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소박한 삶 - 아미쉬로부터 배운다 타산지석 12
임세근 지음 / 리수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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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29 ― 아름다운 삶을 찾아 ‘돈ㆍ이름ㆍ힘’ 버리기
 : 임세근, 《단순하고 소박한 삶》



- 책이름 : 단순하고 소박한 삶
- 글 : 임세근
- 펴낸곳 : 리수 (2009.9.28.)
- 책값 : 15900원



 (1) 내가 선 삶자리를 돌아보며


 날마다 되풀이하는 ‘아기 옷가지 빨래’는 더미더미입니다. 갓난아기일 때에는 날마다 서른 장이 넘는 기저귀를 빨아야 했고, 이제는 기저귀 빨래가 반이 못 되게 줄었으나 다른 옷가지 빨래가 넘칩니다. 오줌가리기를 할 무렵인 터라 아침부터 밤까지는 기저귀를 풀며 지내다 보니, 바지에 오줌을 싸든 마루나 방에 오줌을 지르든 하면서 옷가지 빨래와 걸레 빨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아기한테 젖떼기밥을 먹일 무렵이니 아이 키우기에 가는 손은 더없이 바쁩니다. 지난날 어머니들이 아이 키우고 집살림 도맡고 논일이며 밭일까지 함께 해낸 삶자락을 돌아본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식구가 맡은 몫은 우습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어머니들한테는 당신 다른 삶이 아무것 없었습니다. 온통 일에 일뿐이었고 다른 자리에 눈둘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남자 어른만 세상일을 돌보도록 하려고 여자 어른한테는 끊임없고 끝없는 일을 지나치게 무겁도록 얹어 놓지 않았나 싶습니다. 밥하기 옷짓기 빨래하기 집치우기 살림하기 아이보기 농사일 …… 이러한 일을 남자 어른이 하도록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자 어른 가운데 이 모든 집일을 스스럼없이 떠맡거나 어려움없이 잘 해낼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집일은 우습게 여기고 바깥일은 높이 섬기는 오늘 우리 삶터입니다. 어려운 말로 ‘가사노동 인정’을 안 합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버는 일’만 받아들입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버는 일이라고 수월하기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을 얼마나 집일에 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집살림 가운데 다문 한 가지라도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실을 잣고 물레를 돌려 천을 낸 다음 바느질을 하여 옷을 짓는 일을 오늘날 어느 누가 치를 수 있겠습니까. 솜을 틀고 이불을 누비며 빨고 다리고 하는 일을 요즈음 어느 누가 치를 수 있겠습니까. 끼니때마다 절구를 빻고 키질을 한 다음 쌀을 일어 안치고 찬거리를 마련하는 일을 요사이 어느 누가 옳게 치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수많은 기계가 나와 집일 짐을 많이 줄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빨래기계 밥기계 청소기계가 나온 뒤로 집일 부피는 조금도 줄지 않습니다. 그만큼 더 자주 빨래를 하고 더 자주 온갖 밥을 차리며 더 자주 집 안팎을 치워야 합니다. 지난날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수한 밥차림이었습니다. 김치 한 조각만 있든 나물 한두 가지만 있든, 콩밥에 국 한 가지만 마련하든 더없이 수수한 밥차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밥차림은 요리책을 보며 궁중음식을 배우느니 서양음식을 배우느니 하며 수없이 많은 반찬을 올리도록 합니다. 이에 따라 접시며 밥그릇이 수북하고, 네 식구 살림만 하여도 설거지감이 가득합니다. 집 치우기란 날마다 해야 하는 노릇이라지만, 서로서로 더 넓은 평수 더 큰 집에서 살면서 청소 시간으로 퍽 오래 잡아먹습니다. 아이한테 옳은 삶 착한 마음 바른 몸가짐을 가르치는 어버이는 자취를 감추고, 학원에 보내는 어버이만 늘어납니다. 아이들한테 ‘좋다는 책’을 읽히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아이들한테 ‘어버이로서 좋은 삶을 보여주는’ 일은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아빠나 엄마 되는 분들 모두 집밖에서 돈을 벌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쁩니다.

 수수함을 잃으며 누리는 물질문명입니다. 수수함을 버리며 즐기는 기계문명입니다. 수수함을 팽개치며 받아들이는 소비문명입니다. 수수함을 등돌리며 껴안는 자본주의 문명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지난 밤 사이 쌓인 기저귀와 아기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미지근한 물을 받으며 빨래를 하는 동안 ‘예전에 혼자 살 때에는 찬물로 빨래를 했잖아? 이제는 미지근한 물로 빨래를 하니 얼마나 나아진 삶이냐?’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나는 나대로 이렇게 사는 데에 바쁘고 힘들어 잘 먹고 돈 많다는 사람들 삶을 생각할 수 없구나?’ 하고 느낍니다. 거꾸로 잘 먹고 돈 많다는 사람들은 당신들 나름대로 돈굴리기와 집키우기나 다른 여러 가지로 바쁘고 힘들어 낮은자리에서 가난하고 고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할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꼭 돈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갈리리라 봅니다. 가난한 사람이면서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삶이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지만, 돈 많은 이웃이 아닌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는 삶이 있습니다. 스스로 수수하고 낮게 고개숙이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수수하고 가난하면서 사랑스러운 이웃을 생각합니다. 스스로 거들먹거리며 이름값과 돈힘을 키우는 사람은 언제나 이름값과 돈힘이 대단한 사람을 이웃으로 삼으려 하겠지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좋아하는 벗을 사귀고,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은 자전거를 즐기는 동무를 사귑니다. 땅장사 좋아하는 사람은 땅장사 좋아하는 이웃을 둘 테고,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하고 가까이 지내겠지요.
 





 (2) 아미쉬 사람들 삶자리를 헤아리며


 《단순하고 소박한 삶》(리수,2009)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을 읽기 앞서 《Amish Country》(1988)라는 사진책을 읽으며 아미쉬 사람들 삶을 돌아보았고, 《Nicole visits an Amish farm》(1985)이라는 어린이책을 만나며 아미쉬 사람들 삶자락을 좀더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번역일 하는 선배가 알려주어 《Amish Country》를 일찍부터 읽을 수 있었는데, 선배는 제 짧은 영어라 할지라도 찬찬히 읽어 보라며 이 책을 건네주었고, 이 책을 살피면서 ‘다른 삶’이 아닌 ‘좋은 삶’을 생각하면서 당신(어른)들 스스로 좋은 삶을 꾸리려 하고 당신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물려주려고 하는 아미쉬 삶자락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몇 해 뒤 헌책방에서 《Nicole visits an Amish farm》을 읽으며 아미쉬 마을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저처럼 돈없는 사람한테는 헌책방마실을 하며 나라밖 책을 만나는 일이 ‘비행기 타고 나라밖 나들이 떠나는 일’과 같습니다. 몸소 아미쉬 마을을 찾아가 보지 못하지만, ‘니콜’이라는 흑인 여자아이가 아미쉬 마을에 사는 동무를 찾아가 어떻게 지내는가를 겪는 모습을 슬쩍 엿보면서 ‘이렇구나’ 하고 살짝이나마 깨닫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이 눈높이에서 다가서려는 이야기책이 좀더 또렷하면서 손쉽게 ‘아미쉬 사람 삶’을 한눈에 보여줄 테니까요.

 그러나, 나라안에서는 이처럼 나라밖 영어로 된 책 아니면 아미쉬 삶을 읽을 길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저야 헌책방마실을 하며 한두 가지 책을 만나서 읽는다지만, 아미쉬 삶을 좀더 많은 우리 이웃들이 읽고 생각하면서 우리 삶을 돌아본다면 우리 터전을 차근차근 가다듬으면서 새롭게 갈고닦을 수 있으리라 보았거든요.

 그나마 아미쉬 삶을 겉훑기로 아는 사람들은 “아미쉬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이웃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187쪽)”는 줄 제대로 모르는 일쑤입니다. 아주 외따로 떨어진 채 살아가는 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기와 전화와 셈틀을 쓰지 않는 이들이 “‘과학의 발전’이 곧 ‘보다 좋은 삶의 질’을 의미하지 않는(208쪽)”고 여기기 때문임을 헤아리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아미쉬 마을을 제대로 모르는 품새는 이 땅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제대로 모르는 품새와 매한가지입니다.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품새가 아닌 슬기롭고 아름다우면서 낮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보’나 ‘미친사람’쯤으로 하찮게 여기는 품새하고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어 땅 사고 집 사서 시골로 가는 삶이 아닌 마음과 땀방울과 삶으로 시골살이를 하려는 사람들 넋을 읽지 않는 품새하고 똑같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며 더 많이 나누고 살겠다는 품새가 아닌, 조금밖에 못 버는 살림이더라도 늘 푼푼이 나누고 스스로 아끼면서 살겠다는 품새를 읽지 못하는 흐름하고 닮았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오늘날 물질문명하고는 거의 담을 쌓은 채 지내지만 ‘문명과 아예 담을 쌓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좋은 삶을 꾸릴 수 있을 만하면서 당신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물려줄 수 있는 테두리를 지킵니다. 당신들이 아름답게 삶을 일굴 수 있는 자리에서 당신 아이들한테도 아름답게 새 삶터를 일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도록 어우러집니다. 좋으며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기쁜 삶을 찾자고 하는 ‘믿음두레’가 아미쉬 사람들이 예부터 이어받고 물려주면서 가꾸는 마을입니다.
 





