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서 온 편지 삶창시선 49
김수열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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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05


보말죽 냄새가 고소한 시집
― 물에서 온 편지
 김수열 글
 삶창 펴냄, 2017.7.25. 9000원


  시 한 줄은 아주 가볍게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음 가볍게 마주하면 술술 읽습니다. 우리는 평론을 하려고 시를 읽지 않기 때문에, 이웃마을에 사는 시인이 가만히 읊은 이야기를 찬찬히 읽으면서 이웃마을 살림살이를 헤아릴 만합니다.


출근길
허리 잘린 어린 국화
박카스병에 담아 책상 위에 놓으니
보라색 향기 교무실에 그윽하다 (예감)


  허리가 잘린 국화는 길바닥에 있습니다.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면 길바닥을 볼 까닭이 없고, 길바닥에서 갈 곳을 모른 채 쓰러진 국화 한 송이를 바라볼 수 없어요. 곁을 지켜볼 수 있기에 허리 잘린 어린 국화를 보고, 작은 들풀을 보며, 해마다 조금씩 줄기가 굵는 나무를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 모든 작은 이웃살림을 글 한 줄로 담을 수 있습니다.

  멋들어진 말이 아니라 수수한 말로 빚는 이야기입니다. 돋보이는 말이 아니라 잔잔한 말로 일구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선 자리를 생각하면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자리를 알아보면서 말 한 마디를 건네다 보니 어느새 이야기가 피어나는 글이 바로 시가 된다고 느낍니다.


예순 살짝 넘긴 며느리가 여든 훌쩍 넘긴 시어매한테 어무이, 나, 오도바이 멘허시험 볼라요 허락해주소 하니 그 시어매, 거 무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얼릉 가서 밭일이나 혀!
요번만큼은 뜻대로 허것소 그리 아소, 방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떠듬떠듬 연필에 침 발라 공부를 허는데, 멀찌감치 앉아 시래기 손질하며 며느리 꼬라지 쏘아보던 시어매 몸뻬 차림으로 버스에 올라 읍내 나가 물어물어 안경집 찾아 만 원짜리 만지작거리다 만오천 원짜리 돋보기 사 들고 며느리 앞에 툭 던지며 허는 말, 거 눈에 뵈도 못 따는 기 멘허라는디 뵈도 않으믄서 워찌 멘헐 딴댜? 아나 멘허! (고부)


  제주서 제주사람으로서 제주말을 짓는 김수열 님이 들려주는 《물에서 온 편지》(삶창,2017)를 읽습니다. 물에서 온 글월을 읽는 시인은 뭍에서 오는 글월도 읽습니다. 바람한테서 오는 글월도, 구름이나 빗물한테서 오는 글월도 읽어요.

  여든 넘은 시어매한테서 이야기꽃으로 날아오는 글월을 읽고, 해짓골 올빼미 형한테서 이야기밭처럼 다가오는 글월을 읽어요. 먼발치에서 구경하는 글월이 아닌, 곁에서 물끄러미 마주하는 글월입니다.


해짓골 올빼미 형은
멜철 들어 물이 싸면 탑바리 원담에
족바지 들고 멜 거리레 갔다

이레 화르르륵 저레 다울리라
저레 화르르륵 이레 다울리라

작대기 들고 바당물 탕탕 치당보민
팔딱팔딱 족바지에 멜이 가득 (원담)


  시집 《물에서 온 편지》에 흐르는 이야기를 들려준 이웃님들 살림이란 노래하고 같지 싶습니다. 대중가수나 유행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아닌, 수수한 보금자리를 가꾸는 살림지기나 살림꾼으로서 나긋나긋 부르는 노래이지 싶어요.

  허리 잘린 국화를 주워서 새롭게 밝히는 손길이 노래입니다. 여든 넘은 시어매가 예순 넘은 며느리한테 안경 한 벌 마련해 주려고 부산스레 읍내를 누비는 발길이 노래입니다. 멜을 훑으러 족바지 들고 다녀오는 해짓골 올빼미 형 몸놀림이 노래입니다. 여기에 이 모든 살림살이를 살포시 안아서 글꽃이라는 숨결을 담아내니, 시집 한 권이란 노래책이 될 만하지 싶습니다.


