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감독 김기덕 -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
마르타 쿠를랏 지음, 조영학 옮김 / 가쎄(GASSE)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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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감독’ 김기덕 이야기를 아르헨티나 작가가 썼네
 [잠깐 읽기 52] 마르타 쿠를랏, 《나쁜 감독》



- 책이름 : 나쁜 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
- 글 : 마르타 쿠를랏
- 옮긴이 : 조영학
- 펴낸곳 : 가쎄 (2009.6.29.)
- 책값 : 9000원



 (1) ‘거북하게’ 이끄는 영화들


 〈어느 날 그 길에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길에서 죽는 짐승 이야기를 하나하나 좇아다니면서 담아낸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앞서도 길에서 죽는 짐승을 숱하게 보고 느끼고 알고 있었으며,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는 길에서 죽는 짐승을 바라보는 이웃사람 눈길을 새삼스레 느끼거나 깨닫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당신 삶을 바꾸었는지 모르나, 도심지이든 시골길이든 고속도로이든 자동차 빠르기를 5킬로미터나마 줄이려고 애쓴다고 하는 사람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아예 자동차를 버리겠다고 외치는 사람을 찾아보지는 못합니다.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우리한테 ‘자동차를 멀리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길에서 짐승을 치여 죽이는 사람들이 ‘나쁘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길에서 차에 치여 죽는 짐승을 놓고 마냥 ‘불쌍하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죽음을 보여주고 죽임을 보여줍니다. 그예 앞으로도 죽음과 죽임이 끝없이 이어지도록 하려는 이 나라 공무원들 매무새를 보여줍니다. 이 나라 공무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여느 사람들 모습’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 하나의 이미지가 수천 개의 단어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 글에서 〈악어〉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소개하기 위해 우선 그와 관련된 피상적인 플롯만 소개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윗글에서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폭력은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이고, 그로 인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여성들은 실제로 그 저변에 깔린 개인적, 사회적 메타포들을 읽지 못했다. 그저 스크린 밖의 그들을 노려보는 야만성과 타락상에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다 … 다른 한편, 침묵도 언어라는 개념은 보수적인 언어학자들을 펄쩍 뛰게 만들지는 몰라도 어쨌든 진실 중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침묵은 빈칸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화자에게 허용된 의미 모두를 함축한 백과사전에 가깝다. 의미를 선택하는 건 온전히 대화를 하고 있는 상대방의 몫이 되며, 두 사람이 동일한 주파수를 공유할 경우에만 소통이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나아가 소통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김기덕의 영화에서, 언어는 오해 또는 소통의 부재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시간〉의 일부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에서 침대에 누운 두 연인의 대화는 비극으로 끝나는데, 그들이 마침내 (언어의 한계 밖에서) 소통을 이루게 된 건 바로 길고도 고통스러운 침묵이 이어지고 난 후였다 ..  (39, 47쪽)


 여러 해 앞서 〈고추 말리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았거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이 영화를 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곧 문을 닫고 사라진다는 ‘아트큐브’인가요? 이곳에 조용히 걸리고 그야말로 조용히 보여진 영화 〈고추 말리기〉는 아파트 옥상에서 고추를 말리려는 어머니 심부름을 따르는 ‘시집 안 가고 영화 찍는다며 깝죽댄다는 딸내미(감독 스스로)’ 이야기를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영화이름 그대로 고추를 말리는 모습이 나오고, 주인공 딸내미가 식구들하고 복닥이면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목소리는 없습니다. 다른 어떤 주제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한국땅에서 ‘여자’로 태어나서 무슨 꿈을 꾸고 무슨 삶을 꾸리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가를 수수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길에서〉나 〈고추 말리기〉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을 ‘번거롭게’ 하거나 ‘거북하게’ 한다고 합니다. 자꾸자꾸 무엇인가 생각하도록 하고 돌아보도록 하며 곱씹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영화가 달갑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계몽’이니 ‘교훈’이니 또 무어니 하는 이름을 붙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 여성 비평가들은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자 평론가들은 아예 무시해 버린다 … 이런 식의 잔혹함은 관객들을 괴롭히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결국 디즈니월드와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단의 거짓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크린의 장면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라면 아무도 그렇게 무자비하게 고문하거나 살해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런 화면에 대해 얼마든지 관용을 베풀 수 있다. 다른 한편, 구타와 강간 등 일상적인 형식의 폭력과 가슴을 찢어내는 미묘한 심리적 고문은 관용의 수준을 현저하게 끌어내리게 된다. 직접 이런 식의 폭력을 겪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약간의 상황변화만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이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관객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자신의 자아가 행사하거나 당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대한 잠재의식적 공포는 리얼리티에 가까운 폭력형태에 대해 절대적인 반감을 유발하게 된다 … 물론 일반적으로 영화팬들은 여가를 즐기고 고민을 달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때문에 쓰라린 심장과 잔뜩 꼬인 머리로 영화관을 떠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다. 관객들은 수저로 떠먹여 주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김기덕은 깊은 사고를 자극하는 노력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  (42, 68, 69쪽)


 저한테는 비디오가 없고 텔레비전 또한 없어 다시 보기 쉽지 않지만, 제가 퍽 여러 차례 본 영화로 〈안드레아스 라인〉이라는 네덜란드 영화가 있습니다. 네 번쯤 보았다고 떠올리는데, 볼 때마다 늘 사람들이 북적북적했습니다. 언제나 무슨 모임에서 여럿이 함께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안드레아스 라인〉을 ‘안 잘린 판’으로도 보았고 ‘잘린 판’으로도 보았습니다만, 여러 차례 보아도 질리지 않고 나중에 다시 보고프다고 생각했습니다. 좀더 나이가 들고 내 삶이 다른 자리에 들어섰을 때 새롭게 보고프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 아이를 키우는 애 아빠 자리에 있는 만큼 요즈음 다시 〈안드레아스 라인〉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는지 궁금합니다. 이 영화를 같이 보던 적잖은 사람들은 졸거나 자거나 딴청을 피우거나 나가 버리거나 하기 일쑤였는데, 저는 한결같이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며 한 대목 두 대목 찬찬히 곱씹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숱하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학자 같은 어머니한테서 사랑스러운 눈길을 받고 싶어 계집아이가 일부러 그네에서 손을 놓고 바닥에 쿵 떨어지는 대목에서도 눈물이 찔끔 나왔고, 차츰 크기가 커지는 공동체 식구들 밥차림과 왁자지껄 수다 떠는 대목에서도 눈물이 왈칵 나왔습니다. 그러나, 좋은 ‘씨’를 받으려고 남자를 꼬드기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싱긋 나오고, 화면을 넷으로 나누어 집집마다 사랑을 불태우는 대목에서도 웃음이 히죽 나왔습니다.


.. 어쩌면 그도 시나리오, 촬영, 편집이 모두 끝난 후에야 겨우 해답을 얻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그건 그의 개인적 해답이고, 그걸 관중과 공유할 필요는 없다. 관객들도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해 내거나 아니면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으면 그만이다 … 더 좋은 선택은 영화를 보는 것이다. 아름다운 화면과 스크린에 펼쳐진 계절의 변화는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주변 환경에 대한 김기덕의 관심은 빈틈없는 관찰력과 더불어, 감수성보다 지성이 발달한 사람들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사람들과 사람들의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해 주었다 … 그는 다른 감독들이 모교의 배지를 가슴에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영화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때문에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  (49, 64, 88, 91쪽)


 영화 〈집으로〉를 볼 때처럼, 영화 〈선생 김봉두〉를 볼 때에도 ‘영화에 그려지는 마을 모습’에 오래도록 눈이 멎었습니다. 〈선생 김봉두〉가 그리 잘 찍은 영화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저로서는 강원도 동강 둘레에 문닫은 작은 학교를 바탕으로 찍어 놓아 ‘작은 학교 삶터와 삶매무새’가 고스란히 사라지거나 잊혀지기 앞서 이렇게 하나 남겨 놓은 대목이 참 반가웠습니다. 2010년이나 2020년에도 〈선생 김봉두〉 같은 영화야 얼마든지 찍을 수 있지만, ‘강원도 동강 둘레 맑고 파란 하늘빛과 물빛’은 이 영화를 찍던 지난날만큼 싱그러이 되살려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책상서랍 속의 동화〉라든지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드넓은 산마을과 자연을 보면서 속울음을 삼켰고, 우리 집 아이한테는 이제 더 보여줄 수 없는 깨끔한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자꾸만 삭여야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스스로 우리 나라 자연 터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끔찍한 물질소비문명이 언제쯤 끝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나마 이 모습이 살아남아 준다면, 우리 아이가 나중에 커서 ‘엄마 아빠, 이 영화에 나오는 저 하늘빛은 뻥 아냐? 거짓말 아냐? 꾸민 그림 아냐? 뽀샵질로 만들지 않았어?’ 하고 물을는지 모르겠지만, …….


.. 서구 사회에서라면 계급이동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다. 인도의 카스트에 버금갈 정도로 엄격한 계급체계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결국 감옥이나 시체실에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는 식의 악순환의 저주에 시달리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  (50쪽)


 홀로 골목동네를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옆지기와 나란히 골목동네를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그리고 이제는 아기를 안거나 이끌고 골목마실을 하면서 사진을 찍을 때, 마음속으로 숱하게 되뇝니다. 저는 제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동네를 이 모습 그대로 담아낼 뿐이라고. 더 잘난 모습도 아니요 더 못난 모습도 아닌, 그저 이 모습 그대로를 담아낼 뿐이라고.

