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전 생각 문학의전당 시인선 213
김성렬 지음 / 문학의전당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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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1



책을 읽어도 밥은 안 나온다지만

― 본전 생각

 김성렬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5.9.18. 9000원



  울산에서 살며 조용히 시를 짓는 김성렬 님은 《본전 생각》(문학의전당,2015)이라는 시집을 두 권째 내놓았습니다. 2008년에 첫 시집 《종점으로 가는 여자》를 내놓았다고 하는데 이 시집이 좀처럼 안 팔리면서 먼지만 뒤집어썼다고 해요. 읽히지 못하고 먼지만 먹는 시집이 너무 안쓰러워 그냥 둘레에 ‘나눠 줘버릴까’ 하고 생각했다는데, 차마 그냥 아무한테나 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다가 문득 먼 곳에 사는 동무가 떠올랐고, 먼발치 동무한테 시집을 보냈다고 합니다.



찬거리 사러 마트 갈 때마다 / 비싼지 싼지 구분 못해 / 일단 먹음직스럽다 싶으면 이것저것 주워 담았다가 / 낭패 보기 일쑤였던 할머니들 // 복지관 한글학교 다닌 뒤부터 / 진열대 앞에 붙은 금액 / 더듬더듬 읽고 / 찬거리 계산한 후 / 우수리까지 꼼꼼히 챙긴다 (문맹 탈출기)



  시인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사는 동무는 시인이 보낸 시집을 받고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시골 면소재지에는 책방이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 읍내에는 책방을 건사하기 어려운 오늘날입니다. 시골에서 살며 ‘책을 사서 읽기’란 몹시 어려울 수 있어요. 아니, 시골에서 살며 책을 사서 읽는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먼지만 먹던 시집을 선물로 받은 시골 사는 동무들이 뭔가 주섬주섬 꾸려서 시인한테 보내 주었다고 해요. 바다에서는 바닷것을, 멧골에서는 멧것을 바리바리 보내 주었다지요.



먼지 뒤집어쓴 시집 바라볼 때마다 / 아무나 한 권씩 나눠줘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 그동안 들인 공이 얼만데 싶어 /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들에게 한 권씩 보내주었다 // 어촌 사는 친구는 / 새벽에 출항해서 막 건져 올린 / 해산물 박스를 보내왔고 / 두메산골 벗은 / 아침에 들에 나가 저물 때까지 / 땀으로 딴 농산물 박스를 보내왔다 (물물교환)


옥탑방으로 이사한 날 아침 / 세탁기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 지하 단칸방 살 때는 / 해가 뜨는지 지는지 몰랐는데 // 옥탑방에는 해가 살고 있었다 (옥탑방)



  그나저나 대통령은 책을 읽을까요? 시장이나 국회의원은 책을 읽을까요? 책을 바지런히 읽던 살림을 오랫동안 잇다가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국회의원으로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온갖 갈래 책을 두루 읽으면서 마음을 살찌우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일이 바빠도 책을 읽을 틈을 마련하면서 스스로 새롭게 배우려는 마음인 이는 얼마나 될는지요?


  아예 없지는 않을 테지만, 어쩌면 우리는 ‘여느 때에 책을 거의 안 읽던 사람’들이 정치나 행정이나 문화나 경제나 복지나 교육을 주무르는 벼슬아치가 되도록 표를 주는 삶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책조차 안 읽는 사람’을 대통령이나 정치꾼이나 공무원이 되도록 팔짱을 낀 채 우리 스스로도 ‘베스트셀러 몇 권’을 빼고는 막상 책을 안 읽지는 않았나 싶어요. 우리 스스로 새롭게 삶을 배우는 길로는 좀처럼 안 접어들지 않은 탓에, 대통령을 비롯해서 바보스럽거나 어리석거나 터무니없는 이들이 정치권력이나 문화권력을 주무르도록 내버려두었을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밖에 나가든 들어가든 / 웃을 일 없는 세상에 넌더리난 그는 / 책을 읽으며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았다 / 그러므로 책 속에 푹 빠진 그는 / 전철 버스 타고 출퇴근할 때마다 / 남들은 스마트폰 만지작거릴 때도 책을 읽는다 / 주말 저녁, 회사 동료들 끼리끼리 / 회사 근처 주점에 둘러앉아 고주망태 되도록 / 술잔 주고받으며 노닥거리는 동안 / 그는 일찍 퇴근해 / 책갈피 넘기며 밤늦도록 책을 읽는다 / 얘들아, 아빠 깨워라 아침 먹게 / 으이그, 책 속에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 국, 찌개 식는데, 책 덮어놓고 / 빨리 밥 먹지 뭐하고 있어? 상 치워 (책 읽는 사람)