보말이 보말이주, 보말을 뭐셴 고라?
고메기? 난 몰라, 우리 동네선 그자 보말 (보말죽)


  노란 꽃송이인 민들레를 ‘노란꽃’이라고만 해도 되고 ‘노랑둥이’라든지 ‘노랭이’나 ‘누렁이’라 해도 됩니다. 어떤 말을 붙여서 마주하든 따사로운 눈길이면 곱지요. 하얀 꽃송이인 민들레를 ‘흰꽃’이라고만 해도 되며 ‘하양둥이’라든지 ‘하양이’나 ‘허영이’라 해도 됩니다. 어떤 말로 불러서 맞이하든 넉넉한 손길이만 곱습니다.

  따사로운 눈길로 마주하기에 글월을 받습니다. 냇물도 글월을 띄우고, 골짜기도 글월을 띄워요. 종가시나무가 띄우는 글월을 받아 볼까요? 후박나무나 동백나무가 띄우는 글월을 받아 볼까요? 자귀나무나 가문비나무가 띄우는 글월을 받으면 어떨까요? 사마귀도 방아깨비도 우리한테 글월을 띄웁니다. 다만 우리가 이들 작은 이웃이 띄우는 글월을 못 알아챌 뿐입니다.

  작은 마을이나 작은 골목에서 살아가는 이웃도 늘 글월을 띄워요. 작은 연립주택이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이웃도 노상 글월을 띄우고요. 우리는 어떤 글월을 알아채면서 기꺼이 받는 삶일까요? 우리는 누구를 이웃으로 삼아서 글월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살림일까요? 제주에서 날아온 시집을 덮으니 보말죽 냄새가 고소하게 퍼집니다. 2017.9.12.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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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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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04


아프고 작은 이와 이웃 되는 언론을 바라며
― 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글
 수오서재 펴냄, 2016.8.22. 12000원


  저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저는 스무 살 무렵부터 제금을 나서 살았고, 이때부터 텔레비전 없는 살림을 지었습니다. 텔레비전을 집에 두지 않은 지 스무 해가 넘는데, 살면서 어렵거나 번거로울 일을 못 느낍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텔레비전 없는 집에서 사는 동안 힘들거나 갑갑한 일을 못 느껴요.

  텔레비전을 두지 않는 살림이란, 방송을 들여다보지 않는 살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송에서 어떤 이야기가 흐르는지 하나도 안 들여다볼 뿐 아니라, 사회 흐름이라든지, 날씨 이야기조차 안 쳐다본다는 살림이기도 해요. 저나 곁님은 ‘마지막으로 어버이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무렵’에 얼굴을 보거나 이름을 들은 연예인이나 가수 이름을 어렴풋이 떠올릴 뿐, 누가 뜨거나 지는지 몰라요. 우리 집 아이들은 어떤 연예인도 가수도 모르고요.

  방송을 보지 않으니 신문도 읽지 않습니다. 이러니 저희 집에서는 참말로 정치나 사회나 경제나 문화나 교육이나 연예인이나 운동경기 이야기를 하나도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집에서 스스로 짓는 살림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더디거나 느리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가꾸거나 돌볼 하루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나는 역군 아닌데
종현이 아버지인데
지수 씨 남편인데
썩 괜찮은 아들인데
(나는/‘보령 조선소 직원 철판에 깔려 숨져’를 읽고서 2010.10.6.)

  시집 《그 쇳물 쓰지 마라》(수오서재,2016)를 읽으며 살짝 놀랍니다. 저희는 방송도 신문도 가까이하지 않기에 이 시집이 지난해 여름에 나온 줄 몰랐어요. 전남 광주에 있는 마을책방에 갔다가 그곳 책시렁에서 눈에 뜨여서 장만했어요. 이 시집을 선보인 분은 ‘제페토’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요. 이 시집을 쓴 분이 사내인지 가시내인지 젊은지 늙은지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마흔 줄을 넘긴 아저씨라고 어림한다고 해요.

  성별이나 나이란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시집을 낸 분이 ‘댓글로 쓴 시’가 대수롭습니다. 제페토라는 분은 이녁 이름을 고이 묻은 채, 신문에 실리는 사회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시를 써서 댓글을 남겼다’고 해요. 누리신문에서 글을 읽고서 댓글을 남겼겠지요.

짜디짠 소금장수라지만
씀씀이 푸짐했다
지뢰가 걷어붙인 두 팔로
온종일 땡볕 아래에서 수확한
눈부신 결정들은
소금이었을까
마음이었을까
(소금선생/‘세상의 소금 된 손 없는 소금장수의 선행’을 읽고서 2011.5.1.)

