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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그리고 삶
최건수 / 시공사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사진찍기와 ‘사진읽기’ 모두 즐길 노릇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3] 최건수, 《사진 그리고 삶》


- 책이름 : 사진 그리고 삶
- 글·엮음 : 최건수
- 펴낸곳 : 시공아트 (1999.3.20.)
- 책값 : 15000원



 (1) 사진을 언제까지 만들고 있는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닌 사진을 ‘만드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은 ‘찍는’ 일만으로 모두 담아내어 보여줄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로서는, ‘찍는’ 틀을 벗어던지며 ‘만드는’ 쪽으로 접어들기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요즈음 만화쟁이와 그림쟁이들은 종이에 대고 펜이나 붓으로 그림을 안 그리곤 합니다. 셈틀을 켜 놓고 셈틀에서 펜마우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만화책이나 그림책에서 ‘종이 그림’을 만나기란 퍽 힘듭니다. 또한, 종이 그림을 그렸다 할지라도 다시 스캔을 뜨느니 뭐를 하느니 하면서 훨씬 번거로울 뿐 아니라, 종이에 그렸던 그림 느낌을 제대로 살리기까지 퍽 많은 손길과 손품과 돈까지 들여야 합니다.

 만화쟁이와 그림쟁이가 셈틀로 그림을 그린다면, 사진쟁이는 필름사진 아닌 디지털사진을 찍는다 할 만합니다. 요즈음은 필름 원판이 아닌 디지털 파일로 일을 하거나 사진을 마련하거나 책을 꾸미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디지털 파일로 사진을 찍어 놓으면 나중 일이 수월합니다. 필름으로 찍은 사진은 따로 현상을 하고 스캐너를 돌리고 빛느낌을 살피고 하면서 손이 많이 가고 오랫동안 눈 빠지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와 달리 디지털사진은 처음 사진을 찍을 때에 빛느낌을 다 맞추어 놓고 찍으면 됩니다. 셈틀을 켜고 사진 풀그림을 돌려 이래저래 손질할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빨리빨리 온누리’에 걸맞는 문화나 예술이 디지털사진이 아니냐 싶기도 하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사진쟁이들이 필름값 걱정을 덜며 어느 만큼 홀가분하게 즐기는 디지털사진이라 여길 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디지털사진이라고 반드시 홀가분하지는 않습니다. 필름사진은 필름값이 들지만, 디지털사진은 ‘셈틀 저장장치’가 있어야 하거든요. 필름값도 필름값이지만, 디지털사진 파일은 부피가 작지 않기 때문에 이 파일을 건사할 저장장치가 꽤 커야 할 뿐더러, 한 번 모셔 놓은 저장장치가 언제까지나 알뜰히 지켜질 일은 없으니, 더 큰 부피인 저장장치를 틈틈이 따로 마련하여 겹으로 건사해 놓아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돈이 많이 깨질밖에 없는 사진입니다.


.. 주입식 교육에 의해서 형성된, 사진에 대한 고정된 틀이 몸에 밴 경우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성을 잃는 경우가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한국 교육과정의 경직성이 개개인의 개성을 묻혀 버리게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 우리가 외국어를 해독할 때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시각 언어의 해독도 역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문의 영역과는 달리 예술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열린 마음이지요 ..  (14, 18쪽/구본창)


 우리 집식구는 열흘쯤 앞서 인천 골목동네 살림집을 떠나 충주 산골마을 살림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누구들처럼 돈이 있어 집 사고 땅 사고 하며 들어온 시골집은 아닙니다. 돈이며 집이며 땅이며 하나 없는 주제에 비어 있는 집자리 하나 얻어 살림살이를 옮겼습니다. 여러 날에 걸쳐 손바닥만 한 땅뙈기 돌을 고르고 비닐을 걷어내어 밭으로 일구었고, 이 밭에 처음으로 씨앗을 심어 기릅니다.

 이러는 동안 제 사진찍기는 거의 멈추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담아 온 사진은 ‘헌책방’과 ‘인천골목길’인데, 이 두 가지하고 아주 동떨어진 곳에서 시골살림을 꾸리고 있으니까요.

 새 삶터에서는 새 사진감을 찾아 새 사진을 찍어야 할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만큼은 아닐지라도 내 사진감을 놓거나 잊지 않은 채 틈틈이 찾아다니며 내 사진감을 함께 일굴 노릇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시골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좋으며 반가운 사진감을 하나 느껴 붙잡고, 지난날부터 꾸준히 이어온 사진감은 틈나는 대로 차근차근 가다듬으면서 여태껏 나 스스로 걸어온 사진길이 얼마나 고왔거나 좋았거나 올바랐는지를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그동안 걸어온 사진길은 나 스스로 바라지 않았어도 ‘이 나라 이 땅에서는 자꾸 스러지거나 잊혀지거나 없어지는’ 모습을 담는 길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제 사진감을 저 스스로 즐기고 있으면서도 ‘오늘 찍은 사진을 앞으로 두 번 다시 나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찍을 수 없겠지’ 하고 느꼈습니다. 따로 조바심을 내려 하지 않았으나, 찍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살펴보며 제대로 못 담은 사진이라고 느낄 때에는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과 ‘이렇게 찍으면 어떡하니’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마주할 수 없는 사진감을 왜 자꾸 엉터리로 찍느냐고 스스로 다그치고 나무라면서 지냈습니다.

 시골집 한 구석에서 밭일을 하다가 아이를 보다가 밥을 하다가 파리를 잡다가 빨래를 하다가 등허리를 두들기며 한동안 드러누웠다가 곰곰이 헤아립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는 나날이 길면서도 짧아, 사진찍기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그나마 시골집으로 온 뒤부터는 아이 사진조차 얼마 못 찍어 주고 있다고.


.. 그러나 몇 달 동안은 거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어요. 밤거리에서 방황하고 술집 종업원들과 사귀면서 이태원 분위기를 몸으로 익혔죠. 그러다가 한 업체와 연결되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비로소 촬영이 시작됐습니다. 한 3년 찍었어요 … 처음 이태원에 들어갔을 때는 부정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예를 든다면 서양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짬뽕 문화의 현장, 속 빈 여대생들이 영어라도 한 마디 배워 볼까 배회하는 곳 등. 그러나 몇 년을 이태원에 출입하고, 유흥가 종업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요. 그들도 평범한 인간들이었고, 도리어 기구한 삶들이 많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 들었어요. 그래서 그들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면서 고발성 사진을 찍기보다는 그들의 삶을 우리들의 삶과 동격으로 놓고 담담히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스트레이트냐 메이킹이냐 하는 문제보다도 사진가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담기 위해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겠지요 ..  (28, 34쪽/김남진)


 한숨을 돌리고 가만히 돌아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저부터 얼마 앞서까지 도시에서 도시사람으로서만 지냈습니다. 시골살림을 꾸리면서도 도시사람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 돌아보면, 사진쟁이뿐 아니라 그림쟁이도 매한가지요, 만화쟁이나 여느 글쟁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인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교사나 교수들 모두 도시사람일 뿐입니다. 전문직이라는 의사나 변호사나 정치꾼 모두 도시사람입니다. 사는 곳은 시골일지라도 도시사람다운 살림살이를 꾸리고 있습니다.

 새소리를 듣고 벌레소리와 바람소리를 느끼는 시골에서 조용히 곱씹습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을 하자면 아무래도 도시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을 즐길 사람은 모조리 도시에만 있으니, 사진쟁이 스스로 도시사람이어야 하고 도시 터전에 발맞추며 지내야 하는지 모릅니다. 사진잔치를 해도 도시에서 하고, 사진책이 나와도 도시에서 나오며, 사진을 누군가 사들인다 하여도 도시사람이 사들입니다. 시골에서 이루어지는 사진잔치는 구경할 수 없습니다. 시골사람한테 팔려고 내놓는 사진책을 본 적은 아직 없습니다. 시골사람이 사진 작품을 장만해서 당신 집이나 논가나 밭가에 세우거나 걸어 놓는 모습 또한 아직 못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삶이란, 아니 오늘 우리 사진쟁이 삶이란 도시에 뿌리내리고 도시에 머물며 도시만 헤아리는 삶이로구나 싶습니다. 도시에서만 주고받을 사진이요 도시에서 태어나는 사진인 가운데 도시에서 자리매기는 사진이로구나 싶습니다. 삶과 넋과 열매 모두 온통 도시에 쏠려 있는 사진문화이고 사진예술입니다.

 산이나 들이나 바다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산사람이나 들사람이나 바다사람 눈높이와 삶결로 사진을 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안승일 님이 이룬 《굴피집》(1997) 하나쯤 있다고 할까요. 시골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지내는 분들이 찍는 시골살림 사진조차 시골사람이나 시골마을을 ‘풍경’으로 바라보고 풍경으로 담습니다. 시골사람이나 시골마을을 ‘삶’으로 껴안으며 ‘사진’으로 빚어내는 모습은 아직 못 보고 있습니다. 산일이든 들일이든 바다일이든, 산과 들과 바다에서 하는 일을 담을 때에도 ‘풍경’에서 헤매거나, 뭔가 다르다면 그나마 ‘기록’이라는 테두리에 머물 뿐, ‘삶’이라는 자리를 찾아나서지 못합니다. 산사람은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헤아리거나, 들사람과 바다사람은 무엇을 어느 곳에서 어떠한 눈썰미로 바라보고 있는지 살피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오늘날 한국땅 사진쟁이들 사진이란 ‘만듦사진’뿐입니다. 일하는 골방에서 만드는 사진이든, 셈틀을 주무르면서 만드는 사진이든, 인화액과 인화지를 만지작거리며 만드는 사진이든 만듦사진입니다. 더욱이, 사진기 단추를 찰칵찰칵 누르며 담는 사진 또한 있는 그대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만드는’ 사진에 머물고 맙니다.

 삶을 느끼지 못하고 풍경만 잡아채니까, 이 또한 ‘스냅’이나 ‘스트레이트’가 아닌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진쟁이 눈높이로 얼개와 이야기를 억지로 만드는’ 사진이 되어 버립니다. 만듦 삶이고 만듦 넋이며 만듦 사진입니다. 