  시를 써서 시집을 내놓아도 먼지만 먹었다고 하는데, 시인은 꿋꿋하게 책을 읽습니다. 시인 스스로 ‘책 읽는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 책 읽는 사람이 되니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해요. 책 읽는 사람이 되면서 회사를 마치고서 술잔을 기울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루를 기쁘게 마무를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렇지만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한소리를 듣는다지요. “책 속에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하고 말이지요.



막상 현역에서 은퇴하고 보니 / 하나같이 빈털터리 / 분가한 자식들에게 전화해도 다녀가기는커녕 / 소식조차 없자 섭섭한 아버지들 // 생애 최악의 재테크라며 후회했다, / 거기다 사별한 아버지들 말벗은 반려견뿐 / 아니면 TV밖에 없다 (재테크)



  시집 《본전 생각》에 흐르는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은퇴한 아버지들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빌린 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는 대목을 뒤늦게 알았다는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각혈〉이라는 시를 읽으며 문득 제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우리 어머니도 ‘학교에 낼 돈’을 빌리느라 무던히 머리를 조아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새는 ‘학교에 낼 돈’이 많이 줄었다고 할 만한데, 예전에는 툭하면 무슨 성금을 내라 무슨 기금을 내라 무슨 육성회비를 내라 … 그저 ‘돈 먹는 물뚱뚱이’인 학교였어요. 주마다 성금을 내야지요, 주마다 학교 새마을금고에 돈을 내야지요, 날마다 무슨 숙제 준비물을 사서 가야지요, 철마다 꽃그릇을 사라느니 뭐를 사라느니 하지요.



사립문 앞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 동네 한 바퀴 돌고 오신 어머니 / 사내놈이 울긴 왜 울어, 혼내시며 / 팔짱 낀 겨드랑이 주먹 속에서 / 꼬깃꼬깃 말아 쥔 돈 건네주셨다 / 그 돈은 / 학교 다니는 동안 친구네 엄마, / 아버지 앞에 각혈 토하듯 머리 조아리며 / 빌린 돈이란 것을 그때는 몰랐는데 (각혈)



  아득하며 아련하면서 아픈 이야기가 오늘 쓸쓸하게 시 한 줄로 태어납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구나 싶은 삶을 다독여 시 한 줄로 갈무리합니다.


  책을 읽어도 밥은 안 나온다지만 시를 씁니다. 책을 읽으며 웃음을 되찾았다고 하기에 시를 짓습니다. 스스로 새롭고 싶기에 책을 읽고 시를 씁니다. 스스로 살아서 움직이는 즐거운 살림이 되려고 책을 곁에 두고 시를 짓습니다. 이 마음, ‘본전’을 바라는 생각보다 ‘살림’을 바라는 생각을 곱씹습니다. 2017.1.27.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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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화살 애지시선 56
고영서 지음 / 애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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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0



‘엑소·빅뱅’ 아닌데 아이들이 금남로에 섰다

― 우는 화살

 고영서 글

 애지 펴냄, 2014.11.15. 9000원



  1980년 5월 전라도 광주에 들이닥친 계엄군이 헬리콥터를 띄워 총을 쏘아댔다는 이야기가 2017년에 이르러 비로소 밝혀집니다. 이때에 누가 ‘헬기사격’을 하라고 시켰는가 하는 대목은 아직 안 밝혀집니다만, 이 대목도 머잖아 밝혀질 테지요.


  군사쿠테타와 계엄령과 학살하고 얽힌 묵은 실타래가 낱낱이 밝혀지기까지 참 오래 걸립니다. 그날 뒤로 어느덧 마흔 해가 가까워요. 그날 그곳에서 그 피비린내를 지켜본 사람이 있고, 죽거나 다친 사람이 있으며,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을 잃은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여기에 어느 만큼 귀를 기울이거나 마음을 두었을까요.



