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꾸는 눈동자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76
제니 수 코스테키-쇼 지음, 노은정 옮김 / 보림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사팔눈’이 멋지다고 생각한 아이가 키운 꿈
 [그림책이 좋다 62] 제니 수 코스테키-쇼, 《나의 꿈꾸는 눈동자》



- 책이름 : 나의 꿈꾸는 눈동자
- 글ㆍ그림 : 제니 수 코스테키-쇼
- 옮긴이 : 노은정
- 펴낸곳 : 보림출판사 (2009.3.10.)
- 책값 : 9800원



 (1) 내 눈에 보이는 모습들


 아침에 전철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서는, 오늘은 일찌감치 사진기 목에 걸고 자전거 몰고 골목마실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와 지지난해를 돌아보건대, 4월을 막 넘긴 이무렵에 골목마실을 해야 개나리 노란 꽃망울을 한가득 볼 수 있습니다. 이주를 넘기고 나면 노란 꽃망울이 지고 푸른잎이 돋습니다. 또한, 엊저녁 동네 구멍가게에 보리술 한 병 사러 가며 보니, 구멍가게 옆 텃밭에 잇빛 진달래가 꽃망울을 흐드러지게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개나리와 함께 진달래도 구경하고, 또 개나리와 진달래보다 먼저 꽃을 피우다가 금세 지는 이팝나무 꽃도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 태어났을 때부터 내 눈은 서로 다른 쪽을 보고 있었어요. 누군가 이렇게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나요. “사팔뜨기잖아!” ..  (6쪽)
 





 아침 아홉 시가 조금 지납니다. 자전거를 들고 내려옵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허연 구름이 가득합니다. 빗줄기라도 뿌리려나? 그냥 걸어서 다녀올까? 그렇지만 걸어다니다가 비를 만나기보다는 자전거 타고 움직이다가 비를 만나면 집에 돌아오기 한결 낫지 않을까. 오면 오는 대로 맞고,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다니자.

 자전거는 맨 먼저, 엊저녁 들른 구멍가게 옆으로 갑니다. 잇빛 꽃망울 앞에 서서 물끄러미 들여다봅니다. 꽃그릇 하나에 진달래나무 한 그루이지만, 이 한 그루만으로도 골목이 환하다고 느낍니다. 아침길을 나서는 이웃집 사람들은 따로 이 진달래한테 눈길을 보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당신 댁에도 진달래쯤이야 한두 그루쯤 기르고 있기 때문일 테지요. 또는, 당신 댁에서 기르는 이팝나무나 개나리가 한결 어여쁘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릅니다.

 금창동사무소 옆을 따라 창영초등학교 울타리 길을 달리다가 우뚝 멈춥니다. 손바닥 만한 동네 쉼터 앞으로 마련된 텃밭 둘레에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져 있습니다. 꽃망울을 들여다보니 오늘 오지 않았으면 이 흐드러진 노랑물을 느끼지 못했겠구나 싶습니다. 지난해와 지지난해에는 꼭 이맘때를 놓쳐서 무척 아쉬웠는데 올해에는 꼭 알맞춤하게 때를 맞춥니다. 골목마실 사진찍기를 하자면 적어도 세 해라는 세월쯤은 들여야 꽃때를 맞출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 나는 “꿈꾸는 눈동자”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아요. 그 눈길이 가는 대로 내 마음이 움직이니까요. 때로는 아이들이 놀리곤 해요. 내 두 눈이 저마다 다른 곳을 보고 있어서 꼭 이구아나 눈동자 같다고요.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이구아나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나도 분명히 멋질 거예요 ..  (7∼8쪽)
 



 한참 돌아다니는데, 송림3동 92번지 조그마한 집 문에 ‘보증금 100 월세 10, 방 1 부엌 1 도시까스’라 붙은 알림쪽이 보입니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인데 도시가스가 나온다라, 어떨까, 괜찮을까. 방이 아주 작지만 않다면 아기와 함께 세 식구가 오순도순 지낼 만하지는 않을까.

 알림쪽에 붙은 번호로 꾹꾹 누르는데 받지 않습니다. 못 받으시는 듯. 이따가 다시 걸기로 하고 좀더 골목마실을 합니다. 우리 동네에서 새 삯집을 얻으려면 부동산에 알아볼 수도 있지만, 이렇게 구비구비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문에 붙은 알림쪽을 찾아보기도 해야 합니다. 부동산에 내놓는 집보다는, 한 동네에 사는 사람한테 내놓는 집이 좀더 많거든요. 있는 집들이야 부동산에 내놓을 만하지만, 없는 집에서는 복비 몇 만 원도 아쉬워 알음알음으로 방을 놓고 얻고 합니다.

 쭐래쭐래 걷기도 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슬슬 달리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복덕방 앞에 잠깐 멈추어 봅니다. 또 모르는 일이니 어떤 방이 나와 있나 들여다봅니다. 방 둘에 기름보일러가 있다는 전세 800짜리 집이 보입니다. 전세 800이라면 좀 버겁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그 옆에는 보증금 50에 달삯 5만 원인 방 둘짜리가 보입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복덕방으로 들어가고, 복덕방 할아버지와 그 집을 구경하러 찾아가 봅니다. 낮에 불을 안 켜면 깜깜하지는 않으나 햇볕은 들어오지 않고, 푸세식 뒷간이 옆에 딸려 있습니다. 벽에 짙게 밴 곰팡이 자국에다가 이웃집에서 기르는 큰 개 두 마리 때문에, 이 집이 아주 눅어도 힘들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 집에서 대학생 둘이서 엊그제까지 살다가 집을 비웠다고 합니다. 도배도 않고 장판도 안 깔고 그 대학생들이 용케 잘 살았다고 하는데, 달삯을 삼만 원으로 깎을 수도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지만, 방은 하나요 달삯이 10만 원일 그 집이 좀더 마음에 남습니다.


.. 어느 날,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창밖을 보는 듯한 내 눈을 보고 알림장에다 “안과 치료가 필요함.”이라고 써 주었어요. “난 됐어요.” 나는 엄마 아빠에게 말했어요. “내 눈은 멀쩡해요.” ..  (16쪽)
 





 자전거를 몰아 아까 그 집 앞에 섭니다. 다시 전화를 겁니다. 집임자가 받습니다. 도화1동에 사신다며 이리로 오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기다리기로 하고 둘레 골목마실을 합니다. 바로 뒤편 샛골목으로 오릅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까지만 드나들 수 있는 비알진 골목으로 들어섭니다. 대문을 마주한 두 골목집에서 저마다 내놓은 빨래가 한 가득 해바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집 빨래에는 햇볕이 닿고 한 집 빨래에는 햇볕이 안 닿습니다. 저런저런.

 빨랫대에 수북하게 걸린 빨래를 살며시 들여다봅니다. 아기 옷이 꽤 많습니다. 두 집 모두 갓난쟁이가 있는가 봐요. 살살살 자전거를 끌면서 좀더 돌아다니니, 아기를 업고 슬금슬금 나들이를 하는 젊은 아주머니가 보입니다. 집 앞 텃밭을 일구고 장독대를 들여다보는 할매가 보입니다. 드문드문 차가 다니는 데에는 교회 앞. 집이 교회 앞이라는 대목에서 조금 걸리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아주 고즈넉한 동네이면서, 동네에 우리 아이 또래인 아이도 꽤 많은 듯하니 동네에서 동무를 사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깃든 집 둘레에는 아무런 또래동무가 없거든요.

 집임자가 올 때가 다 되어 자전거를 싱 달려 그 집 앞에 닿습니다. 마침 집임자도 교회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오는 길. 꾸벅 인사를 하면서 집으로 들어가 봅니다. 문을 여니 곧바로 트인 부엌(부엌이라기보다는 문간인데 수도꼭지를 놓은 자리)이고, 막바로 방 한 칸. 좁은 쪽으로 누워 봅니다. 세 식구가 나란히 눕고도 벽에 옷통과 작은 책상 하나를 놓을 자리가 납니다. 방 크기 절반 조금 못 될 만한 다락이 하나 있습니다. 다락이라니, 멋진걸. 다락으로 기어들어갑니다. 건너편 교회가 바라다보입니다. 다락에서는 앉을 수 없고 그냥 엎드려만 있어야 하지만, 꽤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빨래는 옥상에서 2층 집 사람과 함께 널면 된다 하고, 뒷간은 이웃집과 함께 쓰는 자리가 붙어 있습니다. 이웃집에는 중학교 다니는 아이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하고 부모 둘이 산다고 합니다. 전기와 물은 서로 나누어 낸다고 하니, 이번에도 세금 내는 데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아껴도 어쩔 수 없는 살림이 되겠구나 싶습니다.

 요모조모 살피고 있자니 뒤에서 집임자 할매가, 당신 아이들이 클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면서, 아이들이 나중에 ‘이런 좁은 데에서 사느라 다리를 못 뻗어 키가 못 컸잖아요’ 하면서 투정을 부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훗. 그런 이야기는 달삯방 얻으려는 사람한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못 되는 듯한데. 하하 웃으면서 ‘그래도, 이만하면 꽤 살 만한데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 박사님은 내 오른쪽 눈에 납작하고 동그란 반창고를 붙여 주었어요. “이렇게 하면 가물가물 눈이 빠릿빠랫해질 거야.” ‘난 원래 빠릿빠릿한데.’ ..  (22쪽)


 집임자 할배는 제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해 보고 괜찮다 싶으면 연락을 하라는 말을 남기고 차를 타고 댁으로 돌아갑니다. 저도 도서관 문을 닫아 놓고 너무 오래 밖에서 보냈구나 싶어, 다시 자전거에 올라 숭의동 골목을 조금 더 돌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나올 때와는 달리 하늘에 잔뜩 끼어 있던 구름이 가시면서 햇살이 비칩니다. 햇살이 비치니 조금 덥습니다. 반바지를 입고 나오려다가 말았는데 반바지 차림이어도 괜찮았겠구나 싶습니다.

 전도관 재개발구역으로 들어가는 숭의3동 109번지 언덕골목을 살몃살몃 거닐고 자전거를 몰면서 개나리와 진달래를 바라보다가는, 며칠 뒤면 막 벌어지겠구나 싶은 목련 봉오리를 올려다봅니다.

 비가 오는 날은 비 느낌과 함께 싱그러운 이 골목이고, 눈이 오는 날은 눈 느낌과 함께 깨끗한 이 골목이요, 햇살 맑은 날은 햇볕 느낌과 함께 따사로운 이 골목입니다. 아까 그 송림3동 92번지도 괜찮지만 숭의3동 109번지에 삯집이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꿈을 꿉니다. 그래도, 이만한 방이라도 어디인가 싶습니다.

