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딩 감옥의 노래 큐큐클래식 1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지현 옮김 / 큐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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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29


감옥 담장은 튼튼하고 하루는 길더라
― 레딩 감옥의 노래
 오스카 와일드/김지현 옮김
 쿠쿠, 2018.3.2.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지. 자유로와야 할 영혼에
빡빡히 조인 굴레를 씌워 가두려 하고
숲은 모두 자유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도
건전한 상식의 먼지 깔린 길을 걷는다지 (변명/53쪽)


시집 <레딩 감옥의 노래>(오스카 와일드/김지현 옮김, 쿠쿠, 2018)는 두 가지 시를 들려줍니다. 앞쪽에는 글쓴이 오스카 와일드 님이 ‘여느 삶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는 눈길로 쓴 시라면, ‘레딩 감옥의 노래’는 ‘감옥이라는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는 눈길로 쓴 시입니다.

이 시집은, 오스카 와일드 님이 왜 옥살이를 해야 했는가를 모르는 채 읽을 수 있고, 이 대목을 궁금히 여겨 책끝에 붙은 풀이글을 먼저 읽고서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시부터 먼저 읽고서 풀이글을 읽었고, 시를 새롭게 더 읽어 보았습니다.


저 높이 우짖는 하얀 갈매기를 봐
우리가 못 보는 그 무엇을 보는 걸까
별일까? 아니면 먼 바다로 나가는
어느 배에서 번뜩이는 등불일지도 몰라.
아! 어쩌면 우리는
꿈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목소리/67쪽)

혀도 없고 노래도 못 하는 어느 죄의 유령이, 밤의 장막 사이로 기어나와
내 방의 양초가 환히 타오르는 것을 보고, 문을 두드려 너를 들여보낸 걸까? (스핑크스/121쪽)


오스카 와일드라는 분이 옥살이를 한 탓은 여러모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얼핏 보기로는 동성애 때문이라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영국 귀족 사회 틀을 ‘더럽게 건드렸’기에 미운털이 박혔다고도 합니다. 영국 귀족 사회는 오스카 와일드라는 사람이 ‘후작 집안 젊은이’를 이끌고 동성애를 즐기는 몸짓을 두고볼 수 없었다고 하는군요. 영국 귀족 사회는 ‘공개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고,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도 이성애도 모두 떳떳한 사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동성애를 한다는 대목을 떳떳이 밝히고 산 오스카 와일드는 영국에서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주류 남성’이 매우 싫어했다고 합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를 둘러싸고 영국 귀족 집안 젊은이하고 ‘공개된 동성애’를 누리지 않았다면, 이녁 문학에서도 동성애를 고스란히 드러내지 않았다면, 아마 이녁은 옥살이를 치러야 할 일도, 한동안 영국 문단에서 버림받아야 할 일도 없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녁은 제 마음이나 사랑을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에 빠진 이들과 함께 원을 그리며
그와 다른 줄에서 걷던
나는 궁금해졌네. 그 남자가 저지른 죄가
큰 것일까 작은 것일까
그때 내 뒷사람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말,
“저 친구, 교수형당할 거라오.” (레딩 감옥의 노래/141쪽)

다만 그가 어떤 생각에 쫓겨 발걸음이
빨라졌는지, 그리고 어째서
눈부신 하늘을 향해 그토록 애틋한 눈빛을
보냈는지, 나는 알았네.
그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였고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이라네. (레딩 감옥의 노래/143쪽)


옥살이를 해야 하면서 그동안 누리던 이름이나 삶을 모두 잃어버립니다. 감옥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 햇볕 한 줌을 쬐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옥살이를 하는데 어느 날 사형수 한 사람을 문득 보았다고 합니다. 볕바라기를 시키는 감옥에서 볕바라기를 하기보다는 하늘을 애틋하게 올려다보는 사형수 모습이 남다르게 보였다고 해요.

