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
소복이 지음 / 새만화책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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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뜻이란
 [살가운 만화 50] 소복이,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



- 책이름 :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
- 글ㆍ그림 : 소복이
- 펴낸곳 : 새만화책 (2009.7.25.)
- 책값 : 8000원


 경기도 시흥시 매화동에서 살아가는 여섯 사람 이야기를 만화로 담은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는 아주 조그마한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섯 사람 이상범 님(48), 경아 씨(38), 은동원 씨(36), 함은희 씨(37), 인섭이(20), 지희(12)는 남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동네에서 저마다 제 삶을 하루하루 느끼고 있는 여느 사람들입니다. 이 만화책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에서 상범, 경아, 동원, 은희, 인섭, 지희 같은 이름을 따로 붙이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는, 이 같은 이름으로 우리 땅 곳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당신 이름을 세상에 내놓거나 드높이지 않으면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160쪽짜리 자그마한 만화책은, 그린이가 만화를 다 그릴 무렵, 매화동 마을회관에서 조촐하게 만화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만화에 나온 사람과 동네사람들이 모인 따뜻한 자리였다고 합니다. 책 사이사이에는 그린이가 만난 여섯 사람이 손수 그린 그림 한두 장을 살짝살짝 곁들여 놓았습니다. 그린이가 사는 곳에서 경기도 시흥시 매화동으로 가자면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한다는데, 매화동은 도시도 시골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이면서, 집값 싼 곳을 찾아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고, 시골스러움과 어수선하지 않음에 끌려 찾아온 사람들이 있으며, 예부터 농사짓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남아서 함께 어우러진 곳이라고 합니다.


.. “뭐, 정신을 차려도 삶 자체가 변해야 되잖아요. 극단을 접거나, 혹은 대박을 터뜨리는 작품을 하거나. 그런데 여기서 공연을 해도 사람들은 공연 보러 서울로 가요. 못 믿는 거죠.” ..  (37쪽)
 





 오늘은 새벽 네 시 반에 잠에서 깼습니다. 아기가 그무렵에 깨었기 때문입니다. 잘 자다가 갑자기 깬 아기는 끙끙거리고, 아기 엄마가 기저귀에 손을 넣어 보더니 “똥 쌌네.” 한 마디. 뜨이지 않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아기를 안고 씻는방으로 가서 기저귀를 벗기고 밑을 씻깁니다. 곧바로 똥기저귀를 빱니다. 일어난 김에 아기 엄마와 아빠는 모기를 대여섯 마리쯤 잡고 불을 끕니다. 아기는 이십 분쯤 더 칭얼거리며 엄마아빠 배며 등이며 올라타고 놀다가 스르르 잠이 듭니다. 아빠는 곧바로 일어날까 했지만, 몸이 무거워 더 잠들기로 하고 다섯 시 오십 분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안칩니다. 머리를 감고 셈틀을 켭니다. 그런데 모니터 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엊저녁, 아기가 모니터에 대고 오줌을 갈겼는데, 그 탓에 모니터 전원단추가 맛이 간 듯합니다. 그제는 셈틀 자판에 똥을 갈기는 바람에 자판이 맛이 갔습니다. 지난달에는 엄마아빠 손전화를 입에 넣고 빠는 바람에 엄마아빠 손전화가 모조리 맛이 가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기 엄마가 쓰는 노트북을 켜고 글 몇 조각을 쓰는데, 예전에 아기가 쥐어뜯은 자판 몇 군데가 잘 눌리지 않습니다. 히유.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다고 아기한테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길을 나섭니다. 오늘은 일곱 시 이십이 분에 나섭니다. 늦어도 이십 분 안쪽에 길을 나서야 전철역에 알맞게 닿는데, 전철역까지 가는 길에 사진 몇 장 찍는다며 이 분쯤 어기적거립니다. 전철역에 닿고 보니, 삼십삼 분에 들어왔어야 할 급행전철이 삼 분 늦어졌다고 합니다. 아침에 좀더 바지런히 길을 나서고 골목 사진 찍는다며 깨작거리지 않았어도 때맞추는 전철은 못 탔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제때 안 들어온 전철 때문에 전철역에는 사람들이 넘칩니다. 히유. 오늘도 첫 역인 이곳에서 자리잡고 가기는 글렀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50살에 자살할 거예요.” “그때 너무 잘 살고 있으면요?” “그럼 그냥 오래 살구요.” “하하.” “저는 집에 있는 게 고통스러워요. 저는 막내인데, 사랑받는 막내는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내 밥은 내가 차려 먹었어요. 엄마가 차려 주면 이상해요. 엄마는 내가 밥 먹기 전에 이 닦는 걸 극도로 싫어하셨어요. 손으로 칫솔을 만져 보고 검사까지 했다니까요. 원래 제 꿈은 만화가예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힘들겠다 싶어서 포기했어요.” “그럼 지금의 꿈은 뭐예요?” “성공이요. 목표를 달성해서 행복하게 미소짓는! 세계에서 나를 인정해 주는! 고등학교 때는 개근상 받는 것이 목표였는데, 지금은 성공하는 게 목표예요.” ..  (51∼53쪽)
 





 전철에 타면서 자리는 꿈조차 꾸지 않고 바퀴걸상이나 자전거를 놓는 자리 안쪽에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펼칩니다. 이 다음으로 서는 주안역부터 퍽 많은 사람들이 잔뜩 몰려 탑니다. 이이들도 아침 전철이 늦어지는 바람에 줄이 더 길어졌으니까요. 이리하여 부평역에서 사람들이 탈 때에는 서서 가는 사람은 옴쭉달싹 못할 만큼 꽉 끼게 되고, 끄트머리에서 책을 펼치던 저는 창문 쪽으로 몸이 눌립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송내며 부천이며 역곡이며 더 타려는 기나긴 줄은 지치지 않고 더 몰려들고, 먼저 들어와서 눌렸든 늦게 들어와서 누르든 서로서로 숨을 쉬기 어렵습니다. 전철기사는 여러 차례 안내방송을 하면서 에어컨을 가장 세게 틀었으나 시원하지 않을 듯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문득 1994년 봄이 떠오릅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가끔 책방 마실(교보문고나 헌책방)을 하러 서울에 전철을 타러 왔고, 국민학생 때에는 집에 자가용이 없어 전철을 타고 작은아버지 댁에 찾아갔는데, 이때에는 선풍기만 있거나 선풍기조차 없는 전철칸이 그렇게까지 덥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마, 출퇴근 지옥철을 탈 일이 없이 전철을 타서 그랬을 텐데(이무렵에는 다들 창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1994년 봄에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수업을 들으러 가면서 처음으로 ‘지옥철’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인천 끄트머리부터 구로역 둘레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이 전철을 탈밖에 없으나, 그사이에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타기만 해야 합니다. 또한, 서울과 가까운 곳이라 해서 서울로 수월히 갈 수 있지 않고, 외려 탈 자리가 없어 다음 차를 기다려야 하는 판이니, 벌써 꽉 들어찬 전철이라 하여도 우격다짐으로 밀면서 타려고 합니다. 서로서로 괴로운 노릇이지요. 그때, 1994년에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에는 선풍기만 있었습니다(수원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도 매한가지). 게다가 선풍기는 안 돌아가기 일쑤였고, 그나마 돌아가는 선풍기라 하여도 한 칸에 두어 대가 달랑 달려 있었습니다.