 꽃그릇을 마련해 꽃씨를 심었으니, 이제 막 움이 틀 때부터 줄기가 오르고 잎이 돋으며 꽃이 피고 열매 맺고 씨가 떨어질 때까지 한 해 내내 끊임없이 담아냅니다. 볕 좋은 날 빨래가 나부끼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따로 동네 할매 할배를 불러 앉히고 얼굴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골목마다 놓인 걸상과 평상을 담으면서 할매 할배 손길과 손끝을 느끼도록 합니다. 나무문패를 쓰다듬으면서, 나무전봇대를 어루만지면서, 나무로 짠 대문을 쓸어 보면서, 한 동네에서 오래도록 뿌리내린 사람들 발자취를 더듬습니다.

 뒷날 우리 아이가 이 동네에서 살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또 뒷날 우리 아이가 제가 태어나 자란 동네 모습을 떠올리고 싶어할는지 모르지만, 아비 된 사람으로서 할 몫이라면 이 동네가 더는 다치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힘쓰면서 오늘 모습을 차근차근 담는 데에 있다고 느낍니다.


 (2) 김기덕 감독 영화를 생각한다


 《나쁜 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라는 긴 이름으로, 줄여서 《나쁜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김기독 감독 한삶을 다룬 책 하나가 조그맣게 나왔습니다. 책은 그야말로 조그맣습니다. 2/3쯤이 몸글이고 1/3쯤은 글쓴이 ‘마르타 쿠를랏’ 님이 김기덕 감독과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김기덕은 인간의 조건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82쪽)”는 이야기를 적바림한 마르타 쿠를랏 님은 아르헨티나사람입니다. 아르헨티나에 김기덕 감독 영화가 걸리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데, 이이는 김기덕 감독 영화를 하나하나 찾아서 보고 생각하고 곱씹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주 많은 한국 ‘영화관 손님’은 못마땅해 하거나 거북해 하거나 몸둘 바를 몰라 하거나 손가락질을 하거나 등을 돌리지만, 한국 아닌 나라에서는 여러모로 섬기고 이야기하며 차근차근 파헤치기까지 하는 김기덕 감독 영화가 참말 무엇을 보여주거나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있는 그대로 나누려고 아르헨티나 작가이자 교수인 마르타 쿠를랏 님은 조곤조곤 생각주머니를 펼칩니다.


.. (김기덕) “프랑스에만 있었던 게 아니고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미술관을 다 다녔고, 많은 그림과 조각 사진을 보았고, 그 모든 게 저의 영화 작업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미술관의 작품보다는 거리의 동상이나 과거의 흔적들이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 “저는 영화로 철학자나 권력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며 이해하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결국 초월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만드는 시간 동안 너무나 고통스럽고 슬프며 행복합니다.” ..  (30, 44쪽)


 책을 읽으며 헤아려 보니, 제가 본 김기덕 감독 영화는 몇 가지 없습니다. 〈수취인불명〉하고 〈파란 대문〉쯤? 둘 모두 누구 작품인지 모르면서 보았고, 〈파란 대문〉을 보고 난 다음에는 ‘이 잘 찍은 영화를 잘 읽어낼 사람은 거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영화관 손님’뿐 아니라 ‘책읽는 사람’들도 당신들을 ‘거북하게’ 하는 책을 꺼립니다. 당신들을 거북하게 하는 책을 놓고 ‘교훈적’이라느니 ‘계몽적’이라느니 하는 꼬리말을 달아 놓으면서 깎아내리기 일쑤입니다. 재미가 있으면 재미가 있다고 받아들이면 되고, 나를 가르쳐 주면 넉넉히 배우면 될 텐데, 재미를 재미 그대로 못 느끼는 가운데 가르침은 가르침 그대로 못 받아들인다고 할까요. 우리 삶에서 어느 하루 어느 누구한테고 서로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는 일이 없건만, 영화와 책에서만큼은 ‘저눔이 날 가르치려 들어? 건방지게?’ 하고 생각해 버립니다.


.. (김기덕) “가족들은 생계비를 벌지 못할까 봐 내가 시나리오 쓰는 것을 반대했고, 저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거리에서 타자기를 안고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사람들이 대학 나온 사람들도 못하는 것을 한다고 포기하라고 한 적도 많습니다.” … “이제 저는 다수가 행복한 것보다, 한 나라가 행복한 것보다, 어떤 집단이 행복한 것보다 개인이 자유롭고 행복한 것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그 행복은 물질적 만족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 “인정받지 못했다고 제가 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더 단단하게 제 생각을 고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34∼35, 79, 97쪽)


 《나쁜 감독》을 읽다 보니, 김기덕이라고 하는 영화감독은 고작 ‘국졸’이고, 영화판에 따로 선후배나 스승이라 할 만한 줄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까닭 때문에 찬밥이나 미운털이지는 않을 테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많이 배우고, 너무 많은 가방끈을 움켜쥐고 있느’라 영화이고 책이고 사람이고 삶이고 스스럼없이 바라보며 껴안는 매무새를 스스로 놓쳐 버리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머리속에 어떤 지식으로 가득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지식이 들어서지 못합니다. 머리속이 텅 비어 있어도 아무런 지식이 뿌리내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 머리에 자질구레한 지식을 꽉 채워 놓고서 우리 둘레 사람들을 살갑고 넉넉하게 껴안지 못합니다. 또는, 우리 머리에 아무런 생각을 담아 놓지 않고서 우리 둘레 사람들을 깊고 너르게 살펴보거나 헤아리는 품이 없습니다.

 꽉 차서 야무진 듯 보이지만 갑갑하게 꽉 막혀 있는 셈이고, 확 트이거나 열린 듯 보이지만 썰렁하게 메말라 있는 셈입니다.


.. (김기덕) “저는 제 영화에 꼭 맞는 배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제 시나리오를 이해하고 시간이 맞는다면 가능합니다. 유명한 배우가 출연해서 영화가 잘되는 것보다 그 배우가 누구인지 모르고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보는 게 저는 더 중요합니다.” … “저의 가장 큰 스승은 자연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지루하게 유럽 영화사를 외웠다면 다른 감독들과 다름없거나 감독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 그냥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게 참 행복합니다.” ..  (54, 87쪽)


 다만, 김기덕 감독 영화가 빈틈없이 잘 짜이거나 훌륭하게 잘 엮이기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는 잘 짜이거나 엮였다 할지라도 앞으로도 잘 짜거나 엮을지는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저, 김기덕 감독은 김기덕 감독대로 온힘을 다해 당신 영화를 알뜰살뜰 일구어 선보이면 될 뿐입니다. ‘영화관 손님’은 영화관 손님대로, 영화관에 가는 까닭이 ‘영화를 보고 싶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간 때우기를 하러 가는 영화관입니까. 사랑놀이를 하려고 가는 영화관입니까.

 뭐, 사람에 따라, 또 때에 따라 시간을 때우거나 사랑놀이를 하려고 영화관에 마실을 갈 수 있어요. 언제나 어디서나 자유란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관이 시간만 때우러 가는 곳은 아니요, 책방이나 도서관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러만 가는 곳은 아닙니다. 책을 보러 가면서 책 하나로 마음밥을 얻도록 하자는 책방입니다. 영화를 보러 가면서 영화 하나로 내 삶밥을 곱씹도록 하자는 영화관입니다. (4342.8.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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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진가선 이해문 - 1950~70년대 사진들
박평종 글, 이해문 사진 / 포토넷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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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고 즐기며 껴안다가 살포시 찍는 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 이해문 사진,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



- 책이름 :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
- 사진 : 이해문
- 엮은이 : (사)민족사진가협회
- 펴낸곳 : 포토넷 (2008.12.30.)
- 책값 : 15000원
  







 (1) 사진을 보는 눈


 사진기는 우리가 단추를 누르는 대로 찰칵찰칵 찍어 줍니다. 사진기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로 얼마든지 담아내 줍니다. 우리가 곱다고 느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진기를 들이민다면, 사진기는 어김없이 곱다고 느끼는 대로 담아내 줍니다. 다만, 빛과 빠르기와 그늘을 잘 맞추어 준다면. 아무리 있는 그대로 담아내 준다는 사진기라 할지라도 기계 다루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초점이 어긋나거나 흔들리거나 뿌옇거나 날아가거나 합니다.

 사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온갖 모습을 골고루 찍어 줍니다. 우리가 반갑게 맞이하려는 모습이든, 우리가 숨기고 싶어하는 모습이든, 우리가 돋보이도록 하고픈 모습이든, 우리가 내리누르려 하는 모습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어느 높이에서 어디를 보고 어느 쪽에 중심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모습을 찍는다 하여도, 마음속에 품은 생각에 따라 사뭇 다르게 느낄 사진을 찍기 마련입니다.

 또한, 사진은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가운데, 찍는 사람 느낌과 생각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몸싸움하는 두 사람이 치고박고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지만, 사진쟁이가 ‘어느 한쪽이 아흔아홉 대를 몹시 아프게 흠씬 얻어맞는 모습’은 멀뚱멀뚱 구경만 하다가 ‘딱 한 번 어쩌다 뻗은 손이 다른 편 얼굴에 가닿은 모습’을 잽싸게 찍어냈다 했을 때, 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이때가 어떤 흐름이었는가를 깊이 따지면서 사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맙니다. 게다가, 사진쟁이가 사진 밑에 사진말을 어떻게 달아 놓느냐에 따라서 사진은 대단히 다르게 받아들여질밖에 없습니다.

 이는 시위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시위 현장이 아닌 우리 삶터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파트를 찍을 때에도 찍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루빨리 ‘재건축허가’가 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파트를 찍을 때, 수십억에 이르는 집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을 때, 아파트 문화를 비판하고 싶을 때, 외딴 시골에서 살다가 처음 아파트를 보는 사람 눈으로 바라볼 때, 나라밖 사람들이 한국에 나들이를 와서 아파트를 찍을 때, 언제나 다 다르게 찍을밖에 없습니다.