 이 방에 삯을 얻고 머잖아 아이가 걸음마를 하게 되면, 아이 손을 잡고 걷고 뛸 골목 놀이터에서 날마다 기나긴 시간을 보내지 않으랴 싶습니다. 차는 다닐 수 없고 사람만 오갈 수 있는 골목에서 세 식구가 한결 싱그럽고 맑으며 따뜻한 기운을 얻으며 지내노라면, 이 기운을 우리 둘레 사람한테도 넉넉히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스티로폼 꽃그릇 농사를 아직 못하고 있지만, 둘레 어느 집에서나 이와 같은 농사를 짓고 있으니, 우리도 이참에 문간 바깥에 꽃그릇을 몇 가지 차려 놓으면서, 우리 집 앞 골목을 오가는 사람부터 우리 세 식구까지 꽃기운과 풀기운을 듬뿍 받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 하고 꿈을 꾸어 봅니다.
 





.. 이튿날 아침, 난 엄마한테 내 마음을 이야기했어요. 너무 슬퍼서 학교에 가고 싶지도 않다고요. 엄마는 곰곰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제니 수, 우리 좀 다르게 생각해 보자꾸나.” 그래서 나는 엄마랑 같이 첫 “그림 안대”를 만들었어요. ‘엄마는 정말 똑똑해.’..  (31쪽)


 우리한테는 자가용이 없어, 이맘때 흔히들 자가용 타고 인천대공원이니 월미도니 또 어디니 하고 다니는 사람들처럼 꽃구경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자전거가 있어, 언제라도 자전거를 몰고 이웃 동네 꽃골목 마실을 즐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 튼튼한 두 다리로 뚜벅뚜벅 골목을 누비면서 집집마다 차려 놓은 꽃잔치길을 온몸으로 껴안으면서 즐기기도 합니다.

 큰 놀이공원 너른 꽃밭에서 피어나는 꽃도 꽃이요, 조그마한 골목길 한켠에서 피어나는 꽃도 꽃입니다. 골목길 시멘트 틈바구니에서 고개를 내미는 작은 풀꽃도 꽃입니다. 낡은 꽃그릇이나 스티로폼 통이나 바구니에서 자라는 푸성귀도 풀이며, 고추와 토마토가 틔우는 꽃도 꽃입니다.

 더 나은 꽃이나 덜 좋은 꽃은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꽃은 모두 꽃이며, 모든 꽃은 그 나름대로 곱고 환하며 싱그럽다고 느낍니다. 우리한테 마음만 있으면 어느 꽃이든 어디에서 자라는 꽃이든 이 소담스러운 내음과 기운과 빛깔을 조촐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느낍니다.
 





 (2) 그림책 《나의 꿈꾸는 눈동자》에 담은 이야기


 그린이 스스로 어릴 적에 겪은 일을 담아낸 그림책 《나의 꿈꾸는 눈동자》를 읽어냅니다. 그린이는 처음으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하는데, 첫 작품으로는 더없이 훌륭하다고 느낍니다. 누구보다도 당신이 겪은 일을 담았으며, 당신이 겪은 일을 다름아닌 당신 눈과 마음으로 곱새겨서 펼쳐 놓았습니다.

 사팔눈으로 태어났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린이는 ‘사람들이 놀리는 내 눈’이야말로 멋있고 재미있고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구아나 눈동자’라고 놀리더라도 그린이는 ‘이구아나는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내 눈은 더 멋있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병원 의사가 그린이 눈을 ‘사팔이 아닌 정상(?) 눈’으로 고쳐 주었다고 하나, 그린이는 ‘사팔눈’이었어도 ‘빠릿빠릿’했으며, 언제나 그린이 두 눈은 ‘멀쩡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생각을 입밖으로는 꺼내지 않습니다. 괜히 입밖으로 꺼내 보았자 재미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으리라 느꼈을 테니까요.


.. 내 두 눈은 마치 환상의 짝꿍 같아요. 오른쪽 눈은 길잡이예요. 숫자를 잘 보면서 나를 이끌어 줘요. 내 꿈꾸는 눈동자는 화가예요. 색깔을 주로 보거든요. 모험도 좋아해요. 그래서 두 눈이 함께 있으면 못할 게 없어요 ..  (9∼10쪽) 






 현실이 아닌 꿈에서 살았던 그린이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꿈에서 허덕인 그린이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꿈에서 살던 그린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즐기려는 마음이었기에 꿈을 꿀 수 있던 그린이가 아닌가 느낍니다. 사팔눈인 내 몸을 사랑하고, 이구아나 닮았다는 내 눈을 사랑한 그린이는, 누구보다도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그 나름대로 꿋꿋하고 힘차게 걸어갈 길을 잘 알고 있었다고 느낍니다.


.. ‘내 눈은 항상 멀쩡했는데.’ ..  (38쪽)


 이 꿋꿋함과 힘참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요? 그림책 《나의 꿈꾸는 눈동자》에서는 이 밑힘을 따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린이가 병원에 가서 오른눈을 가리고 사팔인 오른눈으로만 세상을 보며 다니라고 한 의사 말 때문에 너무 괴롭고 힘들어 밤새 잠을 못 자고 눈물을 흘리다가 어머니한테 이 일을 모두 털어놓았어요. 이때 그린이 어머니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한 마디를 했습니다. “제니 수, 우리 좀 다르게 생각해 보자꾸나.”

 그러면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도 기쁘고 아이로서도 기쁠 훌륭한 풀이법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이 풀이법을 따르는 어린 날 그린이는 ‘엄마는 정말 똑똑해’ 하고 생각해요.

 이 생각, ‘엄마는 정말 똑똑해’는, 제 느낌입니다만, ‘엄마는 참 사랑스러워’라든지 ‘엄마는 더없이 믿음직해’라든지 ‘엄마는 언제나 든든해’ 하는 애틋함과 반가움과 고마움이 담긴 생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리하여 어린 ‘사팔눈 제니 수’는 둘레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놀리더라도 늘 꿋꿋할 수 있었고, 제 사팔눈을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꿈꾸는 아이가 될 수 있는 가운데, 제 두 눈동자는 저마다 맡은 몫이 달라, 이 다른 몫대로 사이좋게 어울린다고 깨닫게 되었구나 싶어요.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리고 이 깨달음이 좋은 밑힘이 되어 무럭무럭 자라났고, ‘어린 제니 수’가 ‘어른 제니 수’가 되고 난 다음, 아마도 즐겁고 신나게 《나의 꿈꾸는 눈동자》라는 그림책을 그려내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사팔눈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늘 따뜻하고 믿음직스러운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싱그러운 꿈꾸기를 멈추지 않은 그린이 스스로가 튼튼하게 두 다리를 이 땅에 디디고 있었기 때문에. 






.. 내 꿈꾸는 눈동자는 튼튼해졌어요. 게다가 훨씬 당당해졌어요. 아마 사랑이 조금 더 필요했나 봐요. 이제 내 외눈박이 생활도 끝났어요 ..  (38쪽)


 책을 덮으면서 한 가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책이름이 《나의 꿈꾸는 눈동자》인데, “내 꿈꾸는 눈동자”라든지, 그냥 “꿈꾸는 눈동자”라고만 했으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영어 ‘my’를 우리 말로 옮기면 ‘나의’가 아닌 ‘내’예요. 그리고 이 책에서는 굳이 ‘내’를 넣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4342.4.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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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예수 - 예수는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비출 것이다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지음, 원충연 옮김 / 달팽이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95 ― 종교란 ‘가르침ㆍ봉사ㆍ선교’ 아닌 ‘사랑’
 :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볼룸하르트, 《숨어 있는 예수》


- 책이름 : 숨어 있는 예수
- 글 :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 옮긴이 : 원충연
- 펴낸곳 : 달팽이 (2008.8.5.)
- 책값 : 8500원



 (1) 우리가 읽을 책이라면


 저한테 “어떤 책을 즐겨 읽으셔요?” 하고 묻는 분들한테 언제나 “읽어서 좋고, 받아들여 살 만한 책을 즐겨 읽습니다.” 하고 대꾸합니다. 문학이냐 비소설이냐 인문학이냐 자연과학이냐 종교냐 예술이냐 하는 갈래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만화책이나 사진책이나 그림책을 더 좋아할 수 있고, 글만 가득한 책을 더 즐길 수 있습니다. 그 책이 제 마음을 톡톡 건드릴 수 있다면 모두 반갑습니다. 다만, 건드리다가 그치면 서운합니다. 책이 더 아름답지 못해서 서운하다기보다, 이 책을 쓴 사람 마음밭이 너무 얕아서 서운합니다. 글쓴이가 좀더 깊고 너르게 뻗어나가지 못했다고 느끼니 불쌍한 마음이 들어 서운합니다. 얕은 책을 애써 펴낸 책마을 일꾼 땀방울이 서운합니다. 더 가다듬지 못해서 안타까운 한편, 더 갈고닦으며 글쓴이를 일으켜세우지 못해서 슬픕니다.

 이리하여, 저는 따로 갈래를 나누지 않고 책을 장만하여 읽습니다. 종교책을 읽는다 할 때에도, 개신교와 천주교와 천도교와 불교와 이슬람교 책을 굳이 가르지 않습니다. 어떠한 종교를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저 스스로 참다운 길을 느끼도록 해 주는 책이라면 기꺼이 집어듭니다. 어떠한 종교를 다룬달지라도, 스스로 우상을 모시지 않는 이야기로 펼쳐진다면 고마이 받아듭니다. 어떠한 종교 테두리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자기들 종교 테두리 사람한테만 달고 맛난 마음밥을 선사할 그릇이 아닌 책일 때에 비로소 사들게 됩니다.


..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게. 자유로우면서도 하나님이 자네에게 보내는 사람들과는 일치를 이루게. 사람들이 자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세상에서 이뤄지게 될걸세 … 선교사는 종교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 예수의 이름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면 그만이야 … 성령은 파당을 만들지 않고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일을 한다네 … 이런 입장 때문에 아마 자네는 윗사람과 갈등을 겪게 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하나님이 내려 살펴 줄 거야. 무슨 일이 생기든지 기다려야 하네 …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성령은 군림을 허용하지 않네. 사람들은 생명을 주는 섬김이 아니라 힘에 의지해서 살고 싶어하는데, 그것은 세상에 죽음만을 가져다준다네 … 크게 소리칠 필요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돼 … 말의 하나님이 아니라 행동의 하나님이라는 걸 알게 될 거네 ..  (23∼24, 28, 33, 38쪽)


 두 번째 물음은 으래 “한 달에 몇 권쯤 읽으셔요?”나 “한 해에 몇 권쯤 읽으셔요?”입니다. 어떤 책을 즐겁게 읽느냐는 물음 못지않게 부질없는 물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작가 책을 좋아하느냐는 물음과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물음이라고 느낍니다.