오스카 와일드 님은 레딩 감옥에서 이태를 살고 나온 뒤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고 합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갔다지요. 다만 이 마지막 삶자락에서 쓴 글이 ‘레딩 감옥의 노래’이고, 이 시는 옥살이를 하기 앞서 쓴 시하고 사뭇 달랐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즐겁게 꿈꾸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시였다면, 레딩 옥살이를 마치고는 아프거나 슬픈 이웃이 살아가는 나날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함께 아프거나 슬픈 마음을 담은 시였다고 해요.


어떤 이는 젊은 시절에 사랑을 죽이고
어떤 이는 늙어서 죽이지
어떤 이는 욕망의 손으로 목 졸라 죽이고
어떤 이는 황금의 손으로 죽이네
가장 친절한 자는 칼로 죽이지, 그래야
죽은 자가 빨리 차가워지니까 (레딩 감옥의 노래/145쪽)

그러다 마침내, 걷는 수감자들 사이에
그 남자가 나타나지 않자
나는 알아지, 그가 검은 피고석의 끔찍한
칸막이 안에 서 있으며
신의 달콤한 세상에서는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 없을 것임을. (레딩 감옥의 노래/159쪽)


사랑을 노래하던 사람은 사랑을 노래했기에 발목에 사슬을 채워야 했고, 발목에 사슬을 채우고 옥살이를 하는 동안 사형수를 만납니다. 사형수를 만나고 이이를 지켜보면서 무엇을 헤아렸을까요. 감옥에서 노예처럼 고된 일을 날마다 치르는 이태를 견디고 감옥 바깥으로 나와서 어떤 바람을 쐬었을까요.

다른 글은 더 쓰지 못하고 오직 ‘레딩 감옥의 노래’만, 레딩 옥살이에서 겪은 이야기를 ‘노래(ballad)’라는 이름을 붙여서 길게 시 하나를 쓰기만 한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더는 노래할 기운을 내지 못했으나 마지막으로 노래한 한 마디에 어떤 꿈이나 사랑을 실을 수 있었을까요.


법이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
그런 것은 나는 모르네
감옥에 누워 있는 우리가 아는 것은
담장이 튼튼하다는 것과,
하루가 일 년 같다는 것, 꼭 그만큼
매일이 길다는 것뿐이라. (레딩 감옥의 노래/207쪽)


고된 하루가 깁니다. 고되지 않은, 그러니까 사랑으로 가득한 하루는 어떠할까요? 사랑으로 가득한 하루는 짧을까요, 아니면 사랑으로 가득한 하루도 길까요?

레딩 옥살이를 마치고 죽음길로 떠난 오스카 와일드 님을 묻은 자리에 ‘날개 달린 스핑크스’ 조각을 세웠다고 합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날개를 꺾어야 한 몸이지만, 흙으로 돌아간 저승나라에서는 날개를 다시 펴고 날아오르려나요.

깊고 어두운 곳에서 울리는 노래는 오래오래 흐릅니다. 가위질하는 법은 목숨 하나를 끊었지만, 날개를 달고 싶은 노래는 새롭게 저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2018.4.5.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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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학동네 시인선 101
문태준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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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28


우리가 사랑하는 일에는 끝이 없어요
―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태준
 문학동네, 2018.2.10.


아름다운 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보았네
내 고운 님의 맑은 눈 같았지
님의 가늘은 손가락에 끼워준 꽃반지 같았지
대지에서 부르던 어머니의 노래 같았지
아름다운 바퀴가 영원히 굴러가는 것을 보았네
꽃, 돌, 물, 산은 아름다운 바퀴라네
이 마음은 아름다운 바퀴라네 (일륜월륜/12쪽)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태준, 문학동네, 2018)를 읽습니다. 책끝에 붙은 시집 추천글을 보면 문태준 시인이 훌륭한 ‘서정시인’이라고 나옵니다. 문득 ‘서정’이라는 말이 궁금해서 사전을 살핍니다. ‘서정시(抒情詩)’를 “[문학] 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주관적으로 표현한 시”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어느 시나 글이든 글쓴이 느낌(감정)이나 마음(정서)을 스스로(주관적) 그리기 마련입니다. 딴 사람이 느끼거나 생각하는 이야기를 그리는 시나 글이라면, 이때에는 아무개 시나 글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모든 시는 밑바탕이 서정시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참말로 그렇습니다. 시뿐 아니라 글도 모두 ‘서정글’이 되겠지요. 우리 나름대로 느끼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밝히는 글일 테니까요.

