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생활하기
최광호 지음 / 소동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당신은 사진을 왜 찍습니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 최광호, 《사진으로 생활하기》


- 책이름 : 사진으로 생활하기
- 글ㆍ사진 : 최광호
- 펴낸곳 : 소동 (2008.5.15.)
- 책값 : 16000원



 (1) 사진기를 든 손과 사진기를 쥔 마음


 그동안 잘 쓰고 있던 렌즈가 지난 8월 15일에 망가졌습니다. 어디 떨어뜨리거나 부딪히지 않았으나 망가졌습니다. 이 렌즈는 지난해 6월 25일에 열 번째로 제 품을 떠난 사진기(도둑맞거나 잃거나)를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로 떠나보낸 다음 새로 장만한 녀석입니다. 꼭 한 해하고 한 달하고 열흘 만에 망가진 셈입니다. 그동안 이 렌즈로 이만 장 남짓 찍었는데, 값싼 렌즈치고 잘 버티어 준 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비바람이 몰아치건 춥건 덥건 언제나 제 땀을 먹으면서 지내던 사진기요 렌즈입니다. 어떤 이는 제 사진기와 렌즈를 보면서 ‘너무 막 다루고 있지 않으시나요?’ 하고 묻는데, 저는 사진기와 렌즈를 막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언제나 한쪽 어깨에 걸쳐 놓거나 한손으로 쥐고 있습니다. 비오는 날 자전거를 몰 때에도 목에 사진기를 걸고 언제나 찍을 수 있게끔 비옷 안쪽에 두고 있습니다. 몹시 추운 날 손가락이 얼어붙어도 맨손으로 사진기를 쥡니다. 장갑 낀 손으로 쥐는 느낌하고 장갑 낀 손으로 단추를 누르는 느낌이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겨울철에 사진을 찍을 때에는 으레 사진기를 겉옷으로 감싸며 걷지만, 겨울에는 온몸과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는 채 사진을 찍으며 사진기도 함께 벌벌 떱니다. 손가락은 얼어붙더라도 사진기는 얼지 않기를 비손하며 돌아다닙니다. 여름에는 웃옷 안쪽에 사진기를 모셔 놓으며 몸으로는 비를 흠뻑 맞으면서 사진기만은 젖지 말아 달라며 비손하며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마구 눌러대는 사진은 싫어합니다. 꼭 찍어야 할 만큼만 찍고, 한 번 찍은 사진은 되도록 지우지 않으려 합니다. 고단하도록 돌아다닌다 해서 더 많이 찍어야 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고단하게 돌아다니면서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디지털사진기를 쓰는 매무새는 필름사진기를 쓰는 매무새하고 같습니다. 사진 한 장 찍을 때마다 돈이 몇 백 원씩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허투루 사진을 날릴 수 없습니다. 또한, 허투루 찍었다가 날린다면, 이 사진을 지우느라 시간을 몇 초씩 버려야 하며, 이렇게 시간을 버리다 보면, 나중에는 잘못 찍은 사진을 지우느라 더 눈여겨보거나 들여다볼 ‘내 사진감’을 몇 초 동안 못 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한 장을 찍건 열 장을 찍건 백 장을 찍건, 모두 ‘내 사진’이라 말할 수 있도록 빛과 셔터빠르기와 조리개값을 알맞고 올바르게 맞추어 찍어내려 합니다. 사진을 찍기 앞서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하며, 사진기 단추를 누를 때까지 내 사진감이 내 눈길로 들어와 내 마음길을 거쳐 내 몸길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다스려 내려고 합니다.
 





.. 아침에 일어나면 예쁜 햇살이 나를 반기기에 사진을 찍는다. 아내가 밥상을 차리면 그 밥이 예쁘고 맛있어 또 찍는다 …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늘 함께 사는 것이다. 사진하며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사진으로 이 세상을 이야기하고 서로 나누는 방법이 무엇일까 나는 꾸준히 고민했다. 그래서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사진 찍고 땀냄새와 생활이 배어 있는 사진을 찍자고 항상 주장해 왔다 … 나다운 방식으로 열심히 한다는 것은 작업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다운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산다, 사진으로 사는 삶, 살다 보니 내 것이 되어 있는 나다운 삶, 내가 나다운 바른 생각을 해야 바르게 살고, 바르게 살아야 올바른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살면서 알게 되었다 ..  (4∼5, 148쪽)


 지난해에 사진기를 열 번째로 도둑맞고는 힘이 쪼옥 빠졌습니다. 그동안 쓰던 사진기는 영영 다시 쓸 수 없을 뿐더러, 내 꿈은 파노라마사진기 장만할 돈은 다시는 못 모으겠다고 생각하니 무엇하러 사진을 찍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시 허리띠 졸라매고 몇 해 동안 돈을 모으면 사진기며 렌즈며 알뜰히 되살 수 있겠지만, 그 몇 해 동안은 사진하고 헤어져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죽기’를 떠올리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돈 좀 있거나 힘깨나 씀직한 곳에 이래저래 편지를 띄워 ‘사진기를 빌릴 수 있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적금을 붓듯 다달이 조금씩 갚아 나갈 테니, 사진기를 ‘스물넉 달 갚기’로 팔 수 있는지, 렌즈를 ‘서른여섯 달 갚기’로 내어줄 수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름 안 난 사진쟁이라 그럴 수 있고, 저와 비슷한 까닭으로 사진기와 렌즈를 빌려 주십사 하는 분들이 많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때 옆지기는 ‘우리가 다른 일을 못해도 괜찮으니, 밥을 굶더라도 사진기부터 어떻게든 먼저 사자’고 하며 기운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수로 백팔십만 원짜리 캐논 엘렌즈에, 사십팔만 원짜리 니콘 에프엠 이번에, 또 디지털사진기까지 장만하랴 싶었습니다. 말은 고맙지만 주머니가 후줄근하면 어찌할 길 없는 노릇입니다. 시무룩하니 며칠을 지내다가 목포에 사는 형한테 도와 달라는 아쉬운 이야기 담은 편지를 띄웁니다. 어려울 때마다 늘 도움을 받아 미안하지만, 또 도와 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형은 스스럼없이 또 도와줍니다. 외려 그만큼만 보태 주면 되느냐고 걱정해 줍니다. 우리 식구가 힘들 때마다 보태 주는 손길이 고맙고 미안해, 새 디지털사진기 하나(캐논 450디) 장만할 만큼 빌리고, 렌즈는 번들이 아닌 녀석 가운데 가장 값싼 녀석으로 장만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진을 다시 찍으니 ‘사진을 아예 못 찍던 때를 생각하면 숨통이 트이고 살맛이 납’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신나고 즐겁게 찍기는 어려웠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이 렌즈로는 이만큼밖에 안 보이는구나. 예전 렌즈로는 훨씬 넓게 보였는데’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예전 렌즈로 찍었다면 한결 잘 나왔겠지’ 하는 생각마저 자주 품었습니다.


.. 그 인상을 기록하다가 보면, 그 기념사진을 모아 작품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 꼭 이런 사진을 찍어야지 생각하며 찍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도록 내 생활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12, 47, 55∼56쪽)
 





 이렇게 한 달쯤 보내고 두 달째 접어들 무렵, 값싼 렌즈로 찍은 사진을 종이로 뽑아 보면서 ‘그럭저럭 잘 나왔네. 생각보다 꽤 잘 나오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 그동안 헌책방마실을 하며 찍은 숱한 사진을 하나씩 돌아보았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사람들이 퍽 좋아하는 제 작품들(헌책방이나 골목길을 찍은 사진)은 다름아닌 바로 오늘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이 값싼 렌즈와 값싼 사진기로 찍었던 녀석이 아니었는가 하고 곱씹습니다. 몇 천만 원짜리 사진기와 렌즈가 없더라도 내가 바로 이곳에 늘 있는 가운데 찍은 사진이기에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반가이 여기는 작품이 아니었느냐고 되씹습니다. 비록 파노라마로 담지 못했다 할지라도, 내 사진에는 내 눈물과 땀방울과 웃음과 손길을 골고루 담아냈다 한다면,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껴안아 주고 사랑해 주지 않았느냐고 되돌아봅니다.

 1998년 1999년 2000년 무렵에 찍은 사진들을 다시 들춰내며 들여다봅니다. 나한테는 돈도 없었지만 사진기조차 없어서 후배한테 빌려서 찍었습니다. 신문사 지국에서 나와 출판사에 들어간 뒤에는, 두 번째로 일한 출판사에서 사장님이 사진기를 한 대 선물해 주어 그 장비를 몹시 고맙게 여기며 다루었습니다. 그때에도 제 사진기에 달린 렌즈는 퍽 값싼 녀석이었고, 그 뒤 이태 동안 푼푼이 모아 다른 사진쟁이들 발가락만큼 따라가는 장비를 헌 것으로 겨우 하나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값싼 장비를 남한테 빌려서 사진을 찍었든, 여러 해에 걸쳐 푼돈을 조금씩 모아 마련한 조금 괜찮은 장비로 사진을 찍었든, 제 사진은 늘 한결같았구나 싶습니다. 어떠한 장비를 쓴다고 해서 달라지는 사진이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또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 봅니다. 저한테 사진을 처음 가르쳐 준 분은 저나 다른 사람들한테 ‘어떤 장비를 써야 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꽤 비싼 장비를 자랑하듯 만지작거리면서 수업을 들으면 당신이 미국에서 사진을 찍고 배우고 가르치던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라밖 사람들은 1회용 사진기로도 퓰리처상을 받을 만한 사진을 찍는데, 한국 사진기자들은 수천만 원짜리 사진기로도 기념사진 하나 제대로 못 찍는다’고 말하며 나무랐습니다.

 우리들한테 저마다 제 사진감을 하나씩 붙잡고 이 사진감을 우리가 눈을 감는 날까지 놓지 말라는 말만 끝없이 되풀이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붙잡는 사진감에 따라 어떠한 사진기가 알맞거나 걸맞는지는 잠깐조차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화각’이라든지 ‘광각-망원’ 렌즈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필름 인화와 현상이라든지, 잘라내기(트리밍)라든지 숱한 사진솜씨 이야기는 한 가지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저는 여태까지도 이런저런 사진 잔솜씨는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 배울 때부터 갖출 까닭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사진솜씨 이야기는 ‘너희들이 집에 가서 시간 내어 책을 읽어 봐’ 하면서 끝냈습니다. 집에서 암실을 마련해 손수 만들어 보아도 좋지만, 그냥 사진관에 다 맡기고 길에서 사진기 부둥켜안고 너희들 사진감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말까지 하곤 했습니다.
 





.. 기록이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으나,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찍는 사람도 대상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 한창기 사장은 그제야 껄껄 웃으며, ‘야, 최광호, 사진을 못 찍는 것이 아니라 도자기를 볼 줄 모르는군’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도자기에도 앞뒤가 있으니, 그것부터 공부하라며 집으로 데려가 도자기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런 건 이렇게 찍어라, 또 이런 건 저기서 이렇게 보아야 한다, 하는 식으로 사진을 찍는 방법 이전의 더 근본적인 관점과 생각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전통 한옥을 좋아했던 한창기 사장은 그 후에도,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시골마을에서 예쁜 한옥이나 초가를 지나치면 차를 세우고 내려서 그 집 대문을 두드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집을 둘러보면서 건축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했다 ..  (64, 75쪽)


 사진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 스스로 사진감을 제대로 찾아내고 알아내면서 지치지 않고 사진길을 걷도록 이끌’ 구실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을까요. 사진기 몸통이나 렌즈는 우리 스스로 하나씩 알아 가면서 마련하면 될 뿐이라는 생각이었을까요.

