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는 눈빛 64. 날마다 베풀고 베풀지



  짭짤한 바닷바람을 마시면서 자라는 후박나무는 겨울에도 짙푸른 잎사귀입니다. 소나무와 잣나무뿐 아니라 동백나무와 후박나무도 늘푸른나무입니다. 가시나무와 아왜나무도 늘푸른나무입니다. 서울이나 경기도 언저리에서는 늘푸른나무를 찾아보기 어려울 수 있으나, 시골에서는 곳곳에서 늘푸른나무를 만납니다.


  그런데, 늘푸른나무라고 해서 잎사귀 하나가 오래오래 살지는 않아요. 늘푸른나무에서도 가랑잎이 집니다. 다만, 가을에 가랑잎이 지는 다른 나무처럼 한꺼번에 모든 잎이 지지는 않아요. 한여름부터 늦가을 사이에 묵은 잎이 천천히 노랗게 물들면서 툭툭 떨어집니다. 늘푸른나무는 ‘여름가랑잎’을 낸다고 할까요.


  한국말사전에는 ‘가랑잎’이라는 낱말만 나오고 ‘여름가랑잎’과 ‘가을가랑잎’이라는 낱말은 안 나옵니다. 말을 살피는 학자나 나무를 헤아리는 학자가 아직 이런 낱말을 짓지 못한 탓일 수 있는 한편, 시골사람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학자가 아직 모르는 탓일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제나 ‘사진을 찍는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글을 쓰는 바로 그곳’이나 ‘그림을 그리는 바로 그곳’에 있어야 제대로 느낌을 살립니다. 그런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바로 그곳’에 없었어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요.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있던 사진가 한 사람이 사진을 찍었다면, ‘바로 그곳’에 없었어도 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글이나 그림을 빚을 수 있습니다.


  사진만큼은 글이나 그림을 보면서 찍지 못합니다. ‘바로 그곳’에다가 ‘바로 오늘 이때’에 찍는 사진이기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은 언제나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바라보고 알아야 합니다.


  온몸을 움직여서 삶을 함께 맞아들일 때에 찍는 사진입니다. 온몸을 써서 삶을 살갗으로 느낄 때에 찍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제나 새롭게 바라볼 수 있기에 새롭게 배울 수 있습니다. 새롭게 바라보며 새롭게 배우는 사진가는 새롭게 생각을 지어 새롭게 이야기를 엮을 수 있습니다.


  숲은 날마다 새로운 모습을 베풉니다. 하늘과 땅은 날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달과 별과 해는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눈여겨보면 새로운 모습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날마다 새로운 모습이요, 우리 집 아이들이나 이웃집 어른들도 날마다 새로운 모습이기에, 이러한 모습을 알아차린다면 사진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담는 새로운 노래가 됩니다.


  날마다 달라지는 모습은 날마다 베푸는 선물입니다. 날마다 달라지는 모습은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숨결입니다. 4347.10.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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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63. 사진으로 읽는 문학



  문학을 가만히 그립니다.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로 엮어 말로 담을 때에 문학이라고 합니다.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로 엮어 그림으로 그리면 그림(또는 미술)이 되고,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로 엮어 사진으로 보여주면 사진이 됩니다.


  문학은 문학이면서 예술입니다. 그림은 그림이면서 예술입니다. 사진은 사진이면서 예술입니다. 그리고, 예술이 되는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은 언제나 삶입니다. 생각과 느낌은 삶에서 피어나거든요. 삶에서 이야기가 샘솟거든요. 우리가 나누는 말은 언제나 삶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사진읽기를 하는 이들 가운데 ‘사진비평’을 한다고 하면서, 생각과 느낌을 읽기보다는 이론과 사조를 살피면서 이런 이론과 사조로 사진을 재거나 따지는 일이 잦습니다. 문학읽기에서도 이와 엇비슷합니다. ‘문학비평’을 한다고 하면서, 정작 생각과 느낌을 읽지 않고 이론과 사조에 따라 문학을 재거나 따지는 일이 잦아요.


  이론과 사조로 사진을 재거나 따지는 일은 ‘비평’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비평이란 이론과 사조로 사진을 갈기갈기 찢는 일일는지 모릅니다. 문학비평이 이제껏 했듯이 말이지요.


  사람들은 문학비평 때문에 문학을 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문학에서 생각과 느낌을 읽고 이야기를 누리려고 합니다. 사진은 어떠한가요? 사진을 읽으면서 이론과 사조를 알아야 할까요? 사진을 읽을 적에 은유와 비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까요? 소재는 무엇이고 주제는 무엇이다, 하고 시험문제에서 다루듯이 사진이나 문학이나 그림을 재거나 따져야 할까요?


