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말하는 글쓰기

 


  사진을 말하는 글을 쓰며 생각한다. 내 둘레뿐 아니라 이 나라, 나아가 지구별에서 ‘사진을 말하는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너무 없기 때문에 내가 이 글을 쓰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한다.


  사진을 말하는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너무 없다’는 말은 옳지 않다. 꽤 많다. 참 많다. 그러나, 내가 바라거나 기다리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사진을 말하는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부터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사진을 찍는지, 그냥 사진기를 들며 멋을 부리려 하는지 돈을 벌려 하는지 알쏭달쏭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사진기를 든 사람들뿐인가. 붓을 들거나 연필을 든 사람 가운데에도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고서 붓을 들거나 연필을 드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꼭 책을 내야 하지 않고, 굳이 책을 읽어야 하지 않다. 삶을 느끼면 넉넉하고, 삶을 읽으면 아름답다. 삶을 헤아리지 않는 가슴으로는 글 한 줄에 사랑을 싣지 못한다. 삶을 누리지 못하는 넋으로는 그림 한 장에 사랑을 꽃피우지 못한다. 삶을 나누지 못하는 몸가짐으로는 사진 한 장에 사랑을 그리지 못한다.


  나는 ‘사진을 말하는 글쓰기’를 한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을 읽는 사람이든, 부디 즐겁게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예쁘게 깨닫기를 꿈꾸면서 글을 쓴다. 내 글은 사진을 말하면서,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좋아할 꿈을 말한다. 내 글은 사진과 책을 말하면서, 사진과 책을 손에 쥐는 사람들이 이룰 이야기를 말한다.


  빗소리를 들으며 글을 쓴다. 내 글에는 빗소리가 담긴다. 햇살을 쬐면서 글을 쓴다. 내 글에는 햇살이 깃든다. 두 아이 놀며 자지러지는 웃음을 느낀다. 내 글에는 아이들 웃음이 스민다. 옆지기가 마련한 좋은 밥을 먹는다. 내 글에는 좋은 밤내음이 풍긴다.


  글도 그림도 노래도 춤도 모두 사랑 어린 이야기 그득그득 넘실거리기를 꿈꾼다. 사진 한 장마다 고운 사랑이 함초롬히 피어날 수 있기를 꿈꾼다. (4345.3.3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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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3-30 17:29   좋아요 0 | URL
"삶을 헤아리지 않는 가슴으로는 글 한 줄에 사랑을 싣지 못한다. " - 아, 이 글에 찔리고 가요. ㅋㅋ 새겨 두겠습니다.

숲노래 2012-03-30 21:44   좋아요 0 | URL
그저 이 한 가지만 있으면
누구나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요.
 


 빨래기계 이레

 


  집에 빨래기계를 들인 지 이레가 지난다. 1995년 4월 5일부터 2012년 3월 한복판까지 빨래기계를 안 쓰며 살았다. 내 어버이와 함께 살던 집에서 제금난 뒤로는, 기계를 써서 내 옷가지를 빨래한 적은 한 차례조차 없다. 군대에서는 영 도 밑으로 이삼십 도씩 떨어지는 날씨일 때조차 얼음을 녹여 손빨래를 해야 했다. 이제 손빨래 아닌 기계빨래를 하니 느낌이 남다르다. 맨 처음에는 내 몸이 게을러지나 하고 생각한다. 이듬날에는 퍽 홀가분하구나 싶으면서 어딘가 허전하다. 사흘째에는 나 스스로 빨래거리한테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마음을 빼앗겼구나 하고 느낀다. 나흘째에는 기계가 손보다 물기를 더 잘 짜고 사람 몸뚱이를 덜 쓰도록 돕지만, 이만큼 옷가지를 더 세게 헹구거나 짜기에, 기저귀 실올이 꽤 많이 풀린다고 느낀다. 가장 적게 헹구고 짜도록 맞추었지만, 이렇게 해도 기계를 돌리고 나서 꺼낼 때 살피면 기저귀 실올이 새로 자꾸 풀린다.


  빨래기계를 쓸 수 있으니, 이제 옆지기가 아침에 나보다 먼저 기계에 전기를 넣어 빨래감을 맡길 수 있기도 하다. 내가 손으로 짜서 털 때보다 물기가 적으니 기저귀랑 옷가지는 햇살을 쬐며 더 일찍 마른다. 손으로 빨래하던 나날에는 머리 감는 물로 가장 지저분한 옷을 헹구고, 아이들 씻긴 물로 아이들 옷가지를 헹구곤 했는데, 이런저런 버릇도 조금씩 바꾸어야겠다고 느낀다. 똥기저귀나 속옷이나 양말은 손으로 비빔질하면 아주 금세 끝나고 한결 깔끔하다. 빨래기계를 쓴대서 손빨래를 아예 안 할 일이란 없다. 그러나, 빨래 일거리를 기계한테 꽤 많이 맡기면서, 집에서 아이하고 눈을 마주하는 겨를이 더 늘고, 몸을 차분히 쉬면서 가만히 생각을 다스리는 겨를이 한결 늘기도 한다. 차츰 따스해지는 날씨를 느끼며 섬돌에 아이들이랑 나란히 앉아 해바라기를 할 수 있기도 하다. (4345.3.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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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하나 쓰기란

