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6) -의 : 피망의 쓴맛

 

“피망의 쓴맛을 제거하는 방법?”
《오자와 마리/노미영 옮김-은빛 숟가락 (1)》(삼양출판사,2012) 92쪽

 

  “제거(除去)하는 방법(方法)”은 “없애기”나 “빼기”나 “지우기”로 손봅니다. “없애는 방법”이나 “빼는 법”처럼 손볼 수 있습니다만, 단출하게 적을 때에 한결 나으리라 느껴요.

 

 피망의 쓴맛을 제거하는
→ 피망에서 쓴맛을 빼는
→ 피망 쓴맛을 없애는
→ 피망 쓴맛 없애는
 …

 

  한국말은 토씨를 줄이거나 덜어도 뜻과 느낌이 살아납니다. 토씨 하나 줄이면서 새 맛이 나고, 토씨 하나 덜며 새 이야기 샘솟아요. 먼저 ‘-의’에서 홀가분해야 할 노릇인데, 한국말 무늬와 결을 살찌우거나 살리는 길을 슬기롭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4346.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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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망 쓴맛 없애기?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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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가운 상말
 610 : 여여부동

 

소리나 빛을 향한 내 성품이 너, 나의 구별이 없는 여여부동한 마음자리였으면
《김수우-百年魚》(심지,2009) 41쪽

 

  “빛을 향(向)한”은 “빛을 마주한”이나 “빛을 바라보는”이나 “빛 앞에 선”으로 다듬고, ‘성품(性品)’은 ‘마음씨’나 ‘마음결’이나 ‘됨됨이’나 ‘몸가짐’이나 ‘마음가짐’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아니, 예부터 이처럼 말했습니다. “너, 나의 구별(區別)이 없는”은 “너, 나로 가르지 않는”이나 “너, 나를 나누지 않는”이나 “너, 나 사이에 금을 안 긋는”으로 손볼 만해요. “너와 내가 따로 없는”이나 “너와 내가 하나인”이나 “너와 내가 함께 있는”처럼 적어도 잘 어울립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여여부동’이라는 낱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낱말은 한국말도 아니지만, 한국사람이 쓸 만한 한자말도 아닙니다. 중국말이거나 다른 바깥말이에요. 불교에서는 ‘여여부동(如如不動)’이라는 사자성어를 “마음이 주변 상황에 자극 받지 않고 항상 늘 원만하고 자유롭게”를 뜻하는 자리에 쓴다고 합니다. 곧, 이 사자성어를 한국말로 옮긴다면 ‘한결같이’나 ‘꾸준하게’쯤 돼요.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한겨레는 예부터 익히 ‘한결같이’라든지 ‘꾸준하게’처럼 말했어요. 한겨레가 ‘여여부동’처럼 말할 일은 없었어요. 불교를 파고드는 이들은 이런 한자말을 썼다지만, 처음 불교를 책에 적바림한 나라에서 한자말을 썼다 하더라도, 이 ‘한자로 지은 책’을 한국으로 받아들여 널리 퍼뜨리려 하던 사람들은 ‘한겨레가 쓰는 여느 말’로 불교 이야기를 옮겨서 나누어야 올발라요.

 

 여여부동한 마음자리였으면
→ 한결같은 마음자리였으면
→ 곧은 마음자리였으면
→ 올곧은 마음자리였으면
→ 곧고 바른 마음자리였으면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서로서로 아름답게 쓸 말을 주고받아야지 싶습니다. 학문으로나 역사로나 다 함께 즐거이 나눌 말을 일구어야지 싶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보드라운 마음자리”나 “살가운 마음자리”나 “사랑스러운 마음자리”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너와 나를 따로 나누지 않는 마음자리라 할 때에는 “따스한 마음자리”나 “어여쁜 마음자리”나 “환한 마음자리”나 “맑은 마음자리”라고 나타낼 수 있어요.