 열한 해 앞서 있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봅니다. 그무렵 제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는 총장님께서 뒤에서 저지른 비리가 말썽이 되어 날이면 날마다 대자보가 춤을 추고 집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달에 걸친 집회와 싸움은 가끔 일간신문에 실리기도 했고, 끝내 말썽 많은 총장을 물러나게 하고, 당신이 저지른 잘못과 앞으로 이 대학교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들을 동판에 새겨 도서관 앞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몇 해쯤 지나고 나니 모두들 이때 일을 잊어버렸고, 이때 학교에서 쫓겨난 분은 교육부장관 자리를 한동안 맡기도 했습니다. 도서관 앞에 세웠던 동판은 소리 소문 없이 어느 날 깨끗이 사라졌고, 후배들 어느 누구도 사라진 동판을 알지 못할 뿐더러, 열한 해 앞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한창 집회를 하고 수업거부까지 하며 강의실 걸상을 모조리 건물 밖이나 운동장에 쌓아 두고 있던 그때, 그 사진학과 강사(이제는 정교수가 됨)는 우리들한테 큰소리를 쳤습니다. ‘너희 대학교 총장 비리 문제는 잘 알고 있다. 나도 너희들 뜻하고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집회는 너희가 밖에서 알아서 하고, 내 수업은 내 수업이니까 내 수업을 안 듣겠다고 거부할 권리가 없다. 나는 너희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외쳤습니다. 두 시간짜리 수업이었는데 두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외치면서 수업을 하겠다고 버티었고, 그날 하루는 끝내 ‘해야 할 수업을 못했’습니다.

 이때 저는 강의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 창문에 붙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아쉽게도 이때 찍은 필름은 잃어버렸습니다). 두 시간에 걸친 실랑이를 사진으로 담으며 조금 우쭐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실랑이나 이런 사진찍기는 오래도록 앙금으로 남아 뒷맛이 하나도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일까. 왜 그날 그 수업을 굳이 꼭 하겠다던 그 시간강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는 그때처럼은 안 하겠지요. 그무렵 우리한테 조금 더 넉넉하고 느긋한 마음이 있었다면, “선생님,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학교 총장 비리 말썽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모든 학과 모든 수업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마지막 길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수업을 안 듣기란 참 힘들고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의실 수업이 아닌 길거리 수업이나 운동장 수업, 또는 다른 데에 가서 사람들이 안 보는 자리에서 우리 수업을 조용히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건네면서 타협을 볼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사진가들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것은 사진에 자신의 인생과 사진을 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 사진 찍기 때문이다. 사진에 자기 이야기를 담고 사진으로 세상 이야기를 나누려면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서서 내가 있기에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내가 보기에 한국 사진의 가장 큰 문제는 사진이 사람들의 삶과 생활과 한데 어우러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따로, 작품 따로, 이런 식으로 겉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  (184, 186쪽)


 사진을 찍으며 늘 느끼고 배웁니다만,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다고 해서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모델을 써서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한다 해서 우리 생각과 느낌을 환히 담아낼 사진을 얻지는 못합니다. 살아가는 흐름을 거슬러서는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없습니다. 찍히는 사람이나 건물이나 풍경 앞에서 우악스럽게 군다 해서 이들이 제 모습을 오롯이 우리한테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든 사람은 늘 기다려야 하고, 뛰어들어야 하며, 어깨동무해야 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흐름을 우리 스스로 고이 헤아리면서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좋은 사진을 찍는 바탕을 마련합니다. 이런 바탕을 마련한 다음 더 오랫동안 곰삭이고 껴안으면서 시나브로 좋은 사진 한 장을 찍습니다.

 그때나 이때나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사진을 잘 찍는 솜씨를 굳이 대학교를 다니면서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교실을 다닌다든지 사진강좌를 들을 때에도 사진 잘 찍는 이야기를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다루는 우리 매무새를 배워야 합니다. 사진을 다루는 매무새는 우리가 살아가는 매무새하고 같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진기를 쥔 우리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학교나 강좌에서 듣고 배워야 합니다. 사진기를 쥔 마음은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마음하고 같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마음은 내 사랑하는 사람 손을 어루만지는 마음하고 같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2) 사진이야기 《사진으로 생활하기》라는 책


 사진을 좋아하던 최광호 님은 어느새 사진을 배우려고 나라밖을 떠도는 사람으로 지냈고, 나라밖을 떠돌다 돌아온 한국땅에서 제 사진길을 꿋꿋이 가다가 젊은이한테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섰습니다. 사진책 몇 권을 펴내기도 한 최광호 님은 ‘사진이 아닌 말’로 당신이 걸어온 사진길이 무엇이고 당신이 찍은 사진작품이란 무엇이며 당신이 붙잡은 사진기하고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조곤조곤 풀어 놓습니다.


.. 그 당시 여의도에서는 반공궐기대회가 자주 열렸다. 기독교인들은 교인들대로 모여 하느님과 예수를 찬양한다고 하면서 반공을 앞세우는가 하면, 군인들은 탱크를 앞세우고 여의도에서 마포 지나 종로로 시가행진을 하기도 했다. 살아가는 특정한 방식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나는 거기에 물들지 않을 나다운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고민했고, 내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자 전국을 방황하기도 했다. 사진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사는 나를 갈구했던 것이다 … 나는 일본에서의 생활이 사진가로서 최상의 공부였다고 생각한다. 멋있는 사람, 멋있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가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우리 나라에는 훌륭한 작품은 있는데 인생이 담긴 훌륭한 작가는 없다고. 그런데 일본에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사진가다운 삶의 방식이 드러나는 개성 있는 작가들이 많다고 ..  (23, 93∼94쪽)


 사진쟁이 최광호, 또는 사진학과 교수 최광호 님이 쓴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읽어 보면, 맨 마음으로 쓴 글과 함께 술 한잔 걸치며 쓴 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최광호 님은 맨 마음인 채로 사진을 찍는 날이 있을 테며 술을 걸친 채 사진을 찍는 날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맨 마음이 아니고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날이 있었을 테며, 술기운이 아니고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던 날이 있었겠지요.

 어느 때 어떻게 찍었든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잘 찍었건 못 찍었건, 찍힌 모습 그대로 이야기를 남깁니다. 찍은 모양새 그대로 이야기를 건넵니다. 배부른 사람은 배부른 이야기를 남기고, 배고픈 사람은 배고픈 이야기를 남깁니다. 사랑이 철철 넘치는 사람은 사랑이 철철 넘치는 사랑을 사진에 담고, 사랑이 메말라 쩍쩍 갈라진 가슴으로 지내는 사람은 사랑이 메말라 쩍쩍 갈라진 가슴 그대로 사진에 제 느낌을 담습니다.

 감추려 한다면 얼핏설핏 감출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감추면서 내보이는 작품이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농사꾼 밀레가 추운 겨울날 손이 덜덜 떨리고 얼어붙는 가운데 주린 배를 붙잡고 그린 그림에 밀레가 겪은 가난함이 안 배어 있을 수 없습니다. 외로움과 괴로움을 죽는 날까지 붙잡는 가운데 빛줄기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고흐 형제가 두 사람 힘으로 이루어 낸 그림에 둘이 겪은 외로움과 괴로움에다가 빛줄기가 안 담겨 있을 수 없습니다. 목숨을 바쳐 일구어 내어 목숨이 다해 세상을 떠난 최명희 님 작품 《혼불》에 최명희 님을 비롯한 둘레 사람들 넋과 삶결이 안 스며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으로 생활하기》에는 사진하고 서른 해 남짓 살아가고 있는 최광호 님 온몸과 온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랑도 담기고 믿음도 담기며 미움과 아픔이 고루 담겨 있습니다. 그리움이 깃들고 아련함이 깃들며 애틋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 그러나 돈 많은 사람들이 돈벌 욕심에 돈, 돈, 돈, 하지 가난은 오히려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든다 …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자신있게 살 때만이 이 모든 것은 가능하고, 부족하기에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돈이 부족하면 생활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돈 없는 불편함을 극복하는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이 필요할 뿐이다 … 가끔 아마추어들이 촬영하는 장소에 가 보면 사진기를 보물 다루듯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사진기 망가질 것이 겁나서 저렇게 소중하게 다루면서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 사진기에 사람이 눌려 있음을 느낄 때,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다 ..  (35, 245쪽)


 지난달에,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 〈공씨책방〉에서 《환희와 우정》(조선일보사,1988)이라는 사진책을 하나 만났습니다. 틀림없이 예전에도 곧잘 만났을 사진책이 아닌가 싶은데 여태까지는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제 눈에 살며시 들어왔더라도 제 손은 가 닿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이런 겉치레 사진책이 무슨 사진책이라고?’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꾀한 움직임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우리 사회 그늘진 자리를 감추는 이 같은 사진책은 더없이 씁쓸하고 안타깝다고 느끼면서 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같은 사진책을 즐겁게 만지작거립니다. 무슨 꿍꿍이셈이 있든 없든, 사진은 사진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사진에 새겨 놓은 꿍꿍이셈은 이러한 셈속대로 읽어내면서, 나 스스로는 꿍꿍이셈이 아닌 참사랑과 참믿음을 보여주거나 나눌 수 있도록 참삶을 가꾸며 참사진을 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올봄, 서울 봉천동(올해부터인가 ‘낙성대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봉천동’이라는 이름은 가난하다는 느낌이 사람들한테 콱 박혀 있다고 하면서)에 있는 헌책방 〈흙서점〉에서 《박상원-a monologue》(에디션 뿔,2009)라고 하는 사진책을 하나 만났습니다. 연기를 하는 박상원 님이 사진책을 펴냈다고 하니 뜻밖이면서 놀랐습니다. 펴낸 곳은 ‘웅진출판사 임프린트’라고 하는 곳입니다.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 보면서, ‘이분은 이런 사진을 좋아하며 찍는구나’ 하고 느끼는 가운데, ‘이와 같은 사진이 이렇게 좋은 꾸밈새로 세상에 또 하나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잘 찍고 못 찍고 하는 틀로 따져서 이 책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이만한 사진이 아니고서는 사진책으로 내 주기 어려운 우리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세상에서 받아들이는 ‘다 다름(다양성)’이란 무엇인지 새삼 궁금해졌고, 우리 세상에서 사진을 한다는 사람은 왜 사진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담은 사진을 왜 나누고 싶어서 사진을 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 구경꾼의 눈으로 사진을 찍는다면 남을 통해 자기 삶을 느낄 수 있기는 하나, 자신의 외로움과 자신의 이야기는 표현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의 삶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자신의 외로움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  (236쪽)


