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통한 날 문학동네 동시집 2
이안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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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시읽기

노래책시렁 108


《고양이와 통한 날》

 이안

 문학동네

 2008.11.24.



  어린이가 쓰고 읽는 글이기에 동시일 수 없습니다. 동시란 어린이부터 누구나 삶을 새롭게 읽고 사랑을 슬기롭게 익히며 꿈을 즐겁게 노래하는 글이라고 여깁니다. 때로는 어른 사이에서만 흐르는 시를 쓸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른 사이에서 따지거나 다룰 이야기를 시로 쓰더라도 언제나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는 마음으로 쓸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시란 언제나 노래이거든요. 노래란 누구나 부르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빛이거든요. 《고양이와 통한 날》을 읽는데, “고양이와 통하는” 길이 뭔가 아리송합니다. “고양이하고 만나는” 길일까요, “고양이하고 사귀는” 길일까요, “고양이랑 노는” 길일까요, “고양이를 구경하는” 길일까요? 아니면? 동시란 이름으로 글을 쓸 적에는 어렴풋한 말을 쓸 수 없습니다. 또렷하되 여러모로 생각을 넓힐 말을 가려서 쓸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어린이부터 어른 누구나 마음을 북돋우도록 낱말을 고르고 말씨를 가리며 글자락을 여밀 적에 비로소 동시가 되어요. 곧 동시란 여느 어른시하고 대면 대단히 어렵지만 매우 쉬운 글이에요. 우리가 같이 동시를 쓸 줄 아는 마음이라면 어떤 노래이든 부를 수 있고, 어떤 길을 걷더라도 아름드리꽃이 되지 싶습니다. 꽤 아쉽습니다. ㅅㄴㄹ



빨래하기 전 아버지는 마당에 나가 / 하늘 한 바퀴 둘러보신다 / 바람 한 자락 만져 보신다 (빨래/20쪽)


고양이는 고양이 / 개가 아니죠 // 오란다구 오지 않고 / 가란다구 가지 않죠 (고양이는 고양이/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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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나를 위로하다 모악시인선 16
박두규 지음 / 모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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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07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

 박두규

 모악

 2018.11.23.



  시를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하고 묻는 분한테 늘 한 가지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책을 눈으로 글씨를 읽지 않는다고, 우리는 책에 적힌 글씨에 흐르는 마음을 읽는다고, 이를 한자말로 바꾸어 ‘행간 읽기’라고들 하지만, 이런 말은 누구나 알아듣기 쉽지 않다고, 꾸밈없이 ‘마음 읽기’라고 말해야 어린이부터 누구나 알아듣는다고, 곧 시를 쓸 적에는 언제나 우리 마음으로 이웃 마음을 읽는 몸짓이 되어 손에 붓을 쥐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를 읽으면서 시쓴님 마음을 헤아립니다. 시쓴님은 이녁 둘레에 흐르는 마음을 어떻게 읽으면서 글줄을 여미었을까요?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읽을까요? 꿈이나 기쁨이나 반가움이나 노래라는 마음으로 읽을까요? 곰곰이 보면 시쓴님은 이녁 싯말 곳곳에 드러내기도 했듯이 ‘어둠’으로 바라보면서 글줄을 여미었구나 싶어요. 어둠이라는 눈길하고 마음으로도 얼마든지 이웃을 볼 만하겠지요. 그러나 스스로 어둠을 지우거나 씻거나 털어낸 말끔한 이웃을 ‘어둠이란 눈길’로 바라보려고 하면 무엇을 보거나 느낄까요? 어둡게 살아도 나쁘지 않아요. 어둠에 감싸인 채 시를 써도 나쁘지 않아요. 다만 어둠도 어둠 그대로 바라본다면 이 시집이 사뭇 달랐으리라 느낍니다. ㅅㄴㄹ



숲길에서 꽃 한 송이에 걸음이 멈추면 / 나는 그 꽃입니다. (그렇게 그대가 오면/28쪽)


이젠 내 어둠도 가벼워져야 해. 아무리 순도 높은 어둠이라 해도 이젠 변해야 해. (새벽에 문득 깨어/57쪽)


10년을 살든 110년을 살든 사랑이 없다면 그게 무슨 삶이겠는가. 나는 길을 가는 아무나 붙잡고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토해내고 싶었다. (빌카밤바의 110살/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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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당신이 계셨고 지금은 내가 있습니다 어른의시간 시인선 1
전병석 지음 / 어른의시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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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05


《그때는 당신이 계셨고 지금은 내가 있습니다》

 전병석

 어른의시간

 2018.8.3.



  그리운 님을 곁에 두면서 삽니다. 저한테 그리운 님이라면 별이지 싶어, 밤별을 실컷 누릴 수 있는 곳을 보금자리로 삼고 싶었습니다. 인천·서울이란 고장에서 살 적에도 밤별을 찾아서 밤하늘을 살폈고, 고흥이란 고장에서 살며 밤별을 가만히 올려다보면서 이 별빛을 먹고 푸나무를 비롯해 사람도 무럭무럭 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때는 당신이 계셨고 지금은 내가 있습니다》는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습니다. 오늘 곁에 없는 어머니이지만, 마음으로 언제나 새롭게 떠올릴 수 있기에 이렇게 노래꾸러미 하나를 여밀 수 있습니다. 함께 살아간다고 할 적에는 늘 마음으로 만나고 마음으로 보며 마음으로 이야기하거든요. 즐겁든 서운하든 반갑든 고맙든 모든 느낌은 새삼스레 녹여내어 이야기 한 자락으로 거듭납니다. 빛이란, 그리움이라는 빛이란, 그때그때 다르게 스미리라 생각합니다. 해를 마주보는 자리라면 이 별에서는 무지갯빛이 퍼지고, 해를 등지는 자리라면 이 별에서는 온통 고요빛이 번집니다. 아마 다른 별에서도 매한가지리라 느껴요. 모든 별누리는 별누리마다 다른 빛살로 빛결로 빛방울로 하루를 열고 닫으면서 다 다른 그리움을, 다 다른 사랑을 차곡차곡 노래하겠지요. ㅅㄴㄹ