 (3) 거듭 읽는 마디마디


 반갑게 읽은 책을 덮고 옆지기한테 건네주었습니다. 끝까지 다 읽은 옆지기는 책 뒤쪽(4부)에 실린 ‘아마쉬 여러 계파 역사와 문화’가 지루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단순하고 소박한 삶》 뒤쪽에 실린 지식조각은 그리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나라에는 낯선 아마쉬 마을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같은 지식조각을 실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좀더 단출하게 줄이거나 아예 ‘부록’으로 밀어넣었다면 더 좋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보다는 아미쉬 사람들 여느 삶을 다루는 데에 자리를 더 내주었으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온몸을 사랑과 믿음에 바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요. 잘난 척하지 않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면서, 책과 학교와 겉멋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를 더 낮추려고 하는 사람이니까요.

 저와 옆지기가 함께 읽으면서 좋았다고 느낀 대목을 밑줄을 긋고 거듭 다시 읽어 봅니다. (4342.12.13.해.ㅎㄲㅅㄱ)
 







[26, 54쪽] 아마쉬 사람들은 거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용모를 가꾸고 치장을 하는 일을 금하고 있기에 외모를 뽐내기 위한 목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만의 거울이 있다. 그게 바로 조상들이 흘린 피로 얼룩진 ‘순교자의 거울’이요, 일상을 통하여 마음과 정신을 비추고 가다듬는 일깨움의 거울이다 … 그때 나는 아미쉬 공동체에는 교회가 없고 돌아가며 교인들 집에서 예배를 보며, 예배당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들은 아미쉬 공동체의 학교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교회가 없으니 십자가를 높이 올린 뾰족한 종탑이 있을 리 없고, 벽이나 천장, 창문 곳곳을 장식한 성화가 있을 리 없다. 은은히 들려오는 예배당의 종소리마저도 아미쉬 마을에서는 들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신학교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성직자가 없고, 위엄을 갖춘 설교연단도 볼 수 없다. 오르간과 성가대도 없고, 화음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가도 들리지 않는다. 헌금을 하지 않고 성경 공부를 위한 별도의 모임도 없다. 전도를 하지 않고 선교 활동도 지원하지 않기에 그들의 공동체에는 전도사도 없고 선교사도 없다.

[28, 56, 86쪽]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 살인과 폭력 그리고 마약, 가정 파괴, 낙태와 동성애, 퇴폐 행락 등의 비도덕적 행각이 범람하는 바깥세상은 여전히 그들의 종교적 순수함을 해치는 사악한 사람들의 세상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공동체 밖 이교도들을 경계하며 바깥세상을 향해 둘러친 울타리를 더욱 높이고 튼튼히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들은 그 어떠한 공격을 받더라도 폭력을 휘두르거나 무력에 의존하지 않으며 보복도 하지 않는다. 군 징집에 응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법적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로 ‘용서’를 일깨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 나는 지금까지 아미쉬 사람들을 접하면서 그들로부터 ‘내 종교가 무엇인지? 교회에 나가는지?’ 등의 질문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교회에 나가 구원을 받으라는 권유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메리 아줌마와 다니엘을 비롯한 아미쉬 사람들로부터 감응을 받고 있다.

[35, 76, 106∼108쪽] 그들은 온당한 주의 주장을 믿고 따를 뿐, 그 어떤 사람의 명예를 드높여 영웅으로 만들거나 신격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비쳤다 …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자녀들에게 아미쉬 교도로서의 삶의 가치와 율법을 보여주고 일깨울 뿐, 이를 평생의 삶의 길로 택하여 교회의 일원이 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본인(아이)들의 의사에 맡긴다 …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은 교회의 리더와 연장자를 존경하고 예우를 해 주고, 또한 교회 리더와 연장자는 평신도와 젊은이들을 존중하고 배려한다. 이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구나 전문성을 가진 전담 조직 없이도 아미쉬 공동체가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는 결정적 이유임이 분명하다 … 통일된 복장의 엄격한 규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에 관해 명문화된 규정집이 없고, 옷을 짓는 요령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한 지침서 하나가 없었다. 그들은 옷을 지으면서 어린 딸아이들이 옆에 앉아 지켜보게 하고 말로 일러 주면서 격식에 맞추어 옷을 만드는 방법을 하나하나 터득게 하는 방식으로 전수해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43∼45쪽] 그런 데다 인디언과의 전쟁,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 신대륙에서도 전쟁은 어김없이 이어져서 무저항 평화주의를 고집하며 참전을 거부하던 아미쉬 사람들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 … 1930년대 시행된 고등학교 과정의 의무교육에 아미쉬 사람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공동체 삶을 영위하는 데 중학교 과정을 넘어선 고등교육은 해가 된다고 판단한 아미쉬 사람들은 자체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학교 운영을 주장했다. 그들은 1971년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법적 권리를 얻어내기까지 주 정부로부터 피소를 당하고 벌금, 징역 등의 처벌을 감수했다 … 그들은 정부로부터 사회보장 혜택을 받지 않을 것임을 밝히며 세금 납부를 거부했고, 이로써 연방정부로부터 농지와 주택을 가압류당하고 밭을 갈고 있던 말과 농기구를 강제 경매 처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23, 154∼156, 164∼165, 166쪽] 아미쉬 사람들은 부부 간에, 또는 부모와 자녀가 긴 시간 떨어져 있는 것은 아미쉬의 전통적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아미쉬 학교는 ‘지적인 삶보다는 미덕의 삶’, ‘전문적 지식보다는 필수적인 기본 지식’, ‘개별적 경쟁보다는 공동체의 번영’, ‘외부 속세와의 융합보다는 분리’를 추구하는 공동체 삶에 필요한 교육을 구현하는 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 전날보다 향상하는 것을 학습의 목표로 하되 학생들 간에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우열을 가리는 방법으로 학습 효과를 꾀하지 않는다 … 아미쉬 학교의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숙제를 많이 내주지 않는다. 이는 방과 후에 집에 돌아가 갖가지 집안일을 해야 하는 학생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 관계 당국이나 외부에서 교사로서의 능력을 겸비할 수 있게 대학교 과정을 이수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하지만, 그들은 아미쉬 학교에서 8학년까지 마치고 올바른 삶을 살며 바르게 전수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판단하여 외부의 교사 양성 과정 이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48쪽] 검소하게 사는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농가나 달리는 마차에 강탈할 만한 값진 물건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좀도둑의 목표가 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집에는 담이나 울타리가 없고 대문도 없다. 문을 걸어 잠그지도 않는다. 나아가 감시카메라나 경보 장치는 생각할 수도 없다.

[216쪽] 자동차는 개인주의, 자율, 속도, 자유, 이동성을 불러왔으며, 이에 더하여 사회적 신분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전통적 삶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위해 요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자동차를 허용할 경우 손쉽게 공동체를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고, 빨리 움직이는 기동성의 매력에 빠져 생활의 속도가 빨라지고, 개인주의와 자기 과시욕에 들뜨는 등 교도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나아가 분명 공동체의 겸손, 평등, 결속의 전통적 가치가 훼손될 것이었다.

[257쪽] 가족이 모두 모여 세 끼 식사를 함께하는 것을 가정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아미쉬 가정에서 가장이 도시락을 들고 나가 하루 종일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농사일을 하면서 어린 자녀를 데리고 다니고, 텃밭을 일구는 어린 딸아이에게 호미를 쥐어 주어야 할 아빠와 엄마를 아미쉬 가정의 어린 자녀들로부터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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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의 역습 - 당신이 몰랐던 우유에 관한 거짓말 그리고 선전
티에리 수카르 지음, 김성희 옮김 / 알마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우유가 나쁜 줄 모르는 당신은 바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5] 티에리 수카르, 《우유의 역습》



 지난 2003년에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이지북,2003)라는 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우리들한테 ‘오래 살기를 바라’는지 ‘오래 안 살아도 먹고픈 대로 먹으며 살기를 바라’는지를 묻는 책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읽혔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이 책을 읽고도 우유 마시기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을 테고, 이 책을 안 읽었어도 우유를 안 마시는 사람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우유를 안 마시는 사람보다는 우유를 마시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병이나 팩에 담긴 우유를 비롯해 가루를 낸 우유까지 먹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요구르트를 마시고 숱한 유제품을 먹으며 우유를 넣은 빵과 과자를 먹습니다. 우리 둘레에 우유가 섞이지 않은 먹을거리는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 어쨌든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총리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책임감 있고 똑똑한 정치인들이 어째서 유제품이 물, 과일, 채소만큼이나 건강에 필수적인 음식이라고 믿고 국민들까지 설득하게 된 것일까? ..  (34쪽)


 우리가 사서 마시는 우유에는 ‘성분 표시’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100% 원유로 되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100% 오로지 원유라 한다면, 또다른 대목에서 궁금합니다. 우리가 마시는 우유를 빚어내도록 해 주는 젖소는 무엇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지, 어떤 물을 마시고 있는지. 어느 소우리나 들판에서 날마다 어떤 삶을 꾸리고 있는지. 젖소는 사료를 먹는지 풀을 먹는지. 젖소가 사료를 먹는다고 할 때에는 사료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젖소가 먹는 항생제는 얼마나 되며, 젖소가 짚이나 풀을 먹는다고 할 때에 이 짚과 풀은 어디에서 거두어들인 짚이나 풀인지. 이 짚과 풀에는 농약이나 풀약 들이 얼마나 묻어 있는지.

