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정답 : 정답이 궁금한 사람은 끝까지 정답을 알지 못한다. 정답이 무엇이라는 말소리를 듣더라도 마음으로 알아내지 못한다. 정답을 궁금해 하지 않기에 어느새 정답에 다가설 뿐 아니라, 삶이 고스란히 정답을 녹여내는 몸짓이 된다. 수수께끼를 열여섯 줄 동시로 갈무리했다. 한 해 동안 이 일을 하면서 둘레에 슬그머니 여쭌다. 마음으로 이 수수께끼를 들은 어린이나 어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거 그거네요!” 한다. 마음읽기로 수수께끼 이야기를 맞이하는 어린이하고 어른은 내가 쓴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를 하나도 안 틀리고 대번에 맞추더라. 그러나 마음읽기 없이 서두르거나 빨리빨리 읽어내려 하는 이는 하나도 못 맞출 뿐 아니라 “뭐예요? 다 그게 그거인 동시 아냐? 문제가 너무 어려워?” 하고 대꾸한다. 이 대꾸를 듣고 느낀다. 그래, 나는 ‘우리말 + 수수께끼 + 동시’에다가 ‘사전’을 엮은, 다시 말하자면 ‘우리말 + 수수께끼 + 동시 + 사전 + 살림 + 노래’를 들려주려 하는데, 그쪽에서는 ‘정답 맞추기 문제’로 여기니 하나도 못 맞출밖에. 이러면서 툴툴거릴밖에. 이리하여 새삼스레 ‘어른시’를 한 자락 적어 본다. 2020.3.31.


빨리 읽어내어

빨리 맞추려고 하면

모두 어렵습니다


혀에 얹고

마음을 실어

느긋하게 읽으면서

머리에 그림을 그리는


동시 하나를 놓고

하루나 이틀을 누리듯

천천히 나아가지 않고

후딱 정답만 알아내려 하면

모두 헷갈리겠지요


적어도

한 해를 놓고서

함께 읽으면

모두 맞추겠지요


서둘러 읽으면 못 맞춥니다

서둘러 쓰면 알맹이가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살림말


기계랑 사람 : 돌아가신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을 갈무리하는 일을 했다만, 어른을 ‘섬긴다’거나 ‘존경’한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하지 않았다. 떠난 어른이 남긴 뜻을 찬찬히 밝히는 일하고 ‘섬기기·존경’은 확 다르니까. 어느 분이 “언중(言衆)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 같은 말씨를 쓰더라. “의도적으로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한다고도 하더라. 이런 말씨를 쓰면서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씨’를 헤아리거나 쉽게 말하려 한다는데, 하나도 믿기지 않는다. 아니, 눈속임이나 거짓말이로구나 싶다. 아니, 겉치레이거나 자랑질이나 잘난척이지 싶다. 미국사람이 미국말 하기가 어려울까? 일본사람이 일본말 하기가 힘들까? 어느 나라 사람이건, ‘아이하고 주고받는 말’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어른이자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들려주고, 아이가 물려받아서 아이 나름대로 스스로 생각을 빛내며 가꿀 말’을 가만히 돌아보면 된다. 이렇게 하면 저절로 ‘즐겁게 우리말로 생각을 짓고 빛내어 나누는 살림길’이 되겠지. 덧붙이자면, 모든 사전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 쓰기 때문에 어떤 사전도 ‘객관적’이지 않다. 사전이란 책에 뜻풀이를 ‘객관적’으로 할 수 있다면, 진작에 사전짓기 같은 일은 기계한테 맡기고 사람은 이 일을 안 했겠지. 사전이건 책이건 모두 ‘사람이 짓’는다. ‘사람이 짓는다 = 그 사람 마음이 깃든다’요, 이는 “언중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이 아닌 말”로 하자면 ‘모든 책과 사전 = 주관적’이란 소리이다. 너랑 내가 왜 만나는가? 우리는 서로 ‘객관적 시각으로 관찰하고 소통하기’ 때문에 만날까? 씨나락 까먹는 소리이다. 우리는 서로 ‘다 다른 눈(주관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야기하면서 즐겁고 신나고 사랑스러우’니까 만난다. 모든 만남은 사랑이다. 사랑인 ‘주관적’이다. 2015.3.31.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낙서 : 아이는 글을 쓴다. 아이는 그림을 그린다. 아이는 노래를 한다. 아이는 춤을 춘다. 아이는 말을 한다. 아이는 빙그레 웃다가 까르르 터진다. 아이는 눈물에 젖기도 하고, 아이는 꿈을 꾸면서 사르르 잠이 든다. 아이는 꽃이며 나무한테 속삭인다. 아이는 어른이 안 보는 자리에서 구름에 살짝 올라타며 놀고, 바람하고 온나라를 돌다가 별빛을 품고서 온누리를 즐긴다. 아이가 붓을 쥐어 생각나는 대로, 본 대로, 사랑하는 대로, 살아가는 대로, 무엇이든 종이에 담아낸다. 아이 손길이 흐르는 붓자국을 바라보는 어른은 몇 가지로 느낄 만하겠지. 첫째, 아이 삶이자 사랑이자 꿈이로구나. 둘째, 낙서잖아. 아이 손길을 삶·사랑·꿈으로 알아보든, 아이 손길을 한낱 낙서라고 치면서 지나가든 대수롭지 않다. 다만 하나는 밝힐 만하다. 아이 손길을 고스란히 아이 눈빛으로 읽으면서 말을 섞으면 아이는 사랑으로 꿈을 키우며 살아간다. 아이 손길을 그냥 낙서로 읽으면서 핀잔하거나 비웃으면, 뭐 그냥 끝이지. 2020.3.30.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봄꽃 : 봄을 밝히는 꽃은 들판에, 사랑을 밝히는 아이는 어른 곁에. 하루를 밝히는 해는 하늘에, 살림을 밝히는 어버이는 보금자리에. 숲을 밝히는 풀은 나무 곁에, 오늘을 밝히는 우리는 서로서로. 2018.3.25. ㅅㄴㄹ


