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플라스틱 - 쓰레기와 떠나는 슬픈 항해 미래를 꿈꾸는 해양문고 7
홍선욱.심원준 지음 / 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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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를 외치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를 망가뜨린다
 [잠깐 읽기 25] 홍선욱+심원준, 《바다로 간 플라스틱》



- 책이름 : 바다로 간 플라스틱
- 글 : 홍선욱, 심원준
- 펴낸곳 : 지성사 (2008.12.31.)
- 책값 : 8000원



 (1) 내 밥그릇이 무엇인지를 알아야지요


 요즈음 라면 한 봉지는 700원을 넘어섭니다. 850원짜리도 있고 1000원 넘는 녀석도 있습니다. ㅇ마트나 ㄹ마트에 가면 봉지에 적힌 값보다 꽤 싸게 사들일 수 있다고 하나, 비싸기는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밀 라면’은 값이 얼마나 할까요? 1100원입니다. 항생제와 비료와 풀약과 갖가지 몸에 나쁜 짓을 하면서 짓지 않은 곡식으로 만든 라면 한 봉지 값이 1100원일 때에, 나라밖에서 온갖 항생제와 비료와 풀약을 쓰는데다가 나라안으로 사들일 때에 또다시 약품을 치는 곡식을 화학물질을 섞어 가면서 식품회사 공장에서 만드는 라면 한 봉지 값이 700원이라 하면, 어느 쪽이 비싸고 어느 쪽이 값쌀까요?

 생협매장에서 사서 먹는 순부두 400그램은 1000원 안팎입니다. ㅇ마트나 ㄹ마트에서 아주 값싸게 사서 먹을 순부두 400그램이라면 500원쯤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500원에 두 봉지를 주기도 할 테지요. 그런데, 유전자조작을 하지 않은 콩으로 빚은 순두부하고, 유전자조작을 한데다가 수없이 많은 풀약과 항생제를 쓴 콩으로 빚은 순두부하고, 이만한 값벌어짐이라면, 어느 쪽이 비싸고 어느 쪽이 값쌀까요?

 세겹살을 싸게 파는 곳은 한 사람 몫(1인분) 200그램에 5000원도 하고 3500원도 합니다. 드물게 2000원 하는 집이 보이는데 이러한 집은 200그램이 채 안 된다고 느낍니다. 아주 싸다고 하여 200그램이 3000원이라고 치면, 600그램에 9000원입니다. 그런데 생협매장에서 세겹살을 사면 650그램에 9000원이 안 됩니다. 여느 고기집에서 사면 훨씬 눅을 테지만, 우리가 고기구이집에 가서 사먹는 돈을 헤아릴 때에 생협매장 나들이를 해서 ‘항생제 안 먹이고 화학처리된 사료 안 먹이는’ 고기를 사먹는다고 했을 때 드는 돈은 그리 많이 안 듭니다.

 다만, 생협매장에는 늘 물품이 넘치게 있지 않습니다. 늘 모자라게 있어, 공급날짜를 놓치면 장바구니가 비게 됩니다. 미리 어떤 물품을 받으려 하는지를 알려주어야 장바구니를 채울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장보기가 쉽지 않은 셈이지만, 쓸데없이 사들이는 물품이 없도록 살림을 맞출 수 있고, 꼭 써야 하는 물품만 쓰게 되는 한편, 우리 몸과 밥상과 둘레 터전을 한결 두루 살필 수 있기도 합니다.


.. 어두운 밤하늘에 예쁘게 퍼지는 불꽃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준다. 촛불이 제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고 사라지듯 불꽃도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태우고 사라지는 환상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폭죽을 터뜨리고 난 다음날, 같은 해변을 거닐어 볼 것을 권한다 … 가볍고 작아서 사람들 눈에는 잘 안 띄지만, 먹이를 찾는 바닷새들에겐 먹이로 착각하기 쉬운 크기이다. 담배필터를 먹이로 알고 잘못 먹는 새들이라면 이런 폭죽쓰레기도 먹게 될 것이다 ..  (31∼33쪽)


 생협매장은 전국 곳곳에 있지 않습니다. 큰도시 몇 곳에 몰려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손수 지어 먹으면 되니 구태여 생협매장이 들어설 까닭이 없다고 할지 모르나, 곰곰이 따지면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시골에도 생협매장이 있어야 합니다. 몸소 땅을 일구어 먹지 않는 도시사람 모인 곳에는 마땅히 생협매장이 있어야 하고요.

 농사짓는 사람이 허튼 농사를 안 지어도 일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생협이 차츰 자리를 잡아야, 시골이 살고 우리 살림이 삽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우리 몸이 바뀌고, 우리 몸이 바뀌는 흐름에 따라 우리 생각이 바뀝니다. 우리 생각 흐름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가려보는 눈길이 달라지고, 옳고 그름을 가려보는 눈길을 머리속 지식만이 아닌 온몸 삶으로 부대끼게 된다면, 우리 세상은 밑바탕부터 튼튼하게 새로워집니다.


.. (갯벌에서)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그들과 함께 나뒹구는 스레기들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불편하다. 아이들이 먹고 버린 과자봉지, 우유팩, 도로변에서 낚시하다 버린 엉킨 낚싯줄과 미끼통, 술병은 늘상 볼 수 있는 것들이고 줄 끊어진 기타가 발견된 적도 있다. 물속에는 오래 전에 버려진 의자, 세발자전거, 생활정보지 거치대 등이 갯벌에 박혀 세월을 보내고 있다 ..  (47쪽)


 인천에서 오랫동안 지역 역사를 파헤쳐 온 어르신이 언젠가 “지식인들은 밤낮 민중을 말하지만 밤낮 맥주만 마셔” 하고 따끔한 한 마디를 들려주어서, 옆에서 이 말씀을 듣다가 속으로 피식 웃었습니다. ‘그러게 말야, 참말 그러네’ 하고 생각했는데, 맥주를 마시는 일이 잘못이 아니라 ‘허구헌날 술자리에서만 떠들 뿐이지, 온몸으로 이웃사람과 부대끼면서 이 땅 삶과 참모습을 알아보고 함께하려 하지 않는다’는 소리이거든요.

 인천에서 살고 있으니 인천을 돌아보지만, 서울에서 지낼 때 서울을 돌아보면서, 또 충청도에서 살아가며 충청도를 돌아보면, ‘자기 텃밭에서 자기 밥그릇을 지키는 틀’을 깨부수면서 땀흘리는 사람을 찾아보는 일이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밥그릇 채우기에서 홀가분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이웃 마을 삶터까지 헤아리지 못하기 일쑤이고, 이웃사람 삶과 아픔을 내 삶과 아픔으로까지 삭이지 못하고요.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좁을까, 왜 이렇게 마음주머니를 북돋우지 못할까 하고 곱씹는데, 아무래도 자기 삶부터 다부지게 붙잡지 못하니 이러지 않겠느냐는 데로 생각이 모아집니다. 어떤 일을 하든 먼저 자기가 어느 집에서 살며 어떠한 밥을 먹고 어떻게 집살림을 꾸리느냐가 그이 삶과 생각을 크게 움직인다고 느낍니다. 밥 한 그릇 좀더 옳게 먹으려 마음쏟지 못하면서 이웃 삶터를 좀더 옳게 헤아리도록 마음쏟지 못합니다. 배고픈 이웃한테 라면상자 선물하면 좋은 일이 될까요? 영구임대아파트가 집없는 사람한테 가장 나은 보금자리가 될까요? ‘일자리 백만 개 만들기’를 하면 실업자가 사라지고, 돈없어 애먹는 사람이 사라질까요? 그러면 그 일자리 백만 개란, 무슨 일을 어디에서 어떻게 하는 일자리일까요?


..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그 시작점은 알 수 없지만 다도해의 아름다운 바다공원이 거대한 하얀 목걸이를 두르기 시작했다. 낯설고 괴이한 목걸이를 가까이 들여다보니 스트로폼으로만든 부표들이다. 굴과 김 등을 양식할 때 어디에 양식을 하고 있는지 소유주가 위치를 표시하거나, 해수면 아래로 굴의 종묘를 늘어뜨릴 때 가라앉지 않도록 띄우는 역할을 하는 어구이다 … 1년에 우리 나라에서 사용하는 스티로폼 부표는 3500만 개 이상이 된다. 바람에 날리고 파도에 휩쓸린 스티로폼 부표는 다도해의 수많은 섬으로 퍼져 나간다 … 스티로폼은 손으로 살짝 긁기만 해도 떨어져 부스러기가 생길 정도로 약하다 …원래 부표는 깨지거나 망가지면 되가져와 다시 사용하거나 처리해야 하지만, 떨어져 나간 부표를 찾아다니는 인건비가 새로 사는 비용보다 비싸기 때문에 쉽게 포기해 버린다 … 본디 파랗던 바다는 어디로 갔을까? … 생각보다 자주 바다쓰레기가 배들의 항해를 방해한다. 배들의 불안한 항해가 계속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선박 사고의 1/10이 바다쓰레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여객선을 타고 가는데 바다 위에서 이유 없이 멈춰 선다면 아마도 대부분 바다쓰레기 때문일 것이다 ..  (52∼60쪽)


 대통령 이명박 님은 서울과 부산 사이에 물길을 내고, 서울과 인천 사이에도 물길을 트면서 ‘엄청난 일자리를 마련하고 엄청난 돈돌리기를 이룬다’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런 물길트기만이 아닌 ‘새 고속도로 또 뚫기’와 ‘새 고속화도로 자꾸 뚫기’와 ‘고속철도 늘려 뚫기’와 ‘새 아파트 끝없이 다시 짓기’만 하여도 어마어마합니다. 이런 정책은 이명박 대통령뿐 아니라 야당 정치꾼도 똑같이 되뇝니다. 우리는 어느 정치꾼을 뽑아도 똑같은 정책이 되풀이되고, 똑같은 토목건설 바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꾼 공약과 정책으로만이 아닌 우리 스스로, 집값이 오르기를 꿈꿉니다. 주식값이 오르기를 꿈꿉니다. 일삯이 오르기를 꿈꾸고, 물건값은 안 오르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자기 사는 집값이 오르면 물건값이 안 오를 수 없습니다. 물건값이 오르는데 일삯이 올라 보았자 달라질 구석이 없습니다. 물건값이 오른다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쓰는 물건값만 오를 뿐인데다가, 가난한 사람이 팔아야 하는 물건은 값을 올리기 어렵습니다. 달걀 하나 넣는 오방떡 하나가 1994년에도 500원이었고 2009년에도 500원입니다. 군고구마 한 봉지가, 붕어빵 한 조각이, 떡볶이 한 접시가, 열 몇 해 앞서와 오늘날 얼마만큼 벌어졌을까요. 우리 입에 냠냠짭짭 씹혀 우리 밥통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움직이며, 어떻게 우리 손까지 오게 될까요. 우리는 이 먹을거리를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생각하며, 얼마만큼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요사이 어느 식료품이든 ‘MSG無첨가’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딱지를 하나도 안 붙였습니다. 예전에는 ‘엠에스지’라는 녀석을 안 넣었기에 안 붙였을까요 넣었어도 안 붙였을까요. 그런데 ‘엠에스지’를 안 넣었다는 식료품치고 화학착색료와 화학착향료 들을 안 넣은 식료품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가운데 생각있고 뜻있고 넋있다고 하는 분들, 더욱이 지식인과 지성인이라고 하는 분들은 이런 먹을거리를 얼마나 속깊이 제대로 알고 있으려나요.