 우유보다 두유가 좋다고 하며 콩물을 사다 마시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우유를 사서 마시든 두유를 사서 마시든 이와 같은 마실거리에 ‘어떤 첨가물’이 들어 있는지를 낱낱이 살피는 사람은 드뭅니다. 과일에서 짜낸 물을 담았다는 과일주스이든 콜라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공장에서 만들어서 가게에서 파는 마실거리’가 어떠한 재료를 어떻게 다루어서 어떻게 내놓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텔레비전에 나온다든지, 이렇게 책으로 나와 주어야 비로소 한 번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들여다본 다음에 잊습니다. ‘맛있는걸’ ‘나는 좋은걸’ ‘그러거나 말거나 내 몸이 아프지 않은걸’ ‘나중에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는걸’ …….

 생각줄기를 더 이어 본다면, 우유가 들어간 먹을거리라는 유제품은 어떤 우유를 어떻게 다루어 넣었는가를 알기 어렵습니다. 빵집에서 파는 우유식빵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가게에 잔뜩 쌓여 있는 과자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초콜릿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밥집에서 마련해 주는 밥에는, 술집에서 장만해 주는 안주에는 어떤 우유가 들어갈까요.


.. 막대한 규모의 시장이 문을 열었다. 바로 아이들을 겨냥한 시장으로, 그 시작은 유아를 대상으로 했다. 당시 농산업계로서는 전략적인 공략이었는데, 어릴 때 얻은 식습관은 평생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 1920년대 말부터 영국의 우유 생산업자들은 ‘우유를 알리기 위해’ 학교에 저렴한 가격으로 우유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영양실조를 없애기 위해 애쓸 것’을 약속했다 ..  (37, 39쪽)


 좀더 따지면, 우유 하나만 헤아릴 노릇이 아닙니다. 우유보다 훨씬 많이 먹는 우리들 쌀밥을 곰곰이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 땅 논밭에서 농약이나 풀약이나 비료나 항생제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 땅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 나라 농협은 농사꾼이 비료와 농약을 쓰라고 하는가요, 안 쓰라고 하는가요.

 겨울을 앞두고 김장을 하는데, 김장에 쓰는 배추는 또 어떠한 배추이겠습니까. 약과 비료와 항생제 없이 거두고 있는 배추입니까, 무입니까, 고추입니까. 시금치며 상추며 깻잎이며, 이와 같은 푸성귀에는 어떠한 약품이나 방부제나 항생제가 어느 만큼 깃들어 있을까요.

 곡식과 푸성귀 말고, 가공식품은 어떠한지를 따지기도 해야 합니다. 과자 한 봉지에, 또 커피 한 봉지에, 또 감기약 한 봉지에는 어떠한 화학성분이 깃들어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이들한테 맞도록 하는 예방주사는 ‘생약’일까요, ‘화학약’일까요. 예방주사는 어떠한 성분을 어떻게 엮어서 만들고 있을까요.

 며칠 앞서 ‘빼빼로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 빼빼로 날에 과자 빼빼로를 서로서로 주고받곤 하는데, 우리들은 과자 빼빼로를 주고받으면서 ‘빼빼로 하나에는 어떤 성분이 들어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있겠습니까. 성분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고 나서도 기쁘게 선물을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들은 우유 섭취량이 확인된 약 4만 명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고, 사람들의 답변을 골다공증 골절의 위험과 연결지어 검토했다. 그런데 연구진을 놀라게 하는 결과가 나왔다. 골절 위험과 관련해서 우유 애호가들과 우유를 전혀 혹은 거의 마시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 아이들 대부분은 그(우유에 들어 있는) 단백질을 제대로 소화하지만 일부는 주로 유전적인 이유로 소화해내지 못한다. 소화되지 못한 단백질 조각들은 혈액 속으로 유입되는데 면역계는 그것을 침입자로 인식하고 파괴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단백질의 일부가 인슐린을 만드는 췌장 세포와 닮아 있는 까닭에 면역계는 착각하여 췌장 세포까지 파괴해 버린다. 그 결과 아이는 인슐린을 분비할 수 없게 되어 제1형 당뇨병에 걸리는 것이다 ..  (111∼112쪽)


 누구나 알듯, 우유란 소젖입니다. 소젖이란 어미소가 송아지가 잘 자라도록 내어주는 밥입니다. 사람은 사람젖이 나와서 아기를 먹여살립니다. 사람은 엄마젖으로 아기를 키웁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젖은 어린이가 자라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영양이 골고루 담겨 있습니다. 소젖에는 마땅하게도 송아지가 잘 자라도록 도움이 되는 영양이 골고루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천천히 자랍니다. 소는 빨리 자랍니다. 송아지는 어미소 배에서 바깥으로 나오면 곧바로 섭니다. 사람은 엄마 배에서 밖으로 나와도 곧바로 서지 못합니다. 거의 돌이 지나야 비로소 서며, 걸을 때까지 퍽 걸립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젖은 아기가 알맞게 자라도록 이끕니다. 하루아침에 선다든지 뛴다든지 하도록 영양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사람 삶에 걸맞게 영양을 내어줍니다. 이와 달리 소젖은 송아지한테 영양을 퍽 빨리 내어줍니다.

 《우유의 역습》이나 예전에 나온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라는 책에서도 다루지만, ‘빨리빨리 우쑥우쑥 크도록 이끄는 우유’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우유를 마시면 ‘사람도 송아지마냥 좀더 빨리 더 크게 자랄’ 수 있으나, 이렇게 빨리 더 크게 자라는 만큼, ‘사람한테 알맞춤한 흐름에 따라서 자라지 않는’ 탓에 뜻하지 않게 병치레를 할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더디 자라며 더디 살기에 백 살 안팎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빨리 자라며 빨리 살아가는 우리들로 바뀐다면, 우리 앞날이 어찌 될는지는 뻔한 노릇입니다. “인구 집단별 연구들은 우리에게 간단명료한 한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 바로 우유와 동물성 단백질을 적게 먹는 나라일수록 국민들이 더 건강한 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유를 거의 마시지 않는 나이지리아의 경우, 식물성 단백질에 대한 동물성 단백질의 비율이 독일에서 조사된 비율보다 10배 더 적고 대퇴골 경우 골절 발생율은 99%나 낮다(100쪽)”는 이야기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우유의 역습’이 아니라 ‘우유가 보여주는 결과’는 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아이들한테 우유를 마시도록 합니다. 지난날 우리 나라가 무척 가난하다고 했을 때에도 우리 아이들은 우유를 마시면서 자라야 했습니다. 저 또한 국민학교 다닐 때에 학교에서 ‘거의 의무’처럼 우유값을 학교에 내고 날마다 받아서 마셔야 했습니다. 속에서 우유가 받지 않는 아이들마저 우유를 억지로 마시도록 했고, 우유를 마시고 속이 얹히거나 재채기가 끊이지 않아도 반드시 마시도록 했습니다. 이무렵 어느 누구도 ‘우유를 마셔야 키가 크고 튼튼해진다’고만 이야기를 들었으며, 어버이나 교사 또한 ‘우유를 안 마시면 안 된다. 적어도 우유라도 마시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긴다. 유제품을 먹으면 살이 빠진다고 계속해서 단언하고 있는 네슬레를 비롯한 유제품 기업 연합의 구성원들과 영양학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의사 단체가 왜 이제는 하나도 없는 것일까? 보건 당국과 소비자 보호 및 불공정 거래 감시국의 방관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  (204쪽)


 사람에 따라서는 우유가 몸에 잘 맞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식품첨가물이나 화학조미료나 화학성분이 들어간 마실거리라 하더라도 몸에 잘 받으며 맛있고 즐겁게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농약을 쳤든 비료를 먹였든 ‘엄마가 해 주는 밥’이면 다 맛있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습니다. 농담처럼 주고받는 말이지만, 어느 모로 보면, 우리 아이들한테는 우유 한 잔보다 ‘자동차 배기가스’ 한 모금이나 ‘담배연기’ 두 모금이 몸에 훨씬 나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과 거짓을 제대로 따져 본다면, 우유를 비롯해 배기가스와 담배연기 모두 나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나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한테 ‘나쁜 것은 되도록 줄여’ 주어야지, ‘더 나쁜 것도 늘 마시는데 이거 하나 더 얹는다고 달라지거나 더욱 나빠지겠어?’ 하는 매무새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유는 우리 삶터에 ‘역습’하듯 불쑥 고개를 들이밀지 않았습니다. 처음 소젖을 사람한테 먹이려 했을 때부터 ‘부작용’이나 ‘반작용’은 어림할 수 있던 일입니다. 논밭을 밀고 아파트를 지을 때, 산을 깎고 고속도로나 공장을 세울 때, 갯벌을 메워 공항을 닦을 때, 우리 자연 삶터가 더러워지며 우리 사람 삶터 또한 나빠질 수밖에 없음을 모르는 이란 없습니다. 꼬리치레도룡뇽이나 맹꽁이 한 마리만 사라지지 않습니다. 꼬리치레도룡뇽이 살 수 없는 만큼 우리들 또한 살 수 없는 터전이 됩니다. 맹꽁이 한 마리 뿌리내릴 수 없는 만큼 우리들이 마시는 바람과 물은 끔찍하게 더럽혀지고 매캐해집니다.

 자가용하고 헤어지지 못하는 분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장사를 하고 영업을 하고 무엇무엇을 하는데 자가용을 안 몰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자가용을 몰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이름값을 얻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연 삶터를 망가뜨리거나 더럽힙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자연 삶터를 망가뜨리거나 더럽히면서 시나브로 우리 사람 삶터를 나란히 더럽히거나 망가뜨립니다.