밀림지역에서 봉사를 하다보면 / 말라리아는 수도 없이 걸린다는데 / 한국의 수녀들은 말라리아가 도지면 / 우리나라 라면을 약으로 생각하고 / 끓여 먹는단다 / 밍밍한 그곳 음식만 먹다가 / 매운맛에 땀을 뻘뻘 흘리고 나면 / 감기조차 뚝, 떨어졌다는 것 (그들의 처방전)



  시집 《우는 화살》(애지,2014)에는 ‘1980년 광주’하고 얽힌 사람들 이야기가 줄줄이 흐릅니다. 살았어도 살았다고 하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야 하던 사람들 이야기가 흐릅니다. 죽었어도 이 땅을 고이 뜨지 못한 사람들 이야기가 나란히 흐릅니다. 살아도 산 듯하지 않고 죽어도 죽은 듯하지 않은 사람들 곁에서 애면글면 하루하루 보낸 사람들 이야기가 같이 흘러요.



“저 사람이 나를 때리려 한다” “뛰어, 뛰어!” “전두환이 내 일을 방해하고 있다”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었으나, 신체적 피해만 인정해 준다는 5·18 특별법 탓에 월 17만원의 기초생활 수급자로 홀로 살아오다 2012년 6월 24일 새벽,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과 시비가 붙어 폭행을 당했다 세상을 떴다 향년 53세 (부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그러고도 그렇게 얼굴 둘르고 살고 있는거 보믄은 비참헌 일이고 귀신이 있다믄 원흉들 그대로 놔두지 않고 다 잡아 죽였을 턴디 귀신도 없는 것 같으고 (닦아도 닦이지 않는)



  시집 《우는 화살》은 애면글면 눈물아는 삶을 시로 그리면서 다른 삶 하나를 시로 그립니다. 생채기를 그득 짊어지며 하루하루 힘겨운 사람들 삶 곁에 새롭게 일어서려는 아이들 삶을 함께 비추어 줍니다. 이른바 “엑소에 열광하던 아이들”이 노란 꽃댕기를 가슴에 달고 금남로에 서는 이야기를 시로 그립니다.



승객들을 놓아둔 채 / 줄행랑을 치던 선장이 / 이 나라에 한둘이겠습니까? / 청와대는 재난수습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 발뺌하는 무리들이 / 따스한 생명을 구할 수나 있었겠는지 (그때 이후로)


엑소에 열광하던 아이들이 / 소녀시대 카라 미쓰에이 빅뱅이 / 온 것도 아닌데 / 5월 17일 금남로에 섰다 // 34년 전 그날, / 세월호로 가슴 아픈 오늘을 / 잊제 않겠어요 / 손 피켓을 들고 / 촛불을 들고 (세월호 꽃영정)



  “엑소에 열광하던 아이들”만 금남로에 서지 않습니다. “서태지에 열광하던 아이들”이나 “이문세에 열광하던 아이들”도 금남로나 광화문에 섭니다. “전인권에 열광하던 아이들”도 “신중현에 열광하던 아이들”도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이를 먹은 몸짓으로 함께 금남로나 광화문에 서요.


  푸르게 자라던 풋풋한 날에 교과서만 들여다보지 않던 아이들이 사회를 함께 바라보면서 꼿꼿하게 섭니다. 푸르게 빛나는 얼굴로 웃고 춤추던 아이들이 사회를 마주할 적에 찬바람과 눈보라에도 씩씩하게 맞서면서 섭니다.



마당 한 귀퉁이 무쇠솥이 끓는데 / 어머닌 행주도 대지 않은 손으로 / 뚜껑을 열고 / 뜨건 물을 푹푹 퍼 나르시네 (푸른 손)


꽃이 암만 이뻬도 쳐다볼 새가 있을랍디여 / 죽은 서방 생각할 짬이 있다요 / 저 너른 양파밭 누가 봐도 오지제마는 / 당최 품삯도 못 건지는 가실 아닌게라우 / 사방간디 쑤시고 애리다가도 해 뜨먼 벌떡 인나지고 / 금메, 봄이면 씨앗을 또 안 뿌리겄소 (풍년의 역설)



  화살이 웁니다. 날아가는 화살이 울고, 꽂힌 화살이 웁니다. 손에 쥔 화살이 울고, 저 멀리 바람을 가르며 나는 화살이 웁니다. 시집에 깃든 사람들 삶이 눈물겹고, 이들 언저리에서 애틋하게 하루하루 일구는 사람들 손길이 눈물겹습니다.


