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목록 창비시선 381
김희업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129



바람을 마신 숨결을 내 몸으로

― 비의 목록

 김희업 글

 창비 펴냄, 2014.11.10.



  빵을 반죽하면서 효모를 넣어야 부푸는데, 나는 이제껏 몇 번이나 이를 빠뜨립니다. 왜 이렇게 효모를 빠뜨리는가 하고 돌아보면, 나는 아직 빵굽기가 몸에 익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대로 마음을 기울여서 반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깨닫습니다. 국을 끓이면서 마치 간을 하나도 안 한 짓이랑 똑같다고 할 테니까요.



안 팔리는 꽃이 조금씩 자라고 있다 / 수직으로 뻗다 지루하면 수평으로 서서히 방향을 튼다 / 아주 조금씩 자라서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다 / 주인 속 타는 줄 모르고 /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꽃들 (출생의 비밀)


잠긴 문 / 들끓는 어둠 / 맡긴 시간이 부패할 때까지 / 밖은 모를 것이다 / 누군가가 발굴하기 전까지는 (물품보관함)



  코앞에 있는 꽃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코앞에 꽃이 있어도 이를 느끼거나 알지 못합니다. 눈앞에 있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눈앞에 아이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활짝 웃어도 이를 느끼거나 알아채지 못합니다.


  김희업 님 시집 《비의 목록》(창비,2014)을 읽습니다. 시인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삶을 바라보면서 느낀 이야기가 흐릅니다. 시인 둘레에 있는 여러 사람이 저마다 다르게 짓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전혁림미술관을 나와 차를 기다리는데 / 내 앞을 가로질러 가는 청바지 차림의 사내 / 페인트가 위아래로 묻어 있어 페인트공임을 알 수 있었다 (통영 2)


소녀의 공중비행을 우러러보던 지상의 유일한 목격자 / 화단의 꽃이 / 죽음을 애도하는지 / 고개를 반쯤 숙였다 /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비행법)



  《비의 목록》을 쓴 시인은 ‘화가’와 ‘페인트공’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하고 묻습니다. 미술관에 깃들어야 ‘그림’이 된다면, 미술관에 깃들지 못한 채 페인트를 바르는 일을 하는 일꾼은 ‘무엇’을 하는 셈인가 하고 묻습니다.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숨을 끊은 어린 가시내를 떠올리면서, 이 아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을 꽃이 반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시인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시인은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 만할까요. 우리는 저마다 무엇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배우거나 알거나 깨닫는 하루를 누릴까요.



그의 혈액형은 동물형이다 / 바람이 풀 위를 밟고 지날 때마다 / 풀이 한입 가득한 소 / 그런 소를 덥석 먹어치워 / 풀의 피가 몸속 푸릇푸릇한 그는 과연 육식주의자인가? (그의 혈액형은 동물형이다)


당신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돈은 / 어지간해서 나올 줄을 모른다 / 관 속의 당신 또한 나올 생각을 않는다 / 포근했던 호주머니 속 한때의 동전처럼 (호주머니)



  고기를 먹으면 고기가 내 몸이 됩니다. 한때 고기였던 짐승은 거의 풀을 먹던 짐승이었으니, 풀을 먹는 짐승을 이룬 살점은 거의 모두 풀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풀짐승 가운데 풀을 먹고 자란 짐승은 드물어요. 예부터 소는 풀을 먹었지만, 오늘날 소는 풀이 아닌 사료를 먹지요. 짚조차 못 먹고 항생제를 먹어요. 그러면 ‘사료 먹는 소’를 먹는 사람은 ‘풀로 이룬 살점’이 아닌 ‘사료로 이룬 살점’을 먹는 셈이 될까요?


  문득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풀을 먹든 고기를 먹든, 이 모든 목숨은 이 별에서 다 같이 살면서 모두 똑같이 바람을 마셔요. 바람을 마시지 않는 풀이나 짐승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풀밥을 먹거나 고기밥을 먹을 적에 ‘잎이나 살점이 된 바람’을 나란히 먹는 셈이라고도 할 만해요. 깻잎을 이룬 바람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고, 돼지 살점을 이룬 바람을 내 몸으로 맞아들여요.