 올 1월에는 서울 동묘앞에 있는 헌책방 〈영광서점〉에서 1960년대 첫머리 국민학교 졸업사진책을 세 권 보았습니다. 이 가운데 두 권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국민학교 것인데, 파주에 있던 국민학교는 1960년대에 ‘수학여행을 인천으로 왔’습니다. 이 자취가 졸업사진책 뒤쪽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950년대 끝무렵에 ‘각국공원’에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공원으로 나들이를 하면서 멕아더동상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몇 해 뒤에는 수봉공원으로 옮겨갔지만 이맘때까지는 자유공원에 놀이기구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유공원에서 멕아더동상 앞에 서면서 묵념을 하고 놀이기구를 타면서 신나게 놀았다고 할까요. 그 다음에는 연안부두나 만석부두나 월미도 쪽으로 가서 배를 탑니다. 경기도 파주라면 뭍만 있는 땅이요 산과 들밖에 없을 테니, 인천 앞바다처럼 놀이기구에 ‘반공교육 하기 좋은 멕아더동상’에다가, 여기에 갯벌에 바다에 배까지 고루 있는 곳은 수학여행을 보내기에 딱 어울릴 만한 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이 졸업사진책을 뒤적이면서 제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젊은 나날을 보내던 인천 한구석을 조용히 돌아보았습니다. 벌써 예닐곱 달이 된 이야기이지만, 이 졸업사진책을 만나던 그날은 헌책방 골마루 한쪽에 선 채로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이 졸업사진책은 그날 장만한 뒤로 여태껏 제 책상맡에 놓고는 가끔 들추어 봅니다. 들추어 보고 다시 덮을 때마다 ‘사진은 뭘까? 내 사진은 뭘까?’ 하고 거듭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을 사진으로는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말로 설명하는 사진이 아닌 신선한 느낌이 살아 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일상 생활에 대한 감동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변 현실을 보며 감동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감동할 줄 알아야 한다. 매일 보던 사물을 새롭게 볼 줄 아는 시선을 갖추어야 한다 … 좋은 앵글이란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가장 잘 느끼고 전달할 수 있는 시각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  (270쪽)
 





 《사진으로 생활하기》는 지난해 여름에 장만했습니다. 서울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에서 장만하던 그날부터 즐겁게 읽어 나가고 있었는데, 조금조금 뜯어먹으며 읽던 지난 겨울날, 살림집 물이 얼어붙었다가 녹았는데, 물이 녹으면서 그만 수도꼭지가 터져 부엌이며 마루며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때 이 책은 물바다에서 옴팡 젖어 버렸습니다. 물바다가 된 날 꽤 많은 책이 젖거나 퉁퉁 불어 못 쓰게 되었는데, 《사진으로 생활하기》는 그나마 아주 버리지는 않았고, 책장을 하나하나 닦아내고 며칠에 걸쳐 말리니 그럭저럭 넘길 만큼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바다를 치르며 적잖은 책을 버리게 되니, 젖었다가 살아난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넘기기 싫어졌습니다. 다른 다친 책들과 망가진 책을 자꾸만 떠올리게 하더군요.

 그렇게 반 해쯤 한쪽 구석에 팽개치듯 꽂아 놓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지난달쯤, 도서관에 나들이를 온 어느 분이 이 ‘물 먹고 퉁퉁 불어터진 책’을 애틋하게 여기면서 두어 시간 동안 이 책 하나만 읽고 돌아가더군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말끔하고 깨끗하고 번듯한 책이 가득가득 있는데 어쩜 저 책 하나만 그리 알뜰하게 여기면서 들여다본담?’

 손님이 돌아가고 난 뒤 퍽 오랜만에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끄집어 냅니다. 끄집어 내는 바로 이때, 지난겨울 물바다가 떠오르고, 그날 버리게 된 아까운 책들이 떠오릅니다.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렵다고 할 책들을 눈물과 함께 떠나보낸 일이 새록새록 가슴을 쑤십니다. 그러나, 떠나간 책을 놓고 아파할 수만은 없습니다. 살아남은 이 책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등돌린 채 지낼 수 없습니다.

 지난해에 읽다가 만 대목을 찬찬히 훑습니다. 밑줄을 그었던 대목은 두 번씩 읽고, 밑줄을 안 그었던 몸글은 천천히 읽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 전철길에 금세 다 읽어냅니다. 이제 책을 덮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을 차례입니다. 며칠쯤 더 책상맡에 올려놓고 있은 다음 책꽂이에 꽂아 놓을 생각인데, 아무래도 저한테는 이 책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그날 그렇게 물바다에서 반쯤 죽다가 살아나 주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곰곰이 되읽으면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난해에 다 읽었다면 더 좋았을는지 모르나, 이제 와서 다 끝마치니 한결 낫지 않느냐 싶습니다. 마침, 사진기며 렌즈며 여러모로 말썽을 부리는 요즈음, 값싼 장비를 붙잡고 사진길을 어떻게 이어가면 좋을까를 놓고 걱정인 요즈음, 다른 어느 책보다 이 책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저한테 좋은 길잡이나 이슬떨이, 아니 길동무나 사진동무가 되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최광호 님은 “사진으로 생활하기”이고, 저는 “사진으로 살아가기”입니다. 사진쟁이자 사진학과 교수님으로서는 한자말 ‘생활’을 넣고, 우리 말 지킴이로 살아가는 저로서는 토박이말 ‘살아가기’를 넣습니다. 아마 어느 분은 ‘life’나 ‘living’이라는 말마디를 넣어서 “사진 삶”을 가꿀 수 있겠지요. 어느 이름이든 우리가 걷는 길은 사진길입니다. 어떤 사진기를 쓰든 우리가 이루려는 삶은 사진삶입니다. 어느 갈래 사진길을 걸으며 어떤 모습 사진삶을 일구든 우리가 바라보는 곳은 사진밭입니다. (4342.8.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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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
소복이 지음 / 새만화책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뜻이란
 [살가운 만화 50] 소복이,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



- 책이름 :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
- 글ㆍ그림 : 소복이
- 펴낸곳 : 새만화책 (2009.7.25.)
- 책값 : 8000원


 경기도 시흥시 매화동에서 살아가는 여섯 사람 이야기를 만화로 담은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는 아주 조그마한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섯 사람 이상범 님(48), 경아 씨(38), 은동원 씨(36), 함은희 씨(37), 인섭이(20), 지희(12)는 남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동네에서 저마다 제 삶을 하루하루 느끼고 있는 여느 사람들입니다. 이 만화책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에서 상범, 경아, 동원, 은희, 인섭, 지희 같은 이름을 따로 붙이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는, 이 같은 이름으로 우리 땅 곳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당신 이름을 세상에 내놓거나 드높이지 않으면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160쪽짜리 자그마한 만화책은, 그린이가 만화를 다 그릴 무렵, 매화동 마을회관에서 조촐하게 만화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만화에 나온 사람과 동네사람들이 모인 따뜻한 자리였다고 합니다. 책 사이사이에는 그린이가 만난 여섯 사람이 손수 그린 그림 한두 장을 살짝살짝 곁들여 놓았습니다. 그린이가 사는 곳에서 경기도 시흥시 매화동으로 가자면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한다는데, 매화동은 도시도 시골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이면서, 집값 싼 곳을 찾아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고, 시골스러움과 어수선하지 않음에 끌려 찾아온 사람들이 있으며, 예부터 농사짓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남아서 함께 어우러진 곳이라고 합니다.


.. “뭐, 정신을 차려도 삶 자체가 변해야 되잖아요. 극단을 접거나, 혹은 대박을 터뜨리는 작품을 하거나. 그런데 여기서 공연을 해도 사람들은 공연 보러 서울로 가요. 못 믿는 거죠.” ..  (37쪽)
 





 오늘은 새벽 네 시 반에 잠에서 깼습니다. 아기가 그무렵에 깨었기 때문입니다. 잘 자다가 갑자기 깬 아기는 끙끙거리고, 아기 엄마가 기저귀에 손을 넣어 보더니 “똥 쌌네.” 한 마디. 뜨이지 않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아기를 안고 씻는방으로 가서 기저귀를 벗기고 밑을 씻깁니다. 곧바로 똥기저귀를 빱니다. 일어난 김에 아기 엄마와 아빠는 모기를 대여섯 마리쯤 잡고 불을 끕니다. 아기는 이십 분쯤 더 칭얼거리며 엄마아빠 배며 등이며 올라타고 놀다가 스르르 잠이 듭니다. 아빠는 곧바로 일어날까 했지만, 몸이 무거워 더 잠들기로 하고 다섯 시 오십 분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안칩니다. 머리를 감고 셈틀을 켭니다. 그런데 모니터 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엊저녁, 아기가 모니터에 대고 오줌을 갈겼는데, 그 탓에 모니터 전원단추가 맛이 간 듯합니다. 그제는 셈틀 자판에 똥을 갈기는 바람에 자판이 맛이 갔습니다. 지난달에는 엄마아빠 손전화를 입에 넣고 빠는 바람에 엄마아빠 손전화가 모조리 맛이 가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기 엄마가 쓰는 노트북을 켜고 글 몇 조각을 쓰는데, 예전에 아기가 쥐어뜯은 자판 몇 군데가 잘 눌리지 않습니다. 히유.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다고 아기한테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길을 나섭니다. 오늘은 일곱 시 이십이 분에 나섭니다. 늦어도 이십 분 안쪽에 길을 나서야 전철역에 알맞게 닿는데, 전철역까지 가는 길에 사진 몇 장 찍는다며 이 분쯤 어기적거립니다. 전철역에 닿고 보니, 삼십삼 분에 들어왔어야 할 급행전철이 삼 분 늦어졌다고 합니다. 아침에 좀더 바지런히 길을 나서고 골목 사진 찍는다며 깨작거리지 않았어도 때맞추는 전철은 못 탔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제때 안 들어온 전철 때문에 전철역에는 사람들이 넘칩니다. 히유. 오늘도 첫 역인 이곳에서 자리잡고 가기는 글렀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50살에 자살할 거예요.” “그때 너무 잘 살고 있으면요?” “그럼 그냥 오래 살구요.” “하하.” “저는 집에 있는 게 고통스러워요. 저는 막내인데, 사랑받는 막내는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내 밥은 내가 차려 먹었어요. 엄마가 차려 주면 이상해요. 엄마는 내가 밥 먹기 전에 이 닦는 걸 극도로 싫어하셨어요. 손으로 칫솔을 만져 보고 검사까지 했다니까요. 원래 제 꿈은 만화가예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힘들겠다 싶어서 포기했어요.” “그럼 지금의 꿈은 뭐예요?” “성공이요. 목표를 달성해서 행복하게 미소짓는! 세계에서 나를 인정해 주는! 고등학교 때는 개근상 받는 것이 목표였는데, 지금은 성공하는 게 목표예요.” ..  (51∼53쪽)
 





 전철에 타면서 자리는 꿈조차 꾸지 않고 바퀴걸상이나 자전거를 놓는 자리 안쪽에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펼칩니다. 이 다음으로 서는 주안역부터 퍽 많은 사람들이 잔뜩 몰려 탑니다. 이이들도 아침 전철이 늦어지는 바람에 줄이 더 길어졌으니까요. 이리하여 부평역에서 사람들이 탈 때에는 서서 가는 사람은 옴쭉달싹 못할 만큼 꽉 끼게 되고, 끄트머리에서 책을 펼치던 저는 창문 쪽으로 몸이 눌립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송내며 부천이며 역곡이며 더 타려는 기나긴 줄은 지치지 않고 더 몰려들고, 먼저 들어와서 눌렸든 늦게 들어와서 누르든 서로서로 숨을 쉬기 어렵습니다. 전철기사는 여러 차례 안내방송을 하면서 에어컨을 가장 세게 틀었으나 시원하지 않을 듯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문득 1994년 봄이 떠오릅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가끔 책방 마실(교보문고나 헌책방)을 하러 서울에 전철을 타러 왔고, 국민학생 때에는 집에 자가용이 없어 전철을 타고 작은아버지 댁에 찾아갔는데, 이때에는 선풍기만 있거나 선풍기조차 없는 전철칸이 그렇게까지 덥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마, 출퇴근 지옥철을 탈 일이 없이 전철을 타서 그랬을 텐데(이무렵에는 다들 창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1994년 봄에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수업을 들으러 가면서 처음으로 ‘지옥철’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인천 끄트머리부터 구로역 둘레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이 전철을 탈밖에 없으나, 그사이에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타기만 해야 합니다. 또한, 서울과 가까운 곳이라 해서 서울로 수월히 갈 수 있지 않고, 외려 탈 자리가 없어 다음 차를 기다려야 하는 판이니, 벌써 꽉 들어찬 전철이라 하여도 우격다짐으로 밀면서 타려고 합니다. 서로서로 괴로운 노릇이지요. 그때, 1994년에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에는 선풍기만 있었습니다(수원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도 매한가지). 게다가 선풍기는 안 돌아가기 일쑤였고, 그나마 돌아가는 선풍기라 하여도 한 칸에 두어 대가 달랑 달려 있었습니다.