春の花 : 春を照らす花は野原に、愛を照らす子は大人のそばに。 一日を照らす太陽は空に、生活を照らす親は家庭に。 森を照らす草は木のそばに、今日を照らす私たちは互いに。 (作 : 森の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조선일보 사랑 : 조선일보를 사랑하든, 조중동을 좋아하든 마음대로 할 노릇이다. 한겨레·경향을 사랑해도 되고, 어느 신문이나 방송이든 마음대로 즐기면 된다. 다만, 신문이나 방송이 어떤 속내이며 구실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들 신문하고 방송이 그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고, 오늘 어떤 속셈이나 꿍꿍이나 꾀를 부리는가를 읽어내야겠지. 이러한 눈썰미가 없다면 ‘기생충 서민 교수’가 2020년 3월 25일치 〈조선일보〉에 손수 써서 실은 “‘문빠’가 언론 탄압하는 시대, 조선일보 없었다면 어쩔 뻔“ 같은 글을 쓰겠지. 어떤 이는 동인문학상이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이고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동인문학상이나 이상문학상뿐 아니라 조중동 신춘문예에도 발을 담그지 않는다. 어떤 이는 문학은 문학이고 상은 상이라면서 아랑곳하지 않으며, 어떤 이는 글을 쓰는 길이란 아무 신문이나 출판사나 방송에 기웃대지 않으면서 삶길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나저나 ‘언론 탄압’이란 뭘까? 무엇이 ‘언론 탄압’이고, 무엇이 ‘매판 언론’이며, 무엇이 ‘독재·제국주의 일본에 빌붙으며 사람들 피를 빨아먹고 죽음수렁으로 내몬 언론’일까? ‘기생충 서민 교수’는 책을 팔고 싶으면 책광고를 하고, 책소개를 하면 될 텐데, 왜 ‘조선일보 사랑타령’을 할까? 아, 그렇지. ‘조선일보 사랑타령’이 바로 〈조선일보〉를 읽는 이한테 책을 알려서 파는 일이 되겠구나. 잘 가셔요. 그대 사랑 조선일보 품으로. 2020.3.25. ㅅㄴㄹ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23&aid=0003517503&date=20200325&type=1&rankingSeq=4&rankingSectionId=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