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을 쳤다 문학의전당 시인선 225
김양아 지음 / 문학의전당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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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49

 


지긋지긋한 뒷북질도 애틋한 이야기가 되어
― 뒷북을 쳤다
 김양아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6.5.23. 9000원

 

  뒤늦게 깨닫는 일이 잦습니다. 처음부터 깨달으면 좋으련만 나는 자꾸 뒷북을 치듯이 뒤늦게 깨닫곤 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내 뒷북치기를 바라보며 나 스스로 깎아내리곤 했어요. 요즈음에는 이 생각을 좀 바꾸기로 합니다.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뒷북을 친대서 나쁘지 않아. 나를 스스로 미워하지 말아.’ 하고 생각해요.

 

  그리고 ‘남보다 늦게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깨닫는 셈이지?’ 하고 달래요. 이러면서 ‘처음부터 깨닫지 못할 뿐, 나중에 꼭 깨달으니까 더 느긋하게 살림을 꾸리자고 다짐하면 되지.’ 하고 마음을 다스려요. 어떤 일을 맞이하든 곧바로 달려들기보다는 하루나 이틀, 때로는 사흘이나 나흘쯤 묵혀 보자고 여겨요.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뒷북’이어도 나 스스로 제대로 깨닫기까지 기다리기로 해요.

 

갓 나온 따끈한 두부가 입맛을 당긴다 / 두부는 말랑하게 살아 있다 // … // 오늘도 내 앞에 덩그랗게 놓인 과제는 / 선택과 결정을 요구한다 / 넓적하게 잘라 지지거나 조려야 할지 / 작게 썰어 찌개에 넣고 끓일지 (두부 한 모)

 

그토록 태연하던 그가 뒷북을 쳤다 / 제 몸에 보이지 않게 실금을 그으며 / 어느 날의 반란을 키우고 있었다 / 그의 능청스러운 음모에 앉아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동안 / 이 지긋지긋한 무게를 언제 던져버릴까 궁리하고 있었다 (뒷북)

 

  김양아 님 시집 《뒷북을 쳤다》(문학의전당,2016)를 읽습니다. 이 시집을 쓴 김양아 님은 첫 시집을 냈다고 합니다. 첫 시집이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어느 모로 보면 느즈막하게 내놓은 시집일 테지만 아직 시집을 한 권도 못 낸 시인도 많아요. 아니, 굳이 시집을 내지 않아도 즐겁게 시를 쓰고 삶을 노래하는 사람도 많지요.


  시집을 내기에 시인이 아니라, 삶을 노래하고 살림을 노래로 지을 수 있을 적에 시인이겠지요. 《뒷북을 쳤다》를 써낸 시인은 이녁한테 무엇이 뒷북이었나 하고 되새기면서 ‘뒷북’도 ‘앞북’도 ‘옆북’도 아닌 오롯이 누리면서 지을 삶을 조곤조곤 밝히려 합니다.

 

그곳의 돌담은 얼기설기 / 바람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다 /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는 경계일 뿐 /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 키 낮은 돌담 사이로 파도 소리가 드나들었다 (돌담)

 

둥글게 둘러앉아 / 단물 가득한 수박 한 덩이 베어 먹고 / 평상에 누우면 쏟아지던 밤하늘 / 머리맡 여름 별자리 가물거린다 (먼 여름밤)

 

  지긋지긋한 뒷북질은 얼마든지 떨칠 수 있고, 얼마든지 붙안은 채 살 수 있어요. 비록 늦게 깨닫고서 뒷북을 친다지만 스스로 즐겁게 짓는 살림이라면 언제나 마음껏 웃을 수 있어요.


  느긋하게 살며 돌담을 바라봅니다. 돌담 곁에 서며 물결 소리를 듣습니다. 돌담 곁을 떠나 아파트에 깃들면서도 바닷가 돌담에서 들은 물결 소리를 돌아봅니다. 아득한 옛날 나무 그늘이 시원한 평상에서 수박을 베어물고 드러눕던 일을 돌아봅니다. 어제는 아이였고 오늘은 어버이로 지내는 삶을 돌아봅니다. 나를 낳아 돌본 어버이도 틀림없이 먼 옛날에는 아이였을 테지 하고 생각하면서 빙그레 웃음을 짓습니다.