.. ‘요즘 나는 매일 바란다. 오늘 밤 꿈에서 엄마를 만나기를. 몇 년 전,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임종을 못 봤다. 우리 엄마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견디고 사셨을까? 그런 일이 있고 나니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엄마를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엄마는 나보다 더 열심히 사셨는데 말이다.’ ..  (67∼68쪽)
 





 신길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여의도를 지나면 전철은 홀가분하다고 느낄 만큼 사람이 줄어듭니다. 서울에서 움직이든 서울 바깥에서 서울로 들어오든, 저마다 제 갈 곳을 찾아서 사람 물결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하겠습니다. 오늘은 800쪽이 조금 안 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조금 읽다가 《씨앗은 힘이 세다》라는 책을 살짝 펼쳤습니다. 고흐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두툼한 책은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드디어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씨앗은 힘이 세다》는 2006년에 처음 장만해 놓고 한참 읽다가 줄거리가 조금 지루해졌을 때 덮어놓고는 이태 넘게 다시 펼치지 않다가 이즈음 마저 읽으려고 집어들고 있습니다. 서대문역에서 내리기 앞서 “소비자들이 때깔이나 크기로만 농산물을 선택한다면 이 땅의 농부들은 농약을 안 칠 수 없을 것입니다. 소비자의 의식도 함께 바뀌어야 하겠지요(199쪽).”라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익히 들어 왔는데, 오늘은 새삼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곡식이나 열매를 사먹는 도시사람들이 ‘굵직굵직하고 빛깔 고우며 벌레먹은 곳 없는 말끔한 녀석’을 찾는다면, 어느 농사꾼이건 농약과 비료를 듬뿍듬뿍 안 칠 수 없습니다. 포도며 능금이며 배며 복숭아며 수박이며 갖은 농약과 비료에 범벅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 도시사람들은 뻔히 농약과 비료를 많이 친 줄 알면서 이런 열매를 사다 먹습니다.

 알 수 없는 우리 씀씀이요 삶이 아닌가 싶으나, 밀고 밀리는 사람 물결에서 벗어나서 아침햇살 받고 한글학회까지 거니는 동안 곱씹어 보니, 《씨앗은 힘이 세다》를 쓴 농사꾼이 외친 이 말마디는 바로, ‘오늘날 우리들은 온통 껍데기로 겉치레를 하는 데에 매여 있다’는 소리로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책이란 알맹이(줄거리)를 살피고 사서 읽어야 합니다. 껍데기가 곱거나 멋스럽다고 사서 읽습니까. 꽂아 놓기에 보기 좋다고 사들이는 책입니까. 뭐, 누군가는 틀림없이 ‘꽂아 놓으려고 책을 사들일’ 수 있고, 이렇게 하는 일은 그이 권리입니다. 다만, 책은 꽂아 놓으려고 만드는 종이뭉치가 아닙니다. 읽으려고 만드는 종이뭉치입니다.

 곡식이나 열매는 먹으려고 일굽니다. 보기 좋으라고 일구지 않습니다. 배속에 들어와서 우리 몸에 새힘을 불어넣도록 하려고 일굽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은 어떠한가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어떻게 가꾸는가요. 우리 스스로 내 모습을 어떻게 차리고 있지요? 우리 스스로 내 이웃하고 마주하면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마주하는지요? 우리들 옷차림은 얼마나 내 몸을 사랑하고 아끼는 옷차림입니까? 우리들 집치레나 몸치레는 얼마나 내 삶터를 사랑하며 돌보는 집치레이거나 몸치레인가요? 우리는 왜 일을 하지요? 우리는 왜 사랑을 하지요? 우리는 왜 아이를 낳아 기르지요? 우리는 왜 밥을 먹지요? 우리는 왜 돈을 벌지요? 우리가 아무개 정치꾼한테 표를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무개 정치꾼이 죽은 일에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숙이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 “부모님은 수원에 사시구요. 여기도 곧 정리할 거예요. 귀농할 거거든요.” “왜요?” “농촌은 뿌리고 도시는 꽃이라고 하는데, 음, 썩은 꽃이죠. 도시는 죽이는 일만 해요. 지구라는 별에서 제대로 살려면 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혼자 가면 외롭지 않겠어요?” “술 안 드시죠? 술 마시면 외로운 것도 몰라요. 하하!” “농사일이 힘들 텐데요.” “일하는 게 즐거워야 해요. 농업이 아니라 농사가 되어야지요. 팔아먹을 거 생각하면 고되져요. 나는 행복하려고 가는 거예요.” ..  (127∼128쪽)
 





 그제 일터로 오는 길에 만화책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를 다 읽어 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일터 책상에 그대로 두고 나왔습니다. 어제와 오늘, 다 읽어 낸 만화책을 다시 더듬어 보면서, 이 만화는 우리한테 무슨 말을 걸고 싶어 하는가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그나마 저는 집이 아닌 일터에 있기 때문에 이 만화책을 생각할 겨를을 얻었습니다. 집에서 옆지기하고 아기를 돌보고 있었다면, 아기를 보고 놀고 씨름하느라 온 기운이 다 빠져서 책이고 뭐고 거들떠보기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울로 전철을 타고 와서 돈을 얼마쯤 버는 일을 한답시고 아기를 옆지기한테 통째로 맡겨 놓으면서 저는 제 깜냥껏 제 일을 한다고 하는데, 이 일이란 얼마나 저와 옆지기와 아기한테 도움이 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글을 쓰고 책을 쓰며 이것저것 곁일을 거들면서 가까스로 버는 돈으로 도서관 달삯을 대고 집삯을 또 어찌어찌 대며 우리 살림을 이렁저렁 꾸릴 때하고 견주면, 어느 회사 한 곳에 엉덩이를 지긋이 눌러붙이면서 일할 때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해서 버는 돈으로 우리 세 식구는 얼마나 즐겁거나 아름답게 우리 삶을 가꿀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을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보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우리한테 목숨 하나 내려주고 이 땅으로 보내준 ‘너른 자연’은 무슨 마음을 먹고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 목숨 하나 붙잡으면서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굽어살피고 있을 하늘나라 넋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오로지 내 밥그릇만 챙기면 된다고 하는 이 터전인데, 너른 자연이든 하늘나라 님이든 따지기 앞서, 우리한테 목숨을 선사한 우리 어버이는 무슨 사랑과 믿음을 우리한테 나누어 주었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어버이한테,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를 그린 만화쟁이 소복이 님 어버이한테, 이 만화책에 나오는 여섯 사람네 어버이한테, 당신들이 살아온 뜻과 보람은 무엇이었으며, 당신 아이들한테 보여주거나 나누려고 하던 뜻과 보람은 무엇이었을까요. (4342.8.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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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22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그림체가 일반일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군요.요즘은 암만 알맹이가 좋아도 포장이 나쁘면 사지 않은 시대이니까요.

숲노래 2009-08-23 08:21   좋아요 0 | URL
'일반인'이란 누구일까요?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그림체'란 무엇일까요?

책은, 편견으로 보는 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책일 뿐입니다.
편견에 맞추어 주면 더 훌륭할는지 모르나,
그저 유행으로 그칠 뿐입니다.

카스피 2009-08-23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님,말씀 마따나 책은 편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하지만 암만 좋은 책도 독자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면 쉬이 읽혀 질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의 내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관주성경(아주 고풍스러운 20~30년대 문체의 성경인데 제목이 이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을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는다면 아마 반도 이해하지 못할것입니다.
솔직히 좋은 내용의 책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힐려고 한다면 그에 걸맞는 포장도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HUMAN 인간 (특별보급판) - 1957-2006 최민식 사진 50년 대표선집 최민식 사진집 휴먼(Human)
최민식 지음 / 눈빛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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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식장 비싼 밥이 아닌 사진책을 선물로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 최민식, 《HUMAN 1957∼2006》



- 책이름 : HUMAN 1957∼2006
- 사진 : 최민식
- 펴낸곳 : 눈빛 (2006.12.7.)
- 책값 : 6만 원


 (1) 사진에 담는 삶


 너른 터가 생긴 광화문 앞길을 가로질러 보았습니다. 한글회관에서 나와 문화체육관광부로 건너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땅밑길로 지나다녔다 하고, 몇 해 앞서 비로소 건널목이 생겼으며, 이제는 너른 터가 생겨 자동차 흐름은 조금 줄면서 걸어다니기에 한결 나아졌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나와 서울 시내 이런저런 모습을 찍는 사람이 제법 있고, 남녀 짝을 지어 오붓하게 하루를 즐기는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다리쉼을 하는 공공근로 할매와 할배가 보이고, 개인옷을 입은 경찰과 제복을 입은 경찰이 곳곳에 많이 보입니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대리석으로 보이는 돌을 새로 깔았습니다. 너른 터가 되었으나 아스팔트 밑에 있던 흙바닥을 밟을 수 있지는 못하며, 사람들이 집회나 시위를 하지 못하게끔 꽃밭을 가꾸어 놓았습니다. 시청 앞 너른 터에는 잔디를 심고 광화문 앞 너른 터에는 꽃밭입니다.

