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결에 물든 미국말
 (662) 베리 쿨


.. “스포츠 하는 남자애들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 안 드니?” “별로 안 드는데. 열심히 뛰고 있구나라는 생각은 들지만. 나 재수 없니?” “괜찮아, 괜찮아. 아주 쿨해. 베리 쿨!” ..  《와타나베 페코/김진수 옮김-라운더바우트 (1)》(대원씨아이,2011) 173쪽

 사람들은 누구나 말을 합니다. 어린 나날부터 배운 대로 말을 합니다. 배우지 못한 말은 하지 못합니다. 배운 말을 조잘조잘 늘어놓습니다. 배우지 못한 말은 주워섬기지 못합니다. 배운 말을 나긋나긋 풀어놓습니다.

 사람들이 배우는 말은 지식조각을 꿰어맞추는 말이 아닙니다. 몸으로 하루하루 받아들이는 말이 사람들이 배우는 말입니다.

 아주 쿨해 (△)
 베리 쿨 (x)


 아이들은 어린 날부터 영어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영어를 배우니까, 아이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아주’ 쿨하다고 말하다가도 ‘베리(very)’ 쿨이라고 영어를 섞습니다. 워낙 자주 듣고 아주 흔히 듣는 영어이니까,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더군다나, 방송에서고 인터넷에서고, 또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쿨(cool)’이라는 영어를 쓰는 어른들은 이 영어가 들어오기 앞서 어떤 말로 당신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냈는가 잊습니다. 그저 아이들 앞에서고 어른들 앞에서고 ‘쿨’이라고만 말합니다. 아이들은 이 어른들 말투를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아이들은 ‘쿨은 쿨이지 쿨 아니고 뭔가?’ 하고 여깁니다. 굳이 ‘쿨’이 무엇을 뜻하는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쿨은 쿨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며 지나갑니다.

 괜찮아, 괜찮아, 아주 차분해
 괜찮아, 괜찮아, 아주 바른 말이야
 괜찮아, 괜찮아, 아주 맞는 말이야
 괜찮아, 괜찮아, 아주 잘 짚었어


 아이들이 생각없이 말을 한다면,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어른들부터 생각없이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생각있이 말을 하도록 이끌자면,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른들부터 생각있이 말을 해야 합니다.

 어른들 말마디에는 생각씨가 거의 없습니다. 어른들 말투에는 사랑씨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른들 말결에는 마음씨가 그닥 드러나지 않습니다. 알맹이 없는 말에, 씨알 없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말이면서, 꿈이 없는 말이에요.

 아이들 말은 말대로 슬프게 무너집니다. 아이들 삶은 삶대로 아프게 흔들립니다. 아이들 넋은 넋대로 뿌리없이 휩쓸립니다. (4344.11.1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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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78] 큰못

 면에 있는 철물점에 들러 큰못 하나 얻습니다. 새 도서관 샤시문에 다는 자물쇠는 구멍을 뚫어 못 하나 넣은 다음 채웁니다. 자물쇠는 장만했는데 큰못이 없어, 철물점에서 다른 물건 하나 사며 얻습니다. 큰못 하나 얻으며 말씀을 여쭐 때에 “대못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큰못’이라 말하고 싶으나,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이면 ‘大못’ 아닌 ‘큰못’으로 말해야 옳다고 나오기는 한데, 정작 이처럼 옳게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나이든 분이든 나어린 사람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못과 망치를 들어 일하는 사람이든 연필이나 볼펜을 쥐고 일하는 사람이든 노상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못이 아닌 커다란 못을 쓰면서 ‘큰못’이라 말하지 않아요. 그나마, 국어사전에는 ‘큰못’ 한 가지만 실릴 뿐, ‘작은못’은 아예 안 실려요. 슬픈 노릇인데, 말을 말다이 사랑하거나 아끼는 길을 국어사전부터 보여주지 못하니까,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말을 말다이 돌보거나 어루만지는 길을 걷지 못해요. 큰사람이 없어요. 큰마음이 없어요. 큰사랑이 없어요. 큰일을 몰라요. 큰꿈을 몰라요. 큰넋을 몰라요. (4344.11.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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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77] 뒷종이