 골목길을 찍을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골목길 삶터가 ‘남이 아닌 바로 내가 살아가는 터전’일 때 담는 사진하고, ‘구경꾼으로 잠깐 찾아와서’ 담는 사진에다가, ‘어릴 적에 살던 추억을 떠올리며 지나가는 길에’ 담는 사진은 모두 다릅니다. 여기에, 도시재정비를 하려는 공무원 눈길로 골목길을 바라본다면 어떠한 사진이 될까요. 가난한 살림집이라고 하나 가난만 있는 골목집이 아니고, 어느 만큼 변두리라고 하나 삶과 마음과 넋이 변두리이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데까지 찬찬히 헤아리거나 짚는 가운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분은 얼마나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진을 처음 배우던 1998년에 저를 가르친 분도 말씀하셨고, 저 스스로도 사진을 찍는 동안 뼛속 깊이 느끼는 이야기인데, 어느 누구라도 사진을 이제 막 배워서 찍겠다고 한다면 다른 머나먼 좋은(?) 곳으로 나들이를 떠나서 찍을 생각을 하지 말고, 바로 내가 사는 집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식구부터 찍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내 삶터를 먼저 찍고 내 식구를 먼저 찍은 다음, 내가 사는 동네를 찍으면서 나와 이웃한 동무를 찍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차츰 테두리를 넓혀 ‘내가 내 깜냥껏 나 스스로 즐길 사진감은 무엇으로 잡을까’를 찾아나서야 비로소 옳고 바르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한편, 첫마음을 끝마음이 되도록 곱게 붙잡으면서 사진길을 걸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내 사진감은 내가 사랑하는 사진감일 테니까요. 내 사진기에 담으려는 모습은 내 일거리일 뿐 아니라 내 삶이요 내 생각일 테니까요. 내 눈길이고 내 몸짓이며 내 넋이요 내 마음일 테니까요. 내 다리품이고 내 땀방울이며 내 손자국과 손때일 테니까요.

 사랑하는 만큼 내 집과 식구를 껴안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내 동네와 이웃과 동무를 부둥켜안습니다. 사진은 내 마음그릇만큼, 또는 내 사랑그릇만큼, 아니면 내 믿음그릇만큼 손가락에 힘을 주어 단추를 꾸욱꾸욱 누르는 춤사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날갯짓을 하듯이, 신나거나 구슬픈 노래를 부르듯이, 무더운 날 부채질을 하다가 까무룩 단잠에 빠져들듯이 단추를 살몃살몃 누르는 손놀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못 느껴서 그렇지, 우리가 높이 사거나 훌륭하다고 여기는 숱한 사진 작품은 ‘내 삶’ 아니면 ‘네 삶’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을 나 스스로 담아내지 못했을지라도 누군가 나한테 찾아와서 내 삶을 ‘꾸밈없이 꾸준히 알알이’ 담아낸다면 훌륭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내 이웃이 살아가는 모습과 자취를 내가 가까이 다가서면서 지긋이 바라보고 껴안고 보듬고 어깨동무하면서 차근차근 사진으로 담아낸다면, 나는 ‘내 이웃 삶’ 그러니까 ‘네 삶’을 사진작품으로 아름답게 새로 태어나도록 이끌어 낸 셈입니다. 브레송이 담은 한때이든, 살가도가 담은 한동안이든, 모두모두 ‘내 삶’ 아니면 ‘네 삶’입니다. 다만, 이 모습들이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못 느끼거나 못 깨닫고 있을 뿐입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라고 다르겠습니까. 연극은 어떠하지요. 춤이나 노래라고 아주 새로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문화와 예술은 바로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얼우고 사귀고 고꾸라지고 일어서고 스러지는 이 땅에서 샘솟습니다. 이 땅에서 샘솟지 않는 문화란 없고, 이 땅에서 비롯하지 않는 예술이란 없습니다. 여느 한국사람이 부러워해 마지 않는 서양 문화라 해 보았자, 하나같이 ‘서양사람 여느 삶’입니다. 스티글리츠 눈에 담긴 사진은 ‘스티글리츠 삶’이거나 ‘스티글리츠 이웃이 꾸리던 삶’입니다. 구와바라 시세이가 담은 1960년대 청계천은 ‘구와바라 시세이가 이웃으로 여기던 사람들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삶은 바로 ‘우리 삶’입니다. 그저,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사진으로 안 담았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나라 안팎 모든 거룩하거나 훌륭하다는 사진쟁이는 ‘내 삶’을 찍는 사람입니다. 또는 ‘네 삶이지만 내가 꾸리는 삶으로 곰삭이고 받아들여서’ 찍는 사람입니다. ‘네 삶이라 할지라도 내 삶처럼 녹여내고 껴안으며’ 찍는 사람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대로 ‘내 삶’을 담고, 내가 살아가는 대로 ‘네 삶을 내 삶과 같이 바라보며’ 찍는 사람입니다. 












 (2)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에 담긴 사진


 1922년에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나 1956년에 ‘신선회’라는 사진모임을 함께 열어서 꾸린 뒤, 1981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리얼리즘’ 사진 하나를 붙잡았다는 이해문 님 사진책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을 봅니다. 나라안 사진밭에 그다지 이름이 나지 않은 분이요, 살아 있는 동안에 당신 사진책이 나온 일은 없지 않느냐 싶은 분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자취를 사진으로 담던 일을 마무리지어야 하던 1981년부터 스물일곱 해가 지난 뒤 비로소 당신 이름을 걸고 사진책이 하나 나와 주었습니다.

 지난 2008년 12월에 나온 사진책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에 비평글을 실은 박평종 님은 이해문 님 사진을 놓고, “이해문의 사진이 50∼60년대 생활상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지니는 가치는 점차 커져나갈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그 시대 다른 사진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염두에 둘 점은 리얼리즘 사진이 지니는 사진사적 맥락에서의 문제이다. 리얼리즘 사진의 흐름 속에서 활동했던 사진가들의 차별성을 말해 주는 개인적 시각은 50∼60년대 작가들에게서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덧붙여, “1950년대부터 이해문이 기록해 온 한국의 생활상은 크게 몇 가지의 주제로 분류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주제는 작가 주변의 가족, 친척들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진 활동을 했던 작가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피사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가족들의 일상을 일반적인 기념사진의 형식이 아니라 리얼리즘적인 기록의 형식을 빌려 촬영함으로써 그것을 동시대의 보편적인 생활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맛살을 찌푸렸습니다. 1950년대 사람들이 1950년대를 그때에 찍었을 때 그때 값어치는 어떠했느냐 궁금하고, 2000년대 오늘날 바로 오늘 모습을 담는 사진을 오늘날에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이해문 님 사진들이 값어치가 있다는 셈인지, 세월이 흐르지 않았어도 이해문 님 사진이 값어치가 있다는 셈인지, 또렷하게 갈라서 밝혀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값어치가 있다는 사진이라면, 사진쟁이 스스로 먼 앞날만 바라본 사진이었다는 소리인지, 아니면 그때그때 사람들과 숨결을 같이할 만한 사진작품으로까지 빚어내지 못했다는 소리인지를, 제대로 나누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과 연구만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손쉽게 ‘1950년대’이니 ‘1960년대’이니 읊지만, 참 역사에는 1950년대나 1960년대란 없습니다. ‘1958년 4월 7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 몇 번지, 그날 몇 시 몇 분, 아무개하고 어디에서’라고 하나하나 밝히는 가운데 비로소 참 역사가 있습니다. 좁다란 양철통에 누나랑 동생이랑 멱을 감는 사진이든, 추운 겨울날 동네 꼬마가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진이든,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가운데 엄마 따라 나온 아이가 멍석을 깔고 낮잠에 빠져 있는 사진이든, 그 모습 하나하나가 ‘몇 년대 어찌어찌한 역사’가 아니라, ‘어느 해 어느 날 어느 곳 누구네 어찌어찌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참된 역사는 세월이 지난 뒤에만 값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진이 한낱 ‘기념사진’이라 할지라도, 이 사진을 찍은 바로 그날 그때부터 값어치가 있습니다. 찍힌 사람과 찍은 사람 모두한테 값이 있는 가운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때 그런 사진을 기막히게 하나 찍었단 말이야!’ 하면서 더욱더 높은 값이 쌓입니다. 찍힌 사람부터 스스럼없이 웃으면서 사진을 들여다보고, 찍은 사람 또한 눈물겨운 웃음으로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이해문 님 사진을 보면서도 느끼지만, 이무렵 사진쟁이들은 한결같이 비슷했을 텐데, 사진찍기로는 먹고살 수 없을 뿐더러 필름값 대기에 만만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진 아닌 다른 일’을 하면서 사진을 찍었을 터이며, 부지런히 집 바깥으로 짬을 내어 사진찍기를 나섰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해문 님은 바깥에서도 사진을 부지런히 찍는 가운데 집 안쪽에서도 사진을 신나게 찍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대목이 ‘이해문 님 리얼리즘 사진’을 그무렵 다른 사진쟁이하고 갈라 놓을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식구들한테 ‘사진을 좋아하는 남편’이자 ‘사진을 좋아하는 아빠’로서 바깥에서 맴돌이만 하지 않고, 집에서 식구들하고 오붓하게 지내는 가운데 사진을 담았거든요. 이러는 가운데,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이 붙는 사진은, 사람들 삶을 꾸밈없이 담는 사진이어야 할 테지만, 바로 이 리얼리즘은 남들을 구경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나부터 내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보고, 이런 눈과 몸짓을 바탕으로 내 이웃을 껴안는 데에 있지 않겠느냐’는 깨달음까지 간다고 생각합니다.

