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 지혜사랑 시인선 103
김태암 지음 / 지혜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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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53


《박정희 시대》

 김태암

 지혜

 2014.2.12.



  아는 사람은 압니다. 모르는 사람은 모릅니다. 아는 사람은 더 알려고 하며,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채로 있기 일쑤입니다. 아는 사람은 왜 더 알려고 마음을 기울일까요. 모르는 사람은 왜 모르는 채 머물려고 할까요. 때로는 밥벌이 때문에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고, 밥그릇을 지켜야 한다며 안 알려고 합니다. 때로는 삶을 찾으려는 뜻으로 더 알겠다며 나서고, 가슴에 사랑을 고이 품으면서 모르쇠짓을 그만둡니다. 《박정희 시대》는 군사독재 사슬에서 느끼거나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늘날에도 끊어지지 않는 고리를 시로 풀어내려 합니다. 허술하거나 느슨한 이야기라든지, 덜 여물었구나 싶은 대목이 보이기도 하는데, 가만 생각하니 군사독재를 군사독재라고 오롯이 밝히는 시가 얼마쯤 있나 싶습니다. 낡은 군사독재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사그라들지 않고 남은 군사독재를, 이런 윽박질에서 비롯하는 가부장권력을 먼저 스스로 떨쳐내는 사내는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열린 눈으로 서로 바라볼까요? 우리는 눈을 활짝 열고서 마음이며 머리도 활짝 열려는 몸짓일까요? 아름다운 삶을 바라려면 스스로 아름다운 눈이자 손이자 발이자 입이자 귀가 되어야지 싶습니다. 낡은 옷과 말을 털고서, 날개옷하고 날개말을 펼 때입니다. ㅅㄴㄹ



수소 원자가 태초에 하늘이 열리던 날에 그냥 하늘이었다고 말한다. / 하늘에 하늘을 만들고 땅에 두려움을 만들고 / 윽박지르며 휘두르고 (타볼라 라사 2/19쪽)


나라가 그들에 의하여 지탱된 듯, 애국하는 양 / 얼굴 없이 일해온, 많은 사람들의 노고 가로채고 / 뒷전 시궁창, 야금야금 챙기고, 지키려고 / 정당화한 독재, 빨갱이로 몰아붙여 재미 본, 시궁쥐 (박정희 시대 3-빨갱이 서울시장/39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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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물감상자 창비시선 132
강우식 지음 / 창비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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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54


《어머니의 물감상자》

 강우식

 창작과비평사

 1995.5.10.



  붓으로 살며시 움직이니 그림이 태어납니다. 붓으로 슬슬 더 움직이니 그림이 살아납니다. 나뭇가지로 흙바닥을 그으니 그림이 나타납니다. 나뭇가지로 이리저리 흙바닥을 더 그으니 그림이 춤춥니다. 붓을 잡은 이도 나뭇가지를 쥔 이도 그림을 그립니다. 종이가 있어도 그림이고, 종이가 없어도 그림입니다. 《어머니의 물감상자》를 넘기며 시쓰기하고 그림그리기를 맞물려서 헤아립니다. 누구나 소리를 내어 말을 할 수 있고, 이 말소리는 저절로 노래가 되기도 하고 잔소리로 그치기도 하며 그냥 소리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시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시이기도 하고, 시집으로 묶기에 시집이기도 하지만, 시나 시집을 모르면서도 날마다 시를 펴고 시집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말로 아침을 열까요. 우리는 어떤 말소리로 하루를 누릴까요. 우리는 어떤 말씨로 노래를 읊으며 밤을 맞이할까요. 시라는 이름으로 태어나는 글은 퍽 많으나, 막상 시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글은 어디에 있을까 아리송합니다. 시를 대학교에서도 가르치고, 시 한 줄을 놓고 큰돈을 내놓기도 하는데, 정작 노래가 되어 흐르는 글은 어디에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모두 허깨비 아닌가 싶습니다. ㅅㄴㄹ



이 산문 아래에 와 / 마시는 한잔의 소주는 / 열반이다. // 머릿속은 月印千海의 물결로 황홀타. (낙산사吟/112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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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박남수 / 미래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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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38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박남수

 미래사

 1991.11.15.



  노래는 노래하는 가슴에서 흐릅니다. 춤은 춤추는 손길에서 피어납니다. 이야기는 이야기하는 눈에서 빛납니다. 모두 그렇습니다. 다른 데에서 오는 노래나 춤이나 이야기란 없습니다. 노래하고 춤하고 이야기를 생각하고 품으며 나누는 사람들이 선 자리에서 바로 노래랑 춤이랑 이야기가 자랍니다.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을 읽으면, 어디인지 스스로 모르지만 어렴풋이 느끼는 이야기를 노래하는 한 마디 두 마디가 이슬처럼 어우러져서 흐르는구나 싶습니다. 굳이 꾸미거나 애써 덧바르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에 흐르는 말을 고스란히 옮기면 됩니다. 이렇게 손질하거나 저렇게 보태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에 살포시 얹는 꿈을 말로 풀어내면 됩니다. 시란 어렵지 않습니다. 꽃밭에 뛰어들어 꽃이 되는 몸짓을 고스란히 적으면 시입니다. 시란 대단하지 않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잎처럼 우리 몸을 바람에 날려서 이 느낌을 낱낱이 적으면 시입니다. 할머니가 꽃씨를 받는 손길대로 쓰기에 시요 노래이며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꽃송이를 쓰다듬으면서 반갑다고 속삭이는 마음길대로 쓰기에 시이자 노래이자 이야기예요.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 시를 잃었을까요? 우리는 언제쯤 이런 시를 되찾을까요? ㅅㄴㄹ