 우리가 입는 옷은 어떻게 빨아서 입고 있지요? 빨래를 할 때 빨래틀이라는 녀석을 쓰나요, 두 손을 쓰나요? 빨래하는 데 쓰는 비누는 어떤 세제인가요? 빨래는 어디에서 어떻게 말리나요? 옷은 얼마나 사입고, 우리가 사입는 옷은 어떤 천으로 지어졌는지 아나요? 커피와 초콜릿만 공정무역을 하면 될까요? 이런저런 흐름은 알 까닭 없이 그저 ‘공장노동자’이면 다 똑같은 ‘노동자’일까요? 이 나라에서 지식인이라 하는 분들은 얼마나 자기 집살림을 알고 있을는지, 얼마나 스스로 옳게 집살림을 꾸리고 있을는지, 얼마나 아름답게 집살림을 이웃나눔으로 펼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성을 아버지와 어머니 한 글자씩 붙여 ‘김신 아무개’나 ‘최박 아무개’처럼 적으면 두 성을 평등하게 다루는 셈일까요? 어머니 또한 당신 아버지한테서 받은 성일 텐데?


.. 이렇듯 이름을 외우기도 쉽지 않은 해로운 화학물질들이 우리가 늘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 … 제품을 생산할 때에 사람의 건강이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보다는 생산가를 얼마나 낮출 수 있느냐를 먼저 따진 결과이다 ..  (96쪽)


 지난날 신동엽 시인이 피를 뿜으며 외친 “껍데기는 가라”는 온갖 쇠붙이 무기만 가라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전쟁무기만 없으면 된다는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삶자락 어느 구석이든 겉치레와 겉발림이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살림을 꾸려야 하고, 우리 손으로 우리 삶을 가꾸어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두 손에 비누거품 가실 날 없고 진물이 빠질 날 없는 손으로 연필을 들고 깃발을 들고 가방끈을 조여야 합니다. 두 손으로 기저귀를 빨고 아기를 어르며 밥짓고 찌깨 끓여낼 수 있은 다음에 논문을 쓰든 소설을 쓰든 기사를 쓰든 해야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한테서 당신 살아온 이야기 듣던 귀로 민중이든 시민이든 국민이든 서민이든 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내 아이뿐 아니라 옆집 아이한테 놀이노래 불러 주고 자장노래 불러 주는 입으로 역사든 진보든 혁명이든 보수든 개혁이든 반동이든 읊어야 합니다. 바닥 없는 하늘이 없고, 기둥 없는 집이 없습니다. 모래알에 기둥을 박아 보았자 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내리지 않고서는 어떠한 일이건 운동이건 뭣이건 해낼 수 없고 이룰 수 없으며 맞이할 수 없어요. 오로지 돈만 바라보는 주제에 무슨 사회운동이며,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주제에 어인 대학졸업장이며, 오로지 돈셈밖에 안 하는 주제에 웬 자기계발입니까.

 사회운동은 자기 삶을 고치는 일입니다. 대학교란 자기 마음을 뜯어고치는 일입니다. 자기계발이란 나한테 있는 사랑과 믿음을 송두리째 이웃과 동무하고 나누는 일입니다. 






 (2) 《바다로 간 플라스틱》이 밝히는 바다쓰레기


 《바다로 간 플라스틱》은 고작 150쪽 조금 넘기는 얇은 책입니다. 집에서 아기 어르고 재우고 먹이는 틈틈이 책을 넘기고 들추고 하니 며칠 만에 다 읽게 됩니다. 줄거리를 살피면, 잘게 잘게 쪼개어져도 사라지지 않는 플라스틱이 바다로 가면 쓰레기로 남을 뿐 아니라, 바다를 삶터로 두는 온갖 목숨붙이들이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들이 찬찬히 눈길을 두지 않으면서 망가지는 바다 이야기를 하고, 우리들이 알면서도 더럽히는 바다 이야기를 합니다.


.. 바다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앨버트로스의 비극은 일어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하늘 높이 나는 앨버트로스가 항공기나 높은 관제탑에 부딪쳐 몇 년 사이 수천 마리가 죽었다. 높이, 그리고 멀리 나는 새가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하늘과, 언제라도 편히 쉴 수 있는 안전한 바다는 이제 없다. 보존하고 복원하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만이 남았을 뿐이다 ..  (71쪽)


 단출하게 참 잘 엮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이런 살가운 이야기를 살가이 녹여낼 만한 가슴이 우리들한테 얼마 없겠구나 싶은 생각 또한 듭니다. 참말, 우리들은 이런 이야기책을 지식으로만 여기고 우리 매무새를 고쳐나가는 삶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바닷가에서 불꽃놀이 하는 일도 골칫거리이지만, 도시에서 불꽃놀이 하는 일도 골칫거리입니다. 이런 불꽃놀이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과 눈길도 안타까운 한편, 이런 불꽃놀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기사로 다루고 하는 우리 마음결도 슬픕니다. 바닷가에서만 안 하면 될 불꽃놀이는 아니니까요.


.. 우리가 사용하고 버린 생활용품이 모래톱이나 갯벌에 더 깊이깊이 박혔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언젠가 유물로 발견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 마구 쓰레기를 버려대면 아마 여기저기 썩지 않는 유물로 가득한 유적지가 너무 많아서, 우리 후손들에게는 더 이상 보존하고 지켜야 할 소중한 유적이 아닌 몰상식한 선조들의 더러운 쓰레기더미로 눈총을 받을 것이 뻔하다 … 이곳의 어민들은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터전인 바다를 가꾸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오래오래 후손들까지 안정적으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동참하는 것이다 .. (81, 82, 87쪽)


 구멍가게에서 맥주 한두 병 사다 마시면서, 맥주 겉에 붙은 종이딱지를 살며시 뜯어내어 말리곤 합니다. 하루쯤 두면 빳빳하게 되어 책갈피로 쓸 수 있거든요. 동네 마실을 하면서 자동차 앞유리에 끼워진 광고쪽을 빼들거나, 전철 광고판에 꽂힌 또다른 광고쪽을 빼내어 책갈피로 쓰곤 합니다. 모두 쓰레기가 되어 길바닥에 나뒹굴게 될 일을 생각하면, 한 장이라도 덜 쓰레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손전화값 알려주는 청구서가 오면 알맞게 잘라내어 책갈피로 씁니다. 잘 갈무리를 해 둔 다음, 나중에 아이하고 종이접기를 할 때 써도 되고요.

 요즈음 세상은 우리 스스로 쓰레기를 안 만들려고 애써도 어쩔 수 없이 쓰레기가 나오고 넘치고 널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한 사람 움직임은 그저 나비 팔랑거림밖에 안 된다고 느껴지지만, 그래도 한 목숨 살아가면서 조그맣게나마 몸부림을 치면서 살고 싶고, 이렇게 몸부림을 치는 동안 제가 바라보는 길과 제가 걷는 길을 좀더 곰곰이 되짚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저는 이 나라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돈을 벌고 쓰면서 살아야 할 테지만, 돈에만 매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착한 돈은 50만 원 겨우 벌 수 있다면 50만 원만 벌고, 50만 원도 못 벌게 된다면 못 벌면서 살림을 꾸릴 생각입니다. (4342.2.1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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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 늙다리 보리피리 이야기 5
이호철 지음, 강우근 그림 / 보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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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는 소’와 얽힌 추억에 젖는 일은 좋지만
 [그림책이 좋다 56] 이호철, 강우근 《우리 소 늙다리》



- 책이름 : 우리 소 늙다리
- 글 : 이호철
- 그림 : 강우근
- 펴낸곳 : 보리 (2008.12.29.)
- 책값 : 8500원


 (1) ‘소’를 모르는 우리 삶


 둘레에서 영화 〈워낭소리〉를 보러 가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먼저 본 분들이 으레 말씀하시는데, 마음은 영화관에 가 있어도 몸은 집에서 아기와 복닥입니다. 더욱이 인천에서는 딱 한 곳에서 영화를 올린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고, 우리 동네에서 퍽 떨어진 곳임만 알고 있어서 섣불리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어떻게 찾아간다 한들 저 혼자 먼저 보고 옆지기 나중에 보고 하지 않으면 볼 수도 없습니다.

 너무 많이 바란다고 할는지 모르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 극장 가운데 아기를 데리고 찾아가서 걱정없이 볼 수 있는 곳은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아기가 으앙으앙 울면 시끄러워 다른 이가 못 보게 된다고만 말할 뿐, 아이키우기로 밤잠 이룰 길 없는 수많은 아줌마와 아저씨들을 헤아리는 극장 시설이란 꿈을 꾸지 못합니다. 하기는,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 나들이를 요즈음만큼이라도 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 많은 이들 목소리와 땀방울이 있어야 했는지요.

 우리 둘레를 살피면, 책방도 도서관도 영화관도, 또 여느 밥집조차도 아이를 데리고 찾아가기에는 아주 안 좋습니다. 이렇게 하자면 돈을 많이 들여 시설을 갖추어야 하지만, 그만큼 장사하는 이한테 돈이 떨어지지 않으니 마음은 먹어도 선뜻 옮기지 못합니다.

 장애인편의시설이란 전철역에 리프트 놓거나 에스컬레이터 까는 일만이 아닐 테지만, 우리들 생각과 눈길은 ‘장애인 복지와 문화’뿐 아니라, ‘장애인 아닌 비장애인 복지와 문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남 이야기할 까닭 없이, 저부터 아이키우기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목까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저 또한 아이키우기를 지식으로만 받아들인 채, 아이키우기를 하는 엄마 아빠가 얼마나 ‘세상 복지와 문화’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갈밖에 없는지, 그러면서도 오히려 눈총을 받아야 하는지, 게다가 몸과 마음이 얼마나 지치면서 미치게 되는지 알 길이 없었겠지요. 동네에서 성당을 다니는 서른일곱 아주머니는 집에서 애 보다가 미칠 듯하면 포대기에 아기 똘똘 싸매고 업어서 바깥으로 바람 쐬러 나온다고 하시더군요. 혼자서 애를 보는 일이란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거든요. 더구나 아이만 보아야 하나요. 집안일 해야지, 남편 뒷바라지 해 주어야지, 시부모 계시면 또 시부모도 모셔야지, 아기 말고 다른 형제가 있으면 하나하나 따로 돌보아야지, 일이란 끝이 없습니다.


.. 늙다리는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여물만 맛나게 먹습니다. 망나니도 제 어미 옆에서 날름날름 마른 풀을 골라 먹고요. 뒤꼍에 쟁여 둔 검불나무를 한 아름 가져와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핍니다. 그리고 풍구로 바람을 불어 넣어 가면서 왕등겨를 한 움큼씩 아궁이 속에 던져 넣으니까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이제 아궁이 앞에 쌓아 둔 마른 솔가지를 ‘똑똑’ 부러뜨려 넣습니다. 잔솔가지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잘 타오릅니다. 소죽이 끓는지 솥에서 김이 ‘피이’ 솟아오릅니다. 늙다리는 더 못 참겠는지 빗장 밑으로 목을 쑤욱 빼고 코를 식식거립니다 ..  (17∼18쪽)


 영화 〈워낭소리〉는 못 보았지만, 지난 설날, 옆지기 식구들 사는 일산으로 나들이를 가서, 그곳 식구들하고 ‘일소 부리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다큐멘타리로 보았습니다. 영화만큼 가슴을 적신 이야기인지는 영화를 못 보아 모르겠지만, 영화 〈워낭소리〉가 어떻게 짜여져 있는가는 어렴풋하게나마 헤아리게 됩니다. 마을에서도 꼭 한 집, 당신만 수십 해에 걸쳐서 소를 부려 농사를 지으시는데, 송아지 한 마리를 일소로 부리기까지 어떻게 애를 먹는가 하는 대목에서는 코끝이 찡합니다. 처음 코뚜레를 뚫어 아픈 나머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송아지 모습을 보면서 코끝이 찡하거나 눈물이 안 날 사람이 있을까요. 소를 부리는 할아버지도 미안해 하면서 송아지 등을 어루만져 주는데.