  문태준 시인이 훌륭한 서정시인이라 한다면, 다른 누구보다 문태준 시인은 이녁 느낌이나 마음을 안 숨길 줄 안다는 뜻이지 싶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제 느낌이나 마음을 살뜰히 시로 그릴 줄 안다는 뜻이 될 테고요.


내 어릴 적 어느 날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랗게 익은 뭉뚝한 노각을 따서 밭에서 막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 안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泉水)를 떠내셨습니다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16쪽)


  시를 쓰거나 읽기 어렵다면 아무래도 이 대목 ‘우리 느낌이나 마음’을 어떻게 보거나 다루어야 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거꾸로 우리 느낌이나 마음을 꾸밈없이 그리거나 즐거이 담아낼 수 있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싶어요.

  글솜씨가 훌륭해야 시인이 되지 않습니다. 갖가지 표현기법을 잘 살려야 훌륭한 시인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느낌을 우리 목소리로 살릴 때에 비로소 시인이 되지 싶습니다. 우리 마음을 우리 삶에 담아서 우리 손으로 풀어낼 줄 안다면, 시인이란 이름이 없어도 시를 쓰고 비평가란 이름이 없어도 시를 읽을 만하리라 봅니다.


만일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창백한 서류와 무뚝뚝한 물품이 빼곡한 도시의 캐비닛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맑은 날의 가지에서 초록잎처럼 빛날 텐데
집밖을 나서 논두렁길을 따라 이리로 저리로 갈 텐데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39쪽)


  문태준 님은 어릴 적 외할머니가 읊은 샘물 같은 시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만 맑은 샘물 같은 시를 읊지 않았겠구나 싶어요. 어머니도 누나도 참말로 그윽한 시를 읊었네 싶습니다. 어머니는 늙은오이를 따는 시를, 누나는 여름 빨래를 널고 걷는 시를 읊습니다.

  그리고 문태준 님은 맑은 날 푸르게 빛나고 싶은 나뭇가지 같은 마음으로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하루를 노래하고 싶다는 시를 읊습니다. 서류도 강단도 떠나, 조용히 흙을 만지고픈 나날을 꿈꾸며 시를 읊어요.


따라붙는 동생을 저만치 떼어놓을 때
우는 내 동생의 맑은 눈물이 또르륵 굴러떨어져 피어난 꽃아 (별꽃에게 2/78쪽)


  우리가 사랑하는 일에는 끝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흙을 짓는 하루도 끝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서류에 파묻혀 회사일에 얽매이는 하루도 끝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찬비를 맞거나 봄비를 맞거나 소나기를 맞으며 밭을 매는 하루도 끝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루 내내 쉴새없이 나오는 갓난쟁이 오줌기저귀를 갈아대는 하루도 끝없이 사랑할 수 있어요. 고단한 출퇴근 버스길이나 전철길도 끝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시 한 줄은, 스스로 사랑하는 삶에서 터져나옵니다. 시 두 줄은, 스스로 사랑하는 하루에서 샘솟습니다. 시 석 줄은,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하고 마음으로 어깨동무하는 자리에서 태어납니다. 시 넉 줄은, 스스로 사랑하는 꿈길을 걷는 동안 시나브로 자라납니다.