 한쪽은 이런저런 그림과 글이 잔뜩 찍히지만, 뒤쪽은 말끔하게 하얀 종이가 있습니다. 신문 사이에 낀 광고종이가 되든, 우체통에 꽂히는 광고종이가 되든, 한쪽만 쓰는 종이가 있어요. 시골에서는 집집을 돌며 광고종이 꽂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우체통이건 집 둘레이건 광고종이 흩날리는 일이 없습니다. 시골집 들어오는 신문에 광고종이 잔뜩 꽂힐 일 또한 없어요. 읍내 밥집이나 관공서에 놓인 신문을 들추어도 광고종이를 구경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광고를 해서 물건을 팔려 하는 사람들은 도시에만 있을 테니, 시골에서 광고종이를 돌리거나 붙여 본들 다리만 아프리라 봅니다. 앞뒤가 온통 하얀 종이가 되든, 한쪽만 하얀 종이가 되든, 그예 도시에서 넘칠 뿐이겠구나 싶어요. 초콜릿 껍데기를 뜯습니다. 비닐로 싸인 벽종이를 뜯습니다. 껍데기 겉은 이런저런 그림과 글로 꽉 차지만, 껍데기 뒤는 하얗습니다. 종이 구경하기 힘든 시골에서는 이런저런 종이들을 잘 간수해서 써야겠다고 느낍니다. 앞은 못 쓰고 뒤만 쓰는 종이일 테니까, 이들 종이는 뒷종이가 되겠다고 느낍니다. 앞종이는 광고하는 종이요, 뒷종이는 요모조모 적바림할 때에 알뜰히 쓰는 종이로 삼으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4344.11.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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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76] 벽종이

 새로 얻은 보금자리를 꾸미려고 헌 벽종이를 뜯습니다. 우리로서는 새 보금자리이지만, 이 집은 퍽 예전부터 다른 사람들이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살림집 하나 꾸리면서 아이들을 낳고, 아이들이 자라 어른 되어, 나중에 저희끼리 새로운 살림을 일구면서 제금을 납니다. 벽종이에 풀을 바르면서 생각합니다. 풀을 바른 벽종이를 차곡차곡 접어서 살짝 말리묘 헤아립니다. 지난날 이 집을 곱게 꾸미면서 벽종이를 바르던 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내 어린 날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 집에 벽종이를 새로 바르면서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헌 벽종이를 뜯어 마당 가장자리에서 불을 붙입니다. 새 벽종이는 한 장씩 차근차근 붙입니다. 불이 붙은 벽종이는 금세 까맣게 재로 바뀝니다. 새로 붙인 벽종이는 조금씩 마르면서 시나브로 하얀 빛이 돕니다. 문득, 먼먼 옛날 벽종이 없던 때에는 살림집 방을 어떻게 꾸몄을까 궁금합니다. 임금님 살던 궁궐은 방마다 벽이 어떠했을까요. 임금님을 모신다는 사람들 커다란 기와집 방은 벽을 어떻게 마감했을까요. 흙을 일구는 여느 사람들 흙집은 방마다 벽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벽종이는 언제부터 발랐고, 벽종이는 왜 발라야 했을까요. 이제 모든 집을 시멘트로 짓다 보니 벽종이 없이는 안 되는구나 싶지만, 시멘트 아닌 흙과 나무로 집을 짓던 멀디먼 옛날을 그립니다. (4344.11.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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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75] 학교옷

 아이들이 중학교 들어갈 무렵 학교옷을 맞춥니다. 똑같은 모양과 빛깔로 맞춘 학교옷을 입은 아이들이 버스나 자가용이나 두 다리나 자전거로 학교에 갑니다. 옷을 똑같이 맞춘 만큼, 학교에서 이 아이들한테 베푸는 앎조각이란 모두 똑같습니다. 똑같은 대학교에 시험성적 더 잘 받은 아이가 들어가게끔 힘씁니다. 아이들은 학교옷을 똑같이 맞춰 입기에 한결 예뻐 보이는지, 아니면 학교 밖에서 미운 짓이나 못난 짓을 못하도록 가로막거나 지키거나 다스리려고 틀에 맞추는 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아이들이 학교옷을 따로 맞추지 않을 때에도 끔찍한 입시지옥이 그대로 있을까 궁금합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다 다른 옷을 입고, 다 다른 꿈에 걸맞게 다 다른 이야기를 다 다른 어른한테서 배울 수 있다면, 이리하여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며 다 다른 삶을 예쁘게 일굴 수 있으면, 우리한테 대학교란 어떤 값이나 보람이나 뜻이 있을까요. 학교옷을 입고 운동장에서 뒹굴 수 없습니다. 땀내 물씬 나는 옷을 한 주 내내 입기 어렵습니다. 학교옷을 입고 논밭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학교옷을 입고 바다에서 고기를 낚을 수 없습니다. 학교옷을 입고 어린 갓난쟁이 동생을 돌볼 수 없습니다. 학교옷 똑같이 입은 아이들은 회사원이나 공무원 되는 길만 걷습니다. (4344.1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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