 농사짓는 늙은 가시버시는 ‘지을수록 빚잔치’를 하게 되어, 하는 수 없이 그 아끼고 사랑하던 일소를 팔려고 내놓습니다. 고추를 팔아도 큼직한 한 상자에 고작 2500원밖에 못 받는데, 빚을 안 질 수 없는 노릇입니다. 나라밖으로 판다는 그 큰 고추상자는 상자값만 해도 1500원. 우리가 저잣거리 나들이를 가서 그 상자만큼 고추를 사려면 아마 10만 원은 치러야 할 듯하건만, 농사짓는 사람은 이렇게밖에 일삯을 못 건지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소시장에 간 할아버지는 쓰겁게 웃으면서 소를 도로 데려옵니다. 일소 값을 고작 150만 원 쳐 주기 때문입니다. 고기소로만 소를 사고파는 요즈음이니, 일소로 소를 사고팔려 할 때 어느 누가 사 가려 하겠습니까. 할머니는 빚 250만 원을 갚으려면 소를 팔아야 한다고 채근댔고, 할아버지는 어쩌는 수 없이 소를 팔려 했는데, 소를 팔아도 빚이 100만 원 남게 되면, 아예 소를 못 팔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착하게, 아니 고맙게 일을 잘해 준 소를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면서, 문득문득, 전민조 님 사진책 《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눈빛,2005)이 생각납니다. 이 사진책 겉에는 섬마을 빡빡머리 아이가 일소를 부리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는 나이가 얼마 안 되었으나 지게를 지고 있는데 지겟다리가 땅에 끌릴 듯합니다. 아이나 소나 배불리 먹지는 못하는 듯 몸집이 여위었습니다. 소는 갈비뼈가 드러나고 등날이 날카롭다고 할 만큼 등뼈가 불거져 있습니다.

 지난날은 이 나라 어디인들 배불리 먹으며 살았겠습니까만, 섬마을은 좀더 힘들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런 삶자락은 섬마을 모습을 담은 사진에도 고스란히 담기고, 이렇게 담긴 모습은 그 뒤로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가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가 살아온 모습’으로 또렷하게 새겨집니다.


.. 나는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지요. 아버지는 등불을 늙다리 주둥이 앞에 바짝 갖다 대고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막 소리를 질렀습니다. “언놈이 때렸구나! 우리 늙다리가 우쨌길래 이래 놨노! 헤헤이, 늙다리 코가 이기 뭐꼬! 말 몬하는 짐승을 우예 이래 때리겠노, 으이!” 우리 집 힘든 농사일을 다 하는 일꾼, 아버지가 그리 아끼는 늙다리를 저리 해 놓았으니 펄쩍 뛸 수밖에요 ..  (44쪽)


 인천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ㅈ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저보다 두어 살 또는 서너 살 어린데, 송도고등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가운데무렵, 이이가 다닌 학교 건너편 논에서 일소를 부리며 논갈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송도고등학교 둘레는 온통 아파트로 바뀌었기에, 그 둘레가 시골 논밭이었음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아파트로 갈아엎히기 앞서까지, ‘똑같은 인천’이었다고 하여도, 더욱이 1990년대임에도 기계가 아닌 소를 부리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렇구나,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고, 또 몸소 겪지 않았어도 영화며 텔레비전을 보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안다’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안다고 할 때에는 ‘움직임’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들 삶을 안다고 한다면, 철거민을 만들어서는 안 되며, 철거가 되려는 집에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한테 우악스러운 용역깡패나 특공경찰을 선물로 갖다 안기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경찰총장이나 대통령 부모님이나 동무가 그 ‘철거 대상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할 때에도 그처럼 몰아세울 수 있었을까요. 자기 부모나 동무가 안 산다 할지라도, 스스로 그런 가난과 고단함을 안다고 하는 이들이 그와 같이 몽둥이를 휘두르고 소방차 물을 뿜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경찰총장이나 대통령만 모르지 않습니다. 용역깡패 일을 하는 젊은이와 특공경찰 노릇을 하는 젊은이 또한 ‘철거민 이웃’을 모릅니다. 철거민 이웃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모릅니다. 그리고, ‘일하는 소’ 삶을 모를 테지요. ‘아이키우는 아줌마 아저씨’ 삶 또한 모를 테지요. ‘입시지옥이 무너뜨리는 아이들’ 삶을 모를 테며, ‘일제 식민지 찌꺼기’가 어떻게 우리 삶 구석구석 남아서 힘을 내는지도 모르리라 봅니다.


 (2) 아쉬운 그림이야기 《우리 소 늙다리》


 지나온 우리 삶을 찬찬히 돌아보며 조곤조곤 이야기로 풀어내는 《우리 소 늙다리》를 읽습니다. 구수한 글과 푸진 그림이 잘 어우러져 있어, 이 책을 펼치는 분들마다 ‘참 좋구나, 참 따뜻하네’ 하고 생각하리라 봅니다. 오로지 돈벌기에 매이는 현대물질문명으로 치닫는 한국땅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가를 조용히 일깨워 주고 있으니,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읽히며 보여주면 퍽 괜찮으리라 봅니다.


.. 늙다리는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더니, 내 쪽으로 머리를 돌렸습니다. 아직도 늙다리 주둥이 밑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늙다리는 순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 늙다리 두 눈 밑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늙다리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  (52쪽)


 그런데 그림 몇 대목이 껄끄럽습니다. 무엇보다 ‘소’ 그림이 마음으로 파고들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 그림’인데, 소가 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어미소 젖을 무는 송아지는 더더구나 송아지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릴 적 집에서 소를 키우셨다는 분이 글을 썼는데, 게다가 이분은 《연필을 잡으면 그리고 싶어요》(보리,1997)라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어 주는 길잡이책’을 엮어낸 분인데, 어찌 《우리 소 늙다리》 겉에 그려진 소 그림이 이렇게 엉터리가 되고 마는지 궁금해집니다.

 갓 태어난 송아지도 키가 꽤 큽니다. 제법 자란 송아지는 더더욱 큽니다. 그러나, 그림이야기 《우리 소 늙다리》를 보면 송아지가 목이 아파라 고개를 치켜들고 젖을 물고 있습니다. 글을 쓴 이호철 선생님이 엮은 《연필을 잡으면 그리고 싶어요》에 실린 아이들 그림을 살피면, ‘젖 무는 송아지’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아이들이 그린 ‘소 모습’만 보더라도 송아지 등짝이 어미소 배에 닿는 가운데 송아지가 고개를 모로 돌려서 옆으로 젖을 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필을 잡으면 그리고 싶어요》와 그림이야기 《우리 소 늙다리》를 낸 출판사는 같은 곳입니다.


.. 내가 어릴 때 농촌에서는 소가 집안의 큰 일꾼이었습니다. 논밭 갈고 무거운 짐 나르는 일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러 가지 일들도 다 했으니까요. 어지간한 일꾼 몇 몫의 일을 했습니다 ..  (58쪽)


 오늘날 아이들이 모르는 우리 삶 소담스러운 한구석을 밝히면서 빛내는 일은 큰뜻이 있습니다. 소를 소답게 알아야 소고기를 먹든 소를 부려 일을 하든, 소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엔 그랬지’ 하는 투로 섣불리 아이들한테 ‘지식 + 교훈’만 떠안기려고 하는 우리 어른들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면서, 오늘날 우리 어른들도 ‘소 삶과 매무새’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어설피 치우쳐지거나 비뚤어진 지식과 교훈을 떠먹이고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설 무렵 일산 옆지기네에서 텔레비전을 보니, ‘청량음료가 나쁘고 치약 샴푸 나쁘며 과자 라면 나쁘다’ 하는 풀그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방송사에서 ‘화학첨가물 집어넣은 공산 식료품’이 우리 몸에 나쁘다고 한들, 이런 공산 식료품에 길들어 있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먹이게 됩니다. 제대로 농사지은 먹을거리를 먹이지 않습니다. 값싼 공산품을 ㅇ마트나 ㄹ마트 같은 데 가서 한꾸러미 사들여 자가용 짐칸에 싣고 아파트로 돌아올 테지요. 그리고 집에서 맥주깡통을 따면서 ‘화학첨가물이 얼마나 나쁜가’ 하는 이야기를 텔레비전으로 봅니다. 때때로 《우리 소 늙다리》 같은 ‘옛생각(추억) 불러일으키는 애틋한 이야기’에 눈가를 적십니다. (4342.2.7.흙.ㅎㄲㅅㄱ)
 

 

[동영상] 엄마 젖 먹는 송아지 "예쁘다"

글을 다 읽은 분은 동영상을 보십시오. 이 그림책은 반드시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잘못된 그림으로 정보를 건네는 일은 아이한테 불량식품 먹이는 일보다 더 나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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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군의문사 유족들은 말한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엮음 / 삼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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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는 아들을 머저리로 만들고, 딸한테 생채기를 남긴다
 [잠깐 읽기 24]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책이름 :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글ㆍ사진 :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 펴낸곳 : 삼인 (2008.12.5.)
- 책값 : 12000원



 (1) 내가 겪은 군대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보면서, 이 아기가 사내로 태어나지 않아 얼마나 반가운가 하고 다시금 생각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사내였으면 기저귀를 갈다가 갑자기 오줌을 찍 사면 얼굴에 맞잖아요’ 하고 말하지만, 그런 아기 오줌질이야 아무렇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내로 태어날 때 가장 걱정스러운 ‘군대’ 문제는 아직도 풀릴 길이 까마득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 현재 국방부 훈령인 전공사상자 처리 규정엔 ‘자살’ 규정만 있고 ‘구타나 가혹 행위 등’으로 인한 자살의 경우는 명시돼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공무 수행 중 자살에 대한 순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  (64∼65쪽)


 그렇다고 계집으로 태어난 우리 아이가 ‘군대’ 문제 때문에 피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사귀는 남자아이가 군대에 갈 때라든지, 이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랑하여 혼인할 남자아이가 ‘군대에서 지내는 세월에 걸쳐 몸과 마음에 받은 생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 때에는 똑같이 ‘군대’ 때문에 피를 보게 됩니다.

 저처럼, 군대에서 바보 멍텅이 돌대가리가 되어 버릴 뿐더러, 군대를 거치면서 입이 걸어지고 마음이 메말라 버리는 사람들도 ‘군대’ 때문에 피를 보지만, 저하고 함께 사는 옆지기도 ‘군대’ 때문에 피를 보는 셈이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또 장인 장모 모두 ‘군대’ 때문에 피를 보는 셈입니다.