 


면접용 정장을 차려 입고 집을 나서는 길, / 뿌옇게 하늘을 뒤덮은 미세먼지에도 / 환하게 웃고 있는 너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로 들어서는 뒷모습을 / 묵묵히 지켜보는 난감한 계절 (미완의 봄)

남쪽지방의 군락지가 고향인 후박나무 / 아무리 둘러보아도 혼자뿐이라고 / 타지에서 맘 붙일 곳 없다고 또 말을 걸어온다 (후박나무를 받아 적다)

  짐을 무겁게 짊어지고 서울 한복판을 걷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왜 어리석게 등허리를 힘들게 하지? 그냥 택시를 타도 되지 않니? 택시삯이 얼마나 한다고 택시를 못 타지? 돈이 없어서 못 탈 수 있지만, 어쩌면 나 스스로 ‘돈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몸을 더 괴롭히지는 않니?


  뒷북질을 하는 까닭은 오늘 이곳에 선 나를 더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고 느낍니다. 나중에 돈을 넉넉히 벌고서 택시를 타자는 생각이 아니라, 짐이 많아 무거운 바로 오늘 이곳에서 택시를 타자고 생각할 수 있어야겠다고 느낍니다. ‘돈이 없어서 못 한다’가 아니라 ‘돈을 쓸 데에는 즐겁게 쓰자’는 생각으로 거듭날 줄 알 때에 비로소 뒷북질을 스스로 끊을 만하다고 느낍니다.

 

구불구불 벼랑 위 산길 / 덜컹거리며 달리던 버스 종점엔 / 잣나무 숲에 안겨 있는 마을이 있었다 // 설악면 그 작은 동네의 방 한 칸 / 나는 딴 세상에 세 들었다 / 부임 첫날 안개 피어오르는 개울로 나가 얼굴을 씻을 때 / 맑고 청정한 개울물 소리에 이가 시렸다 / 그 후로 새벽은 내게 설렘이라는 말로 다가왔다 // 시간은 느리게 개울을 건너 다녔다 / 여물기 시작한 초가을이 몰려온 바람에 넘어졌다 / 종일 쓰러진 벼를 세우던 아이들 / 풀과 이삭도 구별 못하는 / 촌스러운 새내기 담임마저 소매를 걷어붙였다 // 설악이 건네준 커다란 상자를 안고 / 간신히 버스에 올랐다 / 밤톨 같은 아이들이 주워 담아준 / 밤 한 움큼씩 쪄먹으며 지낸 그해 겨울 / 문득 자욱한 눈송이로 내려온다 (설악雪岳)

 

  시집 《뒷북을 쳤다》에 나오는 후박나무 이야기를 새삼스레 다시 읽어 봅니다. 우리 집 마당에 후박나무가 있거든요. 마을 어르신들은 마당에 그늘을 많이 드리우니 이 후박나무를 베라고들 하지만, 우리 집은 이 후박나무를 살뜰히 아낍니다. 올여름 우리 집은 이 후박나무 그늘을 시원하게 누렸어요. 올해는 유난히 끔찍한 불볕이었다고 하지만 마당에 우뚝 선 후박나무는 아주 고마이 그늘을 베풀어 주었어요. 처음에 우리 집 후박나무를 베라 하신 어르신들도 올여름만큼은 이 후박나무 그늘이 참 좋다고 말씀하셔요.


  어쩌면 이런 몸짓이나 이야기도 뒷북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즐거운 뒷북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리석은 몸짓이었다 할는지 모르나, 하루가 흐르고 한 해가 흐르며 몇 날 몇 해가 지나고 되새기면 ‘그때 그 모습은 뒷북질’이지 않았다고 여길 수 있어요.


  첫 시집을 낸 김양아 님이 ‘교사로 첫 부임’을 하던 해 이야기를 적바림한 싯말을 아주 천천히 꾹꾹 새겨서 읽으며 다시금 뒷북질을 떠올립니다. 도시에서만 살다가 강원도 깊은 두멧자락 아이들을 처음 만나서 ‘시골스러운 도시내기 교사’로 지냈다고 말씀하는데, 이 뒷북질 같은 아스라한 옛이야기는 오늘에 이르러 살며시 웃음을 짓도록 북돋우는 재미난 삶자국, ‘삶 발자국’이 되어 줍니다.


  밤톨 같은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주워 준 그 옛날 그 밤알은 얼마나 맛났을까요? 아득한 그때 그 모습을 가만히 마음에 그리기만 해도 애틋해서 웃음이랑 눈물이 함께 피어나겠지요. 2016.8.3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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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지은 집 애지시선 33
권정우 지음 / 애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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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50



아이하고 별을 볼 수 있는 살림

― 허공에 지은 집

 권정우 글

 애지 펴냄, 2010.10.29. 9000원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면서 시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라 한다면, 시는 누구나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 아니라 한다면,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으나 우리 스스로 시를 안 쓰기 때문입니다.


