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불편 - 소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한 인간의 자발적 실천기록
후쿠오카 켄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77 ― 자전거 타기뿐 아니라 살기도 어려운 한국에서
 : 후쿠오카 켄세이, 《즐거운 불편》



- 책이름 : 즐거운 불편
- 글 : 후쿠오카 켄세이
- 옮긴이 : 김경인
- 펴낸곳 : 달팽이 (2004.4.5.)
- 책값 :


 (1) 한국땅에서 자전거 타는 어려움


 아침에 자전거를 몰고 일터인 도서관으로 나옵니다. 살짝 골목마실을 하고 도서관으로 올까 하다가, 무서운 빠르기로 날아가고 있는 먹구름이 하늘에 가득해서, 다른 데에 한눈을 팔지 않고 곧장 도서관으로 옵니다. 가파른 계단을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올라와서 창문을 여니, 이내 바깥에는 빗줄기가 후둑후둑 떨어지고, 곧 굵은 빗방울로 바뀝니다. 자칫 1분만 늦게 왔어도 큰비를 쫄딱 뒤집어쓸 뻔했습니다. 비옷을 따로 챙겨 나오지 않았으니,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걱정이지만, 비가 그치지 않으면 우산을 쓰고 자전거는 두고 가야겠습니다.

 동네에서 가게를 여는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들은 으레 자전거를 타고 당신 댁에서 일터로 나오곤 합니다. 헌책방 앞, 문구점 앞, 구멍가게 앞, 쌀집 앞에는 으레 자전거가 서 있습니다. 짐을 나르기도 하는 자전거이지만, 집과 일터를 오가는 자전거이기도 합니다. 요사이는 ‘자출-자퇴’라는 이름으로 ‘자전거로 출퇴근하기’를 하는 사람이 제법 늘고 있는데, 이런 자출-자퇴가 있기 앞서부터, 동네 가게 일꾼들은 언제나처럼 자전거로 집과 일터를 오갔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자전거 문화가 퍼지고, 한 해가 다르게 번쩍번쩍하는 나라밖 고급 자전거가 나라안에 물밀듯 들어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자전거집은 꾸준하게 늘어나고, 길거리에서 ‘자전거옷 쪽 빼입고 달리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낯설지 않습니다. 이분들 가운데에도 ‘자출-자퇴’가 있겠습니다만, 좀더 많은 분들한테는 ‘레저-취미-운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들 집과 일터를 오가는 데에도 더러 이 자전거를 탈 테지만, 집과 일터 사이는 ‘인천과 서울’ 사이일 때가 많고, 이러다 보면 으레 자가용이나 전철로 집과 일터를 오가기 마련이며, 쉬는 날이나 주말에 자전거를 끌고 나오기 일쑤입니다.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하고, 자전거에서 내린 다음 생각하고, 두 다리로 골목마실을 하면서 ‘짐자전거’를 만날 때하고 ‘레저-취미 자전거’를 만날 때마다 생각합니다. 우리한테 ‘삶자전거’라 할 만한 생활자전거란 무엇일까 하고. 우리는 어떤 자전거를 어떻게 타야, ‘내 삶으로 스미는 자전거’라 할 수 있을까 하고.


.. 사람들이 자동차 타기를 그만두기만 한다면, 일본 국내에서 연간 8천 명이 넘는 교통사고 사망자는 사라지게 될 것이고, 수많은 부상자들이 상처 입는 일도 없을 것이다 … 차라는 교통수단으로 우리의 생활은 날로 편해지고, 산업은 발전한다. 하지만 그 덕분에 반드시 희생자가 발생한다. 희생자를 줄이기 위한 방법은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게 마련인데, 제한된 예산을 거기에 투자를 한다면 산업발전이나 안락한 생활을 지탱해 주는 자동차를 위한 사회적 생산기반의 정비가 늦어진다 … (정부와 사회는) 자동차의 장점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 보험료를 지불하고, 그것으로 희생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함으로써 타협을 도모하자는 방법을 제시했다 … 차의 안전성을 말할 때,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왔던 것은 항상 차 안에 있는 사람의 안전뿐이었다. 안전벨트도 에어백도 그것을 위한 장치다. 사고를 당한 상대방의 피해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  (5∼6쪽)


 저전거로 먼나들이를 떠난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옵니다. 자전거를 자전거집에 찾아가지 않더라도 손수 고치거나 만질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책이 나옵니다. 자전거 정책을 다루는 책이 나옵니다. 나라에서는 새 자전거길을 놓는 데에 몇 조에 이르는 돈을 쓰겠다는 공약을 내놓습니다.

 책방마실을 하면서 ‘자전거책’을 들춰보고 몇 가지를 장만합니다. 저 스스로도 자전거책을 씁니다. 다른 분들이 쓴 자전거책을 읽다가는 끝까지 못 읽고 덮곤 합니다. 자전거 정비를 다룬 책을 읽으며 ‘자전거를 처음 살 때 주는 설명서에 담긴 이야기하고 무엇이 다를까?’ 하는 궁금함을 풀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나라안 자전거책이 어느 대목에서 서로 닮은지를 어렴풋하게 느낍니다. 자전거 이야기를 다루는 자전거잡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한국땅에서 자전거책이라 할 때에는 꼭 두 가지 자전거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첫째, 산타는자전거, 영어로 하자면 ‘엠티비’. 둘째로는 길에서 내달리는 자전거, 영어로 하자면 ‘로드바이크’, 이른바 ‘사이클’.

 드문드문, ‘작은자전거’를 ‘미니벨로’라는 이름으로 다룹니다. 그렇지만, 드문드문 다룰 뿐이요, 속깊이 들여다보는 눈길이나 매무새가 되지 못합니다. 어쩌다 들여다본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널리 사랑하고 아끼도록 이끄는 힘을 보거나 느끼기란 퍽 어렵습니다.


.. 남은 길은 오직 하나다! 선진국 국민들이 에너지와 물자의 소비량을 줄이는 길뿐이다. 지금, 선진국에서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것은 자원과 에너지의 효율화를 추진하여, 낭비를 제거하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어느 일부에서 낭비를 없애고 절약을 할라치면, 절약된 돈을 유혹하는 새로운 소비가 뒤이어 등장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 계단이 찾기 어려운 외진 곳으로 쫓겨나고, 그 존재조차 눈에 잘 보이도록 표시해 두지 않게 된 배경에는, 계단보다 안락하고 빠른 엘리베이터를 누구나 선호할 것이라는 ‘상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꾸준히 계단을 이용하다 보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만도 없다 ..  (17, 50쪽)


 툭 까놓고 하는 말이지만, 자전거 문화이든 정책이든 취미이든 삶이든 무엇이든 말하는 자리에 있는 분들치고, 여느 사람들이 예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타고 있는 자전거(짐자전거와 장바구니자전거)를 차근차근 들여다보고 나서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제오늘앞날에 이르기까지, 조용히 꾸준히 자전거를 즐겨 온 사람들 매무새는 한 번도 살갗으로 느껴 본 적이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가게 일꾼이 타고, 아저씨 아주머니가 타는 여느 짐자전거치고, ‘자전거 설명서’가 붙어 있은 적이란 없습니다. 설명서가 붙어 있는 자전거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유사산악자전거’쯤 되어야 합니다. 튜브에 바람을 넣든, 구멍난 튜브를 때우든, 이래저래 손질을 하건, 안장 높이를 맞추건 손잡이를 맞추건, 언제나 ‘값나가는 자전거’한테만 눈길을 맞춥니다.

 우리네 땅에 자전거길을 놓아야 한다면, 취미나 운동을 삼아서 놓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집하고 일터를 오가거나 집하고 학교를 오가거나 내 집에서 이웃이나 동무네 집을 오가는 길에서 걱정이 없도록 하는 길을 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서울 한강 같은 데처럼, 강줄기를 끼고 자전거길을 새로 큰돈 들여 닦아 놓는다면 보기에도 좋고 달릴 때에도 좋고 할 터이나, 정작 자전거 쓰임새 가운데 아주 작은 대목만 누리거나 나눌 뿐입니다. 취미나 운동은 채워 준다지만, 우리가 취미나 운동만 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삶을 꾸리고 우리 일을 하는 가운데 취미가 있고 운동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늘 살아가는 가운데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하는 자전거 정책이요 문화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있는 가운데 한 번 더 마음을 쏟아 즐거이 운동도 하고 취미로도 삼을 자전거 이야기를 펼쳐야 하지 않을는지요?


.. 소유하는 물질과 정보도 훨씬 많고, 에너지도 먹을 것도 넘칠 정도로 소비하고 있으면서, 30년 전의 어버이들이 아이들에게 주었던 정도의 행복감을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눠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아니, 오히려 우리 자녀 세대에게 환경파괴니 식량위기니 자원고갈이니 하는 무거운 짐을 떠넘기려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 에너지와 돈을 써 가면서 자가용이나 전철로 이동하고, 운동부족 해소니 체중감량이니 하는 명목으로 냉난방이 잘 갖춰진 스포츠센터에서 또 에너지와 돈을 들여, 바퀴도 없는 자전거 페달을 밟고 런닝머신에서 제자리뛰기. 내 자녀와 손자들의 자원을 야금야금 축내고, 그 미래를 짓밟아 가면서 ..  (19, 33쪽)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저는 마땅히 ‘대통령 관용차’를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대통령이 아닌 국회의원이 되든 시장이나 군수가 되든 마찬가지입니다. 모오든 관용차를 없애고 누구나 ‘관용자전거’를 타도록 틀거리를 마련할 생각입니다.

 행정과 정치를 맡으며 차를 타고 어디를 가야 한다면 택시를 불러야지요. 요새 부름택시가 얼마나 잘 옵니까. 더구나, 관용차 아닌 택시를 쓰면 유지비와 경비는 훨씬 덜 들 뿐더러, 인건비 또한 훨씬 적게 먹습니다. 게다가, 택시는 우리가 가려는 데까지 얼마나 빠르게(?) 모셔다 줍니까. 이러는 가운데, 택시업자들도 한숨을 돌릴 수 있으니, 우리네 일자리 지키기에도 더욱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러면서 관용차를 제멋대로 굴리는 일을 막을 수 있어 공직사회 썩은물 갈기에도 이바지를 합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공무원이 자전거로 일터를 오가도록 하면서 배불뚝이 공무원은 머잖아 사라질 수 있고, 공무원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집과 일터를 오가는 동안 ‘대한민국 길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뼛속 깊이 깨달을 테며, 애먼 돈을 해마다 보도블럭 갈아엎는 데에 쏟아붓지 않고 ‘어디에 그 돈을 써야 하는가’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자전거 타기가 늘 몸에 배었을 테니까, 굳이 비행기 타고 머나먼 나라로만 여행을 다니지 않고, 식구들하고 자전거를 타고 나라안 곳곳을 찾아다니는 마실을 떠나기도 하며, 이렇게 나라안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허튼 나라사랑’이 아닌 ‘참된 자연사랑’을 조금씩 키울 수 있고, 우리 아이들한테도 땀흘리는 보람과 이웃과 사귀는 기쁨을 가르칠 수 있어요.

 다만, 이런 생각은 아직까지는 덧없는 꿈 같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부질없는 꿈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무원뿐 아니라 우리들 누구나 돈을 밝히고 이름에 매이고 힘에 휘둘리고 있으니까요. 내 몸을 나 스스로 움직이며 살아가기보다, 내 입과 손만 께작거리며 살아가려고 하니까요.


.. 우리 식구들이 먹을 채소인 만큼, 농약이나 화학비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사용 후 처리에 문제가 있는 비닐 등의 화학합성재료도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기 위해, 신문지로 대신 쓰고 있다 … 본가의 어머니께 여쭸더니, 봄에서 가을까니는 무농약으로 양배추를 키우기가 어렵다고 하신다. 시판되고 있는 ‘곱디고운’ 양배추의 대부분은 흙에 뿌려진 약제를 뿌리로부터 흡수하며 자라기 때문에 벌레들이 좀처럼 기생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벌레도 먹지 못할 것을 인간이 먹고 있는 셈이다. 생산자 입장에서는 편하게 곱디고운 상품을 생산할 수 있으니 분명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먹는 소비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 대량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가격이 낮아진다. 단가가 낮아지면 대량으로 보급되고, 보급 후에도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소비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고장이 나면 버리고 새로 사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낮은 가격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  (64, 66, 55∼56쪽)


 그러나, 자전거를 탄다고 좀더 튼튼한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전거를 안 타거나 못 타면서도 얼마든지 생각과 마음을 튼튼하게 일구거나 지키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전거를 모르면서도 세상을 똑똑히 깨달으며 ‘아름다운 땀방울’ 값어치를 널리 나누는 분이 많습니다.

 꼭 자전거 한 가지를 들어야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한 사람이 한 아이를 낳고 기를 때와 마찬가지로, 좀더 넓고 깊이 들여다보거나 깨닫거나 부대낄 실마리를 하나 더 열 수 있을 뿐입니다. 아이 키우기에서도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인데, 아이를 낳지 않고 키워 보지 않는다 해서 아이 사랑을 못하란 법이 없습니다. 아이를 돌본 적이 없다 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 어우러짐을 잘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한 가지 이음고리가 없다뿐입니다. 그리고, 아이 키우기를 하면서 한 가지 이음고리를 더 뼛속 깊이 깨닫습니다. 갓난쟁이부터 큰 아이가 될 때까지 한팔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팔로는 장바구니를 들면서 한두 시간을 땀 뻘뻘 흘리며 저잣거리 마실을 하고 돌아와서 식구들 밥상을 차려 본 사람과, 이런 일을 치러 보지 않은 사람 삶과 생각은 같을 수 없습니다. 헬스클럽에서 역기를 들며 한두 시간 운동할 때하고, 아기를 안고 한두 시간 거닐며 어르고 재우는 삶은 같을 수 없습니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두 다리로 걸을 때하고 자전거로 달릴 때하고 자가용으로 지나칠 때는 사뭇 다른데, 두 다리로 걷던 길을 자전거로도 오가면 더욱 깊이 이 길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안는다고 할까요. 아기한테 젖을 물려 본 삶을 치러내고서 ‘엄마젖 먹이기’를 말하는 삶하고, 아이 키울 마음은 따로 없으나 ‘엄마젖 먹이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삶하고 다른 셈이라고 할까요. 목소리는 같아도 목소리에 담는 삶이 다릅니다. 목소리는 똑같이 들릴지 몰라도 목소리에 담는 느낌이 다릅니다.


