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마흔 해 남짓 살며 광주에서 언제 하룻밤을 묵었을까. 안골에 깃든 길손집에 깃들어 따뜻하게 난다. 이 길손집에 꽤 많은 이들이 다녀갔겠지. 저마다 새 이야기를 찾아 이 자리를 거쳤을 테지. 고흥을 떠난 시외버스는 주암못 둘레를 구비구비 돌았고,  오늘 다시 그 길을 구비구비 돌겠구나. 광주에 닿은 뒤에는 택시를 타고 자가용을 얻어타고 예쁜 밥집과 찻집에 들면서 이곳 바람을 쐰다. 서른 몇 해 앞서 군사쿠테타는 왜 다시 일어났을까. 서울에서는 그 많은 똑똑한 사람과 힘이랑 돈이 있는 참말 그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꿈으로 가득한 평화 평등 자유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을까. 광주시외버스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계림동 쪽으로 달리다가 비탈진 골목 한켠에 비탈밭을 정갈히 가꾼 모습을 보았다. 재개발을 들이대고 돈을 밀어붙이면 번듯해 보이는 건물이 설 테지만, 흙과 풀과 나무가 죽는다. 돈과 권력이 아무리 대단해 보인들, 숨을 못 쉬면 다 죽는다. 숨을 쉬도록 숲과 시골이 있어야 하고,  도시에도 숲과 들이 우거져야 비로소 숨을 쉰다. 사람들이 책을 자꾸 안 읽는 까닭은 숲을 모르고 시골과 등지기 때문이지 싶다.  삶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사랑을 알겠으며, 어찌 꿈을 노래하겠는가. 4348.1.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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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하는 책읽기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책을 살핍니다. 내가 생각하는 결에 따라 내 마음으로 이런 책과 저런 책이 찾아옵니다. 나는 내 생각을 살찌우는 책을 만나고, 내 생각을 살찌우는 책은 다시금 새롭게 녹아듭니다.


  내 이웃과 동무는 저마다 이녁이 생각하는 대로 책을 헤아립니다. 내 이웃과 동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결에 따라 이녁 마음으로 이런 책과 저런 책이 찾아가지요. 내 이웃과 동무는 이녁 생각을 살찌우는 책을 만나고, 이녁 생각을 살찌우는 책은 다시금 새롭게 스며듭니다.


  내 생각이 ‘내가 읽을 책’을 부르고, 내가 읽는 책에 따라 내 삶은 ‘내 생각과 닮은’ 길을 걷습니다. 이렇게 천천히 내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내가 처음에 바란 꿈하고 가까워질 테지요. 시나브로 내 꿈을 내 손으로 하나씩 이룰 테지요.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거나 바라는 대로 책을 읽습니다. 스스로 생각을 넓히는 사람은 온갖 책을 넓게 읽습니다. 스스로 생각을 깊게 파헤치는 사람은 깊게 파고드는 책을 읽습니다. 바쁜 사람은 바쁜 겨를에 훑을 만한 책을 읽습니다. 느긋한 사람은 느긋하게 돌아볼 만한 책을 읽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면서 하루를 짓는 사람은 아이와 함께 하루를 짓는 이야기가 흐르는 책을 읽습니다. 지구별과 얽힌 수수께끼를 풀면서 삶을 빛내는 슬기를 헤아리고 싶은 사람은 이러한 실타래를 푸는 책을 하나둘 만납니다. 생각대로 짓는 삶이고, 생각대로 찾아서 읽는 책입니다. 4348.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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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앓으며 스스로 읊은 말


  얼마 앞서 크게 몸살이 나면서 마음속으로 세 가지를 그렸습니다. 그때에는 “옳고 바르며 아름답게”였습니다. 어제와 오늘 다시 크게 몸살이 나는 동안 마음속에 다시 세 가지를 그렸어요. 어제는 끙끙 앓고 누운 자리에서 “튼튼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게”였습니다. 끙끙 앓을 적마다 온몸에서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는구나 하고 느끼는데, 이 기운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릅니다. 다만, 아프기 앞서까지 나를 둘러싼 기운이 하나둘 사그라들면서 없어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열흘쯤 앞서 앓던 때에 나를 둘러싼 꽤 많은 기운이 사그라들었는데 어제오늘 앓으면서 아직 나한테 남은 여러 기운이 꽤 많이 사그라든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아직 모든 기운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고 느낍니다. 앞으로 더 앓고 다시 앓으면서 찌끄레기를 털리라 느낍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늘 읊으면서 아로새길 이야기가 온몸을 감싸는 기운이 되도록 새롭게 앓고 다시 일어나기를 되풀이하겠구나 싶습니다. 아프면서 자라는 아이들처럼, ‘몸 나이로 마흔 살 넘은 아기’가 ‘첫걸음부터 다시 떼는 아기’로 돌아가려는구나 싶습니다. 4347.12.3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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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람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말을 씁니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을 따로 ‘한국말’이라고 여기는 때는 드뭅니다. 나는 그저 ‘말’을 한다고 느낍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땅’에서 산다고 할 만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산다고 느끼기보다는 ‘내 보금자리’에서 산다고 느낍니다.


