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 글쓰기


 요 한 달 사이, 자원봉사로 글을 써서 보내던 지역 누리신문에 더는 글을 보내지 않는다. 애써 글을 써서 보내도 제때 제대로 싣지 않고 쌓기만 해서, 나로서는 도무지 힘을 낼 수 없더라. 글삯을 안 받고 자원봉사로 글을 써서 보내는 마음을 모르기 때문일까.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글을 쓰는 사람이 글 한 줄에 얼마나 땀을 들여야 하는가를 거의 모르거나 아예 모른다. 손수 밥을 지어 차리고 치우지 않는 사람은, 누군가 밥을 해서 차리는 일이 얼마나 품을 많이 들이고 겨를을 많이 바쳐야 하는가를 거의 모르거나 아예 모른다.

 따지고 보면, 밥은, 먹을 사람이 언제나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아나스타시아처럼 타이가숲에서 스스로 얻을 수 있고, 시골 흙일꾼 할매 할배처럼 구부정한 허리로 일흔이나 여든이나 아흔 나이에도 손수 심고 손수 거두어 손수 차려 먹을 수 있다. 참말, 밥은 스스로 일구고 스스로 거두어 스스로 차려야 한다. 스스로 이루지 않는 밥이란 누구한테나 참다이 밥 구실을 하지 못한다.

 어딘가 갈 때에도 스스로 가야 한다. 스스로 두 다리로 걷거나 스스로 자전거를 몰아야 한다. 자가용을 몰거나 버스·전철을 타서는 안 된다. 스스로 두 다리로 걷거나 스스로 자전거를 타야 한다. 몸으로 겪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몸으로 겪는 일’이 어떠한가를 깨달을 수 없다.

 글을 쓰려면 삶이 있어야 한다. 글을 쓰기 앞서 삶을 일구어야 한다. 글줄에는 글쓴이 온삶이 스며든다. 글쓴이가 익히거나 배우거나 받아들인 앎조각이 글줄에 서리기도 한다. 아마, 오늘날 웬만한 사람들은 앎조각이라 하는 지식·정보를 더 얻으려고 책을 장만하거나 읽으리라. 참말, 앎조각을 더 뽐내거나 선보이는 글이 몹시 많다.

 그러나, 나는 앎조각을 드러내는 글이 아주 싫다. 아주 못마땅하다. 아주 안 내킨다. 나는 앎조각 하나조차 밝히지 않는 글이 좋다. 앎조각 아닌 삶자락 들려주는 글이 반갑다. 앎조각 다스리는 따사로운 사랑과 꿈을 이야기하는 글이 즐겁다.

 글은 사랑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살아내는 사랑을 담는 글일 수밖에 없다.

 글은 꿈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하루하루 시나브로 이루는 꿈인 글일 수밖에 없다.

 자원봉사 글쓰기를 그만둔 한 달 사이, 똑같은 글을 다른 곳에 똑같이 올리느라 들이는 품이 사라진다. 이제는 애먼 품을 덜 들여도 되기 때문인지, 내 꿈과 내 사랑을 소담스레 싣는 글을 홀가분하게 한 꼭지라도 더 쓸 틈을 얻는다. 이제부터 굳이 자원봉사 글쓰기는 하지 말자고 생각한다. 자원봉사로 쓴 글을 그야말로 고맙게 여기거나 반가이 맞아들이는 곳이 아니라면 자원봉사 글쓰기를 하지 말자. 돈이 없다느니 살림이 어렵다느니 하는 이야기에 홀리지 말자. 글을 쓰는 사람은 굶어죽어도 되니까 자원봉사 글쓰기를 바랄까.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 나날을 누리면서 이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한때가 좋다. (4344.11.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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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 타는 마음


 자전거를 타면서 찻삯 들 걱정이 없어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참 자전거를 달려 볼일을 다 볼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등줄기로 흐르는 땀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을 때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늘 하루 바깥 볼일을 보면서 돈을 어디에 얼마나 썼나 돌아볼 때에도 깨닫지 못합니다. 숨을 돌리고 밥을 먹고 아이를 씻기고 아이를 재우고 새벽녘 조용히 일어나 글쓰기를 할 무렵 시나브로 생각하면서 깨닫습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면에 다녀오자면 찻삯으로 1300원을 내던가, 잘 모르겠습니다. 읍에 나갈 때에는 군내버스 찻삯이 1500원인데 면까지 가면서 버스를 타지는 않으니 참 모르겠습니다. 면에 나갈 때에는 늘 자전거만 탔어요.

