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눈, 벌레의 눈
김해자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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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21


풀벌레처럼 노래하는 우리는 누구나 시인
― 시의 눈, 벌레의 눈
 김해자
 삶창, 2017.12.26.


오늘날 우리 언어 속엔 살 속에 내장한 숨결이 없다. 자본에 저당 잡힌 인간의 시간에는 현재가 없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대지를 일군 노동의 근육과 언어는 사라졌다. 시를 찾는 것은 언어를 찾는 것이고, 언어는 인간의 살아 있는 숨결이자, 이 모든 현재적 시간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21쪽)


  우리 보금자리에 아이가 찾아온 뒤부터 시를 꾸준히 읽습니다. 아이가 어버이한테 들려주는 모든 말은 노래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들려줄 말도 언제나 노래라고 느껴요. 이러면서 시집을 손에 쥡니다.

  아이가 우리 보금자리에 찾아온 첫무렵에는 그냥 숱한 시집을 읽었어요. 아이가 말에 귀를 열고 글에 눈을 뜰 즈음, 어버이가 스스로 시를 써서 들려주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제는 아이하고 함께 시를 씁니다.

  따로 등단이라든지 문학수업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만, 아이들하고 말놀이를 누립니다. 아이한테 새롭게 말을 한 마디 들려주고, 아이는 다시금 새롭게 노래를 부르며 돌려줍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다 공평히 나눠 먹는 삶, 도란도란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밥을 통해 시인은 그가 바라는 세상 모습을 확연하게 그려낸다. 누구도 혼내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지식인의 시가 갖는 그릇된 것에 대한 풍자라기보다, 우리 민중의 판소리 가락에 묻어나오는 해학과 익살에 가깝다. (121쪽)


  시를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하는 ‘아주머니’인 김해자 님이 엮은 《시의 눈, 벌레의 눈》(김해자, 삶창, 2017)은 문학비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말로는 문학비평입니다. 쉬운 말로 하자면 ‘시를 읽고 쓴 이야기’라 할 수 있을 테고요.

  김해자 님은 시를 쓸 적에 아주머니다운 말씨로 부드럽거나 나긋나긋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시곤 하는데, 막상 이녁도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시집을 이야기하려니 말씨가 좀 딱딱하거나 어렵습니다. 그저 수수하게 아주머니스럽게 시를 읽고 이야기하면 한결 나을 텐데 싶기도 합니다.


이 시를 읽다 아주 조금 울었습니다. 그의 방 냉장고에 있는 말라비틀어진 갓김치 몇 조각과 젓갈이 보여서요. 그 방의 눅눅한 이불과 책과 어둠이 생각나서요. (146쪽)

생명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생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풀이라는 언어를 떠올릴 때 풀의 형상이 없을 수 없다. (237쪽)


  시를 이야기하는 《시의 눈, 벌레의 눈》이라는 책이 다루는 시집은 ‘일하는 시’입니다. 그냥 시가 아닌 ‘일하는 시’란 ‘노동시’라고도 합니다. 일하는 자리에서 솟아나는 시요, 일하는 땀방울을 담은 시요, 일하는 보람을 드러내는 시요, 일하다가 아프거나 슬픈 마음을 밝히는 시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씩씩하게 한 걸음 내딛는 몸짓을 그리는 시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모두 다를 테니, 언제나 다 다른 시가 태어납니다. 일하는 사람도 저마다 다른 일터에서 저마다 다른 일손을 잡을 테니, 늘 다른 일거리하고 일노래가 흐르겠지요.

  그런데 김해자 님이 이녁 책에서 적기도 하듯이, 요즈음 시집에서는 땀내음이 옅기 일쑤입니다. 요즈음 시를 쓰는 분들은 스스로 땀을 흘려 삶을 지은 이야기를 덜 쓰거나 안 쓰곤 합니다. 머리로 말을 굴리거나 짜맞추는 문학만 으레 하지 싶어요.


