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말 바로잡기
 (1584) 주의

 

하지만 주의 깊게 들어 보면 어른한테 배운 말은 순 엉터리라는 것을 금세 알게 됩니다
《하이타니 겐지로/햇살과나무꾼 옮김-선생님, 내 부하 해》(양철북,2009) 108쪽

 

  ‘하지만’은 ‘그렇지만’으로 바로잡습니다. “어른한테 배운 말”은 “어른한테서 배운 말”로 다듬고, “엉터리라는 것을”은 “엉터리인 줄”로 다듬으며, “알게 됩니다”는 “알 수 있습니다”나 “압니다”나 “깨닫습니다”로 다듬어 줍니다. ‘금시(今時)에’를 줄여서 쓰는 ‘금세’는 즐겁게 쓸 만하지만, ‘곧’이나 ‘이내’나 ‘바로’로 손보면 한결 나아요.


  한자말 ‘주의(注意)’ 말뜻을 살펴봅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이면, “(1) 마음에 새겨 두고 조심함 (2) 어떤 한 곳이나 일에 관심을 집중하여 기울임 (3) 경고나 훈계의 뜻으로 일깨움” 이렇게 세 가지 쓰임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리값 같은 다른 한자말 ‘주의’로 ‘朱衣’는 “붉은 옷”을 뜻한다 하고, ‘周衣’는 “두루마기”를 뜻한다 하며, ‘酒蟻’는 “술구더기”를 뜻한다 하고, ‘紬衣’는 “명주옷”을 뜻한다 하는군요. 그런데, 이런 한자말 ‘주의’를 쓸 일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런 한자말을 국어사전에 실을 까닭이 없겠지요. ‘籌議’라는 한자말은 “모여서 서로 상담함”을 뜻한다고 하는데, 이런 한자말을 쓸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참말 이런 한자말은 국어사전에서 마땅히 덜어야 하고, 사람들이 슬기롭고 아름답게 살려서 쓰는 한국말을 알뜰살뜰 실어야지 싶어요.

 

 주의 깊게 들어 보면
→ 찬찬히 들어 보면
→ 가만히 들어 보면
→ 곰곰이 들어 보면
→ 마음 기울여 들어 보면
 …

 

  국어사전을 살피면, ‘주의’ 첫째 뜻 보기글로 “주의 사항”이나 “맹견 주의”나 “칠 주의”나 “주의를 시켜야겠소”가 있습니다. 둘째 뜻 보기글로 “주의가 산만하다”나 “주의를 기울이다”나 “주의를 끌다”나 “주의를 집중하다”나 “주의를 환기하다”가 있어요. 셋째 뜻 보기글로는 “주의를 받다”나 “주의를 주다”가 있어요.


  한자말 ‘주의’를 쓰는 동안 이렇게 보기글이 늘어납니다. 한자말 ‘주의’를 안 쓰던 지난날을 돌이켜봅니다. 어떤 낱말과 말투로 우리 생각 나타냈을까 차근차근 되새깁니다.

 

 살필 대목 . 살피시오 ← 주의사항
 사나운 개 있음 . 개 있음 ← 맹견 주의
 칠했음 . 페인트 발랐음 ← 칠 주의
 다짐을 시켜야겠소 . 잘 살피라 해야겠소 ← 주의를 시켜야겠소

 

  “주의가 산만한” 모습이라면, “마음이 어수선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운” 모습입니다. “주의를 기울인”다고 할 적에는 “마음을 기울인”다는 뜻이에요. “주의를 끌다” 같은 말을 쓰기 앞서 “눈길을 끌다”나 “마음을 끌다” 같은 말을 썼어요. “주의를 집중하다” 같은 말에 앞서 “마음을 모으다”나 “마음을 그러모으다” 같은 말을 썼고요.


  곰곰이 생각하면, “주의를 받다”나 “주의를 주다” 같은 말을 안 쓴 지난날에 “꾸지람을 받다”나 “꾸중을 듣다” 같은 말을 썼어요. 한자말 ‘주의’를 사람들이 차츰차츰 쓰면서 ‘꾸지람’이나 ‘꾸중’ 같은 낱말 쓰임새가 거의 사라져요. 더 생각하면, “말을 듣다”라고도 했는데, 이런 말 쓰는 어른은 요즈음 좀처럼 만날 길 없습니다.