  생각 한 줄기 가다듬으며 말 한 줄기 가다듬습니다. 마음 한 자락 추스르며 말 한 자락 추스릅니다. 4346.1.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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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나 빛을 바라보는 내 마음결이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한결같은 마음자리였으면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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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276) 천하의 1 : 천하의 남사고도

 

천하의 남사고도 어쩔 수 없죠? 다른 사람의 묏자리는 잘 보면서 정작 자신의 아버지 묏자리는 제대로 보지를 못하니 말예요
《강난숙-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지혜롭게 살았을까?》(청년사,2008) 23쪽

 

  “다른 사람의 묏자리”는 “다른 사람 묏자리”로 다듬습니다. “자신(自身)의 아버지 묏자리”는 “제 아버지 묏자리”로 다듬어 줍니다.


  한자말 ‘천하(天下)’는 “(1) 하늘 아래 온 세상 (2) 한 나라 전체 (3) 온 세상 또는 한 나라가 그 정권 밑에 속하는 일 (4) (일부 명사 앞에 쓰이거나 ‘천하의’ 꼴로 쓰여) 매우 드물거나 뛰어나서 세상에서 비길 데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뜻한다고 합니다. 토씨 ‘-의’를 붙이는 말꼴은 넷째 뜻으로 쓰는 셈입니다.


  그런데, “천하를 다스리다”라 해도 나쁘지 않지만, “온누리를 다스리다”라 하면 한결 낫다고 느낍니다. “공산당 천하”라면 “공산당 판”이나 “공산당 누리”나 “공산당 나라”처럼 적을 수 있겠지요.

 

 천하의 남사고도
→ 내로라하는 남사고도
→ 온누리에 비길 바 없는 남사고도
→ 묏자리 잘 보는 남사고도
→ 그 잘난 남사고도
→ 그 똑똑한 남사고도
 …

 

  온누리에 비길 데가 없는 사람이라면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둘도 없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놓고 “그 잘난”이라든지 “그 똑똑한”이라든지 “그 대단한”을 꾸밈말로 넣어도 어울립니다. 보기글에서는 묏자리를 잘 보는 사람을 이야기하니, “묏자리 잘 보는 아무개”라고 적어도 됩니다.

 

 천하 갑부 → 알아주는 갑부
 천하 절경 → 끝내주는 모습
 천하의 명기 → 아주 훌륭한 기생
 천하의 못된 놈 → 더없이 못된 놈

 

  한자말이건 한국말이건, 쓰는 만큼 더 익숙하게 쓸 수 있습니다. 마음을 기울이는 대로 더 잘 쓸 수 있습니다. 한자말 ‘천하’를 써 버릇하면 토씨 ‘-의’가 자꾸 달라붙습니다. 어떤 말씨로 생각을 드러내느냐에 따라, 삶이 차츰 달라지는 줄 느낄 수 있기를 빌어요. 4341.3.21.쇠./4346.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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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똑똑한 남사고도 어쩔 수 없죠? 다른 사람 묏자리는 잘 보면서 정작 제 아버지 묏자리를 제대로 보지를 못하니 말예요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305) 천하의 2 : 천하의 파인만 씨에게도

 

천하의 파인만 씨에게도 중년의 위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북새통》 67호(2008.4.) 28쪽

 

  “중년(中年)의 위기(危機)는”은 “아찔한 중년”이나 “아슬아슬한 중년”이나 “흔들리는 중년”으로 다듬으면 어떠할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썩 내키지 않습니다. ‘중년’이 한 사람한테 어느 나이 때인가를 헤아려 봅니다. 나이 마흔을 넘기는 때부터 쉰 살 언저리입니다. 흔한 말로 “꺾이는 나이”가 한자말 ‘중년’으로 가리키는 때입니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는 “파인만 씨도 나이가 꺾이니 위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나 “파인만 씨한테도 꺾이는 나이에는 위기가 어김없이 찾아왔다”로 손보면 어떨까 싶군요.