..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했다. 국가에서 데려간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는데 그 원인조차 밝히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함께 배를 타고 먹고 잤다는 부함장이라는 사람은 20여 일이 지나서야 아들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들 잃은 슬픔에 잠겨 식음 전폐하기를 몇 날 며칠. 부모는 생업도 접고 아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찾아나섰다. 그 과정에서 아들의 속옷이 제대로 인계되지 않고 심지어 일부 품목은 부모의 확인 과정도 거치지 않고 세탁돼 있었다. 자꾸 감추려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  (76쪽)
 

 나날이 군대 가는 사내 숫자가 줄어, 이제는 중졸자도 군대로 끌려간다고 합니다. 얼마 앞서까지는 중졸자까지는 군대에 안 갔습니다. 제가 군대에 간 1995년에는 ‘고퇴자(= 중졸자)’도 군대에 갈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중졸이면서 군대에 온 녀석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군대에서 “야, 넌 어떻게 군대에 와서는 안 되는데 군대에 왔느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대한민국 군대에 너희들이 잘못 들어왔어도 국방부 시계가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어!” 하면서 까닭없는 주먹질과 얼차려를 덤으로 받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무렵 제 후임병으로 ‘다른 형제와 친척 없는 외동 장남이면서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생활보호대상자’ 집안 아이도 여럿 들어왔는데, 도무지 군대에 와서는 안 되는 이 아이들이 어찌 군대에 들어왔던가 하고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신상기록카드를 곰곰이 살피니, 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북파간첩 키우는 부대’로 끌려갔다가(징집) ‘북파간첩 대상자 부적격 판정’을 받고 ‘일반 군대, 이 가운데 강원도 산골짝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힌 육군 보병’으로 흘러든 셈이더군요.

 요즈음도 북파간첩을 키우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1997년에 전역을 하는 그때까지, 한국군에서는 틀림없이 북파간첩을 키웠고, 그 부적격자는 우리 부대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연고자가 더 없는 외로운 집’에서 살던 아이들이었고, 이 아이들은 자기들이 군대면제자였음을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훈련소를 거쳐 자대에 왔으며, 전역하는 날까지도 이런 일은 1급비밀에 붙여져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어릴 적 살던 동네 이웃집 아저씨도 북파간첩 출신이었습니다. 이 아저씨는 키 크고 덩치 우람해 또래 동무들 모두가 무서워했지만, 우리들보고 ‘남자는 체력단련을 잘해야 해!’ 하고 으르렁댈 때를 빼놓고는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 집 형은 아버지한테 얻어맞으면서 태권도와 무술을 배웠고, 집에서도 매섭게 체력단련을 해야 했습니다. 북파간첩 출신 아저씨는 5층짜리 아파트 마당에 샌드백과 평행봉을 손수 용접하고 시멘트 부어서 만들어 놓고 우리보고도 체력단련을 하라고 시켰고, 아저씨 말이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체력단련은 재미있는 놀이라서 곧잘 즐겼습니다.

 아저씨네(라기보다는 이웃집 형네) 놀러가면 때때로 아저씨가 임진강이며 북한강이며 물속으로 헤엄쳐 북녘으로 넘어 들어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당신이 군대에서 일찍 나온 까닭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통이 나서 자기 동료가 바로 옆에서 온몸에 총알구멍이 나면서 죽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동료 주검이라도 건지고 싶었지만 자기 또한 죽을까 두려워 혼자 빠져나왔다는데 그 죄책감을 씻을 수 없었답니다.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 5분 동안 물속에서 헤엄쳐야 하는 훈련을 받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물속에서 자기들이 숨을 못 참고 물 밖으로 나올라치면 고참들이 군화발로 머리를 까고 몽둥이로 두들기면서 꼭 5분 동안 물속에서 물을 마시면서라도 버티게 했다고 했는데, 소름이 돋는 한편, 나도 5분 동안 물속에서 참을 수 있을까 하고 집에서 바가지에 물을 받아 머리를 처박아 보곤 했습니다.


.. 진상 규명 결정이 내려졌지만, 늙은 아비와 어미는 여전히 답답함이 남았다. 아들의 사망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안 받고, 국방부가 군의문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지도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 가족들은 사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에 동의했다.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지만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부검 결과는 대부분의 의문사가 그렇듯 자살이었다. 심한 모욕과 얼차려, 구타를 자행해 아들을 사지로 내몬 병사와 간부들은 제대로 된 징계 한 번 받지 않았다 ..  (81, 94쪽)


 어릴 때에는, 저 또한 군대라는 곳에 들어가기 앞서까지는, 우리 아버지가 군대에서 지역차별을 받으면서 얼차려와 주먹다짐으로 시달리다 못해 고향 동무들하고 같이 실장갑에 대못을 박고 “썅, 서로 죽어 보자!”고 싸움박질을 했다는 일이 장난이나 거짓이나 뻥튀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군대에 들어가고는, 그리고 그 군대가 남녘땅 군대에서는 가장 외지고 춥고 고되다는 곳으로 용케(?) 들어가서 스물두 달을 채우고 나오는 동안에는 생각이 아주 뒤바뀌었습니다. 왜 부잣집 사람들이, 정치꾼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군대에 안 보내려’ 하는지를 온몸으로 깊디깊이 깨달았습니다. 훈련소와 자대에서는 ‘신상명세서 쓰기’ 종이를 나누어 주며 한쪽에 ‘내 식구나 친척 가운데에 국회의원, 시도 지사 따위가 있는지 적으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유명인사나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 간부 가운데 식구나 친척이 있으면 적으라 했는데, 이렇게 적은 동기들은 모두 ‘좋은’ 데로 빠져나갔고, ‘줄 닿는 뒷배’가 없는 저 같은 떨거지는 기차와 배와 군짐차를 여러 차례 갈아타면서 강원도 양구 산골로 엉덩이가 걷어차이며 들어갔습니다.

 자대에 들어가던 무렵부터 눈이 얼마나 오지게 오던지, 사단휴양소에서 이틀이나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눈밭을 헤치고 겨우 자대에 들어가니 더블백을 풀기 앞서 빗자루와 눈삽과 흙삽을 하나씩 받고는 한 시간 동안 산을 타고 올라가서 보급로 눈치우기를 해야 했습니다. 훈련소와 자대를 거치며 ‘이놈(고참)들 눈에 밉보이면 그대로 죽어 버릴 수 있구나(이때는 ‘의문사’를 몰랐고, 그냥 ‘개죽음’만 알았습니다)’ 하고 느꼈기에 죽자 사자 고참 꽁무니에서 1미터 거리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따라붙어 겨우 ‘눈치우기 산타기’에서 낙오를 안 했는데, 고참은 자기 뒤에 1미터 넘게 떨어진 모든 후임병을 눈밭에 머리박기를 시키며 발로 뻥뻥 걷어찼습니다. 등과 배와 얼굴을. 낙오를 안 해 옆에서 다리쉼을 할 수 있는 저로서는 ‘안 맞아서 다행’이 아니라, ‘나만 안 맞으니 이따 돌아가서 지금 맞은 사람(다른 고참)들한테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크게 들어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이등병 때, 치약뚜껑에 머리박기를 하며 저녁점호를 받던 동기는 ‘치약뚜껑에 머리박기를 하는 채’로 고참한테 발길질을 받아서 이마가 쭉 찢어져서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고, 제가 전역할 무렵 스물여섯 나이로 고시에 실패해서 들어온 ㄱ대 공부벌레 늦깎이는 날마다 뒷간에서 대여섯 살 아래 동생(고참)들한테 얻어맞고 우느라 늘 눈이 부어 쳐다보기에 언제나 안쓰럽기에, 제 앞으로 나오는 담배를 몇 갑씩 슬그머니 주머니에 찔러 주곤 했습니다. 이 녀석(형)은 이때부터 담배를 배웠습니다.


.. 경찰들은 또 장례를 치러야 된다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먼저 현덕의 동료 부대원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혹시 부대에서 가혹 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살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경찰은 가족들의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단, 부대원과의 개별 면담은 허락하지 않았다 … 부모는 아무리 애간장이 끊어져도 죽은 아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찾아간 군부대에서는 오히려 “아들이 나약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부대에 피해를 주었으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을 쳤다. 적반하장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과 맞서기에 늙은 부모는 너무나 힘이 없었다 ..  (146, 156쪽)


 그렇지만 모든 군대가 주먹다짐과 욕설과 얼차려로 얼룩져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나왔던 그 양구 골짜기 부대만(민통선 안쪽에서 이북 군인과 마주하고 있는) 더 모질었는지 모릅니다. 해병대 전적비가 있는(도솔산) 그 산골짜기 부대는 한 해에 꼭 닷새만 해를 볼 수 있는 비와 안개와 눈으로 덮인 곳이었고, 주둔지 대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중대에서도 소대가 따로 지내기도 했던 만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시무시함이 더 깊었는지 모릅니다.

 사단장이나 별 달고 무궁화 단 분들께서 우리 부대에 나들이하실 때마다 모든 중대원이 하루 내내 ‘취나물 뜯기 사역’을 해서 몇 마대씩 선물로 앵겨 드리지 않으면 대대장 지시사항으로 우리 중대에 벼락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뭐 이런 일은 괜찮았습니다. 한 해에 한 번씩 사단장님께서 헬기가 아닌 지프를 타고 가칠봉전망대로 헤엄을 치러(가칠봉gop 꼭대기에는 수영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별 단 분들께서 헤엄치러 놀러옵니다. 마땅한 소리이지만, 지오피 꼭대기에 마련된 수영장은 우리 같은 땅개들이 자갈과 시멘트와 모래와 물을 주둔지부터 한 사람씩 등짐 지고 날라서 만들었습니다) 가시는데, 사단장님 지프가 작은 돌멩이 하나에라도 바퀴가 통! 하고 흔들리다가는 연대장 지시사항으로 우리 중대에 불벼락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뭐 이런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혹한기훈련을 앞두고 사격훈련을 하는데 그 추위에 총기고장도 잦고 손이 떨려 제대로 맞추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런 형편은 아랑곳 않고 제대로 못 쏜다고 몇 시간 동안 ‘뒤로 포복’으로 눈밭을 밀며 자대복귀 시키다가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 무전병 헬멧에 총질을 해대어 구멍을 내고 다음에는 우리들 대갈통에 구멍을 내겠다던 중대장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일도 그리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관물검사를 하며 ‘불온서적 색출’을 하는데,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불온서적이라고 스무 권 남짓 찾아내어 태우게 하는 일이 저한테 떨어져, 어찌 책을 태우나 속이 아파서 안 태우고 소각장 한쪽 구석에 몰래 숨겨 놓았으나 들키고 말아, “너 빨갱이 아냐? 간첩 아냐? 너희 같은 새끼들은 총으로 쏴죽여서 저기(철책) 안쪽에 갖다 던지면 월북했다고 신고하면 그만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갖은 징계와 구박과 주먹질을 받던 일도 있었는데, 여느 날 늘 벌어지는 주먹다짐과 욕설과 얼차려를 돌아보면 새발바닥 피 같은 장난입니다. 논산훈련소에서 똥물먹기가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그러기 앞서 우리 부대에서도 푸세식 뒷간을 혀로 핥아서 닦기를 시키는 고참이나 중대장이나 행정보급관이 있었고, 삽날과 곡괭이자루로 맞는 일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으며, 소총 소염기에 머리박느라 머리에 구멍이 나는 일도 잦았습니다. 