  마음을 기울여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주 많이 줄었어요. 마음을 가다듬어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꾸 줄어요. 그러나, 앞으로는 마음을 그러모아 말을 북돋우는 사람이 차츰 태어나리라 믿어요. 어른들이 슬기롭게 말하지 못하더라도, 아이들이 슬기롭고 착하게 말길 트리라 믿어요. 아이들이 아름답고 참답게 말삶 가꾸리라 믿어요. 4346.5.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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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가만히 들어 보면 어른한테서 배운 말은 순 엉터리인 줄 곧 알 수 있습니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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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3-05-08 01:33   좋아요 0 | URL
아, 배우고 갑니다
저도 걱정이네요

숲노래 2013-05-08 07:05   좋아요 0 | URL
좋은 마음 품으면서 좋은 말 즐겁게 익혀 보셔요~
 

겹말 손질 337 : 헐뜯고 비난


모든 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죽음에 책임을 느꼈으며,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서로를 헐뜯고 비난했다
《바바라 아몬드/김진,김윤창 옮김-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간장,2013) 157쪽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는 “저도 모르게”나 “알게 모르게”나 “저절로”나 “하나둘”이나 “문득”이나 “시나브로”로 손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는 “어머니 죽음에”나 “어머니가 죽은 일에”나 “죽은 어머니한테”로 손질합니다. “책임(責任)을 느꼈으며”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짐을 느꼈으며”라든지 “저마다 잘못했다고 느꼈으며”로 다듬어도 됩니다. 바로 이어지는 글월에 ‘죄책감(罪責感)’이라는 낱말이 나와요. 그러니 앞뒷말 이으면서, “죽은 어머니한테 저마다 잘못했다고 느꼈으며, 그 잘못에서”처럼 다듬으면 한결 잘 어울립니다.


  한자말 뜻을 살피면, ‘죄책감(罪責感)’은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 보기글에서는 ‘잘못’으로 다듬을 수 있어요.


  ‘비난(非難)’은 “(1)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 (2) [북한어] 터무니없이 사실과 전혀 맞지 않게 헐뜯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곧, 한자말로는 ‘비난하다’요, 한국말로는 ‘헐뜯다’입니다.

 

 서로를 헐뜯고 비난했다
→ 서로를 헐뜯었다
→ 서로를 헐뜯고 해코지했다
→ 서로를 헐뜯고 손가락질했다
→ 서로를 헐뜯고 괴롭혔다
 …

 

  같은 낱말을 잇달아 적기보다는 ‘해코지했다’나 ‘손가락질했다’나 ‘괴롭혔다’ 같은 낱말을 뒤에 적을 때에 뜻이나 느낌이 살아납니다. 단출하게 적자면 “서로를 헐뜯었다”라고만 적으면 되고요. “서로를 헐뜯고 다투었다”라든지 “서로를 헐뜯고 미워했다”처럼 적어도 뜻이나 느낌을 살릴 수 있어요. 4346.5.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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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이들이 죽은 어머니한테 시나브로 저마다 잘못했다고 느꼈으며, 그 잘못에서 벗어나고자 서로를 헐뜯고 괴롭혔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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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468) 나중의 1 : 나중의 일

 

그가 장례식의 슬픔과 고통을 한층 더해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괴롭게 들리는 곡소리들을 개발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자케스 음다/윤철희 옮김-곡쟁이 톨로키》(검둥소,2008) 182쪽

 

  “장례식의 슬픔과 고통(苦痛)”은 “장례식을 치르는 슬픔과 괴로움”이나 “장례식을 감도는 슬픔과 괴로움”으로 손질합니다. “충분(充分)할 정도(程度)로”는 “넉넉할 만큼”으로 손보고, “개발(開發)한 것은”은 “만든 때는”이나 “지어낸 때는”으로 손봅니다.

 

 나중의 일이었다
→ 나중 일이었다
→ 나중이었다
 …

 

  오늘 일어난 일이라면 “오늘 일”입니다. 어제 일어난 일은 “어제 일”입니다. 지난해 겪은 일은 “지난해 일”이에요.