 제가 어느 일터에 몸담고 있다고 치면, 달삯으로 얼마를 받느냐 묻는 소리인데, 제가 달삯을 200만 원 받으면 그럭저럭이고, 210만 원 받으면 뛰어나고 220만 원 받으면 훌륭하겠습니까. 달삯 1000만 원은 되어야 뭔가 있어 보이고 달삯 900만 원은 좀 모자라고, 달삯 1100만 원은 아주 뛰어나 보이겠습니까.

 어쩌면, 아이들한테 “너 몇 살이니?” 하고 묻는 철없는 어른들 물음하고 똑같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이는 그저 그 아이인 대로 반갑고 귀엽고 좋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네 살이든 여덟 살이든 그리 마음쓸 일이 아닙니다. 아홉 살인데 키가 몹시 크다든지 열세 살인데 키가 참 작다든지 하는 일 또한 마음쓸 대목이 아닙니다. 열다섯에 부쩍 클 수 있고, 아홉 살 키가 스무 살까지 갈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겉으로 드러나는 매무새가 아닌 속으로 살찌우는 매무새를 들여다볼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속차림을 살피고 속차림을 북돋우며 속차림을 아낄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튼, 어제도 이 물음을 받고 시익 웃으면서 “한 달에 300권쯤?” 하고 대꾸했습니다. 예전처럼 책방 나들이를 자주 못하고 살기에(예전에는 날마다 두어 곳씩 다녔으나 이제는 한 주에 두어 번 겨우 다니니까요), 예전만큼 책을 장만하여 읽지는 못하지만, 책방 나들이에서 더듬는 책과 꼼꼼히 되짚는 책과, 거듭거듭 곱씹는 책을 헤아리면 이만한 숫자로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많다면 많은 숫자일 테지만, 적다면 적은 숫자이고, 넘치면 넘치는 숫자일 테지만 모자라면 모자라는 숫자입니다. 한 달에 삼백 권 읽는 사람과 서른 권 읽는 사람과 세 권 읽는 사람과 세 쪽 넘기는 사람하고는 그리 다를 바가 있지 않습니다. 그저 제 삶이 이러할 뿐입니다.


.. 일하는 계급,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이 되어 있네. 하늘의 이름으로 그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이름은 의미가 있어질 거야 …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 위가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이 희망이지 않나? 죽음을 이긴 하나님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싶어하고 있어. 그러니 특정 종교를 위한 선전에는 관심이 없지. 자네는 모든 사람을 위해, 그들이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고 모두에게 비추는 복음을 당당하게 대표해야 하네. 예수는 낮은 사람들로부터, 낮은 사람들을 위해 왔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게나 … 자네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어야 해. 그래서 나중에는 후원자들 없이도 지낼 수 있어야 하고, 정부 관리들이나 성공한 사업가들한테 칭송을 받기보다는 낮은 사람으로 머물러 있게나 ..  (25, 47∼48, 56쪽)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보리술을 사러 찾아가는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할매는 늘 성경을 펼쳐 놓고 있습니다. 돋보기를 쓰고 찬찬히 읽어내려 가십니다. 성경 통째로 읽기를 퍽 많이 하셔서 당신 다니는 교회에서 표창장을 받으셨다고 하고, 무거운 성경을 받쳐 놓고 읽는 틀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할매 삶이 어떠한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마음가짐과 말씨로 사람들과 마주하는지 깊이 알지 못합니다. 다만, 틈틈이 스쳐 지나가는 만남과 할매가 동네에서 이웃한테 보여주는 만남과 때때로 당신 아이들(막내가 저보다 일곱 살쯤 위이더군요) 살아가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말씀으로 돌아보건대, 할매 마음자리 깊이는 할매가 다니는 ㅊ교회 목사님하고 대면 웅숭깊구나 싶어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어슐러 르 귄’이라는 분이 쓴 《어스시의 마법사》에 나오는 아렌과 게드와 같은 셈이구나 싶습니다. 아렌은 아주 젊은 제자요 게드는 나이 많이 든 훌륭한 임금 같은 스승입니다. 아렌은 게드를 모시면서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데, 이 여행길은 아렌이 게드한테서 배우는 여행길이라 볼 수 있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외려 게드가 아렌한테서 배우는 여행길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할매가 다니는 ㅊ교회뿐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에서는 목사님이 신도한테 가르침을 베푼다기보다, 신도들이 목사님한테 가르침을 베풀면서 더 깊고 너르게 예수님 사랑과 마음과 뜻을 받아들이고 깨닫도록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너비와 깊이를 ‘징검다리’에 선 이들한테 넉넉히 나누어 주면서, 징검다리에 선 이들이 다른 나그네를 만날 때마다 기꺼이 당신 자리를 내어주면서 즐겁고 걱정없이 냇물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셈이 아니냐 싶습니다.

 어버이는 딸아들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피와 살을 내어주고, 교회 신도는 교회 목사가 훌륭한 징검다리가 되도록 믿음과 돈과 품과 땀을 내어주는구나 싶습니다. 어머니 자연이 뭇사람과 뭇목숨한테 제 땅과 바람과 물과 햇볕을 베풀면서 오순도순 살라고 하듯, 구멍가게 할매는 당신 식구뿐 아니라 동네 이웃과 교회 목사님한테도 모두를 바치면서 ‘당신이라는 자리가 보이지 않게’ 하는구나 싶습니다.


.. 우리가 만약 증오에 맞서 화를 내지 않는다면 악은 선으로 인도될 거야 … 지금까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영혼만 돌봐 왔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의 물질적 삶을 어두운 좌절과 죄에 내주고 말았네 … 영적인 틀은 세워져야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자연의 삶에서 나와야 해 … 나는 중국사람들이 교회나 교리의 길이 아니라, 자유로운 하나님의 길로 인도되어지길 기도하네 … 사실, 사람들을 기독교 교회들의 늪에서 건져내는 일은 죄와 불신앙의 야만에서 사람들을 건져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워 … 모든 곳에서 기독교의 겉치레가 완전히 없어져야 하네. 실제의 삶에서 실패한 종교는 어떤 모습을 하든 간에 사람들의 진정한 삶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야 … 자네도 권력과 영향력을 찾는 사람들한테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오직 단단한 바위 위에 짓게 ..  (35, 50∼51, 54, 57쪽)


 구멍가게 할매를 보면서, 또 저잣거리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성경을 숱하게 읽어내는 할배와 할매를 보면서, 이분들이 다른 책들을 함께 읽으면 더 좋을 텐데 하고도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분들한테는 오로지 이 거룩한 책 하나로도 넉넉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분들한테는 거룩하다는 책조차 없어도 즐거웁겠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기 앞서 삶이 튼튼하고, 거룩한 책을 펼치기 앞서 당신 몸과 마음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삶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오직 한 가지 책을 붙안으면서 당신 몸이며 마음이 슬지 않게끔 가다듬는 셈이라고도 느낍니다.

 톨스토이 님 말이 아니어도, 우리한테 얼마나 많은 땅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커다란 돈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높은 이름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센 힘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많은 책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넓은 집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한테 넉넉한 삶자리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받아안으면서 스스럼없이 나눌 품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바라볼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우리가 읽는 책에서 무엇을 얻어듣겠습니까.


 (2) 우리가 살 집이라면


 교회에 빠짐없이 나갈 뿐더러, 틈틈이 제법 큰돈을 내놓기도 하는 아주머님이 저보고 “교회 나가야지.” 하는 말씀을 스무 해 가까이 하셨습니다. 예전에 이태쯤 교회에 나간 적이 있으나 대입시험을 앞두고 더 나가지 못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삶에 치이기도 했으며 책으로 받아먹는 말씀이 고마워 굳이 예배당에 나가야만 믿음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즈음까지도 아주머님은 “교회 나가야지.” 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저는 천주교회에서 세례와 견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따로 꺼내지 않습니다. 세례와 견진을 받았대도 바지런히 다니는 사람이 못 되기도 하고, 저 스스로 천주교회 길을 따른다고는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교회를 나가” 보라고 하시지만, 아주머님이 다니는 교회는 당신 집에서 가까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는 교회가 아주 많이 있는데, 교회 다니는 분들을 보면 집이나 일터에서 가까운 교회에 나가지는 않아 보입니다. 모두들 참으로 먼 데까지 나들이를 다닙니다. 거의 모두 자가용을 끌면서 멀리멀리 교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동네마다 새 교회는 끝없이 우뚝우뚝 섭니다. 새 교회마다 때 되면 절집 크기 불리는 공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곤 합니다.


..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구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권력에 목 졸리게 되어 있어 … 우리의 삶은 우리가 작아지고, 예수가 커지는 것을 분명히 보여줘야만 하네 … 낡은 세계를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게 우리의 목표인 것은 분명하네 … 다른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 기독교 사람들의 오만함을 경계하게. 그런 기독교 사람들은 유교 사람들에게 절을 해야 돼. 왜냐하면 그들은 존경을 진정한 예배의 시작이라고 봤거든. 우리 모두는 이런 존경하는 마음을 적들을 포함해 모두에게 가져야 해 ..  (52, 60, 73, 94쪽)


 천주교회가 참으로 괜찮다고 느끼는 대목 하나는, 절집에 매이지 않는 믿음에 있습니다. 천주교회는 제 삶터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멀리멀리 ‘아는 얼굴 있는’ 곳으로 다니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얼굴 있는 데로 나간다고 하여 탈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미사를 함께 받는 일이란 어디에서나 할 수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개신교회에서 안타깝다고 느끼는 대목 하나는, 자꾸자꾸 큰집을 지어서 더 멀리에서도 자가용 끌고 찾아오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조그마한 살림집에서 비손을 올릴 수 없을까요. 왜 우리는 으리으리한 절집에서만 비손을 올려야 하는 듯 여기고, 이런 흐름을 부추길까요. 절집을 크게 다시 짓는 데에 바치는 돈(헌금)이 아니라, 바로 내 팍팍한 삶을 일으키는 데에 바치는 돈이 되는 한편, 내 식구들과 동무들과 이웃들 팍팍한 삶을 돌보는 데에 바치는 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살림이 팍팍함에서 겨우 벗어났다 하면, 아니 내 살림이 팍팍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여도 다른 식구와 동무와 이웃한테 나눌 수 있습니다. 다른 식구와 동무와 이웃도 마찬가지 삶을 꾸리니까요. 서로서로 돈이 넘쳐나서 도와주는 삶이 아니라, 모자라는 가운데 도와주는 삶이거든요.