  신문에 실리는 사회 이야기에는 아프거나 슬프거나 고단하거나 괴로운 사람들 살림이 묻어나곤 합니다. 제페토라는 분은 아픈 이웃을 신문글로 마주하면서 함께 아파 합니다. 슬픈 이웃을 마주하면서 함께 슬퍼 하고, 괴로운 이웃을 마주하며 함께 괴로워 해요. 그리고 이 모든 마음을 시로 수수하게 풀어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신문에 나오는 사회 이야기는 퍽 딱딱합니다. 이른바 ‘사실 보도’만 하니까요. 일하다가 그만 용광로에 떨어져 아스라이 목숨을 잃은 이웃이 있어도, 입시지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린 이웃이 있어도, 무시무시한 전쟁무기 때문에 티끌처럼 목숨을 빼앗긴 이웃이 있어도, 신문에 글을 싣는 기자는 ‘모든 슬픔이나 눈물 같은 느낌을 감추’고서 딱딱한 사실 보도만 해요.

박정호가 죽었어요
훌쩍대는 전화에
울 엄마는 그 아이
몇 등이냐 물었네
(학원 가는 길/‘명절이 지나고 다니는 학원 수가 더 늘었어요’를 읽고서 2012.9.28.)

  어쩌면 말이지요, 신문이나 방송이 꼭 사실 보도만 해야 하지 않을 수 있어요. 아프거나 슬픈 이웃 이야기를 들려줄 적에 함께 눈물을 적시면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기쁘거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는 함께 웃음꽃을 피우면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엉터리 정치꾼이 재판을 받고 죄값을 받아서 감옥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다룰 적에는 매섭게 나무라거나 꾸짖을 수 있어요. 앞으로는 ‘감정 보도’를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참거짓(사실)에 바탕을 둔 곧은 마음(감정)을 드러내는 보도’가 되어야겠지요.

술을 샀습니다
나만큼 가난한 후배에게
한턱을 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는
곱창을 노래했었습니다 (사당동에서)

  방송국에서 파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방송도 신문(종이신문)도 안 보지만, 누리신문에 글을 쓰는 터라, 누리신문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로 얼핏 알았습니다. 파업을 하려는 방송국 일꾼은 앞으로 방송이 옳고 바르며 참다운 길을 가도록 힘쓰려는 마음을 드러내려는 뜻이리라 생각합니다. 촛불 한 자루가 일으킨 큰 빛물결처럼 방송국 일꾼이 똘똘 뭉쳐서 일어나는 몸짓도, 참다운 방송으로 거듭나는 아름다운 소리물결이 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바라고 싶어요. 방송 파업을 하는 김에, 방송국 일꾼이 ‘방송국이 있는 서울 같은 도시’를 떠나서 외진 시골이나 멧골로 찾아가 보면 좋겠습니다. 제가 사는 전남 고흥 같은 시골은 ‘○○시 내 고향’이나 ‘○○노래자랑’ 같은 일이 아니라면 방송국 기자도 신문사 기자도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더욱이 외진 시골이나 멧골에 사는 할매나 할배는 ‘방송에 나오는 대로 믿’곤 하셔요. 두 다리로 외진 시골이나 멧골로 방송국 일꾼이 찾아다니면서 ‘입으로 방송 파업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렇게 시골 할매하고 할배한테 온몸으로 들려준 ‘새로운 방송으로 거듭나려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갈무리해서, 앞으로 새로운 방송길을 열 적에 즐거이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리하여 댓글시인 제페토 님이 앞으로 ‘아름답고 즐겁게 피어나는 이웃’ 이야기도 넉넉히 마주하면서 그 시골바람 좋더라 하는 시도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쇳물 쓰지 마라”에 이어 “그 나물밥 맛나더라” 같은 시가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9.6.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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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엽수 지대 창비시선 99
김명수 지음 / 창비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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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9


우리 곁에 있는 의젓한 바늘잎나무
― 침엽수 지대
 김명인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1.11.25.