  시인이 어린 날, 우는 동생 볼을 타고 흙바닥으로 떨어진 눈물이, 오늘 별꽃으로, 그러니까 곰밤부리꽃으로 피어난다고 해요. 참말로 새봄에 피어나는 온갖 꽃송이는 우리가 흘린 눈물이 자라난 숨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기쁘게 얼싸안으면서 놀고 노래하다가 지은 웃음에서 이어진 숨결일 수 있어요. 매화내음이며 동백내음이 마을에 가득한 삼월 한복판입니다. 2018.3.2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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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열면 창비시선 418
김현 지음 / 창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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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28


입술을 열어 어떤 말을 하는가
― 입술을 열면
 김현
 창비, 2018.2.10.


뱃살이 늘어간다
그걸 평화라고 부를 수 있겠지
뱃살의 평화 (빛의 뱃살/30쪽)


  아침에 일어난 아이들이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하고 입술을 엽니다. 저도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래, 즐겁게 꿈을 꾸었니?” 하고 입술을 엽니다.

  말을 하려면 입술을 엽니다. 입술을 열지 않고서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입술을 달싹이지 않고 속으로 꿍얼거리면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제대로 생각을 나누어 말을 섞자면 입술을 제대로 열어야 합니다.


그게 어느새 / 늙어버린 우리 얼굴 // 견딜 수 없는 / 얼굴을 사이에 두고 // 우리는 우리를 본다 / 우리는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조선마음 11/51쪽)


  입술은 곱게 열 수 있습니다. 곱게 여는 입술로 곱게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입술은 밉게 열 수 있겠지요. 밉게 여는 입술로 밉게 가시 돋힌 이야기를 퍼부울 수 있어요.

  겉보기로는 입술을 여는 똑같은 모습일 테지만, 우리 마음에 따라서 말씨가 사뭇 다릅니다. 서로 즐거운 입술짓이 될 수 있으나, 서로 지치거나 싫은 입술질이 될 수 있어요.


물은 딱딱한 돌 / 한번에 여러번 죽어간 인간들을 보면 알 수 있지 // 보릿자루를 풀었다 / 묶었다가 // 하루아침에 생명을 다 썼다 (무서운 꿈/122쪽)


  김현 님 시집을 읽습니다. 마치 영화처럼 꾸미고 싶었다는 《입술을 열면》(김현, 창비, 2018)입니다. 시마다 글이름에 어깨무늬를 달고서 끝자락에 덧말을 붙여요. 시는 시대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덧말에는 덧말대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시 한 꼭지마다 두 가지 이야기를 섞는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는 시 한 꼭지에 달리는 두 가지 이야기를 나란히 읽어도 되고, 하나만 읽어도 됩니다. 둘을 함께 살펴도 좋고, 하나만 살펴도 좋습니다. 시를 쓴 분은 우리가 영화를 보며 저마다 좋아하는 흐름을 살피거나 좇듯, 시를 읽을 적에도 ‘시를 쓴 마음을 읽’되 ‘시를 읽는 우리 스스로 어떤 마음인가를 새롭게 헤아리며 읽’기를 바라는구나 싶습니다.


귀에 대고 말을 하면 / 말은 귀에 담긴다 // 내 입술이 / 네 귀와 가까워지려는 말 (귓속말/166쪽)


  새로운 틀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시가 흐르는 《입술을 열면》을 읽으면서 때때로 놀라기도 합니다. 시인은 살섞기하고 얽힌 낱말을 갑자기 거침없이 풀어놓기도 하거든요. 그러고 보면, 김현 시인은 이 시집하고 《질문 있습니다》라는 산문책을 나란히 내놓았습니다. 김현 시인이 쓴 산문책은 ‘문단 성폭력’을 비롯한, 우리 사회 한켠에 꽁꽁 감춰진 이야기를 낱낱이 풀어내는 책이라지요. 시인이라는 자리에 앞서 평등하고 인권을 살피고픈 활동가로 지켜보고 맞닥뜨린 아픔이랑 생채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라 하고요.