  이리하여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으로 마음을 이룹니다. 나는 아이들이 오롯이 사랑을 물려받아 즐겁게 웃는 숨결이 되도록 살림을 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라보는 눈에 따라, 짓고 가꾸는 손에 따라, 삶을 돌보고 살림을 추스르는 생각에 따라, 오늘 하루는 늘 새롭게 거듭나리라 느낍니다. 2016.7.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패배는 나의 힘 창비시선 281
황규관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128

 

뙤약볕에 지친 할머니를 느티그늘이 품어 주네
― 패배는 나의 힘
 황규관 글
 창비 펴냄, 2007.12.14.

 

  나무가 선 곳에 새가 찾아듭니다. 새가 찾아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애벌레가 있습니다. 애벌레는 새한테 잡히기도 하지만, 새가 알아채지 못해서 씩씩하게 살아남기도 합니다. 새한테 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애벌레는 나비로 깨어나기도 하고 나방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 나비나 나방은 바지런하면서 기쁜 날갯짓으로 꽃을 찾습니다. 오랫동안 꿈을 꾸면서 잠만 자느라 몹시 배고프거든요. 이 꽃 저 꽃 수없이 찾아들며 꽃가루하고 꿀을 먹는 동안 나비나 나방은 어느새 꽃가루받이를 해 줍니다.


  가만히 보면 애벌레가 자라도록 해 준 나무는 나비나 나방이 깨어난 뒤에 즐겁게 꽃가루받이를 할 수 있어서 천천히 열매를 맺어 씨앗을 퍼뜨릴 수 있습니다.

나는 이승의 어떤 탐닉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 살이 얼었던 마음을 녹인다 / 살이 굳어버린 영혼을 살린다 / 강물 같은 살이 / 달빛 같은 살이 (흐르는 살)

 

아내가 사온 쌀은 여주쌀 / 20킬로그램 한 포대에 사만팔천원이나 한다 //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깻잎무침 오천원어치 / 구운 김 삼천원어치 등등, 이렇게 / 나는 금방 장에서 돌아와 쌀을 푼다 (쌀을 푸다)

  황규관 님이 빚은 시집 《패배는 나의 힘》(창비,2007)을 읽습니다. 시집 이름에 드러나기도 하는데, 황규관 님으로서는 이녁 삶에 ‘지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일터에서도 지고, 곁님한테도 지고, 아이들한테도 지고, 또 술벗한테도 지고, 여기에서도 지고 저기에서도 지고, 더욱이 어머니 병문안을 다녀오며 병원삯을 변변히 보태지 못하는 살림에도 진다고 해요.


  어제도 지고 오늘도 지는 바람에 앞으로 다가올 날에도 자꾸 지겠구나 하고 여긴다는데, 그렇지만 이렇게 지고 자꾸 지면서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 씩씩하지 못한 몸짓이라 하더라도 다시 아침을 맞이하면서 하루를 엽니다. 새 일자리를 찾으려고 기운을 내어 다시 이력서를 쓰고, 먼지를 수북히 먹은 자전거를 바라보면서 어릴 적 꿈을 되새깁니다.

왜 우리는 결핍에 시달리며 사랑을 해야 하나 / 봄비 그친 오늘 아침엔 / 마른 가지마다 어린잎이 입도 안 가리고 웃었다 / 그게 우주고 또 우리의 생활은 거기서 피어나는 것 (완전한 슬픔)

 

아침에 일어나 다시 뒷산을 걸어도 / 떡갈나무야, 나는 아직 아는 바가 없구나 / 분노보다도 슬픔에 익숙해진 이후라야 / 혼자 길을 갈 수 있을까  가난, 사랑, 바람, 잎사귀, 자벌레 / 이런 뭉게구름 같은 말들에 마음이 닿는지 / 옮겨적은 말씀이 가벼웁다 (금강경을 옮겨적다)


  새한테 잡아먹힌 애벌레는 얼핏 보기에 ‘삶에 진’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애벌레는 어느 모로 본다면 ‘새와 한몸이 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내가 먹은 밥 한 그릇도 이와 같이 바라볼 수 있거든요. 내 몸이 되어 준 모든 밥, 모든 목숨, 모든 숨결, 모든 넋을 돌아본다면, 내 몸을 이루는 수많은 목숨과 숨결이란 언제나 나를 새롭게 이루는 꿈이나 사랑이라고 여길 만하다고 느낍니다.