저는 시집 한 권을 읽는다는 게 하나의 우주를 펼쳐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275쪽)

어쩌면 이미 모두 시인일 수 있는데, 시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불필요한 기준 혹은 규정들이 시를 소수의 전유물로 만든 게 아닌가요. 시짓기가 필수였던 과거제도도 오래전 없어진 마당에 등단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290쪽)


  시집 한 권이란 저마다 다른 우주일 수 있어요. 시집을 펴면서 새로운 우주를 마주한다고 할 만해요. 시를 쓰는 이웃은 어떤 우주를 손수 지으면서 이야기꽃을 펴려고 할까요. 시를 읽는 우리는 시를 쓰는 이웃하고 어떻게 만나면서 손을 맞잡을 만할까요.

  아직 ‘등단’이나 ‘추천’이라는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어른문학도 어린이문학도 이와 같아요. 등단이나 추천을 받지 못한다면 ‘문학상’을 거머쥐어야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요.

  어쩌면 이런 등단·추천·문학상이야말로 사람들하고 시인 사이에 금을 긋는 일인지 모릅니다. 마치 졸업장이나 자격증처럼 울타리를 세우는 셈일 수 있어요. 시인 자격증이 없이는 시를 내놓아 실을 자리를 얻을 수 없고, 시인 자격증이 없다면 시 한 줄을 실을 자리뿐 아니라 시집 하나 낼 곳을 찾을 수 없는 셈일 수 있습니다.


희망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아플 대로 아파 본 밑바닥에서 마치 굿거리장단처럼 터져나오는 것이 희망이자 노래라고. (427쪽)


  이오덕 어른이 들려준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라는 말을 떠올려 봅니다. 저는 이 말에 살짝 바꾸어 보고 싶어요. “우리는 모두 시인이다”라고요. 어린이도 어른도 누구나 시인이라고 느껴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모든 수수한 어머니하고 아버지도 시인이요, 어버이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라는 모든 아이도 시인이지 싶어요.

  시골지기도 시인이요, 버스 일꾼도 시인입니다. 택시 일꾼도, 기업 우두머리도, 시장이나 군수도 시인입니다. 교사나 청소부도 시인이요, 의사나 국회의원도 시인이지요. 밥집 아지매나 군밤장수도 시인이에요. 시인이 아닌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고 여겨요.

  풀벌레처럼 노래하는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지 싶습니다. 풀잎처럼 싱그러운 우리는 저마다 시인이지 싶습니다. 말 한 마디에 꿈을 싣습니다. 글 한 줄에 사랑을 심습니다. 말 한 마디가 노래로 퍼집니다. 글 한 줄이 이야기로 피어납니다. 시를 보는 눈이란, 풀벌레를 보는 눈이 됩니다. 풀벌레로 숲을 노래하는 마음이 시를 쓰는 손이 됩니다. 2018.1.28.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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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멀지 않게 모악시인선 8
권오표 지음 / 모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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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20


미처 못 걷은 빨래가 밤새 울더라
― 너무 멀지 않게
 권오표
 모악, 2017.11.6.


저물도록 미나리꽝에서 놀다 나온 어린 거위 떼가 양 날개를 풍선껌처럼 한껏 부풀려보더니
밥 짓는 저녁연기 오르는 고샅을 향해 노란 주둥이를 벌리고 일제히 꽥꽥 우네 (목련 질 무렵/13쪽)


  2011년 여름에 전남 고흥에 깃들며 처음 들은 아랫녘말은 ‘싸목싸목’입니다. 어떤 일이든 ‘싸게싸게’ 하지 말고 ‘싸목싸목’ 하자는 말을 들었어요. ‘싸목싸목·싸게싸게’는 서울말 ‘천천히·빨리빨리’하고는 사뭇 결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아랫녘에는 ‘천천히’라는 말도 쓰지만 ‘싸목싸목’도 따르고 쓰거든요. 더 헤아려 보면 ‘찬찬히’라는 말도 있어요.


아랫녘에서는
낙숫물을
집시랑물이라 한다 (집시랑물/14쪽)

무밭에서 한소쿠리 무를 이고 온 어머니가 저녁쌀을 씻으러 우물로 간다 (다시 11월/28쪽)


  말마다 결이 다르기에 말결이 상냥합니다. 다 다른 말은 다 다른 자리에 알맞게 흐르니 즐겁습니다. 사람도 말하고 같아서, 저마다 다른 마음결인 사람이 저마다 상냥하고, 저마다 즐거워요. 하루가 즐겁다면 어제하고 퍽 다르게 찾아오고 맞이하고 누리면서 살림을 지었다는 뜻이라고 느껴요. 오늘 하루 즐거이 살았다면, 밤에 깊이 꿈나라로 잠기면서 느긋이 쉬면서 새로운 날을 기다릴 수 있을 테고요.