  산문책에서는 이 땅 한켠에서 아프거나 괴로운 이웃이 얼마나 아프거나 괴로운가를 줄줄이 풀어내는 글로 들려준다면, 시집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여러 눈으로 바라보자는 뜻을 어깨무늬+덧말로 그린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는 일요일 아침을 세계화하는 데
쓴다

그림일기는
꼬맹이들의 몫

아이의 왼쪽 팔 옆에는 딸기스무디가
엄마와 형이 있고

아이는 영양가 있는 세계라는 말을
배워서 곧이곧대로 사용한다

어른들은 영양가라는 말에 사족을 못 쓴다 (일요일 아침 태현이는/135쪽)


  김현 시인이 들려주는 시는 꽤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어려움이란 글재주를 부려서 어렵다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일요일 아침 태현이’가 겪는 하루처럼 입시·대학·점수·돈·취업 같은 데에 얽매여 아이들을 다그치는 몸짓에서 비롯했다고 할 만하지 싶어요.

  아이들은 어른이 쓰는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씁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보는 새소식을 같이 지켜보며 방송이나 신문에 흐르는 말을 하나하나 받아들여서 씁니다. 아이들은 시사상식을 살펴서 받아들이고, 사회비평을 하며 논술을 하는 훈련을 학교나 학원에서 해요. 아이들 입에서 ‘세계화·영양가 있는 세계’ 같은 말마디가 아무렇지 않게 흐른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입술을 어떻게 열어야 즐거울까요? 우리는 입술을 언제 어떻게 열어야 아름다울까요? 우리는 입술을 언제 어떻게 왜 열면서 어떤 말로 이야기를 지펴야 서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을까요? 입술을 열기 앞서 마음을 열고, 마음을 열면서 생각을 열며, 입술·마음·생각을 열며 사랑도 함께 열 줄 아는 어른으로 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2018.3.9.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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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8-03-09 13:18   좋아요 0 | URL
그제 서점에 갔다가 기존 창비시선과 다른 표지에 눈길이 갔습니다. 바로 <입술을 열면>이었는데요. 시집 소개 잘 읽었습니다. 조만만 주문 넣을 것 같습니다

숲노래 2018-03-09 16:26   좋아요 0 | URL
처음 읽을 적에는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못 알아들었어요.
다시 읽고
거듭 읽으면서
비로소 이야기를 짚어 보았습니다.
찬찬히 헤아리면서 즐겁게 만나시겠지요?
이대로도 좋은 시집일 테지만
조금 더 쉽게 말결을 살려 보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보았어요.
 
꿈결에 시를 베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26
손세실리아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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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26


노래하는 어머니 곁에 노래하는 딸아이
― 꿈결에 시를 베다
 손세실리아
 실천문학사, 2014.10.13.


다시 태어나도 아빠와 결혼하겠느냐는
아이의 질문에 한참을 묵묵……하다가
다른 건 몰라도 너랑은 만나고 싶어
에둘러 답했더니
자긴 안 된다며 난감해 한다 이유인즉
이십여 년 전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서
있는 힘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란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우승 부상이 엄마인 이유로
필사적 질주 끝에 월계관은 썼지만
그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숨이 차고
무릎도 써금써금하다며
이런 몸으로 재출전은 무리라 너스레다 (나를 울린 마라토너/26쪽)


  제주 조천에서 ‘시인의 집’을 꾸리는 분이 있습니다. 시를 만나고 시로 쉬면서 시를 누릴 수 있는 보금자리를 꾸리는 이분도 시인입니다. 제주에서 바닷바람과 함께 빛나는 《꿈결에 시를 베다》(손세실리아, 실천문학사, 2014)를 찬찬히 읽어 봅니다.

  손세실리아 시인은 이녁 딸아이가 스무 해쯤 앞서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힘을 다 썼노라 밝힐 적에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저도 이 시를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습니다. 시인네 딸아이가 마라톤 대회에 나간 적이 있다면 마흔 살쯤 되려나 어림했는데, 가만히 읽고 보니 마라톤 대회란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려고 작은 씨앗으로서 달린 일’을 빗대는 말이더군요.