옛날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배밭을 가꾸던 신명 많은 이웃네들
우라질 것 오늘은 우리 판이다
도가 나오면 꽹과리 치고
개가 나와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소주 한잔에 벌겋게 취해
오늘은 대보름날 저녁이면 달 뜨리라 (윷판)

변한 것은 없었다
국토 2백여 리
의정부에서 동두천까지
동두천에서 전곡까지
얼룩무늬로 위장한 군용트럭이
포장 안된 작전도로로
흙먼지를 일으키고 달려가고
그 길 양편에 호박넝쿨 올라간
시멘트 블록의 시골집들 (흙먼지)

연초록 진달래 이파리에 싸여
이파리를 갉아먹는 노란 풀벌레야
빨간 띠줄은 누가 그었니?
한 사나흘 잎에 붙어 잎을 먹다가
까맣게 말라죽은 노란 풀벌레야
우리는 무심코 한세상을 산단다
하늘은 또 잿빛으로 흐려오누나 (풀벌레)

꿀을 먹을 때 꿀벌들을 보느냐
꿀벌을 볼 때 꽃밭을 보느냐
꽃밭을 볼 때 꽃을 피운 흙을 보느냐
흙을 볼 때 흙에 스몄던 빗방울을 보느냐
빗방울을 볼 때 구름과 하늘을 보느냐
꿀 한방울이 빗방울이 되고 빗방울은 또 하늘이 된다 (꿀을 먹을 때)

그 손가락 하나 잃고
징집을 면한 아버지가
6·25때 목숨을 건지고
논 다섯 마지기 부치며 키운 아들을
오늘 막 버스에 실어 보냈다
그의 아들이 군에 가는 것이다 (斷指)

뺏긴 것 되찾고
억눌린 굴레 벗고
더러운 것 새롭게
목 졸린 건 자유롭게
불의와 독재도
쓰레기와 함께
핵무기도 주둔군도
쓰레기와 함께
철조망도 외세도
쓰레기와 함께
우리들 스스로가
치워 없애야지 (그러나 새해에는)


  어릴 적 일을 떠올립니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침엽수·활엽수’라는 이름으로 가르쳤어요. 이때 저는 두 말마디를 도무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한자를 익혀서 ‘침·활’을 알더라도 늘 아리송했습니다.

  이러다가 ‘바늘잎나무·넓은잎나무’라는 낱말을 나중에 듣고서 깜짝 놀랐어요. 아니 이렇게 또렷하면서 쉬운 이름이 있는데 왜 어른들은 학교에서 ‘침엽수·활엽수’라는 이름만 가르쳤을까요?

  두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이즈음에는 이 대목을 한결 뼛속 깊이 느낍니다. 일곱 살이나 열 살 어린이한테 ‘침엽수·활엽수’ 같은 이름을 말하면 하나도 못 알아듣습니다. 이 이름을 외우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바늘잎나무·넓은잎나무’라고 말하면 바로 알아듣지요.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나무’라고 할 적에 늘 곧장 알아듣지만 ‘수(樹)’라는 한자를 붙이면 못 알아듣습니다. ‘나무’라는 쉬운 말을 놓고 구태여 ‘樹’ 같은 한자를 왜 써야 하는지 아리송할 테지요. 그렇지만 우리 사회 어른들은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지 않기 일쑤예요. 아직도 많은 어른들은 그냥 ‘침엽수·활엽수’ 같은 이름을 써요.

  1991년에 나온 김명인 님 시집 《침엽수 지대》(창작과비평사)를 새삼스레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시인한테 아이가 있다면, 또 시인이 아이한테 이 나라 나무를 이야기하거나 가르친다면, 틀림없이 ‘바늘잎나무’ 같은 이름을 썼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말을 알뜰히 사랑하기에 쓰는 ‘바늘잎나무’라는 이름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바늘·잎·나무’ 세 낱말을 쉽게 알아요. 이와 달리 ‘침·엽·수’라는 세 한자는 어렵습니다. 낯설고요.

  나라에서는 틈틈이 입시제도를 바꿉니다. 한때 연합고사였고, 한때 본고사였으며, 요즈음 수능입니다. 수시입학도 있고 이러저러한 틀도 있는데, 어느 모로 보든 나라에서는 ‘입시’라고 하는 얼거리를 뜯어고치지 않아요. 더 깊고 크게 배우는 대학교가 아니라, 졸업장을 거머쥐어서 돈 잘 버는 일자리를 얻기 좋도록 하는 길로 가기만 해요.