.. ‘요즘 나는 매일 바란다. 오늘 밤 꿈에서 엄마를 만나기를. 몇 년 전,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임종을 못 봤다. 우리 엄마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견디고 사셨을까? 그런 일이 있고 나니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엄마를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엄마는 나보다 더 열심히 사셨는데 말이다.’ ..  (67∼68쪽)
 





 신길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여의도를 지나면 전철은 홀가분하다고 느낄 만큼 사람이 줄어듭니다. 서울에서 움직이든 서울 바깥에서 서울로 들어오든, 저마다 제 갈 곳을 찾아서 사람 물결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하겠습니다. 오늘은 800쪽이 조금 안 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조금 읽다가 《씨앗은 힘이 세다》라는 책을 살짝 펼쳤습니다. 고흐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두툼한 책은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드디어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씨앗은 힘이 세다》는 2006년에 처음 장만해 놓고 한참 읽다가 줄거리가 조금 지루해졌을 때 덮어놓고는 이태 넘게 다시 펼치지 않다가 이즈음 마저 읽으려고 집어들고 있습니다. 서대문역에서 내리기 앞서 “소비자들이 때깔이나 크기로만 농산물을 선택한다면 이 땅의 농부들은 농약을 안 칠 수 없을 것입니다. 소비자의 의식도 함께 바뀌어야 하겠지요(199쪽).”라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익히 들어 왔는데, 오늘은 새삼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곡식이나 열매를 사먹는 도시사람들이 ‘굵직굵직하고 빛깔 고우며 벌레먹은 곳 없는 말끔한 녀석’을 찾는다면, 어느 농사꾼이건 농약과 비료를 듬뿍듬뿍 안 칠 수 없습니다. 포도며 능금이며 배며 복숭아며 수박이며 갖은 농약과 비료에 범벅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 도시사람들은 뻔히 농약과 비료를 많이 친 줄 알면서 이런 열매를 사다 먹습니다.

 알 수 없는 우리 씀씀이요 삶이 아닌가 싶으나, 밀고 밀리는 사람 물결에서 벗어나서 아침햇살 받고 한글학회까지 거니는 동안 곱씹어 보니, 《씨앗은 힘이 세다》를 쓴 농사꾼이 외친 이 말마디는 바로, ‘오늘날 우리들은 온통 껍데기로 겉치레를 하는 데에 매여 있다’는 소리로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책이란 알맹이(줄거리)를 살피고 사서 읽어야 합니다. 껍데기가 곱거나 멋스럽다고 사서 읽습니까. 꽂아 놓기에 보기 좋다고 사들이는 책입니까. 뭐, 누군가는 틀림없이 ‘꽂아 놓으려고 책을 사들일’ 수 있고, 이렇게 하는 일은 그이 권리입니다. 다만, 책은 꽂아 놓으려고 만드는 종이뭉치가 아닙니다. 읽으려고 만드는 종이뭉치입니다.

 곡식이나 열매는 먹으려고 일굽니다. 보기 좋으라고 일구지 않습니다. 배속에 들어와서 우리 몸에 새힘을 불어넣도록 하려고 일굽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은 어떠한가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어떻게 가꾸는가요. 우리 스스로 내 모습을 어떻게 차리고 있지요? 우리 스스로 내 이웃하고 마주하면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마주하는지요? 우리들 옷차림은 얼마나 내 몸을 사랑하고 아끼는 옷차림입니까? 우리들 집치레나 몸치레는 얼마나 내 삶터를 사랑하며 돌보는 집치레이거나 몸치레인가요? 우리는 왜 일을 하지요? 우리는 왜 사랑을 하지요? 우리는 왜 아이를 낳아 기르지요? 우리는 왜 밥을 먹지요? 우리는 왜 돈을 벌지요? 우리가 아무개 정치꾼한테 표를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무개 정치꾼이 죽은 일에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숙이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 “부모님은 수원에 사시구요. 여기도 곧 정리할 거예요. 귀농할 거거든요.” “왜요?” “농촌은 뿌리고 도시는 꽃이라고 하는데, 음, 썩은 꽃이죠. 도시는 죽이는 일만 해요. 지구라는 별에서 제대로 살려면 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혼자 가면 외롭지 않겠어요?” “술 안 드시죠? 술 마시면 외로운 것도 몰라요. 하하!” “농사일이 힘들 텐데요.” “일하는 게 즐거워야 해요. 농업이 아니라 농사가 되어야지요. 팔아먹을 거 생각하면 고되져요. 나는 행복하려고 가는 거예요.” ..  (127∼128쪽)
 





 그제 일터로 오는 길에 만화책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를 다 읽어 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일터 책상에 그대로 두고 나왔습니다. 어제와 오늘, 다 읽어 낸 만화책을 다시 더듬어 보면서, 이 만화는 우리한테 무슨 말을 걸고 싶어 하는가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그나마 저는 집이 아닌 일터에 있기 때문에 이 만화책을 생각할 겨를을 얻었습니다. 집에서 옆지기하고 아기를 돌보고 있었다면, 아기를 보고 놀고 씨름하느라 온 기운이 다 빠져서 책이고 뭐고 거들떠보기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울로 전철을 타고 와서 돈을 얼마쯤 버는 일을 한답시고 아기를 옆지기한테 통째로 맡겨 놓으면서 저는 제 깜냥껏 제 일을 한다고 하는데, 이 일이란 얼마나 저와 옆지기와 아기한테 도움이 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글을 쓰고 책을 쓰며 이것저것 곁일을 거들면서 가까스로 버는 돈으로 도서관 달삯을 대고 집삯을 또 어찌어찌 대며 우리 살림을 이렁저렁 꾸릴 때하고 견주면, 어느 회사 한 곳에 엉덩이를 지긋이 눌러붙이면서 일할 때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해서 버는 돈으로 우리 세 식구는 얼마나 즐겁거나 아름답게 우리 삶을 가꿀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을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보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우리한테 목숨 하나 내려주고 이 땅으로 보내준 ‘너른 자연’은 무슨 마음을 먹고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 목숨 하나 붙잡으면서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굽어살피고 있을 하늘나라 넋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오로지 내 밥그릇만 챙기면 된다고 하는 이 터전인데, 너른 자연이든 하늘나라 님이든 따지기 앞서, 우리한테 목숨을 선사한 우리 어버이는 무슨 사랑과 믿음을 우리한테 나누어 주었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어버이한테,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를 그린 만화쟁이 소복이 님 어버이한테, 이 만화책에 나오는 여섯 사람네 어버이한테, 당신들이 살아온 뜻과 보람은 무엇이었으며, 당신 아이들한테 보여주거나 나누려고 하던 뜻과 보람은 무엇이었을까요. (4342.8.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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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22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그림체가 일반일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군요.요즘은 암만 알맹이가 좋아도 포장이 나쁘면 사지 않은 시대이니까요.

