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 - 제주어 선싕이 들려주는 제주어 동시집 씨앗시선 5
김정희 지음 / 한그루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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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90


수수한 고장말이 사랑스러운 노랫가락
책이름 :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
 : 김정희
펴낸곳 : 한그루 2017.3.10.


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인천이라는 고장은 서울이 곁에 있어서 쉽게 서울 문화에 젖으리라 여길 수 있지만, 어릴 적 인천에서 서울을 바라보면 서울은 참 멀기만 한 곳이었어요.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집에 다녀올라치면 너덧 시간이 걸렸지요. 전철길은 까마득히 멀고, 전철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길도 멀었어요. 웬 자동차며 사람이며 이다지도 많은지. 무엇보다 서울에서는 서울사람이 쓰는 서울말 인천말하고 다르다고 느꼈어요.

대구나 부산에서 살던 분이라면 인천말하고 서울말이 무엇이 다르냐고 물을 만해요. 광주나 전주에서 살던 분이라면 인천말하고 부천말하고 수원말이 어찌 다른가를 모를 만해요. 그러나 경상도 분이라면 진주말하고 창원말이 다른 줄 알아요. 전라도 분이라면 나주말하고 고창말이 다른 줄 알지요.

고장마다 사람이 다르면서 말이 달라요. 고장마다 삶자리가 다르면서 말씨가 다르지요. 다만 우리는 이 다 다른 고장말을 매우 많이 잊거나 잃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은 모두 표준 서울말을 쓰고,교과서나 책도 언제나 표준 서울말을 써서 어린이하고 푸름이한테 가르쳐요.
 
할망네 우영팟듸 가민
애기호박이영 호박잎 부루 고치 ᄂᆞᄆᆞᆯ
우리 할망네 우영팟듸
명줖진품 세간살이덜은 덤
벗덜 불렁
자파리 ᄒᆞ게
 
어멍도 뒈곡
아방도 뒈곡
ᄒᆞ으로 밥도 ᄒᆞ곡
ᄂᆞᄆᆞᆯ쿡도 끌리곡
조물조물 ᄂᆞᄆᆞᆯ 무치고
밥 먹게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
 
할머니네 텃밭에는
아기호박 호박잎 상추 고추 배추
우리 할머니네 텃밭에
명품진품 살림살이는 덤
친구들 불러
소꿉장난 하자
 
엄마도 되고
아빠도 되고
흙으로 밥도 하고
나물국도 끓이고
조물조물 나물도 무쳐놓고
밥 먹자 (할머니네 텃밭 소꿉놀이)
 
제주에서 나고 자라서 제주에서 사는 김정희 님이 쓴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한그루 펴냄)를 읽으며 깜짝 놀랍니다. 요즈음 고장말을 드러내어 쓴 동시를 만나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어린이하고 함께 읽을 시뿐 아니라 어른끼리 읽는 시에서도 고장말로만 쓴 시를 만나기란 대단히 어려워요.

동시집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는 두 가지 말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먼저 제주말로 이야기를 엮어요. 이런 다음에 서울말을 옆에 붙여요.
 
빗방울덜
하늘서 곱을락ᄒᆞ당
마당더레 툭 털어지민
어듸 곱으카
 
ᄇᆞ글ᄇᆞ글 거리당
이녁찌레 모다들엉
응상응상 거리당
우르르 쾅 (부끌레기 동동) 

빗방울들
하늘에서 숨바꼭질하다가
마당으로 뚝 떨어지면
어디로 숨을까
 
보글보글 거리닥가
끼리끼리 모여
웅성웅성 거리는데
우르르 쾅 (보글보글 빗방울)
 
책이름으로 나온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가 무엇인지 저로서는 가늠도 못 했습니다. 제주말 옆에 붙은 서울말을 읽고서야 할머니네 텃밭 소꿉놀이인 줄 깨닫습니다. 옳거니 하며 무릎을 쳤어요. 구성지면서 재미나거든요. ‘우영팟듸 텃밭이기도 하고 마당이기도 하대요. ‘자파리소꿉이거나 소꿉놀이라고 합니다.

