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통하는 청소년 인권 학교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6
홍세화 외 지음, 인권연대 기획 / 철수와영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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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27



학교에 갇힌 푸름이한테 인권이란

― 10대와 통하는 청소년 인권 학교

 홍세화·오인연·안수찬·조광제·한재훈·오창익

 인권연대 기획

 철수와영희 펴냄, 2014.10.9.



  오늘날 아이들은 학교에 갇힙니다. 학교에서 벗어날라 치면 학원에 갇힙니다. 학원에서 벗어날라 치면 컴퓨터에 갇힙니다. 컴퓨터에서 벗어날라 치면 아파트 그득그득한 도시에 갇힙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갈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학교와 학원과 피시방이 아니면 도무지 깃들 만한 곳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쉴 데가 없어요. 아이들이 갈 만한 공원은 어디에 있나요? 공원이라 할 만한 데가 도시에서 몇 군데나 있나요?


  어른들이 가는 술집은 도시이든 시골이든 아주 많습니다. 어른들이 가는 찻집이나 옷집이나 밥집도 도시나 시골에 아주 많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갈 곳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돈을 마음껏 쓸 수 없으니 가게에 쉬 들어가기도 어렵습니다. 기껏 아이들이 가는 곳은 편의점입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아이들은 편의점이나 롯데리아 같은 데 빼고는 다리를 쉴 수 없습니다. 도시라는 데에는 다리를 쉴 걸상도 없고, 길바닥은 어른들이 술에 절어 왝왝 뱉은 것들이 곳곳에 널렸을 뿐 아니라 자동차가 쉴새없이 다니니 아무 데나 앉기도 어렵습니다.



.. 조금 전만 해도 같은 택시 기사 출신이라며 반기던 그분은 왜 읽어 보지도 않은 신문을 그렇게 매도했던 걸까요? 제가 올바른 정보를 알린다면 그분의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었을까요 … 한국 사회에서 학문은 입시와 취업의 도구가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우는 목적이 개인의 인격과 지성을 높이는 데 있지 않아요 … 우리 사회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는 기존의 질서와 체제를 빠르게 인정하고 숙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환경 탓만 할 수는 없잖아요. 학교 분위기가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분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  (16, 22, 23, 31쪽/홍세화)



  오늘날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험공부만 합니다. 아이들은 제대로 무엇을 배우는 적이 없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 하나 제대로 가르치는 적이 없습니다. 그저 대학입시로 내몰 뿐입니다. 대학입시가 끝난 뒤에는? 네, 어른들은 대학입시 끝난 뒤에 아이들을 풀어놓습니다. 아니, 어른들은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그저 풀어놓았을 뿐이고, 대학교에 들어갈 적에도 풀어놓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삶을 배우는 적이 없고, 아이들한테 사랑을 가르치는 적이 없습니다.


  처음 태어나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스무 해 내내 사랑을 배운 적이 없이 대학생이 되거나 스무 살을 넘깁니다. 그러고는 저마다 짝꿍을 찾아 헤매는데, 아이들은 ‘사랑’이 아닌 ‘짝꿍’을 찾을 뿐입니다. 마음을 아름답게 살찌울 사랑이 아니라, 살을 섞거나 부빌 짝꿍을 찾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무엇인지 배운 적 없이 학교에 갇혀서 지냈거든요. 이제 비로소 학교에서 풀려났으니, 아이들은 갑갑한 몸을 풀어내려고 서로서로 살을 섞거나 부빌 짝꿍을 찾을밖에 없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이 없거든요. 스무 살이 되도록 밥짓기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거든요. 옷짓기는 할 수 있을까요? 바느질을 할 줄 아는 스무 살 젊은이는 몇이나 될까요? 토익이나 토플 점수는 잘 받더라도 바느질 하나 못 하는 젊은이는 수두룩하리라 느낍니다. 집짓기는 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숲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 손질한 뒤 기둥을 세울 줄 아는 젊은이는 아예 없다시피 해요.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월세에 전세에 ‘내 아파트’로 나아갈 생각만 겨우 합니다.



.. 자기표현이야말로 민주 시민의 소양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유와 권리는 표현하고 실천하고 다듬어 볼수록 더 커지거든요 … 한국의 자살률은 OECD 1위예요. 인구 10만 명당 31명, 한 해에 1만 5000여 명이 자살합니다. 브라질 사람이 총기 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한국 사람이 자살로 죽을 확률이 높습니다 ..  (74, 80쪽/안수찬)



  학교는 왜 아이들을 꽁꽁 가둘까요? 우리 어버이는 왜 하나같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어 꽁꽁 갇히게 할까요? 왜 학교는 아이들을 꽁꽁 가두어 아이들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지어서 삶을 가꾸도록 이끌거나 가르치지 않을까요? 왜 우리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가꾸는 삶을 물려주지 못하면서 사랑도 꿈도 아이와 나누지 못할까요?


  홍세화·오인연·안수찬·조광제·한재훈·오창익, 이렇게 여섯 사람이 저마다 이야기를 살풋살풋 들려주는 《10대와 통하는 청소년 인권 학교》(철수와영희,2014)를 읽습니다. 인권을 빼앗기거나 짓밟히거나 잃거나 잊은 푸름이한테 인권이란 무엇인가 알려주면서, 푸름이가 스스로 인권을 찾도록 하려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들려주는 이야기책입니다.