  문학 강의를 들어야 시를 쓸 수 있지 않습니다. 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와야 시를 쓸 수 있지 않습니다. 고등학교만 마쳐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문예지에 시를 실어야 시인이 되지 않습니다. 문학상을 받아야 시인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참으로 누구나 시인입니다.



열매가 익으면서 / 꽃향기를 그대로 기억해 내듯이 / 딸아이도 점점 / 내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 (푸른 기억)


목련 꽃잎 만지던 손으로 //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니 // 아이에게서 향기가 난다 (지는 봄에)



  권정우 님이 쓴 시집 《허공에 지은 집》(애지,2010)을 읽습니다. 책 안쪽에는 권정우 님이 이녁 딸아이하고 함께 찍은 사진이 실립니다. 이 시집에는 곳곳에 딸아이하고 맺은 살림 이야기가 흐릅니다. 딸아이한테서 배우는 삶을 시로 쓰기도 하고, 딸아이한테서 엿보는 어머니 모습을 시로 쓰기도 하며, 딸아이한테 가르치거나 물려주고 싶은 살림 이야기를 시로 쓰기도 해요.



벚꽃이 피기만을 / 손꼽아 기다리는 동안 // 개나리가 / 언제 피었는지도 모른 채 / 지고 있다 (개나리)


봄은 // 두엄에게도 // 풀잎 더미로 // 새 옷을 지어 입히는구나 (가르치기 8)



  나는 우리 집에서 우리 아이들하고 별을 함께 바라봅니다. 밤에는 별을 함께 바라보고, 낮에는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함께 바라봅니다. 우리 집 나무하고 풀을 함께 바라보고, 우리 집 옥수수를 함께 따서 함께 먹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면서 우리는 누구나 교사이기도 합니다. 시인이라는 이름이 있어야 쓰는 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있을 적에 시인이듯이, 교사 자격증이 있어야 교사가 아니라, 아이하고 함께 살림을 짓는 슬기로운 넋으로 삶을 가르칠 수 있다면 교사이지 싶어요.


  먼 옛날부터 모든 어버이가 교사였어요. 어버이요 교사였지요. 또 먼 옛날부터 수수한 모든 어버이가 시인이었어요. 모든 수수한 어버이는 아이한테 말을 물려주고 가르쳤거든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가르치는 말은 ‘학습 도구’나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에요. 어버이 스스로 살림을 지으면서 쓰는 말입니다. 살림을 짓는 동안 삶으로 익힌 말이에요.



우물을 들여다보면 / 땅 밑에도 하늘이 있어 / 구름이 흐러가고 / 별들이 반짝였다 (대보름 달을 보며)



  시집 《허공에 지은 집》을 쓴 권정우 님은 어버이요 교사이면서 시인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일까요? 아이한테 물려주거나 가르치고 싶은 이야기를 시로 쓰는 사람은 ‘어버이’와 ‘교사’와 ‘시인’이라는 이름에다가 또 어떤 이름을 얻을 만할까요? 아마 ‘꿈님(꿈꾸는 사람)’하고 ‘사랑님(사랑을 나누는 사람)’ 같은 이름을 얻을 만하겠지요? 언제나 꿈을 가르치고, 늘 사랑으로 한솥밥을 먹을 테니까요. 언제나 꿈을 노래하고, 늘 사랑으로 말을 물려줄 테니까요.


  밤마다 흐드러지는 별을 바라봅니다. 여름이 저물면서 가을로 접어드는 새롭고 높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구름결이 다르고 바람맛이 다릅니다. 가을철에는 개구리 노랫소리가 없이 풀벌레 노랫소리만 있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가슴으로 느끼는 살림이 철 따라 고요히 달라지면서 흐릅니다. 나는 이 새로운 철을 기쁘게 마주하면서 시 한 줄을 쓰려 합니다. 기쁘게 쓰는 시 한 줄을 아이들하고 나누려 합니다. 어버이요 교사요 시인인 우리들 누구나 오늘 살림을 시 한 줄로 지어서 아이하고 나눌 수 있겠지요. 수수하면서 즐거운 노래를, 투박하면서 재미난 노래를, 조촐하면서 사랑스러운 노래를, 글 한 줄과 말 한 마디로 부를 수 있겠지요. 2016.8.30.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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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른 이름들 민음의 시 224
조용미 지음 / 민음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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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52



별과 내가 아주 커다란 한집에 산다

― 나의 다른 이름들

 조용미 글

 민음사 펴냄, 2016.7.29. 9000원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때때로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삶과 죽음으로 나눌 수 있고, 배고픔과 배부름으로 나눌 수 있어요. 사랑인가 사랑이 아닌가로 나눌 수 있고, 기쁨인가 기쁨이 아닌가로 나눌 수 있어요.