 우유 한 잔? 뭐, 마셔도 좋고 안 마신다면 더 좋습니다. 우유를 마셔야 하느냐 안 마셔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얼마나 속깊이 들여다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어떻게 가다듬으며 우리 발걸음과 몸짓을 고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살기 마련입니다. 돈을 더 벌고 싶다면 돈을 더 벌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더 버는 만큼, 더 아름답게 살지는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더 아름답게 살고 싶다면 돈은 덜 벌밖에 없습니다. 이웃하고 더 사랑을 나눈다든지 내 아끼는 고운 님하고 더 사랑스럽게 어울리고 싶다면, 이때에도 돈은 덜 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마땅하지만 돈을 더 바란다면 내 아이와 옆지기하고 보내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내 동네를 살피거나 내 고향마을을 돌아보는 겨를은 마련하기 힘듭니다. 내 몸이나 마음을 살필 틈조차 줄어들고, 내 어버이나 스승을 찾아가 인사를 여쭙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느긋함마저 마련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길은 하나입니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갈래로 가느냐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살겠습니까? 돈을 더 사랑하면서 살겠습니까? 우리 아이를 더 아끼며 살겠습니까? 우리 아이한테 입힐 옷과 먹을 밥과 지낼 집과 다닐 학교를 더 생각하며 살겠습니까? 우리가 걷는 길에 따라서 ‘우유와 우리 삶’ 이음고리는 달라지고, 우유는 일찌감치 우리 삶을 파고들며 좀먹고 있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길 바란다. 식사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요구르트와 치즈, 우유에 대해서는 나도 찬성이다. 나는 포도주 한 잔에 신선한 핸드메이드 치즈를 곁들여 먹는 걸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유제품을 소화해 내고 면역계가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루에 하나쯤 먹는다고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즐거움을 위해 먹는 거라면 괜찮지만 의무적으로 먹지는 말라는 것이다. 건강을 위한다는 핑계로 사람들에게 그토록 많은 유제품을 먹도록 계속 권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본다 ..  (머리말)


 《우유의 역습》이라는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우유가 어떤 마실거리인지를 일찌감치 알고 있던 분한테는, 또 지난 2003년에 나온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를 읽은 분한테는 하나도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한, 예방접종이나 가공식품이나 화학조미료나 식품첨가물 문제를 일찍부터 헤아린 분한테는 조금도 새롭지 않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더구나, 이 책은 우리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프랑스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는 ‘한국 형편’을 다루는 부록이 따로 실려 있지 않습니다.

 우유란 ‘완전한 마실거리나 식품’이 아니지만, 《우유의 역습》이라는 책 또한 ‘완전한 책’이 아닙니다. 그저, 우유가 어떠한 마실거리인지 제대로 모르는 분들한테는 놀랄 만한 이야기가 됩니다. 덧붙여, 우유가 어떻게 우리 삶터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렇게 널리 마시도록 하는지를 살피지 않았던 분들한테는 끔찍하다고 여길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4342.11.18.물.ㅎㄲㅅㄱ)


 ┌ 《우유의 역습》(알마,2009)
 ├ 글 : 티에리 수카르 / 옮긴이 : 김성희
 └ 책값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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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02 0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씨앗은 힘이 세다 - 앙성댁 강분석이 흙에서 일군 삶의 이야기
강분석 지음 / 푸르메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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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22 ― 사랑씨 없는 도시사람이 되어 간다지만
 : 강분석, 《씨앗은 힘이 세다》


- 책이름 : 씨앗은 힘이 세다
- 글 : 강분석 (http://www.angsung.com)
- 펴낸곳 : 푸르메 (2006.5.19.)
- 책값 : 9000원



 (1)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 찾는 씨앗


 사람은 누구나 씨앗 하나 품고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받아 태어날 때부터 씨앗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날 목숨씨를 아버지와 어머니한테서 함께 받습니다. 어느 한쪽 씨앗만으로는 우리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곡식에는 씨눈이 있습니다. 이 씨눈이 트고 자라며 더 많은 열매를 맺어 우리 밥상에 오릅니다. 쌀과 보리뿐 아니라 콩과 팥 또한 씨앗이며 곡식입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고기에도 씨앗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버이한테서 목숨씨를 얻듯 짐승 또한 제 어미한테서 목숨씨를 얻습니다. 그저 우리들 거의 모두 언제나처럼 ‘토막토막 잘게 썰린 채 불에 익히기를 기다리는’ 고깃점만 보거나 밥집에서 다 익혀 놓은 고깃점을 받아들일 뿐이라 살갗으로 못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든 푸나무이든 물뭍짐승이든 씨앗에서 비롯합니다. 씨앗에서 비롯하며 씨앗을 남깁니다. 씨앗에서 비롯하여 씨앗을 남기기까지 고이 삶을 꾸리는 한편, 다른 목숨한테 밥이 됩니다. 사람이든 푸나무이든 물뭍짐승이든, 저마다 목숨을 잇자면 다른 씨앗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목숨을 내 몸에 삭여 새 기운을 얻어야 합니다. 홀로 살 수 없는 사람이요, 홀로 살지 못하는 푸나무요, 홀로 살아가지 못하는 물뭍짐승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지켜야 한다고 외칠 때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이어가도록 하자는 뜻일 텐데, 이 자연 지키기란 다름아닌 ‘먹이사슬이 흐트러지지 않게끔 다양성을 건사하는 일’입니다. 사람만 배불리 먹는다든지, 사람 가운데 몇몇 겨레나 나라만 배터지게 먹는다든지 하지 않게끔, 알뜰살뜰 올바르게 추스르자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터는 어떻습니까. 우리 삶터는 서로가 서로를 지키거나 보듬거나 껴안거나 사랑하는 삶터인지요? 우리 삶터는 서로서로 오붓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을 만한 넉넉하고 따스한 삶터인지요?

 서울 광화문에 자리한 한글학회에 일을 나오고 있는 요즈음, 낮밥 때에 맞추어 문방구에 다녀옵니다. 문방구 다녀오는 길에 큰길 안쪽 모퉁이에 큼지막하게 문을 연 ‘ㅎ플러스 슈퍼마켓’이라는 데를 들여다봅니다. 요사이 말 많은 곳 가운데 하나인데, 돈이 많은 큰 회사들이 ‘동네 구멍가게’ 씨를 마르게 한다는 그 ‘슈퍼마켓 아닌 슈퍼마켓’입니다.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 바글바글이요, 가게를 드나드는 손님 또한 바글바글입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서울 광화문 같은 데에는 ‘동네 구멍가게’가 들어설 수 있을까?

 지난주에 종로 안쪽 골목을 거닐다가 ‘동네 구멍가게’에서 보리술 한 병을 살까 하고 값을 여쭈니 640들이도 아닌 500들이 중간병을 2100원 달라고 합디다. 이 구멍가게에서 150미터쯤 떨어진 편의점에서도 640들이 보리술을 2000원 받고 있는데. 구멍가게 할매는 외국 관광객한테 바가지를 씌우면서 당신 살림을 꾸리거나 가게를 지키는 셈이었을까요? 자리값을 그쯤은 받아야 하는 셈이었을까요? 아무래도 서울 종로 같은 데에는 골목길이 골목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이런 곳 구멍가게 또한 구멍가게라 하기 어려우며, 구멍가게가 들어설 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서울 광화문이나 종로거리에는 ‘근대화슈퍼’나 ‘연쇄점’ 같은 구멍가게는 또아리를 틀 수 없고, ‘ㅎ 슈퍼마켓’과 ‘ㄹ 슈퍼마켓’만 들어서야겠다고 느낍니다.

 낮밥 때를 맞추어 길거리에 쏟아져 걷는 사람들 숲을 헤치고 일터로 돌아왔습니다. 하나같이 잿빛이나 검은빛 양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은 담배나 커피잔을 들고 하하호호 웃고 맑은 얼굴빛입니다. 문득, 속으로 ‘서울 도심지에는 굳이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 따로 없구나.’ 하고 느끼면서, ‘서울뿐 아니라 부산과 대구와 인천과 광주와 대전 같은 큰도시 번화한 거리에도 아무런 철과 날씨가 아랑곳하지 않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철이 바뀌어도 철이 바뀌는 줄 모를 뿐더러, 느낄 까닭이 없는 이곳에서는 사람이든 푸나무이든 짐승들이든 옹근 목숨씨 하나로 자리잡기 힘들겠다고 새삼 느낍니다. 언제나 똑같은 회사일이요 사무직이지, 무슨 씨앗이고 철이고 목숨이고 있겠습니까. 좀더 나은 대접과 연봉과 보고서와 성적이지, 어떤 하늘이고 꽃잎이고 바람이고 깃들겠습니까.