 

 천하의 파인만 씨에게도
→ 한결같던 파인만 씨한테도
→ 거침없던 파인만 씨한테도
→ 잘나가던 파인만 씨한테도
→ 훌륭한 파인만 씨한테도
 …

 

  보기글에 나오는 ‘천하의’는 거침이 없거나 씩씩하거나 당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키지 싶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뜻과 느낌 그대로 적을 때에 가장 알맞습니다. 통째로 고쳐쓸 수 있겠지요. “한결같던 파인만 씨한테도 중년이라는 위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나 “거침없던 파인만 씨한테도 꺾이는 나이에는 위기가 어김없이 찾아왔다”로. 4341.4.11.쇠./4346.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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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던 파인만 씨도 꺾이는 나이는 어김없이 위기였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7) 천하의 3 : 천하의 나쁜 놈

 

혹시 누군가 내 머릿속을 열고 들여다보면 천하의 나쁜 놈이라고 욕할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죠
《노을이-10대와 통하는 성과 사랑》(철수와영희,2012) 59쪽

 

  ‘혹시(或是)’는 ‘아마’나 ‘어쩌면’이나 ‘문득’이나 ‘이를테면’으로 손볼 수 있어요. 이야기 나누는 흐름을 살펴 알맞게 손봅니다. “욕(辱)할 것 같아”는 흔히 쓰는 말투로 여겨 그대로 둘 수 있지만, “나무랄 듯해서”나 “꾸짖을까 봐”나 “손가락질하겠다 싶어”로 손질하면 한결 나아요. 국어사전 말뜻을 살피면 ‘욕’은 “아랫사람의 잘못을 꾸짖음”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한국말로 쉽고 알맞게 하면 됩니다. “마음이 불편(不便)하죠”는 “마음이 안 좋지요”나 “거북하지요”나 “꺼림칙하지요”로 다듬습니다.

 

 천하의 나쁜 놈이라고
→ 천하에 몹쓸 놈이라고
→ 이 나쁜 놈이라고
→ 이런 나쁜 놈이라고
→ 몹시 나쁜 놈이라고
→ 대단히 나쁜 놈이라고
 …

 

  이 보기글은 겉으로는 한국말처럼 보이지만, 조금도 한국말이 아닙니다. “천하의 나쁜 놈” 같은 말투는 일본 말투입니다. 일본사람이 쓰는 말투를 껍데기만 한글로 적은 모습입니다. 토씨 ‘-의’ 넣은 자리를 고쳐 “천하에 나쁜 놈”처럼 적으면 그나마 한국말 맛이 살짝 난다 할 텐데, 이나마 헤아릴 수 있는 한국사람은 차츰 줄어듭니다.


  “세상에 이런 나쁜 놈이 다 있나”처럼 말하고, “이 벌건 대낮에 무슨 짓이람”처럼 말합니다. 이 보기글처럼 쓰는 자리에 한국사람은 ‘-에’를 넣습니다. ‘-의’를 넣지 않아요.


  글흐름을 더 헤아리면, ‘천하의’는 꾸밈말 구실을 합니다. 나쁜 놈을 말하는데, 어떻게 나쁘다 하는 뜻을 북돋우는 구실입니다. 그래서 ‘몹시’나 ‘매우’나 ‘아주’나 ‘참말’이나 ‘대단히’나 ‘무던히’ 같은 낱말을 넣으면 잘 어울립니다. ‘이’나 ‘이런’이나 ‘이렇게’나 ‘이다지도’나 ‘이 따위로’ 같은 말마디를 넣어도 썩 어울려요.


