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애인 시인동네 시인선 35
이은유 지음 / 시인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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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72


《태양의 애인》

 이은유

 시인동네

 2015.10.30.



  내가 스스로 바람이라고 느끼면 바람이 되더군요. 내가 스스로 꽃이라고 여기면 꽃이 되고요. 내가 스스로 바보라고 느끼니 참말로 바보요, 내가 스스로 멍청하다고 여기니 그야말로 멍청해요. 마구마구 먹는대서 살이 찌지 않네요. 며칠뿐 아니라 열흘 넘게 안 먹는대서 살이 빠지지 않고요. 스스로 마음에 어떤 씨앗을 생각으로 심느냐로 갈리는 하루요 삶이라고 느낍니다. 마음을 노래하는 글인 시 한 줄도 이와 같다고 여겨요. 《태양의 애인》을 읽으며 ‘태양’ 아닌 ‘해’라는 낱말을 제 마음에 심고, ‘애인’ 아닌 ‘사랑님’이라는 낱말을 제 생각에 놓습니다. 해를 사랑하는 님을 먼발치에서 찾을 수 있으나 저부터 스스로 해를 사랑하는 님이 되자고 추스릅니다. 해를 사랑하면서 해다운 글을 쓰고, 해를 사랑하듯 보금자리를 이루는 숲이 되도록 살림을 건사하자고 아이들한테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어느 날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이렇게 속삭여요. “아버지는 꽃을 좋아해서 꽃아버지야.” 하고. 이름으로만 꽃아버지가 아닌, 삶이며 살림이며 사랑으로 꽃사람이 되기로 합니다. 걸음걸이에 꽃송이가 묻어나는 꽃걸음을 딛고, 말마디마다 눈부시게 피어나는 꽃말을 노래하기로 합니다.



집안의 딱지처럼 굳은 먼지를 발견하는 데 십 년이 걸렸다 / 처음엔 흰 날개로 부유하다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을 먼지들 / 쌓이고 쌓여서 회색으로 변한 포개어진 먼지들 (먼지의 힘/24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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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황학주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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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52


《루시》

 황학주

 솔

 2005.6.15.



  사내라는 몸을 입은 시인·소설가는 가시내 몸을 아무렇게나 휘젓듯이 글을 써댔습니다. 이런 지 꽤 됩니다. 예전에는 사내가 우격다짐이나 주먹힘으로 이런 글힘을 부렸다면, 이제 이런 우격다짐이나 주먹힘이 듣지 않는 때가 되었는데, 아직 이런 낡은 글이 썩 사라지지 않아요. 《루시》라는 시집을 읽으며 내내 거북했습니다. 이런 글도 시라는 이름을 달고서 쓰고, 시집이라는 옷을 입고 태어나도 될 만한가 아리송했지만, 여태 한국문학이 이런 꼴이었어요.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불알처럼 아름답게 올라가는 별”이라고 어느 가시내 시인이 글을 썼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내라는 시인은 아무렇지 않게 참말로 자주 “젖가슴처럼 아름답게 올라가는 달” 같은 글을 씁니다. 이 시집이 비록 2005년에 나왔다고 둘러댈 수 있지만, 2005년이라는 때에도 아직 이런 글을 썼다는 대목을 보아야지 싶어요. 오늘날에는 어떤 글을 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야간업소’ 이야기를 왜 시라고 하는 글에 담으려 할까요? 술을 들이켜야만, 또 밤일을 하는 술집에 찾아가서 술을 부어야만 시가 태어날까요? 시에 드러난 터전이란 시인이 지켜보거나 살아가거나 생각하는 자리입니다. 밝은 곳도 어두운 곳도 없습니다. 길을 찾을 일입니다. ㅅㄴㄹ



젖가슴처럼 아름답게 올라가는 / 달이 들어간 구석 / 슬픔을 냄비처럼 손바닥으로 감싸 안고 / 누이와 밴드마스터들은 야간업소에서 시장으로 흘러나오고 / 건더기 채로 돌아다니는 추운 건달들도 / 안으로 하나씩 달을 매달고 그만 자러 들어가는 (달방/60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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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문학동네 시집 3
이정록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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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51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이정록

 문학동네

 1994.8.18.



  오늘부터 셈을 해서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앞서 쓴 글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요? 부끄럽거나 창피할까요? 새삼스럽거나 새로울까요? 낯설거나 낯익을까요? 우리가 지난 스무 해나 서른 해에 걸쳐 꾸준히 거듭나거나 배우면서 자랐다면, 지난 자취를 적은 글이 부끄러울 수 있지만, 새로울 수 있습니다. 누구나 처음 배울 적에는 어설프거나 어수선하구나 하고 느끼기도 하고, 누구라도 아직 모를 적에는 헛다리를 짚거나 헛발질을 하는구나 하고 깨닫기도 해요.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를 읽으면서 시쓴이 오늘날 시를 가만히 맞댑니다. 스물 몇 해라는 나날이 벌어지는 글줄이지만 이동안 한결같은 숨결이 있고, 이사이에 바뀐 숨결이 있어요. 아직 가난하던 무렵에는 어떤 꿈을 꾸는지 새삼스레 돌아보고, 이제 꽤 넉넉하지 싶은 살림을 꾸리면서 어떤 꿈을 다시 꾸는지 하나하나 헤아립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걸을까요? 풋내기요 가난하면서 서툴거나 어수룩하던 날에는 무엇을 그리고, 차츰 익숙해지고 살림을 펴며 솜씨가 느는 동안에는 무엇을 그리나요? 묵은 글을 읽으며 새로운 길을 엿보고, 새로운 길을 가다듬으며 지난날을 되새깁니다. 어제하고 오늘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하고 모레는 그리 안 벌어집니다. 늘 마음으로 하나입니다. ㅅㄴㄹ