아파트 복도에 자전거가 기대 서 있다 / 큰애가 내리자 작은애가 한때 / 즐겁게 달렸던 낡은 자전거 / 중학교 삼년, 자전거만 타면 /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전거)

폐지수거하다 뙤약볕에 지친 / 혼자 사는 103호 할머니를 / 초등학교 울타리 넘어온 느티나무 그늘이 / 품어주고, (품어야 산다)

  뙤약볕에 지친 할머니를 느티나무 그늘이 지켜 주었다고 합니다. 지고 또 지는 삶에 지친 황규관 님한테도 이녁을 따사롭거나 시원하거나 너그럽거나 넉넉하게 지켜 주거나 돌보아 주는 느티나무 그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벚나무 그늘이나 구름 그늘이 있을는지 몰라요. 감나무 그늘이 있을는지 모르고,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기쁘게 그늘을 드리워 줄 수 있을 테고요.


  들판이나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나비와 나방이 씩씩하게 깨어납니다. 조그맣고 수수한 빛깔인 나비와 나방도, 알록달록 곱거나 눈부신 무늬를 갖춘 나비와 나방도, 저마다 즐겁게 바람을 가르면서 아침을 엽니다. 새들도 먹이를 찾아 나무를 찾아듭니다. 우리도 저마다 새롭게 삶을 이루고 살림을 지으며 사랑을 꿈꾸면서 아침을 엽니다. 지고 지고 거듭 지면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란 바로 우리 마음속에 꿈꾸는 샘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새처럼 노래하고 나비처럼 춤추는 마음이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2016.7.11.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의 뼈대 문학과지성 시인선 441
곽효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127



오래된 책을 잃어버린 시인

― 슬픔의 뼈대

 곽효환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4.1.10. 8000원



  똑같은 일을 두고도 사람들마다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이 일이 누군가한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지만, 이 일이 누군가한테는 대단한 일이 됩니다. 저 일이 누군가한테는 슬픈 일이 되지만, 저 일이 누군가한테는 슬프지 않은 일이 되어요.


  꽃이 지기에 슬퍼할 수 있습니다. 꽃이 지기에 ‘꽃이 지는구나’ 하고 여기기만 할 수 있어요. 꽃이 져서 더 꽃을 못 본다고 슬퍼할 만한데, 꽃이 지니 이제 열매를 맺고 씨앗이 새로 나오는구나 하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 한 사람을 보냈다 / 오랫동안 사랑했으나 / 함께 웃고 울고 뒹굴고 부비고 / 더러는 행이었고 더러는 불행이었던 / 혹은 그 경계를 넘나들던 / 그를 보내고 오랫동안 아팠다 (한 사람을 보내다)


21세기가 열리고 10년이 더 지났어도 / 개발의 꿈은 그칠 줄 몰라 / 가장 넓은 길을 뒤로하고 광장이 된 광화문 세종로 / 길은 막히고 소통은 뒤엉켜 있어도 이벤트는 계속되지 (피맛길을 보내다)



  곽효환 님 시집 《슬픔의 뼈대》(문학과지성사,2014)를 읽습니다. 살면서 슬픔으로 느끼거나 바라볼 만한 뼈대를 놓고 찬찬히 말을 엮은 노래가 흐릅니다. 틀림없이 슬픔이 되고, 틀림없이 슬픈 일이 되며, 틀림없이 슬픈 이야기가 되는 노래가 흐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슬픔은 늘 슬픔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일을 놓고도 어느 모로 본다면 기쁨으로 볼 수 있고, 웃음으로 맞이할 수 있어요. 슬플 적에 눈물이 날 만하지만, 슬프면서도 웃음으로 슬픔을 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날 보고 웃네요 / 찻잔 둘 덩그러니 놓여 있는 / 낡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 오래전에 그랬듯이 / 당신, 여전히 날 보고 웃네요 / 어느새 창밖에는 눈발 가득하고요 (웃는 당신)



  글을 모르는 사람은 글을 모릅니다. 이뿐입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거나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저 글을 모를 뿐입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은 ‘글로 엮은 책’을 읽지 못하니, ‘글책 지식’은 없거나 얕아요. 다만, 글책 지식이 없더라도 ‘삶책 이야기’를 품기 마련입니다. 〈오래된 책〉이라는 시에서 나오듯이 곽효환 님 할머니가 물려주었다고 하는 ‘사람책’이나 ‘삶책’은 글이 아니라 삶을 지은 사람으로서 온몸과 온마음으로 아로새긴 책이에요.



