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진은 ‘찰칵(스냅)’입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119] 김태한, 《김태한 사진집》(열화당,1993)

 


  모든 사진은 ‘찰칵(스냅)’입니다. ‘스냅사진(snap寫眞)’ 말풀이를 찾아보면 “변화하는 장면을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고 재빨리 촬영하여 기록한 사진”이라고 하는데, 이 말풀이를 따르든 안 따르든 어떠한 사진이든 ‘찰칵(스냅)’이 아닐 수는 없습니다.


  어느 사진은 ‘찰칵(스냅)’이 아니기도 하다고 여긴다면, 왜 어느 사진은 ‘찰칵(스냅)’이 아닌가를 가만히 따져 보셔요.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 왜 모든 사진이 ‘찰칵(스냅)’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헤아려 보셔요.


  먼저, 말풀이대로 생각합니다. ‘달라지는 모습을 따로 꾸미지 않고’ 찍는 사진이 스냅사진이라 하는데, 어떤 모습을 연출한다(꾸민다) 하더라도 사진으로 찍으려 하는 사람은 ‘연출한 모습 가운데 어느 한 가지’입니다. 곧, 스스로 찍으려 하는 모습에서 벗어나도록 연출할(꾸밀) 수는 없어요. 스스로 연출한 모습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이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재빨리 찍’습니다. 다만, 누군가는 ‘재빨리 찍’는 겨를이 1초일 수 있고 1시간일 수 있어요. 하루나 이틀이 걸릴 수도 있겠지요. 열 해나 서른 해를 기다려 사진 한 장 얻는 이가 바라보기에는 1시간을 기다리든 하루를 기다리든 ‘아주 짧은 겨를’입니다. 곧, 어떻게 찍든 모든 사진은 ‘재빨리’ 찍는 사진이요, ‘내가 찍고 싶은 모습에서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찍는’ 사진이 돼요.


  다음으로, 말풀이에서 홀가분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진이든 ‘있는 그대로’를 찍습니다. ‘없는 모습을 만들어’ 찍을 수 없어요. 내가 어떤 모습을 ‘따로 꾸민다(만든다/연출한다)고 할 때’조차, ‘꾸며진 모습 그대로’를 찍지, ‘꾸며진 모습에서 더 달라지는 모습’을 찍지는 않아요. 모델 ㄱ을 이곳에 놓고 모델 ㄴ은 저곳에 놓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놓은 모습 그대로’를 찍어요.


  곧, 어느 사진이든 그예 ‘사진’입니다. 패션사진을 찍든 다큐사진을 찍든, 모든 사진은 사진이에요. 패션사진은 다큐사진이 되기도 하고, 다큐사진이 거꾸로 패션사진이 되기도 해요.


  바라보는 눈에 따라 달라지거나 나누는 사진이 아닙니다. ‘쓰는 자리’에 따라, 이 사진은 패션사진으로 쓰고 저 사진은 다큐사진으로 쓸 뿐입니다. 이렇게 찍기에 패션사진이 아니고, 저렇게 찍어야 다큐사진이 아니에요. 어떻게 찍든 모두 ‘사진’이에요. 이렇게 찍거나 저렇게 찍거나, 어떻게든 찍은 사진을 쓰는 사람이 어느 자리에 쓰는가에 따라 ‘패션사진’이나 ‘다큐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추상사진’과 ‘구상사진’도 따로 없습니다. 스스로 찍는 사진이 추상사진이라고 말한달지라도 ‘추상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사진을 찍는 사람 눈에 구상으로 드러난 모습’이요 ‘사진을 읽는 사람 마음에 구상으로 그려지는 모습’이에요.