  권오표 님 시집 《너무 멀지 않게》(모악, 2017)를 읽으면서 아랫녘 집살림하고 말살림을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겨울 한복판인데 어제는 이불을 빨아서 널었고, 저녁에 다 말라서 아이들이 폭신폭신 덮습니다. 겨울 한복판이지만 어제 이불빨래를 마치고서 마을 빨래터에 가서 반소매에 바짓자락을 걷고서 물이끼를 치웠어요. 이동안 아이들은 저희 신을 빨래했고요.

  마을 어귀 빨래터에 손을 담근 아이들은 “물이 안 차네?” 하면서 물놀이를 살짝 하기까지 했습니다. 한겨울에도 폭한 볕을 누릴 수 있는 아랫녘이란 고장은 더없이 고운 선물을 받는 터전이지 싶습니다. 이 고운 선물을 너나없이 누리면서 싸목싸목 하루를 가꾸면서 말매무새를 가다듬지 싶어요.


너무 멀지 않게

봉숭이 씨앗이 터지는 거리만큼만

풀여치 날갯짓 소리만큼만

노루오줌꽃 연둣빛 그날만큼밤

시누댓잎에 쌓인 봄눈만큼만 (너무 멀지 않게/27쪽)


  서울말로 ‘조릿대’라 해도 되고, 표준말로 ‘신우대’라 해도 됩니다. 그리고 ‘시누대’ 같은 아랫녘말을 써도 되어요. 굳이 모든 사람이 서울 표준말로만 말을 하거나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웃녘사람은 웃녘말을 쓰면 되고, 가운뎃녘사람은 가운뎃녘말을 쓰면 되어요. 저마다 다른 터전에서 길어올린 저마다 다른 살림이 깃든 말을 쓰면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서울에 얽매이면서, 또 지나치게 표준말에 스스로 가두면서, 고장마다 다르고 마을마다 다르며 집집마다 다른 우리 모습을 잊거나 잃는지 몰라요. 더 이쁘거나 더 잘생겨야 하지 않는데, 남하고 비슷하거나 닮은 길로 자꾸 휩쓸리는지 몰라요.


누가 자꾸 문을 두드리는 듯싶어 창을 열어보니

지난밤 빨랫줄에 걸어 놓은 셔츠가 밤새 비를 맞고 있다

천둥 번개도 다녀갔는지 흐느끼며 울고 있다 (곡비哭婢/66쪽)


  아침 낮 저녁 밤, 참말로 하루 내내 자동차 지나갈 일이 드문 아랫녘 깊은 시골자락에서 지내다 보면, 귀로 스미는 소리가 언제나 새삼스럽습니다. 마루문을 누가 자꾸 두들기는 듯해서 슬그머니 내다보면 사람은 없이 바람이 스윽슥 지나가는 소리입니다.

  누가 왔나 싶어 마루문 쪽을 내다보면 들고양이 몇 마리가 섬돌이며 평상에 옹크리고 겨울볕바라기를 합니다. 들고양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섬돌이며 평상을 디딘 소리가 가만히 스며요.

  자그마한 가랑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가볍습니다. 도톰한 동백잎이 문득 떨어지는 소리가 묵직합니다. 고즈넉한 보금자리에서는 딱새나 참새가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앉을 적에 나무가 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겨울눈을 들여다보면 잎망울이며 꽃망울이 차츰 굵는 소리까지 들을 만해요.

  미처 못 걷은 빨래가 내는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스민 《너무 멀지 않게》를 덮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왔을까요? 우리는 어떤 소리하고 가깝거나 멀까요? 우리는 어떤 그림이나 숨결하고 가깝거나 멀까요? 우리가 가는 길은 우리 꿈이나 사랑하고 얼마나 가깝거나 멀까요? 2018.1.20.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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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구름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16
박서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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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19



좋은 말을 구름에 실어서

― 좋은 구름

 박서영

 실천문학사, 2014.2.20.