.. 원래 불황이란 물건이 팔리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물건이 팔리지 않게 되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 않게 되었을까? 그것은 살 필요가 없고, 사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살 필요가 없고, 사고 싶은 것이 없을까? 그것은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시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물질이 팔리지 않으면 당연히 만들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만들 필요가 없으면, 또 일하지 않아도 좋다는 결론이 된다 … 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돈은 이제 그다지 필요없다는 것이다. 돈이 그다지 필요치 않게 되었다면, 억척같이 일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 사람들이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늘어난 자유시간을 그런 공생을 위한 활동으로 돌린다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와 더불어 인간관계의 폭도 넓힐 수 있고, 삶의 보람도 찾을 수 있다 ..  (125∼128쪽)


 사람들이 자전거를 제대로 안 타 버릇하기 때문에, 자전거 문화가 제대로 뿌리내리기 어렵고 자전거 정책이 올바르게 나오기 어렵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사회와 문화와 역사와 경제를 올바로 읽지 않기 때문에, 자꾸자꾸 옳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꾼으로 나설 뿐 아니라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으로까지 뽑히고 시장이나 군수를 여러 차례 지내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도, 내 삶으로 곰삭이는 자전거가 아닌 취미나 멋이나 명품이나 뽀대나 레저나 지름신이나 매니아나 유행이나 소비이기 때문에, 자전거 문화가 튼튼히 뿌리내리기 힘들고 자전거 정책이 슬기롭게 나오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헤아리려고 애쓰면서 책을 찾아 읽는다든지, 우리 이웃을 굽어살피고자 마음문을 연다든지 하지 않으니까 자꾸자꾸 범죄가 늘고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 말씨가 거칠어지며 갖가지 아프고 슬픈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과 머리단속과 교복통제를 떨쳐내지 못하지만, 어른들 또한 아이들이 더 높은 대학교에 동무를 짓누르고 들어가기를 꿈꾸고 있기 때문에 교육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이런 얼거리를 모르는 어른은 드무리라 봅니다.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이 아슬아슬하지 않으려면, 우리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길에 나와야 합니다. 자전거 문화이든 정책이든 제대로 나오고 뻗어가려면 우리 스스로 내 자전거와 이웃 자전거를 꾸밈없이 바라보고 껴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셈틀 앞에 앉아 인터넷바다를 휘저으며 지름신을 꿈꾸는 가운데 자전거 문화란 싹이 트지 못합니다. 값비싼 자전거이든 값싼 자전거이든 언제나 스스로 즐겁게 타고다니는 버릇을 들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엉터리 자전거 정책만 쏟아지면서 나라돈을 엉뚱한 데에 쏟아붓고야 맙니다.


 (2) 한국에서 살아가는 어려움


 며칠 앞서 어느 혼인잔치에 다녀왔습니다. 여느 혼인잔치와 거의 똑같이 이루어졌으나, 신랑과 신부가 혼인서약을 할 때에 조금 다르던데, 저마다 맞은편 앞에서 ‘내 다짐’을 읽는데, 신부 되는 분께서 “신랑 내조를 잘하겠으며……” 하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읽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스물너덧밖에 안 되었을 신부는 ‘남편 내조 잘하는 아내’가 꿈이라고 하더군요.


.. “지금 현대인의 생활상을 보면, 그런 생생한 삶의 근원과 관련된 작업을 모두 가정 밖으로 몰아내서,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 있잖아요? 출산도 사람이 죽는 것도 병원에서 하고, 고기도 생물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얻어진다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포장돼서 진열냉장고에 깨끗하게 장식되죠. 그것을 들고 계산대에 가서 돈만 내면 내 것이 되니.” … “지금은 교육비가 많이 들어간다며,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살지만, 우리 아이들은 실제 돈보다는 부모님의 시간과 정성을 더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149, 150쪽)


 남편을 잘 모시는 일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아내를 잘 섬기는 일 또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더 알뜰히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앞에서는 받드는 척하다가 뒤에서는 깎아내리는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부 되는 젊은 아가씨 다짐을 들으면서 더없이 거북했습니다. 당신 스스로 그렇게 밝히지 않아도, 2000년대 한국 삶터에서는 옛날하고 크게 다르지 않도록 ‘남편 모시기’를 해야 할 텐데, 굳이 스스로 더 굽히고 들어갈 까닭이 있느냐 싶고, 젊은 아가씨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젊은 아가씨한테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쏭달쏭했습니다.

 그나마 저는 한국땅에서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땅 여자와 견주어 ‘먹고들어가는 뭔가’가 있습니다. 덧붙여, 저한테는 형이 있으니, 첫아들이 아닌 데에서 ‘홀가분한 뭔가’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가 여자였다면 오늘과 같이 저 하고픈 일을 제 꿈대로 하나하나 이루어 가면서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첫째였다면 이제와 같이 저 가고픈 길을 제 깜냥껏 우격다짐으로 걸어올 수 없습니다.


.. “폐기물처리장이나 댐은 대개 시골에 만들어집니다만, 지금까지는 시골사람들이 너무 착해서 도시사람들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둔 점도 있지 않았습니까?” … “지금의 아이들은 환경문제 등 어둡고 칙칙한 이야기들만 들으면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밝은 꿈을 갖기가 어려워졌어요.” … “결국 모든 것이, 생명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큰 기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204, 206, 311쪽)


 옆지기는 가끔 저한테 “형한테 고마워 해야 해요”나 “형한테 미안해 해야 해요”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이 아니더라도 형한테 늘 고마우면서 미안합니다. 그런 한편으로, 제가 형이었다면, 또는 제가 맏이이면서 여자였다면, 또는 둘째이면서 여자였다면 어떠했을까를 곱씹어 보는데, 저는 제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어도 오늘과 같은 길을 걸었다고 느낍니다. 그저, 이 길을 걷는 동안 부딪힌 울타리가 달랐을 테고, 달랐던 울타리만큼 제 마음밭도 다르게 일구었을 테고, 다르게 일군 마음밭만큼 더 일찍 거듭났거나 더 늦게 거듭났을 테지요. 아직도 어리숙한 자리에서 헤맬는지 모르고, 일찌감치 훌륭히 거듭나면서 더 바지런히 제 삶을 붙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맏이이자 남자였다면, 집안일 짐이 어마어마했을 터이나, 이 어마어마한 짐 때문에 또다른 눈길로 또다른 삶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맏이이자 여자였다면, 내 앞길을 헤쳐나가는 데에 나 스스로 더 많이 애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 테니 더 다부지고 단단해졌을 테지요. 둘째이자 여자였다면,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설렁설렁 살았을는지, 저도 며칠 앞서 혼인잔치 자리에서 본 젊은 아가씨처럼 ‘얌전하고 다소곳하게 지아비 섬기는 한 사람’으로 머물자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외려 더 홀가분하게 저 가고픈 길을 마음껏 갔을는지도 모릅니다.


.. “시간에 쫓기다 보면,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해 보고자 하는 의욕이 사라지죠.” … “모두 너무 바쁘니까 좀처럼 그렇게 해 줄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지, 잘 모르겠지만.” … “세상은 어쨌든 편리해졌습니다. 하지만 편리해졌다고 행복한가 하면, 반대로 아주 힘든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아이들이 놓여 있는 상황은, 그대로 어른의 상황과 똑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어른도 지금보다 장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노후를 위해서라거나 좀더 유명해진다거나 하는 잡음이 끼어들죠. 지금을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위해 준비해라, 오늘은 내일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아라 하고. 내일이 되면, 또 다른 내일을 위해 희생하라고. 그러니 아무리 내일이 오고 또 와도 생명을 구가할 수 없게 되는 거죠.” ..  (215, 225, 230, 236쪽)


 지난 2008년 8월 16일에 딸아이를 낳으면서, 저는 속으로 제발 제발 딸아이가 나와야 한다고 빌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땅에서 아들아이로 태어나면 어김없이 군대에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설렁설렁 노닥거리는 군부대도 틀림없이 있으나 우리 아이가 그런 데에 갈는지 알 길이 없는 한편, 노닥거리는 군부대에 간다 해서 아이 삶자리가 걱정이 없거나 나아지리라 여길 수 없습니다. 착하고 풋풋한 열아홉스물짜리 젊은 한 사람을 살인병기로 만들면서 바보가 되도록 굴리는데다가 주먹다짐을 몸에 배도록 하는 군대라는 곳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둘레에서 만나는 어린 후배한테마다 ‘웬만하면 군대에 안 가는 길을 잘 찾길 바란다’고 이야기합니다. 군대에서 썩는 젊음은 돌이킬 수 없음을 들려줍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군대라는 곳에서 스물여섯 달을 썩어 보았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삶터가 얼마나 살기 팍팍한가를 새삼 깨닫고 보고 삭였습니다. 베트남전쟁 때에도 고엽제를 써서 많은 분들이 뒤탈을 앓고 있는데, 제가 있던 군부대에서도 비무장지대 철조망을 가리는 푸나무를 베어내거나 뽑아낸다면서 고엽제를 뿌렸습니다. 고엽제를 ‘당까(‘들것’이 바른 말인데, 언제나 이렇게 말했습니다)’에 두어 포대씩 얹어 신나게 날랐고, 포대를 그냥 북 뜯어 하이바로 퍼서 뿌렸습니다.

 간첩이 아닌 ‘귀순’을 한다던 북녘 병사를 옆 중대 아이들이 잘못해서 쏘아죽였던 일이 있고, 이웃 소초 말년병장이 지뢰를 밟아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밤새 근무를 서면서 지뢰 터지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뭔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던 일이 있으며, 온도계로 영하 47도까지 떨어진 모습을 보며 이를 덜덜 떨었던 일이 있고, 우리가 사격을 엉터리로 한다고 마구 총질을 해대며 ‘다 죽어 버려!’ 하고 외치던 중대장이 있었습니다. 이 중대장 방을 청소하다가 침상 밑에 빨간 잡지 두 권이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 녀석도 사람이긴 사람이네. 군대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나 보군’ 하고 생각했고, 고참병들이 쉴새없이 주먹질을 해대며 울먹여야 할 날이면 주먹을 불끈 쥐면서 ‘군대에서 죽을 수 없어. 나한테도 전역날이 있을 테니까 기다려라, 밖에 나가서 보자 xxx들’ 하고 다짐하는 한편 ‘나는 너희처럼 고참병이 되어도 이 따위 주먹질 발길질은 안 할 테다’ 하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군대였지만, 영하 22도를 오르내리던 혹한기훈련 때 ‘우리 주둔지보다 따뜻하잖아?’ 하고 생각하며 국을 뜨다가 그만 숟가락이 입천장에 붙는 바람에 뜨거운 물을 입에 얼른 부어 떼어내던 일을 겪으며, 추위란 이렇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습니다. 배고픈 행군을 열 몇 시간 끝없이 하면서 눈을 퍼먹는 동안 그 옛날 한국전쟁 때 피난 가던 사람들도 이렇게 눈을 퍼먹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던 고슴도치를 두 눈으로 보며 살며시 품에 안아 보던 기쁨은 전역한 지 열 몇 해가 되었어도 어제일처럼 떠오릅니다. 산에서 우쑥우쑥 자라는 돌배와 개복숭아가 얼마나 맛있는지를 이때 처음 알았고, 내 뺨으로 두 번을 재야 할 만큼 날개가 큼직한 사향제비나비 무리를 보았을 때에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맨눈으로 금강산을 바라보고 스탈린고지와 김일성고지를 바라볼 때에는 그저 하염없이 좋았습니다. 남과 북은 고작 저 쇠가시울타리로 가를 수 없다고, 저쪽에서도 맨눈으로 남녘땅을 바라볼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통일이란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되뇌었습니다.

 누구나 치러내기 나름이니, 잘 치러내면 군대라는 곳은 좋은 배움터가 됩니다. 누구나 치러내기 나름이라서, 군대에 가지 않고 젊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하여도 어영부영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꼭 젊은 넋한테 살인병기 되는 솜씨를 가르쳐야만 할까요. 젊은 넋이 더 젊고 싱싱하고 푸르게 거듭나는 길을 보여주거나 이끌 수 없을까요.


.. “지금까지는 소비를 위해 일한다는 면이 강했죠. 즉 소비를 위한 노동이었던 셈입니다 … 필요없으니까 사지 않는 것인데, 필요없는 것을 만든다는 건 곧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 “왜 자전거도로는 그대론데, 고속도로만 점점 늘어나는 것일까? 역시 정치가 자동차 회사나 물류기업, 즉 기업 생산자들 편만 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참 많아집니다.” ..  (251, 276쪽)


 아들아이 아닌 딸아이를 낳아 군대 시름은 살짝 놓았지만, 더 깊이 헤아리면 우리 아이가 군대를 안 간달지라도 우리 아이가 나중에 만날 남정네는 하나같이 군대를 갔다 와야 합니다. 우리 아이가 군대에서 살인병기 되는 훈련을 안 받는달지라도 우리 아이하고 사귀거나 함께 살아갈지 모를 남정네는 군대에서 살인병기 되는 훈련을 받으며 사람을 깔보거나 얕보는 마음이 어느새 깃들게 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앞날까지 근심하기 앞서, 바로 오늘 우리 아이를 가르치도록 할 학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가 더 큰 근심입니다. 교육부장관이 누가 되고 교육감을 누구로 뽑느냐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교육 정책이 달라지는데, 교과서는 아이한테 삶을 밝히는 빛줄기가 아닌 시험성적으로만 다가가도록 짜여 있는데, 교사들은 큰어른이나 스승이기보다는 월급쟁이에 훨씬 가까운데, 도시락을 안 싸도 되고 급식을 내어준다지만 급식 밥차림이 생채식이거나 생협 물품일 수는 없는데, 학교 건물은 어디나 감옥소와 똑같이 지어져 있고 모든 아이 생각과 몸을 한 가지로 틀에 박히도록 짜맞추고 있는데, …….


 (3) 《즐거운 불편》을 읽는 어려움


 이야기책 《즐거운 불편》을 읽습니다. 2005년에 한 번 읽었고 2008년과 2009년 이태에 걸쳐 거듭 읽습니다. 《즐거운 불편》을 쓴 후쿠오카 켄세이 님은 일본 〈마이니치신문〉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몸도 ‘즐거운 불편’을 겪은 열두 달 이야기에다가, 일본에서 ‘맑고 밝은 앞날을 생각하며 뜻있게 사는’ 열두 사람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로 묶습니다. 그러니까, 글쓴이 스스로 꼭 이태에 걸쳐 쓴 책이라는 소리입니다. 이에 따라 읽는이까지 글쓴이 흐름에 맞출 까닭은 없지만, 《즐거운 불편》 같은 책은 꼭 이태에 걸쳐서 한 달에 한 꼭지씩 읽어낸다면 한결 새삼스럽지 않겠느냐는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즐거운 불편》은 ‘읽기책’이 아니거든요. ‘하기책’입니다. 이론이 아닌 실천을 밝히는 책이요, 지식으로 생각하라는 책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면서 세상과 내 삶을 바꾸자는 책입니다.


.. 자전거 통근으로 쉽게 배가 고파지고, 배가 고프면 아무리 찬밥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외식을 하지 않고 도시락을 지참한다’는 불편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밖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도시락을 싸는 시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도시락을 아내와 함께 준비하다 보면, 부부 간의 대화 시간도 늘어나니 그 또한 즐겁지 않은가! … 여기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즐긴다’는 것이다. 머리를 불끈 동여매고 결연히 뭔가에 도전하는 식의 금욕적 방법으로는, 한때 공산주의 국가가 만들어 냈던 모범시민처럼, 소소의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들만의 행동을 유발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  (31, 38쪽)


 1인출판사 ‘달팽이’에서 펴낸 《즐거운 불편》은 이 조그마한 출판사를 대표하는 책입니다. 첫발부터 1인출판 길을 걸었고, 첫발부터 오늘날까지 생태환경책을 중심으로 바른 사회눈과 종교눈을 틔워 줄 이야기책을 펴내 오는 이곳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즐거운 불편’이니까요.