  시로 살아가는 어머니 곁에서 딸아이도 시를 쓰듯, 삶을 노래하는 말을 들려주는구나 싶어요. 어쩌면 그럴 테지요. 어버이가 어떤 삶을 짓느냐에 따라 아이가 짓는 삶이 달라질 테니까요.


조천 사람 앉은자리에 검질도 안 난다기에
내심 각오하고 있었는데 웬걸
폐가 내치지 않고 깃든 일 높이 사
푸성귀 등속 문고리에 걸어놓곤
행여 들킬세라 어기적어기적 내빼는
속 깊고 귀 먼 유지 할망 (텃세/36∼37쪽)


  “우리 모두 시를 써요”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이제는 흙이 된 어느 어르신이 남긴 책에 붙은 이름인데, 시인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시를 쓸 노릇이 아니라, 모든 아이가 즐겁게 시를 쓸 수 있고 시를 쓸 노릇이며 시를 써서 생각을 키우고 하루를 빛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을 받아서 조금 더 헤아려 봅니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누구나 시를 쓸 만하지 싶어요.

  학교를 오래 다녔든 학교 문턱을 못 밟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책을 써냈듯 책을 쓴 적 없든 대단하지 않아요. 이른바 등단을 안 했더라도 누구나 시를 쓸 만합니다. 잔치마당에서 저마다 시를 한 줄씩 써서 돌아가면서 읊을 수 있어요. 새해를 맞이하면서 온식구가 저마다 시를 하나씩 써서 돌아가면서 읽을 수 있어요.

  봄에는 봄맞이노래처럼 시를 써서 나눌 만합니다. 여름에는 여름맞이노래를, 가을에는 가을맞이노래를 시로 쓸 수 있어요. 겨울을 떠나 보낼 적에는 겨울배웅노래로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몸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암록색 해조류인 몸말예요
남쪽 어느 섬에서는 그것으로 국을 끓이는데요
모자반이라는 멀쩡한 명칭을 놔두고 왜 몸이라 하는지
사람 먹는 음식에 하필이면 몸을 갖다 붙였는지
먹어보면 절로 알아진다는데요 (몸국/68쪽)


  노래하는 마음으로 삶을 돌아볼 줄 안다면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된다고 여깁니다. 꿈꾸는 마음으로 살림을 가꿀 줄 안다면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 되어 어깨동무를 한다고 여깁니다.

  모자반을 모자반이라 해도 좋고, ‘몸’이라 해도 좋겠지요. 누구는 ‘몸’보다는 ‘맘’이라는 소리로 모자반을 가리킬 수 있어요. 몸이랑 맘 사이인 ‘뫔’이라 할 수 있을 테고요. 몸도 맘(마음)도 함께 헤아린다는 뜻으로 ‘뫔’을 쓰면서 몸국을 모자반국을 뫔국을 따뜻하며 넉넉히 나눌 수 있습니다.


잊었는지 모르겠다만
나도 너 그렇게 키웠다 (벼락지/75쪽)


  어버이가 시인으로 살기에 아이가 시인으로 산다면, 이제 늘그막 길을 걷는 시인네 어머님도 시인으로 살겠지요. 시인네 어머님은 어느 날 문득 한 마디를 들려줍니다. “잊었는지 모르겠다만 / 나도 너 그렇게 키웠다”면서, 저잣거리나 길거리에 자리를 펴고 장사를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리고 키우셨다지요.

  굵고 짧은 한 마디인데, 이 말마디도 삶노래입니다. 삶을 노래하는 싯말 한 줄입니다. 삶을 노래하여 하루를 되새기는 포근한 싯말 한 가락입니다.