숲노래 2009-08-23 08:21   좋아요 0 | URL
'일반인'이란 누구일까요?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그림체'란 무엇일까요?

책은, 편견으로 보는 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책일 뿐입니다.
편견에 맞추어 주면 더 훌륭할는지 모르나,
그저 유행으로 그칠 뿐입니다.

카스피 2009-08-23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님,말씀 마따나 책은 편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하지만 암만 좋은 책도 독자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면 쉬이 읽혀 질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의 내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관주성경(아주 고풍스러운 20~30년대 문체의 성경인데 제목이 이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을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는다면 아마 반도 이해하지 못할것입니다.
솔직히 좋은 내용의 책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힐려고 한다면 그에 걸맞는 포장도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책으로 보는 눈 97 : 회사원이 읽는 책 - 저녁부터 밤까지

 서울에서 여느 회사원과 마찬가지로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길에 책을 한 권이나 두 권쯤 마저 읽습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전철길에서는 얇은 책은 한 권 반쯤 읽고, 조금 두툼하면, 아침에 2/3쯤 읽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마저 다 읽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저 다 읽고 나서 새로운 책을 가방에서 꺼내지 못합니다. 처음 집에서 길을 나설 때에는 맨 첫 역에서 타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맨 첫 역이 아니기도 하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전철을 탈 때에는 책을 펼치기 어려울 만큼 오징어떡이 되기 일쑤입니다. 이런 전철에서 책을 읽자고 하는 사람이 미쳤거나 바보이거나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렇지만 여섯 시나 여섯 시 반에 칼퇴근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퍽 드물지만, 오징어떡이 되는 가운데에도 끝끝내 책을 펼쳐 읽는 책사랑꾼을 한두 사람씩 꼭 보곤 합니다. 거의 모두 지치고 고단해서 곯아떨어져 있는데, 또는 집으로 돌아가서 만날 사람하고 수다를 떠느라 바쁜데.

 칼퇴근을 했어도 서울에서 좀더 머물며 사람을 만나고 느즈막하게 전철을 타면, 퇴근 물결에서 벗어난 까닭에 조금 널널합니다(그래도 미어터지기는 비슷비슷). 술 몇 잔을 걸쳤으면 해롱거리는 가운데 책을 펼칩니다. 둘레에 저처럼 해롱거리면서 손잡이를 붙잡고 기우뚱거리거나 용케 자리를 얻어 앉아 고개를 푹 숙이거나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찍 돌아가나 늦게 돌아가나 책 한 번 손에 쥘 만한 틈을 내기란 더없이 빠듯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읽으며 금세 다 읽어치운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호미,2009)이라는 책 끄트머리 빈자리에 몇 마디 끄적입니다. ‘책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틈을 내고 힘을 내고 돈을 내어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말미를 주고 집을 주고 돈을 주어도 책을 안 읽는다. 그 말미와 집과 돈으로 다른 놀음놀이에 젖어든다.’

 다 읽은 책은 집어넣고 새로 읽을 책을 꺼내고 싶으나, 급행전철이 부천과 송내와 부평과 동암과 주안까지 지나지 않고서는 꽉 끼고 밀리고 눌린 틈에서 꼼짝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 읽은 책을 다시 펼치며 밑줄 그은 대목을 곱씹습니다. “십오 년 동안 한결같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 12시 일본 대사관 앞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상설 퍼포먼스로 인식되는 측면도 있다 …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슈로서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 언론도 더는 이 문제를 돌아보지 않는다(236쪽).”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겨 봅니다. ‘사람들은 꼭 책을 읽어야 하나? 이렇게 고단하고 지치도록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책을 꼭 쥐어 주어야 하나? 책을 쥐어 준다면 무슨 책을 왜 쥐어 주나? 우리는 왜 우리 스스로 책하고 멀어지도록 살아가나? 우리한테 책이 있어 무엇이 좋고, 우리한테 책이 없어 무엇이 나쁠까? 오늘날 우리들은 한결같이 더 돈을 많이 주는 일터를 바랄 뿐, 돈을 덜 주더라도 책 한 권 읽을 겨를을 넉넉히 내어주는 일터를 안 바라고 있지 않나? 내 몸과 마음을 사랑스레 돌보고 아끼는 길은 어느 누구도 안 가르칠 뿐더러, 우리 스스로 찾아 배울 뜻이 없지 않는가?’ (4342.8.2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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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96 : 회사원이 읽는 책 - 아침부터 낮까지

 며칠 앞서부터 한글학회에 일을 나오고 있습니다. 한글학회는 서울 종로구 새문안길에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 볼 수 있는 길이지만, 자전거로 인천과 서울을 오가면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아기하고 씨름할 기운은 바닥이 나기 때문에 전철을 타기로 합니다.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용산과 새문안길 사이를 오가도 괜찮으나,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전철에 자전거를 싣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가득가득 타는 사람들만으로도 넘치니, 자전거가 아니라 바퀴걸상이나 아기수레 또한 들어갈 구멍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철칸 한쪽 구석에 기대어 서고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한손에는 책을 듭니다. 사진쟁이 전민조 님이 엮은 《사진 이야기》(눈빛,2007)를 읽습니다. 인천에서 떠나는 전철은 서울과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고, 이내 꾹꾹 눌러담듯 서 있는 사람은 서로서로 밀고 밀치면서 에어컨 돌아가는 전철은 후덥지근합니다. 문득, 이 전철이 1990년대에는 선풍기가 탈탈 돌아가며 ‘인천에서 서울 가는 급행’이 없었다는 생각이 납니다. 또한 1980년대에는 선풍기조차 제대로 없거나 망가져 있기 일쑤였다는 생각이 납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여기에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앞둔 이날까지 죽 돌아보고 헤아려 보건대, 전철로 오가며 책을 손에 쥔 사람은 나날이 줄어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리고, 예나 이제나 ‘전철을 타면서 책을 읽는 한국사람은 참 적다’는 이야기를 누구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는 것에 멋있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사진도 멋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그런 사진을 추구했던 내 모습이 사진의 노예로 보일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74쪽/최광호).”는 대목을 밑줄을 그으며 읽습니다. 이 대목에 밑줄을 긋는데 제 앞쪽으로 어느 아가씨가 불쑥 끼어들더니 신문을 쫙 펼치며 읽습니다. 신문 끄트머리가 제 얼굴에 닿을락 말락 합니다. 제 뒤에 서 있던 아저씨가 아주 큰 소리로 재채기를 합니다. 틀림없이 입에 손을 안 대고 재채기를 했다고 느낍니다.