  오늘날 사진비평은 문학비평처럼 자꾸 엇나갑니다. 여느 사람들이 아무도 안 쓰는 딱딱하고 어려운 일본 한자말과 서양말을 뒤섞어서 울타리를 쌓습니다.


  사진을 읽는 까닭은 논문을 쓰거나 예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삶을 한결 아름답게 가꾸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읽은 뒤에 ‘사진이야기’를 쓴다고 한다면, 사진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 얼마나 즐거웠고 사진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이 얼마나 자랐으며 사진을 읽고 나서 내 삶을 스스로 어떻게 가꾸는가 하는 기쁨을 노래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사진가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이나 ‘어느 사진가 한 사람이 꾀한 표현기법’을 따지는 일은 ‘사진이야기’도 ‘사진비평’도 될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 문학을 읽습니다. 문학으로 사진을 읽습니다. 비평이라는 틀이나 잣대가 아닌, 내 삶과 네 이야기라는 즐거움으로 사진을 문학으로 읽고 문학을 사진으로 읽습니다. 사진 한 장에 깃든 숨결을 읽으면서 우리가 누리는 삶을 읽습니다. 사진 한 장을 찍는 손길을 읽으면서 우리가 가꾸면서 사랑할 삶을 읽습니다. 4347.10.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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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62. 너랑 내가 좋아서



  길을 가는 사람 아무한테나 사진기를 들이미는 사람이 더러 있을 테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은 굳이 아무한테나 사진기를 들이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끌려야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없는데 이 사람도 찍고 저 사람도 찍는다 한들, 이렇게 찍어서 ‘건질 사진’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길을 가는 누구나 사진에 찍힐 수 있습니다. 누구나 모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모델이 안 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을 골라서 사진을 찍는 일이란, 사진을 찍는 사람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 사람을 찍을 만하고, 이튿날은 저 사람을 찍을 만하며, 그 다음날에는 그 사람을 찍을 만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진으로 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찍으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길에서 만난 연예인한테 눈길이 사로잡혀 사진을 찍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냥을 하는 아저씨한테 눈길이 사로잡혀 사진을 찍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시에서 아주 수수하다 보이는 사람한테 눈길이 사로잡혀 사진을 찍습니다. 어떤 사람은 할머니한테 눈길이 사로잡히고, 어떤 사람은 어린이한테 눈길이 사로잡힙니다.


  사진을 찍는 길은 한 갈래가 아니니, 이렇게도 찍을 만하고 저렇게도 찍을 만합니다. 사람을 찍을 적에 사람을 보면서 찍을 수 있을 테고, 사람을 찍지만 그림이 될 만하다 싶은 모습을 찾아서 찍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어떻게 찍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다만, 어떻게 찍든 ‘내가 이웃한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에 비로소 ‘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한테 들려주고 싶은 ‘내 이야기’가 없다면, ‘사진’이라는 이름을 못 붙입니다.


  서울사람은 부산에도 가고 광주에도 갈 수 있습니다. 일본에도 가고 중국에도 갈 수 있습니다. 어디에나 갈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든 가고 싶은 대로 갈 노릇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행’을 간다고 할 적에는 ‘나 스스로 누리고 싶은 바깥바람을 쐬어야’ 비로소 여행입니다. ‘내가 사는 터전’에서 멀리 벗어난대서 여행이 되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이야기를 길어올리면서 삶을 짓거나 누릴 때에 비로소 여행입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살며 그저 서울에서 맴돌더라도, 날마다 내 나름대로 즐겁게 이야기를 길어올리면서 삶을 짓거나 누리는 사람은 ‘내 집이나 내 동네에서 천천히 돌아다녀’도 얼마든지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베트남이나 아이슬란드까지 가지 않아도 ‘여행’이요, 배를 타고 여러 날 바다를 가르더라도 ‘여행이 아닐’ 수 있어요.


  이야기는 너랑 내가 좋아서 이루는 노래입니다. 이야기는 너랑 내가 좋아서 일구는 꿈입니다. 이야기는 너랑 내가 좋아서 새롭게 짓는 사랑입니다. 4347.10.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 찍는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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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61. 하루하루 새로 짓는다



  사진가는 사진을 찍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입니다. 사진가는 사진을 빌어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삶과 사랑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가꾸는 사람입니다.


  사진가는 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놀랍다 싶은 사진을 짠 하고 선보여야 사진가로 뜨지 않습니다. 사진공모전에서 1등이 되거나 멋진 곳에서 사진전시를 하기에 사진가로 우뚝 서지 않습니다. 잘 팔리는 사진책을 펴낸다든지, 좋은 비평을 두루 듣는 사진책을 선보여야 사진가로서 이름을 날리지 않습니다.


