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 개정판 민음의 시 43
손진은 지음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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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26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손진은

 민음사

 1992.4.30.



  오늘 우리가 잃거나 잊은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는 손짓기입니다. 먼저 사랑을 손수 짓는 길을 잃고, 삶을 손수 짓는 길을 잃으며, 마을이며 집을 손수 짓는 길을 잃습니다. 이러다가 옷이나 밥을 손수 짓는 길을 잊고, 노래랑 말이랑 이야기를 손수 짓는 길을 잃더니, 꿈하고 생각을 손수 짓는 길을 잊습니다. 옛날이 더 좋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얼마 앞서까지 우리는 누구나 집이나 옷이나 밥뿐 아니라, 삶도 사랑도 꿈도 손수 짓는 나날이었습니다.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를 읽으며 숲을 얼마나 설레게 돌아볼 만할까 하고 헤아리는데, 막상 숲을 다루는 글은 드뭅니다. 책이름에 낚였나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오늘날 이 나라 터전이야말로 이 모습 그대로이지 싶어요. 숲을 밀어내어 시멘트를 때려붓는 아파트를 잔뜩 지으면서 ‘푸른 마을’이란 이름을 붙이잖아요? 마구 삽질을 해대면서 ‘그린’이란 영어까지 끌어들여요. 큰 핵발전소를 더 짓거나 송전탑을 자꾸 박거나 바다나 갯벌에 위해시설까지 끌어들이려 하면서 ‘청정’이란 한자말을 붙이더군요. 시가 좀 투박하면 좋겠습니다. 문학이 참말 수수하게 풀내음이며 숲내음이 흐르기를 바라요. ㅅㄴㄹ



바람이 불 때 / 우리는 다만 가지가 흔들린다고 말한다 / 실은 나무가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시/15쪽)


바다로 가려다가 산을 택했다 / 오랜만에 벗어났음인지 모두들 싱글벙글 / 두 손을 입에 대고 야 하고 소리치니 / 저쪽 산이 야아아 되받는다 (메아리/54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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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결 2019-10-03 11:17   좋아요 0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구매해주시고 정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자(와 그의 아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비시선 91
정희성 지음 / 창비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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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25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창작과비평사

 1991.4.10.



  누가 저더러 ‘열 몇 해째 개인도서관을 하는데 어렵지 않나요?’ 하고 물으면 으래 되묻습니다. ‘사회에 맞추어 쳇바퀴로 도는 하루가 어렵지 않나요?’ 퍽 자주, 게다가 오랫동안 돈이 바닥난 적이 있었는데, 돈이 바닥나면 돈이 바닥났구나 하고 여겼고, 돈이 없으면 돈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를 ‘어려움’이라 여기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웃으면 웃는다고 여기고, 춤추면 춤추네 하고 여깁니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읽습니다. 여기 있는 마음이 저기로 흐릅니다. 저기 있는 마음이 이곳으로 흐릅니다. 제가 짓는 손길은 이웃한테 다가가고, 이웃이 가꾸는 손길은 어느새 저한테 꽃으로 피어납니다. 함께 짓습니다.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짓기도 하지만,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꿈을 바라보면서 씩씩하게 한 걸음씩 내딛기에, 이러한 몸짓이 어느새 모여 새롭게 숲이며 마을이며 둥지를 이루는 즐거움이 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줄 느끼면서 서로 다른 숨결을 보듬는 길을 헤아립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저마다 꿈을 가슴에 품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면서 홀가분하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 별에서 삶을 짓습니다. ㅅㄴㄹ



헷갈리지 마라, 아무리 생각해도 / 확실하지 않은 것은 / 한국어가 아니다 (넋두리/31쪽)


시는 아무래도 내 아내가 써야 할는지도 모른다 / 나의 눈에는 아름다움이 온전히 / 아름다움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 박종철 군의 죽음이 보도된 신문을 펼쳐 들며 / 이 참담한 시대에 /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 살아 남기 위하여 죽어 있는 나의 영혼 (눈보라 속에서/42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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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산식당 옻순비빔밥 모악시인선 2
박기영 지음 / 모악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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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24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박기영

 모악

 2016.7.29.



  냇물마다 맛이 다릅니다. 물살도 다르고, 물빛도 달라요. 어느 골짜기나 들판을 적시는 물줄기이든 그 고장 삶결이나 숲살림에 따라서 모두 다릅니다. 수돗물도 고장마다 맛이 다르지요. 다만 수돗물마다 다른 맛은 싱그럽거나 푸른 숨결로 다른 맛은 아닙니다. 고장마다 어떤 곳에 파묻힌 시멘트나 플라스틱 물줄기를 거쳐서 오느냐에 따라 다르고, 물꼭지가 얼마나 낡거나 새것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을 읽습니다. 글쓴이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글쓴이한테 보여준 여러 멧살림 사냥살림 이야기가 흐릅니다. 멧골을 누비며 손수 잡은 꿩을 하나하나 손질해서 넣고 끓인 칼국수란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맛이겠지요. 두멧자락 숲맛 바람맛 손맛 살림맛이 고이 흐르는 맛일 테니까요. 글 한 줄에는 줄거리만 있지 않습니다. 오늘 이 글줄에 줄거리가 서리기까지 걸어온 길마다 아른아른 묻어난 삶결이 낱낱이 함께 있습니다. 두고두고 새기고 싶어서 마음에 얹은 이야기는 노래로 태어나고 글맛으로 피어납니다. 언제까지나 흐를 글줄은 어제하고 오늘이 섞인 새로운 하루로 자리잡습니다.