.. 생산력이 엄청나게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여전히 일에 매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자본은 계속 증식해 나가려고 노동력을 착취합니다. 일을 더 시켜야 생산성을 올릴 수 있잖아요. 개인들은 자발적으로 노동 시간을 연장합니다. 야근, 휴일 근로, 안 하면 돈을 적게 받으니까요 ..  (132쪽/조광제)



  《10대와 통하는 청소년 인권 학교》를 읽으면, 인권이 걸어온 발자취라든지, 인권이 ‘발명’된 까닭이라든지, 한국 사회에서 인권이 얼마나 짓눌리는가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살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푸름이 누구나 학교를 다니면서 인권이 억눌리는 얼거리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청소년 인권’에서 우리가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바로 ‘학교’이지 싶습니다. 학교를 다니기만 하면 인권을 빼앗기거나 짓밟히는 얼거리를 바로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아무리 뜻있거나 똑똑한 어른이라 하더라도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 아이들한테 인권을 찾아 주거나 지켜 주기 어려운 얼거리를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참말 학교를 바르게 살펴야 합니다. 오늘날 도시 문명 사회에서 학교는 ‘배우는 곳’ 구실을 하나도 안 합니다. 오늘날 도시 문명 사회에서 학교는 ‘입시지옥’ 노릇만 합니다. 대학입시와 얽힌 과목만 달달 볶듯이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합니다. 언제나 시험공부를 할 뿐입니다. 시험점수와 등수를 따지고, 등급과 성적표를 매깁니다. 아이들한테 사랑을 들려주는 교과목이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사랑을 가르치거나 이야기하는 교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즐겁게 삶을 노래하는 시나 소설을 이야기하는 국어 교과목이 있는가요? 없습니다. 셈과 넋과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밝히는 수학 교과목이 있는가요? 없습니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말을 익히면서 이웃나라 문화와 삶을 살피고 서로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지구별을 가꾸는 이야기를 북돋우는 외국어 교과목이 있는가요? 없습니다. 가장 굵직하다는 국·영·수조차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역사 교과목은 어떠한가요? 왕조 발자국이나 살필 뿐, 지난날 이 나라에서 99퍼센트 남짓 차지하던 여느 시골마을 수수한 시골사람 이야기는 한 줄로도 안 다룹니다.



.. 김상용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평범한 일상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행복은 사람이 살아가야 할 까닭입니다. 김상용 시인의 시처럼 소박한 것에서 찾아도 좋고, 인류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겠다는 커다란 포부여도 좋아요 … 인권은 사람을 존중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인권은 당연히 자기 존중의 토양에서만 싹틀 수 있습니다 ..  (171, 172, 202쪽/오창익)



  ‘청소년 인권’은 학교 안팎에서 찾아야 합니다. 한창 삶을 배우고 사랑을 맞아들일 푸름이인 터라, ‘학교 울타리’가 아닌 ‘배우는 터전’을 찾아야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보금자리에서 아름다운 꿈을 키우고, 아이들한테 동무와 이웃이 되는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마을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이도록, 다 같이 힘을 기울여야지 싶습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 ‘인권’입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란, 서로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나날입니다. 서로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나날은 함께 꿈을 꾸고 함께 일과 놀이를 나누며 함께 노래잔치 춤잔치 밥잔치를 빚는 하루입니다. 4347.10.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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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 비폭력 교육혁명가 비노바 바베의 배움과 삶, 교육 이야기
비노바 바베, 김성오 옮김 / 착한책가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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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26



새롭게 가꾸어야 할 시골

―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비노바 바베 글

 김성오 옮김

 행복한책가게 펴냄, 2014.9.20.



  2013년 정부 통계를 보니, 한국에서 도시에 사는 사람이 92퍼센트라 하고, 한국에서 직업으로 농업을 적는 사람이 6퍼센트라 합니다. 앞으로 92퍼센트는 더 늘어날 테고, 6퍼센트는 더 줄어들리라 느낍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는 그대로 도시에 눌러앉을 테며, 시골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까지 도시로 들어갈 테지요.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학교에 넣으면, 도시에서는 도시살이만 가르치고 시골에서는 도시살이를 가르칩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모두 도시 이야기만 가르칩니다. 도시에서 시험을 치러서 잘 붙도록 하는 재주만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고 한다면, 이 아이들이 ‘시험 잘 보는 재주’를 익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 되어 돈 잘 벌도록’ 하려는 뜻이라고 할 만합니다.


  시골 초·중·고등학교에서조차 모내기나 풀베기나 나물뜯기 같은 일을 가르치지도 않고 보여주지도 못하며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도시에 있는 초·중·고등학교는 이런 일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온 나라가 ‘입시지옥’ 잔치판이 됩니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온통 입시지옥 이야기입니다. 막상 가을에 가을걷이 일손을 거든다든지, 가을철 바쁜 시골마을을 돌아보려는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신문기자나 방송피디는 죄다 도시에서 살아요. 시골살림을 모릅니다. 시골살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도시이고 모든 것이 도시일 뿐입니다.



.. 37년 전, 나는 대학을 떠나 지혜를 찾아 나섰습니다. 학교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그중에 지혜는 없었습니다 … 오늘날 괴상한 교수법이 삶의 조화로운 일체성을 토막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육을 받는답시고 인생의 첫 십오 년 혹은 이십 년을 통째로 쓰면서도,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들은 회피합니다 … 인간은 이 무한한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에서 끊임없이 배웁니다. 시냇물은 막임없이 흘러갑니다. ‘돌 하나하나마다 교훈이 서려 있고, 흘러가는 실개천도 지식의 원천’입니다 … 아버지는 아이의 머릿속에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쑤셔넣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학교에서도 그와 똑같이 대합니다 … 신은 언제나 정말 경이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까닭에, 어느 한 구석에 잠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  (10, 39, 50, 54, 340쪽)



  요즈막에 ‘글쓰기’ 이야기가 많이 도드라집니다. 예전에는 ‘논술’이었는데, 이름만 살짝 바꾸어 ‘글쓰기’를 들먹입니다.


  글쓰기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뜻있고 값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글쓰기를 왜 해야 하는가부터 살펴야지 싶습니다. 글쓰기를 하는 즐거움과 보람과 뜻부터 살펴야 한다고 느낍니다.


  글쓰기란 글을 쓰는 일입니다. 글을 쓰려면 말이 있어야 합니다.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없으면 글을 쓰지 못해요.