고장말은 서울말이나 표준말이 아닌 고장말입니다. 그래서 빗방울덜처럼 시를 써요. “하늘에서라 하지 않고 하늘서라 시를 씁니다. “마당으로가 아닌 마당더레라 시를 써요.
 
꼬불꼬불
돌담 ᄉᆞ이로 난 족은 질 (올레)
 
꼬불꼬불
돌담 사이로 난 작은 길 (올레)
 
시에서 흐르는 감칠맛이란 무엇일까요? 요리조리 말장난을 하면 맛이 날까요? 이리저리 익살맞게 꾸미면 멋이 날까요?

동시도 어른시도 굳이 말장난이나 말놀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놀이하듯이 시를 쓰면 놀이를 하듯이 즐거운 시가 되어요. 신나게 노래하듯이 시를 쓰면 참말 노래를 부르듯이 신나는 시가 되어요.

지름ᄂᆞᄆᆞᆯ고장으로 저고리 ᄒᆞ영 입엉
살랑거리는 어욱 머리 찰랑거리멍
ᄀᆞ슬ᄁᆞ정 철철이 옷 ᄀᆞᆯ아입는
할망 웃이는걸 베릴 수 잇일거우다 (할락산)

유채꽃으로 저고리 해 입꼬
살랑거리는 억새 머리 흔들며
가을까지 계절 따라 옷 갈아입는
할망 웃음 볼 수 있지요 (한라산)
 
제주 어린이가 제주말을 되새기면서 마음밭에 고이 담기를 바라는 뜻을 펼쳐 보이는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를 읽으면서 새삼스레 기운을 얻습니다. ‘서울말로 옮긴 시 제주말로 쓴 시하고 대면 매우 밋밋하지 싶어요. 이와 달리 제주말로 쓴 시는 대단히 수수하거나 투박한 이야기를 그저 그대로 적을 뿐이지만 구성질 뿐 아니라 싱그럽습니다. 펄떡펄떡 살아서 춤추는 숨결이 흘러요. 고작 제주 고장말을 쓸 뿐이지만 싯말이 사뭇 다릅니다.

이 대목을 눈여겨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줄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한 가지라면 바로 이요 살림이지 싶어요. 돈이나 이름값이 아니라, 재산이나 물질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을 물려주고 사랑스러운 살림을 물려줄 적에 넉넉하고 따스하지 싶어요.

두고두고 이어온 아름다운 삶을 수수한 말에 담아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즐거이 가꾼 사랑스러운 살림을 투박한 말에 실어 아이한테 넘겨주어요.

여느 어른들은 그냥 유채꽃이나 청개구리라 하지만, 제주 고장말로 살피면 지름나물고장(지름ᄂᆞᄆᆞᆯ고장이나 풀개구리(풀ᄀᆞᆯ개비)’가 됩니다. 고장말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말이며 노래이며 삶이 살아나기도 하고, 이 고장말을 한껏 살리는 길을 헤아린다면 여느 서울말을 더욱 새롭게 가다듬어 볼 수 있어요.
 
조용ᄒᆞᆫ 도서관 못듸
어린 풀ᄀᆞᆯ개비 (도서관 못) 

조용한 도서관 연못에
어린 청개구리 (도서관 연못)
 
이를테면 지름나물꽃(유채꽃)’이나 풀개구리(청개구리)’ 같은 이름을 가만히 얻습니다. 하찮다고 여길는지 모르겠으나 수수한 자리에서 수수하게 길어올리는 말 한 마디가 새롭게 깨어납니다.대단한 우리말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 작은 고장 작은 말에서 넉넉하며 따스한 기운이 피어납니다.