  그러나 이 눈물겨운 삶은 눈물로만 젖은 채 고이거나 멈출 수 없습니다. 노래로 거듭날 삶이요, 웃음으로 다시 태어날 살림입니다. 금남로에도 광화문에도 촛불잔치를 넘어서 덩실덩실 아름다운 꿈과 사랑을 노래하는 기쁨잔치가 벌어지도록 달라져야지 싶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어두운 곳일수록 밝게 빛나는 별처럼, 싱그럽게 푸른 아이들이 자라 슬기로운 어른이 되어 온누리를 아름답게 갈아엎을 수 있겠지요?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다가오면 쟁기와 호미와 삽을 챙겨서 땅을 갈아엎어 씨앗 한 톨 새로 심을 수 있겠지요? 2017.1.23.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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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 - 황명걸 시선집
황명걸 지음, 구중서.신경림 엮음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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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2



철없던 젊은 날 되새기는 여든 할아버지 시인

―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

 황명걸 글

 구중서·신경림 엮음

 창비 펴냄, 2016.12.26. 12000원



  1935년 평양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 뒤에 서울로 와서 살아온 황명걸 님은 여든 고개를 넘습니다. 1970년대에 자유언론운동을 하다가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었다는 이녁 발자취를 더듬으니, 여든 고개가 참 아득하면서도 빠르게 흘렀구나 싶습니다.


  이제 눈처럼 센 머리를 인 할아버지 시인입니다. 하루하루 그야말로 새로운 기쁨으로 맞이하는 삶이라고 할 만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하루를 더 살 수 있다는 고마움을 누립니다. 저녁에 잠이 들면서 앞으로 떠나갈 이 땅을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 함께한다는 것 / 끝까지 간다는 것 / 목숨 다하도록 더불어 산다는 것 (우리는)


작고 비열한 사내 / 나를 두고 이름이나 / 그를 사랑할 계집이 없지만 / 침만 뱉기엔 불쌍한 구석도 없지 않아 / 그 사람, 나 아니면 누가 돌보랴 (자기애)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창비,2016)는 황명걸 님이 그동안 써낸 시집에서 대표작을 추린 뒤, 마지막 시집을 내고 나서 새로 쓴 시를 끝에 덧붙입니다. 여든 고개를 걸어가는 터라 이렇게 ‘옛 노래’를 하나하나 더듬으면서 애틋하게 돌아보시는구나 싶습니다. 이러면서도 아직 새롭게 일굴 노래가 있다는 마음을 그려내는구나 싶습니다.


  스물도 서른도 마흔도 쉰도 아닌, 여든 언저리에 써 내는 노래에는 그동안 황명걸 님 스스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되새김질이 흐릅니다. 되새김질마다 아쉬움과 뉘우침이 묻어납니다. 되새김질에는 부끄러움과 멋쩍음이 감돌아요. 그리고 도시를 떠나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지내는 하루가 여든 언저리 노래마다 조곤조곤 돋아납니다.



진달래, 애기똥풀, 붓꽃 / 엉겅퀴, 까치수염, 부처꽃 / 쑥부쟁이, 여뀌, 감국 / 이렇게 철 따라 벗하며 / 봄 여름 가을을 보냈다 (길)


뒷골목의 / 쓰레기통을 뒤지는 / 길고양이 / 배가 불렀다, 그래서 / 아름답다 (나의 미학―길고양이)



  황명걸 님은 ‘철들기’ 앞서 뭇 가시내를 놀려대는 말을 일삼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황명걸 님 스스로 “작고 비열한 사내”였다고 털어놓습니다. 늘그막에 시골자락에서 뭇꽃을 길마다 가득 만나면서 마음이 바뀐다고 합니다.


  젊을 적에는 이 뭇꽃을 미처 못 알아보았을 수 있어요. 젊을 적에는 다른 것을 보느라 바빠서 황명걸 님 둘레에 이렇게 작고 수수하면서 아름다운 꽃이 철 따라 피고 지는 줄 제대로 못 알아챘을 수 있어요.


  할아버지가 되고서 꽃을 비로소 봅니다. 허연 할아버지 한 분은 길고양이가 배가 부른 모습을 알아봅니다. 배가 부른 길고양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름답다” 하고 말하는 모습이 됩니다.