 아침마다 시청역에서 내려 광화문으로 걸어오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경복궁과 인왕산 위로 하늘이 시커멓습니다. 먹구름이 깔려 시커멓지 않고, 서울에 잔뜩 깔린 먼지와 배기가스 때문에 시커멓습니다. 가뜩이나 서울은 우줄우줄 산 때문에 바람이 쉬 빠져나가지 못하는데, 인왕산과 북한산 둘레로 높직높직 아파트가 새로 올라서면서 먼지와 배기가스는 하염없이 늘기만 합니다. 경제위기 소리가 잦아든 지 오래이고, 기름값 걱정 같은 소리는 하기 좋아서 하는 말 뿐이며, 음식쓰레기는 늘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습니다. ‘밥그릇 비우기’를 하는 분이 제법 늘어 몇 만 사람쯤 되는 듯하지만, ‘밥그릇 비우기’를 안 할 뿐 아니라 생각조차 않는 사람은 수천만 사람입니다. 서울땅에서 씨앗을 찾거나 말하거나 나눌 수 있는 길은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2) 시골 농사꾼이 되며 깨달은 씨앗


 벌써 열두 해째 농사짓기를 하고 있는 강분석, 유근세 두 사람은 당신들 땀방울을 그러모아 지난 2006년에 《씨앗은 힘이 세다》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을 찾아온 사람들한테 ‘도시에 있었다면 이런 글을 쓰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면서, 땅한테도 고맙고 당신들이 지은 곡식을 사 주는 도시사람한테도 고맙다고 이야기합니다. 처음 시골에 자리잡을 때에는 마땅한 벌이구멍이 없어 번역일을 하며 겨우겨우 메꾸었다고 했는데, 이렇게 메꾸면서도 ‘죽어라 일만 하는 허리 휘는 농사꾼 삶’이 아닌 ‘농사짓는 틈틈이 쉬면서 하늘을 볼 느긋함’을 품을 줄 아는 가슴 따스하고 넉넉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다고 합니다.

 시골살이를 몰랐을 뿐 아니라 생각조차 않던 두 사람인데, 어느덧 쉰다섯 나이 가운데 열두 해를 시골에서 보냈고, 앞으로 시골에서 보낼 햇수는 길어지기만 할 테니, 머잖아 도시살이 햇수 못지않게 시골살이 햇수가 채워질 테고, 차츰차츰 당신들이 도시살이 하던 나날을 떠올리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골에서 땅을 부치고 땅한테서 얻으며 보내는 하루하루는 언제나 새로운 배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배움은 앞으로도 꾸준하게 새로워지리라 봅니다. 아닌게 아니라 시골살이 봄여름가을겨울은 2009년과 2008년이 다릅니다. 2008년과 2007년이 다르고, 2006년과 2010년이 같을 수 없습니다. 해마다 다르고 달마다 다르며 날마다 다릅니다. 늘 똑같이 하는 일이란 없고, 늘 똑같이 느낄 모습이란 없습니다.

 산이, 논밭이, 내와 물이, 바다가 언제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 적이 있겠습니까. 늘 다른 자연 터전입니다. 다만, 우리가 늘 다른 자연 터전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 없느냐일 뿐입니다. 늘 다른 자연 터전을 우리가 어느 만큼 새기고 삭이며 받아들일 수 있느냐일 뿐입니다.

 이리하여, 늘 다른 자연 터전을 가슴으로 껴안는 우리들이 될 때에는, 하루하루뿐 아니라 사람사람을 다 다른 목숨으로 돌아보면서 껴안는 우리들이 될 수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이요 생각이요 움직임임을 느끼는 우리들이 됩니다. 나를 속깊이 들여다보며 사랑할 뿐 아니라, 내 둘레 사람들 또한 속깊이 톺아보면서 믿고 손잡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는 우리들이 됩니다.

 《씨앗은 힘이 세다》라는 책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 잘 나거나 너 못난 삶이 아닌, 나 스스로를 못 보고 너 스스로도 못 느끼는 삶을 이제는 멈추자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구나 싶습니다. 날마다 새로 배우는 고맙고 넉넉한 삶일 때 가장 알차고 아름답겠습니다만, 이렇게 꿋꿋하고 다부지게 ‘돈-이름-힘’을 훌훌 내던지고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당신들 스스로 먼저 보여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도시에서 앞으로도 내처 살든, 도시에서 앞으로는 떠나려 하든, 우리 스스로 사람다운 씨앗이 누구한테나 가늘게 떨면서 옹송그리고 있음을 거듭 헤아리자는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3) 거듭 읽는 글월


 2006년에 장만한 뒤에 오래도록 책상맡에 꽂아 두고 틈틈이 넘기던 책을 이제 마감하면서, 그동안 밑줄을 그으며 읽던 대목을 하나하나 손소 옮겨적어 봅니다. 마음에 아로새길 만한 이야기라면 타자로 쳐서 종이로 뽑든 손으로 종이에 옮겨적든 해 보면 한결 깊고 널리 살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4342.11.5.나무.ㅎㄲㅅㄱ)


[머리말] 아직 밥벌이도 안 되고 농사와 사람의 일로 어려움도 있지만, 저는 지금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자연과 농사가 제게 준 것이 그토록 크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우리가 가꾼 이 땅에서 언제까지나 농부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8쪽] 시골 와서 두 번째 맞는 겨울, 금융위기로 서울의 아파트가 팔리지 않아 돈줄이 막혔는데, 두릅 묘목이며 농자재며 경운기를 사느라 돈이 자꾸 들어갔다. 우연히 신문에 난 공고를 보았는데, 공공근로사업으로 정보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영어와 컴퓨터 지식이 있는 사람을 모집한다는 거였다. 게다가 재택근무라니 딱이다 싶어 부랴부랴 서류를 갖추어 면사무소에 제출했더니 전업농가라 안 된다고 했다. 시골에 3백 평 이상의 땅을 가지고 있으면 전업농가로 분류되는데,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농업 인력이 다른 근로사업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전업농가는 지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볼펜으로 짚어 가며 공문을 읽어 주는 면사무소 직원에게 나는 한 마디만 했다. “3백 평 땅에 농사지어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이도 없고 속도 상하고, 그리고 비참했다. 집에 돌아와 애꿎은 막걸리 잔만 비웠던 것조차 씁쓸하게 기억된다.

[73, 195쪽] 처음 방문한 곳은 사과 농장이었다. 방충시설과 환풍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농장을 둘러보고 나서도 어딘지 모르게 묵직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누군들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싶지 않으랴. 가진 돈이 없으니 아무리 좋은 시설도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 한 달에 50만 원이면 빠듯하게나마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에 6백만 원. 설마 그 돈을 못 벌랴 했는데, 서울에서 내외가 한 달이면 벌던 그 돈은 초보 농군이 넘보기에는 너무나 큰 거금이었다. 하루아침에 얼마가 올랐다는 서울 아파트 값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꼭 남의 나라 이야기같이 느껴진다 … 도시에서 사는 자식들이야 돈도 몇 푼 안 되는데 그만두시라고 쉽게 말한다지만, 농협빚 고지서에 농약청구서를 생각하면, 또 여름방학 때 당신 찾아 내려올 손주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106, 142쪽] 거실에서 바라보이는 영수 할아버지의 직사각형 논 위에 커다란 삿갓 모양의 짚가리 여섯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서 있다. 꼭 조형미술 작품 같다. 봄부터 겨울까지 영수 할아버지의 논은 거대한 종합 예술관이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야외 예술관 … “매화 꽃망울이 조금씩 커지면서 분홍이 되었다가 다시 하얀 꽃으로 피는 것은 매년 보아도 똑같이 감동스러울 거예요.” 경주에서 매실 농사를 짓는 마로 어머니는 그 말씀을 하실 때 소녀처럼 해맑은 얼굴이 되었다.

[175, 227, 238쪽] 며칠 전, 맨발로 우리 논에 들어섰던 아이도 언젠가는 어른이 되겠지. 어른이 된 어느 날, 도시의 빌딩숲을 정신없이 걷다가 문득 어린 날 빨간색 반바지를 입고 산골짜기 논에 들어섰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 … 내 손으로 논에 모를 심고 잡초를 뽑고 벼를 거두고 나서야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상품이 될 수 있는 게 아님”을 몸과 마음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 만약 내가 지금도 도시에 있다면, 일 년 내내 푸른 잎을 자랑하는 화분의 나무를 바라보며 내 삶도 그렇게 늘 푸르러야만 한다고 떼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곳에서야 나는 느티나무가 늘 푸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푸른 느티나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요.

[199, 231쪽] 소비자들이 때깔이나 크기로만 농산물을 선택한다면 이 땅의 농부들은 농약을 안 칠 수 없을 것입니다 …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말은 어록에 기록되어 저 아득한 후대에까지 전해지겠지만, “농부 못해먹겠다”는 말에 누가 콧방귀나 뀔까요?

[218쪽]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하늘이 험악했지만 남겨 놓은 두 골이 영 눈에 밟혔다. 다솜이네서 팥을 얻어 다시 밭에 올랐다. 남은 두 골에 팥을 넣는 동안 비가 계속 내렸다. 온몸을 두들기는 장대비를 우산으로 가리는데 아람이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농사는 그렇게 지어야 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내려오는 길, 마음은 뿌듯했다.