  추상을 찍어 추상이 아니고, 구상을 찍어 구상이 아니에요. 구상사진이 가장 추상사진다울 수 있으며, 추상사진이 가장 구상사진다울 수 있어요. 왜냐하면, 모두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김태한 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듯 내놓은 《김태한 사진집》(열화당,1993)을 읽습니다. 김태한 님은 처음 사진을 배우고 찍고 가르치고 나누려 할 때에 무척 힘들었다고 해요. 사진책 머리말에 “사진인은 방황했다.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할는지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평론가도 없었다. 선배도 수를 헤아릴 정도다. 그때 사진을 하는 사람은 한국사단이 선구자라 할 만하다. 처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은 평가받을 때가 없었다. 그래서 길은 하나였다. 그것은 해외국제사진전에 출품하여 평가를 받는 방법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어떠할까 생각해 보셔요. 오늘날 여느 어버이를 생각해 보셔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아이키우기’를 가르치는 적이 없어요. 어느 교사도 학생한테 ‘너희가 말야, 아이를 낳아서 키울 때에는 이렇게 슬기로운 길을 걸으며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아름답단다’ 하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교과서로도 없고 시험문제에도 안 나와요. 그런데, 모든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고 대학교를 마치며 회사원이 되거나 말거나 월급쟁이가 되든 가게를 차리든, 이러고서 짝꿍을 만나 아이를 낳잖아요. 사랑놀이 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나 어버이조차 없어요. 아이들은 그저 저희끼리 알음알이로 사랑놀이를 즐기다가는 아이를 낳아요. 그러고는 처음으로 ‘아이키우기’를 맞딱뜨려요. 이제는 인터넷으로 뒤질 수 있고 책을 찾아 읽을 수 있다지만, 인터넷 자료와 책이 있다 하더라도, ‘처음으로 맞딱뜨리는 아이키우기 앞에서 헤매거나 길을 잃는’ 어른들이 참 많아요. 그렇지만 다들 이래저래 용을 쓰기도 하고 애를 쓰기도 하면서 아이를 돌보고 사랑해요. 지식은 없어도 마음이 있고, 정보가 없어도 사랑이 있거든요.


  사진을 찍는 사람도 이와 같구나 싶어요. 지식으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마음으로 찍는 사진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든, 내가 꿈꾸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든, 내 마음이 움직일 때에 찍어요. 아무 때나 수도 없이 단추를 누르지 못해요.


  사진을 차츰 찍으면서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무언가 깨달아요. 아하, 사진을 찍을 때에는 내 마음이 움직여야 할 뿐 아니라, 나 스스로 사진을 좋아하고 즐길 뿐 아니라, 사진기로 바라보는 모습을 모두 사랑할 수 있어야 하네, 하고 깨달아요.


  김태한 님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진은 스냅 사진이다. 그래서 스냅 사진을 기피하였다. 이쯤 되고 보니 자기 자신의 나아갈 방향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사진만 보면 이것은 누구 사진이라는 것을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사진 경향은 추상적인 사진으로 정했다.” 하고 말합니다.

 


  열 아이를 낳을 때에 한 아이는 싫어할 수 있을까 궁금해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모든 손가락은 저마다 사랑스럽습니다. 내 아이 모두 사랑스럽고, 이웃 아이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아는 아이들이든 내가 모르는 아이들이든 모두 사랑스러울밖에 없어요. 곧, 김태한 님이 스냅사진을 싫어한다고 대놓고 말한다 하더라도 ‘정작 싫어할’ 수는 없어요. 모든 사진이 ‘찰칵(스냅)’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이렇게 밝히며 ‘추상사진’을 찍는다 하더라도, ‘찰칵(스냅)’하는 단추질 없이는 어떠한 사진도 태어나지 않아요. 복사기에 몸뚱이를 얹든 인화지만으로 사진을 만들든 ‘바로 이 한때(결정적 순간)’이 사진으로 깃들어요. 바로 이 한때에 찰칵 하고 거치지 않으면 아무런 사진이 태어나지 않아요.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진은 ‘바로 이 한때’를 찍고 ‘찰칵’으로 이루어져요.


  김태한 님은 “나는 사진의 프램 속의 세계에 집중했다. 소재로는 보통의 것, 무시된 것, 의미가 없는 것을 선택했다. 즉 벽, 거리의 보도, 철제품 등 이제까지 사람들이 애용하였으나 지금은 버려져서 돌보지 않는 것.” 하고 말합니다. 참말 적잖은 분들이 이와 같이 ‘많은 이가 등돌린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해요. ‘사람들한테서 사랑 못 받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려고 해요.


  그렇지만, 다른 이가 이런저런 등돌려지거나 사랑 못 받는 모습을 사진으로 안 찍는다고 할 적에 내가 이런저런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바로 누구보다 ‘나한테서 사랑을 받고 눈길을 받는’ 모습이 돼요. 내가 사진으로 찍으면서 ‘널리 읽히고 알려지며 사랑받는’ 모습으로 거듭나요. 나로서는 이것저것 ‘따돌려진 모습을 따스하게 바라봐 주며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나조차 들여다보지 않거나 나마저 눈여겨보지 못한 모습이 매우 많아요. 어쩌면, 내가 찍는 모습은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 그저 ‘내가 눈여겨보며 사랑해 주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따돌려지거나 안 따돌려지거나 하는 금이란 처음부터 없지 않을까요.