  그렇다고 나라 탓만 할 수 없습니다. 시집이나 장가를 가려는 젊은이는 맞은쪽 어버이한테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가’를 밝혀야 합니다. 어른들은 며느리나 사위가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가를 궁금하게 여깁니다. 공공기관에서도 대졸자를 좋아합니다만, 적잖은 개인사업자도 일꾼을 찾을 적에 대졸자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일쑤예요. 더군다나 대학교를 마친 이한테 일삯을 더 주곤 하지요.
  다시 말해서 한국 사회를 비롯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바늘잎나무’라는 쉽고 또렷한 이름을 쓰기 어려운 얼거리입니다. 쉬운 말을 옆에 두고도 버젓이 ‘침엽수’ 같은 말을 전문용어로 삼는 한국 사회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앞으로 달라지려고 애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땅에 아름드리나무가 자라는 아름다운 살림터를 가꿀 수 있을까요? 시집 《침엽수 지대》에 흐르는 이야기는 답답한 굴레에 갇혀서 갑갑한 길을 가기만 하는 어둡고 차디찬 사회를 다룹니다. 이제는 달라지기를 바라면서 시인 스스로 발버둥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늘잎나무를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소나무, 잣나무, 향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 노간주나무, 측백나무 …… 같은 이름을 그려 봅니다. 씩씩한 소나무, 살뜰한 잣나무, 향긋한 향나무, 의젓한 전나무 …… 나무마다 한 가지씩 느낌을 붙여 봅니다. 포근하고, 미덥고, 눈부신, 이러면서 언제나 하늘을 닮은 파란 바람을 베풀어 주는 나무를 떠올려 봅니다.

  이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오늘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앞으로 이 나라는 어떤 길로 나아갈까요? 오랜 시집 《침엽수 지대》처럼 우리 마음자리를 오래도록 밝히면서 씩씩하고 살뜰하며 의젓하게 북돋우며 곁에 있는 바늘잎나무를 생각하는 하루입니다. 2017.9.2.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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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감정 문학과지성 시인선 318
최정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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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03



믿을 수 없는 말

― 레바논 감정

 최정례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6.5.4.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레바논 감정)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수퍼마켓엔 겨울딸기가 있어요

그것도 두 팩에 7천 원 소리치면서

전에 딸기는 수원 딸기 밭에 있었는데

연인들은 5월이면 딸기 밭으로 가

처음으로 눈을 맞추고 몸을 만졌는데 (겨울딸기)


어릴 때 사촌은 기차는 바퀴가 없는 것이라고 우겼다. 겨울방학 책에 뱀 꼬리처럼 사라지는 기차 그림엔 정말 바퀴가 보이지 않았다. 기차를 타본 내가 기차를 타보지 않은 사촌의 말을 이길 수가 없었다. (내부순환도로)



  믿을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럼없이 말하고 거리낌없이 말할 적에는 믿습니다. 허물없이 말하고 참다이 말하면 믿어요. 스스럼없거나 거리낌없을 적에는 때때로 투박하거나 거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말씨는 참답기에 좀 날카롭더라도 얼마든지 믿을 만합니다.


  믿을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감추거나 숨기며 말할 적에는 안 믿습니다. 아무리 달콤하거나 부드럽거나 듣기 좋도록 말하더라도, 거짓으로 하는 말은 믿을 수 없어요.


  값싸게 파는 것이기에 좋을까요? 값비싸게 팔기에 안 좋을까요? 제대로 지어서 제값을 붙여서 판다면 좋겠지요. 값은 때로는 쌀 수 있고 비쌀 수 있어요. 값이 대수롭지 않아요. 제구실을 하는 제대로 된 것인가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장만하며 꾸리는 살림일까요?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삶일까요? 우리는 어떤 말을 나누면서 사귀거나 만나는 사이일까요? 참을 드러내려고 스스럼없거나 거리낌없는 하루를 짓는가요? 겉보기로만 좋도록, 그저 그럴싸해 보이도록, 껍데기만 가꾸는 말마디로 살아가지는 않나요? 아니면, 투박하거나 거칠더라도 참다운 살림을 지으면서 차근차근 하루를 누리나요? 2017.8.27.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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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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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02



서로 말을 배우며 평화롭다

―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허수경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5.10.14.



  진주말로 시를 지어 함께 실은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2005)을 읽다가, 그냥 진주말로만 시를 실으면 한결 나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굳이 서울말로 다시 적어야 하지 않아요.