[223, 226쪽] 10년이 넘게 농부가 되겠노라고 노래를 불렀으면서도 변변한 준비와 공부가 없었던 것이 우리의 귀농에서 가장 큰 잘못이라고 하겠다. 그 땅에 대궐 같은 집을 짓는 것으로 우리의 실수는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외로 많이 들어갔던 자금도 그랬지만, 더욱 치명적인 것은 집 때문에 발목이 묶인 것이었다 … 그러나 농사지어 먹고사는 일도 만만치도 않거니와, 시골에도 이웃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그것도 오래고 단단한 문화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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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을 신은 자전거 - 스타일리시한 라이딩을 위한 자전거 에세이
장치선 지음 / 뮤진트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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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타는 자전거와 남자가 타는 자전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1] 장치선,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



 애 아빠는 아직 제 몸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나, 아기는 눈썹 위가 크게 찢어져 병원에 안겨 가서 꿰매었습니다. 애 아빠가 조금씩 몸이 나아질 무렵 이제는 아기가 몸이 뜨거워지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칭얼대기만 합니다. 아파도 아프다 말을 못하는 아기로서는 울고 칭얼댈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칭얼거리니 꿰맨 자리에 자꾸 피가 배깁니다. 저녁과 밤과 새벽에 반창고를 갈아 붙입니다. 관장을 하며 배속에 있는 똥을 내보내도록 해 줍니다. 옆지기는 아기를 내내 안고 어르고 달래고 젖물리면서 긴긴 밤을 더디더디 보냅니다. 아기하고 씨름하면서 보내고 나니 어느덧 아침이 밝아 옵니다. 묵은 똥을 모두 내보낸 아기는 뜨거움이 많이 가라앉으면서 조용해지고, 엄마 품에서 조금 더 옹알거리다가 비로소 새근새근 잠듭니다. 애 아빠는 아직 성하지 않은 몸으로 이불 한 채를 빱니다. 간밤에 아기가 똥을 퍼질러 놓은 이불입니다. 바야흐로 겨울이 코앞에 닥쳐, 이제부터는 빨아서 개 놓을 이불은 얼른 빨아서 개 놓아야 하니 이불 빨래를 미룰 수 없습니다. 후들거리는 손발로 꾹꾹 누르고 밟고 하면서 이불을 빱니다. 이불 빠느라 손발이 후들거리지만, 내친 김에 기저귀 빨래를 함께 합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일하러 서울로 가야 하지만, 집일을 내버려 두고 홀로 나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밀린 일도 일이지만, 집식구를 함께 건사하지 못하고 바깥일만 챙겨서 좋을 구석은 없다고 느낍니다. 내 이웃한테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손 치더라도 내 식구한테 함께 보탬이 되는 일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나저나, 사진쟁이 가운데 저처럼 후들거릴 때까지 손발을 놀리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렇게 후들거리는 손으로는 사진기를 쥘 수 없으니까요. 몇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며 쉬어 준다면 후들거림이 잦아들 테지만, 집일이며 바깥일이며 잔뜩 있는데, 이 모두를 남한테 떠넘길 수 없습니다. 비빔질을 하면서 걱정이요, 비빔질을 마치고도 근심입니다.

 아침에 이불을 빨며 곰곰이 헤아려 보는데, 흔히는 ‘자질구레한’ 집일이라고 여기면서 애 엄마한테 이 모두를 맡기고 애 아빠는 슬그머니 몸을 빠져나와 회사로 가 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기 관장을 하려면 한 사람이 아기를 붙잡고 한 사람이 줄에다 약을 탄 물을 넣어야 하는데, 이런 일은 엄마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죽 하랴 밥 하랴 뭐 하랴, 거기다 빨래하랴 치우랴 뭣뭣 하랴, 아기가 아프지 않아도 엄마들은 혼자서 하루해가 몹시 짧지만, 아기가 아프면 더더욱 하루해가 짧을 뿐더러 잠을 못 이루고 고단함이 가득 쌓입니다.


.. 사람들이 종종 묻습니다. ‘너는 자전거로 멋부리느냐’고. 이런 질문이라면 대답보다는 반대로 물어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멋진 물건으로 멋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느냐’고 … 잘 모르는 사람들은 미니벨로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바퀴가 저렇게 작아서 어디 굴러나 가겠어!” 이는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자전거의 속도는 바퀴의 크기보다는 앞뒤 기어의 비율인 ‘기어비’거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미니벨로는 기어비가 큰 편이어서, 작은 바퀴로도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이다 … 미니벨로는 도시에서 타기 좋은 자전거인 것이다 ..  (여는 말, 67)


 오늘보다 더 무겁고 아픈 몸이던 어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서울로 일을 하러 가서 몇 시간 자리를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서울로 가는 전철길에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라는 책을 펼쳤습니다. 자전거를 즐겨타는 사람이 쓴 책이요, 더욱이 ‘자전거를 즐겨타는 여자’가 쓴 책입니다. 이제까지 나라안에 나온 자전거책을 돌아보면 거의 모두 ‘남자만 썼’습니다. 자전거 즐김이가 남자만이 아닐 텐데, 자전거책은 하나같이 남자들만 쓸 수 있는 듯 나왔고, 이 책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읽기에 좋도록만’ 엮었습니다. 얼마 앞서 나온 《자전거 홀릭》이라는 책에서는 ‘지름신’을 이야기하며 “가족을 위해 하나를 양보하면 두 개 세 개의 양보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배려와 이해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가족들은 나를 이해하게 되고, 다음번에는 기꺼이 남편과 아빠를 위해 그들의 시간을 양보해 줄 것이다(86∼87쪽)”라는 대목이 엿보이기까지 하는데, 자전거 즐겨타기를 오로지 ‘남자 일’로만 여기는 눈길에 갇혀 있는 모습입니다. 더 비싸고 더 고급스럽고 더 겉멋을 부릴 수 있는 자전거 부품을 ‘질러대면서도 아내와 아이 눈치를 안 보려면 어떻게 하면 좋다’는 ‘요령(?)’을 다룬 대목이라 이 책을 읽다가 그만 질렸는데요,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남자들끼리 자전거를 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말로 이렇게 ‘여자로서 자전거를 즐기는 일’을 얕잡거나 모른 척해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남자끼리만 타기에 더 좋은 부품을 질러대는’ 데에 돈을 쓰지 말고, ‘부부가 함께 타기에 좋은 자전거를 장만하는’ 데에는 돈을 못 쓰는지 궁금합니다. ‘부부와 아이 모두, 그러니까 식구들 모두 즐겁게 자전거 마실을 하기에 좋은 자전거를 마련하는’ 데에는 돈과 마음 모두 못 쓰는지 궁금한 노릇입니다.


.. “자전거 태워 줄게요.” 이건 나의 로망 〈아멜리에〉의 한 장면이 될 수 없는 시추에이션이었다. 나는 저 자전거를 타는 순간 ‘영심이 인증’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탔다. 키다리 아저씨의 자전거도 아니었고, 고가의 근사한 자전거도 아니었고, 내가 꿈꾸는 핑크색 튜닝 자전거도 아니었지만, 나는 탔다. 그리고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 나는 작고 아담한 핑크색 자전거를 꿈꾸었지만, 그는 튼튼하고 뒷자리가 넓은 자전거를 꿈꾸었다 ..  (32쪽)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는 오로지(까지는 아니나, 거의 오로지) ‘여자로서 자전거를 마음껏 즐기자’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여자로서 자전거를 처음 만나고 장만하고 남자친구하고 자전거를 즐기던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찬찬히 나옵니다. 글쓴이처럼 ‘자전거 타는 기본’을 모르고 예쁜 자전거부터 덜컥 장만한 사람들이 자전거를 끌고 길거리로 나오기 앞서 알아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맞게 적어 넣습니다. 먼저 겪어 본 사람으로서, 자전거를 타는 기본 예의와 교통법규 들을 곰곰이 되새기자는 이야기가 돋보입니다. ‘오랜 동무(여자들)’하고 함께 자전거를 끌고 마실을 다니기에 좋은(서울 시내에서) 곳이 어디인가를 넌지시 알려주는 대목 또한 볼 만합니다.

 다만, 이런 ‘자전거 타는 기본’ 이야기를 이 책에서 글쓴이가 굳이 왜 적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자전거 타는 기본’은, 새 자전거를 살 때 자전거와 함께 곁들여 오는 ‘자전거 설명서’에 훨씬 꼼꼼하면서 알기 좋도록 그림까지 그려서 보여주고 있거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글쓴이가 제법 긴 쪽수를 마련해서 적바림하는 일은 나쁘지 않지만, ‘자전거 타는 기본과 예의’ 이야기는 딱 한 줄로, ‘자전거를 살 때에 설명서를 반드시 챙겨서 꼼꼼하게 읽읍시다!’ 하고 적어 주면 넉넉해요. 헌 자전거를 산다 할지라도, 동네 자전거집에 들러서 ‘자전거 설명서 한 부 얻을 수 있을까요?’ 하고 여쭈면 열 곳 가운데 아홉 곳은 거저로 줍니다. 우리 나라 자전거꾼치고 자전거 설명서를 꼬박꼬박 챙기고 읽는 사람이 거의 없어, 자전거집마다 설명서가 잔뜩 쌓여 있거든요.


.. 오지랖이 넓은 탓일까? 고리타분한 생각일까? 아니, 어쩌면 늘어나는 중국집 스티커만큼이나 내 머리속도 그 무언가로 채워졌기 때문일까? 환경 비용을 줄이는 일, 그리고 환경운동가가 되는 일은 대부분 이처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일회용 나무젓가락이나 플라스틱 포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오지랖이 넓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자장면 배발도 자전거를 이용하면 된다 … 자전거도로가 충분하고 제대로 정비되어 있다면 정장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지 못할 이규가 있을까. 자전거 타기가 생활화되었다면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이 자전거를 꺼릴 이유가 있을까 ..  (46, 100쪽)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니 옆지기가 묻습니다. 아침에 들고 간 그 자전거책을 읽으니 어떠하느냐고. 머뭇거립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다가, 재미없었다고 대꾸합니다. 값비싼 자전거가 아니라 ‘좋은’ 자전거라고 느끼기 때문에(누구한테나 도움이 되고 지구환경에 보탬이 되며, 잘생기고 쓸모 많은 자전거라고 느끼기 때문에), 이 좋은 자전거로 한껏 멋을 내면서 살고 싶다는 분이 엮은 자전거 이야기라서, 남달리 눈여겨볼 이야기가 많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무슨 멋을 부리는지는 몇 줄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 자전거길 현실 몇 쪽에다가 남자친구 자전거 얘기 몇 쪽에다가 아버지와 짐자전거가 얽힌 ‘로망’을 몇 쪽쯤 이야기하다가 책 1/4을 ‘자전거 설명서’에 뻔히 나오는 이야기를 길게 적바림하는 바람에 지루했거든요.