 (2) ‘한국 사진작가’는 누구인가


 사진찍기와 사진비평과 사진전시와 대학교수 일을 다 함께 한다는 최건수 님이 쓰고 엮은 책 《사진 그리고 삶》을 읽습니다. 이 책 《사진 그리고 삶》에는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최건수 님이 사진쟁이 스물다섯 사람을 차례차례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통으로 실어 놓고 있습니다.


.. 요사이는 사진을 전공하지 않은 것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뭐랄까, 학연이나 인맥으로부터 자유가 결국 작업의 자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요즘은 많이 들어요 … 새로운 소재를 찾기보다는 이미 익숙한 소재들을 새롭게 접근하여 사진을 풀어 가는 것입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새롭게 바라볼 때 사물은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  (57, 59쪽/민병헌)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글쓴이 최건수 님은 틀림없이 ‘한국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들 스물다섯 사람이 어떻게 ‘한국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가 궁금합니다. 한국에는 사진작가라 하는 사람이 이들 스물다섯밖에 없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을 드는 책을 내놓는다고 할 때에, 이들 스물다섯 사람이 맨 먼저 다루어져야 하는 까닭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최건수 님은 2004년에 《사진 속으로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사진 그리고 삶》은 판이 끊어졌고, 《사진 속으로의 여행》은 품절되었다고 하는데, 첫 번째 스물다섯 사진쟁이 이야기에서는 “구본창, 김남진, 김장섭, 민병헌, 이상일, 이정진, 이주용, 임양환, 조남붕, 최광호, 최병관, 황경희, 김대수, 김재경, 김석종, 김석중, 박용세, 신경철, 신미혜, 신현숙, 신혜경, 안승환, 정동석, 정주하, 한세준” 님을 다룹니다. 두 번째 스물다섯 사진쟁이 이야기에서는, “강상훈, 강용석, 고명근, 권순평, 김기찬, 김우영, 김정수, 박홍천, 배병우, 성남훈, 양성철, 오상조, 오형근, 우종일, 육명심, 이갑철, 이완교, 임영균, 전흥수, 정창기, 주명덕, 차용부, 한정식, 홍순태, 황규태” 님을 다룹니다.

 사진쟁이 이름을 낱낱이 살펴보면 이들을 두고 ‘한국 사진쟁이’라 일컫는 일이 엉성하거나 잘못이라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진쟁이를 다룰 수 없고 모든 사진밭을 두루 살필 수 없으며 모든 사진삶을 펼쳐 보일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몇몇 분을 빼놓고는 사진을 만드는 분들입니다. 사진으로 이야기 하나 엮으려고 하는 분들은 몇 사람 다루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사진쟁이 온삶을 실어내는 사람은 쉰 꼭지에 이르는 만나보기 이야기 가운데 몇 되지 않습니다.


.. 대학의 사진과에 입학함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이미 예술가가 되어 버리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사진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증거지요 … 결국 내가 찍은 사진이 내가 가지고 있는 자양분으로부터 나오지 못할 때, 한 사람의 올곧은 사진가가 아닌 모방꾼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 또 하나의 원인이라면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자각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쉽게 예술가라는 탈을 뒤집어쓰기 위해서라도 메이킹으로 선회하죠 ..  (73쪽/이상일)


 한국에서 사진을 하고 있으면 누구나 ‘한국 사진작가’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말이나 ‘사진작가’라는 말은 더없이 부질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책에 실린 사진쟁이들 발자국을 더듬어 보면,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 ‘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분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사진기를 내려놓고 강단에 섰다 할지라도 사진쟁이는 사진쟁이입니다. 사진을 찍은 손품에 따라 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이룬 사진은 다른 이들보다 한결 돋보이거나 빼어나다 여길 수 있습니다. 주류라 하건 비주류라 하건 이들 ‘가르침이 + 찍새’인 분들이 숱한 ‘아마추어’ 사진쟁이들한테 피와 살이 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면 이 책은 값있고 뜻있고 멋있다 할 만합니다.


..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미국에서 손꼽히는 사진쟁이)의 사진 속에 그들의 삶이 스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사진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깊이 있는 사진을 하면서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삶의 즐거움입니다 ..  (106쪽/이주용)


 만듦사진이라고 해서 사진을 모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만듦사진을 한다고 해서 사진하고 동떨어진 길을 걷는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만듦사진이든 삶사진이든 사진을 할 수 있으면 되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엮어서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최건수 님이 만나본 최광호 님 말씀마따나 ‘사진으로 재미있게 살’ 수 있으면 되는 한편, ‘사진으로 이야기를 엮’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최건수 님 사진책에 실린 쉰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나마 두 갈래 가운데 하나에 드는 분이라 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분들이 돈이나 이름을 바라며 사진을 찍지는 않을 터이나, 거의 모두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만 만나면서 사진하고 삶이 이어지는 고리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는지 잘 모겠습니다.

 만듦사진 또한 똑같이 사진이요, 만듦사진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누구한테나 삶이 있으니 《사진 그리고 삶》이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몇몇 ‘찍는 사진’을 하는 사람을 끼워넣는 일은 달가워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스물다섯 사람 + 스물다섯 사람을 몽땅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서 ‘만듦사진에도 어김없이 삶이 있고 사람이 있으며 이야기가 있다’고 나아가면서 더욱 깊은 사진말을 들려줄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오거나 나라밖으로 사진을 배우러 다녀왔거나 대학교나 대학원에서 사진학을 하거나 사진을 가르치는 이들만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식구들 사진을 찍는 사람 또한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윤미네 집》을 일군 전몽각 님 또한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골목 안 풍경》을 이룬 김기찬 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사진밭에서는 ‘당신은 아마추어요’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데, 여느 사람들이 복닥거리며 어우러지는 삶을 찍는 사진을 즐기는 사진쟁이가 얼마 없기는 합니다만, 다른 누구도 아닌 사진작가이면서 사진비평가이고 사진전시자인 가운데 대학교수이기까지 한 최건수 님이라 한다면, 당신만 한 자리에서 써 내려갈 《사진 그리고 삶》이란 이러한 높낮이에서 그칠 책이어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참말로 사진은 무엇이며 삶은 또 무엇인가를 파헤치면서 건드리는 책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들한테서 당신들한테 사진과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뿐 아니라 최건수 님 스스로 생각하는 사진과 삶을 또렷이 밝히며 더욱 깊고 너른 이야기를 나누어 《사진 그리고 삶》에 담아야 할 노릇이 아니냐 싶습니다.


.. 미국에서는 사진으로 재미있게 사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진이 다양한 것은 사진을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 사진은 무엇을 주장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진을 가지고 즐기지도 못합니다. 어정쩡하게 서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곁눈질하면서 사진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 사진의 특성은 이미지 전달이지요. 기계적 특성에 너무 매달리면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 사진은 보편적 아름다움이나 결정적 순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느낀 것을 토해 내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일상 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장비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진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죠 ..  (157, 164쪽/최광호)


 아쉬우나마, 숱한 사진쟁이들은 사진하는 마음과 살아가는 마음을 이 도톰한 책에 알뜰히 펼쳐 보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쉽게도 최건수 님은 이 대목에서 더 깊고 그윽한 대목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자기가 느낀 것을 토해 내는” 사진이라 한다면, “무엇을 느끼셔서 무엇을 담았습니까?” 하고 물을 줄 알아야 하고, “느낀 그 무엇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던가요?” 하고 다시금 물을 줄 알아야 하며, “사진으로서 그 무엇을 느끼는 일이란 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고 거듭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일상 속에 있는 자기가 느낀 것을 보려면 어떻게 살며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같은 물음을 잇는다든지, 이 물음을 사진쟁이들이 하기 앞서 최건수 님 스스로 “아, 그래요. 사진이란 이러구저러구이며 삶이란 이바구저바구로군요.” 하는 사진말을 길어내야지 싶습니다.


.. 조금 극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만, 일본의 어린 유치원생들은 해를 그릴 때도 모두 빨간색으로 그리도록 교육받지 않습니다. 파란 해를 그린 아이도 있고, 검정 해를 그린 아이들도 있죠. 선생님들은 그 부분을 인정하고 북돋아 주지요. 이렇게 열린 사고로 훈련받은 아이들은 세상과 사물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요 ..  (122쪽/임영환)