  김태한 님은 “사진이론서적을 구하기 힘들어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일본을 내왕하면서 책을 사모았다. 교단에서 학생을 바라보면 사진의 메카니즘이 너무나 급격하게 발달함으로써 학생들은 귀중한 것을 뺏들어 버렸다. 만약 사진의 메카니즘이 좀더 천천히 발달하였으면 학생들은 좀더 훌륭한 것을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또 많은 학생들은 셔터를 누르는데 이상한 흥미를 나타내나 표현성에 대해서 고려하는 학생은 적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하고 말합니다. 더없이 맞는 이야기로구나 싶은 한편, 다른 한편으로 바라보면 ‘새 기계’를 발돋움한 사람은 ‘사진기를 만들’고 ‘사진을 찍’는 어른입니다. 어른 스스로 더 빠르게 바뀌고 더 많이 바꾸었어요. 어른 스스로 삶을 재빠르게 옮겨요. 아이들(대학생)은 이 흐름에 맞추어 스스로 재빠르게 달라질밖에 없어요. 어른 스스로 느긋하게 즐기지 않는 삶인데, 아이들만 느긋하게 즐기라 할 수 없어요. 어른 스스로 새 기계를 자꾸 내놓고, 기계 솜씨를 더 눈부시게 바꾸려고 용을 써요. 아이들 또한 새 기계에 더 손뼉을 치고, 더 낫다 하는 새 기계에 마음을 빼앗길밖에 없어요.


  그러고 보면, 이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내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나는 내 사진을 찍고, 내 나름대로 사진을 읽으며, 내 깜냥껏 사진을 말하면 돼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대서 내가 그 말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책에 이런 사진흐름 저런 사진역사가 적혔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아이들(대학생)한테 가르쳐야 하지 않아요. 그저 내 삶길과 같이 내 사진길을 걸어가면 즐겁습니다. 내 사랑길을 아끼며 내 사진길을 보살피면 기뻐요. 내 꿈길을 다스리면서 내 사진길을 갈고닦으면 아름답습니다.


  모든 사진은 ‘찰칵(스냅)’입니다. 모든 사진은 사랑입니다. 모든 사진은 삶입니다. 모든 사진은 꿈입니다. 모든 사진은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진은 웃음이요, 눈물이고, 빛이며 그림자입니다. (4345.11.10.흙.ㅎㄲㅅㄱ)

 


― 김태한 사진집 (김태한 사진,열화당 펴냄,1993.9.10.)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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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사진들

 


  디지털파일로 찍은 사진이 사라집니다. 틀림없이 즐겁게 찍은 사진인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메모리카드가 잘못되었나? 아니면 메모리카드에 담긴 사진을 셈틀로 옮기지 않고 그만 메모리카드 씻기(포맷)를 하는 바람에 봄눈 녹듯 아무런 자취를 안 남기고 사라졌나?


  필름으로 찍은 사진이 사라집니다. 파노라마사진기를 즐거이 장만해서 낑낑거리고 들고 다니며 우리 아이들이며 우리 마을이며 신나게 찍었는데, 아무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 필름을 거꾸로 끼웠나? 빛을 제대로 못 맞추었나? 때로는 현상소에서 깜빡 하고 한 통쯤 잃어버렸나?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언가 찍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이 사진을 찾아보면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불쑥 어느 방(폴더)에서 사진이 ‘나 여기 있네!’ 하고 나타날는지 모릅니다. 현상한 필름이 어느 책더미나 짐 사이에 찡긴 채 몇 해를 묵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 여기 있었는데 몰랐니?’ 하고 고개를 내민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찍든 저렇게 찍든 종이에 앉히지 않으면 내 앞에서 안 보이는 사진일까 하고 헤아려 보곤 합니다. 종이에 앉힌 사진을 벽에 붙이고는 날마다 곰곰이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사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노릇 아닌가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런데, 사진기 단추를 눌러야 사진이 ‘태어난다’고 할까요. 사진기 단추를 누르지 않고도 사진을 ‘빚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맨 먼저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눈을 거쳐 내 마음에 담으며, 내 눈을 거쳐 내 마음에 담은 모습을 내 가슴속 깊은 데에서 샘솟는 사랑으로 살며시 어루만질 때에, 비로소 ‘사진찍기’를 이루지 않나 싶어요. 사랑 어린 마음으로 찬찬히 아로새기는 사진찍기를 하고 나서야, 시나브로 ‘디지털파일이나 필름이라는 이름으로 사진기를 써서’ 어떤 이야기를 꾸릴 수 있지 싶어요.