 전철은 어느덧 신도림역에 닿으면서 거의 모든 손님이 내립니다. 신도림역에서 내린 절반쯤은 강웃마을로 갈 테며, 다른 절반쯤은 강아랫마을로 갈 테지요. 집에서 나와 전철역에 처음 들어설 때부터 아직까지도 손에 책을 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만 보입니다. 사람이 오징어떡처럼 눌리는 전철에서는 손에 책을 쥔 사람을 더더욱 볼 수 없었습니다.

 숨막히는 전철칸에서 시달리다가 서대문역에서 내려 걷습니다. 광화문역에서 내리면 조금 덜 걷지만, 몇 걸음 더 걷더라도 아침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천천히 팔월 기운을 느끼고 싶습니다. 몇 분쯤 하느작하느작 거닐면서, 사람 걷는 길을 뚝 끊고 지붕 없이 새로 만든 ‘자전거 주차장’ 어설픈 모습을 봅니다. 울퉁불퉁한 거님길을 느끼고, 밝고 가벼운 차림인 아가씨와 까만 양복 차림인 아저씨를 숱하게 스칩니다. 낮밥때가 되니 온 길거리에 사람들로 그득하고 퍽 많은 사람 손에는 커피잔이 쥐어져 있습니다. 회사원은 새벽바람으로 일어나 낮밥을 먹을 때까지 책을 손에 쥘 겨를이 몇 분이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4342.8.1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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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인간 (특별보급판) - 1957-2006 최민식 사진 50년 대표선집 최민식 사진집 휴먼(Human)
최민식 지음 / 눈빛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예식장 비싼 밥이 아닌 사진책을 선물로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 최민식, 《HUMAN 1957∼2006》



- 책이름 : HUMAN 1957∼2006
- 사진 : 최민식
- 펴낸곳 : 눈빛 (2006.12.7.)
- 책값 : 6만 원


 (1) 사진에 담는 삶


 너른 터가 생긴 광화문 앞길을 가로질러 보았습니다. 한글회관에서 나와 문화체육관광부로 건너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땅밑길로 지나다녔다 하고, 몇 해 앞서 비로소 건널목이 생겼으며, 이제는 너른 터가 생겨 자동차 흐름은 조금 줄면서 걸어다니기에 한결 나아졌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나와 서울 시내 이런저런 모습을 찍는 사람이 제법 있고, 남녀 짝을 지어 오붓하게 하루를 즐기는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다리쉼을 하는 공공근로 할매와 할배가 보이고, 개인옷을 입은 경찰과 제복을 입은 경찰이 곳곳에 많이 보입니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대리석으로 보이는 돌을 새로 깔았습니다. 너른 터가 되었으나 아스팔트 밑에 있던 흙바닥을 밟을 수 있지는 못하며, 사람들이 집회나 시위를 하지 못하게끔 꽃밭을 가꾸어 놓았습니다. 시청 앞 너른 터에는 잔디를 심고 광화문 앞 너른 터에는 꽃밭입니다.

 이나마 너른 터 한 곳이 늘어나니 반갑다고 해야 할까 싶지만, 돈을 지나치게 많이 들인 너른 터요, 꼭 무엇무엇을 세우고 놓고 마련해야만 하는 너른 터입니다.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어 억지로 무엇인가를 만들지 않으면 땡볕에 그예 드러나야 하고, 비라도 올라치면 고스란히 맞아야만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밟으면 흙땅은 딱딱해진다지만, 우리한테는 시멘트나 아스팔트나 대리석이 아닌 맨흙을 풀기운과 나무그늘을 함께 느끼면서 밟을 수는 없는가 궁금합니다. 도시 한복판에는 숲길을 마련할 수 없고, 조그맣게라도 나무숲을 이룰 수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문득 오늘날 사진이 자꾸자꾸 날카롭거나 차갑거나 딱딱한 채 겉멋과 겉치레와 겉꾸밈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움이 사라지는 사진만 판치거나 넘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운 멋도, 자연스러운 움직임도, 자연스러운 손길도, 자연스러운 눈길도 찾아보지 못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푸나무와 흙이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으니까요. 이렇게 사람만 오갈 수 있으며, 참새나 비둘기 한 마리 깃들 틈조차 없으니까요. 이렇게 차 소리 가득한 가운데 귀가 멍멍해지는 터전에서 돈만 버는 일을 해야 하고, 돈만 쓰는 문화를 누려야 하고, 돈만 들이는 집을 얻어서 살아야 하니까요.