  이도 저도 아닌 두루뭉술한 자리를 말하면서 어느 쪽에도 들지 않으려 할 수 있을 테지요. 그런데 누군가 나한테 저를 ‘좋아하느냐 안 좋아하느냐’ 하고 물을 적에 좋아하지도 안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면 그이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밤에 별을 보려고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온누리는 ‘별을 볼 수 있는 곳’하고 ‘별을 볼 수 없는 곳’으로 나눌 수 있겠구나 하고 느껴요. ‘별을 많이 볼 수 있는 곳’하고 ‘별을 조금 볼 수 있는 곳’으로 나눌 수도 있을 테고요.



저 커다란 흰 꽃은 오래도록 피어 천 년 후엔 푸른 꽃이 되고 다시 천 년 후엔 붉은 꽃이 된다 하니 (당신의 거처)


나는 어떻게 나임을 증명할 수 있으며 어느 순간 나의 다른 얼굴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가 / 나는 내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으로 똘똘 뭉친 이 진실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나의 다른 이름들)



  고개를 들어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고 나서 시집 《나의 다른 이름들》(민음사,2016)을 돌아봅니다. 《나의 다른 이름들》을 빚은 조용미 시인은 ‘내가 나인 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하고 넌지시 묻습니다. ‘천 년마다’ 다른 빛깔로 피어나는 꽃을 노래하고, ‘이곳하고 저곳하고 다른 마음’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하는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당신도 혹 이곳에 발붙이고 있어도 늘 저곳을 향하고 있는 마음이 따로 있진 않은지요. 자의식 과잉의 먹구름이 늘 폭우를 동반하고 머리 위를 떠다닌다면 그 정신과 육체는 너무 습도가 높아 목까지 찰랑이는 슬픔이 그득 차 있겠지요 (봄의 묵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보지 못하겠지만, 같은 시간을 겪지도 못하겠지만 / 새들이 날아간 허공 어디쯤 우리의 눈빛이 잠시 겹쳐지는 일도 없겠지만 (풍경의 귀환)



  논둑에 드러누워서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나한테 찾아온 이 별빛은 언제쯤 저 별에서 지구로 보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저 별빛을 보낸 별에서는 이 지구에서 보내는 지구빛을 언제쯤 받으려나 하고도 생각해 봅니다. 가만히 반짝이는구나 싶은 별을 바라보다가, 숱한 별 사이를 휙휙 가로지르는 별을 쳐다봅니다. 내가 드러누운 논둑에는 두 아이도 함께 드러누워서 밤별을 올려다보고, 두 아이도 나처럼 ‘별과 별 사이를 휙휙 가로지르는 작은 별빛’을 함께 찾아냅니다. 아이들은 ‘빠르게 날아다니는 별빛’을 볼 적마다 저기야 저기야 하면서 손을 들어 가리킵니다.


  어떤 별일까요. 우리가 보는 별은 저마다 어떤 이름인 별일까요. 과학자가 알파벳이나 숫자를 엮어서 붙인 이름이 아니라, 저 별에 깃든 숨결이 스스로 붙인 저희 별이름은 무엇일까요. 저 별에서는 지구나 달이나 해를 어떻게 느낄까요.



명왕성에서도 몇 광년을 더 가야 하는 우주의 멀고 먼 공간, 아무도 가 보지 못한 태양계의 가장자리, 내가 사람이 아니었을 때 / 난 거기서부터 고독을 습득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사람이 아니었을 때)



  시인 조용미 님은 “내가 사람이 아니었을 때” 저 먼 별에서, 명왕성에서 한참 더 먼 별에서, 어쩌면 사람 눈에도 망원경 눈에도 안 보일 만큼 아득히 먼 저 별에서 ‘사람 아닌 다른 숨결로 깃들었’다고 느낄 그곳에서 외로움을 배웠으리라 하고 노래합니다.