아직 글을 다 깨치지 못한 어린 내게 / 할머니는 살아 있는 귀한 책이었다 / 할머니에게도 그런 책이 있었을 테고 / 다시 그 할머니의 할머니에게도 / 오래된 그런 책이 있었을 게다 / 오래오래 전해져 내려오다 / 그만 내가 잃어버리고 만 (오래된 책)



  글로 담는 이야기가 있고, 글로 담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글로 새롭게 빚는 이야기가 있고, 글로는 도무지 빚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니, 모든 이야기를 글로 빚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돌보며 누리는 살림을 모조리 글로 옮길 까닭이 없어요. 아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구태여 몽땅 글로 옮겨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을 가꾸는 바탕이 되는 이야기는 ‘글이나 책이라는 꼴로 따로 묶이’지 않더라도 마음자리에 튼튼하게 깃들기 때문입니다.



바람 깊은 밤, 어느 골목 어귀 / 불 꺼진 반지층 창문을 본다 / 외등 아래 앙상한 몸통을 드러낸 플라타너스에게 / 무성했던 잎새의 기억을 물었지만 그네는 답이 없다 (조금씩 늦거나 비껴간 골목)



  나뭇잎을 읽고 장마를 읽습니다. 옥수수를 읽고 콩꼬투리를 읽습니다. 쑥불을 읽고 구름을 읽습니다. 여름바람을 읽고 여름볕을 읽습니다. 장마철에는 빨래에서 퀴퀴한 냄새가 흐르는구나 하고 읽습니다. 얼른 이 비가 그치고 다시 해님을 마주하면서 옷가지를 보송보송 말리면서 햇볕내음을 먹이고 싶다는 꿈을 그립니다. 비와 해와 바람이 모두 싱그러이 어우러지면서 알맞게 함께 있는 삶일 때에 넉넉하며 즐겁다는 대목을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남다른 말이 아닌 수수한 말 한 마디에서 시가 태어납니다. 남달라 보이지 않더라도 이 수수한 말 한 마디에서 시가 자라납니다. 시집 《슬픔의 뼈대》가 조금 더 수수한 자리에서 조금 더 투박한 노래여도 재미났을 텐데 싶으나, 이 모습도 이 모습대로 재미난 노래일 만하겠지요. 오래된 책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시인인데, 오래된 책을 잃어버렸으면 이제 새로운 책을 지어서 이녁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으면 됩니다. 2016.7.4.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 여림 유고 전집
여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노래하는 시 116



고졸 아닌 대학 중퇴라는 실랑이

―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여림 글

 최측의농간 펴냄, 2016.5.25. 11200원



  1967년에 태어나 2002년에 흙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여림 님입니다. 여림 님은 1999년에 〈실업〉이라는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뽑혔다고 해요. 시인 최하림 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름 끝 자를 빌어 ‘여림’이라는 글이름을 따로 지었다고도 합니다. 1999년에 신춘문예에 뽑힌 뒤 2002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시 한 줄로 글빛을 펼칠 겨를이 얼마 없었다고도 할 만합니다.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 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실업)


허름한 옷에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 요즘은 도시 공공 근로자 일을 합니다 / 은빛 피라미 떼 같은 햇살이 자욱한 점심때 / 양은 도시락 하나씩을 찬 손에 꺼내 들고 / 저희들은 잔디밭에 둘러앉아 밥을 먹습니다 (나는 공원으로 간다)



  여림 님이 숨을 거두고 열 몇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시집이 나옵니다. 시와 산문을 모은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최측의농간,2016)이 바로 이 시집입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아련한 옛 자취를 곰곰이 그려 봅니다. ‘실업’이라는 자리에 서서 고개를 꾸벅이며 졸기도 하고, 비둘기하고 말을 섞던 모습을 그려 봅니다. 공공근로를 하는 시인 모습을 그려 보고, 출판사에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대학 자퇴-고졸’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을 그려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고졸인 학력입니다. 나는 여림 님이 신춘문예에 뽑히던 그해에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들어갔는데 ‘고졸’이면서 이런 자리에 뽑히기란 아주 어려웠다고 합니다.