 어제 집에서 아이랑 애 엄마랑 영화 〈로빙화〉를 또 한 번 보았습니다. 어제는 “아명, 왜 해를 파랗게 칠하지?” “해가 너무 뜨거우면 아빠가 일하시기 힘드니까요.”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목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마침 요 며칠 동안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텃밭에서 돌 고르기를 한 탓인지 모릅니다. 해를 발갛게 그릴 수 있으나 노랗게 그릴 수 있고, 또 파랗게 그리거나 까맣게 그릴 수 있습니다. 하얗게 그린다거나 잇빛으로 그릴 수 있겠지요. 푸르게 그리거나 하늘빛에 녹아들도록 그릴 수 있습니다. 어느 때이든 해를 그리는 사람 마음이 깃들어 있다면 제 마음 가는 대로 그릴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 누리에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하는 사진이란 무엇인가 새삼스레 곱씹습니다. ‘찍는’ 사진이 되든 ‘만드는’ 사진이 되든, 오늘 이 땅 이 나라 사진쟁이라 하는 분들은 참으로 당신들 나름대로 당신 삶으로 받아들이는 무엇인가를 느끼면서 사진기를 쥐고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사진작품을 선보이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싸해 보이는 사진이나 잘 팔리는 사진이나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에 얽매인 채, 정작 ‘내 사진 즐기기’하고는 그예 멀어지거나 등을 돌리고 있지 않느냐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을 말하는 글을 쓰거나 책을 엮는 분들을 바라보면서도 이러한 걱정은 이어집니다. 참말 ‘좋은 사진을 좋게 즐기는 마음을 담는 사진읽기’를 펼치고 있으신지, 강단에 선 지식인으로서 ‘말 만들기’를 하고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사진찍기도 즐기는 일이요, 사진읽기도 즐기는 일입니다. 즐길 수 없다면 사진찍기가 아니고 사진읽기가 아닙니다. 아니, 즐기지 못한다면 삶이 아닙니다. 즐기지 못하면서 사진삶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4343.7.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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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조지 풀러 / 눈빛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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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을 빛깔사진으로 담은 미군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5] 조지 풀러,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예순 해를 맞이하면서 여러 가지 책과 사진자료가 빛을 봅니다. 이 가운데 지난 5월 10일에 나온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존 리치 사진,서울셀렉션 펴냄,2010)은 무척 돋보이는 사진책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맨 앞자리에 실린 추천글을 쓴 사람은 백선엽 씨입니다. 백선엽 씨 이름 밑에는 ‘대한민국 육군협회 회장’과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고문’이라는 직책이 달려 있습니다. 백선엽 씨가 한국전쟁 때 거두었다는 ‘큰 성과(쥐잡기 작전)’를 헤아린다면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사진책에 추천글을 쓸 만할 수 있으며, 한국전쟁을 기린다는 사업회 고문 자리를 맡을 만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선엽 씨 발자취를 돌아보면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를 나왔고, 인천에서 당신과 동생 백인엽 씨 이름을 딴 ‘선인재단’을 만들었습니다. 만주군관학교라는 곳은 아무나 들어가는 여느 학교가 아닙니다. 인천에서 선인재단은 어마어마한 사학비리를 저지른 곳일 뿐 아니라 인천이라는 곳이 꼴통이 되도록 권력을 뒤흔들던 곳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일제강점기 발자취라든지 군사독재정권 무렵 사학비리를 저질렀다든지 하는 발자국이란 ‘한국전쟁 공로’에 견주면 아무것 아닐 수 있으며, 눈감을 만한 티끌로 삼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속이 갑갑하고 아찔합니다. 전쟁 때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외치며 두 주먹 불끈 쥐었던 사람이라면 전쟁을 마친 다음에도 나라를 지킬 수 있게끔 맑고 깨끗하며 정갈한 삶을 꾸려야 할 노릇이 아니냐 싶습니다. 전쟁 업적과 친일부역과 사학비리란 한 자리에 한 사람한테 나란히 놓일 만한 보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씁쓸한 추천글이 달린 사진책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을 한 장 한 장 넘깁니다. 추천글은 씁쓸하더라도 책에 담긴 사진이 씁쓸하지 않다면 이 사진책은 훌륭합니다. 아니, 이런저런 추천글하고는 아랑곳하지 않을 책 하나 알맹이입니다. 그런데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에 실린 사진들 또한 그리 달갑지 못합니다. ‘컬러로 보는’이라는 책이름답게 한국전쟁 모습을 빛깔사진으로 담은 드문 자료로 엮은 책이기는 하나, 한국땅에서 일어나 한겨레가 서로 치고박으며 숨을 거두고 괴로워 하던 나날을 읽을 수 없습니다. 또한, 총부리를 마주하며 다투는 가운데에도 여느 사람들은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살림을 여느 매무새로 꾸리고 있던 손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지난 1996년에 나온 작은 사진책 《끝나지 않은 전쟁》을 책꽂이에서 꺼내어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든 《끝나지 않은 전쟁》이든 미군 사진기자가 찍은 빛깔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책은 한국땅과 한국전쟁과 한겨레붙이를 바라보는 눈매가 사뭇 다릅니다. 아니, 한국땅과 한국전쟁과 한겨레붙이를 바라보는 눈매가 다르다기보다 두 미군 사진기자 삶이 달랐겠지요. 사뭇 다른 삶에 따라 서로 다른 눈매가 되었을 테며, 서로 다른 눈매에 따라 서로 다른 눈썰미로 한국땅에서 한국전쟁을 부대끼고 한겨레붙이를 마주하면서 빛깔사진을 담았을 테지요.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사진책은 책이름 그대로 1950년 무렵이든 1996년 무렵이든, 또 2010년 무렵이든 끝나지 않았을 뿐더러 끝날 수 없어 보이는 싸움터 삶자락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끝나지 않을 싸움터로 보이는 이 자그마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자그마한 사람들은 아기자기하며 앙증맞습니다. 군인들이 쏘아댄 총알과 폭탄 때문에 산과 들은 무너지고 나무는 꺾이고 풀과 꽃은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나 군인 아닌 여느 사람들, 또 군인으로 끌려간 여느 사람들은 빈 들판에 곡식을 심어 일구고 빈 멧부리에 나무가 자라도록 마음을 쏟습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헌 옷가지이든 모포이든 무엇이든 그러모아 바느질을 하여 아이들 옷과 어른들 옷을 마련합니다. 쑥대밭이 된 마을에서 흙과 나무로 집을 다시 세우고, 이런 마을 한켠에서 아이들은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코를 흘리며 골목놀이를 합니다. 널뛰기를 하고 초콜릿을 얻으려고 미군한테 달려듭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작은 사진책을 덮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 사진책 하나로 엮인 전쟁 사진을 찍은 미군 사진기자 조지 풀러 님은 ‘전쟁과 자본주의 미국 문화와 삶에 진저리를 치면서 넋이 맑고 차분하고 깨끔한 사람과 삶’을 찾아나서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하고. 왜냐하면 《끝나지 않은 전쟁》에 실린 한국땅 여느 한겨레붙이 모습을 보면, 오늘날 한국 사진쟁이가 인도이니 티벳이니 네팔이니 찾아가서 사진으로 담는 ‘거룩하고 수수하며 깨끗하고 착하다는 사람들’ 느낌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사진책에 실린 한국땅 한겨레붙이 모습을 볼라치면 한 마디로 ‘전쟁 난민’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으레 떠올릴 만한 ‘코소보 아이들’이라든지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이라든지 ‘콩고 아이들’과 같은 느낌이 납니다.

 한국전쟁이란 참으로 쓰디쓴 우리 옛 생채기입니다. 죽인 쪽이나 죽은 쪽이나 아프디아픈 자국입니다. 앞으로 마흔 해가 더 지나 한국전쟁 백 해를 맞이한대서 아물 수 없는 슬픔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왜 우리한테 생채기요 아픔이요 슬픔이 될까요. 한국전쟁을 떠올릴 때 곰곰이 살필 대목이란 북침이니 남침이니 전쟁 피해이니 하는 숫자셈이어야 할까요. 몇 백만이 죽거나 얼마나 많은 산과 들이 무너졌거나 얼마나 많은 들짐승이 나란히 숨을 거두었거나 하는 한국전쟁이 아닙니다. 이때 뒤로 남과 북이 서로서로 무기를 더 늘리려고 얼마나 큰돈을 쏟아부었으며 서로서로 독재 틀거리를 지키고자 반공과 반미를 왜 그토록 모질게 외쳤는가 하는 대목 또한 한국전쟁하고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한국전쟁이란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가 죽고 우리 어머니가 죽었으며 우리 누나가 죽는 가운데 우리 동생이 죽은 끔찍한 일입니다. 내 살붙이가 죽고 내 이웃이 죽었으며 내 동무가 죽은 끔찍한 일입니다. 고단하게 죽고 만 용산 철거민 또한 내 이웃이요, 미선이와 효순이 또한 내 동생이며, 한때 정치권력자와 언론들이 폭도로 내몰았던 광주사람 또한 내 살붙이입니다.

 어떤 전쟁이든 우리 삶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괴롭히며 짓밟습니다. 어떤 전쟁에서든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느 사람들은 아프고 힘들며 고단해야 합니다. 어떤 전쟁이든 거룩하다거나 뜻깊다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어떤 전쟁에서든 권력자와 지휘자는 죽지 않으며, 전쟁이 끝났든 전쟁이 없는 동안에든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자면 모든 무기와 군인이 사라져야 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참된 힘이란 무기와 군대가 아닙니다. 나라를 지키는 참다운 힘이란 여느 사람들 따스한 사랑과 땀흘려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샘솟습니다. (4343.6.25.쇠.ㅎㄲㅅㄱ)


- 끝나지 않은 전쟁 (조지 풀러 사진,신광수 엮음,눈빛 펴냄,1996.6.3./1만 원)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모르겠으나, 사진책 《끝나지 않은 전쟁》을 엮은 신광수 님 또한 백선엽 씨한테서 도움을 받아 사진에 나온 곳이나 그무렵 이야기를 듣고 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지 풀러 - 끝나지 않은 전쟁]에 실린 사진들 





















 

[존 리치 -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에 실린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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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신미식 포토에세이
신미식 지음 / 푸른솔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구경꾼 사진인가 사랑꾼 사진인가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2] 신미식,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책이름 :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글ㆍ사진 : 신미식
- 펴낸곳 : 푸른솔 (2007.7.7.)
- 책값 : 27000원


 (1) 구경하는 사진과 살아가는 사진


 제가 마지막으로 마친 학교는 고등학교입니다. 제가 마친 고등학교는 여느 인문계 고등학교이기에 따로 어떤 특기나 재주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마친 학교가 이곳이든 저곳이든 저로서는 학교에서 배웠다고 내세울 만한 대목이 따로 없습니다.

 고등학교만 마치거나 중학교만 마친 사람이 대학교에서 강사나 교수가 되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대학교라는 자리에서 대학생을 가르치는 몫을 맡는 사람은 모두 자격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이란 숱한 자격증 가운데 하나이며 거의 언제나 어디에서든 내밀어야만 하는 자격증입니다. 흔히 말하는 전문 일자리를 얻으려면 대학교 졸업장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출판사이든, 온누리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언론사이든, 아이들 가르치는 터전이라는 학교이든, 동네사람을 보듬는 일을 맡는다는 공공기관(동사무소)이든, 졸업장이 없고서는 입사지원서 하나 내놓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글쓰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그림그리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노래부르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춤추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사진찍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왔다거나 어느어느 사람한테서 배웠다고 하는 경력이나 자격을 들이밀어야 합니다.