 우리가 따르거나 받들거나 모시거나 세워야 하는 절집이라면, 비바람을 막을 만한 집 하나면 넉넉하기도 하지만,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한데라 해도 넉넉합니다. 말씀과 넋은 절집으로 찾아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넋은 지붕을 가려 가면서 찾아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타워팰리스에만 찾아오거나 더샵에만 찾아오는 말씀과 넋이 아닙니다. 판자집 철거마을에도 찾아오고 서울역 떨꺼둥이한테도 찾아오는 말씀과 넋입니다.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이라면, ‘나라가 만드는 가난’ 때문에 고달픈 사람들이 쉴 만한 자그마한 방 한 칸이 차근차근 마련된 집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개신교회에서 수없이 절집을 지으려 한다면, 이 절집에 예배를 올릴 때에는 ‘거룩한 집’이 되고, 예배를 마친 여느 때에는 ‘가난한 집’이 되어 집없이 헤매는 사람이 깃들 보금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런 보금자리로 가꿀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개신교회 새 절집을 지을 구실이 생기고, 이런 구실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곳은 절집이 아니라 부자집일 뿐이라고 느낍니다.


.. 기독교가 적을 사랑하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금 도리어 심판을 받고 있네 … 사업가들, 선교사들, 군인들마다 모두 하나님의 손이 아닌 자신들의 주머니 속에 사람들을 틀어넣으려고만 해 … 어느 누구도 우리가 만든 형식에 따라서 기독교인이 될 필요는 없어. 하나님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의 뜻에 따라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허용하길. 그래서 사람들이 진짜 자유를 찾고 해방이 될 수 있게 되기를 … 세례를 줄 사람을 고르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신뢰하게 … 자네는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 생각을 해야 하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선교사들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대신, 지역 교회 조직들을 세우는 어리석은 일에만 몰두하고 있어. 그건 당연히 사람에게는 영광이 되겠지만 하나님에게는 모욕이 될 뿐이야 … 예수를 따르려는 기독교 사람들은 사람들을 섬겨야지, 지배해서는 안 되네 ..  (66∼69, 90쪽)


 그렇지만, 절집이 부자집이 되어 가는 흐름을 우리 형편에서는 무어라 따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절집만 부자집이 되지 않으니까요. 우리네 살림집도 부자집이 되어 버리고 있으니까요. 나라살림이 힘들다는 소리는 그치지 않으나, 서울시청 으리으리 다시 짓는 모습을 보고, 숱한 관공서가 번쩍번쩍 새로 올리는 모습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서울 강아랫마을에 있는 어느어느 우체국 건물은 서울 중앙우체국 건물보다 훨씬 크고 우람하고 빛이 납니다. 돈이 넘쳐나는 동에서 짓는 동사무소와 돈이 쌓이는 구에서 짓는 구청 건물은 어마어마하기까지 합니다. 공무원도 사람이라 공무원이 느긋하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면, 그만큼 ‘봉사’를 잘할 수 있다고 여길 테지요. 그런데, 공무원이 일하도록 세금을 내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집은 모두 헐리거나 쫓겨나야 한다면, 가난한 사람이 겨우 얻어서 들어갈 만한 작은 골목집은 모두 헐리며 몇 억도 아닌 십 몇 억이 넘는 아파트로만 새로 짓는 재건축과 재개발만 판을 치도록 하는 행정을 짜는 공무원들이 나라안에 득시글거리게 된다면, 이런 부자집들이 우리 삶을 얼마나 북돋우게 될는지요. 참말 북돋운다고 할 만한지요.

 사람 사는 집이 살림집이 아니라 부자집이 되는 가운데, 관공서 행정기관 건물도 부자집이 되고, 개신교회 절집도 부자집이 되어 갑니다. 믿음을 얄딱구리하게 비틀면서 절집에 돈이 넘치거나 쌓이는 우리네 흐름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보금자리를 보금자리 아닌 부자집으로 깎아내리거나 비틀고 있기에, 바로 우리 나라가 깎아내려지거나 비틀리고 맙니다.

 공무원이 누구이겠습니까. 목사님이 누구이겠습니까. 신도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 식구이고 동무이고 이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처럼 살아가고 있는 판인데, 누가 순복음교회에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부자집에 자가용 몇 대씩 굴리며 떵떵거리고 있는 주제에, 어느 누가 순복음교회를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까. 순복음교회뿐 아니라, 수많은 부자 교회는 다름아닌 우리 모습이요 우리 넋이요 우리 말씀입니다.


.. 기독교의 역사 전체는 종교적 예식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인지 보여준다네 … 우리는 신학이나 교회를 대표해서는 안 되네. 우리는 그저 사람들이 진리의 성령 가까이 갈 수 있게 돕기만 하면 돼 … 사람들이 교회 문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고도 하나님에게 갈 수 있다는 것을 왜 상상조차 할 수 없을까? … 혹시 우리는 이교도처럼, 죽고 난 다음의 행복을 찾고 있는 건 아닌가? 이 땅을 버리고, 우리 자신과 이웃들을 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 모든 종교적인 도발은 피하는 게 좋아. 그리스도가 조용하게 일하고, 위로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자네가 시도하는 일 속에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신을 분명하게 느끼게 되길 바라네 … 기억하게, 그들이 ‘기독교 사람들’이 될 필요는 없어. 그런 이름은 전혀 신경을 쓰지 말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은 그 실마리를 유교에서 찾든 교부에서 찾든 아무 상관없이 모두 하늘나라의 자녀가 되기 때문이야 ..  (70, 76, 77, 79, 99쪽)


 대학교 졸업장을 따지는 우리가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아이들한테 똑같은 학교옷을 맞추게 하고 똑같은 머리길이로 맞추게 하며 똑같은 연속극과 연예인 놀음놀이에 온마음을 빼앗기게 하는 우리들 스스로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 펜데 굴리는 큰회사 사무직 일자리를 바라는 우리들이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쇠밥그릇 공무원시험에 붙어 걱정없이 연금 받고 놀고먹겠다는 우리들이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얼굴과 몸매를 따지는 우리들이, 돈벌이밖에 생각하지 않는 우리들이, 옷차림과 유행에 얽매이는 우리들이, 갖은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버리지 못하는 우리들이, 사장님입네 교수님입네 기자님입네 선생님입네 사모님입네 하는 거짓 이름값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않는 우리들이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아니, ‘순복음교회’라는 이름으로 보여지게 되는 거짓 믿음을 만들고, 잘못된 믿음을 세우며, 뒤틀린 믿음을 섬깁니다.


 (3) 개신교회에 ‘칼’이 아닌 ‘사랑’을 드는 《숨어 있는 예수》


 이야기책 《숨어 있는 예수》를 쓴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라는 사람은 1842년에 태어나 1919년에 죽었습니다. 이 책은 꽤나 오래 묵어 있던 글모음입니다. 성경만큼 오래 묵은 글모음은 아니나, 성경에 담긴 말씀과 넋을 고이 새기면서 살아오던 한 사람이 자기와 같이 믿음길을 걷는 젊은이한테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담은 조그마한 책입니다.

 얼핏설핏 이 작은 책을 읽는다면, ‘우리 사회 뒤틀린 개신교단에 칼을 들어 썩은 자리를 도려내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읽어 줄 수 있다면, 이 책은 어느 만큼 값을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렇지만, 《숨어 있는 예수》는 칼을 드는 책이 아닙니다. 사랑을 드는 책입니다. 왼뺨을 내주고 오른뺨도 내주는 예수처럼, 한손에 사랑을 들고 다른 한손에도 사랑을 드는 책입니다.


..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네. 그들은 기독교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고 있는 거야 … 기독교 교회들은 영적인 세계와 사랑을 짓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풍습을 반대하는 일에만 힘을 쓰고 있어 … 지금 자네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지금은 무엇을 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 자네가 할 일은 종교적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네의 벗들이 자신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서 문제를 이겨내고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야. 예수는 생명, 하나님의 진정한 생명을 주고 싶어해. 종교적 느낌과 의견은 중요하지가 않네. 세상은 생명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경건한 척하는 위선자가 필요하지는 않아 … 서로 존중하는 신앙이 평화를 가져다주게 될 걸세 ..  (100, 112, 116, 127, 128쪽)


 이 세상을 살리는 길은 가르침에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세상을 북돋우는 길은 봉사에 있지 않음을 들려줍니다. 우리 세상을 일구는 길은 선교에 있지 않음을 깨우쳐 줍니다. 오로지 사랑 하나에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길부터 믿음길이 열림을 이야기합니다. 나 스스로 어떠한 사람인 줄 느껴야 내 삶을 사랑할 길을 찾고, 내 삶을 사랑할 길을 찾으며 내 삶을 고쳐 나가야, 비로소 내 삶이 새로워지면서 나와 얽히거나 나를 둘러싼 사람들한테 즐거움과 보람과 좋음을 함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종교를 나누는 일이란 ‘내가 먼저 믿고 보니 참 좋아서 너한테도 믿게 하려는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내가 이렇게 믿으며 내 삶을 이처럼 고칠 수 있었음을 털어놓는 일이며, 내 삶을 고치는 길에 접어들었기에 더 나은 삶으로 고쳐 보고자 내 이웃과 동무한테도 마음문을 여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함께 돌아보고 함께 나아지자고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 사람들과 따뜻한 관계를 다져나가되 그들의 신뢰를 얻기 전까지는 절대 설교를 하지 말게 … 설교가 아니라 삶이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야 하니까 말이야 … 자네가 다르게 살지 않고 사람들을 그들의 높이에서 만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이해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게 될 거네 …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서게 … 사람들은 목사나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언제나 새로운 생각과 행동에 이를 수 있네 … 신학에 의존한 추상적인 믿음은 무기력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실제적인 표현이 되어야 하네 … 오늘날 중국의 선교사들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처럼 행동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어. 동시에 교회와 기독교 사회는 모든 것을 ‘성공’이라는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기업가처럼 행동하고 있지 …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자기 교인들만 존중하려고 들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이기 전에 자기와 똑같이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 (111∼114, 118, 121쪽)


 이리하여 블룸하르트 님은, 중국으로 선교사 일을 하러 간 젊은이한테 틈틈이 편지를 남겼습니다. 당신이 살아온 길을 더듬고 당신이 겪은 삶을 돌이키면서, 당신이 젊은이한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편지들을 찬찬히 얻어읽는 동안 젊은이가 블룸하르트 님한테 말씀과 넋을 받는다기보다 블룸하르트 님이 젊은이한테 말씀과 넋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젊은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가 갖은 애를 쓰기에 비로소 블룸하르트 님 당신 마음에 뭉클하고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생겨났구나 싶습니다. 이 움직이는 무엇인가는 블룸하르트 당신이 빚어낸 말씀이나 넋이 아닌, 젊은 선교사와 늙은 블룸하르트 둘이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서 하늘나라 아닌 땅나라에서 둘을 지켜보던 말씀과 넋이 살며시 배어들어가 이 책 하나 꾸려지게 되었구나 싶습니다.