 숱한 사진쟁이들이 집식구 사진을 곧잘 찍지만,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에 담긴 사진처럼 싱그럽거나 짠하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이해문 님 ‘삶 사진’은 억지스럽거나 어설프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살아가는 집과 동네를 ‘부끄러움 없이’ 보여줍니다. 딱히 숨기지 않으며, 굳이 내세우지 않습니다. 감출 구석 없고 자랑할 구석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사진쟁이 스스로 삶이 사진이 되고 사진이 삶이 되었습니다.

 〈팽이〉나 〈꼬마도서관〉 같은 작품이 퍽 돋보인다 하지만, 이런 돋보이는 사진이 있을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멀리 나가서 여느 사람 수수한 모습’을 찾으려 아둥바둥하기보다, ‘바로 내 집에서 내가 바로 여느 수수한 사람임을 깨달아 나와 내 식구부터’ 찍는 길을 걷고 나서 사진을 넓게 바라보아야겠다고 느끼는 매무새가 고스란히 사진에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또한 제 삶마디에 따라서 헌책방을 찍고 골목길을 찍고 자전거를 찍으며 우리 아기를 찍습니다. 아기를 돌보고 집 안팎 살림을 꾸리느라 집은 온통 어질러져 있는데, 이런 어질러진 모습을 사진눈에서 슬쩍 빼놓을 수 있는 가운데 더 잘 들어오도록 찍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따로 빼지 않고 굳이 더 넣지 않습니다. 꼭 그만큼, 제가 찍어야 하는 만큼만 찍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어떤 ‘적바림(기록)’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좋아서 찍습니다. 좋아서 찍은 사진을 좋아서 두 장씩 찾은 다음, 음성에 살고 있는 부모님한테 한 장씩 모은 꾸러미를 띄우고, 저는 저대로 집에 차곡차곡 한 장씩 갈무리해 놓습니다.

 오늘도 집에서 몇 장 담았고, 골목길마실을 하면서 몇 장 찍었습니다. 다음날도 그 이듬날도 매한가지로 사진과 함께 살아갈 생각입니다. 이해문 님은 이해문 님이 살던 그무렵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사진을 즐겼듯, 저는 저대로 제가 발딛고 있는 터전에서 제 둘레 사람을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제 사진을 즐기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당신 첫 사진책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 같은 작품을 하나하나 장만해서 제 도서관 책시렁에 고맙게 꽂아 놓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4342.8.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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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람의 말 - 6·9 작가선언
작가선언 6·9 지음 / 이매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미친이는 미친소와 함께 물러나라고 외치려면
 [잠깐 읽기 51] 작가선언 6ㆍ9, 《“이것은 사람의 말”》



- 책이름 : “이것은 사람의 말”, 6ㆍ9작가선언
- 글 : 작가선언 6ㆍ9, 192 사람
- 펴낸곳 : 이매진 (2009.6.29.)
- 책값 : 5000원



 (1) 오늘 우리가 하는 일과 읊는 말


 아침에 일본 만화쟁이 ‘나가이 고’ 님 작품인 《마징가 Z》와 《그레이트 마징가》와 《Z 마징가》 아홉 권을 금세 읽어냅니다. 그러께에도 한 번 보았고 지난해에도 한 번 보았는데, 오늘 아침에 스캐너로 겉그림을 긁다가 문득 한 번 다시 넘겨 보는데, 한 번 이야기에 빠져드니까, 아홉 권을 내리 다 읽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합니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 첫머리에 그렸고, 우리 나라에도 곧이어 들어온 ‘마징가 제트’가 일본 로봇이었음을 어릴 때부터 찬찬히 알았던 사람은 드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어릴 때에는 알지 못했으며, 어른들은 옳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일본이라 해서 굳이 꺼려야 할 까닭이 없으며, 일본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아름답게 일구는 문화와 문학이라면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면서 즐길 노릇입니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우리들은 이웃나라 훌륭한 문화와 예술을 꾸밈없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 스스로 일구는 문화와 예술 또한 꾸밈없이 바라보지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반성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말은 오물이 되고, 민주주의가 멈추는 순간 우리의 삶은 허깨비가 된다. (고나리)
― 국민을 잠재적 폭도로 여기는 정권은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고인환)
― 민주주의는 공기와 같아서, 숨쉴 수 없게 된 후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권혁웅)



 모처럼 되넘기며 읽는데, 지난해와 그러께 책장을 넘길 때에는 눈여겨보지 못하던 대목 몇 군데가 새삼스레 눈에 박힙니다. 1권 첫머리에서는 “이 녀석의 악마와 같은 파괴력을 써서, 신과 같은 온화한 마음으로, 내가 세계를 구한다!” 하고 외치는 대목이 눈에 뜨이고, 4권 첫머리에서는 “올림푸스의 별들도 예전엔 괴수신이 아니라 지구와 똑같은 생물의 사람들로 가득했었지. 지구인보다 훨씬 거인이긴 했지만 지구인과 다름없는 생활이 있고,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이 있었어!” 하고 외는 대목이 눈에 뜨입니다.

 마징가 로봇 이야기를 살피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로봇들이 때리고 부수고 죽이고 죽고’ 하면서 지구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싸움판이 나옵니다. 그저 싸우고 또 싸웁니다. 그예 죽이고 또 죽입니다. 나쁜 마음으로 죽이고 착한 마음으로 죽입니다. 나쁜 이도 착한 이도 맞은편보다 더 힘이 세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왜 싸우려 하는지, 왜 서로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괴롭히고 들볶으며 ‘세계 정복’을 하려고 드는지는 밝히지 못합니다. 오로지 ‘세계 정복’이 꿈일 뿐입니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이들은 어디에서 돈이 철철 흘러넘쳐 그 숱한 무기와 로봇을 만드는지, 또 지구를 지키는 쪽 또한 어느 메에서 돈이 콸콸 솟아나서 그 대단한 무기와 로봇을 만드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나쁜 쪽이든 착한 쪽이든 온통 전쟁무기 만드는 데에 돈과 땀과 힘을 바칠 뿐이요, 싸움로봇이 휩쓸면 그 어떤 문명이든 문화이든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됩니다. 주먹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이 아닌, 주먹 앞에 역사가 없고 문화가 없으며 교육이 없습니다. 오직 주먹힘 하나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납니다.


― 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경제발전 운운하는 거창한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 아래 억압된 정직한 욕망이다. (김남혁)
― 이제 더는 하소연할 길조차 없는 억울한 사람들을 때리지 마라. (김연수)
― 술 마시고 깨어 보니 역사를 몽땅 훔쳐가 버렸네. 일어나자, 친구야. 도둑 잡으러 가야지. (신용목)



 어제부터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을 죽 읽다 보니, 자연 삶터에서 모든 목숨붙이는 ‘텃세, 제거, 경쟁, 분산’에 따라 서로서로 살아남기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을 읽다가 ‘경쟁’이라는 말마디에 오래도록 눈길이 멎습니다. 말 그대로 좀더 힘세고 좀더 슬기로우며 좀더 튼튼한 녀석들이 살아남습니다. 좀더 여리고 좀더 어리숙하며 좀더 가냘픈 녀석들은 밀려나다가 죽어납니다.

 그런데 이 ‘겨루기’란 푸나무와 짐승한테서만 볼 수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사람 또한 아주 예전부터 겨루기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겨루기가 아닌 텃세인지 모르며 ‘없애기(죽이기, 제거)’라 할 수도 있고, ‘나누어 모여 살기(공동체, 분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겨루기를 하지 않고 ‘어깨동무’나 ‘품앗이’를 하기도 할 테며, ‘사랑’과 ‘나눔’으로 서로 함께 살아나기도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푸나무이든 짐승이든 서로서로 기대어 살아가기도 하니까요.

 그나저나 이 ‘겨루기’라는 대목을 오래도록 곱씹어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터는 어찌 된 노릇인지 그렇게 ‘경제성장’을 높디높이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겨루기는 나날이 거세고 거칠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터는 국민소득도 오르고 물질문명도 거의 마음껏 누리는 데다가 자가용 끌면 못 가는 데가 없는 판인데, 이렇게 느긋하게 잘살 수 있게 되었는데도, 더욱 불꽃 튀도록 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더더욱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입니다. 남보다 더 높이 오르려 하고, 남보다 더 누리려 하며, 남보다 더 가지려 합니다. 나한테 없으면 빼앗든지 못 쓰게 하든지 들볶든지 깔보든지 깎아내리든지 합니다.


― 사람의 마을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 그곳에도 사람이 지나갑니까? (우대식)
― 사랑이나 꿈 때문에 절망해 볼 권리를 달라. 돈 때문이 아니라. (윤이형)
― 내 이웃이 헌법적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고 도멸을 삼키며 죽어갈 때, 나는 어디에 있었나? (이안)


 아주 많은 어버이와 교사 들은, 아이들한테 일찍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한글을 떼도록 하고 무슨무슨 책을 읽히며 ‘영재교육-재능교육’ 따위를 ‘조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시킵니다.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아이한테 더 많은 지식을 더 어릴 때부터 머리속에 집어넣도록 하는 데에 힘쏟고 있는 가운데, 아이들이 집 바깥으로 나와 신나게 뛰어놀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놀 골목이나 놀이터를 깡그리 없앤 데다가 너른터(광장)마저 꽁꽁 틀어막았는데, 이렇게 없애고 틀어막고서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유익한 교육방송’을 보여주기만 합니다. ‘체험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자연 이야기도 체험학습’이요, ‘동네 문화와 역사도 체험학습’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에서 땅을 딛고 놀고 넘어지고 어울리는 길은 뿌리뽑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이웃을 보면서 역사와 문화를 몸과 몸으로 배우도록 하는 길은 내팽개칩니다.

