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52] 긴치마

 아이 어머니가 뜨개질로 아이 입을 치마를 떠 줍니다. 길다 싶은 치마로 뜨지 않았을 테지만 아직 아이한테는 퍽 깁니다. 아이는 긴치마를 입고는 즐겁게 뜁니다. 할머니·할아버지가 한복을 사 줄 때에 치맛자락이 자꾸 발에 밟히니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걷거나 뛰라 말했더니, 아이는 이 말을 곧바로 알아듣고는 긴치마를 입고 다닐 때에는 으레 치맛자락을 잡고 움직입니다. 치마라면 다 좋으니까 긴치마이며 짧은치마이며 깡똥치마이며 다 좋아합니다. 아버지가 웃도리를 입으면 웃도리를 보고도 치마라 말하며 두 손으로 꼭 잡고는 밑으로 죽 내리려고 합니다. 아침에 문득 어느 한국어사전 하나를 펼치다가 ‘롱스커트’라는 낱말이 실렸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해 봅니다. 한국어사전이라 하지만 ‘롱스커트’와 ‘미니스커트’ 같은 영어는 실으면서 막상 ‘짧은치마’ 같은 한국말은 안 싣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아이가 입은 치마가 길면 ‘긴치마’라 말하고, 아이가 입은 치마가 짧으면 ‘짧은치마’라 말하지만, 이런 치마 하나조차 한국말로 옳게 밝히며 적기가 힘들구나 싶습니다. 바지도 그래요. 아니, 바지는 아예 ‘긴바지’도 ‘짧은바지’도 한국어사전에 못 실립니다. (4344.4.1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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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51] 흙일꾼

 집에서 살림을 하기에 살림꾼입니다. 살림꾼은 집일만 하는 사람을 일컫지 않습니다. 집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집일꾼이에요. 살림을 하기에 살림꾼이라고 따로 일컫습니다. 흙을 만지면서 일을 한다면 흙일꾼입니다. 아직 어설프면서 어리숙하게 텃밭을 돌보는 저 같은 사람은 흙일꾼이라는 이름조차 부끄럽기에, 섣불리 흙일꾼이라 밝히지는 못하고 흙놀이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덧 스무 해 즈음 글을 쓰며 일을 했기에 글일꾼이라 할 만한데, 사진으로도 일을 하니까 사진일꾼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일을 한대서 일꾼이지만, 일만 한다면 나 또한 기계와 마찬가지로 맥알이 없거나 따스함 없는 목숨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집일꾼에서 집살림꾼으로 거듭나는 한 사람이 되고자 힘쓰려 합니다. 흙놀이에서 흙일꾼으로 거듭난다면 나중에는 흙살림꾼으로 살아가자고 다짐합니다. 집일꾼에서 집살림꾼이 되고, 책일꾼에서 책살림꾼으로 다시 태어난다든지, 글일꾼에서 글살림꾼으로 거듭 꽃피운다면, 나한테 고운 목숨을 베풀어 준 우리 어버이한테 기쁨과 사랑을 갚는 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4344.4.1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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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50] 산들보라

 둘째 아이 이름을 지었습니다. 둘째 아이 이름 또한 애 엄마가 짓습니다. 애 아빠가 곁에서 거들며 함께 지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 아이 이름을 놓고 ‘눈보라’나 ‘봄눈보라’도 생각해 보았으나, ‘산들보라’로 마무리짓습니다. ‘산들’이란 산들바람에서 나오는 ‘산들’이요, 산들바람이란 “시원하고 가볍게 부는 바람”입니다. ‘보라’는 눈보라에서 나온 말인 한편, “이 사람을 보라” 할 때에 나오는 ‘보라’이기도 합니다. ‘산들’이라는 이름은 “산과 들”을 일컫는 산들이 되기도 합니다. ‘보라’는 보라빛 보라이기도 합니다. 뜻이야 이밖에도 여러모로 더 헤아릴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한결 깊어지거나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뜻이나 더 사랑스러운 느낌이나 더 고운 결에 걸맞게 붙이는 이름은 아닙니다. 둘째를 낳아 함께 살아갈 어버이 스스로 어느 곳에서 어떤 매무새로 어떤 살림을 꾸리면서 지내려 하느냐 하는 꿈을 담는 이름입니다. 둘째 아이 또한 첫째 아이처럼 어쩔 수 없이 아버지나 어머니 성을 붙여야 할 테며, 의료보험증에는 끝 이름 하나가 잘리겠지요. 그래도 우리 둘째는 그예 ‘산들보라’일 뿐이고, 산들보라처럼 어여삐 이 땅으로 찾아오리라 믿고 기다립니다. (4344.4.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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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49] 봄꽃

 봄에 피어 봄꽃을 시골자락에서 쉬나무 꽃으로 처음 마주합니다. 도시에서 살던 지난날에는 개나리를 보며 봄꽃을 처음 느꼈으나, 멧자락 시골집에서는 쉬나무 꽃이 맨 먼저 우리들을 반깁니다. 텃밭에 거름을 내려고 풀을 뽑고 흙을 갈아엎다 보니 아주 조그마한 풀에 곧 맺히려는 풀잎 빛깔 작은 꽃망울이 보입니다. 이 꽃망울이 활짝 터지면 풀빛 꽃이 조그맣게 흐드러지려나요. 사람 눈으로는 아주 작다 싶지만, 개미한테는 무척 함초롬한 꽃이 되겠지요. 봄날이기에 봄꽃을 봅니다. 멧자락 집이기에 멧꽃입니다. 시골마을인 터라 시골꽃입니다. 도시에서는 도시꽃이었고, 도시에서도 골목동네였기에 골목꽃이자 동네꽃이었습니다. 시골마을 들판에서는 들꽃이며, 도시자락 길바닥에서는 길꽃입니다. 종이로 만들면 종이꽃일 테고, 나무에는 나무꽃이요, 풀은 풀꽃입니다. 사람들 마음에는 마음꽃이 필까요. 사람들이 사랑을 나눈다면 사랑꽃이 흐드러질까요. 사람들이 서로를 믿거나 아끼면 믿음꽃이 소담스러울 수 있나요. 그렇지만 요즈음 도시내기들로서는 돈꽃과 이름꽃과 힘꽃에 자꾸 끄달릴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참꽃과 삶꽃과 말꽃과 꿈꽃을 사랑하면서 일꽃과 놀이꽃과 아이꽃과 살림꽃과 글꽃과 그림꽃을 피우기란 힘든 나날입니다. (4344.4.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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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62] ‘뮤직 홈’과 ‘음악 감상’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지 않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사람은 한국말 ‘노래’를 즐겨쓰지 못할 뿐 아니라, 널리 북돋우지 못합니다. ‘노래’하고 ‘音樂’이 다른 말일 수 없을 뿐 아니라, ‘music’은 ‘노래’를 가리키는 영어일 뿐입니다. 노래는 한국말이고, 음악은 중국말이며, 뮤직은 영어입니다. 이를 옳게 가누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사람 스스로 ‘노래’라는 낱말 쓰임새를 줄이거나 옭아맵니다. ‘노래듣기’는 못하고 ‘뮤직플레이어’만 하겠지만, ‘뮤직비디오’를 우리 말로 옮기려고 마음쓰지도 못합니다. ‘海外’는 일본사람이 쓰는 낱말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해외음악’ 같은 말마디도 ‘나라밖 노래’로 적을 줄 모릅니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알 때에는 ‘최근 들은 음악’이라는 말마디 글자수를 살피며 ‘관심음악’을 ‘좋아하는 노래’쯤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겠지요. (4344.4.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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