단골 서점이 문을 닫았다
시는 모든 예술의 기초라며
베스트셀러 자리에 시집 진열을 고수하던
서점주의 무릎뼈가
대형유통업의 일격에 우두둑 꺾인 게다 (시집 코너에서/94쪽)


  누구나 시를 쓰는 나라를 그려 보고 싶습니다. 대학입시를 앞둔 아이들도 아침에 시를 읽고, 대학입시를 이끄는 교사도 교과서보다 시집을 먼저 펼 수 있는 나라를 그려 보고 싶습니다. 대학입시 문제에 시짓기가 있어서, 객관식도 주관식도 논술도 아닌, 그저 수수하게 제 삶을 적는 시 한 줄을 노래하도록 달라지는 나라를 꿈꾸어 보고 싶습니다.

  이웃나라 대통령이 찾아올 적에 이 나라 대통령이 한글로 적은 시를 건네면서 이를 영어나 이웃나라 말로 옮겨서 읊어 줄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을 그려 봅니다. 하늘을 노래하고 땅을 꿈꾸며 서로 사랑하는 살림자리를 기릴 줄 아는 즐거운 시 한마당을 골골샅샅에서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꿈결에 시를 베고, 꿈결에 사람을 생각하는, 고운 숨결로 다시 태어나는, 기쁜 보금자리를 이루겠지요. 작은 새들이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서 아침을 노래합니다. 2018.3.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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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는 항구다 창비시선 364
박형권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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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27



한숨에 지는 하루

― 전당포는 항구다

 박형권

 창비, 2013.7.25.



엄마는 아직도 밥집 꿈을 꾸는지

김밥 두 줄! 순두부 하나! 잠꼬대를 하는 아침

오늘도 아빠는 사발면 하나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너를 우리의 살림으로 초대하는 일이

늘 이 모양인 나는 대체 어느 나라 아빠이냐 (아빠의 내간체, 녹말중독자/10쪽)


로또 하면 인생 확 바꿀 돈 만원을 가지고

자반고등어 한손 사고 참치 캔과 두부 한 모 사니

에누리 없이 똑 떨어진다 (〈뷰피플 플라워〉를 지나가고 있다/26쪽)


방세 두어달 밀리고 공과금 고지서는 쌓여만 가는데

죽을 땐 죽더라도 삼겹살 몇 덩이 씹어보고 싶어서

전당포 간다

육질이 쫄깃했던 내 젊음은 일회용 반창고처럼 접착력이 떨어져

오늘 하루 버티는 일에도 힘껏 목숨을 건다 (전당포는 항구다/78쪽)



  한숨을 쉬는 그때 하루가 지더군요. 한숨을 쉬지 않는 날에는 하루가 지지 않아요. 한숨하고 함께 사그라드는 하루요, 한숨이 아닌 한사랑으로 새롭게 가꾸는 하루이지 싶습니다.


  주머니가 텅 비었기에 한숨을 쉴 만하지 않습니다. 주머니에 10원이 있대서, 100원이 있대서 1000원이 있대서 10000원이 있대서 한숨을 쉴 만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머니에는 돈이 얼마쯤 있어야 비로소 한숨을 그칠 만할까요. 우리 주머니에 돈이 아무리 철철 넘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한숨에서 헤어날 길이 없지는 않을까요.


  시집 《전당포는 항구다》(박형권, 창비, 2013)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숨이 가득합니다. 도시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그림이 하나하나 흐릅니다. 어쩌면 시인은 이 같은 가난이 괴로울 수 있고, 어쩌면 시인은 이 같은 가난을 늘 글로 옮기면서 글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가난살림인 터라 이 하루를 그대로 글로 옮겨서 시도 되고 시집도 되어요.


  짓는 하루에는 한숨이 없습니다. 짓는 하루에는 땀방울이 똑똑 떨어지면서 새롭게 솟는 기운이 흐릅니다. 짓는 하루에는 날마다 즐겁게 지피면서 자라는 꿈이 있습니다. 시인은 시집에 한숨살이를 잔뜩 적바림했습니다만, 이 한숨 저쪽에 있는 웃음이 틀림없이 넓고 고우리라 생각합니다. 2018.3.4.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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