 나아가,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 따위를 처음으로 배운다든지 새롭게 배운다든지 하는 우리들 스스로 ‘어느어느 대학교’라든지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온 아무개’라든지 ‘이런저런 강좌나 특강’이라든지 ‘어찌어찌 이름난 누군가’를 찾아나섭니다. 하다못해(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 삶에 따라) 밥하기를 배운다는 자리에서도, 우리를 낳아 기르며 먹여살린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밥하기를 배우려 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요리학원에 나가야 하고, 요리교실을 들어야 하며, 요리책을 들여다보거나 요리방송을 보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렇다고 대학교라는 틀이 나쁜 틀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섬돌을 밟아 올라가듯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틀입니다. 샛길로 빠지거나 어긋나지 않도록 잘 붙잡아 주며 이끄는 틀입니다.

 그런데, 대학교라는 배움터는 열린 마당이 아닌 갇힌 틀입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길을 찾으며 저마다 다른 삶을 꾸리도록 길벗이 되어 주는 열린 마당이 아니라, 어떠한 자격증을 따내도록 한 가지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갇힌 틀입니다.

 열린 마당에서는 무슨 솜씨나 재주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로 가르칠 일이 없습니다. 밥물 맞추기와 나물 무치기를 알려주는 할머니가 무슨 솜씨나 재주를 부려서 더 맛나게 하라고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저 밥을 할 때에는 물을 어찌 맞추고 나물을 무칠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된다고 가르칠 뿐입니다. 갇힌 틀에서는 언제나 솜씨와 재주를 가르칩니다. 따로 가르치지 않고서는 따로 배울 수 없습니다. 밥물을 맞출 때에 비율을 따지고 부피를 셈합니다. 쌀알을 몇 그램 떠서 몇 차례 씻어서 어느 높이가 되도록 맞추도록 지시를 내립니다. 나물은 몇 그램을 마련하고 어디를 어느 만한 길이로 다듬어서 몇 분에 걸쳐 어떠한 그릇이나 냄비나 불판을 쓰는데 어떤 양념을 얼마만한 부피를 어느 때에 넣어서 무치라고 가르칩니다.

 지난주부터 어찌저찌하여 어느 대안학교 선생님들한테 사진을 가르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저처럼 대학교를 안 나왔을 뿐 아니라, 사진 전공조차 안 했으며, 가르쳐 준 사진 스승이 없는 사람한테 사진을 배우겠다고 하는 분들이 참 용하구나 싶은데, 저로서는 즐겁게 사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너덧 해쯤 앞서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모임 자원봉사 활동가 아줌마 아저씨한테 사진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나 이때나 제 마음은 매한가지입니다. 저한테 ‘사진 배우기’를 하겠다는 분들은 ‘가르쳐’ 주기를 바라시지만, 저는 사진을 가르치지 못하고 가르칠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가르치려 한다면, 모든 사진기마다 딸려 있는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손전화를 장만해도 이 손전화에 딸린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잘 다룰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마련해도 이 자전거에 딸린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됩니다. 자동차를 사서 몰든 오토바이를 사서 몰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물건에 딸린 설명서를 찬찬히 읽으면서 이 물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익힐 노릇입니다. 사진이라고 다르지 않고, 그림이나 글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볼펜을 쓰는 솜씨를 익히고자 글쓰기를 배운다 하지 않겠지요? 붓을 놀리는 재주를 알고자 그림그리기를 배운다 하지 않을 테고요.

 사진기 다루는 재주나 솜씨 때문이라면 저 같은 사람한테서 사진을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아니, 누구한테서든 배울 까닭이 없어요. 이는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요, 사진강좌나 사진교실 같은 데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재주나 솜씨는 어느 누구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재주나 솜씨는 ‘사진기 사용설명서’를 읽으며 스스로 알아차릴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사진기 단추를 눌러 사진을 만드는 일이란, 빨래기계 단추를 눌러 빨래를 하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사진을 배운다고 할 때에는 사진기 다루는 재주가 아닌 사진 한 장에 담을 내 넋과 삶을 배우려 한다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진 한 장을 어떠한 눈길과 매무새로 바라보는가를 돌아보고, 사진 한 장을 얻고자 어떻게 마음쓰고 애쓰고 힘써야 하는가를 살피며, 사진 한 장을 얻고 나서 이 사진으로 내 둘레 이웃과 동무하고 즐거운 눈물과 웃음을 주고받느냐를 헤아릴 노릇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따라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따라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사람을 사귑니다. 이리하여 사진을 배운다 할 때에는 우리 삶을 배우겠다는 셈이요, 이제까지 보내 온 내 삶을 찬찬히 되새기고 되짚으면서 앞으로 꾸릴 내 삶이 어떠한 모습과 매무새가 되면 좋을까 하고 내다보는 셈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로 사진을 읽을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려는 걸음걸이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사진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맨 먼저 내 삶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사진찍기는 못합니다. 내 삶을 모르는데 무슨 글쓰기를 하며, 내 삶을 알려 하지 않는데 무슨 그림그리기를 하겠어요.

 오늘날 숱한 사람들이 사진기를 쉽게 장만하고 사진을 쉽게 찍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사진찍기란 몇몇 부자나 예술쟁이들이 겉멋 부리듯 하는 놀음놀이가 아니니까요. 비싸구려 사진기만 사진기가 아니요, 값싼 1회용 사진기 또한 사진기입니다.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어야 하며, 사진기는 누구나 장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빼어난 장비를 갖추었다고 빼어난 사진이 나오지 않으며, 허술한 장비밖에 없다고 허술한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입니다. 숟가락을 들고 주걱을 들며 칼을 든 살림꾼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밥이듯, 사진기를 쥔 우리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왜 어디에서 언제 찍으려 하느냐는 마음가짐을 다스리는 만큼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기를 들고는 겉멋을 부리고 싶다면야 얼마든지 겉멋을 부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겉멋에 들린 삶을 꾸리며 겉멋을 한껏 뽐내는 또다른 길로 사진기를 쥘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길을 걸어간다고 잘못이라거나 몹쓸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을 찍어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길로 접어들지 못할 뿐이니, 이렇게 겉스치는 길로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는 동안에는 구경꾼 사진을 얻습니다. 나 스스로 속알을 채우며 보듬는 길을 걸어가려 한다면 시나브로 속알이 야무지거나 단단하여 그윽한 멋이 풍기는 사진을 얻습니다. 사랑스레 꾸리는 삶이기에 사랑꾼 사진을 얻어요.

 그런데 사진 가르치기를 두 번째로 해 보면서 적잖이 걱정스럽습니다. 저로서는 제 삶을 아름다이 가꾸고 싶어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고 싶은데, 사진을 배우려는 분들은 어떤 길을 걷고자 하시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따로 사진 재주만을 배우려 하지 않느냐 싶어 근심스럽습니다. 대안학교에서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하루하루란 아이들한테 지식을 집어넣는 일이 아닐 텐데, 대안학교 선생님들이 배우려 하는 사진이란 당신 스스로 ‘사진 다루는 지식’으로 흐르지 않느냐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구경하는 삶이라 할 때에는 오로지 구경하는 사진만 얻으며 구경하는 사진이 아름다운 듯 여길 뿐 아니라 구경하는 사진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살아내는 하루하루라 할 때에는, 그러니까 땀흘리고 마음쏟으며 꾸리는 참삶일 때에는 땀흘리는 사진이고 내 마음 깊이 바쳐진 사진이며 참다운 사진으로 나날이 거듭납니다. 어제는 어제대로 아름다우나, 오늘은 오늘대로 어제까지 보낸 삶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디는 새로우며 빛나는 삶을 사랑하고 싶다면, 티없는 사랑꾼 사진을 즐기고 싶다면, 우리는 사진 지식을 내려놓고 사진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사람 삶터를 담는 사진이란


 “사진가가 아름다운 풍광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34쪽).” 하고 말하는 신미식 님은 당신 사진을 그러모은 작품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 《사진은 감동이다》(2010)를 엮었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을 때》(2009)라든지 《천국의 땅, 에티오피아》(2009)라든지 《행복 정거장》(2008)이라든지 《마치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2008)이라든지 《미침, 여행과 사진에 미치다》(2007)라든지 《카메라를 던져라!》(2006)라든지 《마다가스카르 이야기》(2006)라든지, 지난 2002년부터 숱한 사진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2007)는 사진찍기 한길을 걸어가는 당신 삶과 넋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책을 여러 번 되읽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틀림없이 ‘사진쟁이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기쁜’ 일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쟁이 스스로 내가 남긴 사진에 아름다운 모습이 담겼을 때 눈물을 흘릴 뿐 아니라, 이 아름다이 찍은 사진 한 장을 이튿날이 되어 보잘것없다고 느낄 줄 안다면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든 ‘어제 쓴 글’과 견주어 ‘오늘 쓴 글’이 더 아름답거나 훌륭하기 마련이요, ‘어제 그린 그림’과 맞대어 ‘오늘 그린 그림’이 한결 빛나거나 놀랍기 마련입니다. 사진쟁이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책을 내놓으려고 하는 이들은 으레 한 가지 사진감을 놓고 아무리 짧아도 열 해는 잇달아 꾸준히 찍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까닭은 오직 이 한 가지 때문입니다. 어제 찍은 사진이 제아무리 훌륭했어도 오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 보잘것없거든요.

 사진쟁이가 되었든 그림쟁이나 글쟁이가 되었든 모두 한 가지 매무새입니다. 첫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내 사진에 아름다움이 담겼으면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오늘 찍은 사진은 오늘로 잊고 이듬날에는 이듬날 새로운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이 일이 나에게 물질적으로 풍요를 채워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사진은 직업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호흡법이기 때문이다 … 이곳에 실린 사진의 인물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에겐 잊혀지지 않을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와 동떨어진 피사체가 아니라 나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친구로 다가가 찍은 사진들이 결국 내 마음을 만진다 …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작품성의 의미를 떠나 신미식이 만난 귀한 친구들이라는 사실이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다. 사진을 찍기 전에 사람을 먼저 사랑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모아져 결국은 지금의 내가 되었다. 카메라를 장만한 지 이제 1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금 나는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스스로 감사하며 감동이 있는 사진을 계속 찍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는 그런 존재로 남길 원한다. 만들어진 틀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가 아닌 스스로 찾아낸 삶의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가 된 것은 나에겐 행운이다 ..  (책을 내면서)


 사진 한 장 아름다이 찍은 사람은 누구보다 사진쟁이 스스로한테 영향을 끼칩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아름다움 그대로 담아낸 사진쟁이는 이웃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끼며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이끌기 앞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손이 덜덜 떨리면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사진쟁이라는 사람은 당신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죽이거나 밀어내어 손가락이 덜덜 떨리지 않도록 다그치면서 차분하게 아름다움을 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손가락이 덜덜 떨리면서 찍은 사진이 아니고서는 이웃사람한테 벅차오르는 가슴이 무엇인지를 나누지 못합니다. 벅차오르는 가슴일 때에 벅차오르는 그대로를 담아야지, 벅차오르는 가슴을 다독이며 담은 사진에는 ‘벌써 차분해지고 만 재미없거나 따분한’ 사진이 박히고 맙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으로서는 ‘이 사진을 찍을 때에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데?’ 하고 말할는지 모르나, 사진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사진쟁이가 덧붙이는 말’ 때문에 ‘그렇군요!’ 하고 생각하지, 사진을 보는 사람 스스로 가슴이 울렁거리지 못합니다.