.. 그처럼 날씨나 기후의 변화를 몸으로 직접 느끼기는, 참으로 자극적이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거기에 살아 있는 생물이라도 하나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강변을 따라 달리고 있을 때, 한 마리 갈매기가 내 자전거 바로 옆을 나란히 날았을 때는,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 이 작은 논에 두둑을 치는 것만으로 이 정도라니! 기계화가 되기 전의 농촌 노인들의 허리가, 그렇게 ‘ㄱ’자로 굽어진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 우리가 감상에 젖어 바라보는 농촌의 황금들판이, 허리가 ‘ㄱ’ 자로 굽어질 정도의 중노동을 묵묵히 해내는 농부님들 공덕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 ‘지키라’고 입으로 말하기야 쉽지만,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노동이 필요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춥다. 산다는 것은, 이 정도로 시간과 수고를 필요로 한다. 현대인이 지금처럼 불손해진 것은, 아마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  (32, 77, 138쪽)


 어린이들 또는 갓난쟁이들 앞에서 담배를 태우지 않는 매무새도 ‘즐거운 불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은 불편이지만 즐거운 불편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 또는 갓난쟁이들 앞에서 담배를 태우지 않는 매무새라 한다면, ‘아이 밴 엄마’ 앞에서도 담배를 태우지 말아야겠지요. 나아가, ‘아이 키우는 아빠’가 가까이 있을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애 아빠는 집에 가서 아이를 품에 안을 텐데 애 아빠 옷이나 몸에 담배 냄새가 배어 있으면 어떡합니까.

 즐거운 불편이란 생각이 생각 꼬리를 잡고 이어집니다. 이런저런 생각 꼬리를 잡고 이어지다 보면, 나 스스로 담배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하여도 ‘길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습니다. 내가 담배를 좋아해서 길에서 담배를 피우면 ‘아이이든 아이 엄마든 아빠이든 또 아이와 얽힌 사람 누구한테라’도 담배 냄새를 퍼뜨리거든요. 담배를 안 피우거나 담배 냄새 때문에 골치를 썩는 사람한테도 잘못하는 노릇입니다.


.. 엄마에게 배워 가면서 찢어진 의자를 바느질하는 큰딸. 누덕누덕 기운 만큼 정성이 가득 담겼다 … 운전을 즐기는 마음이 없다면 안전운전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즐기는 마음이 아닐까? … 농촌생활은 결코 안락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광활한 자연을 상대하는 만큼, 몸과 머리와 마음을 움직일 기회가 듬뿍 있다. 시간도 충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고는 본질적인 것으로 향하게 된다 ..  (95, 162, 260쪽)


 담배 한 가지를 들었지만, 담배 한 가지만을 놓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터 모든 곳에서 똑같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즐긴다고 하는 온갖 ‘일과 놀이’가 얼마나 내 삶을 북돋우거나 채워 주는 일과 놀이인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가운데, 내 둘레로는 어떻게 퍼져 나가는가를 톺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ㅈㅈㄷ이라는 신문을 좋아해서 나 스스로 이 신문을 받아본다고 한다면, 이 신문을 보는 나는 나대로 좋을는지 모르나, 내 이웃은 어떻게 될는지, 그리고 내 이웃한테는 어떤 삶결이 펼쳐지게 될는지를 곱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과자봉지 하나를 길바닥에 그냥 버리면 나쁜 일이라고 아이들한테 말할 노릇이 아니라, 이렇게 버려지는 과자봉지가 어떻게 흐르고 흐르는지, 또 이 과자봉지는 어떻게 누가 만들었고, 버려진 과자봉지는 길바닥에서 어떻게 뒹굴게 되는지를 살피면서 쓰레기 문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돈 한 푼을 쓰면서도, 이 돈이 누구 손을 거쳐 어떻게 쓰이는지를 좇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즐거운 불편’이라는 명목으로 자전거 통근을 사람들에게 권장하던 당사자가, 2년 간의 자전거 통근 끝에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까지 넘겼다. 불편은 결국, 즐거운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기만 하다는 걸 증명한 셈이 되고 말았다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책까지 낸다는 것은, 진정한 ‘즐거운 불편’에게 죄를 더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좌절하고 있는 나를 격려해 준 사람은 아내였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으면서 말했다.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자전거를 타고 밤에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만들지 않고, 미성년자에게 오토바이나 자동차 같은 위험한 것을 타도록 면허증을 내준 나라가 잘못한 거지! 당신이 주장하고 실천해 왔던 게 틀린 건 아니잖아요!” ..  (363쪽)


 어찌 보면 딱딱하고 따분하다 여길 수 있을 텐데, 《즐거운 불편》은 일부러 ‘어렵게 살자’고 말하는 책이 아닌 ‘즐겁게 살자’고 말하는 책입니다. 불편한 몇 가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우리 삶이 한결 즐거워진다고 몸소 치러낸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불편한 몇 가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삶이야말로 더없이 즐겁지 못하며 아름답지 못하고 반갑지 못함을 글쓴이 스스로 겪어낸 이야기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글쓴이 옆지기 말마따나 “당신이 주장하고 실천해 왔던 게 틀린 건 아니잖아요!”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밤에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만들지 않고, 미성년자에게 오토바이나 자동차 같은 위험한 것을 타도록 면허증을 내준 나라가 잘못한 거지!”입니다.

 책 맨끝에 실린 글쓴이 마지막말을 거듭거듭 읽으며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습니다. 저 또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숱하게 뺑소니 사고를 겪으며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고, 이렇게 가까스로 살아난 저를 보고 제 둘레 좋은 벗님과 옆지기는 언제나 “당신이 잘못하지 않았어요!” 하고 북돋워 주었거든요. 좋은 벗님과 옆지기는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자동차 모는 사람들이 당신을 죽도록 치어 놓고 꽁무니를 빼도록 가르치고 이끈 우리 사회와 교육과 정치가 잘못이지!” (4342.7.18.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 위 나의 인생
마거릿 D. 로우먼 지음, 유시주 옮김 / 눌와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15 ― 두 아이 키우는 여자 과학자 삶이란
 : 마거릿 D.로우먼, 《나무 위 나의 인생》



- 책이름 : 나무 위 나의 인생
- 글 : 마거릿 D.로우먼
- 옮긴이 : 유시주
- 펴낸곳 : 눌와 (2002.3.11.)
- 책값 : 1만 원



 (1) 남자 세상과 여자 세상


 어제는 옆지기하고 아기와 함께 서울마실을 했습니다. 출판사에 들러 책을 하나 건네주어야 할 볼일이 있었습니다. 아기가 아침에 똥을 누지 않았기에 모르는 노릇이라 바지며 기저귀며 더 챙깁니다. 아기가 아주 갓난쟁이였을 때에는 함께 서울마실을 하러 길을 나설 때에는 기저귀를 열 몇 장을 챙겨도 빠듯했습니다. 어제는 고작 여섯 장을 챙겼으나 꼭 석 장만 썼습니다.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는구나 싶습니다. 하루하루 튼튼히 자라나며 일손을 더는 대목이 있는 가운데, 새로운 일손이 찾아드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저귀 빨래는 조금 줄어 빨래감이 줄었습니다만, 그만큼 아기가 헤집고 다니는 품새가 늘어 옷가지를 자주 갈아입혀야 하니, 따지고 보면 빨래감이 줄지 않습니다. 나날이 무게가 느니 안고 다닐 때에도 팔이 더 빠지는데, 그래도 때때로 말귀를 알아들으니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끼어들고 싶어 뗑깡을 부리면 고단합니다.

 으레 남자가 바깥 볼일을 도맡고 여자가 집안 살림을 도맡습니다. 우리 나라도 그렇고 다른 여러 나라도 그렇습니다. 남녀평등이 잘 이루어져 있다는 서양나라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여자 권리가 높다는 중국이라고 해서 썩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이 하나 세상에 태어난 뒤로는 ‘남자 몫 여자 일’은 아주 또렷하게 금을 긋듯 갈립니다.


.. 그전에 나는 퀸즐랜드의 우림 속에서 포스터사의 맥주깡통으로 장식을 해놓은 (새들이 사는) 구애용 침실들을 본 적이 있었다. 자연이 인간의 습관에 적응한 슬픈 이야기들이다 …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환경을 소홀히 다루고, 오염시키고, 그것이 보내는 악화의 징후를 무시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자, 목축업자, 농부, 경제학자, 삼림관리자, 토지관리자, 정치인, 납세자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잎병의 치유법을 찾아내고, 더 이상 잎병이 발생하지 않게 하고, 죽어가는 산과 들을 되살려 놓을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  (82, 99∼100쪽)


 서울마실을 떠나기 앞서 동네 머리방에 들릅니다. 옆지기가 머리를 짧게 친다고 해서 집에서 잘랐는데 아무래도 듬성듬성이 되어 놔서 손질을 할 생각입니다. 숱이 많아 삼십 분 남짓 걸려 머리를 다듬었고, 목덜미께 닿을 만큼 손질하니 시원하고 아기를 업었을 때 손을 뻗어 잡아당기지 못할 듯합니다.

 우리 아이가 크는 동안에는 웬만하면 집에서 머리를 잘라 줄 텐데, 나중에 차츰 크면서 제 머리 모양이나 길이를 어떻게 생각할는지 궁금합니다. 옆지기는 아이가 웬만큼 자라면 머리를 다 밀겠다고 하는데, 아이는 사내아이 머리길이와 계집아이 머리길이를 어떻게 생각하거나 받아들이게 될까요. 제 엄마 아빠가 ‘남자 = 짧게, 여자 = 길게’라고 딱히 못박지 않을 뿐더러, 엄마가 아빠보다 머리가 짧고, 아빠는 머리를 기른다기보다 머리털이며 수염이며 그대로 두고만 있을 뿐인데, 이런 모습을 늘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우리 집에서야 이렇다 하지만, 집 밖으로 나가면, 모든 ‘남자 = 짧은머리, 여자 = 긴머리’인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껴야 할까요.


.. 훼손되지 않은 생태계 안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과학자들이 당면하는 또 하나의 무거운 과제는 생태계를 있는 그대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섬은 대단히 예민한 생태계이다. 규모가 작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내부의 어떤 요소가 사라지거나 밖에서 어떤 것이 들어오면 그 영향이 극대화된다. 해충 한 마리가 침입한 것이 그 지역의 식물상 전체가 궤멸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버린 온갖 찌꺼기들 또는 임의로 치워 버린 것들도 자연적인 평형 상태, 즉 자연의 균형에 그와 똑같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  (121쪽)


 사람들이 우리 아이를 보며 으레 “남자 아이지요?” 하고 묻습니다. 어느 할머니는, “사내대장부답게 잘 커야지.” 하고 말씀하셔서 쓰겁게 웃었습니다. 아이가 계집아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려도 ‘사내대장부’를 말씀하셔서, ‘사내’면 어떻고 ‘계집’이면 어떠한데 하는 생각이 자꾸자꾸 들었습니다. 사내답게 키우는 길과 계집답게 키우는 길이 따로 있을까요.

 모르는 노릇이지만, 우리 딸아이는 하루하루 크면서 ‘여느 집하고는 아주 많이 다른’ 삶을 속속들이 느끼고 받아먹으리라 봅니다. 밥하기며 빨래하기며 집치우기며 웬만한 집안일은 아빠가 다하고, 또 밥벌이 삼는 글쓰기며 바깥일이며 아빠가 도맡다시피 하는 모습이니까요. 언뜻 보면 엄마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생각할 텐데, 애 엄마도 집 안팎에서 하는 일이 많고, 또한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으로서 퍽 많은 일을 짐지워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눈길로 우리 옆지기가 ‘일을 얼마 못하거나 안 하는’ 듯 느껴진다 하여도 거리낄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눈높이로 온갖 일을 똑같이 해내야 하지 않으니까요. 이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저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이 세면 그만큼 더 할 노릇이고 힘이 여리면 그만큼 덜 할 노릇입니다. 누군가는 날마다 원고지 100장씩 글을 쓸 수 있다지만, 누군가는 한 주에 원고지 10장 겨우 채울 수 있습니다. 나날이 100장씩 쓰는 사람이 한결 훌륭하다거나 사람답다 말할 수 없고, 한 주에 10장 겨우 채우는 사람은 못났다거나 사람답지 않다 말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5인치밖에 안 되는 어린 나무가 35살이나 먹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우림의 보존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확실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다. 나는 어린 것들의 유아기와 성장기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새싹과 아이들, 그 둘은 기쁨과 시련을 선사하며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 어린 시절, 우리는 나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나무를 기어오르고, 큰 가지 위에 요새를 짓고, 나무 밑 풀밭에 몸을 누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들을 쳐다보고, 민첩하게 나무를 타는 원숭이와 새들을 부러워하고, 썩어가는 나무 둥치 속에서 살아가는 조그만 동물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 중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극히 제한된 시야밖에는 가질 수 없는 공간, 즉 땅 위에 서서 경이로운 심정으로 나무를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  (167, 169쪽)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배웁니다. 어머니한테서 배우고 아버지한테서 배웁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도 배우고, 언니와 오빠와 동생과 형과 누나한테서도 배웁니다. 피붙이와 이웃한테서도 배우고 동무한테서도 배웁니다. 누구나 가르치고 누구나 배웁니다. 나이가 먹었다고 가르치기만 하지 않으며, 나이가 어리다고 배우기만 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배울 일은 배우고 가르칠 일은 가르칩니다. 나이가 많아도 배워야 할 일은 배워야 하고 가르칠 때에는 가르치기 마련입니다.

 이리하여, 어버이 된 사람은 어버이가 되기 앞서도 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옳게 추슬러야 합니다만, 스스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몸이 될 때에는 한결 무르익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되도록 훨씬 힘써야 합니다. 때때로 길에서 스치는 이웃으로서 이웃 아이와 배우고 가르치는 사이를 넘어, 늘 함께 먹고 자고 부대끼는 식구로서 내 아이와 배우고 가르치는 사이가 되었으니까요.

 어버이가 아닌 자리에서도 나 스스로 올바르고 아름답고 맑고 빛나야 했던 애틋한 목숨인 우리들이었고, 어버이가 된 자리에서도 나 스스로 꿋꿋하고 야무지게 올바르고 아름답고 맑고 빛나야 할 사랑스러운 목숨인 우리들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대로 내 아이가 배우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아이가 생각하며, 내가 말하는 대로 내 아이가 말합니다.

 어버이 된 사람이 ‘딴 사람 안 보는 자리이니까 허튼 짓을 해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라면, 이 마음은 고스란히 내 아이한테도 이어갑니다. 어버이 된 사람이 ‘내가 바빠 죽겠는데 골목에서 저 애들은 왜 뛰놀고 법석이야’ 하면서 빵빵대며 싱싱 내달린다면, 이 매무새는 그예 내 아이한테도 옮아갑니다. 어버이 된 사람이 국회의원 대통령 뽑는 매무새 그대로 아이들이 어른과 정치와 사회를 보는 매무새로 스며듭니다. 어버이 된 사람 하루하루가 당신 아이 하루하루를 엮어 나가고 이루어 나갑니다.