  말이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고받을 이야기가 있어 말을 꺼내는 삶이기에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글을 쓸 수 없어요.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학교나 사회에 이야기가 있을까요? 오직 시험공부만 시키는 학교에서 이야기가 있을까요? 교과서와 문제집만 들여다보도록 시키는 어른 사회에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야기가 없는 학교요 교육이며 사회인데, 아이들더러 글쓰기를 하라고 시킵니다. 자, 그러면 아이들은 뭘 쓰나요? 아이들은 뭘 써야 할까요? 아이들은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데 아이들더러 글쓰기를 하라고 시키고, 글쓰기 책을 펴내며, 글쓰기 강의를 하고, 글쓰기 학원이 문을 엽니다.



.. 놀이를 하는 동안 그 아이에게 바깥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은 오직 놀이에만 몰입합니다 … ‘교육은 의무’라는 식의 틀에 박힌 생각 대신에, ‘교육은 즐거움’이라는 아주 자연스럽고 고무적인 생각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류 전체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절망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인간이 그 근본부터 악하다면 교육에는 희망이 없게 됩니다 … 진짜 ‘나’는 결코 망가지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몸이 망가지고 때가 끼었을 때 그것을 고치고 씻어내는 존재가 나입니다 … 작은 무기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군인은 더 큰 무기를 집어듭니다. 그리고 그것들조차 충분치 않다고 판단되면 한층 더 파괴적인 무기에 의존합니다 … 우리는 아이들에게 자기를 때리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복종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은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일상적인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  (55, 56, 57, 66, 337, 353쪽)



  아이나 어른 모두 글쓰기를 할 만합니다. 글쓰기를 하면서 삶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쓰기에 앞서 먼저 삶이 있어야 합니다. 삶이란 이야기이지요. 이야기란 삶이지요. 다시 말해서, 삶이 없고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이 글솜씨나 글재주를 키운다고 하면 어떤 일이 생길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솜씨나 글재주를 부려서 쓰는 글이 우리한테 얼마나 즐겁거나 반갑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울 만한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알맹이 없는 입시지옥이 되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교육이 아니라 입시지옥만 있는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무엇을 배울까요?


  배울 것 없는 학교에서 ‘시험 잘 치는 솜씨’와 ‘글 만지는 재주’만 키운다면, 이런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시험공부와 글재주만 키운 아이들이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을까요? 시험공부와 글재주만 있는 아이들이 아이를 낳아 돌볼 수 있을까요? 시험공부와 글재주로만 살아온 아이들이 밥·옷·집을 어떻게 마련할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제도권 학교교육은 모든 아이들을 기계 부속품이 되도록 내몹니다. 모든 아이들이 밥·옷·집을 돈으로 사서 쓰고 버리도록 길들이려는 제도권 학교교육입니다.


  어느 교과서에도 밥을 짓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어느 교사도 옷을 짓는 이야기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어느 학교도 집을 짓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밥도 옷도 집도 없는데, 지식만 있습니다. 밥과 옷과 집은 없으면서, 온갖 정보와 책은 넘칩니다. 인터넷과 신문과 방송도 넘치지요.



.. 얼마나 많이 배웠든 간에 세상은 여전히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일수록 더 겸손할 것입니다 …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참된 지혜는 어떤 무기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수단입니다. 교육은 비폭력의 힘만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실천하지 않고는 결코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정녕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만약 그 아이들이 날마다 두세 시간씩 책만 들여다보면서 보낸다면 다른 것들을 배울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 아이들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모국어도 엄마한테서 배웁니다. 정부는 단돈 1원도 안 들입니다. 이것이 제가 무상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67, 76, 83, 85, 119쪽)



  신문사와 방송국은 모조리 사라져도 됩니다. 대학교 또한 몽땅 문을 닫아도 됩니다.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죄다 없애도 됩니다. 이렇게 한다 한들 나라가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골 논밭을 모조리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덮어 보셔요. 어떻게 될까요? 다 죽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을 몽땅 도시로 끌어들여서 공장 노동자로 바꾸거나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바꿔 보셔요. 어떻게 될까요? 다 죽습니다.


  4대강사업이 끔찍한 까닭은 막공사를 밀어붙인 독재정권 때문이 아닙니다. 4대강사업은 시골을 무너뜨리고 숲과 들과 냇물을 짓밟았기 때문에 끔찍합니다. 새만금이나 시화호가 왜 무시무시했겠습니까? 밀양 송전탑이나 제주 강정마을이나 평택 대추리가 왜 슬펐겠습니까? 이는 모두 시골을 짓이기거나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에 무시무시하고 슬픕니다.


  아이들은 손수 흙을 만지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쌀이 어떻게 나오고, 밥을 어떻게 지으며, 볍씨는 어떻게 심어서 돌봐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오이심기 가지심기 호박심기 당근심기뿐 아니라, 나무 한 그루를 돌보는 일도 찬찬히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흙을 살리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나물과 풀을 샅샅이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농약이나 비료나 항생제나 농기계를 배우지 말고, 시골과 들과 숲을 배워야 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쉰 해 앞서까지 이 나라 골골샅샅에서 이루어진 ‘숲살이’와 ‘들살이’와 ‘바다살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 도시가 농사와 유리되어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이보다 더 큰 손실은 없기 때문입니다 … 풀과 나무와 돌과 흙, 햇살과 바람이 있는 탁 트인 자연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며 얼마나 가슴 벅찬 축복인지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즐거움을 모릅니다. 그러니 그 가련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인간이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되면 충분한 만족과 넘치는 기쁨을 누리게 되어서, 더는 다른 인공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 어떤 사람은 늘 약을 먹는데도 병세가 계속 악화되기만 합니다. 병과 약이 함께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 현대의 노동자들은 하루에 여덟 시간을 공장 안에 갇혀서 일합니다. 그곳에는 맑은 공기도 기쁨도 없습니다. 그들의 노동은 지식과 유리되어 있으며, 즐거움마저도 영화 등을 통해서 ‘제공받아야’ 합니다. 그들의 노동에는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  (89, 92, 98, 115쪽)



  삶이 서야 이야기가 흐릅니다. 삶이 서면서 이야기가 흘러야 사랑이 싹틉니다. 삶이 서면서 이야기가 흘러 사랑이 싹틀 때에, 비로소 가르치고 배우는 노래가 샘솟아요.