기타를 잘 치는 긴 손가락을 갖기 위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갈퀴를 찢어버린 사람,

그러고 보면 호미를 쥐는 손은 호미에 맞게

펜을 쥐는 손은 펜에 맞게 점점 변해가는 것 같다 (손의 의미/16쪽)


좋은 노을이 있다고 했다. 사진작가들은 그런 걸 찾아 뛰쳐나간다고 했다. 다리 위에 서서 여자를 불렀다. 여자는 또 노을이 떠나버릴까 화장도 하지 않고 서둘렀다.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 노을 앞에 서자 사진작가는 또다시 화를 내며 떠나갔다. 좋은 노을이 떠나버려서, 좋은 노을이 강물과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려서. (좋은 구름/58쪽)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당신의 목덜미를 만졌다

관 뚜껑이 닫히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

목 뒤 감췄던 주름살과 약점들 (목/70쪽)


기차 안에서 아이를 안고 잠든 여자

잠에 취한 채 침까지 질질 흘리며 그대로 굳어 있다

아이를 안고 잠든 어머니

삼백 년 후에 저 모습 그대로 발굴될 수 있을 것 같다

母子 미라 (미인도/116쪽)



  아이를 바라보며 넌지시 한 마디를 합니다. 얘야, 네가 네 입으로 내놓는 말은 모두 너한테 하는 말이란다. 네 입에서 나온 그 말을 너한테 들려주면 너는 즐겁니?


  아이는 아니라면서 고개를 젓습니다. 다시 아이를 마주보며 슬며시 한 마디를 합니다. 얘야, 네가 스스로 되고 싶은 모습이나 길이나 꿈대로 네 입에 말을 얹어서 내보내렴. 언제나 그 말대로 이룰 수 있단다.


  즐겁게 살고 싶기에 즐겁게 나눌 말을 헤아립니다. 노래하며 춤추고 싶기에 노래하며 춤출 말을 마음에 담습니다. 상냥하게 웃을 뿐 아니라, 신나게 손을 잡고서 들길을 달리고 싶으니 살림을 짓습니다.


  박서영 님 시집 《좋은 구름》(실천문학사, 2014)을 읽습니다. 시인이 지켜보는 사람이 있고, 시인이 아프게 여기는 삶이 있습니다. 시인이 만난 사람이 있으며, 시인이 고단하게 맞이하는 하루가 있습니다.

  좋은 구름이라면, 시인 스스로 좋은 말을 얹고 싶은 구름일까요. 좋은 구름을 타고서 멀리멀리 마실을 하는 꿈살림을 짓고 싶을까요.


  이 겨울에 포근한 비를 뿌리는 전라도 시골자락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포근한 고장에서는 겨울에 눈 아닌 비가 찾아들며 한결 포근합니다. 포근한 비를 뿌리는 구름은 그야말로 새하얗게 하늘을 덮습니다. 2018.1.1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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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는 건 좋은 거라고 펄북스 시선 4
문바우 지음 / 펄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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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18


눈칫밥 하루였지만, 삶이란 좋구나
― 그래도 사는 건 좋은 거라고
 문바우
 펄북스, 2017.12.14.


나는 우리 집에서
암만 배가 곱파도
내 손으로 밥 찾아 먹으면
왜 도둑놈 새끼가 되나요 (배곱픈 아이/15쪽)

아버지
낮에도 집에 있어 주면 안 되나요
아버지가 없으면
집엔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식구들만 있어 (기다립니다/17쪽)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날,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면서 눈밭을 달리고 미끄러지고 엉덩방아를 찧습니다. 볼이랑 귀랑 코랑 손이 발갛게 되도록 쉬지 않고 놉니다. 온누리 모든 아이가 눈놀이를 즐기리라 생각해요.

  그런데 때로는 눈송이를 반기지 못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로 뛰놀지 못하고, 아이답게 웃지 못하며, 하루하루 배곯는 아픔을 견디어야 하기도 합니다.