대학 중퇴의 학력은 고졸이라는 출판사 사장과의 면접에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뒤 방송국 스크립터로 일하는 대학 동창을 만나 늦도록 술추렴을 하다 귀가한 다음날 나는 책상 위에 커다랗게 대체로 사는 건 싫다라고 써붙여 두었었다. (대체로 사는 건 싫다)



  장마철을 맞이해서 줄줄이 내리는 비가 때때로 멎곤 합니다. 빗줄기가 멎으면 바로 멧새가 노래하는 소리가 퍼집니다. 빗줄기가 몰아치면 새도 풀벌레도 모두 숨을 죽이는데, 빗줄기가 그치기 무섭게 새랑 풀벌레는 싱그럽게 노래를 불러요.


  나는 내가 고졸인 가방끈으로 이런 일 저런 일을 했기에 나로서는 ‘나만 누릴 수 있는 발자국’을 찍습니다. 여림 시인은 여림 시인대로 고졸에다가 실업자로 지낸 발자국이 있기에 ‘여림 님만 쓸 수 있는 시’를 써서 남깁니다.



나 / 오랜 시절 / 꿈으로 지은 집에 세 들어 살았노라고 / 그 집의 세간들에 정 들 무렵 / 홀연 / 먼길을 떠났노라고 (木에게)


몇 년 전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다친 다음부터 / 나는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무서워졌다 (계단밟기)



  아침에 밥을 끓이면서 빗자루를 들고 마루하고 방을 쓸었습니다. 밥물하고 국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비질을 했어요. 밑반찬은 미리 해 두었으니 오늘은 아침을 차리면서 손 갈 일이 적어서 ‘불 앞에서 멀거니 지키기’를 하기보다는 비질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가운뎃방을 쓸고 나서 끝방을 쓸 때인데, 구석진 한쪽에서 조그마한 뭔가가 폴짝 뜁니다. 뭔가 하고 허리를 숙여서 쳐다봅니다. 옳거니, 조그마한 풀개구리입니다. 내 손톱보다 작은 가녀린 목숨입니다.

  이 녀석은 어떤 구멍으로 우리 집에 들어왔을가요? 창호종이로 얇게 가린 문에 구멍을 내어 들어왔을까요? 아니면 모기그물 한쪽에 틈을 내어 살살 비집고 들어왔을까요? 비질을 멈춥니다. 한손으로 풀개구리를 낚아채려고 바쁩니다. 예닐곱 번 손을 휘드른 끝에 잡습니다. 아이들을 부른 뒤 섬돌에 섭니다. “우리 집에 개구리가 들어왔네.” 하고 말하니 두 아이는 “어디! 어디?” 하면서 우르르 달려옵니다. “자, 보렴.” “안 보이는데?” 풀개구리가 워낙 작아서 처음에는 안 보인다고 하더니, 이 풀개구리가 제 손가락에 살그마니 올라타니 그제야 알아챕니다.


  풀개구리는 몇 초쯤 제 손가락을 올라타고 가만히 있다가 힘차게 폴짝 뛰어서 마당에 내려앉습니다.



구름은 바람의 뼈 / 바람은 제 뼈를 조금씩 화장시키며 이 도시를 지난다. (폭죽처럼 터지는 첫눈, 그리운 사람들.)


노래가 없는 밤은 쓸쓸하다 / 어둠을 뒹굴고 있는 / 바람 몇 줄을 잡아 음을 고르고 (낯선 도시의 밤)



  차분하면서 낮술 내음이 흐르는 시를 돌아봅니다. 고즈넉하면서도 힘차게 폴짝 뛰어오르고 싶은 꿈이 깃든 시를 돌아봅니다. 김치도 잘 담근다고 하고 살림도 잘 할 줄 안다고 하는 여림 님이었다는데, 집안도 늘 정갈하게 추스르면서 살았다고 하는 여림 님이었다는데, 참말로 “비 고인 하늘을 밟고 바람을 타면서 저 먼 길을 떠난” 여림 님이라고 하는데, 바람내와 구름내와 하늘내를 새삼스레 맡아 봅니다. 비내음이 가득한 여름바람과 여름구름과 여름하늘을 새삼스레 올려다봅니다.


