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빨래


 한가위를 맞이해서 네 식구가 찾아온 할머니·할아버지 댁에서 할머니 일을 아주 조금만 거들면서 둘째 갓난쟁이 기저귀를 빨거나 품에 안아 어르느라 바쁘다. 첫째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하는 말은커녕 할머니가 하는 말조차 거의 듣지 않으면서 이리저리 뛰놀기만 한다. 한가위에도 빗줄기는 그치지 않아 빨래가 아주 안 마른다. 온 집안에 둘째 천기저귀가 가득 널린다. 스무 장 가까이 널렸을 때에 도무지 안 되겠구나 싶어 다리미를 든다. 다리미를 들어 석 장쯤 말릴 때에 새 오줌기저귀가 나온다. 이럭저럭 다섯 장을 다리미로 말리는 동안 오줌기저귀가 두 장 나온다. 아득한 옛날까지는 아닐 내 어머니 젊은 날, 한가위날이나 설날이나 제삿날에 어린 아이들 돌보기와 갓난쟁이 기저귀 빨래에다가 집일이랑 숱한 먹을거리 장만하기를 어떻게 한꺼번에 치를 수 있었을까. 아버지들 가운데 이 숱한 일 가운데 한 가지라도 도운 사람이 있었을까. 어머니들만 이 숱한 일을 홀로 치러야 했을까. 어머니들끼리 치를 이 숱한 일을 어머니들이 서로서로 조금씩 돕고 거들면서 살아냈을까. 아버지들은 이 숱한 일 가운데 어느 한 가지조차 제대로 건사하거나 맡거나 나누지 않으면서 무슨 거룩한 역사나 정치나 문화나 예술이나 사회나 경제나 교육이나 철학을 세웠을까. (4344.9.1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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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1.8.26.
 : 새 사진기 들고 첫 마실



- 그동안 목걸이처럼 쓰던 무겁고 큰 사진기를 내려놓는다. 새 보금자리로 옮길 때부터 옆지기하고 아이가 쓰도록 마련한 자그맣고 가벼운 사진기를 목에 건다. 새로 장만한 사진기는 목에 걸든 손에 쥐든 무게를 느끼기 어렵다. 참 가볍고 작다. 참 가볍고 작은데, 화소수는 내가 여러 해째 쓰는 무겁고 큰 사진기하고 엇비슷하다. 어느 모로 본다면, 자그맣고 가벼운 디지털사진기는 커다랗고 무거운 디지털사진기보다 화소수가 높다.

- 자그맣고 가벼운 사진기는 완전수동으로 놓고 빛느낌이나 빛깔이나 그림자를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웬만한 자리에서는 자동으로 찍어야 한다. 웬만한 자리에서는 자동으로 불을 터뜨리거나 감도를 높이기에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 잘 안 나온다. 그러나, 이 사진기를 목에 걸고 언덕을 넘을 때에는 목이 안 아프고 몸이 덜 고단하다.

- 읍내 찐빵집에 들러 만두랑 찐빵을 산다. 아이가 찐빵집 할매와 할배 앞에서 까르르 웃으면서 논다. 둘째는 갓난쟁이라 하지만 워낙 얌전한데, 첫째는 갓난쟁이 때부터 다른 사람한테 덥석 잘 안기고 잘 웃으며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크면 클수록 귀여움을 더 많이 받는다.

- 옆지기가 먹고 싶다 해서 피자를 산다. 몇 번 들르지 않았으나 그동안 가던 피자집은 ‘맛은 있으나 마음씨가 차가웁’기에 내키지 않는다. 오늘 새로 간 피자집은 ‘맛은 떨어지지만 마음씨가 차가웁지 않’다. 나는 맛이 더 나은 데로 가지 못한다. 애쓰고 힘써도 맛을 더 낫게 하지 못할는지 모르지만, 착하거나 따스히 일하는 사람들 가게에서 물건이나 먹을거리를 사고 싶다. 나는 돈을 더 벌 수 있는 일자리보다 집식구하고 더 사랑스레 어울릴 겨를을 낼 수 있는 일자리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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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1.8.13.
 : 내장 터진 개구리와 빗길


- 장날은 어제 읍내로 나오려 했지만, 비가 너무 쏟아지는 바람에 길을 나서지 못했다. 13일인 오늘도 낮부터 비가 내린다고 했지만 아침에는 비가 멎었기에 아이와 함께 읍내로 마실하기로 한다. 오늘 어떤 먹을거리를 장만해야 하는가를 수첩에 적는다. 당근, 양배추, 마늘, 무, 양파, 오이.

- 아이는 오랜만에 자전거를 탄다며 좋아한다. 아이를 수레에 앉히고 띠를 채우는데, 띠에 핀 곰팡이가 보인다. 비가 끝없이 내리니 이 띠에까지 곰팡이가 앉는가.

- 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읍내로 가는 오르막에서 신나게 땀흘리며 오르다가 개구리 한 마리를 본다. 개구리는 내장이 다 튀어나왔고 머리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자동차에 치이고 밟혀 죽은 개구리 주검을 지나친다. 조금 가다가 자전거를 돌려 개구리 주검 자리로 돌아온다. 딱하게 죽은 개구리한테 고개를 숙인 다음 사진을 찍는다. 수레에 앉은 아이가 고개를 내밀며 죽은 개구리를 바라본다.

- 읍내에 닿을 무렵 빗방울이 듣는다. 우리 집에도 빗방울이 들을까. 집에 전화해서 마당에 내놓은 빨래를 걷으라고 이야기한다.