 

 지금 일 / 나중 일 / 지난해 일 / 이듬해 일 (o)
 지금의 일 / 나중의 일 / 지난해의 일 / 이듬해의 일 (x)

 

  올바르며 알맞춤하게 적을 우리 말씨와 말투를 찬찬히 헤아려 주면 좋겠습니다. 낱말과 낱말을 이어서 글월을 이룰 때에 어떤 토씨를 넣어야 올바른지를 살피고, 군더더기가 될 대목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면서 글을 잘 여미어 주면 좋겠습니다.

 

 곡소리들을 개발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 곡소리들은 나중에야 만들었다
→ 곡소리들은 나중에 가서야 만들었다
→ 곡소리들을 지은 때는 나중이었다
 …

 

 사람마다 말버릇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다른 말씨로 이야기합니다. 이렁저렁 쓰는 사이에 익숙해진 말투가 있습니다. 내 말버릇과 말씨와 말투는 잘 살리거나 지켜 주어야 할 노릇입니다. 그러나, 내 말버릇과 말씨와 말투를 살린다고 하면서, 우리 말법을 흐트리거나 깨뜨리거나 흔들게 된다면 어찌하겠는가를 생각해 볼 일입니다. 4341.7.13.해/4346.5.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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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장례식 치르는 슬픔과 괴로움을 한층 더해 주기에 넉넉하도록 괴롭게 들리는 곡소리들을 나중에 지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69) 나중의 2 : 나중의 문제

 

이 순간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계산서는 맨 나중의 문제였다
《그레그 마리노비치·주앙 실바/김성민 옮김-뱅뱅클럽》(월간사진,2013) 233쪽

 

  “이 순간(瞬間)”은 “이때에”로 손봅니다. 글흐름에서 ‘그녀(-女)’는 ‘옆지기’로 손볼 수 있고, 덜어내어 “이때에 생각할 수 있는”처럼 적을 수 있어요. ‘중(中)에서’는 ‘가운데’로 손질하고, “맨 나중의 문제(問題)였다”는 “맨 나중 일이었다”나 “맨 나중이었다”로 손질하면 ‘문제’라는 한자말을 덜 수 있어요.

 

 맨 나중의 문제였다
→ 맨 나중 일이었다
→ 맨 나중이었다
→ 맨 나중에 따질 일이었다
→ 맨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

 

  한 번 손이나 귀나 입이나 눈에 익은 말투는 오래오래 갑니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책이나 만화영화에서 “잘 가”나 “잘 있어”나 “다음에 또 봐” 같은 인사말을 들려주지 않고 “바이바이(byebye)”나 “안녕(安寧)” 같은 인사말만 들려주면,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이 같은 인사말만 익숙해요. 어른들이 “살펴 가”나 “살펴 가셔요”처럼 인사하지 않고 “조심해”나 “조심해서 가”처럼 인사한다면, 아이들은 어린 나날부터 ‘조심(操心)’이라는 한자말에만 익숙할 뿐, ‘살피다’라는 한국말을 어느 자리에 어떻게 써야 알맞을까 하는 대목을 짚지 못합니다.


  이 보기글을 살피면, 한국사람은 예부터 “맨 나중이었다”처럼 말했고, 한자말 ‘문제’를 쓰더라도 “맨 나중 문제였다”처럼 말했어요. 토씨 ‘-의’를 붙이지 않았어요. 그러나, 어른들이 자꾸 이러한 말투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글을 쓰면, 아이들은 이런 말투에 익숙해집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이런 말투를 못 듣더라도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간 뒤, 또 대학생이 되거나 어른이 된 다음 이런 말투를 둘레에서 자꾸 들으면, 시나브로 이 같은 말투에 젖어들어요.


