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이에 드리우는 빛

 


  책에는 빛이 서립니다. 책에는 다른 어디에도 서리지 않는 빛이 곱게 서립니다. 나는 이 빛을 ‘책빛’이라고 말합니다.


  책빛은 언제나 곱게 서립니다. 이 빛을 알아채는 사람과 안 알아채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빛은 이 빛을 알아채는 사람한테만 곱지 않습니다. 이 빛을 안 알아채는 사람한테도 늘 곱게 서립니다. 다만, 안 알아채기 때문에 못 받아들일 뿐입니다. 마치 햇볕이 어디에도 곱게 드리우지만, 햇볕이 드리우는 줄 모르고 지하철을 타거나 건물에서 형광등 켜고 일하는 사람이 많듯, 햇볕도 책빛도, 또 사랑빛과 푸른 숨결도 어디에나 찬찬히 드리우거나 서립니다.


  책에 서리는 빛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무를 베어 종이로 만든 사람들이 저마다 복닥이거나 부대끼면서 빚는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빛 한 줄기 되어 책에 서립니다. 나무들 우거진 숲을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 손길과 숨소리와 마음결이 고스란히 종이 한 장에 스며듭니다. 햇살은 나무로 드리우며 나무를 살찌우고, 나무는 사람한테 와서 종이가 되어 포근한 기운을 보여주며,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 한 자락 알뜰살뜰 엮어 책 하나를 새롭게 빚습니다.


  빛이 된 이야기는 이야기빛일 텐데, 사람들 가슴에 살포시 내려앉으니 이야기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이야기빛은 이야기씨앗이 되면서 이야기나무로 자라고, 이야기꽃으로 피어납니다. 이야기꽃은 고소한 이야기밥이 되어 스며들고, 다시 이야기바람이 되어 시원한 생각 간질입니다.


  빛이 없거나 볕이 없는 데에서도 목숨이 싹틀까요. 빛이 없거나 볕이 없는 곳에서도 사람이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울 수 있을까요. 책은 인쇄소와 제본소에서 척척척 찍어서 나오는 물건처럼 보이지만, 똑같은 모습으로 천 권 이천 권 만 권 십만 권 찍힌다 하더라도 저마다 고운 나무숨 담은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아파트에서 형광등 켜고 읽을 수 있다지만, 석유와 천연가스 바닥이 나면 햇살이 드리우는 아침과 낮과 저녁 아니고서는 읽을 수 없습니다. 아니, 책이란, 형광등 불빛 아닌 햇살을 쬐며 읽을 때에 비로소 책이라 할 만합니다. 햇살이 있는 곳에서 읽으며 따스한 기운 받아먹고, 햇살이 온누리에 골고루 내리쬐도록 마음을 기울이도록 북돋우며, 햇살처럼 따스한 사랑이 내 마음에 서려 날마다 새롭게 웃고 뛰놀도록 이끌어, 바야흐로 ‘책’이 되고 ‘책빛’이라 할는지 모릅니다. 4346.6.3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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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나무와 책기둥

 


  헌책방에서는 책이 책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탑이 되고 때로는 밑받침이 된다. 헌책방에서는 책이 보배가 되기도 하면서 읽을거리가 되며 따사로운 이야기꽃이 되기도 한다. 헌책방에서는 책이 기록이나 역사나 문화가 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만남이 될 때가 있고, 애틋한 벗이 될 때가 있으며, 그리운 님이 될 때가 있다.


  받침대 밑에서 기둥 노릇을 하는 책은 서운하게 여길까. 나무받침대 밑에서 튼튼히 기둥 구실을 하는 책은 저마다 어떤 빛을 이룰까.


  나무한테서 얻은 종이는 사람들이 이야기 담은 책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람들한테 푸른 숨결 나누어 주던 나무는 알맞게 잘리고 손질받아 받침대나 책상이나 걸상 되어 우리 곁에 머문다.


  오래되어 낡은 플라스틱이나 쇠붙이나 비닐은 쓰레기가 된다. 오래되어 낡은 책걸상은 잘 닦고 손질해서 두고두고 쓸 뿐 아니라, 너무 갈라지거나 쪼개졌다 싶으면 아궁이에 넣어 방바닥 지피는 장작으로 거듭난다.


  다 다른 이야기 담긴 책은 어떠한 빛이 되어 사람들 손으로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 오늘 이야기는 모레나 글피에 어떠한 빛으로 사람들 손에 살그마니 얹힐 수 있을까.