.. 수없이 개미들에게 물리면서 나는 어떤 경외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자기보다 수천 배나 큰 존재를 공격해대는, 그리하여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는, 그 조그마한 생명체의 극성스러움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조용히 걸어다니며 숲을 관찰하던 중, 우리는 나무 위에서 거미원숭이가 재롱을 피우는 모습도 보았고, 타이라 일가족이 나무들 사이로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았다. 야생 동물들은 우리가 숲속에서 조용히 있을 때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인류라는 종족의 한 사람으로서 숲의 거주자들과 함께 숲을 감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226, 292쪽)


 옆지기와 저는 아이를 배고 낳고 키우는 어제오늘 또 모레글피 한결같이 생각합니다. 우리는 딸아이를 낳아 기르지만, 딸아이가 아닌 ‘한 사람’을 낳아서 기른다고 생각합니다. 너나와 똑같은 아이요, 어른아이 가르지 않는 목숨이며, 꼭 같은 한 사람 몫임을 느끼면서 함께 살아가는 벗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되어 가기를 바라며, 이 삶터에서 아이 스스로 우뚝 서면서 사랑과 믿음을 다른 누구한테보다 나 먼저 참되게 맛보고 깨달으면서 이웃하고 살가이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아이는 아직 돌이 안 되었습니다. 다음달이 돌입니다. 우리는 돌잔치를 따로 할 겨를이 없기도 하지만, 돌잔치보다는 이웃을 한 집씩 불러 집에서 밥상 하나 차려 함께 나누어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마련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돌이라지만 세월은 금세 흐르기에, 우리는 이 아이가 뒷날 학교에 들어가도 될까 안 될까를 곰곰이 생각하기도 합니다.

 꼭 학교에 가야 할 까닭이 없으며, 굳이 학교를 안 다닐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 스스로 다니고프면 다닐 노릇인데, 학교에 간다고 동무를 더 사귈 수 있지 않고, 학교에 안 간다고 동무를 못 사귈 수 있지 않습니다. 또래동무를 여럿 두어야 아이가 맑고 밝게 크지 않으며, 또래동무란 학교 울타리 안쪽에만 있지 않습니다.

 저보다 나이든 살가운 동무가 있고, 저보다 나어린 살뜰한 동무가 있습니다. 아이한테는 아이 스스로 좋아하며, 아이를 좋아할 동무가 있으면 넉넉할 뿐입니다.


.. 나는 내가 어머니이고 아내임을 좋아했다. 그러나 내 영혼은 그와 더불어 과학을 향한 열정도 지니고 있었다 … (첫) 남편은 내 연구가 가족보다 우선할 수는 없으므로, 가족용 차를 몰고 대학 도서관으로 가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충고했다 … 1970년대의 호주는 백인 남성에게는 ‘행운의 나라’였을지 몰라도, 미국인 여성 과학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여자가 숲 우듬지를 연구하기 위해 혈혈단신 1만 마일을 날아 멀리 떨어진 대륙으로 온다는 것은, 내가 만난 호주인 남자들 대부분에겐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일일 뿐 아니라 도대체가 미심쩍은 일이었다. 사실, 남자나 여자나 호주 농촌의 많은 사람들에겐, 부엌이나 침실에서 실용적으로 전혀 써먹을 데가 없는 어떤 지적인 생각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아마 1백 마일을 여행하는 것조차도 우스꽝스럽게 보았을 것이다 ..  (14, 25, 44쪽)


 다만, 아이를 학교에 넣지 않으려 한다면, 그만큼 어버이 된 사람한테 주어진 몫이 큽니다. 지난날에는 어느 어버이도 아이를 학교에 안 넣고 죄다 집에서 가르쳤는데, 그만큼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일이 많았고, 챙길 일이 많았으며, 살피고 보듬을 일이 많았습니다. 요즈음은 이런저런 어버이 노릇을 온통 ‘돈’에만 맡기고 있을 뿐입니다.

 제도권학교도 돈이요 대안학교도 돈입니다. 제도권학교라고 돈을 안 내겠습니까. 우리가 낸 세금으로 꾸리는 곳이 제도권학교인걸요. 대안학교를 넣으려 하면 어버이 된 사람은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때때로 ‘대안학교에 넣었으면서 아이와 어울릴 틈이 더 없’기까지 합니다. 배움삯 벌려면 그만큼 허리가 휘니까요.

 여섯 살 아이를 유치원에 넣는 제 옛동무는 한 해 배움삯이 500만 원을 웃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치원에 바쳐야 할 돈이 대학등록금 못지 않다고 푸념입니다. 대학생들 목소리가 어린이들 목소리보다 커서 그렇지, 어린이들이 제 어버이 된 사람들 살림을 걱정하며 ‘유치원 배움삯은 나라가 내라!’ 하고 외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어버이들은 줄줄이 파산을 해야 할 수 있습니다. 요새는 셋째가 아닌 둘째를 낳아도 구나 시에서 돈(출산장려금)을 준다고도 하는데, 아이를 낳았다고 돈을 얼마 준다고 해서 살림이 필까요? 나라가 아이와 어버이한테 돈을 대어줄 노릇이 아니라, 아이와 어버이가 걱정없이 아이를 키우고 가르칠 터전과 삶터를 일구는 데에 올바로 돈을 써야 할 노릇입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보도블럭 까뒤집기’는 이제는 참말 그만두고서라도. 고속도로 새로 하나 더 늘리는 일은 그만두고서라도.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고속도로 하나 더 늘리지 않는다고 길이 막히지 않습니다. 고속도로 하나 덜 내면서 ‘아이 키우는 품’에 댈 보건복지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내가 학생이었을 때 나의 지도교수는 모두 남성이었는데, 그분들은 임신한 몸으로 현장 작업을 수행하는 데 대해 어떤 조언도 해 주지 못했으며, 남성 동료들과 정글 속에서 함께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아이디어도 제공해 주지 못했다 … 20세기가 이룩한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고 지내던 이웃 농장의 여성들은 그들의 삶이 어머니 또는 시어머니의 삶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고민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 일반적으로 젊은 여성들은 지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아이들, 융자금, 갚아야 할 학자금, 연로하신 부모, 일반적으로 가정 밖으로 나가려는 여성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배우자 … 이상하게도, 나는 (첫)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야 오히려 내 인생의 다른 어떤 시기보다 더 폭넓게세상의 이곳저곳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난생처음 사탕가게에 들어간 아이처럼, 가깝게는 집 근처의 하버드대학, 멀게는 내가 상상하는 한 가장 먼 곳이었던 카메룬의 야운데까지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  (19∼20, 137, 201∼202, 236∼237쪽)


 어쩌면, 아이한테는 국어니 수학이니 영어니 하는 교과목 지식이란 하나도 없어도 됩니다. 이런 지식이 없다 하여 세상 못 살아가지 않을 테니까요. 다만, 아이가 여느 큰회사 사무직 일꾼으로 일하고자 한다면, 또는 은행 일꾼이나 병원 일꾼으로 일하고자 한다면, 이런저런 지식 갈래에서는 ‘대학졸업장’을 바라고 있으며, 대학졸업장을 따려면 갖은 시험지식을 높이높이 따내어야 합니다.

 이와 달리, 아이가 큰회사 사무직 일꾼을 바라지 않는다면, 농사꾼을 바라든 글쟁이를 바라든 시민모임 일꾼을 바라든 헌책방 일꾼을 바라든 한다면, 아이한테는 사뭇 다른 앎과 삶을 깨닫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양복 차려입고 구두 신은 채 도심지 한복판에서 자가용 달려 셈틀 앞에 하루 내내 앉아서 일하기를 바란다면, 옆지기와 저로서는 크게 마음쓸 대목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제도권학교에 넣으면 그만이고, 이렇게 학교에 넣으며 두 사람은 훨씬 기나긴 말미를 얻어 두 사람 마음 내키는 대로 먼 나들이도 다니고, 책도 읽고, 다른 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면서 제 마음과 몸을 함께 살찌우는 길찾기를 하려 한다면, 어머니 된 우리 두 사람은 아이와 함께 오래도록 어깨동무를 하는 길동무가 되면서 아이한테 새길을 보여주고 우리 스스로도 새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두 사람으로서는 아이가 어느 길을 가든 아이 몫이니, 아이한테 여기로 가라느니 저기로 가면 안 된다느니 하고 손가락질을 할 마음이 없습니다.


.. 아이는 《초록색 알과 햄》을 독파했을 뿐 아니라 오레일리의 우림에 있는 여관에서는 밥 먹을 때마다 메뉴를 주르륵 읽어내렸다. 그때 동행했던 동료들도 그 일을 나처럼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부모가 된다는 것과 과학을 한다는 것, 그 두 가지 모두를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나는 버스 안에서 아들과 함께 책을 읽었던 그 특별한 날을 가능케 해 준 것이 다름아닌 과학이라는 내 일이었음을 잊지 않았다 …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열대 우림 탐사에 나선 것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 우듬지는 (아들) 에디와 제임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고, 아이들의 눈높이로 그걸 보게 된 나에게도 역시 그러했다 … 진흙투성이가 된 아이들은 원시 그대로의 우림 속에서 우림의 거주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자신들을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많은 어린이들이 열대의 진흙에 몸을 적셔 보지도, 정글 속의 모험을 즐겨 보지도 못하고 자랄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속도로 우림이 계속 파괴된다면, 우리 아이들이 누렸던 그러한 특혜도 더 이상은 불가능할 것이다 ..  (141, 259, 272, 274∼275쪽)


 우리 아이는 ‘우리 집 아이’이기 앞서 ‘한 사람’입니다. 우리 아이는 두 사람이 배앓이하고 몸앓이하면서 낳고 키우는 ‘재산’이 아닌 ‘홀로선 사랑스러운 목숨’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먼저 우리 삶을 즐기고 넉넉히 채울 일거리를 찾습니다. 우리 아이 또한 제 스스로 제 삶을 즐기며 넉넉히 채울 일거리를 찾으면 될 뿐이라고 느낍니다. 즐거운 삶은 한 가지만이 아니며, 반드시 어느 곳에 있어야만 즐거운 삶이지 않습니다. 어김없이 어떠한 일을 해야만 즐거운 삶이 아니며, 더 많은 돈을 벌든 더 적게 돈을 벌든 훨씬 보람있는 일이라 잘라말할 수 없습니다.

 만드는 삶이지 만들어진 대로 흐르는 삶이 아닙니다. 꾸리는 삶이지 틀에 맞추는 삶이 아닙니다. 몇 분 동안 기저귀를 삶고 햇볕에 몇 시간 쬐여 말린 다음 몇 센티미터로 나누어 개야 하는 빨래감이 아닙니다. 그때그때 다르며, 그때그때 알맞게 하면 될 뿐입니다. 아침에 아기 먹을 죽을 끓이고 어른 두 사람 먹을 밥을 하면서, 늘 어림으로 쌀을 푸고 콩을 퍼서 하루 동안 불려서 냄비밥을 합니다. 냄비밥을 하면서 시간을 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날그날 냄새를 맡고 김빠짐을 살피고 하면서 밥물을 맞추고 밥을 할 뿐입니다.


 (3) 《나무 위 나의 인생》이라는 책은


 ‘마거릿 D.로우먼’이라는 분이 쓴 책, 《나무 위 나의 인생》을 읽습니다. 식물학자라고 해야 할까, 생물학자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과학자인 글쓴이입니다. 그러나 글쓴이는 깊이 생각을 하지 않는 가운데 덜컥 혼인을 하면서 호주 시골에서 아이를 둘 낳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엄마가 되면서 과학자였던 당신 삶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호주에 있는 (옛) 남편이나 시어머니나 마을사람들은 당신이 과학자였든 아니든 ‘이제부터는 시골 농장을 일구며 아이를 돌보는 엄마일 뿐’이라고만 외칩니다.

 이에, 글쓴이는 아이 엄마로서도 훌륭히 살고 싶지만, 아이 엄마이기 앞서 ‘마거릿 D.로우먼’이라는 제 이름에 걸맞는 과학자로 걸어가려던 당신 길 또한 훌륭히 걷고 싶어서 마음앓이를 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앓이를 고이 간직하면서 지내고 길찾기를 하면서, 드디어 ‘20세기, 아니 21세기에도 버젓이 살아남아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더 거세게 휘감고 있다 할 남성가부장권력’을 박차고 나옵니다.


.. 나의 부모님은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차를 타고 가다가 내가 무언가 건질 만한 것을 발견하면 언제라도 차를 세워 주실 만큼 이해심이 깊으셨다. 어머니는 무척 끔찍해 했지만, 내 침실 작은 장에는 생쥐가 살았다. 생쥐들은 나의 수집품 가운데 하나였던 자연 섬유들을 아주 좋아했는데, 그것으로 북부 뉴욕의 추운 겨울을 나게 해 줄 둥지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이 내려준 소중한 선물로 나의 삶은 은혜로웠고, 나의 수집품은 과학적 호기심의 토대가 되었다 ..  (12쪽)


 《나무 위 나의 인생》은 과학자로서 한길을 걷는 사람 이야기를 하나 선보입니다. 다음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올바르며 곧은 길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보며 가누어 본 ‘사람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톺아보았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삶터가 한 사람을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한 사람으로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하려면 어떡해야 할까를 가슴 깊이 되뇌었던 이야기를 펼쳐 보입니다.


.. 숲 우듬지 속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많은 비밀들이 숨겨져 있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우리들이 가진 과학적 데이터들을 유권자, 경제학자, 정치가들, 즉 천연자원의 보존과 관련된 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쓰는 일상적 언어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나는 미래에도 나의 아이들이 그 속에서 즐거이 뛰놀 수 있는 자연림이 남아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나는 일반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과학자들의 능력이야말로 숲의 보존을 좌우할, 절대적으로 중요한 변수라는 걸 알고 있다 ..  (304쪽)


 저로서는 《나무 위 나의 인생》이라는 책에서 네 가지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다섯째 이야기와 여섯째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옆지기가 이 책을 함께 읽어낸다면, 또 우리 아이가 커서 이 책을 새롭게 읽어낸다면 일곱째와 여덟째 이야기가 나타날 테지요.

 그때그때 읽는 사람에 따라, 《나무 위 나의 인생》은 다 다른 이야기를 우리한테 베풀어 줍니다. 어떤 사람한테는 네 가지 아닌 한 가지 이야기만 느껴질 테고, 어떤 이한테는 한 가지조차 느껴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책이란, 읽는 사람 몫이기 때문입니다. 쓰는 사람은 온삶과 온마음을 쏟아낸 책이지만, 읽는 사람 스스로 ‘책을 쓴 사람 삶’과 같은 자리에 서면서 헤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해, 아무것도 빨아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많은 여성들이 길에 놓인 장애물들을 피하느라 먼 길을 돌아왔다. 현장 생물학에서 내가 여성으로서 부닥쳐야 했던 어려움들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나를 단련시켰고, 내게 확고한 신념을 심어 주었다 … 나고, 자라고, 썩고, 다시 재생하는 잎처럼, 나도 개인적인 생활에서나 직업적인 길에서나 그러한 과정을 경험했다 … 불평을 하는 대신 소리 지르는 법을 배우라, 그것이 내가 배운 가장 값진 가르침이었다 ..  (305쪽)


 두 아이 키우는 여자 과학자 삶으로, 참 눈물겹고 애틋하며 딱하지만 힘차고 다부지고 당찬 이야기로 《나무 위 나의 인생》이라는 책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 삶터에서 ‘아이 키우는 엄마’들이 어떠한 삶인가를 헤아릴 수 있고, ‘아이 키우는 아빠’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삶인가를 짚을 수 있습니다. 글쓴이는 나무를 타고 우듬지를 돌아보면서 당신 삶을 찾았는데, 우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우리 삶을 찾을 수 있을까요. (4342.7.7.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는 폭력이다 - 평화와 비폭력에 관한 성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윤정 옮김 / 달팽이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하나 113 ― 오늘날 정부와 권력자는 폭력덩어리일 뿐이다
 : 레프 톨스토이, 《국가는 폭력이다》


- 책이름 : 국가는 폭력이다
- 글 : 레프 톨스토이
- 옮긴이 : 조윤정
- 펴낸곳 : 달팽이 (2008.7.25.)
- 책값 : 12000원


 (1) 머리 아프도록 읽는 책 하나


 이제는 사라진 잡지 가운데 《샘이 깊은 물》이 있습니다. 이 잡지를 이끌어 나간 ‘설호정’이라는 분은 1992년부터 1995년 사이에 〈이 인물의 대답〉이라는 꼭지를 꾸렸고, 이 꼭지에서 설호정 편집장은 당신이 만나본 사람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한 구석을 꼬치꼬치 파고들면서 깊이있는 이야기를 이끌어 냈습니다. 설호정 편집장한테 꼬치꼬치 대꾸를 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힘겹고 고단하고 짜증스러울 수 있을는지 모르나, ‘설호정이라는 사람까지도 뭔가 속시원히 풀리지 않는 대목이 보이고 느껴지기 때문에 환히 밝혀질 때까지 파고들어 캐낸다’는 흐름이었습니다.