  어른이 일으킨 싸움 불구덩이에서 헤매는 아이들이 많아요.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서 계급으로 가르는 곳에서 짓눌리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리고 이 땅에서도 들볶이거나 시달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밤하늘 별들 쳐다보고
나는 왜
우리 엄마가 없나 하고
눈물 글성이면
울지 않고 착하게 살아가면
나중에 천국에서 만난다고 
반짝 반짝 해줍니다 (별하고 나하고/19쪽)

그래도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
해가 지면
먼 삼 리 외로운 고갯길에서
이 자식이 생각나
가슴속 주머니에 국화빵 몇 개
싸 감추어서 오시고선
식구들 몰래
숨어서 꺼내주었어요
나중엔 너하고만 살으마, 하고
자식의 목을 끌어안아도 주었어요 (국화빵/20쪽)


  시집 《그래도 사는 건 좋은 거라고》(펄북스, 2017)는 한겨울 흰눈처럼 다가오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시집을 낸 문바우라는 분은 시를 배워서 시를 쓰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어린 날 겪은 숱한 생채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려고 삶을 글로 옮기다 보니 저절로 시가 되었구나 싶어요.

  낳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서 눈칫밥만 먹으면서 어린 날을 보내야 했다는데요, 사는 동안 아버지한테도 ‘아버지’라는 말을 다섯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겨우 말했다고 합니다. 늘 눈칫밥을 먹으니 아버지한테도 아버지라고 못했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머니가 나에게 준 밥은
어제저녁에 어머니가 먹고 남은
찬밥 찐 것이었어요
그리고 김치꽁대기 한 개마저도
오늘 아침엔
어머니가 아깝다며 맛있겠다며
손으로 쥐고 가서
듣어먹고 남은 것을
나의 밥그릇에 찔러넣어 주었어요
순간 나는 왈칵 눈물이 나고
먹을 수가 없어
밖으로 달려나가서
소리내어 울고 싶었어요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무섭고 겁이 나서
일어나지 못하고
고개 숙여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한입에 깨물어 삼켜버리고 말았어요 (찬밥/23쪽)


  시집 《그래도 사는 건 좋은 거라고》를 읽으면 어린 문바우 님을 괴롭히거나 놀리거나 닦달하는 여러 사람 이야기가 자꾸자꾸 흐릅니다. 한겨울에 오줌그릇을 들고 냇가에 가서 맨손으로 박박 닦아서 가져다주는 이야기가 흐르고, 밥 한 그릇조차 반찬 한 점마저 제대로 먹을 수 없던 이야기가 흐릅니다.

  그렇다고 울지 못하고, 그렇다고 따지지 못하며, 그렇다고 집을 뛰쳐나가지 못합니다.

  속으로 삭이면서 기다렸을 테지요. 날마다 갖은 지청구에 따돌림에 놀림에 잔소리를 들으면서 앞날을 바라보았을 테지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혼잣힘으로 살림을 지을 날을 손꼽았을 테지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꿈으로 품었으리라 생각해요. 앞으로 어른이 되어 곁님을 만나고 아이를 낳는다면, 어린 문바우 님은 어버이 문바우로서 아이들을 너른 사랑하고 따스한 마음으로 고이 안아 주겠다고 하는.


제 나이 여섯 살 때부터
큰어머니께서 저에게 바라신 것은
건강하게 자라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착하게 자라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큰어머니 눈앞에서
사라져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섯 살 때부터/58쪽)


  겨울에 눈이 옵니다. 겨우내 뭇짐승하고 뭇나무는 조용히 겨울잠을 잡니다. 겨울잠을 자면서 새봄을 기다립니다. 이 눈이 모두 녹고 따사로운 봄이 되면 활짝 피어나고 기지개를 켤 꿈을 꿉니다.

  착하거나 튼튼하게 자라 달라는 말을 한 마디도 못 들은 어린 문바우 님이지만, 큰어머니 눈앞에서 얼른 사라져 달라는 말을 들은 어린 문바우 님이지만, 남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려는 넋이 아닌, 새로운(새로 낳을, 또는 새로 만날) 아이들을 사랑해 주고 싶으며 어루만져 주고 싶으며 보살펴 주고 싶은 씨앗을 차곡차곡 심습니다.