 (2) 군대에서 살아남으면 용하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참 많이 맞았지만, 저는 적게 맞은 셈이고, 저 또한 후임병을 아주 적게 때렸습니다. 저는 꼭 세 번 때렸는데 세 번 때릴 때 거의 반죽음으로 때려 놓았으며, 웬만하면 주먹이 아닌 입으로 후임병을 들볶았습니다. 저를 때렸던 고참은 전역 뒤에 어느 한 사람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저한테 맞은 후임병 셋도 두 번 다시 연락이 안 됩니다. 때린 분한테는 왜 때렸는지 묻고프고, 맞은 동생한테는 너무 미안하다고 빌고 싶으나, 어느 누구도 보거나 만나거나 알고 지낼 수 없습니다.

 그저 다들 그 끔찍한 데에서 살아남았으니, 그 일로 다 잊자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저한테 욕 많이 먹던 어느 분은 예닐곱 해 앞서인가 길거리에서 두어 번 마주쳤는데, 술이나 마시자며 연락처 좀 주고받자고 했으나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 마시지’ 하면서 끝내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모르지만, 모두들 어디에선가 어떻게든 군대에서 보냈던 일은 훌훌 털어버렸는지 모를 노릇이고, 털어낸다 해도 털어지지 않아 그때 생채기가 오늘날 자기 모습으로 굳은 가운데 사람들과 부대끼고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우리 애를 제일 괴롭혔던 그 군인이, 아주 부대 안에서 소문이 났더라고. 부산역 TMO에서 그 자를 조사하는데, 난 좀 늦게 갔어. 헌병 조사관이 추궁을 하니까, ‘어, 그럼 진술 거부하겠다’ 그러더군. 그러니 헌병이 또 달래서 진술을 시키는데……. 그 정 아무개라는 사람이 날보고 힐책을 하더라고. ‘왜 아들을 그리 약하게 키웠습니까’라고. 바로 조사관들 앞에서, 허허허 ……. 허허허, 우리 애를또 많이 괴롭혔던 자들 중에 전주에 있는 한 명은 그래도 가식적으로나마 사과를 하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쥐어박아도 살살거리고 살아남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는 뜻이겠지.” ..  (250쪽)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이라는 책을 읽으며, 어느 한편으로는 ‘군대에서 죽은 이 사람들은 그나마 자기들 목숨을 내려놓았을 때’ ‘그래, 이제 더는 안 맞아도 되고 더 욕을 안 먹어도 되며 더 속으로 눈물 안 흘려도 돼’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 군대 적 때 일이 그러했으니까요. 이등병 때 수없이 얻어맞고 불쌍하게 있던 동생들이 일병이 되고 후임병이 생기니 자기가 받은 그대로 후임병한테 고스란히 물려주는 모습을 보며, “야, 너도 이등병 때 그렇게 겪었는데 왜 그러느냐?” 하고 불러세워 따끔히 한 마디 하면 “네, 죄송합니다! 안 그러겠습니다!” 하면서도 눈빛에는 ‘씨, 씨, 그동안 맞은 만큼 돌려줘야지!’ 하는 불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곳은 뼛속 깊이 ‘시키는 대로 해라. 안 그러면 맞는다. 맞다가 죽을 수 있다. 맞다 죽으면 그냥 개죽음이다’ 하는 생각이 박혀 있으니 우리들 여느 사람 여린 힘으로는 어쩔 길이 없는가 싶곤 합니다. 그냥저냥 이등병 일병 때는 죽지 안을 만큼 맞고 버티자고 하다가, 상병 병장이 되면 죽지 않을 만큼 때려 주면서 속풀이 하자고 생각하게 되는가 싶곤 합니다. 안 맞고 크면 이상하고, 안 때리며 고참질 하면 또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가 싶습니다. 제가 상병이 되어도 동생들을 한 번도 안 때리니 동기들이 “야, 너만 안 때리면 우리가 어떻게 되냐. 너 때문에 우리가 상병이 되도 병장들한테 맞잖아. 그렇게 하면 안 돼!” 하고 자꾸 그래서, 상병 6호봉에 이르러 처음으로 동생들한테 욕을 했고, 병장 계급장을 달고 나서 비로소 주먹다짐을 했습니다. 이때에는 “얌마, 병장이 되어서도 그러면 우리 밑에 있는 애들이 함부로 날뛰어!”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리하여 군대 조직 질서가 남자들 몸과 마음이 하루하루 또아리를 틀고, 사회에 돌아와서도 이 버릇이 씻기지 않아, 한국땅 남자들은 ‘군대에서 아무리 몸소 손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옷을 개고 내무반 쓸고 닦고 이부자리 치우고’ 했어도, 군대에서 벗어나는 그때부터 모든 집안일은 ‘여자들이 알아서 할 일’로 넘기고, 무슨 일만 있으면 쉽게 주먹을 들고 손찌검을 하고 회초리나 몽둥이를 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푸름이들이 ‘제도권 교과서’가 아닌 ‘마음밭 살찌우는 진짜 책’을 찾아나서지 못하듯, 군대지옥에서 풀려난 젊은 사내가 ‘폭력으로 얼룩진 위계 질서’를 떨구지 못하고 자기 또한 ‘밥그릇 서열과 주먹힘’ 따위로 사람을 깔보거나 얕보거나 푸대접하지 않느냐 싶어요.


.. “텔레비전을 보면 매번 군대가 좋아졌다, 군대가 변했다는 얘기를 떠들잖아. 난 그거 하나도 안 믿어. 군대 깊숙이 자리잡은 폐쇄성과 폭력성이 사라지기 전에는 변했다는 말을 하면 안 돼.” ..  (98∼99쪽)


 2006년 여름이던가, 서울 어느 미술관에서 ‘이름난 어느 서양 그림책 작가’ 원화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그분 이름을 잊었지만, 온나라 어린이와 어버이한테 사랑받는 분인데, 이분은 미국사람이면서 ‘군대에 안 가고 산림보호원 공익근무’를 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총을 드는 일은 자기 마음을 다치게 할 뿐 아니라, 내 이웃을 다치게 하기에 군대에 안 가겠다고 하여, ‘대체 복무’로 산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자연을 들이마시면서 자연사랑과 사람사랑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고 밝히더군요.

 오늘날 한국땅에서 군대라는 조직을 키워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라도 키울 노릇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돈-이름-힘이 있는 사람은 다 빼돌릴 수 있는데다가, 군대라는 곳부터 ‘좋고 나쁜’ 곳으로 갈리는 한편, ‘사람 죽이는 훈련’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우리 스스로 이 땅 젊은 넋을 살인기계이자 바보로 만드는 틀거리가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대체복무제’가 하나도 없다면, 우리 나라 앞날이 어찌 될는지 걱정과 근심일 뿐입니다. 권력자한테는 젊은 넋이 모두 깨어 ‘권력이 썩지 않도록 일어서는’ 일이 걱정과 근심일는지 모르나, 이 나라와 삶터를 돌아본다면, 젊은 넋은 ‘살인기계 훈련’이 되도록 할 일이 아니라 ‘참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몸을 기르고 다스리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손길을 바라는 외로운 어르신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손이 모자란 공장과 농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젊은 넋이 세상을 더 알뜰하고 애틋하게 껴안거나 부대끼도록 하자면, 이 젊은 넋들 손을 ‘참다운 땀방울 흘리는 곳’으로 돌려놓아야지 싶습니다. 젊은 넋이 총칼 훈련 받을 시간에, 시골 논밭에서 손농사를 짓도록 하면, 우리 나라 농업은 100% 유기농으로 바꾸는 한편, 나라밖에서 곡식과 푸성귀를 사들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넉넉할 수 있습니다. 젊은날, 공장에서 일하면서 ‘물건 하나 만들기까지 얼마나 어려운가’를 몸소 배울 수 있고, 이 젊은이들이 새벽녘 길거리 청소를 해 보면서 ‘우리가 술주정을 하면서 길을 마구 더럽히거나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일이 동네를 어떻게 망치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땅 모든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편, 또래 동무들뿐 아니라, 이 나라 절반을 차지하는 딸들한테 사랑스러운 벗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군대 틀거리로는 이 땅 모든 아들들은 이태 동안 영 글러먹은 머저리나 깡패가 되어 갈 뿐입니다. (4342.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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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작가의 상수리 나무집 사람들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공선옥 지음, 이형진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81 ― 아픔을 먹고 사랑으로 나눈 ‘정신대’ 할머니
 : 공선옥, 《상수리나무집 사람들》



- 책이름 : 상수리나무집 사람들
- 글 : 공선옥
- 그림 : 이형진
- 펴낸곳 : 어린이중앙 (2005.5.31.)
- 책값 : 8500원



 (1) 아픔을 먹고 살아가는 할머님들


 한국땅에서 태어나 한국사람으로 살았던, 그러나 한국 여자였기에 ‘성노예’가 되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국 정부에 등록한 ‘성노예 피해자’는 이백서른네 분이라 하고, 이 가운데 백 사람이 채 못 되게 살아 있다고 합니다. 성노예 피해자는 공식 집계로 잡히지 않았고, 또 나라에서 소매 걷고 찾아나서거나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나라는 강제징용자와 강제징병자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원폭피해자도 제대로 살피지 않았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땅을 빼앗긴 사람들 아픔을 고이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농사꾼들 쌀을 빼앗아갈 때 굶어죽거나 굶주린 사람들 슬픔을 두루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또 그 만주와 일본에서 다른 데로 보내진 사람들을 하나도 어루만지지 않았습니다.

 참을 숨기고 거짓을 드러낸다는 새 교과서가 나오는 까닭은 먼 데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바로 가까이에서 우리가 몸소 겪은 아픔과 슬픔을 아픔과 슬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껴안지 못했는데, 어찌 참다운 교과서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예 거짓스런 교과서가 나오고 아이들한테는 거짓된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가르치게 되며, 아이들 스스로 참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알아보고자 책방이나 도서관 나들이를 해 보았자, 참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일러 줄 마땅한 책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도서관 가운데 책을 알뜰히 갖춘 곳이 드물 뿐더러, 이런 도서관까지 갈 겨를조차 없이 입시에 매이고 돈벌이 회사일에 얽히는 우리들입니다. 학교를 다니건 학교를 안 다니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발자국과 참모습을 알고 느끼고 새기면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짜여져 있습니다.


.. 옥주가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을 때, 길거리로 젊은 대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관계를 끊고 살았던 일본하고 다시 왔다갔다 할 수 있는 협정을 맺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다 … 일본에서 돈을 받았다고 했다. 소문에는 그 돈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많은 조선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서 일을 시키고, 전쟁터로 내몰아 죽게 하거나 다치게 해서 주는 돈이라고도 했다. 일본에서 받은 돈 중에 얼마를 일본군에 끌려가 전쟁을 치르다가 죽었거나 다친 사람들을 조사하여 위로비로 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도 정신대에 끌려갔던 여자들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았다. 옥주는 동사무소에 가서 물었다. “혹시 정신대에 끌려갔다가 온 사람들에게도 나라에서 돈을 주나요?” 동사무소 사람은 옥주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말했다. “아줌마가 정신대 갔다 왔소?” “…….” 옥주는 대답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동사무소 사람이 마치 나무라듯이 물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조사를 한다 해도 정신대 갔다 왔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소? 정신대는 솔직히 일본 군인의 노리개가 아니었소. 누가 알까 부끄럽지도 않소?” 옥주는 그만 동사무소 사람을 때려 주고 싶었다. 옥주가 뭘 잘못했다고 부끄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옥주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일본 군인한테 속아서 따라간 것뿐이다 … 동사무소 사람은 제 어머니나, 누나나, 여동생이나, 딸이 정신대로 끌려갔어도 노리개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  (42∼45쪽)


 곰곰이 되새겨 봅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던 1982∼1993년 사이에, 우리한테 역사를 가르쳐 준 분들 가운데 ‘정신대’든 ‘종군위안부’든 ‘성노예’든 한두 마디라도 올바르게 일러 주면서 깨닫도록 했던 목소리가 얼마나 있었는지.