 이나마 너른 터 한 곳이 늘어나니 반갑다고 해야 할까 싶지만, 돈을 지나치게 많이 들인 너른 터요, 꼭 무엇무엇을 세우고 놓고 마련해야만 하는 너른 터입니다.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어 억지로 무엇인가를 만들지 않으면 땡볕에 그예 드러나야 하고, 비라도 올라치면 고스란히 맞아야만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밟으면 흙땅은 딱딱해진다지만, 우리한테는 시멘트나 아스팔트나 대리석이 아닌 맨흙을 풀기운과 나무그늘을 함께 느끼면서 밟을 수는 없는가 궁금합니다. 도시 한복판에는 숲길을 마련할 수 없고, 조그맣게라도 나무숲을 이룰 수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문득 오늘날 사진이 자꾸자꾸 날카롭거나 차갑거나 딱딱한 채 겉멋과 겉치레와 겉꾸밈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움이 사라지는 사진만 판치거나 넘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운 멋도, 자연스러운 움직임도, 자연스러운 손길도, 자연스러운 눈길도 찾아보지 못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푸나무와 흙이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으니까요. 이렇게 사람만 오갈 수 있으며, 참새나 비둘기 한 마리 깃들 틈조차 없으니까요. 이렇게 차 소리 가득한 가운데 귀가 멍멍해지는 터전에서 돈만 버는 일을 해야 하고, 돈만 쓰는 문화를 누려야 하고, 돈만 들이는 집을 얻어서 살아야 하니까요.


.. 내 앞선 세대에 그토록 불멸의 사진을 찍었던 작가들이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을 보며 나도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하면서 깊은 울림이 있고, 몸을 조이는 긴장감을 주는 그런 사진을 찍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  (책 끝에 붙인 말 / 최민식 - 나의 사진 인생 50년)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지옥철에 시달리며 인천에서 서울로 옵니다. 새벽에 아빠가 일을 나갈 때면 어김없이 깨어나 ‘아빠 가지 말라’며 울면서 종아리에 달라붙는 아기를 달래며 홀로 떨어져 나와 하루 절반 남짓을 집 밖에서 보냅니다. 쇠와 시멘트로 지은 건물에 놓은 책상 앞에 앉아 셈틀을 또닥거립니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기 소리를 듣고, 모임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들으며,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다시 찻길에서 차 소리며 사람들 수다 소리며 가게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들에 휘감긴 채 전철역으로 걸어갑니다. 전철은 쇠를 긁는 소리를 내고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에어컨 소리와 방송 소리를 냅니다. 이어폰을 끼고 있다 해도 옆에까지 들리는 디엠비 소리를 듣고, 전철에서 울리는 소리보다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나 사진기를 한쪽 어깨에 걸쳐 놓고 있지만, 새벽에 집을 나서며 전철에 올라 서울에 닿은 뒤 일터에서 아홉 시간쯤 보내고 나서 다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사진기 단추를 누를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이 쳇바퀴 같은 하루라 할지라도, 우리들은 ‘쳇바퀴 삶’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길과 전철에서 부대끼거나 스치는 아가씨들 반바지와 치마를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길과 전철에서 부딪히거나 뒤엉키는 아저씨들 담배 꼬나문 모습이나 침 뱉는 모습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전철에서 잠든 사람들 모습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전철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모습만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으며, 사람들 다리께만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틈틈이 바뀌는 전철 광고판만 찍어도 재미있는 사진감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건물 들머리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고, 울퉁불퉁한 길바닥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으며, 건물 10층이나 20층에서 길거리를 내려다보면서 하루 스물네 시간 흐름을 담을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무엇을 사진감으로 하느냐도 크게 돌아볼 대목일 터이나, 무엇을 사진감으로 삼든 사진쟁이 스스로 무슨 생각과 마음과 뜻과 넋을 담느냐가 훨씬 크게 돌아볼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민식 님 사진책 《인간》 또는 《HUMAN》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데, 최민식 님 사진감은 늘 ‘사람’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진쟁이들은 최민식 님이 사람을 찍든 말든 ‘당신들 깜냥껏 바라보거나 느끼는 사람’을 찍습니다. 모델을 찍든 알몸을 찍든 만듦사진으로 꾸미든 다큐로 찍든,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누구나 으레 사람을 사진감으로 삼습니다.


.. 진정한 사진은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한 고민과 사색, 그리고 체험이 수반되어야 한다. 내가 의도적으로 연출하지 않은, 생생한 인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자 한 것은 그 현실 자체에 이미 예술이 추구하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책 끝에 붙인 말)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이 사진감을 얻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이 어울리는 마을이나 도시가 사진감을 찾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나 사람한테 바람과 물과 먹을거리를 대어 주는 자연이 사진감을 느끼게 하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을 마주 바라보며 찍어도 사람 사진입니다. 사람이 아닌 길이나 건물을 찍어도 사람 사진입니다. 왜냐하면 길이건 건물이건 사람이 짓기 때문입니다.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뒷골목이든 앞골목이든 사람 사는 터전이라, 골목을 어떻게 담더라도 사람 이야기가 스며듭니다.

 그런데, 사람을 찍은 사진 가운데 사람맛이나 사람멋이 나지 않는 작품이 있습니다. 섬뜩하거나 밋밋한 사진이 있습니다. 지루하거나 눈 버리는 사진이 있습니다. 빼어난 솜씨를 선보인다 하지만 손재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남다른 눈길을 보여준다 하지만 손놀림 말고는 무엇도 스미지 않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 사진은 나를 찾아 주었다. 나는 사진만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었기에 사진기에 나를 송두리째 맡겨 버렸고, 내 인생을 사진으로 가득 채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  (책 끝에 붙인 말)


 나 스스로 우리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때에는 내가 담는 사진에 힘찬 넋이 서립니다. 나 스스로 내 이웃을 사랑스레 바라보거나 껴안으며 살아갈 때에는 내가 찍는 사진에 사랑스러운 얼이 스밉니다. 나 스스로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삶일 때에는 내가 이루는 사진에 따스한 기운이 녹아듭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도시문명에 젖어든 삶이라 할 때에는 자본주의 도시문명을 깊이 느끼는 사진이 됩니다.
 





 (2) 사진책 《HUMAN》을 이룬 최민식 님 삶이란


 1928년에 태어나 1950년대 끄트머리부터 사진을 찍어 온 최민식 님 《HUMAN 1957∼2006》은 당신 사진길 쉰 해를 그러모읍니다. 사진길 쉰 해를 기리는 뜻에서 새롭게 사진책이 하나 나오기도 했고, 이무렵 《진실을 담는 시선, 최민식》(예문,2006)과 《뭘 그렇게 찍으세요, 사진 작가 최민식》(우리교육,2006)과 《소망, 그 아름다운 힘》(샘터사,2006)이 잇달아 나왔습니다.

 사진찍기 한길을 쉰 해나 이었다는 대목은 무척 놀랍고 대단하며 기릴 만한 일입니다. 사진쟁이 최민식 님을 기리는 책이 한꺼번에 네 가지 나오는 일이란 마땅한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어쩌면 예전에 나오고 다시 못 나오는 책을 새로 펴낼 수 있으며, ‘최민식 사진전집’을 묶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2006년 사진길 쉰 해를 맞이하기 앞서인 2005년에는 《사진이란 무엇인가》(현실문화연구)라는 이름으로 ‘사진쟁이 최민식이 생각하는 사진’ 이야기를 펼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좀더 앞서인 1996년에는 사진길 마흔 해를 돌아보는 가운데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한양출판)이 나오기도 했고, 이 책은 2004년에 고침판으로 다시 나옵니다.


.. 나의 사진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험난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내 사진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체험이 있었기에 일관되게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삶의 진실을 추구할 수 있었다. 나는 사진을 통해 사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휴머니즘의 정의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  (책 끝에 붙인 말)
 





 그런데 궁금합니다. 사진길 쉰 해를 걸은 최민식 님을 말하는 사람들은 최민식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샅샅이 살피거나 생각하거나 들여다보거나 만나거나 껴안거나 부대끼거나 감싸안으면서 이야기를 펼치고 있을까요. 곧게 한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최민식 님처럼 당신 스스로들 남다른 한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길동무 최민식’을 바라보는지, ‘넘볼 수 없는 위인전 주인공’으로 바라보는지, ‘눈물 콧물 웃음 쏟아내는 사진을 선사한 고마운 이’로 바라보는지, ‘꾀죄죄한 사람들 꾀죄죄한 삶 꾀죄죄한 사진’으로 바라보는지, ‘가난한 사람을 찍어 거룩하거나 아름다운 사진’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최민식 님 사진에 몇 마디 말이나 시나 글을 붙이는 분들은 얼마나 최민식 사진을 당신 마음속 깊이 부둥켜안으면서 말마디나 글줄을 뱉어내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이는 최민식 님 사진을 놓고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부터 군부가 등장한 1960년대, 그리고 민주화 투쟁이 가열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진 속 인물들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생명력을 지닌 모습으로 포착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최민식 님을 놓고 “최민식은 한국 사진예술의 1세대로서 리얼리즘 사진의 독보적인 존재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진이란 찍는 사람 삶이 그대로 묻어나기도 하지만, 사진이란 보는 사람 삶결 그대로 느끼기도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을 보는 사람이든, 제 깜냥에 따라서 사진을 이루거나 즐깁니다. 내 눈길뿐 아니라 손길과 마음길과 몸길에 따라서 내 손으로 빚어내는 사진이 달라집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사진을 다르게 느낍니다.

 어떤 이로서는 최민식 님 사진에 담긴 사람들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생명력을 지닌 모습’이라고 느낄는지 모르나, 최민식 님은 당신 사진에 담긴 사람들을 바라보며 ‘비참한 현실’이 아니라고 느낄는지 모르며, 사진에 담긴 사람들 스스로 당신 삶을 ‘비참한 현실’인 적이 없다고 느낄는지 모릅니다. 흔히들, 골목동네를 가난하고 구질구질하고 어둡고 퀘퀘하다고 여기지만, 골목동네 바깥에서 겉스치는 눈으로 잘못 바라보거나 대충 바라보니 이렇게 여길 뿐입니다.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가난 또한 어느 만큼 영향을 끼치겠지만, 가난보다도 둘레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훨씬 영향을 끼칩니다. 나 스스로 오늘 하루 밥 한 그릇에 흐뭇할 수 있으면, 가난하면서도 웃습니다. 돈이 없이도 즐거운 삶이요, 기쁜 삶이며, 보람찬 삶입니다. 큰도시 큰 아파트에서 깊은 밤에도 낮처럼 환하게 불을 켜 놓고 있어야 ‘구질구질하지 않고 어둡지 않’은 삶이겠습니까. 청소부들이 바지런히 손을 놀려 쓰레기를 치워 놓는다고 ‘퀘퀘하지 않고 지저분하지 않’은 삶이겠습니까. 우리 눈앞에 안 보인다고 ‘없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없는 사랑’이 아닙니다. 최민식 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그대로를 당신 사진에 담았을 뿐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었을 때에는 가난한 그대로를 담습니다. 멋부리고 어여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일 때에는 멋부리고 어여쁘게 살아가는 우리들 그대로를 담습니다. 싱그러운 웃음은 싱그러운 웃음 그대로, 하품하는 졸린 낯빛은 하품하는 졸린 낯빛으로 찍습니다. 아이 키우며 고단한 주름살은 아이 키우며 고단한 주름살 그대로 찍습니다. 해맑게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 그대로 찍습니다. 힘겹게 얻은 국수 한 그릇 허둥지둥 먹는 아이는 힘겹게 얻은 국수 한 그릇 허둥지둥 먹는 그대로 담습니다. 다 다른 사람을 다 다른 느낌 그대로 살리면서 다 다른 삶임을 느끼도록 보여줍니다.