 신미식 님은 2007년에 열여섯 해째 사진찍기를 했다 했으니, 2010년이면 열아홉 해째요, 2011년에는 스무 해째가 될 테지요. 그렇다면 궁금합니다. 이제는 신미식 님이 “(당신 아닌 다른 사람들한테) 감동이 있는 사진을 계속 찍을” 생각인지, ‘누구보다 당신 스스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삶을 꾸리며 사진을 즐길’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신미식 님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는 그런 존재로 남길” 바라기 앞서, 신미식 님 스스로 찍은 사진으로 남들보다 당신 스스로한테 영향을 끼치며 당신 삶을 스스로 티없이 맑고 밝으며 곱게 다스릴 수 있기를 바라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소금호텔을 나와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한다. 길 하나 없는 하얀 사막을 달리는 운전사는 이정표도 없는 길을 잘도 찾아간다. 아마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길이 있는 듯하다 … 난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플라밍고의 동작 하나하나를 담기 위해 숨죽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분홍빛의 플라밍고는 처음으로 내 카메라의 포로가 되었다. 한참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운전사가 오더니 나를 보고 웃는다. 왜 그러냐고 어깨를 들썩이니, 이곳은 플라밍고가 많은 곳이 아니고 다음에 가는 호수가 진짜 제대로 된 플라밍고 서식지라는 것이다. 난 이곳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는데, 이보다 더 큰 서식지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수밖에 ..  (30, 33쪽)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라는 사진책에서 신미식 님은 ‘사진쟁이로서 당신 나름대로 아름다이 걸었던 길’은 그다지 밝히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로 걷는 아름다운 길’이 아니라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아름다움을 본 길’만 자꾸 되풀이합니다. 당신이 두 눈과 두 다리와 온몸으로 부대낀 여행지에서 마주한 아름다움을 그저 ‘풍광’으로 받아들일 뿐, 당신 ‘삶’으로는 삭이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딛었을지도 모르는 낯선 자연과 그들의 소중한 삶 속에서 난 미치도록 행복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82쪽)” 같은 말을 해야 하고 들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런 말마디에 뭉클해 해야 할는지요. 우리는 우리 둘레 여느 삶터 여느 이웃하고 복닥이는 삶에서 ‘미치도록 즐거운 삶자락’을 느끼고 잡아채며 담아내는 사진쟁이 길을 걸어야 참다이 아름답지 않으랴 싶습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내 아름다움을 깨달을 때에 내 이웃 보금자리에서도 내 이웃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를 깨닫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쟁이 신미식 님 말은 슬픕니다. 아직 한국사람이 안 내디뎠다는 그곳 모습을 처음으로 찍어야만 미치도록 즐거울는지요. 수많은 사람이 다녀간 곳에서 ‘수없이 스친 사람들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하거나 마주하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한’ 모습을 신미식 님 당신만은 날카롭고 포근하며 따스하게 잡아채거나 느껴 사진 한 장으로 옮길 노릇이 아닌지요.

 아무도 못 본 모습을 처음으로 사진으로 담을 때에 즐겁다면, 그예 1등주의와 다름없는 최초주의로 머무는 삶이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찍기란 1등주의가 아니고 최초주의가 아닌데, 사진찍기란 글쓰기와 그림그리기와 다름없는 아름다움 찾기일 텐데, 사진찍기란 사진기를 든 사람부터 아름답게 거듭나면서 둘레 이웃과 동무한테 아름다움을 나누는 일일 텐데, 왜 ‘(구경꾼한테) 더 아름답게 보인다’고 일컫는 곳에만 찾아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벌어진 틈이 있는 곳에서는 아름다운 연기가 올라온다. 함께 온 여행자들의 입에서는 탄성소리가 터져나온다. 여행의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 함께 기쁨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 이곳에 서면 사람은 모두가 작아진다. 그리고 한없이 작아진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그랬듯이, 이곳을 여행하는 모든 여행자가 그랬듯이. 감격에 겨워 흘린 눈물은 새로운 여행자들을 이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 직접 오를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여행자의 특권 앞에 난 심장이 뛰었다 ..  (50, 62, 77쪽)


 여행하는 사람은 당신한테 낯선 곳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여행하는 사람 당신으로서는 낯선 곳이지만, 여행하는 사람이 찾아간 곳에서 태어나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하나도 낯설지 않은 곳입니다.

 ‘여행지’라는 곳이 ‘고향’인 사람하고 여행지가 말 그대로 ‘여행지’요 ‘낯선 곳’이요 ‘처음 내딛는 곳’인 사람하고는 느낌이 다릅니다. 여행하는 사람은 여행지 모습을 당신으로서는 ‘처음 사진으로 담는다’ 할지라도 여행지를 여행지 아닌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은 ‘늘 으레 보던 모습’이요 ‘늘 으레 사진으로 담은 모습’입니다.

 플라밍고 호수를 사진으로 찍는 신미식 님을 보며 웃던 운전기사는 ‘플라밍고가 조금 모여 있는 곳은 이 나름대로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한편 ‘플라밍고가 구름처럼 모여 있으며 대단히 아름답다’고 하는 곳을 함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는 소리가 아니라, 두 곳이 저마다 달리 아름다운 줄을 알고 있습니다. 고향땅 운전기사는 어느 곳에 가든 그곳에 알맞춤하게 아름다움을 맛보며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은 모든 곳을 ‘고향땅 사람’처럼 머물고 살고 일하고 놀며 지낼 수 없으니 겉훑기처럼 몇 가지만 살짝 보고 그치겠지요.

 여행이란 ‘눈을 넓히는 일’이 아닌 ‘좁은 눈을 자랑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며 내 삶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본다지만, 내가 보았다는 사뭇 다른 모습이란 ‘속내를 알고 보면 내가 찾아간 낯선 땅 참모습이 아닌 몇 가지 겉스친 모습’이기 일쑤입니다. 내가 찾아간 낯선 땅을 속속들이 느긋하고 너그러이 돌아볼 수 있으면 여행이란 더없이 ‘눈을 넓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여행을 한다는 분들은 얼마나 ‘눈을 넓히고자 넉넉하고 느긋하고 따스하게 여행하는 발걸음을 떼고’ 있으려나요. 우리들 여행자는 나라밖에서는 나라밖에서대로 좁은 눈으로 몇 가지만 겉스쳐 보고 있는 한편, 나라안에서는 나라안에서대로 내 삶터와 동네와 이웃을 넉넉하고 속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그저 밖으로만 눈을 돌리고 있지 않는지요. 우리들한테 고향을 우리 고향으로 여기지 못하면서, 다른 ‘여행지가 고향인 사람들 터전’ 또한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곳인지를 살피지 못하는 쳇바퀴 돌기가 아닐는지요.


.. 사진으로 남기는 것과 가슴으로 남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남긴 수많은 사진들이 전부 가슴에 담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바쁘게 살아갈 필요가 없는 이곳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두고두고 나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 줬다 … 아마존의 숲을 걸었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이 숲속 길을 걸으면서 내가 정말 아마존의 밀림에 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져야 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내 여행의 여정들을 생각해 봤다. 여행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후로 가장 가슴에 남는 여행이라고 생각되어진 이곳에서 난 너무나 행복했다. 여행이란 꼭 대단한 것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꿈꾸던 그곳에서 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  (114, 141쪽)


 신미식 님은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라는 사진책에서 끊임없이 스스로한테 말합니다. “여행이란 꼭 대단한 것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이런 말 뒤에는 어김없이 “하늘의 신이 이들에게 선물한 최고의 자연” 같은 말마디가 이어집니다. 입으로는 대단한 모습을 보아야만 하는 여행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진으로는 대단한 모습만을 사진으로 담아야 하는 듯 책을 엮었습니다.


.. 인도의 골목에는 내가 이해하기 힘들 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사진을 찍을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사진가의 선택이다 … 여행자들은 사파의 순수한 사람들을 보고 싶어 찾아오지만 정작 이들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겠지 … 모른다바 바닷가의 눈부시도록 신비한 오렌지색 하늘과 그 아래 휴식을 취하러 나온 사람들의 찬란한 오후는 하늘의 신이 이들에게 선물한 최고의 자연이다. 난 이들이 매일 접하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하늘을 잠시 훔쳐본 이방인일 뿐이다 … 니켈의 주요 생산지이자 뉴칼레도니아의 수도인 누메아는 흔히 작은 프랑스라고 불릴 정도로 현대적인 프랑스의 모습을 닮았다. 태평양에서 프랑스의 문화를 느껴 보는 즐거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프랑스의 니스를 옮겨 놓은 듯한 건물들과 부둣가에 정박돼 있는 화려한 요트들을 구경하는 것도 이곳에서의 즐거움 중 하나다 ..  (214, 251, 323, 355쪽)


 인도 골목길이든 한국 골목길이든 숱한 이야기가 서려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골목동네 사람들이 잘 읽거나 깨달을 수 있으나, 토박이 아닌 구경꾼 또한 어느 만큼 읽거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머무는 사람이라고 더 잘 읽거나 깨닫지 않으며, 구경꾼이라고 하나도 못 알아채거나 못 읽지 않습니다. 저마다 살아낸 만큼 읽습니다. 저마다 살아가려는 몸짓만큼 읽습니다.