 글쎄, 저로서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고 떠올립니다. 스쳐 지나가는 말마디로는 들은 적 있으나 ‘시험문제에 안 나오는 이야기’라서 그랬는지, 또 우리가 그리 재미있어 하지 않을(?) 듯하다고 그랬는지, 학교를 다니는 동안 배운 적은 없습니다. 학교 바깥에서, 그러니까 도서관에서도 못 찾고 인천에서 크고 책 많다고 내로라하는 새책방 어디에서도 정신대 할머니를 다룬 책은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비로소 정신대 할머니들 다룬 책이 흘러나왔을 때 알아보고 깜짝 놀랐고, 그 뒤로 하나하나 살펴보고 알아가면서 읽어 나갔습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부터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소설에 이르기까지, 또 《정신대실록》부터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까지, 또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부터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까지, 또 《일본군 군대위안부》부터 《위안부 리포트》까지, 샅샅이 찾고 보면 고작 열 권 남짓밖에 되지 않는 ‘성노예 피해 여성’ 이야기를 다룬 책들입니다. 제 깜냥껏 찾고 살피며 읽고 간직하고 있는 책으로, 이밖에 《증언, 여자 정신대 8만 명의 고찰》(센다 가꼬오), 《위안부》(조지 힉스), 《실록 여자정신대 그 진상》(한백흥), 《자료집, 종군위안부》(吉見義明),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강용권), 《봉선화에 부치는 고백》(히노 순조, 쯔즈끼 쯔토무), 《종군위안부》(千田夏光), 《나, 내일 데모 간데이》(혜진), 《할머니 군위안부가 뭐예요?》(한국정신대연구소), 《종군위안부》(이토 다카시), 《종군위안부》(노라 옥자 켈러) 들이 있습니다.


.. 옥주는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렸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몸을 닥치는 대로 두들겼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옥주는 안다. 그것은 분노 때문이라는 것을. 어린아이와 여자와 노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나쁘다.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쁘다. 옥주는 그런 사람을 보면 분노가 일었다 ..  (92쪽)


 우리 스스로 돌아보자니 너무 괴로워 묻어 버리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되새기자니 참으로 부끄러워 덮어 버리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알아보자니 자료가 턱없이 모자라 두 손 드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가르치자니 성교육조차 제대로 안 되는 가운데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하는 탓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태일을 추모하고 떠올리듯, 백범을 떠올리고 되새기듯, 우리들은 우리 땅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한 가슴을 읽고 슬퍼한 마음을 헤아리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잊지 않을 수 있어야 우리 세상과 삶을 아름다이 가꿀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을 잊으면서 잘못되거나 뒤틀린 쪽으로 마음이 끌리게 되고, 되새길 일을 되새기지 않으면서 엉뚱하거나 비뚤어진 샛길로 눈길이 쏠리게 되지 않느냐 싶어요.


.. “히로시마랍니다. 원자탄이 떨어졌지요. 차라리 그때 다른 사람처럼 죽어 버렸다면…….” 옥주는 혹시 아낙의 입에서 정신대라는 말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원자탄이 떨어진 히로시마라고 했다. 정신대 갔다 온 사람이건 원자탄을 맞은 사람이건 힘들고 고통스럽게 사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정신대 갔다 온 옥주와 아낙이 다른 건, 그래도 이 아낙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비록 건강하지 못한 아이라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본 아낙이 옥주는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123쪽)


 정신대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군대위안부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때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노예란 머나먼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날 이 나라 우리들과 이웃들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내 이웃과 동무가 겪은 일이고, 내 이웃과 동무가 아니라면 내 식구와 살붙이가 겪은 일입니다. 우리 마을에서 일어나고 우리 옆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가지 못하던 때 어이없이 짓밟히면서 겪어야 한 일입니다.


.. “팔자도 내림이라, 듣자 하니 떡장수 할멈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하더니 그 딸은 또 미군 위안부라. 모녀가 팔자도 기구하네.” 그러면서 사람들은 또다시 왁자하게 웃어댔다. 시장 사람들은 영희가 미군 부대 여자라서 더럽다고 한다. 한국사람과 다른 새까만 아이를 낳아서 영희는 사람들에게 더 손가락질을 받는다. 옥주도 안다. 영희가 말 안 해도 옥주는 이미 영희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을 다 안다. 영희가 미군 부대 여자였다는 것을 옥주도 알고 용화도 알고 길수도 안다. 알아도 모른 척했다. 아니, 아니까 굳이 묻지 않았다. 그렇지만 영희가 왜 더러운가. 영희는 절대로 남한테 못살게 굴거나, 남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남을 욕하거나, 남을 속여먹거나 하지 않았다. 영희는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송희를 낳았고, 송이를 키우려고 노력하고, 송이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  (139∼140쪽)


 한미자유무역협정은 하루아침에 터져나오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대운하나 4대 강 정비라는 토목일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한다는 역사왜곡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저지르는 역사왜곡은 몇몇 사람 손으로 일으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어지지 않은 일이란 없으며, 얽히지 않은 일이란 없습니다.

 성노예 피해자를 지켜 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원폭피해자 1세뿐 아니라 피해 2세와 3세도 끌어안지 못합니다. 원폭피해자를 끌어안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재일조선인과 재러조선인과 재중조선인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재외국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라는 이 나라로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를 돌보지 못하며, 이주노동자를 돌보지 못하는 나라는 노동자를 보살피지 못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 보금자리를 흔들리게 합니다.

 나라를 일구는 노동자(와 농사꾼 모두)를 땀흘리는 보람으로 갚음하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교육이 교육답게 이루어지지 않기 마련이고, 교육이 교육답게 이루어지지 않는 마당에 정치가 정치답거나 경제가 경제다울 리 없습니다. 정치가 정치답지 않은데 신문이 신문다울 턱 없으며, 방송이 방송다울 턱 없습니다. 신문방송이 옳은 목소리를 내지 않는 가운데 사람 삶터에다가 자연 삶터는 제다움을 잃고 무너지게 되고, 사람과 자연이 사람 그대로 자연 그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판에 책이 책다울 바탕은 서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성노예 피해 여성 이야기를 살피지 못하는 뿌리는, 또 이와 같은 이야기책이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바탕은, 또한 이런 책이 가까스로 한두 권 나와도 거의 알려지지 못할 뿐더러 읽히지도 못하는 흐름은, 오늘날 우리 나라를 아주 단단히 휘어감고 있습니다. 정신대 할머님들이 850번째 수요집회를 넘기고 900번째 수요집회를 넘기며 1000번째 수요집회에 이르도록 목숨을 다부지게 이어나가면서 목소리를 낸다 하여도, 우리 사회 틀거리는 이분들과 우리들 모든 밑바닥 사람들 목소리를 귀담아듣거나 받아들일 만한 매무새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이런 매무새를 갖추고자 애쓰지 않습니다.


 (2) 어린이책으로 읽는 ‘정신대 할머니’ 이야기


 소설쓰는 공선옥 님이 《상수리나무집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책 하나 써냈습니다. 써낸 지 벌써 네 해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는 아픔이란 아픔은 빠짐없이 온몸으로 겪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는 상수리나무집 이야기입니다.

 상수리나무집 임자는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된 점쟁이 할머니입니다. 점쟁이 할머니는 참으로 오랫동안 혼자 차려 먹는 밥상이 외로워, 자기마냥 외로운 정신대 할머니인 옥주 할머니를 받아들입니다. 점쟁이 할머니와 정신대 할머니 두 분은, 아프고 힘든 나날을 함께 겪어내다가 자기들과는 사뭇 다른 아픔을 안고 살던 장님 아버지와 어린아이를 받아들이고, 또 떠돌이 개를 받아들인 다음, 양공주 노릇을 했던 아줌마와 살갗 까만 어린아이를 마지막으로 받아들입니다.


.. 아이 엄마는 마음이 많이 다쳐서 이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다친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친 사람 스스로 열기 전에는, 다친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여는 데 다른 사람은 그저 도와줄 수 있을 뿐 ..  (67쪽)


 있이 살아도 모자란 판에 없이 살면서 밥숟가락 하나 더 얹으며 꾸리는 상수리나무집 살림살이입니다. 없이 사니 맨손으로 세상과 부딪히면서 저마다 다 다른 밥벌이를 제 깜냥껏 하는 가운데 서로서로 돕습니다. 이웃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산다’고 손가락질이지만, 이런 손가락질은 ‘더는 흐르지 않는 눈물’로 삭이면서, 당신들보다 마음이 더 다친 또다른 이웃을 걱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옆에 가까이 있으면 이웃이라 할 수는 있을 테지만, 눈물나는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없다면 이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상수리나무집’ 이웃이라는 사람들은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동떨어진 사람들입니다. 바가지를 씌우는 사람, 속여먹는 사람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고, 달삯을 너무 높게 올려받으려는 집임자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휙휙 던져 버리는 사람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고, 아는 체 모르는 체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이웃을 사귀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옆집 사람한테 이웃이 되려 하지 않습니다. 단단한 쇳덩어리로 되고 빈틈없는 열쇠로 잠긴 문을 빠꼼히 열고 승강기로 씽하고 내려가 자동차에 열쇠를 꽂고 부릉 하고 내달리면서 집과 일터, 또는 놀 곳으로 움직이는 거의 모든 우리들입니다. 승강기에서 마주치면 고개를 까딱이기는 하겠지만 서로 무슨 일을 하고 이름은 어찌 되며 나이는 얼마인지 식구는 누가 있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서로서로 가슴에 품은 기쁨과 슬픔을 하나도 함께 나누지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서로 모르는 채 따로 떨어져 지내니 서로를 더 모르게 되고, 서로를 더 모르게 되니, 이웃사람 삶에도 눈길을 안 두고, 우리 둘레 사람 모두한테 눈길을 못 둡니다. 나라에서 무슨 짓을 하건 말건, 정치꾼이 무슨 공약을 내놓다가 무슨 일을 하건 눈길을 안 보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고, 시험문제가 어떤 지식을 다루고 있거나 말거나 마음을 안 씁니다. 그예 아이들이 시험점수 잘 받으면 그만이고, 그저 내 은행계좌에 일삯이 많이 들어오면 장땡입니다.