.. 사진작품 속에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기에 이를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소중한 친구가 된다 ..  (책 끝에 붙인 말)
 





 최민식 님을 놓고 “한국 사진예술의 1세대로서 리얼리즘 사진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추켜세우는 말마디는 어쩐지 몹시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먼저, 최민식 님은 사진예술 1세대가 아닙니다. 우리네 사진예술 1세대는 임응식 님이나 이해문 님 같은 분들입니다. 또는, 이 나라에 사진을 처음 들여온 지운영 님 같은 이름을 들어야 합니다. 지운영 님 또래를 사진예술 1세대라 한다면, 임응식 님이나 이해문 님은 2세대가 될 테지요. 그러고 나서 최민식 님이나 이해문 님 같은 분들은 3세대라 할 테고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사진 발자취가 어떠한가를 참으로 잘 모릅니다. 참으로 잘 모를 뿐 아니라 참으로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참으로 생각해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참으로 안 알아봅니다. 참으로 안 알아볼 뿐 아니라 참으로 느끼려 하지 않고, 참으로 깊이 곰삭여 새로 태어나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최민식 님 사진이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최민식 님 사진을 ‘넘어서’거나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사뭇 다른 길에서 사뭇 다른 아름다움을 꽃피우’거나 하는 우리들 사진동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사진길 쉰 해를 기리면서 이 책 저 책 나오기는 했으나, 무엇보다도 최민식 님 사진열매 가운데 가장 눈여겨보면서 아끼고 사랑해야 할 《HUMAN 1957∼2006》은 판이 끊어졌습니다. 안타까운 노릇인데, 우리네 얕은 사진문화로서는 어찌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2008년 3월에 ‘특별보급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와 주었습니다. 2006년판은 6만 원이었고, 특별보급 2008년판은 3만5천 원입니다(저는 2006년판 6만 원짜리 책을 장만해서 보았습니다).

 ‘삼청각’ 같은 곳에서 혼인잔치를 하면 밥값이 5만5천∼10만 원이라고 합니다. 여느 예식장에서 혼인잔치를 해도 밥값이 몇 만 원쯤 합니다. 돌잔치를 해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식구는 혼인잔치도 안 하고 돌잔치도 안 했습니다. 문득문득 새로운 생각이 불쑥불쑥 드는데, 우리 식구가 나중에 어느 만큼 살림이 펴서 ‘늦깎이 혼인잔치 또는 돌잔치’를 하는 날을 맞이한다면, 최민식 님 사진책을 500권쯤 한꺼번에 장만해서 손님들한테 ‘밥은 안 주고 책을 한 권씩 드리면’ 더없이 좋겠구나 싶습니다. 돈은 제대로 못 버는 주제에 꿈만 꾼다고, 새로 꿈 하나 꾼 만큼 이 꿈을 이루도록 돈을 신나게 벌어 볼까 합니다. (4342.8.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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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19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님,오늘 신촌 숨책에 갔더니 여자 사장님이 그러시더군요.요사이 책들을 안 읽어선지 책들도 잘 안들어 온다고요.
아이고 어른이고 책들 잘 안 읽는 상황에서 결혼식에 밥 대신 책을 돌리면 아마 신문 기사에 나던지,다시는 그 집안 결혼식에 안갈지 아마 둘중의 하나일걸요 ㅜ.ㅜ
 
왜 하지 말라는 거야? - '금지'와 '허용' 사이 청소년을 위한 세상읽기 프로젝트 Why Not? 1
마르크 캉탱 지음, 브뤼노 살라몬 그림, 신성림 옮김 / 개마고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ㆍ인권ㆍ평화ㆍ믿음ㆍ즐거움 모두 없는 한국
 [잠깐 읽기 53] 마르크 캉탱, 《왜 하지 말라는 거야?》



- 책이름 : 왜 하지 말라는 거야?
- 글 : 마르크 캉탱
- 그림 : 브뤼노 살라몬
- 옮긴이 : 신성림
- 펴낸곳 : 개마고원 (2009.7.30.)
- 책값 : 1만 원


 (1) 어른한테도 없고 어린이한테도 없는 인권


 청소년한테는 ‘청소년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어린이한테는 ‘어린이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아기들한테는 ‘아기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여성한테 ‘여성 인권’이 있고, 장애인한테 ‘장애인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인권 가운데 제대로 보듬거나 지키도록 하는 인권은 거의 없는 우리 나라가 아닌가 하고 느끼곤 합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무슨무슨 인권’이라 할 때 ‘무슨무슨’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나 목숨들은 거의 한 번도 제대로 된 권리를 못 누리는 사람들이거나 목숨들이곤 합니다. 길에서 차여 치여 죽는 들짐승 권리를 말한다 할 때에, 자가용을 모는 이들을 비롯해 도로공사 공무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들 목숨한테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하기 좋아 ‘청소년 인권’이고 ‘청소년 최저임금’이지만,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청소년한테 제대로 된 권리를 누리도록 돕거나 이끄는 어른이란 몹시 드뭅니다. ‘청소년 알바 최저임금’은 거의 언제나 ‘청소년 알바 최고임금’으로 머물곤 합니다.


.. 미국에서는 열여섯 살이면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조수석에 어른을 태우고 운전하는 게 아니라 혼자서도 운전을 하지요 … 얼마 전 미국 어느 주에서는 열두 살 된 어린애가 종신금고형을 선고받았대요. 게다가 가석방될 여지도 남겨 두지 않았다나요 ..  (16쪽)


 조금 더 헤아려 봅니다. ‘남성 인권’이나 ‘재벌총수 인권’이나 ‘경찰 인권’이나 ‘기무사 요원 인권’ 같은 말은 쓰지 않습니다. 저 또한 남성입니다만, 남성들이 ‘인권을 짓밟히거나 빼앗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재벌총수가 아주 드물게 법정에 서는 일은 있지만, 죄가 있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몰래 끌어들인 검은돈을 송두리째 빼앗기거나 그동안 노동자한테 제대로 안 준 일삯을 모조리 뱉어내도록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경찰한테도 마땅히 인권이 있어야 합니다만, 경찰한테는 인권보다 ‘특권’이나 ‘법을 넘어서는 권력’이 있어, 우리들 여느 사람들을 함부로 두들겨패거나 붙잡기도 합니다. 경찰들이 시민들 집회를 아예 ‘집회금지’로 못박고 있습니다. 이러한 ‘집회금지’를 법원에서는 ‘경찰이 집회금지를 못박는 일은 옳지 않다’는 판결을 내리지만, 경찰은 ‘옳지 않다’는 판결을 받아도 끝없이 ‘집회금지’를 밀어붙입니다. 헌법으로 집회며 결사며 언론이며 자유라고 적혀 있어도, 우리 나라 경찰은 이러한 헌법 자유를 손쉽게 깔아뭉갭니다.

 요사이 떠도는 ‘기무사 요원 사찰’을 생각해 보아도, 국가권력에 기대거나 빌붙는 이들이 이 땅 여느 사람들을 내리누르는 힘이란, 또 내리누르면서 얻는 콩고물이란 참 대단하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 프랑스에서는 만 6세에서 16세까지 의무적으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육받을 ‘권리’라고 하지 않고 ‘의무’라고 말하지요. 최소한 10년 동안, 모두 합해 대략 1500일 동안 학교에 다닐 의무가 있어요 ..  (20쪽)


 중학교를 다니던 때 학교에서 했던 일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무렵(1988∼1990년) ‘어린이 인권선언’이 우리 나라에도 나왔다고 떠오르는데, 중학생이면 ‘청소년’이지 어린이는 아니지만, ‘어린이 청소년 인권선언’으로 삼아 우리들(중학생)한테도 권리가 있음을 학교 교사들이 깨닫기를 바라면서, 이 인권선언글을 어디에선가 얻어서 전지에 펜으로 또박또박 적어서 학교장한테 겨우 허락을 받아 한 주 동안 건물 들머리에 세워 놓은 적이 있습니다.

 기껏 종이 한 장짜리 인권선언이요, 이런 글을 애써 전지에 적어서 세워 놓아도 교사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외려 히죽히죽 웃으면서 “인권? 웃기지 말아? 니들한테 무슨 인권이 있어?” 하던 교사가 참 많았습니다. 이들은 우리한테 뺨따귀질이나 주먹질이나 몽둥이질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그 교사들 나이는 오늘날 제 나이보다 몇 살 어린 나이인데, 고작 서른 안팎인 젊은 교사들이 무엇 때문에 뿔이 났다고 “오늘 나한테 걸리면 한 놈은 내 손에 죽는다”고 을러대면서, 교단에서 동무녀석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도 주먹질을 멈추지 않곤 했습니다. 밀걸레자루가 여럿 부러지고 동무녀석이 교단에서 고꾸라졌어도 등짝에다가 부러진 밀걸레자루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곤 했습니다. 코앞에서 이런 모습을 거의 날마다 지켜보면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헌병이 우리 독립운동가를 이렇게 때리고 괴롭혔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벌써 그때 일이 스무 해나 지난 일이라니 까마득하다고 느끼는 한편, 그 뒤로 스무 해가 지난 2009년이라 하여도 주먹다짐이나 욕부림은 그치지 않는 굴레가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 같은 주먹다짐이나 욕부림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이들끼리 서로를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새로운 짓거리는 끊임없이 살아나고, 또다른 교실폭력과 학교폭력이 되풀이되지 않느냐 싶습니다.


.. 차를 운전하고 있는 성인의 경우를 한번 볼까요. 그는 몹시 바빠서 다른 운전자들에게 화를 냅니다. 그가 볼 때, 다른 운전자들이 더 빨리 갈 수 있는데도 빨리 운전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그는 마치 자기 약속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듯 자기를 지체하게 만드는 느림보를 마구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 느림보는 단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제한속도를 준수하고 있을 뿐이에요. 다들 똑같은 필요성에 따라 움직이는 건 아니거든요! ..  (60쪽)


 몇몇 교사가 말썽쟁이이기 때문일까요? 몇몇 교사들은 교대에 다닐 때부터 당신 스승한테서 ‘애들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면 말을 잘 듣는다’고 배웠기 때문일까요? 우리 사회에 민주가 튼튼히 뿌리내리고 평화가 아름다이 자리잡으면 이와 같은 주먹다짐은 사라질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주먹다짐이 살아숨쉴 뿐 아니라 영화나 연속극 따위에 자꾸만 그려지는 까닭은, 아무래도 우리 정치판과 사회판과 경제판과 문화판 모두 끝없는 싸움박질과 밥그릇싸움이 피튀기듯 이루어지기 때문일까요?

 예전 같은 부정선거는 없다지만, 정치가 민주와 평화와 통일로 이루어졌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한 표 권리가 있다지만, 사회가 민주와 평화와 통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는 느끼기 힘듭니다.

 ‘함께 하자’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고 ‘하지 말라’는 목소리만 들립니다. 너른 터는 하나둘 사라지면서 주차장과 쇼핑몰이 되어 갑니다(또는 ‘허울좋은 광장’으로 바뀝니다). 아이들이 뛰어놀 골목길이나 운동장이나 마당이 없는 한편, 어른들 또한 마음껏 어우러지거나 얼싸안을 골목길이나 운동장이나 마당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쉴 자리가 없고 어른들 또한 쉴 자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제 어버이나 이웃 어른한테서 세상을 하나하나 배우고 어른들 일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차근차근 배우거나 따라할 틈이 없습니다. 돈벌이 일은 조각조각 갈리고, 돈벌이 일을 하느라 식구들은 서로서로 쪼개집니다.