밭에서 / 김매고 오신 어머니는 / 두꺼운 책을 베고 잠자는 내가 / 자랑스럽다 (기쁨/46쪽)


겨울산은 / 이쪽 골짜기에서 / 저쪽 산마루까지 / 투명 창 같다 (겨울산/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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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양장] 금정산을 보냈다 - 2015 원북원부산선정도서, 2015 부산시 공공도서관 1월의 책 선정
최영철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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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02


《금정산을 보냈다》

 최영철

 산지니

 2015.4.14.



  누가 묻는다면, 누가 “시는 아무나 쓰는가요?” 하고 묻는다면, 두 가지 뜻으로 “네, 시는 아무나 씁니다.” 하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아니, 첫째로는 “아무나 쓰는 시”라 말할 테고, 둘째로는 “누구나 쓰는 시”라 말하겠습니다. “아무나 쓰는 시”라 말할 적에는 ‘겉보기로는 시요 시집이지만, 알맹이가 드러나지 않는 꾸러미’라는 뜻입니다. “누구나 쓰는 시”라 말할 적에는 ‘우리는 모두 노래님이라, 어린이도 어른도 스스로 우리 삶을 스스럼없이 적바림하면 언제나 시가 된다’는 뜻입니다. 《금정산을 보냈다》를 끝까지 읽기가 쉬우면서 어려웠습니다. 시라는 틀에서 어떤 삶이나 줄거리를 담았나 하는 대목을 읽기란 쉬웠지만, 왜 구태여 이런 시를 들려주어서 무슨 삶을 나누려 하느냐 하는 대목에서는 어렵더군요. 부디 문학이라는 시가 아닌,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쓰면 좋겠습니다. 부디 시인이라는 이름을 내거는 시가 아닌, 사랑으로 살림을 짓는 이야기를 쓰면 좋겠습니다. 부디 붓을 들기 앞서 햇빛하고 별빛하고 꽃빛하고 눈빛을 맑은 손길로 마주하면 좋겠습니다. 부디 시인이 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노래하는 살림님이 되어 하루를 즐겁게 가꾸면서 활짝 웃고 춤춘다면 좋겠습니다. 살림을 그려야 노래입니다. ㅅㄴㄹ



담배 좀 그만 피라고 / 누군가 고안했을 / 해골재떨이 / 날 빤히 쳐다보며 / 넌 벌써 해골 / 넌 벌써 재떨이 / 살점 다 뜯어 먹히고 / 넌 벌써 뼈다귀만 남아 (해골재떨이/30쪽)


목표물은 분명해 보였으나 / 곧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 급히 이백원짜리 총 한 자루를 샀다 / 탄알이 있는지 쓱쓱 문질러 보는데 / 우두두두 오발로 발사된 알이 (볼펜 탄알/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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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한티재시선 14
변홍철 지음 / 한티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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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06


《사계》

 변홍철

 한티재

 2019.3.25.



  어디에 놓고서 못 찾는가 헤매던 꾸러미를 아주 쉽게 찾았습니다. 그 꾸러미를 그곳에 둘 적에 ‘여기에 두면 이내 찾겠지’ 하고 읊던 혼잣말이 생각났어요. 그 꾸러미를 한동안 잊었고, 뒤늦게 그 꾸러미를 찾아서 쓰려니 도무지 떠오르지 않더군요. 《사계》를 손에 쥘 적에 네 철이 흐르는 이야기를 만나려나 싶었으나 막상 네 철 이야기는 만나지 못합니다. 끝까지 읽고서 마당에 맨발로 서서 해바라기를 했습니다. 책이름에 ‘철’을 넣는다고 해서 철 이야기를 줄줄이 써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아직 철을 모르기에 철이 없이 지내는 삶을 쓸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철을 알고 싶어 부러 철이라는 낱말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시라고 하는 글을 이렇게 쓰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철을 알아가고 느끼며 나누는 길을 글로 밝히기보다는 머리로 말을 엮는 글을, 삶이 피어나서 철철이 새롭게 자라는 기쁨을 절로 노래하는 길을 글로 옮기기보다는 머리로 말을 엮어 멋부리는 글을, 시라고 하는구나 싶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학교에서 시험공부로 배우고 외워야 하던 옛 시조도 이런 느낌이었어요. ‘배꽃’ 아닌 ‘이화’를, ‘달빛’ 아닌 ‘월백’을 읊던 길에서 몇 걸음이나 나아갔을까요. ㅅㄴㄹ



가령 새벽 세 시 넘어 만취해 들어왔다고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어머니에게 기술을 걸어, 골목 끝 민속식당에 같이 가서 해물칼국수를 먹고는 계산은 어머니가 하시도록 만든다든가. (작업의 기술/26쪽)


아이들 찾아오지 않은 지 오래된 / 놀이터 귀퉁이에서, 담배 한 대 / 피우며 하루를 돌아본다 (붉은 달/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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