아버지가 낚시로 꿩을 거두어 온 날은 / 칼국수를 먹었다. // 생콩에 숨겨둔, 외줄낚시에 붙잡혀 / 하늘을 끌고 잡혀온 짐승. // 별점이 박힌 껍질 벗겨내면 / 붉은 겨울 살 / 새콤한 얼은냄새 풍기고. (꿩낚시/18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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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예수 문학과지성 시인선 R 14
김정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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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23


《황색예수》

 김정환

 문학과지성사

 2018.3.5.



  사내가 쓰는 글하고 가시내가 쓰는 글이 다릅니다. 두 삶이 다르니 두 글이 달라요. 그러나 두 삶이 같다면 두 글이 다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두 삶이 어깨동무를 할 적에도 두 글이 아주 다르지는 않습니다. 두 삶이 서로 아끼거나 사랑하거나 손을 맞잡을 적에도 두 글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1980년대에 처음 나온 《황색예수》는 2010년대 끝자락에 새옷을 입고 다시 나옵니다. 이 시집을 다시 읽어 보는데 새삼스레 거북합니다. 오직 사내이기에 쓰는 글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 대목에서도 예전에 이 시집이 마음에 안 들어왔습니다. 왜 사내인 글쟁이는 사내라는 굴레를 못 벗을까요? 아니, 안 벗을까요? “네 사내 불알처럼 참모습이 더러워 보이더라도” 같은 말마디는 ‘옳을’까요? 글 쓰는 사내는 왜 툭하면 ‘숫처녀’ 타령을 할까요? 왜 이렇게 ‘가시내 몸뚱어리’를 쳐다보려고 할까요? 모든 사람이 가슴에 하느님을 품는 고운 넋인 줄 안다면, 하얀예수도 까만예수도 누런예수도 저마다 아름답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살림을 지을 만하지 싶습니다. 사내들은 밥짓고 빨래하고 천기저귀 갈고 아이들이랑 놀고 배우면서 살림부터 할 노릇입니다. ㅅㄴㄹ



품에 안은 네 여자의 자궁처럼 진실이 추해 보이더라도 (188쪽)


숫처녀도 힘센 농자천하지대본 하늘을 찌를 듯 치솟는 (245쪽)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속속들이 / 아픔에 배여 흐느끼는 / 더러움에 물든 / 여인의 몸뚱어리? (379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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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료샤 2020-03-06 22:24   좋아요 0 | URL
저도 서점에서 읽어보고 혹시나 싶어 알라딘 들어와봤는데, 역시나 먼저 지적해주셨네요.... ‘자궁‘, ‘애기집‘, ‘젖가슴‘, ‘처녀성‘ 자연의 어머니화 등... 남성 시인들이 전형적으로 보이는 성적대상화, 창녀/성녀 도식이 보이더군요. 시집 출간년도가 80년대임을 감안하더라도 참 불편하네요. 그 세대 멘탈리티를 읽는 느낌.

숲노래 2020-03-06 23:04   좋아요 0 | URL
이분뿐 아니라 90년대 시집까지 이런 시가 넘쳐났어요. 게다가 이런 시를 쓴 분들이 대학교에서 교수가 되었고, 신춘문예를 비롯한 온갖 문학상을 심사하며, 문화예술 쪽에서 공공지원금 집행을 심사하는 자리까지 맡아요. 이런 오래된, 그리고 ‘낡은‘ ‘남자 어르신 문인‘을 만나야 하는 자리가 있으면 으레 그 대목을 그분들 코앞에서 비판해 왔는데, 이분들 스스로 ‘시와 소설 같은 문학은 그렇게 표현해야 한다‘고 여기시고, 이분들 곁에서 맴도는 후배 작가와 부교수나 시간강사, 또 이분들한테서 추천받은 후배 문인들은 입을 꾹 다물더군요.

지나간 낡은 세대 멘탈리티로 끝이 아니라, 오늘도 고스란히 문단권력으로 이어지는 모습입니다. 덧붙인다면, ‘어른시‘뿐 아니라 ‘동시‘판도 이와 비슷하더군요.
 
별과 민들레 가네코 미스즈 전집 1
가네코 미스즈 지음, 서승주 옮김 / 소화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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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22


《별과 민들레》

 가네코 미스즈

 서승주 옮김

 소화

 2015.2.17.



  마을길을 걷던 아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꽃잎을 줍습니다. 꽃잎이 떨어진 지 꽤 되었을 텐데 안 시들었다며 웃음으로 반깁니다. 아이는 머리에 꽃잎을 꽂아 보려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이러다가 저더러 머리를 대라고 하더니 제 머리 한쪽에 꽃잎을 꽂아 줍니다. 꽃아이는 아버지를 꽃아버지로 바꾸어 놓습니다. 《별과 민들레》에 흐르는 상냥한 숨결을 한 줄 두 줄 읽습니다. 별하고 민들레뿐 아니라, 물결하고 구름도, 제비하고 풀벌레도 모두 상냥하게 마주하면서 노래가 저절로 태어납니다. 따로 솜씨를 부릴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부를 노래는 별이 가르쳐 줍니다. 민들레하고 물결하고 구름도 우리한테 노래를 가르쳐요. 제비하고 풀벌레도 언제나 노래를 가르치고 들려주면서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이 부르는 놀이노래는 별노래요 꽃노래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놀이노래를 듣는 어른들은 새삼스레 살림노래를 부르고 일노래를 부르며 자장노래에 꿈노래에 기쁨노래까지 짓습니다. 이야기가 돌고 돕니다. 부드러우면서 따스한 숨결이 온누리에 고루 퍼집니다. ㅅㄴㄹ

  


파란 뽕나무 잎새 / 먹으면서, // 누에는 하얗게 / 되었습니다. // 빨간 뽕나무 열매 / 따먹으면서, // 나는 까맣게 / 햇볕에 그을렸습니다. (뽕나무 열매/125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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