먹당 냉긴 정거
밧듸 걸름으로 묻언 놔둬신디
봄 나난
뾰족뾰족 올라오는 잎셍이덜
걸름 소곱서
노랑꼿이 올라오고
간잘귀가 지랑지랑 ᄃᆞᆯ려신게 (간잘귀)
 
먹다 남은 음식
밭에다 거름으로 묻었더니
봄이 되어
뾰족뾰족 올라오는 싹
거름 속에서
노란 꽃이 올라온다
개똥참외가 주렁주렁 달린다 (개똥참외)

다만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에서도 살짝 아쉬운 대목이 있어요. 제주말로는 철철이 으로 적으면서 서울말로는 계절(季節)’하고 친구(親舊)’로 옮긴 싯말입니다. ‘계절이나 친구도 흔히 쓴다고 하지만 하고 을 더 알뜰히 다룰 수 있었어요. 이러한 대목을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면 제주말로 쓰는 동시는 제주말을 제주 어린이한테 선물로 건네는 책을 넘어서,한국 어린이 모두 살가이 선물로 받을 만큼 자라리라 생각합니다.

전라도에서 전라말로 동시를 쓰는 분이 나오면 좋겠어요. 경상도에서 경상말로 동시를 쓰는 분이 나오고, 강원도에서 강원말로 동시를 쓰는 분이 나오면 좋겠어요. 교과서를 고장마다 두 가지 말로 적어 볼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고장말하고 서울말을 나란히 적어서 시골 아이가 시골살이와 시골살림을 자랑스레 배우고 보람차게 물려받도록 이끄는 교육 정책이 있기를 빌어 봅니다.

수수한 말 한 마디에 가락이 붙어 노래가 되어요. 투박한 말 두 마디에 새로운 숨결이 깃들어 동시로 거듭나요. 고장마다 흐르는 여느 말 세 마디에 사랑스러운 씨앗을 심으니 기쁜 이야기로 태어나요.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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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무늬 애지시선 39
박일만 지음 / 애지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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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01



아이 셋을 낳아도 한국사람이 아닌

― 사람의 무늬

 박일만 글

 애지 펴냄, 2011.11.29. 



  누군가 말합니다. 시집 한 권을 읽고 나서 마음에 남는 시가 두 꼭지만 되어도 시집을 읽은 값이 있다고. 저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왜 두 꼭지만 마음에 남아도 되는가 하고요. 시집 한 권이 통째로 마음에 남도록 이야기가 흐를 수는 없는가 하고 묻기도 합니다.



꽃도 영혼도 지구의 흔적이다 (지구의 체적)



  곰곰이 돌아보면 시집 한 권이 대단해야 하지는 않습니다. 시집 한 권에서 한 줄만 아름다울 수 있어도 됩니다. 개구지게 노는 아이들이 문득 한 마디를 꽃처럼 바람처럼 하늘처럼 나무처럼 숲처럼 햇살처럼 해님처럼 별빛처럼 달님처럼 내놓을 적에 이 아이 가슴속에 어떤 씨앗이 이토록 몽실몽실 자랐는가 하고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작은 말 한 마디가 모든 삶을 씻어 주어요. 시집 한 권에서 짧은 한두 줄이 문득 울리기에 시를 찬찬히 읽는다고 할 수 있어요.



아버지가 아프시다

용하다는 점쟁이는 부적을 권하고

신통방통 보살님은 치성을 주장하고

도립병원 추천받아 간 대학병원에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입원수속 속전속결 (유물론)



  시집 《사람의 무늬》(애지,2011)를 읽습니다. 사람한테 있는 무늬가 무엇인가 하고 되새기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때로는 꽃하고 사람이 얼마나 닮거나 다른가를 읽고, 때로는 아픔과 병원과 돈은 얼마나 잇닿는가를 읽습니다. 때로는 한국사람하고 한국사람이 아닌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를 읽습니다.