  예부터 한겨레뿐 아니라 지구별 모든 겨레는 어른이 아이한테 노래를 들려주면서 삶을 가르쳤습니다. 예부터 어느 겨레 어느 나라에서든,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노래를 들으면서 삶을 배우고 물려받았습니다.


  민요나 노동요가 아닌 ‘노래’입니다. 전래동화나 구전설화가 아닌 ‘이야기’입니다. 구비문학이나 민중문화가 아닌 ‘삶’입니다. 노래는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삶이 됩니다. 삶은 노래로 거듭나고 노래는 이야기로 태어납니다.


  아이들이 배울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아이들이 물려받을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어른이 가르칠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어른들이 물려줄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그리고, 어른은 사랑스러운 몸짓과 눈길과 손길로 노래와 이야기와 삶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노래와 이야기와 삶을 귀여겨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구별 어느 곳에서도 학교란 없었어요. 우리 집이 학교이고 우리 마을이 학교였습니다. 우리 숲과 들과 바다가 학교였어요. 우리 어버이가 교사요, 우리 아재와 아지매와 할배와 할매가 교사였습니다.


  오늘날 도시 문명 사회에서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면서 즐거운 배움터인 보금자리를 와장창 무너뜨리거나 깨부숩니다. 이러면서 시멘트 건물을 뚝딱뚝딱 올려 ‘학교’라는 이름을 붙이고 ‘교육’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씌웁니다.



.. 최근 30년간 저는 하루하루를 물 긷기, 곡식 찧고 빻기, 쓰레기 치우기, 실잣기, 천짜기, 면화 고르기, 목공일 등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런 일을 함으로써 저의 지적 능력이 감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나아졌다는 것입니다 … 교사가 어린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어린이가 성장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 진정한 앎은 100퍼센트를 기억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차파티를 30퍼센트만 만들 수 있는 요리사를 누가 고용하겠습니까? 어중간하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완전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머리와 손발이 하나가 되어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은 잘해 내지만 그 일의 전 과정을 말로 잘 설명해 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 기능을 완전히 꿰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  (109, 155, 171, 186쪽)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부가 무슨 구실을 하는지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도시 문명 사회는 오직 돈으로 굴러갑니다. 학교도 늘 돈으로 굴러갑니다. 대학교 배움삯이 얼마나 비싼지 보셔요. 돈이 아니면 대학교가 없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은 돈으로 사고파는 ‘면죄부’와 같습니다. 성적표를 얻으려고 오늘날 거의 모든 어버이가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몰아세웁니다. 여느 어른들도 가녀린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기보다는 성적표를 들이밀면서 다그칠 뿐입니다.


  교육 없는 한국이고, 사랑 없는 한국입니다. 제도권과 입시와 졸업장만 있는 한국입니다. 돈만 판치는 한국입니다. 꿈이나 노래가 흐르지 않는 한국입니다. 상업주의와 경제개발만 춤추는 한국입니다.


  우악스럽고 어리석은 한국이라 할 텐데, 이런 한국에도 한 줌짜리 조그마한 빛줄기가 흘러 반짝반짝 어여쁜 책이 한 권 나옵니다. 비노바 바베 님이 쓴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행복한책가게,2014)입니다.



.. 진정으로 삶에 유익하다면 그것은 삶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들을 배울 때에는 즐거운 방법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 역사는 권력을 가진 자의 입장에 따라서 기술됩니다. 그들은 과거의 사건들을 사람들의 정신을 호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합니다 … 역사라는 미명 하에 모든 사람들의 사고가 강제로 특정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온 국민이 선입견으로 가득 차게 되어서 … 새로운 역사를 만들겠습니까, 아니면 그저 낡은 역사책이나 읽겠습니까 … 우리의 삶에서 그토록 귀중한 사실인 어머니의 사랑은 결코 역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역사는 결코 쓰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인간성에 위배되는 역사만을 씁니다 ..  (209, 221, 222, 225쪽)



  인도사람 비노바 바베 님은 ‘학교 없는 마을’을 이야기합니다. 이녁은 ‘돈을 들이지 않는 배움’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시골에서 꽃피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마땅합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마을에는 학교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마을은 마을 그대로 배움터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흙짓기와 흙살림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아이낳기와 동생보기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이웃사랑과 들놀이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모든 삶을 고스란히 배웁니다. 마을은 통째로 배움터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지구별 어느 나라에서도 고작 쉰 해 앞서까지만 해도 ‘모든 시골’은 ‘스스로 삶을 지어서 가꾸는 터전’이었습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고작 쉰 해 앞서까지만 해도 지구별 모든 시골은 ‘완전한 자급자족’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작 쉰 해 사이에 지구별 거의 모든 시골이 경제 식민지가 되고 문화 식민지가 되며 종교 식민지까지 되고 맙니다. 게다가 시골마다 쓰레기가 넘쳐요. 비닐과 농약 쓰레기뿐 아니라, 도시 관광객이 버린 쓰레기까지 넘칩니다. 이뿐인가요? 도시사람이 쓸 전기를 뽑는다면서 시골에 엄청나게 큰 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수없이 때려박습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다면서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를 끝없이 자꾸 때려짓습니다. 도시사람 ‘여가생활’ 때문에 시골에 골프장이나 관광단지나 호텔 따위를 새롭게 때려잡습니다.