 사진책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를 덮을 무렵, “태평양에서 프랑스의 문화를 느껴 보는 즐거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하는 대목을 읽고는 무릎을 칩니다. 그렇군요. 신미식 님은 태평양에서 태평양 문화를 느끼는 즐거움 못지않게 ‘프랑스 문화’를 좋아하고 즐기고 있었군요. 태평양 한복판에 뜬금없이 프랑스 문화가 있는 까닭을, 프랑스사람이 왜 뜬금없이 태평양 한복판까지 저희 문화를 심어 놓았는지를 읽지는 못하는군요.

 스스로 더 읽으려 하지 않거나 스스로 더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더 아름다이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더 바라볼 수 없으며 스스로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한국땅 곳곳에 숱하게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가 심어 놓은 집과 건물과 문물’ 또한 즐겁게 맛볼 수 있는 노릇입니다. 서울 한복판에 못박혀 있는 일제강점기 문화를 얼마든지 즐겁게 맛볼 수 있습니다. 신미식 님이 태평양 한복판 ‘프랑스 식민지 자국’을 즐겁게 맛본다고 하는데 토를 달거나 말꼬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하는 분들 마음이 이토록 가난하다면 어떤 사진이 태어날까요. (4343.6.1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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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 앤 뽀또그라피
진동선 지음 / 시공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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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은 사진을 만나고 싶었을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1] 진동선, 《노블 앤 뽀또그라피》


- 책이름 : 노블 앤 뽀또그라피
- 글 : 진동선
- 펴낸곳 : 시공아트 (2005.6.29.)
- 책값 : 1만 원


 (1) 배에서 갈매기 사진 찍는 사람


 옆지기와 아이하고 배를 타고 영종섬을 다녀왔습니다. 인천사람한테 영종섬은 고작 10분 거리로 배를 타고 들어가 볼 수 있는 몹시 가까운 섬입니다. 저는 이 배를 1994년에 마지막으로 타고 2010년에 탔으니 열여섯 해 만에 탔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뻔질나게 탔던 배인데,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는 꼭 한 번 타고는 다시 탈 일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저는 이무렵부터 인천을 떠나 살았고 인천으로 돌아올 일이 퍽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배삯 250원으로 오간 영종섬인데, 아버지가 장봉섬에서 분교장으로 일하셨기에 중학생 때에는 어머니와 함께 다달이 아버지를 뵈러 배를 타러 장봉섬에 가고자 먼저 영종섬으로 들어가서 버스를 타고 영종섬 끝까지 간 다음 다시 배를 타고 한 시간 반 길을 들어가곤 했습니다.

 지난날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에는 ‘새우깡 같은 과자를 갈매기한테 던지는 일’은 없었다고 떠오릅니다. 그러나 다시금 곰곰이 떠올리면 몇몇 분들은 갈매기한테 과자나 빵부스러기를 던졌습니다. 다만, 섬사람이라든지 우리 식구처럼 자주 들락거려야 하는 사람들은 과자이든 빵부스러기를 던지지 않습니다. 던질 만큼 과자나 빵을 넉넉히 사먹을 수 있지도 않았지만, 그럴 겨를이나 기운이 없었으니까요. 갈매기한테 과자나 빵부스러기를 던지는 사람은 ‘어쩌다가 배를 탄’ 사람이거나 ‘처음 배를 탄’ 사람이거나 ‘놀러다니고자 배를 탄’ 사람들뿐입니다.

 열여섯 해 만에 영종섬 들어가는 배를 타는데, 배에 탄 사람은 몇 없습니다. 젊은 아가씨 둘이 보입니다. 두 사람은 바지런히 새우깡을 던지고 갈매기 무리는 이들 가까이 붙어서 새우깡을 얻어먹으려고 합니다. 이윽고 중국 관광객이 스무 사람 남짓 탑니다. 이들도 젊은 아가씨를 좇아 과자를 갈매기한테 던집니다.

 갈매기한테 새우깡이나 과자를 던지는 분들은 다들 손에 사진기를 들고 있습니다. 새우깡 던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달라붙는 갈매기를 사진으로 찍으며 달려드는 갈매기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이분들한테 사진이란 무엇일까 살짝 헤아려 보고는 지나칩니다. 이분들한테 갈매기는 어떤 목숨일까 한동안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돌립니다. 갈매기들이 저 새우깡이나 과자부스러기를 먹으며 목구멍이 막히거나 속이 더부룩해지는 줄을 하나도 살피지 않으니까 이렇게 바보스레 새우깡을 던지고 과자부스러기를 던지고 하겠지요. ‘새우깡 받아먹는 갈매기는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목구멍이 막혀서 죽습니다’ 하고 알려준들 알아먹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알아먹을 관광객이었다면 조용히 갈매기를 바라보기만 할 뿐 무얼 던진다고 생각하지 않겠지요. 던져 주려면 싱싱한 날물고기를 던질 노릇입니다.

 아기를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가 앉아 밥을 먹이며 곰곰이 돌아봅니다. 어쩌면 사진 찍는 사람들한테는 갈매기 사진을 찍자면 옆에서 새우깡을 던져 주어야 할 노릇입니다. 그래야 새우깡을 받아먹으려는 갈매기가 아주 가까이에서 날갯짓을 멈춘 채 날며 사진으로 그럴싸하게 찍혀 줄 테니까요. 바닷바람을 가르며 멈추어 있는 날갯짓을 사진으로 가까이에서 찍기에는 ‘뱃전에서 새우깡 던져 주기’를 할 때만큼 좋은 때가 없을 테니까요. 아주 적은 돈을 들이고도 멋지다는 사진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새우깡을 던지면서 갈매기가 무리지어 달려드는 모습을 뒤로 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이 사진 한 장이 얼마나 즐겁거나 멋진 추억이 될까 궁금합니다. 다른 곳에 놀러가서도 이와 비슷한 얼거리로 사진을 찍고 사진을 남기며 사진으로 추억을 만들고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2) 소설과 만나지 못한 사진말 《노블 앤 뽀또그라피》


 사진평론을 하고 있는 진동선 님은 《현대사진가론》(태학원,1998), 《사진의 메카를 찾아서》(태학원,2000), 《한 장의 사진미학》(사진예술사,2001), 《현대사진의 쟁점》(푸른세상,2002), 《진실의 시뮬라크르》(푸른세상,2002), 《영화보다 재미있는 사진 이야기》(푸른세상,2003), 《사진과 역사적 기억》(눈빛,2003), 《시간의 풍경》(눈빛,2004),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아카이브북스,2005), 《사진, 영화를 캐스팅하다》(효형출판,2007), 《사진가의 여행법》(북스코프,2008), 《쿠바에 가면 쿠바가 된다》(비온후,2009), 《좋은 사진》(북스코프,2009), 《그대와 걷고 싶은 길》(예담,2010)과 같은 책을 꾸준하게 써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사진 이야기를 널리 펼치면서 나누는 몫을 단단히 맡고 있습니다. 《노블 앤 뽀또그라피》는 2005년에 내놓은 책으로, ‘사진을 만난 소설’ 또는 ‘사진을 다루며 이야기를 풀어 가는 소설’을 하나하나 들면서 사진이 우리 문학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흔히 ‘영화가 만난 사진’이라든지 ‘영화와 어우러지는 사진’을 다루는 사람은 있지만, ‘소설이 만난 사진’을 다루는 사람은 진동선 님을 빼고는 거의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무래도 사진쟁이 가운데 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이 많지 않을 뿐더러, 사진쟁이 가운데 ‘책을 가까이하면서 내 이웃 삶을 들여다보거나 헤아리거나 만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 나만의 시선, 나만의 세상보기. 신현림은 사진으로 자신을 말한다. 세상과 나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세상을 통해서 나를 보는 열린 시선을 갖는다 … 기억을 위한 이미지, 삶의 증거로서의 사진. 구효서는 소설 속에서 사진으로 그리움과 상처를 뽑아내고 보듬는다 … 윤대녕이 바라본 사진은 ‘거울’과 ‘창’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에게 사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 이청준은 사진이 어떻게 미래를 찍을 수 있는지를 문학적 행위로 완성한다.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행위만 있을 뿐 해석은 나중에 행해지기 때문에 사진은 언제나 미래라는 관점을 보여준다 … 작가에게 사진은 눈의 기억과 동등한 무게로 자리한다. 눈이 본 역사를 사진도 보았기를 바란다. 눈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사진이 더욱 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상징적 표현을 담아낸 문학 작품이 바로 김소진의 〈동물원〉이다 ..  (22, 24, 75, 93, 160, 173쪽)


 진동선 님은 《노블 앤 뽀또그라피》에서 신현림, 구효서, 안도현, 김원일, 김인숙, 윤대녕, 최일남, 이청준, 공지영, 조세희, 신경숙, 김주영, 남상순, 하성란, 박일문, 전경린, 김소진, 배수아, 한강, 함정임, 이렇게 스물한 사람 작품을 들춥니다. 소설쟁이 이름을 살피면 하나같이 나라안에 손꼽히는 분들이요, 이분들이 모두 당신들 소설에서 ‘사진을 만났다’고 하면 뜻밖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사진이라고 남다른 문화이거나 예술이지 않습니다. 사람들 누구나 노래를 듣고 춤을 즐기며 영화를 보듯,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씁니다. 쟁이만 사진을 찍으란 법이 없습니다. 쟁이만 그림을 그리고 쟁이만 글을 쓰란 법이 없습니다. 대학교수라야 글을 쓰겠습니까. 중학교만 마친 분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와야만 사진을 찍겠습니까. 학교 문턱을 밟아 본 적 없다 하더라도 사진기를 쥘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안에 이름난 소설쟁이 스물한 분 작품이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나 어렵잖이 만날 수 있는 ‘사진을 만난 소설’이요, ‘사진이 만나려는 소설’인 셈입니다. 우리한테는 사진과 소설이 만난 이야기를 따로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사진과 소설이 ‘만나서 이루어 내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짚으면서 우리 삶을 다시금 들여다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뜻이 있고 값이 있으며 사랑과 믿음이 있는 셈입니다.