  아마 미움을 키웠다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을 적에 이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해요. 내가 오늘 아무리 미움이며 설움이 쌓인다 하더라도 미움하고 설움만 생각하다 보면, 참말로 그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서 스스로 선 뒤에 곱거나 착하거나 상냥하게 마음을 쓰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먼 앞날을 꿈꾸면서, 겨울이 끝나고 찾아올 봄을 그리면서, 하루하루 눈물밥을 꿀꺽 삼키면서, 더욱 단단히 여민 사랑씨앗이 시나브로 이야기 하나로 남고 시집 하나로 흘러서 우리 곁에 살포시 찾아오는구나 싶습니다.


너는 날 아빠라 하네
나는 너를 내 아들이라 하네
부디 안 좋은 것
지난 것은 다 잊고 잊고
마음 놓고 먹고 자고 놀며
또 떼도 쓰며
무럭무럭 자라다오
아기야 나의 사랑아 (내 아기야/78쪽)

아기가 과자 한개 손에 받아 쥐고
좋다고 좋다고 춤춘다고
귀저기 찬 궁둥이 엉거주춤 들었다 놓았다 하면 (손자 재롱/98쪽)


  시집 《그래도 사는 건 좋은 거라고》를 읽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쩜, 어쩜’ 하는 말이 절로 나올 만한 이야기가 흐르거든요. 그러나 어린 문바우 님이 어른 문바우가 될 적에 어떻게 살아가고 싶노라 하는 꿈을 그린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할아버지 문바우’가 되어 아이 궁둥짓에 아이처럼 까르르 함께 웃음을 터뜨리면서 기뻐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로소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래도 삶이란 좋지요. 어제 그토록 배고프고 괴로웠어도 오늘 주먹밥 한 덩이를 먹으면서도 “삶이란 좋구나” 하고 말할 수 있지요. 오늘도 쫄쫄 굶더라도 이튿날에는, 먼 뒷날에는, 잔칫밥이 아니어도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으면서 웃을 수 있다는 작은 꿈씨를 심을 수 있지요.

  삶이란 좋다고, 삶이란 곱다고, 삶이란 사랑이라고, 삶이란 언제나 꿈이라고, 조용조용 되뇝니다. 모든 아픔과 괴로움과 슬픔을 사랑으로 녹여내는, 꽁꽁 얼어붙는 추위를 따사로운 손길로 품는, 해님 같은 이야기를 시로 만납니다. 2018.1.10.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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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시선 4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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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17


똥 누는 아이 얼굴을 찍듯이 시를 그리는
―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장석남, 창비, 2017.12.8.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입춘 부근/12쪽)


  아침이면, 아니 새벽이면 쌀을 씻습니다. 조용히 부엌으로 가서 고요히 하루를 헤아리면서 찬찬히 쌀을 씻어 불립니다. 아이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면 넌지시 말합니다. “우리 이쁜 아이들아, 누가 우리 아침에 맛있게 먹을 밥이 될 쌀을 씻어 볼까?”

  스스로 씻든 아이들한테 맡기든 곰곰이 돌아봅니다. 아침 아닌 새벽마다 쌀씻기가 번거롭거나 귀찮다면, 이런 마음으로 씻어서 불린 쌀로 지은 밥이 맛날 수 있을까 하고. 아이들한테 쌀씻기를 맡길 적에 낯을 찌푸리거나 성가시다는 말씨로 아이들을 부르면 아이들이 반길까 하고.


나는 꽃이 되어서 꽃집으로 들어가 꽃들 속에 섞여서 오가는 사람들을 맞고 오가는 사람들로 시들어, 시들어 (꽃집에서/23쪽)


  장석남 님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 2017)를 읽습니다. 시집을 손에 쥐고서 살며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니, 어째서?

  봄이 와서 뒤꼍이며 마당이며 들이며 숲에 들꽃이 가득하면, 아이들 걸음걸이가 더디곤 합니다. 들꽃을 밟을까 자꾸 근심하지요. 이때 아이들한테 이야기합니다. “우리 꽃순아 꽃돌아, 들꽃은 한두 번 밟힌들 꺾이거나 눌리지 않아. 너희들이 근심하면서 그렇게 하면 외려 들꽃은 더 아프단다. 사뿐사뿐 걸으면 들꽃은 모두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어. 가만히 앞을 보며 걸으렴.”