.. 모든 종교에서,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어떤 의례적인 형식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들을 해야만 덕을 쌓을 수 있다는 믿음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 지성을 가꾸는 것은 영혼입니다. 그리고 지성이 영혼을 버리고 육체의 집에서 노예가 되면 지성은 부정을 행합니다 … 사람들은 시골에서 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렇지만 도회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시골 마을의 정감 어린 분위기와 비교해 본다면, 도회지의 생활이 얼마나 쓸쓸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낡은 관습에 젖은 학교들은 감옥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방학이 필요합니다 … 베짜기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옷이며, 농사일에서 생겨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음식이며, 목공일에서 얻는 것은 돈이 아니라 집이라는 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  (248, 263, 268, 269, 272쪽)



  새롭게 가꾸어야 할 시골입니다. 학교나 도시나 문명이나 경제나 교육 따위는 새롭게 가꿀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도 새롭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학교나 도시나 문명이나 경제나 교육 따위는, 여기에 스포츠라든지 영화라든지 소비문화 모두 새로움이 하나도 없을까요?


  철이 없기에 새로움이 없습니다. 봄철과 여름철과 가을철과 겨울철이라고 하는 철이 없으면 새로움이 없습니다.


  시골은 철이 있기에 새롭습니다. 다만, 오늘날 시골은 도시 문명에 너무 길들고 찌들어서 웬만한 시골은 거의 다 철을 잊거나 잃었습니다. 도시를 떠나 망가진 시골로 간다 한들 달라지지 않습니다. 도시만 떠난대서 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도 새로운 숲을 지어야 합니다. 시골은 오늘날처럼 망가진 시골 모양이 아닌 ‘숲으로 되살아나는 새로운 시골’로 고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 잘 알아야 하는데, 비노바 바베 님이 말하듯이 ‘참답게 배우고 가르치는 삶’은 돈이 한푼조차 안 듭니다. 시골을 참답게 가꾸어 돌보고 누리는 삶도 돈이 한푼조차 안 듭니다.


  곡괭이를 들어 시멘트를 걷으면 됩니다. 한쪽에 시멘트 쓰레기를 잘 쌓아 두면 됩니다. 흙이 드러난 땅을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잘 쓰다듬으면 됩니다. 바람 따라 풀씨가 날아오도록 하면서, 콩씨를 심고 옥수수씨를 심으면 됩니다. 차근차근 흙을 살리고, 능금씨도 심고 살구씨도 심으며 도토리도 심으면 됩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시멘트를 걷고 씨앗을 심는 일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씨앗은 돈으로 사지 말아요. 들과 숲에 있는 씨앗을 받아서 쓰거나 이웃한테서 얻어서 쓰셔요. 도시와 시골 모두 숲으로 푸르게 우거진 터전이 되도록 되살릴 수 있어야 비로소 ‘배우고 가르치는 삶’을 이룹니다. 입시지옥이나 졸업장이나 교과서 따위가 아닌 ‘사람과 사랑과 삶’을 배우고 가르치려면, 도시와 시골 모든 곳에 숲이 우거져야 합니다.


  도시 문명 사회가 숲을 없애는 까닭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정치 권력자와 경제 권력자와 문화 권력자와 종교 권력자가 서로 한통속이 되어 우리들을 ‘종(노예, 기계 부속품, 톱니바퀴)’으로 부리려고 하기 때문에 돈을 내세워 숲을 없애고 시골을 무너뜨립니다. 무상교육이나 무상급식을 해 보았자 교육은 하나도 안 나아져요. 잘 알아야 해요. 우리가 할 일은 무상교육이나 무상급식 따위가 아닙니다. ‘숲’입니다. 학교 운동장에 인조잔디를 못 깔게 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학교로 못 들어오게 막고, 학교에는 주차장을 마련해서는 안 됩니다. 교사도 학생도 손님도 모두 학교에는 두 다리로 걸어서 들어와야 합니다. 학교 건물을 둘러싸고 나무가 우거져야 하며, 조경이나 정원 따위로 나무를 망가뜨리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돈을 들이는 일은 교육이 될는지 모르나, 배움이나 가르침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돈벌이를 알려주는 일은 교육이 될는지 모르나, 삶이나 사랑하고는 멀어집니다. 아무쪼록, 어른과 아이가 모두 푸른 숲에서 삶을 노래하고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즐거운 하루를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0.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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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많은 생쥐 - 블랙베리를 혼자 다 먹고 싶은 생쥐가 참다운 우정을 알게 된 이야기 봄봄 아름다운 그림책 40
매슈 그림즈데일 글, 토니 린셀 그림, 김현좌 옮김 / 봄봄출판사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40



시골사람이 나누어 주는 밥

― 욕심 많은 생쥐

 토니 린셀 그림

 매수 그림즈데일 글

 김현좌 옮김

 봄봄 펴냄, 2014.8.5.



  아이들과 함께 먹으려고 밥을 차립니다. 나 혼자 먹을 생각으로 밥을 차리지 않습니다. 나 혼자 먹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도 저희끼리만 먹지 않습니다. 언제나 함께 나누는 밥입니다. 가을에 뒤꼍에서 무화과를 따면 아이들은 게눈 감추듯이 먹어서 없앱니다. 여러 알을 먹고도 모자란지 더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작은 접시에 몇 점을 남깁니다. 나는 아이들이 더 먹기를 바라며 내 몫을 따로 덜지 않는데, 아이들이 “아버지도 먹어야지.” 하면서 ‘더 먹고 싶은 마음’을 참습니다. 때로는 아이들한테 “자, 이만큼은 어머니 몫이야. 이 그릇은 건드리지 마.” 하고 말하는데, 그러면 아이들은 참말 이 그릇에 담긴 먹을거리를 안 건드립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아무 말이 없고, 네 살 작은아이는 그릇에 담긴 먹을거리를 바라보면서 “어머니 꺼야?” 하는 말을 여러 차례 묻습니다.