.. 기뻐하고, 걱정하지 않으며, 늘 한결같은 젊은이가 되게 … 자네가 목사나 선교사의 자리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네. 그런 자리는 사람에게서 온 거지 하나님에게서 온 게 아니거든. 자리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과 절대 똑같아질 수가 없어. 그러니 변절의 누룩을 경계하게. 중국사람들과 늘 같은 높이에서 머물러야 해.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  (118, 128쪽)


 한결같은 젊은이가 되기를 바라는 블룸하르트 님 말은, 곧바로 블룸하르트 당신이 한결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말이 됩니다. 이리하여 블룸하르트 님은 당신이 높은 이름값을 당신 뜻하고 달리 얻게 되었을 때 스스럼없이 내놓으면서 조용히 물러났고, 사람한테서 온 이름이나 자리가 아닌 하늘에서 온 이름이나 자리를 찾으러, 아니 하늘에서는 이름도 자리도 오지 않음을 느끼면서 몇 마디 글로 당신 삶자락을 남겨 놓았다고 느낍니다. 마지막 눈을 감는 날까지 “변절의 누룩”이 생기지 않도록, 자기가 발디딘 이 지구에서 모든 사람들과 “늘 같은 높이”에서 머물려고, 그리고 사람 아닌 뭇목숨하고도 “늘 같은 높이”에서 얼싸안도록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맞추었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되면서, 《숨어 있는 예수》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우리들한테 고마운 마음밥이 되어 준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이 작은 책은 저와 옆지기와 아이한테, 더불어 제 둘레 사람들과 다른 식구와 동무한테도 마음밥이 되어 주겠구나 싶습니다. 날마다 먹는 사랑 깃든 마음밥으로, 언제나 즐기는 믿음 넉넉한 마음밥으로. (4342.3.3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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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어린이미술관 13
신수경 지음 / 나무숲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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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아닌 ‘좋은’ 그림쟁이 이인성
 [그림책이 좋다 61] 신수경,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


- 책이름 :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
- 글 : 신수경
- 펴낸곳 : 나무숲 (2009.3.4.)
- 책값 : 10500원



 (1) 즐거운 삶이 될 때 비로소


 지난밤, 책 하나 만드는 일을 하면서 날밤을 홀딱 새웠습니다.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야 누구나 날밤 새우는 일을 밥먹듯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출판사에 몸담고 있지 않은 터라 딱히 일감이 많지 않아 날밤 새울 일이 드뭅니다. 1인잡지를 엮을 때 며칠쯤 밤을 새우다시피 하지만, 아기 함께 돌보고 기저귀 빨고 해야 하기에 밤을 새우지 않기도 합니다. 다만, 어제 하루는 홀몸으로 인천집에 머물면서 책 만들기를 하다 보니 저절로 날밤 새우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녘에 살풋 잠든 다음 다시 일어나서 여러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일손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손을 붙잡으면서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즐겁습니다.

 따로 어떤 돈을 버는 일이 아니요,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나, 저한테는 그지없이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등짝이 쑤시고 팔 어깨 손목이 저리지만, 이렇게 아프고 쑤시고 저리고 결리는 몸뚱이를 다독이면서 눈을 밝힙니다.

 다른 책쟁이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그예 돈만 벌려고 일하는 분도 어김없이 있는 한편, 그저 좋아서, 즐거워서, 재미있어서 적은 일삯을 받으면서도 책마을에 오래도록 몸담는 분이 많을 테지요.


.. 이인성은 ‘우리의 풍경’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자연의 색을 표현한 화가입니다. 색채의 마술사였던 이인성은 땅과 하늘, 산과 나무에서 우리 고유의 색을 찾아냈습니다 ..  (3쪽)


 사진을 찍으러 골목마실을 하고 헌책방마실을 하면 온몸과 손목이 저리고 결립니다. 골목에서는 사진만 찍지 않고 햇볕과 바람을 함께 받아들입니다. 헌책방에서는 사진만 담지 않고 반가운 책을 바지런히 살피고 보듬습니다.

 햇볕과 바람이 있고, 밤냄새와 이야기소리가 있어 즐거운 골목마실입니다. 마음을 살찌우는 밥이 있고, 마음을 건드리는 헌책방 일꾼과 책손 말씀이 있어 고마운 헌책방마실입니다. 이리하여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진을 찍게 되고, 두 손이 꽁꽁 얼어서 손가락을 꼬부리지 못하게 되어도 사진을 찍습니다. 가방이 터질 듯 책을 채워서 집으로 돌아오고, 두 손이 책먼지로 시커매져도 까만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씨익 웃게 됩니다.


.. 이제 갓 스무 살의 이인성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까지 하자, 지역 유지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려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울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들은 경북여자고등학교 시라가 주키치 교장이 이인성의 유학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일본의 킹 크레용 회사 사장에게 재주가 뛰어난 학생이 있는데 화가로 키우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  (12쪽)


 둘레 사람들은 저보고 왜 세탁기를 안 쓰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탁기를 쓰겠습니까. 제 옷이며 옆지기 옷이며 아기 옷이며, 손으로 빠는 느낌이 얼마나 풋풋하고 싱그러운데요. 기저귀 빨래를 하느라 하루 가운데 1/5쯤 잡아먹고(요사이는 아기가 오줌을 적게 누기에) 널고 개고 뭐하느라 다른 일을 할 시간을 빼앗긴다고 하지만, 시간을 빼앗긴다기보다 시간을 넉넉히 나누어 쓰는 셈이 아니랴 싶습니다. 북북 비비고 헹구고 탁탁 물 빼어 너는 동안 마음이 얼마나 고요해지는데요.

 몸이 여위고 힘들다 하여도 손빨래를 놓을 수 없습니다. 몸이 아프고 지쳤다 하여도 손빨래를 미룰 수 없습니다. 하루 한두 끼니 먹는 밥과 같이, 하루에 몇 차례 손빨래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고이 다스립니다. 날마다 누런쌀에 온갖 콩팥 섞은 밥으로 몸을 다스리는 한편, 훌륭하고 거룩한 책들로 마음을 다스리듯, 손빨래로 제 넋과 손발을 다스립니다.

 앞으로 아이가 무럭무럭 크면, 아이한테도 손빨래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이 기쁨을 혼자서만 즐기기란 얼마나 아까운가를 차근차근 물려줄 생각입니다. 저부터 즐겁고, 저부터 기쁘고, 저부터 고마운 일이며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 이인성은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을 캔버스에 풀어냈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모델로 하여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  (33쪽)


 열 해 남짓 사귀어 오는 술동무를 낮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제 모두들 시집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얼마나 바쁜 몸이 되었는지, 예전에는 거의 날마다 만나 술잔을 비웠는데 이제는 한 해에 한 번 잠깐 얼굴 보기도 힘들어집니다. 다들 아이가 좀 자라면, 다들 일이 좀 느긋해지면, 이리하여 우리들 나이가 쉰이나 예순쯤 되면 한갓지게 다시 어울릴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한창 바쁠 때에도 연락을 못하거나 만나지 못하는 사이이면서 나중에도 어울릴 수 있으려나요.

 좋은 사람들이라 저 스스로도 벗님들한테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고, 좋은 동무들이라 저 스스로도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어깨동무를 하리라 다짐하게 됩니다.

 좋은 자연과 벗삼으면 자연이 선물하는 좋음을 받는 가운데, 나 스스로도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자연한테 선물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좋은 이웃과 좋은 마을에서 살게 되면 이웃과 마을이 베푸는 선물을 받는 가운데, 나 스스로도 좋은 이웃이요 마을문화 일구는 사람으로 새로워지자고 마음먹으면서 내 다른 이웃과 마을에 좋은 땀방울을 바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살아가는 기쁨이라면 하루하루가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하루하루가 비손하는 믿음이라면 하루하루가 서로 손 맞잡으면서 부둥켜안는 넉넉함입니다.

 삶이란 문화이며 문화란 삶이고, 사랑이란 믿음이며 믿음이란 사랑이고, 일이란 놀이이며 놀이란 일이라고 느낍니다. 모두 한동아리가 되어 흐를 수 있을 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빚어진다고 느낍니다. 자연스레 생겨나는 무지개이고, 자연스레 비가 되고 눈이 되는 물방울이며, 자연스레 싹이 트고 움이 돋고 줄기와 잎과 꽃과 열매로 뻗어나가는 푸나무입니다. 우리 사람한테도 이와 같은 자연스러움이 온몸과 온마음에 깃들면서 나와 너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저마다 선 자리에서 즐거이 호미 한 자루 쥘 수 있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2) 그림쟁이 이인성 님 이야기를 담은 《이인성》


 그림이야기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을 넘깁니다. 1912년에 태어나 1950년까지 짧게 살면서 그림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아온 한 사람 발자취를 고이 담아낸 그림이야기책입니다.

 이인성 님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이런 모습을 보면서 둘레에서 일본으로 그림을 배우도록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인성 님이 살던 때는 일제강점기 때였고, 이인성 님을 일본으로 보내준 사람은 일본사람입니다.

 발자취와 그림밭을 찬찬히 살피다가 흠칫 놀랍니다. 아니, 우리 나라를 짓누르고 있던 일본인데, 그 일본에서도 조선사람을 눈여겨보면서 고이 보듬던 손길이 함께 있었다는 소리인가? 그러면, 오늘날 독립된 나라로 살아가는 이 땅에서는 어떠하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림밭에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진밭이나 글밭에서 놀라운 솜씨를 선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뿐 아니라, 농사짓기를 훌륭히 하는 사람들이 있고, 집살림을 알뜰살뜰 잘 꾸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바른 넋과 착한 마음으로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숱한 사람들도 ‘일제강점기 그림쟁이 이인성’ 님과 마찬가지로 고운 손길과 따순 사랑을 받고 있을까요?


.. 이인성은 평생 우리 자연과 평범한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  (21쪽)


 그림쟁이 이인성 님 그림밭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책에 실린 풀이말과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인성 님 붓질은 더없이 밝으며 맑다고 느낍니다. 그림을 즐기는 동안 눈이나 머리나 마음이 짐스럽지 않습니다. 홀가분하게 넘기고 가붓하게 헤아리게 됩니다. 아무래도 ‘자기와 같은 이웃을 그리고, 자기가 발디딘 터전을 그렸기’ 때문인가 생각해 보는데, 자기와 같은 이웃을 그리더라도 엉망으로 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가 발디딘 터전을 그린다 하여도 ‘우리가 어깨동무하는 삶터’가 아닌 ‘좁거나 치우친 눈길로 허투루 바라본 삶터’를 그리는 사람이 많아요.
 