 1992년 9월치 《샘이 깊은 물》에서는 〈이 인물의 대답〉 꼭지에서 《녹색평론》을 펴내는 김종철 교수와 만나보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이 자리에서 김종철 교수는 설호정 편집장이 꼬치꼬치 묻는 말에 벌컥 성을 내며 소리를 높였다고 하는데, 그래도 설호정 편집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더 가시돋힌 말을 묻고,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잡지 《샘이 깊은 물》을 읽는 사람들로서는 ‘1992년에 막 새로 나온 환경잡지 《녹색평론》은 뭐를 하려는 책인가?’ 하는 궁금함을 많이 풀 수 있습니다.

 물음을 받는 분으로서는 괴롭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괴로운 물음을 받아야 서로서로 발돋움합니다. 우리 스스로 못 느끼는 내 모자람과 어리숙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슬그머니 넘어갔거나 대충 흘려보낸 어설픔과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어요.

 이를테면, 김종철 교수가 너무 뜬구름잡듯 ‘철학적ㆍ추상적 이론’만 늘어놓고 있다 보니 설호정 편집장은 “사실 무슨 이념을 펼치는 데는 정권을 장악하는 게 최선 아닙니까?” 하고 한 마디를 쏘아붙입니다. 그러며 “지구의 광범위한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미국 식의 소비 문화가 지속될 터인데 개인 몇 만 명이 책을 통해서건 명상이나 직관을 통해서건 각성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닙니까?” 하고 덧붙입니다. 이때 김종철 교수는 성남을 참지 못하고, “그거는 그야말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세뇌된 논리입니다. 저는 종교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이지만 예컨대 예수라는 존재가 하나 있었기 때문에 인류가 얼마나 변했습니까?” 하고 대꾸하는데, 설호정 편집장은 거침없이 “장기적으로는 그런 소수가 인류를 의미있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는 있기도 하겠지만, 이런 식의 개발 일변도로는 세계는 백 년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하고 따지고, 다시금 “모든 사람이 부처 될 만한 싹수를 가졌다고 해서 부처가 된다는 법도 없고, 또 되더라도 아주 장구한 세월이 필요할 것 같고, 그때가 되기 전에 세상은 이미 든 망조 때문에 망해 버릴 것 같다는 말입니다.” 하고 못을 박습니다.

 이에 김종철 교수는 “그건 오만한 얘기예요. 우리가 당장 부처입니다. 또 지금 지구가 망하느냐, 안 망하느냐, 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을 안 한다든지 그건 불필요한 얘기라고 생각해요…….” 하고 말을 잇지만 그리 가슴에 와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들, 김종철 교수가 하는 이야기는, 일찌감치 설호장 편집장이 몸을 담았던 ‘전두환이 없앤 잡지’인 《뿌리 깊은 나무》에서 해 왔던 일인 한편, 지금 편집장으로 몸담은 《샘이 깊은 물》에서도 하기 있기 때문입니다. 설호정 편집장은 당신이 몸소 겪어 왔을 뿐 아니라 헤쳐나가고 있는 일을, ‘설호정 당신 눈과 머리’가 아닌 ‘환경잡지라는 빛깔있는 목소리로 한길을 걸어가려는 다른 사람 눈과 머리’가 무엇인가를 듣고 싶어 이렇게 물었지만, 김종철 교수는 이때까지 제대로 당신 생각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 오늘날 정부와 지배 계급은 정의 아니면 권리 비슷한 것에조차 기초해 있지 않고, 오로지 발달된 과학의 도움으로 정교하게 고안된 조직에 의존하고 있다 ..  (21쪽)


 올해는 2009년입니다. 1992년부터 열일곱 해가 흘렀습니다. 2009년 오늘날 《녹색평론》은 ‘대구 변두리’를 떠나 ‘서울 한복판’으로 일터를 옮겼습니다. 어느덧 열일곱 해가 지난 이야기인데, 열일곱 해 사이, 서울 한복판에서 환경잡지를 펴내는 《녹색평론》 김종철 교수 생각과 삶은 어떻게 거듭났을까 궁금합니다. 오늘에 와서 지난날 물음에 대꾸를 해야 한다면 어떤 말씀을 펼치실까 궁금합니다.

 설호정 편집장은 “저와 같은 패배주의자들한테 들려주실 수 있는 얘기이기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으로 말하자면 이 책을 탐독하기 시작한 뒤로 구체적으로 훨씬 더 패배주의자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속되게 말해 고민만 늘었다는 말이지요.” 하고 말합니다. 김종철 교수는 “자꾸 사람을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건 제가 상당히 성공하고 있다는 얘기 같은데요?” 하고 묻습니다. 설호정 편집장은 “그런데 이런 책이 진실로 성공하려면 저 같은 사람이 실천에까지 이르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책에 제시되는 문제들을 끊어버릴 힘이 제겐 없습니다.” 하고 한 마디 받아칩니다.

 두 어른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아주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더구나 열일곱 해 만에 다시 읽는 저는 피식 웃습니다. 쓴웃음이 저절로 새어나옵니다. 그러면서 제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제가 읊는 말마디가 나 스스로 내 삶을 고쳐 나가는 말마디인가를 돌아보게 되며, 내 말마디를 듣는 이웃이 당신 스스로 당신 삶을 고쳐 나가는 말마디로 받아들일까를 돌아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 노동자에게 땅이 없고 게다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양식을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권리조차 없다면, 그것은 그가 그런 상황을 바랐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람들(지주들)이 노동 계급한테서 땅과 그 권리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이 비정상적인 사물의 질서는 군대에 의해 지탱된다 … 모든 정부와 통치 계급은 기존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제도는 결코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마련된 게 아니며,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며 오로지 정부와 통치 계급에게 봉사한다 … 군비와 전쟁을 위해 사람들에게서 징수한 세금은 군대가 보호한다고 하는 노동 생산물의 대부분을 앗아간다. 또 전 남성 인구가 평소 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서, 노동의 가능성 자체가 상실된다. 언제라도 발발할 수 있는 전쟁의 위험 때문에 사회적 삶의 개선은 헛되고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 … 정부는 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군대는 주로 국내에서 억압적 통치를 하기 위해 필요하고, 군대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국민에 대한 정부의 폭력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 … 병역 의무를 져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국가의 의미에 대해 성찰해 보아야 한다 ..  (35∼40, 44쪽)


 퍽 긴 꼭지로 마련한 〈이 인물의 대답〉이 막바지에 이를 때, 설호정 편집장은 가장 날카롭게 파고드는 말 한 마디를 묻습니다. “《녹색평론》의 이념을 선생님은 삶에서 어느 정도 실천하세요?” “대부분 못하죠. 그러니까 《녹색평론》은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실천하시는지.” “가급적이면 외식 안 하려고 하고.” “보신주의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보신주의 나쁠 거 없어요. 나한테 좋은 게 지구한테도 좋은 거예요. 또 고기 안 먹고. 제 생활은 간단하게 단순하게 살고. 여행을 잘 안 하고. 거의 안 합니다.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집하고 여기하고 학교하고밖에 왔다갔다 안 하고. 또 식구한테 빨래 자주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빨래 해결해야 되는 과제가 아파트로부터 나와야 하는 일입니다.” “선생님 가족들이 공감하세요?” “내년이면 애들이 다 우리를 벗어납니다. 대학을 가니까.” “서울로 간단 말이죠?”

 김종철 교수는 2009년에는 ‘아파트를 벗어나셨’는지, 그리고 당신 잡지에 실은 이야기 가운데 ‘거의 하나도 실천을 못했다는 대목 가운데 어느 대목을 실천하고 있으’신지 궁금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대목을 궁금해 하기보다는, 어딘가 뒤끝이 많이 남는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합니다. 왜 스스로 못하는 일을 ‘마치 스스로 하고 있는 듯 느껴지도록’ 글을 쓰고 생각을 하고 책을 내고 해야 할는지요. 왜 우리 스스로 즐겨하고 좋아하는 일이 아닌, 머리로만 굴리는 일을 해야 할는지요.

 저는 아파트가 싫고 텔레비전이 싫어 부모님 집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부모님께서 저한테 당신 아파트(이제는 전원주택이 되었습니다)를 물려주실는지 안 물려주실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저로서는 부모 재산을 물려받을 마음이 없습니다. 옆지기 또한 내가 내 부모한테, 또 옆지기는 옆지기 부모한테 재산을 물려받을 까닭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책이 제대로 못 읽히는 나라에서 책을 제대로 느끼도록 돕는 일을 하는 도서관 운동’을 하기 때문에 일부러 인천에 남아 있지만(인천이 우리 나라에서 책을 가장 안 읽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아닌 골목동네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자연이 아닌 기계와 시멘트와 석유로 온통 가득한 터전에서는 우리 스스로 숨이 막힙니다. 이리하여 텔레비전은 마땅한 노릇이고, 세탁기나 냉장고나 이런저런 가전제품을 처음부터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우리 몸에 알맞게 씻고 빨래를 합니다. 굳이 맛난 바깥밥을 찾아 먹으러 돌아다니지 않으나, 밖에서 밥을 먹어야 할 때에는 옳고 바르게 애쓰는 집을 찾아서 즐겁게 먹습니다.

 환경운동이란, ‘환경운동’이라는 이름이 붙기 앞서에도 언제나 있어 왔던 일이니까요. 지식 있는 분들이 환경운동을 외치고 환경모임을 열고 환경책을 펴내기 앞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자연 삶터와 사람 삶터를 고루 사랑하는 매무새를 고이 지켜 오셨으니까요.


.. 왜 이런 죄수 같은 일을 하냐고 내가 묻자 그들은 “그럼 뭘 한단 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하지만 왜 36시간을 쉴 새 없이 일하는 겁니까? 작업을 교대제로 할 수는 없나요?”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에요.” “그래요. 하지만 왜 그저 시키는 대로 하냐 이겁니다.”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죠. 보나 마나 ‘싫으면 그만둬.’라고 할 거라구요. 작업에 한 시간이라도 늦으면 당신에게 허가증을 집어던지며 나가라고 하죠. 당장 일할 수 있는 사람이 10명은 된다구요.” … 노예 주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차 주인조차도 자기 말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은 비싸기 때문이다. 힘든 일을 시켜 값비싼 동물의 생명을 단축하는 것은 비경제적인 일이리라 … 실상 우리들, 즉 부자들, 자유주의자들, 인도주의자들, 사람의 고통뿐만 아니라 동물의 고통에도 매우 민감한 사람들은 그런 노동으로 덕을 보고 있으며, 게다가 더욱더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즉 그런 노동으로 더 큰 덕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우리는 완전히 평온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지 않은가 … 우리 주위에서 천천히 그리고 대개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에 관한 한, 그들의 노동 생산물로 우리가 편의와 쾌락을 얻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 눈을 굳게 감고 있다 ..  (105, 108, 111∼112쪽)


 옆지기는 저와 혼인하기 앞서 《녹색평론》을 정기구독하고 있었으나 지난해에 끊었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1992년) 책방에 서서 《녹색평론》을 읽었지만, ‘쉽게 누구나 하고 있는 일을 어렵고 딱딱하고 긴 글로 적는 일’은 그리 안 달갑다고 느꼈습니다.

 참다운 “푸른 이야기”라 한다면, 지식 있는 사람만 새겨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지식 없는 누구나 기꺼이 읽을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푸른 이야기”라 한다면, 나부터 오늘까지 꾸준히 이어온 내 삶을 글로 담아낼 노릇이요, 아직까지 못하던 일이라면 오늘부터 신나게 펼쳐 나가려 하는 몸짓을 실어낼 노릇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이든 정치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입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란 없습니다. 몸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남녀평등을 이루려는 운동이든 장애인 권리를 지키려는 운동이든, 입이 아닌 몸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환경운동은 더더욱 밑바탕이 되면서 커다란 운동인데, 환경운동이라 할 때에는 다른 어느 운동보다도 나 스스로 내 삶이 되어 가면서 말하는 운동이어야 하고, 나부터 먼저 즐겁게 한몸으로 받아들인 이야기를 내 이웃과 식구와 동무한테 스스럼없이 말하고 함께하도록 어깨동무하거나 손을 맞잡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정부는 사람들을 어린아이의 의식 수준에서 붙잡아 두기 위해 노력했다. 칭얼대는 아이에게는 돌봐 줄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 당신들은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 우리를 파탄에 몰아넣는다. 세금으로 함대를 유지하고 무장을 강화하고 전략적 철도를 건설하지만, 그것은 당신들의 야망과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 토지 재산을 보호하고, 그 결과로 지가가 상승하는 일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좁은 공간 안에 와글와글 모여 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직 세계에 넘쳐나는 자유로운 땅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 싸움에서 유리한 자는 땅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언제나 정부의 폭력에 참여한 사람이 된다 ..  (157, 159쪽)


 책을 읽는 손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가슴이 어둡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눈에서 뗄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그러하나 책을 내 삶에서 떨굴 수 없습니다. 안타깝고 아쉬운 대목이 많이 보이지만 《녹색평론》을 내치지 못하는 한편, 《뿌리 깊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린 잡지 《샘이 깊은 물》을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하나하나 찾아내어 차곡차곡 갖추어 놓고 틈틈이 다시 꺼내어 읽으며 내 오늘날을 돌아봅니다.


 (2) 몸이 아프도록 돌보는 목숨 하나


 옆지기는 엊그제부터 아기 ‘오줌 가리기’를 시키려고 애씁니다. 열 달을 넘어간 아기가 이제부터 차근차근 오줌 누기를 가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기는 아직 변기에 앉아 쉬를 할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이웃 분들 말씀으로는 ‘바지를 벗기고 있으면’ 얼마쯤 방바닥 닦느라 애먹겠지만 이내 쉬를 가릴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아기도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 준다면, 아기 기저귀 빨래에서 한 시름을 놓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기 기저귀에서 한 시름 놓인다고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다른 빨래가 새 시름으로 다가오리라 느낍니다. 아기 옷가지가 부피가 커질 테며 신발도 있을 테니까요.