젊은 시절 철들기 전 나는 / 다리가 굵은 처자에 대고 무다리라고 놀려댔다 / 허리가 없는 아낙을 보고는 도라무통이라고 이죽거렸다 / 아랫배가 나온 과수더러는 똥배라고 하대했다 / 젖통이 큰 아주머니 등 뒤에서는 미련퉁이라고 빈정댔다 (허튼소리)



  흰머리 할아버지 시인은 함께 늙는 다른 할아버지 시인하고 술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하루가 고맙습니다. 후배가 주머니에 슬쩍 찔러 준 돈으로 오랜 술동무한테 술 한 잔 사 주면서 웃음꽃을 짓습니다. 수다를 한보따리 풀어놓고, 사회가 아름답게 거듭나기를 빌며, 바야흐로 이 땅을 조용히 떠날 마지막 날을 다소곳이 그립니다.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 오면 / 나 떠나리, 이 산하 어드메에 / 쇠잔한 몸 추슬러 외양 단정히 매만지고 / 명아주 단장에 의지해 / 희고 가는 머리카락 날리며 (새날)



  명아주 지팡이를 짚는 할아버지 시인은 흰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고요히 마지막 숨을 쉬고 싶다고 밝힙니다.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에 가만히 잠들고 싶다는 마지막 꿈을 이야기합니다. 남들을 미련퉁이라고 빈정대던 철없던 젊은 시인은 이제 스스로 미련퉁이였다는 대목을 깨닫고는 제철에 제자리를 찾아 깃들려는 차분한 마음이 됩니다.


  황명걸 님한테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는 마지막 시집이 될까요? 앞으로 조금 더 기운을 내어 시골노래 삶노래 사랑노래를 몇 가락 더 읊조리면서 이 겨울을 날 수 있을까요? 봄을 한 철 더 누리면서 새롭게 깨어날 나라를 지켜볼 수 있을까요?


  흰눈 같은 마음을 시에서 읽습니다. 흰꽃 같은 노래를 시로 만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을 이웃하고 나누는 손길이 따사롭구나 하는 이야기를 시로 마주합니다. 2017.1.16.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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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
김경원 지음 / 푸른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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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59



‘고등학생 시인’에서 ‘노래하는 시인’으로 거듭나기

―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

 김경원 글

 푸른길 펴냄, 2016.10.7. 12000원



  시 한 줄은 노래와 같습니다. 시를 한 줄 쓰면서 마음에 흐르는 이야기를 살며시 풀어놓을 수 있습니다. 시름에 겨운 마음도, 응어리가 지는 마음도, 괴롭거나 슬프거나 고단한 마음도 시 한 줄로 풀어내면서 가늘게 한숨을 돌릴 수 있습니다. 즐거움이나 기쁨도 시 한 줄로 풀어내면서 새롭게 북돋울 수 있고요.


  글을 쓰는 분들은 ‘시’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딱히 ‘글을 쓰는 살림’이 아닌 분들은 ‘노래’를 불러요. ‘입으로 읊는 시’라고 할 만한 노래를 부르면서 슬픔이나 기쁨을 다스립니다. 입으로 읊는 시 한 마디로 하루를 되새기고 스스로 기운을 북돋우기도 해요.


  대중노래이든 민중노래이든, 또는 옛노래이든 서양노래이든, 우리가 흔히 듣는 노래를 소릿가락이 아닌 노랫말을 종이에 가만히 적어 보면, 참말 모두 ‘시’로구나 싶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가락을 붙여서 읊는 말’을 노래라고 할 만해요. 그러니 글을 안 쓰더라도 노래를 부르면서 하루를 열거나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살림을 꾸리는 모든 사람들은 늘 ‘시를 짓거나 누리듯이’ 살아간다고 할 만합니다.



연필 한 자루면 시 하나 / 뚝딱 만들어내는 세상 / 시 하나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 공감할 수 있는 세상 /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 차별이 없는 세상 (내가 꿈꾸는 세상)



  어느덧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로 나아가는 김경원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푸른길,2016)을 읽습니다. 김경원 님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거나 다독이거나 달래려고 시를 씁니다. 남한테 내보이려고 하는 시가 아니라, 스스로 마음을 풀어놓는 시입니다.


  그런데 김경원 님이 쓴 시를 읽은 같은 학교 동무들이 좋아해 줍니다. 이 시는 학교 바깥으로도 조금씩 알려지면서 여러 이웃들 마음을 따사로이 달래 줍니다.