 면에서 택시를 타고 동백마을 시골집으로 돌아오자면 4000원을 치릅니다. 시골집과 도화면 사이는 2.1킬로미터. 네 살 아이와 아주 천천히 동네마실 하며 걸어갔더니 한 시간 십 분 걸립니다. 이 길을 자전거로 슬금슬금 달리면, 하늘하늘 에돌아 달려도 십 분이면 너끈합니다. 1킬로미터를 5분에 달리는 셈이라면 그야말로 아주 천천히 달리는 노릇일 테니까요.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 두발자전거에 탈 나이가 된다면, 1킬로미터를 10분에 걸쳐 달려야 알맞겠지요. 앞으로 예닐곱 해쯤 뒤, 네 식구가 자전거 넉 대를 저마다 신나게 타고 면내마실을 할 수 있다면, 참 볼 만하면서 재미나겠구나 싶습니다.

 논둑길을 달릴 수 있고, 멧골길을 달려도 됩니다. 마을길을 거친다든지 바닷가길을 달려도 좋아요. 자전거마다 깃발 하나씩 꽂아 멀리서 자동차가 쉬 알아보도록 합니다. 무리지은 자전거를 보는 자동차는 원 어디에서 예까지 자전거마실을 나왔나 궁금해서 들여다볼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시골마을 시골사람으로서 시골자전거를 탈 뿐인걸요. 우리는 네 식구 모두 시골바람 맞고 시골햇살 누리며 자전거를 즐길 뿐인걸요.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저희 아버지 자전거수레를 더는 탈 수 없을 때에는 아버지 자전거에 달린 수레는 짐바구니 노릇을 합니다. 네 식구 옷가지와 먹을거리를 알뜰히 담아 네 식구 홀가분히 이웃 군이나 시에 마실을 떠날 수 있어요. 자전거를 몰며 우리 나라 한 바퀴 돌 수 있어요. 녹동으로 자전거를 몰아 배로 갈아탄 다음 제주섬 휘휘 둘러보고 나서 우리 시골집으로 돌아올 수 있어요.

 함께 움직이고 함께 쉽니다. 함께 바라보고 함께 느낍니다. 함께 웃고 떠듭니다. 함께 힘들고 함께 고단합니다. 함께 밥먹고 함께 이야기꽃 피웁니다. (4344.11.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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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마음


 하루하루 살아가며 가장 따사로이 보듬을 마음이라면 사랑하는 마음일 텐데, 어쩌면 나는 어느 마음보다 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장 잊거나 잃은 채 지냈구나 싶어요. 사랑받는 삶이어도 사랑받는 줄 느끼지 못하고, 사랑받는 삶이면서 사랑하는 삶을 일구지 못했구나 싶어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미는 손길일 때에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다듬는 손길일 때에 싫어할 풀이나 나무는 없어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얼싸안는 손길일 때에 거리끼는 어린이는 없어요.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글을 써요. 사랑하는 마음이라서 책을 읽어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요. 사랑하는 마음을 실어 춤을 춰요. 사랑하는 마음 그대로 밥을 짓고 옷을 지으며 집을 지어요.

 나는 온통 너른 사랑으로 이루어졌어요. 내 피와 살부터 내 꿈과 넋 모두 사랑이 가득해요. 그렇지만 이제껏 이 사랑을 오롯이 깨닫거나 느끼려 하지 않았어요. 바보스럽지만 바보스러운지 느끼지 않고 바보스럽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사진기를 들어 옆지기랑 아이들을 들여다보면서 나부터 사랑이 아니고는 우리 살붙이를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줄 느껴요. 붓을 들어 옆지기랑 아이들과 부대끼는 나날 이야기를 글로 적바림하려 할 때마다 사랑이 아니고는 내 살림집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구나 싶어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목숨입니다.

 사랑하는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책입니다. 사랑하는 밥입니다. 사랑하는 바느질입니다. 사랑하는 이불입니다. 사랑하는 머리결입니다.

 글월 하나 띄우면서 내 고운 사랑을 실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쪽글 하나 적어서 내밀 때에 내 빛나는 사랑을 담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글줄 하나 쓸 적마다 내 맑은 사랑을 녹일 수 있어야겠습니다. 좋은 사랑으로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으로 웃음꽃 피우고 싶습니다. (4344.1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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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름과 글쓰기


 인천에서 옆지기와 만나 함께 살아가면서 옆지기가 “시골에서 살자.” 하고 이야기했을 때에 “우리가 갈 만한 시골은 없으리라.” 하고만 대꾸했다. 막상 우리가 예쁘게 살아갈 시골을 찾아볼 엄두를 내지 않았다. 여러 해에 걸쳐 옆지기한테서 말을 듣고 내 발자국을 더듬어 본다. “우리가 갈 만한 시골이 없다”기보다 “우리가 살아갈 시골을 생각하지 않고 바라지 않으며 꿈꾸지 않으니 느끼거나 찾거나 알지 못했을” 뿐이라고 깨닫는다.

