라산 마음을 받건, 우리들은 어떤 넋과 얼과 마음으로 어떤 노래를 즐기고 부르고 나누고 있는가요.

 하긴, 곰곰이 돌아보면, 우리한테는 노래도 없고 춤도 없고 잔치도 없습니다. 관청에서 수 억이나 수십 억을 들이는 ‘축제’나 ‘이벤트’는 있어도, 동네사람 마을사람 어깨동무하면서 들썩들썩 신이 나는 잔치판이란 없습니다. 품앗이와 두레가 없으니 잔치판 또한 없겠습니다만, 어우르는 일, 울력이 없으니 일노래가 없을 테고, 어깨동무 씨동무 할 또래가 없으니 놀이노래가 없을 테지만, 어쩐지 쓸쓸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노래를 즐기는 매무새로 우리 노래도 함께 부르면서 ‘안데스 노래’를 찾아나설 만한 노래그릇이 못 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몹시 허전합니다.


.. 한 인디헤나가 께추아어로 지은 아이의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한다. 그러자 담당자는 께추아어로 이름을 지을 수 없다며 그 자리에서 후안이라고 정해 준다. 그때부터 그 아이의 이름은 후안이 된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꽈도르에서는 께추아어로 이름을 짓는 것이 금지사항이었다고 한다 … 은행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그렇다. TV를 보다 보면 스페인 방송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거의 백인들이 브라운관을 차지하고 있다 … 실제로 스페인에는 지금도 중남미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 인디헤나는 말 그대로 원래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다. 인디헤나가 상층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차별은 말아야 하지 않을까 ..  (175∼177쪽)


 그렇지만, 우리는 중남미 인디헤나처럼 ‘우리 이름을 우리 나름대로 짓는 권리를 빼앗기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우리 이름을 우리 나름대로 지을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지난해 8월 17일에 우리 아이(사름벼리) 출생신고를 하러 동사무소에 가니까, “아이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적지요?” 하고 묻더군요. “우리 아이 이름은 한자가 아닌 토박이말로 지은 이름입니다.” 하고 한마디 해 주니, “그래도 한자로 적어야 하는데요?” 하고 되묻기에 귀고 귓구멍이고 기고 콧방귀고 다 막혔어요. 동사무소(따지고 보면 동사무소가 아닌 동주민센터입니다) 일꾼한테 다시금 따졌습니다. “아니, 왜 아이한테 한자 이름만 지어야 합니까? 우리 말 이름을 지어 주면 안 됩니까?” “주민등록증에 한자를 꼭 입력하도록 되어 있어요.”  “나원참, 그러면, 아이한테 이름을 지어 줄 때에는 반드시 한자로만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한다는 소리이네요?” “아니, 그렇지는 않은데.” “우리 아이 이름은 토박이말이니까, 그 토박이말에 한자를 넣고 싶으시면 알아서 넣으셔요. 우리 아이는 한자 이름이 없습니다.”


 (2) 우리 가슴에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란


 1999년으로 떠오릅니다. 그때 김종필 국무총리께서는, 우리 주민등록증에 모조리 ‘한자를 넣도록’ 법을 바꾸었습니다. 그무렵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 님은, 김종필 님과 어깨동무하면서 대통령이 되는 가운데 몇 가지를 김종필 님한테 들어 주기로 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관공서 문서나 주민증 따위에 한자 함께쓰기 또는 밝혀쓰기’를 하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자 없는 주민증’을 만들었지만, 그때 국무총리 되신 분이 아주 굳세게 밀어붙여서 나라돈 몇 조를 쓴 줄 알고 있습니다. 그때 길알림판 또한 한자를 넣어 새로 만드는 정책을 억지로 밀어붙였고, 애꿎은 길알림판 또한 모조리 갈아치웠습니다. 이와 같은 정책에 찬반이 4:6이나 3:7쯤 되었으나, 이 정책대로 일이 풀렸고, 아무래도 이때 일 때문에 우리 아이한테까지 불똥이 튀는구나 싶습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잊은 옛일이겠지만, 그때에 주민증에 ‘손그림 넣기’를 억지로 시켜서 이 일을 놓고도 ‘주민증 안 받기’를 하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라는 숫자란 1968년에 박정희 독재자가 나라사람을 억누르고 휘어잡으려고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일이 왜 있었는지를 떠올릴 줄 아는 사람도 얼마 없지 싶은데, 우리가 입으로는 ‘세계화’를 외치지만, 정작 세계 어느 나라에도 주민등록번호란 없고 주민등록증이란 없습니다. 더욱이, 나라사람을 범죄자로 여기며 지문을 받는 끔찍한 일을 하는 나라는 한국을 빼고 일본뿐인데, 일본은 제 나라 사람한테는 지문을 안 받고, ‘제 나라 사람 아닌 사람’한테만 지문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끌려갔거나 넘어가야 했던 재일조선인한테만 지문을 받는 셈이고, 이 일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골칫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인권을 끔찍하게 짓밟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새 주민증을 만든다고 하던 1999년 그때는, 오랜 군사독재정권을 선거라는 민주주의 제도로 뒤집었던 때입니다. 그렇지만,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정권마저도 ‘주민증에 지문 찍기’ 같은 끔찍한 일을 똑같이 되풀이했습니다.