현관에 벚꽃 잎들 날려오니 자주 와서 꽃을 쓰는 노파여
꽃을 쓸어 깨끗이 하려는가?
하늘을 쓰는 노파여
옛날을 쓰는 노파여
꽃 쓸어 감추는 노파여
얼결에 마침 노을도 쓸어내는 노파여
꽃을 쓸어 밤을 맞는 노파여
꽃에게 이기지 못할 노파여 (꽃을 쓰는 노파여/26쪽)


  한겨울에 꽃을 자꾸 이야기하는 시집을 읽으며 봄꽃을 새삼스레 헤아려 봅니다. 봄에는 여름이 멀지 않았다고 여기고, 겨울에는 봄이 멀지 않았다고 여길 수 있어요. 12월을 지나 1월 한복판에 선다면, 우리 집이나 마을에서는 언제쯤 동백꽃이 터질까 하고 손을 꼽아 봅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로 접어들 무렵 차츰 맺는 동백꽃망울을 지켜보고 살살 만지면서 어쩜 이렇게 나날이 굵고 단단히 여무나 하고 설렙니다.

  추운 철이기에 따뜻한 꽃을 그립니다. 따뜻한 철이기에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그립니다. 열매가 익는 철이기에 온통 하얗게 덮는 눈을 그립니다. 돌고 돌면서 새로운 살림과 길을 그리는 하루입니다.

  골목에서 꽃이며 잎을 쓰는 할머니는 예부터 익힌 몸짓대로 정갈하게 보금자리를 가꾸는 모습이지 싶어요. 꽃을 한 군데에 모으면서 꽃이 더 도드라지게 한달 수 있고, 꽃을 가만히 쓸면서 꽃내를 한몸에 맞아들인달 수 있고요.


각색 양말을 빨아 방바닥에 널어놓고
나도 모르게 짝을 맞춰 그리해놓고
나는 그리해놓았다
전에는 없는 일이라 핸드폰으로 찍어놓고
나는 흐뭇하다 (다섯켤레의 양말/44쪽)


  시인은 모처럼 양말을 빨아서 짝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아마 예전에는 이런 집안일을 곁님(가시내)한테만 도맡겼을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런 집안일을 살짝 거들면서 스스로 대견하구나 싶을 만합니다.

  참말 그래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도 이 대목을 느껴요. 아이들은 심부름이 때로는 벅차다고 여기면서도 끝까지 해내면 얼마나 해맑게 웃으면서 두 손을 번쩍 치켜올리면서 춤추는지 몰라요.

  스스로 한다는 보람이란 놀라운 기쁨이라고 봅니다. 스스로 해내면서 온몸에 흐르는 짜릿한 기운이란 우리를 새롭게 살리는 웃음이지 싶어요. 스스로 잔빨래나 잔심부름을 하는 데에서 그치지 말고, 더 손을 뻗어 이 일 저 살림 건사해 본다면, 우리가 쓰는 시 한 줄은 한결 싱그러이 피어날 만합니다.


놀던 카메라를 팔고
눈이 멀었네
내 푸른 피의 사치였던 물건

첫아이의 똥 누는 표정을, 그 동생의 부러진 앞니의 웃음을,
그 에미의 아직 밝던 고단을 찍던 (카메라를 팔고, leica m6/82쪽)


  꽃이 고와 꽃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아이들이 고와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삶이 고와 삶을 시 한 줄로 여밉니다. 하늘이 고와 하늘을 고요히 노래 한 마디로 부릅니다.

  사진을 찍는 마음이란, 시를 쓰는 마음이란, 밥을 짓고 살림을 하는 마음이란, 빨래를 하고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는 마음이란, 모두 한동아리가 되리라 느낍니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봄이 오니, 겨우내 아무리 추워도 봄꽃은 찬바람을 머금으며 피어나니, 오늘 하루를 더욱 씩씩하게 열자고 다짐합니다. 마음 한켠에 시 한 줄을 살며시 놓으면서. 2018.1.5.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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