  조그마한 풀개구리처럼 조그맣게 이 땅에 찾아와서 아주 작은 폴짝임을 보여주고는 조용히 스러진 시인 한 사람 발자국이었을까요. 내가 걷는 발걸음을, 아이들이 걷는 발걸음을, 이웃들이 걷는 발걸음을, 모두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짙푸른 여름에 흐르는 바람을 마십니다. 하늘 같은 바람을 마십니다. 2016.7.2.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깐치야 깐치야
권정생 엮음, 원혜영 그림 / 실천문학사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사랑하는 시 84

 


우리 삶은 늘 모두 사랑스레 노래였어요
― 깐치야 깐치야
 권정생 엮음
 원혜영 그림
 실천문학사 펴냄, 2015.6.30. 1만 원

 


  권정생 님이 엮은 《깐치야 깐치야》(실천문학사,2015)를 틈틈이 아이하고 읽습니다. 아이는 이 책에 깃든 ‘옛 어린이노래’를 아이 나름대로 가락을 붙여서 노래로 부르곤 합니다. 아이더러 노래로 불러 보라 시키지 않았는데, 아이는 아이 스스로 노래로 부르더군요.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문득 생각했어요. 어쩌면 나도 이 아이만 하던 어릴 적에 이렇게 ‘동시 아닌 어린이노래’를 적은 글을 읽으며 으레 흥얼흥얼 노래로 부르지 않았느냐 하고 말이지요.


  문학을 하는 어른들이 쓰는 동시는 이렇게 노래처럼 부르기 어려워요. 그러나 처음부터 아이들이 재미나게 놀면서 재미나게 부르던 노래를 받아적어서 책 한 권으로 묶은 《깐치야 깐치야》는 ‘동시집’이나 ‘어린이문학’이라고 하기 어렵구나 하고 느껴요. 참말로 이 책에 깃든 모든 ‘글’은 글이기 앞서 ‘노래’이기 때문이에요.


달강 달강 시상 달강 / 서울 가서 밤 한 바리 실어다가 / 살강 밑에 두었더니 / 머리 감는 생쥐란 놈이 / 다 까먹고 두 알 남은 걸 / 부섴에다 묻었더니 / 이웃집 할마씨가 / 볼랑거리라 하고 / 한 알을랑 가져가고 / 한 알 남은 걸 / 껍데기는 할바이 주고 / 허물을랑 할마이 주고 / 알꼬배긴 니캉 내캉 / 달강 달강 시상 달강 / 달강 달강 시상 달강 …… (세상 달강)


  우리 삶은 늘 모두 사랑스러운 노래이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어른들은 일을 하며 노래를 불러요. 그래서 어른들 노래는 ‘일노래’예요. 아이들은 놀이를 하며 노래를 불러요. 그러니 아이들 노래는 ‘놀이노래’이지요.


  어른이 일하며 노래를 부르든 아이가 놀이하며 노래를 부르든, 이 노래는 모두 삶에서 우러나와요. 권정생 님이 그러모아서 엮은 《깐치야 깐치야》에 나오는 모든 노래는 이 노래를 부른 아이들이 텔레비전이나 책이나 신문에서 배운 노래가 아니에요. 모두 아이들 스스로 지은 노래예요. 아이들이 생각을 빛내어 지은 노래이고, 아이들이 생각을 펼쳐서 지은 노래랍니다.


헝글레야 헝글레야 / 방아찧라 방찧라 / 싸래기 받아 떡해 줄게 (방아깨비)

깐치야 깐치야 / 내 눈에 가시든 거 / 꺼내 다고 / 니 새끼 웅굴에 빠진 거 / 건져 주마 / 졸뱅이로 건질까 / 뜰뱅이로 건질까 / 헛 쉬! (깐치야 깐치야)


  삶에서 우러나와서 삶으로 짓는 노래라면 무엇일까요? 바로 ‘삶노래’일 테지요. 살림을 북돋우면서 가꾸려는 뜻으로 지어 부르는 노래라면 무엇일까요? 바로 ‘살림노래’일 테지요. 서로 아끼고 보살필 줄 아는 따사로운 사랑으로 짓는 노래라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노래’일 테여요.


  글을 쓴다면 글노래가 됩니다. 책을 즐긴다면 책노래가 됩니다. 웃음을 띠는 사람은 웃음노래예요. 눈물이 흐를 적에는 눈물노래일 테지요.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거닐면서 마실노래를 부르고, 자전거를 싱싱 달리면서 자전거노래를 불러요.