  마음속에 있으면 언제나 사진이요, 마음속에 없으면 내 눈앞에 ‘종이에 앉힌 어떤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사진이라 할 수 없는 셈 아닐까 싶어요.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에는 제아무리 이름난 아무개가 찍어 길거리에 큼지막하게 내걸었어도 내 눈에는 안 보여요. 그저 스쳐 지나가며 느끼지도 못해요. 마음에 와닿을 때에는 환하게 떠올리고 활짝 웃으며 이야기꽃 피우는 밑바탕이 되어 주는구나 싶어요.


  삶이 있으며 사진이 있고, 스스로 삶을 잃으며 사진을 잃어요. 마음이 있으며 사진이 있고, 스스로 마음을 놓거나 버리면서 사진 또한 놓거나 버리고 말아요. (4345.1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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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11-0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지털 사진의 경우 한 3개쯤 백업을 해놔야 안심이 되는데 요즘은 워낙 사진들 파일이 커서 백업 기기 사는 것도 만만치 않더군요ㅡ.ㅡ

숲노래 2012-11-10 07:42   좋아요 0 | URL
그래도 외장하드가 예전 생각하면 참 싼값인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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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는 사진에

 


  애써 찍은 사진이 흔들리면 어딘가 서운하다고 여깁니다. 흔들린 사진이라 해서 값어치가 떨어질 까닭은 없지만, 나는 흔들린 사진을 바라지 않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사진을 곧잘 찍으면서도, 또 집에서 저녁나절 아이들 뒹구는 모습을 으레 찍으면서도, 셔터값 1/15초나 1/8초나 1/4초로도 안 흔들리는 사진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가만히 따지면, 1/4초마저도 안 되는 1/0.3초나 1/0.08초로 찍으면서 안 흔들리기란 몹시 어렵다 할 만합니다. 이렇게 사진을 찍자면 세발이를 받칠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리 놀고 저리 움직이는 아이들을 찍자며 집안에서 세발이를 받치고 움직일 수 없어요. 내가 사진을 즐겨찍는 곳인 헌책방에서 세발이 대고 사진을 찍기도 매우 까다롭습니다.


  나는 내 몸을 세발이로 삼습니다. 숨을 훅 들이마시고는 한동안 숨을 멈춥니다. 마시지도 내뱉지도 않는 채 퍽 오래 기다립니다. 손끝 떨림 하나 없도록 몸을 다스리고는 차아알칵 하고 한 장 찍습니다. 벽에 기대어 찍기도 하지만 벽 없는 데에서 찍기도 하고, 바닥에 쪼그려앉거나 거의 엎드리다시피 찍기도 합니다.


  안 흔들리는 사진을 바라면 참말 안 흔들리는 채 사진을 얻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한편, 아주 가끔 그런데, 흔들린 사진 가운데 ‘어, 이 사진 훨씬 마음에 드네.’ 싶기도 합니다. 왜 ‘흔들린 사진 하나가 더 마음에 드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사진으로 찍히기로는 흔들린 사진’이지만, 이 사진을 찍던 때 내 마음이 아주 너그럽거나 따사롭거나 즐겁거나 예쁘기에, ‘흔들리건 안 흔들리건’ 내 마음이 촉촉하게 젖으며 반갑구나 하고 여기지 싶어요. 흔들리는 사진에 내 마음이 사로잡힌달까요. (4345.1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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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숨결을 깨우는 소리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36] 오진태, 《바닷소리》(세명출판사,1981)

 


  바닷가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늘 바닷소리를 듣습니다. 들판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들소리를 듣습니다. 멧골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노상 멧소리를 듣습니다.


  시골사람이라면 시골에서 나서 자랐다는 뜻이니, 시골소리를 듣고 자란 셈입니다. 도시사람이라면 도시에서 나서 자랐다는 뜻이라, 도시소리를 듣고 자란 셈일 테지요.


  바다에는 어떤 소리가 흐를까요. 들판에는 어떤 소리가 감돌까요. 멧골에는 어떤 소리가 떠돌까요. 시골에서는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나요. 도시에서는 어떤 소리에 휩싸여 살아가나요.