 지난여름 인천을 떠나 충청도 멧골자락으로 옮기면서 “시골에서는 기름을 쓸 수밖에 없어요. 기름으로 불을 때야 해요.” 하는 말밖에 못했다. 그렇지만, 참말 기름을 비싼값 치러 장만한 다음 방에 넣을 불로 때야 할까. 나무를 해서 방바닥에 불을 넣을 수는 없는가. 기름도 나무도 아닌 다른 땔감을 마련하거나 찾을 수는 없는가. 나 스스로 생각하고 바라며 꿈꾼다면 틀림없이 찾으리라. 나부터 더 좋아하면서 파고든다면 모를 수 없고 못 찾을 수 없으리라.

 나와 옆지기와 두 아이가 예쁘게 살아갈 보금자리가 되도록 일구자고 생각하고 바라며 꿈꾼다면, 나는 참말 이 집 살림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참 아직 멀고 모자라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 하는 대목을 옳게 느끼거나 헤아리거나 살피지 못한다.

 밥찌꺼기 그러모아 쏟은 자리를 이레 만인가 겨우 땅을 파서 흙으로 덮는다. 왜 나는 처음부터 구덩이를 파서 묻을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아니, 생각조차 없었고, 스스로 무언지 모를 일에 쫓기듯 애먼 데에 바쁘며 엉뚱하게 힘을 쏟았겠지. 오늘 하루 할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잠들어야 한다. 이듬날 하루 할 일을 가만히 꿈꾸면서 잠들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식구랑 하루 동안 어떤 삶을 누릴까 하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어야 한다. 이제부터 천천히 걷자. 물골내기와 울쌓기를 돌아보자. 도서관 책들 곰팡이 먹지 않는 길을 헤아리자. 집에서 스스로 책꽂이를 짜든 누군가한테 맡겨서 짜든, 그저 책을 때려꽂는 책꽂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기쁘게 누릴 만한 책꽂이가 되도록 생각하자. 집에 들일 옷장은 어떤 크기 어떤 나무일 때에 오래오래 사랑할 만한가를 살피자. 부엌에 놓을 부엌상은 어떤 크기 어떤 길이 어떤 높이로 마련하면 좋을까를 가늠하자. 아이가 아침에 깨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함께 무슨 놀이를 누리면서 지낼까를 곱씹자. 글쓰기로 살아가려 하는 나라면, 나는 어떤 글을 내 기쁨과 웃음을 담아 내 삶을 빛내는 길을 걸으려 하는가를 참말 똑똑히 다스리자. (4344.1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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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일어나서 빨래하기


 새벽에 일어나서 빨래를 해야 한다. 새벽에 빨래를 한두 차례 하지 않으면 아침에 너무 바쁘다. 아침 일찌감치 밥차림을 헤아려야 하고 이부자리 개고 뭐를 하노라면 한두 시간 아닌 서너 시간 홀라당 지나간다. 새벽에 둘째 오줌기저귀를 갈거나 보일러를 한 시간쯤 돌리고 끌 무렵 기지개 켜고 일어나 빨래를 해 놓아야 비로소 아침에 느긋하다.

 고요히 잠든 마을 한켠에서 새벽빨래를 하며 새벽소리를 듣는다. 빨래를 비비고 헹구는 복작복작 소리를 낸다. 새까만 바깥을 바라본다. 다 마친 빨래를 한손에 걸치고 어두운 방을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다 마른 빨래는 방바닥에 미리 깐다. 빨래는 따뜻하게 올라오는 기운을 받아들인다. 옷걸이에 기저귀랑 옷가지를 하나씩 건다. 방마다 알맞게 나누어 넌다. 글조각 조금 매만지다가, 방바닥에 드러누워 허리를 펴다가, 다시금 기지개를 켠 다음 빨래를 갠다.

 밤빨래나 새벽빨래는 나 혼자 아무도 몰래 하는 집일. 옆지기도 아이도 모른다. 어쩌면 옆지기나 아이는 알아챌는지 모른다. 이부자리 한쪽에 있어야 할 아버지가 없으니까. 뒹굴며 자는 아이가 아버지 쪽으로 뒹굴며 발을 뻗거나 손을 휘두르며 아무것도 채이거나 만져지지 않으니까.

 아이가 뒹구는 소리가 나면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 깃을 여민다. 빨래를 다 개고 나면 바야흐로 홀가분하게 글조각 붙잡을 수 있다.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 나한테 주어진 아주 고마운 두 시간. 새벽 네 시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 바지런히 글을 빚는다. 새벽 한 시나 두 시에 빨래를 했으면 새벽 너덧 시 무렵까지 글조각을 붙잡다가 졸음에 겨워 드러눕는다. (4344.1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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