.. 속임수를 쓰는 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짓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특별한 이야기를 꾸며낼 필요도 없지요 ..  (98쪽)


 요 며칠 인천에서 서울로 일하러 오가면서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동안 서로서로 괴롭겠지만, 서로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옆사람이 짜부가 되건 오징어떡이 되건 몸이 눌리건 발을 밟히건 ‘나까지 전철에 더 타야’ 하고 ‘내가 더 타면 그때부터는 그만’이라는 생각을 저절로 품지 않느냐 싶습니다. 처음부터 서로를 미워하거나 괴롭힐 마음은 아니었을지라도 하루하루 지옥철에 시달리고 길들면서 시나브로 사랑과 믿음이 옅어지거나 스러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서로서로 더 많은 돈을 벌면 그만이요, 더 널리 사랑을 나누거나 더 깊이 믿음을 함께하려는 생각은 못 품지 않느냐 싶습니다.
 







 (2) 프랑스사람이 말하는 《왜 하지 말라는 거야?》


 프랑스 어른이 프랑스 어린이한테 ‘인권이란 무엇인가’를 들려주려고 쓴 책 《왜 하지 말라는 거야?》를 읽습니다. 나라안에서도 나라안 어린이한테 우리네 사람 권리란 무엇인가를 들려주고자 이와 비슷한 책을 더러더러 쓰곤 합니다. 다만, 아직가지 나라안 사람들이 쓰는 ‘제대로 누릴 사람 권리’ 이야기는 겉핥기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속깊이 파고들지 못하며, 간지러운 구석을 긁지 못합니다. 골고루 들여다보지 못하며, 아픈 생채기를 보듬지 못합니다. 이와 견주어 《왜 하지 말라는 거야?》는 간지럽고 아픈 자리를 살며시 건드리면서 퍽 쉽고 슬기롭게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 사람들이 어떤 일을 열심히 금지해 놓고 정작 자기 자신에겐 허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거든요! 간혹 더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전직 장관이 범법행위로 유죄선거를 받았다는 뉴스를 곧잘 접할 거예요. 결국, 금지조항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 자신이 정작 금지조항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거죠 ..  (111∼112쪽)


 오늘날 우리 세상에는 사랑도 자유도 평화도 통일도 믿음도 즐거움도 모두 사라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인권 또한 저절로 사라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너도 나도 외는 말마디, ‘먹고살기 힘들다’와 ‘먹고살기 바쁘다’에 눌리고 밟힙니다. ‘살아남아야 한다’와 ‘살려면 어찌할 수 없다’에 뭉개지고 차입니다.

 우리 어른들 스스로 아이들 앞에서 사랑하면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평화로이 어깨동무하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통일을 꿈꾸지 않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서로서로 믿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즐거운 일과 놀이를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이런 판에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이런 가운데 아이들은 어른들이 읊는 말마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어른들이 몸으로 보여주기로는 형편없거나 보잘것없거나 얄딱구리한데,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이들한테는 영어 동화책이나 영어 교재가 아닌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책을 쥐어 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이 책을 쥐어 주기 앞서, 우리 어른들부터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책을 곰곰이 읽고 되새기고 톺아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책을 쥐어 주고픈 어른들은, 어른들 스스로 먼저 좋은 책을 찾아 읽고 삭이고 받아들이면서 좋은 삶을 일구어야지 싶습니다.


.. 안타깝게도 어떤 것이 금지인지 검열인지 종종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검열관들 쪽에서, 그건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거라고 주장하면서 일부러 경계를 흐려 놓는 경우도 많지요 ..  (137쪽)


 그런데, 《왜 하지 말라는 거야?》라는 책은 퍽 아쉽습니다. 틀림없이 간지러운 곳을 긁는 책이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제 간지러움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김없이 생채기를 달래는 책이요 아픈 구석을 찌르는 책이지만, 제 생채기에서는 고름이 철철 흐르고 제 아픈 구석에는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습니다.

 프랑스하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너무 벌어져 있기 때문일까요. 한국에서는 프랑스에서 이루어지는 ‘인권’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프랑스 책은 퍽 높은 눈높이에서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길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는 아주 밑바닥에서 끝없이 뒹굴고만 있기 때문일까요.

 애써 좋은 책 하나를 우리 말로 옮겨내어 이 땅 아이들한테 좋은 마음밥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른들은 왜 우리 터전에서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헤아리면서 아이들한테 참다이 마음밥이 되고 슬기롭고 따숩게 마음동무가 될 책을 우리 땀을 흘리면서 빚어내지 못할까요? 왜 이런 일에는 깊이 힘을 쏟지 못할까요? 이러한 책이 돈이 되든 안 되든, 이러한 책을 펴내어 잘 팔리든 안 팔리든, 참말 한국땅에 꼭 하나쯤 있어야 할 ‘맑고 밝고 환하고 고운 권리 이야기’를 신나게 펼칠 어른들이란 도무지 찾아보아서는 안 될 노릇인가요?

 우리가 우리 자유를 지키자면 우리 자유를 있는 힘껏 부리며 자유로운 이야기를 담는 책을 빚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사람된 권리를 누리자면 우리 사람된 권리를 용쓰며 뽑아내어 사람된 권리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일구어야 합니다. 바라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고, 참되게 바라는 매무새를 이어가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으며, 참되게 바라는 매무새대로 우리 삶을 단단히 붙잡고 부둥켜안도 부대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4342.8.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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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감독 김기덕 -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
마르타 쿠를랏 지음, 조영학 옮김 / 가쎄(GASSE)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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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감독’ 김기덕 이야기를 아르헨티나 작가가 썼네
 [잠깐 읽기 52] 마르타 쿠를랏, 《나쁜 감독》



- 책이름 : 나쁜 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
- 글 : 마르타 쿠를랏
- 옮긴이 : 조영학
- 펴낸곳 : 가쎄 (2009.6.29.)
- 책값 : 9000원



 (1) ‘거북하게’ 이끄는 영화들


 〈어느 날 그 길에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길에서 죽는 짐승 이야기를 하나하나 좇아다니면서 담아낸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앞서도 길에서 죽는 짐승을 숱하게 보고 느끼고 알고 있었으며,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는 길에서 죽는 짐승을 바라보는 이웃사람 눈길을 새삼스레 느끼거나 깨닫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당신 삶을 바꾸었는지 모르나, 도심지이든 시골길이든 고속도로이든 자동차 빠르기를 5킬로미터나마 줄이려고 애쓴다고 하는 사람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아예 자동차를 버리겠다고 외치는 사람을 찾아보지는 못합니다.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우리한테 ‘자동차를 멀리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길에서 짐승을 치여 죽이는 사람들이 ‘나쁘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길에서 차에 치여 죽는 짐승을 놓고 마냥 ‘불쌍하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죽음을 보여주고 죽임을 보여줍니다. 그예 앞으로도 죽음과 죽임이 끝없이 이어지도록 하려는 이 나라 공무원들 매무새를 보여줍니다. 이 나라 공무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여느 사람들 모습’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 하나의 이미지가 수천 개의 단어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 글에서 〈악어〉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소개하기 위해 우선 그와 관련된 피상적인 플롯만 소개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윗글에서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폭력은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이고, 그로 인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여성들은 실제로 그 저변에 깔린 개인적, 사회적 메타포들을 읽지 못했다. 그저 스크린 밖의 그들을 노려보는 야만성과 타락상에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다 … 다른 한편, 침묵도 언어라는 개념은 보수적인 언어학자들을 펄쩍 뛰게 만들지는 몰라도 어쨌든 진실 중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침묵은 빈칸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화자에게 허용된 의미 모두를 함축한 백과사전에 가깝다. 의미를 선택하는 건 온전히 대화를 하고 있는 상대방의 몫이 되며, 두 사람이 동일한 주파수를 공유할 경우에만 소통이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나아가 소통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김기덕의 영화에서, 언어는 오해 또는 소통의 부재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시간〉의 일부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에서 침대에 누운 두 연인의 대화는 비극으로 끝나는데, 그들이 마침내 (언어의 한계 밖에서) 소통을 이루게 된 건 바로 길고도 고통스러운 침묵이 이어지고 난 후였다 ..  (39, 47쪽)


 여러 해 앞서 〈고추 말리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았거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이 영화를 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곧 문을 닫고 사라진다는 ‘아트큐브’인가요? 이곳에 조용히 걸리고 그야말로 조용히 보여진 영화 〈고추 말리기〉는 아파트 옥상에서 고추를 말리려는 어머니 심부름을 따르는 ‘시집 안 가고 영화 찍는다며 깝죽댄다는 딸내미(감독 스스로)’ 이야기를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영화이름 그대로 고추를 말리는 모습이 나오고, 주인공 딸내미가 식구들하고 복닥이면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목소리는 없습니다. 다른 어떤 주제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한국땅에서 ‘여자’로 태어나서 무슨 꿈을 꾸고 무슨 삶을 꾸리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가를 수수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길에서〉나 〈고추 말리기〉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을 ‘번거롭게’ 하거나 ‘거북하게’ 한다고 합니다. 자꾸자꾸 무엇인가 생각하도록 하고 돌아보도록 하며 곱씹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영화가 달갑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계몽’이니 ‘교훈’이니 또 무어니 하는 이름을 붙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 여성 비평가들은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자 평론가들은 아예 무시해 버린다 … 이런 식의 잔혹함은 관객들을 괴롭히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결국 디즈니월드와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단의 거짓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크린의 장면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라면 아무도 그렇게 무자비하게 고문하거나 살해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런 화면에 대해 얼마든지 관용을 베풀 수 있다. 다른 한편, 구타와 강간 등 일상적인 형식의 폭력과 가슴을 찢어내는 미묘한 심리적 고문은 관용의 수준을 현저하게 끌어내리게 된다. 직접 이런 식의 폭력을 겪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약간의 상황변화만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이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관객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자신의 자아가 행사하거나 당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대한 잠재의식적 공포는 리얼리티에 가까운 폭력형태에 대해 절대적인 반감을 유발하게 된다 … 물론 일반적으로 영화팬들은 여가를 즐기고 고민을 달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때문에 쓰라린 심장과 잔뜩 꼬인 머리로 영화관을 떠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다. 관객들은 수저로 떠먹여 주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김기덕은 깊은 사고를 자극하는 노력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  (42, 68, 69쪽)


 저한테는 비디오가 없고 텔레비전 또한 없어 다시 보기 쉽지 않지만, 제가 퍽 여러 차례 본 영화로 〈안드레아스 라인〉이라는 네덜란드 영화가 있습니다. 네 번쯤 보았다고 떠올리는데, 볼 때마다 늘 사람들이 북적북적했습니다. 언제나 무슨 모임에서 여럿이 함께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안드레아스 라인〉을 ‘안 잘린 판’으로도 보았고 ‘잘린 판’으로도 보았습니다만, 여러 차례 보아도 질리지 않고 나중에 다시 보고프다고 생각했습니다. 좀더 나이가 들고 내 삶이 다른 자리에 들어섰을 때 새롭게 보고프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 아이를 키우는 애 아빠 자리에 있는 만큼 요즈음 다시 〈안드레아스 라인〉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는지 궁금합니다. 이 영화를 같이 보던 적잖은 사람들은 졸거나 자거나 딴청을 피우거나 나가 버리거나 하기 일쑤였는데, 저는 한결같이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며 한 대목 두 대목 찬찬히 곱씹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숱하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학자 같은 어머니한테서 사랑스러운 눈길을 받고 싶어 계집아이가 일부러 그네에서 손을 놓고 바닥에 쿵 떨어지는 대목에서도 눈물이 찔끔 나왔고, 차츰 크기가 커지는 공동체 식구들 밥차림과 왁자지껄 수다 떠는 대목에서도 눈물이 왈칵 나왔습니다. 그러나, 좋은 ‘씨’를 받으려고 남자를 꼬드기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싱긋 나오고, 화면을 넷으로 나누어 집집마다 사랑을 불태우는 대목에서도 웃음이 히죽 나왔습니다.