꽃밭에 뛰어들면 / 꽃이 되고 / 날리어 흐르는 바람의 수염. / 푸른 하늘에 / 걸리어선 / 나부끼는 기폭이 되다가, (바람/20쪽)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 방공호 위에 / 어쩌다 핀 /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24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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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밥도둑 창비시선 109
심호택 지음 / 창비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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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37


《하늘밥도둑》

 심호택

 창작과비평사

 1992.12.15.



  숱한 사내들이 으레 잊고 사는데, 사내 곁에 있는 가시내는 하느님, 곧 여신이지 싶습니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숨결을 따스히 사랑하며 보드랍게 어루만질 줄 아는 하느님이 바로 가시내이지 싶으나, 이를 사내들은 으레 잊거나 모르지 싶습니다. 사내들이 이를 일찍부터 느끼거나 깨닫거나 배운다면, 살림하는 하느님 곁에서 살림을 배워 함께 살림을 짓겠지요. 아이를 돌보는 하느님 곁에서 아이를 같이 돌보는 하루를 배우며 보금자리를 가꾸겠지요. 《하늘밥도둑》에 나오는 조그만 사내 이야기에 웃음이 납니다. 글쓴이는 “쪼그만 가시내 하나 때문에”라고 말합니다만, 쪼그만 가시내 아닌 “하느님 한 분”이었겠지요. “여신 한 분”이었을 테지요. 하느님 곁에서 따스한 사랑을 배우고 싶어, 하느님 가까이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살림을 노래하는 길을 받아들이고 싶어서, 그렇게 “어푸러지며 고꾸라지며 달려”갔을 테지요. 사내들은 이런 마음하고 몸짓을 잊지 말아야지 싶습니다. 나이가 어리건 나이가 들건,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야 즐거우며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야지 싶습니다. 온누리 사내가 즐거우며 아름다운 사랑으로 나아갈 적에, 땅강아지도, 그러니까 하늘밥도둑도 조용히 다시 깨어나리라 봅니다.



우리들 한 뜨락의 작은 벗이었으니 / 땅강아지, 만나면 예처럼 불러주련만 / 너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하늘밥도둑/12쪽)


쪼그만 가시내 하나 때문에 / 예배당 종소리 한번도 안 놓쳤다 / 만날 수 있을까 / 새벽 잠 떨치고 / 눈구렁 헤치며 달려갔다 // 그로부터 이십년 / 나는 나에게 묻는다 / 오늘도 그 종소리 들려오냐고 / 어푸러지며 고꾸라지며 / 달려갈 거냐고 (이십년 후/100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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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97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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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35


《게 눈속의 연꽃》

 황지우

 문학과지성사

 1990.12.1.



  어른들은 쉬 잊지만, 집에 텔레비전이 있으면 어른도 아이도 텔레비전을 바라봅니다. 집에 책이 있으면 어른도 아이도 책을 보아요. 집에 꽃이 있으면 어른도 아이도 꽃을 보고, 집에 밭이 있으면 어른도 아이도 밭을 볼 테지요. 아이들 눈길하고 배움길은 늘 어른 하기 나름이라고 느낍니다. 어른 스스로 어떤 사람으로 새롭게 자라려느냐 하는 생각에 따라 아이들 삶이 달라지지 싶어요. 《게 눈속의 연꽃》을 읽다가 글쓴이 집에 있는 텔레비전을, 또 이 텔레비전에 멍하니 빠져든 아이들 모습을 그립니다. 텔레비전을 치우고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할 생각을 했다면,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한테서 배우는 살림을 지었다면, 아마 ‘다른 시’를 썼으리라 봅니다. 서울하고 인천을 오가는 전철을 탄 글쓴이는 동냥하는 장님 어비아들을 마주하는데, 지켜보기만 했을는지 동냥그릇에 쇠돈 몇 푼 넣었을는지에 따라 ‘다른 시’를 쓰겠지요. ‘인천-서울’ 전철을 오래 길게 탔던 저는 동냥그릇에 돈닢 넣어 주는 분을 드물게 보았습니다. 제 주머니에 있던 책 살 돈을 슬그머니 넣곤 했으며, 때로는 버스삯을 털어넣고서 집까지 걸어가곤 했습니다. 전철이 ‘사상’을 싣고 다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싣지 않을는지요? ㅅㄴㄹ



그렇게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해도 / 그래서 스위치 꼭지를 빼어 감춰버렸는데도 / 아이들은 어느새 / 앉아서 / TV를 禪하고 있다 / TELEVISION (아이들은 먼 것을 보기를 좋아한다/76쪽)


전철은 사람을 싣고 서울로 오지만 / 빈 전철은 사상을 싣고 인천으로 간다 / 盲人 父子가 / 내 主를 가까이 / 를 부르며 / 내게 가까이 온다 (인천으로 가는 젊은 성자들/78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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