바람 소리가 물결 소리 같다 / 물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주천)


별이 내뿜는 빛들을 먼먼 우주의 / 어느 한 점에서 바라본다는 건 // 별과 내가 아주 커다란 한집에 산다는 것. / 별과 내가 곧 우주라는 것 (열 개의 태양)



  꽉 찬 사람들로 복닥이는 전철이나 버스를 탈 적에 ‘나는 우주 한복판에 있다’고 느끼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꽉 찬 사람들로 복닥이는 전철이나 버스에서 이리 찡기고 저리 밀리면서 ‘마음을 곱게 다스리는 시 한 줄을 노래하기’는 만만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나도 고흥 시골마을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너덧 시간 남짓 달리며 서울로 갈 적에 ‘나는 우주 한복판에 있다’라든지 ‘마음을 곱게 다스리는 시 한 줄을 노래하기’가 수월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러한 마음이나 생각을 잊고 싶지는 않기에 시외버스에서 눈을 가만히 감고서 ‘여기는 시외버스가 아니라 지구라는 별에서도 우주를 바라보는 한복판이지’ 하고 되뇌어 봅니다. 서울에 닿아 전철을 갈아탈 적에 땀을 흠뻑 쏟다가도, 옆사람이 내 발을 밟느라 아프다고 느끼다가도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시를 노래할 수 있는 기쁜 넋’이라고 되새겨 보곤 합니다.


  한여름 무더위에 부채 하나로 날 수 있습니다. 한여름 무더위로 땀을 흘리며 잠드는 아이들 곁에 서서 밤새 부채질을 해 줄 수 있습니다. 내 부채질은 아이들한테 싱그러운 산들바람을 베푸는 손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름도 머잖아 끝나면서 다 같이 시원한 새 바람을 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조용미 님은 시집 《나의 다른 이름들》을 빌어서 이 땅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 ‘속으로 빛나는 숨결’을 노래하려고 합니다. 시집을 읽으며 아이들한테 부채질을 해 주는 나는 ‘바람 같은 노래를 아이들한테 물려주는 숨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이름은 ‘아버지’나 ‘어버이’이기도 하지만, 내 다른 이름은 꿈이나 사랑일 수 있어요. 숲이나 바람일 수 있어요. 새로운 숨결로 거듭나고 싶은 내 다른 이름을 하나하나 혀에 얹어 봅니다. 2016.8.21.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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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내밀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04
맹문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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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7



이끼가 살 수 있는 바위와 바람을 불러

― 사과를 내밀다

 맹문재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2.11.21. 8000원



  요즈음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내가 어릴 적에는 능금을 나무로 짠 궤짝에 담아서 팔았고, 능금궤짝에는 겨가 가득 찼어요. 요즈음은 저온창고에서 능금을 오래 건사한다지만, 예전에는 으레 겨에 묻어서 오래 건사했어요. 능금뿐 아니라 배도 겨에 묻어서 다루었어요.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나를 낳은 어머니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셨고, 이웃 어른들도 으레 시골에서 나고 자란 분이었어요. 그래서 저잣거리에서 능금궤짝을 장만해서 집에 들여서 먹을 적에는 집집마다 ‘텃밭’이나 ‘꽃그릇’에 겨를 뿌렸지요. 좋은 거름 구실을 했어요.


  겨로 가득한 궤짝에 손을 넣어 능금 한 알을 꺼내면 퍽 즐거웠습니다. 손에 닿는 겨 느낌이나 소리가 재미있고, 능금이 어디에 숨었는지 찾으면서 재미있어요. 모든 열매를 고이 아끼던 지난날에는 능금 한 알뿐 아니라 한 조각조차 몹시 알뜰히 여겼습니다.



당숙이 나를 한 여자 앞에 앉혔다 / 소위 큰손이라는 이였다 / 집을 수십 채 가지고 있기에 / 이번 일을 잘하면 기회를 잡는다고 했다 / 당숙은 시인을 모르면서 / 조카가 대단한 글을 쓴다가 사람들에게 자랑하다고 / 몇 다리 건너 아는 여자에게까지 / 데리고 온 것이다 (시인)


이모님 댁에 왔다가 시골로 가시려는 어머니를 붙들었지만 / 상 한번 차리지 못했다 / 백 년 만에 처음이라고 텔레비전이 떠들어대듯 / 눈이 너무 오기도 했지만 / 직장 일을 핑계로 늦게 들어오느라고 / 외식 한번 못 했다 (어머니를 울리다)



  맹문재 님이 빚은 시집 《사과를 내밀다》(실천문학사,2012)를 읽으면서 내가 어릴 적에 마주한 능금궤짝을 떠올립니다. 손으로 짓는 살림을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하던 지난날을 되새기고, 손으로 가꾸는 이야기를 둘레에서 쉽게 만나던 지난날을 그려 봅니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문명에서는 손으로 짓거나 가꾸는 흐름이 옅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 문명은 그냥 문명이 아니라 기계문명인 셈이라고 할까요. 이와 달리 지난날은 손으로 짓는 살림인 ‘손살림’이었구나 싶어요.