  사진책을 선보이려면 책에 담을 만큼 사진을 모아야 합니다. 책에 담을 만큼 사진을 모으려면 하루 만에 사진을 다 찍을 수도 있으나, 여러 날이나 여러 달 걸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여러 해 걸릴 수 있고, 서른 해나 쉰 해가 걸릴 수 있습니다.


  더 빠르게 더 많이 찍었기에 사진책을 일찍 선보일 수 있지 않습니다. 이웃한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몽실몽실 샘솟는 사진을 모았을 때에 비로소 사진책을 선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한 해에 사진 한 장씩 모아서 마흔 해나 쉰 해 만에 사진책을 한 권 내놓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하루에 백 장을 찍어서 사진책을 내놓을 수 있어요. 이렇게 두 가지 사진책이 있을 적에,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더 낫거나 떨어지지 않습니다. 둘은 둘대로 값과 뜻이 있으며, 즐거움과 이야기가 있어요.


  하루에 백 장을 찍어서 날마다 사진책을 한 권씩 펴낼 만큼 사진을 찍는다면, 이러한 흐름으로 날마다 새로운 이야깃감을 찾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해에 한 장씩 찍어 쉰 해 만에 사진책을 내놓는다면, 오랫동안 찬찬히 삭히는 삶이 들려주는 이야깃감을 살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자랍니다. 날마다 자라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한 장씩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한 해 동안 얼마나 자랐는가 돌아보는 사진책을 묶을 수 있습니다. 이 아이들을 스무 해나 마흔 해에 걸쳐 지켜본 뒤, 스무 해나 마흔 해 만에 사진책을 묶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사진책 모두 어버이 사랑이 그득합니다. 두 가지 사진책 모두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사진은 하루하루 새롭게 삶을 짓듯이 이룹니다. 오늘이 새롭기에 어제와 다르게 사진을 찍습니다. 오늘이 흘러 모레가 되면 오늘과 다를 테니 모레에는 모레대로 새롭게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기 앞서, 내 하루를 먼저 새롭게 엽니다.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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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60. 움직이고 흐른다



  나는 바깥마실을 다니면서 가방에 늘 공책과 연필을 챙깁니다. 언제 어느 곳을 가더라도 공책과 연필이 가방에 꼭 있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저잣마실을 갈 적에도 몇 시 몇 분에 버스를 타고, 버스삯을 얼마를 치렀다는 이야기를 공책에 적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읍내까지 버스로 20분 동안 달리는 길에도 틈틈이 이 생각 저 느낌을 적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가 이렇게 다니는 모습을 늘 지켜봅니다. 그러고는 이런 모습을 흉내냅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어느 날 공책과 연필을 챙겨 저잣마실을 나옵니다. 큰아이는 걸으면서도 공책에 무엇인가 적습니다. 무엇을 적으려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껴서 무엇을 적으려나?


  일곱 살 큰아이가 아는 ‘한글’은 아직 많이 짧습니다. 혼자 떠올려서 쓸 수 있는 글은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큰아이는 큰아이 나름대로 아는 한글 테두리에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적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요. 우리는 누구나 아는 대로 글을 씁니다.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알지 못하면서 글을 쓰는 사람도 있기는 해요. 제대로 알지 못해서 제대로 쓰지 못하는 글이 되기는 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채 어수룩하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제대로 알 때에 비로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합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제대로 모르면 ‘제대로 모르는 티’가 나요. 생각해 보셔요. 밥이나 국이나 반찬을 지을 적에 제대로 할 줄 모르면 제대로 모르는 티가 곧바로 드러납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알뜰히 다스리거나 살필 줄 알아야 제대로 밥이나 국이나 반찬을 짓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돌보는 삶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알아서 살펴야 합니다. 기저귀를 갈 줄 모르거나, 기저귀를 빨 줄 모르거나, 기저귀를 말려서 갤 줄 모른다면, 아기를 어떻게 돌보겠습니까.


  사진은 겉모습만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이야기를 찍습니다. 그러니, 사진을 찍으려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모르는 채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이러한 사진에도 ‘제대로 모르는 티’가 스미기 마련입니다.


  기계 다루는 솜씨나 재주가 아닌, 사진에 담는 넋과 마음과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진으로 담으려고 하는 이웃이나 모델이나 숲이나 풍경이나 사물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시골을 제대로 모른다면 시골에 와서 무엇을 찍을까요? 축구 경기를 취재하려는 신문사 기자가 축구라는 경기와 축구선수를 모른다면 무엇을 취재하거나 찍어서 기사를 쓸까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은 우리 둘레에서 흐르거나 움직이는 삶을 늘 읽어야 합니다. 함께 움직이고 나란히 흐르면서 온마음으로 사진을 마주해야 합니다. 4347.10.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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