 여느 ‘남자 자전거꾼’이 여느 ‘자전거 타는 삶을 이야기한 책’하고 짜임새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느끼니 몹시 뻔했습니다. 그래도 여느 남자 자전거꾼처럼 ‘어떤 스펙’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아 반갑다고 느꼈습니다. 이거를 갖추고 저거를 갖추지 않고서는 자전거를 타지 말아야 하는 듯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라서 괜찮았습니다. 산을 타는 재미니 강을 달리는 즐거움이니 하면서 휴일에 놀러다니는 이야기에만 치우치지 않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자전거 하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다루고 있어서 새삼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글쓴이 이야기를, 글쓴이 자전거 이야기를, 글쓴이가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쏘다니던 산뜻함과 기쁨과 고단함과 슬픔을 좀더 낱낱이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을까요. 왜 어설픈 가르침이나 길잡이에 빠져들고 말았을까요. 왜 몸소 부대끼거나 겪으면서 받아들인 ‘서울 시내에서 일하고 살면서 자전거를 타는 여자로서 내 삶은 이러했고 이러하며 이러하리라 본다’는 고갱이를 붙잡지 못했을까요.

 우리 자전거 문화가 아직은 밑바닥이기에, 자전거를 말하는 책 눈높이조차 밑바닥에서 허덕여야만 하는지요? 우리 자전거 정책이 아직 씨앗이 뿌려졌다고 하기도 어렵기에,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 목소리 담은 책 또한 이렇게 제 줏대를 잃고 시류나 유행에 끄달려야 하는가요?


.. 자동차는 불편하게! 자전거와 보행자는 편하게! 이것이 암스테르담을 암스테르담답게 만드는 기본이다 … 남자친구의 허리둘레에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은 핸들 하나가 더 생긴 것도 자동차와 혼연일체로 생활했던 탓은 아닐까 …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청담동에서는 자전거를 주차하기가 왠지 조심스럽다. 자동차 주차 공간을 조금만 할애해 자전거족을 위한 주차 공간을 만들어 주면 고급스러운 청담동 분위기에 어울리는 자전거족이 되어 줄 자신이 있는데 말이다 ..  (54, 58, 122∼123쪽)


 자전거는 틀림없이 굽높은구두도 신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전거는 고무신도 신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전거는 짐도 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전거는 짧은치마도 입을 수 있어야 하고, 청바지나 반바지나 양복 또한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빨리 달리는 자전거와 함께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가 골고루 길을 누빌 수 있어야 합니다. 아기를 태운 자전거와 함께 사랑하는 짝꿍이 나란히 앉은 자전거가 어깨동무하며 거리를 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 빵빵 소리에 세발자전거와 네발자전거가 놀라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골목길에서든 아파트 주차장에서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달리는 어린이들 자전거보다 빨리 내달리는 자동차가 사라질 수 있어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전거는 경륜장에 가거나 곧게 쭉 뻗은 길로 가야 합니다.

 평화가 되는 자전거이며, 사랑이 되는 자전거에다, 어깨동무가 되는 자전거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라 한다면, 끌신을 신은 자전거한테도 살짝 눈짓 한 번 보낼 수 있겠지요. 이야기책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는 살그머니 눈짓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예 콧대를 높이며 흥 하고 돌아섭니다. (4342.11.4.물.ㅎㄲㅅㄱ)


 ┌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뮤진트리 펴냄,2009)
 ├ 글 : 장치선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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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안아보았나요
조안 말루프 지음, 주혜명 옮김 / 아르고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21 ― 아기를 꼬옥 안아 보았나요
 : 조안 말루프,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 책이름 :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 글 : 조안 말루프
- 옮긴이 : 주혜명
- 펴낸곳 : 아르고스 (2005.11.7.)
- 책값 : 9800원



 (1) 아기를 꼬옥 안아 보았나요


 요 며칠 사이, 인천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일하러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자리에 앉고 있습니다. 굳이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나 저한테까지 자리가 나기 일쑤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빈자리가 있어도 안 앉아서 제가 앉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빈자리에 앉은 다음 ‘왜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안 앉으려 했는지’를 깨닫습니다. 제 옆에 앉은 다른 사람들이 다리를 쩍 벌리거나 화장품 냄새를 너무 짙게 내거나 엉덩이가 팔꿈치로 밀거나 하면서 고달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 견디다 못해 슬쩍 눈을 찌푸려 보기도 하지만 못 본 척입니다. 이럴 바에는 그냥 서서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 책을 읽습니다. 이렇게 제가 앉던 자리가 비며 제 앞서 서 있던 이가 앉곤 하는데, 이분들은 좁거나 말거나 끝까지 잘 앉아서 가시고, 또 이내 잠들며 곯아떨어집니다. 저로서는 딱히 내 자리를 내어준다는 생각이 있지도 않습니다만, 제 앞에서 빈자리 얻는 분들 가운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건넨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아침저녁 미어터지는 때에 아기나 어린이를 데리고 타는 분이 드물게 있습니다. 어이하여 이런 때에 이 전철을 타시나 싶어 안쓰러운데, 이분들은 틀림없이 이분들 다른 일이 있어서 이때에 꼭 타야 했겠지요. 이때 제가 자리에 앉아 있다면 얼마든지 내어드리겠지만, 아기나 어린이를 데리고 타는 어머니나 어버이를 마주칠 때에는 으레 서 있곤 합니다. 아이들이며 어버이며 답답하고 힘들겠구나 싶어 걱정이 되지만, ‘자리에 앉은 다른 분’들 가운데 힘들지 않은 분이 없을 테니, 아기를 안고 있든 다리 아파 괴로워하는 어린이 손을 붙잡고 참으라고 말하고 있든 마음써 주는 모습을 보기는 더없이 힘듭니다. 도시 문명을 탓할 일은 아니지만, 이만큼도 안 되나 싶어 속이 쓰립니다.

 하기는. 찻길 건널목에서 푸른불을 기다리고 있을 때, 푸른불이 들어와도 버젓이 가로지르는 자동차나 버스가 퍽 많으니까요. 건널목 가운데쯤을 지나고 있어도 부웅 지나가는 차가 꽤 되니까요.

 그렇지만, 자가용을 살금살금 모는 이 또한 많고, 골목에서 아이들을 널리 헤아리면서 아주 천천히 달리는 이 또한 많습니다. 빵빵거리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이 또한 많으며, 멈춤줄에 잘 멈추며 건널목이 빨간불로 바뀌어도 곧바로 달리지 않고 더 기다려 주는 이 또한 많습니다. 이웃을 헤아리지 못하는 매무새일 때에는 두 다리로 걸으나 전철과 버스를 타나 자가용을 몰거나 자전거를 끌거나 마찬가지가 되어 볼썽사납습니다. 이웃을 헤아리는 매무새일 때에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반갑고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숨쉴 틈 얼마 없이 미어터지는 지옥철에서도 공짜신문을 쫙 펼치면서 옆사람이나 앞사람 머리통이나 얼굴이 신문으로 긁히도록 하는 사람들한테 치이며 광화문 한글학회로 온 오늘 아침, 등판과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조용히 생각에 잠기면서 하루일을 엽니다. ‘그 사람들은 당신 아기이든 아는 사람 아기이든 안아 본 적이 있을까?’ ‘그 사람들은 당신 어린아이가 어른들 틈바구니에 끼여 옴쭉달싹 못하고 있을 때 그예 밀어붙이기만 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은 너덧 살짜리 아이는 서서 가도록 하고 당신들은 오래오래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을까? 아버지로서, 또는 어머니로서?’ ‘그 사람들은 당신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고 무엇을 사랑하며 왜 사랑하고 있을까?’

 한참 셈틀에 눈을 박고 일하자니 눈이 아픕니다. 화면을 끄고 뒷간으로 가서 오줌을 누고 낯을 씻은 다음 창밖을 내다봅니다. 바람이 퍽 거세게 부는 오늘은 서울하늘조차 꽤 파랗습니다. 파랗고 높은 하늘에 하얀구름 조금조금 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 파랗고 구름 하얀 날은 골목마실 하면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어느 사무실이든 건물 안쪽에 깃들어 있고, 어느 사무실이든 한낮 햇살 따갑고 눈부시게 들어오는 때에도 형광등 불빛을 환하게 켜 놓고 있습니다. 낮밥 때가 되어 이때만이라도 불을 꺼 놓고 도시락을 먹으려고 하니, “사람이 있는데 왜 불을 끄고 있어?” 하면서 다시 불을 켜고는 낮밥 먹는다며 밖으로 나가십니다. 다른 일꾼들이 모두 나가고 난 뒤 슬며시 다시 불을 끕니다. 다문 삼십 분이나 한 시간 만이라도 한낮에는 창문으로 햇살을 받으면서 책을 읽거나 쉬거나 단잠을 자거나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 가을을 이 가을답게 느끼고 이 파란하늘을 이 파란하늘로 느끼며 이 거센 바람을 거센 바람으로 제 살결이 받아들이도록 하고 싶습니다.
 