아이 셋을 낳고도 한국인 되지 못했다

까맣고 눈 큰 여자

얼핏 보면 내남없는 얼굴이

몸빼 입고 큰 수건을 둘러써도 어색해 보였다

아이들은 커갈수록 남방인 표시가 나서

바깥보다 집안에서 칭얼댔고 (놋쳉잉 씨)



  저는 인천이라는 고장에서 태어나 전남 고흥으로 옮겨서 삽니다. 저는 인천에 안 살지만 어쩌다 한두 해에 한 번쯤 인천에 들르면 다들 저를 보며 ‘인천사람’이라 합니다. 전남 고흥에 산 지 일곱 해가 넘지만 다들 저를 보며 ‘고흥사람 아니다’ 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사람’이기는 한가요? 우리한테는 어떤 이름이 붙어야 알맞을까요? 우리는 서로 어떤 이름을 부르면서 마주할까요? 시집 《사람의 무늬》가 나온 지 일곱 해가 흐르는데, 놋쳉잉 님은 이제 ‘한국사람’으로 주민등록이 되어 이 땅에서 세 아이를 곁에 두면서 ‘안 쫓겨나도’ 될 만한지 궁금합니다. 2017.8.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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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의 곧은 나무 한티재시선 10
김수상 지음 / 한티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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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98


고르면서 곧게 자라는 나무가 되고 싶어
― 편향의 곧은 나무
 김수상 글
 한티재 펴냄, 2017.6.19. 8000원


  시집 《편향의 곧은 나무》(한티재,2017)를 읽으며 시집에 붙은 이름을 생각합니다. ‘편향’이라는 한자말은 ‘치우침’을 뜻합니다. 그러니 “치우치면서 곧은 나무”를 이야기하는 시집이라는 뜻이에요. 치우치면서 곧다니 그럴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참말 한쪽으로 ‘곧게 치우친’ 모습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치우친 모습이 아니라 마냥 한쪽으로 곧게 치우친 모습이 있어요.


라디오를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면,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나와서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 하고 말했다 그 말이 거북의 등처럼 듣기에 거북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하고 쓰면 되는 말을, 마치 자기가 아주 커다란 집단의 우두머리라도 되는 것마냥 (개인적이란 말)


  ‘개인적’이란 무엇일까요? ‘-的’을 붙인 일본 말씨라고도 할 터이나, 쉽게 쓰지 않는 말씨라고도 할 터입니다. 시인은 ‘개인적’이라 말할 까닭 없이 ‘내가 보기에는’이라고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와 맞서는 ‘집단적’도 매한가지가 될 테지요. ‘집단적’이라 하지 말고 ‘우리가 보기에는’이나 ‘사람들이 보기에는’이라 하면 되어요.

  그런데 어느 모로 보면 ‘개인적’이란 말이 듣기 거북한 시인처럼 ‘편향’이란 말도 거북할 수 있습니다. 굳이 ‘편향의’ 같은 일본 말씨를 써야 할까 궁금해요. ‘치우친’이라고 하면 되거든요.


이틀 내리 내린 소낙비에도 우리 아파트의 백일홍은 꽃을 매달고 있었어요 기특한 마음에 사진을 좀 찍어주려고 속옷 바람으로 스마트폰을 내밀었더니 꽃나무 바로 옆, 테니스장에서 공을 치다가 모자 벗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땀을 닦는 아주머니, 저를 보더니 옴마얏! 하네요 (치한이 살고 있다)


  우리는 서로 같은 자리에 있으나 서로 다른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시인은 배롱꽃(백일홍 꽃)을 찍고 싶어서 속옷 차림으로 아파트에서 문을 슥 열고 손전화를 내밀었다는데, 배롱꽃 둘레 테니스터에서 공을 치던 아주머니는 어떤 미친 사내가 속옷 차림으로 저를 몰래 찍는다고 여겨요.

  같은 자리에 있으나 다른 마음으로 다른 일을 했습니다만, 두 다른 사람은 그만 마음도 생각도 엇갈려요. 배롱꽃을 찍으려던 시인은 어느새 치한이라는 옷을 입습니다.