.. 일어나서 미음을 한 숟갈 떠먹으려는데, 눈에서 뭔가 핑글 돌면서 죽그릇 위에 투둑, 하고 떨어졌다. 눈물이다. 지금껏 마음껏 흘리고 싶어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지금, 영희가 끓여 준 죽그릇에 투둑, 보석처럼 떨어지고 있다. 사실 옥주도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만들어 준 음식을 너무도 오랜만에 먹어 보는 것이다 … 어느새 영희는 울음을 멈추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옥주의 말에 수줍게 웃는 영희는 지난봄 처음 봤던 그 영희가 아니다. 옥주는 서서히 변하는 영희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갑자기 용기가 생긴다. 슬픈 사람에게는 오히려 슬픔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옥주는 생각했다. ‘내 얘기를 하면 영희가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예전에 내가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랬던 것처럼.’ ..  (107, 110쪽)


 우리 모양새를 돌아볼라치면, 《상수리나무집 사람들》은 퍽 지루하달지, 뭔 소리인지 모른달지, 구태여 이런 책까지 왜 읽어야 하느냘지 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우리 이웃뿐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한테 생채기를 입히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개나리는 개나리이고, 별이는 별이입니다. 잘한 일은 잘한 일이고 옳지 않은 일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옳지 않은 일이나,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면 할 만한 일이 되겠습니까. 옳지 않은 짓을 하는 사람이나, 얼굴이 잘생겼다든지 이름값이 높다든지 하면 괜찮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 “별이야, 지금만 울고 나중에는 울지 마라. 별이가 울면 송이도 운단다.” “할머니, 내가 왜 우냐면요,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분해서 울어요.” “별이가 강해지면 분하지도 않단다. 별이는 강해져야 한다. 몸과 마음이 다 강해지면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괜찮단다. 저기 예쁜 개나리꽃이 피었구나. 개나리꽃이 예쁜 건 추운 겨울을 이겨내서 그렇단다. 강해지면 꽃처럼 예뻐진단다. 예쁜 것들은 모두 강하단다. 예쁜 사람을 보고 누가 뭐라고 하겠니. 개나리를 보고 아무리 개나리가 아니라고 해도 개나리는 개나리란다. 별이는 별이가 되어라.” “알았어요, 할머니.” ..  (173쪽)


 그런데 한 가지, 이야기책 《상수리나무집 사람들》을 읽으면서 아쉬움 한 가지가 걸립니다. 이야기 끝에, 상수리나무집이 헐리며 아파트가 새로 지어지는데, 상수리나무집에 살던 정신대 할머니와 ‘장님 아저씨와 양공주 아주머니네’가 따로따로 임대아파트를 얻어 이웃집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마무리가 돼요. 그렇지만 참말 오늘날 우리네 임대아파트란 집이 이렇게 쉽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한테 군말없이 주어지는지 궁금합니다.

 이제까지 고되고 고달프게 살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 비로소 빛을 구경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쩐지 우리 세상살이하고는 잘 안 맞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읽을 사람이 초등학교 높은학년이나 중학생 나이임을 헤아린다면, 이렇게 살며시 웃음을 띠면서 끝을 맺는 일이 썩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자꾸자꾸 이야기 마무리가 아쉽고 허전하고 어딘가 바람이 피식 빠져 버린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지만. (4342.2.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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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말을 걸다 - 백성현 포토 에세이
백성현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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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삶’인 줄 알면, 사진은 저절로 예술이 된다
 [잠깐 읽기 23] 백성현, 《당신에게 말을 걸다》


- 책이름 : 당신에게 말을 걸다
- 글ㆍ사진 : 백성현
- 펴낸곳 : 북하우스 (2008.12.19.)
- 책값 : 15000원



 (1) 사진, 사진기, 사진쟁이


 사진 찍는 사람 많고 사진 즐기는 모임 많습니다. 이제는 사진이 따라붙지 않는 신문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사진이 함께하지 않으면 재미없어 하거나 지루해 하기까지 합니다. 글로만 이야기를 건네는 문학책에도 사이사이 사진(또는 그림)이 끼어들기 일쑤이고, 과자봉지며 길거리에 붙거나 흩날리는 광고전단지에도 사진이 박혀 있습니다.

 초상권이란 예전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으나, 오늘날 최민식 님처럼 《인간》 사진을 찍으면 틀림없이 멱살잡이가 나오거나 법원에 서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필름사진만 있던 때, 35미리 필름 쓰는 사람을 바라보는 중형 필름 쓰는 사람은 ‘저걸로는 사진이 안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형 필름 쓰는 사람은 중형 필름으로는 사진이 나올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35미리 필름을 써도, 완전수동 기계식을 쓰는 사람은 완전자동 전자식을 쓰는 사람을 ‘사진도 모르는 녀석’이라고 바라보기 일쑤였습니다. 옛날, 그리 멀지 않은 열 해쯤 앞서만 하더라도.


.. eos5, eos1 ……. 그건 선배들이 사용하는 까맣고 커다란 렌즈가 달린 카메라였는데, 그냥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선배들은 보도반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보여지는 것에도 꽤나 신경을 쓰는 듯했다 … 요즘이야 디지털카메라를 쓰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수동 필름카메라를 보면 괜히 예뻐 보이고 무언가 특별한 듯 시선을 주곤 하지만, 그때는 단지 한물 간 카메라를 구입했다는 생각에 속상하기만 했다. 집에 와서도 계속 인상을 쓰고 툴툴거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새 카메라를 구경하자고 하셨는데, 나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내게 왜 기분이 그리 안 좋은지 물어 보셨다. 나는 철없는 소리만 해댔다. “다른 친구들과 선배들은 모두 좋은 카메라 쓰는데 나만 싸구려 옛날 카메라 쓰는 게 창피해요!” 나의 철없는 투정을 다 들으시더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펜을 쓴다고 글씨가 잘 써지는 것이 아니다.” 다음날 보도반 선배들이 한 명씩 새로 구입한 카메라를 보자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다른 친구들은 모두 선배들이 추천해 준 좋은 카메라를 자랑하듯 꺼냈다. 나는 풀이 죽은 채 가방 안에 숨겨 두었던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선배들과 친구들은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 카메라를 본 순간 보도반 안에는 묘한 기운이 돌았다. 선배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다들 카메라를 새로 샀으니 열심히 하자며 교실로 돌아가자고 했다. 친구들은 어깨에, 목에, 카메라를 자랑하듯 걸었고, 나는 카메라를 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다 ..  (33∼34쪽)
 





 저는 1998년부터 사진을 배우고 찍었습니다. 그무렵 제 한 달 벌이는 16만 원이었고, 이 가운데 9만 6천 원을 적금으로 붓던 터라 사진기를 장만하는 일이란 꿈처럼 아득했습니다. 어렵사리 후배한테 미놀타 x-700을 빌려 썼는데, 제가 일하며 머물던 신문사지국에 도둑이 들어, 두어 달 만에 이 녀석을 잃어버렸습니다. 후배한테 사진기를 돌려주어야 하고, 저도 사진을 찍어야 하기에, 그때 우체국에서 이십만 원 빚을 얻어 미놀타 x-700을 재활용매장에서 13만 원을 주고 겨우 다시 장만했습니다. 저로서는 없는 돈을 털어 장만한 사진기였고, 이 사진기로도 제가 바라는 모습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었기에 늘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다녔고, 집식구나 동무나 선후배들 사진을 즐겨 찍어 주었습니다.

 그러고 두 해 뒤,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들어간 출판사에서, 사장님이 새해 선물이라면서 저한테 캐논 이오에스 5번을 덜컥 장만해 주었습니다. 이때만 하여도 필름 사진기에서 이오에스 5번은 프로와 아마가 두루 쓰던 ‘값싼’ 장비라고 했는데, 그렇더라도 백만 원을 치러야 하는 녀석이었습니다(요즈음 이 녀석은 25만 원밖에 안 합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동안 한 달 일삯 62만 원을 받았고, 신문배달 할 때와 견주어 여러 곱이 되었기에 푼푼이 돈을 모아, 미놀타 사진기는 후배한테 돌려주고, 저는 캐논 AE-1로 기종을 바꾸었습니다. 이때나 예전이나, 또 요즈음이나, 미놀타 x-700이나 x-300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고, 캐논 AE-1을 쓰는 사람도 퍽 드물었습니다. 예전 35미리 수동사진기를 쓰는 이들은 으레 니콘 FM-2나 콘탁스나 펜탁스를 썼지, 미놀타나 캐논은 ‘쓸 만한 녀석’이 못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도 저는, 13만 원짜리 미놀타에서 28만 원짜리 캐논으로 한 계단 올라선(?) 일만으로도 주머니가 홀쪽해졌고, 홀쪽해지는 주머니에도 ‘이제는 함부로 기계 탓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진쟁이도 비슷할 텐데(《당신에게 말을 걸다》를 쓴 백성현 님도 이천만 원이 넘는 사진장비를 도둑맞았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캐논 이오에스 5번과 AE-1에다가 애써 찍은 필름이 든 사진가방을 두어 차례 도둑맞았고, 눈물을 쪽 빼면서 새롭게 사진장비를 장만할 때, ‘아예 더 낫다고 하는 장비를 써 보자. 또 도둑맞아도 나중 일이고, 어쨌든 쓰고픈 장비를 써 보자’고 하면서, 48만 원 하던 FM-2를 장만했습니다. 전자식 이오에스 5번은 중고 C급으로 70만 원을 치러 새로 장만하면서.


.. 한국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사진관으로 달려가서 카메라(1회용카메라)를 맡긴 것이었다. 다음날 사진을 찾아 연습실에 들고 갔다. 사진을 찾아왔다는 말에 모두들 나에게 달려들었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보며 다들 말도 많고 웃음이 흐르는 즐거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모두들 자기 사진을 보며 웃고 떠드는데, 나는 혼자 흐뭇함과 복잡함에 휩싸였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이런 거구나,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거구나 ..  (91쪽)
 





 처음 사진을 배우며 찍을 때 부럽게 바라보았던 FM-2를 손에 쥐니 살짝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사진관 분은 ‘니콘은 사람들이 워낙 많이 써서 오히려 잔고장이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캐논이나 미놀타가 값도 싸고 사진도 잘 나온다’고 값싼 녀석을 써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찍는 사진감인 ‘헌책방’을 무지개빛 필름으로 담아낼 때에는, 미놀타와 캐논보다는 니콘이 한결 잘 나왔습니다. 헌책방 사진은 늘 실내에서 찍어야 하고, 형광등 불빛 때문에 렌즈에 FL-W 필터를 꼭 끼어야 합니다. 바깥에서 햇볕을 받으며 사람이나 풍경을 찍는다고 한다면 미놀타와 캐논도 훌륭하지만, 제 사진감을 헤아릴 때에는 달랐습니다.

 라이카 사진기만 쓰는 한 분이 ‘책’을 사진감으로 삼아 우리 동네 헌책방에서 사진일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 이분 사진기를 몇 초쯤 빌려 ‘라이카에 눈을 박고 헌책방을 죽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니 웬걸, 헌책방을 사진으로 찍는다고 할 때에, 니콘보다 라이카가 느낌과 화각이 한결 뛰어납니다. 라이카 쓰시는 분은 ‘단추를 눌러서 한 번 찍으셔도 돼요’ 했지만, 단추까지 누르지 않았습니다. 속에서 눈물이 났거든요. 사진은 ‘돈으로 장만하는 장비로 찍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런 장비가 있으면 어마어마한 구석을 채워 주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장비이구나 싶고, 며칠쯤 사진기앓이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장비를 쓰시는 분은 그분대로 푼푼이 돈을 모아서 장만하셨을 테고, 멋이 아닌 발바닥으로 찍으시는 만큼, 나는 나대로 내 발바닥으로 사진을 찍으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내 장비가 많이 뒤떨어지면 뒤떨어지는 만큼 더 부지런히 땀흘리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좀더 헤아리면, 저보다 주머니가 홀쭉한 분은, 제가 쓰는 장비만큼도 못 갖추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진찍기를 하고 싶어도 사진기 살 돈조차 없을 뿐더러,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찍을 겨를 없는 분도 있을 테고요.