.. 세상을 떠나던 해에 쓴 그의 글에는 화가의 자부심과 단호함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나의 천직은 그림을 그린다는 신세인 만큼, 그림 속에서 살고 그림 속에서 괴롬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누구에게도 자기의 개성을 짓밟히기는 싫다.” ..  (43쪽)


 그렇다면, 그림쟁이 이인성 님한테는 여느 그림쟁이와는 사뭇 다른 마음결이 있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똑같은 밑바닥 사람을 보더라도 바라보는 눈이 다르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짓눌린 이 나라 이 땅을 바라보더라도 여느 사람들 눈결과는 다르지 않았겠느냐 싶어요. 그리고 이런 다름을 고이 돌보고 북돋우면서 당신 나름대로 그림에 말을 걸었을 테고, 이런 말걸기는 그림을 즐기려는 우리한테 보람과 눈물과 웃음과 기쁨을 남기게 될 테고요.

 어떻게 본다면 이인성 님은 ‘천재화가’일는지 모릅니다만, 제가 느끼기로 이인성 님은 ‘천재’라 하기보다는 ‘좋은’ 그림쟁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살가운’ 그림쟁이로, ‘가슴 열린’ 그림쟁이로, ‘눈을 뜬’ 그림쟁이로, ‘제 길을 제 다리로 뚜벅뚜벅 걷는 동안’ 조금도 흐트러짐이나 망설임이 없이 힘차고 다부졌던 그림쟁이로 보아야 알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그림을 즐기고 나누려는 많은 이들이 ‘천재’나 ‘뛰어나다’라는 이름에 매이기보다는 ‘좋다’나 ‘아름답다’나 ‘즐겁다’나 ‘반갑다’는 소리를 듣는 이웃 같은 그림쟁이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면, 오랜 벗님 같은 그림쟁이로 뿌리내릴 수 있으면, 언제 보아도 허물없고 반가운 풀꽃과 같은 그림쟁이로 이어갈 수 있으면, 그림그리기와 그림즐기기는 모두 사랑이요 믿음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4342.3.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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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난 책읽기가 좋아
아놀드 로벨 글.그림,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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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너한테, 너는 나한테 좋은 벗님
 [그림책이 좋다 60] 아놀드 로벨,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 책이름 :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 글ㆍ그림 : 아놀드 로벨
- 옮긴이 : 엄혜숙
- 펴낸곳 : 비룡소 (1996.8.15.)
- 책값 : 5000원



 (1) 동무 사귀기


 ‘독후감 쓰기’를 해야 하는 중학교 1학년 처남이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읽습니다.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겉에는 ‘초등학교 1ㆍ2학년을 위한 그림 동화’라는 글월이 제법 굵게 적혀 있습니다. 왜 이 그림책을 초등학교 1ㆍ2학년을 생각하는 책이라고 못박을까 궁금한데, 아이들 눈높이를 헤아려 이와 같이 적을 수 있었겠으나, 이 그림책에 담긴 너비와 깊이를 살핀 우리 어른들이었다면, ‘예닐곱 살 어린이부터 함께 즐기는 그림이야기’라고 적어 놓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그림책이란 어린이만 읽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화책 또한 아이들만 보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화책을 초등학생만 읽는 책이라고 누가 말하든가요. 누가 그런 금을 함부로 그을 수 있습니까. 《몽실 언니》를 어린이만 읽어야 할까요? 《꼬마 옥이》를 아이들만 가슴 저미게 읽어야 할까요?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은 세상 살아가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사람들한테, 그리고 세상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알아가고픈 사람들한테 길잡이가 되어 주는 책입니다. 이리하여 어린 아이들한테 ‘동무를 사귀는 기쁨과 보람’을 차근차근 깨닫도록 해 주려는 싱그럽고 맑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왔단다. 집에 와서 또 다른 모퉁이를 보았지. 우리 집 모퉁이 말이야.” 하고 개구리가 말했어요. “너 거기서도 돌아다녔니?” 하고 두꺼비가 물었어요. “그럼, 그 모퉁이도 돌아다녔어.” 하고 개구리가 대답했지요. “무얼 좀 보았어?” “나는 해가 구름 속에서 나오는 걸 보았어.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것도 보았어.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꽃밭에서 일하시는 것도 보았어. 꽃밭에는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어!” “드디어 봄을 찾았구나!” 하고 두꺼비가 기뻐 소리를 질렀어요. “응, 나는 정말 기뻤단다. 봄이 온 모퉁이를 찾아냈으니까.” ..  (26∼28쪽)


 중학교 1학년이 된 처남은 학교 말고 학원도 나갑니다. 다른 동무들도 학원을 나갑니다. 초등학교 때에도 학원을 나갔습니다. 우리 나라나 일본에서는 아주 마땅한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학원 다니기인데, 두 나라를 빼놓고(어쩌면 중국도 비슷할는지 모릅니다만)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공부를 더 하거나 미리 하려는’ 학원에 다니는 나라는 지구에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 나라 많은 분들이 우러러 마지 않는 미국에조차도 입시학원이란 없습니다. 프랑스에 있을까요? 영국에 있는가요? 독일에 있는지요? 우리는 입을 벙긋할 때마다 ‘세계화’니 ‘글로벌’이니 ‘선진국’이나 ‘경제대국’이니 읊고 있는데, 아이들한테 입시지옥을 선물하는 나라가 무슨 앞서거나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아이다움을 키우면서 제 꿈과 뜻을 고이 펼치거나 나누도록 하지 않는 어른들이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나라가 어떤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학원에 다녀야 한다면, 노래를 배우고 그림을 배우고 글을 배우고 연극을 배우며 춤을 배우는 한편 농사일을 배우고 뜨개질과 손빨래 들을 배우는 ‘삶이 있는 다른 배움터’여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입시음악이나 입시미술이나 논술학원이 아닌 ‘삶을 가꾸는 노래’와 ‘삶을 빛내는 그림’과 ‘삶을 밝히는 글’을 익히는 새로운 배움터를 다녀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 “이런, 달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죄다 씻겨 내려갔네.” 하고 두꺼비가 말했어요. “걱정 마, 두껍아. 내게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하고 개구리가 말했어요. 개구리와 두꺼비는 재빨리 가게로 달려갔어요. 그런 다음 둘이는 커다란 나무그늘에 앉아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었답니다.” ..  (40∼41쪽)


 어린 처남은 초등학교 때에도 동무들과 겨루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처남이 다닌 초등학교는 아주 작은 학교였고 반도 세 반에다가 한 반 아이들 숫자가 참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중학교에는 아홉 반에다가 한 반에 마흔이 넘는 아이들이 있고, 이 아이들은 서로서로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데로 내몰립니다. 아니, 교사 스스로 내몹니다. 교과서가, 교과 제도가, 교육 틀거리가 모두 입시지옥일 뿐입니다. 아이들한테 빛나는 마음과 넉넉한 얼과 따순 숨결을 북돋우는 터전이 아니라, 숱한 지식과 셈 잘하는 머리와 돈되는 일거리 생각하기에만 매이도록 하는 감옥과 같습니다.

 그래도 처남 스스로 제 삶을 잘 다스리면 될 노릇이고, 동무들하고도 사이좋게 어울리면서 즐겁게 뛰어놀 수 있으면 될 노릇입니다. 학교옷이 땀과 먼지로 뒤엉키도록 신나게 놀 수 있는 가슴과 팔다리가 있으면 됩니다. 어른들이 내어주는 ‘독후감 숙제’ 때문에 억지로라도 책을 읽게 된다 하여도, 제 깜냥껏 삭이고 빨아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 느낌글이 어수룩할 수 있고 글씨가 삐뚤빼뚤일 수 있지만, 책마다 담긴 고운 이야기를 제 마음바탕에 담아 놓을 수 있으면 됩니다.


.. 개구리는 두꺼비 집에 와서 집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마침 다행이다, 두꺼비가 집에 없으니. 누가 갈퀴질했는지 모르겠지.” 두꺼비는 개구리 집에 와서 집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마침 다행이다, 개구리가 집에 없으니 누가 갈퀴질했는지 짐작조차 못하겠지.” 개구리는 열심히 일했어요. 갈퀴질을 해서 나뭇잎 더미를 만들었어요. 곧, 두꺼비네 마당이 말끔해졌어요. 개구리는 갈퀴를 집어들고 집으로 왔지요. 두꺼비는 여기저기 갈퀴질을 했어요. 갈퀴질을 해서 나뭇잎 더미를 만들었어요. 곧, 개구리네 마당에는 나뭇잎이 하나도 없게 되었어요. 두꺼비는 갈퀴를 집어들고 집으로 왔지요. 바람이 불어왔어요. 바람이 휙 지나갔어요. 개구리가 갈퀴질한 나뭇잎 더미가 사방으로 날렸어요. 두꺼비가 갈퀴질한 나뭇잎 더미가 사방으로 날렸어요 ..  (46∼50쪽)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사귀는 동무는 놀이동무입니다. 그 다음으로 소꿉동무이고, 그 다음으로 배움동무이고, 그러고 나서 일동무입니다. 그 뒤 한참 지나서 길동무를 만나고 마음동무와 사랑동무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부터 마음동무와 사랑동무를 만날 수 있지만, 이러한 마음동무와 사랑동무는 놀이동무와 소꿉동무를 함께 거치곤 하지, 놀이와 소꿉과 배움과 일을 한꺼번에 뛰어넘으며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어린 처남이 이런 흐름과 삶과 동무를 제 나이와 자리에 맞게 바라보고 어울리고 웃고 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합니다.

 저 또한 어릴 적부터 사귀고 만나고 어울려 온 수많은 동무들을 떠올리면서, 서로서로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즐겁게 제 길을 가면서 오래도록 한마음으로 기쁘게 술잔을 부딪힐 수 있기를 꿈꿉니다. 어느 한때 잠깐 스치던 사이가 아니기를 꿈꾸고, 저마다 제 밥그릇에 따라서 사귀다가도 헤어지다가도 등치다가도 하는 사이가 아니기를 꿈꿉니다.