농협장 선거에 돈이 뿌려진다고 이르신다 / 기름값이 너무 비싸 보일러를 뜯어야겠다고 이르신다 / 영달네가 자식 놈에게 맞았다고 이르신다 / 내가 쉬는 일요일 저녁에 이르신다 / 엊그제 이른 일을 또 이르신다 / 여든 살 아이가 되어 큰아들에게 이르신다 (아버지가 이르신다)


남의 물건에 손대는 행동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 가난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 한번 어기고 싶었다 (사과를 내밀다)



  기계문명이 널리 퍼지면서 ‘손빨래’나 ‘손글씨’라는 말이 새로 생기기도 합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으레 손으로 하거나 나누던 일이 이제는 손으로 거의 안 하는 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살림’만 잊히거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손일도 손놀이도 모두 잊히거나 스러집니다. 이러는 동안 손수 짓는 이야기도 잊히거나 스러지면서, 남이 지은 이야기가 널리 퍼집니다. 내가 손수 지은 집에서 살기보다는 남이 지어서 돈으로 사고파는 집에서 살기 마련입니다. 내가 손수 지은 옷을 입기보다는 남이 지어서 돈으로 사고파는 옷을 입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집이나 옷도 ‘남이 손으로 짓’지 않기 마련이에요. 기계를 써서 한꺼번에 똑같은 꼴로 엄청나게 찍어내요.



울산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당숙이 / 작업반장 좀 혼내달라신다 / 폭행으로 목을 다쳐 육 주 진단이 나왔지만 / 본 사람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 근무하기 힘든 곳만 보낸다고 이르신다 (어떻게 혼낼 수 있을까?)



  시집 《사과를 내밀다》에 흐르는 이야기는 모두 맹문재 님이 손수 겪은 삶이요 살림이며 사랑입니다. 더 낫거나 덜 나은 삶이 아닙니다. 그저 맹문재 님이 나날이 부대끼거나 마주하는 삶입니다. 더 좋거나 덜 좋은 살림이 아닙니다. 그예 맹문재 님이 늘 지켜보거나 바라보는 살림입니다.


  우리가 기계문명을 누리더라도 손살림을 잊지 않을 수 있으면, 우리는 우리 사랑을 손수 지을 수 있다고 봅니다. 마치 기계처럼 글쓰기를 익혀서 멋져 보이는 글을 지어야 하지 않아요. 저마다 다른 우리들은 저마다 다른 삶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손길로 저마다 다른 살림을 지으면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어요.


  내가 누리는 삶이 너하고 달라서, 내가 쓰는 글이 너하고 달라요. 네가 보내는 하루가 나하고 달라서, 네가 쓰는 시 한 줄이 내가 쓰는 시 한 줄하고 달라요.



이끼가 살 수 있는 이슬을 불렀고 바위를 불렀고 옹달샘을 불렀다 풀을 불렀고 나무를 불렀고 바람을 불렀다 꽃을 불렀고 구름을 불렀고 햇살을 불렀다 물안개를 불렀고 새소리를 불렀고 물고기를 불렀다 (이끼를 담보로 잡히다)


부치려고 하는데 / 손안에 없다 // 집에 두고 왔는가? / 길에 흘렸는가? // 돌아가며 찾아보지만 / 어디에도 없다 // 안타까워 다시 쓰려는데 / 바람이 손을 잡는다 (오십 세)



  쉰 살 문턱을 넘어서면서 삶을 새삼스레 되돌아보는 이야기가 잔잔히 흐르는 시집 《사과를 내밀다》입니다. 앞으로 맹문재 님이 걸어갈 예순 살 문턱 언저리에서는 그때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시 한 줄로 태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가꾸며 스스로 노래하는 하루이기에 스스로 새롭게 시 한 줄을 쓸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끼가 살 수 있는 이슬을 부르는 시인 마음을 돌아보면서, 나는 노린재와 민들레와 제비가 함께 살 수 있는 바람을 불러 봅니다. 꽃과 구름과 햇살을 부르는 시인 마음을 헤아리면서, 나는 우리 아이들하고 곁님하고 나란히 미리내를 부를 수 있는 시골살림을 불러 봅니다.