 그러고 나서 지식인들은 한 마디씩 합니다. ‘시골에 아이들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도시에는 아이들이 많지만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권력을 움켜쥐었다는 제도권 공무원과 정치꾼이 아이들을 이처럼 못살게 군다지만, 제도권 공무원과 정치꾼을 누가 뽑았겠습니까. 제도권 공무원과 정치꾼이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어른들이 뽑은 공무원과 정치꾼입니다. 바로 우리 어버이들 스스로 공무원이 되어 일을 해서 아이들을 먹여살리고, 정치꾼이 되어 집식구를 거느립니다.


― 이성은 행동하지 않는다. 너의 울고 있는 말들을 보여줘. (정은경)
― 자유와 사랑을 원합니다. (허윤진)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먼저 바꾸어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은 바꾸지 않는 가운데 화살만 남들한테 돌리고 있다고 할까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먼저 들여다보고 느껴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은 거들떠보지 않거나 지나치는 가운데 남 탓과 남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할까요. 우리 아이들은 바로 우리 모습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남김없이 받아들이면서 크고 있는데, 정작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 앞에서 아름답고 훌륭하고 싱그럽게 살아가지 않고 있다고 할까요. 우리는 우리 모습과 삶을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주기 마련이지만, 우리 참모습은 숨기거나 감추거나 내버린 채 나라밖 그럴싸한 껍데기만 아이들한테 들씌우려고 한달까요.


 (2) 《“이것은 사람의 말”》에 담긴 글쟁이들 말


 ‘작가선언 6ㆍ9’라는 이름으로 글쟁이 백아흔두 사람이 한 마디씩 외친 목소리를 그러모은 책 《“이것은 사람의 말”》을 읽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은 책상맡에서 머리만 굴리며 펜놀림으로 뽑아낸 글모음이 아닙니다. 보름이라는 짧은 동안에 엮어낸 글모음이기는 하나, 너른터로 뛰쳐나와 촛불을 들든 돌멩이를 들든 빈손으로 말없이 선 채로 자리를 지키든 하던 글쟁이들이 온몸으로 부대끼며 헤아리던 목소리를 담아냅니다.

 글쟁이 백아흔두 사람 목소리는 꼭 한 사람한테 가 닿습니다. 아니, 꼭 한 사람한테 보내려고 쏘아붙이는 말화살이요 말칼입니다. 바로, 이명박 대통령 한 사람한테.

 그렇지만 이 책을 쥐어들어 읽는 저는, 백아흔두 사람 외마디소리를 읽는 저로서는, ‘틀림없이 이명박 대통령한테 하고픈 말’을 외쳤다는 백아흔두 사람이었을 터이나, 어쩐지 제대로 화살을 쏘는 말을 꺼낸 사람은 꼭 두 사람만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퍽 부질없는 말잔치, 꽤 달콤한 말사탕, 제법 날카로운 듯한 말채찍, 썩 힘알이없는 옹알이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 이명박 정권은 문화와 민주를 파괴하는 광기의 야만을 국민 앞에 사죄하고 물러가라. (박민규)


 아무래도 이명박 대통령 탓만 할 수는 없으리라 봅니다. 대통령 한 사람만 잘못했다고 해서 우리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는 않으니까요. 우리 스스로 좀더 옳고 바르게 살아내지 못한 탓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일 테니까요.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나 스스로한테 외치는 말마디’조차, 나한테서 무엇이 잘못되거나 어긋나거나 뒤틀렸다고 느끼는가 하는 대목에서 엉성궂습니다. 흐리멍덩합니다. 모두들 글쟁이라서 글솜씨가 빼어나서 ‘은유와 비유’로 이야기를 펼치시는지 궁금합니다만,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겠다는 “작가선언 6ㆍ9”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청계천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살아 있는 물이 아니다. 이대로 모두가 유령이 될 순 없다. (정주아)


 《“이것은 사람의 말”》을 펴낸 출판사에서는, 오늘날 정권이 엉뚱한 길로 마구 내달리는 모습을 꾸짖으려는 마음으로 책을 펴냈다고 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 몹쓸 정권을 바로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값을 퍽 값싸게(5000원) 붙여서 내놓았다고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을 했다고 느끼는 한편, ‘작가선언 6ㆍ9’를 더욱 힘차고 또렷하고 널리 나누려 하던 마음결이라면 한 쪽에 한 줄씩 넣는 책짜임이 아닌, 백아흔두 줄에 이르는 외침을 더 작은 판으로 더 수수하게 묶고 책값은 아예 1000원쯤 붙일 수 있도록 엮어내어 수만 권을 찍어서 뿌려야 알맞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백아흔두 줄을 열 몇 쪽짜리 더 작은 책자로 꾸며 한 권에 500원씩만 받으면서 수십만 권을 찍어서 뿌려야 한결 알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뭇소리 없이 입다물고 있는 우리들이 아님을 느끼니 서운하지는 않습니다. 이만한 몸부림이라도 보여주는 글쟁이들이니, 이와 같은 발버둥으로라도 치면서 우리 삶터를 새롭게 바라보고 부둥켜안고자 하니 반갑습니다. (4342.8.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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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 1 세미콜론 코믹스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김희정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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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숲’에서 농사지으며 만화그리는 아가씨
 [살가운 만화 49] 이가라시 다이스케, 《리틀 포레스트》 1권



- 책이름 : 리틀 포레스트 (1)
- 글ㆍ그림 : 이가라시 다이스케
- 옮긴이 : 김희정
- 펴낸곳 : 세미콜론 (2008.10.13.)
- 책값 : 8000원



 (1) 도시 삶터에서 자연이란 어디에?


 꼭 지난주부터 동네 골목길에서 ‘빨간고추 말리기’를 봅니다. 처음에는 어느 한 동네 골목길에서만 ‘고추 말리기’를 하는가 생각했지만, 자전거를 타고 휘휘 이웃 동네를 다니다 보니, 온 골목동네가 고추를 말리려고 부산합니다. 꼭 지난주에는 한두 집 드문드문이었고, 어제오늘은 제법 늘었는데 마침 엊저녁부터 빗줄기가 뿌리는 바람에 오늘은 길가에 고추를 널어 놓은 집이 퍽 줄었습니다. 그렇지만, 빗줄기가 뿌리더라도 비닐을 쳐서 고추는 길가에 그대로 두는 집이 제법 있습니다.

 이렇게 고추 말리는 철이 다가오면, 골목마다 ‘자동차가 들어서지 못하게 하려’고 굵은 나무토막을 먼저 길가에 척척 깔아 놓습니다. ‘이 자리에는 고추를 널어야 하니까 차 대지 마쇼!’ 하고 밝히는 뜻인데, 여느 때에는 아무 거리낌없이 차를 대놓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차를 대놓을 수 없으니 못마땅해 하거나 짜증이 나겠구나 싶습니다. 고추를 말려 놓는 집에서 모는 자동차라면 다른 데에 대놓을 테지만, 다른 집에서 대놓던 차라면 고추를 내놓는 집은 ‘이제 며칠 동안이나마 우리 집 앞에 멋대로 차를 못 대놓겠지’ 하고 싱긋 웃을 테고, 제 집 앞이 아니면서 아랑곳않고 차를 대놓던 집에서는 ‘뭐야, 이건?’ 하며 이맛살을 찌푸릴 테지요.


.. 다시 수유의 계절이 되었다. 많은 열매가 떨어져서 썩어간다. 떨어진 건 모두 쓸모가 없을까? 잼이나 만들어 보자 … “뱀밥은 역시 잡초야. 쇠뜨기가 무성해지면 베어도 베어도 없어지지 않고 말야. 뿌리는 잘아서 뽑아내기도 힘들고.” “뭐, 그건 그렇지만, 뱀밥이 자라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 온 건 인간이잖아. 숲을 개방해서 말야. 옛날에, 죠몬시대에 말야, 뱀밥이 자라는 곳은 얼마 안 돼서 잡초가 아니라 귀중한 산채였을지도 모르지. 봄을 알리는 중대한 산의 은혜로. 분명히 태고적 인간은 뱀밥을 소중하게 여겼는지도 몰라.” ..  (8∼9, 74∼75쪽)
 



 고추를 말리는 철에는 골목동네마다 길바닥이 빨갛게 물들지만, 아파트도 곳곳이 빨갛게 물듭니다. 예전부터 고추를 말려서 쓰던 할매가 함께 살아가는 집에서는 아파트로 삶터를 옮겼어도 어김없이 ‘어디라도 빈 자리를 찾아내어’ 고추를 널어 놓습니다. 지난날에는 아파트 꽃밭에 장독을 심기까지 했고, 오늘날에는 그나마 고추 널기라도 한다고 할까요.

 제 어릴 적 일을 떠올려 보면, 제가 일곱 살 무렵부터 열일곱 살까지 살던 5층짜리 아파트에서는 ‘자가용 있는 집’이 드물어서, 아파트 주차장은 거의 모두 ‘고추 말리는 터’가 되었고, 여느 길바닥에도 고추를 촘촘히 깔아 놓아, 차는 고작 한 대만 외길로 다닐 만큼만 남겨 두곤 했습니다. 5층짜리 아파트 옥상은 집집마다 자리를 잡아 놓고는 가득가득 고추를 널어 놓곤 했는데, 헬리콥터라도 타고 내려다보았다면 그야말로 남다르고 빛고운 모습이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옹진군 장봉섬 옹암분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 분교 사택 옥상이며 학교 운동장이며 온통 고추를 널어 놓던 일이 떠오릅니다.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따로 안 살았지만, 어머니가 으레 고추를 널어 말린 다음 집에서 손수 고추장을 담갔습니다. 이웃집도 매한가지였습니다. 어느 집이든 ‘고추장은 마땅히 사다 먹지 않고 집에서 빚어 먹는다’는 흐름이었습니다.