.. 내 앞선 세대에 그토록 불멸의 사진을 찍었던 작가들이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을 보며 나도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하면서 깊은 울림이 있고, 몸을 조이는 긴장감을 주는 그런 사진을 찍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  (책 끝에 붙인 말 / 최민식 - 나의 사진 인생 50년)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지옥철에 시달리며 인천에서 서울로 옵니다. 새벽에 아빠가 일을 나갈 때면 어김없이 깨어나 ‘아빠 가지 말라’며 울면서 종아리에 달라붙는 아기를 달래며 홀로 떨어져 나와 하루 절반 남짓을 집 밖에서 보냅니다. 쇠와 시멘트로 지은 건물에 놓은 책상 앞에 앉아 셈틀을 또닥거립니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기 소리를 듣고, 모임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들으며,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다시 찻길에서 차 소리며 사람들 수다 소리며 가게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들에 휘감긴 채 전철역으로 걸어갑니다. 전철은 쇠를 긁는 소리를 내고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에어컨 소리와 방송 소리를 냅니다. 이어폰을 끼고 있다 해도 옆에까지 들리는 디엠비 소리를 듣고, 전철에서 울리는 소리보다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나 사진기를 한쪽 어깨에 걸쳐 놓고 있지만, 새벽에 집을 나서며 전철에 올라 서울에 닿은 뒤 일터에서 아홉 시간쯤 보내고 나서 다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사진기 단추를 누를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이 쳇바퀴 같은 하루라 할지라도, 우리들은 ‘쳇바퀴 삶’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길과 전철에서 부대끼거나 스치는 아가씨들 반바지와 치마를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길과 전철에서 부딪히거나 뒤엉키는 아저씨들 담배 꼬나문 모습이나 침 뱉는 모습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전철에서 잠든 사람들 모습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전철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모습만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으며, 사람들 다리께만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틈틈이 바뀌는 전철 광고판만 찍어도 재미있는 사진감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건물 들머리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고, 울퉁불퉁한 길바닥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으며, 건물 10층이나 20층에서 길거리를 내려다보면서 하루 스물네 시간 흐름을 담을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무엇을 사진감으로 하느냐도 크게 돌아볼 대목일 터이나, 무엇을 사진감으로 삼든 사진쟁이 스스로 무슨 생각과 마음과 뜻과 넋을 담느냐가 훨씬 크게 돌아볼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민식 님 사진책 《인간》 또는 《HUMAN》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데, 최민식 님 사진감은 늘 ‘사람’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진쟁이들은 최민식 님이 사람을 찍든 말든 ‘당신들 깜냥껏 바라보거나 느끼는 사람’을 찍습니다. 모델을 찍든 알몸을 찍든 만듦사진으로 꾸미든 다큐로 찍든,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누구나 으레 사람을 사진감으로 삼습니다.


.. 진정한 사진은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한 고민과 사색, 그리고 체험이 수반되어야 한다. 내가 의도적으로 연출하지 않은, 생생한 인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자 한 것은 그 현실 자체에 이미 예술이 추구하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책 끝에 붙인 말)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이 사진감을 얻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이 어울리는 마을이나 도시가 사진감을 찾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나 사람한테 바람과 물과 먹을거리를 대어 주는 자연이 사진감을 느끼게 하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을 마주 바라보며 찍어도 사람 사진입니다. 사람이 아닌 길이나 건물을 찍어도 사람 사진입니다. 왜냐하면 길이건 건물이건 사람이 짓기 때문입니다.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뒷골목이든 앞골목이든 사람 사는 터전이라, 골목을 어떻게 담더라도 사람 이야기가 스며듭니다.

 그런데, 사람을 찍은 사진 가운데 사람맛이나 사람멋이 나지 않는 작품이 있습니다. 섬뜩하거나 밋밋한 사진이 있습니다. 지루하거나 눈 버리는 사진이 있습니다. 빼어난 솜씨를 선보인다 하지만 손재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남다른 눈길을 보여준다 하지만 손놀림 말고는 무엇도 스미지 않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 사진은 나를 찾아 주었다. 나는 사진만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었기에 사진기에 나를 송두리째 맡겨 버렸고, 내 인생을 사진으로 가득 채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  (책 끝에 붙인 말)


 나 스스로 우리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때에는 내가 담는 사진에 힘찬 넋이 서립니다. 나 스스로 내 이웃을 사랑스레 바라보거나 껴안으며 살아갈 때에는 내가 찍는 사진에 사랑스러운 얼이 스밉니다. 나 스스로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삶일 때에는 내가 이루는 사진에 따스한 기운이 녹아듭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도시문명에 젖어든 삶이라 할 때에는 자본주의 도시문명을 깊이 느끼는 사진이 됩니다.
 





 (2) 사진책 《HUMAN》을 이룬 최민식 님 삶이란


 1928년에 태어나 1950년대 끄트머리부터 사진을 찍어 온 최민식 님 《HUMAN 1957∼2006》은 당신 사진길 쉰 해를 그러모읍니다. 사진길 쉰 해를 기리는 뜻에서 새롭게 사진책이 하나 나오기도 했고, 이무렵 《진실을 담는 시선, 최민식》(예문,2006)과 《뭘 그렇게 찍으세요, 사진 작가 최민식》(우리교육,2006)과 《소망, 그 아름다운 힘》(샘터사,2006)이 잇달아 나왔습니다.

 사진찍기 한길을 쉰 해나 이었다는 대목은 무척 놀랍고 대단하며 기릴 만한 일입니다. 사진쟁이 최민식 님을 기리는 책이 한꺼번에 네 가지 나오는 일이란 마땅한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어쩌면 예전에 나오고 다시 못 나오는 책을 새로 펴낼 수 있으며, ‘최민식 사진전집’을 묶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2006년 사진길 쉰 해를 맞이하기 앞서인 2005년에는 《사진이란 무엇인가》(현실문화연구)라는 이름으로 ‘사진쟁이 최민식이 생각하는 사진’ 이야기를 펼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좀더 앞서인 1996년에는 사진길 마흔 해를 돌아보는 가운데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한양출판)이 나오기도 했고, 이 책은 2004년에 고침판으로 다시 나옵니다.


.. 나의 사진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험난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내 사진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체험이 있었기에 일관되게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삶의 진실을 추구할 수 있었다. 나는 사진을 통해 사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휴머니즘의 정의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  (책 끝에 붙인 말)
 





 그런데 궁금합니다. 사진길 쉰 해를 걸은 최민식 님을 말하는 사람들은 최민식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샅샅이 살피거나 생각하거나 들여다보거나 만나거나 껴안거나 부대끼거나 감싸안으면서 이야기를 펼치고 있을까요. 곧게 한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최민식 님처럼 당신 스스로들 남다른 한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길동무 최민식’을 바라보는지, ‘넘볼 수 없는 위인전 주인공’으로 바라보는지, ‘눈물 콧물 웃음 쏟아내는 사진을 선사한 고마운 이’로 바라보는지, ‘꾀죄죄한 사람들 꾀죄죄한 삶 꾀죄죄한 사진’으로 바라보는지, ‘가난한 사람을 찍어 거룩하거나 아름다운 사진’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최민식 님 사진에 몇 마디 말이나 시나 글을 붙이는 분들은 얼마나 최민식 사진을 당신 마음속 깊이 부둥켜안으면서 말마디나 글줄을 뱉어내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이는 최민식 님 사진을 놓고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부터 군부가 등장한 1960년대, 그리고 민주화 투쟁이 가열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진 속 인물들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생명력을 지닌 모습으로 포착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최민식 님을 놓고 “최민식은 한국 사진예술의 1세대로서 리얼리즘 사진의 독보적인 존재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진이란 찍는 사람 삶이 그대로 묻어나기도 하지만, 사진이란 보는 사람 삶결 그대로 느끼기도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을 보는 사람이든, 제 깜냥에 따라서 사진을 이루거나 즐깁니다. 내 눈길뿐 아니라 손길과 마음길과 몸길에 따라서 내 손으로 빚어내는 사진이 달라집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사진을 다르게 느낍니다.