.. “와! 맛있겠다. 내가 좀 따 먹어도 될까?” 참새가 물었어요. “아니! 나 혼자 다 먹을 거야. 그러니 어서 가!” 생쥐가 사납게 대답했어요 ..  (5쪽)




  토니 린셀 님 그림하고 매수 그림즈데일 님 글이 어우러진 그림책 《욕심 많은 생쥐》(봄봄,2014)를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혼자 차지하려는 생쥐가 나옵니다. 이웃하고는 조금도 나눌 마음이 없는 생쥐가 나옵니다. 우악스럽다고 해야 할는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는지, 바보스럽다고 해야 할는지, 여러모로 어설픈 생쥐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혼자서 다 먹을 수 있는 밥이나 열매는 없습니다. 들이나 숲에서 나는 열매는 몇몇 사람이 다 먹어치울 만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골고루 나누어 먹어도 넉넉합니다. 다 먹을 수 없기 마련입니다.


  우리 집은 해마다 늦봄과 이른여름 사이에 들딸기를 실컷 먹습니다. 들딸기로 끼니를 삼을 만큼 먹습니다. 그런데, 이 들딸기는 우리만 먹지 않아요. 꽤 많은 들딸기는 도로 땅으로 돌아갑니다. 개미와 풀벌레와 나비와 벌이 수없이 찾아와서 함께 먹습니다. 들쥐와 여러 작은 짐승도 들딸기를 함께 먹습니다. 아마 새도 딸기넝쿨에 살몃살몃 내려앉아 들딸기를 콕콕 쫄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도시사람은 시골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사다가 먹는 얼거리인데, 참말 시골사람은 혼자 먹지 않습니다. 논도 밭도 숲도 없는 도시사람이 굶지 않게끔 시골사람은 아주 넉넉히 일구어서 푸지게 나누어 줍니다. 한국 사회를 보면 2013년에 6퍼센트가 ‘농업 인구’라고 하니, 6퍼센트가 다른 94퍼센트를 먹여살리는 셈입니다.




.. “여우가 네 블랙베리를 훔쳐 가는 걸 두고볼 수는 없었어.” 다람쥐가 말했어요. “너는 우리한테 블랙베리를 나눠 주지 않았지만 말이야.” 참새가 덧붙여 말했어요 ..  (19쪽)



  우리 집 아이들을 찬찬히 돌아봅니다. 먹을것이 있으면 아이들은 어느새 달라붙습니다. 아이들은 허둥지둥 입에 먹을것을 집어넣다가 문득 멈추고는 어머니나 아버지 입에 먹을것을 넣어 줍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제 어버이더러 같이 먹자고 말합니다. 이 아이들은 이런 매무새를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아마 어릴 적부터 어버이한테 ‘떠서 먹이는 밥’을 받아서 먹었기에, 아이 스스로 제 배가 고프면 제가 먹고 싶듯이, 옆에 있는 사람도 똑같이 배가 고픈 줄 여기는구나 싶습니다. 아이가 먹을것 한 점을 손을 집어서 내 입으로 곧게 뻗는 모습은, 내가 이 아이한테 밥을 먹이던 갓난쟁이 무렵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림책 《욕심 많은 생쥐》에 나오는 생쥐와 같은 모습은 선뜻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어리거나 철없거나 어리석은 생쥐라 하더라도, 갓 태어났을 무렵에는 어미젖을 물려 컸을 테니까요. 제 어미가 베푸는 먹이를 받아서 고맙게 먹으며 자랐을 테니까요.


  다만, 그림책으로 아이들한테 무엇 하나 가르치겠다는 뜻으로 작고 예쁘장한 짐승을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고 할 텐데, 일곱 살 큰아이가 이 그림책을 보더니 문득 한 마디를 해요. “아버지, 이 생쥐는 저만 먹으려고 해요. 동무들한테 나눠 주지 않아요. 왜 그래요?”


  어린이 마음이 될 때에 생쥐뿐 아니라 사람도 누구나 이웃하고 밥을 나눕니다. 어버이 마음이 될 때에 생쥐도 사람도 누구나 동무하고 밥을 나눕니다. 그러니까, 어린이가 되든 어버이가 되든, 다시 말하자면 어떤 곳에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든, 이웃이랑 동무하고 밥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서로 즐겁게 살아가고 싶으니 밥을 나누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기에 어깨동무를 하면서 함께 밥잔치를 누립니다. 4347.10.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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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1. ‘다른 말’과 ‘틀린 말’

― 한국말을 바로보고 바로세우는 길



  사람마다 삶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말이 다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말이 달라요. 삶터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충청도와 경기도도 말이 다르지요. 삶터와 삶자락이 모두 다를 뿐 아니라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서 잘 자라는 나무가 경기도나 서울에서는 잘 자라기 어렵습니다. 날씨와 철과 바람과 햇볕과 물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흙이 다르고, 숲과 들과 바다가 다르지요. 똑같은 잣나무나 참나무라 하더라도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자라는 나무는 달라요. 크기도 모양새도 빛깔도 냄새도 다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와 어는 같을 수 없습니다. 서로 다릅니다. 표준말로는 “했고요”라 할 테지만, “했구요”라든지 “했구만”이라든지 “했지라”라든지 “했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장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할 적에는, 바로 이처럼 삶자락과 고장마다 다른 삶결에 따라 말이 다르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와 달리, ‘틀린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에는 현재진행형이나 과거분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어 같은 외국말을 한국사람이 배우려고 하면서, 그만 서양 말법에 따라 현재진행형과 과거분사 꼴로 ‘번역’을 해야 했고, 이런 번역 말투가 어느새 한국사람한테 널리 퍼졌습니다. 이를테면 “가고 있습니다”라든지 “먹고 있습니다”라든지 “했었거든요”라든지 “먹었었어” 같은 말투는 모두 틀립니다. 잘못 쓰는 말투예요. 이런 말투는 “갑니다”와 “먹습니다”와 “했거든요”와 “먹었어”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지구가 마치 한집인듯이 여기곤 하지만, 지구가 한집이어도 한국말과 영어는 같은 말이 아닌 다른 말입니다. 영어 말법을 한국 말법에 집어넣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미국사람은 ‘싱글싱글·싱글벙글·빙글빙글·싱긋싱긋·싱긋빙긋·빙긋빙긋·방긋방긋·방글방글·벙글벙글·벙긋벙긋’ 같은 한국말을 영어로 적을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겨레가 서로 다른 삶에 따라 서로 다른 말을 쓰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대로 한국말을 한국 말법에 맞게 쓰고, 영어 쓰는 나라에서는 그 나라 삶에 따라 그 나라 말법을 즐겁게 씁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로 “준비 땅!”을 쓰는데, 아직 꽤 많은 한국사람은 이런 일본말을 버젓이 씁니다. 일본말인 줄 모를 뿐 아니라, 오랫동안 몸에 익었다면서 이런 말투를 털지 않습니다. 글이나 말 첫머리에는 “하여”나 “해서”나 “하지만”을 넣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말투는 “이리하여”나 “이리해서”나 “그러하지만(그렇지만,그러나)”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여·해서·하지만”은 모두 ‘틀린 말’입니다. 잘못 쓰는 말투를 잘못 퍼뜨리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투를 쓰는 적잖은 이들은 잘잘못을 느끼거나 헤아리지 않기 일쑤예요. ‘틀린 말’을 쓰면서, ‘다른 말’인듯이 잘못 여기거나 둘러댑니다.