.. 푹 삶아진 잼은 투명감이 없는 탁하고 진한 핑크색. ‘타는 게 무서워서 너무 많이 젓다 보면 잼이 탁해진다’고 엄마가 말했었다. 망설이다가 너무 많이 저었나. ‘요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야. 집중해. 다치기 쉬우니까.’ “지금, 이게 내 마음의 색깔인가?” … 벼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벼 수확도 비가 내리는 추운 날 짬을 내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분주하게 일했다. ‘올해의 찹쌀농사의 성과가 지금……’ ..  (11, 42쪽)


 날씨는 한여름에 접어들어 푹푹 찝니다. 흙을 밟을 수는 없어도 골목집들은 어김없이 스티로폼 꽃그릇을 키우거나 ‘철거되어 빈 집터에 있던 돌을 치우고’ 동네텃밭을 일구어 조그맣게 농사를 짓곤 합니다. 작디작은 땅뙈기마다 오이며 가지며 박이며 쑥갓이며 마늘이며 파며 배추며 상추며 고추며 도라지며 깨며 심는데, 꽤 느즈막하게 오이와 호박을 심어, 이제서야 꽃을 피우는 집이 있습니다. 어쩌면, 꽤 느즈막하게 심었다기보다, 일찍 심어 일찍 한 번 거둔 다음 두 번째로 심어 새로 거두려고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비가 살짝 흩뿌리다가 개다가 하는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숭의4동과 도화1동 둘레를 죽 돌아보는데, 도원역과 제물포역 사잇길 건너편 안쪽인 숭의4동에 있는 꽤 많은 골목집에서 포도넝쿨을 키우는 모습을 봅니다. 어느새 짙은 빛깔로 익어 가는 포도송이가 있고, 아직 덜 익은 포도송이가 있습니다. 보름쯤 앞서는 신흥동1가 긴 담벼락을 타고 자라는 포도넝쿨을 보았는데, 이곳도 머잖아 바다를 닮은 쪽빛으로 송이송이 알알이 영글겠구나 싶습니다. 슬쩍 한 알 따먹을까 하다가 사진만 여러 장 찍고 돌아섭니다.


.. 하츠미는 밀가루에 물을 넣고 귓불 정도로 말랑하게 반죽해서 2시간 이상 재워 둔다. 그것을 손으로 잡고 얇게 늘려서 찢어 국물에 넣고 끓인다. 충분히 재워 두지 않으면 쫀득하지가 않다. 그래서 눈을 치우기 전에 만들어 놨다가, 눈을 다 치우고 배가 고파졌을 때 먹는 게 제일 맛있다 … 서리 맞은 시금치는 감칠맛이 확 늘어나서 더 맛있다 ..  (25, 158쪽)


 이제 우리 집 아기는 아장걸음을 곧잘 걸어, 신을 신기면 혼자서 신나게 이리 뒤뚱 저리 뒤뚱 걷습니다. 비알이 진 길에서는 자꾸 넘어지지만 판판한 골목에서는 웃는 입을 헤 벌린 채 나비춤을 추듯 걷습니다.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가면 마주 걸어오던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은 웃음으로 인사하면서 길을 내어줍니다. 몸소 아이와 함께 오래도록 지내온 분들이기 때문일까요.

 며칠 앞서 아기가 첫발을 내딛고 나서, 옆지기는 푸념을 했습니다. “아기가 첫발을 떼었는데, 첫발을 뗀 길이 아스팔트야!”

 옆지기가 말하기 앞서 한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 아스팔트입니다. 또는 시멘트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 제아무리 싱그럽고 아리따운 골목길마실을 즐길 수 있다 하더라도, 어찌 되었든 도시라서 흙길이 아닌 시멘트길이거나 아스팔트길입니다. 아기는 제 첫발을 뗀 기쁨을 ‘제대로 된 땅’이 아닌 ‘껍데기 씌운 땅’을 밟으면서 느끼게 되었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런 아스팔트 길맛을 땅맛인 듯 잘못 알게 되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흙땅이 아닌 시멘트땅과 아스팔트땅을 밟습니다. 시골에서도 논밭일을 할 때를 빼고는 으레 시멘트땅을 밟기 마련입니다. 온나라 거의 모든 시골길은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덮여 있으니까요. 옛날 같은 고샅길이란 없다시피 하고, 아련한 논두렁길 또한 없다고 해야 옳지 싶습니다.


.. 저녁식사도 준비되어 있고, 집에서는 피곤하다고 말해도 되겠죠. 빨래가 쌓여 있으면 잔소리도 하고 말예요. 하지만 난 아무리 피곤해도 전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돼요. 돈을 버는 것도 집안일도 분담해 줄 사람은 없으니까. 여기서 돈을 벌고 있는 동안 집안일은 손도 못 대요. 한 가지씩밖에 못하죠. 눈을 치우고 있을 때, 장작 패는 게 끝나는 일은 절대 없어요. 난 혼자니까.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가족에게 시키는 주제에 바쁜 척 대단한 척하지 마요. 난 뭐든 혼자서 다하니까. 가족에게 어리광 부리는 당신들이 내 고통을 알 리가 없지. 일을 분담해서 해 줄 가족이 없는 게 얼마나 ……, 난, 엄마에게 정말, 가족, 이었을까 ..  (62∼63쪽)


 엊저녁 옆지기가 푸념하는 소리가 귀에 쟁쟁한 가운데, 낮나절에 홀로 자전거를 몰며 골목마실을 하며 밤나무를 보고 모과나무를 보고 호두나무를 보고 대추나무를 보며 감나무에다가 포도나무 들을 실컷 보았습니다. 제 사진기에는 이 온갖 열매나무들 자취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하나같이 ‘골목집 담벼락 안쪽 마당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길가 흙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길가엔 흙이 없으니까요. 숭의3동과 송림2동에는 꽤 큰 고무다라이통에서 자라는 대추나무가 있기도 한데, 이런 데에 대추나무를 심어서 가꾸니 놀랍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서글픕니다.

 나무는 마땅히 너른 흙을 제 어머니밭으로 삼아 뿌리를 내려야 하니까요. 그러면서 그 나무 한 그루만이 아니라 동무나무도 옆에서 자라고, 엄마나무나 아빠나무도 둘레에서 함께 자라야 할 테니까요. 키가 15미터쯤 넘는 버드나무가 고작 너비 0.5미터도 안 되는 흙에 뿌리를 내리기도 하고, 키가 20미터를 훌쩍 넘는 은행나무 또한 고작 0.5미터쯤 될까 말까 한 ‘살짝 구멍난’ 아스팔트길 가운데에서 줄기를 올리고 뿌리를 내리기도 합니다.

 말라죽지 않을 만큼 흙을 얻고, 겨우 숨을 틔울 만큼 땅을 얻은 셈이라고 할까요. 모조리 사람들한테 제자리를 빼앗기고 가까스로 고만큼 살아남았다고 할까요.

 그런데 어느 모로 보면, 골목길이나 찻길가에서 자라는 나무들 삶하고, 우리네 여느 사람들 삶은 매한가지 아닌가 싶습니다. 나무가 나무다움을 살뜰히 간직하면서 살아가기 어려운 터전이듯이, 사람이 사람다움을 알뜰히 추스르면서 살아가기 어려운 터전이 아니랴 싶습니다. 우리들은 틀림없이 온갖 물질문명을 누리거나 즐기고는 있는데, 날마다 어마어마한 먹을거리에 둘러싸인 채 배고픔이나 배곯음을 잊거나 모르는 채 살아가고는 있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들 누구나 ‘목숨붙이’임을 생각하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자연을 잊으면 사람 또한 잊고, 자연을 잃으면 사람 또한 잃는다고 느낍니다. 자연을 버리는 터전에서는 사람 또한 버리고, 자연을 내치는 삶터에서는 사람 또한 버린다고 느낍니다. 국민소득이니 경제발전지수니, 또 무슨무슨 국제행사이니 빌딩 높이이니 아파트 평수이니 연봉이니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이니 하는 말마디와 숫자놀음은 어디에나 흘러넘치는데, 정작 사람들 목소리와 숨결과 살내음과 땀방울과 손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2) ‘작은숲’에서 농사짓는 아가씨가 그린 만화


 만화책 《리틀 포레스트》를 봅니다. 우리 나라에는 이제 2권까지 옮겨진 작품입니다. 그린이는 일본 어느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도시로 나와 만화를 그리다가 마음에 생채기를 받고는 ‘내빼듯이’ 고향인 시골마을로 돌아와서 혼자 숨어 지내듯이 농사짓고 살면서 다시 만화를 그리는 아가씨입니다. 우리 말로 옮기자면 “작은 숲”이 될 만화책 《리틀 포레스트》는 책이름 그대로, 그린이 스스로 ‘작은’ 사람이요, 그린이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시골 또한 ‘작은’ 땅이요, 이곳에서 웅크리듯 묻혀 지내는 당신 삶 또한 ‘작은’ 살림이며, 지구라고 하는 커다란 자연과 견주면 아주 ‘작은’ 움직임을 보이면서 살아갑니다.


.. 보름달이 뜬 밤. 대낮처럼 밝다 … ‘코모리’는 토호쿠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상점 같은 건 없어서 간단한 물건을 사려면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 중심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농협의 작은 슈퍼나 상점이 몇 채. 가는 길은 대부분 내리막길이라서 자전거로 30분 정도 걸리고, 돌아오는 길은 어느 정도 걸릴지……. 겨울에는 눈 때문에 걸어가야 합니다. 천천히 도보로 가면 1시간 반 정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웃 마을의 대형슈퍼로 가는 모양입니다. 내가 거기에 가려면 한나절이 걸립니다 ..  (50, 13쪽)


 그린이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은 “작은 숲”에서 살면서 ‘어릴 적 어머니가 당신한테 해 주던 밥’을 하나하나 떠올립니다. 시골살이에서 ‘먹는 이야기’밖에 없으랴 싶을 만큼 ‘어머니 손맛과 입맛’을 곱씹습니다. 다른 이야기라든지 다른 삶이라든지 다른 삶자락도 있을 텐데, 무엇보다도 ‘손수 키우고 손수 거두며 손수 빚는 밥’ 이야기가 그득합니다.