.. 어쩌면 그도 시나리오, 촬영, 편집이 모두 끝난 후에야 겨우 해답을 얻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그건 그의 개인적 해답이고, 그걸 관중과 공유할 필요는 없다. 관객들도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해 내거나 아니면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으면 그만이다 … 더 좋은 선택은 영화를 보는 것이다. 아름다운 화면과 스크린에 펼쳐진 계절의 변화는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주변 환경에 대한 김기덕의 관심은 빈틈없는 관찰력과 더불어, 감수성보다 지성이 발달한 사람들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사람들과 사람들의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해 주었다 … 그는 다른 감독들이 모교의 배지를 가슴에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영화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때문에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  (49, 64, 88, 91쪽)


 영화 〈집으로〉를 볼 때처럼, 영화 〈선생 김봉두〉를 볼 때에도 ‘영화에 그려지는 마을 모습’에 오래도록 눈이 멎었습니다. 〈선생 김봉두〉가 그리 잘 찍은 영화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저로서는 강원도 동강 둘레에 문닫은 작은 학교를 바탕으로 찍어 놓아 ‘작은 학교 삶터와 삶매무새’가 고스란히 사라지거나 잊혀지기 앞서 이렇게 하나 남겨 놓은 대목이 참 반가웠습니다. 2010년이나 2020년에도 〈선생 김봉두〉 같은 영화야 얼마든지 찍을 수 있지만, ‘강원도 동강 둘레 맑고 파란 하늘빛과 물빛’은 이 영화를 찍던 지난날만큼 싱그러이 되살려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책상서랍 속의 동화〉라든지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드넓은 산마을과 자연을 보면서 속울음을 삼켰고, 우리 집 아이한테는 이제 더 보여줄 수 없는 깨끔한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자꾸만 삭여야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스스로 우리 나라 자연 터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끔찍한 물질소비문명이 언제쯤 끝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나마 이 모습이 살아남아 준다면, 우리 아이가 나중에 커서 ‘엄마 아빠, 이 영화에 나오는 저 하늘빛은 뻥 아냐? 거짓말 아냐? 꾸민 그림 아냐? 뽀샵질로 만들지 않았어?’ 하고 물을는지 모르겠지만, …….


.. 서구 사회에서라면 계급이동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다. 인도의 카스트에 버금갈 정도로 엄격한 계급체계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결국 감옥이나 시체실에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는 식의 악순환의 저주에 시달리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  (50쪽)


 홀로 골목동네를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옆지기와 나란히 골목동네를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그리고 이제는 아기를 안거나 이끌고 골목마실을 하면서 사진을 찍을 때, 마음속으로 숱하게 되뇝니다. 저는 제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동네를 이 모습 그대로 담아낼 뿐이라고. 더 잘난 모습도 아니요 더 못난 모습도 아닌, 그저 이 모습 그대로를 담아낼 뿐이라고.

 꽃그릇을 마련해 꽃씨를 심었으니, 이제 막 움이 틀 때부터 줄기가 오르고 잎이 돋으며 꽃이 피고 열매 맺고 씨가 떨어질 때까지 한 해 내내 끊임없이 담아냅니다. 볕 좋은 날 빨래가 나부끼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따로 동네 할매 할배를 불러 앉히고 얼굴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골목마다 놓인 걸상과 평상을 담으면서 할매 할배 손길과 손끝을 느끼도록 합니다. 나무문패를 쓰다듬으면서, 나무전봇대를 어루만지면서, 나무로 짠 대문을 쓸어 보면서, 한 동네에서 오래도록 뿌리내린 사람들 발자취를 더듬습니다.

 뒷날 우리 아이가 이 동네에서 살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또 뒷날 우리 아이가 제가 태어나 자란 동네 모습을 떠올리고 싶어할는지 모르지만, 아비 된 사람으로서 할 몫이라면 이 동네가 더는 다치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힘쓰면서 오늘 모습을 차근차근 담는 데에 있다고 느낍니다.


 (2) 김기덕 감독 영화를 생각한다


 《나쁜 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라는 긴 이름으로, 줄여서 《나쁜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김기독 감독 한삶을 다룬 책 하나가 조그맣게 나왔습니다. 책은 그야말로 조그맣습니다. 2/3쯤이 몸글이고 1/3쯤은 글쓴이 ‘마르타 쿠를랏’ 님이 김기덕 감독과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김기덕은 인간의 조건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82쪽)”는 이야기를 적바림한 마르타 쿠를랏 님은 아르헨티나사람입니다. 아르헨티나에 김기덕 감독 영화가 걸리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데, 이이는 김기덕 감독 영화를 하나하나 찾아서 보고 생각하고 곱씹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주 많은 한국 ‘영화관 손님’은 못마땅해 하거나 거북해 하거나 몸둘 바를 몰라 하거나 손가락질을 하거나 등을 돌리지만, 한국 아닌 나라에서는 여러모로 섬기고 이야기하며 차근차근 파헤치기까지 하는 김기덕 감독 영화가 참말 무엇을 보여주거나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있는 그대로 나누려고 아르헨티나 작가이자 교수인 마르타 쿠를랏 님은 조곤조곤 생각주머니를 펼칩니다.


.. (김기덕) “프랑스에만 있었던 게 아니고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미술관을 다 다녔고, 많은 그림과 조각 사진을 보았고, 그 모든 게 저의 영화 작업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미술관의 작품보다는 거리의 동상이나 과거의 흔적들이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 “저는 영화로 철학자나 권력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며 이해하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결국 초월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만드는 시간 동안 너무나 고통스럽고 슬프며 행복합니다.” ..  (30, 44쪽)


 책을 읽으며 헤아려 보니, 제가 본 김기덕 감독 영화는 몇 가지 없습니다. 〈수취인불명〉하고 〈파란 대문〉쯤? 둘 모두 누구 작품인지 모르면서 보았고, 〈파란 대문〉을 보고 난 다음에는 ‘이 잘 찍은 영화를 잘 읽어낼 사람은 거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영화관 손님’뿐 아니라 ‘책읽는 사람’들도 당신들을 ‘거북하게’ 하는 책을 꺼립니다. 당신들을 거북하게 하는 책을 놓고 ‘교훈적’이라느니 ‘계몽적’이라느니 하는 꼬리말을 달아 놓으면서 깎아내리기 일쑤입니다. 재미가 있으면 재미가 있다고 받아들이면 되고, 나를 가르쳐 주면 넉넉히 배우면 될 텐데, 재미를 재미 그대로 못 느끼는 가운데 가르침은 가르침 그대로 못 받아들인다고 할까요. 우리 삶에서 어느 하루 어느 누구한테고 서로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는 일이 없건만, 영화와 책에서만큼은 ‘저눔이 날 가르치려 들어? 건방지게?’ 하고 생각해 버립니다.


.. (김기덕) “가족들은 생계비를 벌지 못할까 봐 내가 시나리오 쓰는 것을 반대했고, 저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거리에서 타자기를 안고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사람들이 대학 나온 사람들도 못하는 것을 한다고 포기하라고 한 적도 많습니다.” … “이제 저는 다수가 행복한 것보다, 한 나라가 행복한 것보다, 어떤 집단이 행복한 것보다 개인이 자유롭고 행복한 것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그 행복은 물질적 만족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 “인정받지 못했다고 제가 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더 단단하게 제 생각을 고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34∼35, 79, 97쪽)


 《나쁜 감독》을 읽다 보니, 김기덕이라고 하는 영화감독은 고작 ‘국졸’이고, 영화판에 따로 선후배나 스승이라 할 만한 줄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까닭 때문에 찬밥이나 미운털이지는 않을 테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많이 배우고, 너무 많은 가방끈을 움켜쥐고 있느’라 영화이고 책이고 사람이고 삶이고 스스럼없이 바라보며 껴안는 매무새를 스스로 놓쳐 버리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머리속에 어떤 지식으로 가득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지식이 들어서지 못합니다. 머리속이 텅 비어 있어도 아무런 지식이 뿌리내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 머리에 자질구레한 지식을 꽉 채워 놓고서 우리 둘레 사람들을 살갑고 넉넉하게 껴안지 못합니다. 또는, 우리 머리에 아무런 생각을 담아 놓지 않고서 우리 둘레 사람들을 깊고 너르게 살펴보거나 헤아리는 품이 없습니다.

 꽉 차서 야무진 듯 보이지만 갑갑하게 꽉 막혀 있는 셈이고, 확 트이거나 열린 듯 보이지만 썰렁하게 메말라 있는 셈입니다.


.. (김기덕) “저는 제 영화에 꼭 맞는 배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제 시나리오를 이해하고 시간이 맞는다면 가능합니다. 유명한 배우가 출연해서 영화가 잘되는 것보다 그 배우가 누구인지 모르고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보는 게 저는 더 중요합니다.” … “저의 가장 큰 스승은 자연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지루하게 유럽 영화사를 외웠다면 다른 감독들과 다름없거나 감독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 그냥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게 참 행복합니다.” ..  (54, 87쪽)


 다만, 김기덕 감독 영화가 빈틈없이 잘 짜이거나 훌륭하게 잘 엮이기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는 잘 짜이거나 엮였다 할지라도 앞으로도 잘 짜거나 엮을지는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저, 김기덕 감독은 김기덕 감독대로 온힘을 다해 당신 영화를 알뜰살뜰 일구어 선보이면 될 뿐입니다. ‘영화관 손님’은 영화관 손님대로, 영화관에 가는 까닭이 ‘영화를 보고 싶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간 때우기를 하러 가는 영화관입니까. 사랑놀이를 하려고 가는 영화관입니까.

 뭐, 사람에 따라, 또 때에 따라 시간을 때우거나 사랑놀이를 하려고 영화관에 마실을 갈 수 있어요. 언제나 어디서나 자유란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관이 시간만 때우러 가는 곳은 아니요, 책방이나 도서관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러만 가는 곳은 아닙니다. 책을 보러 가면서 책 하나로 마음밥을 얻도록 하자는 책방입니다. 영화를 보러 가면서 영화 하나로 내 삶밥을 곱씹도록 하자는 영화관입니다. (4342.8.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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