넘어지는 것은 아프지만 / 백 번이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을 / 배우기엔 딱 좋은 나이 (열여덟 살)



  고등학교를 다니며 쓴 시가 ‘잘 쓴 시’라면 학교 동무나 사회 이웃은 김경원 님 시를 그야말로 ‘잘 쓴 시’로 여겼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에 깃든 시는 ‘잘 쓴 시’가 아니라 ‘마음을 풀어놓은 노래 같은 이야기’인 터라 둘레에 환한 웃음이나 애틋한 눈물을 북돋우겠구나 싶어요.


  왜, 노래방 같은 곳에서도 그렇지요. 우리는 노래를 직업가수처럼 부를 수 있어야 하지 않아요. 이른바 박자 음정 모두 잘 맞추어야만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아요. 돼지 멱을 따는 소리이면 어떻게, 늦박자나 엇박자이면 어떤가요. 마음을 담아서 부를 수 있으면 될 노래예요. 즐겁거나 슬픈 마음을 달래려고 부르는 노래이면 돼요.


  시 한 줄도 이와 같아서, 마음을 풀어내려고 쓰는 시일 때에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마음을 풀어내기에 비로소 시요, 마음을 나누기에 참으로 시이며, 마음을 모아 서로 어깨동무하려는 사랑이기에 그야말로 시라고 느껴요. 



나에게 엄마란 / 정말 못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 하지만 아주 가끔은 / 엄마라는 그 이름을 / 불러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 가끔은 엄마의  품에 안기에 / 울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엄마에게)



  ‘잘 쓴 시’가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잘 부르는 노래’이기는 하되 ‘마음을 담지는 못하고 잘 부르기만 하는 노래’일 적에는 두 번 세 번 자꾸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잘 부르는 노래’로는 마음을 달래거나 북돋우지 못하거든요.


  마음을 담아서 부르는 노래이기에 두 번 세 번 자꾸 들으면서 마음을 달래거나 북돋아요. 잘 쓴 시가 아닌 마음을 담아서 쓰는 시이기에 두 번 세 번 자꾸 읽으면서 마음을 달래거나 북돋울 만합니다.



그동안 나만 아프지 않았나 / 그동안 나만 힘들지 않았나 / 싶었기에 // 미안해서 눈물이 납니다 / 내가 못다 한 이야기 / 내가 들어줄게 (못다 한 이야기)



  고등학생이던 김경원 님은 ‘반려동물 관리사’라는 길을 가 보고 싶다는 꿈을 품었답니다. 그렇지만 대학등록금이나 살림돈을 모을 수 없어서 이 꿈을 한동안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이러다가 마침 뜻있는 분들이 김경원 님을 돕겠다면서 나서 주었고, 새로운 해에는 고등학생 아닌 대학생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고 합니다.


  김경원 님은 앞으로 내디딜 새로운 삶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 한 줄로 적바림할 수 있을 테지요. 이제는 학교 울타리가 아닌 김경원 님 스스로 일구는 ‘내 작은 보금자리’에서 한결 홀가분하게 시 한 줄을 노래할 수 있을 테지요.


  마음을 열고 눈을 더 크게 뜨면서 시를 노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홀로 우뚝 설 수 있는 길에서 새로운 시를 길어올리기를 빌어요. 때때로 힘들거나 지칠 적에는 동무나 이웃 어깨에 살며시 기대어 쉬기도 하고, 남들이 두세 걸음을 걷든 말든 김경원 님은 스스로 반 걸음이나 반반 걸음이나 반반반 걸음만 걷더라도 즐겁고 씩씩하게 앞길을 나아가기를 빕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아름답게 / 빛을 내는 보석은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



  할 수 있어요. 누구나 노래를 할 수 있고,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어요. 온누리에 오직 하나 있는 보석이라면 바로 ‘우리 스스로’이니까요. 나한테는 네가 보석이요, 너한테는 내가 보석이니, 우리는 서로 보석이에요. 저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멋진 시인이에요.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숨결을 사랑하는 따사로운 손길로 앞길을 즐거이 일구면서 거둘 씨앗 한 톨 같은 노래를 기다립니다. 2017.1.6.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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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의 봄 문학과지성 시인선 493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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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78



여든 앞둔 늙은 시인이 그리는 풀벌레 노래

― 연옥의 봄

 황동규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6.11.24. 8000원



  겨울이 되면 마을고양이는 따순 곳을 찾아서 웅크립니다. 때로는 혼자 웅크리고, 때로는 두어 마리가 함께 몸을 맞대고 웅크립니다. 제가 사는 시골집은 곳곳이 마을고양이한테 따순 곳이 되지 싶습니다. 때로는 평상 밑이, 때로는 평상 위쪽이, 때로는 자전거수레 밑이, 때로는 자전거수레 위쪽이, 때로는 헛간이, 때로는 섬돌이, 마을고양이가 웅크리고 해바라기를 하는 자리가 돼요.