벚꽃과 살구꽃의 구별이 안 되었다 
팻말이 없었더라면 지나칠 뻔하였다 (살구꽃을 보았다)

중학교에 다니는 막내 놈은 방학이라서
아무데도 가지 않고 먹고 자고 먹고 잤다
나는 오늘도 밥을 하고
어제 널은 빨래를 개고 청소를 하였다 (안심을 따라가다)


  한쪽으로만 간다는 길, 이쪽하고 저쪽을 두루 살피지 않고 마냥 치우치기만 한다는 길, 둘레를 고루 헤아리지 않고 그저 한쪽으로 뻗기만 한다는 길이란 무엇일까요.

  누구는 벚꽃하고 살구꽃을 못 가릴 테지만, 누구는 매화하고 벚꽃을 못 가립니다. 복숭아꽃하고 살구꽃을 못 가릴 수도 있을 테고요. 오얏꽃은 또 어떨까요? 꽃이 아닌 열매는 얼마나 가릴 만할까요? 푸른 매실이 아닌 누렇게 익은 매실하고 살구를 가리지 못하는 분이 많아요.

  그리고 나무마다 다른 결을 못 가리는 분이 많습니다. 느티나무를 보며 느티나무인 줄 못 알아본다든지, 탱자나무를 보며 탱자나무인 줄 못 알아보는 분이 많아요. 우리는 다들 아는 만큼만 알아요. 우리는 다들 모르는 것은 도무지 몰라요.


그래, 우리는 술집하고 다방하는 것들이다
별고을에서 술 팔고 차를 팔아서
토끼 같은 내 새끼들 기르고 늙은 부모 모시는
술집하고 다방하는 것들이다 (저 아가리에 평화를!)


  누구나 평화를 바랄 수 있습니다. 평화운동가만 평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흙 만지는 할매도 평화를 바랍니다. 그러나 기자는 국회의원이나 이름난 몇몇 이들이 목소리를 높일 적에 사진을 찍더라도, 시골 할매나 아지매가 목소리를 높일 적에는 사진을 안 찍고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곤 합니다.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면 기자가 모일 테지만, 시골 할매랑 아지매가 목소리를 높이려는 자리에 찾아오는 기자는 찾아볼 길이 없어요.

  시집 《편향의 곧은 나무》는 우리 사회를 둘러싼 한쪽으로만 냅다 뻗는 곧은 길이란 무엇인가를 가만히 짚는다고 할 만합니다. 두루 뻗지 못하는 가지를 이야기한다고 할 만합니다.

  나무가 가지를 한쪽으로만 뻗으면 나무 스스로 못 버티고 무너져요. 나무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를 뻗기에 아름드리로 아름답게 자랍니다. 사람도 나무와 같이 고루 가지를 뻗듯 이웃을 헤아리고 사랑할 적에 아름다운 어른으로 살아가리라 느껴요.

  고르면서 곧게 자라기에 아름답습니다. 골고루 곧게 살피기에 사랑스럽습니다. 나무처럼 씩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나무처럼 넉넉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2017.7.29.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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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어요 최측의농간 시집선 1
박서원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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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97


아파서 시를 쓰고, 슬퍼서 시를 읽는
― 아무도 없어요
 박서원 글
 최측의농간 펴냄, 2017.5.31. 8000원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알았는데, 아이들이 처음 걸음을 떼다가 넘어질 적에 어버이가 안 놀라면 아이도 안 놀랍니다. 이뿐 아니라, 어버이가 아무렇지 않게 아이를 바라보면서 “넘어졌구나. 그래, 일어나면 돼. 무릎에 묻은 먼지 털고.” 하고 부드러이 말하면 아이는 아픈 줄 몰라요. 더욱이, 아이 무릎에 피가 흐르더라도 어버이가 차분하고 따스하게 “피가 나네. 피를 닦아야겠구나. 자, 이제 다 됐어.” 하고 말하면 아이 무릎에 흐르던 피는 어느새 멎습니다.

  넘어지기에 다치지 않아요. 넘어진 뒤에 둘레에서 걱정하거나 놀라거나 슬퍼하거나 안쓰러워하는 눈치를 느끼면 이때부터 갑자기 아프고 힘들구나 싶어요. 이러다가 다치더군요. 아이들은 늘 이와 같고, 어른도 때때로 이와 같아요.