  소리가 한 사람을 키웁니다. 내음이 한 사람을 돌봅니다. 빛깔이 한 사람을 북돋웁니다. 무늬가 한 사람을 살찌웁니다. 보고 듣고 겪고 마시고 느끼고 마주한 모든 것이 한 사람 숨결로 깃듭니다. 좋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그르거나 맞는 것은 없습니다. 차근차근 흐르고 하나하나 흘러 한 사람 넋으로 이루어집니다.


  1936년에 경상남도 충무에서 태어나 부산 동래구 장전2동에서 살아간다고 하던 오진태 님이 1981년에 내놓은 사진책 《바닷소리》(세명출판사)를 읽습니다. 부산 한켠에서 조용히 내놓은 사진책 《바닷소리》는 그야말로 부산 한자락에서 조용히 읽혔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닷소리를 생각하는 사진을 찍고, 바닷소리를 헤아리는 사진을 읽습니다. “갯가에서 나서 갯가에 살고 있읍니다(맺음말).” 하는 말처럼, 갯가에서 나서 자라며 늘 마주하던 삶을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담습니다.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사진으로 담지 않습니다. 더 구지레하거나 낡게 보이도록 사진으로 찍지 않습니다. 늘 보던 대로 사진으로 담습니다. 늘 느끼던 대로 사진으로 찍습니다. 늘 마주하고 바라보며 겪던 대로 사진으로 옮깁니다.

 

 

 


  글을 쓰는 이들이 이녁 어린 날이나 푸른 삶을 꾸밈없이 적바림하듯, 사진쟁이 오진태 님은 이녁 어린 날이나 푸른 삶 바닷가 바닷소리를 꾸밈없이 사진으로 다시 빚습니다.


  1930년대나 1940년대 바닷가 바닷소리를 1960년대나 1970년대에도 사진기 하나 손에 쥐고서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2000년대나 2010년대로 접어든 오늘날 사진책 《바닷소리》는 오래도록 흐르는 바닷내음이나 바닷빛깔을 들려줄 수 있을까요.


  문득 사진책을 덮습니다. 바닷사람이 바닷소리를 사진책으로 내놓는다면, 들사람은 들소리를 사진책으로 내놓을 만하고, 멧사람이 멧소리를 사진책으로 내놓을 만해요. 그러면, 들사람 이야기를 담은 사진책이나 멧사람 삶자락을 실은 사진책은 우리 둘레에 얼마나 있을까요. 수수하거나 투박하면서 즐겁게 누리는 하루를 고이 담는 사진책은 우리 곁에 얼마나 있는가요.


  오늘날 젊은 사진쟁이는 으레 ‘만듦사진(메이킹포토)’으로 흐릅니다. 사진을 만들지 않고서는 ‘사진찍기’를 할 수 없는 듯 여깁니다. 더없이 마땅한 흐름이라 할 텐데, 오늘날 젊은 사진쟁이는 사진길을 걷기 앞서 어린이집·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만들어진 틀’에서 시험공부만 해야 했어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부터 영어를 배우도록 내몰려요. 어른들은 아이들을 ‘만들어진 틀’에 집어넣고는 다섯 살 어린이나 열 살 어린이일 적에도 서울에 있는 이름난 몇몇 대학교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만들어진 틀’ 바깥에서 홀가분하게 뛰놀도록 풀어놓지 않습니다.


  즐겁게 뛰놀지 못한 아이들이 사진기를 손에 쥔다 해서 ‘삶을 사진으로 빚는’ 길을 깨닫지 못해요. 그동안 길들여진 대로 ‘만들어진 틀 틈바구니에서 무언가 다시 만드는 얼거리’를 짤 뿐이에요. 사진을 찍는 삶과 사진을 읽는 삶을 누리지 못해요. 자꾸 새로운 예술을 하거나 놀라운 문화를 해야 하는 듯 생각하고 말아요.

 

 

 


  오진태 님은 “이제 여기 몇 점 바다 내음의 조각들을 모아 보았읍니다(맺음말).” 하는 말을 붙이며 사진쟁이 말을 마감합니다. 책끝에 실은 오진태 님 모습은 최민식 님이 찍어 주었습니다. 같은 부산에서 서로 사진으로 만나고 사귀었겠구나 싶습니다. 최민식 님은 오진태 님을 반가운 동생으로 여기고, 오진태 님은 최민식 님을 고마운 형으로 여겼을까요. 서로 다른 사진을 찍지만, 서로 같은 사진길을 걸으면서 즐거이 어깨동무를 했을까요. 오진태 님은 1969년에 중앙일보 사진콘테스트 금상을 받고, 1975년에 신동아 초대작품 14점 ‘바다의 삶’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1981년에 《바닷소리》를 내놓은 다음 어떤 사진빛을 이루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바닷사람이 바닷내음 맡으며 바닷소리를 ‘바다삶’으로 들려주는 사진책 《바닷소리》를 읽으며 바다를 그릴 수 있어 즐겁습니다. 바다를 그리면서 내가 살아가는 터전을 그려 봅니다. 바닷내음을 맡으며 내가 살아가는 시골자락 시골내음은 어떤 기운이나 넋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바닷빛깔을 느끼며 우리 집 두 아이가 누리는 시골빛은 어떤 꿈결이 되어 맛난 밥이 될까 하고 가눕니다.