  오늘도 아침에 마루문을 열며 한 발을 내딛으려다가 멈칫합니다. 털이 하얀 고양이는 섬돌에 앉으면 눈에 잘 안 뜨여서 때로 밟기도 하거든요. 문득 멈칫한 뒤 가만히 고양이를 바라봅니다.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얘야, 내려가도 되겠니? 네가 거기 있으면 내가 널 밟을 텐데?’ 아침볕을 쬐며 웅크리던 고양이는 느리게 몸을 풀고 느리게 걸음을 옮깁니다. 몇 발자국 옆으로 가서 다시 동그랗게 몸을 맙니다.


  얼추 열 마리쯤 우리 집 곳곳에 깃드는 마을고양이가 저마다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몸을 말며 겨울볕을 쬐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때때로 이 고양이하고 매우 가까운 자리에 앉아 책을 읽습니다. 고양이가 평상 밑에서 자면, 나는 평상에 누워서 살짝 등허리를 펴며 겨울볕을 함께 누려 보기도 합니다. 가을이 지났기에 겨울이요, 봄을 기다리기에 겨울인 이즈음, 황동규 님 시집 《연옥의 봄》(문학과지성사,2016)을 읽습니다.



중얼거림을 멈췄다. 눈앞에서 / 껍질 벗어 던진 나체의 석류 같은 천남성 열매 / 붉은 알 하나하나가 최면 걸듯 빛나고 있었다. / 생각들아 가을이 깊으면 / 겉도 속이 된다. (천남성 열매)


노령자 무료 독감 백신 맞으려 동네 병원에 갔다. / 이왕 오셔서 기다리신 김에 / 4만 원짜리 폐렴 백신도 맞고 가시라는 의사의 말에 / 얼씨구 이런 게 바로 시간 절약! / 하지만 저녁 병원 문 닫을 무렵부터 몸 오슬오슬 추워와 / 노령자에게 겹으로 백신 놓아준 의사, 돌팔이라 욕하며 / 새벽 2시까지 끙끙 앓다 간신히 눈 붙이고 (몸이 말한다)



  1938년에 태어난 황동규 님이니 이제 제법 늙수그레한 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의 여든인 나이입니다. 이리하여 ‘늙은 시인’은 동네 병원에서는 그냥 ‘늙은 할아버지’ 손님인 터라 “이왕 오셔서 기다리신 김”에 “4만 원짜리 폐렴 백신”도 덩달아 맞으라는 얘기를 의사한테서 듣습니다. 시인 황동규 님은 의사 말에 “얼씨구 이런 게 바로 시간 절약!”이라 여기며 그만 하루에 두 가지 백신을 맞았대요. 이러고서 이날 저녁부터 새벽까지 끙끙 앓았다지요. “노령자 무료 독감 백신”에 “시간 절약!”을 노리다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고 합니다.



최근 들어 청력이 줄었는지 / 봄비 유난히 숨죽이고 창에 뿌리는 밤. / 테킬라 ‘호세 쿠에르보’ 한 잔 넉넉히 따라 마시고 누워 / 이 생각 저 생각 두어 시간 보내다 (명품 테킬라 한잔)


유채꽃인가, 다시 보니 배추꽃이었다. / 밭둑에 혼자 피어 있었다. / 어디선가 노랑나비 하나 날아와 / 시계 방향으로 한 번 돌다 말고 / 슬그머니 꽃에 내려앉는 순간 (사는 노릇?)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을 겪습니다. 아픈 일 슬픈 일도 겪고, 기쁜 일 웃는 일도 겪어요. 젊은 날에는 귀가 잘 들렸어도, 어느덧 귀가 어두워지는 몸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젊은 날에는 한 잔 마시기도 어려웠을 “명품 테킬라”였을지라도 이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한 잔 걸치면서 “나폴리 민요”라든지 여러 서양고전을 누릴 수 있기도 하지요.