.. 런던의 한 노천카페 앞. 열 살 남짓 한 꼬마가 대낮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저 어이없이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 나는 카메라의 노출을 적정으로 맞춘 뒤, 아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셔터를 눌렀다. ‘찰칵’, 순간, 셔터 소리를 들은 아이가 나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사진을 찍힌 아이는 내게 맥주캔을 집어던지더니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 아직도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나도 맥주 한 캔을 들고 그 옆에 앉아 시원하게 한잔 마시며 말동무나 되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  (177쪽)
 





 늘 느끼고 있는데, 사진을 못 찍는 바보 같은 마음일 때 장비 탓을 합니다. 또, 자기가 다른 일로 바쁘다는 핑계를 댑니다. 무슨 사진을 어디에서 찍든, 자기 마음에 찰 때까지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거듭거듭 찾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그곳에서 그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김영갑 님이 찍은 제주섬 오름 사진은 제주섬에서 오름 곁에, 아니 오름과 함께 먹고살았기에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김영갑 님 앞이나 뒤에 제주섬 오름을 찍는 분이 제법 많은데, 이분들은 한결같이 구경꾼 사진만 찍었습니다. 요즈음도 오름을 구경꾼 사진으로만 멋들어지게 담아낼 뿐입니다. 이런 사진을 보면서 멋있다 말하고 훌륭하다 말하는 분이 꽤 많지만, 제 눈으로는 한낱 겉멋과 겉치레로만 느껴집니다. 제주 두모악갤러리에서 본 김영갑 님 오름 사진은 저를 그 자리에 못박히도록 하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게 이끌었지만, 김영갑 님을 뺀 다른 분들 오름 사진은 ‘이 따위를 사진이라고 찍었나?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자기 사진감하고 먹고살면서 일궈낸 작품으로 안승일 님이 빚은 《굴피집》이 있습니다. 안승일 님은 산 사진만 찍던 분인데, 자기 사진감으로 지루해 하던 어느 날 중국으로 사진여행을 하다가 문득 깨달아 부랴부랴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한국다운 한국땅과 한국사람이 무엇인가’를 헤아린 끝에 강원도 산골짝 굴피집 한 채를 찾았고, 이 굴피집을 열 해에 걸쳐 뻔질나게 찾아가고, 때로는 두어 달씩 굴피집 두 늙은 식구와 한솥밥을 먹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굴피집 딸아들보다 더 살가이 지내며 사진을 찍은’ 안승일 님은 ‘다른 사진은 다 찍었지만 한 장을 아직 못 찍어’ 열 해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는데, 이 한 장은 가을날 산자락 논에 누런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을 담는 사진입니다. 둘레 산꼭대기에 올라서 굴피집 앞으로 펼쳐진 다랑이야 어찌 보면 흔한 사진인데, 아주 맑고 구름 몇 점 살짝 흩뿌려진 날씨에 누렇게 일렁이는 나락 물결을 담을 수 있는 날은 한 해에 며칠이 안 됩니다. 한 해 가운데 하루도 없을 수 있습니다. 있더라도 때를 놓치면 못 찍습니다.

 김기찬 님이 담은 《골목 안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이웃사촌 사진’입니다. 김기찬 님은 골목길에서 살지 않았습니다만, 골목길이 훌륭한 사진감이 되는 줄 깨달으면서, 오래도록 골목길을 두 다리로 거닐고 골목집 사람하고 이웃이자 동무이자 말벗으로 사귀면서 사진을 일구었습니다. 골목사람 스스로 골목 삶터를 사진으로 담아내지 못하던 1980∼90년대에 부지런함 하나와 수수함 하나를 모아 눈물과 웃음이 함께 어우러진 사진 열매를 맺었습니다. 골목길은 있는 그대로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됨을 몸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사진을 즐겼습니다.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골목길을 사진감으로 삼는 이들이 꽤 많은데, 이들은 하나같이 ‘구경꾼 곁다리 사진’ 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구경꾼이라 하여도 오래도록 머물고 자주 찾아오면서 골목을 마음으로 품어야 비로소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 눈길이 틉니다. 그렇지만 빨리빨리 얼른얼른 예술작품 얻어내려는 싸구려 생각에 젖은 채, 자기 머리를 깨지 않으니 골목길을 골목길 그대로 담지 못해요.

 헌책방이나 골목길이나 마찬가지인데, 헌책방도 골목길도 ‘꾀죄죄하거나 퀴퀴한’ 곳이 아닙니다. ‘마냥 어둡기만 한’ 곳이 아니며, ‘추억이 묻은’ 곳 또한 아니에요. 무슨 얼어죽을 추억입니까. 당신들이 언제 헌책방을 열 해 스무 해 단골로 날마다 찾아다녔기에 추억이고, 당신들이 언제 골목집에서 태어나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 살아 보았기에 추억입니까. 달콤쌉싸름한 사탕발림이 아니라 한다면, 헌책방과 골목길을 비롯한 모든 사진감은 몸으로 부대끼고 마음으로 녹여내는 매무새로 다가설 때라야만 사진기를 든 우리한테 문을 활짝 열어 줍니다.


.. 니콘에서 나온 필름 수동카메라인 FM2는 사실 들고 다니기에는 꽤 무거운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추천하기에는 살짝 걸리는 부분이 있다. 요즘에는 콤팩트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 카메라를 거의 매일 들고 다니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고생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필름으로 사진교육을 받았던 세대의 사람들이나 필름 특유의 색감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단점이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무겁고 짐이 되는 것이야 사실이지만, 사진가가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면 조금 무거운 카메라라는 이유는 눈꼽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않는 법. 마치 사랑하는 이의 단점이 문제되지 않듯 말이다 ..  (347쪽)


 우리한테 ‘아직’ 문을 활짝 열어 주지 않은 사진감한테 사진기를 들이대는 일은 주먹다짐이나 칼부림입니다. 어려운 말로 ‘폭력’입니다. 무시무시한 주먹다짐이고 소름돋는 칼부림입니다. 얼핏 보거나 모르는 눈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할는지 모릅니다. 손뼉칠 만한 예술이라고, 돈이 되는 예술이라고 할는지 모릅니다(이를테면 배병우 님 사진처럼). 그러나, 사진쟁이로서는 더 뻗어나갈 예술을 이루면서 사진에 담아낼 수 있는 틀을 버리고 섣부른 눈요기에 머문 셈일밖에 없습니다. 사진은 기다리면서 이루어지고, 오래오래 곰삭이면서 다시 태어나기 마련인데, 날짜를 못박고 이때까지 뭘뭘뭘 찍어대자고 한다면, 어줍잖은 틀로는 마무리될는지 모르지만, 제대로 담아낼 사람 삶터나 자연 삶터를 스며들게 하지 못해요.

 스스로 내로라하는 사진쟁이 많고, 사진잔치 끊임없이 전국 곳곳(거의 모두 서울입니다만)에서 다달이 수백 가지씩 펼쳐지고 있으나, 우리 나라는 아직 ‘사진문화를 즐기는 나라’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진기 든 손은 많으나 사진기를 배우는 손은 적고, 사진기를 휘두르는 주먹은 많으나 사진기를 쓰다듬는 손길은 드뭅니다. 사진으로 밥벌이하는 사람이 늘지만 사진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적고, 사진으로 이름값 높이는 사람이 생기지만 사진으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은 드뭅니다.
 



 (2) 아직 설익은 《당신에게 말을 걸다》이지만


 사진과 글로 이야기를 건네는 《당신에게 말을 걸다》를 읽습니다. ‘코요태 래퍼 빽가’로 방송에 얼굴을 내밀었다고 하는 백성현 님은, 연예인으로 뛰기 앞서 사진길을 걷고픈 꿈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안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사진길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지만 사진길을 놓고 싶지 않았고, ‘사진 = 삶’임을 어렴풋하게 느끼면서 지금과 같은 자리에 섰구나 싶습니다.


.. 아버지는 아주 검소하시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자동차를 타지 않으시고 대중교통만을 이용하신다. 그리고 3년 전부터는 자전거만 타고 다니신다. 부모님 집은 일산이고 내가 사는 곳은 강남인데, 일산에서 강남까지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신다 ..  (278∼280쪽)


 ‘사진 = 삶’인 까닭을 고개 끄덕이며 읽어내지 못하면 사진을 즐기지 못합니다. ‘삶 = 일’이자 ‘삶 = 놀이’인데, ‘일 = 놀이’입니다. 억지로 힘겹게 돈벌이만 해야 하는 일이라면, 놀이 또한 돈만 펑펑 쓰면서 몸을 마구잡이로 부리는 억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적게 벌든 많이 벌든 남이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스스로 즐겁고 기쁘게 일을 할 수 있는 마음그릇이라면, 자기가 즐기는 놀이도 돈하고는 아랑곳없이 언제나 가슴벅참과 가슴뜀을 느낍니다. 이러는 가운데 사진을 자기 일감이나 놀이감으로 삼을 때 시나브로 ‘사진 = 삶’이 이루어지면서, 자기가 펼치는 사진 하나마다 저절로 예술이 되고 바야흐로 문화가 되어요.


.. 많이 찍고 주변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주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남들이 좋아하는 구도와 당신이 좋아하는 구도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구도가 될 것이다 ..  (357쪽)
 





 그런데 백성현 님이 빚은 《당신에게 말을 걸다》는 스스로 ‘말을 건다’고 하면서, 백성현 님 모습을 모두 드러내지는 않은 듯합니다. 좀더 남김없이 털어내지는 못한 듯합니다. 아직 자기 나름대로 사진길을 마무리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고 있으니 ‘이것이 백성현 사진이다’ 하고 말할 만한 모습을 못 보여주지 않느냐 싶습니다.

 앞으로 더 힘차게 사진길을 걷고, 더 바지런히 사진나라를 열며, 더 널리 사진밭을 일구면서 “당신에게 말을 걸다”가 아닌 “나(백성현)한테 말을 걸다”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나한테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땅을 디디고 땅냄새를 맡은 뒤 “당신한테 말걸기”를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한테 말걸기를 할 만한 이야기가 넉넉하지 않은데 섣불리 말걸기부터 하고 나면 백성현 님 두 손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사진길 걷는 수많은 분들이 소리와 이름 없이 열 해나 스무 해씩 자기 사진작품을 고이 모셔 두고 갈고닦으면서 기다리는 까닭을 백성현 님 스스로 더욱 곱새길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달라, 누구는 오래 곰삭이는 사진을 빚고 누구는 금세 짠하고 보여줄 사진을 빚기도 하지만, 곰삭이든 짠하고 보여주든 ‘똑같은 사진’입니다.

 백성현 님 스스로 다부지게 사진길을 걷노라 말하려 한다면, 사진작품 귀퉁이에 ‘백성현 것’이라고 이름을 안 적어 놓아도 ‘이 사진은 백성현이 사진이군’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만하게 사진기와 살아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튼, 사진길을 걷노라 당차게 밝히신 만큼, 이 길에서 흔들리지 말고 꼿꼿하게 길닦기를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4342.1.3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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