.. 찰나의 예술인 사진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상처가 되고, 눈물이 되고, 그리움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진의 특성이다 …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진을 보고 슬퍼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되찾을 수 없는 육신, 돌아올 수 없는 시간,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기억이 그것이다 … 사진은 실재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진 앞에서 현실이 될 수 없는 욕심에 놀라 미끄러진다 ..  (32, 45, 137쪽)


 진동선 님은 소설을 하나하나 들추면서 이 작품 어느 대목에서 사진이 나타나고, 이 작품을 통틀어 사진이 어떻게 녹아들고 있는가를 밝힙니다. 소설쟁이마다 사진을 당신 삶이나 문학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껴안는지를 읽어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를 놓칩니다. 《노블 앤 뽀또그라피》에 나오는 소설쟁이 스물한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사진을 말하’고자 소설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들 스물한 사람뿐 아니라 소설을 쓰는 어떠한 사람들도 ‘사진을 말하’려는 뜻에서 소설을 쓰지 않습니다. 소재나 주제가 ‘사진’이 될 수 있다 하여도 사진을 말하는 소설이 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소설이든 오로지 하나, ‘삶을 말하기’입니다.

 이리하여, 이 책 《노블 앤 뽀또그라피》에서는 크나크게 아쉽다고 느낄 대목이 자꾸 드러납니다. 진동선 님은 “찰나의 예술인 사진”이라고 틈틈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사진은 조금도 “찰나의 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찍히는 ‘기계 도구’로 바라보기에는 사진기란 아주 잠깐인 모습을 찍는 연장이라 볼는지 모르나, ‘아주 잠깐’을 찍고자 아주 기나긴 나날을 기나긴 생채기와 웃음을 부대껴야 합니다. 삭이고 되뇌고 생각하고 느끼며 어루만지지 않고서는 아무런 사진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진기 단추를 누른다고 모두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종이조각에 끄적인다고 모두 글이 되지 않습니다. 겉보기로는 책이요 영화요 옷이요 집이요 사람이요 밥이요 할는지 모르지만, 속보기로는 책다운 책이 아니거나 영화다운 영화가 아니거나 옷다운 옷이 아니거나 집다운 집이 아니거나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거나 밥다운 밥이 아닌 때가 아주 잦습니다. 안타깝게도, 진동선 님 스스로 너무 멋을 부리며 읊는 말마디 때문에 이 책에서는 사진이 사진으로 빛을 못 보곤 합니다. 소설 하나하나로 살폈을 때에 더없이 아름다운 작품이요, 이 더없이 아름다운 작품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사진으로 드러나는 삶자락을 옹글게 잡아채지 않다 보니, “사진은 실재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라느니 “고통과 가난 속에서도 사진의 주인공은 미소 짓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 한 장의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라는 것도 알고 보면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보이지 않는 약속과 같다 … 어느 민족의 영정사진도 슬프거나 우는 모습이 없다. 약속이나 한 듯 행복한 모습,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고통과 가난 속에서도 사진의 주인공은 미소 짓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 … 사진을 알아봄으로써 잊혀진 시간을 되찾고 존재를 되찾는다 ..  (41, 81, 120쪽)


 사진은 우리 삶을 담습니다. 만듦사진이라면 ‘실제로는 없는 모습’을 담는다 할 만할 텐데, ‘실제로는 없는 모습’을 만들자면 ‘실제로 있는 모습’을 알아내거나 찾아내어서 뒤틀거나 비틀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찍는 사진이든 없는 모습을 만드는 사진이든 모두 우리 ‘실제로 꾸리는 삶’을 느끼거나 살피거나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진은 “실재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진은 바로 “참말 나 스스로 아프거나 기쁘게 부대끼는 삶을 담아내는 발자국”입니다. 이러한 발자국은 욕망이 될 수 있고 꿈이 될 수 있으며 부질없는 몸짓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될 수 있고 미움이 될 수 있습니다. 웃음이 될 수 있으며 눈물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떠하게 자리매김하거나 뜻매김을 하든 사진은 우리 삶입니다.

 영정사진은 “고통과 가난 속에서도 사진의 주인공은 미소 짓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은 덧없는 중얼거림과 같습니다. 괴로운 삶이면 괴로운 삶이 영정사진에 고스란히 담깁니다. 가난한 삶이면 가난한 삶이 영정사진에 그예 스밉니다. 다만, 괴롭거나 가난하다고 해서 “나쁜 삶”이 아닙니다. 괴롭거나 가난해야지만 “좋은 삶”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괴롭거나 가난한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괴로우면서도 웃는 삶이 영정사진에 담기고, 부자이면서 잘 먹고 잘 지냈다는 삶이면서도 슬프게 우는 모습이 영정사진에 담깁니다.

 《노블 앤 뽀또그라피》 맨 마지막 쪽 맨 마지막 글월에 이르러, 진동선 님은 “결정적 순간이란 없다”고, 바로 “작고 작은, 흔하디흔한, 하찮은 삶의 순간의 부활”이 소설이요 사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마지막 대목 마지막 글월은 《노블 앤 뽀또그라피》라는 책에서 214쪽에 걸쳐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모두 뒤엎습니다. 215쪽짜리 책에서 214쪽에 걸쳐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한낱 겉멋이었음을 스스로 밝힙니다. 진동선 님 스스로 소설쟁이 스물한 사람 작품을 들여다보며 ‘소설이 만난 사진’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시나브로 ‘따로 소설이 사진을 만나려 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거든요. 아니, 진작에 깨닫고 있었으나 일부러 숨기고 있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소설이든 사진이든 그저 우리 사람들 삶을 담는 몸짓이나 손길’이라고 밝히고 있는지 모릅니다.


.. 사진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또 다른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사진은 찍은 사람의 감정, 혹은 찍힌 사람의 인생의 부분이다 … 인간의 눈은 카메라의 눈과 다를 게 없다. 사진의 눈도 육신의 눈처럼 현실 한가운데서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본다 … 문학과 사진, 어떤 창에도 결정적 순간이란 없다는 말은 진정한 삶이란 결정적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영원성의 순간도 작고 작은, 흔하디흔한, 하찮은 삶의 순간의 부활이어야 한다 ..  (96, 136, 215쪽)


 책을 꾹 덮으며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진동선 님이 처음부터 이 마지막 글월에서 보여주려던 생각을 보여주었다면 《노블 앤 뽀또그라피》라는 책은 아주 다른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진동선 님은 처음부터 바로 이 마지막 글월을 보여주면서 ‘소설이 만난 사진’이든 ‘사진이 만난 소설’이든 하는 허울에서 벗어나 사진은 무엇이요 소설은 무엇이며 우리 삶은 무엇인가 하는 참으로 깊으며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나서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처음부터 진동선 님 스스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나섰다면 《노블 앤 뽀또그라피》를 쥐어든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헤아리면서 더 깊고 살가우며 따뜻한 마음밭을 일굴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뿐 아니라, 이 책을 쓴 진동선 님 스스로 당신 마음밭을 더욱 알차고 아름다우며 기쁘게 추스르거나 다스릴 길을 찾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우리는 아름답고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나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며 좋아하기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연극과 영화를 합니다. 우리는 나 스스로 아름다움이 사랑스럽고 멋스러우니까 농사를 짓든 운전대를 쥐든 두 다리로 걷든 하면서 이 땅에서 땀흘리며 부대끼고 살아냅니다.

 사진이란 머나만 남쪽나라에 있지 않습니다. 머나먼 동쪽나라에도 있지 않습니다. 사진이란 바로 우리 집에 있고 우리 이웃한테 있고 우리 아이한테 있으며 우리 동무와 우리 살붙이 누구한테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이란 바로 삶이기 때문입니다. 소설로 빚어내는 이야기란 다름아닌 우리 삶에서 비롯하고, 시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모두 우리 삶에서 이야기를 길어올립니다. 사진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상업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무슨 사진이든 모두 우리 삶에서 이야기를 퍼올립니다.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얼마나 진득하게 붙잡거나 마주안을 수 있느냐에 따라서 사진이 달라집니다.

 사진이 아름답도록 하자면 나 스스로 내 삶을 아름답도록 일구면 됩니다. 사진이 훌륭하도록 하자면 나 스스로 내 삶을 훌륭히 가꾸면 됩니다. 사진이 멋스럽도록 하자면 나 스스로 내 삶을 멋스럽게 돌보면 됩니다. 사진이 사랑스럽도록 하자면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스레 어루만지면 됩니다. 사진이 소설을 만나서 우리 삶으로 뿌리내리는 발자국을 좇으려던 진동선 님 손자취가 여러모로 아쉽고 안쓰럽다고 느끼며 《노블 앤 뽀또그라피》라는 책 하나를 책꽂이에 꽂아 놓습니다. 아무쪼록 2011년 2012년 …… 2020년으로 고이 이어지는 진동선 님 삶자락에서 사진 하나 알뜰히 뿌리내리면서 아름다이 자리잡을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사진을 만나고 싶었던 소설들이 아닌, 삶을 만나고 싶고자 사진하고 함께 길을 걸었던 소설들일 뿐입니다. (4343.6.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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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결정적 순간의 환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31
클레망 셰루 지음, 정승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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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진을 찍는 기쁨 하나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4] 클레망 셰루,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앎에는 아무 뜻이 없습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알아서는 안 되고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알고 있다면 앎을 머리에 가두지 말고 온몸으로 녹아내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찍기에는 아무 뜻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고 제대로 찍어야 하기 때문이며,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내 삶이 송두리째 드러나도록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다루는 글쓰기이고 그림그리기입니다. 삶을 보여주는 노래부르기이고 춤추기입니다. 삶을 영글은 농사짓기이고 아이키우기입니다. 우리 둘레에서 맞아들이거나 부대끼는 일놀이 가운데 삶하고 이어지지 않는 일놀이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모두 애틋한 삶이고 모두 가멸찬 삶이며 모두 땀흘리는 삶입니다. 밥 한 그릇을 마련할 때에도 애틋한 삶이고, 밥그릇 하나를 설거지할 때에도 가멸찬 삶이며, 아이한테 노래 하나 들려주며 재울 때에도 땀흘리는 삶입니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며 껴안는 가운데 곰삭일 수 있으면 굳이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사진이나 만화나 영화나 연극 따위가 없어도 넉넉합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살피며 어루만지는 가운데 되뇌일 수 있으면 따로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사진이나 만화나 영화나 연극 따위로 나타낼 때에 눈물과 웃음이 절로 깃듭니다.