 어떤 이로서는 최민식 님 사진에 담긴 사람들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생명력을 지닌 모습’이라고 느낄는지 모르나, 최민식 님은 당신 사진에 담긴 사람들을 바라보며 ‘비참한 현실’이 아니라고 느낄는지 모르며, 사진에 담긴 사람들 스스로 당신 삶을 ‘비참한 현실’인 적이 없다고 느낄는지 모릅니다. 흔히들, 골목동네를 가난하고 구질구질하고 어둡고 퀘퀘하다고 여기지만, 골목동네 바깥에서 겉스치는 눈으로 잘못 바라보거나 대충 바라보니 이렇게 여길 뿐입니다.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가난 또한 어느 만큼 영향을 끼치겠지만, 가난보다도 둘레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훨씬 영향을 끼칩니다. 나 스스로 오늘 하루 밥 한 그릇에 흐뭇할 수 있으면, 가난하면서도 웃습니다. 돈이 없이도 즐거운 삶이요, 기쁜 삶이며, 보람찬 삶입니다. 큰도시 큰 아파트에서 깊은 밤에도 낮처럼 환하게 불을 켜 놓고 있어야 ‘구질구질하지 않고 어둡지 않’은 삶이겠습니까. 청소부들이 바지런히 손을 놀려 쓰레기를 치워 놓는다고 ‘퀘퀘하지 않고 지저분하지 않’은 삶이겠습니까. 우리 눈앞에 안 보인다고 ‘없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없는 사랑’이 아닙니다. 최민식 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그대로를 당신 사진에 담았을 뿐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었을 때에는 가난한 그대로를 담습니다. 멋부리고 어여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일 때에는 멋부리고 어여쁘게 살아가는 우리들 그대로를 담습니다. 싱그러운 웃음은 싱그러운 웃음 그대로, 하품하는 졸린 낯빛은 하품하는 졸린 낯빛으로 찍습니다. 아이 키우며 고단한 주름살은 아이 키우며 고단한 주름살 그대로 찍습니다. 해맑게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 그대로 찍습니다. 힘겹게 얻은 국수 한 그릇 허둥지둥 먹는 아이는 힘겹게 얻은 국수 한 그릇 허둥지둥 먹는 그대로 담습니다. 다 다른 사람을 다 다른 느낌 그대로 살리면서 다 다른 삶임을 느끼도록 보여줍니다.


.. 사진작품 속에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기에 이를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소중한 친구가 된다 ..  (책 끝에 붙인 말)
 





 최민식 님을 놓고 “한국 사진예술의 1세대로서 리얼리즘 사진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추켜세우는 말마디는 어쩐지 몹시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먼저, 최민식 님은 사진예술 1세대가 아닙니다. 우리네 사진예술 1세대는 임응식 님이나 이해문 님 같은 분들입니다. 또는, 이 나라에 사진을 처음 들여온 지운영 님 같은 이름을 들어야 합니다. 지운영 님 또래를 사진예술 1세대라 한다면, 임응식 님이나 이해문 님은 2세대가 될 테지요. 그러고 나서 최민식 님이나 이해문 님 같은 분들은 3세대라 할 테고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사진 발자취가 어떠한가를 참으로 잘 모릅니다. 참으로 잘 모를 뿐 아니라 참으로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참으로 생각해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참으로 안 알아봅니다. 참으로 안 알아볼 뿐 아니라 참으로 느끼려 하지 않고, 참으로 깊이 곰삭여 새로 태어나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최민식 님 사진이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최민식 님 사진을 ‘넘어서’거나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사뭇 다른 길에서 사뭇 다른 아름다움을 꽃피우’거나 하는 우리들 사진동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사진길 쉰 해를 기리면서 이 책 저 책 나오기는 했으나, 무엇보다도 최민식 님 사진열매 가운데 가장 눈여겨보면서 아끼고 사랑해야 할 《HUMAN 1957∼2006》은 판이 끊어졌습니다. 안타까운 노릇인데, 우리네 얕은 사진문화로서는 어찌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2008년 3월에 ‘특별보급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와 주었습니다. 2006년판은 6만 원이었고, 특별보급 2008년판은 3만5천 원입니다(저는 2006년판 6만 원짜리 책을 장만해서 보았습니다).

 ‘삼청각’ 같은 곳에서 혼인잔치를 하면 밥값이 5만5천∼10만 원이라고 합니다. 여느 예식장에서 혼인잔치를 해도 밥값이 몇 만 원쯤 합니다. 돌잔치를 해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식구는 혼인잔치도 안 하고 돌잔치도 안 했습니다. 문득문득 새로운 생각이 불쑥불쑥 드는데, 우리 식구가 나중에 어느 만큼 살림이 펴서 ‘늦깎이 혼인잔치 또는 돌잔치’를 하는 날을 맞이한다면, 최민식 님 사진책을 500권쯤 한꺼번에 장만해서 손님들한테 ‘밥은 안 주고 책을 한 권씩 드리면’ 더없이 좋겠구나 싶습니다. 돈은 제대로 못 버는 주제에 꿈만 꾼다고, 새로 꿈 하나 꾼 만큼 이 꿈을 이루도록 돈을 신나게 벌어 볼까 합니다. (4342.8.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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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19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님,오늘 신촌 숨책에 갔더니 여자 사장님이 그러시더군요.요사이 책들을 안 읽어선지 책들도 잘 안들어 온다고요.
아이고 어른이고 책들 잘 안 읽는 상황에서 결혼식에 밥 대신 책을 돌리면 아마 신문 기사에 나던지,다시는 그 집안 결혼식에 안갈지 아마 둘중의 하나일걸요 ㅜ.ㅜ
 
왜 하지 말라는 거야? - '금지'와 '허용' 사이 청소년을 위한 세상읽기 프로젝트 Why Not? 1
마르크 캉탱 지음, 브뤼노 살라몬 그림, 신성림 옮김 / 개마고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ㆍ인권ㆍ평화ㆍ믿음ㆍ즐거움 모두 없는 한국
 [잠깐 읽기 53] 마르크 캉탱, 《왜 하지 말라는 거야?》