비로소 완벽해진 나의 사회
이곳에선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
이젠 긴장을 풀어도 좋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무색해지는
여긴? 어디? (나의 호텔)

아픈 꽃을 보시겠어요?
선인장의 살 껍질을 말아 올리고
붉게 붉게 서려올라
어머니가 기워주시던 옛날
뚫어진 양말처럼
하루하루를 홈질하여
황혼 녘에 높다란 집 하나 짓는
수고로운 꽃을 (아픈 꽃을 보시겠어요?)


  1960년에 태어나서 2012년에 숨을 거둔 시인 박서원 님이 있습니다. 이녁이 남긴 시집하고 산문집이 여러 권 있으나 모두 판이 끊어졌습니다. 이러던 터에 시집 《아무도 없어요》(최측의농간,2017)가 새롭게 옷을 입고 태어납니다.

  시집 《아무도 없어요》를 읽으면 아픔하고 아픔이 흐릅니다. 이다음으로는 슬픔하고 슬픔이 흘러요. 아픔이 가득한 이야기가 끝나면 슬픔이 넘치는 이야기가 흐르고, 슬픔이 넘실거리는 이야기가 그치면 아픔이 춤추는 이야기가 흘러요.


곪을 데가 필요하십니까
물론 만발한 꽃은 없지만
에나폰
트리민
디아제팜 따위는 있습니다
한번 입원하면
그 맛을 잊지 못해 찾아오는
여긴
물론 당신의 꿈이나 여행을
팔지는 않지만
신선한 병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병원·1)


  무엇이 이토록 시인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요. 폐결핵으로 일찍 숨을 거둔 아버지 삶자락이 시인 마음에 생채기로 남았을까요. 어릴 적부터 온갖 일을 하는 맏이로서 동생들을 돌보는 살림을 꾸리느라 시인 마음에 생채기가 생겼을까요. 젊은 나이에 사랑이 아닌 거친 손길을 받은 일이 시인 마음에 생채기로 아로새겨졌을까요.

  크고작은 일이 모두 아픔이 될 수 있어요. 아픔을 달래는 동안 슬픔이 깊어질 수 있어요. 아픔하고 슬픔을 다독이는 동안 응어리가 깊어질 수 있어요. 아픔하고 슬픔을 다스리려고 병원을 드나들다가 외려 아픔도 슬픔도 안 가라앉고 더욱 깊어질 수 있어요.


있는 그대로 오너라
있는 그대로 와서
너의 벗은 몸을 보여다오
몸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닿았다 가면
커다란 태양의 눈이 되어
온누리를 밝히게 되지 (5월)

아무도 없어요
원고지도 비어 있고
화병도 비어 있어요
하루 종일 노닐다 간
햇살도
벌써 가고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곁에 아무도 없다고 느끼는 하루를 헤아려 봅니다. 곁에 늘 누가 있는 채 지낸다면 이런 하루를 헤아리기 어려울 수 있어요. 하루 내내 아파 보지 않고서야, 한 해 내내 아파 보지 않고서야, 열 해 스무 해 내내 아파 보지 않고서야, 우리 이웃이 얼마나 어떻게 아픈가를 헤아리기란 참으로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시집 한 권으로 이웃 아픔과 슬픔을 모두 읽어낼 수는 없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이 어떻게 아프거나 슬프면서 이 생채기를 달래려 하는가 하는 몸짓이나 몸부림을 살며시 들여다볼 수 있다고 느낍니다.

  거꾸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우리가 마음 가득 기쁨을 느끼거나 누려 본 적이 없다면, 우리 곁에서 한껏 기뻐하는 이웃하고 함께 활짝 웃으면서 기뻐할 수 있을까요? 뜻하던 일이 잘 풀리거나 잘 되는 이웃 곁에서 스스럼없이 기뻐하거나 북돋우면서 함께 활짝 웃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삶에서 기쁨을 누려 보지 못했다면, 기쁨이 가득한 이웃을 바라보면서 자칫 시샘하거나 미워할 수 있어요. 우리가 삶에서 아픔을 느껴 보지 못했다면, 아픔이 가득한 이웃을 마주하면서 자칫 지나치거나 모르쇠로 지나갈 수 있어요.