  숨결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봄에는 제비가 처마 밑으로 찾아와 봄소리를 들려줍니다. 가을에는 처마 밑 둥지를 떠난 제비에 이어 누런 들판을 누비는 뭇새들 노랫소리가 가을소리 되어 찾아듭니다. 시골자락 바람소리에는 별빛이 묻어나고 햇볕이 스밉니다. 시골마을 들소리에는 풀벌레 노랫소리가 천천히 어립니다. 어린 아이들은 마음껏 마당을 뛰놀고, 집안을 뒹굽니다. 까르르 웃고, 넘어져 울고, 밥먹으며 게걸스럽고, 잠들며 색색 고요합니다. (4345.10.14.해.ㅎㄲㅅㄱ)

 


― 바닷소리 (오진태 사진,세명출판사 펴냄,1981.8.23.)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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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읽기
― 천천히 알아보며 즐긴다

 


  나는 2000년부터 해마다 부산을 찾아갑니다. 부산에 아는 얼굴이 여럿 있기도 하지만, 아는 얼굴을 보러 찾아가는 부산은 아닙니다. 부산에는 골목골목 어여쁜 헌책방이 있기도 하고, 보수동에는 헌책방골목이 있습니다. 나는 보수동에 있는 헌책방골목을 비롯해서, 골목골목 깃든 어여쁜 헌책방을 누리고 싶은 마음으로 부산을 찾아갑니다.


  해마다 한 차례나 두 차례 찾아가면서 사진을 조금씩 찍습니다. 한 해에 필름사진 백오십 장에서 이백 장 즈음? 어느새 열 해 남짓 부산 나들이를 하니까 필름사진이 이천 장 즈음 모입니다. 나로서는 뜻한 일은 아니었으나 열 해 남짓 사진을 찍으며 이런저런 달라진 모습을 느낍니다. 어느 헌책방은 간판이 바뀌고, 어느 헌책방은 문을 닫습니다. 어느 헌책방은 새로 문을 열고, 헌책방마다 일꾼들 매무새가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해마다 나이를 먹으니까요.


  자리를 옮기는 헌책방을 봅니다. 어느 헌책방 할배는 그만 숨을 거둡니다. 어느 헌책방은 책꽂이를 바꾸고, 어느 헌책방은 새 일꾼이 들어옵니다. 이쪽 헌책방에서 여느 일꾼으로 일하다가 저쪽 골목에서 씩씩하게 새 가게를 차려 사장님이 된 분을 만납니다. 헌책방골목 이름이 차츰 널리 알려지면서 부산시청인지 중구청에서 골목 거님돌을 새로 깔아 줍니다. 이동안 보수동 한켠에 ‘헌책방 빌딩’이 하나 서며, 헌책방골목을 기리는 전시관이 생깁니다.


  누구라도 스스로 좋아하는 무엇 하나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열 해이든 스무 해이든, 또 서른 해이든 마흔 해이든 줄기차게 찍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보겠지요. 빛을 보고 그림자를 보겠지요. 맑은 날을 보고 흐린 날을 보겠지요.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을 보겠지요.


  아이들 자라나는 흐름을 찍는 여느 어버이도 다큐멘터리 사진쟁이라고 느낍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사진감 하나를 씩씩하게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진가’, 곧 ‘사진쟁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올해에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사진잔치를 열며 붙일 사진을 고르다가, 2009년에 찍은 사진 한 장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그예 문을 닫은 헌책방 간판을 떼는 사진입니다. 옛 헌책방 한 곳 문을 닫으며 퍽 오랫동안 빈자리가 되었는데, 이 텅 빈 곳에 젊은 분이 새 헌책방을 열었어요. 그래서 나는 옛 헌책방 모습과 헐린 모습과 새 헌책방 모습을 여러 해에 걸쳐 몇 장씩 찍습니다. (4345.9.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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