- 책이름 : 왜 하지 말라는 거야?
- 글 : 마르크 캉탱
- 그림 : 브뤼노 살라몬
- 옮긴이 : 신성림
- 펴낸곳 : 개마고원 (2009.7.30.)
- 책값 : 1만 원


 (1) 어른한테도 없고 어린이한테도 없는 인권


 청소년한테는 ‘청소년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어린이한테는 ‘어린이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아기들한테는 ‘아기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여성한테 ‘여성 인권’이 있고, 장애인한테 ‘장애인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인권 가운데 제대로 보듬거나 지키도록 하는 인권은 거의 없는 우리 나라가 아닌가 하고 느끼곤 합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무슨무슨 인권’이라 할 때 ‘무슨무슨’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나 목숨들은 거의 한 번도 제대로 된 권리를 못 누리는 사람들이거나 목숨들이곤 합니다. 길에서 차여 치여 죽는 들짐승 권리를 말한다 할 때에, 자가용을 모는 이들을 비롯해 도로공사 공무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들 목숨한테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하기 좋아 ‘청소년 인권’이고 ‘청소년 최저임금’이지만,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청소년한테 제대로 된 권리를 누리도록 돕거나 이끄는 어른이란 몹시 드뭅니다. ‘청소년 알바 최저임금’은 거의 언제나 ‘청소년 알바 최고임금’으로 머물곤 합니다.


.. 미국에서는 열여섯 살이면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조수석에 어른을 태우고 운전하는 게 아니라 혼자서도 운전을 하지요 … 얼마 전 미국 어느 주에서는 열두 살 된 어린애가 종신금고형을 선고받았대요. 게다가 가석방될 여지도 남겨 두지 않았다나요 ..  (16쪽)


 조금 더 헤아려 봅니다. ‘남성 인권’이나 ‘재벌총수 인권’이나 ‘경찰 인권’이나 ‘기무사 요원 인권’ 같은 말은 쓰지 않습니다. 저 또한 남성입니다만, 남성들이 ‘인권을 짓밟히거나 빼앗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재벌총수가 아주 드물게 법정에 서는 일은 있지만, 죄가 있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몰래 끌어들인 검은돈을 송두리째 빼앗기거나 그동안 노동자한테 제대로 안 준 일삯을 모조리 뱉어내도록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경찰한테도 마땅히 인권이 있어야 합니다만, 경찰한테는 인권보다 ‘특권’이나 ‘법을 넘어서는 권력’이 있어, 우리들 여느 사람들을 함부로 두들겨패거나 붙잡기도 합니다. 경찰들이 시민들 집회를 아예 ‘집회금지’로 못박고 있습니다. 이러한 ‘집회금지’를 법원에서는 ‘경찰이 집회금지를 못박는 일은 옳지 않다’는 판결을 내리지만, 경찰은 ‘옳지 않다’는 판결을 받아도 끝없이 ‘집회금지’를 밀어붙입니다. 헌법으로 집회며 결사며 언론이며 자유라고 적혀 있어도, 우리 나라 경찰은 이러한 헌법 자유를 손쉽게 깔아뭉갭니다.

 요사이 떠도는 ‘기무사 요원 사찰’을 생각해 보아도, 국가권력에 기대거나 빌붙는 이들이 이 땅 여느 사람들을 내리누르는 힘이란, 또 내리누르면서 얻는 콩고물이란 참 대단하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 프랑스에서는 만 6세에서 16세까지 의무적으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육받을 ‘권리’라고 하지 않고 ‘의무’라고 말하지요. 최소한 10년 동안, 모두 합해 대략 1500일 동안 학교에 다닐 의무가 있어요 ..  (20쪽)


 중학교를 다니던 때 학교에서 했던 일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무렵(1988∼1990년) ‘어린이 인권선언’이 우리 나라에도 나왔다고 떠오르는데, 중학생이면 ‘청소년’이지 어린이는 아니지만, ‘어린이 청소년 인권선언’으로 삼아 우리들(중학생)한테도 권리가 있음을 학교 교사들이 깨닫기를 바라면서, 이 인권선언글을 어디에선가 얻어서 전지에 펜으로 또박또박 적어서 학교장한테 겨우 허락을 받아 한 주 동안 건물 들머리에 세워 놓은 적이 있습니다.

 기껏 종이 한 장짜리 인권선언이요, 이런 글을 애써 전지에 적어서 세워 놓아도 교사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외려 히죽히죽 웃으면서 “인권? 웃기지 말아? 니들한테 무슨 인권이 있어?” 하던 교사가 참 많았습니다. 이들은 우리한테 뺨따귀질이나 주먹질이나 몽둥이질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그 교사들 나이는 오늘날 제 나이보다 몇 살 어린 나이인데, 고작 서른 안팎인 젊은 교사들이 무엇 때문에 뿔이 났다고 “오늘 나한테 걸리면 한 놈은 내 손에 죽는다”고 을러대면서, 교단에서 동무녀석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도 주먹질을 멈추지 않곤 했습니다. 밀걸레자루가 여럿 부러지고 동무녀석이 교단에서 고꾸라졌어도 등짝에다가 부러진 밀걸레자루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곤 했습니다. 코앞에서 이런 모습을 거의 날마다 지켜보면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헌병이 우리 독립운동가를 이렇게 때리고 괴롭혔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벌써 그때 일이 스무 해나 지난 일이라니 까마득하다고 느끼는 한편, 그 뒤로 스무 해가 지난 2009년이라 하여도 주먹다짐이나 욕부림은 그치지 않는 굴레가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 같은 주먹다짐이나 욕부림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이들끼리 서로를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새로운 짓거리는 끊임없이 살아나고, 또다른 교실폭력과 학교폭력이 되풀이되지 않느냐 싶습니다.


.. 차를 운전하고 있는 성인의 경우를 한번 볼까요. 그는 몹시 바빠서 다른 운전자들에게 화를 냅니다. 그가 볼 때, 다른 운전자들이 더 빨리 갈 수 있는데도 빨리 운전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그는 마치 자기 약속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듯 자기를 지체하게 만드는 느림보를 마구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 느림보는 단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제한속도를 준수하고 있을 뿐이에요. 다들 똑같은 필요성에 따라 움직이는 건 아니거든요! ..  (60쪽)


 몇몇 교사가 말썽쟁이이기 때문일까요? 몇몇 교사들은 교대에 다닐 때부터 당신 스승한테서 ‘애들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면 말을 잘 듣는다’고 배웠기 때문일까요? 우리 사회에 민주가 튼튼히 뿌리내리고 평화가 아름다이 자리잡으면 이와 같은 주먹다짐은 사라질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주먹다짐이 살아숨쉴 뿐 아니라 영화나 연속극 따위에 자꾸만 그려지는 까닭은, 아무래도 우리 정치판과 사회판과 경제판과 문화판 모두 끝없는 싸움박질과 밥그릇싸움이 피튀기듯 이루어지기 때문일까요?