  손수 지은 밥을 손수 밥상으로 차립니다. 손수 거둔 남새를 손수 갈무리해서 즐깁니다. 들마실을 할 적에 아이들이 으레 저희 작은 손을 내밉니다. 나는 아이들보다 커다란 손을 하나씩 뻗습니다. 두 아이를 왼쪽하고 오른쪽에 나란히 두고 서로 손을 잡으며 들바람을 쐽니다. 나긋나긋 나풀나풀 홀가분한 손살림은 손빛이 되고 손노래가 되고 손사랑이 됩니다. 2016.8.7.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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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정면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43
김선향 지음 / 실천문학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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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8



네 코앞에 미사일을 들이대 볼까?

― 여자의 정면

 김선향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6.6.27. 8000원



  나는 사내라는 몸을 입고 태어났습니다. 사내라는 몸을 입었으니 스물을 갓 넘길 무렵 군대라는 곳에 갔습니다. 군대라는 곳에 간 사내이기에 두 손에 총을 쥐면서 ‘누군가를 나쁜 놈으로 여겨서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이거나 주먹이나 발길로 때려서 죽이는 재주’를 익히는 솜씨를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군대에 있어야 하던 사내로서 그때에 늘 생각해 보았어요. 왜 이렇게 정갈하고 아름다운 멧골에 막사를 세우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짓을 남녘이나 북녘 모두 바보스레 해야 할까 하고요. 남·북녘은 서로 돈이 얼마나 많기에 전쟁무기와 군부대에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돈을 쏟아부어야 할까 하고요.



엄마, 그거 알아? 난 노점상에서 떨이로 사온 귤 대신 고디바초콜릿이 먹고 싶었어. 단화를 신고 온종일 마트에서 일하는 엄마 같은 여자, 생리휴가도 없이 서서 피 흘리는 가장은 사절이야. (안녕, 엄마)


그녀는 늘 옆모습만 보여줬지 / 왼쪽이 웃는 듯해서 / 오른쪽을 보면 울고 있었어 / 왼쪽은 나를 사랑했고 / 오른쪽은 나를 증오하는 것 같았지 (그녀의 정면)



  흔히 ‘군부대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나라에 군부대가 없으면 저쪽에서 이쪽을 얕보고 쳐들어오리라 여기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아이들한테도 고스란히 이어져요. 아이들은 어릴 적에 ‘호신술’을 익혀야 합니다. 골목마다 감시카메라를 달아야 합니다. 이웃사람을 ‘이웃’이 아닌 ‘수상한 사람’으로 바라보도록 길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렇게 온 사회에 전쟁이나 감시라고 하는 바람이 불도록 하면서, 막상 사회는 그리 평화스럽거나 아늑하지는 못합니다. 경찰이나 군대가 있으니 ‘이만큼 평화롭다’고 여길 분도 있을 텐데, 막상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웃사랑’이나 ‘마을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요. 젊은 사내는 군대에서 ‘이웃을 나쁜 놈으로 여겨서 때려죽이는 재주’에 길들어야 하고요.


  평화를 가꾸는 평화교육이 아니라, 전쟁무기를 남보다 더 갖추어서 남을 윽박지르거나 꺾어누르는 ‘전쟁교육’을 시키는 사회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한국 정치·사회는 새삼스레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조용하고 한갓지면서 평화로운 시골마을에 ‘사드’ 같은 무시무시한 미사일을 들이겠다는 정책을 내놓습니다.



자장 자장 우리 엄마 자장 자장 잘도 잔다 // 기차 타고 전철 타고 마을버스 타고 / 양손에 어깨에 들고 메고 와서는 / 문전부터 딸년에게 핀잔만 들었구려 (엄마를 위한 자장가)


동네 오빠 아는 오빠 친구의 오빠 / 신세대들은 남편에게도 오빠라 부른다지 / 쥐꼬리 월급 어디에 다 썼냐고 잔소리해대는 남편 오빠 / 결혼하더니 남이 되어버린 피붙이 오빠 / 노래를 기차게 잘하는 오빠 / 오입질에 선수인 오빠 / 입만 열면 거짓말을 늘어놓는 오빠 (오빠들)



  김선향 님이 빚은 시집 《여자의 정면》(실천문학사,2016)을 읽습니다. 이 시집은 오롯이 ‘가시내(여자)’ 목소리와 눈길과 숨결이 흐릅니다. 사내(남자)한테 눌리거나 밟히거나 치이거나 차이거나 꺾이거나 눌리거나 죽는 가시내 이야기가 흐릅니다.