  참말로 언제 어디에서나 노래를 불러요. 서울에 살며 서울노래를 부르고, 시골에 살며 시골노래를 불러요. 바다에서는 바다노래를 부르고, 숲에서는 숲노래를 부르지요.


쪽을손가 쪽저구리 / 잇틀손가 잇저구리 / 백자동전 놀피달고 / 사실깃을 설피달고 / 횃대끝에 걸어놓고 / 시애각시 어디갔노 (저고리)

 

생아 생아 사촌 생아 / 쌀 한 쪽만 재졌으면 / 너도 먹고 나도 먹고 / 구꾸정물 받았으면 / 소도 먹고 말도 먹고 / 그 누룽지 끓였으면 / 개도 먹고 닭도 먹고 / 생아 생아 사촌 생아 / 어찌 그리 무정튼고 (생아 생아 노래)


  경상도 아이들 말씨가 구성지게 묻어난 《깐치야 깐치야》입니다. 다만 오늘날 경상도 아이들은 이 책에 깃든 놀이노래나 어린이노래를 거의 모르리라 느껴요. 오늘날 아이들은 고샅이나 골목이나 마을이나 숲이나 냇가나 바다나 마당에서 마음껏 놀지 못하거든요. 게임은 할 줄 알고, 텔레비전은 볼 줄 알지만, 막상 아이들이 스스로 새로운 놀이를 지어서 새로운 노래를 부를 줄 몰라요. 이리하여 오래오래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은 재미난 놀이노래는 이제 더는 놀이노래로 잇지 못해요. 책에 남을 뿐이에요. 책에 남은 이 놀이노래를 놀이노래답게 놀면서 부르기 어려워요. 애써 엮은 《깐치야 깐치야》이지만 이 놀이노래를 어떻게 부르거나 즐길 때에 재미있을까 하는 대목을 시디 같은 데에 담아서 들려주기 어려워요.


딸아 딸아 내 딸아 / 멍두딸이 딸인가 / 나무딸이 딸인가 / 수리딸이 딸인가 / 오조밭에 갔든가 / 오지게도 생겼네 / 끌조밭에 갔든가 / 끌지게도 생겼네 / 미조밭에 갔든가 / 미끈케도 생겼네 / 차조밭에 갔든가 / 차지게도 생겼네 (둥게 둥게 노래)

눈굴떼기가 / 배가 불러서 / 다리가 짧아서 / 먼 데 못 가네 (눈굴떼기)


  나는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면서 노래를 불러 봅니다. 나는 내 삶을 노래해 봅니다. 오늘 하루 즐길 살림을 생각하면서 노래해 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하고 기운차게 부대끼면서 꾸릴 사랑을 그리면서 노래해 봅니다. 내 노래는 언제나 삶노래·살림노래·사랑노래·숲노래가 되기를 꿈꾸면서 노래해 봅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가 기쁜 웃음이 되기를 꿈꾸면서 노래해 봅니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 / 머리 좋고 키 큰 처자 / 알곰 솜솜 고운 처자 / 밍지 꽁지 짜는 처자 / 들고 치나 놓고 치나 / 얼 없이도 잘도 치네 (곰보 처자)


  아이가 아이 나름대로 가락을 입혀서 《깐치야 깐치야》를 노래로 즐깁니다. 나도 아이 곁에서 내 나름대로 새 가락을 입혀서 《깐치야 깐치야》를 노래로 즐겨 봅니다. 어떻게 불러야 ‘정답’이 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놀이를 누리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되리라 느껴요. 너는 너대로 부르고 나는 나대로 부르지요. 잘 부르고 못 부르고 같은 금을 긋지 않고 부르지요. 어깨동무를 하면서 불러요. 깨끔발을 하고 뜀뛰기를 하면서 불러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파란 바람을 마시면서 불러요. 땅을 내려다보면서 까무잡잡한 흙빛을 가슴에 담으면서 불러요. 나비를 바라보면서 부르지요. 무럭무럭 크면서 길다란 꽃대를 주욱주욱 내밀며 바람에 한들거리는 옥수수를 바라보면서 부르지요. 우리 노래가, 우리 놀이노래가, 우리 꿈노래가, 우리 웃음노래가 언제나 새삼스레 꽃처럼 피어나기를 바라면서 목청껏 부르지요. 2016.6.30.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동시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