산은 물구나무 선
하느님
내가 가까이 가면 갈수록
멀어지고
멀어지면 가까워지는
하느님 (산)

나비는 죽어서도
이 땅에 남는다
푸른 날개 노랑 날개
팔랑거리던 시절이
흐린 밤 하늘,
하필이면 두통에
시달리던 날
내 꽃밭의 꽃들을 (나의 나비)


  아픔을 아픔대로 풀어낸 시집 《아무도 없어요》라고 생각합니다. 슬픔을 슬픔대로 녹여낸 시집 《아무도 없어요》라고 생각해요. 아픔하고 슬픔으로 일렁이는 시집을 읽는 뜻이라면,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우리 이웃을 다시 바라보면서 앞으로는 웃음지으며 어깨동무하는 길을 찾고 싶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마치 할머니나 어머니 손처럼 아픔을 씻어 주는 손이 되면서 시집을 읽는다고 느껴요. 오늘 우리 두 손이 이웃 두 손을 맞잡으면서 아픔을 씻고 슬픔을 달래는 따사로운 숨결로 거듭나도록 북돋우는 시집 한 권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7.23.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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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느 지구에 사니? - 제4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동시집 49
박해정 시, 고정순 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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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89


아이와 어른이 함께 사는 곳에서
― 넌 어느 지구에 사니?
 박해정 글
 고정순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6.11.3. 10500원


  어른 눈길로 보자면, 어른은 아이를 돌보거나 키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습을 가만히 다시 짚어 보자면, 어른하고 아이는 함께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 자리에서 살핀다면, 어른은 아이를 가르치거나 이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조용히 새로 짚어 본다면, 어른하고 아이는 서로 가르치고 어깨동무를 한다고 할 만합니다.


늘 퉁명스럽게
책을 빌려주는 사서 언니는
내가 만화를 보느라 낄낄거리면
따가운 눈총을 날리지.
도서관에선 웃을 때도
소리를 내선 안 된다나?
그런 언니가 오늘
붕어빵 한 마리를 잡았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책상 밑으로
숨기는 거 있지. (사서가 금붕어 된 날)


  박해정 님 동시집 《넌 어느 지구에 사니?》(문학동네,2016)를 읽습니다. 이 동시집은 우리가 사는 별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사는 마을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는 집을 이야기하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이야기해요.

  하나하나 짚어 볼까 싶어요.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 살까요, 아니면 지구라는 별을 느끼지도 못한 채 살까요? 우리는 우리 마을을 날마다 살갗으로 느끼면서 살까요, 아니면 마을 얼거리는 거의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살까요?

  우리는 집안일을 함께 하거나 집살림을 같이 맡으면서 즐거운 하루일까요, 아니면 어느 한 사람이 도맡는 집안일이거나 집살림일까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평화로운 곳일까요, 사랑스러운 곳일까요, 끔찍한 곳일까요, 싫은 곳일까요?


꽃밭에
호미 하나

전화 받으러 갈 때
던지고 간 것

뒤뜰에
호미 하나

택배 받느라
두고 간 것

텃밭에
호미 하나

버스 놓칠세라
내팽개치고 간 것 (호미와 할머니)


  아이한테 넌지시 물어봅니다. 아이들아, 너희들은 어느 별에서 왔니? 아이들은 이 물음을 듣고 곧장 어른한테 되묻습니다. 어른들이여, 그대들은 어느 별에서 왔소?

  어른은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면서 돌보는 마음일까요. 아이는 어른을 어떻게 마주하면서 자라는 마음일까요. 어른은 아이를 어떻게 가르치고 이끌어서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까요. 아이는 어른 곁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우고 받아들이면서 어떤 어른으로 크자는 마음일까요.

