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시선 277
이시영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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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시읽기

노래책시렁 168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이시영

 창비

 2007.6.15.



  1995년부터 2020년에 이르도록 제가 하는 일을 ‘일칸(직업 기입란)’에 적어 넣지 못합니다.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 말꽃지음이(사전집필자), 갈무리지기(유고 정리자), 책숲지기(도서관장), 살림꾼(가정주부) 같은 일을 적을 만한 일칸이란 없습니다. 가만 보면 일칸에 ‘흙살림꾼(농부)’ 자리도 없습니다. 일칸은 언제나 큰고장에서 돈을 버는 자리만 다룰 뿐입니다. 아이를 돌보며 집안을 살피는 ‘살림꾼’은 왜 일이 아니라고 여길까요? 새벽을 여는 나름이를 비롯해 짐을 옮기는 나름이도 이제는 어엿이 일칸에 넣을 수 있어야지 싶어요.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를 읽으니, 노래님하고 술을 마신 사람들하고 얽힌 글자락은 퍽 푼더분하되, 다른 글자락은 먼발치에서 뒷짐을 서며 바라본 이야기이지 싶습니다. 뒷짐을 선대서 나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머리끈을 질끈 동이며 앞장서지는 않으며, 뒷자리에서도 얼마든지 노래를 부를 수 있어요. 뒤켠에도 삶이 있으며, 살림과 사랑으로 오늘을 녹여 노래로 빚을 만합니다. 그나저나 노래님은 일칸에 어떤 이름을 적어 넣었을까요? 시인? 창비? 교수? 이사장? 먼데보다 곁을 보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달빛이 대숲에 하얗게 부서져내리는 밤, 웬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방 창문 앞에 쿵 하고 무언가를 부려놓았다. 아버지 등에 업혀 시오릿길을 꼬박 걸어온 옻칠이 반지르르한 앉은뱅이책상이었다. (책상 동무/18쪽)


금강산에 시인대회 하러 가는 날, 고성 북측 입국심사대의 귀때기가 새파란 젊은 군관 동무가 서정춘 형을 세워놓고 물었다. “시인 말고 직업이 뭐요?” “놀고 있습니다.” “여보시오. 놀고 있다니 말이 됩네까? 목수도 하고 노동도 하면서 시를 써야지…….” 키 작은 서정춘 형이 심사대 밑에서 바지를 몇번 추슬러올리다가 슬그머니 그만두는 것을 바다가 옆에서 지켜보았다. (시인이라는 직업/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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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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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68


《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문학과지성사

 2004.8.27.


  저는 담배를 안 피웁니다.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은 담배짬을 안 누립니다. 그냥 일해요. 일하다가 숨을 돌리는 짬은 매우 짧다고 여길 만하지요. 둘레에서 “안 힘들어요? 좀 쉬지요?” 하고 묻고 “왜 힘들어야 해요? 저는 제가 쉬고 싶은 만큼 쉬어요.” 하고 대꾸합니다. 12월에 접어들어도 저는 반바지에 민소매를 걸칩니다. 그렇다고 긴소매에 긴바지를 안 입지 않아요. 해랑 날씨랑 바람에 따라 달리 입어요. 둘레에서 “안 추워요?” 하고 묻기에 “안 더워요?”로 대꾸합니다. 12월 저녁, 작은아이를 샛자전거에 태우고 반바지 차림으로 달립니다. 《사라진 손바닥》을 읽으며 ‘젊음이 간다’고 느끼는 노래님 마음을 문득 느낍니다. 몇 살 나이여야 젊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으레 서른이나 마흔 줄은 젊음이 아니라고 여기지 싶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보면 쉰 줄조차 아기로 여겨요. 서울살이라면 고작 스무 줄 언저리만 젊음으로 볼 뿐, 다른 나이는 어떠한 결인가를 헤아리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젊음은 몸 아닌 마음빛으로 헤아려야지 싶어요. 마음이 젊어야 젊음이요, 마음이 맑아야 맑음일 테지요. 손바닥에 꽃씨를 얹어 보면 좋겠습니다.



방에 마른 열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 책상 위의 석류와 탱자는 돌보다 딱딱해졌다. / 향기가 사라지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 그들은 향기를 잃는 대신 영생을 얻었을까. (풍장의 습관/16쪽)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연두에 울다/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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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밀의 시 - 어디 엔드레 시선집
어디 엔드레 지음, 한경민 옮김 / 최측의농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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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67


《모든 비밀의 시》

 어디 엔드레

 한경민 옮김

 최측의농간

 2020.7.20.