연탄가스 심한 월세방에서 / 드디어 전세로 옮긴 아내는 / 보일러 작동법을 배우며 목련꽃처럼 웃는다 / 베란다에 빨래도 널고 / 조그만 서재도 꾸미며 / 이삭 벤 벼포기처럼 자랑스럽다 (집/35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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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8
서정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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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73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서정학

 문학과지성사

 2017.5.30.



  젊다는 이하고 늙다는 이가 쓴 시를 문득 돌아보면, 젊다는 이는 시마다 영어를 한두 마디씩 어떻게든 섞는구나 싶고, 늙다는 이는 시마다 한자를 드러내어 요리조리 섞는구나 싶습니다. 젊다는 이는 영어를 섞으며 가볍다거나 틀을 깨겠다는 다짐으로 보인다면, 늙다는 이는 한자를 섞으며 묵직하다거나 틀을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쪽을 보든 저쪽을 보든 글치레에 너무 얽매인 나머지 정작 시라고 하는 노래는 잘 안 보이기 일쑤입니다.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를 읽으며 내내 영어에 치입니다. 달리 본다면, 이 시집에 실린 영어에 치인다기보다, 우리 삶터가 이런 흐름이니 시인도 이런 흐름을 고스란히 담는구나 싶어요. 늙다는 이는 예전에 예전 삶터 흐름대로 한자를 신나게 드러내어 시를 썼지요. 다시 말해서, 삶터가 아늑하거나 따스하거나 사랑스럽다면, 시를 쓰는 이들 글결도 달라지겠지요. 다만 삶터가 이러거나 저러거나 시라고 하는 글을 쓰는 이는 삶터 흐름에만 따르거나 휩쓸리기보다는 스스로 새롭게 흐름을 지을 줄 안다면 반갑겠습니다. 남들이 다 그러하니까 시도 그러려니 하고 따르는 발걸음이 아니라, 서로 즐거이 부를 노래를 스스로 새로 일구어 가만히 펴는 손길이 될 노릇이지 싶습니다. ㅅㄴㄹ



물을 붓고 3분만 기다리면 바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에 떨리는 손으로 봉지를 뜯었다. 날은 추워지고 또 몸은 젖었으니 그것밖에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인스턴트 사랑주스/17쪽)


스무 개가 겨우 천 원이라는 상상 초월 대박 가격에 모든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61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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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동자 창비시선 66
고은 지음 / 창비 / 198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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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50


《네 눈동자》

 고은

 창작과비평사

 1988.3.20.



  예전에 어떤 길을 걸었든 오늘 새롭게 길을 걷는다면, 지난 자취를 떨쳐낸 즐거우면서 고운 발걸음이 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누가 옛자취를 캐묻거나 따지면서 손가락질을 한다면 넙죽 절을 하면서 새삼스레 잘못을 빌고 더욱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겠지요. 《네 눈동자》라는 시집은 1988년에 나왔다 하고, 이 시집에 적힌 고은 시인 딸아이 고차령은 세 살이라 합니다. 이 시집을 읽으면 딸아이 이야기가 꽤 자주 나오는데 퍽 구성집니다. 고은 시인은 이녁 딸아이를 마주하면서 틀림없이 모든 앙금이 스르르 풀리면서 아름다운 빛을 보았다고 느껴요. 그런데 으레 이때뿐, 집 바깥으로 나돌면서 두 손에 술잔을 쥐었다 하면 말썽을 일으켰구나 싶어요. 왜 술잔을 즐겁게 못 들고 말썽쟁이 손길로 들었을까요? 딸아이 보기에 아름다운 술잔이 되기는 어려운 노릇일까요? 앞하고 뒤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길이 시를 쓰는 사람 참모습일까요? 두 손에서 술잔을 떼어놓고서, 앙금이란 앙금은 씻으려는 마음이 되고서, 모든 부끄러운 걸음걸이를 뉘우치며 새로 태어나겠다는 몸짓이 될 때에 비로소 시 한 줄을 쓰는 이름을 얻으리라 봅니다. 하늘을 보고도, 딸아이를 보고도, 스스로 부끄러운 줄 모른다면, 그이는 뭘까요? ㅅㄴㄹ



여기 지는 잎새 하나 받을 만한 손바닥 없이 / 그저 맨바닥으로 / 이 땅의 자손 자라났다 / 수많은 술집 빈 적 없나니 (낙엽/17쪽)


세살짜리 차령이 / 아침마다 노래하누나 / 네가 먼저 일어나 / 노래하누나 / 뭐라고 / 뭐라고 노래하누나 / 잠든 아빠 들으라고 / 엄마 엄마 들으라고 / 잘도 노래하누나 / 그제서야 새 한 마리 두 마리 노래하누나 (노래/19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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