 (2)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읽기


 지난 9월 22일부터 읽고 있던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라고 하는 199쪽짜리 책을 다 읽습니다. 하루면, 아니 몇 시간이면, 아니 인천에서 서울로 가거나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는 전철길이면 큰 어려움 없이 다 읽을 만한 부피인 작은 책인데, 금세 읽어치우자니 몹시 아쉬워서 읽고 쉬고 읽다가 멎으면서 10월 19일 아침에 끝을 봅니다.

 이 책을 처음 만나 읽던 지지난주, 책 한귀퉁이에 몇 마디 생각부스러기를 끄적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읽어치울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 놀랍도록 반갑고 기쁘며 좋은 책을 하루아침에 써냈을는지 모르는데, 이러하다 하여도 우리는 이이가 온삶에 걸쳐 배우고 삭이고 가르치고 나눈 끝에 어느 하루 온힘을 모아 책 하나를 써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웬만한 거의 모든 책은 몇 해에 걸쳐 조금씩 꾸준히 쓰는 가운데 한 권으로 모두어집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여러 해, 또는 여러 열 해에 걸쳐 피와 땀이며 사랑과 믿음이며 깃든 책을 하루아침에 읽어치울 수 있겠습니까. 하루 동안만 반가움과 기쁨을 맛보기에는 참으로 아쉽고 아깝고 슬프지 않습니까. 여러 해, 또는 여러 열 해에 걸쳐 아주 조금씩, 차근차근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며 내 마음을 채우고 덥히고 북돋워야지 싶습니다.”

 대학교에서 생물학과 환경학을 가르친다는 글쓴이 조안 말루프 님은 생물학이라는 학문을 책에 갇히거나 연구실에 매인 지식으로는 다루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 내 이웃과 우리 터전인 자연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는 매무새로 생물학을 가르치고, 사람과 자연이 도시나 시골에서 슬기롭게 어울리는 길을 일러 주는 환경학을 가르치겠구나 싶습니다.

 이 책에 처음 붙은 이름은 “Teaching the Trees, Lessons from the Forest”라고 합니다. 이 이름을 우리 말로 옮기며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로 고쳐썼는데, “나무를 가르치고, 숲한테서 배우기”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나무를 꼬옥 안아 보는 데에서 뗀다고 합니다. 나무를 온몸으로 껴안아 보지 않고서는 나무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으며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무를 온 가슴으로 느껴 보아야 비로소 나무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지없이 마땅한 소리입니다. 나무란 사람과 같은 목숨인데, 나무를 안아 보지 않고 어찌 나무를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온 우주가 깃든 목숨인데, 나무를 안아 보려고 다가서지 않으며 나무를 배운다든지 다룬다든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나무를 나무 그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나무를 껴안는 일도 드뭅니다. 나무라는 낱말은 다 알고 있겠지만 나무라는 삶과 목숨은 제대로 모릅니다.

 이와 비슷하게 책을 살포시 껴안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를, 흙길을, 물과 바람을, 어린이를, 할매 할배를, 무지개를, 비와 구름을, 산과 들을, 논과 뻘을, 바다와 시내를, 골짜기와 들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쉬우나마, 또 모자라나마 이 같은 작은 책이라도 한 권쯤 읽으면서 우리 생각과 마음과 넋과 얼을 새롭게 추스르거나 다독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우리들 걸어갈 앞길에 좋은 마음벗을 사귀고 좋은 마음스승을 모실 수 있으면 반가우리라 생각합니다.
 







 (3) 슬쩍 들여다보기


 책을 덮고 나서 다시 한 번 들춥니다. 책을 읽으면서 가슴으로 한 줄 두 줄 스며든 대목을 차근차근 되짚으면서, 이 알맹이를 섣부른 지식조각이 아닌 마음밥으로 잘 받아먹자고 다짐합니다. 밑줄을 긋거나 별을 그린 몇 대목을 옮겨적어 봅니다. (4342.10.19.달.ㅎㄲㅅㄱ)


[15쪽] 숲에서는 특별한 향기가 난다고 늘 생각했던 나였지만 그날은 숲에 들어가기도 전에 숲 향기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자연림이 사라지기 전, 그러니까 나무와 이끼, 새와 곤충이 함께 호흡을 섞던 그 먼 과거에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땅에서도 이런 향기가 나지 않았을까?

[16쪽] 우리는 숲을 잃고도 우리가 진정 잃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30쪽]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요즘 아이들은 사람이 아닌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것이 보호해야 되는 대상이라면 불편해 하는 마음은 더 커지는 것 같다. 내가 학생들에게 나무는 지키고 보호해 줘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을 하면 학생들은 금방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몸을 비튼다. 그러나 나는 그들 모두가 깊이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고자 애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살아숨쉬는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듯이, 그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야 할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33쪽] 짚신벌레, 뱀, 나무에게서 누가 경이로움, 경외감, 존경 따위를 느낀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학생들에게 이들도 경이로운 존재이며,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44∼45쪽] 나는 양버즘나무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 사는 아홉 마리의 곤충들을 알고 있다. 그 외에도 아마 내가 모르는 곤충들이 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양버즘나무 한 그루를 벨 예정이라면 어쩌면 그 나무 위에서 자신의 꿈을 찾게 될 아이 하나와 최소한 다섯 종의 곤충들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어느 날 내가 내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설명해 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나무는 환경을 이루는 한 요소가 아니라, 나무 자체가 환경이구나.”

[55쪽] 사람들은 곰을 먼저 죽이고, 그리고 나서 너도밤나무 숲을 죽인다. 친구와 내가 다시 숲을 찾았을 때 나무는 대부분 벌목을 당한 후였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벌목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말할 수 없는 고요함 때문에 숲은 더 슬퍼 보였다. 막 잘려나간 나무 밑동은 수액으로 젖어 있었고 남아 있는 나무들은 무력하게 잘려나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잘린 나무들이 집이나 가구를 만들 목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짓이겨져서 버려지거나 태워 없어진다. 그나마 가장 나은 건 나무 판지를 만들기 위한 펄프로 가공되는 경우다. 이 숲의 주인은 이렇게 나무를 통째로 내어줘도 아주 적은 돈을 받을 뿐이다. 그런데 왜 나무를 베냐고? 그것은 너도밤나무가 가치 있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이것은 자본주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40년이 지나도 이 너도밤나무들은 지금보다 더 자랄 뿐, 여전히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다.

[61쪽] 그 순간 우린 우리의 잘못을 깨달았다. 죽은 나무는 하늘다람쥐가 가장 좋아하는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이후에도 나는 하늘다람쥐의 보금자리라는 것을 모르고 죽은 나무를 베어버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우리에게 아무 쓸모없는 죽은 나무들조차 생태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지내는 것이다.

[69쪽] 더 슬픈 것은 이곳이 이 근처에 남은 마지막 활엽수림이라는 사실이다. 이곳에 있던 나무들이 베어지던 날 이곳에 살던 새들과 동물들은 더 이상 갈 곳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숲 주위에 이들이 거처를 옮길 만한 곳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73쪽] 하지만 산림 관리원이 당신에게 말해 주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도룡뇽과 도마뱀, 그리고 소나무좀을 유용한 양식으로 보는 새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사는 건강한 숲에 사는 소나무좀은 절대 소나무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76쪽] 딱따구리가 둥지를 만드는 데에는 보통 1년에서 6년이 걸린다 … 놀랍게도 이들이 주로 먹는 먹이는 바퀴벌레였다. 우리는 바퀴벌레를 먹어 주는 이 새를 사랑해야 한다.

[78∼79쪽] 다만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가 나무를 단지 자원으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 “이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늙고 아름다운 나무는 없어.” 그렇다. 노목들은 죽음이 얼마 안 남았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나무들이다 … 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만 살고 있는 도시에는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숲이라고 부르는 곳에는 어린 나무와 젊은 나무만 있을 뿐이다.

[91∼92쪽] 바구미의 일생이 경이로운 이유는 누군가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이 곤충들의 행동을 쫓아서 그것을 기록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성충바구미가 나오는 것을 보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112쪽] 내가 꽃밭에 아카시아 나무를 두기를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 자연은 그것을 두기로 결정했고, 자연의 선택이 가장 옳다는 걸 안다. 나는 나무와 싸우기를 멈추고 그냥 물러서서 두고보았다. 그냥 내버려두자 나무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이제는 15미터가량이 되어서 정원의 한 구석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나무는 이제 나의 쉼터다.

[127쪽] 종이를 값싸게 얻기 위해 숲을 아름답게 수놓는 붉은꽃산딸나무 꽃을 포기할 것인가?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129쪽] 나는 내 손 안에 있는 종이가 나무뿐만 아니라 딱정벌레와 아름답게 지저귀던 새들과 벌레를 잡아먹던 박쥐 같은 다른 생명들이 사라진 대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 작은 도시에 단지 나 하나라는 사실이 몹시도 슬프고 외로웠다.

[140쪽] 우리는 아이들의 교육과 노후를 대비하는 데에는 많은 돈을 쓰고 있지만, 정작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숲과 산호초와 강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일에는 무신경하다.

[159쪽] 공원 조성 책임자는 자연과 생태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숲길을 걸어 본 적이 별로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그곳의 나무들을 판 돈으로 공원 조성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숲이 지금 그대로 보존되길 바라는 나로선 그들의 결정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 나는 사람들이 나처럼, 울창한 숲길을 걸으면서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160쪽] 드디어 어느 날 경고도 없이 벌목 기계가 나타났다. 물론 그것은 합법적인 일이었다.

[173∼174쪽] 나는 남성을 혐오하는 사람도 아니고, 남성이 우리의 모든 환경 문제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폭력적인 사람들은 지구와 나무들에 대해서도 폭력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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