  이런 말투 저런 말씨 그런 낱말을 찬찬히 헤아리지 않으면 ‘-의’ 말씀씀이는 단단히 들러붙어요. 스스로 아름답게 쓰려고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 말투는 아름답게 거듭나지 못해요. 스스로 곱게 추스르려고 힘쓰지 않으면, 우리 말씨는 곱게 빛나지 못해요. 4346.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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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누군가 내 머릿속을 열고 들여다보면 아주 나쁜 놈이라고 나무랄 듯해서 거북하지요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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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 짓는 애틋한 틀
 (313) 덧- : 덧밀가루

 

“잠깐, 여러 장 달라붙었잖아. 덧밀가루 뿌렸어?”
《오자와 마리/노미영 옮김-은빛 숟가락 (1)》(삼양출판사,2012) 53쪽

 

  만화책을 읽다가 문득 멈춥니다. 어, ‘덧밀가루’라는 말이 있나? 국어사전을 들춥니다. 국어사전에는 ‘덧밀가루’라는 낱말이 안 나옵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쓴 적도 없습니다. 만두를 빚을 적에 우리 어머니는 늘 “밀가루를 뿌리라.”고만 하셨지 “덧밀가루를 뿌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덧밀가루’라 한다면, “덧붙이는 밀가루”인 셈이요. 하지 않아도 될 만하지만, 부러 더 놓거나 쓰는 밀가루라 할 만합니다. 그래서, 만두를 빚으면서 도마에 밀가루를 뿌린다든지, 만두껍질을 편다든지, 다 빚은 만두를 쟁반에 올린다든지, 이런저런 자리에 밀가루를 ‘더 뿌린다’고 할 적에 쓰는 낱말로 잘 어울립니다. 참 알맞다 싶은 낱말입니다.

 

 덧말 . 덧글 . 덧이야기
 덧셈 . 덧생각 . 덧마음
 덧일 . 덧돈 . 덧손

 

  무언가 더한다고 할 때에는 ‘덧-’을 앞가지로 삼을 수 있습니다. ‘덧셈’ 같은 낱말을 빼고는 국어사전에조차 안 실린다 할 텐데, 국어사전에 실리고 말고를 떠나, 이러한 낱말을 알맞게 쓸 만하다면 쓸 노릇입니다. 인터넷에서는 ‘댓글’이나 ‘덧글’ 같은 말마디를 즐겁게 쓸 수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마친 다음, 따로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덧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생각을 더하며 ‘덧생각’이 되고, 모자라다 싶은 돈이든 넉넉하다 싶은 돈이든, 여기에 조금 더 보태고 싶은 돈이면 ‘덧돈’이 돼요. 일손이 넉넉하다 하더라도 내 손길을 보태면 ‘덧손’이 됩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한다면, ‘덧노래’ 같은 낱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노래잔치를 하면 으레 ‘앵콜(encore)’을 외쳐요. 표준말로는 ‘앙코르’요, 줄여서 ‘앙콜’처럼 쓰기도 한다는데, 표준말 아닌 ‘앵콜’을 참 많이 씁니다. 요즈음은 ‘한 번 더’ 같은 말을 외치기도 하지요.


  노래를 듣는 쪽에서는 ‘한 번 더’ 하고 외칠 만합니다. 그러면, 노래를 부르는 쪽에서는? 노래를 부르는 쪽에서도, “자, 그러면 ‘한 번 더’ 부르겠습니다.” 하고 말할 만하지요. 그런데 으레 ‘앵콜곡(앙콜곡)’이라고 덧붙여요.


  노래잔치 나누는 자리에서는 ‘덧노래’를 부른다 할 수 있습니다. 노래를 다 불르서 마치는 자리에, 노래 한두 가락을 더하니까 ‘덧노래’입니다. 어떤 상을 주는 자리에서, 상을 받은 기쁨을 말한 다음, 몇 마디 더하고 싶으면 ‘덧말’을 한달 수 있겠지요. 글월 한 쪽 띄울 때에는 흔히 ‘추신(追伸)’이라는 한자말을 쓰곤 하지만, 한국사람 한국말로는 ‘덧말’입니다.


  저마다 한 숟가락씩 덜어 새로 밥 한 그릇 이루는 일을 가리켜, 한자말로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 하지만, 이 또한 ‘덧밥’인 셈이에요. 조금씩 나누어 보태는 밥이거든요.