  우리가 늘 쓰는 말투는 어릴 적부터 들은 말투이면서, 어른이 된 뒤에도 늘 듣는 말투입니다. 내가 쓰는 말투가 내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한테 스며들고, 내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이 쓰는 말투가 나한테 스며들어요. 서로 사랑스럽게 쓰는 말투라면 서로서로 날마다 사랑스러운 말투로 아름답습니다. 서로 얄궂게 쓰는 말투라면 서로서로 자꾸자꾸 얄궂게 쓰는 말투가 퍼집니다. 4346.5.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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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생각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계산서는 맨 나중이었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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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68) 변신의 1 : 변신의 시간

 

“변신의 시간이니?” 엄마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키르스텐 보이에/박양규 옮김-아빠는 전업 주부》(비룡소,2003) 52쪽

 

  같은 한자말 가운데에도 일본 한자말과 한국 한자말이 있습니다. ‘가족(家族)’이 일본 한자말이라면, ‘식구(食口)’가 한국 한자말입니다. ‘현관(玄關)’은 일본 한자말이고, ‘문간(門間)’이 한국 한자말이에요. 어차피 한자말이니 어느 쪽을 쓰든 달라질 없다 여길 수 있고, 영국사람과 미국사람이 ‘같은 영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영어를 쓰듯, 한국사람도 한국 삶자락과 알맞도록 찬찬히 가다듬을 수 있어요. 보기글에서는 “현관문을 열고”보다는 “대문을 열고”라든지 “문을 열고”라고만 적어도 됩니다.


  ‘변신(變身)’이라는 한자말을 생각해 봅니다. 이 한자말 뜻은 “몸의 모양이나 태도 따위를 바꿈”입니다. 한국말로 쉽게 풀어내자면 ‘바꿈’이거나 ‘몸바꿈’이거나 ‘모습 바꿈’입니다. 누군가는 이 같은 한자말 스스럼없이 쓸 수 있을 테지만, 누군가는 이 같은 한자말 굳이 안 쓸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한자말 없이 말삶 곱게 일구는 사람이 있고, 이러한 한자말에서 홀가분하게 풀려나며 말밭 넓고 깊게 돌보는 사람이 있어요.

 

 변신의 시간이니
→ 변신하는 시간이니
→ 바뀌는 시간이니
→ 확 달라지는구나
→ 확 달라졌는걸
→ 새 사람이 되었네
 …

 

  한자말 쓰느냐 마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한자말 ‘변신’을 쓰더라도 말틀 잘 가누면 됩니다. 곧, “변신의 시간” 아닌 “변신하는 시간”이나 “변신 시간”처럼 적으면 돼요. 말넋 고이 추스르지 못하면서 토씨 ‘-의’까지 붙이면 여러모로 얄궂습니다.


  바뀌는 모습이니 “확 바뀌었구나?”처럼 손보면 됩니다. “딴 사람이 되었네?”라든지 “멋지게 바뀌었네?”처럼 손보아도 돼요. “못 알아보겠는걸?”이라든지 “눈부시게 달라졌네?”처럼 손볼 수 있어요. 자리와 때를 살펴 말을 합니다. 흐름과 줄거리를 돌아보며 글을 씁니다. 4346.4.2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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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이 되었네?” 엄마는 문을 열고 나갔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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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결에 물든 미국말
 (675) 믹스견(Mix犬)

 

순심이는 믹스견이에요. 흔히 똥개라고 하지요
《이효리-가까이》(북하우스,2012) 190쪽

 

  ‘믹스견’이라는 낱말을 처음 마주하면서 뭔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똥개’라고 하는 낱말을 잇달아 들으면서 아하 하고 깨닫습니다. 그렇군요. 국어사전에는 안 실릴 낱말이요 영어사전에도 안 실릴 낱말이라 인터넷으로 살펴봅니다. 인터넷에서는 ‘믹스견(Mix犬)’을 “잡종견, 똥개를 순화하여 부르는 말. 영어의 ‘Mix’와 한자의 개 ‘견(犬)’의 합성어”라고 풀이합니다.

 

 순심이는 믹스견이에요
→ 순심이는 골목개예요
→ 순심이는 마을개예요
→ 순심이는 동네개예요
 …

 

  아마 ‘순종’과 ‘잡종’이라는 낱말 때문에 ‘믹스견’ 같은 낱말을 새삼스레 지으리라 생각합니다. 개라면 다 같은 개인데, 암컷과 수컷이 같은 갈래 아닌 다른 갈래끼리 붙어 낳은 개라서 조금 더 부드럽고 따스하게 가리키려고 이런 낱말을 지었구나 싶어요.