 저는 동무한테 빛이 되고, 동무는 저한테 힘이 되면서, 스스럼없이 어깨동무를 하는 가운데 늙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동무한테 눈물이 되고, 동무는 저한테 웃음이 되면서, 거리낌없이 술벗으로 만나는 동안 주름이 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동무한테 사랑이 되고, 동무는 저한테 믿음이 되면서, 꾸밈없이 속을 털어놓는 말벗으로 복닥이고 복닥인 끝에 흙으로 조용히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그린 ‘아놀드 로벨’ 님은 1933년에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그림책만 하여도 1976년에 그렸습니다. 당신 나이 마흔셋일 때 빚은 작품이군요. 이밖에 《개구리와 두꺼비가 함께》, 《개구리와 두꺼비의 하루하루》, 《개구리와 두꺼비는 친구》 같은 그림책이 우리 말로 옮겨져 있습니다.

 개구리며 두꺼비며 겨울잠 없이 썰매를 타고 논다거나, 예수님나신날을 즐긴다거나, 얼음과자를 맛본다든가, 집 앞에 쌓인 가랑잎을 쓴다든가 하는 일이란,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는 일입니다만, 아이부터 어른까지 ‘개구리와 두꺼비는 징그러운 물뭍짐승으로 여기는’ 잘못된 생각을 톡톡 건드리면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을 가만히 돌아보게 해 주는 반가운 벗님들 삶자락입니다. 개구리는 개구리 나름대로, 두꺼비는 두꺼비 깜냥껏 저희들 삶이 있고 저희들 꿈이 있으며 저희들 놀이와 일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고운 목숨을 물려받으면서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사람들만 바삐 살지 않아요. 사람들만 땀흘리지 않아요. 사람들만 사랑을 하나요. 사람들만 밥을 먹나요. 사람들만 동무하고 어울리나요.

 개구리는 개구리대로삽니다. 두꺼비는 두꺼비대로 땀흘리고 사랑하고 밥을 먹고 동무와 어울립니다. 흰둥이는 흰둥이대로, 깜둥이는 깜둥이대로, 누렁둥이는 누렁둥이대로 제 땅에 발붙이면서 삶을 꾸리고 사랑하고 어울리고 사귑니다. 못생긴 이나 잘생긴 이나 마찬가지이며, 돈 많은 이나 가난한 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똑똑한 이나 어리석은 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저마다 고운 삶이 있습니다. 저마다 고운 삶을 즐깁니다. 얕은 사람 눈길에는 조금도 고와 보이지 않을 테지만. 비뚤어진 사람 눈썰미로는 하나도 곱다고 느껴지지 않을 테지만.


.. 그런데 개구리가 거기 있는 것이었어요. “안녕, 두껍아, 늦어서 정말 미안해. 선물 꾸리다가 그만 늦었어.” “너 구덩이에 안 빠졌어?” “응.” “너 숲에서 길 잃지 않았어?” “으응.” “너 커다란 동물한테 안 쫓겼어?” “그래, 전혀 그런 일 없었어.” “와, 개굴아, 너하고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수 있어서 정말 기뻐.” 하고 두꺼비가 말했어요 ..  (62∼63쪽)


 아놀드 로웰 님은 개구리는 개구리대로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껴안으면서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빚어냅니다. 두꺼비는 두꺼비대로 믿음직스럽게 헤아리고 보듬으면서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내놓았습니다.

 돈으로는 사랑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참된 사랑은 처음부터 돈을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름값으로는 믿음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살가운 믿음은 처음부터 이름값을 살피지 않음을 일러 줍니다. 힘이 세다고 평화를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평화는 처음부터 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이러저러그러한 모든 이야기를 수수하게 그려 보이는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입니다. 책겉에 적힌 말처럼 ‘초등학교 1ㆍ2학년’ 어린이도 손쉽게 알아채거나 느낄 수 있도록 짜여 있습니다. 아주 가벼운 줄거리이고, 예닐곱 살 어린이가 아니라 너덧 살 어린이도 어버이가 조곤조곤 읽어 주면 좋아라 들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게끔 엮여 있습니다.

 읽거나 듣는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읽어 주거나 먼저 살피며 책값 치르어 사드는 어른은 어른대로, 이 그림책 하나를 펼치는 동안 우리 앞에 펼쳐지는 푸르고 밝은 새나라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합니다.


.. “우리, 썰매 타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하고 개구리가 말했어요. “나는 싫어.” 하고 두꺼비가 대꾸했지요. “무서워하지 마. 내가 같이 탈 테니까. 썰매는 신나게, 빠르게 달릴 거야. 두껍아, 네가 앞에 앉아. 내가 너 뒤에 앉을 테니까.” ..  (8쪽)


 그림책은 누가 읽는 책인지 잘 모르겠다면 아놀드 로웰 님 작품을 살며시 집어들어 보면 됩니다. 그림책이 왜 좋은가 궁금하다면 아놀드 로웰 님을 비롯한 훌륭한 앞선 사람들 작품을 가만가만 돌아보면 됩니다. 그림책이란 어떤 책인지 아직 모르겠다면 나라 안팎 손꼽히는 그림책 작가를 알아보면서, 이분들 작품이 우리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면서 뭉클하게 움직이는지를 아이 손을 붙잡고 함께 들여다보면서 느껴 보면 됩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습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울타리를 쌓지 않습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얌전하고 다소곳하게 문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너나없이 웃고 울며 손에 쥘 수 있습니다. 보다가 찢어져도 괜찮고, 찢어지면 풀로 붙이거나 종이를 대면 되며, 망가지고 더러워져도 우리 아이들한테 두고두고 물려주게 됩니다. (4342.3.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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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시장 삼대째 21 - 노르웨이의 어프로치
하시모토 미츠오 지음 / 대명종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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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끔하면서 아름다운 만화 하나
 [살가운 만화 44] 미츠오 하시모토, 《어시장 삼대째 (21)》



- 책이름 : 어시장 삼대째 (21)
- 그림 : 미츠오 하시모토
- 글 : 마사하루 나베시마, 카즈토 쿠와
- 옮긴이 : 편집부
- 펴낸곳 : 대명종 (2008.10.30.)
- 책값 : 3800원



 (1) 그림과 말 하나마다 따끔한 만화


 띄엄띄엄 끊일 듯 이어지면서 나오는 만화책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덧 25권까지 옮겨진 만화로, 이 만화를 처음 알게 되어 1권부터 읽어 오는 여러 해 동안 ‘틀림없이 만화는 훌륭하지만, 널리 사랑받을 수 있을까? 글쎄, 아무래도 더 번역을 안 하고 사라질 듯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만화책을 스물세 권째 장만한 만화가게에서도 이 만화가 ‘새로 나올 때’ 딱히 돋보이는 자리에 올려놓고 알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서 어느 한 번도.

 그러나 이 만화는 여러 해 동안 숨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돋보이는 자리에 올려놓지 않아도 꾸준히 사랑받을 만한 만화로 여겼는지 모르고, 그렇게 구석진 자리에 꽂혀 있어도 소리 소문 없이 사랑하는 손길이 가 닿았는지 모릅니다.


.. “이건 트롤이라는 녀석이지. 북유럽 민화에 나오는 요정이라고 할 수 있네. 숲과 산속에 살면서 사람을 골리기도 하고 돕기도 하지. 어린아이들을 좋아하고, 자연과 요정에 경의를 표하는 인간들에게 행운을 준다고 하더군.” “요정…이요? 그런데 별로 귀엽진 않네요. 좀 음침한 느낌.¨ …후후, 그렇지만 이 트롤은 노르웨이사람들에겐 무척 사랑받는 특별한 존재라네. 그걸 알고 나니 나도 귀엽게 느껴지더군.” “그래요?” “우리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이 트롤은 노르웨이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상징이라네.” ..  (10쪽)


 아기를 낳아 기르느라 만화책을 제대로 돌아볼 겨를이 없던 지난 반 해 동안, 이 만화, 끊일 듯 이어지는 만화 《어시장 삼대째》가 21, 22, 23권이 잇달아 나와 있었습니다.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렀구나 싶고, 그렇게 긴 세월을 까맣게 잊고 살았구나 싶으며,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그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만화가 꾸준히 나오고 있었는데 몰라봤다 싶어 미안합니다.

 가방이 다른 책으로 무겁고 살림돈은 바닥을 헤매고 있으나, 기꺼이 세 권을 집어듭니다. 서울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에 꺼내어 읽을까 하다가 그만둡니다. 다른 만화와 달리 《어시장 삼대째》 같은 만화를 전철길에서 읽다 보면 그만 눈물이 주르르 흘러서 남우세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두 번 겪고 나서는 《어시장 삼대째》는 반드시 집에서, 그리고 잠자기 앞서와 새벽에 일어나서만 펼칩니다.


.. “그럼 여기선 그 자연산 연어를 먹지 않나요?” “자연산 연어를 먹어요?” “제가 이상한 말을 한 건가요?” “자연산 연어를 먹는 건 곰뿐이에요! 당신 곰인가요?” “고, 곰? 이해가 안 가네. 양식 연어는 잘 먹으면서 자연산 연어는 왜 곰의 먹이로 생각하는 거지?” … “하하하, 여기서도 낚시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잡은 연어를 먹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연산 연어는 시장에 나오질 않습니다. 모두가 먹는 연어는 이런 팜(양식장)에서 키운 것들이죠.” “왜죠?” “야생의 곰이 야생의 연어를 먹는 건 자연계의 섭리죠. 인간이 거기에 개입하면 그 균형이 깨집니다.”..  (33, 50쪽)


 어느새 스물다섯 권째 나오는 《어시장 삼대째》인데, 책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어시장에서 삼대째 일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어시장 이야기가 나오며, 물고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시장에서 다루는 물고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요, 일꾼도 한두 사람이 아니니, 적어도 100권쯤은 너끈히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루는 사람에 따라 200권도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다만, 이렇게 권수를 늘릴 수는 있다고 하여도 깊이와 너비를 고루 갖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땀을 쏟아야 할 뿐 아니라, 이 하나에 온몸과 온마음이 깃들어야 합니다. 땀방울이 바쳐지지 않는 만화는 우리한테 눈물방울을 뽑아낼 수 없습니다.