  서른 해 꾸준하게 읽히는 책이 있고, 마흔 해만에 새롭게 빛을 보는 책이 있다. 이백 해 한결같이 읽히는 책이 있으며, 오백 해만에 비로소 빛을 보는 책이 있다.


  책을 아름답다고 느끼면, 내 마음속에서 아름다움이 찬찬히 싹을 튼다는 뜻이다. 책을 사랑스레 느끼면, 내 마음자리에서 사랑이 천천히 움을 튼다는 뜻이다. 책을 반가이 여기면, 내 마음결이 보드랍게 춤을 추면서 이웃을 반가이 맞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가 책기둥에서 하나 빼내어 다른 책을 책기둥 되도록 할까. 누가 책기둥을 하나하나 덜어내어 받침대 기둥이 오롯이 나무로 바뀌도록 할까. 돌고 도는 책이니만큼, 오늘은 책기둥이 되고 모레에는 다른 책들이 책기둥이 되다가는 글피에는 새로운 책들이 책기둥이 되겠지. 4346.6.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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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헌책방

 


  신문사나 잡지사나 방송사에서 곧잘 ‘헌책방’을 취재하곤 한다. 기자와 방송작가와 피디는 으레 나한테 연락을 한다. 오래도록 헌책방을 다녔으니 ‘좋은’ 헌책방을 잘 알지 않겠느냐며, 몇 곳을 추천해 달라 하고, 짬이 되면 길잡이를 해 달라 한다. 나는 이들한테 ‘좋고 나쁜’ 헌책방이란 없다고 말한다. 어느 헌책방이든 집과 일터하고 가까운 곳을 꾸준하게 즐거이 찾아다니면 마음을 사로잡거나 살찌우거나 북돋우는 아름다운 책을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굳이 ‘좋은’ 헌책방 몇 군데 추려서 멋들어진 그림 보여주려고는 하지 말라 주십사 이야기한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헌책방만 취재하지 말고, 서울을 벗어나기를 바란다. 적어도 인천이나 수원으로는 가든지, 의정부나 천안이나 청주쯤 가 보기를 바란다. 요새는 춘천까지도 쉬 오갈 수 있고, 부산까지 고속철도 타면 훌쩍 다녀올 수 있다. 그렇지만, 서울에 있는 기자도 방송작가도 피디도, 서울에서만 맴돈다. 적어도 인천까지 갈 생각을 못한다.


  서울을 벗어나면 아무 데도 갈 수 없다고 여길까. 서울을 벗어난 데에 있는 책방은 갈 만한 값어치가 없다고 여길까.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은 서울사람만 본다고 여길까. 서울사람은 서울에 있는 책방 이야기만 보아야 한다고 여길까.


  나더러 서울에 볼일 있으면 함께 다닐 수 있느냐고 묻지만, 내 찻삯과 일삯을 대주지 않으면 어떻게 다니겠는가.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왜 시골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다니지 못할까. 왜 시골로 나들이를 오면서 시골에 깃든 푸근하고 따사로운 책넋을 만나려고 하지 못할까. 서울 아닌 다른 도시에서도 모락모락 피어나는 맑은 책숨을 마시면서 이 나라 책삶 골고루 아끼며 사랑하는 길을 찾기란 아직 너무도 먼 길이요 힘든 노릇일까. 4346.6.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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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헌책방

 


  책은 불도 싫어하고 물도 싫어합니다. 책은 따스함과 시원함은 좋아하지만, 불과 물은 반기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책이 된 나무도 흙땅에 뿌리를 내려 살아갈 적에 숲에 불이 나거나 큰물이 지면 달갑지 않아요.


  들풀도, 벌레도, 사람도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불을 여러모로 살려서 문명과 문화를 일구는 사람이라 하지만, 불길 치솟는 전쟁과 싸움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됩니다. 가뭄이 들거나 큰물이 질 때면 사람들 삶터 또한 무너집니다. 그렇다고, 냇바닥을 시멘트로 바꾸고 냇둑 또한 시멘트로 높이 쌓는 일이 사람들 삶터를 지키지 않아요. 시멘트 울타리 세우는 댐에 물을 가두어 시멘트관으로 물줄기 이어 도시를 먹여살리려 한대서 사람들 삶터를 살찌우지 못합니다. 흐르는 냇물이 숲을 살찌우고 사람을 살찌웁니다. 맑게 흐르고, 구비구비 흐르는 물줄기가 흙을 살리며 사람을 살리지요.