 그린이가 따로 ‘먹는 일을 좋아하’는가 하고 생각해 보다가는, 어릴 적 엄마한테 안겨서 젖을 물던 느낌을 잊지 않는 어른이 적잖이 있음을 떠올려 보면, ‘이제는 곁에 없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데에 ‘어머니 손맛과 입맛’을 되새기는 일만큼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일도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차근차근 그린이 지난 삶을 되짚고 톺아보는 동안, 그린이가 도시살이에서 받은 생채기를 하나둘 씻을 수 있을 테며, 생채기를 하나둘 씻는 가운데 ‘내빼서 숨어든 시골’이 아닌 ‘좋아서 다시 찾아온 고향’ 이야기로 새로 태어날 수 있겠지요.


.. 나한테 ‘우스터소스’는 집에서 만드는 소스였다. 그래서 학생 때 가게에서 팔고 있는 ‘우스터소스’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었다 … 씻고 잘라서 볶다가 간을 하고 그릇에 담는다. 순서는 엄마랑 똑같은 게 분명한데, 씹는 감촉이 다르다. 뜯는 시기를 놓쳐서 너무 많이 자란 푸성귀라도 엄마가 볶으면 맛있었다. 내가 볶으면 ..  (18, 155∼156쪽)


 이제 곧 2권을 넘길 차례인데, 우리한테도 《리틀 포레스트》처럼 제 삶과 삶터를 단단하고도 따뜻하게 붙잡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만화로 엮어내는 만화쟁이가 하나둘 태어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고 느낍니다. 벌써 스무 해쯤 앞서부터 시골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만화를 그리는 박연 님은 《들꽃 이야기》와 《엄마의 밥상》을 그려내기도 했는데, 농사일이 너무 바쁘고 힘든 탓인지, 아니면 농사일이 훨씬 재미있어서 만화그리기는 조금 멀리하는 탓인지, 더 많은 작품이 못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만화쟁이를 돌아보면, 하나같이 도시에서 살아가며 도시 삶만을 만화로 담아냅니다. 하기는. 어느 누구라도 제가 살아가는 곳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좋아하는 가운데 담아낼 테니까요. 더구나, 이런 만화를 보고 저런 만화를 펼치는 저 또한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부터 스스로 시골살림을 꾸리지 않으면서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 살내음 나는 만화’를 바란다면 꿈 같은 노릇입니다.

 다만, 꼭 농사짓는 만화쟁이가 농사짓는 시골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내어 내놓지 않더라도, 도시에서 도시살림 꾸리는 만화쟁이 스스로 ‘머리만 굴려 어설피 지어낸 이야기로 그려내는’ 만화를 뛰어넘으면서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사람과 동네를 받아들이고 느낀 이야기를 펼쳐내는’ 만화로 거듭날 수 있으면 더없이 반갑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참되게 살고, 스스로 즐겁게 살며,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가운데, 이와 같은 우리 삶을 만화이든 사진이든 글이든 알차게 꽃피울 수 있으면 둘도 없이 훌륭하면서 싱그럽고 재미있는 작품으로 아로새겨지리라 믿습니다. (4342.8.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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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0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만화가 우리에겐 음란하고 폭력적이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처럼 서정적인 만화를 그리시는 분도 계시네요.
 
만화 공화국 일본여행기 - 만화평론가 박인하의 일본컬처트래블
박인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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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만화쟁이가 일본을 사랑하는 까닭은
 [잠깐 읽기 50] 박인하,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


- 책이름 :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
- 글 : 박인하
- 펴낸곳 : 랜덤하우스 (2009.7.10.)
- 책값 : 13800원



 (1) 일본책과 한국책


 헌책방에서 만난 책마을 어르신들은 퍽 예전부터 으레 “자네, 일본 간다에 가 보았나? 일본 간다에 가 보면 책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질 거야.” 하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일본 나들이를 할 만한 비행기삯이나 방삯이 없습니다. “네, 나중에 돈이 되면 가 볼게요. 그리고 굳이 일본까지 가 보지 않아도 우리 나라에서도 책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하고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틀림없이 일본은 우리와 견주어 책 문화가 크게 발돋움했고, 일본 헌책방 문화 또한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훌륭합니다. 이러저러한 모습은 몸소 겪으면서도 알 수 있겠지만, 굳이 몸소 겪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제 깜냥껏 할 수 있는 일도 많으리라 생각하면서 조용히 나라안 헌책방 마실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1년 여름에 일본 나들이를 한 번 했습니다. 그무렵 몸담고 있던 출판사에서 ‘자료를 사서 들고 올 짐꾼’으로 저를 곁다리 삼아 일본에 보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넉 밤을 지내고 돌아오는데, 그 넉 밤 동안 ‘일본 간다에 가 보지 않고 헌책방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던 책마을 어르신들 말씀을 살갗으로 느꼈습니다. 간다 헌책방거리를 여러 날 돌아보면서 ‘책을 보는 눈’ 또한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 일본에 처음 도착해서 느낀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거리가 너무나 익숙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과 닮아서 비슷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몇 번 방문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일본 도시의 거리는 한국과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많이 다르다. 특유의 작은 이층집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는 거리와 골목, 외관이 잘 정돈된 상가, 아케이드 지붕 아래 늘어선 건물들, 길게 형성된 지하상가까지 일본의 가장 일상적인 풍경들은 사실 우리에게 낯선 모습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에 도착하면 이 일본적인 거리 풍경을 보고 ‘낯익다’고 느낀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일본의 거리와 집을 끊임없이 봐 왔기 때문이다 ..  (38쪽)


 제 돈으로 제 깜냥껏 즐기는 나들이가 아니었던 탓에, 제가 가고픈 대로 다닐 수 없었지만, 넉 밤 가운데 꼭 두 시간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말미를 얻었고, 이 두 시간 동안 저는 ‘더 많은 헌책방’을 다니는 데에 쓰기보다는 ‘일본 여느 살림집이 있는 골목 안쪽은 어떠한 모습일까’가 궁금해서 사람들 발길이 뜸한 곳을 부지런히 쏘다녔습니다. 나리타공항에서 내려 도쿄로 들어가는 전철길에서도 창밖으로 보이는 여느 살림집 모습이 살갑다고 느껴 ‘일만 아니라면 예쁜 마을에서 내려 한참 동안 그저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도쿄 도심지에서 어느 만큼 벗어난 여느 살림집 있는 골목을 거닐 때에도 ‘일본에서는 이런 골목을 잘 간수하고 있구나’ 싶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도쿄에서 책꾸러미를 이고 지고 끌고 하며 다시 전철을 타고 나리타공항으로 가는 길에서도, 창밖을 내다보며 ‘일본이라는 나라 여느 삶자리가 이러하다면, 한국보다는 차라리 일본에서 살면 훨씬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 여느 삶자리를 지킬 수 있으니, 이처럼 사람들 여느 시골마을을 깨끗하게 간수할 수 있으니, 일본이라는 나라는 퍽 괜찮다 못해 훌륭한 나라가 아닌가 하고 느꼈습니다. 일본도 틀림없이 재개발을 하기는 하겠지만 우리 나라처럼 마구 밀어붙이지는 않겠구나 싶었고, 한 집에서 쉰 해 백 해 이백 해를 뿌리내리며 살아갈 수 없는 한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하는 나라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 일본에는 걷기 좋은 거리가 널려 있고, 그 거리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일본은 숲의 나라다. 그래서 숲은 일본을 잘 표현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이 숲의 이미지를 가장 잘 활용한 대표적인 작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88년 작품 〈이웃집의 토토로〉는 ‘숲’의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다 ..  (42, 131쪽)


 흔히 일본을 두고 ‘역사가 짧은 나라’라 하고, 우리 나라를 놓고 ‘역사가 긴 나라’라 합니다. 그러면, 일본은 어느 대목에서 역사가 짧고, 우리는 어느 대목에서 역사가 길까요. 역사가 짧은 일본이 제 나라 역사와 문화와 사회와 삶터를 보듬는 매무새하고, 역사가 길다는 한국이 제 땅 역사와 문화와 사회와 삶터를 보듬는 매무새는 어떠할까요? 일본은 ‘역사가 짧은’ 모습 그대로 어설프고 어줍잖게 살고 있습니까? 한국은 ‘역사가 긴’ 모습 그대로 훌륭하고 거룩하게 살고 있습니까?

 일본 나들이를 하고 난 다음 헌책방에서 다시 만난 책마을 어르신들은 이런 말씀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일본은 저희들 짧고 모자란 역사라 할지라도 하나하나 알뜰히 모시고 사랑하고 가꾸면서 살아왔기에, 그 흐름이 한 세대 두 세대 꾸준히 거치면서 나날이 발돋움할 수 있었고, 한국은 스스로 역사가 길다는 생각에만 빠진 채 제대로 우리 삶과 문화를 돌보지 않고 우쭐거리기만 하느라고 제 모습도 못 보고 다른 이 모습도 못 본다”고.