 어느덧 열 해가 흐른 일이니 아득한 일이라고 느낍니다만, 그때에나 이때에나 느끼기로는, 우리들 한겨레는 ‘생각힘이 너무 없’구나 싶습니다. 상상력이 없습니다. 애써 이룬 자유를 자유로 누리지 못하고, 힘써 이룬 민주를 민주로 펼치지 못했습니다.


.. 식사고 뭐고 없다. 넋을 빼놓고 그들의 연주에 빠져든다. 게다가 내가 신청하는 곡을 빠짐없이 하나씩 연주해 주는 것이 아닌가.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암, 안 되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건 폴클로레에 대한, 아니 저 연주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앞으로 나가 선율이 이끄는 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번엔 연주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그만 동양인 하나가 자기네들의 음악을 신청하고 거기에 춤까지 추자 신기하고 반가웠는지 더욱 신나게 연주해 준다 ..  (44쪽)


 안데스를 밑돌 삼아 안데스 문화를 꽃피웠고 안데스 노래를 조촐히 지켜 나가는 안데스 토박이들은 안타깝게도 제 말과 글을 잃었고 제 삶터에서도 2등이나 3등 자리로 밀려나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어떠할까요. 이곳 안데스사람들도 우리들처럼 생각힘이 없을까요? 아직까지 ‘넋과 얼을 빗질하는 노래’를 부르고 즐기기는 하지만, 구석자리로 밀려난 채, 뒷골목으로 쫓겨난 채, 그저 숨죽이는 가운데 부르거나 즐기고 있을까요?

 《영혼을 빗질하는 노래》를 쓴 분이 안데스 나들이를 하면서도 ‘참다운’ 안데스 노래를 찾기가 만만하지 않았다고 밝히는데, 이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중남미 삶터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지 않을까요?


.. 여기도 서양 팝 음악이 흘러나오는 디스꼬떼가 많이 있지만, 볼리비아노들은 안데스 폴클로레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자기들의 기분을 발산할 수 있다 ..  (114쪽)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땅에서 참다운 우리 노래를 잃은 지 몹시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리 삶터에서는 우리 노래로는 우리 넋과 얼을 빗질할 수 없을밖에 없다고. 그렇다고 안데스땅 곳곳에 안데스 노래가 넘실넘실 넘쳐나면서 안데스 삶터를 어루만지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으나, 군데군데 듬성듬성 안데스 삶자락 어딘가에는 ‘넋과 얼을 빗질하는 노래가 남아’ 있다고. 이 조그마한 실마리를 잡아채어 우리들이 스스로 놓거나 내버린 넋과 얼을 새롭게 추스르고, 다시 태어나는 한 사람이 되자고 조용히 말걸기를 하고 있다고.


.. 힘들기야 하겠지만 한국에서 불가능한 일이 아님에도 다시 여권을 만지작거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엔 한국의 바람이 불듯, 안데스엔 안데스의 바람이 불 테니까. 안데스 악기는 안데스의 바람 속에서 본연의 소리를 낼 테니까 ..  (191쪽)


 덮었던 책을 다시금 훑습니다. 339쪽에 이르는 책에는 글과 사진이 골고루 섞여 있고, 책끝에는 ‘추천하는 노래’와 ‘안데스 악기 소개’가 붙어 있습니다. 야무지게 잘 엮었다는 생각이 들고, 감칠맛나는 글은 제법 잘 썼다고 느낍니다.

 다만, 좀더 느긋하게 노래로 스며들고, 더욱 부드러이 노래와 함께했다는 느낌은 옅습니다. 글쓴이 발자취를 바지런히 알려주면서 다른 이들한테도 이 길을 함께 걷도록 이끌려는 마음이었는지 모르나, 이 책이 ‘여행기’나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한다면, 글쓴이 나름대로 가슴속 깊이 파고든 ‘넋을 흔든 노래와 삶’이 무엇인지에 더 많은 자리를 나누어 주어야 했다고 느낍니다. ‘얼을 달랜 노래와 사람’은 어떠했는가를 다루는 글에 좀더 길게 이야기를 모두어야 했다고 느낍니다.

 그래도, 나라안에 ‘안데스 노래’를 맛보도록 이끌거나 일러 주는 이야기책은 몇 가지 없다고 느끼기에, 이만큼 엮고 쓴 책이라도 반갑습니다. 아직은 서툴 수밖에 없다고도 봅니다. 왜냐하면, 글쓴이는 아직 ‘안데스 노래’ 맛보기만 한 분이지, ‘안데스 노래’를 안데스 악기로 신나게 뜯고 퉁기면서 춤판을 벌여 줄 수 있을 만큼 무르익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마무리로 낸 책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첫 걸음마를 데듯 써낸 책이니까요. 이제, 이 첫 걸음마를 발판 삼아, 앞으로는 무르익은 이야기를 한결 곰삭이고 달래면서 펼쳐 줄 수 있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꿈꾸어 봅니다. (4342.7.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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