.. “여기선 모든 양식장에서 사용되는 먹이를 국가기관이 엄격히 조사해서 허가한 것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먹이는 열처리로 살균하고 항생물질 등의 약품도 전혀 들어가질 않습니다 …… 인간이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다.” … “또 이 지역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입니다. 그 비와 녹은 눈이 암벽을 통해 풍부한 미네랄을 품은 다음 흘러내려 항상 신선한 바다를 유지시켜 줍니다.” ..  (43, 48쪽)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또는 할머니 어머니 나, 또는 할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세 집안에 걸쳐서 이어오는 중간도매상을 하는 ‘삼대째’는 만화책이 25권에 이르도록 어시장에서 ‘새내기’나 ‘풋내기’ 소리를 듣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도 새내기요 풋내기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런 생각은 바로 ‘언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로 이어집니다. 처음 보는 물고기가 있으면 꾸지람을 듣더라도 만져 보고 여쭈어 보고 손수 사들여서 끓이거나 저며 보거나 삶아 보거나 구워 보거나 합니다. 먹어 보지 않고서는 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몸으로 배우는 물고기에서, 머리로 배우는 물고기로 나아갑니다. 물고기 맛을 알고 잘 다룬다고 하여 훌륭한 일꾼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욕심에 따라서 바다밭이 말라 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필 줄 알아야 하는 한편, 가게 매출을 올리자면서 아무렇게나 사들이거나 다룰 수 없습니다. 나아가, 고기잡이하는 사람들 삶을 껴안고, 나라밖 고기잡이 참모습을 돌아보면서, 주인공이 사는 일본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되짚습니다. 어시장 삼대째인 자기 스스로도 어떤 삶을 꾸려야 하는가를 돌아봅니다. 이리하여, 22권을 보면, “전 제 아이에게 풍요로운 바다와 생선 문화를 남겨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 아이가 어시장 사대째가 되어 주길 바라구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전 그걸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137쪽)” 하고 당차게 외칩니다.


.. “이 신문기사를 보면 유엔에서 국민이 풍요롭게 사는 나라의 랭킹이 나왔는데, 노르웨이가 6년 연속 1위를 차지했어.” “그래요?” “그런 노르웨이사람들의 오락이라면 자연과 접하는 것이라는군. 여가를 즐기기 위해 숲의 오두막에서 불편한 생활을 하거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즐긴다고 하네.” … “지금까지 노르웨이 연어에 유해물질과 약품이 남아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답니다.” “만약 발견되면 그 양식업자는 바로 라이센스가 취소되고 영업정지를 당하게 됩니다.” ..  “난 여기에 와서 다시 노르웨이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느꼈네. 이곳 수산업의 대단한 점은, 정부와 국민과 학교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야.” … “불필요한 인공구조물로 꽉 찬 일본의 해안선과는 다른 자연 그대로의 피욜도, 모두가 협력해서 미리 자연을 보호하고자 과감하게 금어 조치를 내리는 정부, 제가 여기서 느끼고 본 것은 모두 자연과 공존하려는 수산업의 현주소였습니다.” ..  (64, 69, 79, 84쪽)


 이어가려는 마음은 가꾸는 마음입니다. 지키려는 마음은 바로 이곳 이때에 즐기려는 마음입니다. 물려주려는 마음은 고마워하는 마음입니다. 나누려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만화로 들려주는 어시장 이야기는 어시장 사람들이 어떻게 바다와 우리 삶터를 사랑하는 길을 찾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만화 바깥 우리들로서는 우리가 저마다 발딛고 선 자리에서 어떤 이웃과 어떤 매무새로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한테 즐거울 길을 찾느냐 하는 물음표입니다.

 혼자만 잘 살겠다는 밥그릇 지키기가 아닙니다. 나와 이웃 모두 잘 살자는 밥그릇 가꾸기입니다. 혼자만 배부르면 된다는 밥그릇 지키기가 아닙니다. 나와 이웃이 다 함게 즐거웁되 배곯는 사람이 없도록 하자는 밥그릇 보듬기입니다.


.. “이 낡은 목조 건물이 수산선진국의 최첨단 연구소?” “이 건물은 전통 있는 무역상의 창고를 개축한 겁니다. 13세기에 지어진 한저 상인의 집이 지금도 레스토랑과 선물 가게로 사용되듯이, 우리는 낡은 건물을 소중히 여기죠. 좀 불편해도 수리하면서 사용하자는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오래된 건물이 많이 남아 있었네요. 전부 다시 짓는 우리완 다른 느낌입니다.” ..  (66쪽)


 《어시장 삼대째》 22권을 보면, 어시장 사대째가 될 어린이 입을 빌어, “전 소용없단 생각이 들어요. 일본에서 MSC는 확산될 수 없어요. 아까 그 사람들 앞이라 말은 안 했지만, 생산자의 의식이 강해도 소비자의 인식이 낮은데 효과가 있을까요? 아저씨도 본 적이 있잖아요. 마트나 수퍼에서 도시락이나 우유를 살 때, 모두 안쪽에 있는 유효기간이 긴 걸 찾잖아요. 금방 먹을 거고 마실 건데, 그것 때문에 많은 음식과 우유들이 버려지고 있어요. 언젠가는 그 일들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게 될걸 알면서도 그러죠. 그런 일본에서 MSC 따윈 무시될걸요.(111∼112쪽)” 하고 따끔한 한 마디를 합니다. 이 어린이 말에는 22권이 끝나고 23권이 되도록 뾰족한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나오기 어렵지 않으랴 싶습니다.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일본이라고 하여도, 깨우친 생산자만큼 따라가는 소비자가 많지 않음은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깨우치지 않는 생산자도 아직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는 어떠할까요. 우리 나라에서 깨우친 생산자는 얼마쯤 될까요.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깨우친 소비자는 또 얼마쯤 될까요.

 우리는 어느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일는지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느 자리에 서도록 이끌고 있는 어른일는지요. 우리는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즐기는 사람일는지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즐기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는 어른일는지요.


 (2) 그림과 말 어느 자리나 애틋한 만화


 《어시장 삼대째》는 어느 한편으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만화입니다. 그러면서 ‘홀가분’하게도 하는 만화입니다. 권수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고 새로 나오는 만화를 집어들어 펼치면, ‘이 권수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겠지’ 하고 헤아리게 되고, 꼭 그 헤아림대로 줄거리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다 알 만한 이야기가 펼쳐져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웃음을 빼는 대목은 그리 안 많으나 곳곳에서 웃음이 묻어나도록 엮여 있는 한편, 눈물을 빼는 대목이 참으로 많습니다.

 슬픈 눈물이 아닌 아름다운 눈물로, 괴로운 눈물이 아닌 기쁜 눈물로.


.. “어이가 없군. 내가 이런 녀석에게 졌다니 한심해. 삼대째, 자넨 맛으로만 생선을 보나?” “왜 화를 내시는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곰치를 요리해 주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거야! 내 말을 모르겠으면 오토메에게 물어 봐!” ..  (168쪽)


 만화를 넘기며, 또 만화를 덮으며 생각합니다. 그린이와 글쓴이는 어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기에 이렇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하고. 그린이와 글쓴이 어버이는 어떤 분이었기에 이런 마음결을 담아내도록 아이들을 돌보고 키울 수 있었을까 하고.

 고되고 벅찬 삶을 겪어냈다 하더라도 그 고되고 벅참을 짜증이 아닌 사랑으로 펼쳐 보이는 힘이 반갑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삶을 맞아들였다 하더라도 그 기쁨과 고마움을 지루하거나 어설픈 붓끝이 아니라 애틋하며 싱그럽게 담아내 보이는 기운이 좋습니다.

 어려움은 어려움대로 껴안고, 수월함은 수월함대로 부둥켜안는다고 할까요. 슬픔은 슬픔대로 힘이 되고, 기쁨은 기쁨대로 빛이 된다고 할까요.


.. “하지만 시어머니도 유미코 씨보다 더 곰치를 무서워하고 싫어하셨습니다. 그래도 유미코 씨를 위해, 귀여운 손자를 위해 곰치를 손질하고 요리했던 겁니다.” ..  (184쪽)


 삶이 묻어나는 만화이기에 즐겁게 장만하여 읽습니다. 삶이 배어든 만화이기에 깊은 맛을 느끼며 읽습니다. 삶이 삭여진 만화이기에 둘레에 널리 알리면서 읽습니다. 삶이 곧 만화로 다시 태어났기에 책꽂이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 두고 도서관 손님들한테 읽힙니다.


.. “찰가자미국이 정말 맛있는 걸 알겠네요.” “삼대째는 드시지도 않았는데…….” “이시쿠라 씨 얼굴이 무지 편해졌거든요.” … ‘왜 이렇게 먼 기억까지 생각나는 거지? 이 맛은 그저 맛있기만 한 게 아니야! 그리움이야!’ ..  (130, 134쪽)


 그러고 보면 우리한테는 동해와 남해와 황해가 있습니다. 골골마다 냇물이 흐릅니다. 바다물고기와 민물고기가 고루 있습니다. 바닷가마을마다 어시장이 있고 갖은 물고기가 우리 밥상에 오릅니다. 그렇지만, 바다 이야기가 만화로 그려지는 일이 드뭅니다. 어시장 이야기가 만화로 담기는 일이 드뭅니다. 고기잡이 삶이 만화로 새로 빚어지는 일이 드뭅니다. 물고기 하나를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싸안으면서 사랑으로 바라보는 만화를 구경하기란 아주 힘듭니다.

 늘 곁에 있어도 모르는 우리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언제나 함께 있어도 알뜰히 여기지 않는 우리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한결같이 이웃으로 있으나 한결같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뭐가 그리 바쁘신 우리들인지, 뭐가 그리 알아야 할 일이 많은 우리들인지, 뭐가 그리 다른 큰일이 많은 우리들인지, 뭐가 그리 대단한 우리들인지 알 노릇은 없습니다만.


.. “이시쿠라 씨는 요리사라서 내가 모자라지만, 찰가자미 요리는 자신이 있거든요. 찰가자미 요리를 못하면 시집을 못 간다고 할머니가 가르쳐 줬죠.” “유코도 할머니를 좋아하는구나.” “예, 어릴 때 부모님이 일 때문에 바빠서 할머니가 절 돌보셨어요. 내 찰가자미 요리는 우리 할머니 솜씨랍니다.” ..  (100쪽)


 어제 하루와 오늘 하루,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을 우리 아이가 먼먼 뒷날 “우리 할머니 사랑이에요”나 “우리 할아버지 사랑이에요” 하면서 두 손 모두어 내밀 그 자리에 깃들 무엇은 어떻게 자리매겨질까 슬며시 궁금해집니다. 그때까지 아이를 사랑으로 알뜰살뜰 보듬어야 할 테고, 그때까지 어버이 된 몸으로서 아프지 말고 튼튼히 잘 살아야겠지요.

 아이와 함께 즐거울 길을 찾으면 삶은 즐겁고, 아이와 같이 아름다울 길을 살피면 삶은 아름다워진다고 느낍니다. 만화책 《어시장 삼대째》는 1권부터 21권에 걸쳐, 그리고 22권과 23권과 24권과 25권에서도, 또 앞으로 나올 수많은 뒷권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길을 당신들 나름대로 고이 엮어내어 보여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만화를 호수가 빠지지 않도록 잘 챙겨서 모아 놓고, 다가올 앞날을 기다립니다. 아이가 스스로 이 만화를 끄집어 내어 읽을 그 앞날을. (4342.3.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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