  “가벼운 미소”나 “넓은 광장”은 모두 잘못 쓰는 말입니다. ‘틀린 말’입니다. “가벼운 웃음”이나 “넓은 터(광장)”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잘못 쓰는 ‘틀린 말’은 틀린 말일 뿐 ‘다른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된장찌개에 된장을 안 넣고 간장이나 소금을 넣어도 간이 맞아요. 그러나 된장찌개가 아닌 간장찌개나 소금찌개입니다. 된장을 안 넣고도 된장찌개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콩나물국에 소금이 아닌 설탕을 넣으면 어찌 될까요. ‘다른 콩나물국’을 끓이는 셈일까요, ‘틀린(잘못 끓인) 콩나물국’을 끓이는 셈일까요.


  ‘축제’는 일본말입니다만 어느덧 한국 사회에 이 일본말은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영어를 썩 안 좋아하는 이들은 ‘축제’나 ‘축전’ 같은 한자말을 쓰고, 말을 깊이 살피지 않는 사람은 ‘페스티벌’이나 ‘쇼’나 ‘비엔날레’ 같은 영어를 써요. 한국말로 ‘잔치’나 ‘큰잔치’나 ‘작은잔치’나 ‘마당’이나 ‘한마당’을 쓰는 사람이나 모임이나 지자체를 보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한국말을 옳거나 알맞거나 아름답거나 즐겁게 쓰지 않는 일을 놓고 ‘다른 말’이라고 여겨도 될는지 아리송합니다. 아이들과 ‘생일잔치’를 하지 않고 ‘생일파티’를 하는 모습도 ‘다른 말’을 쓰는 모습이라고 해도 될까 궁금합니다.


  다른 삶터는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서울과 부산은 저마다 달라 아름답습니다. 경기와 강원과 전라와 경상과 충청은 서로 다른 터전이요 마을이고 이야기이기에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다른 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저마다 다른 곳에서 다른 보금자리를 다른 몸가짐과 눈길로 사랑스레 가꾸는 삶일 때에 아름다운 ‘다른 말’이 태어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구름이다” 하고 말할 사람이 있고, “구름이 있네” 하고 말할 사람이 있으며, “구름이 토끼처럼 생겼네” 하고 말할 사람이 있을 테고, “구름은 하늘에서 사는구나” 하고 말할 사람이 있어요.


  ‘다른 말’이란 저마다 다르게 사랑하면서 가꾸는 삶에서 찬찬히 태어나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다른 말’은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합니다. ‘다른 말’은 이웃과 동무가 쓰는 말을 가만히 살피거나 귀여겨들으면서 새롭게 맞아들입니다. ‘다른 말’은 말법이나 말틀이나 말삶을 무너뜨리거나 일그러뜨리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쳐들어온 말은 모두 ‘틀린 말’입니다. 영어를 배우는 일은 뜻있습니다만, 영어 말투나 말법을 한국말에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모습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my’를 ‘내’가 아닌 ‘나의’로 번역해서 가르치거나 쓰는 일은 모두 ‘틀린 말’입니다. ‘your’는 ‘네’로 번역해야 옳고 맞지, ‘너의’로 번역하면 ‘틀린 말’입니다. 바다는 ‘바닷가’요 내는 ‘냇가’이며 강은 ‘강가’입니다. 이를 ‘해변’이나 ‘천변’이나 ‘강변’처럼 한자를 빌어서 써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틀리게 쓴 말은 알맞게 바로잡으면 됩니다. 이제껏 틀리게 썼으면 앞으로 바로잡으면 됩니다. 내가 쓰는 말투 열 가지 가운데 열 가지가 모두 ‘틀린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씩 차근차근 바로잡으면 됩니다. 한국말을 한 가지씩 새롭게 배우면서 즐겁게 쓰면 돼요.


  내 삶을 바로보면서 내 말을 바로세웁니다. 내 넋을 바로보면서 내 삶길을 바로잡습니다. ‘틀린 말’을 잘못 받아들여서 쓴 일은 부끄럽지 않고, 대수롭지 않으며, 꾸중 들을 일이 아닙니다. 이제껏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슬기롭게 삶과 넋과 말을 바로보면서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게 한국말을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0.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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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애장판 5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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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89



언제나 배우고 새로 배우는

― 천재 유교수의 생활, 애장판 5

 야마시타 카즈미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09.7.25.



  배우는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이 늙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우리 둘레를 새롭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우리 둘레를 새롭게 바라보지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을 짓는 사람입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을 짓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입니다.