  무리를 짓는 이들은 이 무리를 지키고, 이 무리에 깃든 쪽을 서로 북돋웁니다. 둘레에 사납게 물결이 치기에 함께 맞서면서 살아가려고 무리를 짓기도 하지만, 둘레에 사납게 물결을 일으켜 그들만 주먹힘·돈·이름을 거머쥐려고 무리를 짓기도 해요. 무리짓기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끼리끼리 노는 이들은 저희 사이에 끼워 주지 않은 쪽을 등돌리거나 깎아내리거나 괴롭힙니다. 무리짓기는 마음에 따라 다르다지만, 끼리짓기는 처음부터 둘레를 나쁘게 보려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모든 비밀의 시》를 읽으며 ‘무리·끼리’는 어떻게 다른 사이일까 하고 한참 생각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끼리끼리 놀지 않고, 무리조차 짓지 않습니다. 사랑이기에 너른 품이 되어 한결같이 빛나는 마음입니다. 사랑길에서 조금씩 멀어질수록 끼리짓기나 무리짓기로 흐릅니다. 사랑이 아주 사라졌다면 우락부락한 끼리질·무리질로 너울대지요. 사랑이 어려울까요? 사랑으로 삶을 가꾸어 함께 나누면 나쁠까요? 다 다른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은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삶에 높낮이란 없고, 풀꽃나무를 높낮이로 줄세우지 못합니다. 노래를 부르려면 오직 사랑이어야 하고, 늘 사랑으로 빛나야 합니다. ㅅㄴㄹ



나는 뜨겁고, 욱신거리는 상처, 불타오른다. / 빛이 고통스럽게 하고 이슬이 고통스럽게 한다. / 나는 너를 원해, 너를 위해서 왔어. / 더 많은 고통을 갈망해, 너를 원해. (나는 불타는 상처/29쪽)


그래 나 죽어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겠지. / 겨우 두 여인이 / 알아차리겠지. // 한 사람은 우리 어머니, / 다른 사람은 다른 여인이겠지. / 울어줄 사람. (나의 두 여인/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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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절 창비시선 447
김현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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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65


《호시절》

 김현

 창비

 2020.8.10.



  일본을 거쳐 들어온 듯한 ‘소수자’란 말은 사랑 아닌 따돌림을 받는 사람을 가리키곤 하는데, 누구를 좋아하거나 어떤 길을 반기든, 으레 ‘작은이’가 걷는 ‘작은길’이 되기 마련입니다. 가시내가 가시내를 좋아하든, 서울 아닌 시골을 좋아하든, 커다란 책집이 아닌 마을책집을 좋아하든, 잘팔리는책 아닌 아름책을 좋아하든, 돈 많이 버는 자리 아닌 아름일을 좋아하든, 언제나 ‘작거나 낮은 길’입니다. 작은길을 왜 갈까요? 스스로 좋아서 가지요. 작은길에 왜 마음이 끌릴까요? 크기가 아닌 마음으로 바라보거든요. 《호시절》에서 말하는 ‘성소수자’는, 작은길을 바탕으로 크고작음이란 따로 없으며 이 푸른별에서 저마다 다르고 즐겁게 사랑이란 길로 감싸안거나 품으면서 아름답다는 실마리가 될까요, 아니면 목청높이기로 갈까요. 골목길은, 작은길 아닌 마을을 이룬 집을 서로 이어 두 다리로 다가서고 가까이 마주하도록 이끄는 길입니다. 숲길은, 작은길 아닌 이 푸른별을 이룬 뭇목숨이 서로 얽혀 따스히 만나고 살가이 어울리도록 여미는 길입니다. 좋은날도, 좋은날이 아닌 날도 없습니다. 품는 마음하고 보는 눈빛하고 살림하는 숨결에 따라서 다르게 가는 날입니다. 금긋기나 끼리질 아닌 사랑을 노래하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저는 여성이자 성소수자인데 / 제 인권을 반으로 가를 수 있습니까? (생선과 살구/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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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시선 450
유병록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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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65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유병록

 창비

 2020.10.12.



  바람에 섞인 먼지를 누구보다 일찌감치 맡는 이가 있습니다. 이이는 아직 먼지가 바람에 묻어나지 않았으나 어디에서 이 먼지를 일으킨 줄 느낍니다. 아직 이곳까지 먼지가 흘러오지 않았으나 우리가 이 자리를 그어야 한다고 느끼는 이가 있습니다. 먼지가 흘러들었을 적에 느끼는 이가 있고, 아직 못 느끼는 이가 있고, 코를 찌르는 먼지가 되어서야 느끼는 이가 있고, 먼지가 코를 찔러도 못 느끼거나 안 느끼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니, 느끼는 몸이나 마음이 다를밖에 없어요. 그런데 먼지를 못 느끼거나 안 느끼려 한다면 차츰 먼지한테 잡아먹혀서 어느새 목숨까지 잃겠지요.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를 읽었고, 여러 고장을 돌며 바깥일을 하다가 시골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람맛하고 물맛이 확 다릅니다. 구름빛하고 풀빛이 사뭇 다릅니다. 큰고장에서는 ‘몇 걸음 가야 하면 두 다리 아닌 씽씽이를 탄다’고들 합니다. 참말로 걷는 사람이 드뭅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도 아이랑 마을길을 걷는 일이 드물어요. 어떻게 나아가는 나라일까요? 누림(복지)하고 배움(교육)이란 무엇일까요? 걷지 않고 마을이 없는 나라·글꽃·책·누리집에서는 겉도는 꾸밈길이 널리 퍼지는구나 싶습니다. ㅅㄴㄹ


양말에 난 구멍 같다 / 들키고 싶지 않다 (슬픔은/18쪽)


사과밭에서는 모든 게 휘어진다 // 봄날의 약속이 희미해지고 한여름의 맹세가 식어간다 / 사과밭을 지탱하던 가을의 완력도 무력해진다 // 벌레 먹듯이 / 이제 내가 말하는 사과는 네가 말하는 사과가 아니다 (사과/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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