 예전 같은 부정선거는 없다지만, 정치가 민주와 평화와 통일로 이루어졌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한 표 권리가 있다지만, 사회가 민주와 평화와 통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는 느끼기 힘듭니다.

 ‘함께 하자’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고 ‘하지 말라’는 목소리만 들립니다. 너른 터는 하나둘 사라지면서 주차장과 쇼핑몰이 되어 갑니다(또는 ‘허울좋은 광장’으로 바뀝니다). 아이들이 뛰어놀 골목길이나 운동장이나 마당이 없는 한편, 어른들 또한 마음껏 어우러지거나 얼싸안을 골목길이나 운동장이나 마당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쉴 자리가 없고 어른들 또한 쉴 자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제 어버이나 이웃 어른한테서 세상을 하나하나 배우고 어른들 일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차근차근 배우거나 따라할 틈이 없습니다. 돈벌이 일은 조각조각 갈리고, 돈벌이 일을 하느라 식구들은 서로서로 쪼개집니다.


.. 속임수를 쓰는 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짓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특별한 이야기를 꾸며낼 필요도 없지요 ..  (98쪽)


 요 며칠 인천에서 서울로 일하러 오가면서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동안 서로서로 괴롭겠지만, 서로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옆사람이 짜부가 되건 오징어떡이 되건 몸이 눌리건 발을 밟히건 ‘나까지 전철에 더 타야’ 하고 ‘내가 더 타면 그때부터는 그만’이라는 생각을 저절로 품지 않느냐 싶습니다. 처음부터 서로를 미워하거나 괴롭힐 마음은 아니었을지라도 하루하루 지옥철에 시달리고 길들면서 시나브로 사랑과 믿음이 옅어지거나 스러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서로서로 더 많은 돈을 벌면 그만이요, 더 널리 사랑을 나누거나 더 깊이 믿음을 함께하려는 생각은 못 품지 않느냐 싶습니다.
 







 (2) 프랑스사람이 말하는 《왜 하지 말라는 거야?》


 프랑스 어른이 프랑스 어린이한테 ‘인권이란 무엇인가’를 들려주려고 쓴 책 《왜 하지 말라는 거야?》를 읽습니다. 나라안에서도 나라안 어린이한테 우리네 사람 권리란 무엇인가를 들려주고자 이와 비슷한 책을 더러더러 쓰곤 합니다. 다만, 아직가지 나라안 사람들이 쓰는 ‘제대로 누릴 사람 권리’ 이야기는 겉핥기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속깊이 파고들지 못하며, 간지러운 구석을 긁지 못합니다. 골고루 들여다보지 못하며, 아픈 생채기를 보듬지 못합니다. 이와 견주어 《왜 하지 말라는 거야?》는 간지럽고 아픈 자리를 살며시 건드리면서 퍽 쉽고 슬기롭게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 사람들이 어떤 일을 열심히 금지해 놓고 정작 자기 자신에겐 허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거든요! 간혹 더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전직 장관이 범법행위로 유죄선거를 받았다는 뉴스를 곧잘 접할 거예요. 결국, 금지조항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 자신이 정작 금지조항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거죠 ..  (111∼112쪽)


 오늘날 우리 세상에는 사랑도 자유도 평화도 통일도 믿음도 즐거움도 모두 사라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인권 또한 저절로 사라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너도 나도 외는 말마디, ‘먹고살기 힘들다’와 ‘먹고살기 바쁘다’에 눌리고 밟힙니다. ‘살아남아야 한다’와 ‘살려면 어찌할 수 없다’에 뭉개지고 차입니다.

 우리 어른들 스스로 아이들 앞에서 사랑하면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평화로이 어깨동무하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통일을 꿈꾸지 않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서로서로 믿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즐거운 일과 놀이를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이런 판에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이런 가운데 아이들은 어른들이 읊는 말마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어른들이 몸으로 보여주기로는 형편없거나 보잘것없거나 얄딱구리한데,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이들한테는 영어 동화책이나 영어 교재가 아닌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책을 쥐어 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이 책을 쥐어 주기 앞서, 우리 어른들부터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책을 곰곰이 읽고 되새기고 톺아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책을 쥐어 주고픈 어른들은, 어른들 스스로 먼저 좋은 책을 찾아 읽고 삭이고 받아들이면서 좋은 삶을 일구어야지 싶습니다.


.. 안타깝게도 어떤 것이 금지인지 검열인지 종종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검열관들 쪽에서, 그건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거라고 주장하면서 일부러 경계를 흐려 놓는 경우도 많지요 ..  (137쪽)


 그런데, 《왜 하지 말라는 거야?》라는 책은 퍽 아쉽습니다. 틀림없이 간지러운 곳을 긁는 책이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제 간지러움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김없이 생채기를 달래는 책이요 아픈 구석을 찌르는 책이지만, 제 생채기에서는 고름이 철철 흐르고 제 아픈 구석에는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습니다.

 프랑스하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너무 벌어져 있기 때문일까요. 한국에서는 프랑스에서 이루어지는 ‘인권’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프랑스 책은 퍽 높은 눈높이에서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길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는 아주 밑바닥에서 끝없이 뒹굴고만 있기 때문일까요.

 애써 좋은 책 하나를 우리 말로 옮겨내어 이 땅 아이들한테 좋은 마음밥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른들은 왜 우리 터전에서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헤아리면서 아이들한테 참다이 마음밥이 되고 슬기롭고 따숩게 마음동무가 될 책을 우리 땀을 흘리면서 빚어내지 못할까요? 왜 이런 일에는 깊이 힘을 쏟지 못할까요? 이러한 책이 돈이 되든 안 되든, 이러한 책을 펴내어 잘 팔리든 안 팔리든, 참말 한국땅에 꼭 하나쯤 있어야 할 ‘맑고 밝고 환하고 고운 권리 이야기’를 신나게 펼칠 어른들이란 도무지 찾아보아서는 안 될 노릇인가요?

 우리가 우리 자유를 지키자면 우리 자유를 있는 힘껏 부리며 자유로운 이야기를 담는 책을 빚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사람된 권리를 누리자면 우리 사람된 권리를 용쓰며 뽑아내어 사람된 권리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일구어야 합니다. 바라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고, 참되게 바라는 매무새를 이어가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으며, 참되게 바라는 매무새대로 우리 삶을 단단히 붙잡고 부둥켜안도 부대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4342.8.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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