 어떤 잘난 사람을 따라하거나 흉내낼 글이 아니요 그림이 아니며 사진이 아닙니다. 대단한 노래꾼을 따라하며 노래를 불러야 맛이 아닙니다. 내 목소리에 감겨드는 느낌을 살리고 사랑하며 부르는 노래가 제맛입니다. 엄청난 춤꾼을 흉내내며 춤을 추어야 멋이 아닙니다. 내 몸에 찾아드는 기쁨과 슬픔에 따라 움직이며 즐기는 춤이 제멋입니다. 스스로 제 결을 찾아야 할 삶이지, 스스로 제 결을 놓거나 버리며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고 다른 곳에 손길을 뻗을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겉치레로 내동댕이칠 수 없습니다. 겉을 꾸미는 일놀이란 삶이 아닙니다. 겉을 꾸미는 일놀이란 거짓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속차림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속을 차리는 일놀이일 때라야 비로소 삶입니다. 속을 차리는 내 삶이란 바로 참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려 하는 우리들이라 할 때에는 바야흐로 내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볼 뿐 아니라 너그러이 껴안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사진기 다루는 재주를 배워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값나가는 장비를 갖추어야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 교본을 챙겨 읽는다든지 사진 강좌를 찾아 듣는다든지 해서 사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잘 찍자면 내 삶을 잘 꾸려야 합니다. 사진을 신나게 즐기고 싶다면 내 삶을 신나게 즐기고 있으면 됩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바란다면 내 삶을 아름답게 여밀 노릇이고, 사랑스러운 사진을 꿈꾼다면 내 삶을 사랑스레 가꿀 노릇입니다.

 나라 안팎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거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진쟁이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있습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을 통해 기하학에 대한 관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냈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금 분할 법칙에 충실한 그의 이미지 위에 구성 도식을 적용해 가며 이 사실을 설명하곤 한다 … 카르티에브레송은 마네킹, 인형, 매춘부, 눈 감은 사람, 잠자는 사람, 꿈을 꾸거나 무언가에 도취된 사람 등 초현실주의 신화의 좋은 구성 요소를 사진으로 담아냈다(38, 41쪽).”고 합니다. 이때에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갓 사진기를 손에 쥔 때요, 그러니까 새내기 사진쟁이 때 모습이라고 합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이 한층 성장하는 데는 전쟁의 경험, 수용소 생활, 지인들의 실종 같은 사건들이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전쟁 이후, 염려하던 마음은 달라진 세상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의 추상적 접근법’보다는 ‘인간의 가치’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 이제 그는 선동적이거나 초현실주의적인 사진가가 아니라, 정보에 따라 적절하게 반응하는 사진기자였다(58, 64쪽).”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픗내기나 새내기였을 적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사진을 할지 그림을 할지’ 망설이는 가운데 ‘돈 걱정을 따로 하지 않는 넉넉한 살림’에서 ‘사진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을 뿐 아니라, ‘사진을 한다 하더라도 무엇을 담아서 보이고 나눌는지’는 살피지 못한 셈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빗사위를 넘기는 동안 비로소 당신한테 ‘사진이야말로 내 삶이로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으로 태어났다고 하겠습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는 늘 좋은 이미지를 노렸다(45쪽).”고 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아주 마땅한 소리입니다. 언제나 좋은 사진이 되도록 애쓸 노릇이지, 어느 때에는 대충 찍는다든지 어느 때에는 어설피 찍는다든지 어느 때에는 아무렇게나 찍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주든 이웃 아줌마가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주든 사랑스러운 집식구가 찍어 주기를 바라며 찍든 늘 온힘과 온마음을 바쳐 나한테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사진을 일구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사진을 찍든 이제까지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나으며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잡지사들의 요청에 응하면서 사진을 선택하고 의미 있게 배열하는 작업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78쪽).”고 합니다. 당신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당신 사진을 잡지사에 팔고 신문사에 팔았을 텐데, 이렇게 돈을 받으며 사진을 내어줄 때에 편집자들은 이리 자르고 저리 붙이는 한편, 당신이 사진으로 담아 나누려는 이야기하고 엇나갈 때가 있다고 밝힙니다.

 뭇사람들이 사진밭 큰사람으로 섬기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이름을 놓고 돌아볼 때에 이런 말마디는 퍽 얄궂습니다. 그러나 큰사람이든 작은사람이든 이런저런 다툼과 부딪힘과 아픔과 생채기를 겪거나 치르는 가운데 차츰차츰 당신 자리를 찾아 가는 셈 아닌가 싶습니다. 주문에 맞추는 글ㆍ그림ㆍ사진이 아니라, 부탁에 따르는 글ㆍ그림ㆍ사진이 아니라, 바로 내 삶에 맞추는 글ㆍ그림ㆍ사진이 되어야 시나브로 나를 비롯한 내 둘레 사람들 모두한테 웃음과 눈물을 선사하는 땀방울로 영글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당신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닌 미국에서 당신 사진을 전시하던 이들이 처음 붙였던 이름이라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마디는, 우리 말로 쉽게 옮기면 “바로 이 사진 하나 얻는 때”를 있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아내는 삶이었다는 당신 매무새는, 사진찍기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한테든 사진찍기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한테든 고마운 이야기 하나라고 느낍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언제나 발생한 사건자 자체보다는 그 안의 진실을 다양하게 해석해 보여주는 상황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96쪽).”고 하니까요. ‘순간을 기다리며 찍는 당신’이 아닌 ‘어느 한때에 깃든 삶을 누구보다 스스로 느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당신’이었을 테니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지만, 사진을 찍는 삶을 글로 함께 적바림하는 사람은 몹시 드문 가운데, 당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우리한테 남긴 사진 못지않게 우리한테 남긴 글이 제법 많습니다. 이리하여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자그마한 책에는 당신이 걸어온 사진삶이 차곡차곡 담기는 한편, 당신이 밝히며 늘 거듭나고 있던 사진말이 알알이 깃들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당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은 꽤나 많으면서, 정작 당신 사진 작품을 찬찬히 챙겨 본다든지 당신 사진 이야기를 곰곰이 찾아 읽는다든지 하는 사람은 그리 안 많구나 싶습니다. 브레송이 어떻고 저떻고 하고 입방아를 찧기 앞서, 브레송이니 부라자이니 어렁저렁 말밥을 삼기 앞서, 사진 하나에 온삶을 들여 땀과 품과 사랑과 믿음을 펼쳐 온 삶자락을 들여다볼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을 어떤 매무새로 껴안았는지 살필 노릇이고,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을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가 돌아볼 노릇이며,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에 어떤 숨결을 불어넣었는지 생각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작은 책에는 “결정적 순간의 환희”라는 이름이 하나 덧붙습니다. 책을 두 번 내처 읽고 나서 이 덧이름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사람한테는 더도 덜도 아닌 “사진을 찍는 기쁨”일 뿐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봅니다. 찍힌 사진을 나중에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바로 이때”를 찍었다 할는지 모르고, 찍은 사진을 두고두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느끼기에 “기막힌 모습을 짜릿하게” 찍었다 할는지 모르나,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으로서는 ‘찍어야 할 모습을 찍었’을 뿐이요, ‘담아야 할 삶을 담았’을 뿐 아니랴 싶습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작은 책에 담긴 당신 삶과 넋을 돌아보니 그저 이런 느낌이 듭니다. 떠들썩하니 무슨무슨 이름을 갖다 붙이며 떠받들 브레송이 아니라, 그예 사진을 사랑하고 아끼며 사진과 한몸이 된 삶이었던 브레송이라고 느끼며 우리 스스로 우리 깜냥껏 사진을 사랑하고 아끼며 사진과 한몸이 될 길을 찾아나서면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4343.6.5.흙.ㅎㄲㅅㄱ)


[책에서 그러모은 생각조각]
ㄱ. 나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이나 일화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그저 그것들이 거기 있었다.
ㄴ. 마그네슘 플래시는 빛이 전혀 없을 때라도 허용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사진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인 것이 되고 만다.
ㄷ. 인간적 진실이 훼손되지 않도록 인위적인 면을 반드시 피하고 사진기와 사진 찍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ㄹ. 만일 좋은 사진을 조금이라도 잘라낸다면 결국 균형은 깨지게 된다.
ㅁ. 사진기는 작업의 도구이지 그저 예쁜 장난감 기계가 아니다. 이 기계로 우리가 하려는 일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ㅂ. 나는 내 사진을 트리밍하거나 피사체를 재배치해서 좀더 나아 보이도록 시도한 적은 거의 없다. 만일 사진이 그리 좋지 않았다면 프레임 안의 기하학적 비율이 잘못된 것이고, 그렇다면 여기저기 변형하여 인화하더라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ㅅ. 사진가는 자신을 잊고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꿰뚫어보며, 상대가 지금 그 위치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으로까지 정교하게 카메라를 들이밀어야 한다.
ㅇ. 탐미주의에 앞서 현재의 삶이 드러나 보이는 이미지에 애착을 가진다.
ㅈ. 나는 보도기자이지 화실의 초상화가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외부세계(혹은 내적 세계)는 내 작품의 주제이자 나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 무대 배경이다.
ㅊ. 애호가들은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고, 기술자들은 시험 중인 기계 속에 파묻혀 있다.
ㅋ. 사실 우리 모두는 모방자들로서, 무엇보다 ‘본질’을 모방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우리 자신을 부담 없이 표현해야 한다.
ㅌ. 나는 위대한 사진을 찍으려 일부러 애쓰지 않는다. 내가 얻은 모든 것이 위대한 사진이다.
ㅍ. 나는 사진보다 삶에 더 관심이 많다.
ㅎ. 나에게 보도사진은 눈과 손, 그리고 두 다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클레망 셰루 씀,정승원 옮김,시공사 펴냄,2010.5.24./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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