  귀뿐 아니라 눈까지 어두워지면서 유채꽃하고 배추꽃을 먼발치에서는 못 가리다가 가까이 다가서서야 비로소 배추꽃이네 하고 알아보기도 합니다. 배추꽃이로구나 하고 깨달으며 바라보다가 노랑나비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자잘하면서 투박한 하루하루가 시 한 줄로 새롭게 영글기도 하지요.



명예교수 휴게실에서 문학의 죽음에 대해 / 대책 없는 토론을 벌이다 채 끝내지 못하고 나와 / (이거 한평생 헛발질한 거 아냐?) / 차 시동 걸고 오디오를 켠다. / 옛 테너 스테파노가 부르는 나폴리 민요. / 순환도로에 오르자 시야 가득 벚꽃 휘날린다. (나폴리 민요)



  여든을 앞둔 명예교수 황동규 님은 대학교 쉼터에서 “문학의 죽음”을 놓고 한참 말씨름을 하다가 불현듯 속으로 생각했대요. “이거 한평생 헛발질한 거 아냐?” 하고요. 참말로 어쩌면 한삶을 헛발질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삶을 헛발질을 했더라도 이 나름대로 재미나게 누린 나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노래를 듣듯, 자전거를 달리며 바람소리를 노래처럼 듣듯, 두 다리로 천천히 거닐며 스스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듯, 버스나 전철을 타면서 수많은 사람들 복닥거리는 소리를 노래마냥 받아들이든, 저마다 다르면서 뜻있는 나날이요 삶입니다. 흔한 하루가 아닌 언제나 오직 하나뿐인 하루요, 바로 이 하나뿐인 하루에서 하나뿐인 시가 태어나요.



어머님, 백 세 가까이 곁에 계시다 아버님 옆에 가 묻히시고 / 김치수, 오래 누워 앓다 경기도 변두리로 가 잠들고 / 아내, 벼르고 벼르다 동창들과 제주도에 갔다. / 늦설거지 끝내고 /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끝난다. / 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도 없다. (삶의 본때)


여름내 뿌린 소독약 때문인가 / 8층까지 올라오던 벌레들의 간절한 가을의 소리 / 끊겼다. / 벌레 소리 자리 뜨자 밤새 소리도 / 사라졌다. (늦가을에)



  시집 《연옥의 봄》은 ‘늙은’ 시인 자리에 들어선 황동규 님이 ‘죽음’이란 참말 무엇인가 하고 더 가까이 생각하면서 쏟아낸 이야기를 담습니다. 연옥에도 봄이 올까요? 연옥에도 봄이 있을까요? 연옥에서도 봄을 그릴 수 있을까요? 연옥하고 봄은 어울릴까요?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이 얽히거나 설키면서 “삶하고 죽음” 사이에 놓인 실타래를 헤아립니다.


  얼마 앞서까지 누리던 “아파트 8층 가을 풀벌레 노랫소리”가 농약(또는 소독약) 때문에 사그라들었다고 해요. 아파트 관리인은 소독약도 농약도 잔뜩 뿌려서 풀벌레를 모조리 죽이고, 풀벌레가 모조리 죽은 자리에는 새 한 마리도 깃들지 못하며, 이러한 아파트 꽃밭은 꽃나무만 멀쩡히 있는지 몰라도 아무런 소리 하나 없다고 합니다. 레이첼 카슨 님이 밝힌 “고요한 봄”마냥 소리가 없는 가을이란 가을답다고 느끼기 어려운 가을이리라 느껴요.


  어쩌면 《연옥의 봄》이라는 시집에서 노래하는 ‘연옥’하고 ‘봄’이란, 이렇게 우리 곁에서 어느새 사그라들고 만 애틋하거나 살갑거나 따스한 소리를 그리는 이야기일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풀벌레가 노래하지 못하며 밤새도 노래하지 못하고, 개구리는 더더욱 노래할 수 없으며, 이런 가을 밤에는 시인도 노래를 그만 못하고 마는, 그런 얼거리라고 할까요. 거의 예순 해에 이르도록 시라고 하는 한길을 걸어온 늙은 시인이 마음에 담는 봄을, 늙은 몸에 담고 싶은 봄을, 앞으로 꿈처럼 그리고 싶은 봄을 고요히 생각해 봅니다. 2016.12.31.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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