.. 애국심을 조장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 참되고 올바른 애국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까지 들은 바가 없다 … 애국심은 자기 국민만을 사랑하는 감정이며, 자기 마음의 평정, 재산을 희생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며 적들의 침략과 학살로부터 자기 국민을 보호한다는 신조이다. 애국심은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침략하고 학살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던 당시의 개념이다 … 애국심과 그 결과(전쟁)는 신문사에 엄청난 수입을 안겨다 주고, 다른 많은 업계도 이로부터 이득을 챙긴다. 작가나 교사, 교수 등 직업이 안전한 사람일수록 더욱 열정적으로 애국심을 찬양한다. 왕과 황제는 더 큰 명성을 얻을수록 애국심에 더 깊이 빠져든다. 지배 계층은 군대, 돈, 학교, 교회, 언론을 손안에 쥐고 있다. 그들은 학교 역사 수업에서 그들 민족이 최상의 민족이며 언제나 옳다고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이식한다 ..  (51, 57, 59쪽)


 아기 먹일 죽을 날마다 새로 끓이고, 아빠 엄마 먹을 밥 또한 날마다 새로 끓입니다. 빨래하는 데에도 한짐이요, 밥하는 데에도 한짐입니다. 그렇다고 아기가 밥을 낼름낼름 받아먹어 주느냐?

 저로서는 제 어릴 적을 떠올리지 못하지만, 저 또한 우리 아기처럼 우리 어머니를 고달프게 했을지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보나 마나 제가 아기였을 때에도 어머니를 몹시 고달프게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웃집에서는 ‘뭘 그리 힘들게 아이를 키우느냐’고 하지만, 우리 어버이나 이웃 어르신이나 아이를 낳아 키울 때 어려움과 고단함 없던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아이 키우는 고단함이 있으니 아이 키우는 보람이 있지 않느냐 싶어요.


.. 공장 일꾼, 나아가 일반적인 도시 노동자들이 감수하는 비참한 환경은 오랜 노동 시간과 적은 보수가 아니라, 자연과 접촉하는 정상적인 환경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기고,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 강제적이고 단조로운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한다 … 세상의 모든 현자와 시인들은 인간 행복의 이상을 언제나 농촌 생활의 조건 안에서 찾고 있다. 또 생활 습관이 왜곡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경우, 무엇보다 농업 노동을 선호하고 있으며, 공장 일이 언제나 유해하고 단조로운 반면 농업은 건강하고 다양성을 제공하는 일이다. 농업은 자유롭고 농민들은 자기 마음대로 일하거나 쉴 수 있는 반면, 공장 일은 공장이 노동자들의 소유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기계 작동에 따라 일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장 일은 부차적인 반면, 농사일은 일차적이다. 농업이 없으면, 공장은 존재할 수 없다 ..  (119, 122쪽)


 아침마다 똥을 누는 아기를 씻기고, 틈틈이 아기를 안고 바깥마실을 다니며 바람을 쐴 때면 팔이며 허리며 등짝이며 쑤시고 저립니다. 아직 걸음마를 떼지 못하니까요, 그래도, 아기를 안고 골목마실을 하다 보면, 우리처럼 아기를 안고 있는 동네이웃을 곧잘 만납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지만, 마음으로는 ‘저쪽 집에서도 우리와 똑같거나 비슷하겠지’ 하는 생각이 됩니다. 마음으로 ‘힘들겠지만 힘내셔요’ 하는 인사를 보냅니다.

 아기 아빠는 바깥일 때문에 가끔 아기 엄마랑 아기만 집에 두고 서울마실을 하는데, 이렇게 홀가분한 몸이 되면 ‘이렇게 돌아다니는 일은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가?’ 하고 새삼 느낍니다. 몸이 아파 오래도록 몸져눕던 사람이 비로소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며 숲길을 걸을 때 짜릿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듯, 아기한테서 잠깐 풀려난(?) 때에 이토록 신나고 즐거운 바깥마실이 다 있었다고 느끼면서, 집에 홀로 남아 아기랑 씨름하는 옆지기한테 미안해집니다. 그러다가 ‘나 혼자만 이렇게 신나게 다녀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다음부터는 나 혼자 볼일을 보지 말고 온 식구가 다 함께 움직이자고 마음먹습니다. 칠월까지 대안학교 아이들하고 자전거 정비를 가르치고 배우는 자리는 어쩔 수 없지만, 다른 때에는 늘 함께하자고 다짐합니다.


.. 사치품은 내버려야 한다. 폭력과 자본, 발명이 불필요한 물품의 생산에 치우쳐 있는 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 필수품의 경우 누구도 일정 정도 이상은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치품의 경우는 한도 끝도 없다. 수천 톤의 금으로 집을 장식할 수 있으며, 수백만 에이커의 땅을 공원으로 조성할 수도 있다 ..  (185, 196쪽)


 이렁저렁 따지면, 혼자 살 때에 얼마나 크고 너르게 홀가분함을 누리는지 모르는 노릇입니다. 혼자 밥하고 빨래하고 살림 꾸리는 일이란, 얼마나 넉넉히 시간을 쓰며 내 삶을 가꾸는 셈인지 모릅니다. 혼인을 하면 저마다 제 시간을 빼앗긴다지만, 아이를 낳아 키울 때를 생각하면 우스울 뿐입니다.

 이러한 이음고리를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에, 적잖은 예술가와 글쟁이들은 ‘혼인 않고 아이 안 낳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느낍니다. 힘들고 고되니까, 힘듦과 고됨에 당신들 예술과 슬기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 홀로 조용히 당신들 삶을 즐기는구나 싶습니다.

 그래, 참 바보스러운 사람들이 아이 낳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 삶이든, 제 시간이든, 제 겨를이든 하나도 없으니까요. 제 삶이며 시간이며 품이며 땀이며 온통 아이한테 쏟아붓고 바쳐야 하니까요. 제 살을 깎아 주고 발라 주고 모조리 내놓아 주어야 하니까요.


..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어떤 구실에서든, 심지어 가장 흔한 처벌의 구실에서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 과거의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주로 육체노동에서 벗어나 있는 고급 직종 종사자와 이들이 이끄는 도시 노동자들이었다. 반면, 다가오는 혁명의 참여자들은 주로 농촌의 대중들이 될 것이다 … 오늘날 사람들은 별개의 자유, 즉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이런저런 형태의 선거의 자유, 결사의 자유, 노동의 자유,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자유에 관해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지금의 러시아 혁명가들처럼) 자유에 관해 매우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자유는 어떤 사람에게 그의 바람과 이익을 무시하고 어떤 행동을 하도록 요구하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  (234, 257, 270쪽)


 아이와 함께 살면서 집살림이 버겁다고 느끼지만, 버거운 만큼 새로운 길을 엿봅니다. 아이가 없었다면 한결 단출하고 홀가분하게 살림을 꾸렸을 텐데, 이렇게 살림을 꾸렸다면 우리 두 사람이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며 지나칠 숱한 일을 알게 되고 보게 되고 헤아리게 됩니다. 아이 키우는 고단함만큼 둘레사람들 고단함을 새삼스레 돌아보고, 우리가 미처 모를 또다른 숱한 고단함은 무엇일까를 살피게 됩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책 펼칠 겨를이 몹시 줄어든 만큼 아무 책이나 허투루 읽으며 나한테 애틋한 말미를 함부로 버리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 글 한 줄을 쓰면서도 더 마음을 쏟도록 해 줍니다. 동무나 이웃이 저를 볼 때면 “얼굴에 살이 쏙 빠졌네요.” 하고 말을 거는데,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아이 키우는 사람은 다 그렇잖아요. 그래도, 힘드니까 그만큼 보람이 있어요.”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3) 톨스토이 님이 남긴 《국가는 폭력이다》


 사람들한테 ‘문호(文豪)’ 아닌 ‘대문호’ 소리를 듣는 톨스토이 님 이름을 모르는 분은 얼마 없으리라 봅니다. 톨스토이 님 작품을 찬찬히 읽어 보지는 못했어도 이분 이름은 익히 알 테며, 러시아 사람들 여느 이야기를 그러모아 엮은 옛이야기 또한 온누리 사람들한테 두루 퍼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한테는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하느냐〉 같은 작품은 무척 짧은 글이요 쉬운 글이면서도 어린이부터 어른 모두한테까지 ‘내 삶에서 내가 깊이 돌아보고 사랑할 대목이 어디에 있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1930년대부터 우리 말로 옮겨지며 읽힌 이야기인데, 설익은 가르침이나 어설픈 밀어붙이기가 아닌 따뜻한 사랑과 튼튼한 믿음으로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아름다이 가꿀 길을 보여줍니다.


.. 사람들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정부가 없다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폭력과 살인을 일삼을 것이다.” 왜 그렇단 말인가? 폭력의 결과로 생겨난 조직이,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세대를 넘어 이어져 온 조직이, 이제는 아무 필요도 없어진 그런 조직이 사라진다고 해서 왜 사람들이 서로에게 폭력을 행하고 서로를 죽인단 말인가? ..  (75쪽)


 톨스토이 님 산문모음 《국가는 폭력이다》를 읽습니다. 산문모음 《국가는 폭력이다》는 무척 억세고 굳은 목소리로 오로지 한 가지 말마디를 외칩니다. “한 나라는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한테 주먹다짐만 하고 있다.”고. “사람들한테는 정부가 아닌 자치만 있어야 하며, 모든 전쟁은 정부가 일으킬 뿐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려고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다.”고. “정부는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한테 나라 지키기에 몸바치도록 이끌려 하지만, 정부가 말하는 애국심이란 다름아닌 권력자 밥그릇 지키기요, 권력자 밥그릇을 크게 키우려고 우리 뼈와 살을 온통 발라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국가는 폭력이다》는 “나라와 정부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켜야 한다.”는 말마디가 얼마나 그릇되고 잘못되고 엉터리인가를 낱낱이 밝히는 책입니다.

 《국가는 폭력이다》를 읽는 동안 조지 오웰 님 산문모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떠올랐습니다. 조지 오웰 님 스스로 파리와 런던 밑바닥에서 가난뱅이나 떨꺼둥이로 지내면서 ‘프랑스와 영국이 나라 안팎으로 내세우는 거짓된 이름과 껍데기’가 무엇인지를 밝힌 책으로, 톨스토이 님과 조지 오웰 님이 살았던 곳이 다르고, 느낀 바는 다르지만,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는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가꾸는 길에서 자꾸자꾸 멀어지고 있으며, 우리 손으로 가시울타리를 쳐 놓고 이 안에 우리 스스로 갇혀 있다고.


.. 우리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인류를 변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정작 아무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 참여는 희생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지위뿐만 아니라 형제ㆍ동포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를 원한다면, 익숙해 있는 삶의 방식을 바꾸고 그동안 누리고 있던 유리한 지위를 포기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격심한 투쟁에 대비해야 한다 … 사람들이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취해야 할 행동은 새로운 형태의 체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기 자신과 타인의 품성을 바꾸고 개선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  (88, 174, 220쪽)


 그러면, 이 나라는 이 정부는 왜 폭력덩어리가 되었을까요. 우리들은 왜 나라와 정부가 폭력덩어리가 되도록 손을 놓고 있을까요. 아니, 우리들은 나라와 정부가 폭력덩어리가 되도록 이끄는 한편 떡고물을 얻어먹고 있지는 않는가요. 얄딱구리한 나라얼개를 뜯어고치는 데에 마음쏟기보다는, 고시에 붙어 죽는 날까지 쇠밥그릇 떵떵거리면서 살아가기만을 바라지는 않는가요.

 스스로 아름답게 꾸릴 내 삶을 찾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바보가 되어도 좋으니 돈만 있으면 그만인 내 삶이 되도록 굴러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사랑과 믿음이 가득한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되도록 힘쓰지 않는 가운데, 이웃이고 동무이고 식구이고 밟고 타올라가며 내 밥그릇 두둑히 챙기면 좋다고 여기는 삶이 되도록 망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 사람들을 돕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스스로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 다른 모든 수단은 환상이다 ..  (223쪽)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아름다이 말을 하고, 아름다이 일을 합니다. 스스로 아름답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겉보기로는 예쁘장한 말을 할는지 몰라도 속알맹이까지 예쁘지 않을 뿐더러, 겉보기로만 훌륭해 보이는 일을 할 뿐, 조금도 안 훌륭한 일을 합니다. 내가 나를 돕지 않고서는 내가 발디딘 이 나라를 도울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내가 몸담은 이 마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살찌우지 않고서는 내 이웃과 동무와 식구가 오순도순 살가운 보금자리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나부터 ‘폭력덩어리’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숱한 폭력덩어리가 하나둘 뭉치면서 ‘나라와 정부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폭력덩어리’가 망나니처럼 나대고 짓찧고 까불며 법석을 떱니다. (4342.6.22.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짐
정상명 지음 / 이루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작 ‘샐러리맨’이 꿈인 사람들한테 꽃 한 송이를
 [잠깐 읽기 40] 정상명, 《꽃짐》


- 책이름 : 꽃짐
- 글ㆍ그림 : 정상명
- 펴낸곳 : 이루 (2009.5.25.)
- 책값 : 1만 원



 (1) 아픔이 낳은 풀꽃세상


 1999년에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모임인 ‘풀꽃세상’을 연 정상명 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처음부터 환경과 생태에 깊이 뜻이나 마음이나 눈길을 두고 있지는 않았다고 느낍니다. 다만 한 가지, 어릴 때부터 딱히 ‘환경과 생태를 거슬러’ 살아오지 않았을 뿐이요, 이런 매무새가 큰 아픔을 겪으면서 ‘풀꽃세상’ 모임으로 모두어졌지 않을까 싶습니다.


.. 논물 대기 공사 도중 잠시 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앵두 할머니와 앵두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슬그머니 발치에 핀 민들레 꽃대 하나를 꺾으시더니 손을 보신 후에 말없이 할머니에게 건네주었습니다. 할머니 역시 별 말씀 없이 꽃대를 받고는 곧장 입으로 가져가셨습니다. 저는 ‘민들레에 무슨 특별한 맛이 있어 그러시나 보다’ 했습니다. 제 추축은 틀렸습니다. 할머니는 두 손으로 조심스레 꽃대를 잡고는 피리를 부는 것이었습니다 ..  (48∼49쪽)


 정상명 님 딸아이 천초영 씨가 어머니인 당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아이는 갑작스레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정상명 님 딸아이가 튼튼하게 살아 있었어도 어머니께서는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모임을 열 수 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정상명 님 따님이 싱그럽고 아름다이 살아가고 있었어도 어머니께서는 환경과 생태를 걱정하는 모임을 마련할 수 있었을까 곱씹어 봅니다.

 살아 있었다면 함께 모임을 열어 꾸렸을는지 모릅니다. 살아 있었다면 그런 모임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알콩달콩 오순도순 살아가는 데에만 마음을 쏟았는지 모릅니다.

 기쁨이 꼭 기쁨이지만은 않다고 느낍니다. 슬픔이 반드시 슬픔이지만은 않다고 느낍니다. 기쁨이 슬픔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되는 일이 흔하다고 느낍니다. 기쁨을 더 큰 기쁨이 되도록 북돋우기도 하지만, 슬픔이 외려 기쁨이 되도록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지고 부딪히고 깨지고 다치면서 좀더 튼튼히 걱정없이 즐겁게 타는 길을 익히듯, 무릎이 깨지고 어깨가 까지면서 내 자전거와 이웃 자전거를 한결 너그러이 헤아리듯, 아픔이라고 꼭 아픔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숱한 아이들한테 가장 큰 아픔이라면 대학입시에서 떨어지는 일이 될 텐데, 대학입시에서 쓴맛을 본다 하여 이 아이한테 낭떠러지만 있지 않아요. 쓴맛을 보기 때문에 더욱 달콤한 맛을 보는 앞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쓴맛에만 머물며 더 고달프고 괴로운 쓴맛에서 나뒹굴 수 있겠지요.