- 가게에 들러 오늘 장만할 먹을거리를 장만해서 가방에 담는다. 자전거집에 들러 내 자전거 뒷바퀴 옆자리에 깃대꽂이를 단다. 깆대꽂이에 구멍을 내어 뒷바퀴 버팀쇠 한쪽에 붙인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빗줄기가 굵어진다. 수레 안쪽에 물이 튀지 않도록 종이상자 하나를 펼쳐서 깐다. 아이한테 비옷을 입으라 한다. 덮개를 닫는다. 나도 비옷을 입는다. 빗줄기가 아주 거세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들이붓는다. 들이붓는 빗줄기를 가르며 달리자니 죽을맛이다. 아이는 수레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할까. 덮개를 후려치는 무시무시한 빗줄기를 아이는 어떻게 느낄까.

- 빗줄기는 숯고개 오르막까지 가늘어지지 않는다. 숯고개 오르막에 닿을 무렵 빗줄기가 잦아든다. 참 사람을 애먹이는 비로군요, 하고 생각하다가는, 그래도 이렇게 고갯마루부터는 비가 그쳤으니 고맙군요, 하고 인사를 한다.

- 아이는 고갯마루에 닿을 무렵 잠든다. 덮개를 덮은 채 내리막을 달린다. 비탈논에서 넘치는 물이 내리막길을 적신다. 흐르는 물이 자전거로 쏟아진다. 집에 닿으니 온몸은 비와 땀으로 범벅이고, 아이는 새근새근 잘 잔다. 자는 아이 비옷을 살며시 벗기고 살살 안고 자리에 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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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1.8.10.
 : 사진기는 살짝 내려놓고



- 읍내로 후다닥 볼일을 보러 나가는 길. 아이는 집에서 어머니하고 영화를 보기로 하고 아버지 혼자 나선다. 아버지 혼자 길을 나설 때에도 으레 사진기를 챙기지만, 비가 하도 끊이지 않기에 오늘은 사진기를 내려놓고 나선다. 아이를 수레에 태우지 않는데다가 사진기까지 집에 내려놓고 나서는 마실길은 참 따분하다.

- 오가는 자동차가 거의 없는 시골길을 달리는데, 이런 길을 달리면서도 아주 가끔 보는 얄궂은 자동차가 꼭 있다. 오가는 자동차가 거의 없다지만, 길가에 함부로 대는 자동차들. 이들은 왜 아무 데나 자동차를 댈까. 읍내에서든 시내에서든 똑같은데,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저희 볼일을 보자며 아무 데나 차를 세운다. 자동차가 한 줄로 죽 섰어도 옆에다가 새로 차를 멈춘다. 뒤에서 지나갈 차가 지나가지 못하게 길을 막으면서 저희 볼일을 버젓이 본다. 무슨 마음일까. 무슨 생각일까. 어떻게 이런 못된 버릇이 들었을까. 왜 이런 못난 매무새로 살아갈까.

- 길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를 본다. 언제나 개미를 본다. 자그마한 벌레가 내 앞을 볼볼볼 기어갈 때면 얼른 뒷거울을 보며 뒤따르는 자동차가 있는가를 살핀다. 내 자전거 바퀴가 벌레를 밟지 않게끔 요리조리 비껴 달린다.

- 읍내를 다녀오는 그닥 길지 않은 시골길에서 수많은 주검을 늘 보아야 한다. 어떠한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죽음이요, 어떠한 사람도, 환경운동 일꾼도, 진보 지식인도, 우익인사도 헤아리지 않는 죽음이다. 길바닥 개미와 길바닥 나비를 바라보는 내 자전거는 바보스럽거나 어리석은 자전거일까.

- 길은 자꾸 넓어진다. 길은 끝없이 늘어난다. 사람이 사람다이 오갈 길은 좀처럼 늘지 않는데다가, 사람이 사람다이 오가던 길은 이 옆을 싱싱 달리는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가스 때문에 숨이 막힌다.

- 읍내에서 몇 가지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우체국을 들르고 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끔찍한 사람들을 겪다. 이들은 아무런 자동차가 오가지 않는 호젓하며 고즈넉한 시골길에서 시끄러이 빵빵대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니, 이렇게 스쳐 지나가면서 담뱃재를 탁탁 턴다. 너무 어처구니없지만, 막말이나 거친 짓을 하고 싶지 않지만, 오른손을 들어 가운뎃손가락을 쭉 뻗으며 앞으로 휘젓는다. 이들이 내 몸짓을 볼 일은 없겠지. 이들은 어디에서나 이렇게 살겠지. 부디, 사람 치지 말고 멧짐승 다치지 말면서 자동차를 몰기를 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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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1.7.30.
 : 자전거쪽지 2011.7.30.


- 내 자전거는 아이를 태우고 수박을 싣고는 멧부리를 넘는다. 아이는 수레에 앉아 노래를 부르며, 아버지는 오르막에서 땀을 비처럼 쏟으면서 멧길을 달린다.

- 아이야, 즐겁지? 그래, 네가 즐거웁도록 이렇게 자전거를 몰아야지. 아버지는 너랑 길을 나서기 앞서 둘째 기저귀 빨래를 남김없이 해 놓는다. 너와 읍내를 다녀온 다음에는 너를 씻기거나 너를 재운 다음 네 옷가지하고 아버지 옷가지에다가 이동안 쌓인 동생 기저귀를 함께 빨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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