  배우는 사람이어야 산 목숨입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이라면 죽은 목숨입니다. 배우는 사람으로 살아야 사랑을 속삭일 수 있습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속삭이지 못합니다.



- “자네 논문에는 유감스럽게도 볼 만한 점이 하나도 없었네.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네는 대학이란 걸 오해하고 있는 거야.” (11쪽)

- “공부한 것은 인정하네. 하지만 이건 아직 케인즈 이론의 요약에 지나지 않아. 여기에는 자네 자신의 해석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군.” “그, 그럼 또 유급이란 말씀입니까?” “이건 유급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야. 난 단지, 이걸 논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걸세.” (15쪽)





  학생이기에 배우지 않습니다. 학교에 다니기에 배우지 않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학생이나 학교라는 굴레를 쓰지 않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그저 배울 뿐입니다. 잘 살펴보셔요. 학생이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붙였으나 안 배우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학교라는 데를 다니지만 안 배우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넣는다고 해서 아이들이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아끼고 사랑해서 즐겁게 지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배웁니다. 나이 여덟 살에 초등학교를 넣고, 나이 열네 살에 중학교를 넣는다고 해서 배우지 않아요.


  교과서 지식을 머릿속에 넣는 일은 배움이 아닙니다. 시험성적을 잘 받도록 하는 일은 배움이 아닙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도록 하는 일은 배움이 아닙니다. 배움은 삶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되도록 스스로 가다듬는 일입니다.



- ‘이게 도서관이야 방이야? 무슨 어른이 공부를 하냐? 아버지란 건 원래 술 취해 들어와서 밥 먹고 방귀 뀌고 잠자는 건데. 뭐야, 이 아저씨는?’ (34쪽)

- “왜 동창회에 한 번도 안 나타났나?” “앞으로 전진하고 싶어서, 라고나 할까.” (65쪽)





  야마시타 카즈미 님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 애장판》(학산문화사,2009) 다섯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유택 교수’는 늘 새롭게 배우려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배우고 다시 배우려는 사람입니다. 배우는 하루가 즐거우니 배웁니다. 배우는 하루가 즐겁기 때문에, 즐겁게 배운 이야기를 이웃과 동무한테 기꺼이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자면, 만화책에 나오는 유택 교수는 ‘배우면서 가르치’고, ‘가르치면서 배우’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삶을 누리는 사람이요, 늘 삶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 “과거는 뒤돌아보지 않는 주의라고 하지 않았나?” “자에 부인은 예외야. 밝고 명랑하고, 내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에 처음으로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지. 내가 아주 좋아했어.” (69쪽)

- “내가 여태 자네를 오해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감정 같은 건 없는 사람으로 말야. 내가 자네 부인한테 말했지. ‘그런 감정 없는 남자와 결혼하면 당신은 불행해집니다’라고 했더니.” “그랬더니?” “자네 부인 말이, ‘그 사람은 사실, 감정이 아주 풍부한 사람이에요. 표현이 조금 적을 뿐이지.’ 자네 부인이 사람을 훨씬 잘 본 거라구.” (72쪽)



  만화책에 나오는 유택 교수가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는 너한테서 배우고 싶다’입니다. 유택 교수는 사람을 재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 사람은 오늘 이곳에서 어떤 넋으로 어떤 모습이 되어 내 앞에 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오늘 이곳에서 어떤 넋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내 둘레를 밝히려 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바라보기에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알기에 제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생각하기에 제대로 삶을 지어 하루하루 기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느 한 가지도 배우지 못합니다. 언제나 제대로 바라보는 몸가짐부터 다스릴 노릇입니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느껴서, 제대로 삭힐 줄 아는 몸가짐을 추스를 노릇입니다.





- ‘기뻤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가 내게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늘 그 세계를 접하게 된다. 학문 탐구는 단지 책이나 학교를 통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로부터 새들로부터 대지로부터 그리고 사람들과의 교류로부터 많은 발견을 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몸소 실천하고 있다. 산다는 것, 그것이 곧 학문이다.’ (144쪽)



  만화책에 나오는 유택 교수는 틈틈이 시계를 봅니다만, 굳이 시계를 안 보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유택 교수는 스스로 몸에 ‘삶’을 새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즐겁게 배우는 삶이니, 군더더기가 한 가지도 없습니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삶이 아니라, 늘 새롭게 바라보면서 배운다는 삶이기에, 스스로 바라볼 것만 바라봅니다. 스스로 바라볼 것만 바라보기 때문에, 유택 교수 앞에 허깨비가 나타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니, 유택 교수한테는 허깨비가 보이지 않습니다. 허깨비는 삶이 아니니까요.


  먼먼 옛날부터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들이 해마다 다시금 씨앗을 심어 기를 수 있는 까닭은 해마다 즐겁게 삶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따스한 봄볕을 배웁니다. 더운 여름햇살을 배웁니다. 싱그러운 가을볕을 배웁니다. 포근한 겨울햇살을 배웁니다. 해마다 똑같은 땅에 심어도 해마다 다르게 돋으면서 즐거운 밥이 되는 남새와 열매를 만나서 배웁니다. 우리가 먹는 오이는 ‘오이’라는 이름으로는 똑같으나, 생김새나 맛이나 모양이 같은 오이는 하나도 없어요. 수박을 쪼갤 적에 수박씨가 똑같이 박히는 일이란 없어요. 들딸기가 똑같은 자리에 돋는 일이란 없어요. 똑같은 감나무에서 얻는 감알은 늘 모양새가 다른데, 해마다 또 다른 모양새로 열매를 맺어요.


  가만히 지켜보면 삶은 늘 새롭습니다. 늘 새로운 삶이니 언제나 환하게 웃으면서 배웁니다. 웃으면서 배우는 사람은 평화만 생각합니다. 평화만 생각하면서 삶을 짓는 사람은 오직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4347.10.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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