.. 아, 그 달콤하고 싱그러운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디 맛은 보라색’이라고 … 나무의 나이는 50년이 넘은 걸로 추정됩니다. 다른 나무와 달리 가래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잎사귀를 다 떨구어 지금처럼 온몸이 완벽히 드러나는 계절입니다. 제게는 그렇습니다 … 아주머니 댁 복숭아는 특별히 맛있지는 않습니다. 딱딱한 편이고 당도도 좀 떨어집니다. 그러나 저는 언덕 위의 그 천막을 한 번 찜한 후로는 절대로 다른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제 마음을 ‘복숭아는 언덕 위의 그 천막집이다’로 정했으니 그렇게 하는 것뿐이지요. 저는 복숭아만을 먹는 게 아니고 복숭아 천막을 싸고도는 모든 풍경을 먹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51, 59, 79∼80쪽)


 문득,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당신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 아이가 부모인 나보다 먼저 죽은 일을 슬퍼하면’서 이 슬픔을 이겨내고 삭여내고자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모임을 꾸릴 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우리 옆지기가 옆지기 아버지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할 때에, ‘우리 아이한테 닥친 아픔을 견디어 내고자’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모임을 이끌 수 있을까 곱씹어 봅니다.

 글쎄요. 어떠시려나.

 모르는 노릇입니다. 자식 앞에 장사 없다는 옛말이 아니라도, 자식한테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이 아니어도, 있는 돈 없는 돈 털어 밑바닥 시민모임 하나 꾸려 당신들 눈물과 웃음을 모두 쏟아부을는지 모르는 노릇입니다.

 따지고 보면 남 일만은 아니거든요. 저와 옆지기한테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지만, 저와 옆지기 또한 우리 어린 딸아이한테 어머니 아버지 된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마치 남 일처럼 ‘내가 아버지 어머니보다 먼저 죽으면?’ 하고 생각하지만, 머잖아 ‘우리 딸아이가 우리보다 먼저 죽으면?’ 하고 생각할 날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음악을 만든 적도, 스피커를 만든 적도, 나무를 만든 적도 없습니다. 바람도 푸른 하늘도 흰 구름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비로운 자연 속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누군가가 만든 좋은 것들을 듣고 즐깁니다. 세상을 밝히는 일에 먼지만큼도 보탠 게 없는 것만 같은데 ‘공짜’로 이 모든 것을 듣고 느낍니다 ..  (70쪽)


 엊그제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된 집을 장만하지 말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아직 우리한테 돈이 없어서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한다고 여길는지 모르나, 앞으로 우리한테 돈이 있게 되어도 집없는 사람으로 살림살이를 잇고 싶은 마음입니다. 집 하나 장만할 돈으로, 어쩌면 정상명 님이 했듯이 우리 깜냥껏 조그마한 시민모임을 열 수 있습니다. 집 하나 장만할 돈을 벌게 된다면, 이 돈으로 도서관 지킴이 한 사람을 두고 한 주 내내 도서관을 열어 놓고 알차게 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 하나 장만할 돈이 모였을 때에 집을 장만한다면 우리는 다른 어느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 집이 있다’로 끝납니다. ‘달삯 나갈 걱정’은 안 하지만, ‘목돈으로 더 널리 나눌 일’은 한 가지도 못하고 맙니다.


.. 사람들은 거의 모두 도시에서 이름난 좋은 직장에 다니기를 소망합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렸을 때부터 엄청 시달립니다. 코흘리개를 겨우 면한 아이들에게 영어 과외를 시킨다, 영재 교육을 시킨다, 고액 과외를 시켜 좋은 대학에 보낸다, 난리입니다. 강남의 집값이 죽자고 오르는 이유가 좋은 학교가 몰려 있어서 거기 살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지요. 그리고 공부 잘해 좋은 대학 나와서 일류 기업에 취직을 하지요. 거칠게 말하면, 코흘리개부터 시작한 공부라는 게 겨우 샐러리맨 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걸 성공으로 여기는 우리 시대가 생각해 보면 너무나 초라합니다 ..  (181쪽)


 풀꽃세상 모임을 열고, 풀꽃평화연구소를 꾸리는 정상명 님이 펴낸 산문모음 《꽃짐》을 읽으면서, 조그마한 환경모임 ‘풀꽃세상’을 새삼 돌아봅니다. 정상명 님한테는 더없는 아픔이 있어 시민모임을 열 슬기를 얻었다지만, 이러한 슬기를 얻었다 할지라도 여느 때부터 곧고 바른 생각과 몸짓으로 당신 삶을 엮어 오지 않았다면, 사뭇 다른 길을 걸었으리라고.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일이 발판이 되어 크게 거듭나거나 달라지기도 한다지만, 마음속 한켠에 고운 풀씨 하나 깃들어 있지 않았다면 풀꽃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는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으리라고.


 (2) 산문모음 《꽃짐》


 산문모음 《꽃짐》을 읽습니다. 아이를 보며 책을 읽자니, 214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을 덮기까지 닷새가 걸립니다. 읽다가 덮고 기저귀를 갈고, 읽다가 덮으며 아기를 어르고, 읽다가 덮으면서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


.. 저는 할머니가 빨래하시는 모습을 참 좋아했습니다 … 추억이니 그리움이니 하면서 항아리에 의미를 붙여 귀히 간직할 수도 있지만, 편안하게 무시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 무심함은 아마도 나이가 주는 선물인지도 모릅니다 … 지금부터 30년 전에 충청도의 고요했던 소도시 대전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채송화니 분꽃이니 하는 꽃들이 어느 집에나 풍성했고 인구가 적어 거리는 늘 비어 있었는데, 이따금 짐을 한두 덩이 실은 말 달구지가 꿈결처럼 지나가던 곳. 목척교 아래에는 맑은 물이 흘러가고 냇가 한편에서는 양잿물을 넣은 커다란 무쇠솥이 걸려 있어 무럭무럭 솟아나는 김 속에서 옥양목 빨래들이 희디희게 삶아질 때 ..  (86, 93, 205쪽)


 산문모음 《꽃짐》을 덮으면서, ‘정상명 님은 글을 썩 잘 쓰는 분이 아니구나’ 하고 느낍니다. 좀 엉성하고 어설픕니다. 왜 이러한 글을 썼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심심한 글은 아니요, 시시한 글도 아닙니다.

 수수한 이야기거리에서 수수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글입니다. 자그마한 글감에서 자그마한 아름다움을 받아들인 글입니다. 돋보이지 않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삶을 건드리는 글이요, 스스로 돋보이고자 하지 않는 자리에 선 한 사람으로서 제 삶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 결혼한 후 저희 집 아이들이 ‘국민학교’에 다닐 때도 날씨는 매우 추웠습니다. 너무 추운 날이면 애들을 학교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 강추위에 여리디여린 것들이 두 볼이 시퍼렇게 얼어터지면서까지 학교에 가서 배울 게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지요 ..  (108쪽)


 책 겉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짐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되었습니다.” 하고 한 줄이 적혀 있습니다. 책이름 ‘꽃짐’이란 꽃송이가 짐이 되었다는 이야기일 테고, 정상명 님 당신한테 닥친 짐은 오래도록 부대끼고 지켜보고 돌아보는 동안 ‘쇳덩어리로 이루어진 짐이 아니라 꽃송이로 가득한 짐’이었다고 느꼈다는 소리이구나 싶어요.

 그래, 짐입니다. 무겁다고만 보았던 짐입니다. 그런데, 짐이었습니다. 무겁지는 않았으나 그 무게란 킬로그램 숫자로 재는 짐이 아니라, 당신 마음밭을 건드리는 짐이었어요. 당신 정상명 님 마음밭이 얼마나 넉넉한지를 돌아보도록 하는 짐이었고, 당신 정상명 님이 앞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이웃하고 어울리고 너른 자연하고 어깨동무를 하면 좋은가 하고 깨닫도록 일깨우는 짐이었습니다.


.. 어떤 한 작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정신세계로 들어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단돈 몇 푼을 내고 ‘위대한 작가’라고 일컬어지는 분들의 평생에 걸친 인간과 생에 대한 탐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  (118쪽)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산문모음 《꽃짐》은 밋밋합니다.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예쁜 말이나 그림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뽐내려 하지 않고, 동무와 이웃 등을 밟고 올라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모습 그대로 고이 앉아 있으려고 합니다. 그예 그 자리에 고스란히 뿌리를 내리려고 합니다.

 혼자 지려는 짐이 아니요, 남한테 들씌우는 짐이 아닙니다. 함께 짊어지자는 짐입니다. 함께 들고 가자는 짐입니다. 무거우니 함께 들자는 짐이 아니라, 가뿐하고 어여쁘기에 함께 들고 가자는 짐입니다. 싱그럽고 아름다우니 함께 어깨동무를 하면서 천천히 나누어 들고 가자는 짐입니다.

 아무래도, 잘난 척하지 않는 꽃짐이 되자면, 또한 스스럼없는 꽃짐이 되자면, 글이 좀 못생겨야 할 테지요. 글이 좀 투박해야 할 테지요. 글이 좀 가벼워야 할 테지요. 더없이 풋풋하게 펼쳐진 들꽃 한 송이 같은 《꽃짐》입니다. (4342.6.19.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
폴 인그램 지음, 홍성녕 옮김 / 알마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중국은 부자나라가 되고자 티베트를 짓밟는다
 [잠깐 읽기 37] 폴 인그램,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


- 책이름 :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
- 글 : 폴 인그램
- 옮긴이 : 홍성녕
- 펴낸곳 : 알마 (2008.7.31.)
- 책값 : 19800원



 (1) 티베트를 바라보는 눈길


 사진을 찍는 분들 가운데 티베트나 몽골이나 인도에 다녀오는 분이 꽤 많습니다. 티베트나 몽골이나 인도에 다녀오면서 찍는 사진은 으레 ‘티없이 맑게 웃는 어린이’와 ‘주름이 깊게 팬 늙은 할배’와 ‘가난하고 꾀죄죄한 가운데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어여쁜 아가씨’와 ‘울긋불긋한 빛깔로 꾸며진 불교 문화 발자취’이곤 합니다. 때로는 ‘가난과 따돌림이 흠씬 묻어난 뒷골목’ 모습을 담아 오곤 합니다. 스무 해 앞서고 이와 같았고 오늘날도 이와 같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런데 사진만 이러하지 않습니다. 티베트 이야기나 몽골 여행기나 인도 순례기는 이 사람이 쓰든 저 사람이 쓰든 한결같습니다. 다른 눈길을 느끼기 어렵고, 깊은 눈썰미를 찾을 수 없으며, 너른 눈매를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눈에 보이는 모습, 한자말로 하자면 ‘현상’은 잘 담아내지 않았느냐 할는지 모르나, 티베트사람 삶을 겉스쳐 훑으며 담는 ‘현상’이란 그저 ‘겉스친 현상’이지, 삶이 아닙니다. 골목길을 담는 사진이든 도심지를 찍는 사진이든 매한가지인데, 골목길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나를 느끼면서 담는 사진과 골목길 풍경을 구경꾼으로 담는 사진은 사뭇 다릅니다. 사진기를 들기 앞서 ‘그곳은 그러한 곳이야!’ 하고 지레 생각을 굳혀 버리고 ‘그런 모습을 찍어야지!’ 하는 가운데, ‘그곳이 어떻게 흘러왔고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는 못 봅니다. 못 느끼니 못 보고, 알려 하지 않으니 볼 수 없으며, 얼핏 알아도 살갗으로 스며들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수많은 골목길 사진은 거의 어느 한 가지도 ‘골목사람 눈길이나 눈높이’인 적이 없으며, ‘골목사람 삶’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골목사람 스스로 사진기를 들어 내 이야기는 내가 담는다고 하면 달라질 텐데, 골목사람은 스스로 사진기를 들지 않아 왔습니다. 사진기 들 겨를이 없었고, 사진기 장만할 돈이 없었으며, 사진기를 굳이 들어야 할 까닭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싱그럽고 즐거운 삶이요, 나날이 고단하고 힘겨운 삶일 뿐입니다. 누구한테 내보이거나 자랑하려고 꾸리는 삶이 아니며, 누구한테 숨기거나 감추거나 덮어놓는 삶 또한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보려 하지 않아 그렇지, 티베트는 우리 나라에도 있고 몽골은 우리 둘레에도 있으며 인도는 우리 삶자락 어디에나 있습니다.


.. 1949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에 진입하기까지 식량생산을 위한 티베트 민족의 토지 사용은 지극히 균형과 상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중국이 보이고 있는 서구인과 같은 방자한 자연개발의 태도가 없었고, 자연적 기근은 최근까지도 전혀 알려진 바 없다 … 티베트어 교육을 격려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중국어에 통달하지 못하는 한 아무런 직업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자 언어의 사용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많은 장소에서 티베트어를 사용해도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며, 여러 곳에서 중국어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중국은 현재까지도 티베트인 부모가 아이들에게 티베트 이름을 지어 주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 중국 정부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티베트의 평균수명은 여전히 약 40세에 그치고 있다 … 의료혜택의 우선권은 중국인과 티베트 공산당원에게 주어진다. 고통당하고 있는 티베트인이 병원시설로부터 거절당하는 일은 다반사이며, 심지어는 치료가 필요한 중국인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면 침대에서도 쫓겨나고 있다 ..  (36, 93, 101∼103쪽)


 티베트는 식민지 나라입니다. 중국이 쳐들어와 식민지로 삼고 있는 나라입니다. 일본이 한국과 대만과 여러 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듯, 중국은 멋대로 티베트에 군화발을 들이밀고 탱크를 밀어붙여, 티베트를 아주 조각조각 뜯어먹고 있습니다.

 한국과 대만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이 한국과 대만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히고 품을 울궈냈듯, 중국은 티베트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히고 품을 울궈냅니다. 일본이 한국과 대만에 있던 지하자원이며 문화재이며 곡식이며 나무이며 어마어마하게 빼앗아 가 버렸듯이, 티베트는 중국한테 지하자원을 빼앗기고 문화재를 빼앗기며 곡식이며 나무를 빼앗깁니다.