  비가 내리는 날 헌책방골목은 빗물에 젖습니다. 헌책방골목 길바닥은 깔끔한 돌로 바꾸었으나, 지붕은 따로 없어, 비 내리는 날이면 가게마다 해가리개를 길게 늘어뜨리거나 잇습니다. 해가리개 사이사이 빗물이 흐르고, 빗물이 길바닥에 덜 튀도록 양동이를 댑니다. 빗물이 덜 튀어야 책이 덜 다치겠지요. 비 내리는 날에는 하는 수 없이 비닐로 책을 덮고, 비닐로 책을 덮으면 책이 잘 안 보이며, 책이 잘 안 보인대서 비닐을 함부로 걷으면 책들이 빗물에 젖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책을 바깥으로 내놓지 않으면 골마루가 책더미에 쌓여 드나들기 어렵습니다. 헌책방은 책을 들이고 내놓는 품을 들이면서 하루를 열고 닫습니다. 비가 안 오면 시골마을을 걱정하고, 비가 내리면 책을 걱정합니다.


  비 내리는 날 책방마실 하는 책손은 어느 곳에서 발걸음 멈추고 우산을 끌까요. 비 내리는 날 책방마실 누리는 책손은 어느 책 하나 살포시 가슴에 안으며 빗물내음과 함께 책내음을 마실까요. 4346.6.2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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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르는 책

 


  ‘남 눈’으로 바라보면 ‘남 흉내내는 그림’을 그려요. ‘남 눈’으로 헤아리면 ‘남 따라하는 글’을 써요. ‘남 눈’으로 돌아보면 ‘남 꽁무니 좇는 사진’을 찍지요. ‘남 눈’에 휘둘리면 ‘남이 만든 울타리’에 갇혀 내 삶을 잃어요.


  ‘내 눈’으로 바라보면 ‘내 이야기 담은 그림’을 그려요. 그림솜씨가 떨어지더라도 언제나 ‘내 그림’ 되어요. 그럴듯한 작품이나 이름값 얻는 작품이 안 되더라도, 내 사랑 실은 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내 눈’으로 헤아리면 ‘내 삶 보여주는 글’을 써요. 글솜씨나 글재주는 없어도 돼요. 글솜씨나 글재주를 키우지 않아도 돼요. 내 삶을 밝히는 글을 쓰면서 글빛을 북돋우면 즐거워요. 내 삶을 사랑하는 글을 쓰면서 글넋을 살찌우면 기뻐요.


  ‘내 눈’으로 돌아보기에 ‘내 마음빛 아로새기는 사진’을 찍습니다. 빛과 그림자로 일구는 사진에 내 삶빛과 삶그림자를 담습니다. 내 눈은 내 눈빛을 밝히고, 내 눈은 내 손길을 어루만집니다. 내 눈은 내 눈길을 넓히고, 내 눈은 내 손빛에 웃음노래를 드리웁니다.


  남이 골라 주는 책이 아닌, 내가 고르는 책을 읽습니다. 남이 추천하거나 칭찬하는 책이 아닌, 내 마음에 와닿는 책을 읽습니다. 남들이 많이 읽는다는 책이 아닌, 내가 즐겁게 읽을 책을 고릅니다. 내 삶을 밝힐 책을 생각하고, 내 삶을 일구는 밑거름이 될 책을 헤아리며, 내 삶을 사랑하는 눈길 어루만지는 책을 살핍니다.


  내가 고르는 책은 내가 가는 길입니다. 내가 고르는 책은 내가 사랑하는 삶입니다. 내가 고르는 책은 나와 어깨동무하는 이웃입니다. 내가 고르는 책은 내 꿈이 드리우는 쉼터입니다. 내가 고르는 책은 곱게 빛나는 웃음꽃입니다. 내가 고르는 책은 즐겁게 노래하는 마음씨앗입니다. 4346.6.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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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모모 2013-06-23 03:39   좋아요 0 | URL
깨침을 주는 글 감사합니다. (__)
'내 눈'으로 보아야 '내 마음'으로 들어오고 '내 삶'이 되는군요.

숲노래 2013-06-23 07:34   좋아요 0 | URL
어느 책이든 스스로 살피고 헤아리며
가장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 느껴
즐겁게 읽으면 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