  그런데, ‘피 섞인 개’를 ‘똥개’라고 가리키는 일은 그리 알맞지 않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똥개란 똥을 먹는 개일 뿐, 피가 섞인 개를 가리킬 수 없어요. 게다가 지난날 똥개가 먹던 똥은 나쁜 똥이 아니에요. 시골마을에서 풀을 먹던 시골사람이 눈 풀똥을 먹는 개이니, 하나도 나쁠 개가 아니지요. 흙을 살리고 풀과 나무를 북돋우는 똥은 아주 값진 거름이에요. 똥오줌으로 거름을 내어 흙을 살찌워 씨앗을 심고 거두니,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눈 똥을 다시 먹는 셈입니다. 똥개만 똥을 먹지 않아요.


  곧, ‘믹스견’이라 한다면 ‘똥개’를 조금 더 부드럽게 가리키는 낱말이라고 여길 수 없어요. 한자말 ‘잡종(雜種)’을 부드럽게 가리키자 하는 낱말로 여겨야 할 뿐입니다.


  한국말에는 피 섞인 짐승을 가리키는 낱말이 따로 한 가지 있어요. 바로 ‘튀기’입니다. ‘튀기’는 ‘특이’라는 옛말이 꼴을 달리한 낱말이요, 이 낱말은 “수말과 암소, 수소와 암말 사이에 태어난 짐승”을 가리킨다고 해요. 그래서, 버새나 노새 같은 짐승이 바로 ‘튀기’입니다. 무언가를 깎아내리는 낱말이 아니고, 그저 ‘갈래 다른 짐승이 만나 태어난 짐승’을 가리키는 낱말일 뿐이에요.


  더 따진다면, 짐승을 가리킬 때에 쓰는 낱말이니, 이 낱말을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 쓰면 얄궂을 수 있겠지요. 다만, 누군가를 비아냥거리거나 깎아내리려는 뜻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을 가리켜 ‘꽃’이라고도 하고 ‘나무’라고도 합니다. 사내를 가리켜 ‘수컷’이라고도 하고 가시내를 가리켜 ‘암컷’이라고도 해요. ‘새끼’는 짐승이 낳은 어린 목숨을 가리키는 낱말이에요. 그런데 ‘새끼’라는 낱말을 “아이구 귀여운 내 새끼”처럼 쓰기도 해요. 얄궂게 거친 말을 하면서도 쓰지만, 스스로 따사롭고 좋은 마음이라 한다면, 푸나무 가리키는 낱말이든 짐승 가리키는 낱말이든 스스럼없이 즐겁게 쓸 만해요.


  안타깝다면, ‘튀기’라는 낱말, 곧 짐승 가리키는 이 낱말을 한겨레가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서 쓸 적에 얄궂은 마음이 되기 일쑤라, 자칫 이웃을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리는 일이 생기고 말아요.

 

― 골목개, 마을개, 시골개, 동네개, 길개(길강아지)

 

  영어와 한자말 섞은 ‘믹스견’ 같은 낱말을 쓰려 한다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쯤 곰곰이 생각을 기울이면 더 좋겠어요. 더 부드럽고, 더 알맞으며, 더 쉽고, 더 따사롭게 가리킬 만한 이름 하나 즐겁게 빚도록 마음을 기울이면 한결 나으리라 느껴요.


  길에서 살아가기에 ‘길고양이’이듯, 개한테도 ‘길개’라 할 수 있습니다. ‘길개’라는 낱말 느낌이 썩 내키지 않다면 ‘길강아지’라 할 수 있어요. 골목고양이나 시골고양이나 마을고양이처럼, ‘골목개’나 ‘시골개’나 ‘마을개’ 같은 이름을 써도 잘 어울려요. 굳이 ‘피가 섞였느냐 안 섞였느냐’를 따지려 한다면, 말 그대로 ‘섞이다’라는 낱말을 쓰면 돼요.


  스스로 꾸밈없는 마음 되어 꾸밈없는 말을 나누면 좋겠어요. 스스로 따사로운 마음 되어 따사로운 말을 주고받으면 좋겠어요. 4346.4.2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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