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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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다 : 좋으니 반긴다. 좋아하니 반긴다. 사랑스럽기에 반기고, 설레거나 기다리면서 반긴다. 좋지 않은데 반기지 않고, 좋아하지 않으니 반기기 어렵다. 사랑이 아니기에 반길 마음이 없고, 설레거나 기다릴 뜻이 없는데 반기지 않겠지. 마음을 산뜻하면서 따사롭게 띄울 줄 안다면, 갑작스레 찾아오는 발걸음이라도 반기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겠지. 2020.5.30.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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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 입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손을 움직여 글로 마음을 나타낼 수 있다. ‘글’이란 무엇일까? 뜻풀이를 새로 여미어 본다. “그리는 길. 가는 길. 나누는 길. 생각하는 길. 소리를 얹어 노래하려는 길. 살림·사랑·삶을 담아서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슬기로운 숲을 이야기로 헤아리면서 소리로 읽어내도록 지은 무늬. 살아갈 꿈을 생각에만 담지 않고, 늘 코앞에서 지켜보면서 되새길 수 있도록 읽어내리며 그려낸 소리에 이야기를 담은 무늬.” 2020.5.2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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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 책을 잘 읽어야 하지는 않다. 글을 잘 써야 하지도 않다. 말을 잘 해야 하지도 않으며, 길을 잘 찾아야 하지도 않지. 돈을 잘 벌어야 하지 않으며, 자전거를 잘 타거나, 씽씽 잘 달려야 하지도 않아. 얼굴이며 몸매가 잘 빠지거나 생겨야 하지 않고, 키가 잘 자라야 하지 않네. 하루를 잘 보내야 하지 않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든지, 사진을 잘 찍어야 하지도 않다. ‘잘’만 빼면 된다.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읽으면” 된다. 글을 쓰고 싶으니 “글을 쓰면” 된다. “말을 하”고 “길을 찾”고 “돈을 벌”고 “자전거를 타”면 된다. 이 얼굴하고 몸매를 입으면 될 노릇이며, 어느 키이든 우리 몸이다. 잘 그리려고 애쓴 그림을 보면 갑갑하다. 잘 찍으려고 힘쓴 사진을 보면 숨막힌다. 뭣 하러 잘 해내려 하는가? 노래하지 않으니 ‘잘’에 얽매인다. 춤추지 않으니 ‘잘’에 휘둘린다. 꿈꾸지 않으니 ‘잘’에 치인다. 사랑하지 않으니 ‘잘’에 사로잡힌다. 아이를 잘 가르쳐야 하지 않아.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어. 모든 곳에서 ‘잘’을 덜어 놓으면 ‘잘못’조차 따로 없는 줄, 우리는 저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부대끼고 아프고 멍울이 들다가도 활짝 피어나서 달콤히 열매를 맺는 푸나무처럼 푸르게 우거진 숲이라는 숨결인 줄 알아채겠지. 1992.5.24.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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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년·돌·해 : 2020년을 맞이하는 해를 ‘5·18 40주년’이라 하면서 ‘5·18 40주년 기념식’을 한단다. 그래, 벌써 마흔 해가 되었네 싶고, 이런 날을 헤아리는 나도 나이를 꽤 먹었구나 싶다. 그런데 말이 걸린다. 어릴 적에 둘레에서 ‘주년·기념식’은 아무 자리에나 안 쓴다고 했다. ‘5·18’뿐 아니라 ‘6·25’도 ‘주년·기념식’ 같은 말로 가리키지 않는다. ‘주년·기념식’이란 한자말은 즐겁거나 반갑게 맞이하는 날이나 자리에서 쓰니까. 춤추고 놀 만한 자리가 아니라면 ‘주년·기념식’이란 한자말이나 ‘돌’이란 한국말 이름을 안 붙인다고 할까. 그렇다면 어떤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까? 아마 이 대목을 헤아리는 눈길이 적다 보니 그냥그냥 아무 말씨나 쓴 셈이지 싶은데, ‘5·18 마흔 해’라고 수수하게 쓰는 길이 낫다고 느낀다. 한자말을 굳이 쓰고 싶다면 ‘5·18 40년’이라 하면 되겠지. 그리고 ‘5·18 마흔 해를 돌아본다’나 ‘5·18 마흔 해 되새김날’이나 ‘5·18 마흔 해 되짚음날’처럼 수수하게 헤아리도록 이름을 붙이면 좋겠다. 2020.5.1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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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 “전기가 끊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하고 물으면, 참 끔찍하리라고 생각한다는 분이 많다. “전기를 못 쓸 때를 헤아려, 전기 없이 살아가는 길을 즐겁게 누리거나 지을 줄 알면 어떨까요?” 하고 물으면, 그런 생각은 좋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고 묻는 분이 많다. “학교가 멈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고 물으면, 생각조차 한 적이 없을 뿐더러 생각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고 되묻는 분이 많다. 자, 그런데 2020년 봄에 학교가 멈추었고 하늘길이며 뱃길이 끊어졌다. 그나마 전기는 안 끊어졌다만, 또 택배가 안 끊어졌다만, 전기하고 택배를 쓸 수 없을 적에 어떻게 이곳에서 살아갈 만한가를 이제라도 생각할 노릇은 아닐까? 그리고 “학교가 멈출 적에 아이한테 무엇을 누가 어떻게 가르치고 나누면서 함께 배울 노릇인가?”도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일은 아닐까? 2008·2011년에 태어난 우리 집 두 아이는 졸업장학교에 안 다닌다. 두 아이 스스로 고른 길이다. 어버이인 내가 두 아이한테 졸업장학교에 안 넣을 마음으로 안 넣지 않았다. 아이들 스스로 학교란 곳에 가 보고서 안 가기로 했으며, 두 아이는 “우리 집”을 배움숲으로 삼겠노라 했다. 좀 쉽게 알아들으라고 ‘홈스쿨링’ 아닌 ‘우리 집 학교’라 말하지만, ‘우리 배움숲’이다. 우리 집뿐 아니라 어느 살림집이든 다같이 “우리 집 = 우리 배움숲 = 우리 살림숲 = 우리 사랑숲”이라 할 만하다고 여긴다. ‘집’이란 말을 ‘살려고 지은 곳’이라고 풀이하고서 그쳐도 될까? ‘집’이란 ‘살림을 나누면서 슬기롭게 사랑하는 길을 넉넉하고 아늑하며 포근하게 누리면서 하루를 새롭게 마감하고 여는 숲을 조촐하게 담아내어 살아가는 곳’이라고 여기는 눈을 키울 일이 아닐까. 나는 둘레 사람들한테 “제발 아이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면 졸업장학교에 보내지 마십시오” 하고 말하지는 않는다. 둘레 사람들은 나더러 “사회생활·사회성을 기르고 추억·또래 친구를 얻으려면 제발 아이를 졸업장학교에 보내야 하지 않느냐”고 으레 닦달한다. 2020년 봄에 이제는 생각해 보기를 빈다. 학교가 멈춘 이 마당에 다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시는지요? 배움터는 어디인지요? ‘우리 집’은 어떤 몫을 하는지요? 술 마시고 노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강남 클럽·홍대 클럽·단란주점’ 같은 데를 왜 차려야 하고, 왜 그런 데에 ‘어른’이 찾아가야 하고, 왜 그런 데에서 노닥이는 짓에서 ‘어른’ 스스로 못 벗어나는지요? 무엇이 사회이고 무엇이 폭력인지요? 왜 작은 보금자리하고 마을이 스스로 학교가 되지 못하는지요? 2020.5.10.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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