  남녘에서는 ‘한국’이라는 이름을 쓰고 북녘에서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사는 한겨레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거나 ‘고려’라는 이름을 씁니다. 모두를 아우를 만한 이름이라면 ‘한겨레’일 텐데, 정작 ‘한겨레’라는 이름을 널리 쓰려는 몸짓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굳이 이런 나라나 저런 겨레라고 이름을 꼭 붙여야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틀이나 무리에 깃들어서 삶을 일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는 우리 삶을 가꾸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서로 사귀거나 가리키거나 부를 적에는 ‘이웃’이나 ‘동무(벗)’라는 이름을 쓰면 넉넉하리라 느낍니다. 지구라는 별에서 함께 사는 지구이웃이요, 지구벗입니다.


  우리는 ‘한국 문화’나 ‘조선 미술’을 살필 일이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그저 ‘삶’을 헤아리고 ‘그림’을 즐긴다고 느낍니다. ‘한국 역사’도 아니라 ‘삶자취’요, ‘한국 문학’도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냥 사람’입니다. 내 이웃도 ‘그냥 사람’입니다. 서로 오붓하게 만나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함께 춤추고 노래하면서,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두레를 합니다. 4347.12.3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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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와 가시내 책읽기



  일곱 살 큰아이와 네 살 작은아이가 면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 놀이터에 나들이를 가서 한참 논다. 이제 작은아이가 졸릴 때가 가깝구나 싶어서 짐을 꾸리려는데,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 둘이 놀이터로 자전거를 타고 온다. 하나는 여덟 살이고 다른 하나는 아홉 살이다. 아홉 살인 아이가 우리 집 네 살박이를 바라보면서 “너 남자야, 여자야?” 하고 묻는다. 우리 집에서는 도무지 안 쓰는 말이니 네 살박이 작은아이는 이 말을 알아듣지 않는다. 옆에서 일곱 살박이 큰아이가 “보라는 남자야.” 하고 말을 거드는데, 이때에 네 살박이 작은아이가 “나는 보라야!” 하고 크게 외친다.


  큰아이가 네 살 무렵일 적에도 큰아이를 보고 ‘사내’인지 ‘가시내’인지 묻는 사람이 참 많았다. 그게 그렇게 대수로운가? 그걸 그렇게 알고 싶은가? 아이들 성별을 물을 적에 나는 웬만해서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대꾸할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에 큰아이는 스스로 “나는 사름벼리예요!” 하고 외쳤다. 큰아이는 그림책이나 만화책이나 만화영화에서 ‘어른들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가르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에 이제는 ‘남자·여자’라는 낱말을 안다. 우리 집에서는 사람을 구태여 사내와 가시내로 나누지 않지만, 사회에서는 사람을 늘 둘로 쪼갠다.


  사회에서 사람을 사내와 가시내로 쪼개거나 가르는 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저 쪼개거나 가르는 일일 뿐이다. 그러면, 사회에서는 사람을 왜 둘로 쪼갤까? 사람을 둘로 쪼개면서 두 갈래 사람을 서로 섬기거나 아끼거나 모시거나 사랑하려는 뜻인가? 사람을 두 가지로 가르면서 두 가지에 따로 서는 사람을 높이거나 보살피거나 좋아하려는 뜻인가?


  평화나 평등으로 나아가려는 뜻에서 사내와 가시내를 가른다면 재미있거나 즐거울 만하리라 본다. 그러나, 사회나 언론이나 교육이나 문화나 예술이나 정치나 경제에서 가르는 잣대는 ‘평화가 아니’고 ‘평등이 아닌’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느낀다.


  우리는 그저 ‘사람’을 보면 된다. 사내나 가시내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사람’을 보면 된다. 어린이나 어른이 아니다. 젊은이나 늙은이도 아니다. 모두 그저 ‘사람’이다. 대추나무를 알아보고 잣나무를 살필 줄 아는 눈은 반갑다. 그러나 대추나무도 나무요 잣나무도 나무이다. 사내와 가시내를 가려서 보려 한다면, 먼저 둘 모두 오롯이 사람인 줄 바라보면서 살가이 아낄 수 있는 마음이 되기를 빈다.


  그런데, 고작 아홉 살짜리 아이가 읊는 “너 남자야, 여자야?”를 놓고 시시콜콜 따지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이 아홉 살짜리 아이는 벌써 ‘옷차림’이나 ‘머리카락 길이’나 ‘입은 옷 빛깔’만 놓고서 사내와 가시내를 갈라야 한다는 ‘강박관념·고정관념·선입관’이 박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4347.12.2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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