 유럽은 유럽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식민지를 거느리며 제 나라 살림을 키웠습니다. 중국은 중국대로 티베트를 식민지로 거느리며 제 나라 살림을 키웁니다. 그리고 한국 또한 한국대로 돈없고 힘없는 나라에 공장을 세우며 공해를 내다 팔며 돈을 버는 한편, 돈없고 힘없는 나라 사람들 품을 헐값으로 받아들여 경제발전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 공산당이 중국의 권력을 잡기 전에도 중국의 무장군대는 동부 티베트의 넓은 지역에 걸쳐 침입해 왔다 … 중국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벌어지는 식민지 해방투쟁은 격려하면서도 자국 안팎에서 티베트 민족이 제기한 요청은 계속 부정했다 … 북부 인도 다람살라의 티베트중앙사무국이 최근 실시한 세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 40년 동안 중국의 티베트 점령의 결과로서 고문사 당한 10만 명을 포함하여 120만 명 이상의 티베트인이 사망했다. 1982년 이사이불교평화회의 국제사무국의 달지트 센 아델은 최근 30년 동안 약 4백만 명의 불교인이 캄보디아와 티베트에서 살해당했다고 추정한 바 있다. 현재 드러난 증거로 볼 때 그의 추정치는 정확한 것으로 인정된다 … 많은 티베트인이 자신들의 집이 어느 때나 수색당할 수 있고, 자신들이 체포당하여 고문당하고 처형당할지 모른다고 여기며 생활의 상당 부분을 거의 영원한 공포의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데서 오는 신경장애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  (43, 45, 74, 114쪽)


 2000년대를 넘어선 오늘날, 프랑스가 지난날 어느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는지를 짚어낼 줄 아는 사람은 그리 안 많습니다. 독일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줄은 그럭저럭 알는지 모르나, 이 또한 왜 일으켰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영국은 얼마나 넓게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는지,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어떠했으며, 이탈리아는 무슨 짓을 해 왔는지 헤아리는 사람은 몇 안 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질이 왜 포르투갈말을 쓰는지 생각해 보는 사람이 적습니다. 중남미에서 왜 스페인말을 쓰는지 알아보려는 사람 또한 적습니다. ‘체 게바라’가 왜 스페인 이름을 얻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칠레사람들 가슴에 깊이 서린 노래꾼 ‘빅토르 하라’가 왜 빅토르인지 곱씹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요.

 꼭 이러하기 때문은 아니지만, 베트남 빵집에서 ‘프랑스 빵’을 무척 잘 굽는 까닭을 모르거나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우리 말에 일본 한자말이 많이 스며든 까닭에다가 일본책이 대단히 많이 옮겨지는 까닭을 곰곰이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 1950년경 티베트 전역에는 6000개 이상의 수도원ㆍ사원과 약 60만 명의 승려가 있었다. 1979년경 대부분의 비구와 비구니는 죽거나 실종되었고, 남겨진 수도원은 겨우 다섯 개에 불과했다. 그나마 남은 수도원들도 망가진 상태였다 … 중국은 티베트의 수도원과 사원을 고의적ㆍ조직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특별 팀이 여러 가지 귀중한 종교 물품을 골라 티베트 밖으로 반출하고 나면 건축물은 숙련된 솜씨로 폭파되었다. 반출된 물품의 상당수가 외국의 교환시장에서 팔려나가, 중국이 문화재보다 더 필요로 하던 외화를 벌어들였다 … 10대 중국인 살인자들이 유구한 불교문화의 유산을 파괴해도 좋다는 거의 백지위임장과 다름없는 구너력을 가지고 나라를 휘젓고 다녔기 때문에, 시민과 사회의 혼란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라싸에서 그들이 벌인 광란을 뒤로 하고 홍위병들은 콩포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포워 트라모에 살고 있던 나무꾼 400명의 딸들을 야만스럽게 강간했다. 소녀들은 벌거벗긴 채로 행진해야 했고, 탐징(인민재판)을 통해 처벌당했다. 이 잔혹함과 모욕에 울화가 치밀 정도로 무력했기 때문에 많은 티베트인이 자살을 택하고 말았다 ..  (48, 50, 65쪽)


 지난 2004년, 《티벳전사》라는 책 하나가 우리 말로 나왔습니다. 티베트사람이 티베트 이야기를 쓴 책 가운데 우리 말로 옮겨진 책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우리 나라에 나오는 티베트 이야기라면 하나같이 ‘티베트 불교’하고 ‘티베트 의학’뿐이지만, 이마저도 몇 권 안 되는데, 《티벳전사》는 티베트사람이 중국한테 어떻게 밟히고 있으며 어떻게 맞서는가 하는 이야기를, ‘티베트사람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처럼 우리(티베트) 문화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들려줍니다. 다만, 눈여겨보는 사람이 적고, 알아보는 사람 또한 드뭅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티베트 여행이나 순례는 떠난다 할지라도 티베트 역사와 문화를 먼저 살펴보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티베트를 다녀왔어도 그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거나 흘러가는가까지 살펴보려는 사람 또한 드물어요. 중국 정부가 감시와 통제를 모질게 해서 알아채기도 힘들다지만, 알아보려고 애쓰면 못 알아보겠습니까.


.. 중국의 티베트에서의 환경정책의 비정상성을 대표하는 사건이 있다. 중국인 홍위병이 밤나무 25만여 그루를 ‘엘리트주의자’로 선포하고 모조리 벌목해 버린 사건이다 … 중국은 로프 노르 지역에서 핵실험을 감행하여 환경에 더욱 위험한 손상을 안겼다. 중국도 극심한 방사능 대기오염을 인정하고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티베트인은 허겁지겁 베이징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이미 전술한 바, 중국은 약 540억 달러 상당의 목재를 티베트에서 채취해 갔다. 또 중국은 사원에서 약탈한 종교예술작품을 외국 교환시장에서 판매하여 틀림없이 수천만 달러 이상의 외화를 거머쥐었을 것이다 … 흥미롭게도 티베트를 일컫는 중국면 ‘시짱(西藏)’은 “서쪽의 보물”을 뜻하며, 티베트인은 이것이 수세기 동안 중국이 티베트를 탐내 온 주된 이유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1985년 티베트의 광물자원의 규모를 추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결과는 수조 달러 이상이었으며, 이 수치도 일반적으로 과소평가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티베트에 매장된 풍부한 광물자원의 리스트에는 석면, 붕사, 크롬, 코발트, 석탄, 구리, 다이아몬드, 금, 흑연, 철, 철광, 옥, 납, 마그네슘, 수은, 몰리브덴, 니켈, 천연가스, 석유, 요오드, 광유, 라듐, 은, 텅스텐, 티타늄, 우라늄, 아연이 포함되어 있다 … 중국에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가치를 지닌 더 큰 자원은 수력전력이다 … 종합해 말하면, 티베트에는 거의 미개발 상태의 광대한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고, 무한에 가까운 수력전기 잠재력이 잠재되어 있다 ..  (136, 139, 142, 144, 145쪽)


 몇 해 앞서, 충북 음성군 생극면 시외버스역에서 ‘몽골에서 한국으로 와서 이주노동자로 살고 있으나, 거의 한 번도 일삯을 받아 보지 못하고 몸만 망가지고 있던 아저씨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이는 당신 여동생이 한국으로 시집을 왔기 때문에 초청비자로 들어올 수 있었는데, 당신이 일하던 공장 사장이 허구헌날 욕을 하고, 또 동네사람이 ‘저놈은 한국말을 잘 모르고 이주노동자니까 막 굴려먹어도 돼’ 하면서 욕지꺼리를 내뱉고 있었음에도 ‘한국은 좋은 나라예요’ 하고 띄엄띄엄 말하면서 웃었습니다. 당신한테 착하고 반가이 마주하는 사람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어디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반짝이며 칭찬을 하는지 도무지 알 노릇이 없었습니다.

 몽골이든 티베트이든 네팔이든 인도이든 찾아가고 순례를 하고 뭐를 하면서 ‘낮에는 하늘이 파랗디파랗게 눈부시’고, ‘밤에는 온누리 별을 여기에 갖다 놓은 듯 맑게 빛난’다고 노래를 하고, 그토록 아름다운 곳이 없다고 노래를 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 사람들이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오면 ‘찬밥꾸러기’에다가 ‘천덕꾸러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참 아리송합니다. 여행을 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순박하다’고 입을 모으면서, 왜 그 여행터 사람을 한국땅에서 마주할 때면 ‘욕’을 내뱉으면서 ‘지저분하다’느니 ‘바보’라느니 하고 깔보거나 깎아내릴 수 있지요? 때때로 텔레비전에서 몽골이나 티베트나 인도 이야기를 ‘예쁘장하게 비추어 내는 다큐멘터리’로 보여줄 때에는 ‘더없이 아름답고 깨끗한 나라’라고 말하면서도, 왜 그 나라 사람을 코앞에 마주할 때에는 싹 바뀌어 버릴 수 있지요?


 (2) 두툼한 보고서가 말하는 티베트와 중국


 500쪽이 넘는 두툼한 보고서 묶음인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을 읽습니다. 말하지 못한 티베트 이야기는 훨씬 많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책 하나를 읽어낸다면, 이 나라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티베트 삶과 사회와 정치를 조금이나마 훑어 볼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달라이 라마를 한국 정부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을 돌아보고, 한국 정부가 중국 정부 눈치를 보면서 ‘티베트 평화’에는 손을 하나도 안 쓰는 까닭을 어느 만큼 짚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1990년에 나온 책이니만큼, 퍽 예전 자료와 숫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무 해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9년이니, 이제까지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더 많은 자원을 중국이 울궈갔으’며, ‘더 많은 티베트 문화와 터전이 망가졌’음을 어림해 볼 뿐입니다. 그런데, 560쪽이 넘는 쪽수라 한다면, 각주와 찾아보기뿐 아니라, 2000년대 이야기라든지 요즈음 흐름을 따로 달아 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차피 두툼한 보고서이니 조금 더 두툼해져도 괜찮고, 대여섯 쪽 더 나누어 보아도 괜찮을 테니까요. 정 힘들다면 각주나 찾아보기를 덜어내더라도, 오늘날 모습을 보여주어야 이 책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이야기’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출판사는 글쓴이한테 ‘요즘 형편을 밝히는 글도 하나 달아 달라’ 할 수 있었으며, 글쓴이가 어렵다고 밝혔으면 ‘우리 스스로라도 더 알아보며 새 이야기를 붙일’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 2008년 백상예술대상 교양 작품상에 빛나는 다큐멘터리 〈차마고도〉(KBS)는 그 아름다운 영상미와 완성도 높은 음악(양방언 씨), 인상적인 내레이션(최불암 씨)에도 불구하고, 티베트의 현실을 미화하고 티베트인이 오로지 불교에만 매달려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려냈기에, 개인적으로 ‘위험한’ 작품이라 생각한다(엔드 크레디트를 보면 아시겠지만, 중국 당국의 사전 내용검토를 받았다). 이제 티베트를 포함한 인권 문제를 ‘미학’의 차원으로 환치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치즘을 찬양했던 레니 리펜슈탈이 저지른 오류를 동시대의 한국민족이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을 지적함은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  (옮긴이 말 : 401∼402쪽)


 어쩌면, 우리로서는 이만큼 다가서는 몸짓만으로도 벅찰는지 모릅니다. 우리로서는 이만큼 알아보기도 귀찮은지 모릅니다. 우리로서는 이만큼 읽어 주기도 번거롭거나 낯설는지 모릅니다.

 먹고살기 바쁘잖아요. 먹고살기 바빠 책 하나 읽기도 벅차는데, 무슨 티베트 식민지 이야기를 읽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먹고살기 힘들어 내 집 살림 간수하기도 귀찮은 판에, 우리 역사도 아니고 티베트 역사를, 더군다나 식민지로 짓밟히는 역사를 뭐 하러 읽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먹고살기 고단하기도 하지만 엄청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터지는 마당에, 티베트야 죽을 쑤건 밥을 하건 내 알 바 아니라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만한 책을 애써 옮겨내면서도 좀더 넉넉하고 따뜻하게 ‘티베트 오늘 삶’을 담으려는 엮음새를 보여주지 못하고, 이 책 하나 읽으며 얻는 지식조각을 우리 삶에서 어떻게 삭여내면 좋을까 하는 깜냥으로 다가서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티베트인은 폴란드인과 유대인에게 게슈타포가 자행했던 고문을 연상시키는 끔찍한 고문에 노출되었다. 22세의 운전기사 첸진 세랍은 3월 5일 폭동 이후에 체포되었는데, 3월 23일경에 그의 가족은 시의 시체안치소 한곳으로 오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의 여동생이 시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옷뿐이었다. 그의 안면은 심각하게 손상당한 상태였고, 안구 양쪽이 모두 뽑혀 있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을 돕던 남자 가운데 한 명은, 뒤에 그의 몸속에 있는 모든 뼈가 부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시신 석방 대금 600위안을 물어야 했다. 이 금액은 라싸의 빈곤한 티베트인 가족에게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  (173쪽)


 중국은 부자나라가 되고자 티베트를 짓밟았습니다. 티베트사람을 죽이고, 티베트 지하자원을 빼앗으며, 핵무기 실험을 하며 티베트땅을 더럽힙니다.

 한국은 부자나라가 되겠다며 비정규직을 만들고 정리해고를 손쉽게 해대며 이주노동자를 값싸게 들여와 함부로 부려먹고 아무렇지 않게 내동댕이칩니다. 언제나 더 많은 돈벌이에다가 자유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할인매장을 온누리 곳곳에 마구잡이로 올려세우며, 동네에서 조촐하게 장사하는 사람을 굶어죽게 내몹니다. 늘 더 많은 돈벌기에다가 자유경제건설이라는 이름으로 값비싼 아파를 온나라 구석구석에 끝없이 올려세우며, 적은 돈으로도 오순도순 살아가는 사람들 터전을 싸그리 밀어없앱니다.

 우리 나라 군대는 세계에서 손꼽을 만큼 힘이 있습니다. 핵무기는 없어도 군사힘은 꽤 셉니다. 비록 중국과 미국과 러시아와 일본하고 견줄 만큼은 안 되지만. 중국과 미국과 러시아는 어마어마한 군사힘으로 숱한 식민지를 만들고, 일본 또한 돈으로 또다른 경제식민지를 만듭니다. 여기에 우리 나라 또한 제법 센 군사힘에다가 어느 만큼 이룩한 돈힘으로 이웃한 작고 여린 나라를 경제식민지로 삼으려 하지 않을까 근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작고 지하자원 또한 얼마 있지 않아도 ‘에너지 씀씀이’는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듭니다. 석유 소비는 일본 못지 않습니다. 우리들 끝없는 씀씀이를 댈 만한 지구자원을 얻자면, 나라안 낮은자리 사람을 더 누르는 일만으로는 모자라, ‘이라크 파병’이 아닌 ‘북녘 침략’쯤은 해야 숨통을 트지 않겠느냐고 여기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북녘이 하루빨리 남녘을 ‘도발’해 주어 하루아침에 북녘 정권을 허물어뜨리고 ‘무력통일’을 이루어 ‘남녘 경제살리기’를 하려는 무시무시한 꿈을 꾸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는 미국이 멕시코와 이라크로 쳐들어가고, 프랑스가 베트남으로 쳐들어가며, 스페인이 중남미로 쳐들어갔으며, 영국이 아르헨티나를 쳤고,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쳤으며, 중국이 티베트를 치는 흐름하고 매한가지입니다. 모두들 ‘부자나라’가 되겠다면서 군대를 끝도 없이 키웠고, 군산복합체를 터질랑 말랑 하는 개구리배처럼 부풀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평화’와 ‘문명’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습니다. (4342.6.8.달.ㅎㄲㅅㄱ) 

 



이런 좋은 책도 하나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09-06-09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벳전사> 라는 책, 맥그로드간즈의 한국인 식당 한켠에 놓여있던 것을 뒤적거린 기억이 나네요.

숲노래 2009-06-10 07:02   좋아요 0 | URL
맥그로드간즈라는 데는 어디인가요?
한국인 식당 한켠에 이 책이 놓여 있었다니...
대단하군요 ^^

티벳, 티베트... 참 이야기가
제대로 세상에 읽히면서
우리 스스로도 우리 삶을
곰곰이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잉크냄새 2009-06-10 14:17   좋아요 0 | URL
달라이라마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의 한 도시입니다.

숲노래 2009-06-13 09:5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