 어르신들 말씀을 곰곰이 되씹습니다. 어르신 말씀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와 문화 어느 구석에도 제대로 갈무리된 자료나 책이 몹시 드뭅니다. 나라나 지역정부에서 애써 갈무리하는 도서관이나 박물관이 거의 없습니다. 부천에 만화박물관이라 할 만한 곳이 하나 열렸지만 그뿐입니다. 이 나라에 손꼽히는 만화쟁이가 한둘이 아닌데, 만화박물관이 고작 하나로 되겠습니까. 소설박물관이나 시박물관이나 동화박물관이나 사진박물관도 매한가지입니다. 기차박물관 전철박물관 버스박물관 전화박물관 골목길박물관 아파트박물관 논밭박물관 고기잡이박물관 광산박물관 동굴박물관 오름박물관 들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으며, 우람한 건물로 짓는 박물관이 아닌 온나라 곳곳에 조촐하게 가꾸는 ‘지역박물관’이 서야 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 박물관이나 전시관 하면 크고 좋은 것을 떠올리는 우리의 눈으로 봤을 때 ‘테즈카 오사무 박물관’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테즈카 오사무 박물관’은 작고 특성화된 박물관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좋은 예다 ..  (119쪽)


 그러고 보면, 독립기념관이라는 우람한 건물은 있되,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 옛집이 제대로 간수된 일은 거의 못 보았습니다. 독립운동과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당신 삶을 고이 일구어 온 사람들 삶터를 고이 간직하거나 아끼는 일 또한 거의 못 봅니다. 굳이 관광지나 관광자원으로 삼는 개발이나 공원이나 박물관 따위가 아닌, 한 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음을 쉬고 머리를 가다듬고 몸을 갈고닦으며 서로 어깨동무하는 가운데 어우러지는 마을쉼터를 마련하고, 마을 문화를 보듬을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래되어서 더 값이 있거나 오래되었으니 얼른 헐어 버릴 뭔가가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온 흐름이 무엇이고 오래도록 지킬 수 있던 손길은 또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는 눈길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한테 하나도 없는 대목은 이런 눈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지난날에도 우리한테 하나도 없던 대목은 이와 같은 눈길과 손길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아무래도 앞날에도 이러한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은 좀처럼 퍼지기 어렵지 않느냐 싶습니다.


.. 이제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낡은 거리가 구라요시의 매력이다. 일본인들도 이 거리를 보러 구라요시를 찾는다 … 만화 속 주인공처럼 과거의 한때로 돌아간 듯한 아키가와라 마을은 기차역이 다른 곳으로 이전해 쇠락한 마을을 만화와 결합해 추억의 장소로 다시 포장했고, 관광객들은 옛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마을 중앙에는 마을 전체를 안내하는 안내판과 아직도 사용중인 주물로 만든 우체통이 놓여 있다. 에도 시대 커다란 창고였던 집들은 전통 인형을 팔거나 잡화를 팔고 있고, 카페나 식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  (312, 315쪽)


 책은 그 나라 삶터 그대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프랑스책이든 영국책이든 미국책이든 일본책이든 훌륭하다고 하다면 그 나라 사람들이 수수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동네 터전이 훌륭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처음 태어나던 때부터 둘레에서 늘 보고 부대끼며 배우는 모든 모습들이 훌륭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이 훌륭함과 아름다움을 곱다시 받아먹으면서 뒷날 훌륭한 책 하나 빚어낼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 나라에 창작책이 드물고 온통 번역책투성이라 한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 삶자리를 ‘훌륭한 수수함’이나 ‘아름다운 수수함’을 내치거나 내버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나처럼 서양바라기로 흐르는 가운데 서양집을 짓고 서양옷을 입으며 서양밥을 먹습니다. 서양노래를 즐기고 서양말로 생각을 펼치고 서양학교로 가서 배우고 돌아옵니다. 이런 우리들한테서 창작책이 나오기는 힘들 뿐더러, 숱한 창작책들마저 ‘나라밖 이야기’를 다루는 데에 머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이야기를 펼쳐내지 못합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 이야기를 엮어내지 못합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도 아니며, ‘우리 것이 나쁜 것이여’도 아닙니다. 우리 것은 우리 삶일 뿐입니다. 우리 삶이 고스란히 우리 책으로 묶일 뿐입니다. 우리 삶은 고스란히 우리 만화가 되고 우리 노래가 되며 우리 영화가 되다가 우리 연극이 될 뿐입니다. 






 (2)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는 어떤 책일까


 만화평론을 하고 대학교에서 만화창작 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박인하 님 새로운 책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를 읽습니다. 박인하 님은 당신 일터인 대학교에서 ‘안식연구년’을 맞이하여 일본으로 식구들이 다 함께 건너가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는 느긋하게 연구와 창작을 즐기면서 당신 스스로 배우고 느낀 이야기를 뽑아낸 첫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여기 등장하는 풍경들도 일본적인데,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일본 작가들은 만화에 나오는 공간을 현실에서 가장 적절한 공간을 찾아 구체적으로 재현한다 ..  (41쪽)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는 책이름 그대로 ‘만화가 넘치는 나라’인 ‘일본을 여행하고 다닌 이야기’를 담습니다. 더욱이 만화를 퍽 좋아하고 만화이야기를 즐겨서 쓰는 분이 부대낀 삶자락을 담습니다.

 그런데, 책을 처음 펼치고 덮을 때까지, 이 책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로 박인하 님이 우리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하는지를 좀처럼 알아채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난 일본에 와서 이런저런 곳을 둘러보았다’고 하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아니면 인터넷이나 백과사전에 다 나와 있는 ‘일본 지역 정보’를 알뜰히 그러모아서 보여주고 싶으신지, 또는 ‘한국사람들한테 두루 익숙하다기보다 박인하 님 당신한테 익숙하거나 살갑다 느낀 일본 만화가 어느 곳에서 태어났는가를 몸소 느껴 보려고 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어 보고 싶으신지 알쏭달쏭합니다.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으며 그것도 있을 텐데, 글이나 느낌이나 생각이 어수선합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겠습니다. 적어도, 책이름 그대로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쯤 이름을 붙이려 했다면,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구태여 이 책을 들추어보지 않아도 익히 알고 있을 만한 이야기를 어설프고 지루하게 늘어놓는 틀거리에서는 벗어났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박인하 님 취향이 아닌 만화라 할지라도 ‘만화공화국 일본’ 모습을 보여준다 할 만한 작품이 무엇이며 이러한 작품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한국에 꽤 많이 알려진 작품을 중심으로 해서 소개한다고 볼 수 있으며, 앞으로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 2권이나 3권이 나올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여러 권으로 ‘일본만화와 일본 문화와 일본 삶터’를 다루려 했다면 이번 책 같은 맛보기 짜임새로는 모자라며, 한 권으로 끝내려 한 책이었다 하면 너무 가볍고 어지럽습니다. 그리고, 겉훑기로 그치고 맙니다. 아무개 작품으로 무엇이 있고 줄거리는 어찌어찌 하다는 이야기는, 구태여 이 책에서 다루어 주지 않아도 ‘이 책을 사서 읽을’ 사람이라면 으레 알고 있을 법하지 않겠습니까. 또, 만화 줄거리와 만화쟁이 작품 소개에 그렇게 자리를 많이 내주면서, 정작 그 만화쟁이 삶과 생각과 자취, 또 그 만화쟁이가 터를 내린 고향 삶터 ‘여느 사람 삶자락과 목소리와 숨결’ 이야기가 어떠한가를 살피는 데에는 너무도 적은 자리만 들이고 말았구나 싶습니다.


.. 아무튼 일본의 역사만화에는 일본의 역사가 있다. 그것도 대단히 매력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  (67쪽)


 만화평론을 하는 분이 내놓는 일본여행기라 한다면, 대학교수로서 만화창작에 뜻을 둔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이 제자들 앞에서 내놓을 ‘일본만화는 어떤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하는 강의록이라 한다면, ‘일본땅을 밟지 않고 한국땅에 옮겨진 일본번역만화를 한국땅에서 읽으면서도 다 알 수 있고 느끼게 되는’ 이야기를 ‘애써 일본땅을 안식연구년 월급을 받으면서 지내는 가운데’ 쓰신다면, 시간이며 품이며 돈이며, 더욱이 종이며 책이며 아까운 노릇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차라리 더 가볍게 나아가든지, 좀더 무게를 다잡고 엮어내든지, 아니면 깊이 파고들면서 살펴보든지, 또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쟁이를 추려서 한결 너르고 샅샅이 돌아보든지 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 미즈키 시게루는 돗토리 출신 만화가로, 〈게게게의 기타로〉라는 요괴만화를 그려 일본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적 작가다. 그런데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이 문을 열고 나자, 낡고 쇠락한 상점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후 돗토리는 돗토리 출신 만화가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명탐정 코난〉의 인기 작가 아오야마 고쇼의 박물관과 〈아버지〉, 〈열네 살〉의 작가주의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 작품의 배경 등을 관광 상품으로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  (300쪽)


 새삼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를 읽는 동안, 일본 만화쟁이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참으로 사랑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덧붙여, 한국 만화쟁이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참으로 사랑하기 힘들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흐름은 달라지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신나게 붓끝을 놀리는 만화쟁이는 꾸준하게 일본을 사랑하겠구나 싶고(군국주의로 치닫거나 생태환경 이야기에 등돌리는 일본 정부를 때때로 나무라기도 하면서), 한국에서 태어나 고달프게 붓끝을 휘두르는 만화쟁이는 꾸준하게 한국을 서글퍼하거나 안타까이 여기겠구나 싶습니다.

 하기는, 만화쟁이만 그러하겠습니까. 글쟁이는 어떻고 사진쟁이는 어떻습니까. 책쟁이는 어떻고 연극쟁이는 어떻겠습니까. 농사꾼은, 노동자는, 애 엄마와 애 아빠는 어떠하겠습니까. (4342.8.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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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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