  오늘날 거의 모든 아이들은 호미를 안 만지지 싶습니다. 어쩌면 어느 아이는 호미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수 있어요. 옛말 가운데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가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오늘날 아이들은 낫을 본 적이 없는 나머지, 코앞에 누가 낫을 들었어도 손에 뭘 쥐었는지 모를 만합니다.

  자동차를 보면 어느 회사에서 만들었는지 곧장 알아내더라도, 호미나 낫이나 쟁기나 가래나 보습을 보고는 도무지 하나도 모를 만하지 싶어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이와 비슷할 테고요. 텔레비전에 흐르는 연예인 얼굴만 보고도 누구인가 이름을 바로 알더라도, 말이나 되를 보고 말이나 되인지 아는 아이는 거의 없을 만해요. 바구니와 둥구미와 다래끼가 어떻게 다른가를 아는 아이는 드물 테고, 쌀 한 섬이 몇 킬로그램쯤 되는가를 아는 아이는 거의 없을 만하지 싶어요. 어쩌면 요즈음 어른들부터 잘 모를 수 있겠지요. 집이나 마을이 아닌 박물관에서만 이런 살림살이를 만나는 삶이 되었다고 할 만해요.


거미집 생기고
쥐가 들락거리고
마당에 풀이 무성해지면
집이 기울지.

하지만 망치질 소리
도마질 소리
뚝딱뚝딱 들어가고
우리들 웃음소리 들어갔더니
집이 기운 차렸어. (즐거운 집)


  동시집 《넌 어느 지구에 사니?》를 읽으며 마을을 헤아려 보고, 시골을 생각해 보며, 서울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는 어느 별에, 어느 나라에, 어느 마을에, 어느 집에 살까요? 우리는 무엇을 하는 집에 마을에 나라에 별에 살까요? 우리가 사는 이 별·나라·마을·집은 어떤 꿈이나 사랑이 흐르는 곳일까요?

  아이들 웃음소리를 들으며 기운 차리는 집에서 사나요? 아이들 웃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에서 사나요? 학교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얼마나 흐를까요? 마을에는 아이들 웃음소리나 노랫소리가 얼마나 번질까요?


우리 집에 제비 부부가 찾아왔어요.
토닥토닥 흙을 쌓아
몇 날이고 웅크려 앉더니
새끼가 태어났어요.
활짝 핀 노란 주둥이 좀 보세요.
명랑하게 지저귀는 이 꽃과
길가에 새초롬하게 핀 꽃 중에
어느 꽃이 진짜 제비꽃인지 모르겠어요. (제비꽃)


  부드러우면서 따스하게 흐르는 이야기 하나는 아이를 돌보는 어른한테 묻습니다. 어른 스스로 어떤 마음이 되어 아이를 마주하느냐고 묻습니다. 어른 스스로 어떤 생각을 지으면서 아이한테 어떤 삶을 가르치려 하느냐고 묻습니다.

  서울이라는 고장은 언제쯤 제비가 다시 찾아갈 만할까요? 서울 아이나 서울 어른은 사진이나 그림이 아닌 처마 밑 제비를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개미가 씨앗을 물어다 나르면서 퍼지는 제비꽃을 서울이나 부산 같은 커다란 고장에서는 언제쯤 새롭게 만날 만할까요?

  아이를 돌보거나 가르치기만 하는 어른이 아니라, 아이하고 손을 맞잡고 함께 배우고 같이 살림을 짓는 어른이라는 삶을 읽을 수 있기를 빌어요. 어른은 아이한테서 배우고, 아이는 어른한테서 배우며, 서로 사이좋게 웃음짓고 노래하는 별·나라·마을·집이 되면 좋겠어요. 봄꽃 여름꽃 가을꽃 겨울꽃이 철마다 흐드러지면서 기쁨을 누리는 지구별이 되고, 작은 마을이 되며, 사랑스러운 보금자리가 되기를 바라요. 2017.7.2.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어린이문학 비평/동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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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8-05-09 03:07   좋아요 0 | URL
이다음에도 즐겁게 노래꽃을 펼쳐 주시겠지요?
5월이 흐드러지는 하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