  생각을 더하고 더해서, 곧 생각 한 자락에 덧생각 하나를 얹어, 말삶과 글삶을 북돋웁니다. 아름다이 기울이는 마음에 따스한 마음을 살며시 보태어, 덧마음을 넉넉히 주고받습니다. 4345.12.3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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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5) -의 : 말의 바탕

 

이것은 자기 나라 글자인 ‘가나’와 우리 나라 글자 ‘한글’이 전혀 다른 말의 바탕에서 생겨난 글자임을 모르고 하는 말이고, 남의 나라 말글에 철없는 입놀림을 하는 짓이라고 본다
《이오덕-우리 문장 쓰기》(한길사,1992) 426쪽

 

  “자기(自己) 나라”는 “제 나라”로 손보고, ‘전(全)혀’는 ‘아주’나 ‘무척’이나 ‘매우’로 손봅니다. “글자임을 모르고”는 “글자인 줄 모르고”로 손질합니다. “남의 나라 말글”은 “다른 나라 말글”로 손질하면 됩니다. 찬찬히 손보고 손질하면서, 글과 말을 한껏 빛낼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말의 바탕에서 생겨난
→ 아주 다른 말에서 생겨난
→ 몹시 다른 바탕에서 생겨난
→ 매우 다른 말바탕에서 생겨난
 …

 

  1980년대부터 우리 말글 바르게 쓰는 길을 꾸준하게 밝힌 이오덕 님은 2003년에 숨을 거두기까지 바지런히 당신 넋을 북돋았습니다. 이오덕 님이 쓴 글을 찬찬히 읽은 분들은 1980년대 글투와 1990년대 글투와 2000년대 글투가 얼마나 다른가를 환하게 헤아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더 깊이 살피는 분들은 1970년대 글투와 1960년대 글투와 1950년대 글투까지 견주며 톺아볼 수 있어요. 다만, 서른 해나 쉰 해에 걸친 글투를 살핀다 하더라도, 일부러 눈여겨보며 살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으레 ‘책에 실린 줄거리’만 좇는데 바빠, 이오덕 님이 ‘우리 말글을 알맞고 바르게 쓰자’고 외치면서 ‘이오덕 님 스스로 얼마나 당신 글을 갈고닦으며 북돋우려 힘썼는가’ 하는 대목은 놓치곤 합니다.


  서른 해나 쉰 해에 걸친 글투를 곰곰이 돌아보면, 이오덕 님은 “우리 글 바로쓰기”를 외치기 앞서, 당신 스스로 당신 글을 아주 힘을 들이고 사랑을 쏟아 가다듬거나 고쳤어요. 당신 스스로 미처 모르고 쓴 잘못되거나 아쉬운 글투는, 다음에 새 글을 쓰며 고쳤고, 당신이 쓴 글 또한 책을 새로 찍을 적마다 고쳐서 실으려고 했어요. 글은 ‘한 번 배우며 끝나’지 않거든요. 글은 태어나서 숨을 거둘 때까지 날마다 새롭게 배우거든요. 이오덕 님은 당신 스스로 예순 살이나 일흔 살에도 언제나 새롭게 배워서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삶매무새를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더러 당신 글 바로잡으라고만 외치지 않았어요. 누구보다 이오덕 님 스스로 당신 글을 바로잡으면서 깨달은 빛을 이웃사람과 뒷사람한테 나누어 주려고 했어요.