 


  내 마음속에서 곱게 피어나는 사랑이 하나 있으면, 글 하나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내 마음껏 홀가분하게 쓸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곱게 피어나는 사랑이 아무것 없다면, 아무리 고즈넉하거나 한갓진 데에서라도 글 한 줄조차 쓸 수 없습니다. (4345.3.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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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읍내 골목고양이


 읍내로 마실을 나온다. 집으로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며 골목을 조금 걷는다. 읍내사람 발길이 퍽 뜸한 샛골목에 고양이 한 마리 천천히 걸어간다. 곳곳에 놓인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이를 찾는데, 자꾸 눈치를 본다. 아이더러 더 따라가지 말고 가만히 지켜보자고 이야기한다. (4345.3.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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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3-26 13:07   좋아요 0 | URL
이 사진 너무 맘에 드네요.... 고즈넉하니,,,

숲노래 2012-03-27 05:58   좋아요 0 | URL
지난달에 찍은 사진인데
어제 겨우 갈무리해서
올렸어요 @.@
 
 전출처 : 가연님의 "럭키짱에서 삶글에 이르기까지."

 어느 쪽으로 적든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는 '글쓴이'와 '말하는이' 마음에 따라 달라요. 어느 마음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느냐에 따라, 아주 쉬운 말글을 쓰더라도 '문자자랑질'이 돼요. 이를테면 '톺아보다'라는 낱말도 문자자랑질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낱말을 처음 듣던 예전에는 문자자랑질이라고 느껴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낱말을 지식인 아닌 여느 흙일꾼 할아버지가 입으로 읊는 말을 한 번 들은 다음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꼭 흙일꾼 할아버지가 이 낱말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자리 어느 흐름에 맞추어 글을 쓰느냐에 따라 느낌과 결은 사뭇 달라져요. 문학을 이야기하는 글을 쓸 때에는 '삶글'이라는 낱말을 아직 사람들 앞에서 쓰기 힘들어요. 이때에는 그냥 수필과 산문이라고 처음 이야기하면서, 나중에 사이사이 '삶글'이라는 낱말을 곁들일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시나브로 '수필 = 산문 = 삶글'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요사이에는 '에세이'를 넘어 '르포'라는 말까지 들어와요. 수필이든 산문이든 자유롭게 쓰는 글이지만, 자꾸 영어를 끼워맞추면서 글 테두리를 넓힌다고 해요.

 

 이런 흐름에서는 한국말로 또 새로운 말을 빚을 수 있어야겠지요. 제가 이 책(뿌리깊은 글쓰기)에서 '글쓴이가 밝힌 풀이글이나 이야기'가 '대안'이나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되풀이해서 말하는 까닭은, 이 책을 교과서로 삼지 말고, 스스로 말밭을 일구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좋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삶이 달라, 스스로 좋아하며 받아들이는 말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다 다른 결을 스스로 살피면서 날마다 내 넋을 북돋우면 스스로 어느 자리에 어떤 말을 넣을 때에 서로 즐거운가를 깨달을 수 있어요. 이 낱말은 써야 하고 저 낱말은 안 써야 한다는 틀이란 없습니다. 이런 틀이 있다면 굴레가 될 뿐이에요.

 

 님이 쓰신 이 글에서 한 가지를 짚어 보면, "-하고 계시다"라고 적은 대목이 있는데, "-하고 있다" 아닌 '계시다'를 넣는다고 높임말이 되지 않아요. 틀린 말법이랍니다. 더구나, "-하고 있다" 또한 영어 '-ing', 이른바 현재진행형을 일본사람이 '-중(中)'으로 번역하면서, 이 말투가 한국말에 "-하고 있다"로 탈바꿈했어요. 그러니까, '계시다'를 '있다'로 고쳐야 알맞지만, 더 밑을 살피면 '있다'를 넣은 "-하고 있다"부터 잘못 쓴 말이에요. "적혀 있지요"부터 틀리게 쓴 글입니다. "적혔지요"라고만 적어야 올발라요.

 

 그러나, 올바르게 쓰든 잘못 쓰든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어떻게 쓰든 '내 마음을 얼마나 잘 드러내거나 나누려 하느냐'가 대수롭습니다. 대수로운 대목을 살펴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비로소 말을 새로 익히며 글로 사랑꽃을 피우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쓴 책에 실린 이야기를 '동의하든 동의 안 하든' 아무것도 대단하지 않아요. 옳은 대목이 없고 그른 대목이 없어요. 동의하느냐 동의 안 하느냐로, 책을 따져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스스로 아름답게 돌볼 내 말삶을 깨달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도록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으니, 이 대목을 짚지 못하면, 이 책을 읽었어도 안 읽은 셈이라고 할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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