  어쩌면 진주말을 진주나 경상도 사람 아니고서는 못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곡성말을 곡성이나 전라도 사람 아니고서는 못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런데, 못 알아들으면 못 알아듣는 대로 귀를 기울이거나 눈을 크게 뜰 수 있습니다.



비님 나리시는데

노천밥집 안조로미 밥 드는데


이데는 자근 항구말

조갑데기 배드리

푸성귀소 많은 밥상드럼 들어와 있는 데


서콰내 사무드멘

서더먹케 싱경이무침 뒤더기던 손

들썩 들쏙 물회리 가게 되는 데 (항구마을―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진주말을 마음껏 쓸 수 있다면 이 고운 텃말을 수더분하게 쓰면 가장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고장마다 텃말이 차츰 사라지거나 잊히는 까닭은 그 고장에서 오래도록 입에서 입으로 물려준 텃말을 그 고장 사람들 스스로 안 쓰기 때문이에요. 더욱이 글을 쓰는 분들 스스로 이녁 책이나 문학에 텃말을 안 쓰기 때문이고요.


  진주말이라서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주사람이 진주말을 하기 때문에 이 노래는 얼마든지 아름답습니다. 다른 고장에서는 넘볼 수 없는 말이요,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말입니다. 오직 한 곳에서 고이 흐르는 사랑으로 나눌 수 있는 노래입니다.



대구 덤버덩 국 끓이는 저녁 움파 조고곤 무시 숭숭덩

불근 고추가리 마늘 국에서 노닥 눈 헛파는 저녁이먼


어디 먼 데 가고 자파

먼 데 어느 멘지 몰로라 (대구 저녁국―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평화로 가려 한다면 낮고 작은 길을 걸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소꿉놀이를 하듯이 소꿉살림을 짓고, 소꿉마을이 되며, 소꿉집을 이루는 자리에는 언제나 평화가 흐른다고 느낍니다.


  커다랗게 올리거나 세우려고 하는 곳에는 좀처럼 평화가 깃들지 못해요. 커다랗게 올라서려는 곳에서는 자꾸 거머쥐거나 움켜쥐려고 하면서 총을 짓고 탱크를 짓지요. 미사일하고 전투기도 짓고요.


  작은 마을이나 집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전쟁무기를 짓지 않아요. 호미 한 자루를 쥘 뿐입니다. 낫 한 자루로 풀을 벨 뿐입니다. 커다란 나라를 이루면서 울타리를 쌓기 때문에 전쟁무기를 짓고, 사람들을 군대로 끌어갑니다.



알 수 없는 거리에서 자라나는 아이가

꿈으로 들어왔다


아이는 총을 들고 아이는 군복을 입고

주머니에 박하사탕을 한 움큼 넣어달라고 했다 (그때)



  서울사람이 진주말을 배우는 자리에 평화가 흐릅니다. 부산사람이 광주말을 배우는 자리에 평화가 깃듭니다. 춘천사람이 평양말을 배우고, 의주사람이 대전말을 배우는 자리에 평화가 감돕니다. 서로서로 다른 고장을 가꾸어 온 사랑을 말 한 마디로 배우려 하기에 평화를 이룹니다.


  더 많은 군대나 더 커다란 전쟁무기를 휴전선 사이에 두기에 평화롭지 않아요. 서로서로 다르면서 같은 숨결이라는 대목을 바라보면서 말을 섞을 수 있기에 평화롭습니다. 진주랑 곡성이 어깨동무를 하고, 아이랑 어른이 손을 맞잡기에 평화로워요.



엄마

대포 소리가 저리도 가까운데

꽃 피는 소리가 들려요


얘야, 저건 오레안다꽃이 피는 소리란다

거리에서 자동차에 뭉개지면서 꽃이 우는 소리란다

그 자동차를 타고 가던 여인과 비밀경찰을 기억하니? (엄마)



  미국사람이 쿠바말이나 이라크말을 배우려 했다면 아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러시아에서 미국을 배우고, 일본에서 중국이나 한국을 배울 적에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일본도 중국도 미국도 러시아도 배우려 할 적에 전쟁이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아주 작은 말 한 마디를 나누면서 평화입니다. 평화를 바라는 시인이라면 살며시 서울말을 내려놓고 고장말로, 텃말로, 마을말로, 사투리로 홀가분하면서 상냥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마을 할매나 시골 할배 말씨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 좋겠습니다. 2017.8.22.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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