  1992년에 나온 《우리 문장 쓰기》라는 책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첫머리까지 쓴 글을 싣습니다. 이때에는 이오덕 님 글에도 군데군데 ‘-의’이 끼어듭니다. 아니, 이무렵에는 이오덕 님 스스로 ‘-의라는 토씨도 쓸 만한 자리에는 쓴다’고 여겼습니다. 때로는 아주 오래도록 쓰던 버릇이 고스란히 남기도 해요. 이를테면 “남의 나라 말글” 같은 대목인데요, 이오덕 님은 “다른 나라”라고 말하기보다 “남의 나라”처럼 말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러면 “나의 나라”라고도 쓰셨을까요? 아니에요. 이오덕 님은 ‘나의’처럼 쓰는 글투가 참 어리석다고 거듭 밝히셨어요. 그런데, ‘나’와 한짝을 이루는 ‘남’이라는 낱말에서는 조금 더 슬기롭지 못하셨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남의 나라 말글”을 벗어나 “다른 나라 말글”처럼 적거나 “이웃 나라 말글”처럼 적으면 됩니다. 더 생각을 기울이면 “이웃나라”처럼 적을 만해요. “이웃집”은 한 낱말이에요. 흔히 쓰고 널리 쓰는 ‘이웃-’은 앞가지로 삼으면 됩니다. 그러나, 국어사전을 살피면 “이웃사랑”이나 “이웃사람”을 한 낱말로 안 삼아요. 국어학자 밑생각이 깊지 못한 탓이라 할 텐데, 국어사전에 안 실린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스스로 생각을 빛내면서 “이웃돕기”라든지 “이웃나눔”이라든지 “이웃가게”라든지 “이웃노래” 같은 새 낱말을 빚으면 됩니다. “이웃땅”, “이웃밭”, “이웃마을”처럼 새 낱말을 빚을 수 있어요. 스스로 일구는 삶을 스스로 일구는 말로 꽃피우면 즐겁습니다.

 

 서로 다른 말뿌리에서 생겨난
 저마다 다른 말삶에서 생겨난
 사뭇 다른 말밑에서 생겨난

 

  이오덕 님은 “전혀 다른 말의 바탕에서 생겨난 글자”처럼 글을 쓰셨습니다. 1980년대 글투인데요, 2000년대에도 이렇게 글을 쓰셨을까 하고 생각을 기울이며 《우리 문장 쓰기》를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오덕 님 넋을 고맙게 얻을 수 있는 한편, 내 깜냥껏 내 말삶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내 말은 내가 가꾸거든요. 내 삶은 내가 가꾸거든요. 내 일도, 내 놀이도, 내 꿈도, 내 사랑도, 언제나 내가 가꿉니다. 곧, 이런 책을 읽거나 저런 강의를 듣는대서 내 지식을 살찌우지 못해요. 나 스스로 나를 가꾸려는 넋이요 몸가짐일 때에 내 삶을 가꿀 수 있어요.


  “말의 바탕”처럼 글을 쓴 까닭은 ‘말’과 ‘바탕’ 두 가지 뜻을 밝히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보기글을 살피면, ‘말’만 쓰거나 ‘바탕’만 써도 돼요. 둘 가운데 하나만 써도 이야기흐름은 살아나요. 꼭 두 낱말을 다 쓰고 싶으면 ‘두 낱말을 다 쓰면서 말흐름을 살찌울 새 모습’을 찾으면 됩니다.


  ‘말바탕’이라고 하면 돼요. 말뿌리나 말밑이라 하면 돼요. 말자취나 말흐름이나 말줄기라 할 수 있어요. 바탕이나 뿌리나 밑이나 자취나 흐름이나 줄기가 무엇인가 하고 돌아보면 ‘삶’으로 이어져요. 그래서 ‘말삶’이라는 낱말이 태어나요. 또한 ‘말사랑’이나 ‘말생각’이나 ‘말넋’이라는 낱말을 빚을 수 있겠지요.


  이오덕 님이 쓴 《우리 문장 쓰기》 같은 책을 읽는 까닭은 하나입니다. 이 책에 담긴 살가운 넋을 받아먹으면서, 나 스스로 내 넋을 북돋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오덕 님이 외친 이야기라서 무턱대고 따라야 하지 않아요. 아무리 아름다운 생각이라 하더라도 무턱대고 따를 때에는 아름다울 수 없어요. 생각을 하면서 즐겨야 아름답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외치셨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내 슬기를 빛내어 서로 아름다울 길을 찾을 때에 즐겁습니다. 4345.12.2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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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제 나라 글인 ‘가나’와 우리 나라 글 ‘한글’이 사뭇 다른 말삶에서 생겨난 줄 모르고 하는 소리이고, 이웃나라 말글에 철없이 입놀림을 하는 짓이라고 본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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