  사내하고 가시내를 가르는 가장 큰 금이라면, 가시내는 새로운 목숨(아기)을 몸소 낳습니다. 사내는 아기를 낳는 씨앗을 몸에 건사하기는 하지만, 몸소 새로운 목숨을 낳지 못해요. 가시내는 몸소 아기를 낳으면서 새로운 사람을 새롭게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울 수 있다면, 사내는 먼발치에서 마치 남 일처럼 구경하거나 아예 모르기까지 하기 일쑤입니다. 이러면서 우리 사회에서 사내는 젊은 나이에 군부대에 들어가서 군사훈련을 받고,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잔뜩 억눌린 몸으로 ‘성욕해소’에 마음을 빼앗기지요.


  군부대 둘레에 있는 술집과 방석집을 떠올려 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조선 가시내를 비롯해서 중국과 아시아 가시내를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사로잡아서 노리개로 삼은 짓을 떠올려 봅니다. 전쟁무기를 손에 쥔 사내는 마음에 평화를 생각하거나 키우지 못해요. 전쟁무기를 손에 쥐고 군사훈련을 받는 사내는 평화롭거나 사랑스러운 마을을 즐겁게 짓는 길에 힘을 쓰지 못해요.



한국에 온 지 이태가 되어서야 / 자기 이름을 겨우 쓸 수 있는 프엉 씨 //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더니 / 호치민, 버스, 여덟 시간, 까마우, 더워 // 공부한 지 두 달이 넘었는데도 / 읽을 수 있는 단어는 열 개 남짓 / 하지만 모르는 게 없는 생선 이름들 (붉은 꽃, 흰 꽃)



  북녘에서 우리 코앞에 미사일을 들이대는데 남녘에서도 북녘 코앞에 미사일을 들이대야 하지 않느냐고 여길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아이들을 다시 생각해 봐야지 싶어요. 두 아이가 뭔가 어떤 일이 있어서 틀어져서 식식거리며 노려본다고 해 보셔요. 이 두 아이더러, “자, 신나게 싸워! 한 놈이 자빠져서 죽을 때까지 때려눕혀!” 하고 말해도 될까요?


  남녘뿐 아니라 북녘에서도 군부대를 줄이고 전쟁무기를 없애도록 정치 우두머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슬기로운 길을 찾은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한테 이런 전쟁무기가 있으니 우리한테도 저런 전쟁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전쟁무기에 들이붓는 짓은 이제 그쳐야 합니다.


  우리가 피땀과 같이 내놓은 돈(세금)은 바로 우리 삶터를 가꾸고 사랑하면서 아끼는 길에 쓸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가르치는 자리에 피땀 같은 돈을 써야지요. 아프고 슬픈 이웃을 따스히 보살피면서 북돋우는 길에 피땀 같은 돈을 써야지요. 아름다운 마을이 되고 아름다운 숲이 되며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곳에 피땀 같은 돈을 써야지요.



― 피임 같은 건 여자가 알아서 해야지 / ―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 // 흡반처럼 달라붙는 말들을 뜯어내 / 쓰레기통에 처넣지 못한 채 / 비디오방에 갔다 // 거기서 차승원, 설경구랑 놀았다 / 눈물이 쏟 빠지도록 웃다가 / 간이소파에 파묻혀 / 웅크리고 잠을 잤다 (도둑고양이)


너무 추워, 엄마. / 봄은 어디에 있어요? / 세 살 딸아이가 묻는다 (봄은 어디에)



  시집 《여자의 정면》을 가시내뿐 아니라 사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읽는 모습을 가만히 그려 봅니다. 이 나라에서 이 땅에서 이 지구라는 별에서, 수많은 가시내가 사내한테 밟히고 눌리고 차이고 꺾이고 얻어맞고 노리개로 뒹굴어야 하던 발자국을 이 조그마한 시집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읽는 모습을 곰곰이 그려 봅니다.


  전쟁무기는 멈추어야 합니다. 전쟁이 아닌 평화로 나아갈 노릇입니다. 싸움은 그쳐야 합니다. 싸움이 아닌 어깨동무로 거듭날 노릇입니다. 참된 사랑이 되도록, 착한 이웃이 되도록, 고운 살림이 되도록, 이제 우리 보금자리하고 마을을 바라볼 때입니다. 내 이웃 코앞에 미사일을 들이대는 바보스러운 짓은 이처럼 똑같이 바보스러운 짓으로 우리한테 돌아옵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으로 돌아오고, 오로지 평화만이 평화로 돌고 돕니다. 2016.7.22.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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